혜미가 숨을 작게 몰아쉬며 중얼거렸다. 어이가 없는 상황이었으나 크리스티앙은 헛웃음도 나오지 않았다.
“…뭐라고?”
“눈이… 잘… 안 보여.”
크리스티앙은 침대 머리맡에 놓여진 푹신하고 단단한 깃털 베개를 노려보았다. 완전히 무방비한 상태로 늘어진 황녀의 숨통을 끊어 놓기에 이보다 더 적합한 때는 없을 것이다.
온몸이 열상으로 가득한 상태에서도 눈을 부릅뜨고 그녀의 곁을 지키던 황녀의 호위 기사는 교황에게 면회를 신청해 자리를 비운 채였다.
그는 빗줄기가 퍼붓는 후원에서 흠뻑 젖은 채 몸을 부들부들 떨던 남자의 모습을 똑똑히 기억했다. 질투로 눈이 돌아 그가 황녀의 정부를 죽이기라도 한다면 몹시 즐거울 것 같아 면회를 허가했다.
“다시 한번 날 그 이름으로 불러 봐.”
크리스티앙이 그녀의 가느다란 목에 손을 대며 낮게 속삭였다.
“교황님이… 날… 치료해 주러 온 거… 예요…?”
“…마법사에겐 그따위 말투를 쓰는 모양이지?”
마치 어리광을 부리듯 묘하게 풀어진 말투. 크리스티앙은 그녀의 목을 감싼 손에 지그시 힘을 주었다. 황녀는 그를 밀어내기는커녕 몸을 완전히 맡긴 채 눈을 스르륵 감았다. 흐릿한 미소까지 짓고 있는 여자는 뭔가 단단히 착각하고 있는 게 틀림없었다.
“…씨팔.”
낮게 욕설을 내뱉은 후, 크리스티앙은 그녀에게서 손을 떼어 냈다. 툭. 황제가 걸치고 있던 푸른 가운이 바닥에 떨어졌다. 그가 이불을 휙 걷어 내고 침대 위로 올라가 황녀의 곁으로 몸을 뉘었음에도 그녀에게 긴장감은 없었다.
“너 지금 날 누구라고 착각하는 거야.”
크리스티앙의 숨소리가 거칠게 달아올랐다. 자신이 침을 삼키는 소리까지 생생했다.
“눈 떠.”
그녀는 입술을 올려 흐릿하게 웃기만 할 뿐 감은 눈을 도통 뜰 생각이 없는 듯했다. 크리스티앙이 다물리는 그녀의 입술을 이로 깨물며 그 안을 거칠게 비집었다. 모로 마주하고 누운 두 사람의 몸이 점점 더 가까이 밀착되었다.
이불이 바스락거리는 소리, 타액이 섞이는 소리, 젖은 혀가 붙었다 떨어지며 내는 모든 소리가 놀랄 정도로 선명하게 들렸다.
“흐응….”
키스가 깊어지자 아프다고 투정 부리던 그녀의 숨소리도 달콤해졌다. 크리스티앙의 키스 역시 질척하게 바뀌었다. 그의 손가락이 그녀의 뺨을 덧그리다 아래로 향했다. 동그란 어깨를 매만지며 입천장을 긁고, 아랫입술과 윗입술을 번갈아 빨며 안쪽의 연한 살을 모조리 훑었다.
“하아…. 하아….”
열에 들뜬 얼굴로 그녀가 입술을 벌리며 신음하는 작은 목소리가 그의 흥분에 불을 질렀다. 그가 들이마신 것은 분명 수면제였는데, 의사가 실수로 미약을 넣었는지 헷갈릴 지경이었다. 모든 감각이 미치도록 생생하다. 옷 아래에서 성기가 터질 듯 부풀어 올랐다.
“젠장….”
크리스티앙이 약하게 욕설을 씹었다. 그는 눈을 감은 채 졸고 있는 황녀를 보며 제 입술을 꽉 깨물었다. 보통 사람이라면 한 모금만 마셔도 기절할 수면제를 열 모금 넘게 마신 그녀의 정신이 얼마만큼 혼미할지는 크리스티앙 본인이 제일 잘 알고 있었다.
