“보고는 집무실에서 따로 듣지.”
달칵.
굳게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리자마자 소리 없이 누워 있던 혜미가 눈을 번쩍 뜨고 몸을 일으켰다. 아직도 크리스티앙의 감촉이 남아 있는 입술을 손등으로 벅벅 문질렀다. 심장이 쿵쿵 거칠게 뛰었다.
…임신이라고?
그녀는 땀이 찬 손으로 시트를 꽉 쥐었다. 크리스티앙과 의사의 대화는 고스란히 다 들었다. 그들은 분명 자신이 임신했다고 말하고 있었다. 그것도 크리스티앙의 아이를.
말도 안 된다.
혜미는 경악한 눈으로 몸서리를 치며 다시 한번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다. 크리스티앙의 아이를 가지는 일이 상상만 해도 미치도록 끔찍한 것을 차치하고라도, 일단 그녀는 임신할 수 있는 몸이 아니었다. 로즈가 분명 말했지 않은가. 베네딕트가 그녀의 자궁을 없앴다고. 긴 잠에서 깨어나 생리를 한 적도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런데… 내가 임신이라고…?
‘내 아이를 가지게 할까….’
순간 머릿속에서 베네딕트의 속삭임이 그대로 떠올랐다. 방에 갇힌 그를 처음 만나러 갔을 때, 그와 입을 맞춘 후 그대로 들려왔던 그의 생각이었다.
맙소사.
혜미의 입술이 소리 없이 벌어졌다. 그녀는 자유로운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그의 아이야.
무의식중에 떠오른 결론에 반응이라도 하듯 심장이 격하게 쿵쿵 뛰었다. 혜미의 시선이 납작한 자신의 배로 향한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어떻게…. 어떻게…?
베네딕트가 정말 그녀를 임신이라도 시킨 걸까?
자궁을 없앤 것이 그였으니 다시 만들어 낼 수 있는 이도 단 한 사람뿐이다.
비 오는 후원에서의 뜨거웠던 눈길. 사랑한다 말하며 울었던 그녀를 바라보던 베네딕트의 물빛 눈동자는 이전에는 미처 보지 못했던 만족과 흥분을 담고 일렁이고 있었다. 혜미는 입술을 꽉 깨물며 머리카락을 아프게 움켜쥐었다.
어떻게 지금 상황에 그런 일을 벌일 수가 있지…?
무엇보다 중요하고 위험한 시점에서 그녀의 동의 없는 임신이라니. 그녀가 아는 베네딕트라면 충분히 혼자서 그런 일을 벌이는 게 가능하다는 데까지 결론이 미치자 이마가 뜨끈하게 달아올랐다.
대체… 왜?
이유는 하나뿐이었다. 그가 자신을 구속하기 위해 이런 짓까지 했다고 생각하자 분노가 치밀어 오른다. 베네딕트가 그녀의 앞에 있다면 당신 정말 정신 나갔냐고 멱살 잡고 소리치고 싶었지만, 황금성에서 사라진 후 그는 깜깜무소식이었다.
그 와중에 머릿속에 발터가 떠오르자 혜미의 심장이 요동치며 거칠게 뛰었다. 발터가 만일 이 사실을 안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다른 남자의 아이를 임신한 그녀를 그가 받아들일 수 있을 리 만무했다. 아니, 그가 괜찮다고 한들 양심이란 게 있다면 그녀가 그를 놔줘야 하는 게 맞았다.
“하아….”
혜미의 눈이 가늘게 뜨였다. 미동은커녕 변화조차 없는 복부를 내려다보는 눈에 살기가 어렸다. 그녀는 떨리는 양손을 배에 가져갔다.
이 아이만 없애면 되지 않을까? 생명이라 이름 붙이기에도 미미한 세포에 불과한 것만 사라진다면 모든 게 편해질 거라는 생각이 드는 순간, 배 속에서 우렁찬 소리가 울려 퍼졌다.
꼬르륵.
혜미는 놀라서 손을 떼어냈다. 어울리지도 않는 상황에 심각하게 허기가 몰려온다. 배고픔이 너무 강해 실소조차 나지 않았다.
그녀는 손을 뻗어 은쟁반에 올라간 녹색 과일을 하나 집었다. 냄새를 맡아 독 기운이 없는 걸 확인한 즉시 손으로 반을 쪼개 그 안을 허겁지겁 베어 물었다. 달콤하고 쫀득한 과일이 이에 달라붙자 배고픔이 더욱 극대화되는 느낌이다.
그녀는 한 손으로 배를 조심스레 감싼 후, 전투적으로 음식을 씹었다. 황금성에 온 이후 이 정도로 식욕을 느낀 적은 한 번도 없었는데. 설마 아이가 원하는 걸까…?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는 순간 날뛰던 심장이 천천히 진정되며 잔잔한 물가처럼 평온하게 바뀌었다.
너. 살고 싶은 거니…?
