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9화 (59/72)
  • 애써 웃으며 답하는 그녀의 목소리 끝이 미세하게 떨렸다.

    “이든이라고 부르잖아. 어색하게 왜 그래.”

    찰나의 침묵과 함께 발터의 갈색 눈동자가 일정한 속도로 닫혔다 열리기를 반복했다. 뒤이어 묵직하고 낮은 중저음이 그의 성대를 타고 흘렀다.

    “…세르노티에서는 그 이름으로 사셨으나 황궁에 돌아온 뒤에는 상황이 다르니까요.”

    그의 아비인 발트리는 그녀의 신분을 숨기고 세르노티로 데려와 기사들의 틈바구니에서 길렀다. 함께 흙바닥을 뒹굴며 지낼 때는 그녀를 소꿉친구 대하듯 편히 대했으나 모든 것이 제자리를 찾아 가는 지금에 와서까지 그럴 수는 없는 일이었다. 아니, 그래서는 안 된다고 해야 함이 맞았다.

    “발터.”

    하지만 그의 대답에도 그녀의 표정은 납득한 거라고는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더욱 복잡하게 변할 뿐이었다. 발터는 오래 앓아 수분기가 없어진 그녀의 입술이 안쓰럽게 느껴져 갑자기 손이 올라가려는 걸 스스로 애써 저지했다.

    내가 왜 이러지…? 하마터면 무례를 저지를 뻔했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주먹을 꽉 쥐었다.

    “혹시 나한테 아직도 화가 났어? 베네딕트를 만나고 와서 기분이… 안 좋은 거야? 그가 너한테 이상한 말이라도 한 건가? 역시 그런 거지? 살살 놀리면서 열 받게 만들었던 거지?”

    발터가 짙은 눈썹을 중앙에 모으며 그녀를 불렀다.

    “폐하.”

    갑작스러운 그녀의 말에 적지 않게 당황한 탓이었다.

    “…그는 폐하의 연인입니다. 그런데 제가 어째서… 불쾌한 기분을 가질 수 있겠습니까.”

    당연한 답을 내뱉는데 그의 가슴에서 뭔가 탁, 치밀어 오르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발터는 원인 모를 어두운 감정을 속으로 내리누르며 부드럽게 말을 이었다.

    “그것보다 저하께 긴히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그를 떠나 돌아오는 길에 리비에르와 마주쳤습니다. 간밤에 하이데거와 함께 밤을 보낸 것 같은데….”

    발터는 그녀에게 중요한 소식을 전달하고 의견을 구하려 하다가 이내 말을 멈추었다. 그녀가 그의 말을 전혀 듣고 있지 않다는 것을 눈치챈 까닭이었다. 그를 향한 보랏빛 눈동자가 잔뜩 일그러져 떨리고 있었다. 발터가 고개를 기울이며 그녀의 동태를 살폈다.

    “…왜 그러십니까. 혹시 어디가 안 좋으십니까?”

    “발터.”

    “예.”

    혜미가 그의 눈을 직시하며 심호흡을 크게 했다. 심장이 쿵, 쿵, 빠르게 뛰고 손바닥에 땀이 잡혔다. 발터가 그녀와 조금 떨어진 채 일정 거리를 정확히 지키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자 원인을 정확히 알 수 없는 불안한 예감이 점점 더 커졌다.

    눈앞의 남자는 분명 발터가 맞는데 하는 행동은 마치 딴 사람을 대하는 것 같았다. 발터는 그녀와 있었던 일을 몽땅 잊어버린 사람처럼 굴고 있었던 것이다.

    그 와중에 그가 발터라는 사실을 그녀가 확신할 수 있는 까닭은 변함없는 눈동자 때문이었다. 뜨거움과 열망, 괴로움이 혼재된 거짓 없는 시선이 그녀를 직시하고 있었다.

    “내가 죽었던 건 알지?”

    “예.”

    짤막하게 답하는 발터의 낯빛이 갑자기 확 어두워졌다. 혜미는 그와 시선을 마주하며 천천히 입술을 뗐다. 다른 건 몰라도 이것만은 확인해야 했다.

    “내가… 에데르트라는 사실을 인정하기 싫어했던 이유도. 결국 뭘 하다가, 왜 죽었는지도…. 다 알고는 있는 거지?”

    “예.”

    “그럼 네 입으로 직접 말해 봐.”

    그가 아픈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다 낮은 한숨을 삼키며 고개를 숙였다.

    “혼란스러워하는 폐하의 곁을 제가 끝까지 지키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게, 다야?”

    “저는 기사단 중에 첩자가 있다는 중요한 사실도 미리 눈치채지 못하였습니다. 죄송하단 한마디로 끝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는 건 잘 알고 있습니다. 현실을 직시하지 못했던 아둔함을 죽을 때까지 뉘우치고, 폐하를 위해 평생을 다해 속죄하며 살겠습니다.”

    간신히 말을 토해 내듯 답하는 발터의 대답이 틀린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내용이 빠져 있었다.

