풀이 길게 자란 숲의 입구에서 지휘관 하나가 그녀에게 머리를 조아렸다.
“말을 타고 갈게요.”
“예? 위험해서 안 되십니다. 정히 그러하시다면 저의 근위병 뒤에 타시면…?”
혜미는 그녀를 중병 환자 취급하는 지휘관에게 다가간 후, 투레질하고 있는 그의 말에 말도 없이 훌쩍 올라탔다. 날렵하게 몸을 날리는 그녀를 보며 지휘관이 당황한 것도 잠시였다.
“저, 저하?”
“저 길 모르는데. 제가 선두에 서도 돼요?”
“아닙니다. 제가 안내하겠습니다.”
눈치 빠르게 병사 하나가 얼른 말에서 내리자 지휘관이 빈 말에 올라탄 후, 부츠로 말의 뱃가죽을 걷어찼다. 혜미가 고삐를 바짝 말아 쥐고 그의 뒤에 따라붙자 그녀의 뒤로 황실 근위대 예닐곱이 줄을 지었다.
약탕이 있다는 ‘폴린의 뜰’이 플라틴성과 족히 한 시간은 동떨어져 있다는 사실이 무척이나 반가웠다. 혜미는 발터를 일부러 데려오지 않았다. 지금 이 시각 그는, 그녀의 명에 따라 서쪽 엘데이라성의 연무장에서 다른 기사들과 함께 훈련을 하고 있는 중이었다.
혹시나 의심의 눈길을 피하기 위해 모두에게 알리바이를 최대한 많이 만들어 놓는 편이 좋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베네딕트의 실종에 그녀와 세르노티의 기사들 중 누구도 관련이 없다는 사실을 확실히 하기 위해서는 이 방법이 가장 좋았다. 쓸데없는 희생자를 최대한으로 줄이기 위한 그녀의 노력이었다.
빽빽하고 키 큰 나무가 들어차 대낮인데도 어두컴컴한 숲길을 벗어나자 호젓한 풍경이 그녀의 눈앞에 펼쳐졌다. 햇빛이 내리쬐는 양달에 높이가 야트막한 단층 오두막이 하나 자리하고 있었다. 그곳이 약탕이 있는 곳 같았다. 그녀의 예상보다 훨씬 소박한 곳이었지만 지금은 뭐라도 상관없었다.
히이잉.
선두에 선 지휘관이 고삐를 잡아당겨 말을 멈추곤 뒤로 방향을 틀었다.
“이곳입니다. 저하. 여기서부턴 혼자 들어가셔야 합니다.”
“알겠어요. 좀 무서우니까, 저 목욕 끝날 때까지 여기서 아무도 가지 말고 꼼짝 말고 대기해 주세요.”
“예?”
“유령이라도 튀어나올까 봐 무섭다고요.”
“…알겠습니다.”
붉은 제복을 입은 지휘관이 황당한 표정을 짓는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아직 해가 지지도 않은 오후였고 눈앞의 풍경은 조용하긴 해도 음산한 것과는 거리가 멀었기 때문이다. 차라리 평화롭다면 모를까.
“저 원래 좀 오래 씻어요. 그래도 괜찮죠?”
혜미는 저곳에 틀어박혀 일이 벌어질 때까지 시간을 보낼 계획이었다. 베네딕트가 있는 곳에서 무슨 일이 벌어진다면 어떤 방식으로든 이곳에 있는 사람들의 귀에 그 소식이 들어올 거라는 예상에서였다.
“다, 당연한 말씀입니다. 원하시는 만큼 충분히 피로를 푸시면 됩니다. 저희들은 여기서 한 발짝도 움직이지 않고 저하를 기다리고 있을 것입니다.”
“네, 꼭이요.”
지휘관에게 고개를 꾸벅 숙여 보인 후, 혜미가 말에서 내려 오두막으로 걸어갔다. 약 일주일 동안 바깥에 나오질 않아서 그런지 목덜미를 휘감는 공기가 파티 때보다 한층 더 썰렁해져 입김이 나올 정도였다.
“아, 추워라.”
그녀는 고삐를 잡고 달리느라 빨개진 손을 비비며 걸음을 빨리했다. 저 안에 약탕이 있긴 한 것 같았다. 과연 뾰족한 통나무를 마치 벽돌처럼 이어 만든 오두막의 틈새로 희미한 연기가 일렁이고 있었다.
삐걱.
그녀는 조심히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소박했던 외관과는 달리 안은 기대 이상이었다. 드문드문 역하지 않게 은은한 향을 내는 초가 타오르고 있는 실내는 적당히 어둑했고, 벽에는 빨간 산수유 열매가 맺힌 나무 다발들이 걸려 있어 삭막한 분위기를 없애고 있었다.
중앙에는 성인 다섯 정도가 들어갈 수 있을 것 같은 정사각형 모양의 탕이 자리했다. 따끈한 연기가 피어오르는 수면에는 신선한 장미꽃잎이 흩뿌려져 있었고, 구석에 위치한 물 항아리 조각에서는 따끈한 샘물이 퐁퐁 흘러나오는 중이었다. 주변에서 온천이 터진 건 확실한 듯했다.
“…나쁘지 않잖아?”
그녀가 작게 소리 내어 중얼거렸다. 그녀가 한국에서 목욕탕집 딸이었기 때문만이 아니라, 이곳은 긴장을 풀기에 충분히 조용한 공간이었다. 밖에서 새소리가 작게 들려왔다.
