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말인가 보군요. 한낱 힘없는 호위 기사 따위가 주군의 곁을 탐하다니.”
“이든의 옆에 있을 자격이 없는 것은 당신 역시 마찬가지다.”
“왜죠?”
“…당신이 거짓으로 일을 꾸민 걸 이든이 알게 된다면 그녀는 당신을 경멸할 테니까.”
발터는 그녀의 성격을 누구보다 잘 아는 이였다. 일그러진 얼굴로 확언하는 그를 향해 베네딕트가 조금 웃었다.
“경멸이라. 폐하가 지금 제게 가지고 있는 감정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단어로군요.”
“이든은 자신을 기만한 자를 감당할 수 있는 이가 아니야.”
“궁금하군요. 제가 후원에서 폐하와 어떤 시간을 보냈는지 알아도 그따위 부적절한 말을 입에 올릴 수 있는지가.”
발터의 너른 가슴이 딱딱하게 경직했다. 비가 억수같이 쏟아지던 그날의 기억이 떠오른 탓이었다. 그가 이를 꽉 깨물며 고개를 저었다.
“…그딴 건 상관없어.”
“절 사랑한다 하셨습니다.”
“…뭐?”
또렷하게 속삭이는 말투에 발터의 손에서 힘이 탁 풀렸다. 등의 열상이 완전히 없어진 발터가 뒤로 한 발짝 주춤하며 물러났다. 바위 같은 몸이 흔들렸다.
“폐하께선 저를 사랑한다고, 몇 번이나 외치셨습니다. 저와의 추억이 잔뜩 어린 장소에서 제게 안겨 눈물을 흘리며 고백하셨습니다. 우리가 거기서 뭘 했는지는 굳이 말하지 않아도 그대는 짐작하고 있겠지요. 아둔한 자가 아니니.”
“하아….”
“역시 제대로 듣는 편이 좋을까요?”
“닥쳐.”
발터가 거칠게 숨을 들이쉬었다. 콧날이 시큰해지며 뜨거운 것이 눈앞을 가렸다. 베네딕트는 옅은 미소를 띤 채, 마치 꼬리가 잘린 뱀을 공격하는 여우처럼 그를 몰아붙였다.
“폐하께서는 당신에게 사랑을 고한 적이 있습니까?”
있었다. 세르노티에서 늘 함께이던 시절, 이든은 그에게 몇 번이나 사랑한다고 말했었다. 사랑한다고. 너는 내 거라고. 그와 비등한 소유욕을 내비칠 때마다 자신의 마음이 얼마나 충만한 만족감으로 녹아들었는지 아무것도 모르면서 지껄이는 눈앞의 남자를 죽이고 싶었다.
“나와 그녀가 공유했던 시간을 아무것도 모르면서 함부로 지껄이지 마.”
발터의 갈색 동공이 분노와 질투에 꽉 차 거칠게 일렁였다.
“그대와 폐하의 시간이라.”
베네딕트가 부드럽게 말을 이었다.
“그 비밀스러운 시간을 폐하께서도 기억하십니까?”
심장을 쿡, 찔린 것만 같았다. 발터는 오금에 힘이 완전히 풀리는 것을 느꼈다. 베네딕트는 이든의 기억이 완전히 돌아오지 않았다는 사실을 잔인하게 꼬집고 있었다.
“추억을 가진 것은 그대뿐만이 아닙니다.”
“…….”
“하지만 영원히 과거만을 반추하며 살 수는 없는 일이 아닐까요.”
“그만.”
베네딕트는 발터의 말을 가볍게 거부하며 쐐기를 박듯 마지막 질문을 내던졌다.
“긴 잠에서 깨어난 후, 폐하가 당신에게 사랑한다 말한 적이 있습니까?”
발터는 대답할 수 없었다. 거친 숨을 간신히 내쉬는 그에게 베네딕트가 한 발짝 더 가까이 다가왔다. 스르륵. 기다란 은발이 그의 어깨 아래에서 흔들렸다.
“안타까운 이여. 그대의 충성심이 깊다는 것을 압니다. 그렇기 때문에 폐하의 곁을 지키는 자리에 그대를 둔 것입니다.”
“그녀에게 내 심장을 바친 것은 그 누구도 아닌 내 선택이었어.”
발터가 그의 말을 부정하며 괴롭게 속삭였다. 죽은 이든을 끌어안고 두 번 다시 너를 홀로 두지 않겠다고 피를 토하듯 외친 것도, 기적같이 살아 돌아온 그녀에게 평생 충성하겠다 기사의 맹세를 한 것도 모두 그의 온전한 진심이었다. 그 누구의 계획 따위가 아니란 뜻이다.
“당신은….”
목구멍에 뭐가 걸린 것처럼 말이 막혀 발터는 숨을 격하게 몰아쉬어야 했다. 마침내 떨리는 목소리가 그의 성대를 억지로 비집었다.
“…그녀의 선택을 받았음에 평생 감사하며 살아야 할 것이다.”
이글거리는 눈에 뜨거운 물기가 들어찼다.
