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3화 (63/72)

“괜찮다면 아까 하던 이야기나 마저 해 주시겠소? 화해의 뜻으로 내가 사이다 한 잔 사겠소.”

자리를 재빨리 뜨려고 했던 수염 반쪽의 사내는 등덜미가 붙잡혀 엉겁결에 자리에 도로 앉았다.

“사… 사이다…?”

“얼굴을 보니 술이 과한 것 같아서 하는 말입니다. 지나친 음주는 건강에 좋지 않죠. 특히나 겨울에 술을 많이 마시게 되면 체온이 올라간다는 착각을 불러일으킬 수 있기 때문에….”

낯선 남자의 설교를 들으며 멍한 표정으로 달콤한 애플 사이다를 마시던 사내가 조금 긴장이 풀린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런데 댁들은 여기 사람이 아닌지….”

“아내와 신혼여행 중이오.”

사내와 바 주인장의 얼굴이 동시에 붉어지며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아아, 우리가 어린 신부에게 실례가 아주 많았소!”

“어리지 않아요.”

세드릭을 바라보던 몽롱한 표정과는 달리 온도가 싹 바뀐 얼굴로 아일라가 입을 열었다.

“으응?”

“전 어리지 않다고요.”

세드릭은 카랑카랑하게 말을 떼는 아일라의 긴 머리카락을 손으로 한번 훑어 주었다.

“내가 나이가 많은 건 사실이잖니?”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손가락에 휘감는 손놀림은 얼핏 봐도 단순하지가 않았다. 아일라가 아무 말도 못 하고 뺨을 붉게 물들이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세드릭은 제 왼팔이 성한 것에 다시 한번 감사했다. 만약 양손이 다 잘렸다면 그녀와 함께할 때 누릴 수 있는 이 기쁨의 시간을 온전히 다 알지도 못한 채 죽었을 테니까.

“내 곁에 있어서 네가 더 어리게 보이는 모양이구나. 미안하다, 아일라.”

“저, 절대 아니에요! 세드릭 님이 미안해하실 것 없는….”

“응. 알았어.”

세드릭의 기다란 손가락이 슥, 하고 입술에 닿을 듯 말 듯 스치고 떨어졌다. 아일라의 얼굴은 이제 토마토 스튜처럼 새빨간 색이 되었다.

제 몫의 맥주를 꿀꺽꿀꺽 마시는 아일라를 보며 세드릭이 부드럽게 미소를 지었다. 평소라면 잔소리를 내뱉었을 그가 아무런 말도 하지 않는 이유는, 밤마다 부끄러워하는 아일라가 술을 조금 마시면 긴장이 약간 풀어진다는 사실을 최근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녀를 바라보는 회색 눈에서 애정이 뚝뚝 떨어졌다.

“저기… 신혼부부 사이에 방해는 이쯤 하고 나는 이만 가 보겠소만….”

“아뇨. 아메티스에 온 첫날이라 이곳 사람과 많이 대화하고 싶습니다. 내 아내에게 제대로 사과도 시킬 겸 말이오.”

세드릭은 자리를 뜰 기회만 찾는 사내를 다시금 눌러 앉혔다. 사내가 끄응, 소리를 내며 사이다를 들이켰다. 미안하다 사과했지만 아일라는 그를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그저 사랑에 빠진 얼굴로 세드릭만 하염없이 쳐다보고 있을 뿐이었다.

잘생기긴 했지만 눈을 못 뗄 정도는 아니지 않나…? 이럴 거면 그냥 객실로 당장 올라가서 신방을 차리는 게 어떻겠느냐는 소리가 목 끝까지 나왔지만 사내는 말을 겨우 삼킨 후,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무슨 이야기를 듣고 싶은 거요?”

“일단, 도시에서 없어지고 있다는 불쌍한 아이들 이야기를 좀 들어 보고 싶군요. 죽었다는 교황의 이야기와 황녀에 관한 이야기도요.”

세드릭은 이내 진지한 표정으로 사내의 말에 집중했다. 이제부터는 본격적으로 일을 시작할 차례다. 지키고 싶은 것이 분명히 생긴 지금, 그는 절대로 실패할 수가 없었다.

***

베네딕트의 장례는 최소한의 절차보다 못한 대우로 이뤄졌다. 마력을 완전히 소진해 피부는 녹아내리고 백골로 발견된 그의 유해는 교황청 뒤뜰에 무성의하게 묻혔다.

대마법사와 각인하지 않은 황제가 지배하는 제국. 황금성 안에서 계륵 같은 존재이던 그의 죽음을 드러내 놓고 추도하는 이가 없는 것은 당연했다. 혹자는 앓던 이가 빠진 것처럼 시원하다고 내뱉었다. 그러나 하이데거에게는 아니었다.

“폐하. 아무래도 그의 죽음에 미심쩍은 점이 많습니다.”

벽에 달린 거울 앞에 선 크리스티앙의 뒤에서 하이데거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화려한 모습의 황제는 재킷에 달린 다이아몬드 핀의 위치를 스스로 조정하는 중이었다. 해가 지기 시작한 오후, 커다란 창을 통해 비치는 하늘은 불을 질러 놓은 듯 노을이 붉었다.

“이미 사망한 지 수일이나 지난 자인데 이제 와서 그걸 따지는 의미가 있나?”

크리스티앙이 그를 보지도 않고 여상한 말투로 내뱉었다.

“하지만 폐하, 시체를 발견했을 당시….”

“자네의 보고는 확실히 기억하고 있네. 창문이 없어 밀실이던 그의 방에 창이 나 있었으며 시체는 뼈만 남아서 그 형체를 알아보기 힘들었다 말했지. 근위대에서 실종된 기사 1명의 행방이 묘연하다는 사실 역시, 똑똑히 들었고 말이야.”

