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5화 (65/72)

크리스티앙이 단단하게 일어서는 그녀의 젖꼭지를 보며 입술을 비틀었다.

“널 때려가며 개발시킨 사람이 누구지? 냄새나는 개새끼는 네 발가락이나 핥을 줄 알았을 테니, 아마도 교황이었겠군. 그 음침한 놈이 널 어떻게 다루었을지 안 봐도 훤해.”

부드러운 가죽 채찍이 저리 다시 움직이며 유두와 유륜만을 집요하게 자극했다. 결박된 혜미의 어깨가 부들거리며 떨렸다.

“두 남자에게 번갈아 박히는 것도 부족해서 이 꼴로 내 앞에서 이러고 있나?”

“닥쳐… 아흣!”

크리스티앙이 예민해진 가슴을 다시 한번 내려치자 혜미는 입을 다문 채 신음할 수밖에 없었다.

“아직도 모르겠어?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음란해 빠진 널 만족시킬 수 있는 사람은 이 세상에 나 하나뿐이란 걸.”

그녀의 귀에 입술을 딱 붙인 채 속삭이는 목소리가 잔인했다.

“고문 장소는 맘에 들어?”

혜미가 끌려온 방은 황제가 쓰는 침소 중 가장 구석진 곳에 있는 방이었다. 천장에서 늘어진 샹들리에에 주르륵 꽂혀 있는 기다란 촛불이 환하게 불을 밝혔다.

“답이 없는 걸 보니 역시 뭔가 부족한 모양이군.”

크리스티앙이 바닥에 길게 늘어진 끈을 휙 잡아당긴 순간이었다. 사방에 걸려 있던 두꺼운 커튼이 순식간에 내려갔다. 붉은 천 뒤에 가려졌던 벽이 거울이라는 것을 알아챈 순간 혜미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벌거벗은 채 온몸을 붉게 물들이고 결박되어 있는 자신, 그리고 그런 그녀를 포식자처럼 응시하는 크리스티앙의 옆모습이 똑똑히 보였다.

“하아…!”

서둘러 고개를 돌려 보았지만 그녀가 눈앞의 광경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은 없었다. 사방에 붙은 거울이 수치스러운 이 상황을 다각도로 비추고 있을 뿐이었다.

“이제 맘에 들지?”

“…딱 너같이 그냥 미친 것 같아.”

“실망스럽네. 이곳은 내 추억이 가득 담긴 곳인데.”

“변태 같은 공간에서 네게 당했을 수많은 여자들에게 애도하는 마음이 들어.”

“질투해?”

크리스티앙이 거울 속의 그녀를 보며 슬쩍 웃었다. 혜미의 눈썹이 엉망으로 휘었다.

“웃기지 마.”

“애석하게도 이 방에서 여자를 안은 적은 단 한 번도 없어.”

찰싹. 다시 한번 가죽 채찍 술이 그녀를 할퀴고 지나갔다. 이번에는 벌어진 다리 사이였다. 음핵이 지끈거리는 감각에 혜미의 입술이 소리 없이 벌어졌다.

“이 방은 내 어머니인 태후께서 날 가둔 곳이거든.”

“…….”

“내 어머니는 내가 잘못을 할 때면 이 방으로 보냈어. 사방이 거울인 곳에 보이는 것은 나 혼자뿐. 이곳에서 내가 누구인지 똑똑히 깨우치라고. 클라웨의 황제가 될 이는 독서를 게을리해서도, 말실수를 해서도, 그 누구를 믿어서도 안 된다고 말이야. 이틀 동안 나오지 못한 적도 있지. 나중엔 눈을 감아도 내가 보여. 울고 있는 내가. 깨져 버린 내가. 소리치는 내가.”

거울을 통해 수십 개로 굴절된 크리스티앙의 모습이 보였다.

“뭐, 그 덕에 내가 이렇게 훌륭한 군주가 되었으니 정말 현명한 교육 방식이지?”

혜미는 입술을 꽉 깨문 후 그를 향해 작게 내뱉었다.

“어린애처럼 굴지 마, 크리스티앙.”

“…우스운 소릴 하는구나.”

“자신이 망가진 책임을 부모에게 떠넘기고 원망하는 거, 그거 어린애들이 잘하는 짓이거든.”

비단 나이가 어린 이들만이 그 함정에 빠지는 것은 아니었다. 자기가 노력으로 바꿀 수 없는 과거 때문에 평생을 그 고통 속에서 침식된 채 사는 사람은 많았다.

“내가, 내 어미를 원망하는 것처럼 보였어…?”

크리스티앙이 소리 내어 조금 웃었다.

“아니. 그럴 리가.”

그가 채찍을 들어 손잡이 끝으로 발딱 선 그녀의 유두를 덧그렸다. 입을 열면 끔찍한 신음이 터질 것 같아 혜미는 그저 입술을 꽉 깨물 수밖에 없었다.