    그녀가 운명을 받아들이기 싫어했던 건 발터 때문이다. 황제의 삶보다 평범한 범부의 삶을 원했기 때문에. 그들은 다 버리고 함께 도망칠 각오까지 했었고, 그녀는 마지막으로 발트리를 설득하려 떠난 발터를 기다리다 동굴에서 페터의 칼을 맞고 죽었다. 그건 발터의 입을 통해 듣고 울렁거리는 심장의 반응으로 직접 느꼈던 그녀의 과거였다.

    “내가 다른 세상에 다녀온 건 알아? 내가 거기서 혜미라는 이름으로 살았다는 건?”

    혜미가 목소리를 조금 높였다. 숨을 들이마시는 목소리 끝이 불안하게 갈라졌다.

    “압니다.”

    발터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숨만 붙어 있는 채로 쓰러진 내 곁을 네가 무려 3년 동안이나 지켰던 것도 알지?”

    “예.”

    보통 사람이라면 할 수 없는 일이다. 세르노티의 기사들은 혼수상태인 그녀에게 늘 말을 걸고 밤에 함께 잠드는 발터가 미친 사람처럼 보였다고 입을 모았었다. 그가 어땠을지는 그녀가 직접 보지 않아도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왜 그랬는데?”

    “무엇을 말입니까.”

    “언제 일어날지도 모르는데, 왜 숨만 붙어 있는 시체나 다름없는 내 곁을 떠나지도 않고 지켰냐고.”

    “…세르노티의 가주 발트리의 아들이자 빛의 그림자로서 그것은 당연한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혜미가 참았던 숨을 입 밖으로 터뜨리듯 내쉬었다. 발터는 자신이 모시는 주군의 눈이 갑자기 왜 축축하게 젖어 드는 건지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떨리는 손으로 제 입가를 가리려던 혜미가 입술을 한 번 꽉 다물었다 떼고는 그를 향해 마치 따지듯 목소리를 높였다.

    “네가 기억을 몽땅 잃은 나한테 옛날이야기를 해 줬던 건…? 돌아온 내가 매의 탑에서 너와… 뭘 했는지도… 기억나지?”

    눈앞이 갑자기 깜깜해지는 기분에 발터가 미간을 조금 찌푸렸다. 아까 복도에서처럼, 마치 생각이 길을 잃은 것처럼 주춤하다가 다시 머릿속이 밝아졌다.

    “물론 기억합니다.”

    발터는 곧 정신을 차리고 입술을 뗐다. 긴 잠에서 깨어난 그녀는 예전 일을 기억해 내지 못했다. 그래서 의심 많은 세드릭을 당황하게 만들었고, 그 때문에 매의 탑에서 그녀에게 지난 시간을 설명해 주었다. 중간중간 기억이 잘린 것처럼 뚝뚝 끊어지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그럼 왜 갑자기 이렇게 못되게 구는 건데.”

    그녀의 목소리에 희미한 울음기가 번졌다.

    “폐하. 혹시 몸이 안 좋으십니까?”

    발터가 그녀를 조심스레 살피자 보랏빛 눈매가 더욱 구겨졌다.

    “왜 꼭 다른 사람처럼 구는 거냐고.”

    “예? 제가 뭘 잘못하기라도….”

    발터는 심각한 표정으로 말을 잇다 말고 반사적으로 고개를 뒤로 휙 물렸다. 그녀의 손이 그의 얼굴을 향해 예고 없이 다가온 탓이었다. 그의 뺨에 닿지 못한 그녀의 손가락이 공중에서 갈 곳을 찾지 못하고 황망히 떨렸다.

    “폐하.”

    “발터.”

    허공을 두드리듯 가늘게 움직이는 그녀의 손을 보며 발터가 입술을 혀로 축였다.

    “혹시 제 얼굴에… 뭐가 묻었습니까?”

    발터가 낮은 목소리로 내뱉었다. 혜미는 피가 몰려 붉어진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고개를 뒤로 물리는 그의 뺨을 기어코 따라가자 발터는 더 이상 그녀를 피하지 않았다. 그녀의 의도를 알지 못한 채 그저 긴장한 얼굴로 그녀를 응시하고 있을 뿐이었다. 혜미가 떨리는 손가락으로 그의 얼굴을 두드렸다.

    톡. 톡. 톡.

    방금 전 허공을 짚던 손가락이 같은 움직임으로 그의 뺨을 두드렸다. 복숭아 씨앗처럼 툭 튀어나온 발터의 목울대가 일렁이고 푸른 핏줄이 섰다. 짙은 피부에 열기가 오르고 눈동자의 색이 더욱 어두워졌다.

    “…….”

    그가 기다란 눈매를 더욱 가늘게 늘어뜨리며 그녀를 보았다. 찌푸린 미간이 꿈틀거렸다. 널찍한 가슴이 부풀어 오르며 딱딱하게 굳었다. 혜미는 그의 온몸이 긴장하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챘다.

    “…폐하.”

    그래. 이건 기억하는 거지.

