혜미는 그의 시선을 피하며 작게 내뱉었다.
“네가 날 싫어하고 경멸해도 할 말이… 흣…!”
뜨거운 손이 그녀의 머리칼을 헤집었다. 그보다 더 뜨거운 입술이 그녀를 뒤덮었다. 애달픈 혀가 입술 새를 비집고, 울음이 섞인 그녀의 혀를 달래듯, 장악하듯 격하게 빨았다.
지직.
가슴께에서 면직물이 찢어지는 소리가 공간을 갈랐다. 발터가 손을 부들부들 떨며 낮게 내뱉었다.
“…싫은 게 아닙니다. 싫지 않습니다. 절대로… 그런 게 아닙니다.”
보랏빛 눈동자에 안도감과 격정이 차례로 스치고 지나갔다.
“그럼 왜 안 돼…?”
발터는 그녀의 눈에 맺힌 눈물방울을 커다란 손으로 훔쳐 내며 속삭였다.
“자제할 수 없을까 두려워서.”
“난… 네가 참지 않는 편이 훨씬 좋은 걸.”
발터가 더운 숨을 터뜨리며 떨리는 그녀의 입술을 핥았다. 동시에 그녀의 몸에 간신히 달려 있는 옷가지를 완전히 벗겨 냈다.
“하아…!”
벗겼다기보다 찢었다고 하는 편이 맞았다. 가느다랗게 뜨인 암갈색 눈동자는 그녀를 원하는 욕망으로 가득 차 있었다. 발터가 간신히 입술을 떼고 억눌린 목소리를 뱉었다.
“…죄송합니다.”
“사과하지 마. 넌 그럴 필요 없어.”
혜미가 그의 목덜미를 붙잡고 매달리자 발터가 그녀를 번쩍 들어 안고 걸었다. 순식간에 가까워진 침상에 그녀의 등이 닿았다. 발터는 무릎 사이에 그녀를 가둔 채 양손을 교차하여 제 상의를 단박에 벗어 던졌다. 빼곡한 상처와 근육으로 가득한 남자의 상박이 그녀의 가슴을 무게감 있게 밀어붙였다. 피부에 직접 닿는 그의 체온은 불처럼 뜨거웠다.
“지금이라도 제 뺨을 치신다면 그만 두겠습니다.”
“아니. 싫어. 그런 일은 없을 거야.”
“하아….”
발터가 거친 숨을 몰아쉬며 이글거리는 눈동자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커다란 손으로 그녀의 뺨을 감싸 쥐는 손길은 절대 약하지 않았으며 소유욕이 뚝뚝 흘러 넘쳤다. 순간, 혜미는 발터가 기억을 되찾은 게 아닐까 착각이 들 정도였다. 그가 그녀의 목에 얼굴을 파묻었다.
“미칠 것 같습니다….”
울혈이 남은 목덜미를 혀로 길게 핥으며 발터가 정신 나간 사람처럼 중얼거렸다. 마치 그녀의 몸에 남은 흔적을 없애려는 것 같은 집요한 움직임. 뜨거운 돌기가 그녀의 피부를 핥을 때마다 혜미의 몸이 달아올랐다. 그와 처음 하는 것처럼 가슴이 미치도록 격하게 뛰었다.
“…발터…. 하읏…!”
발터가 그녀의 입술을 뜨겁게 훔치고 떨어지며 손으로 그녀의 갈빗대와 복부를 쓸었다. 커다랗고 투박한 손이 만지는 모든 부분이 기분 좋았다. 뜨겁게 녹인 초콜릿 같은 눈빛으로 그녀를 살피는 시선마저도 그녀를 달아오르게 만들었다.
“아프게 하고 싶지 않습니다.”
발터가 혀로 그녀의 귓가를 뜨겁게 핥으며 꽉 잠긴 목소리로 속삭였다. 살과 혀가 부딪혀 찔꺽대는 소리가 생생하게 들리자 아랫배에 쾌감이 단단히 뭉쳤다. 허벅지에 닿는 그의 성기는 완전히 발기한 상태였다. 그럼에도 자신을 염려하며 스스로의 흥분을 억누르고 있는 남자를 보자 혜미의 흥분은 배가 되었다. 그녀의 다리 사이는 이미 축축하게 젖어 든 지 오래였다.
“만져 줘.”
혜미가 작게 속삭였다. 그녀의 슈미즈와 속옷 위에서 망설이고 있던 투박한 손이 단박에 옷을 벗겨 내 던졌다. 다리 사이로 거칠거칠한 발터의 손이 미끄러지며 내려왔다. 흠뻑 젖은 비부에서 흘러나온 애액이 그의 굵직굵직한 손끝에 달라붙으며 휘감았다. 아몬드처럼 길게 빠진 발터의 눈가가 시뻘겋게 달아오른 것은 자동적인 반응이었다.
“폐하….”
바지 앞섶에서 커다란 페니스가 흉흉히 발기해 흉측하게 옷이 들렸다. 발터의 커다란 손에 문질러지는 음핵에서 쾌감이 튀었다.
“넣어 줘…. 넣어 줘, 발터….”
혜미는 열 오른 얼굴로 그의 목덜미에 팔을 감고 매달리며 삽입을 재촉했다. 애무는 그의 눈빛만으로 충분하고도 남았다. 그리고 발터는 그녀의 명령에 기꺼이 따랐다.