“그렇지 않았다면 그녀를 기만한 너를 내 손으로 직접 죽였을 테니까.”
“대단한 충성심이로군요. 사랑하는 이의 사랑까지 지켜 주는 마음이라니.”
베네딕트가 색이 연한 입술을 비틀었다. 그는 역시 발터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감당할 수 없는 질투에 괴로워하면서도 감히 자신에게 손대지 않는 그의 진심이 느껴졌기 때문에 더욱 그러했다.
에데르트의 인생에서 발터 세르노티라는 이름을 완전히 도려내지 않으면 안 되겠다는 확신이 들었다. 풋사랑에 집착하는 그녀의 미련을 끊어 내는 데에도 이 방법이 좋을 것이다.
“크리스티앙이 폐하에게 삿된 마음을 품었다는 사실을 압니까?”
발터의 턱이 딱딱하게 굳었다. 역시, 베네딕트의 짐작대로였다.
“모를 리가 없겠지요. 멀리, 제가 있는 이곳까지 크리스티앙이 그녀를 바라보는 시선의 열기가 느껴졌으니 말입니다.”
발터는 고개를 돌려 베네딕트가 서 있던 벽을 바라보았다. 손바닥 너비만 한 조그마한 창 너머로 보이는 것은 사흘 전 파티에서 그녀가 크리스티앙과 마주했던 구름다리였다.
“남매애로 포장이 안 되는 일이라는 건 폐하께 들어 그대도 이미 알고 있겠지요? 설사 진짜 피가 섞였다 한들, 크리스티앙이 그걸 신경 쓸 위인도 아니지만.”
베네딕트가 흐릿하게 조소했다. 자기 핏줄마저 살해할 수 있는 크리스티앙에게 도덕이란 세상 사람들의 그것과 확연히 다른 가치가 분명할 것이다.
“하고 싶은 말이 뭐야.”
“성안의 경비가 모두 파티에 집중되어 있을 때, 호아킴이 크리스티앙에게 보낸 전서구를 발견해 먼저 보았습니다.”
발터의 눈빛이 번뜩였다.
“그는 곧 아메티스에 입성할 겁니다. 그가 거느리는 군사의 수는 원로원에 알려진 것의 두 배입니다. 폐하께서 리비에르의 군대를 모두 손에 넣는다 해도 당해 낼 수 없으며 하이데거가 거느리는 황궁 경비대와 연합한다면 대적해야 할 적의 수는 더욱 늘어나겠지요.”
“…….”
“그것뿐이 아닙니다. 교황청에는 하이데거가 훈련시킨 비정상적인 마법사들이 득실거릴 겁니다. 그들은 위험 상황에 앞장서는 살인 병기가 될 것입니다.”
“싸우지 않고 이기는 건 불가능해. 힘든 싸움이 될 거라는 사실은 강조하지 않아도 모두가 알고 있다.”
정석적인 대답을 내놓는 발터를 향해 베네딕트가 코웃음을 쳤다. 어쩌면 이리도 미련하리만큼 꼿꼿한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이자는 황녀의 행복을 위해서라면 베네딕트가 일부러 만들어 놓은 가시밭길을 기꺼이 걸어 나갈 수 있는 이였다.
베네딕트는 자신이 왜 불안해지는지 그 이유를 깊이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대신 그의 숨통을 조이기로 마음먹었다.
“당신과 폐하가 계획한 것들이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맞아떨어질 거라는 보장이 있습니까?”
“힘을 보태지 않을 거라면 방해하지 말고 꺼져.”
베네딕트가 수려한 미간에 주름을 잡았다.
“돕지 않겠다고 한 적은 없습니다. 다만 제가 말하고 싶은 건, 모든 계획이 완전히 성공하기 위해서는 눈치 빠르고 교활한 크리스티앙의 주의를 빼앗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뜻입니다.”
“…….”
“그가 폐하에게 마음이 흔들리는 것은 예상치 못한 일이었으나….”
“…그래서?”
“본디 사람의 감정이란 것은 본인의 예상마저도 뛰어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베네딕트가 마치 스스로 혼잣말하듯 중얼거리며 약하게 웃었다.
“폐하는 크리스티앙의 마음을 최대한 이용해야 합니다. 그것이 풋내 나는 연심이든, 한순간의 욕망이든 상관없이 말이죠.”
“이든은 타인의 마음을 이용할 수 있는 성정이 못 된다. 그녀는 그럴 수 없어.”
발터가 주먹을 꽉 쥐며 낮게 속삭이듯 말했다.
“예. 맞습니다. 그대가 아는 이든이라면 절대 그럴 수 없겠지요.”
투명하고도 새파란 베네딕트의 눈동자가 얼어붙은 강물처럼 차갑게 빛났다.
“하지만 클라웨의 다음 황제, 에데르트 폐하는 그럴 수 있습니다. 그럴 수 있어야 합니다.”
바람 한 점 들어오지도 않는 밀실 같은 공간 안에서 그의 기다란 머리카락이 흩날렸다.
“그걸 곁에서 지켜보는 그대는 물론 괴롭겠지만.”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거야.”