    발터와 그녀 두 사람이 어린 시절 만들었던 수신호. 리가스에게 죽을 뻔한 그녀를 끌어안고 차마 말하지 못하는 진심을 손으로 전했던 그 순간을 네가 잊을 리가 없잖아.

    “…송구하지만 자리를 물려도 되겠습니까?”

    발터의 성대를 갈라진 목소리가 비집었다. 꽉 깨물린 혜미의 입술에서 젖은 한숨이 터졌다. 그는 기억하지 못한다.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아니. 안 돼.”

    혜미가 그의 어깨를 거칠게 잡아당기는 순간, 그녀의 몸이 휙 돌아가 푹신한 침대에 깔렸다. 반사적으로 움직인 발터는 그녀 등의 상처가 침상에 닿지 못하도록 목덜미와 허리 아랫부분을 꽉 들어 안은 채 희미하게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왜 그러시는 겁니까. 혹여 제가 잘못한 것이 있다면 지체 없이 말씀해주십시오.”

    “…정말, 기억 못 하는 거야?”

    발터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미간을 일그러뜨릴 뿐이었다.

    “의사를 부르길 원하십니까?”

    “발터.”

    “이곳의 의사를 완전히 신뢰할 수가 없습니다. 차라리 토비아스에게 상처를 보이는 건…!”

    당황을 감추려 더욱 빠르게 내뱉던 발터는 말을 잇지 못했다. 혜미가 그의 강인한 목에 팔을 감고 그를 힘껏 잡아당긴 탓이었다.

    마른 입술이 부딪히는 순간, 발터에게서 뜨거운 숨이 터져 나갔다. 그는 이제껏 자신이 거친 호흡을 간신히 억누르고 있었다는 사실조차 인지하지 못했다. 발터의 눈꺼풀이 가늘게 떨리며 감겼다.

    그가 그녀의 마른 입술을 뜨끈하게 머금고, 그 사이를 가른 후 반기듯 따라 나온 혀를 찾아 뒤섞었다. 일련의 움직임은 생각의 속도가 따라갈 수 없을 만큼 빨랐다.

    울음 섞인 호흡을 들이마시고 부드러운 혀의 돌기를 달래듯 비비다가 혀뿌리에서 샘솟는 타액을 쭉 빨아들이는 것은 더욱 순식간이었다. 마치 훅, 빨려 들어가듯 그녀의 보드라운 입 안을 게걸스레 비집던 발터가 탁한 한숨을 내뱉으며 눈을 번쩍 떴다.

    “…폐하.”

    발터가 숨을 크게 몰아쉬며 그녀를 간신히 떼어 냈다. 짧은 입맞춤이 얼마나 강했는지의 여파를 보여 주듯 피가 터진 그녀의 아랫입술이 시야에 들어왔다. 그녀의 목덜미를 헤집듯 받치고 있는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발터….”

    그녀가 그를 보며 중얼거리듯 내뱉었다. 새빨간 핏방울이 맺힌 입술을 보는데 죄의식이 일어나기는커녕 단전 아래에 뜨거운 피가 단박에 쏠렸다. 불경하게 반응하는 제 육체를 깨닫는 순간, 속이 뒤틀릴 듯 울렁거렸다.

    “왜 거부해?”

    “죄송합니다. 마음껏 벌하십시오.”

    “왜 사과를 해?”

    “폐하께 불경한 짓을 저지른 죄를 용서해 주십시오.”

    혜미가 눈을 크게 뜨고 그를 보았다. 콧날이 시큰거렸지만 그녀는 울지 않으려 안간힘을 썼다. 조금 전의 키스에서 확실히 알 수 있었다. 발터의 몸은 그녀를 정확히 기억한다. 이 남자는 발터가 맞았다.

    “너 나랑 이러는 거 처음 아니잖아. 근데 왜 그러는데?”

    “예?”

    짙은 갈색 눈동자가 혼란을 담고 흔들렸다. 혜미는 그의 멱살을 꽉 틀어쥐며 말을 토해 내듯 내뱉었다.

    “나랑 몇 번이나 잤잖아. 키스하고 껴안고, 네가 내 안에 몇 번이나…!”

    “…폐하. 저, 저는…. 아, 이런 젠장….”

    발터는 자신이 머저리처럼 말을 더듬고 있다는 사실을 인지한 후, 인상을 찌푸리며 작게 욕설을 삼켰다. 머릿속이 또다시 새까만 암흑이었다. 그녀가 하는 말이 정녕 사실인가?

    심장이 목구멍에서 튀어나올 기세로 세차게 뛰고 있었다. 그 와중에 주제도 모르고 팽창한 아랫도리는 그 크기를 줄일 기미도 보이지 않았다. 그는 그녀에게 제 불경한 하체가 혹시라도 닿지 않게 기를 쓰며 간신히 내뱉었다.

    “…송구합니다만…. 파티 이후, 제 기억에 구멍이 생긴 것 같습니다. 죄송합니다.”

    발터의 입술에서 마침내 혜미가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사실이 흘러나왔다.

    “…뭐라고?”

