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5화 (55/72)
  • “경은 황후의 오라비이기도 하나 그 이전에 황금성의 경비를 책임지는 총지휘관이자 원로원의 수장이니 사심에 치우치지 않는 공정한 판단을 내려줄 거라 생각하네.”

    하이데거는 싸늘한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황제를 보며 미간을 조금 모았다. 생각은 읽히지 않았지만 그의 눈동자가 표현하고자 하는 바는 확실히 보였다.

    그의 착각이 아니라면 크리스티앙은 지금 차갑게 분노하고 있었다. 도대체 무엇 때문에…?

    “내가 가면을 떨어뜨리면 그 순간, 다리의 앞뒤를 차단하고 사람들의 이목을 다른 곳으로 돌리게. 황녀와 내가 그 안에서 뭘 하는지 아무도 알 수 없도록 말이야. 파티의 하이라이트가 될 테니 최대한 화려해도 좋겠군.”

    가면을 얼굴에 쓰며 미소 짓던 크리스티앙의 황금빛 눈동자에 일렁이던 작은 흥분. 하이데거는 그것이 황녀를 꿇어 앉히기 위한 계획이라고 생각했었다.

    “그 누구에게든 절대로 잊지 못할 순간이 될 만큼 아름답게 말이야.”

    하이데거는 황제의 명령을 충실히 이행했다. 분수로 구름다리를 완전히 차단해 황제에게 황녀와 독대할 기회를 주었다. 황후가 공격받기 직전, 자신이 마력으로 하늘에 불꽃을 터뜨리던 순간, 크리스티앙은 그녀에게 침을 뱉는 대신 입을 맞추었다. 그것도 아주 뜨겁게.

    여유를 완전히 잃고 그녀의 옷을 찢어발길 기세로 움켜쥐었던 크리스티앙의 모습을 떠올리는 순간 하이데거의 심장이 불안한 속도로 뛰었다.

    ‘에리히. 너 따위가 감히 날 방해했나?’

    갑자기 귓속에서 벌떼처럼 윙윙거리는 소음과 함께 크리스티앙의 목소리가 희미하게 울려 퍼졌다. 그에게만 들리는 환청이 자신의 착각인지 아니면 진짜 황제의 생각인지 알 수가 없었다.

    머릿속이 수십 개로 쪼개지는 것 같은 착각이 일었다. 자신이 앓고 있는 것이 마력의 부작용이라는 사실을 남들이 알아서는 안 됐다. 특히 자신의 눈앞에서 그를 뚫어져라 직시하는 황제에게는 더더욱이나 들킬 수 없었다.

    하이데거는 평정을 유지하기 위해 이를 꽉 물었다. 그의 목울대가 거칠게 일렁인 후 입술에서 짤막한 한마디가 흘렀다.

    “황족의 암살을 시도한 자는 반역으로 그 자리에서 즉각 사형하는 것이 제국의 법도입니다, 폐하.”

    “사실이지.”

    크리스티앙이 그를 향해 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황제의 뒤편에서 젖은 수건을 꽉 쥔 채 가늘게 입술을 꽉 깨물고 있는 황녀가 보였다.

    하이데거는 문득 궁금했다. 황실의 법도를 철저히 따르는 황제가 자신의 다음 말에 어떤 반응을 보일지가.

    “황제, 혹은 황후의 암살이라면 범죄자의 직계 가족은 물론 사촌 이내의 방계 일족 그리고 소속된 조직 수장의 목을 베는 것이 법에 똑똑히 명시되어 있는 내용입니다. 감히 암살을 시도한 자가 일개 병사일 경우에는 더더욱 그러합니다. 암살의 뒷배, 즉 실체를 확실히 처단하기 위함입니다.”

    휘잉. 순식간에 침묵이 내리깔린 파티장에 바람 소리가 크게 들렸다. 숨죽이고 있는 귀족들 간에 공기가 얼어붙었다. 대공이 방금 내뱉은 말은 바싹 마른 장작을 순식간에 타오르게 만들 수 있는 강력한 불씨였기 때문이다.

    황후에게 덤벼든 자는 황실에 소속된 이가 아니다. 지금껏 몸을 숨기며 죽은 척 재야에 살다가 무슨 의도인지 모르게 갑자기 모습을 드러낸 황녀, 에데르트가 이끌고 온 병사들 중 하나인 것이다.

    “…지금, 본인이 무슨 소리를 내뱉는지는 확실히 자각하고 있을 거라 믿네. 에리히.”

    잠시 침묵하던 크리스티앙이 마침내 그에게 입을 열었다. 예의 차분하고 또렷한 목소리. 여유로운 표정과는 달리 움푹 들어간 눈매 안에서 노랗게 타오르는 눈빛은 숨길 수가 없었다. 아니. 숨기려는 티를 내지도 않는 거라고 해야 맞았다.

    하이데거는 입술을 한 번 꽉 씹었다. 크리스티앙의 의중은 일단 확인했다. 지금은 분노한 크리스티앙에게서 한발 물러설 때였다. 황녀를 벌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잡을 생각이 전혀 없어 보이는 황제를 이해하는 것은 나중 일이었다.

    “예. 폐하. 저자는 세르노티에 소속된 자이니 세르노티의 가주가 함께 벌을 받아야 한다고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저런 자를 호위 기사로 두며 가까이 지내는 것은 황녀 저하께도 위험을 초래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흠.”

