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6화 (56/72)

“지난밤에 호아킴이 보낸 전서가 도착했더군.”

하이데거의 시선이 황제를 따라 이동했다. 테이블 위에는 끄트머리가 반듯하게 잘린 편지가 놓여 있었다. 그는 말없이 황제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군사들과 함께 크록 산맥을 지나고 있는 중이라고 해. 빠르면 약 열흘 이내에 차질 없이 아메티스로 입성한다는 내용이었네.”

“…예, 폐하.”

“모든 것이 계획대로야. 잘된 일이지?”

“물론입니다.”

하이데거는 황제가 다시 따라 주는 두 번째 술잔을 받았다. 크리스티앙의 빈 잔을 채우려 했지만 황제는 그를 간단히 저지하며 직접 잔을 따랐다.

“단 한 가지만 빼고 말이야.”

술잔을 집어 드는 하이데거의 손이 잠시 멈칫했다. 그는 눈을 질끈 감고 붉은 술을 입 안에 털어 넣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자신을 알현하라 명했던 황제의 용건이 지금부터 시작이라는 사실을 직감한 까닭에 손끝이 조금 차가웠다.

“자네가 오기 전 의사가 다녀갔어.”

“예. 펠리페 경이 나가는 것을 보았습니다.”

“자네 말이야.”

“…예, 폐하.”

“혹시 몸 상태가 좋지 않은가?”

하이데거는 예상치 못하게 허를 찌르는 황제의 질문에 마른침을 삼켰다. 심장이 불안한 속도로 반응하기 시작했다. 설마. 기를 쓰고 숨겨 온 그의 증상이 예민한 황제의 눈에 띄기라도 한 것일까. 하지만 솔직히 말을 할 수는 없다. 크리스티앙은 망가진 부하를 곁에 둘 정도로 관대한 이가 아니었다.

“몸에 흐르는 마력의 기운이 충천할 뿐, 다른 이상은 없습니다.”

“확실히 문제가 없다는 말이지.”

“예, 그러합니다.”

크리스티앙이 술잔을 내려놓은 후, 무표정한 얼굴로 시선을 들었다.

“펠리페가 고하기를 채찍에 찢어진 황녀의 환부에서 검은 연기가 일렁인다고 하더군. 보통 태형으로 일어난 열상에서는 볼 수 없는 희한한 상처라고. 마치 안에서 무언가가 살을 파먹는 것 같은 끔찍한 모양새라고 말일세. 그것 역시 경이 우발적으로 마력을 제어하지 못한 실수 따위가 아니었다는 뜻이군.”

“…황녀의 호위 기사를 벌하던 도중, 채찍에 마력을 실은 것은 사실입니다.”

“그래?”

“폐하께서 직접 눈으로 확인하셨을 거라 생각하지만 그자는 보통의 사내들과는 비교할 수 없는 체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 때문에 이 방법이 가장 효과적이라고 생각하여 행한 일입니다.”

“그랬군.”

크리스티앙이 눈썹을 들어 올려 시선을 아래로 떨군 채 잠자코 고개를 끄덕였다. 타닥. 타닥. 벽난로 안에서 쌓인 장작이 무너지며 타는 소리만이 고요한 공간에 침묵을 사그라뜨렸다.

“에리히.”

“예, 폐하.”

“만약 황녀가 이 일로 잘못되기라도 한다면, 내 꼴이 뭐가 될 거라고 생각하는가?”

하이데거의 푸른 눈이 흔들렸다. 답할 말을 찾지 못해 침묵을 지키는 하이데거를 보며 크리스티앙이 시선을 들었다.

“귀족들의 이목이 집중된 파티에서 제 누이를 채찍으로 때려죽인 황제라. 내 흠집을 잡을 생각만 하고 있는 원로원들이 박수를 치며 좋아할 만한 일이겠지. 안 그래?”

“폐하. 제가 황녀를 말끔히 치료하겠습니다. 허락해 주십시오.”

술잔을 도로 내려놓는 하이데거의 손끝이 떨렸다.

“아니. 그건 더욱 말이 안 되지.”

크리스티앙이 픽 웃으며 허리를 세웠다. 벽에 시커먼 그림자가 일렁였다.

“황녀가 달려오는 걸 뻔히 알고도 채찍을 잡은 손을 멈추지 않은 자네에게 어찌 그녀의 치료를 믿고 맡기겠는가?”

“폐하 그게 무슨 말씀… 흣!”

당황해 부정하던 하이데거의 말이 갑자기 멈추었다. 흔들리는 그의 시선이 자신의 오른손으로 떨어졌다. 엎어진 술잔 옆으로 편지 봉투를 자를 때 쓰는 날카로운 레터 오프너가 그의 손등을 꿰뚫고 있는 장면이 선명하게 보였다. 검은 얼룩 같은 피가 주르륵 솟아 나오며 동시에 말라붙기를 반복했다.