    “시간이 지나면 곧 나아질 게 틀림없습니다. 지능이나 판단력에 문제가 생긴 것은 결코 아닙니다. 다만… 폐하와 함께 있었던 일이… 선명하지 못합니다. 죄송합니다.”

    그의 옷깃을 틀어쥐었던 혜미의 손에서 힘이 빠져 털썩, 침대 위로 떨어졌다.

    “정말… 기억하지 못한다고?”

    얼이 빠진 얼굴로 중얼거리는 그녀를 내려다보던 발터가 잠시 머뭇거렸다. 자신이 지금 그녀를 실망시키고 있다는 것은 너무나 명백했다.

    문제는 빌어먹을 드문드문 암전된 기억 때문에 그가 뭘 잘못하고 있는지 이유를 정확히 알 수 없다는 것이었다. 마침내 입술을 질끈 깨문 그가 갈라진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시면 몸을 청결히 하고 곧 돌아오겠습니다.”

    “…왜?”

    넋 나간 말투로 그녀가 그에게 물었다. 목덜미까지 시뻘겋게 물들인 채, 발터가 혀로 제 입술을 축였다.

    “폐하의… 침대 시중을 드는 걸 원하시는 게 아닙니까? 이대로는 제 상태가… 너무 더럽습니다.”

    그가 손으로 받쳐 들고 있는 그녀의 몸이 가늘게 진동했다. 혜미가 숨을 한 번 들이쉬고는 젖은 눈으로 그에게 물었다.

    “나랑 무슨 일 있었는지 기억 안 난다면서.”

    “…송구합니다.”

    “그런데도 넌 내가 명령만 내리면 뭐든 할 수 있다는 말이야? 침대 시중이건 섹스건, 상관없어?”

    혜미의 목소리에 작은 울음이 섞이자 잠시 망설이던 발터의 턱에 힘이 꽉 들어갔다. 그가 그녀를 조심스레 내려놓은 후 침대 아래로 내려가 무릎을 꿇었다.

    “폐하.”

    그녀를 부르는 나지막한 성대의 진동음. 혜미는 그의 다음 말을 왠지 듣고 싶지 않다고 느꼈다. 듣지 않아도 알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녀는 숨을 참으며 뜨거워지는 눈을 꽉 감았다.

    “전 기사의 맹세를 했습니다. 제 모든 것은 폐하께 귀속되어 있습니다. 절 어떻게 쓰시건 폐하의 뜻대로 하시면 됩니다.”

    “얼마든지 나를 이용해도 돼. 넌 나의 주인이니까.”

    갤러리에서 크리스티앙과 베네딕트를 동시에 만나고 돌아왔던 날 밤이었다. 바로 이 방 침대 위에서 괴롭게 중얼거리던 발터의 애끓는 얼굴이 떠올랐다.

    “나의 심장도, 좆도, 이 몸뚱이까지도 모두 네 것이니까…. 네가 날 어떻게 쓰든 상관없다.”

    “전쟁에 출정하는 것과 침대에서 폐하의 외로움을 달래는 것의 차이는 제게 없습니다. 폐하가 명하신다면 제게는 똑같이 중요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그 어떤 명령이라도 따를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폐하를 부족함 없이 보조하는 것이 제 역할이니 부디 절 신경 쓰며 주저하지 말아 주십시오.”

    분명 같은 뜻의 말을 전하고 있는 건데, 발터의 얼굴이 그때와는 완전히 달랐다. 베네딕트에게 뜨겁게 안기는 그녀를 상상하며 차라리 죽기를 바랐다고 고백했던 남자는 없었다. 혜미의 눈앞에는 그저 주인 된 자의 명을 기다리는 충직한 기사만이 보일 뿐이었다.

    “하나만 물어볼게.”

    “얼마든지 하십시오.”

    “너. 만약 내가… 내가 아니었다면…. 아니…. 내 말은 그러니까 이 자리에 있는 게 내가 아니라…. 하아….”

    미치겠다. 혜미의 입에서 두서없는 말이 앞뒤를 가리지 않고 튀어나왔다. 그녀는 황망히 떨리는 시선을 발터에게 향한 채 울컥 토해 내듯 입을 열었다.

    “내가 만일 리비에르였다고 해도 넌 똑같이 말했을 거야?”

    이 자리에 있는 사람이 나 아닌 다른 사람이었다고 해도 너는 기꺼이 그녀의 침대 시중을 들 수 있을 거라 말했을까.

    발터의 짙은 눈썹 앞머리가 위로 휘었다.

    “리비에르는 제 주군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만약이라고 하잖아.”

    “…제게 그런 질문을 하시는 이유를 알 수 없지만….”

    “…….”

    “제 주군을 위해 제가 하지 못할 일은 없었을 겁니다.”

    혜미는 심장이 움켜쥐는 압력을 견디다 못해 터져서 흘러내리는 건 아닌지 잠시 생각했다.

    발터는 지금 농담을 하고 있는 게 아니었다. 발터는, 그와 그녀 사이에 있었던 비밀스러운 기억들을 모두 잊어버린 게 틀림없었다. 누군가 고약한 장난을 친 거라고밖에는 생각할 수 없는 일이었다.