크리스티앙 평생의 눈엣가시였던 베네딕트 블라이가 공식적으로 사망한 날. 황녀 에데르트와 ‘폴린의 뜰’에서 밤새도록 둘만의 시간을 보낸 황제는 기절한 누이를 손수 품에 안고 나와 이른 새벽 마차에 올랐다. 크리스티앙의 명령으로 시종을 다 물린 채 직접 말을 몰았던 하이데거의 마음이 복잡했던 것은 당연한 이야기였다.

그는 황녀를 침소로 보낸 직후에 황제에게 베네딕트의 죽음에 관한 사실을 모두 보고했다. 초점이 엉망으로 흐트러져 그의 말을 듣는 둥 마는 둥 하던 크리스티앙이 혹시나 그때 일을 잊었을까 염려했지만, 황제는 그의 예상과는 달리 모든 일을 똑바로 기억하고 있었다.

“폐하. 만일 그의 죽음이 꾸며진 것이라면… 위험할 수 있습니다. 대비책을 강구해야 합니다.”

젊은 황제는 태연했다. 붉은 노을이 반사된 기다란 눈동자가 거울을 통해 뒤에 선 하이데거를 보았다.

“클라웨에서 가장 강력한 마력을 지닌 이가 내 뒤를 지키고 있는데 무엇이 위험하다는 건가.”

크리스티앙이 그를 향해 붉은 입술을 비틀며 조금 웃었다.

“그래. 만에 하나 그의 죽음이 사실이 아니라고 하지. 자네가 직접 고문해 몸이 걸레짝이 된 마법사 하나 따위가 설사 꽁무니가 빠져라 도망을 쳤다고 치자고.”

하이데거가 심각한 얼굴로 마른침을 삼켰다.

“수만의 근위병과 내 손으로 만들어 낸 가장 강력한 마법사, 그리고 황제를 위해 영광스러운 목숨을 바칠 화살받이들이 교황청에 산처럼 쌓여 있는데… 대체 뭐가 문제인지 자네의 입으로 설명해 봐.”

하이데거는 대답할 수 없었다. 크리스티앙의 질문은 그의 자존심을 교묘하게 자극하고 있었다. 여기서 만일 그가 두려움을 보인다면 베네딕트가 자신보다 강하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꼴이 되어 버린다. 그가 말을 주저하자 크리스티앙이 날카롭게 눈을 빛냈다.

“대답하라, 하이데거. 이 제국의 황제는 무덤에 파묻힌 자 따위를 두려워해야 할 처지인가?”

“당치 않습니다. 폐하…!”

하이데거의 입에서 마침내 대답이 토해지듯 튀어나왔다. 황제와 그의 공통점을 감히 논한다면 그것은 자존심이었다.

제 어미를 죽인 후, 두려움에 몸이 덜덜 떨리는 걸 저지하지 못하면서도 그를 향해 고개를 빳빳이 치켜들던 어린 크리스티앙은 진정한 로열의 핏줄이었다. 찢어지게 가난한 공작 가문에 있었어도 품위만은 잃지 않으려 발버둥 쳤던 하이데거가 진심으로 섬길 수 있는 주군이란 뜻이다.

“어차피 죽은 사람이다. 이 세상에서 사라진 존재라고.”

크리스티앙이 뒤를 돌아 그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거울 속에 비치는 에리히의 얼굴이 긴장하며 굳었다.

“무슨 방법을 써도 좋아. 그러니 그가 무덤에서 일어난다면 다시 파묻어.”

손마디가 붉고 길쭉한 황제의 손이 대공의 어깨를 꽉 눌러 짚었다.

“자네를 믿는 날 실망시키지 마.”

하이데거는 더 이상 속이 읽히지 않는 황제를 보며 마른침을 삼켰다. 마력의 부작용은 점점 한계치에 도달하고 있었고 그는 오늘 아침에 시커먼 피를 토해 냈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뜻이었다.

“폐하.”

“말하게.”

하이데거가 용기를 낸 것은 그래서 일지도 몰랐다.

“이 땅의 위대한 태양이신 폐하께, 제가 죽음을 무릅쓰고 한 가지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얼마든지.”

“폐하께서 가장 바라시는 건… 10년 전 그때와 같이 여전히 가장 강력한 힘입니까? 이 땅을 지배하는 주군의 자리입니까?”

잠시간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크리스티앙이 작게 미소를 지었다.

“…자네가 진짜 두려워하고 있는 게 무엇인지 이제야 알 것 같군.”

“…….”

“자네는 베네딕트를 두려워하는 게 아니야. 내가 변할까 두려운 게지.”

“송구합니다. 폐하.”

“에리히. 내가 한 인간에게 눈이 팔려 내 모든 것을 다 내놓기라도 할까 겁이 나는가? 내가 무너져 버릴까 봐, 그래서 자네의 태양이 혹여 빛을 잃을까 염려하는가?”

하이데거에게 묻는 크리스티앙의 목소리는 또렷했다. 표정은 늘 그렇듯 오만할 정도로 당당했으며 말투에는 떨림이 없었다. 손목을 스스로 그어 피범벅이 되었던 황제를 떠올리며 불안해하고 있는 것은 대공 쪽이었다.

“아니. 자네는 틀렸어.”

대답하지 못하는 하이데거를 향해 황제가 섬세한 금빛 눈썹을 치켜올린 채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내 시선을 잡아채는 자가 있을 수 있다. 심장의 속도를 주체하지 못하게 하는 자가 나타날 수도 있지. 하지만 난… 그 대상에게 심장을 바치며 무릎 꿇고 구애하는 머저리가 아니야.”