그가 허리를 한 팔로 가볍게 안아 들자 그녀의 몸이 침상에서 조금 들렸다. 벌어진 다리 사이에 발터의 두꺼운 페니스가 닿는 순간 혜미가 조금 몸을 떨었다. 발터는 죄악감을 억누르고 그녀의 좁은 내벽을 제 것으로 깊숙하게 비집었다.
“아…!”
혜미는 벅찬 충족감을 느끼며 그를 뜨겁게 안았다. 커다란 남성이 그녀의 속살을 한계까지 벌리며 안에서 강하게 맥동하고 있었다. 오래간만에 느껴지는 흐릿한 아픔까지도 눈물 날 만큼 기분이 좋았다.
“죄송합니다.”
“사과할 필요 없다고 했…. 흐응…. 아아….”
발터가 그녀의 입술을 다시 삼켰으므로 혜미의 신음은 그의 입 안으로 먹혀들었다. 그는 그녀의 울긋불긋한 피부를 샅샅이 어루만지며 허릿짓을 시작했다. 살갗이 부딪히는 강렬한 소리는 처음부터였다. 그녀의 몸속으로 완전히 자취를 감추었다가 빠져나오는 성기가 순식간에 미끄러워지며 번들거렸다.
“으응…! 응…!”
그의 무게에 눌리며 박힐 때마다 혜미의 입술에서 높아진 신음이 터졌다. 뜨겁게 그녀를 안는 발터의 격한 움직임에 온몸이 반응했다. 기억을 잃은 발터는 예전과 똑같이 달궈진 바위처럼 강하고 뜨거웠다. 젖은 소리와 함께 입술을 떼어 낸 발터가 그녀의 눈가에 맺힌 눈물을 보며 숨을 몰아쉬었다.
“…스스로가 짐승같이 느껴집니다.”
“너같이 다정한 짐승은 없어, 발터.”
“제가 밤마다 무슨 생각을 했는지 안다면, 그리고 지금 이 순간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안다면 그런 말씀을 하시지는 못합니다.”
“무슨… 생각을 하는데…?”
발터는 대답 대신 짙게 물든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그녀의 몸을 으스러뜨릴 듯 강하게 안았다.
“용서하십시오.”
허스키한 신음과도 같은 짤막한 통보와 함께 그의 몸짓이 더욱 격렬하게 바뀌었다.
춥, 춥.
빗장뼈와 쇄골에 키스하며 그가 허리를 강하게 추어 댔다. 발터의 거친 손바닥이 다정히 문지르며 애무하는 옆구리와 엉덩이가 불을 지른 듯 뜨거워졌다. 뿌리 끝까지 거침없이 치고 들어오는 발터의 성기는 여전히 벅찰 정도로 크고 강했다.
혜미는 허벅지를 더욱 활짝 벌리며 그를 휘감았다. 할 수만 있다면 온몸을 다 열어서라도 그녀의 진심을 보여 주고 싶었다. 부드러운 침상이 거칠게 출렁이며 나무 다리에서는 삐걱거리는 울음을 토해 냈다.
“너무… 좋아서… 견딜 수가 없습니다….”
커다란 덩치를 옹송그리듯 숙이고 그녀를 박는 발터가 일그러진 얼굴로 중얼거렸다. 혜미는 단단한 근육으로 빈틈없이 짜인 그의 등을 더듬으며 연신 헐떡였다.
“나도…. 나도… 발터…. 흣…. 아아…!”
오르가슴이 예고 없이 그녀의 몸을 휩쓸었다. 발터는 덜덜 떨리는 그녀의 몸을 반으로 접을 듯 끌어안고서 흥건한 비부를 멈추지 않고 몰아치듯 두드렸다. 자세를 바꿀 여유도, 그럴 이유도 없었다. 절정은 끊임없이 이어졌다.
“이 시간이 영원했으면… 좋겠습니다.”
얼굴을 마주한 발터의 입술에서 뜨거운 진심이 흘러나왔다. 그는 대답 대신 자신을 꽉 조이는 그녀의 내벽을 쉼 없이 달구었다. 그녀와 하나가 된 지금 이 순간을 믿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더더욱 행위를 멈출 수가 없다. 그는 너무 좋아서 두려울 지경이었다.
그는 확신할 수 있었다. 자신은 황녀를 사랑하고 있다. 목숨을 바쳐도 아깝지 않은 이유는 바로 그 때문인 것이다. 그녀를 보면 심장이 찢어지게 아픈 이유 역시도 마찬가지겠지.
“…미안…. 미안해…. 발터….”
발터를 바라보는 그녀의 눈에 또다시 눈물이 고였다. 발터가 고개를 저으며 그녀의 얼굴을 커다란 양손에 가두었다.
“폐하께서야말로… 제게 사과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토록 아픈 것이 사랑이라면 그는 기꺼이 아픔을 감내할 각오가 되어 있었다. 고통보다 더 큰 환희를 경험해 버린 이상 되돌아갈 수가 없는 것이다. 그가 잃어버린 기억은 바로 이 ‘감정’임이 틀림없다.
“사랑합니다.”
