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2화 (62/72)

혜미는 두 눈을 번쩍 뜨며 그의 손을 잇자국이 패도록 꽉 물었다. 크리스티앙은 어깨를 들썩이며 소리 내어 웃을 뿐이었다. 그제야 그녀는 같은 약을 마신 크리스티앙 역시도 지금 그녀와 같은 상황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고통마저도 그를 자극하는 쾌감일 뿐인 것이다.

코로 들이쉬는 공기조차도 오로지 단 한 가지 목적, 끊임없는 정사와 오르가슴만을 위해 존재하는 것만 같다.

“넌…. 진짜 최악이야…. 크리스티앙….”

그녀가 이제껏 알고 있던 섹스는 이런 동물적인 쾌감으로 이루어진 연속 반응이 아니었다. 분노와 흥분, 수치와 쾌감이 엎치락뒤치락하며 그녀의 내부에서 가슴을 울렁거리게 만들었다.

혜미는 자신을 이런 지옥 같은 상황에 빠지게 만든 상대에게 흥분하고 있는 스스로에게 자괴감이 들어 견딜 수가 없었다.

“이런. 누이는 아직 솔직하지가 못하구나.”

크리스티앙이 커튼을 확 열어젖히듯 그녀의 양 무릎을 거칠게 열며 입술을 비틀었다. 크기를 줄이지도 않은 성기가 그녀의 질구를 짓누르며 뜨끈뜨끈한 안쪽을 단박에 비집었다.

“말은… 바로 해야지….”

“으흑…!”

그를 입으로 담았을 때부터, 있지도 않은 걸 꽉 물며 저 혼자 수축하고 있던 질벽이 드디어 힘 있게 벌어지며 이완되었다. 해방감과 동시에 눈물 날 정도로 아찔한 쾌감이 그녀의 머릿속에 퍼졌다. 죽을 만큼 강렬한 쾌감이었다.

“아아! 흐응…!”

“네 몸은… 내가 최악이 아니라 최고라잖아…. 안 그래?”

크리스티앙이 크게 신음하는 그녀에게 눈을 맞추며 즐겁게 조소했다. 광기 어린 황금빛 눈동자가 색정적으로 가늘어지며 시각적 흥분을 유발시켰다. 그녀가 고개를 저으며 부정하려는 순간, 그가 허리를 뒤로 물렸다가 보란 듯이 강하게 내리찍듯이 박았다.

“흣…!”

피가 몰려 잔뜩 부푼 질벽이 쫙 오므라들며 그의 페니스를 조였다. 크리스티앙이 그녀의 몸에 퍼부은 미약 덕에 흥분의 불길은 배가 되어 타오르고 있었다.

“흐윽…! 으응…! 흐으…! 하읏…!”

강하게 박힐 때마다 척수를 타고 쾌감이 터져나갔다. 혜미가 진저리를 치며 숨을 몰아쉬었다. 크리스티앙은 마치 벌을 내리듯 그녀의 내부를 페니스로 채찍질했다. 그의 몸이 거칠게 흔들릴 때마다 젖은 블론드에서 끈적끈적한 미약이 뚝, 뚝, 흘러내렸다.

“네 몸은, 동생의 좆이 쑤셔 박아 주는 게 아주 좋아서 미치겠다는데.”

“…여자를… 흣…. 만족시키는 방법도 모르면서…. 하아…. 멋대로 떠들지 마.”

혜미가 그를 노려보며 잇새로 간신히 내뱉었다. 그녀의 눈가가 흐른 눈물에 젖어 붉었다.

“내가, 정사를 모른다고?”

크리스티앙이 웃긴 이야기를 들었다는 듯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다. 온몸이 달아올라 죽일 듯 빨아들이고 있는 주제에 끝까지 자신을 거부하는 척을 하는 여자가 몹시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내가 보기에 섹스를 잘 모르는 쪽은 누이인 것 같군.”

그는 이내 그녀의 허벅지를 꽉 말아 쥐곤 제 양껏 몰아치기 시작했다. 약을 마셔 온몸이 성감대일 그녀였지만 내부에서 가장 격하게 반응하는 부분이 어딘지 따위는 이미 파악했다.

“나만큼 능숙한 상대를 처음 만나니 두려워지기라도 한 건가?”

크리스티앙이 보드라운 시트를 움켜쥔 그녀의 손을 억지로 잡아끌었다. 음모를 헤치고 부푼 음핵을 만지게 하자 혜미가 격렬히 박히면서도 그의 손을 마구 뿌리쳤다.

“내가 퍼붓는 이 쾌감을 도저히 믿을 수가 없어서 부정하고 싶기라도 해?”

크리스티앙은 다시 거칠게 그녀의 손목을 이끈 후, 제 손과 그녀의 손을 겹쳐 클리토리스를 마구 문지르게 만들었다.

“응, 으응! 흑…! 아아…!”

혜미가 울부짖으며 신음했다. 음핵이 저릿하게 수축하며 질벽이 거칠게 들락거리는 페니스를 꽉 조였다. 크리스티앙의 눈앞에서 스스로 가는 모습을 보여 주고 싶지 않았지만, 이미 이성의 한계를 넘어선 몸은 쾌락을 거부하지 못했다. 연약한 피부가 서로를 감싸고 긁을 때마다 숨소리가 격해지는 것은 크리스티앙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 밤은 아마 평생 잊히지 않겠지.”

눈에 핏발이 불거진 채 크리스티앙이 쉰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가 그녀의 가슴을 손에 움켜쥐고 이지러진 살점의 끄트머리를 세게 빨았다. 절정에 가까워진 혜미의 다리가 멋대로 움직여 크리스티앙의 허리를 꽈악 조였다.

“씨팔…. 아아…. 흣…!”