그녀는 아무도 없는 주변을 다시 한번 둘러본 후, 빠르게 옷을 벗었다. 대충 시간만 때울 생각이었는데 이렇게 된 이상 뜨거운 물에 몸을 담그고 싶다는 욕구를 참을 수가 없었다.
찰랑.
완벽하게 나신이 된 그녀가 물에 미끄러지듯 몸을 담갔다. 따끈한 물이 피부에 착 달라붙듯 휘감자 여릿한 그녀의 살갗에 기분 좋은 소름이 돋으며 몸이 부르르 떨렸다.
“아아.”
입 밖으로 감탄사가 절로 나왔다. 허풍이라고 생각했던 의사의 말은 사실인 모양이었다. 찢긴 상처 아래에서 욱신거리던 통증이 빠른 속도로 둔해지고 있었다. 혜미는 몸의 긴장을 풀고 숨을 길게 내쉬며 목 아래까지 몸을 완전히 담갔다.
툭.
습기가 맺힌 물방울이 삼각형 모양으로 솟은 통나무 지붕에서 그녀의 이마 위로 떨어졌다. 혜미는 나무 틈새 사이로 아주 미세하게 비켜 들어오는 오후의 겨울 햇살을 느끼며 잠시 혼자 있는 기분을 만끽했다.
휘잉, 하고 오두막을 흔드는 희미한 바람 소리마저 고요했다. 아메티스에 입성한 이후, 홀로 있어 본 적은 난생처음이라는 사실을 인지하자 생각이 조금 더 깊어졌다.
머릿속에 드는 생각은 여러 가지였지만 그중 가장, 큰 부분을 차지하는 것은 역시 기억을 잃은 발터였다.
당황스럽지 않다면 거짓말이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그녀는 지난 며칠 동안 정신이 멍했다. 발터가 자신과 함께했던 소중한 기억을 까맣게 잊었다는 사실을 믿을 수가 없어 몇 번이나 확인해 보았지만 결과는 같았다.
‘…어째서?’
로비나에서 꼬마 마법사들을 만나기 위해 오두막으로 들어갔을 때, 발터는 타우의 눈을 보고도 멀쩡했다. 혜미는 그것을 그의 엄청난 정신력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발터의 머릿속이 오로지 그녀에 대한 안위만으로 꽉 차 있었기 때문에. 강한 의지로 꽉 찬 머릿속을 비집을 틈이 없었던 거라고 판단했던 것이다.
하이데거의 마력이 그 정도로 강력했던 걸까. 아니면 맞은 충격이 너무 심했던 걸까. 보통 사람이라면 쇼크사했을 채찍질을 견뎌 냈으니 머리가 어떻게 되는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혜미는 문득 발터의 생명에 지장이 없음에 감사했다. 만일 그에게 더한 일이 생기기라도 했다면…. 상상하는 것조차 끔찍해 그녀는 고개를 세차게 흔들었다.
정신 차리자.
기억을 잃은 발터에게 서운해하고 있을 틈이 없었다. 아니, 그녀가 그를 원망하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었다. 혜미는 긴 잠에서 깨어난 자신에게 발터가 했던 일들을 떠올려 보았다. 숨 가쁘게 달려왔던 지난 1년 동안의 시간.
발터는 3년 만에 눈을 뜬 후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는 그녀의 앞에 무릎을 꿇고 기사의 맹세를 했다. 지난 시간을 이야기해 주면서 단 한 번도 짜증을 내지 않았다. 머릿속에 구멍이 뻥 뚫린 것 같은 그녀에게 실망하는 모습을 보인 적도 없었다. 그는 단 한순간도 그녀의 곁을 떠나지 않고 지켜 주었다. 두려워하는 그녀를 이해하고 늘 함께해 주었다.
발터의 말에 따르면 그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기억을 잃었다고 해서 그녀라는 사람이 달라지는 것은 아니었으니까. 두 사람 사이에 분명히 존재했던 일들이 사라지는 것도 아니다.
툭.
물방울이 이번에는 그녀의 손등으로 떨어졌다. 긴 시간 김이 모락모락 피어나는 뜨거운 물에 몸을 담그고 있으니 시야가 흐릿했다. 어린 시절, 사람이 없는 목욕탕에서 혼자 놀았을 때가 생각나며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혜미는 길게 숨을 내쉬었다. 그러고 보면 어릴 때는 항상 심심했던 것 같다. 일은 바빴지만 그녀를 누구보다 사랑하는 평범한 부모님이 있는 집안에서 자랐는데도 혼자 멍하니 공상에 빠질 때가 많았다.
오후의 햇살이 비쳐드는 한가한 목욕탕. 바깥에서 흐릿한 말소리가 들리는 공간에서 시간을 죽이고 있으면 마치 내가 이 세상에 혼자 있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형제라도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친구들이랑 어울리는 것도 쉽지 않았다. 그래서 외로움을 잊으려 더욱 단순하게 살았던 것 같다. 생각하는 시간을 줄이고 늘 무언가 혼자 열중할 수 있는 대상을 찾으면서.
“이제 점차 기억을 되찾으실 겁니다.”
베네딕트의 말은 사실이었다. 황금성에 돌아온 이후, 날이 지날수록 어린 시절의 기억들이 하나하나 그녀의 머릿속에 자리를 잡아 갔다. 떠오르는 기억의 대부분은 베네딕트와 함께한 시간이었다. 결국, 이 넓은 성에서 그녀가 기억하는 건 단 하나뿐이었다는 말이 된다.