혜미는 그녀에게 중얼거리듯 내뱉는 발터를 보며 울었다. 뜨겁게 휘몰아치는 아랫도리에서도 울음소리와 비슷한 소리가 났다. 서로를 완전히 기억하는 몸뚱이가 땀에 젖어 마찰할 때마다 흥분이 절절 끓어 넘쳤다.
“제가 감히… 폐하를… 사랑합니다….”
발터의 입술에서 연신 뜨거운 고백이 흘러나왔다. 그 스스로도 놀랄 만큼 자연스러운 말이었다. 나는, 무슨 이유 때문에 이 감정을 잊었을까. 어떻게 그게 가능했을까. 발터는 서럽게 우는 그녀의 귓가에 파고들며 맹세했다.
“아무것도 바라지 않습니다. 영원히 그림자로 살며 홀로 폐하를 사랑하겠습니다.”
“…흐윽… 흐으….”
그녀를 울리고 싶지 않았는데 울려 버린 것은 그가 미숙하기 때문임이 틀림없다. 발터는 그녀를 위해 조금 더 강한 남자가 되고 싶다고 생각했다. 사랑하는 이를 지키기 위해서는 그가 더욱 강해지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었으니까.
그의 머릿속에서 무언가가 툭, 끊어지며 해방감이 들었지만 발터는 그게 무엇 때문인지 정확히 알 수 없었다.
“제 모든 걸 폐하께 바칩니다.”
그녀가 어디에서 무엇을 하든, 그는 그녀의 것이 되겠다는 맹세.
발터는 자신이 똑같은 맹세를 다시 한번 반복하고 있다는 사실 역시도 깨닫지 못했다. 그저 크게 울며 자신에게 매달리는 그녀에게 뜨겁게 키스할 뿐이었다.
***
북쪽에서 차가운 바람이 불자 긴 은발이 휘날렸다. 평원에 외로이 서 있는 황량한 나무 한 그루에 등을 기대고 서 있던 베네딕트가 문득 미간을 찌푸렸다.
그가 금술이 수가 놓인 새하얀 옷깃 안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순식간에 피부가 갈라지고 그 안으로 마디가 긴 손가락이 사라졌다.
자그마한 보석에서 빠른 속도로 피가 말라붙었다. 그러자 불규칙하게 깜빡거리며 빛을 발하는 마법사의 돌이 보였다. 그 안에서 엄청나게 동요하고 있는 감정의 파장이 느껴졌다.
기쁨. 떨림. 조바심. 행복. 안정감. 에데르트가 그녀의 호위 기사에게만 느끼는 혼합적인 감정이었다.
색이 옅은 입술이 열리며 차가운 밤공기에 흐릿한 입김이 길게 뿜어져 나왔다.
가능하지 않을 텐데.
그는 그녀와 관련한 발터의 기억을 마력으로 완전히 삭제했다. 황금성에 온 이후, 빠른 속도로 기억을 되찾는 그녀에게도 세르노티에서의 기억만은 떠올릴 수 없도록 마법을 걸었다. 그가 실수할 리가 없었으니 생각할 수 있는 것은 단 하나.
‘그와 다시 사랑에 빠지기라도 한 겁니까?’
그의 질문이 신호라도 된 듯 보석이 빛을 딱 멈추었다. 최근 에데르트는 자주 이런 짓을 벌였다. 그 탓에 그녀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할 수 없는 것은 썩 마음에 들지 않는 일이었다.
각인한 상대가 대마법사의 마력을 일방적으로 차단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는 드물게 당황했을 정도다.
“저는 폐하를 위해 홀로 이곳에 와 있는데, 폐하께서는 이런 제가 불쌍하지도 않으신가 보군요.”
일부러 다 들리게 중얼거려 보았지만 변화는 없었다. 보석은 여전히 시꺼멓게 죽은 척을 하고 있었다. 그의 피로 만들어 낸 물건이거늘 제 뜻대로 되지 않는 것이 우습기도 하고 조금 놀랍기도 했다.
핑그르르.
베네딕트가 손톱으로 보석을 튕기듯 위로 날렸다 다시 잡았다. 손가락 새로 빠져나가려는 걸 겨우 움켜쥐자 마력이 새어나가 바싹 마른 나뭇가지에 때 이른 새싹이 한꺼번에 움트며 돋아났다.
‘이런.’
최근 이렇듯 의도치 않게 절제력을 잃는 일이 종종 일어났다. 베네딕트는 그 이유를 스스로 가장 잘 알았다.
“왜 이렇게 말을 안 듣습니까.”
그가 붉은 보석을 눈앞에 띄운 후, 부드러운 목소리로 내뱉었다.
“자꾸 반칙하게 만들지 마십시오.”
나뭇잎이 가지에서 저절로 떨어져 마치 징검다리처럼 공중에 지그재그로 놓였다. 그 위를 통, 통, 움직이는 보석은 마치 그의 말은 아랑곳하지 않고 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베네딕트의 매끈한 얼굴에 저도 모르게 피식 실소가 걸렸다.
휘이잉.
북쪽에서 모래바람이 일었다. 베네딕트는 보석을 다시 손에 움켜쥐고 제 자리에 처박은 후, 몸을 일으켰다. 밤낮을 가리지 않고 행군을 이어 가는 호아킴의 군대. 희미하게 피어오르는 모래바람은 그의 예상대로 수가 엄청났다.