엄청난 속도로 빠르게 왕복하던 크리스티앙이 마침내 쇳소리를 내며 사정을 시작했다. 그녀의 비부는 욕심 많은 짐승처럼 그를 꿀꺽꿀꺽 집어삼켰다. 조금 있으면 그녀 역시 절정이었다. 의지를 배반한 음성이 맘대로 그녀의 입술을 비집었다.

“아, 안 돼…. 더…. 조금만… 더…!”

허리가 번쩍 들린 채 바들바들 떨렸다. 이대로 끝까지 가지 않으면 견딜 수가 없을 것 같았다. 크리스티앙이 움직임을 멈출까 두려웠지만 기우였다.

“더?”

크리스티앙은 쿡쿡 웃으며 그녀를 퍽퍽 몰아붙였다. 사정하고도 여전한 위용을 자랑하는 젊은 황제의 양물이 쉼 없이 가려운 내벽을 두드리며 긁었다.

“얼마든지.”

“아, 흣, 아, 아앙…! 아아아!!!”

아랫배에서 꿈틀거리며 뭉치던 감각이 온몸으로 터져 나가는 순간, 혜미의 눈에서 주르륵 기다란 눈물이 흘러내렸다. 제발 이걸로 끝이었으면 좋겠다는 희망은 말 그대로 그녀의 희망 사항일 뿐이었다.

마지막 향초가 완전히 닳아 없어지며 불꽃 대신 희미한 연기만을 남겼다. 통나무 오두막 바깥에서 이름 모를 새가 섧게 울었다.

벌써 몇 번째일까. 도대체 시간은 얼마나 지난 걸까.

“흑…. 아흐윽…. 으응…!”

축 늘어진 혜미의 성대에서 낯선 신음성이 끊이지 않고 흘렀다. 그녀의 얼굴은 눈물과 타액, 그리고 크리스티앙이 멋대로 싸지른 정액으로 뒤덮여 엉망이었다.

“정신을 잃는 건 허락하지 않아.”

크리스티앙이 강하게 왕복하며 갈라진 목소리로 내뱉었다.

“내 불면을 걱정했으니 내가 잠들기 전까진 눈을 감지 말아야지.”

“흐… 윽…. 미친…. 흐응…!”

“미친놈이라는 욕 말고 다른 건 할 줄 몰라? 이제 슬슬 지겨워지려고 하는데.”

크리스티앙이 미약에 흠뻑 젖은 채 침대 위로 늘어진 그녀에게 다정히 속삭였다. 그의 몸 역시 끈적거리는 액체로 온통 단내를 풍겨 대고 있었다.

그동안 꽤나 난잡하게 놀았던 황제에게도 이처럼 더러운 섹스는 처음이었지만, 그는 멈출 수가 없었다. 증오를 품고 그를 바라보는 보랏빛 눈동자에까지 그의 흔적을 뿌리고 싶다는 욕망이 강하게 타올랐다.

그 감정은 크리스티앙이 한 사람의 인간에게 난생처음 가지는 소유욕이었다. 그 인간을 이용해서 얻을 수 있는 무언가가 아닌, 그 인간 자체를 손에 움켜쥐고 싶어진 것이다.

찌걱거리는 음부 안에 몇 번이나 쏟아부은 그의 정액이 움직이는 성기를 타고 묻어나오는 것조차 맘에 들지 않았다. 그녀는 오늘, 무슨 일이 있어도 그의 씨를 수태해야 했다. 조금의 의심도 있어서는 안 된다. 어차피 멈출 수도 없지만.

“폐하라고 불러 봐.”

“흐으…. 흣….”

“자궁에 폐하의 씨를 넘치게 부어 달라 간청해 보라고.”

가늘어지던 혜미의 눈이 사나운 빛을 띠었다.

“걸레 같은 새끼야, 이 정신 나간 더러운… 흐응…!”

욕설을 내뱉으려던 혜미가 입술을 꽉 깨물고 신음을 참았다. 크리스티앙이 하얀 손으로 그녀의 양쪽 유방을 꽉 움켜쥐고는 아랫도리를 빠르게 추어올리기 시작한 탓이었다.

“계속, 지껄여 보지, 왜. 응?”

탄탄하게 균형 잡힌 크리스티앙의 하체가 그녀의 살갗을 반복적으로 쳐 대며 내벽을 강하게 치받자, 침대에 가로로 걸쳐진 그녀의 몸이 그 반동에 점점 위로 올라갔다.

“흣! 응! 으응…!”

혜미의 눈에 거꾸로 보이는 시야가 너무나 흐릿했다. 식지 않는 탕에서 피어오르는 수증기를 바라보며 차라리 정신을 잃어버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지만 그조차도 쉽지 않았다.

“흐윽…!”

그녀가 눈을 질끈 감기가 무섭게 가슴을 움켜쥔 손이 쫙 펴지며 반동에 흔들리는 유실을 짝! 소리가 나게 후려쳤다.

“시선 피하지 말라고 분명히 경고했을 텐데.”

크리스티앙이 다시 한번 소리 나게 그녀의 가슴을 내려쳤다. 분명 손자국이 날 정도로 강하게 때렸지만 그녀의 성대는 교성을 닮은 신음을 토해 낼 뿐이었다. 날카로운 아픔이 피부를 타고 짜릿하게 퍼져나가자, 이제는 손이 닿지 않은 젖꼭지가 간질거릴 지경이었다.

유두를 좀 깨물어 주었으면, 아까처럼 가슴을 좀 더 세게 빨아 주었으면.

혜미는 이를 악물고 애써 팔을 뻗은 후, 다시 한번 그녀의 가슴을 강하게 때리려는 크리스티앙의 어깨를 잡아챘다. 휙, 그녀에게로 순순히 딸려온 그가 흰 이를 드러내며 천사 같은 얼굴로 아름답게 웃었다.