그의 눈빛의 초점이 흐릿해졌으므로 황제는 마치 혼잣말을 하고 있는 것처럼 들리기도 했다. 어둠이 세상을 뒤덮기 전, 혼신을 다해 타들어 가는 붉은 노을에 결이 섬세한 블론드가 조용히 물들었다.

“클라웨의 황제가 여자를 가지는 방식은 그런 게 아니거든. 나는 그녀의 모든 것을 송두리째 빼앗을 거야. 두 눈이 나를 담지 않는다면 아예 아무것도 보지 못하게 만들 거야. 내 명령을 거부한다면 귀를 멀게 하고, 도망치려 한다면 발목을 분질러서라도 내게 스스로 기어 오게 만든다는 뜻이다.”

“만일 그래도 불가능하면… 어쩌실 생각이십니까?”

하이데거는 사람의 마음이라는 게 강제로 가져지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직접 경험했다. 하지만 그의 눈앞에 있는 영민한 황제는 달랐다. 이제껏 손에 넣지 못한 것이 없는 크리스티앙은 그 사실을 미처 깨닫지 못하고 있을 수도 있었다.

“무슨 뜻이지?”

크리스티앙이 그를 보며 수려한 미간에 주름을 잡았다. 벽난로가 타오르는 방 안의 공기가 일순 서늘해진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그 모든 일을 다 행하셔도, 폐하께서 원하시는 그것을 가지지 못하신다면…. 폐하께서는 어떻게 하실지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본인의 말대로 죽음을 무릅쓴 하이데거의 질문에 크리스티앙은 분노하지도, 대답을 망설이지 않았다.

“죽일 것이다.”

나직하게 내뱉는 황금빛 시선에는 흔들림이 없었다.

“가지지 못한다면 내 손으로 직접 죽여 없앨 것이다.”

“그러실 수… 있겠습니까?”

크리스티앙이 그를 직시하며 입술을 비뚜름하게 들어올렸다.

“내가 죽이지 못하는 대상이 이 세상에 없다는 사실은 자네가 가장 잘 알고 있지 않아? 나의 명을 받아 자네가 죽여 없앤 이들의 핏물이 키운 고기떼가 저 운하에 한가득이니까.”

하이데거는 그의 눈빛에 담긴 진심을 그대로 읽었다. 크리스티앙의 말은 과장이 아니었다.

“…알겠습니다, 폐하.”

대공은 이거면 됐다고 생각했다. 거슬리는 대상을 죽여 없애겠다는 황제의 확고한 진심이 있는 한, 하이데거는 황제가 원하는 모든 것을 기꺼이 손에 쥐여 줄 수 있었다.

베네딕트가 살아 돌아온다면 이번에야말로 그의 손으로 죽일 것이고, 황제가 원하는 여인이 황명을 받들기를 거절한다면 그녀가 그를 기쁘게 할 수 있도록 정신이라도 조종할 것이다.

“황후의 오라비로서 내가 다른 여인을 원하는 것이 혹여 서운한가?”

크리스티앙이 문득 그에게 물었다. 죄책감이 느껴지지는 않았다. 그저 궁금하다는 말투였다.

“…폐하가 하이데거 가문에 은혜를 내리지 않았더라면, 몸이 약했던 미리엄은 제대로 치료를 받지도 못하고 이미 오래 전에 세상을 떠났을 것입니다.”

“자네는 이 땅의 더러운 것들과는 달리 예와 격을 제대로 아는 자이지. 그래서 난 자네를 더욱 신뢰해.”

이 세상에서 가장 높은 자리에 스스로 오른 자의 한마디는 하이데거의 정신을 마취시킬 정도로 강력했다.

“모든 것을 뜻대로 하십시오, 폐하.”

옷깃의 먼지를 털어 낸 크리스티앙이 눈썹을 찌푸리며 아름답게 웃었다.

“내가 언제는 안 그런 적 있었어?”

황금성에 가장 잘 어울리는 황제의 자신만만한 미소.

“그럼 이제 슬슬 덫을 치러 가 볼까.”

“예, 폐하.”

황제의 충실한 하인은 그 미소를 오래도록 볼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랐다.

“리비에르에게 전갈을 넣겠습니다.”

***

혜미는 소파에 등을 기댄 채 깜박, 깜빡, 일정한 속도로 점멸하는 칼 손잡이를 조용히 바라보았다. 생각하고 싶지도 않은 욕탕 사건 이후, 어디 가서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고 싶을 정도로 기분이 미칠 것 같을 때, 베네딕트의 보석이 박힌 칼을 쥐고 있으면 진정이 되는 까닭이었다.

“주무십니까.”

침실의 문을 가볍게 두드리는 노크 소리에 초점 잃은 얼굴로 앉아 있던 혜미가 고개를 들었다.

“…들어와.”

소리도 없이 문이 열리고 발터가 나타났다. 줄곧 피해 왔던 그의 얼굴을 마주하니 다시금 뜨끈한 무언가가 속에서 일렁였다.

“…무슨 일이야?”

들어오자마자 용건부터 묻는 그녀를 보자 발터의 얼굴에 흐릿한 실망감이 번졌다가 이내 자취를 감추었다. 그가 문을 닫고 들어와 버릇처럼 주변을 살핀 후 낮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세드릭에게 연락이 닿았습니다.”

“정말? 이리 가까이 와서 이야기해 줘.”

축 늘어져 있던 혜미가 눈을 크게 뜨며 황급히 몸을 일으켰다. 발터는 기다란 소파에 앉아 있는 그녀의 맞은편에 의자를 끌어다 앉았다.

“세드릭은 지금 어디 있어? 아일라는 괜찮은 거지?”