“멍청하다고 생각한 적은 있었지. 하지만 최근엔 그 멍청함에 감사하고 있는걸. 그녀가 널 죽이는 데 실패하지 않았다면 내가 지금 이토록 즐거울 수는 없을 테니까 말이야.”

크리스티앙이 느끼지 않으려 애쓰는 그녀를 보며 이를 드러낸 채 웃었다. 자그마한 흉 하나 없이 완벽한 직각 어깨가 유려하게 흔들렸다.

“삶이란 거, 참 우습지.”

“…….”

“누이를 처음 만나기 전까지 나는 상상도 못 했거든.”

크리스티앙이 허리를 굽혀 그녀와 눈을 맞추었다.

“우리가 이런 관계가 될 거라고 말이야.”

“이런 관계가 어떤 관계인데.”

“정말 몰라서 물어?”

바지 단추를 풀며 크리스티앙이 느리게 물었다. 혜미는 목덜미에 소름이 돋았다. 그를 설득할 수 있을 거라 착각했던 그녀의 순진함을 탓해 보았자 이미 늦은 일이었다.

사람은 타인을 배신할 수도 있고, 짓밟을 수도 있으며, 자신의 욕망을 위해 처절하게 무릎 꿇릴 수도 있다. 크리스티앙은 그 모든 것에 도가 튼 이였다.

“…너와 난 아무 관계도 아니야, 크리스티앙.”

굳이 말하면 악연. 출생부터가 어긋난 사이다.

“글쎄, 과연 그럴까?”

그의 눈높이가 점점 낮아졌으므로 혜미는 고개를 아래로 떨굴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크리스티앙의 긴 다리가 서서히 구부러져, 마침내 바닥에 닿는 것을 눈을 부릅뜬 채 바라보았다.

“너와 내가 무슨 관계인지 똑똑히 봐.”

크리스티앙이 후후 웃었다.

“내가 널 어떻게 만드는지, 잘 보라고.”

벌어진 다리 사이로 크리스티앙이 고개를 천천히 파묻었다. 그가 눈을 감지 않았으므로, 혜미는 그의 눈빛이 만족스럽게 휘어지는 것을 그대로 볼 수 있었다.

그가 제 사타구니에 손을 집어넣어 발기한 남성을 서서히 흔드는 모습도. 숨을 길게 내쉰 후 맹수처럼 쾌락의 핵에 이를 박는 모습까지도.

“……!”

혜미는 고개를 번쩍 쳐들었으나 그에게서 도망칠 수는 없었다. 크리스티앙의 어미가 제 자식을 가둔 방은 천장 또한 거울이었다.

그녀는 흐느끼듯 가쁜 호흡을 내뱉었다. 그가 그녀의 음순을 입술로 물고는 혀로 그 속을 이리저리 비집었다. 혓바닥의 돌기가 음핵을 전체를 싸악 핥자 질구를 타고 수치의 흔적이 흘러내렸다. 크리스티앙이 그녀의 비부에서 얼굴을 떼고는 아름다운 얼굴에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

즐거운 웃음이 붉은 입술을 타고 흘렀다. 웃음소리는 점점 더 커져 갔다.

“고문이 아주 즐거운 모양이야. 누이는.”

그녀의 내면에 있는 수치스러움이 모두 까발려지게 한 상대가 애액으로 엉망이 된 제 입술을 천천히 혀로 핥으며 자위를 이어 나갔다.

“하루라도 섹스하지 않으면 미칠 것 같아? 그래서 마법사와 붙어먹은 것도 모자라 더러운 호위 기사 따위를 성노로 삼아 희롱했나? 네 소원대로 해 주지. 넌 영원히 골방에 갇혀 내 좆이나 기다리는 신세가 될 것이다.”

크리스티앙. 나는 너를 반드시 죽일 것이다.

그녀는 속으로 되뇌며 눈을 질끈 감았다.

“시선 피하지 말라고 했을 텐데.”

부드러운 가죽 채찍이 그녀의 밀부를 쑤시고 들어오는 순간, 혜미는 왜 채찍의 손잡이가 쓸데없이 정교했는지를 깨달을 수 있었다. 혜미가 몸을 뒤로 빼자 묶인 의자가 거칠게 덜컹거렸다. 크리스티앙이 그녀의 안을 쑥 비집었다 빠져나가며 열기 오른 얼굴로 천박한 말을 내뱉었다.

“아랫도리에 뭘 쑤셔 주기만 해도 자지러지면서 어딜 도망가, 씨발.”

“변수가 생기지 않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하지만 폐하, 만에 하나 그럴 경우에는….”

“그럴 경우에는…?”

“저를 겨울제가 시작하는 날, 모든 이들이 보는 앞에서 크리스티앙과 한 공간에 세우십시오. 그렇게 만들어 주십시오.”