“…당신의 괴로움을 이해합니다. 내가 도움을 줄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당신이 날 찾아오기를 기다렸습니다.”
“개수작 부리지 마라.”
발터가 잇새로 내뱉었다.
“그녀를 도울 거라면 모든 진실을 털어놓고 확실히 힘을 합치는 게 옳아.”
“아니오.”
베네딕트가 고개를 저었다.
“무슨 방법이 옳은지는 내가 결정합니다.”
발터는 그에게서 강하게 일렁이는 마력의 파동을 느꼈다. 붉고 푸른 마력의 빛이 섞여 종래에는 보랏빛을 띠었다. 베네딕트가 그를 향해 또렷하게 중얼거렸다.
“그녀가 원하는 것을 모두 손에 쥐여 줄 수 있는 이는 결국 나뿐입니다. 폐하를 행복하게 만드는 건 제 역할이란 뜻입니다.”
“어떻게 그걸 확신하지? 당신은 어떻게…?”
발터의 짙은 갈색 눈동자가 마구 떨리며 흔들렸다. 하루에도 몇 번씩이나 자신의 감정을 곱씹고 뒤엎어 보아도 스스로의 한계에 부딪히는데, 눈앞의 마법사는 어떻게 멋대로 그녀의 행복을 단언할 수 있을까.
“마법사들은 본래 인내심이 강합니다. 그리고 전 그들 중 가장 강한 마법사죠.”
베네딕트가 그를 향해 구김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환한 얼굴로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그대는 그녀를 위해 어디까지 참을 수 있습니까.”
발터의 눈앞에 아득한 회색 연기가 안개처럼 펼쳐졌다.
“베네딕트…. 사랑해요…. 당신을… 사랑해요…!”
그의 눈앞에 비 내리는 후원의 광경이 드러났다. 발터의 호흡이 격하게 흐트러졌다. 기다란 눈매가 괴롭게 일그러졌다. 베네딕트와 뜨겁게 하나가 된 그녀의 모습을 꿈에서 보았을 때와 똑같이, 심장이 버석하게 부서지는 느낌.
“다른 사람에게 사랑을 말하는 그녀를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
베네딕트의 얼굴은 보이지 않고 조소하는 목소리만이 들렸다.
“…북부로 떠날 것이다. 모든 일이 끝나면 나는 북부로 떠난 후 변방에서 그녀를 지켜.”
“왜. 눈앞에서 보지 않으면 참을 수 있을 것 같기 때문입니까?”
발터의 눈앞에서 회색 연기가 짙게 일렁이며 또 다른 장면을 보여 주고 있었다. 발터의 동공이 마구 흔들렸다.
“…이건….”
캄캄한 어둠 속에 펼쳐진 공간은 발터의 눈에도 익숙했다. 침대를 둘러싼 사면에 기다란 캐노피 기둥이 있고 창문이 없는 대신 금술이 달린 비로드 커튼이 사방에 걸린 자줏빛 침실. 이든이 머물고 있는 황녀의 침실이었다.
누군가 침대에서 스르륵, 소리 없이 일어나는 것을 보며 발터가 입술을 꽉 깨물었다. 이든이 아니었다. 그가 떠나기 전까지 발작하다 겨우 잠들었던 이든이 깨어났을 리가 없었다. 무엇보다 그는 그녀의 움직임을 잘 알았다.
길쭉하고 늘씬한 인영이 바닥에 떨어진 가운을 걸치고, 은색 트롤리 위에 놓인 약상자를 집어 들었다. 그는 발터가 익히 아는 남자였다. 발터의 짙은 눈썹이 꿈틀거리며 휘어졌다.
“…저자가… 지금….”
그가 침대 위를 덮고 있던 이불을 걷어 낸 후, 쓰러져 잠든 이든의 곁에 앉았다. 끈이 뒤에 달린 그녀의 잠옷이 풀어 헤쳐져 상처를 훤히 드러내고 있는 모습이 어둠 속에서도 선명하게 보였다.
“가야 한다. 이든이 위험해…!”
“잘 지켜보십시오. 그가 무얼 하는지.”
베네딕트의 목소리가 당장이라도 자리를 박차고 떠나려는 발터를 저지했다. 상처를 소독하는 손길은 발터가 짐작하는 사람이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만큼 섬세하고 조심스러웠다.
“지금 이 시각, 그녀의 침실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입니다.”
길게 찢어진 이든의 상처에 약을 바를 때마다 그녀의 손이 꿈틀거렸다. 남자가 자유로운 손으로 그녀의 손을 꽉 잡는다. 마치 달래듯. 아니, 아닌가. 그것보다 조금 더 진득한 접촉인가. 그녀의 손등에 포개진 손바닥이 느리게 살결을 문질렀다. 혼란스러운 발터의 가슴속에서 심장이 조여들었다.
조심스러운 처치가 끝난 후, 그가 마침내 약상자를 내려놓았다. 침대로 다시 돌아와 천천히 고개를 숙인 그가 그녀의 등에 입을 맞추었다. 목덜미부터 허리 아래까지. 길게 이어진 시커먼 상처에 마치 길을 내듯 부드럽게 입술이 떨어졌다. 발터는 탁하게 한숨을 내뱉었다.