그녀의 질문에 마치 대답이라도 하듯 다시 한번 배 속에서 민망한 소음이 울려 퍼졌다. 혜미는 과일을 다시 깨물었다.
그녀는 초점이 흐려진 눈으로 최근의 일을 떠올렸다. 장난치듯 빛을 발했던 마법사의 보석이 사실은 그녀의 배 속 아이가 반응했던 것일지도 모른다는 결론에 미치자 입술에서 한숨이 탁, 하고 터졌다.
동시에 반드시 살아남아야 한다는 투지가 새롭게 생겨난다. 자신의 목숨이 하나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배 속의 아이는 베네딕트의 아이이기 이전에 그녀 자신의 아이였다.
희한한 기분이다. 간단하지만 중요한 사실을 인식한 순간, 무슨 일이 있어도 그 아이를 지키고 싶다는 마음이 생기는 것은 더더욱 놀라운 일이었다.
“…네 아비는 돌아오면 나한테 죽었어.”
과일 일곱 개를 한꺼번에 해치운 후, 혜미가 끈적한 입술을 냅킨으로 닦아 내며 중얼거렸다.
“나이 스물셋에 애 엄마를 만들어? 베네딕트 블라이. 당신은 진짜 염치도 없는 마법사야. 알아?”
무언가 아주 작게 키득거리는 소리가 머릿속에 울려 퍼지는 느낌이 들었다.
***
호아킴이 입성한 것은 늦은 밤이었다. 완벽한 황제의 의복 차림으로 그를 기다리고 있던 크리스티앙이 화려한 의자에 앉아 입을 열었다.
“수고가 많으셨습니다. 호아킴 경.”
호아킴은 10년 만에 보는 황태자, 아니 황제의 앞에서 잠시 말을 잇지 못하다가 이윽고 차분히 입을 뗐다.
“늦었습니다. 황제 폐하. 불충을 용서하시길.”
크리스티앙은 그를 뚫어져라 바라보며 내뱉는 그의 아비, 호아킴을 마주 보았다. 사람들은 황제가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외탁을 했다 말했지만 그것은 사실이 아니었다.
싹 밀어 삭발한 블론드. 훈련으로 기골이 장대한 몸. 흉터가 가득한 얼굴은 크리스티앙과 무섭도록 닮은 외형을 잘 가리고 있을 뿐이었다. 그중 절정은 쑥 들어간 눈매 안에서 빛을 내는 눈동자였다. 빛을 받으면 반짝이는 결정과 같은 호박색을 띠지만 어둠을 머금었을 땐 악마 같이 샛노란 빛을 띠는 두 눈.
“오는 길에 사고가 있었다 들었습니다만.”
호아킴의 얼굴이 조금 굳었다. 크리스티앙이 찻잔을 기울이며 눈으로 그를 보았다.
“사실입니다. 교황의 공격을 받았습니다.”
“고작 단 한 사람의 공격을 일만 명에 가까운 군대가 막아내지 못했다는 말씀을 하십니까?”
크리스티앙의 목소리는 차분했지만 추궁에 가까웠다. 호아킴이 그를 보며 무겁게 입을 뗐다.
“교황을 미리 숙청하지 않고 그대로 두신 폐하께는 제가 잃은 수천의 군사들의 수가 가볍게 느껴지시는 모양이군요.”
“호아킴 장군.”
하이데거가 눈살을 찌푸리며 입을 떼자 크리스티앙이 찻잔을 내려놓으며 그를 저지했다.
“괜찮네. 대공. 호아킴 장군은 나의 옛 스승이기도 하니 저 정도의 충언은 충분히 가능하지.”
황제의 집무실 벽에 걸린 칼은 호아킴이 어린 황태자에게 선물로 바친 검이기도 했다. 크리스티앙이 호아킴을 똑바로 바라보며 되물었다.
“그런데 장군. 황권을 지키기 위해 대마법사를 무릎 꿇려야 한다고 말씀하신 건 장군이 아니십니까. 각인하지 않은 황태자를 교황이 인정하는 순간, 나의 자리가 더욱 공고해질 거라 하지 않으셨습니까.”
호아킴이 마른침을 삼켰다. 눈썹의 흉터가 꿈틀거렸다. 분명 그가 어린 황태자에게 그리 충언한 것은 사실이었다. 하지만 그가 간과한 것이 있다면 교황의 고집은 바위보다 더 무거웠으며 크리스티앙의 집요함 역시도 만만치가 않았다는 것이다. 한쪽이 포기할 거라 생각했지만 불가능했던 것은 바로 그 이유에서였다.
“돌아온… 황녀는 어떻게 처리하실 생각입니까?”
“소문이 빠르군요. 벌써 거기까지 알고 계시다니.”
클라웨 제국민 전체가 알고 있는 사실을 되짚으며 크리스티앙이 조금 웃었다.