    크리스티앙은 짐짓 심각한 표정을 지었지만 입가를 쓸어내리는 척하며 슬쩍 웃음을 삼키는 모습이 하이데거의 눈에는 똑똑히 보였다. 황녀와 호위 기사를 떼 놓겠다는 그의 말 한마디에 크리스티앙의 분노가 순식간에 만족감으로 바뀐 것이다.

    설마…? 자신이 아는 황제라면 절대 그럴 리가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자꾸만 불안한 가정이 대공의 머릿속을 비집었다. 더러운 창부라 욕하던 황녀에게 키스를 퍼부으며 그녀를 움켜쥐던 크리스티앙의 손끝에서 뚝뚝 떨어지던 위험한 욕망이 하이데거를 괴롭게 만들었다.

    파티에 나가기 직전, 어린아이 주먹만 한 보석을 뚫어져라 바라보다 피식 웃으며 조심스레 품 안에 집어넣던 크리스티앙의 상기된 얼굴 위로, 헐떡이며 황녀의 입술을 탐하던 그의 얼굴이 겹쳐졌다. 하이데거의 심리가 더욱 복잡해지는 것은 당연했다.

    “암살 시도가 아닙니다, 폐하!!!”

    혜미가 목소리를 높인 것은 그때였다. 크리스티앙이 서늘한 눈초리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누이께서는 지금 이 상황에서 암살자의 편을 드는 건가?”

    그녀에게로 시선이 집중된 가운데 혜미가 떨리는 목소리로 빠르게 내뱉었다.

    “편을 드는 게 아니라 사실을 말씀드리는 겁니다.”

    꿀꺽, 마른침을 삼키며 그녀가 고개를 돌려 다급한 눈길로 누군가를 찾았다.

    “체셔 백작 부인?”

    갑자기 이름이 불린 여자가 당황하며 입을 뗐다. 자신이 처음 보는 남자를 황후에게 소개하는 바람에 이 사달이 났다고 생각하여 아까부터 계속 안절부절못하고 있던 이였다.

    “…예?”

    “황후 전하를 공격하던 이가 아까 뭐라고 했다고 했죠?”

    “네? 그, 그건….”

    “비, 빌어먹을 말라쿤이라고 외치면서 갑자기 황후 전하께 달려들었다고 하지 않았나요?”

    분명 그녀가 내뱉은 말이었다.

    “예…. 그랬습니다만….”

    체셔 백작 부인이 불안한 표정으로 작게 고개를 끄덕이자 혜미가 기다렸다는 듯 질문을 이었다.

    “뭔가 이상하지 않던가요? 눈동자의 동공이 비정상적으로 커지진 않았던가요? 마치 눈앞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듯, 뭔가에 사로잡힌 듯 행동하지 않았습니까?”

    “그게 워낙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백작 부인이 말을 흐렸지만 놀라는 그녀의 표정에서 답을 알 수 있었다. 혜미는 확신하는 말투로 설명을 이었다. 크리스티앙이 아니라 파티에 모인 귀족들에게 호소하는 듯한 목소리였다.

    “마법의 종류 가운데는 인간의 정신을 흐트러트려 나쁜 기억을 끄집어내는 심령술이 있습니다. 얀은 마법에 걸려든 겁니다. 황성에 오기 직전까지 목숨 걸고 싸우던 야만족 말라쿤의 환영을 본 게 틀림없어요.”

    조용히 동요하는 귀족들의 반응을 보며 하이데거가 날카롭게 목소리를 높였다.

    “허튼 수작질이었을 뿐입니다. 그리고 송구하오나 황녀 저하께서 증인을 직접 심문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현명하신 폐하께서 옳은 판단을 내리기 위해 꼭 필요한 설명을 드리는 겁니다!”

    지지 않고 버럭 목소리를 높이며 혜미가 크리스티앙을 보았다. 추켜세우는 말과는 달리 그녀의 눈빛에는 분노가 부글부글 끓고 있었다.

    “그러니까 누님의 말은.”

    크리스티앙은 눈썹에 아직도 달려 있는 자그마한 물방울을 손으로 슥 걷어 내며 입을 열었다. 물줄기를 뒤집어쓴 바람에 온몸이 축축했다. 빌어먹을 여자와 엮이면 늘 이런 식이었다. 심장의 박동이 아까부터 제 속도를 벗어나 빠르게 뛰는 것은 당연했다. 단순히 불쾌감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묘한 기분.

    그를 뚫어지게 바라보는 그녀의 눈동자를 직시하며 크리스티앙은 자신이 지금 흥분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마치 달리는 경주마에 직접 올라탄 것처럼 두근거리는 심장을 주체할 수가 없어진다.

    이제껏 가지고 싶은 것은 모조리 손에 넣었던 그가 처음으로 당면한 벽이었다. 어떻게 해결할지는 이미 판단했다. 벽을 넘지 못한다면 부숴 버리면 된다.

    “저자 역시 마력에 걸려 의지와는 다르게 행동했다는 뜻인가?”

    오늘 밤, 사냥개를 잃은 황녀는 황제의 침소에서 온몸이 부서지도록 그를 받아 내야 할 것이다.

    “예. 폐하.”

    “증거는?”

    크리스티앙이 태연한 표정으로 물었다.

    “아뢰옵기 황공하오나….”