말도 안 돼.
이건 말도 안 된다.
춥. 춥.
허벅지 아래 상처에 조심스레 키스한 후, 마침내 고개를 쳐든 이의 얼굴을 마주할 수가 없어 발터는 눈을 질끈 감고야 말았다. 떨리는 속눈썹. 붉어진 눈가. 잠든 그녀를 곁눈으로 바라보며 입술이 마른 듯 혀로 제 입술을 축이는 아름다운 남자. 사랑에 빠진 소년의 얼굴을 한 이는 이 제국의 황제, 크리스티앙이었다.
“믿을 수가 없습니까? 저 역시 그랬습니다. 오만하기 짝이 없는 크리스티앙이 이런 표정을 지을 수 있다는 건 상상도 하지 못했으니까요.”
베네딕트가 연기를 뚫고 한 발짝 다가섰다.
“고통에서 벗어나게 만들어 주겠습니다.”
발터의 주먹이 부들부들 떨렸다.
“다, 당신은 아무렇지 않은가? 이런 모습을 보고도… 어떻게… 그렇게 태연할 수가 있지?”
“말하지 않았습니까. 나는 인내심이 강하다고.”
거짓이었다. 베네딕트가 태연을 가장할 수 있는 것은 그가 이제껏 견뎌 온 세월 동안 축적된 기술 같은 것이었다. 또 한편으로는 궁금하기도 했다. 크리스티앙이 절규하는 모습이 어떨지가.
결국 에데르트의 곁을 차지한 것이 자신이 그토록 경멸하던 대마법사라는 것을 깨닫고 무너지는 모습을 보는 건 퍽 즐거울 것이다.
“그리고 바로 그것이 그대와 저의 차이점이고요.”
시커먼 속을 숨긴 마법사는 평온한 얼굴로 눈앞의 남자를 마음껏 헤집는 데 집중하기로 했다. 사람을 미치도록 괴롭게 만드는 것은 베네딕트가 썩 잘하는 짓이었다. 그리고 그는 제 발로 찾아온 기회를 놓칠 생각이 추호도 없었다.
“이런 장면을 보아도 더 이상 고통스럽지 않도록 만들어 주겠습니다.”
“당신이… 어떻게…. 어떻게 그럴 수 있단 말인가….”
발터의 눈에 뜨거운 기운이 차올랐다.
“황녀를 향한 충성심을 제외한 사적인 기억을 모두 없애 주겠습니다. 그녀와 사랑했던 기억을 도려내 주겠습니다. 그렇다면 에데르트는… 당신의 이든은 행복할 수 있습니다. 크리스티앙을 이용해 그를 자폭하게 만드는 것도 가능하단 뜻입니다.”
“하아…. 아아….”
발터가 제 가슴을 움켜쥔 채 호흡을 거칠게 몰아쉬었다.
“난 당신을 믿을 수가 없어.”
“믿기 어렵겠지만 당신과 나의 목표는 같습니다.”
베네딕트가 그를 향해 또렷하게 내뱉었다. 에데르트가 눈치채지 못하는 방법으로 발터를 치워야 한다. 크리스티앙을 죽이는 것은 그다음 문제였다.
발터는 도망치듯 황궁을 떠나야 했던 어린 황녀의 첫사랑이었고, 기억을 잃고 돌아왔음에도 그녀의 마음을 또다시 사로잡아 버린 남자였다. 그를 반드시 처리해야 한다는 생각에 베네딕트의 심장이 긴장으로 일렁였다.
“나는 에데르트를 반드시 황제로 만들 생각입니다. 아메티스는 이제 호위 기사를 끌어안고 대신 채찍을 맞은 황녀에 관한 이야기로 떠들썩하겠지요. 그들이 아는 황족 중 그 누구도 자신보다 미천한 이를 위해 스스로를 희생한 이는 없었으니까요.”
“…얀을 조종해 황후를 공격하게 만든 것도 당신의 짓이었나?”
감정을 억제하지 못한 발터의 목소리가 비틀렸다. 베네딕트가 그의 시선을 틀어쥔 채 목소리를 낮추었다.
“곤란한 상황에서 폐하를 구해 드린 것뿐입니다.”
그러지 않았더라면 망나니 같은 크리스티앙은 그 자리에서 에데르트를 분명 끝까지 취했을 게 틀림없었으니까.
“얀은 처형당할 수도 있었어.”
“그게 저와 무슨 상관이죠?”
되묻는 베네딕트의 말투는 건조했다. 발터의 잇새에서 분노를 담은 뜨거운 숨이 샜다.
“그녀가 우릴 위해 나서리라는 건 몰랐던 건가?”
“예상할 수 있었습니다. 그 결과 폐하가 사람들에게 강렬한 인상을 남길 거라는 사실도.”
“이든은 하이데거의 채찍에 목숨을 잃을 수도 있었다고…!”
“우스운 말을 하는군요. 내가 폐하를 그리 놔둘 거라 생각합니까?”