    ***

    “황녀 저하, 괜찮으십니까?”

    의사가 목소리를 조금 높이자 혜미는 깊은 상념에서 깨어났다.

    “…뭐가요?”

    “상처의 통증은 어떠하시냐 여쭈었습니다.”

    “아무렇지도 않아요.”

    등받이가 있는 의자에 거꾸로 앉은 채 혜미가 건조하게 입을 열었다. 오전에 거울로 확인한 그녀의 등에는 마치 알파벳 에스 자를 길쭉하게 늘어뜨린 것 같은 기다란 상처가 나 있었다.

    상처 부위가 새까맣고 마지 악어의 등가죽처럼 우툴두툴했다. 지나가는 말로도 흉하지 않다고는 할 수 없었지만 끔찍한 외상과는 달리 피부의 고통은 심하지 않았다.

    “…아무렇지도 않을 리가 없을 텐데….”

    “참을 만하다는 뜻이었어요.”

    혜미가 낮게 대답하며 몸을 일으키자 의사가 얼른 그녀에게서 조금 떨어지며 예를 취했다.

    “두들겨 맞은 것처럼 안에서 조금 욱신거리긴 하지만요.”

    “회복력이 정말 대단하십니다. 무, 물론 제가 최선을 다하긴 했습니다만….”

    “원래 몸이 좀 튼튼해요.”

    혜미는 기이할 정도로 빠른 그녀의 회복력에 놀라 어쩔 줄을 모르는 의사를 한 마디로 정리해 주었다.

    “그런데 황녀 저하…. 저… 혹시 말입니다….”

    “네,”

    마르고 뾰족한 얼굴의 의사가 혜미와 그녀의 곁에 서 있는 발터를 차례로 보며 말을 주저했다.

    “그게… 그러니까. 흠….”

    늘 혼자 다니더니 오늘따라 여자 의사를 보조로 데려온 것도 그렇고, 아까부터 무슨 말을 할 듯 말듯 고개를 갸웃거리는 걸 봐서는 의사의 컨디션이 그리 좋지 않은 것 같았다. 혜미가 그를 보며 되물었다.

    “다 끝났으면 그만 옷을 입어도 될까요? 계속 살 내놓고 있기가 좀 그래서요.”

    “예? 예, 물론입니다.”

    의사가 헛기침을 하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반나신을 드러낸 혜미가 곁에 서 있는 발터에게 눈짓하자 그가 소리 없이 다가와 옷 입는 그녀를 보조했다.

    더러워진 옷을 깔끔히 접어 처리하고 새 옷을 입혀 그녀의 몸을 가리는 발터의 손길은 빠르고 기계적이었다. 매듭을 짓는 신속한 손놀림에 시선을 빼앗겨 옷깃에 가려진 그의 목덜미 색이 짙어진 것을 알아차린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발터. 네 상처는 보이지 않아도 돼?”

    “괜찮습니다.”

    발터가 낮게 답했다. 일전에 베네딕트를 만난 후, 발터의 열상은 완전히 사라졌다. 미세한 실금만이 남아 있는 것을 그 스스로 확인한 후였다. 혜미는 거절하는 그를 설득하는 대신, 몸을 일으켜 기다란 소파에 허리를 세우고 앉았다.

    “의사 선생님. 저 이제 슬슬 바깥에 나가서 햇볕 좀 봐야 할 것 같아요. 일주일이 넘게 침대에 누워만 있었더니 옆구리에 욕창 걸릴 것 같기도 하고요.”

    “예, 황녀 저하. 그렇지 않아도 오늘 오후에 ‘폴린의 뜰’로 모실 참이었습니다.”

    “그게 뭐예요?”

    혜미가 주치의인 펠리페를 향해 멍한 표정으로 되묻자 수십 년 전 그녀의 증조할아버지뻘 되는 선황이 즐겨 찾았던 약탕이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뜨거운 물이 절로 샘솟는데 그곳에 몸을 담그면 진통과 소염에 효과가 있다는 부연 설명을 듣고 있자니 뭔가 익숙했다.

    “그러니까 목욕탕이라는 말이죠?”

    “예? 아, 예. 그렇긴 하지만 그곳은 보통 목욕 시설과는 달리 황족과 황족의 특별 허가가 있는 이들 외에는 아무나 함부로 들어갈 수 없는 곳으로 워낙에 영험한 탓에….”

    주치의가 뭐라고 길게 덧붙이는 말이 혜미의 귀에는 잘 들리지 않았다. 화려하지만 좁은 욕조가 아닌 커다란 탕 안에 들어갈 수 있다고 생각하자 갑자기 참을 수 없이 목욕이 하고 싶었다.

    “알겠어요. 뭐든 좋으니까 오늘은 밖에 나갈게요.”

    혜미가 고개를 끄덕이자 펠리페가 “예, 그럼 그렇게 고하겠습니다.” 하고 대화를 끝낸 후, 자리를 물렸다. 뒤늦게 누구한테 뭘 고한다는 말인지 생각해 보니 답은 쉽게 나왔다. 그녀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고 있을 크리스티앙이려니 싶었다.