“왜, 느낌이 너무 좋아서 미치겠지?”

크리스티앙이 그녀의 가슴을 제멋대로 쥐어짜듯 주물거리며 빠르게 속삭였다. 그 와중에 착실히 그녀의 비부를 쑤셔 대는 추삽질은 멈출 줄을 몰랐다. 이렇게 섹스하다 이지를 상실하고 정신이 나가 버린다고 해도 이상한 일이 아닐 것 같다.

“거짓말할 필욘 없어. 난 음탕한 여자를 싫어하지 않는다.”

혜미의 떨리는 손이 그의 부드러운 머리카락을 꽉 쥐었다. 크리스티앙이 가늘어진 눈으로 그녀를 보며 속삭이듯 내뱉었다.

“아니. 사실… 좋아하지.”

크리스티앙의 얼굴에 번지는 미약한 열기를 보며 혜미가 이를 꽉 깨물었다.

“…웃기지 마.”

그리고 흥분과 땀, 물과 그녀의 애액으로 젖은 크리스티앙의 얼굴에 툭, 하고 침을 뱉었다.

“…….”

조각같이 매끄러운 그의 뺨에 타액이 맺히자 진득하게 풀어져 있던 크리스티앙의 눈동자에 이채가 뒤섞였다. 용서할 수 없는 불경. 아름다운 미간이 사납게 일그러졌다. 죽일 듯 그녀를 노려보던 그가 천천히 숨을 내뱉으며 낮게 속삭였다.

“…이건, 내가 네 얼굴에 넘치게 싸 준 것에 대한 보답으로 하지.”

크리스티앙이 손가락으로 제 뺨을 훑듯이 가볍게 타액을 훔친 후, 제 정액이 발려 엉망이 된 혜미의 얼굴을 이리저리 짓누르듯 만졌다.

“선물 고마워, 누님.”

그의 젖은 손이 가슴까지 내려와 그녀의 피부를 쓰다듬었다. 온통 울긋불긋한 자국이 드리운 그녀의 피부에서는 크리스티앙의 냄새가 가득했다.

“지금 네 얼굴이 얼마나 더럽고 음탕한지…. 직접 그려서 보여 주고 싶군. 아니. 너만 보기엔 아깝지. 갤러리에 전시해서 황녀의 음란함을 이 땅의 모든 국민이 알게 하는 것이 옳겠다.”

혜미는 정신을 차리려 애쓰며 제 입술을 피나게 깨물었다.

“그들은 그 꼴을 보고도 널 아름답다 찬양하겠지. 그러지 않는다면 내가 그들의 눈을 뽑고 혀를 자를 테니까…!”

그녀는 머리카락을 쥐고 있던 손으로 있는 힘껏 그의 따귀를 후려쳤다. 손이 헛나갈 거라고 생각했는데 이번에는 성공이었다. 크리스티앙의 붉은 입술에서 그보다 더 붉은 핏방울이 터져나갔다.

“나한테… 흣, 대체… 왜 이러는 거야…!”

“황제가 몸을 동하게 하는 계집을 취하는 건 당연하잖아. 내가 누군지 설마 잊었나?”

크리스티앙이 허리를 다시 움직여 박으며 내뱉었다. 혜미는 고관절에 감각이 없어진 것 같은 느낌이었다. 오로지 그와 하나로 이어진 성기의 감각만이 남아 그녀를 집어삼키는 기분. 크리스티앙이 잔뜩 성이 난 사나운 짐승처럼 으르렁거리듯 내뱉었다.

“잘못은 네가 먼저 했어. 처음 만나는 순간부터, 날 감질나서 돌아 버리게 만들었잖아. 내 눈앞에서 더러운 마법사와 혀를 섞으며…. 내 성안에서 미천한 호위 기사 따위와 짐승처럼 흘레붙으며…. 이복동생과 배를 맞추게 되리란 건 예상 못 했어?”

예상 못 했다. 혜미는 자신을 향한 황제의 마음이 이상하다는 사실까지는 예상했지만 그가 벽을 넘는 것도 모자라 완전히 무너뜨려 버릴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나는… 하아…! 널… 절대… 절대 용서 안 해…. 흑…!”

크리스티앙이 혀로 제 피를 핥으며 피식 웃었다. 작은 실소는 이내 커다란 웃음으로 번져 나갔다. 그가 그녀의 등을 팔로 안으며 제게로 휙 일으켰다. 침대 끄트머리까지 밀렸던 혜미의 몸이 그와 이어진 채로 마주 보았다.

“네가 날 용서 안 하면 어쩔 건데.”

크리스티앙이 다른 한 손으로 그녀의 엉덩이를 꽉 붙잡고 뭉근히 돌리며 광기 어린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내가 너한테 용서해 달라고, 무릎 꿇고 비는 일이 일어나기라도 할까 봐?”

크리스티앙이 조소를 이어나갔다.

“지금 네 모습을 봐. 창부와 같은 모습으로 내 위에서 허리나 돌리고 있으면서….”

움직이는 것은 그의 손이지 그녀의 몸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있으면서도 혜미는 인상을 잔뜩 일그러뜨린 채 움찔했다. 느끼지 않으려 애를 써 봐도 헛수고라는 사실은 수차례 이어진 정사를 통해 알고 있었다.

“지금도 감질나서…. 날 원해서 어쩔 줄을 모르면서….”

크리스티앙이 그의 맛이 나는 그녀의 입술을 혀로 툭, 툭, 건드리며 다시 그녀의 안에서 꿈틀거렸다. 이미 완전히 달아오른 그녀의 질벽이 더욱 강렬한 삽입을 원하며 멋대로 그의 성기를 죄고 있었다.