“그녀가 아무 이유 없이 공주 놀이나 하러 이곳에 돌아오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염려는 거두시길. 반역죄로 그녀의 군대는 전원 사형. 그녀는 평생 황제의 곁에서 속죄하는 것으로 죗값을 치르게 할 생각이니까.”
“위험의 싹이 될 이라면 미리 없애 버리는 게 낫지 않습니까?”
“하하하….”
크리스티앙이 크게 소리를 내어 웃음을 터뜨렸으므로 호아킴은 당황했다.
“아아. 미안하군요. 너무 우스워서.”
“…무엇이 우스우신지요, 폐하.”
호아킴의 물음에도 한참 동안 웃음을 이어나가던 황제가 마침내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그를 보았다.
“장군께서 북부에 홀로 오래 계시더니 많이 외로우셨던 모양입니다. 말씀이 많아졌군요.”
호아킴은 그의 눈앞에 앉아 있는 젊은 남자가 더 이상 어린 황태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직감했다. 웃음기를 머금은 얼굴은 친근함과는 거리가 멀어 위압적이고 뼈가 담긴 말투는 날카로웠다.
“카트린 헤게를 기억합니까?”
태후, 즉 자신의 친모의 이름을 입에 담는 크리스티앙은 태연했다. 호아킴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영원히 잊을 수가 없는 이름. 그녀는 그의 연인이었다. 권력을 위해 황제의 후처 자리에 올랐던 야망 많던 백작가의 큰아가씨.
“다른 남자와 결혼하는 내가 미워?”
“…아니.”
“억울하면 네가 황제로 태어나지 그랬니. 가엾은 것.”
다른 남자의 아내가 된 후에도 그를 호위 기사로 삼아 곁에 둘 만큼 잔인했던 여자. 카트린을 연상시키는 붉은 입술이 또렷한 말을 토해 냈다.
“그녀는 아들을 위해 일찌감치 위험의 싹을 솎아 내려 했지만 결과는?”
태후는 황녀를 죽이기 위해 카플란을 이용해 별궁에 불을 질렀지만 결국 실패했다. 그 과정을 곁에서 지켜보았던 호아킴은 아무런 말도 할 수가 없었다.
“내 누이가 내 앞길을 막는다면 경이 염려하지 않아도 내가 싹을 자릅니다.”
“…….”
“나는 멍청한 누구와는 달리 실패하지 않습니다. 그 누구에게도 일을 대신하라 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아무도 믿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폐하.”
“섭섭합니까? 이 자리란 게 원래 그런 자리 아닙니까. 누구보다 제가 황좌에 오르기를 바라지 않았습니까.”
크리스티앙이 대답 없는 그를 바라보다 의미심장하게 입술을 들어 올렸다.
“경을 위해 특별히 차 한 잔을 준비했는데, 드시겠습니까?”
찻잔에 시선을 내렸다가 다시 그에게 눈을 마주치는 시선. 공중에서 황금빛 시선이 정면으로 충돌했다.
“…주십시오.”
호아킴은 그가 내민 찻잔을 받아 단박에 들이켰다. 크리스티앙이 그런 그를 보며 만족스레 미소 지었다. 피를 나눈 혈육조차 믿을 수 없는 그의 마음을 알고 있는 호아킴의 진심이 느껴진 까닭이었다.
“역시, 오랜만에 만난 사제지간에 차로는 부족하겠지요.”
그가 종을 울려 신호를 보내자 시종장이 고급스러운 병에 담긴 술과 술잔을 준비했다.
“술 한잔하면서 북부에서 경이 거둔 성과를 듣는 시간을 가지고 싶군요.”
“예, 폐하.”
“오랜만에, 예전처럼 말입니다.”
“좋습니다. 그 전에 부탁이 있습니다.”
“무엇인지.”
크리스티앙이 그를 보며 부드럽게 되물었다. 그의 친부 호아킴은 만만히 여길 상대가 아니었다. 그가 카트린을 죽인걸 눈치챘음에도 반발하지 않고 자진해서 뒤로 물러난 이다.
“황녀를 제게 주십시오.”
황제의 시선이 길쭉하게 가늘어졌다.
“죄인을 평생 황제 폐하의 곁에서 속죄시킨다 말씀하셨지요. 그럼 그녀를 제가 관리하도록 만들어 주십시오.”
“노예로라도 삼으실 생각입니까.”
“황녀를 저의 비로 삼겠습니다. 그렇다면 죄인은 죽을 때까지 제 보호 아래, 폐하에 대한 죗값을 치를 수 있을 테니까요.”
크리스티앙이 술잔의 술을 삼킨 후, 천천히 내려놓으며 빙긋 웃었다.
“좋은 생각이군요.”
황제의 얼굴에서는 일말의 주저함, 혹은 머뭇거림이 느껴지지 않았다.
“반역을 저지른 죄인이긴 하나 황족을 사형한다면 국민들이 혹여 반발이 있을까 골치 아프던 참이었는데.”