    커다란 심호흡을 내뱉은 후, 혜미가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교활한 크리스티앙이 이 파티에 분명 함정을 파 놓았을 거라는 걸 예상치 못한 스스로를 탓하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기절했다가 깨어난 얀은 모든 상황을 짐작한 채 두려움에 질려 있었고, 다른 기사들 역시 주먹을 꽉 쥔 채 어쩔 줄 모르는 얼굴로 그녀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혜미는 마른침을 한 번 삼키며 속으로 되뇌었다. 이대로 도망갈 수는 없다. 가슴이 돌덩이를 매단 것처럼 무거웠다. 하지만 이 상황에서 그들을 구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자신뿐이라는 사실이 그녀를 한 발짝 앞으로 나아가게 만들었다.

    “세르노티 가문의 뿌리를 모르는 이는 이 자리에 없을 거라 생각합니다.”

    “선황께서 비밀리에 조직하셨던 여러 암살단 가문 중 하나이지. 지금은 전멸한 카플란도 그중 하나였고 말이야.”

    친절히 설명해 주는 크리스티앙을 보며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예, 맞습니다. 세르노티의 기사들은 많아도 열셋, 적으면 열 살 때부터 본격적인 훈련을 시작합니다. 늘 위험한 황궁에서 주군을 그림자처럼 보호하려면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적을 처리하는 법을 알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뭐냐는 뜻으로 크리스티앙이 그녀에게 물었다. 마른침을 삼킨 혜미의 입술 새로 작지만 또렷한 말소리가 흘러나왔다.

    “만약 얀이 정말로 황후 전하를 암살하려 했다면 그는 실패하지 않았을 거라는 뜻입니다.”

    “…황녀 저하!!!”

    하이데거가 소리를 높였지만 혜미는 말을 멈추지 않고 이었다.

    “세르노티의 정예 기사들은 맨손으로 사람의 급소를 자극해 죽이는 법을 배웁니다. 몸에 무기를 숨기는 방법 역시 여러 가지입니다.”

    그녀가 머리에 매달려 있던 가발을 거칠게 잡아 뜯어내듯 벗어 던졌다. 머리를 고정시키고 있던 핀이 우수수 떨어지며 짤막한 머리칼이 귀밑에서 흩날렸다. 머리카락 수십 가닥이 한꺼번에 뽑혀 아팠지만 오히려 정신이 더 날카로워지는 기분이다.

    “설사 쇠붙이가 없다고 해도 상관없습니다. 손바닥만 한 천 조각 한 장만으로 숨통을 끊어 내는 것이 가능하니까요.”

    혜미가 핀으로 자신의 드레스 자락을 찔러 구멍을 낸 후, 악력만으로 북 찢었다. 훤히 드러나는 그녀의 허벅지를 보며 귀족들이 저마다 당황해 눈을 깜빡였다. 예쁘게 치장한 채 마치 화려한 파티의 장식품 일부처럼 서 있었을 뿐, 이제까지는 존재감이라곤 없던 그녀의 행동에 모두의 시선이 집중되었다.

    “나뭇가지 하나만 꺾어도 심장을 저격해 즉사시킬 수 있습니다.”

    그녀가 손을 뻗어 길게 내려온 나뭇가지 하나를 뚝 꺾어 손에 쥐었다. 찢어낸 천을 이용해 나뭇가지의 양 끄트머리에 단단한 매듭을 묶는 데는 수초의 시간도 걸리지 않았다. 그녀의 머리카락을 우아하게 틀어 올리고 있던 기다란 에메랄드 핀이 시위가 당겨진 나뭇가지에 걸렸다.

    “상대가 무예를 익힌 적이 전혀 없는 사람이라면 더더욱 쉽겠죠. 황후 전하처럼요.”

    황녀의 손안에서 순식간에 만들어진 무기를 보며 귀족들이 작게 숨을 들이쉬었다.

    “어머, 저건 활이잖아요.”

    “흥. 저 손바닥만 한 장난감으로 대체 뭘 할 수 있다는…!”

    뾰족한 쇠붙이가 휙 날아가 탐스러운 살굿빛 과실을 정확히 꿰뚫었다. 색이 옅은 과육의 색과는 어울리지 않는 시뻘건 과즙이 마치 피처럼 주르륵, 아래로 떨어졌다.

    “과녁이 미간이었다면 즉사입니다.”

    하이데거가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황녀 저하. 지금 폐하의 앞에서 엄청난 무례를 범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계십니까?”

    “판단은 황제 폐하께서 내리실 거라 생각합니다.”

    무서운 표정으로 대공에게 맞받아치는 혜미를 보며 크리스티앙이 입술을 들어 올렸다.

    “그래. 누님이 몸소 보여 준 덕에 세르노티가 얼마만큼 위험할 수 있는 집단인지는 잘 알았어. 이쯤 되면 그가 왜 실패했는지가 궁금해지는데?”

    혜미가 결연한 표정으로 그에게 대답했다.

    “두려웠기 때문일 겁니다. 야만족인 말라쿤과 생사를 걸고 싸운 기억 때문에 본능적으로 공격이 느려진 겁니다. 물론, 본격적으로 싸우기 전 제 호위 기사인 발터가 상황을 눈치채고 그를 저지한 이유가 가장 크겠지만요.”

    그녀는 이 모든 것이 크리스티앙의 계획대로라고 생각했다. 황제가 내민 손을 그녀가 거절했기 때문에 나온 결과임이 틀림없다. 마력으로 얀의 정신을 조종해 귀족들이 모두 모인 자리에서 사건을 일으키는 것마저도.

    “누이의 말도 일리가 있군. 그런데 이 자리에 마력을 사용할 수 있는 자가 대공 말고 또 있던가?”