움푹 들어간 아름다운 눈매 안의 황금색 눈동자에 욕망이 이글거렸다. 그녀는 지금 앓고 있으며 자신을 누군가와 착각하고 있다. 잠이 깬다 한들 이 사실을 똑바로 기억할 리도 만무했다.
그녀가 이 방, 바로 이 침대 위에서 호위 기사와 벌이던 격정적인 섹스가 떠올랐다. 그와 하던 것처럼 자신을 받아들이는 그녀를 상상하는 것만으로 사정감이 치밀어 올랐다.
상관없잖아.
어차피 아무도 모른다.
결론을 내린 크리스티앙의 손이 제 바지춤을 더듬었다. 그렇게 가지고 싶었던 상대가 무방비한 상태로 눈앞에 늘어져 있는데 취하지 않는 것이 더욱 이상한 일이었다. 뜨겁게 안을 것이다. 그 누구보다 더욱, 뜨겁고 열렬히 안아 줄 자신이 있었다.
“크리스티앙.”
자신의 이름을 낮게 부르는 목소리에 그녀의 하의를 내리려던 크리스티앙이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그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한 채 짙어진 눈을 부릅뜨고 그녀를 노려볼 수밖에 없었다.
“크리스티앙.”
혜미는 그녀를 뚫어져라 바라보는 그를 보며 희미하게 웃었다. 그녀의 손이 천천히 올라와 그의 뺨에 사뿐히 내려앉았다. 크리스티앙의 붉은 입술이 무언가를 말하려는 듯 움직이다 굳게 다물렸다. 그의 잇새로 기다란 숨이 새어 나왔다. 혜미는 아름다운 그의 눈 밑, 불면에 색이 짙어진 부분을 손으로 부드럽게 문지르며 느리게 속삭였다.
“너… 많이 피곤해 보인다.”
그녀의 코앞에서 숱 많은 황금빛 속눈썹이 소리 없이 떨렸다. 마치 그를 처음 만났을 때처럼.
“잊게 해 줘….”
“응? …뭘?”
“벌레처럼 들러붙어 내 머릿속을 좀먹는 불안을.”
점점 흐려지는 의식 속에서 혜미가 천천히 눈을 깜빡이며 그에게 물었다.
“잠은… 제대로 자는 거야…?”
“아니.”
크리스티앙이 쉰 목소리를 짤막하게 중얼거리듯 내뱉었다. 혜미는 숨을 몰아쉬며 애써 입을 뗐다.
“좀 자자, 그럼.”
그에게 나직하게 중얼거린 이유는 비단, 의식을 흐릿하게 만드는 약효 때문만은 아니었다. 마취제에 점점 더 무뎌지는 감각을 뚫고 그의 긴장이 생생하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그녀의 손이 닿을 때마다 그의 몸이 흠칫거리며 굳었다. 크리스티앙은 내가 이렇게 엉망으로 부상당한 상태임에도 날 경계하는 걸까. 어쩌면 두려운 건, 그녀만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늘 …딱 하루만. 편하게 쉬어.”
혜미가 힘겹게 눈을 뜨며 속삭였다. 입 안에 단 약 기운이 아직도 달라붙어 있어 침을 삼켰다.
“아무 생각도 하지 말고. 불안해하지도 말고.”
그것은 크리스티앙에게 하는 말과 동시에 그녀 본인에게 하는 말과도 같았다. 찢어진 등의 상처는 아직도 욱신거렸고 몸에 힘은 하나도 없다. 크리스티앙과 날을 세우며 싸울 힘은 더더욱 없다.
“나랑… 오늘 하루만 휴전하자.”
희미하게 미소 짓는 그녀의 입술에서 작게 휴전 신청이 떨어지는 순간이었다.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눈만 부릅뜨고 있던 크리스티앙이 험한 욕설을 내뱉었고, 뒤이어 그녀는 그에게 강하게 끌어 안겨졌다. 숨을 몰아쉬며 그녀를 꽉 안는 크리스티앙의 포옹은… 눈물이 찔끔 나도록 아팠다.
“하…. 아파….”
등의 상처를 누르고 있던 손이 퍼뜩 놀라며 떨어진 것은 잠시였다. 이내 땀으로 축축한 그녀의 머리칼 새를 꽉 비집으며 그가 중얼거렸다.