호아킴은 안도했으나 완전히 마음을 놓을 수가 없었다. 황제가 지나치게 환하게 웃었기 때문이다. 그는 직감이 강한 자였다.
“그런데 어떡하죠?”
“…무엇을 말입니까? 혹여 문제가 될 만한 일이 있습니까?”
“문제는 없는데….”
크리스티앙이 대수롭지 않게 말을 이었다.
“황녀가 지금 내 아이를 임신 중이라 장군의 반려가 될 자격이 없는 것 같습니다.”
호아킴은 그제야 자신이 느끼던 불안감의 원인을 깨달았다. 크리스티앙이 무엇 때문에 마치 먹이를 숨긴 짐승처럼 자신에게 사나운 송곳니를 드러내는 지도.
황제가 그를 보며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기쁘시겠습니다. 호아킴 경.”
“…지금 무슨 말씀을….”
호아킴은 그의 뒤에서 지키고 선 하이데거를 신경 쓰며 당황함을 감추려 애를 썼다. 황제는 그에게 보낸 편지에서 은연중에 자신을 아비로 지칭하는 단어를 사용했다. 하지만 그 사실은 크리스티앙이 무덤에까지 가져갈 비밀이었다.
“클라웨 황족의 피를 받은 첫 아이인데, 당연히 제국의 경사가 아닙니까? 장군께서 마치 가족의 일처럼 기뻐해 주실 줄 알았는데요.”
호아킴의 눈빛이 매섭게 빛났다.
“폐하. 저를 이곳까지 왜 부르신 겁니까.”
크리스티앙이 술잔을 다시 채워 들어 올렸다.
“그야 당연히….”
붉은 입술이 열리며 흰 치아가 다시금 모습을 드러냈다.
“이 상황으로 시끄러워질 원로원을 입 닥치게 만들기 위해섭니다.”
***
열흘이 채 남지 않은 겨울제를 준비하느라 상인들은 더욱 분주해졌다. 가신을 거느린 영주들이 아메티스에 속속 도착하여 도시는 이미 축제 분위기였다. 유달리 차가운 원년의 겨울바람도 사람들의 흥분을 가라앉히지는 못했다.
“소식 들었소? 황실에서 올해에는 검투 경기를 개최할 예정이라는 거.”
“그럼! 그것 때문에 지금 도박꾼들이 단체로 아주 난리가 났는데.”
시내에서 가장 유명한 대장장이의 가게 앞에서 사람들이 시끄럽게 목소리를 높였다.
“자자, 끝났으면 다들 좀 비키시고. 다음 손님.”
검을 받아 든 대장장이가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남루한 행색의 기사가 가지고 있는 검치고는 지나치게 잘 관리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이 장사를 하면 이제 검 손잡이를 잡아만 봐도 알았다. 양날의 검의 칼날이 닳은 수준으로 봤을 때, 앞에 선 이가 보통 실력의 사람이 아니라는 감이 왔다.
“얼마나 걸리겠습니까?”
“워낙 관리가 잘되어 있어 금방 끝날 것 같소이다.”
“그럼 여기, 이 검도 함께 부탁합니다.”
잿빛 머리의 남자가 곁에 있는 시종이 차고 있던 검도 함께 벗겨 내 함께 내려놓았다.
“그런데 아까 들어보니 황실에서 검투 경기가 열린다던데.”
“그렇소.”
“검투는 사행성을 조장한다는 이유로 금지된 지 10년이 넘지 않았습니까?”
검을 가는 대장장이의 앞에 선 세드릭이 흥미로운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그랬지요. 무고한 자들이 목숨을 잃는 것은 잔인하기도 하고. 그런데 이번엔 범죄자들이 무더기로 나오지 않았소. 왜, 황녀가 데려온 그 반역자들 말입니다.”
세드릭의 얼굴 표정은 변화가 없었지만 그 곁에 서 있던 아일라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세드릭이 태연하게 입을 열었다.
“들었습니다. 그들이 처형을 당하지 않은 건 확실한 겁니까?”
“검투 경기 이후에 단체로 목을 자를 예정이랍니다. 아, 물론 경기가 끝날 때까지 그들이 살아 있다면 말이오.”
“황녀가 데리고 온 기사들이라면 ‘매의 수호자’들을 말하는 것이 아닌가요? 그들은 그리 쉽게 죽을 이들이 아닙니다.”
대장장이가 남장을 한 아일라를 보며 혀를 끌끌 찼다.
“혹시 경기 규칙을 아시오? 황실에서 열리는 검투는 일반적인 검술 시합이 아니외다.”
“인간과 동물의 싸움이지요. 전사는 눈을 가린 채 굶주린 열 마리의 사자와 맞서 싸우는 것. 말이 대회이지 그저 살육제에 불과하고요. 이제껏 경기에서 살아남은 이는 단 한 사람뿐.”