    하얗게 변해 버린 대공의 눈썹이 소리 없이 꿈틀거렸다. 무어라 변명하려는 순간, 크리스티앙이 그를 대신해 또렷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하이데거 대공이 긴 수련 끝에 마력을 터득한 것은 사실이지만 황궁 내에서 황명 없이 마력을 사용하는 것은 금지되어 있지. 만에 하나 그가 법을 어기고 임의대로 마력을 사용했다 한들… 그가 나의 아내이자 자신의 막내 누이를 공격할 하등의 이유가 없잖아.”

    잠시 의심하는 표정을 지었던 귀족들이 저마다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혜미는 그다음 말을 이을 수가 없었다. 그녀를 곤경에 빠뜨리기 위해서 크리스티앙이 벌인 일이라는 심증은 충분했지만 그것을 입 밖으로 발설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으니까.

    “의견은 잘 들었어. 오래전에 황궁을 떠난 누님이 마법사의 능력에 관해 어떻게 그리 잘 알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아아.”

    크리스티앙이 말을 잇다 말고 막 생각났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알 만하군.”

    의미심장하게 웃는 그의 눈빛이 강 건너 교황청을 슬쩍 바라보았다. 딱 봐도 베네딕트를 가리키는 표정이었다. 혜미는 거기다 대고 아무런 반박도 할 수가 없었다. 사실을 말하려면 탈주한 꼬마마법사 이야기까지 꺼내야 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녀가 그들을 숨겨 주었다는 사실도.

    “누군가는 이 사태에 대해 책임을 져야겠지?”

    크리스티앙이 손짓하자 누군가가 그의 몸에 바싹 말라 부드러운 로브를 걸쳤다. 그가 산뜻한 얼굴로 머리칼을 슥 훑었다.

    “사람이 죽을 뻔했고, 그 공격자가 뻔히 존재하는 상황에서 아무도 벌을 받지 않는다는 건 이상하잖아.”

    “…폐하.”

    “아직 할 말이 더 남았어?”

    혜미의 눈동자가 공포에 질리는 걸 바라보며 크리스티앙이 그녀에게 한 발짝 다가왔다. 그의 손이 얼굴 옆으로 다가오자 그녀는 흠칫 놀라 그를 밀쳐낼 뻔했다. 가발을 억지로 벗느라 뜯겨나간 밤색 머리카락 몇 가닥이 크리스티앙의 손가락에 부드럽게 감겼다.

    “…누님이 몸소 그 책임이라도 질 셈인가? 그렇다면 말리지 않겠어. 누님의 명예를 위해서라도 말이야.”

    그의 나긋한 목소리를 들으며 혜미가 입술을 꽉 깨물었다.

    “왜 말을 못 하지? 두려워서?”

    크리스티앙이 그녀에게만 들리는 목소리로 작게 속삭였다. 의미심장한 그의 표정에 혜미의 입 안이 바싹바싹 말랐다.

    어떻게 해야 하지? 황제가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설마 누이의 목을 자르지는 않을 거라는 예상. 그럼에도 지금 이 순간 그리하겠다고 고개를 끄덕인다면 뭔가 몹시도 불안한 일이 일어날 것만 같은 예감이 머릿속에서 뒤섞였다. 대답이 쉬이 튀어나오지 않았다.

    “벌은 제가 받겠습니다.”

    혜미가 놀라 고개를 휙 돌렸지만 일은 이미 벌어진 후였다. 무릎 꿇고 바닥을 꽉 짚은 발터의 주먹에 마디뼈가 도드라졌다.

    “발터…!”

    “어떤 이유에서건, 미천한 신분의 저희를 황궁으로 데려오신 황녀 저하께 누를 끼친 것을 책임지겠습니다.”

    끓는 목소리로 낮게 내뱉는 발터의 말을 들으며 혜미는 숨이 턱턱 막히는 것 같았다. 발터는 이 상황에서도 정확하게 선을 긋고 있었다. 그녀가 위험하기라도 할까 봐. 크리스티앙이 그녀에게 또 다른 함정을 파기라도 할까 봐서. 그의 진심이 눈에 보이는 것 같아 가슴이 수만 갈래로 찢겨 나가는 듯 고통스럽다.

    “발터,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날 봐!”

    바닥에 무릎 꿇은 발터가 고개를 들어 소리치는 혜미에게 눈을 마주쳤다. 가면이 벗겨진 맨얼굴이 그녀에게 말하고 있었다.

    “세르노티의 가주로서 맹세한 본분을 지키겠다는 뜻입니다.”

    “흐으….”

    꽉 다문 혜미의 잇새로 울음을 참는 것 같은 작은 신음이 흘렀다. 발터의 말이 뜻하는 바를 알기 때문이다. 세르노티의 본분은 목숨을 다해 주군을 보호하는 것.

    하지만 이건 명령 불복종이었다. 혜미는 당장이라도 발터에게 달려가 멱살을 쥐고 싶었다. 절대로 스스로를 위험에 빠뜨리지 말라고 했는데, 어쩌면 너는 내 앞에서 그리 쉽게 자신을 내던질 수 있냐고 고함치고 싶었다.

    “깔끔하군.”

    크리스티앙이 기다렸다는 듯 또렷한 명령을 내뱉었다.

    “본래 반역죄는 그 자리에서 참수하는 게 국법인데….”

    떨리는 혜미의 시선이 크리스티앙에게 꽂혔다. 그녀의 고개가 가로로 떨리듯 흔들렸다.

    안 돼.

    안 돼, 크리스티앙.

    “폐하, 제발….”