“내기 하나 할래, 크리스티앙.”

혜미가 신음을 간신히 참으며 잇새로 내뱉었다. 그 와중에도 그의 손놀림이 소름 끼치도록 생생하다.

“발터는 겨울제가 시작하는 날, 모든 이들이 보는 앞에서 널 죽일 거야.”

“…뭐?”

크리스티앙이 조소하며 되물었다.

“그는 분명히 그럴 거야.”

“하하. 그건 네 망상인가?”

혜미는 그를 몰아붙였다.

“너 사실 무섭지? 지금도 그가 달려와 네 목을 딸까 봐 두려워 미치겠지? 그렇겠지. 그는 태생이 강하니까. 겁 많고 비열한 너보다 수백 배는 더 강한 사람이니까…!”

채찍을 휙, 잡아 뺀 크리스티앙이 숨을 거칠게 몰아쉬며 바지를 끌렀다. 그의 황금빛 동공에 분노와 질투가 형형히 빛났다.

“웃기는 소리를 지껄이는군.”

“당장이라도 그를 처형하고 싶어지지? 그럼 그렇게 해. 그를 따라 죽는 건 나도 바라는 바니까. …흣!!!”

허리가 번쩍 들렸다. 의자 채로 그녀의 몸이 공중에 들리자 크리스티앙이 폭력적으로 그녀의 내부를 비집었다. 절망감이 다시 온몸으로 퍼져 간다.

“비척대며 내 좆을 잘도 집어삼키면서 죽고 싶단 말을 하면 우습잖아.”

크리스티앙이 그녀를 박아 대는 모습이 사방에 비쳤다. 눈을 감자 그의 구둣발이 삐걱거리는 소리, 그리고 아랫도리에서 젖은 살끼리 부딪치는 소리가 더욱 생생하게 들렸다. 그녀를 고문하겠다는 크리스티앙의 말은 사실이었다.

“죽을 때까지 좆질해 줄 테니까 소원대로 어디 한 번 죽어 봐.”

의자 다리가 바닥을 마구 긁어 대는 소리가 커져 갔다.

“널 증오해, 크리스티앙.”

“그래? 증오하는 사람과 섹스하는 기분이 어때?”

“끔찍해… 끔찍하다고!”

“끔찍한 게 어느 쪽이지? 나? 아니면 싫다고 지껄이며 질질 싸는 네 쪽인가?”

크리스티앙이 열기 오른 얼굴로 조소했다. 혜미는 그의 얼굴에 침을 뱉었다.

“더럽게 놀고 싶은 거면 얼마든지.”

크리스티앙이 질세라 입술을 비틀며 성기가 들락이는 그녀의 음부에 툭, 하고 제 타액을 뱉어냈다.

정신을 잃고 싶어.

“난 사실 그런 게 더 꼴리거든.”

그가 그녀를 바라보며 킬킬댔다.

삭제하고 싶었던 욕탕에서의 기억이 다시금 그녀의 머릿속을 난도질했다. 엉망으로 젖은 채 미소 짓던 크리스티앙의 얼굴이 생생하다.

“누이와 한결 더 친밀해진 느낌이군.”

“으흑… 그, 그만해.”

“왜, 또 그때처럼 못 참고 쌀 것 같아?”

혜미가 거칠게 박히며 입 안의 살을 피나게 깨물었다. 손톱만큼의 쾌감도 느끼고 싶지 않았다. 크리스티앙이 허리를 더욱 집요하게 추어대며 비릿하게 웃었다.

“개새끼야… 이 개같은 새끼야!!”

“재갈 물리기 전에 닥치고 내 이름이나 불러.”

차라리 기절했으면 좋겠다고 강렬히 소망하는 순간, 혜미의 머리가 핑 돌았다. 그리고 머릿속이 암전이었다.

***

“모두 전열을 정비하라…!!!”

아수라장이 된 평원에 호아킴의 외침이 울려 퍼졌다. 사방은 난장판이었다. 말은 미쳐 날뛰었고 몸을 가볍게 하고 행군하던 군사들은 갑주를 챙겨 입느라 정신이 없었다.

원인은 하늘에서 난데없이 떨어지는 우박이었다. 아메티스는 사시사철 수염에 고드름이 낄 정도로 추운 북부와는 달랐다. 4계절이 온화한 편으로 겨울에도 눈이 오지 않았고 비도 적었다.

수도에서 올 한해 비가 유난히 잦았다는 보고는 들었지만 우박과 같은 기상 이변은 수십 년 만의 일이었다. 게다가 갑자기 퍼붓고 있는 우박은 빗물이 얼어붙은 수준이 아니었다. 작게는 어른의 주먹, 크게는 어린아이의 머리통만 한 얼음덩어리가 마치 바윗돌같이 단단했다.

“금방 멎을 것이다! 당황하지 말고 잠시 행군을 멈춘다!”