그들의 곁으로 검은 옷을 입은 귀부인 하나가 다가와 입을 뗐다. 챙모자에 드리운 검은 베일 탓에 얼굴이 확실히 보이지는 않았지만 분위기만 보아도 대단한 미인이라는 느낌이 드는 사람이었다. 고아한 목소리를 들으며 대장장이가 조금 놀라 입을 뗐다.
“아니, 외지인인 것 같소만 그걸 어찌 아십니까?”
검은색 모자가 조금 위로 들렸다. 우아한 입술이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그이가 제 남편이니까요.”
대장장이의 눈이 휘둥그레해졌다.
“하… 하르트만…?”
오래전 수도에서 세를 떨치던 하르트만 가문의 가주 에릭 하르트만. 그는 전장에서 선대 황제를 암살했다는 죄목으로 검투 경기에 내보내졌다.
“경기 직후 죽었지만 사자에게 물어 뜯겨 죽은 건 아니었으니.”
검 한 자루로 열 마리 맹수의 목을 딴 하르트만은 모든 이들이 보는 앞에서 스스로 심장을 찔러 자결했다. 자신의 결백을 증명하기 위함이었다.
그 이후 황실에서 검투 경기가 열리지 않은 것은 당연했다. 모두의 앞에서 피를 토하며 죽었던 하르트만의 이미지가 너무도 강렬했기 때문이다. 마치 그 모든 상황을 예상이라도 하였듯 새까만 옷을 입고 나타나 맨 앞줄에서 꼿꼿이 고개를 치켜든 채 남편의 경기를 지켜보던 하르트만 부인의 모습까지도.
“하르트만 부인.”
세드릭이 그녀에게 서둘러 예를 취하자 귀부인이 마치 기다란 우산처럼 가볍게 들고 있던 장검을 턱, 내려놓으며 그를 보았다.
“고향에 오래간만에 돌아오니 좋네요. 마침 호아킴 장군도 돌아왔다죠?”
클라라 하르트만이 활짝 웃었다. 어쩜 모든 것이 이토록 완벽한 타이밍이란 말인가.
남편을 죽음의 경기에 내보낸 이는 당시 태후의 최측근이었던 호아킴이었다. 그녀는 전장에서 황제를 암살한 이가 호아킴이었을 거라고 예상했다. 태후와 호아킴은 자신들이 권력을 잡기 위해 카플란을 이용, 수많은 범죄를 저질렀음이 틀림없었다.
클라라는 증거를 수집하기 위해 가문이 망해 가는 비참한 상황 속에서도 이를 악물고 살아남았다. 어린 시절 그녀의 도제 기사이기도 했던 에리히 폰 하이데거가 태후의 서거 이후, 황궁에서 세력을 확장한 것은 뜻밖의 행운이라고 생각했다.
심지가 곧고 뚜렷했던 에리히에게 도움을 청하려 했지만 일은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전환했다. 전장에서 공을 세우고 돌아온 그는 개선 파티가 열리던 밤, 스승이었던 그녀를 범했다. 머리에 피도 마르지 않은 황태자의 계획하에 벌어진 일이었다.
“먼 길 잘 오셨습니다.”
세드릭이 낮게 입을 뗐다. 한 사람의 도움이라도 절실한 상황, 하르트만 부인의 합류는 의미가 매우 컸다.
“그러게.”
하르트만 부인이 더욱 꼼꼼히 검날을 손질하는 대장장이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혼잣말하듯 내뱉었다.
“정말… 먼 길을 돌아왔네요.”
아일라는 입을 다물고 조용히 눈을 깜빡였다. 처음 보는 하르트만 부인이었지만 그녀의 표정에서 알 수 있는 것이 있었다.
“남편의 장례를 이제야 제대로 치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하르트만의 가주는 죽을 각오를 하고 아메티스로 돌아온 것이다. 베일 뒤에 가려진 그녀의 눈동자는 복수를 다짐해 본 자만이 가질 수 있는 눈빛이었다.
***
황제의 도서관과 연결된 테라스 옥상. 도시를 품고 있는 하늘에 온통 붉은 빛의 황혼이 저물기 시작했다. 테라스 곳곳에 피워 놓은 횃불이 질세라 활활 타올랐다.
“입맛이 없나?”
냅킨으로 입가를 정리하는 혜미를 보며 맞은편에서 크리스티앙이 입을 뗐다.
“충분히 먹었어.”
테이블 위에 차려진 음식은 단지 훌륭한 정도가 아니었다. 하지만 그녀의 행동거지 하나하나를 주시하는 크리스티앙 앞에서 입맛이 있을 리가 없었다.
“아니. 충분하지 않아.”
혜미가 그의 말을 무시하자 황제가 대화의 방향을 바꾸었다.
“접시를 비우지 않으면 그 위에 남은 음식의 무게만큼 요리장의 살점을 자를 것이다.”
길어진 머리카락이 바람에 날리며 그녀의 일그러진 얼굴을 드러냈다. 혜미는 내려 두었던 포크를 다시 쥐고 핏물이 배어 나오는 고기를 푹 찌른 후, 질겅질겅 씹었다.