“사흘 전에 아메티스에 도착한 후 시가지의 여관에서 머물며 민심을 살피고 있는 중입니다. 아일라와도 함께 있다고 합니다.”

“아아. 다행이다.”

혜미는 속말을 소리 내어 내뱉으며 길게 한숨을 쉬었다. 아일라가 무사하다는 소식, 그리고 세드릭이 지금 같은 도시에 있다는 사실만으로 불안했던 마음이 조금 안심이 되는 것 같은 기분이다.

“빠르게 정보를 수집하고 있는 모양입니다. 평민들뿐만이 아니라 귀족들 사이에서도 황제의 폭정에 대한 불만이 퍼지고 있다고 합니다. 황제의 권력을 등에 업고 세력을 뻗는 하이데거 가문에 대한 불만도 상당하다 들었습니다.”

“그래?”

“예. 황궁 근위대의 수장인 그가 수도의 보안에 신경을 쓰지 않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 사람… 성격상 그럴 이는 아니지 않나…?”

혜미가 하이데거의 까칠하고도 반듯한 얼굴을 떠올리며 되물었다.

“소문에 따르면 토비아스가 말했던 이야기와 일맥상통하는 부분이 있는 것 같습니다.”

세드릭이 수집한 정보는 수도에서 10세가 채 되지 않은 어린아이들이 행방불명되어 사라진 지가 이미 수년째라는 내용이었다. 물론 귀족의 아이들이 아니라 평민이나 노예 아이들이 대부분이었는데, 혹자는 부모나 주인이 돈을 받고 용병의 시중을 드는 애동으로 팔았다고 했고 혹자는 얼굴을 가린 이들이 갑자기 나타나 아이를 납치했다고 했다.

“넌 그 아이들이… 교황청에 갇혀 있다고 생각하는 거고.”

“세드릭 역시 확신하고 있었습니다.”

모든 일에 지나칠 정도로 신중한 세드릭이 그렇게 말할 정도면 충분한 심증이 있다는 소리였다.

“증거는?”

“로비나에서 만났던 마법사 아이들을 기억하십니까?”

“응.”

이마에 숫자를 새긴 채 황금성에서 탈주한 꼬마 마법사들은 안전을 위해 세르노티로 보냈었다. 세드릭은 예상대로 그 아이들을 잘 돌봐 준 모양이었다.

“꼬마들이 종종 말했다고 합니다. 교황청 지하에서 살려 달라는 아이들의 울음소리가 너무 크게 들려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고.”

혜미의 미간이 구겨지며 가슴이 쿵, 쿵, 크게 뛰었다. 동시에 속이 울렁거리며 참을 수 없는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그녀가 곁에 내려놓았던 칼의 손잡이에서 마법사의 보석이 깜빡, 깜빡, 빠르게 점멸하자 발터가 입매를 조금 굳혔다.

“…저건….”

“응. 요즘 들어 빛이 수시로 깜빡거려. 마치… 이야기라도 하는 것처럼.”

혜미가 단검을 손에 들고 손잡이의 보석을 손으로 슥, 슥 부드럽게 어루만졌다. 무기질이 분명한 보석에서 따스한 온기가 느껴져 온몸으로 퍼지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동시에 빠르게 뛰던 심장이 점점 제 속도를 되찾고 울컥거리던 마음이 서서히 진정되었다.

그녀는 근래에 들어 각인 효과를 더욱 강하게 느꼈다. 베네딕트와 완벽하게 이어져 있다는 확신이 들었던 것이다. 참을 수 없이 괴로울 때 그를 생각하면 뒤틀리던 속이 차분해지는 것이 그 증거였다.

“그가 확실히 살아 있다는 뜻이군요.”

대마법사의 보석은 각인 상대가 죽으면 빛을 잃는다는 것이 정설이었다. 희한한 것은 하이데거가 그녀의 보석을 확인하러 왔을 때는 아무런 빛도 내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러다가 그녀 혼자 남겨지면 깜빡, 깜빡, 다시 조용히 빛을 발했다. 마치 상황을 알고 장난치기라도 하는 것처럼.

“응. 베네딕트는 안 죽었어. 절대.”

혜미는 마치 자신에게 말하듯 되뇌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기억하는 것만으로 수치스러운 시간을 크리스티앙과 보냈던 날, 황금성은 말 그대로 비상이었다. 베네딕트의 실종은 미리 입을 맞춘 일이었으나 그 방법은 아무도 예상치 못했다.

차가운 새벽 공기가 스며드는 마차 안, 크리스티앙은 그녀의 귀에 대고 너의 연인이 죽었다는 말을 속삭이며 즐겁게 웃었다. 베네딕트의 눈앞에서 그녀와 뒹구는 모습을 한 번쯤은 보여 줬어야 했는데 그럴 기회가 사라져 아쉽다는 말과 함께였다.

“아. 누이와 각인한 그라면 이미 알고 있으려나? 고고한 마법사께서는 아마도 자살한 걸지도 모르겠군. 내 위에서 허리를 돌리며 신음하는 연인의 수치스러운 모습을 견딜 수가 없어서 말이야. 그가 교황일 당시, 나와 사이가 그리 좋다고는 할 수 없었거든. 몸이 찢기는 고문을 당하면서까지 누이를 생각하며 웃었다던 그가, 누이의 자궁에 내 씨가 뿌려지는 걸 알았다면 대체 무슨 생각을 했을까? 난 그의 표정이 몹시도 궁금해.”

그녀가 기절한 척 눈을 꽉 감고 있던 것은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크리스티앙에게 그녀의 불안과 분노를 고스란히 드러내 보이고 싶지 않았다.

“폐하. 괜찮으십니까…?”

“어? 응.”