    보랏빛 눈동자에 물기가 맺혀 커다랗게 확장되었다. 혜미의 입술에서 희미한 속삭임이 흘러나왔다. 일그러진 얼굴의 그녀와 눈을 맞추며 크리스티앙이 픽 웃었다.

    “누이의 면을 생각해 태형으로 하지.”

    “하아….”

    혜미가 숨을 몰아쉬며 붉어진 입가를 손으로 가렸다. 그는 그녀의 얼굴에 드리우는 안도, 그리고 여전히 사라지지 않는 걱정과 불안이 몹시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하이데거에게 고개를 돌리는 황제의 얼굴에 숨길 수 없는 살기가 묻어났다.

    “채찍을 잡게, 하이데거 경.”

    웃음기가 싹 사라진 크리스티앙의 눈빛이 그에게 말하고 있었다.

    황녀의 눈앞에서 그를 갈기갈기 찢어 죽여 버리라고.

    ***

    태형은 그 자리에서 이루어졌다. 황제가 축객령을 내리지 않았으므로 파티에 참석한 귀족들은 자리를 뜨지도 못하고 그 상황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크리스티앙은 황후를 공격한 암살자와 그가 속한 가문의 가주에게 각각 태형 30대의 형벌을 내렸다.

    휘릭.

    바람을 가르는 소리와 함께 퍽, 하고 몸을 후려치는 소리가 뒤따랐다. 바라보는 귀족들 사이에서 어쩔 수 없이 숨을 몰아쉬는 소리가 들렸다. 귀부인들 중 몇몇은 부채로 입을 가렸고, 그중에는 아예 곁에 있는 이에게 얼굴을 파묻어 버린 사람도 있었다.

    황후는 파리해진 얼굴로 안정을 취하려 진작 자리를 떴다. 황제는 상석에 앉아 눈앞에서 벌어지는 광경을 무심히 바라보고 있는 중이었다.

    “서른셋.”

    짤막한 말과 함께 하이데거의 손에서 다시 채찍이 날았다. 꿇어앉은 발터의 등을 가죽 채찍이 거칠게 후벼 파며 할퀴었다. 재봉사가 그를 위해 세심하게 제작한 옷은 하이데거의 두 번째 채찍에 이미 네 조각으로 갈라져 바닥으로 떨어진 채였다.

    넝마가 된 옷보다 심각한 것은 발터의 몸이었다. 공기 중에 드러난 그의 등은 피가 터져 살가죽을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엉망진창이었다.

    “폐하…!”

    혜미가 읍소하듯 크게 외쳤다. 참으려고 몇 번이나 이를 꽉 물었지만 부르르 떨리는 발터를 보는 순간 어쩔 수 없이 목소리가 터져 나갔다. 얀은 스무 번을 넘기지 못하고 정신을 잃은 채 들것에 실려 나갔다. 발터가 그의 몫까지 대신 맞겠다고 나서지 않았다면 그는 충격으로 사망했을 게 분명했다.

    사실 그때까지 버틴 것도 얀이기에 가능했던 일이었다. 보통 사람이었다면 이미 쇼크로 목숨을 잃었을 상황이다. 눈에 핏발이 선 채로 간신히 내뱉는 발터의 호흡이 불규칙하게 거칠었다. 둥그렇게 뜨인 혜미의 눈동자에 물기가 들어찼다. 사람이 맞아서 죽을 수도 있다는 사실이 뼈에 사무치도록 생생했다.

    “그는 벌을 충분히 받았습니다…!”

    “그래? 발터 자네 역시 그렇게 생각하는가?”

    크리스티앙이 그를 보며 붉은 입술을 비틀었다.

    악귀가 붙은 짐승 같군. 비명 소리조차 내지 않고 헝클어진 머리카락 새로 자신을 뚫어져라 바라보는 발터를 보며 그가 한 생각이었다. 피가 주르륵 흘러내리는 입술 새로 발터의 거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제 불충을 이렇게라도 속죄할 수 있어….”

    그가 말을 하는 와중 다시 채찍이 날아들었다. 발터의 손이 반사적으로 채찍을 움켜쥐었다. 상대가 끌려갈 정도로 엄청난 힘. 하이데거가 당황해 움찔한 것은 자동반응이었다. 피투성이가 된 발터가 채찍을 천천히 놓으며 말을 끝냈다.

    “…감사할 따름입니다.”

    “폐하…. 부디 선처하여 주십시오. 부탁드립니다.”

    크리스티앙이 끝까지 그의 편을 드는 혜미를 보며 잘 빠진 눈썹을 들어 올렸다. 베네딕트를 위해 그녀가 무릎을 꿇었을 때를 떠올렸다. 그때는 넘어가 주었지만 지금은 그럴 수가 없다. 붉은 입술에서 작은 노랫소리 같은 명령이 떨어졌다.

    “계속하게. 대공.”

    휘릭.

    하이데거의 채찍이 기다렸다는 듯 공중을 다시 날았다. 공중을 가르는 소리에 힘이 더욱 세게 붙었다. 찢겨 힘줄과 뼈까지 드러난 상처에서 살점과 피가 튀었다. 살아 있는 짐승을 도살하는 것과 같은 끔찍한 장면. 귀족들이 한 발짝 물러나며 인상을 찌푸렸지만 그를 말릴 수 있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서른여섯.”

    발터의 허리를 후려치는 채찍 탓에 그의 상체가 훅, 앞으로 꺾였다. 쿨럭, 하는 소리와 함께 핏덩이가 목에서 튀어나왔다. 장기가 압박당한 게 틀림없었다. 혜미의 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서른일곱.”