방금 전 그가 내뱉었던 잔인한 협박은 생각하지 않으려 애를 썼다. 배 속의 아이를 위해서도, 그녀의 건강을 위해서도 배불리 먹어 두는 게 좋다는 생각을 하며 억지로 식사를 끝마쳤다.
“거봐. 싹 비울 수 있잖아.”
크리스티앙이 후식으로 나온 차를 들이켜며 입술을 만족스레 비틀었다. 지난밤, 침상 위에서 새벽까지 그녀를 탐하던 그의 표정이 겹쳐진다. 혜미는 그 잘난 얼굴에 뜨거운 차를 끼얹어 주고 싶다고 느끼며 시선을 돌려 버렸다.
그녀가 처한 상황과는 별개로 아메티스의 노을은 감탄이 나올 정도로 아름다웠다. 그림을 그리는 화공이라면 감히 쓸 수 없을 것 같은 대담한 색으로 물들어 가는 자연의 풍광을 보고 있자니 여러 생각이 떠올랐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지?”
“네 생각.”
크리스티앙이 입술로 가져가던 찻잔을 잠시 멈추었다.
“그래?”
“응. 널 어떻게 끝내야 할지를 생각하고 있었어.”
혜미가 나직하게 속삭였다. 감금되어 있는 지난 며칠 동안 그녀는 점점 더 그에게 속내를 털어놓는 데 익숙해졌다. 물론, 제한된 수준이었지만 이 정도도 하지 않고서는 참을 수가 없었다.
“패기는 좋은데, 그게 무엇이든 넌 실패할 거야.”
그녀의 말에 별 타격 없이, 하지만 진지하게 답하는 크리스티앙의 태도 또한 그녀가 솔직해지는 데 한 몫을 더하고 있었다.
달칵.
크리스티앙이 금테를 두른 찻잔을 컵 받침에 내려놓은 후, 버터쿠키가 든 접시를 눈짓했다.
“안 먹어?”
혜미는 그의 앞에서 한가롭게 과자나 씹고 있을 여유가 없었다.
“호아킴 장군이 왔다면서.”
“침실에 출입하는 시녀들의 혀를 모두 잘라 버려야겠군. 쓸데없는 소리를 더 이상 지껄이기 전에.”
크리스티앙이 그녀 대신 쿠키를 와작 소리 나게 씹었다. 혜미는 인상을 찌푸리며 목소리를 높였다.
“뭔 소리야. 어제 그가 내게 선물을 보내온 걸 너도 봤잖아!”
“그랬었나?”
“시녀들은 내 앞에서 숨소리도 내지 않아. 애먼 사람 잡지 마.”
당연한 말이었다. 반역자와 말을 섞는 것 자체가 죄가 되기 때문이다. 흥분한 표정의 그녀를 보며 크리스티앙이 미소를 감추었다. 그는 그녀가 저렇게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에게 대거리하는 모습이 좋았다. 마치 처음 그녀를 만났을 때 기억을 떠올리게 했다.
“호아킴도 알고 있어?”
“뭘 말이지?”
“네가 날 죽일 생각이 없다는 거.”
크리스티앙은 그녀의 바로 이런 점이 맘에 들었다. 그녀가 그를 똑바로 바라보며 정곡을 찌르자 싸늘한 겨울바람이 무색하게도 가슴속이 뜨끈해졌다.
“정확히 말하면 현재로서는 죽이지 못한다는 게 맞겠지.”
“무슨 뜻이야?”
“황제의 아이를 밴 여인에게 감히 손을 댈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
“이 아이는 네 아이가 아니야, 크리스티앙.”
식사 시중을 드는 시종들은 테이블에서 멀리 떨어져 있어 그들이 나누는 대화 소리까지는 들을 수 없었다. 크리스티앙이 조금 웃으며 속삭였다.
“네가 사람이 아닌 염소 새끼를 낳는다고 해도, 내가 그를 내 아이라 천명하면 그건 내 아이가 된다.”
“대체 그렇게까지 하는 이유가 뭔데?”
“몰라서 물어?”
모르겠다. 혜미는 아직도 크리스티앙이 배 속의 아이에게 해를 끼칠 거라는 두려움을 떨칠 수가 없었다. 정확히 말하면 그가 아이를 살려 두고 있는 이유를 알지 못했던 것이다. 의문 어린 시선으로 바라보는 혜미를 보며 크리스티앙은 깍지 낀 손을 입술에 가져갔다.
“나 외에 그 누구도 네게 손대는 걸 원치 않기 때문이야.”
비밀스러운 말. 오로지 그녀에게만 들리는 말을 속삭이는 크리스티앙의 황금색 머리카락이 지는 노을에 붉게 물들었다.
“나는 바쁜 사람이다. 널 내 시야에 두는 것에는 한계가 있어. 아무리 수많은 경비병이 깔려 있다고 해도 내 침실에 침입해 네 심장에 칼을 꽂을 수 있는 사람은 존재하겠지. 네가 표면적으로는 감금당해 있다고 하나, 언제든 마음만 먹으면 탈출할 수 있는 것처럼.”