혜미가 상념에서 깨어나며 고개를 끄덕였다. 걱정스레 자신을 살피는 발터를 보며 그녀가 애써 화제를 원위치시켰다.

“아무튼 그는 멀쩡해.”

발터는 그날 ‘폴린의 뜰’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에 대해 모르고 있었다. 혜미가 기를 쓰고 감춘 까닭이었다.

“내 몸이… 그렇다고 말해 주고 있거든.”

베네딕트가 뼈만 드러난 시체가 되어 발견되었다는 말을 듣고도 간신히 진정할 수 있었던 것도 바로 그 때문이다. 발터는 그의 사망이 성을 빠져나가기 위한 눈속임이었을 거라고 바로 지적했지만.

“각인한 게 좋을 때도 있다니.”

“다행이군요. 그럼 우린 다음 계획을 이어 가면 되니까요.”

발터의 목소리가 조금 딱딱하게 느껴지는 것은 여전히 그녀의 착각임이 분명할 것이다. 혜미는 그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응. 교황청에 사라진 애들이 갇혀 있는 건 확실한 것 같지…?”

“…좋은 상태는 아닐 겁니다.”

“알아.”

그녀는 어두워지는 그의 표정을 보고 그 뜻을 짐작했다. 발터는 일반인의 출입이 금해진 교황청에서 일어나고 있는 것이 마력 실험이 분명할 거라고 예상했다.

마력이 없던 하이데거 대공이 힘을 사용할 수 있게 된 것도 그 실험의 결과였을 것이다. 거기에 마법사인 사비오족뿐만이 아니라 평범한 어린아이들이 대거 희생되었다는 건 새로이 알게 된 진실이었다.

“최악의 경우, 아이들과 싸워야 하는 일이 일어날 수도 있습니다.”

혜미의 동공이 조금 흔들렸다. 발터가 그저 그녀에게 겁을 주기 위해서 이런 말을 내뱉는 게 아니라는 사실은 그녀 역시 알고 있었다.

교황청 내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의 주동자는 하이데거였지만 그에게 명령을 내린 이가 누구였을지는 너무도 명백했다. 크리스티앙이 벌인 일은 모두 자신의 권력을 공고히 하기 위함일 테니까.

상상만 해도 끔찍한데 눈으로 마주해야 하는 현실은 더하겠지.

“…난 크리스티앙을 용서할 수 없을 것 같아. 그가 한 짓을 직접 눈으로 본다면… 더더욱.”

혜미는 몸에 오한이 드는 기분을 느끼며 팔로 제 다른 쪽 팔을 쓸었다. 그 바람에 가슴에 헐렁하게 묶여 있던 잠옷의 끈이 잡아당겨져 풀리며 맨어깨가 조금 드러났다.

“일단 제가 교황청으로 숨어들어 그들을 안전히 격리하는 방법을 찾도록….”

말을 잇던 발터가 입을 다물었다. 그의 눈매가 삽시간에 날카로워지나 싶었다.

탁.

그가 그녀의 어깨를 잡으려 다가오자 혜미가 반사적으로 몸을 움직여 그를 피했다.

“…왜 그래?”

혜미의 목소리가 조금 떨렸다. 서둘러 앞섶의 끈을 매려고 했지만 당황한 탓인지 손놀림이 자꾸만 어긋났다. 그녀의 맨살에 꽂힌 그의 눈동자가 무언가를 살피듯 더욱 가늘어지고 있었다.

“무례를 용서하십시오.”

잠시 망설이던 발터가 마른침을 한 번 삼킨 후 속삭이듯 말을 내뱉었다. 동시에 그녀의 목을 감고 있던 부드러운 천을 손가락에 감고 단박에 휙 풀어냈다. 그는 워낙에 동작이 빠른 이였다. 혜미가 미처 손을 저지할 틈도 없이 눈 깜짝할 사이에 목덜미가 휑하니 비었다.

“…바… 발터…!”

발터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상처가 가득한 커다란 손에서 보드라운 벨벳 천이 소리 없이 구겨지며 꽉 쥐였다. 주인을 잃은 의자가 카펫 위에서 흔들흔들 움직이다 가까스로 중심을 되찾았다. 그가 잇새로 낮게 물었다.

“…어떻게 된 일입니까?”

주섬주섬 옷을 추스르며 몸을 가려보려던 혜미는 이내 행동을 포기했다. 날카로운 발터의 눈은 이미 얼룩덜룩한 울혈과 사나운 잇자국으로 가득한 그녀의 피부를 샅샅이 훑어 내린 후였다.

“말씀해 주십시오, 폐하.”

맨몸을 드러낸 그녀를 보는 눈동자에 수컷의 욕망은 느껴지지 않았다. 어둡게 이글거리며 치솟은 감정은 놀람, 그리고 참을 수 없는 분노였다.

“그자입니까…?”

발터가 그녀를 뚫어져라 바라보며 이를 꽉 깨물었다. 그의 턱이 경직해 단단해진 채 꿈틀거렸다. 혜미는 간신히 표정을 다잡으며 애써 태연하게 입을 열었다.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모르겠네…. 피곤하다. 그만….”

“폴린의 뜰에 황제가 방문하였다고 들었습니다. 그가… 폐하를 이렇게 만들었습니까…?”

혜미의 눈동자에 순식간에 열이 오르며 뜨거워졌다. 심장이 거세게 두방망이질을 쳤다.

“나가 줘.”

싫었다. 그녀는 발터에게 이런 모습을 들키고 싶지 않았다. 다른 남자의 흔적이 빼곡하게 남아 있는 몸을 보여 주고 싶지 않았다. 크리스티앙과 마치 발정기를 맞이한 뱀처럼 뒹굴었던 자신의 모습을 발터가 상상하는 걸 떠올리자 갑자기 숨이 턱, 막혀 온다. 가슴이 답답하고 누가 목을 조르는 것 같은 기분이 들며 숨쉬기가 힘이 들었다.