아메티스를 바로 목전에 둔 상황. 평원을 지나면 보일 초소를 향해 호아킴은 행군을 재촉하던 중이었다. 딱히 몸을 숨길 곳이 없는 초원에서 군사들이 저마다 방패를 머리 위로 치켜들었다. 퍽, 퍽, 하는 둔탁한 소리와 함께 방패가 움푹움푹 패며 손목까지 통증이 느껴졌다.

“뭐지…?”

검은색 갑주로 무장한 호아킴이 투구 안에서 눈을 찌푸렸다. 북쪽에서 희뿌연 무언가가 마치 빠르게 퍼지는 안개처럼 밀려들고 있었다. 평원에 진입하기 전 그들이 힘겹게 지나온 사막에서 시작된 바람이었다.

“모래 폭풍이다…!!!”

지휘관 중 누군가가 소리를 쳤다. 과연 모래바람은 핵을 중심으로 거센 돌풍을 일으키며 나선형이 되어 공중으로 치솟고 있었다.

하늘에서는 여전히 돌덩이 같은 우박이 퍼부었다.

“이건….”

빠르게 다가오는 모래 폭풍은 점점 그 궤적을 늘려 가고 있었다. 대평원에 음산한 바람 소리가 울려 퍼졌다. 저곳에 휩쓸리면 모두가 모래에 숨통이 파묻혀 죽는다는 사실은 명백했다. 호아킴은 이것이 단순한 기상변화가 아니라는 사실을 직감했다.

…설마 마법사의 짓인가?

“흩어져라…! 최대한 멀리 떨어져…!!!”

그는 흐려지는 시야 속에서 주위를 살폈다. 마법사들은 모두 황실의 엄중한 관리하에 있어 황금성을 떠날 수가 없었다. 설사 탈출한 마법사가 있다 치더라도 이 정도의 마력을 일으킬 수 있는 자는 단 한 명뿐이었다.

“교황이다!!! 대마법사가 주변에 있는 게 분명하다!!!”

호아킴이 모래 폭풍에서 빠르게 말을 달리며 멀어지는 지휘관들을 향해 소리쳤다.

“멀리 있지 않을 것이다. 반드시 찾아내라!”

“으아아악…!”

미처 속도를 내지 못한 군사들이 모래 폭풍에 집어 삼켜졌다. 강력한 모래바람에 휩쓸린 이들은 몸부림을 치다가 속수무책으로 바닥에 추락했다. 폭풍이 지나간 자리마다 즐비하게 깔린 시체들 위로 우박이 우두둑 떨어져 두개골과 갈빗대를 부수었다.

“장군님…! 저곳입니다!”

방패로 머리를 가리고 정신없이 말을 달리던 부하 중 하나가 크게 외쳤다. 그가 손을 뻗은 곳, 너른 초원의 지평선 너머 호젓한 달빛 아래에 나무 한 그루가 외로이 서 있었다. 그 아래에서 기다란 머리칼을 날리고 있던 길쭉한 인영은 분명 이 모든 사태의 원인, 교황 베네딕트임이 분명했다.

“저런….”

호아킴이 이를 뿌득 갈았다. 교황이 죽었다는 전서구를 받은 날 기뻐하며 마셨던 술이 위장에서 역류하는 느낌이다.

“기동대와 돌격한다!”

마수와 싸워 온 호아킴의 정예 부대는 빨랐다. 그가 말을 뱉어 내기가 무섭게 군사 수백이 횡으로 길쭉하게 열을 늘이며 달려가기 시작했다.

“공격하라!”

집중하고 있던 베네딕트가 눈을 슬며시 떴다. 삼백안의 눈동자에서 시퍼런 빛이 일렁였다. 말을 타고 일자로 줄지어 그에게 달려오는 호아킴의 군사들은 시커먼 갑옷으로 무장해 마치 어둠의 사자들 같았다.

휙!

수백 개의 화살이 한꺼번에 그를 향해 날아들자 그의 유려한 눈썹이 조금 꿈틀거렸다. 화살에서 마수의 기운이 느껴진 까닭이었다.

마수의 피를 뒤집어쓴 물건은 그 자체로 힘을 발휘했다. 칼은 마검이 되고 활시위를 벗어난 화살은 그 자체로 무기가 되는 것이다. 호아킴이 북부에서 이뤄 낸 성과에 놀라고 있을 틈이 없었다.

후두둑.

나무에서 실처럼 뻗어 나온 가지가 베네딕트의 몸을 감싸며 수백 개의 화살을 튕겨 냈다. 바닥에 떨어진 화살이 기다란 뱀을 닮은 생물로 변해 꿈틀거리며 나무를 타고 올랐다. 모래 폭풍은 점점 그 세기를 더해 가고 있었으므로 베네딕트는 집중할 수밖에 없었다.

“다시 쏴라!!!”