혜미는 바람에 날리는 그의 부드러운 블론드 사이에서 빛나는 눈동자를 보았다. 점점 더 상대에게 솔직해지는 건 그녀뿐만이 아니었다. 손으로 가려진 오만한 붉은 입술을 타고 크리스티앙의 진심이 거침없이 흘러나왔다.
“하지만 넌 못하지. 교황청에 붙들려 있는 네 사람들의 목숨이 너 하나에게 달려있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기 때문에. 네가 도망치는 순간, 내가 그들에게 어떻게 할지를 똑똑히 알고 있기 때문에. 또한, 내가 네게 얼마만큼 너그럽게 대하고 있는지를 가장 잘 알고 있기 때문에.”
“크리스티앙.”
그가 그녀를 보며 황금빛 속눈썹을 느리게 깜빡였다. 혜미는 이미 속으로 수천 번은 되뇌었던 말을 어렵게 끄집어냈다.
“너와 난… 안 돼.”
“뭐가 안 되는데.”
크리스티앙은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되물었다. 그녀가 말하는 의도를 몰라서는 아니었다. 다만 궁금했을 뿐이다. 왜 그렇게 생각하는지.
“불가능하다는 걸 몰라…?”
“내 사전에 불가능한 일은 없었어.”
“너한테는 몰라도 나한테는 아니야.”
혜미는 진심으로 고개를 저었다. 그녀는 이제껏 그가 자신에게 벌인 모든 짓을 용서할 수가 없었다. 싫다고 눈물 흘려도 소용없었고 애원해도 결국 그의 품 안이었다. 인간의 집착이 어느 정도로 사람을 괴롭게 만들 수 있는지 생생히 깨달았다.
“네 주변의 소중한 사람들을 모두 죽이고, 결국 네 곁에 남은 게 단 한 사람뿐이라도 과연 그럴까. 넌 나를 거부할 수 있을까?”
“이미 말한 대로 난 스스로 목숨을 끊을 거야.”
“아니, 넌 그러지 못해.”
크리스티앙이 상체를 쭉 펴며 단언했다.
“그걸 네가 어떻게 알아?”
“시녀가 그러더군. 나만 없으면 식사도 매우 규칙적으로 하고 후식 접시까지 싹싹 비우며, 감금된 와중에도 끊임없이 방 안에서 몸을 움직인다지? 나와 있을 때 죽을상을 하고 있는 것과는 딴판으로.”
혜미의 얼굴이 조금 경직되었다.
“의사에게는 아기에게 혹여나 좋지 않은 점이 무언지 꼬치꼬치 캐묻고, 회임에 관한 책을 가져다 달라고 하고 말이야. 그래서 확실히 깨달았지.”
주변에 있는 모든 이들이 황제의 눈과 귀라는 사실을 알고는 있었지만, 이렇게 확인받는 것은 비참한 일이었다. 특히나 그에게 그녀가 가진 어떤 약한 패도 보여 주고 싶지 않을 때는.
“넌 네 아이를 절대 버리지 못할 거라는 걸.”
그녀는 거짓말로도 차마 아니라는 말이 입 밖으로 떨어지지가 않았다. 배 속의 아이가 혹여나 들을까 두려웠기 때문이다. 혜미는 떨리는 양손을 꽉 쥐었다.
“네 어미가 했던 것처럼, 제 아이를 두고 목숨을 끊는 비정한 짓은 절대 하지 않을 거라는 걸.”
쿵. 쿵. 심장이 격하게 뛰었다. 크리스티앙이 얼굴을 일그러뜨리는 그녀를 보며 환하게 웃었다.
“내가 사람 보는 눈이 좀 정확하거든.”
“네가… 내 어머니에 대해 뭘 알길래 그딴 소리를 지껄여…?”
혜미가 애써 입을 뗐다. 목이 메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음…. 어디서부터 이야기할까?”
크리스티앙이 과자를 씹으며 태연하게 답했다.
“네 어미는 후계자 생성을 위해 이용당했을 뿐이고, 이용 가치를 달성한 후 남편에게 완전히 버림받았다는 것?”
“…….”
“아니면 황제 트리스탄이 연인이었던 교황에게 제 사랑을 증명하기 위해 아내에게 독약을 보냈다는 이야기를 해 줄까?”
“…그만.”
크리스티앙의 입으로 듣는 진실은 잔인했다. 혜미는 두 주먹을 꽉 쥐었다.
“상심한 다니엘라가 젖먹이 아이를 홀로 두고 기어이 자살했다는 건 어때?”
“닥치라고!!!”