바람에 날리는 은빛 머리카락 사이에서 그의 눈동자가 시퍼렇게 빛을 내기 시작했다.
***
시종장이 어쩔 줄을 몰라 안절부절못하는 표정을 지었다. 닫힌 황녀의 침실의 문틈 사이로 흘러나오는 목소리 때문이었다.
“누군가 바깥에 있습니다, 폐하.”
“상관없어.”
안에서 들려오는 것은 단지 말소리뿐만이 아니었다. 거칠게 살이 부딪치며 마찰하는 소리와 마치 짐승이 씩씩거리는 것 같이 거친 호흡 소리. 지금 침실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는 명백했다.
“폐하….”
애가 닳는 목소리의 주인공이 황녀의 곁을 그림자처럼 지키는 호위 기사라는 사실을 모르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황녀는 연인을 떠나보낸 지 얼마 되지 않은 상황이었고, 슬픔에 빠져 있는 그녀를 호위 기사가 위로한다 한들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황족의 성생활은 일개 시종들이 관여할 문제가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이처럼 황제가 불시에 찾아온 상황일 때는 다른 이야기였다.
검은 천에 감싼 그림을 든 시종장의 곁에서 침묵하던 황제가 조용히 눈을 깜빡이며 마침내 입을 열었다.
“누이가 주무실 시간이라는 걸 간과했군,”
황제의 급작스러운 방문은 그 누구도 예상치 못한 것이었다. 문 앞을 지키고 서 있던 근위병의 얼굴까지 시뻘겋게 달아올랐으나 황제는 초연했다. 이때까지만 해도 크리스티앙은 돌아가려 했었다. 재킷 자락이 거친 바람을 일으킬 정도로 빠르게 몸을 돌린 순간이었다.
“발터. 제발.”
문 너머에서 황녀의 달뜬 목소리가 들려왔다. 황제의 걸음이 멈추고 금빛 눈썹이 꿈틀거리며 미간에 모였다. 뒤이어 춥, 춥, 하고 들리는 미세한 젖은 소음. 그리고 황녀가 어린 새처럼 작게 신음하는 소리가 이어졌다.
“이제 안아 줘.”
“힘들지 않으시겠습니까?”
침대가 삐걱, 울더니 호위 기사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속삭였다.
“아니. 좋아. 너무 좋아, 네가 좋아. 발터…. 아아…!”
황녀의 밭은 호흡 소리가 그의 뒤통수를 잡아채는 기분이었다. 크리스티앙의 하얀 치아가 피처럼 붉은 입술을 꽉 물었다.
침실 안에서 일어나고 있는 정사의 현장이 그의 눈앞에 그린 듯 생생했다. 호위 기사에게 개처럼 아래를 빨린 게 분명한 그녀가 애원하듯 매달리는 목소리, 그리고 뒤이어 이어지는 뜨겁고 격렬한 마찰음. 그것은 한 사람만 움직여서 날 수 있는 소리가 아니었다.
자신과 할 때와는 비교할 수 없이 뜨겁게 정사하는 그녀를 문 하나 사이에 두고, 크리스티앙이 숨을 몰아쉬었다.
“문 열어.”
황제의 명령에 시종장과 근위병의 얼굴이 삽시간에 굳었다.
“…폐하…?”
크리스티앙은 당장이라도 그녀의 침실로 들어가 황녀의 몸 아래에서 그녀를 치받고 있는 개의 목을 따고 싶은 충동에 머리가 폭발할 것만 같았다.
“당장 문 열라고, 씨발…!!!”
문이 활짝 열리는 순간보다 발터의 움직임이 더 빨랐다. 나체의 그녀를 이불로 덮고 그 위에 엎드린 채, 그가 마치 사나운 맹수처럼 고개를 뒤로 돌렸다.
“뭡니까.”
공격성을 다분히 내포한 말투로 숨을 몰아쉬는 호위 기사, 그리고 그의 아래에 깔려 경멸하는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황녀를 보자 크리스티앙의 얼굴이 더욱 차갑게 굳었다.
“오신다는 전갈을 받지 못했습니다만.”
“입 닥쳐.”
크리스티앙의 흰 피부가 완전히 핏기를 잃었다. 황금빛 눈동자가 활활 타올랐다. 나체를 그대로 드러낸 발터의 성기에서는 아직도 흥분의 부산물이 떨어지고 있었다.
크리스티앙은 미약을 통째로 들이부었어도 그녀의 입에서 안아 달라는 애원을 듣지 못했다. 상대의 이름을 애달플 정도로 반복해 부르며 어쩔 줄 몰라 하는 그녀의 얼굴을 떠올리는 순간, 미칠 듯한 분노와 함께 성욕이 치밀어 올랐다.
“당장 나가. 크리스티앙!!!”
둘 다 죽여 버린다.
“황녀 에데르트와 호위 기사 발터 세르노티를 지금 당장 반역죄로 체포하라.”
싸늘한 보랏빛 눈동자가 커다랗게 뜨였다. 그래. 네가 집중해야 할 사람은 바로 나잖아. 날 그렇게 바라봐야지. 피처럼 붉은 입술이 다시 또렷하게 움직였다.
“발터 세르노티는 즉결 사형. 황녀는 내가 직접 심문하겠다.”