“…전쟁터에서 구른 기사라면서, 엄살이 심하잖아.”
“엄살 아니고 진짜… 아프거든?”
“아무 말도 하지 마.”
“크리스티앙.”
“…한마디만 더 하면 정말 혀를 잘라 버릴 것이다. 이 말이 농담이라고 생각할 정도로 멍청하지는 않기를.”
크리스티앙의 목울대가 격하게 일렁였다. 심장 박동이 쿵쿵 울려 퍼지는 그의 가슴에 이마를 붙인 채, 혜미는 후후 웃으며 들릴 듯 말 듯 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잘 자.”
의식이 점점 흐려지고 있었다. 아득해지는 의식의 끝에서 크리스티앙이 왜 여기 있는 거지, 하는 물음이 뒤늦게 떠올랐다. 하지만 생각을 이어 나갈 수는 없었다. 깜깜한 수마로 훅 빨려 들어가는 그녀의 귓가에 쿵, 쿵, 하는 북소리가 울려 퍼졌다.
얼마만큼 시간이 흘렀을까. 크리스티앙은 손을 들어 반쯤 타 버린 촛불을 덮어 껐다. 완벽한 어둠 속에서, 쌔근쌔근 잠이 든 그녀를 품에 끌어안은 채 그는 눈을 질끈 감았다.
뜨거운 한숨과도, 급작스러운 울음과도 닮은 뜨거운 숨소리가 그의 입술에서 울컥울컥, 터지듯 흘러나왔다. 감정의 자각은 느닷없었다. 꽉 찬 가죽 주머니에 툭, 하고 칼집이 생기자마자 그 안을 가득 채우고 있던 썩은 물이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크리스티앙은 그녀를 안은 팔에 힘을 주었다. 창이 없는 침실에 누운 것은 처음이었다. 해가 뜨지 않기를 바란 것도 처음이었다. 빛이 완전히 사라진 어두운 공간이 이토록 안정을 선사할 수 있다는 사실을, 그는 난생처음 깨달았다.
***
발터는 말없이 닫힌 문을 쳐다보기만 했다. 그의 곁에서 경비병이 흐흠, 하고 헛기침을 한 후 사무적인 어조를 내뱉었다.
“용무가 끝나면 문을 두드리시오.”
우뚝 선 황녀의 호위 기사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경비병은 그를 힐끗, 본 후 허리에 찬 칼을 다시 매만졌다. 무장을 하지 않았는데도 긴장감이 느껴지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황금성에서 훈련한 정예 군사들이 수두룩 깔린 공간 속에서 그는 마치 풀어놓은 맹수 한 마리처럼 보였다.
그들의 수장인 하이데거의 채찍질을 수십 대 맞은 것이 고작 사흘 전이었는데 돌아다닐 수 있을 정도로 사지가 멀쩡한 거 보면 인간이 아니라 짐승이 맞는지도 몰랐다.
“들어가시오.”
삐걱, 소리와 함께 빗장이 벗겨졌다. 경비병은 움직일 기미를 보이지 않는 그의 바위 같은 등을 칼집으로 밀었다가 고개를 슬쩍 돌려 노려보는 발터의 기세에 눌려 한 발짝 뒤로 물러섰다.
“그럼. 이만.”
발터는 숨을 한 번 크게 쉰 후, 안으로 직접 들어서 문을 쾅 닫았다.
“…생각보다 늦게 오셨습니다.”
베네딕트는 꼿꼿한 자세로 창가에 서 있었다. 발터는 성큼성큼 다가가 그와 조금의 간격을 두고 섰다.
“날 기다리기라도 했단 뜻인가?”
“버릇없는 말투는 여전하군요. 황궁에서 예법을 조금은 익혔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주변의 눈을 봐서라도 말입니다.”
베네딕트가 그에게 몸을 돌리며 흐릿하게 웃었다. 눈동자가 도려내진 얼굴. 온몸의 힘줄이 잘려 너덜거리는 손발. 윤기를 완전히 잃은 머리카락. 발터가 갤러리에서 베네딕트를 처음 보았던 때와 다른 점은 그가 온전히 말을 하고 있다는 사실 하나뿐이었지만, 발터는 그가 힘을 숨기고 있다는 사실을 확신했다.