    젖은 보랏빛 눈동자에 시커먼 어둠이 내리깔렸다. 이 자리에서 크리스티앙의 목을 졸라 죽이고 싶었다. 발터의 몸을 찢어 놓은 하이데거의 몸을 똑같이 만들어 주고 싶은 충동에 흰자위가 시뻘겋게 충혈되어 실핏줄이 터졌다.

    “서른여덟.”

    이대로 죽여 버릴까. 이대로 다 죽이고, 이 세상 따위 등지고 발터를 끌어안은 채 누군가의 칼에 몸이 잘리는 것도 나쁜 죽음은 아니지 않을까.

    “서른아홉.”

    다시 채찍이 날았다. 눈물로 어룽진 시야에 이를 꽉 무는 발터의 모습이 보였다. 한계를 훨씬 넘어선 고통을 간신히 견뎌 내는 그의 주먹이 부르르 떨렸다. 위험하다. 이대로는 그가 위험해. 공중으로 휙 치켜드는 하이데거의 손에서 검은 살기가 응집되는 걸 본 순간, 혜미는 자리를 박차고 뛰었다.

    “마흔…!”

    “흐윽…!”

    크리스티앙이 의자에서 벌떡 일어났다. 금색 눈동자에 불길이 튀었다. 황제의 낯빛이 무섭도록 시퍼렇게 변했다.

    “어머, 세상에…!”

    발터의 등을 껴안고 하이데거의 일격을 그대로 맞은 혜미가 숨을 격렬하게 몰아쉬었다. 피부를 칼로 찢어 내고 그 안을 불로 지지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파멸 대신 희망을 선택한 결과는 죽을 만큼 고통스러웠지만 후회는 없었다.

    “발터….”

    “이, 이든….”

    황망히 떨리는 발터의 갈색 눈동자가 가늘어져 부드럽게 휘는 모습을 다시 한번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가 시원스레 소리 내어 웃는 모습이 그녀의 흐릿한 기억 어딘가에 정확하게 꽂혀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의 품에 안겨 행복해하는 자신의 모습까지도.

    “발터, 넌 내 것이지?”

    “갑자기 무슨 소리야.”

    “너 말이야. 혹시 가주가 되었다고 예쁜 아가씨랑 손잡고 날 배신하면 진짜 죽여 버린다.”

    “…네가 멍청한 소릴 할 때마다 정말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모르겠다.”

    “아아, 깨물지 마, 간지러워! 하하하! 그만! 그만 항복!!”

    발터가 떨리는 손으로 그녀를 간신히 붙들었다. 하얀 드레스는 그녀 본인이 흘린 피, 그리고 발터의 등에서 옮겨진 피로 엉망진창이었다.

    “괘, 괜찮아. 난 괜찮아….”

    엄청난 고통에 말이 잘 나오지 않았지만 뭐라도 말해야 했다. 혜미는 그를 안심시키려 안간힘을 쓰며 웃었다.

    “별로… 안 아파…. 알잖아, 나 맷집, 흐으… 좋은 거.”

    “으아아아아아!”

    발터가 포효하듯 커다란 소리로 울부짖었다. 끔찍한 고문을 참아 내면서도 신음 소리조차 내지 않은 그의 모든 비명이 함축된 것 같은 내지름이 어두운 황성의 하늘을 갈랐다.

    그가 황녀를 번쩍 안아 들었다. 걷는 자리에 벌어진 살점에서 흐르는 피가 뚝뚝 흘러내렸다. 경비병들은 그의 기세에 눌려 감히 앞길을 막아서지도 못하고 있었다.

    “…폐하….”

    하이데거가 당황한 얼굴로 크리스티앙을 바라보았다. 처음이었다. 크리스티앙의 눈동자가 이토록 생소한 빛을 띤 것은.

    황녀를 안고 멀어지는 발터의 뒷모습을 응시하는 크리스티앙의 하얀 손이 주먹을 천천히 쥐었다가 풀어지기를 반복했다. 무언가를 눌러 삼키듯 소리 없이 달싹이던 붉은 입술에서 건조한 명령이 떨어졌다.

    “형벌은 끝났다. 파티는 이것으로 종료하지.”

    “…예.”

    하이데거가 무거운 고개를 아래로 숙였다. 황녀가 달려오는 것을 보고도 손을 멈추지 않은 것은 반쯤은 진심이었다. 불안한 마음을 가라앉히기 위한 의식 같은 행위였지만, 처음 대하는 크리스티앙의 낯선 얼굴에 몸이 떨리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대공.”

    “명하십시오.”

    “황녀와 형벌을 받은 그의 기사들에게 의사를 보내고 파티에 참석해 준 귀빈들에게 답례품을 챙겨 황성을 안전히 떠나는 것을 책임지고 배웅하라. 경비대에게는 특별히 신경을 쓰라 말하게.”

    “그리하겠습니다.”

    크리스티앙이 하이데거를 보며 마지막 말을 덧붙였다.

    “그리고 모든 일이 끝난 후, 내게 와서 보고하도록.”

    “…폐하. 송구하오나 알현하는 시간이 늦어질까 염려가….”

    “몇 시가 되어도 상관없어.”

    크리스티앙이 그의 말을 자르며 조금 웃었다. 붉은 입술의 끄트머리가 가늘게 떨렸다.

    “파티부터 사건 처리까지 고생이 많지 않았나. 자네의 노고를 치하하며 좋은 술을 함께하고 싶어 그러니 거절은 말게.”