지지직.

크리스티앙이 칼을 쥔 손에 힘을 더욱 주었다. 힘줄과 뼈가 뚫리는 게 생생하게 느껴졌다. 하이데거는 입 안의 살을 꽉 물며 숨 막히는 고통을 참아냈다.

황제가 교황을 난도질할 시절, 무표정한 얼굴로 폭행을 감당하던 베네딕트를 지켜볼 때에는 미처 알지 못했다. 치유 마력을 가지고 있다고 해서 고통을 느낄 수 없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은 것은 한참 뒤였다.

“경이 지금 감히 나를 기만하는가?”

크리스티앙이 낮아진 목소리로 그에게 빠르게 내뱉었다. 황금빛 눈동자에 벽난로에서 활활 타오르며 반사되는 시뻘건 불꽃이 일렁였다.

“폐하….”

“덫을 치라는 황명은 내리지도 않았는데 멋대로 움직여 소란을 일으킨 이유가 뭐야.”

“…황후 저하의… 시해를 말씀하시는 거라면 그건 제가 아니었습니다, 폐하.”

“경은 내게 끝까지 거짓을 고할 생각인가 보군.”

크리스티앙의 목소리가 얼음처럼 차가웠다. 하이데거는 황급히 고개를 저었다. 황제가 자신을 의심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으나 오늘의 사건은 정말로 그가 벌인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거짓이 아닙니다, 폐하. 저는 황명에 따라 움직이기로 맹세한 자입니다. 폐하가 명령하지 않은 일을 멋대로 행하는 것은 제게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화려하게 조각된 칼 손잡이를 꽉 잡은 손에 푸른 핏줄이 불거졌다. 뾰족하고 날카로운 칼은 하이데거의 손등과 테이블을 동시에 뚫은 채였다. 크리스티앙이 그를 노려보며 작게 속삭였다.

“나도 그리 믿고 싶으니 증거를 대라. 에리히.”

“폐하께서 직접 제게 내리신 모든 지위와 작위, 저의 명예와 목숨을 모두 걸고 고합니다. 저는 황후를 공격하려 기사들의 정신을 조종한 적이 없습니다.”

“그러니 경의 말만 듣고 무조건 자네를 믿어야 한다?”

조소가 섞인 크리스티앙의 목소리는 차갑기 그지없었다. 대공의 머릿속이 다시금 깨질 듯 아파 오기 시작했다. 하이데거가 마른침을 삼키며 힘겹게 입을 열었다.

“폐하께서 아시다시피 존재하는 마법의 종류를 알고 있는 사람은 극소수입니다. 마법사에 관한 정보는 바깥으로 새어 나가지 않게 교황청에서 엄격히 관리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뭐야.”

“…인간의 정신을 조종하는 마력을 가진 마법사는 한 명뿐으로, 그는 수개월 전 탈주하여 실종되었기 때문에 저는 그 능력을 얻지 못하였습니다.”

길게 빠진 크리스티앙의 눈썹이 미간에 모였다.

“그럼, 황녀의 부하인 그 자가 정말로 황후를 죽이려 시도했단 말인가? 경비가 쫙 깔린 내 성의 중심부에서 그런 멍청한 짓을 저질렀다고?”

위험할 뿐만 아니라 논리에 맞지도 않는 짓이었다. 귀족들이 모두 모이는 밤을 결전의 날로 잡고 반역을 일으킬 생각이었다면 황후보다 자신을 공격하는 쪽이 더욱 말이 되었기 때문이다. 황녀가 아무리 멍청하다 한들 그 정도로 생각이 없을 것 같지는 않았다. 그녀도 아니고, 하이데거도 아니라면 과연 누가 일을 벌인 걸까.

“…베네딕트 블라이가 마력을 잃은 것이 확실한가?”

갑작스러운 크리스티앙의 물음에 하이데거의 눈썹이 꿈틀, 조용히 움직였다.

“제가 고문에 직접 참여했다는 사실을 폐하께서도 아시지 않습니까. 그는 더 이상 교황도, 마법사도 아니며 죽을 날을 기다리고 있는 반시체일 뿐입니다. 원하신다면 당장 끌어내 국민들 앞에서 처형하겠습니다.”

크리스티앙이 초점이 흐려진 가느다란 눈으로 중얼거렸다.

“아니. 그럴 필요 없어. 그건 그에게 너무 초라한 죽음이지.”

교황에게는 그에게 어울리는 화려한 마지막이 있어야 할 것이다. 지난 세월 동안 그를 철저히 기만해 온 교황을 그냥 죽여 버리기에는 분이 차지가 않았다. 그의 후원에서 황녀와 벌거벗고 쾌락을 탐한 죗값도 똑똑히 치르게 만들 것이다. 일단 당장 눈앞에 거슬리는 문제를 먼저 처리하고 나서.