발터를 보는 베네딕트의 얼굴이 처음으로 차갑게 변했다.
“나의 능력을 과소평가하는 것은 상관없으나 이것만은 알아 두십시오. 폐하와 당신의 계획에는 반드시 내가 필요합니다. 그러니 이성을 붙잡고 생각하십시오. 생각에 생각을 더하십시오. 지금의 황녀에게 가장 중요한 것이 무언지.”
베네딕트가 그의 눈동자를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비틀린 애정으로 모든 걸 망쳐 버리는 게, 두렵지 않습니까?”
발터의 입술이 마구잡이로 떨렸다. 베네딕트는 그의 휘청거림을 놓치지 않았다.
“인간은 쉽게 변하지 않습니다.”
“…무슨 뜻이지?”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이미 알고 있을 텐데요.”
베네딕트가 그를 보며 입술만 움직여 내뱉었다.
“똑같은 실수를 두 번 하지 않을 거라 자신할 수 있냐는 뜻입니다.”
이든이 피투성이가 되어 쓰러져 있던 동굴. 마치 그를 과거로 돌려놓은 듯 눈앞에 생생하게 펼쳐진 광경에 발터는 숨을 제대로 쉬지도 못했다. 일그러진 눈동자가 엉망으로 흔들리며 그의 정신에 완벽한 틈이 생겼다.
“킹메이커 역할도, 주군을 지키는 역할도 하지 못한다면 그대의 존재 의미는 무엇입니까.”
“그만.”
발터의 마른 입술이 희게 질렸다. 머리칼을 세게 움켜쥐는 주먹에 뼈가 돋아났다.
“그만!!!”
됐다. 이걸로 발터는 황녀의 인생에서 완전히 아웃이다.
콰쾅!
밤하늘이 밝아지며 천둥이 내리쳤다. 교황이 갇힌 밀실에서 시퍼런 빛이 일렁였지만 번개가 번쩍이는 바람에 아무도 볼 수 없었다.
***
내가 지금 제대로 잘 가고 있는 중인 건가.
아직 동이 트지 않은 새벽. 발터의 걸음이 예고 없이 순간 멈칫했다. 분명 끊임없이 이어진 기다란 복도를 걷고 있는 중이었는데 마치 긴 잠에서 문득 깨어난 것처럼 정신이 조금 불투명했다. 방금 전까지 뭐 하고 있었는지, 여기가 어딘지 순간 헷갈릴 지경이었다.
“뭐 하는 거요? 밤을 꼬박 새우더니 걷다가 졸기라도 했소?”
그의 곁에서 따라붙던 근위병의 목소리에는 짜증이 묻어났다.
아, 그랬었지. 그는 지난밤 황녀의 연인이자 폐위된 교황인 베네딕트를 만나러 갔다가 돌아오는 길이었다. 그를 직접 만나 확인해야 할 일이 많았기 때문이다.
밤이 깊어지기 전에 자리를 비웠었는데 시각은 벌써 하루를 지난 새벽이었다. 베네딕트에게는 물어봐야 할 말도 많았고 들을 말도 많았다. 긴 면회에서 필요한 대화는 다 한 것 같은데, 자꾸만 중요한 뭔가를 잊어버리고 온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그런데. 그게… 뭐였지.
“빨리 갑시다, 좀. 당신 때문에 아침 조례에 늦을지도 모른단 말이오.”
근위병이 날카로운 말투로 그를 재촉했다. 발터가 이내 말없이 걸음을 다시 떼었을 때였다. 복도 끝에서 길쭉한 인영이 나타나자 근위병이 놀라며 고개를 숙였다.
“대공 저하.”
조례 준비를 마치고 의장을 착용한 하이데거는 평소와 다름없이 빈틈없는 모습이었다. 얼굴이 평소보다 조금 더 날카로운 것 빼고는.
“아흐…. 졸려 죽겠네.”
“입을 좀 다물 순 없습니까?”
하이데거가 그의 뒤에서 크게 하품하는 리비에르를 보며 타박을 주었다.
“입을 다물고 하품하면 얼굴이 찌그러진단 말입니다.”
리비에르는 아랑곳하지 않고 그에게 받아치다가 발터를 발견하고는 쑥 들어간 눈을 크게 떴다.
“…으응? 발터?”
발터는 훈련복이 아닌 편안한 실내복 차림의 그녀를 보며 말없이 눈을 깜빡였다. 대공의 침실에서 나오는 리비에르. 지금 시각은 아침 해가 뜨기도 전이었다. 붉은 기가 도는 리비에르의 머리에 어울리지 않는 백금발 한 가닥이 이질적으로 눈에 튀었다.
“벌써 움직여도 되는 건가? 부상은 괜찮아?”
리비에르가 하이데거를 제치고 그에게 다가와 염려가 섞인 목소리로 물었다.
“예.”
발터는 짤막하게 답하며 고개를 숙여 예를 취했다. 자일룬 전투 이후 공작의 작위를 받은 리비에르는 공식적으로 그보다 한참 높은 신분이었다. 무엇보다 흰 뱀 같은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는 대공의 앞에서 그녀와 허물없는 모습을 보여서 좋을 일은 전혀 없었다.