    휙, 몸을 돌려 사라지는 황제의 뒤로 적막함이 내려앉았다. 핏자국이 떨어지는 바닥을 걷는 황제의 걸음걸이가 평소와는 달리 흐트러져 있다는 사실을 알아채는 사람은 하이데거뿐이었다.

    벽난로의 열기가 무색하게도 황제가 있는 집무실의 공기는 훈훈함과 거리가 멀었다. 경비병에게 붙들려 오다시피 한 의사는 무표정하게 앉아 자신을 응시하는 황제를 차마 똑바로 바라볼 수가 없었다.

    “내 누이의 상태가 어떠한가.”

    나직하지만 또렷한 황제의 한마디에서 그의 기분을 짐작해 내기는 힘들었다. 의사가 고개를 아래로 조아렸다.

    “그, 그것이….”

    “일절 가감 없이 고해 주겠나?”

    긴장한 탓에 황궁 주치의의 손이 가늘게 떨렸다. 그는 양손을 꽉 붙들고 마른 입술을 억지로 뗐다.

    “황녀 저하의 상처를 치료하는데 보통의 환자와는 다른 특이한 증상이 보였습니다.”

    “자세히 설명하게. 짐이 알아들을 수 있도록 모조리.”

    늘 자리를 지키던 시종장조차 물러난 집무실에서 황제의 목소리는 더욱 선명하게 들렸다. 의사가 한층 목소리를 낮춘 채 말을 이었다.

    “기사들의 상처는 피부가 심각하게 찢어진 열상으로 보통의 태형 환자들과 다를 것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황녀 저하께서는….”

    의사의 설명이 다 끝날 때까지 크리스티앙은 아무런 말이 없었다. 깍지를 껴서 턱에 댄 손가락이 천천히 까딱, 까딱, 움직였을 뿐이다.

    “이상입니다. 폐하.”

    “…황족의 건강에 대한 사실을 주위에 함부로 발설해서는 안 된다는 것은 잘 알고 있을 거라 믿네.”

    찰나의 침묵 끝에 황제가 입을 뗐다. 주치의는 떨리는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무, 물론입니다, 폐하. 황녀 저하가 계신 곳에는 저와 하이데거 대공 외에 그 어떤 의사도 출입할 수 없도록 조치해 둔 상태입니다.”

    “아니. 치료는 자네가 전담하게 될 거야.”

    “예? 하지만 황녀 저하의 상처는….”

    크리스티앙이 놀란 얼굴의 주치의를 보며 등받이에 등을 기댔다.

    “대공은 아직 교황 자리에 오르지 않았으니 황족을 치료할 명분이 없거든.”

    우아한 백조의 모습을 한 유리병에서 조르륵, 소리와 함께 붉은 술이 잔으로 떨어졌다. 핏빛 포도주가 촛불을 받아 밝은 보랏빛으로 변했다. 크리스티앙이 목이 긴 술잔을 손안에서 천천히 돌렸다.

    “자네는 황금성 최고의 의술을 가진 의사이지. 자네의 연구를 위해 희생된 인력과 재물이 어느 정도인지는 스스로 잘 알고 있을 거라 생각하네.”

    “송구합니다, 폐하.”

    “허심탄회하게 말하겠네, 펠리페 경. 나는 실체가 없는 마력 따위보다 인간의 기술을 더욱 신뢰해.”

    크리스티앙이 포도주를 한 모금 삼킨 후 빙긋 웃었다. 주치의는 떨리는 눈으로 그에게 시선을 마주했다. 마력보다 의술을 신뢰한다. 그 누구도 아닌 황제의 입에서 나온 소리였기에 믿을 수 있는 말이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암투가 늘 벌어지는 황궁. 크리스티앙이 황태자였을 시절부터 이미 수차례의 독살 시도가 일어났다. 하지만 그는 열이 펄펄 끓을지언정 단 한 번도 교황청을 호출한 적이 없었다. 그 탓에 주치의를 포함한 황실의 의사들은 밤낮을 가리지 않고 황금성에 틀어박혀 연구를 계속해야 했다.

    선대 황제들이 대마법사에게 모든 치료를 일임했던 편한 시절은 상상도 할 수 없이 바쁜 나날이었다. 덕분에 해독 연구만큼은 수준급이 되었다는 사실은 웃지 못할 결과였다.

    “짐의 누이를 잘 부탁하네.”

    “물론입니다, 폐하. 황녀 저하를 회복시키는 데 최선을 다할 것입니다.”

    “최선이라.”

    황제가 술잔을 응시하며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황족을 치료하는 데 어울리는 말은 그런 게 아니지. 최선, 혹은 차선. 그따위 말은 결과가 어떻게 나오든 자네는 소명을 다하였으니 책임을 지지 않겠다는 건방진 소리로 들리는데. 내 말이 틀린가?”

    “…폐, 폐하.”

    “아니면 감히 황족의 몸에 손을 대면서 목숨을 걸 각오를 하지 않았다는 뜻인가.”

    “소, 송구합니다!”

    순식간에 서슬 퍼런 칼날같이 변한 황제의 시선에 의사가 저절로 무릎을 꿇었다.

    “더 들을 말은 없는 것 같군.”

    크리스티앙이 탁상에 있는 종을 가볍게 울리자 경비병이 들이닥쳤다. 그의 눈짓을 받은 경비병들이 바닥에 엎드려 있는 의사의 양팔을 붙잡고 억지로 일으켰다. 황제가 술잔을 기울이며 입을 열었다.