그녀가 그를 조일 때마다 날카롭게 빠진 크리스티앙의 눈썹이 더욱 사납게 흔들렸다. 그녀의 반응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이는 지금 이 순간 가장 가까이 마주 닿아 있는 크리스티앙이었고, 혜미는 그 사실이 미치도록 절망스러웠다.

그녀는 그와 절대로 이렇게 엮여서는 안 되는 사이였으니까.

“누이의 음란함을 이해하고 충실히 박아 주는 아우의 다정함에 고마워해도 부족할 판 아니냐고 묻고 있어.”

혜미가 그의 어깨를 움켜쥔 채, 악으로 가득 찬 목소리를 내뱉었다.

“개소리…. 지껄이지 마. 씨발 새끼야.”

“하하하.”

크리스티앙이 크게 소리 내어 웃으며 그녀의 턱을 혀로 길게 핥았다. 그의 목소리에 진심으로 즐거움이 서렸다.

“어떻게 박아 줄까. 이번엔 뒤로 해 줄까? 개처럼 박히는 걸 좋아하잖아, 누이는. 응?”

차라리 얼굴을 보지 않는 게 같다는 생각이 드는 순간, 크리스티앙이 마치 그녀의 마음을 읽은 듯 고개를 갸웃하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아아, 그건 안 되겠어. 뒤로 박히며 다른 이를 상상하기라도 하면 짜증이 날 것 같거든.”

혜미가 대답하지 못한 채 숨을 몰아쉬었다. 피식거리던 크리스티앙이 천천히 인상을 구겼다.

“이런 씨팔…. 정말인 모양이네…?”

혜미의 심장이 쿵쿵 크게 뛰었다. 크리스티앙이 그녀에게 날카로운 콧날을 누르며 잔인하게 내뱉었다.

“설마 이제껏 나와 섹스하며 다른 이를 떠올렸나…?”

솔직히 말하자면 그럴 기회는 없었다. 크리스티앙의 상상력은 그녀의 예상보다 한층 더 앞서 있었지만 혜미는 그를 보며 이를 갈듯 내뱉었다.

“당연한 거 아냐?”

혜미가 아래에서 위로 치받는 그에게 사정없이 흔들리며 간신히 입을 열었다. 또다시 절정에 오르려는 몸뚱이에 저주를 퍼붓고 싶었다.

“뭐?”

크리스티앙이 우뚝, 움직임을 멈춘 채 짤막하게 되물었다. 그의 성기가 그녀의 내벽에서 커다랗게 맥동했다.

“…약을… 먹지, 않았다면… 내가 너와 이러는 일은 죽어도 없었을 테니까….”

크리스티앙의 미간이 사납게 일그러졌다. 혜미는 핏발이 선 눈으로 그를 노려보며 잇새로 내뱉었다.

“솔직히 말해 봐. 너… 자신 없지? 사람의 마음을 얻는 방법 따위, 사실 아무것도 모르지? 그저 죽여 버리겠다고 협박하면 모든 게 다 네 것이 될 것 같지…?”

오만한 황제의 얼굴이 더욱 차갑게 바뀌었다. 여유를 가장했던 얼굴에 삽시간에 분노가 퍼진다.

“입 닥치지 않으면 죽여 버리겠다.”

“죽여 이 새끼야…. 죽일 수 있으면 당장 죽이라고!!!”

악에 받쳐 시뻘게진 얼굴로 혜미가 소리쳤다.

“…넌 이딴 식으로 여자를 가지는 방법밖엔 모르지! 난 네가 오히려 불쌍해…! 마음을 보이며 가까워지는 방법 따위… 서로의 반응을 살피며 상대를 뜨겁게 안는 일 따위는 해 본 적도 없고, 평생 알지도 못할 테니까…!”

질구에서 성기가 쑥, 빠져나간다 싶었다. 고통스러울 정도로 진정되지 않는 몸뚱이와는 별개로 드디어 크리스티앙을 자극시키는 데 성공했다는 것에 혜미가 안심한 것도 찰나였다. 그녀의 몸이 침대 위에서 휙, 하고 돌아간 순간이었다.

“아흑…!!!”

혜미의 보랏빛 눈동자가 크게 뜨였다.

“설교는 잘 들었어. 그런데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는 게, 있어서 말이야….”

거칠게 들어차는 압박감에 혜미는 말도 잇지 못한 채 호흡을 멈추었다. 너무 깊다. 몸을 반쪽으로 쪼개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내가 왜 네게 구걸해야 하지…?”

벌을 주듯 찍어 내린 크리스티앙이 그녀의 등 뒤에서 잔인하게 속삭였다.

“내가 왜, 널 가지며 네 반응 따위를 살펴야 하는지 말해.”

크리스티앙이 잔인하게 입술을 끌어 올렸다. 방향을 잃고 허우적거리는 그녀의 팔목을 가볍게 짓누르며 크리스티앙이 악하게 속삭였다.

“이제 넌 날 절대 잊지 못하게 되겠구나.”

혜미는 그를 밀어내려 했지만, 약에 푹 절여진 몸으로는 허사였다.

“내가 널 가지는 데 네 허락 따윈 상관없어. 그게 나의 자리야.”

엎드려 부들부들 떠는 그녀의 얼굴을 억지로 돌리며 그가 혀를 가볍게 찼다.

“숨을 또 제대로 못 쉬고 있잖아.”

당연한 일이었다. 몸이 반으로 쪼개지는 기분이었으니까. 엄청난 압박감에 혜미는 호흡을 제대로 이어나가기조차 힘이 들었다.

“내가 숨구멍을 제대로 뚫어 줄게. 입 벌려 봐.”