“그가 폐하를 다치게 하였습니까? 제발 사실을 말씀해 주십시오.”

발터가 거칠어지는 호흡을 애써 가다듬으며 내뱉었다. 벨벳 천을 쥐어짤 듯 움켜쥔 그의 팔뚝에서 핏줄이 공격적으로 불거졌다. 며칠 동안 그녀의 태도가 이상하다고 생각은 했었지만 연인인 베네딕트가 떠난 이후 머릿속이 복잡해서일 거라고 판단하고 있었다.

시녀를 다 물리고 굳이 혼자서 옷을 갈아입을 때도 알아챌 기회는 있었다. 하지만 그는 제 머릿속에서 벌어지는 추잡한 갈등을 진정시키기에 급급해 미처 눈치를 채지 못했던 것이다.

이런 제기랄. 빌어먹을…! 발터는 입 안의 살을 씹으며 부들부들 떨리는 주먹을 간신히 이완시켰다.

“흐…. 흑…. 흐윽…. 나가라고 말했어.”

“폐하.”

가슴을 부여잡는 그녀의 얼굴이 하얗게 변하는 걸 보고 발터가 그녀의 어깨를 강하게 붙들었다. 그녀의 눈동자에 원인을 알 수 없는 두려움이 가득 차는 것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왜. 어째서.

“흑…. 나가….”

“왜 그러시는 겁니까, 폐하.”

발터의 눈에 핏발이 섰다. 지금 이 순간, 그녀를 위해 기꺼이 목숨을 내놓을 수 있는 자신을 피하고 있는 상대를 보자 가슴에 두꺼운 말뚝이 박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는 불안해하는 그녀의 옷을 추슬러주며 빠르게 중얼거리듯 내뱉었다.

“제가 잘못했습니다. 제가 폐하의 곁에 있지 못하여 죄송합니다.”

시뻘게진 그의 눈동자에 열기가 차올라 시야가 흐릿했다. 며칠이 지났는데도 물리고 빨린 자국이 빼곡하게 남아 있는 몸이, 그녀가 겪어야 했던 시간이 어땠는지를 그대로 내보이고 있었다.

크리스티앙은 분명 비열하고 잔인하게 그녀를 가졌음이 틀림없었다. 울분이 치밀어 올라 화를 감당할 수가 없는 발터의 얼굴이 무섭게 구겨졌다.

“아무 일도 없었어… 그러니까 나가…!!! 보지 말라고!!!”

혜미가 이성을 잃은 사람처럼 몸부림을 치며 그에게 주먹을 휘둘렀다. 발터는 그녀의 주먹질을 피하지도 않고 그대로 받아 냈다. 쿵. 쿵. 매섭게 내려치는 그녀의 손길보다, 그의 가슴속에서 폐부까지 강하게 때려 대는 심장이 더욱 아프다.

“흐으…. 흐윽…!”

혜미는 결국 그녀를 말없이 바라보는 그의 옷깃을 붙들고 무너져 내리고 말았다. 이제껏 간신히 참아 왔던 뜨거운 눈물이 후드득, 후드득 떨어져 발터의 너른 가슴을 적셨다.

“으어어엉…. 흐으으으…!”

그녀는 아이처럼 목 놓아 울었다. 크리스티앙에게 당한 것까지는 수치스러워도 참을 수 있었다. 그것은 그녀의 의지가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발터가 그것을 알아채는 것은 또 다른 문제였다. 미안함. 죄책감. 이 와중에도 발터만은 그녀를 이해해 주길 바라는 스스로에 대한 자괴감이 온몸을 휩쓸었다.

너는 나를 싫어하겠지. 네 기억이 돌아온다 해도 우리가 다시 예전으로 돌아가는 것은 불가능하겠지.

어쩌면 그녀가 이곳에 발을 딛는 순간부터 결정된 미래였는지도 모른다. 그녀는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만들고 싶어 죽어라 노력했지만 결과는 이거였다. 결국 원하는 건 다 놓쳐 버리게 될 거라는 예감에 눈물이 끊이지 않고 흘러내렸다.

“으흑…. 흐으윽….”

발터의 커다란 손이 공중에서 주저하듯 잠시 떨리다가 마침내 그녀의 뒤통수를 감싸듯 떨어진 것은 그때였다. 흠칫 놀라는 혜미의 머리를 투박한 손이 쓰다듬고 내려와 마른 등을 두드렸다.

툭. 툭.

달랜다고 하기에는 거칠었고, 무심하다고까지 느껴지는 손길이었다. 그러나 그녀의 몸은 그 서툰 남자의 손짓을 너무도 익숙하게 받아들였다.

커다랗게 들리는 심장 소리와 보통 사람보다 훨씬 뜨거운 체온을 느끼자 몸이 저절로 떨렸다. 가슴속에서 퍼져 나가는 그리움에 혜미는 서럽게 몸을 떨며 울었다. 발터는 그녀에게서 손을 뗀 채, 그저 커다란 나무처럼 우뚝 서 있을 뿐이었다.

“허락해 주십시오. 폐하.”

마침내 그녀의 울음소리가 잦아들었을 때쯤, 발터가 쉰 목소리로 내뱉었다.

“…뭘…?”

혜미는 자신이 흘린 눈물로 흠뻑 젖은 그의 옷 위로 겨우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발터를 올려다보는 입가와 눈가가 온통 붉어져 떨렸다.

“그를 죽이는 걸 허락해 주십시오. 폐하.”