지독하게 심심했었다. 엉엉 울고 싶을 정도로.
어린아이가 느끼기에는 너무 깊었던 고독을 일찍 깨쳐 버렸기 때문에 그녀는 평화로운 세르노티의 삶이 더 좋았는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왜…?
혜미는 말없이 인상을 찌푸렸다. 왜 아직까지 세르노티에서 이든으로 살았던 기억만 이토록 희미한 건지 이해를 할 수가 없었다.
가끔씩 섬광처럼 문득문득 떠오르는 이미지는 있었다. 동료를 배신하고 그녀를 찔렀던 페터를 기억했던 순간이 그러했고, 발터와 헛간에 처박혀 함께 만들었던 수신호를 떠올렸던 순간 역시 그랬다.
페터를 알아챈 것은 그녀를 암살하러 카플란이 쳐들어왔던 날 밤이었고, 발터의 수신호가 떠오른 것은 리가스에게 죽을 뻔하다가 겨우 살아난 때였다. 생각해 보면 전부 다 감정이 이성을 넘어 극단으로 내몰렸던 상황이다.
발터.
…발터.
혜미는 눈을 감고 그와의 기억을 떠올리려 애를 썼다. 사실, 그녀가 이제껏 노력해 보지 않은 건 아니었다. 하지만 이전 시간을 더듬어 보려고 하면 가슴이 격하게 울렁거리며 두려움이 번지고 눈물이 치밀어 올라 참을 수가 없었다.
이제껏 꽁꽁 묻어 두었던 두려운 무언가가 파헤쳐지며 완전히 무너져 내릴 것 같은 절망적인 기분이 들었다.
마치 지금처럼.
결국 혜미는 집중하려던 걸 포기한 후, 숨을 크게 들이쉬고 물속에 머리까지 집어넣어 버렸다. 보글보글. 자잘한 물방울이 수면 위로 솟아올랐다. 발터와 함께 숨 참기 시합을 했던 것이, 그녀 스스로의 기억인지 아니면 발터에게 들은 이야기 속의 이미지인지 확실히 알 수가 없었다.
***
상아를 섬세하게 깎아 만든 담뱃대에서 회색 연기가 원을 그리며 둥그렇게 피어올랐다. 긴장한 얼굴로 보고를 마친 황실의 주치의는 아무 말이 없는 황제를 보며 고개를 더욱 아래로 조아렸다.
“시간이 조금 더 지나면 확실히 알 수 있을 테지만 현재 제 판단은 그러합니다.”
“…경이 허튼소리를 지껄이는 성격이 아님은 알고 있네.”
크리스티앙이 마침내 차분히 입을 뗐다.
“핏줄이 귀한 클라웨 황실에서 회임에 대한 연구만은 오랜 세월을 걸쳐 발전해 왔으니 자네가 지금 내린 판단이 사실로 확정될 가능성 또한 높겠지.”
마치 혼잣말하듯 느릿하게 중얼거리는 말투였다.
“황공합니다.”
의사는 마른침을 삼키며 황제의 의중을 확인하려 했지만 그의 얼굴에서 속내를 읽어 내기는 힘이 들었다. 크리스티앙은 무표정하게 눈을 내리깔고 있었다.
잠시간의 침묵이 이어졌다. 의사는 황제가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것이 분노 때문인지 아니면 당황해서인지조차 알 수가 없었다. 확실한 건 죽은 줄 알았던 황녀가 살아서 돌아온 후 황금성 안에서 여러 일들이 바쁘게 벌어지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퍼석.
타들어 간 담뱃재가 크리스티앙의 재킷 끄트머리로 떨어졌다.
“폐, 폐하….”
뜨거운 기운이 남아 있는 잿불이 그의 옷에 시커먼 자국을 남기자 의사가 놀라 시종을 부르려 했다. 크리스티앙이 손을 들어 그를 저지하며 마침내 입을 뗐다.
“황성 안에는 숨어 있는 눈과 귀가 많지. 조용하게 보여도 쥐새끼들은 늘 바쁘게 움직이는 법이니까.”
그가 담배를 내려놓고 재킷을 벗었다.
“황족의 몸 상태에 대해서 말을 아껴야 한다는 사실은 거듭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으리라 믿어.”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이 일을 알고 있는 이가 자네 말고 또 누가 있는가?”
“저 하나뿐입니다.”
“여자 의사를 데려간 걸로 알고 있는데?”
크리스티앙이 자리에 도로 앉아 태연하게 묻자 의사가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크리스티앙은 이미 그의 일거수일투족을 보고받았다는 뜻이었다. 황제가 갑자기 출현한 그의 누이를 몹시도 신경 쓰고 있다는 반증이었다. 이해하지 못할 일은 아니다.
“황녀 저하와 함께 있는 호위 기사의 진찰을 위해 데려갔으나 그가 치료를 거부하여 아무런 일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랬군.”
수긍하는 크리스티앙을 보며 주치의가 조용히 한숨을 삼켰다. 그가 데려간 도제 의사는 영특한 자였다. 황녀의 기분이 좋지 않은 것 같아 진찰을 미루었으나 그녀라면 이미 상황을 짐작하고 있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이미 한번 내뱉은 말을 번복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것도 속을 완전히 읽을 것 같은 날카로운 시선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는 젊은 황제의 앞에서.
“황녀 본인의 자각은 없었나?”
“예, 폐하. 아직 이른 상황이기 때문에 황녀 저하께서는 스스로의 상태를 인지하지 못하고 계신 걸로 보였습니다.”