크리스티앙이 작게 중얼거리며 웃었다.

“죽일 거야…. 내가, 하아…. 널 죽여 버릴 거라고.”

“날 죽이면 너도 죽을 각오를 해야 할 텐데. 그럼 우리가 같이 죽는 건가?”

크리스티앙이 그녀를 보며 미친놈처럼 인상을 찌푸렸다.

“뭐, 어쩌면 내 인생에서 가장 재미있는 상황이 될지도 모르겠군.”

찢어진 입술은 웃고 있었지만 눈빛은 그렇지 않았다. 숨을 몰아쉬며 낮게 속삭이는 그의 눈동자에 무언가가 깊게 일렁였다.

“난 언제나…. 내가 이 좆같은 황성에서 태어나지 않았으면, 하고 바랐거든.”

살의에 찬 눈으로 그를 노려보던 보랏빛 눈동자가 가늘게 흔들렸다. 혜미의 가슴속에서 뜨거운 무언가가 울컥거렸다.

“나는 이 지옥 같은 곳에서… 내가 태어난 의미를 찾으려 이제껏 기를 쓰며 살았거든.”

크리스티앙의 시선은 마치 자욱한 안개가 낀 것처럼 아득하게 보였다. 신기루처럼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 같은 눈빛을 보며 혜미는 입술을 꽉 깨문 후 작게 내뱉었다.

“내가… 내가 널, 흣…. 도와줄 수 있어. 크리스티앙.”

크리스티앙은 자신의 아래에 짐승처럼 깔린 굴욕적인 상황에서도 저따위 말을 내뱉는 그녀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첫 만남부터 지금까지, 끊임없이 그를 열 받게 만드는 건 거짓이 섞이지 않은 그녀의 저 눈동자였다. 너무도 바보같이 순수해 환상인 줄로만 알았던 시간.

“괜찮아…? 아. 미안. 죽은 줄 알고.”

너와 내가 이곳이 아닌 다른 곳에서 만났더라면 어땠을까. 크리스티앙이 마치 혼잣말하듯 그녀의 말을 되뇌었다.

“네가 날 돕는다고…?”

“그래.”

작게 고개를 끄덕이는 둥근 눈동자에 뜨거운 눈물이 맺혔다. 크리스티앙은 그 눈을 영원히 박제해 버리고 싶다는 강렬한 충동에 사로잡혔다.

“날 황제로 인정하고… 스스로 자리에서 물러나, 크리스티앙. 그래서 네 진짜… 인생을 되찾으면 돼.”

크리스티앙은 대답 대신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

마주한 두 시선에 서로가 입에 담지 못하는 진실이 느리게 교차했다. 혜미가 모든 것을 눈치챈 그를 보며 애원하듯, 달래듯 속삭였다.

“아직 늦지 않았어, 크리스티앙. 지금이라도 충분히… 그럴 수 있어…. 내가… 내가 널 도와줄 테니까….”

툭, 하고 무거운 눈물이 젖은 시트에 떨어졌다. 마침내 천천히 그녀에게 다가온 그가 눈물 젖은 그녀의 입술을 이로 뜨끈하게 물었다가 떨어졌다.

“거절합니다. 누님.”

그녀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내민 손길을 내치는 그의 태도는 오만하고도 정중했다. 혜미의 눈빛에 분노와 함께 희미한 안타까움이 뒤섞였다.

“넌… 자리를 빼앗길까 평생 불안해하며 두려움 속에 사는 게… 지치지도 않니…?”

“이 자리에 미처 올라와 보지도 못한 이에게 들을 말은 아니겠지.”

“누이를 탐한 미친 황제라고 손가락질받아도 좋아? 희대의 폭군이라 평생 욕을 들어도 상관없어?”

목소리를 새되게 높이는 혜미의 목소리에 울음이 번졌다. 크리스티앙이 그녀의 아랫입술을 혀로 그리듯 핥으며 화려한 불꽃처럼 웃었다.

“장담컨대, 후대 사람들의 입에 가장 많이 회자되는 황제는 바로 지금, 네 안을 꽉 채우고 있는 남자일 것이다. 사람들은 내가 군주로서 통치하는 강력한 시대를 그리워할 거고, 그 황금 같은 시절에 태어나지 못했음을 통탄하며 나의 환생을 간절히 바라겠지. 이 제국 역사의 가장 빛나는 페이지는 바로 나야. 그게 바로 내가 선택한 내 삶의 의미다.”

절대로 잊혀지지 않는 것. 모든 사람들의 머릿속에 영원히 강하고 아름다운 황제로 기억되는 것. 그게 크리스티앙이 살아온 인생의 전부였다.

“…크리스티앙….”

“넌 나를 이길 수 없어.”

크리스티앙이 그녀의 등에 제 무게를 실으며 중얼댔다.

“내가 너에게 져 주지 않는 이상은.”

보랏빛 눈동자가 가늘게 뜨였다. 그녀의 호흡이 거칠어졌다. 쿵, 쿵, 크리스티앙의 심장 소리가 그녀의 등을 타고 그대로 울려 퍼졌다.

“져 주고 싶게 만들어 볼 생각은 없나?”

“하아…. 흐으….”

“누가 알아? 누이가 열과 성을 다해 날 받아들여 기쁘게 한다면 내가 고리타분한 원로원을 다 죽여서라도 널 황후로 세우고 평생 곁을 허락해 줄지.”

크리스티앙의 상식과 그녀의 상식은 교차점을 지나치며 반대 방향으로 어긋났다.

“겨우 그딴 걸… 내가 왜 바랄 거라 생각하는데?”

“이 제국을 다 가진 이를 소유하는 게, 어떻게 겨우 그딴 일이 되지?”