화살이 다시 쏟아졌다. 튕겨 난 화살은 다시 시커먼 물체가 되어 커다란 나무를 타고 기어올랐다. 날름거리는 혓바닥에서 불길이 뿜어져 나오자 바싹 마른 나무에 불이 붙었다. 불타기 시작한 나뭇가지 안에서 베네딕트는 이를 꽉 깨물었다.

조금만 더.

모래 폭풍은 이제 호아킴 군사 수천을 완전히 휩쓸고 있는 중이었다.

“으아아아!!!”

개미 떼처럼 휩쓸리는 군사들에게서 들리는 비명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불이 활활 타오르며 베네딕트의 기다란 머리카락에 옮겨붙었다. 옷이 타들어 가고 불길이 피부에 닿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베네딕트는 입술을 지그시 깨물며 더욱 집중했다.

이 정도의 힘을 쓸 때는 온 정신을 한 곳에만 쏟아부어야 했다. 조금이라도 집중력이 흩어지면 마법이 깨져 모래 폭풍은 사라지고 만다. 치유 마력을 쓸 여력은 없었다. 얇은 피부가 녹아내리고 서로 들러붙는 화상의 고통이 생생한 와중에도 그는 모래바람을 멈추지 않았다.

조금만 더.

이제 불길은 그의 온몸을 집어삼키고 있었지만 베네딕트의 내부에서 활활 타오르는 욕망의 크기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그는 사랑스러운 에데르트에게 줄 선물로 호아킴이 데리고 온 군대를 아예 몰살시켜 버리기로 마음을 먹었다. 그러고 난 다음, 이 몰골 그대로 그녀에게 돌아갈 것이다.

에데르트가 그를 징그러워할까? 아니. 그가 아는 그녀는 그럴 이가 아니었다. 자수정을 닮은 두 눈에 눈물방울을 달고 입가를 손으로 가리며 울음을 참는 모습을 보면 퍽 즐거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를 울리고 달래는 것은 항상 그의 몫이었으니까.

시커멓게 타들어 가 뼈가 드러난 눈매 안에서 물빛 눈동자가 더욱 시퍼렇게 빛을 냈다. 하늘 높이 치솟는 모래 폭풍은 이제 마치 살아 있는 거대한 물체 같은 모습을 띠었다. 폭풍이 호아킴을 선두로 그를 향해 달려오는 기동대에게 커다란 아가리를 쩍 벌렸을 때였다.

“대마법사님!!!”

어딘가에서 자그마한 손이 쑤시고 들어오더니 피부가 녹아내린 그의 팔목을 꽉 잡았다. 베네딕트가 눈을 돌린 자리에 그의 키 반만 한 어린 소녀가 보였다.

“위험해요!”

…뭐야 이건.

베네딕트가 인상을 찌푸리는 순간, 그의 몸이 불길 속에서 자취를 감추며 사라졌다. 동시에 시커먼 마수들로 점령이 된 나무가 완전히 까맣게 불탄 채 풀썩 무너졌다.

끼익. 끼익.

박쥐 소리가 어두운 동굴 안에 울려 퍼졌다.

“…대마법사님. 괜찮으세요…?”

순식간에 절벽에 위치한 동굴 속으로 이동한 베네딕트가 인상을 찌푸렸다. 입을 열려고 했지만 입술은 붙었고 성대가 타 버려 목소리를 낼 수가 없었다. 너무 큰 힘을 단번에 쓴 탓인지 치유 마력이 보통 수준보다 백배는 더디게 진행되고 있었다.

“이딴 게 대마법사라고?”

소녀의 곁에서 새카만 머리카락의 어린 소년이 못마땅한 얼굴로 투덜거리듯 내뱉었다.

‘너희들은 누구냐.’

머릿속으로 그대로 울려 퍼지는 목소리에 로즈와 타우가 동시에 놀라 한발 물러섰다. 뺨이 통통한 소녀가 자그마한 양손을 앞으로 모은 후,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뗐다.

“저희는 신의 가호를 받은 사비오족의 마법사입니다. 저는 87번… 아니, 로즈구요, 얘는 타우예요.”

베네딕트는 눈앞의 아이들이 탈주했던 꼬마 마법사라는 사실을 인지했다. 베네딕트의 목소리가 다시금 아이들의 머릿속에 울려 퍼졌다.

‘끼어들 자리가 아니었단 건 알고 있었을 텐데.’

“하지만 그대로라면 대마법사님이 위험하셨는걸요.”

로즈의 말이 아주 거짓은 아니었다. 최근 그는 스스로 힘의 절제를 하지 못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그대로 계속 마법을 시전했다면 호아킴의 군대는 전멸했을지 모르나 그의 숨통 역시도 완전히 끊어졌을지 모를 일이었다.

“대마법사님. 저기… 한 가지만 물어봐도 될까요?”

“로즈, 모르는 사람에게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라고 세드릭이 그랬잖아. 우린 그만 가자.”