혜미는 시트로 몸이 둘둘 말리다시피 한 채 크리스티앙의 처소 중 하나로 끌려왔다. 황궁 근위병에게 포위되어 감옥으로 호송된 발터는 마지막까지 그녀에게 안심하라는 사인을 보냈다. 감옥이 있는 곳은 교황청이었고 어차피 그는 그곳으로 침입할 예정이었기 때문이다.
크리스티앙이 뿌린 가장 큰 죄악의 씨앗이 자라나고 있는 어둠의 장소.
베네딕트마저 외면한 곳이었다.
“가장 좋은 방법은 그곳에 제가 갇히는 것입니다.”
“무슨 뜻이야?”
발터와 그녀가 밤새 나누었던 대화가 떠올랐다.
“현재 교황청은 허락된 이들 외에는 출입이 엄금이며 강력한 마법의 결계 때문에 일반인은 뚫고 들어가기조차 힘이 듭니다. 하지만 그들이 저를 가둘 빌미를 준다면 일이 쉬워질 수 있지 않겠습니까?”
“발터…!”
“변수가 생기지 않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하지만 폐하, 만에 하나 그럴 경우에는….”
혜미는 그가 말했던 변수가 정말로 일어났다는 사실에 좌절감과 당혹감을 동시에 느꼈다.
“무슨 증거로 갑자기 나한테 이러는 거야.”
크리스티앙이 부들부들 떠는 그녀를 향해 차갑게 입을 뗐다.
“황녀 에데르트 아이나 클라웨는 겨울제가 시작하는 날, 반란을 일으킬 계획이었지. 동생인 황제의 폭정을 바로잡는다는 미명하에 말이야.”
혜미의 눈동자가 얼어붙는 것은 어쩔 수 없는 반응이었다.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모르겠는데.”
“그래? 누이께서 시치미를 떼고 계시니, 상황을 좀 더 잘 아는 사람에게 설명을 대신하도록 할까?”
크리스티앙이 그녀의 서툰 거짓말에 조소로 답했다.
“들어오게.”
문이 열리고 그녀가 절대로 이곳에서 만나고 싶지 않았던 이가 나타났다.
“…리비에르.”
자신과 눈도 마주치지 않는 그녀를 보며 혜미는 모든 것을 직감했다. 리비에르는 자신의 손을 잡는 대신, 결국 크리스티앙을 택한 것이다.
“리비에르를 경계하십시오.”
“…어째서…?”
혜미는 머뭇거리며 입을 떼면서도 오히려 자신을 염려하던 발터를 떠올렸다.
“감이 좋지 않습니다. 그녀가 대공과 지나치게 친밀합니다.”
“하지만 지젤은 날 도와주기로 했잖아.”
“…가능성을 말씀드리는 것뿐입니다. 만약 나중에 무슨 일이 일어난다 해도 실망이나 자책은 마십시오. 그녀가 배신한다 해도 그건, 절대… 폐하의 잘못이 아니니까요.”
아닐 거라고 믿고 싶었고 아니기를 바랐지만 결과는 희망과 달랐다. 오래전 페터에 이어 벌써 두 번째로 일어난 배신. 믿었던 이에게 뒤통수를 맞고 상처받는 일은 반복해서 겪어도 면역이 생기지 않는다. 혜미는 크리스티앙을 향해 예를 취하는 리비에르를 황망한 눈동자로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경이 대공에게 전했던 말을 여기서 다시 한번 해 줄 수 있겠나?”
“물론입니다. 폐하.”
리비에르가 한쪽 무릎을 바닥에 꿇은 군신의 자세로 서슴없이 입을 열었다.
“황녀가 반란을 계획한 것은 오래전 일입니다. 자일룬성에서 이미 저를 회유하려 한 바 있었고, 최근까지도 저와 제 군대에 지속적인 접촉을 시도하였습니다. 이곳에 입성한 이유가 황위 찬탈이었다는 사실은 명백합니다. 대마법사와 손잡은 이유도 바로 그 때문일 테고요.”
혜미의 눈동자가 배신감으로 커다랗게 뜨였다. 리비에르가 말을 이었다.
“황녀는 겨울제를 알리는 황제의 축사가 끝난 직후 모든 이들이 다 보는 앞에서 황제를 암살하겠다고 하였습니다.”
“지젤!!!”
혜미는 사실과 거짓을 교묘하게 섞어 말하는 리비에르에게 커다랗게 포효해 보았지만 소용이 없었다.
“지금까지 제가 고한 일에는 한 치의 거짓도 없습니다.”
“잘 들었네. 대공과의 결혼 준비로 바쁠 텐데 이렇게 불러서 미안하군.”
“천만의 말씀입니다, 폐하.”
대공이 문을 열어 주었고 리비에르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문을 나서면서 리비에르는 혜미가 있는 쪽으로 잠깐 시선을 주는 듯했으나 이내 불편한 눈동자로 뒤를 돌았다.
혜미가 그녀와 눈을 마주칠 수 있는 방법은 아무것도 없었다. 혜미는 뒤로 묶인 팔목을 움직여 결박을 풀어내려 안간힘을 썼다.
“도망이 가능하다 생각할 만큼 멍청하지는 않을 거라 믿어.”