“교황의 직위를 박탈당한 이에게 예의를 차릴 이유는 없어.”
그와 대면한 베네딕트에게서 숨길 수 없이 흘러나오는 기운은 마치 그를 본능적으로 깔아뭉개려는 것처럼 강력했다.
“그것이 그대가 모시는 황녀를 되살린 나에 대한 예의입니까?”
베네딕트는 그를 향해 마치 제 영역에 침범한 수컷처럼 날카롭게 이를 세우고 있었다. 그것은 같은 성별을 가진 자만이 느낄 수 있는 동물적인 직감이었다.
“황족을 살리는 건 대마법사의 의무였어. 당신은 해야 할 일을 한 것뿐이다.”
베네딕트가 벽에 천천히 머리를 기댔다. 피딱지로 엉겨 붙은 머리칼이 그의 어깨 아래에서 뭉쳐 흔들렸다. 찢어진 입술이 마치 그를 비웃는 것처럼 묘하게 뒤틀렸다.
19화
갑자기 털 뭉치가 나를 밀쳤다. 다짜고짜 나를 밀려고 드니, 처음에는 자리에서 버티려다가.
‘털 뭉치가 밀면 미는 이유가 있을 테니까.’
무언가 심상찮은 기색에 이내 힘을 풀어 그가 미는 대로 뒤로 넘어졌다.
“콜록콜록!”
“으에엥!”
인간들이 소리를 지르고 기침을 했다. 작은 인간, 아이는 소리를 내어 울음을 터트렸다.
털 뭉치의 얼굴은 인간들 틈에 막혀 보이지 않았다.
‘털 뭉치는?’
고개를 돌리자 커다란 무언가가 이쪽을 향해 미친 듯이 달려오고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는데, 자세히 보니 새까만 말들을 흰 머리의 한 남자가 거칠게 몰고 있었다.
‘뭐지?’
마차다. 남자가 끌고 있는 곳은 마차였다. 마차가 내 앞을 팍 치고 지나가자 나는 마차에 새겨져 있는 문양을 발견했다.
그 순간, 돌연 마차가 지나가는 것이 느릿하게 보였다. 그리고 문양이 내 눈에 각인이라도 된 것처럼 콕 박혔다.
- 황녀님은, 이 약혼이 과연 옳은 길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그리고 순간, 보석 같은 눈동자가 보인 것 같았다. 그리고 그 보석을 덮은 흰색 머리카락도.
나는 그게 뭔지는 모르지만, 그게 내게 뭐라 하는지도 하나도 이해할 수 없었지만, 이상하게 단 하나의 생각만 남았다.
‘가야 해.’
내 모든 직감이 저걸 쫓으라고 말하고 있었으니까.
저게 뭔지도 모르면서 그저 저걸 따라가야겠다는 생각만이 머리에 남아서 뛰었다.
“미친 여자인가 봐!”
“앞 좀 보고 다녀!”
뛰고 계속 뛰었다. 내 몸에 부딪친 것들이 뭐라고 큰 소리를 냈으나, 나는 홀린 듯 앞만을 보며 저것, 그래…….
‘마차.’
마차가 지나간 자리만을 맹렬하게 쫓았다. 하지만 간격은 점점 벌어졌다.
아무리 내가 빠르고 강해도 마차를 따라가기는 버거운 것 같다.
게다가 인간들이 잔뜩 모인 곳이라 독한 인간 냄새와 물건 냄새에 지워져서 제아무리 후각이 예민한 나라도, 찾기 힘들었다. 그저 바닥에 남은 흔적을 찾아 쫓아갈 뿐이었다.
‘마차, 동그라미가 많은 저 문양. 어디서 보았지. 어디서…….’
쫓아가면서 문양에 대해 생각했다. 그러나 이상하게 제대로 떠오르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분명히 아는 것인데, 모르는 것이다.
‘그럼 방금 전 머릿속의 기억은 뭐지? 저 문양이랑 관련이 있는 건가.’
머리가 하얀, 흰개미 같은 이상한 남자 말이다. 뭔가 보기만 해도.
‘이것 봐. 또 여기가 아프네.’