발터가 시뻘건 눈으로 속삭이듯 중얼거렸다. 그의 목소리는 차분했지만 눈빛은 그렇지 못했다. 혜미는 그가 지금 진심이라는 사실을 인지했다.

“그를 암살한다 해도 이 성을 무사히 빠져나가는 건 힘들어.”

황금성에 현재 주둔하고 있는 군대만 해도 수천이다. 하지만 그 사실은 그에게 문제가 되지 않았다. 발터는 당장이라도 크리스티앙을 죽이고 참수당하는 것에 전혀 망설이지 않을 이였다. 그것이 발트리가 가르쳐 온 ‘매의 수호자’의 숙명이었으니까.

“상관없습니다. 황명을 내려 주십시오. 고통스레 죽이겠습니다. 갈기갈기 몸을 찢어 버리겠습니다.”

발터가 분노하는 이유는 단지 그뿐만이 아니었다. 그녀의 몸에 시커멓게 남은 입술 자국과 물어뜯었다고밖에 할 수 없는 잇자국, 멍 자국을 보고 그가 이성을 차릴 수 있을 리 만무했다. 섧게 우는 그녀를 마주하자 온몸의 피가 혈관을 뚫고 터져 나가는 느낌이었다.

그녀는 이러한 대접을 받아야 할 이가 아니었다. 크리스티앙을 세상에서 가장 잔인한 방법으로 죽이겠다는 충동이 그의 머릿속을 휩쓸었다.

“아니. 안 돼.”

혜미가 간신히 내뱉자 발터의 짙은 갈색 눈동자가 일그러졌다.

“왜 안 됩니까…?”

“…….”

“호위 기사로서, 폐하께 해를 끼친 이를 죽이는 게 왜 안 되는지… 제가 납득할 만한 이유를 말해 주십시오.”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내뱉는 발터의 눈동자에 실핏줄이 터졌다. 입술을 피가 나게 꽉 깨무는 그가 최대한 억누르며 참고 있다는 사실을 그녀는 잘 알았다. 기억을 잃었어도 발터는 발터였다. 나는 왜. 이렇게 매번 너에게 상처를 줄 수밖에 없는 걸까.

“난….”

혜미의 입술에서 떨리는 고백이 조심스레 흘러나왔다.

“나는… 널 잃을까 봐… 너무… 두려워.”

짙은 어둠을 먹은 눈동자에 촛불이 타올랐다. 그녀의 앞에 우뚝 선 채, 더듬더듬 말하는 그녀를 뚫어져라 바라보는 발터의 심장이 다시금 터질 듯 강렬하게 박동했다.

“네가 나를 싫어해도…. 결국… 내게 질려 버린 네가… 다른 이를 만나도 상관없다…. 하지만 나는…. 나는… 네가 내 곁을 떠나는 게 미치도록 무서워.”

주르륵. 또다시 뜨거운 눈물이 그녀의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네가 있었기 때문에 난 여기까지 올 수 있었어. 기억을 몽땅 잃었어도… 겁쟁이같이, 우유부단하게, 바보같이 약하게 굴었어도…. 네가… 날 믿어 줬기 때문에… 모든 게 가능했다….”

울컥거리며 토해 내는 고백에 울음이 섞여 들었다. 지금껏 가슴에 두고 꾹꾹 참아 왔던 말을 토해 내는 그녀의 머릿속에는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았다. 오로지 한 사람에 대한 생각밖에는.

“너는… 나를 살게 했잖아. 네가 곁에 있으면 나는… 살아 있다는 걸 느껴…. 사람들이 기대하는 내가 아니라 온전한 나 자신으로 존재하는 것 같아. 발터…. 너는 내가 무슨 이름이든… 어떤 이름으로 살든 내 곁을 떠나지 않았잖아…. 흐으윽….”

그녀의 심장이 아프도록 강렬하게 뛰었다.

“아무도… 아무도 안 그랬는데…. 그런데 너만… 너만 그랬어….”

아이처럼 눈물을 뚝뚝 흘리는 그녀를 바라보는 발터의 눈동자가 어둡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나는…. 잘하고 싶었는데…. 점점 엉망이 되는 것 같아…. 모든 사람이 행복했으면 바랐는데…. 모두가 나 때문에 불행해지는 것 같아…. 모두를 지키고 싶어서 시작한 일인데… 결국 모두가 상처만 받는 것 같아서 죽어 버리고 싶어…. 흐으윽…!”

발터가 몸을 굽혀 그녀를 강하게 끌어안았으므로 혜미는 두 눈을 꽉 감았다. 심장이 너무 빨리 뛰어 터질까 두려웠지만, 설사 그런다 해도 이 순간과 기꺼이 바꿀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젖은 속눈썹을 타고 눈물이 길게 흘러 발터의 어깨에 떨어졌다. 그가 그녀에게 꽉 낮아진 목소리로 속삭이듯 내뱉었다.

“저는 배움이 얕아 폐하의 질문에 답을 드리지 못합니다. 하지만… 적어도 폐하의 진심이 옳다는 것은 압니다.”

“위로하지 않아도 괜찮아… 흣!”

“아뇨.”

발터가 그녀를 꽉 안은 팔에 더욱 힘을 주었다. 혜미는 그저 숨을 크게 몰아쉴 수밖에 없었다.

“위로 같은 건 할 줄 모릅니다. 배운 적도 없습니다.”

목덜미에서 그가 내뱉는 뜨거운 호흡이 생생하게 닿아 소름이 일어날 정도였다. 떨리는 목소리, 꽉 안은 그에게서 쿵쿵거리며 전달되는 심장 박동 소리. 이 모든 것들이 지금 그녀를 눈물 날 정도로 안심시키고 있다는 것을 발터는 모르고 있는 게 분명했다.