“본인도 모르고 있다….”
“예. 폐하.”
긴 의자에 편안하게 기대 턱을 괴고 있던 크리스티앙이 붉은 입술을 위로 끌어 올렸다. 하얀 치아가 살짝 드러나며 미형의 얼굴이 햇살이 드리운 듯 환해졌다.
“그러니까, 지금 이 황성에서 그 사실을 아는 사람은 자네와 나뿐이라는 뜻이 되는군.”
모두가 찬사를 내뱉을 만큼 아름답게 웃는 황제를 보는데, 의사는 저도 모르게 온몸의 털이 쭈뼛 서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는 앞으로 모은 손을 마주 잡고 신중한 표정을 유지하려 애를 썼다.
“그러합니다.”
“펠리페 경.”
크리스티앙이 몸을 일으키며 그를 불렀다.
“이왕 온 김에 내 상처도 한 번 봐 주겠나?”
“예, 폐하.”
주치의는 긴장하며 팔목을 내미는 그에게로 가까이 다가갔다. 크리스티앙이 커프스단추를 풀고 소매를 직접 걷어 올렸다. 얼마 전에 입은 자상의 흔적이 생생하게 보였다.
충격받은 얼굴로 당장 지혈하라 소리치던 하이데거의 모습과 피투성이가 된 황제의 모습이 지금도 생생했다. 물론 연유를 물을 정도의 배짱은 그에게 없었으므로 어떻게 된 일인지 알 수는 없었다.
“이대로 환부에 염증이 나지 않도록 관리하시면 문제는 없을 것으로 보입니다.”
황제가 제 몸을 누군가에게 보이거나 만지게 하는 것을 광적으로 싫어한 탓에 치료마저도 조심스러웠지만 상처는 잘 아문 것으로 보였다. 만일 치료가 난항을 겪었더라면 그는 지금 이곳에서 이렇게 황제를 독대하고 있는 것조차 불가능했을 것이다.
“다른 곳은 어떠한가?”
“…예?”
의사가 크리스티앙과 눈을 마주쳤다.
“회임에 관한 이야기가 나왔으니 묻는 걸세. 원로원들이 나의 후사에 대해 관심이 많은 걸로 보이거든. 결혼까지 한 황제에게서 국민들이 기뻐할 만한 소식이 들려오지 않는 까닭에 대해서 단지 걱정을 넘어선 말들이 오가는 모양이라서.”
“어떤….”
“예를 들면 황제에게 심각한 문제가 있다거나.”
“당치 않습니다…!”
펠리페가 목소리를 높였다. 크리스티앙의 건강 이상에 대해 책임을 물게 되는 것은 주치의 쪽이었다. 황제는 신경과민으로 불면증에 시달리는 것을 제외하면 신체 장기의 모든 부분은 최상이었다. 아주 어릴 때부터 그 스스로 독을 조금씩 마셔 단련한 탓에 웬만한 독에는 내성까지 생겼다.
보통 사람이었다면 이미 생이 엉망이 되었을 폭음과 약물 남용에도 멀쩡할 수 있는 것은 바로 그 때문이리라.
대관식을 치르기 직전까지 체력단련도 게을리하지 않았으므로 늘씬한 몸은 자잘한 근육이 꽉 채우고 있었다. 그와 관계했던 시녀를 통해 확인한 정액의 양은 넘치게 많았고 그 생명력 또한 강했다.
크리스티앙 본인의 성적 욕구 또한 작은 편이 아니었다. 최근, 그의 침실 시중을 드는 시녀가 없는 것은 아마도 황후를 맞이했기 때문일 것이다.
“폐하. 제 의술 인생을 모두 걸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폐하의 건강에는 그 어떤 문제도 없습니다.”
“회임하는 데 장애가 없는 몸이라는 거군.”
“입에 올리기조차 두려운 단어입니다. 황태자 시절부터 지금까지 폐하의 건강 기록에 대해서는 상세하게 기록해 놓았습니다. 그 어떤 원로원이 불경한 이의를 제기하는 일은 있을 수 없습니다.”
크리스티앙의 침대 시중을 들었던 시녀와 귀족가의 영애 중 아이를 가진 이가 없었던 것은 당연했다. 그들은 의무적으로 피임차와 낙태차를 마셔야 했고 그것도 모자라 그들 중 다수는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물론, 그 이유에 관해서는 아무도 함부로 입에 올릴 수 없었다. 다만, 침대에서 황제의 환심을 사려 했을 거라고 짐작할 뿐이었다.
“내 생식 능력에 문제가 없다면 왜 황후는 임신하지 못하지? 짐은 꼬박꼬박 합방 날짜를 지키고 있거늘.”
“그, 그건….”
펠리페는 차마 대답을 하지 못했다. 원래 회임하는 것에는 여러 변수가 뒤따랐고 클라웨 황실에는 전통적으로 아기가 귀했다. 펠리페는 그것을 후사를 이어야 하는 황족의 극심한 정신적 스트레스 때문이라고 보았다.
크리스티앙의 육체에는 아무런 이상이 없으나 워낙 예민한 성정인 그의 머릿속까지 정상이라고는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가 맞이한 황후는 선천적으로 몸도 약하게 태어난 이였다. 크리스티앙의 가학적 성적 취향까지 알고 있는 주치의는 그저 말을 아낄 수밖에 없었다.
“자네의 얼굴을 보니 답을 듣지 않아도 들은 것 같군.”