    “후우….”

    그녀와의 관계를 기억하지 못하는 발터 때문에 잠시 잊고 있었던 일이 다시 그녀의 복잡한 머릿속을 비집었다. 예상외의 행동을 벌이기 시작한 크리스티앙에 관한 문제였다.

    걔는 갑자기 또 왜 그러는 걸까. 심각한 정도로 따지자면 이쪽이 더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며 정수리가 쭈뼛거렸다.

    “‘폴린의 뜰’은 황금성의 남쪽에 있는 별채의 후원으로 숲속 오두막 안에 위치한 노천입니다. 성안의 관리된 다른 정원과는 달리 주변에는 숲이 우거져 위험할 수 있으니 주의하십시오.”

    영혼 없이 소파에 늘어져 있던 혜미가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의사를 내보내고 돌아온 발터의 얼굴은 언제나처럼 진지하고 태연했다.

    “…넌 안 가?”

    “물론 함께 갑니다.”

    “그런데 왜 혼자 보내는 것처럼 말하는데?”

    발터가 미간을 조금 모으더니 곧 답을 이었다.

    “…제가 탕 안까지 함께 할 수는 없는 일이니까요.”

    중저음의 목소리로 낮게 내뱉는 발터의 얼굴에서 그의 감정을 읽어 내기는 힘이 들었다. 혜미는 낮은 한숨을 삼키며 되물었다.

    “네가 같이 들어가면 왜 안 되는데?”

    그녀는 지난 사흘 동안 끊임없이 이런 방식으로 발터를 시험했다. 그때마다 발터의 커다란 가슴이 느리게 일렁였고, 그녀를 실망시키는 답이 이어졌다.

    “그곳은 황족 외에는 출입 금지입니다, 폐하.”

    “네가 황족의 법도를 그렇게 중요하게 생각할 것 같지는 않아.”

    혜미가 그를 보며 중얼거리듯 말하자 발터가 마른침을 삼켰다.

    “너한텐 내가 제일 중요하잖아.”

    그녀는 그의 심각한 얼굴이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면 얼마나 다정하게 변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문제는 발터가 무엇 때문인지 기억을 잃어 그와 그녀 사이에 있었던 일들을 기억하지 못한다는 데 있었지만.

    “내 말이 틀려?”

    “틀리지 않습니다. 당연합니다. 폐하께 위험이 생기면 언제든 제가 들어갈 것이니 염려치 마십시오.”

    “…내가 자객이 두려워서 이 말을 꺼낸 것 같아?”

    “아.”

    발터의 피부색이 조금 더 짙어졌다.

    “시녀 대신 제가 폐하의 목욕 시중을 들기 원하신다면…. 그렇게 하겠습니다.”

    마지막 말을 내뱉는 그의 목소리는 마치 조금 주저하는 것처럼 들렸다. 뭔가를 두려워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내키지 않아 하는 말투를 들으며 혜미는 씁쓸하게 웃었다.

    그녀가 싫다는 그에게 기어코 침소에 들라는 명을 내리기라도 할까 봐 이처럼 거리를 두는 걸까. 마치 정말로 폭군이라도 된 듯한 기분이다.

    “넌 정말 날 위해서 못 할 게 없다는 소리로 들리네.”

    “사실입니다.”

    그녀가 소리 없이 숨을 들이쉬며 그를 다시 시험했다.

    “그게… 호위 기사의 의무니까?”

    그녀에게 시선을 마주치며 발터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예.”

    발터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낮게 내뱉었다.

    “그럼 이만 준비를 위해 나가 보겠습니다.”

    옷매무새를 탁, 털어 내는 손짓에는 군더더기가 없었다. 혜미는 그녀의 방을 빠져나가려는 그를 불러 세웠다.

    “발터.”

    그가 뒤돌아 특유의 묵직한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이렇게 된 이상 더 미루어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너한테 할 말이 있어.”

    “예, 폐하.”

    “크리스티앙 말인데.”

    혜미의 시선이 조금 흔들리자 발터가 한 발짝 가까이 다가와 의자를 당겨 앉았다. 그녀의 목소리에 깃든 심각함을 알아챈 탓이었다.

    “말씀하십시오.”

    “…좀 이상해.”

    뭐라고 시작을 해야 할지 몰라 툭 내뱉은 말이었지만 발터는 신중하게 받았다.

    “무슨… 특이점이라도 있습니까?”

    “내가 다쳤을 때, 크리스티앙이 날 보러 왔었어. 호위병은 없었고 대공도 없이 혼자서.”

    발터가 말없이 그녀의 말을 경청했다.

    “그가 갑자기 의사를 내보내더니 상처를 직접 소독하고… 직접 약을 먹였어. 사실 그때까지만 해도 난 꿈이라고 생각했어. 정신이 좀 희미하기도 했고, 그 상대가 진짜 크리스티앙일 거라고는… 생각이 안 되는 거야. 그러니까 내 말이 무슨 뜻이냐면….”