타우가 팔을 세게 잡아당겼지만 로즈는 아랑곳하지 않고 순진한 눈동자로 베네딕트를 바라보았다.

“대마법사님은 저희 사비오족을 버리신 건가요…?”

단순하고 직관적인 질문은 베네딕트의 속을 날카롭게 파고들었다. 이래서 그는 어린애들이 딱 질색이었다.

‘이미 오래전에 그리하였다.’

“이 나쁜 새끼!!!”

타우가 오만상을 찌푸린 채 양 주먹을 꽉 쥐며 소리를 쳤다.

“타우! 대마법사님께 그런 말을 하면 안 돼!”

“대마법사 좋아하네! 아무것도 하지 않는 허수아비 교황이 무슨 대마법사야!”

베네딕트는 눈동자만 남은 눈으로 씩씩거리는 소년을 응시했다. 이마에 선명히 찍힌 숫자. 교황청에는 이와 비슷한 이들이 무수히 많이 갇혀서 지금도 희생되고 있을 터였다.

‘우리 일족에게는 희망이 없다고 여겼었는데, 내가 모시는 폐하께서는 생각이 달랐다.’

로즈의 눈동자가 초롱초롱 빛났다.

“아! 그 언니를 말씀하시는 거죠? 대마법사님의 마력이 온몸에 흐르고 있던 그 언니요!”

‘황제 폐하가 될 분이시다.’

소녀가 신이 나서 말을 이었다.

“네! 폐하가 저희를 안전한 곳으로 숨겨 줬어요. 폐하의 말이 맞았어요. 그곳에서는 아무도 우리에게 힘을 써 보라고 협박하지 않았어요. 맛있는 걸 먹고 실컷 뛰어놀 수 있었어요. 일을 도와주면 어른들은 우리를 칭찬해 주었어요! 있잖아요, 우리는 칭찬 들은 거 처음이었어요. 타우는 그날 밤 자기 전에 베개에 코를 박고 울었어요.”

“야!”

“맞잖아.”

타우가 귀까지 빨갛게 물들이며 버럭했지만 로즈는 헤헤 웃을 뿐이었다.

“그런데 너희들은 어째서 여기에 있는 거지?”

베네딕트가 성대를 회복시킨 후, 녹아내린 입술을 열었다.

“돕고 싶어서요!”

“누구를.”

“폐하를요!”

타우가 쭈뼛거리며 설명을 더했다.

“세드릭의 생각을 엿보았는데 아무래도 급한 상황인 것 같아서….”

“세드릭은 위험하니까 저희더러 꼼짝 말고 세르노티에 남아 있으라고 했는데요, 나쁜 짓이란 거 아는데…. 저희도 돕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서…. 그래서 몰래 따라왔어요.”

“그런데 왜 황금성이 아니라 거기 있었던 거지?”

이번에는 로즈의 얼굴이 빨개졌다.

“중간에… 길을 잃어서 헤매고 있는 중이었어요. 엄청 큰 모래 돌풍이 보여서 가 보니까 대마법사님이 계셨고요.”

베네딕트의 입술이 작은 한숨을 토해 냈다. 일단 현재로서는 안전한 곳에서 시간을 보내며 바닥난 마력을 회복시키는 것이 급선무였다. 혹이 두 개나 붙는 건 예상치 못한 일이었지만, 의외로 도움이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너희들의 주된 마력이 무엇인지 말해다오.”

로즈가 기다렸다는 듯 차렷 자세를 한 채 군기가 바짝 든 목소리를 냈다.

“공간 이동입니다!”

“정신 조작… 입니다.”

둘 다 열 살 남짓한 어린아이들이 시행하기에는 상당한 수준의 기술을 필요로 하는 고급 마력이다. 소녀의 힘은 이미 확인했다. 대마법사와 함께 공간 이동이 가능했다는 것 자체가 대단한 일이었다. 베네딕트가 타우를 보며 시험하듯 물었다.

“내 생각을 엿보는 것도 가능한가?”

“…….”

역시, 거기까지는 불가능한 모양이라고 생각하는 와중 타우가 그를 노려보며 말을 뱉었다.

“이 사람, 우리를 혹이라고 생각하고 있어. 진짜 재수 없는 인간이야.”

“타우….”

로즈는 동동거렸지만 베네딕트는 흐리게 미소를 지었다. 소년은 그의 생각을 읽는 데 성공한 것이다.

“이씨….”

타우의 까만 눈동자가 번쩍거리며 빛을 냈다. 희미한 힘이 베네딕트의 머릿속을 뚫고 들어와 과거 기억을 쿡쿡 찔러 대며 자극했다. 아직 마력이 완성되려면 멀었지만 타고나길 좋은 힘이다. 올바른 훈련을 받고 자란다면 강한 마법사가 될 게 틀림없는 재질이었다.