땀에 젖은 피부를 타고 전달되는 그의 심장 박동이 더욱 강하게 느껴졌다. 늘 또렷하던 그의 말투가 희미하게 떨리는 것까지도.

“너는… 내 말이 무슨 뜻인지, 알아듣지 못할 정도로 백치인가?”

그녀는 바보가 아니었다. 그에게 강제로 범해지는 상황에서도 도움의 손길을 내밀었던 자신처럼, 크리스티앙 역시도 지금 스스로를 최대한 굽히고 있다는 사실을 모를 수가 없었다.

“…나도 거절할게. 크리스티앙.”

그와 같은 답을 되돌려 주는 것이 쉽지만은 않은 이유는 바로 그 때문일 것이다. 크리스티앙이 일그러진 얼굴로 조금 웃었다.

“역시, 우린 이렇게 될 수밖에 없는 거구나.”

혜미는 그에게서 시선을 돌린 후, 눈앞에 보이는 푹신한 베개를 꽉 물었다. 신음을 내지 않기 위해서만은 아니었다. 그녀는 지금 이 순간 그의 황금빛 눈동자에 가득 찬 실망을 외면하고 싶었다.

“나쁘지 않아. 무언가를 강제로 손에 넣는 것은 내가 제일 잘하는 거니까. 단, 한 가지만 기억해라.”

일그러진 발음으로 속삭인 크리스티앙이 그녀를 끌어안은 채 그 누구에게도 허락되지 않은 공간을 격렬히 치받기 시작했다.

그래. 혜미는 차라리 이게 더 낫다고 생각했다. 크리스티앙 역시도, 그녀가 그를 연민하기보다 증오하길 바랄 거라는 예감이 희미하게 들었다.

“나는 네게 분명히 기회를 주었고, 그걸 거절한 쪽은 너라는 걸.”

“…….”

“그러니 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난다 해도 절대 후회하지 마.”

그는 혜미의 머리칼을 잡아채고 몸부림치는 그녀에게 강제로 입을 맞추었다. 키스에 비릿한 피 맛이 섞여 들었지만 크리스티앙은 허리의 왕복을 멈추지 않았다. 크리스티앙은 말 그대로 그녀의 모든 것을 송두리째 가졌다. 바깥에서 세찬 바람이 휘몰아쳤다. 깜깜한 겨울밤은 동이 틀 기미도 보이지 않고 있었다.

크리스티앙에게도, 그녀에게도, 잊을 수 없는 밤이었다.

하이데거의 입술에서 하얀 입김이 길게 샜다. 아직 사위가 어두운 새벽, 먼동이 푸르스름하게 밝아오는 아침이었다. 잠시 망설이던 그가 작게 목을 가다듬은 후, 이윽고 입을 뗐다.

“문을 열어도 되겠습니까, 폐하.”

안에서는 아무런 답이 없었다. 빗장이 바깥에서 걸린 오두막은 누가 문을 열지 않는 한, 밀실과 같았다. 불안한 예감에 그가 인상을 찌푸리는 순간, 안에서 희미한 말소리가 들렸다.

“들어와.”

하이데거는 돌로 연결되어 묵직한 나무 빗장을 한 손으로 가볍게 벗겨 낸 후, 심호흡을 하고 문을 열었다.

“왜 그러고 서 있지?”

크리스티앙의 목소리에 하이데거는 서둘러 정신을 차리려 했지만, 눈앞의 광경에 쉽게 진정을 할 수가 없었다.

“…구둣발에 아교칠이라도 한 건가, 아니면 내게 감기라도 걸리게 할 셈인 건가.”

어디 물에라도 빠졌다 나온 사람처럼 푹 젖은 황금빛 블론드 사이로 어둠을 품은 눈동자가 빛을 냈다. 어스름한 새벽빛에 그가 안고 있는 여자의 나신이 생생하게 들어왔다. 그녀의 등에 선명하게 남은 채찍질의 상흔까지도.

“…송구합니다. 폐하.”

하이데거는 한 발짝 안으로 들어선 후, 서둘러 문을 닫았다. 실내는 난장판이었다. 양탄자에는 여기저기 피가 튀어 있었고, 옷걸이는 쓰러져 바닥에 나뒹굴었다. 침대의 시트는 엉망으로 젖은 채 발치에 아무렇게나 둘둘 말린 채였다. 뜨끈한 수증기가 피어오르는 약탕에는 방금까지 누군가 머물렀던 것처럼 수면이 흔들렸다.

“…….”

하이데거는 흠뻑 젖은 황제와, 역시나 머리카락에서 물을 뚝뚝 흘린 채로 그에게 안겨 있는 여자를 보며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크리스티앙이 황녀가 있는 ‘폴린의 뜰’로 향했다는 보고를 처음 들었을 때 그는 이미 직감했었다. 그가 모시는 황제는 어떠한 일을 허투루 벌이는 사람이 아니었다.

황녀를 여인으로 취하겠다고 말한 황제가 택한 장소는 선대 황제가 자신의 누이와 비밀스러운 정을 나누었다고 알려진 곳이다. 크리스티앙은 스스로의 선택을 반복되는 역사의 한 페이지로 남길 생각인 것이다.

“표정이 이상하군. 꼭 못 볼 거라도 본 사람처럼.”

크리스티앙이 안고 있는 여자의 벗은 어깨에 살짝 입을 맞춘 후 그를 향해 중얼거렸다. 안긴 여자가 희미하게 신음하며 몸을 떨었다. 맙소사. 그들이 여전히 접붙어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하이데거의 얼굴이 더욱 굳었다. 그는 시선을 아래로 내리지 않으려 죽을힘을 다했으나 쉬운 일이 아니었다.

“보고를… 드려야 할 일이 있습니다. 폐하.”