“그런데 꼭두새벽부터 여기서 뭐 하고 있는 거야?”
오히려 발터가 그녀에게 묻고 싶은 말이었다. 리비에르의 거처는 황제와 그의 측근이 머무르는 플라틴성이 아니라 서쪽 엘데이라성이다. 지금 이 시간에 대공의 침실에서 나온다는 것은 그녀가 그와 함께 밤을 보냈다는 뜻이며 보는 눈이 많은 황궁 안에서 그 사실을 별로 숨길 생각이 없다는 것과 같았다.
왜…? 머릿속을 비집는 의문과 동시에 황제가 그녀에게 하이데거와의 혼인을 명했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대공이 그녀의 발목 부상을 고쳐 주었다는 사실도.
발터는 고개를 숙인 채 깔끔하게 나은 리비에르의 발목을 응시했다. 리비에르는 그 덕에 하이데거의 치유 마력을 확실히 확인하는 계기가 되었다고 했었지.
발터는 문득 자신이 사고하는 속도가 평소보다 아주 조금, 느린 것 같다고 느꼈다. 역시 수면 부족 때문인가.
“발터?”
말이 없는 발터를 향해 리비에르가 의아한 표정을 짓자 근위병이 헛기침을 하며 대신 목소리를 높였다.
“…흠흠! 이자는 베네딕트 블라이와 면회를 마치고 황녀 저하의 처소로 지금 돌아가는 중입니다.”
리비에르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아. 그렇구나. 난 또 왜 혼자 있나 했네.”
“사담을 나누기에 이곳은 별로 좋은 장소가 아닌 것 같습니다만. 리비에르 경.”
하이데거가 그녀를 향해 못마땅한 말투를 내뱉자 리비에르가 코웃음을 치며 그에게 대거리를 했다.
“매일 같이 연무장에서 굴려지는 통에 다른 소속 기사들 얼굴 보기도 힘든 걸 몰라서 이러시나요?”
발터의 머릿속에서 정보가 툭, 툭, 터지듯 제자리를 찾아갔다. 크리스티앙이 리비에르를 북부로 보내는 대신 대공과의 결혼 카드를 꺼내 든 것은 놀랍기는 해도 이해가 불가능한 결정은 아니었다.
크리스티앙의 입장에서는 리비에르가 황녀의 손을 잡기 전, 반드시 그녀를 회유해야 했을 테니까. 아메티스에서 가장 권세가 높은 공작 가문과 그녀를 법적으로 엮어 버린 것이다.
“제기랄. 대공이면 다인가? 하이데거 그 개자식이 날 얼마나 벌레 취급하는지 알아? 글쎄 내 발목을 치료하고 나서 자기 손바닥을 아주 벗겨질 듯이 박박 닦는데…. 그 등판에 칼을 쑤셔 넣고 싶은 걸 참느라 얼마나 힘들었는지 모른다고.”
유서 깊은 하이데거 공작가는 본래 신분제를 강력히 옹호한 가문이었다. 뼛속부터 귀족인 그가 평민도 아닌 미천한 노예 출신의 리비에르를 얼마나 경멸하듯 대했을지는 굳이 그녀가 욕하며 불평하지 않아도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그러나 하이데거의 본심과는 별개로 그가 황명을 거부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대공은 의심 많고 날카로운 황제 크리스티앙이 차기 교황으로 낙점 지을 정도로 최측근 심복이었으며, 그가 황태자였을 때부터 그를 보필했던 충신이었다.
“황녀 저하는 좀 괜찮으셔?”
리비에르가 조금 진지한 얼굴로 그에게 물었다. 그녀는 황제가 자신을 권력과는 거리가 가장 먼 곳으로 좌천시키려 했던 사실을 도저히 견딜 수 없다고 말했었다. 결국 황녀의 손을 잡기로 결정한 리비에르는 황제의 눈에 어긋나지 않기 위해 황명을 기꺼이 따르겠노라 고개 숙였다. 리비에르와 하이데거가 같이 있는 이유는 바로 그 때문일 것이다.
“…조금 시간이 걸리지만 회복하고 있는 중이십니다.”
발터가 낮게 답하자 하이데거가 평이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폐하께서 누이에 대한 심려가 크시니 호위 기사는 황녀 저하의 곁을 지키는 게 좋지 않겠나?”
리비에르가 질린다는 표정으로 그를 보았다.
“황녀 저하가 지금 누구 때문에 이렇게 되었는데, 대공께서는 죄책감이 전혀 없으신가 봅니다.”
“제 죄책감을 염려해 주셔서 감사합니다만, 경은 그 복장으로 조례를 나갈 생각입니까?”
“설마요. 젊고 혈기왕성한 황궁 친위대의 눈을 모두 멀게 만들 생각은 없어서요.”
리비에르의 말에 하이데거는 웃지도 않고 턱짓했다.
“그럼 성으로 가서 채비를 서두르는 편이 낫지 않겠습니까? 군대의 수장인 자의 기강이 해이해졌다는 소리를 듣기 싫다면.”