베네딕트가 아이의 마력을 가볍게 돌려보내자 타우가 까만 눈을 멍하게 깜빡거렸다. 보이지 않는 벽에 강하게 부딪혀 튕겨 나오는 느낌은 강렬한 충격이었다. 몸이 공중에 붕 뜨는 느낌, 뒤이어 깃털처럼 폭신한 무언가에 몸이 천천히 내려앉는 기분이 들었다.

대체… 얼마나 수련하면 이런 힘을 가질 수 있는 걸까. 타우의 입이 헤벌쭉 벌어졌다.

“여기서 나와 지내는 동안, 공부를 좀 하면 지금보다 훨씬 나아질 수 있다.”

베네딕트가 그의 마음을 읽은 듯 내뱉었다.

“공부는 좀….”

“제일 싫어. 공부.”

로즈와 타우가 히익, 하는 표정으로 동시에 내뱉는 말을 들으며 베네딕트가 물빛 눈동자를 가늘게 떴다.

“너희들이 사비오족의 희망이 되고 싶은 생각이 없느냐?”

“…하지만 우리는 약한걸요. 대마법사님이 가장 강하시잖아요…!”

“나를 뛰어넘는 마법사가 나오지 않는다면 사비오족의 희망은 없는 거나 마찬가지겠지. 폐하께서도 그걸 바라진 않을 거다.”

에데르트를 떠올리자 베네딕트의 표정이 본인도 모르게 부드럽게 풀어졌다. 황족에게 이용만 당하는 마법사들의 삶을 진심으로 안타깝게 생각했던 사랑스러운 그의 여자.

그가 천천히 눈을 깜빡이자 그의 몸에서 빛이 발하기 시작했다. 쿵. 쿵. 일정한 속도로 뛰던 심장 박동이 빨라지며 다 타 버린 머리카락을 밀어내고 새로운 머리카락을 길게 늘어뜨렸다.

“이곳은 좀 어둡구나.”

베네딕트가 훅, 하고 입김을 불자 캄캄한 동굴 속에서 반딧불이가 빛을 찾아 모여들었다. 거꾸로 매달려 있던 시커먼 박쥐들이 꼬마 아이들을 공격할 기세로 몰려들었다.

“으아악! 박쥐 싫어!!! 으아, 저리 가!!!

“엄마아!!!”

베네딕트의 휘파람 소리에 박쥐 떼는 방향을 바꾸어 캄캄한 동굴 바깥으로 일제히 날아갔다.

“여… 열심히 하겠습니다. 스… 스승님!”

얼빠진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던 타우가 갑자기 태도를 바꾸며 무릎을 꿇었다. 타우는 날아다니는 동물이 세상에서 제일 무서웠다. 동물의 정신을 파고드는 데도 번번이 실패했으므로 더욱 그랬다.

“일어나거라. 그런 식으로는 아무것도 배우지 못해. 스스로의 감정에 집중하는 것이 마력 향상의 기본이다.”

눈을 동그랗게 뜬 채 그의 행동을 하나도 빠짐없이 경청하던 로즈가 얼른 일어나 타우와 양손을 마주 댔다. 정신이 산만하던 타우가 눈을 스르륵 감았다. 베네딕트는 집중하기 시작한 아이들을 부드러운 눈길로 바라보며 동굴 벽에 몸을 기댄 채 저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

***

반투명한 휘장이 드리운 황제의 침대에서 들리는 숨소리는 고요했다. 벽난로가 빛을 내며 타올랐고 따뜻한 와중에도 습도는 알맞게 조절되어 있었다.

“기절한 원인이 무엇인가.”

알 수 없는 이유로 최근 스승을 잃은 의사가 긴장을 삼키며 입을 열었다.

“피로감이 극에 달한 것으로 보입니다.”

“내가 그녀를 피로하게 만들었단 뜻인가?”

황제의 목소리는 차분했지만 날카로움은 숨길 수가 없었다. 정신을 잃고 쓰러진 황녀를 품에 안고 있던 그의 얼굴을 떠올리며 의사는 다시 한번 신중함을 더해 답했다. 셔츠를 엉망으로 풀어 헤친 채로 숨을 몰아쉬던 그는 완전히 광인의 표정을 하고 있었다.

“그녀에게 무슨 일이 생긴다면 네 가문의 삼대를 멸하리라.”

황제에게 틀어 잡혔던 멱살이 아직까지 숨통을 죄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회임한 상태에서는 여러모로 조심을 해야 하는 게 사실이기 때문입니다.”

“나는 그녀를 고문하지 않았어. 육체적인 고통을 주지 않았다는 뜻이야.”

피로감은 오직 육체적인 것만을 뜻하는 것은 아니었다. 정신적인 피로 역시 무시할 수 없었으니까. 황궁 안에는 이미 그녀가 반역죄로 잡혀 들어간 소식이 퍼져 있었다. 이 상황에서 황녀의 심신이 얼마나 피폐할지는 충분히 짐작이 가능했지만 그 말을 입에 담을 용기까지는 그녀에게 없었다.