크리스티앙이 그녀의 앞으로 다가와 천천히 눈을 깜빡였다. 혜미의 손목을 결박한 끈에는 마력이 실려 있는 게 분명했다. 그녀가 풀어내려 하면 할수록 더욱 단단하게 묶이는 것이 그 증거였다.
“발터가 있는 곳으로 날 보내 줘.”
“누구?”
크리스티앙이 눈썹을 치켜올리며 여상한 말투로 되물었다. 혜미가 이를 꽉 깨문 후 소리를 쳤다.
“차라리 발터를 가둔 곳으로 날 보내라고!!!”
“이미 죽은 사람의 곁으로 보내 달라는 건, 죽여 달라는 뜻인가?”
황제가 차갑게 되묻자 혜미의 눈동자가 커다랗게 뜨이며 얼어붙었다. 순식간에 입 안이 말라붙고 심장이 바닥으로 추락했다.
‘거짓말.’
순간, 머릿속에서 누군가 작게 키득거리며 속삭였다. 혜미는 소리 없이 인상을 찌푸렸다. 쿵. 쿵. 그녀의 심장이 격하게 뛰었다. 베네딕트의 목소리는 아니었고 자신의 생각은 더더욱 아니었다.
“지금 뭐라고…?”
혜미의 입술에서 혼잣말 같은 물음이 흐르자 크리스티앙이 입술을 끌어 올렸다.
“이미 죽었다고. 반역을 조장한 황녀의 최측근이었으니 당연한 결과다.”
‘거짓말쟁이.’
머릿속에서 다시 한번 낯선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정신이 분열되고 있기라도 한 걸까. 혜미는 흩어지려는 이성을 붙잡으며 침착하려 죽을힘을 다했다.
발터가 정말 죽었을까? 아니. 그가 그리 쉽게 그녀의 곁을 떠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크리스티앙은 지금, 그녀의 반응을 시험하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정신 차려야 한다. 혜미는 속으로 몇 번이나 되뇌며 혀를 질끈 씹었다. 미쳐 버리기라도 하면 안 된다는 생각이 들자 턱에 더욱 꽉 힘이 들어갔다.
주르륵.
혜미의 입술을 타고 시뻘건 피가 흘러나오자 크리스티앙의 얼굴이 단박에 일그러졌다.
“씨발, 뭐 하는 짓이지?”
크리스티앙이 그녀의 양 볼을 우악스레 붙잡았다. 희고 붉은 손마디에 피가 몰려 더욱 붉어졌다. 깨문 혀에 아릿한 아픔이 느껴졌지만 그게 문제가 아니었다.
“발터가 죽었다면 나도 살 이유가 없어.”
“하.”
그녀의 얼굴을 움켜쥔 황제의 손에 힘이 더욱 강하게 가해졌다. 피가 나도록 깨문 혀보다 어금니에 짓눌리는 볼이 더 아팠다.
“진심인가?”
혜미는 흔들림 없는 시선으로 크리스티앙을 바라보았다. 입 밖으로 내뱉고 나니 더욱 확실해졌다. 그녀는 발터를 위해서라면 죽음이 두렵지 않았다.
“확인해 보면 되잖아. 내가 혀 깨물고 죽을 수 있는지 없는지.”
혜미가 일그러진 발음으로 내뱉는 순간, 크리스티앙은 그녀가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게 아니라는 것을 눈치챘다. 그는 턱 끝까지 치밀어 오르는 패배감을 애써 감추며 표정을 바로잡았다.
“대공.”
“예, 폐하.”
뒤에서 침묵을 지키고 있던 하이데거가 조용히 입을 뗐다.
“누이가 호위 기사의 죽음을 두 눈으로 보지 못한 걸 못내 아쉬워하는군.”
“이곳으로 그를 끌고 와 처형하기를 원하십니까? 죄인은 사형 집행만 기다리고 있는 중입니다.”
혜미는 소리 나지 않게 숨을 내쉬었다. 아직 발터는 죽지 않았다. 발터는 설사 온몸이 꽁꽁 묶여 있다고 한들 쉽게 죽을 이가 아니었다.
게다가 그는 지난밤, 그녀의 명령이 떨어지기 전까지는 절대 죽지 않겠다고 맹세했다. 믿고 있었고, 너무나 당연한 사실이었지만 안도감에 눈물이 어리는 것까지는 막을 수가 없었다.
“아니. 축제는 모든 사람들이 함께 즐겨야지. 겨울제가 시작되는 날, 모든 이들이 보는 앞에서 반역자를 참수하겠다.”
“옳은 판단이십니다.”
대공의 말은 빈말이 아니었다. 그는 아메티스의 기강을 위해서라도 한 번쯤은 모든 이들에게 주의를 주는 편이 낫다고 생각했다. 황녀의 등장으로 어수선해진 시국을 정리시키기 위해서는 두려움을 눈앞에 들이밀어 줄 필요가 있는 것이다. 눈앞에서 사람이 목이 잘리는 것을 지켜보는 것보다 더 큰 공포는 없을 테니까.
“…….”
혜미의 심장은 여전히 빠르게 쿵쿵 두방망이질을 치고 있었다. 그녀는 진정하려 애를 썼다. 발터의 약점은 단 하나. 그녀뿐이었다. 여기서 그녀가 무너진다면 모든 것이 엉망이 되고 만다.