하이데거가 가시 돋친 말을 내뱉자 리비에르가 발터를 향해 휙 고개를 돌렸다. 싫은 기색을 숨기지도 않는 얼굴이었지만 둘 사이의 공기는 확실히 풀어져 있었다. 자일룬의 성에서 하이데거가 문짝을 부수며 나타났을 때와는 완전히 다른 분위기였고 며칠 전 파티에서와도 또 달랐다.
“그럼 몸조리 잘하기를.”
그에게 작게 눈짓하는 리비에르의 얼굴을 보며 발터가 묵묵히 묵례했다. 리비에르는 서둘러 복도를 가로질렀다. 미로 같은 플라틴성을 호위 없이 움직이는 그녀의 발걸음은 거침없었다. 마치 이 성에 거주하기라도 하는 사람처럼.
“호위 기사를 처소에 돌려보내고 죄인의 방은 다시 한번 철저히 수색하도록.”
하이데거가 또렷한 목소리로 명령을 내리자 근위병이 군기가 바짝 든 얼굴로 예를 표했다.
“들었지? 빨리 움직이시오.”
발터는 황녀의 처소로 돌아오며 다시 한번 생각을 거듭했다. 때로 그는 머리보다 몸이 더 정확하게 반응했다. 속에서 그의 본능적인 예감이 꿈틀거리고 있었다.
리비에르와 하이데거의 관계 진전이 그의 예상보다 빠르다. 그 이유는 뭘까.
누군가 일을 서두르고 있다는 뜻일 것이다. 그들이 만일 지금, 속을 숨긴 채 서로의 정보를 캐내려고 한다면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리비에르는 검술만이 아니라 두뇌 회전도 훌륭한 이였다. 그러지 않았다면 노예 출신인 그녀는 지금 이 자리까지 올라오지도 못했다. 때로는 고압적이지만 상황에 따라 전략을 바꿀 수 있는 유연함도 가진 이다.
자일룬성 함락 작전 당시, 군대의 사기를 꺾지 않기 위해 아일라를 그녀로 위장시키고 자신은 뒤로 빠져 리가스의 도주로에 매복하기를 선택했던 것이 단적인 예였다.
그녀가 하이데거에게 가까이 접근해 정보를 빼내는 첩자가 되어 준다면 그들에게는 가장 이상적인 상황일 것이다. 하지만 만일 그 반대라면….
“…엇?”
발터를 이끌던 병사가 숨소리를 죽이며 걸음을 아예 멈추어 섰다.
“아휴…. 오늘이 무슨 날이긴 한가 보군.”
발터는 들릴 듯 말 듯 한 목소리로 작게 중얼거리는 병사의 시선을 따라갔다. 그곳에는 복도 끝으로 사라지고 있는 황제의 호위병들이 있었다. 발터는 짙은 눈썹을 말없이 찌푸렸다.
“그럼 들어가시오.”
황녀의 거처에 다다르자 근위병이 지체 없이 몸을 돌렸다. 발터는 문 앞에서 잠시 우두커니 서 있다가 이내 숨을 크게 들이쉬고 안으로 들어섰다. 황녀의 침실과 연결된 응접실에까지 약 냄새가 진동했다. 이것만으로도 부상의 심각성을 알 수 있었다.
얀은 현재 군사 병동에서 치료를 받고 있는 중이었다. 발터는 황녀의 곁을 지키고자 했으므로 의사가 이곳까지 와서 그를 함께 진료했다.
그는 공간을 가로질러 황녀의 침실로 성큼성큼 걸어 들어서려다 멈칫했다. 독한 약 냄새에 미묘한 체향이 섞여 있었다. 마치 누군가 오래 머물러 있었던 것처럼.
그는 손을 들어 닫혀 있는 침실 문을 두 번, 일정한 간격으로 두드렸다.
“들어가겠습니다.”
문을 열고 침실에 들어서자 침대에 앉아 옷매무새를 정리하고 있는 황녀가 보였다. 상처 난 등을 훤히 내보이고 있던 그녀가 고개를 돌리며 그를 보았다.
“아, 발터. 마침 잘 왔어. 이리 와서 나 옷 입는 것 좀 도와줄래?”
환자복은 등의 상처 치료를 쉽게 하기 위해 끈이 뒤에 달려 혼자는 입기가 번거로웠다.
“…예.”
발터는 황녀의 맨몸을 보지 않으려 시선을 아래로 깐 후, 그녀에게 다가갔다. 등을 돌리며 앉아 있는 그녀의 옷에 늘어진 끈을 쥐고 차례로 매듭짓는 손길은 군더더기 없이 빠르고 정확했다.
“언제 일어나셨습니까?”
“방금 전에. 근데 나 얼마나 쓰러져 있었던 거야?”
“약 사흘 아니, 나흘입니다.”
발터가 대답을 정정했다. 날이 밝았으니 하루가 더 지났다고 함이 맞았다. 그녀가 그를 향해 돌아앉으며 물음을 이었다.
“와. 오래도 기절해 있었네. 넌 괜찮고? 너도 많이 다쳤잖아.”