“그 소란을 벌인 주체가 자네가 아니었다고 치지. 그렇다면 내가 보는 앞에서 황녀에게 채찍을 일부러 휘두른 것은 어떻게 해명할 참인가.”

크리스티앙이 그를 추궁하자 하이데거가 작게 숨을 몰아쉬었다.

“저는… 폐하의 명에 따라, 그리고 클라웨의 국법에 따라 죄인들에게 태형을 집행하였습니다. 에데르트 황녀가 죄인을 감싸러 달려오는 것을 인지한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폐하의 의중을 멋대로 짐작하고 손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송구합니다.”

“나의 의중을 멋대로 짐작했다.”

크리스티앙이 그의 눈을 뚫어져라 바라보며 나직하게 되뇌었다.

“경은 내 의중이 뭐라고 생각하였나.”

“…저는 폐하께서….”

하이데거는 신중히 말을 고를 수밖에 없었다. 책상과 그의 손등을 동시에 꿰뚫은 칼날에는 아직도 검붉은 피가 새어 나오다 말라붙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송구하오나 저는 폐하께서 황녀를… 거슬려하신다 생각하였습니다.”

“맞아.”

하이데거를 직시하며 크리스티앙이 붉은 입술을 비틀었다.

“경의 말이 맞네. 에리히. 나는 그녀가 몹시도 거슬려. 하지만 지금은 그녀의 등을 일부러 찢어 놓은 자네가 더욱 거슬리는군. 그 이유가 뭔지 알아?”

“…폐하.”

“몰라? 자네라면 이미 짐작하고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내가 왜 그녀를 화려한 옷으로 치장시켜 구름다리로 끌어냈는지. 보석 따위를 목에 걸어 주는 촌극을 벌였는지.”

대공의 마음속에서 불안이 더욱 크기를 늘렸다. 긴장을 삼키는 하이데거와는 달리 크리스티앙은 태연한 얼굴이었다.

“이유를 말하기 전에 하나 묻지.”

“…예.”

“경은 자네의 검술 스승이었던 클라라 하르트만을 지금도 원하는가?”

하이데거의 푸른 눈동자가 티 나게 흔들렸다. 갑작스레 오래전 이야기를 꺼내는 황제 탓에 쿵, 쿵, 그의 가슴속에서 심장이 거칠게 요동쳤다.

“그게 갑자기 무슨 말씀이십니까, 폐하.”

“자네가 열여섯, 견습 기사 때부터 못내 사모하고 동경하던 여인이 아니던가. 그녀를 벌거벗겨 대공의 침실로 밀어 넣기를 원하는지를 묻고 있어.”

하이데거의 목울대가 소리를 내며 일렁였다. 황제는 실제로 그리 한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가 전쟁에서 대승을 거둔 직후의 개선 파티에서였다. 소년에서 어른이 되어 가던 황태자 크리스티앙은 그를 향해 천사같이 해사하게 웃으며 말했다.

“내가 고심해서 마련한 선물을 경이 부디 맘에 들어 했으면 좋겠군.”

승리의 기쁨을 만끽하고 황제가 하사한 좋은 술에 잔뜩 취해 침실로 들어간 하이데거를 기다리고 있던 것은 속살이 다 비치는 옷으로 치장한 클라라 하르트만이었다. 크리스티앙은 남편이 죽은 후, 납작 엎드려 살던 클라라 하르트만에게 비밀스러운 황명을 내렸던 것이다.

제자였던 하이데거의 밤 시중을 들어야 했던 클라라 하르트만에게는 스스로 목숨을 끊고 싶을 만큼 치욕적인 일이었을 테고, 반응하지 않으려 이를 악무는 그녀를 결국 반강제로 가지고야 말았던 하이데거 자신에게도 그리 좋은 기억만은 아니었다.

“에리히. 아니 이제는 더 이상 견습 기사 따위가 아니니 대공이라 불러야 합니까?”

“…마음대로 하십시오.”

“오늘의 일은 황명이었나요, 아니면 당신의 선택이었…. 흐읍…! 아악!”

대공이 날이 새도록 그녀를 취했던 그 밤 이후, 하르트만 부인은 단 한 번도 대중 앞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녀를 원했던 건 단지 치기 어린 욕정이었을 뿐입니다. 폐하께서 옳은 판단을 내려 주신 덕에 그 사실을 깨달았고, 지금은 그녀에게 아무런 감정도 남아 있지 않습니다.”

하이데거는 그를 물끄러미 응시하는 크리스티앙을 향해 쉬지 않고 말을 이었다.