“차라리 날 죽여.”
“하하하….”
크리스티앙이 발작적으로 소리 내어 웃었다.
“널 죽일 계획을 세운 건 발터가 아니라 나야. 그러니까 날 먼저 죽이라고.”
“고문할 필요도 없이 순순히 죄를 자백해 줘서 무척이나 고마워.”
웃음을 딱 멈춘 그가 온도가 뚝 떨어진 얼굴로 그녀를 쏘아보았다.
“죽음은 한순간이고 고통은 찰나이지. 내가 너에게 그리 쉬운 죽음을 선사할 거라 생각해?”
또렷한 목소리가 조금 격양되어 입 밖으로 속삭이듯 터져 나왔다.
“넌 아메티스의 시민들이 모두 보는 앞에서, 반역자의 목이 장대에 걸리는 모습을 지켜보게 될 거야.”
크리스티앙이 허리를 숙여 그녀에게 눈높이를 맞추었다.
“목은 하나가 아니라 여럿이겠지. 네가 이곳까지 끌고 들어온 쥐새끼들 역시 모조리 잡아넣었으니까.”
다른 기사들 역시 모두 잡혀갔다는 이야기를 듣는 순간 그녀의 눈빛이 흔들렸다. 크리스티앙은 그녀의 동요를 놓치지 않았다.
“부하들이 차례로 네 눈앞에서 다 죽는 걸 손 놓고 바라보는 느낌이 어떤지 알게 해 줄 테니 기대해.”
혜미는 피 묻은 입술을 꽉 다물었다. 크리스티앙의 협박은 그녀를 살 떨리도록 두렵게 만들었지만 동시에 절대로 실패해서는 안 된다는 의지를 불러일으켰다. 그녀는 그 누구도 희생시키지 않을 것이다.
나는 나 자신을 믿어.
적어도 나 스스로를 배반하는 일은 하지 않는다.
마음속으로 되뇌는 순간, 놀랍도록 정신이 차분해졌다. 그리고 이 상황에 대한 판단이 섰다. 베네딕트는 지금쯤 호아킴의 군대와 맞서고 있을 테고, 발터와 함께 감옥에 갇힌 기사들도 손 놓고 죽음만 기다릴 리는 없었다.
세드릭과 아일라는 황제의 폭정을 알리는데 선전하고 있고 하르트만의 가주 역시 지방 영주들의 힘을 모으고 있다고 들었다. 모두가 제 역할을 충실히 이행하고 있는 지금, 그녀가 할 일은 결전의 날까지 시간을 끄는 것이었다.
“리비에르는 대체 어떻게 회유한 거지?”
그녀가 화제를 돌리자 크리스티앙이 기다렸다는 듯 입을 열었다.
“황실에 충성하는 건 신하의 당연한 의무니까.”
“…….”
“이해를 못 하겠다는 얼굴이네?”
사실 그랬다. 혜미는 어째서 리비에르가 마지막에 자신을 배신했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녀라면 결국 자신의 손을 잡을 거라고 생각했었다. 그녀를 장기판의 말처럼 사용한 황제를 등질 거라고 믿었는데.
“그거 알아?”
크리스티앙이 혜미에게 얼굴을 바싹 가져다 댄 채, 속삭였다.
“이 세상에서 가장 강력한 믿음은 권력, 즉 힘에서 나온다는 걸.”
날카롭고 뾰족한 콧날이 그녀에게 닿을 듯 말 듯 가까웠다. 빽빽한 금빛 속눈썹. 그 안에 가늘어진 눈빛을 보자 기억하지 않으려 애썼던 욕탕에서의 일이 생생히 떠올랐다.
정신을 잃을 때까지 그녀를 탐하고 괴롭게 만들었던 크리스티앙. 천사같이 아름다운 얼굴이 쾌락에 젖어 들어가는 얼굴은 꿈에 나올 정도로 강렬했다. 아마 그의 눈에 비친 자신의 얼굴 역시 그러했겠지.
혜미는 속에서 뜨거운 것이 치밀어 올라 참을 수가 없었다. 그림 같은 그의 얼굴을 진심으로 물어뜯어 버리고 싶다.
“처음부터 가져 보지 않았다면 모를까, 권력의 맛을 단 한 번이라도 맛본 자는 절대 그걸 잊을 수가 없거든. 손에서 놓칠 수가 없어 오히려 두렵지. 그것을 잃어버릴까 봐, 누군가 그걸 빼앗아 버릴까 봐 불안해 밤잠을 이루지 못할 거야. 가지면 가질수록 더 가지고 싶어지는 게 인간의 욕망이거든. 그건 이 제국의 역사가 말해 주고 있다.”
잘 벼린 칼날같이 날카로운 크리스티앙의 말투가 그녀의 뇌리를 아프게 파고들었다.
“리비에르는 멍청한 이가 아니지. 그녀는 결론을 내렸던 것뿐. 너와 나 둘 중, 그녀에게 진정한 힘을 손에 쥐여 줄 수 있는 이가 누구인지 말이야.”
그리고 결과는 지금과 같았다. 혜미는 비릿한 피 맛이 나는 침을 삼킨 후, 크리스티앙을 향해 중얼거리듯 내뱉었다.
“…넌 리비에르를 언제든 내칠 수 있는 사람이잖아.”