    “무슨 말씀을 하시려는지 알 것 같습니다.”

    주저하며 뒷말을 꺼내기 힘들어하는 그녀를 보며 발터가 입을 열었다.

    “…안다고?”

    “파티가 열렸던 밤부터 뭔가 이상하다고 직감했습니다.”

    크리스티앙이 황후와 같은 드레스를 그녀에게 입혀 놓았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는 귀족들 앞에서 제 누이를 망신 주기 위함이라고 확신했으나 시간이 갈수록 그게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크리스티앙과 춤을 추던 황녀의 모습은 그들을 모르는 사람이라면 마치 연인으로 보일 정도로 잘 어울렸다. 마치 의도라도 한 것처럼.

    누이의 허리를 꽉 감싸 제게 붙이던 장갑 낀 손. 그녀를 곁눈으로 내려다보며 웃었던 미소. 하늘에서 불꽃이 터지는 구름다리 위에서 그녀의 눈동자 색과 꼭 닮은 보석을 꺼내 들던 그의 모습이 마치 방금 전 일처럼 생생했다.

    “확신이 들었던 것은 그가 저를 벌하였을 때, 정확히 말하면 폐하께서 얀을 변호하고 저를 위해 채찍을 맞으셨을 때였습니다.”

    발터가 인상을 찌푸렸다. 그날 밤을 떠올리자 속에서 뭔가 뜨거운 것이 치밀어 오른 까닭이었다. 발터는 그것을 부하를 위해 몸을 내던진 주군에 대한 미안함과 죄의식이라 생각했다.

    “그는 분노하고 있었습니다. 정확히 말하면 폐하에게 채찍을 휘두른 그의 충신, 하이데거에게 말입니다.”

    쓰러진 황녀를 끌어안고 일어섰던 발터의 시야에 차갑게 얼어붙어 있던 크리스티앙의 표정이 선명하게 박혔다. 정확히는 대공을 향한 그의 살기가.

    처음에는 말이 안 되는 일이라고 생각했으나 예감은 점점 다른 쪽으로 기울었다. 발터가 아픈 그녀를 뒤로하고 베네딕트를 만나기 위해 자리를 비울 수 있었던 것 역시, 그의 마음속에 어떤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전 크리스티앙에게 폐하를 해할 의도가 없다고 판단했습니다.”

    “…….”

    “아직은.”

    발터는 마지막 말을 충동적으로 덧붙인 후, 아랫입술 안쪽을 지그시 씹었다. 부연할 필요가 없는 쓸데없는 소리를 굳이 내뱉은 스스로가 이상하다고 생각했지만 이내 상념을 떨쳐 내고 설명을 이었다.

    “만일 폐하께서 말씀하셨듯이 그가 이곳에 찾아와 직접 상처를 소독하고 약을 먹이는 등의 일을 벌인 게 사실이라면.”

    “…사실이라면?”

    “저는 현재 크리스티앙이 폐하께 연심을 가지고 있을 가능성이 크다고 봅니다.”

    발터는 그녀가 마지막까지 머뭇거리며 털어놓기를 망설였던 사실을 거침없이 입 밖으로 내뱉었다. 혜미는 가슴이 꽉 막힌 것 같은 느낌에 마른침을 한 번 삼켰다.

    “내 착각이 아니라는 거야?”

    “그는 폐하의 병문안을 올 성정이 아니며, 설사 그렇다면 모두가 잠든 밤이 아니라 환한 낮에 원로원을 끌고 생색내듯 찾아왔을 이입니다.”

    “네가 생각해도 그렇지?”

    “예.”

    “…그런데 크리스티앙은 나한테 입으로 약을 먹여 줬어. 내가 몸을 일으킬 수가 없었거든.”

    “…….”

    “입맞춤이었던 것 같아.”

    묘한 얼굴로 중얼거리듯 내뱉는 그녀를 보며 발터가 말없이 눈을 깜빡였다.

    “그렇다면 더 확인할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찰나의 침묵 끝에 이어지는 목소리는 건조했다. 혜미는 경직된 그의 말투에서 약간의 희망이라도 찾길 바랐지만 이제는 자신이 없었다.

    “그럼 난 어떻게 해야 돼…?”

    발터가 진지한 눈동자가 그녀를 직시했다.

    “크리스티앙이 정말 날 그렇게 본다면 이제 어떻게 해야 하냐고.”

    “차라리 잘된 일입니다, 폐하.”

    발터의 답은 그녀의 예상을 모조리 비껴갔다. 혜미는 말없이 눈을 질끈 감았다 떴다.

    “폐하의 안전을 확보하는 데 그보다 안전한 방법은 없을 겁니다. 그가 폭주할 가능성을 염두에 둬야 하지만 신중히 움직인다면 겨울제까지 그의 신경을 최대한 분산시키고 역으로 그쪽의 정보를 알아내는 게 가능할지도 모릅니다.”

    날카롭게 사실만 짚어 내는 발터를 보는 그녀의 가슴에 절망감이 커져 갔다. 몇 번을 확인해 봐도 결과는 변하지 않았다.