배를 아프게 하는 인간, 흰개미.
나는 뭉근하게 아파 오는 심장인지 배인지 아무튼 그쪽을 문지르다가 고개를 들었다.
[어? 여기는.]
그렇게 한동안 무작정 마차를 미친 듯이 쫓아오다 보니, 아까 털 뭉치와 함께 지나온 숲에 도착했다. ……털 뭉치, 털 뭉치?!
‘맞다, 털 뭉치!’
세상에, 맙소사.
나는 그 무서운 큰 머리들이 가득한 인간 덩어리 사이에 털 뭉치를 두고 왔다!
잠시 고민하던 나는 일단 여기까지 왔으니, 마차를 보고 얼른 가자고 다짐했다.
‘미안해, 털 뭉치.’
속으로 사과를 하고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마차를 찾으면서 주위를 둘러보았다.
동물들 말고는 아무도 없어 털 뭉치의 이름인 듯한 ‘체르’를 소리 내어 연습하기 시작했다.
“떼-.”
체. 분명 체였는데, 왜 내 입 밖으로는 떼가 나오지?
“떼, 떼에- 떼!”
나는 내 입술을 붙잡아 쭈욱 당겨 보기도 하고, 벌려 보기도 했다.
그러나 이 몸은 어떻게 된 건지 발음 하나도 쉽지 않았기에, 눈으로는 열심히 마차의 흔적을 찾으면서 입으로는 바삐 ‘체’를 연습했다.
한 백 번은 같은 발음을 반복한 거 같다.
“떼, 떼- ㅊ…… 체-.”
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한 번 성공하니, 그다음부터는 수월했다.
“체, 체으, -으.”
조금만 더 연습하면 될 것 같기도 한데. 더 연습하려던 나는 마차의 바퀴 자국을 발견하고 입을 다문 뒤, 멈추어 섰다.
‘이 근처인 것 같은데.’
하지만 자국은 중간에 끊겼다. 다시 시작된 마차 찾기.
그렇게 얼마나 헤맸을까.
나는 어느덧 캄캄해진 숲 사이로, 드디어 모습을 드러낸 마차를 향해 웃으면서 달려갔다.
“히이잉!”
마차에 매인 짐승들, 말들이 있었다. 말들은 나를 보고 겁을 먹었는지 울기 시작했다.
[쉿.]
“히, 히잉.”
그러자 말들은 내 눈을 가만히 보다가 조용히 고개를 돌렸다.
그제야 아무에게도 방해받지 않고 이 마차를 향해 다가갈 수 있었다.
‘어디서 많이 본 거 같은데.’
그렇게 마차 주위를 뱅글뱅글 돌던 나는, 보기만 해도 이상한 기분이 드는 문양을 손으로 덧그렸다.
‘왜 이 문양이 이토록 낯이 익지?’
오늘은 참으로 이상한 일의 연속이라며, 문양을 멍하니 보고 있는데 귓가에 한 남자의 음성이 울려 퍼졌다.
- 앞으로, 이 문양을 잘 기억하세요.
또 흰개미였다.
인상을 찌푸리며 이해하려고 노력했으나, 도무지 이해되지가 않았다.
- 제국의 태양이 떠 있는 이상, 당신은 이걸 타고 나를 만나러 와야 하니.
그의 말은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너무 차가웠다. 듣기만 해도 추워서 몸이 사시나무 떨리듯이 벌벌 떨렸다.
‘나는 강한데, 왜 기억 속의 남자 앞에서는 이렇게 한없이 작아지는 거지?’
이해가 되지 않는 감정에 혼란스러워하며 얼마나 마차를 보고 있었을까.
바스락-.
인기척에 천천히 뒤로 돌았다.
온몸이 새하얀 개체였다. 이 새까만 숲으로 내려오는 빛은 자신이 다 가져가겠다는 듯이, 하얗고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지만 자세히 살펴볼 수 없었다.
‘머리가 아파.’
지끈. 아까부터 욱신거리던 머리에 강렬한 통증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남자를 마주한 순간, 터질 것처럼 아프더니 시야마저 핑 도는 느낌이었다.
마차에 댄 손이 잘게 떨렸다.
“이사벨?”
너는, 누구야?