    “잘 가시게나.”

    의미심장한 말이었다. 이 방을 나서자마자 제게 일어날 위험을 직감한 의사의 눈에 공포감이 밀려들었다.

    “황녀 저하께서는 곧 일어나실 것입니다. 반드시 말끔히 회복하실 것입니다! 무슨 수를 써서건 제가 그리 만들 것입니다, 폐하!”

    크리스티앙이 천천히 일어나 그에게 다가갔다.

    “지금 자신이 한 말에 책임질 수 있나?”

    마력보다 인간의 능력을 더욱 신뢰한다는 크리스티앙의 말은 진심이었다. 그는 공포가 때로 엄청난 힘을 발휘한다는 사실을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천둥소리에도 놀라 잠을 쉬이 이룰 수 없었던 심약한 어린아이. 허수아비 황태자에 불과했던 그가 지금 이 자리까지 올라올 수 있었던 것도, 어릴 때부터 끊임없이 그의 목을 졸라 오던 공포감 때문이었으니까.

    “…예! 폐하!!!”

    의사는 감히 황제의 눈을 피하지도 못하고 바들바들 떨었다. 황제의 손이 천천히 다가와 그의 어깨를 부드럽게 짚었다.

    “고맙네.”

    “폐, 폐하를 실망시키지 않겠습니다.”

    “앓고 있는 짐의 누이에게 가서 그 곁을 지켜 주겠어?”

    “예, 예! 물론입니다!”

    의사가 기다렸다는 듯 물러간 자리에 침묵이 내리깔렸다.

    타닥. 벽난로 안에서 통나무 장작이 불씨를 뿜었다. 화기를 담고 시뻘겋게 달아올랐다가 마침내 천천히 시커먼 숯으로 변하는 장작을 보며 크리스티앙이 술잔을 비웠다.

    시각은 새벽 네 시. 겨울이라 밤이 길어져 동이 트려면 아직도 한참은 더 기다려야 했다. 그는 자리로 돌아와 의자에 몸을 묻었다. 며칠째 잠을 이루지 못한 탓에 머리 한쪽이 물에 푹 젖어 든 솜처럼 묵직했다.

    크리스티앙은 팔걸이에 팔꿈치를 댄 채 손으로 관자놀이를 지그시 문질렀다. 붉은 달빛이 비쳐 드는 책상 한 귀퉁이에 얌전히 놓인 자신의 장갑이 보였다. 흠뻑 젖은 옷가지들은 시녀가 모두 처리한 후였지만 장갑은 그대로 두라고 명령한 까닭이었다.

    그는 하얗고 매끄러운 장갑 끄트머리에 옅게 묻어 있는 붉은 안료 자국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마침내 몸을 일으켰다.

    집무실 가운데 있는 둥그런 테이블. 손으로 자그마한 나무 장식을 돌리자 아래쪽에 감춰진 비밀 서랍이 열렸다. 클라웨의 지도 한 장만이 들어 있는 서랍 안에 얼룩이 묻은 장갑 한 켤레가 조심스레 놓였다.

    “폐하, 하이데거 대공이 알현을 청하였습니다.”

    활활 타는 벽난로를 뒤로한 크리스티앙의 눈빛이 가늘어졌다. 그는 탁, 소리 나게 서랍을 닫은 후 낮게 내뱉었다.

    “들어오시게.”

    문이 열리고 하이데거가 긴장한 얼굴로 모습을 드러냈다. 파티의 준비부터 뒷정리까지 모두 손수 지휘한 탓인지 눈동자가 시뻘겋게 충혈되어 있었다.

    “폐하.”

    크리스티앙이 태연한 표정으로 그를 맞았다.

    “파티의 정리는 다 끝났나?”

    “그러합니다.”

    “일단 술 한잔하지. 급하게 파티를 준비하느라 며칠간 고생이 많았을 텐데.”

    잠시 망설이던 하이데거가 뚜벅뚜벅 다가가 그의 맞은편 테이블에 앉았다. 크리스티앙이 그의 몫으로 준비된 술잔에 술을 직접 따르자 하이데거가 주저함 없이 단번에 들이켰다.

    “귀족들은 모두 무사히 돌아갔나?”

    “예. 호위병을 붙여 자택으로 돌아간 것을 확인하고 마지막 보고를 받은 후 돌아온 참입니다.”

    “체셔 백작 부인은?”

    “사건이 일어날 때 황후 전하에게 가장 근접해 있던 이였으므로 차후에 후속 심문을 할 생각입니다. 얀이라는 자와 무슨 대화를 나누었는지도 알아내겠습니다.”

    “그렇군.”

    “…혹 당장 심문하길 원하십니까?”

    “아니. 오늘 밤은 푹 잘 수 있도록 그냥 두게.”

    크리스티앙이 술잔을 입술로 가져갔다.

    “날이 밝으면 성으로 데려와 심문한 후, 적당히 처리하도록.”

    단조로운 목소리였다. 하이데거가 숨을 조금 들이쉬며 고개를 숙였다.

    “…그리하겠습니다.”

    “대공과 함께하니 술맛이 역시 좋군.”

    몇 번이나 살을 섞었던 이를 처형하라 말하는 크리스티앙의 목소리에는 그 어떤 망설임도 느껴지지 않았다.

    하이데거는 오히려 안심했다. 그가 아는 황제는 문제의 불씨를 미리 제거하는 이였기 때문이다. 사사로운 감정에 흔들리는 이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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