크리스티앙이 자리에서 일어나 벽에 걸린 무언가를 향해 손을 올렸다. 그의 집무실에 걸려 있는 기다란 칼이 장식용이 아니라는 사실을 펠리페가 깨달은 것은 그로부터 수초 뒤였다.
“흑…!”
자신의 배를 깊게 찌른 칼에서 꿀럭, 꿀럭 솟는 붉은 피가 보였다.
“폐, 폐하….”
크리스티앙이 칼을 쥔 손목을 틀었다. 고통으로 일그러진 펠리페의 눈에는 떠오르는 의문이 생생했다. 마지막까지 죽음의 이유를 알지 못하는 그의 귀에 황제가 차분히 속삭였다.
“클라웨의 미래를 위해서야.”
의사가 들고 온 반갑지 않은 소식에 크리스티앙은 딱 담배 한 대를 피울 시간 동안만 고민했다. 당장 누구 하나를 죽여 버리고 싶다는 충동을 지금 이 순간까지 억누를 수 있었던 것은 결정에 확신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크리스티앙에게 클라웨의 미래는 곧 자신의 미래였다.
내가 만들어 가는, 나의 제국.
툭.
숨이 완전히 멎어 바닥에 쓰러진 시체를 물끄러미 내려다보는 크리스티앙이 검을 쥔 손등으로 얼굴을 닦아 냈다. 황금빛 눈썹 주변에 핏방울이 묻어났다.
그는 책상으로 걸어가 황금색 종을 가볍게 울렸다. 대기하고 있던 시종장이 문을 열자마자 보이는 광경에 소스라치게 놀라며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을 쳤다.
“뭐 하고 있어? 들어오지 않고.”
“예, 예, 예…. 폐하.”
태연한 황제의 표정에 시종장은 애써 정신을 수습하고 집무실 안으로 들어섰다.
“시녀를 불러 주겠나? 옷이 더러워졌으니 새 옷을 가져오라 명해.”
“예, 그리하겠습니다.”
피 묻은 검 날을 자신의 재킷에 슥, 슥 문지르는 황제를 보는 시종장의 눈동자가 마구 흔들렸다. 그는 격양된 목소리를 애써 죽이며 덜덜 떨리는 턱에 힘을 주었다. 주치의의 몸에서 흘러나온 피가 바닥을 검게 적시고 있었다.
“그런데 폐하. 페, 펠리페 경은 어찌….”
“아아. 불경죄를 저질렀으므로 내가 직접 처벌했어.”
검을 다시금 벽에 올리는 크리스티앙의 동작은 평소와 같이 흔들림이 없었다.
“송구합니다만 펠리페가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황궁 근위대에게 제가 보고를… 하겠습니다.”
크리스티앙이 무심한 눈동자로 그를 보며 입을 열었다.
“펠리페는 내게 황후가 회임하지 못하는 것은 그녀의 몸이 성치 않기 때문이라고, 그러니 후사는 일찌감치 포기하고 다른 건강한 몸을 빌려 수태하는 게 어떻겠느냐고 말하였다.”
“그, 그런…!”
시종장의 얼굴이 시퍼렇게 질려 경악한 빛을 띠었다. 그는 바닥에서 주검이 된 주치의가 미치지 않고서야 황제의 앞에서 어떻게 그런 말을 입에 담을 수 있었는지 이해를 할 수가 없었다.
크리스티앙이 피가 튄 하얀 셔츠를 보며 작게 혀를 찬 후, 옷을 벗어 던졌다. 부드러운 드레스 셔츠가 눈도 감지 못하고 죽은 시체의 얼굴에 아무렇게나 떨어졌다.
“하이데거는 지금 어디 있지?”
“연무장에 계실 시간입니다.”
“그에게는 자네가 내 대신 전하게. 클라웨의 대가 끊어지는 것을 염려하는 주치의의 심정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나, 황후의 장애를 불임의 원인으로 삼는 불경함을 좌시할 수 없어 황제가 직접 그를 벌하였다고.”
“알겠습니다.”
“시신 처리와 죄인의 가족에 대한 거취 처리는 특별히 대공에게 직접 하라고 말해 주겠어? 내게 번거롭게 보고할 필요 없이 알아서 처리해도 상관없다고 해.”
“…예!”
안색이 파래진 채 목소리를 높이는 시종장을 향해 크리스티앙이 명령을 덧붙였다.
“지금부터 짐은 ‘폴린의 뜰’로 갈 것이다. 민트와 박하를 넣은 차가운 음료 세 병과 셰즈 롱 체어, 일인용 침대와 푹신한 수건, 부드러운 양탄자와 여벌의 벨벳 가운을 준비해.”
“그리하겠습니다.”
약탕이 있는 ‘폴린의 뜰’은 이미 황녀가 차지하고 있었지만 황족인 그들이 한 공간에 함께 있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내일 아침 여명이 밝을 때까지, 그 누구도 접근하지 못하게 조치하도록.”
시종장은 피 묻은 재킷 안에서 크리스티앙이 작은 유리병을 꺼내 드는 것을 보며 조금 갸웃했지만 이내 그러겠노라 고개를 숙였다. 같은 모양의 병에 들어있고 같은 색을 띤다고 해서 모두 똑같은 약이라 할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황제가 제 누이를 만나러 가는데 독한 미약을 가지고 갈 이유도 없지 않은가.