리비에르는 말라쿤의 왕, 리가스를 죽이자마자 그녀를 북부로 내쫓으려 했던 크리스티앙을 잊었던 걸까. 아닐 것이다. 전언을 받았을 때 리비에르의 충격적인 표정은 아직도 혜미의 머릿속에 생생했다.
리비에르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크리스티앙에게 복종했다는 사실에 혜미는 다시 한번 뼈아픈 절망감을 느꼈다.
“그랬어. 실제로 그 직전까지 갔었지. 하지만 이젠 그럴 필요가 없어졌는걸? 내가 리비에르를 과대평가했다는 사실을 깨달았거든.”
크리스티앙의 얼굴에 비릿한 승리의 미소가 번졌다.
“대공. 자리를 좀 피해 주겠어?”
“예, 폐하.”
하이데거가 깍듯이 고개를 숙인 후, 조용히 물러났다. 황제가 그녀를 보며 고개를 모로 기울였다. 그 순간, 휙 하며 그녀의 몸을 가리고 있던 천이 바닥에 떨어졌다.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알몸이 드러나자 혜미의 목덜미가 수치심에 시뻘겋게 변했다.
“그녀를 어떻게 회유했냐고 물었나? 난 그저 그녀의 열등감을 티 안 나게 덮어 준 것뿐이었지.”
“…….”
“모두가 강하다 찬양하는 리비에르의 열등감이 뭔지, 난 매우 잘 알고 있었거든. 아무리 노력해도 절대 바꿀 수 없는 것. 이를 갈고 노력해도 변하지 않는 것.”
혜미는 마치 혼잣말하듯 내뱉는 그를 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그건 바로 출신이었다.”
크리스티앙의 목소리가 기묘하게 낮아지는 것은 그녀의 착각만이 아닐 것이다.
“그녀의 혈관 속에 흐르는 천한 피가 그녀의 발목을 잡은 거야.”
크리스티앙은 조소하듯 입술을 끌어 올리며 말을 이었다.
“대공을 배우자로 맞이한 이상, 그녀의 앞길은 안전하겠지. 리비에르의 후손은 공작가의 자식으로 대우받으며 살 것이다. 난 리비에르에게 그토록 간절하게 원하던 미래를 보장해 준 거야.”
한숨을 뱉어 내며 웃는 그의 입 안에서 뾰족한 치아가 드러났다. 혜미의 몸이 절로 떨려 온다.
“날 원해서 어쩔 줄을 모르겠다는 얼굴이군.”
기다란 손가락이 그녀의 이마 선을 따라 콧등으로 내려왔다. 입술에 닿는다면 물어뜯어 버리고 싶었지만 황제는 그녀의 속을 다 읽었다는 듯 짤막한 머리채를 꽉 잡아 쥘 뿐이었다.
“왜, 이제야 무릎 꿇을 마음이 생겨? 어디 한번 해 봐.”
“돌았구나.”
“아, 결박되어 있으니 그럴 수가 없겠군.”
크리스티앙이 양 허벅지가 벌어져 의자 다리에 칭칭 감겨 있는 그녀를 훑으며 붉은 혀로 제 입술을 핥았다. 혜미는 불안한 예감에 아래위로 부딪치기 시작한 이를 꽉 다물었다.
“이제 본격적으로 죄인을 벌할 시간인가?”
그의 목소리에 묻어나는 흥분을 모른 체할 수가 없다. 크리스티앙이 기다란 손으로 제 셔츠의 끈을 느리게 푸는 모습을 보며 혜미가 목소리를 높였다.
“그래, 마음껏 때려 봐! 난 신음 소리 하나 내지 않을 테니까, 마음껏 한 번 고문해 보라고…!”
깊어지는 눈빛, 느리게 움직이는 손짓에 담기기 시작한 흥분을 깨뜨리려는 간절한 노력이었지만 크리스티앙은 끄떡도 하지 않았다. 천천히 그녀에게로 고개 숙인 그가 차가워진 얼굴을 손에 꽉 쥔 채, 낮게 물었다.
“잠자리에서 맞는 게 취미야?”
벌어진 셔츠 사이로 그의 상박이 느리게 호흡하는 모습이 생생했다. 색이 짙은 유두와 목덜미가 부분부분 붉게 물드는 모습이 그의 흥분이 느리게 퍼져 가는 모습을 보여 주고 있었다.
“원한다면 그리해 주지. 격렬하게 하는 건 나도 싫어하지 않으니.”
셔츠를 떨어트린 그가 몸을 드러낸 채 황금빛 머리칼을 천천히 쓸었다. 흐트러진 머리칼 사이로 완전한 욕망을 드러낸 눈빛이 그녀를 핥았다.
“싫어하지 않는 정도가 아니라… 사실 좋아한다.”
“꺼져.”
크리스티앙의 금빛 눈썹이 사납게 움찔거렸다. 혜미는 그가 채찍을 들고 있다는 사실을 그제야 깨달았다. 기다란 술이 수십 개 달린 가죽 채찍은 하이데거가 휘두르던 채찍과는 모양 자체가 달랐다.
“말버릇부터 고쳐 볼까.”
찰싹. 채찍이 가볍게 그녀의 유실을 때리고 지나갔다.
“흣…!”
“가관이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