    “괜찮으십니까…?”

    “속이 좀 안 좋아.”

    그냥 하는 말이 아니라 정말로 속이 메스꺼운 착각이 일었다.

    “아침부터 아무것도 드시지 않았습니다. 뭘 좀 드시는 게 좋겠습니다.”

    발터의 눈이 염려로 젖어 들었다. 하지만 그것은 충심일 뿐 사사로운 감정은 찾아볼 수가 없다.

    “아니.”

    혜미가 고개를 저으며 결심한 듯 내뱉었다.

    “아무래도 베네딕트를 만나야겠어.”

    발터가 잠시 눈을 깜빡이며 대답을 망설인 것은 찰나였다. 연인을 보러 가고 싶다는 그녀의 말을 거스를 명분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이 순간 왜 망설였는지 이유도 알 수 없었다.

    “시종에게 지금 즉시 말을 전하겠습니다.”

    응접실로 나서는 발터의 뒷모습이 사라지자마자 혜미는 탁자 위에 팔꿈치를 댄 채 머리를 감싸 쥐었다. 그녀는 지난 며칠간 생각에 생각을 더했다. 발터의 기억이 손실된 이유는 한 가지밖에 없어 보였다. 파티에서 하이데거의 채찍을 맞은 계기로 충격을 받은 게 틀림없었다.

    발터 대신 채찍을 맞았을 때, 혜미는 대공이 마력을 실었다는 것은 확실히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그녀는 자신의 회복이 빠른 것이 온몸에 감도는 마력의 기운 때문이라는 것을 예측했다.

    베네딕트와 황성에서 재회한 이후, 그녀 스스로도 몸 컨디션이 최고로 치솟고 있다는 것을 느낄 정도였기 때문이다. 정확히 말하자면 비 오는 후원에서 그와 잔 이후로.

    혜미는 침대 아래에서 마법사의 보석이 박힌 칼을 꺼낸 후, 손잡이를 감고 있는 천을 풀어냈다. 눈이 부실 정도로 환하게 발열하는 붉은 빛은 꺼질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었다.

    ‘발터의 상처가 빨리 회복할 수 있었던 것 역시, 베네딕트가 그에게 나눠 준 마력 때문일 거야.’

    하지만 그녀의 사망 당시 베네딕트가 발터에게 주입해 준 마력은 그녀만큼 강하지 않았다. 게다가 자신이 3년 동안 의식을 잃고 누워 있을 때 그녀에게 퍼부어 준 까닭에 그리 많이 남아 있지는 않을 것이다.

    ‘베네딕트라면 발터를 치료하는 방법을 알 수 있을지도 몰라.’

    그녀가 그를 만나려는 이유는 그것 때문이었지만, 순간 그녀의 머릿속에 불안한 의문이 스쳤다. 만약 베네딕트가 협조적으로 나오지 않으면 어쩌지?

    아니, 그의 성정으로 보았을 때 발터의 기억 중 오로지 그녀와 관련된 것만 도려내듯 없어진 이 상황이 오히려 기꺼울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베네딕트에 대한 그녀의 감정이 발전된 것과 별개로 그가 성격이 좋다고는 말할 수 없었으니까.

    그 반대라면 모를까.

    문이 가볍게 두드리는 소리와 함께 발터가 다시 모습을 보였다. 일어나려는 그녀에게 그가 고개를 숙이며 입을 열었다.

    “베네딕트의 몸 상태가 그다지 좋지 않아 오늘은 폐하를 뵐 수 없을 것 같다는 전갈이 왔습니다.”

    쿵. 그녀의 심장이 큰 소리를 내며 뛰었다. 시종을 옆에 달고 온 발터의 눈빛 역시 의미심장했다. 베네딕트가 움직이기 시작했다는 뜻이었다. 왜 하필 지금,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혜미는 등을 꼿꼿이 세우며 그를 향해 태연한 어조로 명령했다.

    “그럼 난 ‘폴린의 뜰’로 가서 상처 치료를 해야겠어. 나중에 폐하께 그를 그곳에 데려가도 되는지 여쭐 겸 확인도 좀 하고.”

    “채비하겠습니다.”

    발터가 두말없이 즉각 고개를 숙였다. 무슨 일이 일어났을 때 그녀가 사건 발생 장소에서 최대한 멀리 떨어져 있는 편이 좋았다. 계획대로라면 베네딕트가 그녀와의 만남을 거절하는 날, 그는 황궁에서 사라질 예정이었다.

    ***

    황금성이 엄청난 대지 위에 지어진 여러 성의 집합체라는 사실은 이미 알고 있었다. 그 크기는 실제로 말을 타고 달려 보면 더욱 실감이 났다. 부상 탓에 말을 타는 것을 저지당한 혜미는 순순히 마차에 몸을 실었고, 흔들리는 마차 위에서 한참을 보낸 끝에 목적지에 다다랐다.

    “이곳에서부터는 마차가 들어갈 수 없어 걸어가셔야 합니다만….”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