***
오두막 천장으로 새어 들어오는 빛줄기의 방향이 아주 조금 서쪽으로 바뀌었다. 혜미가 이곳에 온 이후, 약 한 시간은 흐른 것 같았다. 몸이 노곤하게 풀어지니 정신도 흐트러졌는지 잠깐 졸았다가 깼을 정도였다.
머릿속에서 땀이 새어 나올 정도로 체온이 올라가 있었지만 바깥에 나가고 싶다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 혜미는 오래간만에 혼자 즐기는 시간에 흠뻑 취해 있었다.
어차피 플라틴 성에서 그녀가 기다리는 ‘소식’이 들려올 때까지 움직이지도 못할 테니까.
그는 대체 무슨 생각인 걸까. 베네딕트를 떠올리자 부드럽게 풀어졌던 그녀의 몸에 긴장이 다시 슬며시 찾아왔다.
“베네딕트는 호아킴 장군이 아메티스에 입성하기 전에, 그가 이끄는 군대의 수를 최대한 줄일 예정이라 하였습니다.”
“…무슨 수로?”
“그것까지는 자세히 말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그가 대마법사라는 사실을 미루어보아 마력을 사용할 것이라고 예상할 뿐입니다.”
베네딕트가 능력이 뛰어난 마법사라는 것은 그녀 역시 알고 있었다. 그가 마력을 회복했다는 사실도. 하지만 그가 홀로 처리할 수 있는 적의 숫자에는 한계가 있다는 사실 또한 자명했다.
호아킴이 거느리는 군대의 실력이 어떠할지는 직접 보지 않아도 충분히 예상이 가능했다. 혹독한 북부에서 마물과 대항하며 싸운 이들이 대마법사 하나를 죽이겠다고 달려든다면 그 아무리 베네딕트라 한들 당해 낼 수 없을 것이다.
“발터. 생각해 봤는데 역시 우리가 베네딕트를 도와야 하는 건 아닐까?”
지난밤, 저녁 식사를 마친 혜미가 다시 물었을 때, 발터는 잠시 머뭇거리다 입을 열었다.
“만일 폐하께서 계속 그를 염려하신다면 이 말을 전하라 했습니다.”
“뭐라고?”
“…사랑에 빠진 추한 마법사는 그 누구보다 강할 수 있다고. 폐하께서 자신을 그리 만들었다고.”
발터의 목소리로 들려오는 베네딕트의 메시지에 그녀는 얼굴을 붉히며 말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그가 정확히 언제 떠난다고 했지?”
“황녀 저하의 방문을 거절하는 날. 베네딕트는 황금성에서 자취를 감출 것이라 했습니다.”
그리고 오늘, 베네딕트는 그녀와의 만남을 거절했다. 예상은 했지만 막상 그 시간이 코앞에 닥치자 염려가 되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좌천된 교황이 실종된다면 황실의 분노는 엄청날 것이다. 그를 정부로 삼아 지하 감옥에서 빼낸 그녀에게까지 불똥이 튈 확률이 매우 높았다. 아무리 그녀가 모른 척 발뺌한다 한들, 크리스티앙은 의심의 화살을 그녀에게 돌릴 게 분명했다.
연극에는 자신이 없지만 지금이야말로 확실히 부정하며 황제를 속일 때다. 다짐한 혜미가 탕 안에서 몸을 일으켰다.
뜨거운 물 안에 너무 오래 있었나. 머리가 핑 돌더니 눈앞이 잠시 캄캄해졌다가 돌아왔다. 챙겨 온 물은 이미 홀짝홀짝 다 마셔 버려 수통은 바닥을 보이고 있었다. 차가운 바람이라도 좀 쐐야 할 것 같아 창문을 찾아보았지만 오두막에 달린 문이라고는 그녀가 들어온 입구뿐이었다.
“…진짜 한증막이야 뭐야.”
피식 웃던 혜미가 그 자리에 우뚝 멈춰 섰다. 예민하게 발달된 귀에 바깥의 인기척이 들려온 까닭이었다. 한둘이 아니다. 누군가가 줄지어 움직이는 발걸음 소리가 점점 가까워졌다.
혜미는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그녀의 심장이 쿵, 쿵, 가슴속을 강하게 때렸다. 드디어 성에서 연락이 온 걸까…?
똑. 똑. 똑.
일정한 간격으로 문을 두드리는 노크 소리가 들리자 그녀가 황급히 목소리를 높였다.
“잠시만요…! 내가 나갈 테니 거기서 조금만 기다려 주세요…!”
그녀의 외침을 가볍게 무시하듯 삐걱, 하는 오래된 경첩 소리와 동시에 나무문이 활짝 열렸다. 어두운 공간으로 차가운 바깥바람과 함께 오후 햇살이 단박에 쏟아졌다. 혜미는 날카로운 빛에 적응되지 않는 눈을 찡그리며 탕 안으로 다시 뛰어들었다.
“지금 이게 무슨 짓이….”
목욕도 끝나지 않았는데 마음대로 문을 연 상대를 향해 외치던 그녀가 말을 끝내지 못하고 흐렸다. 역광에 비친 늘씬한 인영은 그녀가 지금 가장 보고 싶지 않은 상대였다.
“힘이 넘치네? 뛰어다닐 정도로 기운이 좋은 걸 보니 이제 다 나은 모양이지?”
하얀 셔츠와 푸른 재킷, 긴 다리에 보기 좋게 달라붙는 푸른색 승마바지를 입은 크리스티앙이 그녀에게로 걸어오며 입을 뗐다. 파티에서 새까맣게 물을 들였던 머리카락은 황금빛 블론드로 제 모습을 되찾은 후였다. 그의 뒤로 줄지어 따라 들어온 시녀와 시종들은 다들 짐을 한 보따리씩 들고 있었다.