* * *
알피어스는 한동안 말없이 넋을 놓고 앉아 있었다.
밤의 숲은 무척 추워 쌀쌀할 법한데도, 그는 오히려 겉옷으로 유해를 감싸 안고 멍하니 앉아 있었다.
‘모르겠다.’
알피어스의 보석안이 어둡게 빛났다. 부모님을 사고로 보내고, 홀로 알피어스의 자리에 올라 귀족파의 선봉에 서기까지 그는 이를 악물고 노력했다.
하지만 황제가 귀족파의 목줄을 쥐겠다는 의도로 자신과 황녀의 약혼을 억지로 추진하는 바람에 모든 것이 어그러졌다.
‘당신 잘못은 없었는데.’
그 때문에 귀족파임에도 귀족들에게 경계를 받아야 했으며, 황제의 경계도 동시에 받아야 했다. 매일매일이 살얼음 위를 걷는 거 같았다.
그래서 그는 황제의 딸, 이사벨을 증오했다.
하지만 지금 돌이켜 생각해 보면 황녀의 잘못은 하나도 없었다. 그녀도 자신처럼 정치 싸움의 피해자였다.
“내가 아둔하기 짝이 없었어.”
억지로 맺어진 약혼이었기에 알피어스는 이사벨에게 더 못된 말만 하고, 더 마음을 안 주려고 했다. 미웠으니까.
그럼에도 이사벨은 약혼 생활에 충실히 임했으며, 때때로 자신을 챙기고자 했었다.
알피어스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멍하니 허공을 응시했다.
“하…….”
자신은 이미 저도 모르게 그녀를 받아들인 걸까? 그래서 더 밀어내려고 노력했던 것일까.
뒤늦게 자신의 마음을 자각한 그는 이내 뚝뚝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울어 본 적이 언제인지 기억도 나지 않는다. 심지어 부모님을 사고로 갑자기 잃었을 때도, 당장 닥친 일들을 해결하느라 울지도 못했었다.
“제정신이 아니군.”
그런데 지금은 눈물이 미친 듯이 난다. 그것에 알피어스는 헛웃음을 지으며 눈물을 거칠게 닦아 냈다.
알피어스는 닦아도, 닦아도 계속 흐르는 눈물에 어이가 없는지 닦는 것을 멈추고 웃었다.
그리고 꼿꼿하게 허리를 펴고, 품에 안은 유해를 더 꽉 껴안았다.
“아둔한 것.”
몸이 덜덜 떨리고 시야가 흐려짐에도 그는 결코 고개를 숙이지 않았다. 아니, 못했다. 귀족으로 태어나 귀족으로 자란 그에게 황제의 앞을 제외하고, 고개를 숙이는 것은 용납되지 않았으니.
꼿꼿하게 허리를 편 채 눈물을 흘리는 그의 모습은 멀리서 보면 전혀 우는 것 같아 보이지 않았다.
한참을 그렇게 앉아 있던 그는 눈물로 인해 흐려진 시야 속에서 덜덜 떨리는 손을 들었다.
“……어 줘.”
그는 떨리는 손바닥에 얼굴을 문지르다가 설움이 가득한 헛웃음을 내뱉었다.
“살아 있어 줘.”
그리고 가망이 없는 소원을 빌었다.
그렇게 손이 발이 되도록 싹싹 빌다가도 알피어스는 별안간 꽃을 움켜쥐며.
“아냐, 살아 있잖아?”
광기 어린 얼굴로 웃음을 터트렸다.
“당신이 죽긴 뭘 죽어. 살아 있는데.”
그렇게 그는 한참을 오락가락하였다. 그러다 그는 한순간 확 무너져 내렸다.
그제야 숙일 줄을 모르던 고개가 숙여졌다. 그는 설움이 가득한 얼굴을 바닥에 비볐고, 이어 흙으로 엉망이 된 얼굴로 어린아이처럼 울음을 터트렸다.
“잘못했습니다. 뭐라 말 좀 해 주십시오.”
주먹으로 바닥을 연신 내리치며 짐승 같은 울음소리를 숲에 퍼트리다가도.
“아니, 아니…… 놀랐죠, 제가, 놀라게 해서…….”