“직전까지 짐과 관계를 하다 갑자기 정신을 잃은 이유가 무엇이냐 물었다. 이전에는 아무리 격렬하게 했어도 쓰러진 적은 없었거늘.”

의사는 숨을 잠시 멈추었다 가까스로 내뱉었다. 지금 자신이 들은 말이 사실인가…? 피를 나눈 누이이자 반역자와 정을 통하였다고 말하는 황제의 얼굴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아, 아뢰옵기 송구하오나 임신 초기의 격렬한 관계는 몸에 무리가 갈 수 있습니다.”

놀람과 당황함을 애써 감추며 의사가 말을 더듬었다.

“태아에게? 아니면 그녀에게.”

황제가 태연하게 말을 이었다.

“아이는 다시 임신하면 돼. 내겐 내 아이보다 내 누이의 건강이 더 중요하네.”

의사의 얼굴이 점점 더 회색빛을 띠었다. 황제는 지금, 황녀의 복중에 있는 태아가 자신의 씨라고 말하고 있었다. 근친은 클라웨 황실이 공표한 죄악 중 하나였음에도.

“질문이 어려웠나?”

크리스티앙이 빈 담뱃대를 손으로 까딱이며 조용히 입을 열었다. 의사는 서둘러 고개를 조아리며 답했다.

“복중의 태아께서는 다행히도 매우 건강합니다. 그 기운이 강건하여 산모가 피로감을 가중해서 느낄 가능성이 있습니다. 특히나 격렬한… 운동은 지금처럼 힘을 한꺼번에 소모할 수가 있기 때문에 피하시는 게 좋습니다.”

“아예 섹스를 하지 말라는 뜻인가? 그건 불가능해. 난 성욕이 강한 사람이다.”

아무렴. 오죽 강했으면 제 이복누이를 임신시키는 짐승 같은 일을 벌인단 말인가. 계산을 따져 봤을 때 황제는 그녀가 황금성에 온 직후부터 관계를 가졌던 게 틀림없다. 여의사는 불경의 말이 턱끝까지 차오르는 것을 생존 본능으로 간신히 눌러 내렸다.

“하, 하셔도 무방합니다. 다만 자궁에 무리가 갈 수 있는 체위, 혹은 격렬한 충격이 계속 이어지는 긴 관계는….”

표현을 아무리 다듬고 다듬어도 어려운 건 당연했다. 곤란한 표정으로 최대한 돌려 말하는 의사를 보고 있던 크리스티앙이 시선을 돌렸다.

“알아들었으니 나가 봐.”

황제의 명이 떨어지자마자 의사가 기다렸다는 듯 자리를 물렸다.

휙.

크리스티앙은 침실에 드리운 휘장을 걷어낸 후, 이불을 덮은 채 잠들어 있는 그녀를 바라보았다. 제 침대 안에 얌전히 누워 있는 그녀를 보는 것은 만족스러웠다. 다만 눈을 감고 있는 것보다 뜨고 있는 게 더 맘에 들 거라는 생각이 들 뿐.

“빨리 정신 차리는 게 좋을 거야.”

그가 낮게 중얼거렸다. 누워 있는 그녀는 여전히 미동 없이 고른 숨소리만 내뱉을 뿐이었다. 크리스티앙이 천천히 그녀에게 얼굴을 가져갔다. 숨결이 닿을락 말락 한 거리에서 그가 잔인한 말투로 속삭였다.

“배 속에 있는 애새끼 죽여 버리기 전에.”

여린 속눈썹이 나비 날개처럼 조심스레 떨려 왔다. 크리스티앙의 눈이 욕망에 가늘어졌다. 그가 그녀에게 붉은 입술을 포개려 했을 때였다.

“폐하. 송구합니다.”

그의 뒤에서 소리도 없이 나타난 하이데거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그는 갑자기 복통을 호소한 황후를 살피러 다녀온 참이었다.

“황후의 건강은 좀 어떤가.”

“…폐하께서 염려할 상황은 전혀 아닙니다. 제가… 알아서 처리하겠습니다.”

“다행이군.”

크리스티앙은 건성으로 내뱉으며 마주 닿은 입술을 혀로 맛보듯 핥았다. 그녀가 언제까지 자는 척을 할 생각인지 궁금하기도 했기 때문이다.

“그것보다 폐하. 호아킴 장군이 지금 막 아메티스 초소를 지났다고 합니다.”

“…그래?”

“이제 입성까지 반나절입니다.”

크리스티앙의 눈이 말없이 빛났다.

“예, 그런데….”

하이데거가 누워 있는 황녀를 힐끗 보며 말을 주저하자 크리스티앙이 몸을 일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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