“크리스티앙…?”
“예를 취하지 않아도 상관없으니 거기 그대로 있어도 돼.”
그가 일어날 생각도 없는 혜미를 향해 가볍게 손짓했다. 휴식 의자와 침대가 놓이고 반투명한 휘장이 드리웠으며 테이블이 비치되었다. 눈을 퍼다 담은 항아리 모양의 쇠붙이 안에 보기만 해도 시원해 보이는 음료가 찰랑이는 유리병이 줄지어 놓였다.
황제의 옷이 다섯 벌 정도 주르륵 걸린 간이 옷걸이까지 들어오자 소박했던 오두막 안의 분위기가 완전히 바뀌었다.
“…폐하가 여긴 어쩐 일이십니까?”
지휘관이나 시종장이 나타날 거라는 예상을 뚫고 등장한 크리스티앙의 출현에 혜미가 구겨지는 인상을 애써 폈다. 그녀를 직접 심문하러 온 거라고 하기엔 준비가 너무 과하다는 느낌이다.
“아우 된 자의 도리로 누이의 병문안을 온 게 그리도 놀랄 일인가?”
크리스티앙이 양팔을 들어 올리자 시녀들이 기다렸다는 듯 그의 몸에서 하나하나 옷을 떼어 냈다. 너무도 익숙하고 빠른 동작이라 옷을 벗기는 거라기보다는 정말로 신체의 일부분을 자연스레 떼어 내는 것처럼 보였다. 순식간에 반나체가 된 그에게서 혜미가 당황해 얼굴을 돌렸다.
“환부의 치료에 좋다는 약을 가져왔어.”
그녀의 뒤에서 크리스티앙이 얇은 가운을 걸치며 내뱉었다. 주르륵. 혜미가 뭐라고 할 새도 없이 노리끼리한 액체가 탕 안에 쏟아부어졌다. 시종들이 보는 앞에서 설마 독을 푼 건 아니겠지?
“뭘 그런 얼굴을 하고 있어. 내가 누이에게 독이라도 풀었을까 봐?”
전혀 안 웃긴 농담을 내뱉고는 그가 혼자 웃었다. 속을 읽힌 것 같은 기분이 들어 혜미는 수면 안으로 더욱 깊숙이 몸을 감추었다.
“보는 눈이 많아 나의 누이가 불편해하는군. 끝났으면 다들 자리를 물리지.”
“예, 폐하.”
황제가 축객령을 내리자 공손하게 답한 시녀와 시종이 기다렸다는 듯 줄줄이 빠져나가고 오두막의 문이 닫혔다. 빛이 사라지고 아까보다 훨씬 비좁아진 공간이 다시금 어둑하게 바뀌었다.
“…여길 쓰려고 온 거면 내가 나갈게.”
혜미는 어둠이 수면 아래에서 일렁이는 그녀의 나신을 가려 주길 바라며 떨리는 목소리를 애써 감추었다. 크리스티앙이 소리 없이 타들어 가는 향초를 들어 담뱃불을 붙였다. 그러고는 화려한 일인용 소파에 등을 기대고 앉아 말없이 연기를 길게 내뱉었다.
“잠시만 기다려 주면 옷 입고 곧 나갈 채비를 할 테니까….”
“내가 이따위 흙탕물에 몸을 담그러 이곳까지 온 거라고 생각해?”
“…그럼 왜 왔는데?”
그의 말마따나 병문안을 온 거라고는 믿기지 않았다. 되묻는 그녀를 보며 크리스티앙이 느리게 내뱉었다.
“확인하러 왔어.”
“…뭐를?”
크리스티앙은 잠시 그녀를 보며 깊이 생각에 빠진 표정을 지을 뿐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혜미는 여전히 탕 바깥으로 나가지도 못한 채 머리를 굴렸다.
왜 하필 크리스티앙은 지금 나타난 걸까. 타이밍도 참 뭐 같았지만 아직 황궁에서는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는 직감이 들었다. 그렇다면 오히려 베네딕트가 사라진 시점에 그녀가 황제와 함께 있는 편이 더 나을 수도 있을 것이다.
“몸은 좀 어때.”
“…힘이 넘쳐. 아까 거기서부터 여기까지 날아다니는 거 봤지?”
어색함을 감추려 일부러 농담했지만 크리스티앙은 표정의 변화도 없이 질문을 이었다.
“식사는 제대로 하고?”
“응.”
속이 안 좋아 하루 종일 뭘 먹지도 않았다는 말은 굳이 하지 않았다.
“빈혈이나 어지럼증은 없어?”
“없는데.”
그녀의 상태를 상세히 알고 있는 크리스티앙을 보며 혜미는 조금 놀랐지만 빠르게 부정했다. 약한 모습을 보여서 좋을 게 없다는 판단이었다.
“다행이군.”
크리스티앙은 그녀에게 두 번 묻지 않았다. 대신 몸을 일으켜 섬세하게 세공된 컵을 들고는 긴 국자같이 생긴 은색 수저로 차가운 음료를 덜었다.
달그락. 이제 봤더니 안에는 얼음까지 띄워져 있는 것 같았다. 자리로 돌아온 크리스티앙이 다리를 꼰 채 천천히 음료수를 마셨다. 그녀에게 주려고 한 걸까, 내심 기대했던 혜미는 마른침을 삼킬 수밖에 없었다.