유해가 바닥으로 떨어지자 허겁지겁 집어 들어, 품에 껴안았다. 그러고는 제가 소리를 질러 놀랐냐며 어르고 달래며 사과했다.
미친 사람처럼 울고, 웃고 사과하기를 얼마나 반복했을까.
알피어스는 이사벨의 유해를 끌어안고 잠시 모든 것을 멈추었다. 알피어스의 뺨은 눈물 자국으로 얼룩덜룩했다.
바스락-.
그때, 고요했던 숲에 작은 소음이 일었다. 수풀을 들쑤시는 소리가 났다.
소리를 들은 알피어스는 정신이 나갔던 것이 착각인 것처럼 눈을 번쩍 뜨고, 그곳을 노려보았다.
“누구냐.”
하지만 숲은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알피어스는 유심히 수풀을 보다가 자리에서 일어나 한 발, 한 발 걸음을 내디뎠다.
소리가 나는 쪽을 향해 걷다 보니, 어느새 아까 자신이 타고 온 마차가 있는 곳임을 깨닫고 눈을 가늘게 떴다
바스락, 바스락…….
누군가가 마차의 옆에 서서, 마차에 새겨진 문양을 더듬고 있었다.
‘도적인가? 하지만 이 시간에?’
알피어스가 미간을 좁히며 상대가 누구인지를 가늠하다가 이내 눈을 크게 떴다.
‘백금발?’
새하얀 금발이었다.
밤이 깊어 달빛에만 의존해 보게 된 백금발은 모자 속에서 엉성하게 빠져나와 하얗게 빛나고 있었다.
알피어스는 천천히 움직이는 형체를 향해 다가갔다.
그리고 움직이던 그것 또한, 알피어스의 존재를 알아챘는지 뒤로 돌았다.
“……!”
달빛에 홀린 걸까. 그렇지 않고서야.
“이사벨?”
왜 나는 당신이 보이는 거지?
“자신이 모시는 주군을 몇 번이나 죽을 위험에 빠트린 호위 기사가 의무를 운운하기엔 너무 뻔뻔하지 않습니까?”
발터의 턱이 강하게 맞물렸다.
“아. 실제로 죽음의 강을 건너게까지 만들었던가요.”
발터는 조소하는 베네딕트에게 한발 가까이 다가서며 이를 뿌득 갈았다.
“단도직입적으로 묻겠다.”
“그러시죠.”
“당신의 목적이 뭐야. 이든을 도울 생각이 있기는 한 건가?”
“이든? 그게 누구죠?”
발터가 순식간에 그에게 거리를 좁혀 목을 강하게 틀어쥐었다. 목이 졸린 베네딕트는 표정의 변화 하나 없는 얼굴로 그를 향해 또렷하게 내뱉었다.
‘폐하는 이제 그따위 이름으로 불릴 이가 아니십니다.’
성대가 아니라 생각으로 들려오는 소리였다. 발터가 숨을 몰아쉬며 베네딕트를 노려보았다. 짙고 옅은 흉터가 가득한 그의 강인한 팔뚝에 핏줄이 툭, 툭, 일어났다.
“마력을 잃은 게 아니었군.”
아무것도 없어야 하는 곳에서 베네딕트의 눈동자가 시퍼렇게 일렁였다. 발터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그는 베네딕트가 갤러리에서 황제의 대관식 그림을 바꾸었을 때, 무언가 이상하다는 것을 이미 직감하고 있었다.
“처음부터 잃은 적도 없었던 거지…?”
‘인간의 하찮은 고문 따위에 사라질 마력을 가진 자가 대마법사의 자리에 올랐다고 하면, 이미 죽은 선대 교황들이 모두 무덤에서 흙을 파헤치고 뛰쳐나올 이야기로군요.’
발터는 완전한 형태를 되찾고 있는 교황의 얼굴과 환하게 빛을 내며 발열하는 그의 몸을 보며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거칠게 갈라진 목소리가 분노로 뭉쳐져 입 밖으로 튀어나왔다.
“마력을 숨기고 연극을 한 진짜 이유가 뭐야. 황제의 눈을 속이기 위해서?”
‘…절반은?’