“만일 제게 사사로운 감정이 남아 있었다면, 그녀를 수도에 압송해 처형하자고 폐하께 몇 번이나 의견을 드리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절 믿어 주십시오, 폐하. 하르트만은 제게 아무런 의미도 되지 못합니다.”

“믿어. 내가 명을 내린다면 경은 지금이라도 기꺼이 그녀의 목을 내게 잘라 바치겠지.”

“당연한 말씀입니다.”

하이데거가 진심 어린 눈으로 그를 보았다.

“자네가 그럴 수 있는 이유가 무엇인지 아는가?”

크리스티앙이 그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말을 이었다.

“경이 그녀를 이미 가져 보았기 때문이네.”

“…폐하.”

“정복하지 못한 땅에 미련이 남는 것은 당연해. 그 땅이 황무지라 해도, 아무리 볼품없는 사막이라 해도 말이야. 계집도 그와 마찬가지지. 한번 정복하고 나면 아무것도 아니란 사실을 깨달을 게 확실한데도, 가질 수 없을 때는 세상에서 가장 기름지고 비옥한 토양으로 보인다는 말이지.”

“…….”

“그래서 나는 손수 경의 미련을 끊어 주었어. 몰래 훔쳐봐야 하는 누군가의 아내이자 감히 손에 넣을 수 있을 거라 상상도 하지 못했던 존귀한 스승을 자네의 앞에 무릎 꿇리고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샅샅이 핥게 만듦으로써.”

흐트러짐 없이 반듯한 하이데거의 직각 어깨가 조금 떨렸다.

“난 자네에게 내가 가진 권력을 주고 싶었어. 날 따르면 경이 원하는 건 모두 손에 넣을 수 있다는 것을 알려 주고 싶었고 실제로 그렇게 했지. 자네를 거슬리게 만드는 것이 없기를 바랐기 때문이야. 그것이 해묵은 미련이든, 남들에게 꺼내 놓지 못하는 배덕한 욕망이든…. 내겐 상관이 없었다고.”

하이데거는 일그러진 목소리를 내뱉는 황제를 바라보며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그런데도 경은, 그 모든 것을 이해한 짐을 이해하지 못한다고 말하는 건가?”

몇 번을 망설이다 마침내 입을 여는 하이데거의 목소리에 허탈함이 스며들었다.

“…폐하께서는… 폐하의 이복 누이를 여인으로 안길 원하시는 겁니까?”

“그럼 안 돼?”

짤막하게 되묻는 크리스티앙의 말투에는 일체의 머뭇거림도, 떨림도 없었다.

“정을 주겠다는 것도 아닌데 뭐가 문제란 말인가. 침소에 시녀를 들이는 것과 다름이 없는데. 창부에게 보석을 쥐여 주고 하룻밤을 보내는 것과 같은 일인데.”

당당한 태도에 오히려 말문이 막힌 것은 대공 쪽이었다.

“이 땅에 내가 가지지 말아야 할 것이 있어?”

“…….”

“대답하라. 에리히 폰 하이데거.”

“폐하…. 하지만….”

하이데거의 성대에서 갈라진 목소리가 샜다. 그는 대체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크리스티앙의 그릇된 시작이 언제부터였는지를 알 수가 없는 것은 더더욱 큰 문제였다.

“그녀가 내 잠자리 시중을 들지 못할 이유가 뭐야. 나와 피를 나눈 상대이건 사창가에서 굴러먹던 창부이건, 제국의 주인인 내가 원하는데 가지지 못할 이유가 존재하느냐고 묻고 있지 않은가!”

크리스티앙이 주먹으로 탁상을 거칠게 내려치자 화려한 잉크병이 엎어져 푸른 잉크가 쏟아져 나왔다.

“폐하!!!”

하이데거가 벌떡 일어나 황제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칼에 박힌 손을 억지로 빼내는 바람에 손바닥 반이 주욱 찢겨 나가 너덜거렸지만 상처를 치료할 여유 따위는 그에게 없었다.

“어차피 죽게 될 계집 하나를 취하는 것뿐이라고.”

크리스티앙이 벌겋게 일그러진 얼굴로 그를 내려다보며 혼잣말하듯 낮게 중얼거렸다.

“단지 그것뿐이야.”

하이데거는 바닥에 머리가 닿을 정도로 자신을 낮추었다.

“예, 폐하. 이 땅의 태양이신 황제 폐하께서는 그 어떤 여인을 원하신다고 한들 모두 가지실 수 있으십니다. 하지만….”

그의 말마따나 제국 내에 크리스티앙이 정복하지 못하는 땅이 존재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이의가 없다. 하지만 그 땅이 황무지가 아니라 사람을 밑바닥까지 끌어내려 숨통을 틀어막을 수 있는 끈적끈적한 늪이라면, 크리스티앙은 그곳에 처음부터 발을 들여 놓아서는 안 된다.