“괜찮습니다.”
그는 간단히 답하며 고개를 저었다. 파티에서 얀과 그를 구하러 위험을 무릅썼던 그녀를 떠올리자 숙연한 마음이 들었다. 황녀를 조금 더 안전하게 지키지 못했다는 죄책감은 덤이었다.
“응. 어디… 다녀오는 길이야?”
“예. 베네딕트와 면회를 신청하여 그를 만나고 왔습니다. 괜찮으시다면 그와 관련해서 드릴 말씀이 많습니다.”
그녀가 잠시 묘한 표정으로 눈을 깜빡이다가 침실과 연결된 문을 힐끗 보며 물었다.
“…혹시 응접실에 누구 있어?”
“아뇨.”
발터는 내실과 연결된 장소의 기척을 다시 확인한 후 고개를 저었다. 그가 예민할 정도로 황녀의 프라이버시를 강조한 탓에 내실과 응접실에는 시종도 함부로 출입할 수가 없었다.
“…그런데 왜 아까부터 계속 공대를 해?”
뜻밖의 물음이었다. 발터가 잠시 망설이다 답했다.
“폐하께선 제 주군이시고, 이곳은 황궁이니까요.”
혜미는 그를 바라보며 마른 입술을 조금 축였다. 보는 눈이 있는 것도 아닌데 발터가 갑자기 왜 예를 차리는 건지 알 수 없었다. 파티에서의 사건 이후 행동을 더욱 조심하기로 마음을 먹은 건가.
“물을 좀 드시는 게 좋겠습니다.”
발터가 곁에 놓인 물 주전자에서 물을 따라 그녀에게 건넸다. 그녀의 입 안이 마른 것을 눈치챈 것이다.
“어? 어. 고마워.”
혜미는 엉겁결에 두 손으로 도자기 잔을 받았다. 그녀의 일거수일투족을 살피며 챙기는 습관은 여전했으나 역시 뭔가 조금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이제 보고를 드려도 되겠습니까?”
그녀를 대하는 발터의 태도가 전에 없이 공손하고 깍듯한 탓이었다. 완벽하게 예를 취하는 그의 모습은 어딘지 모르게 딱딱하고 거리가 있는 느낌이다. 마치 다른 사람인 것처럼 낯설기까지 했다.
“폐하?”
“…어? 응. 말해.”
혜미는 떨떠름한 얼굴로 물을 마시며 낮게 이어지는 그의 보고를 들었다.
“베네딕트의 마력이 사라지지 않은 걸 확인했습니다. 본인의 말에 따르면 손상되었던 마력이 조금씩 회복되고 있는 단계라고 합니다. 폐하의 덕분이라고 감사하다고 말하던데, 인사는 직접 들으시는 게 좋을 것 같아 제 선에는 더 이상 묻지 않았습니다.”
발터는 자신의 머릿속에 있는 정보를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그녀에게 전하려 집중했다.
“또한 호아킴이 지금 아메티스의 지척에 있는 크록 산맥을 넘는 중이라고 합니다. 그의 군대의 수가 원로원에 알려진 것보다 더 많기 때문에 베네딕트가 미리 손을 쓰려는 걸로 보입니다.”
“어떻게?”
뒤이어진 발터의 답을 잠자코 듣고 있던 혜미의 표정이 진지하게 바뀌었다. 그녀가 컵을 꽉 쥐고 조심스레 입을 뗐다.
“…베네딕트 혼자서는 조금 힘들지 않을까?”
“지금으로서는 그에게 달리 힘을 보탤 방법이 없습니다. 황제의 감시가 집중된 이 시점에 섣불리 움직이는 것도 위험하고요.”
발터의 판단에 오류는 없었다. 그가 목소리를 조금 더 낮추며 불안해 보이는 그녀를 설득했다.
“폐하. 연인의 안전을 염려하는 마음은 당연하다 생각하지만 그는 대마법사입니다. 우리 측에서도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게 현명합니다. 그 역시도 폐하가 위험을 무릅쓰는 일을 바라지는 않을 겁니다.”
혜미가 인상을 찌푸린 채 마른침을 삼켰다. 오늘 발터는 어딘가 확실히 이상했다. 그는 베네딕트와 그녀의 관계를 당연하다는 듯, 너무나 태연하게 입에 담고 있었다. 그 화제가 나올 때면 눈에 띄게 불편한 표정으로 애써 말을 돌리던 이전과는 다른 태도였다.
“발터.”
“예.”
“오늘 너 좀… 이상한 것 같은데.”
혜미가 머뭇거리며 그의 눈치를 살피자 발터가 심각한 표정으로 즉각 되물었다.
“제가 말입니까?”
“내가 누군지 잊어버린 건 아니지?”
“그럴 리가요.”
“그럼 내 이름이 뭐야?”
발터는 갑작스러운 질문을 던지는 그녀를 보며 잠시 눈을 깜빡였지만 이내 신중한 목소리로 답했다.
“에데르트 아이나 클라웨. 제 주군이십니다.”
“…넌 한 번도 나 그렇게 부른 적 없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