“제가 할 줄 아는 건… 아니 유일하게 하고 싶은 기분이 드는 것은… 폐하를 지키는 일뿐입니다. 폐하는 저를 수단으로 쓰셔야 합니다. 제가 목적이 되면… 안 됩니다. 저를 위해 채찍을 맞으셔도 안 됩니다.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의 낮은 목소리가 자꾸만 갈라지며 흔들렸다. 너른 가슴이 부풀었다가 잦아들기를 수차례 반복했다.

“…그런데 자꾸만 불경한 마음이 듭니다.”

속삭이는 발터에게서 혜미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녀를 바라보는 발터의 강인한 얼굴은 괴롭고 지쳐 보였다. 스스로의 머릿속을 자꾸만 비집는 불경한 생각 때문에 내적인 싸움을 계속한 탓이었다.

“폐하께서 저를 염려하시는 것이, 주군으로서 부하를 아끼는 것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저는….”

마침내 눌러 참았던 속내를 꺼내어 드러내는 남자의 목소리가 뜨겁게 떨렸다.

“폐하를 떠올리며 잠을 이루지 못합니다.”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는 그의 입에서 다시금 흘러나오는 고백에 눈물이 그렁그렁한 혜미의 눈동자가 커다랗게 뜨이며 흔들렸다.

“불경한 상상을 하는 제 자신을 죽이고 싶습니다.”

마치 시간이 멈춘 것 같았다. 왜 하필 지금일까. 그에게 사랑을 고백하기에는 너무나 잔인한 타이밍이다. 발터의 턱이 경직되며 입술이 엉망으로 씹히는 것을 바라보며 혜미는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어두운 공간을 밝히는 촛불이 힘차게 타며 너울거렸다.

“폐하와 저 사이에 있었다는 일을 기억해 내지 못하는 제 자신에게 실망함과 동시에….”

허스키한 목소리를 더욱 낮추는 그의 목덜미에 핏줄이 섰다. 툭 불거진 남성적인 목울대가 위아래로 일렁였다.

“기억을 잃기 전의 저는 폐하와 더욱 친밀하였을지…. 지금보다는 더 가까운 거리에 있었을지를 감히 상상하며 바보처럼 제 자신을 투기합니다.”

“…발터.”

혜미는 저도 모르게 그의 이름을 불렀다. 그가 말하는 감정은 그녀 역시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것이 얼마나 사람을 비참하게 만드는 지도.

발터가 숨을 한 번 크게 들이쉬었다. 하지만 말을 멈춘 것은 아니었다. 이글거리는 눈 끄트머리에서 기를 쓰고 감춰두었던 시커먼 욕망이 물꼬가 터진 듯 서서히 흘러나왔다.

“폐하를 함부로 대하는 자는, 그 상대를 막론하고 죽이고 싶어지는 이 마음이….”

“…….”

“…단지 충성심이 아닐까 봐 겁이 납니다.”

발터의 마른 뺨에 그녀의 손이 스르륵 내려앉았다. 무릎 꿇고 그녀에게 키를 맞춘 발터의 바위 같은 몸이 크게 흔들렸다.

“죄송합니다.”

마침내 고해성사와도 같은 고백을 끝낸 남자에게서 숨죽인 울음소리를 닮은 한숨이 새어 나왔다. 혜미는 그의 짙은 속눈썹이 무겁게 아래를 향하는 것을 말없이 바라보았다. 입술을 질끈 깨문 발터가 고개를 천천히 돌려 그녀의 손바닥에 제 얼굴을 묻어 버리는 것까지도.

“…….”

그가 길게 들이쉬었다가 내쉬는 뜨거운 호흡이 피부에 그대로 전달되었다. 그가 얼마나 괴로워하고 있는지도 생생했다.

“발터.”

그는 움직이지 않았다.

“발터. 날 봐.”

일그러진 발터의 눈이 그녀의 손가락 사이에서 천천히 뜨였다. 혜미는 떨리는 손가락으로 그의 짙은 눈썹과 강인한 광대뼈를 더듬었다.

“…힘들다. 진짜.”

“…죄송합니다.”

발터가 마치 제 탓인 것처럼 괴로운 표정을 지었다.

“안아 줄래?”

속삭이는 그녀의 목소리에 진한 눈썹이 움찔거렸다. 기다란 눈동자가 먹색으로 짙어졌다.

“네 마음이 충성심이어도, 아니어도 상관없어. 그러니까… 날 좀 안아 줘.”

발터는 대답하지 않았다. 참을 수 없는 침묵이 내리깔렸다. 공간에는 그가 내뱉는 숨소리와 촛불이 타들어 가는 소리뿐이었다.

그가 싫다고 말한들 서운해할 처지가 못 되며 그래서도 안 된다는 사실은 그녀가 가장 잘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발터가 그녀를 거부한다면 견딜 수가 없을 것 같았다. 인간의 욕심은 때로 스스로를 부끄럽게 만들었지만 그래도 그녀는 그를 포기할 수가 없었다.

“제발.”

인상을 찌푸린 발터가 바닥에서 무릎을 떼고 몸을 일으켰다. 허벅지 바깥쪽에서 강인한 주먹이 꽉 쥐었다 펴지기를 반복했다.

“…안 됩니다.”

마침내 열린 기다란 입술에서 흘러나온 답은 거절이었다. 그녀를 노려보듯 응시하는 그의 얼굴은 무시무시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이제 아예 정이 떨어져 버린 걸까. 혜미는 눈물이 그렁그렁 담긴 눈으로 그를 보며 죽어 버리고 싶다고 생각했다.

“미안. 내가 너무 이기적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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