“자네가 직접 온 걸 보고 그럴 거라 생각했어.”

크리스티앙이 손으로 마치 하프라도 연주하듯 천천히 그의 품에 안겨 정신을 잃은 여자의 등을 훑었다. 정확히는 상흔이 남은 상처의 위였다. 하이데거는 황제의 손가락이 자신이 남긴 상처를 보란 듯이 짚어 내려가다가 마침내 풍만한 둔부를 꽉 움켜쥐는 것을 보며 두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떴다.

“보고해.”

황제가 마치 노래라도 부르는 것같이 나른한 목소리로 그에게 말했다. 하이데거는 절망적인 기분을 느끼며 입을 뗐다.

“베네딕트 블라이가 사망하였습니다.”

정신을 반쯤 잃고 있던 혜미가 무거운 눈꺼풀을 천천히 들어 올렸다. 희미한 대화 내용 중 이것만은 흘려들을 수가 없던 탓이었다. 그녀가 움찔하자 둔부가 더욱 단단히 잡혔다.

“그렇군.”

크리스티앙이 무릎을 벌려 자세를 잡은 후, 그녀의 엉덩이를 잡아당기듯 위로 들었다가 서서히 놓았다. 엉망이 된 바닥에 주르륵, 미끄덩한 액체가 떨어졌다. 접합된 아랫도리에서 흘러나온 정사의 산물을 못 본척할 수가 없다.

“보고할 일은 그것뿐인가?”

“…예.”

“그럼 좀 나가주겠어?”

황제가 낮은 신음이 섞인 목소리를 천천히 내뱉었다. 하이데거는 불경함을 무릅쓰고 그를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황녀와 하나로 이어져 있는 모습을 내보이는 황제의 움직임에는 거리낌도, 수치도 없었다. 아니. 마치 그에게 확인이라도 시키려는 것처럼 노골적이라 대공의 얼굴에 피가 몰릴 정도였다.

“흐… 읏….”

쪽, 쪽, 황제의 붉은 입술이 얼룩덜룩해 시커멓게 보이는 황녀의 목덜미를 빨아들였다. 그에게 축 늘어지듯 안긴 그녀에게서 앓는 듯한 신음이 흘러나왔다. 크리스티탕의 서재에서 사라진 미약은 평소 기준치의 다섯 배를 넘긴 양이었다. 정신을 잃고 쓰러지지 않은 것만으로도 놀랄 일이다.

“난 아직 누이와의 시간이 다 끝나지 않았거든.”

크리스티앙이 그녀의 목에 이를 박고 쭉, 빨아들이자 그의 허벅지 위로 늘어진 그녀의 다리가 꿈틀거리며 떨렸다. 멀쩡한 공간이 남아 있지 않은 것 같은 피부에 울혈이 또 하나 늘었다.

“볼 거면 계속 보든지.”

찔걱. 찔걱. 황녀를 들어 안고 자리에서 일어선 크리스티앙이 허리를 움직이며 쉰 목소리를 이었다.

“송구합니다. 나가서 대기하겠습니다.”

그를 보지 않으려 안간힘을 쓰며 고개를 휙, 돌리는 하이데거에게 마지막 명령이 떨어졌다.

“두 시간 뒤에 마차를 대기시켜. 누이가 피로하니 마차로 모실 것이다. 말은 자네가 직접 몰도록. 보고는 그 다음에 받지.”

살이 부딪히는 소리가 점점 커지자 누군지 모를 이의 호흡 역시 격해졌다. 대공은 배덕한 욕망을 드디어 채운 황제가 한 번으로 만족하고 모든 것을 끝내길 바랐던 자신이 바람이 얼마나 어리석었는지를 깨달았다. 크리스티앙의 욕망의 불씨는 자신이 당긴 것이나 다름없었다.

***

“소식 들었어? 교황이 죽었다는군.”

“바짝 말라 뼈만 드러난 백골로 발견되었다는데. 개죽음이 따로 없지 뭐야. 황궁에서는 곧 있을 겨울제 때문에 쉬쉬하면서 장례도 간소하게 처리될 예정이라고 하네. 아무리 그래도 선대 교황이자, 황녀의 연인이었다는데. 너무 초라한 죽음이 아닌가 싶어.”

제국력 179년 겨울, 아메티스는 연신 쏟아지는 뉴스로 바쁜 겨울을 맞이했다. 선술집에서는 교황의 죽음과 함께 황녀가 호위 기사를 끌어안고 채찍을 맞았다는 사건이 술안주로 입에 오르내렸다.

“말이 나왔으니 말인데, 그건 대체 어떻게 된 사건인지 알아?”

“암살 시도를 했다는 누명을 썼다는데…. 아니, 사람들 다 보는 앞에서 자살 행위를 할 사람이 어디가 있냐고.”

“황녀가 호위 기사 대신 대공에게 얻어터지느라 몸이 곤죽이 되었다고 들었소. 역시… 바깥에서 구르면서 살아서 그런지 좀 특이하지?”

“노예이건 귀족이건, 나이가 많건 적건, 그녀에게 말을 걸면 항상 같은 눈높이에서 들어 준다고 들었소. 파병으로 초토화된 마을 하나에서 자식과 남편을 모두 잃은 여인네 하나가 생난리를 쳤는데도 벌을 내리기는커녕 언젠가 꼭 빚을 갚겠다고 약조를 했다지 뭐요.”

“감히 황족에게 그따위 말을 지껄였는데도 죽이지 않았다는 건가?”

“궁에 드나드는 시종들 말로는 지위가 낮은 사람들에게도 허물없이 군다고 합디다. 우리한테야 나쁜 일이 아니겠지만 뭐…. 폐하의 눈 밖에 나지 않기를 바라는 수밖에.”