크리스티앙의 목울대가 소리 없이 움직였다.
안 그래도 목이 마른 상황에 누가 뭘 마시는 것까지 보고 있으니 갈증은 최고조였다. 나도 한 잔 달라는 말이 입 안까지 솟구쳤지만 그에게 사이좋게 뭘 요구할 입장이 아니라는 생각에 겨우 참았다.
“뜨거운 물 안에 오래 있었으니 목마르지 않은가?”
그녀의 마음을 눈치챈 듯 크리스티앙이 물었다.
“어…. 어. 갈증이 좀 나네. 많이.”
혜미는 부정하지 않고 고개를 재빨리 끄덕였다. 갑작스러운 크리스티앙의 출현에 놀라고 당황해서 그런지 아까보다 몸에 더욱 열이 펄펄 나는 것 같았다.
“그렇군.”
크리스티앙은 짤막하게 답하며 내용물이 반쯤 남은 유리잔을 홀짝, 완전히 비웠다.
“나도 마찬가지야.”
두 번째 잔을 연거푸 채우는 그를 보며 혜미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이대로는 도저히 안 되겠다.
일단 나가서 바람이라도 쐐야겠다는 결심이 섰다. 그가 보든지 말든지 몸을 일으키려는 순간, 크리스티앙이 그녀에게 허리를 굽히고 음료가 찰랑거리는 잔을 내밀었다.
“…필요 없어?”
“고마워.”
갈증은 쪽팔림을 이겨냈다. 혜미는 손을 거두려는 그에게서 유리컵을 빼앗듯 낚아채고 단박에 비웠다.
“목이 많이 말랐던 모양이네.”
크리스티앙이 피식 웃으며 그녀의 잔을 다시 채워 주었다.
“두 시간 넘게 이 안에 있었으니까.”
“누가 가둬 둔 것처럼 말하는군. 나오고 싶었으면 나오면 되잖아.”
혜미는 괜히 뜨끔한 마음에 태연한 척 화제를 돌렸다.
“여기 온천, 꽤 물이 좋은 것 같더라고. 상처가 욱신거리는 게 많이… 좋아졌어.”
“그래?”
되묻는 크리스티앙의 말투는 별 감흥이 없었다. 혜미는 그의 팔에 선명하게 보이는 상처를 힐끗 확인했다. 역시, 황제가 앓던 그녀를 찾아왔던 것은 꿈이 아니었다. 붕대로 감겨 있던 팔이 지금도 선명히 기억났다.
감시와 호위가 철저한 이 성안에서 대체 뭘 하다가 자상을 입은 거지…? 생각해봐도 알 길은 없었다. 그녀는 잠시 머뭇거리다 내뱉었다.
“소염에 좋다고 하니까 너도 나중에 이용해 봐.”
“다시 한번 말하지만 지저분한 물에 몸을 담그는 취미는 없어.”
그럼 여기까지 왜 왔단 소리인가. 왠지 불안한 예감이 들었지만 크리스티앙이 그녀에게 물병을 아예 통째로 가져다주었으므로 혜미는 생각을 이어 나가길 멈추었다. 바깥에는 그녀를 호위했던 군사들이 쫙 깔려 있는데 무슨 일이 일어나지는 않을 거라는 예감에서였다.
그녀는 대신 부지런히 음료를 홀짝거렸다. 민트에 설탕과 레몬이 섞인 것 같은 시원한 음료에는 박하 향이 나는 것도 같았는데, 뭔지는 모르겠지만 굉장히 중독적인 맛이 있었다. 크리스티앙도 마신 걸 보면 일단 사약은 아니라는 소리다.
“따듯한 물로 목욕하면 잠도 잘 와.”
“갑자기 무슨 소리지?”
“불면증 치료에도 좋다고.”
크리스티앙이 흔들의자에 앉아 작게 코웃음을 쳤다. 한쪽 발을 다른 쪽 무릎에 걸치고 있는 그의 가운 새로 시선을 주지 않으려 노력하며 혜미가 말을 이었다.
“누가 그러던데. 넌 어두운 곳에서 잠을 못 이룬다고.”
“펠리페가 쓸데없는 소리를 지껄였군.”
“의사가 그랬다고 말한 적 없는데?”
혜미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깜빡였다. 크리스티앙은 어둠을 먹어 짙어진 보라색 눈동자를 바라보며 침묵을 지켰다. 눈앞의 여자는 거짓말에는 젬병이었다.
“하고 싶은 말이 뭐지?”
“…너. 어두운 곳에서 잠을 못 자는 게 아니라 안 자는 거잖아.”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크리스티앙이 내려두었던 담뱃대를 다시 손에 쥐었다.
“불안해서. 어둠 속에서는 무슨 일이 일어나도 아무도 모르니까. 그래서 환한 곳이 아니면 잠을 청하지 않는 거잖아. 사방이 온통 적이라서. 그 누구도… 믿을 수가 없어서.”
파스스. 담배가 깊게 빨리며 회색 재를 태웠다. 크리스티앙이 피우고 있는 담배에서는 정신을 몽롱하게 만드는 것 같은 특이한 젖은 향이 났다.
“황성에서 정부와 노닥거리는 것 외에는 할 일이 없으니 갑자기 누님 역할을 하고 싶어지기라도 한 건가?”
크리스티앙이 마침내 입을 열었다.
“나의 불면이 왜 신경 쓰였는지 묻고 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