“그 여인이 단지 폐하의 누이이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미천한 제 목숨을 내놓고 충언을 드립니다. 이대로라면 황녀는 폐하의 자리를 충분히 위협할 수 있는 위치입니다…!”

“그게 내 질문에 대한 경의 대답인가?”

크리스티앙이 눈썹을 치켜올리며 웃었다. 시린 달처럼 차가운 미소였다.

“경의 대답이 처음으로 나를 실망시키는군.”

“폐하, 벌이라면 얼마든지 달게 받겠습니다, 하지만…!”

탁상에 박혀 있던 레터 오프너가 크리스티앙의 손에 우악스레 뽑혀 나갔다. 날카로운 칼날로 자신의 팔목을 거침없이 긋는 황제를 보며 하이데거가 튀어 나갔지만 이미 크리스티앙의 푸른 혈관에서는 새빨간 피가 두 개의 물줄기를 이루며 길게 흘러내리고 있었다.

“폐, 폐하…!”

하이데거가 경악하며 그의 팔을 붙들었다. 황명을 기다릴 여유가 없었다. 피 흘리는 클라웨를 눈앞에 두고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은 더욱 큰 죄였다. 그가 마력으로 지혈을 시작하려 하자마자 크리스티앙이 그의 뺨을 거칠게 후려쳤다. 고개가 완전히 돌아갈 정도로 강한 힘이었다.

“누가 명령 없이 감히 본제의 몸에 손을 대는가.”

크리스티앙이 가쁘게 숨을 몰아쉬며 끓는 시선으로 그를 노려보았다.

“폐하…! 상처를 치료하셔야 합니다.”

“두 번 말하게 하지 마라. 빌어먹을 마력 따위는 내 몸에 필요 없어.”

“…폐하께서 부상당하셨다! 지금 당장 펠리페 경을 들여라…! 어서!!!”

하이데거가 문 밖을 향해 갈라진 목소리를 크게 높였다. 웅성거리는 소리와 함께 거친 발자국 소리가 이어졌다.

“똑똑히 들어, 에리히. 아무도 내 자리를 위협할 수 없어. 그 누구도 나를 흔들 수 있는 사람은 없다고.”

크리스티앙은 핏기가 모조리 가셔 창백해진 얼굴이었지만 날짐승을 떠올리게 하는 눈동자만은 형형했다. 다른 이에게는 물론, 스스로에게까지 잔인해질 수 있는 이가 혼잣말하듯 낮게 내뱉었다.

“이 땅에서 날 무너뜨릴 수 있는 건 오직 나뿐이다.”

하이데거는 그를 보며 제 입술을 피나게 깨물었다.

“…예, 폐하.”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경고하겠네, 대공. 앞으로 황명이 떨어질 때까지 황녀의 머리카락 하나라도 건드린다면 하이데거 가문은 역사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지게 될 거야.”

“…명심하겠습니다…!”

“나가.”

크리스티앙이 괴롭게 숨을 몰아쉬었다. 황제의 눈동자가 초점을 잃고 위험하게 흔들리는 걸 보며 대공이 자리를 뜨는 것은 불가능했다.

“…폐하.”

“꺼지란 말… 못 들었나?”

“드릴 게 있습니다.”

하이데거는 떨리는 손으로 파티에서 수습해 온 것을 꺼내 그의 앞에 내밀었다. 황제가 황녀에게 선물한 목걸이였다. 크리스티앙은 하이데거의 채찍질에 줄이 반으로 끊어진 목걸이를 움켜쥐었다. 보랏빛 자수정의 매끄러운 표면을 타고 붉은 피가 뚝뚝 흘러내렸다.

“망가져 버린 건 더 이상 쓸모가 없지.”

뒤돌아 벽을 향하는 크리스티앙의 발걸음이 휘청거렸다. 하얀 양털 카펫에 떨어지는 핏자국이 선연했지만 황제는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노란 불길이 날름거리며 타오르는 벽난로로 휙 하고 목걸이가 날아갔다. 크리스티앙의 하얀 팔목으로 붉은 피가 넘치듯 흘러내리는 걸 보며 하이데거가 몸을 덜덜 떨었다.

“의사는… 의사는 아직인가!”

“지, 지금 데려오는 중입니다!”

“서두르라 명하였다!!!”

하이데거가 악을 쓰며 외쳤다. 크리스티앙이 숨을 몰아쉬며 비틀거렸다. 피를 너무 많이 흘린 탓이었다.

“내 것에 흠집을 내는 이는 그 누구도 용서치 않아.”

“폐하… 폐하!!!”

쿵. 의자를 짚은 채 앞으로 무너지듯 쓰러지면서도 그의 눈은 하이데거를 똑바로 노려보고 있었다.

“죽여도 내 손으로 직접 죽인다고….”