베네딕트가 입을 벌리고 소리 없이 웃었다. 발터는 상처 하나 없이 말끔하게 변한 그의 모습에 새삼 소름이 끼쳤다. 그를 대면할 때마다 단 한 번도 유쾌했던 적이 없었다. 아마도 영원히 그럴 것이다. 이든이 클라웨의 마지막 핏줄이며 그가 그녀와 각인한 대마법사라는 사실이 바뀌지 않는 한은.
“똑바로 말하는 게 좋아. 허튼수작을 부리는 거라면 당신은 목숨을 걸어야 할 것이다.”
발터가 그를 더욱 세게 벽으로 밀어붙이며 쓰게 내뱉자 베네딕트가 작게 혀를 찼다.
‘저런. 온몸이 찢겨 엉망진창인 꼴을 하고도 용케 그런 말을 지껄이는군요.’
발터가 움찔했다. 그의 말에 허를 찔려서는 아니었다. 베네딕트의 몸에서 그의 손을 타고 뜨끈한 무언가가 넘어오는 것이 느껴진 까닭이었다.
‘타고난 신체가 워낙 강건한 것은 행운입니다만, 과신하는 건 좋지 않죠.’
옷으로 감추고 있었지만 발터가 입은 등의 열상은 심각했다. 붕대에 피고름이 가득 차 뜨거운 부분에 마치 뿌리를 뻗어 나가듯 퍼져 나가는 마력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었다. 상처 부분이 세밀하게 간질거리다가 마침내 고통이 한 꺼풀 벗겨지듯 완전히 사라지는 느낌. 발터의 손에서 힘이 빠진 틈을 타 베네딕트가 그에게 입을 열었다.
“제가 힘을 숨긴 나머지 이유가 궁금합니까?”
발터는 그 자리에서 부들부들 몸을 떨 수밖에 없었다. 자신의 몸으로 흘러들어오는 마력의 힘이 너무나 강력했기 때문이다. 상처 입은 인간의 몸은 치유 마력을 반기며 날뛰듯 반응하고 있었다. 발터처럼 생존 의지가 강한 이는 더더욱 그 반응이 확실했다.
“당신의 눈으로 직접 확인하지 않았습니까. 엉망으로 무너진 나를 보고 폐하께서 어찌하셨는지 말입니다.”
마른침을 삼키며 인상을 찌푸리는 발터의 귓가에 베네딕트의 목소리가 또렷하게 들렸다.
“모두의 앞에서 날 연인으로 삼겠다 말하셨지요. 사랑스러운 나의 폐하께서는.”
“…….”
“사실, 난 한편으로는 그녀가 날 외면하길 바라고 있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클라웨의 피는 워낙에 비열한 탓에 그리한다 해도 놀랄 일이 아니었거든요. 아니, 오히려 당연했죠. 앞에서는 나의 존재를 부정하고 뒤에서 죄책감에 떠는 그녀에게 괜찮다, 말하며 위로하는 것도 즐거울 거라 생각했지만… 나의 에데르트는 그러지 않았습니다.”
베네딕트가 한 떨기 백합 같은 고고한 자세로 고개를 슬쩍 기울였다.
“날 살리기 위해 눈물을 뚝뚝 흘리는 그 모습을 계속 볼 수 있다면 영원히 처참한 꼴로 살아도 좋다고 생각했답니다.”
“당신한테는… 이 모든 일이 장난 같아?”
발터가 그를 보며 이를 갈았다. 갈색 동공에 분노가 들어차고 힘이 빠지던 손아귀에 다시 핏줄이 불거졌다. 처음부터 싸했던 예감은 맞아떨어졌다. 발터는 눈앞의 상대가 어디서부터 얼마만큼 뒤틀려 있는지 가늠을 할 수가 없었다.
“장난?”
베네딕트의 얼굴에 흐릿한 조소가 걸렸다.
“난 에데르트를 황제로 만들기 위해 제 인생 전부를 걸었습니다. 그리고 나, 베네딕트 블라이는 클라웨와 혼인하는 최초의 대마법사가 되겠지요.”
발터가 흐린 눈을 부릅뜬 채 마른침을 삼켰다.
“왜, 설마 그 자리에 본인을 집어넣는 망상을 하기라도 하셨습니까.”
베네딕트가 눈썹을 들어 올리며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