혜미가 집어던진 찻잔이 크리스티앙의 어깨를 뜨끈하게 적셨다. 시종이 놀라 달려오려 했지만 황제가 저지했으므로 감히 다가올 수가 없었다. 혜미는 벌떡 일어나 테라스로 다가가 바람을 맞았다. 동요하지 않으려 했지만 가슴이 울컥거려 참을 수가 없었다.
아내보다 연인을 더 사랑했던 아버지, 그리고 자식을 버리고 세상을 떠날 정도로 비정했던 어머니의 이야기를 듣는데 눈물이 날 정도로 외로웠다. 결국 그녀는, 부모 둘 중 그 누구에게도 사랑받지 못했던 것이다.
“과거의 환영에 사로잡혀 괴로워하는 이가 여기 또 한 명 보이는구나.”
크리스티앙이 그녀에게 천천히 다가왔다. 혜미는 자신이 일전에 그에게 한 말을 비웃듯 내뱉는 크리스티앙을 보며 입술을 꽉 깨물었다. 바람이 마구 날리는 머리카락이 눈물에 젖은 그녀의 얼굴을 가려 주는 것은 불행 중 다행이었다. 그녀는 울고 싶지 않았다. 적어도 크리스티앙의 앞에서는.
“선대를 이해할 수 없는 것은 나 역시 마찬가지다. 그중 제일 등신은 네 아버지, 트리스탄이겠지. 나라면 내가 사랑하는 이가 교황이든 짐승이든 무조건 내 곁에 앉혔을 것이다. 남들의 눈을 속이기 위한 결혼 따위, 하지 않았어.”
“…네가 그런 말을 할 자격이 있다고 생각해?”
“무슨 뜻이지?”
“너도 황후가 있잖아…!”
혜미가 잇새로 작게 소리치듯 중얼거리자 크리스티앙이 피식 웃었다.
“그건 널 만나기 전이었고.”
“뭐…?”
크리스티앙이 그녀를 보며 또렷하게 중얼거렸다.
“황후와는 이혼할 것이다. 그리고 널 내 옆자리에 앉힐 거야. 난 내 아이를 잉태한 소중한 누이를 버릴 생각이 없거든.”
“…난 너와 결혼할 수 없어, 크리스티앙.”
“있는지 없는지는 내가 결정해.”
“난 널 사랑하지 않아. 죽을 때까지 그럴 일은 없다고 몇 번을 말해야…. 흣!”
크리스티앙이 그녀의 팔목을 휙 낚아챘다. 그녀의 등에 섬세하게 세공된 테라스의 돌벽이 닿았다.
“아니. 결국엔 그렇게 될 거야. 넌 나를 원하게 될 거고, 내 생각만으로 머리가 가득 차게 될 거야. 네 삶에서 내가 가장 중요한 의미가 될 거야. 네 말대로 죽을 때까지 넌 날 잊을 수 없을 거야. 장담하지.”
격양된 목소리로 토해 내는 그의 말은 저주처럼 들리기도 했고 애원처럼 들리기도 했다. 혜미의 입술이 소리 없이 벌어졌다. 그녀가 그를 보며 허탈하게 중얼거렸다.
“…이미 내 삶에 너 말고 중요한 남자들이 더 많아.”
“안됐구나. 난 그들과 널 공유할 생각이 전혀 없어.”
“…….”
“나는 그들보다 레이스를 조금 늦게 시작한 것뿐이다. 출생부터 어긋났던 우리의 과거를 생각해 보면 난 지금 다리에 모래주머니를 달고 뛰는 것과 같지. 하지만 그거 알아?”
크리스티앙이 그녀의 허리를 꽉 잡은 채 속삭였다.
“모든 약점과 결점을 안고도, 최악의 조건을 가지고도 나는 이 경주에서 이길 자신이 있어.”
혜미는 이글거리는 그의 황금빛 눈동자에서 시선을 뗄 수가 없었다.
“나의 삶은 처음 시작부터가 약점투성이였으니까.”
인정할 건 인정해야 했다. 크리스티앙은 분명 사람을 끌어당기는 힘이 있는 이였다. 그녀가 그를 조금 더 일찍 만났더라면 어땠을까. 아니 그가 조금만, 아주 조금만 덜 악랄했더라면 어떠했을까.
“그 모든 핸디캡에도 불구하고 난 한 번도 져 본 적이 없다. 무슨 수를 써서든 이긴다는 뜻이야. 그러니 너도 헛수고하지 말고 내게 안겨. 이 세상을 발밑 아래 둔 자를 가진 기분을 만끽하게 해 줄 테니까.”
“…왜 하필 나야?”
조용히 그의 말을 듣고만 있던 혜미가 그를 보며 마침내 물었다. 그녀는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너와 내가 이 성에서 만난 건 겨우 백일 전이야. 그런데 왜… 하필 나였냐고.”
크리스티앙이 그녀의 말을 들으며 소리 내어 웃었다. 눈을 크게 뜨고 바라보는 그녀의 앞에서 마침내 웃음을 멈춘 그가 입술을 지그시 씹었다.
“나라고… 그러고 싶었을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