하이데거는 그를 떠받치고 있던 차가운 푸른 하늘이 붉은 피투성이로 물드는 것을 목도하며 깨질 것 같은 머리를 꽉 움켜쥐었다. 크리스티앙의 내면의 목소리가 그의 뇌리에 메아리치듯 울려 퍼졌다.

‘그녀는 내 소유다. 누구의 것도 아닌 나의 것.’

“…폐하.”

‘내가 가질 것이다.’

하이데거는 피투성이가 된 황제를 부축하며 자신을 자책해 보았지만 이미 늦은 후였다. 밤이 길어진 창밖에 붉은 달이 기이할 정도로 밝았다. 황제의 성정만큼이나 혹독한 겨울의 시작이었다.

***

발터의 품에 안겨 파티장을 벗어나던 것이 혜미가 정신을 잃기 전 마지막 기억이었다. 그녀는 며칠 밤 내내 악몽에 시달렸다. 발이 수백 개인 시커먼 지네가 몸에 붙은 꿈이었다.

징그럽게 커다란 벌레는 피를 빠는 대신 그녀의 몸 안에 불길을 불어넣는 듯했다. 등이 타는 듯 뜨거웠다.

‘떨어져…! 떨어지라고…!’

아무리 몸을 뒤흔들어 보아도 벌레는 떨어질 줄을 몰랐다. 그녀는 인상을 찌푸린 채 더욱 세게 움직였지만 움직임이 쉽지가 않았다.

“고통스러운 모양이군.”

누군가의 말소리가 희미하게 들렸다. 마치 그녀는 물속에 있고 상대는 바깥에 있는 것처럼 귓가가 먹먹하게 울렸다.

“어제보다는 낫습니다.”

“지금 저 꼴을 보고도 하는 소리인가?”

“아뢰옵기 송구하오나 첫날과 이튿날 밤에는 황녀 저하의 발작이 더욱 심하였습니다. 하지만 상처는 분명히 아물고 있습니다. 그 사실만은 제 목숨을 걸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알았으니 치료해. 내 눈앞에서.”

누군가가 헛기침을 하며 그녀에게 다가왔다.

“황녀 저하, 상처를 좀 보겠습니다.”

조심스러운 말과 함께 엎드려 있는 혜미의 등에서 끈이 스르륵 풀렸다. 달그락, 금속이 부딪히는 소리가 귓가에 거슬려 인상을 찌푸리는 순간 차가운 무언가가 피부에 닿았다.

“하아….”

뜨거운 불로 지지는 것 같던 피부 위에 서늘한 느낌이 들었다가 이내 사라졌다. 모닥불 위에 물방울을 뿌려대는 수준이었다.

조금만 더. 감질나는 손놀림을 재촉하고 싶었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팔을 움직여 보았지만 덜그럭거리는 소리만 들렸다. 손목이 어딘가에 묶인 듯 거동이 자유롭지가 못했다. 약이 들어오는 순간 온몸에서 힘이 쭉 빠져나가는 착각도 들었다. 아니. 착각이 아닌 건가.

“조금만 참으십시오. 황녀 저하. 소독약에 마취제가 들어있으니 고통도 곧 사라지실 겁니다.”

시커먼 상처에서 약이 부글부글 끓으며 괴사한 피부 조직을 태웠다.

“흐으….”

그녀가 앓는 소리를 내자 상처를 소독하는 대신이 손을 멈칫했다. 뭐든 좋으니 등 전체에 확 끼얹어 주었으면 좋겠는데. 대신의 손놀림은 그녀를 배려하듯 더욱 조심스럽게 바뀔 뿐이었다.

“…이제 하부로 내려가도 괜찮으시겠습니까?”

대답도 하지 못하는 그녀에게 대신이 머뭇거리며 말을 걸었다. 채찍이 깊게 할퀴고 지나간 그녀의 상처는 허리 아래, 허벅지까지 길게 이어져 있었다. 전부 치료하려면 위아래가 이어진 치마를 완전히 벗기다시피 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그, 그럼 무례를 무릅쓰고….”

“내가 하지.”

잠자코 있던 다른 이가 입을 열었다. 혜미는 눈을 떠 보려 노력했지만 눈꺼풀에 아교라도 붙여 놓은 듯 뜨기가 힘이 들었다.

“예, 예?”

“소독만 하면 되는 건가?”

“환부의 소독이 끝난 후에는 이 약도 함께 복용하셔야 합니다.”

“이건 내가 마시는 수면제와 비슷해 보이는군.”

그가 평이한 어조로 내뱉자 대신이 황급히 입을 열었다.

“그러합니다. 같은 종류입니다. 거기에 기력을 보충하는 허브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약효가 꽤 센 걸로 알고 있는데.”