십수 년 만에 수도로 귀환하는 호아킴 장군에 관한 이야기도 떠들썩했다.

“호아킴이 오면 아메티스의 기강도 좀 잡히지 않겠소?”

“그러게 말이야. 이 대도시에서 아직도 인신매매가 판을 치고 있으니…. 이러다가 아이들 씨가 마를까 두렵다니까.”

“맥주 한 잔과 사이다 한 잔 부탁합니다.”

짤랑. 동전을 떨어뜨리며 망토를 걸친 한 소년이 바의 주인을 향해 입을 열었다. 얼큰하게 술을 마시며 주인장과 대거리를 하던 사내가 소년의 드러난 팔목을 보며 능글능글하게 입을 열었다.

“어이, 무슨 사내가 피부색이 이렇게 곱나.”

머리 후드를 뒤집어쓴 소년은 그를 쳐다보지도 않고 입을 열었다.

“맥주는 큰 걸로 주시죠.”

“목소리도 아주 곱고 말이야. 그러고 보니 머리도 계집애처럼 긴 것 같은데…!”

망토를 벗기려던 사내의 팔목을 누군가가 가볍게 잡아 저지했다.

“뭐, 뭐요…. 당신은…. 흣…!”

확 뿌리치려던 사내는 엄청난 힘으로 팔목을 비트는 힘에 얼굴이 시뻘게졌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지만 그의 팔은 이미 반대로 돌아가는 중이었다.

“왜 함부로 손을 대십니까.”

“이, 이거 놔. 이거 당장 안 놔…!!!”

사내는 키가 훌쩍 큰 잿빛 머리의 미남자를 보며 시뻘게진 얼굴로 고기를 자르던 나이프를 휘둘렀다. 그의 몸을 향해 칼을 세차게 휘둘렀는데 무언가 단단한 것이 부딪히는 느낌이 들었다.

툭.

잿빛 머리의 미남자가 바닥에 떨어진 의수를 보며 미간을 조금 찌푸렸다. 잡혀 있던 사내의 팔이 자유로워짐과 동시에 그가 쥐고 있던 칼이 순식간에 잿빛 머리로 이동했다.

무언가 휙, 바람이 부는 느낌이 스치더니 사내의 턱이 휑해졌다. 부숭부숭했던 턱수염만 싹 밀린 한쪽 턱에 한기가 드는 기분에 사내가 몸을 가늘게 떨었다. 하마터면 베이는 것은 자신의 얼굴 살점이 될 뻔했던 까닭이었다.

날카롭게 벼려진 칼도 아니고 고깃덩이나 자르는 무딘 나이프를 이 정도로 움직일 수 있는 이는 평범한 사람이 아니었다. 설마 전쟁에 참전한 기사인가…? 겨울제를 맞이해 어디 다른 지방의 귀족이 도시로 놀러 왔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자 간담이 서늘했다.

“남의 체모에 함부로 손을 대면 이런 기분이 들지 않겠습니까?”

나직하게 내뱉는 그의 뒤에서 망토가 벗겨진 소년, 아니 소녀가 바닥에 떨어진 그의 의수를 집어 들었다.

“괜찮니, 아일라?”

눈부신 금발 머리 소녀의 양 뺨이 장밋빛으로 붉게 물들었다. 그녀의 실력이라면 수작을 거는 남자들 따위는 힘도 들이지 않고 가뿐히 처리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세드릭은 항상 그녀를 진심으로 염려했다.

“네. 세드릭 님. 전 아무렇지도 않아요.”

그녀는 세드릭에게 전달할 이든의 메시지를 몸에 지닌 채 보름 동안 흙먼지를 뒤집어쓰며 쉬지 않고 말을 달렸다. 세르노티성에서 그와 재회했던 날 밤을 떠올리니 또다시 가슴이 두근거리며 눈물이 날 정도로 행복한 기분에 심장이 벅차올랐다.

“다행이구나.”

세드릭이 그녀에게 눈을 맞추며 부드럽게 웃었다. 아일라는 아직도 그와 눈을 보고 이야기하는 것이 부끄러웠다. 그것보다 더욱 부끄러운 일을 매일 밤마다 하고 있다는 사실을 믿을 수 없을 정도다.

“말을 맡기고 오느라 늦어서 미안해.”

그의 입에서 나오는 달콤한 사과를 들을 때마다 아일라의 가슴이 얼마나 떨리는지, 세드릭은 전혀 모르고 있는 게 틀림없었다.

“미안하구나, 아일라. 하아, 힘들게 하여 미안하다. 나를 부디… 용서하렴.”

“전 괜찮아요…. 아, 흣…. 세드릭 님…. 으응!”

“그럼… 조금만 더 날 허락해 줄 수 있겠니? 정말 미안해.”

단정한 세드릭의 얼굴이 집요해져 그녀를 파고드는 표정이 불쑥불쑥 떠오를 때마다, 아일라는 일상이 불가능할 정도로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세드릭 님의 그런 얼굴을 볼 수 있다니. 살아 있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차피 그녀의 삶은 숲에서 세드릭을 처음 만난 날, 그가 새로이 선사한 것이나 다름없지만.

그녀는 정신을 차리려 애쓰며 그에게 다가섰다.

“…잠시만 가만히 계세요.”

세드릭은 그에게 의수를 끼워주는 그녀의 손놀림을 가만히 지켜본 후, 아직도 긴장이 가시지 않는 표정으로 서 있는 사내의 옆에 의자를 빼고 앉았다.

바에는 때마침 나온 음료가 준비되어 있었다. 맥주를 아일라에게 건네고 자신은 알콜 도수가 거의 없는 사이다를 한 입 홀짝인 후, 그가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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