“황녀 저하는 등의 상처뿐만이 아니라 오랜 전투와 바깥 생활로 인해 전체적으로 피로가 누적된 상태입니다. 충분한 수면과 휴식을 취하는 것이 치료에 가장 보탬이 될 것입니다.”

“…두고 나가게. 내가 할 테니.”

“지, 직접 하시겠다는 말씀이십니까?”

“문제 있나?”

“물론 아닙니다만….”

“문 앞에 보초병에게 내가 허할 때까지 그 누구도 들이지 말라고 하도록.”

“…명심하겠습니다.”

조심스레 문이 열리고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잠시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혜미는 엎드려 누운 채, 온몸에 힘을 주고 무거운 눈꺼풀을 간신히 들어 올리는 데 성공했다. 밤새 열에 들뜨고 앓은 탓에 시야가 흐릿했다. 마치 눈앞에 반투명한 커튼을 친 것 같은 느낌이다.

창문이 없는 그녀의 침실 안은 희미한 촛불 몇 개만 일렁일 뿐 어둑해 낮인지 밤인지도 알 수가 없었다. 불확실한 시야로 어두운 머리칼을 한 사내의 인영이 일렁였다. 발터인가.

“꼴 좋군.”

여전히 목소리가 먼 곳에서 들려오는 것처럼 윙윙 울렸다. 부드러운 침대 한쪽이 출렁이더니 그가 은쟁반을 손에 들었다. 팔목에 붕대가 감겨 있는 팔이 천천히 움직이며 집게를 들었다. 아마포 거즈를 약에 푹 적시는 게 보였다.

“…하아….”

차가운 소독약이 다시 등의 상처에 문질러지며 부글부글 끓는 소리가 났다. 아까보다는 훨씬 거침없는 손놀림이었다. 혜미가 몸을 작게 떨며 결박된 손으로 주먹을 꽉 쥐었다.

“잘난 척한 것치고는 엄살이 심하잖아.”

“…더… 많….”

그녀의 목에서 놀랍도록 쉰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심한 감기에라도 걸린 것처럼 거칠거칠한 목소리였다.

“…뭐? 지금 뭐라고 한 거지?”

남자의 목소리가 조금 가깝게 들렸다. 그가 고개를 숙여 그녀에게 귀를 붙인 탓이었다. 부드러운 머리칼이 그녀의 코끝을 간질였다.

그에게서는 발터의 체취와는 다른 냄새가 났다. 마치 삼나무 숲에 들어온 것 같은 차갑고 시원한 향. 내가 이 향을 어디선가 맡은 적이 있는 것 같은데. 아니.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더, 많이….”

혜미의 성대에서 갈라진 목소리가 간신히 샜다.

“약을 좀 더 많이 부어 달란 소리인가?”

“응…. 응….”

그녀가 고개를 끄덕이며 격하게 반응하자 상대의 입술에서 바람 빠지는 소리가 났다.

“뭘 좀 아는군.”

작게 속삭이는 남자의 체향이 조금 멀어지나 싶었다. 옷이 완전히 풀리고 은쟁반이 달그락거리더니 그녀의 등에 주르륵 무언가가 넘치듯 흘러내렸다.

“하아…!”

온몸이 차갑게 얼어붙는 감각에 소름이 돋으며 정수리까지 쭈뼛 섰다. 등에 딱 달라붙어 있던 뜨거운 지네가 마침내 떨어져 나가는 느낌이었다.

“숨 쉬어. 약을 넘치게 쏟아붓는다고 해서 죽지는 않으니까.”

짤막한 머리카락이 꽉 붙들리고 차가운 목소리가 그녀의 귓가에 속삭였다. 혜미가 크게 숨을 토해 내며 눈물에 젖은 속눈썹을 간신히 들어 올렸다.

“아픈가?”

얼음에 살이 붙어 뜯겨 나가는 것처럼 아팠다. 하지만 그 덕에 뜨거운 기운이 물러가고 피부가 마비되어 아까보다는 훨씬 살 만했다.

“하, 하아…. 고… 고마…워.”

크리스티앙은 자신을 향해 말라붙은 입술을 애써 떼며 웃는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황녀가 쓰러진 지 사흘. 그는 인내심의 한계를 느끼고 그녀의 침실로 찾아왔다.

눈으로 확인한 그녀의 상처는 엄청났다. 자신이 낸 팔목의 자상은 애들 장난처럼 보일 지경이었다. 회복된다 하더라도 커다란 흉이 남을 거라고 말하던 의사의 목을 자르려다 참았다.

“약을 마셔야 해.”

그가 녹색 약이 일렁이는 병을 들고 낮게 말했다.

“나는 누워서 뭘 먹는 게 익숙한데, 넌 아니겠지.”

잠시 망설이던 그가 침대 기둥과 그녀의 팔목을 결박시키고 있던 끈을 풀었다. 벨벳 끈이 소리 없이 바닥에 떨어졌다.

스르륵.

자유로워진 혜미의 손이 그의 팔목으로 다가오자 그녀를 일으키려던 크리스티앙의 눈썹이 미간에 모였다. 본능적인 반응에 흠칫하는 그의 몸에 덜덜 떨리는 그녀의 손이 닿았다.

“…다쳤… 어…?”

두근.

크리스티앙의 심장이 쿵, 하는 소리를 내며 뛰었다. 그녀가 더듬더듬 그를 붙들더니 손을 꼭 쥐었다.

“여기, 왜…? 어쩌다… 다친… 거야…?”

누가 싸움하는 이가 아니라고 할까 봐 마취제를 들이부었음에도 엄청난 힘이었다. 그는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아무것도 아냐.”

“…어디 봐. 어디… 봐, 발터.”

혜미가 인상을 찌푸리며 애써 말을 내뱉자 그녀가 그를 만지게 내버려 두던 크리스티앙이 갑자기 손을 휙, 사납게 떨쳐 냈다.

“정신 나갔군.”

“아….”

혜미의 손이 털썩, 침상 위로 떨어졌다. 크리스티앙이 그녀를 내려다보며 낮게 중얼거렸다.

“약 먹을 시간이다.”

크리스티앙은 약병을 들고 버릇처럼 꿀꺽꿀꺽 삼키다가 자신이 뭘 하려 했던 건지 자각하곤 입 안에 조금 머금었다. 유려한 손이 혜미의 아랫입술을 천천히 문지르나 싶더니 이 사이에 끼우고 아래턱을 잡아 내렸다. 곧이어 입술과 입술이 마주 닿았다.

“흐으… 음….”

꿀꺽. 혜미의 입 안으로 약이 옮겨졌다. 쓸 거라고 생각했던 약은 놀랍도록 달콤했다.

“잘 먹는군.”

크리스티앙이 다시 약을 머금은 후, 그녀에게 고개를 숙였다. 이번에는 입술이 맞닿는 속도가 조금 성급했다. 꽉 다물리지 못한 입가로 약이 흘러내렸다. 크리스티앙이 작게 혀를 찼다.

“더럽게.”

“…더.”

혜미가 저도 모르게 혀를 내밀어 그의 입가를 핥았다. 정확히 말하면 약이 흘러내리는 그의 뺨과 목으로 이어지는 날카로운 턱선을.

“…뭐 하는 짓이지?”

크리스티앙의 목소리 끝이 위험하게 떨렸다.

“더… 줘.”

약에 취한 혜미가 눈을 가늘게 뜨고 중얼거렸다. 크리스티앙이 훅 하고 숨을 들이쉬었다. 그는 약병을 통째로 들고 자신의 입 안에 넘치게 부었다.

달콤한 냄새를 풀풀 풍기는 약이 줄줄 흘러내려 그의 목덜미와 옷을 적셨지만 크리스티앙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빈 약병이 카펫에 소리 없이 뒹구는 순간 입술이 마주 닿았고, 곧이어 혀가 거칠게 뒤엉켰다.

“하…. 아…. 응….”

혜미의 성대가 꼴깍거리며 약을 삼켰다. 그녀는 달콤한 기운이 가득한 그의 키스에 화답하려 했지만 도무지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움직이는 혀는 느릿했고 온몸에 힘은 쭉 빠져나가고 있었다. 자꾸만 얼어붙는 그녀의 혀를 능숙하게 얽는 움직임에 그 와중에서도 혀뿌리에서는 타액이 샘솟았다.

쪽. 쪼옥. 질척이는 소음이 계속 이어졌다. 혜미는 그에게 혀를 내맡기고 있었으므로 일방적으로 크리스티앙이 주도하는 입맞춤이었다.

약이 다 사라진 후에도 떨어질 줄 모르고 그녀의 입 안을 비집으며 쭉쭉 빨던 크리스티앙이 숨을 가늘게 몰아쉬며 눈을 치떴다. 그녀의 밤색 속눈썹이 천천히 아래로 깔리는 걸 보며 크리스티앙이 그녀의 아랫입술을 아프게 깨물었다.

“아….”

“내가 누구야.”

혜미는 인상을 찌푸리며 미간을 모았다. 마취제를 피부에 통으로 들이부었고 수면 약까지 마신 탓에 흐트러지는 정신을 집중하기가 쉽지 않았다.

“대답해.”

낮게 속삭이는 상대는 분명 발터는 아니었다.

“혹시… 베네딕트예요…?”

“뭐?”

침대로 상체를 잔뜩 숙여 키스하던 크리스티앙이 몸을 확 일으키며 그녀를 노려보았다.

“발터는… 아닌 것 같은, 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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