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4화 (54/72)
  • “이 세상에 내가 즐겁게 해야 할 사람은 아무도 없으니까.”

    그 반대라면 모를까. 크리스티앙이 빙긋 웃으며 중얼거렸다. 혜미는 그를 보며 고개를 천천히 저었다.

    “…그런 말을 해서 스스로가 즐거움을 느낀다면 그건 정상 아니야.”

    “내가 정상이었다면 이 자리까지 스스로 올라올 수 있었을 거라 생각해?”

    혜미는 올라간 입꼬리와는 달리 전혀 웃고 있지 않은 크리스티앙의 눈동자를 잠시 바라보았다. 그의 한마디가 그녀의 마음속 깊은 곳 어딘가를 쿡, 찌른 탓이었다.

    “꼭 칼을 들고 싸우지 않아도 이곳이 전쟁터란 사실을 모를 정도로 누님이 머리가 나쁘진 않기를 바라.”

    연민이 들려는 찰나 크리스티앙이 다시 그녀의 예민한 부분을 쿡 찌르며 자극했다. 혜미는 그가 더 이상 자신에 대한 불만을 감추고 숨길 의향이 없다는 사실을 확실히 깨달았다. 첫 만남부터 확실하게 틀어졌으니 연극을 지속하는 것도 웃긴 이야기였다. 지금처럼 둘만 대화할 때는 더더욱.

    “황제라는 걸 몰랐을 때 널 좀 세게 때렸어야 하는 건데.”

    “뭐?”

    크리스티앙이 뾰족한 송곳니를 드러냈다. 기분이 정말 나쁜 것 같은 모습에 왠지 모르게 통쾌함이 느껴졌다.

    “나도 농담이었어.”

    “어색한 궁중어로 존대하는 말투보다는 낫지만 적당히 해 둬.”

    혀가 잘리고 싶지 않으면. 천사 같은 미소와 함께 뒤이어지는 말은 입술만 움직이는 것처럼 보였다. 혜미가 그를 노려보자 크리스티앙이 그녀의 손을 잡고 자연스레 구름다리 위로 인도했다.

    “어딜 가는 거야?”

    “건너편 사람들에게도 황제와 황녀의 역사적인 만남을 보여 줘야지.”

    다리 입구에 있는 아름다운 조각상들이 별빛을 받아 희게 빛났다. 플라틴 제3 성과 제4 성을 연결하는 다리 위를 건너며 크리스티앙이 작게 내뱉었다.

    “그런데 누님. 계속 그렇게 인상을 찌푸리고 있으면, 나와의 반목설에 불을 붙이는 꼴이 될걸? 그럼 여러모로 좋지가 않아.”

    “…….”

    “지금처럼 혼란스러운 상황에선 내 눈에 들겠답시고 누님에게 암살자를 보내는 이가 있을 수도 있다는 소리야. 내가 그걸 바랄지도 모른다고 ‘착각’하고 말이야.”

    혜미가 다리 한가운데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빙긋 웃는 크리스티앙의 가슴에 살포시 손을 올려놓으며 혜미가 낮게 입을 뗐다.

    “크리스티앙.”

    “음?”

    쿵. 쿵. 손끝으로 전달되는 그의 심장 속도가 그녀 못지않게 거칠었다. 그녀를 일부러 도발하고 있는 그 역시 여유롭지만은 않다는 뜻이다.

    황녀와 황제의 만남. 구름다리를 중앙에 둔 양 건물의 꼭대기에서는 아메티스의 귀족들이 전부 모여 그들을 지켜보고 있었다. 잔뜩 쏠린 사람들의 이목 때문에 마음대로 움직일 수 없는 것은 그녀뿐이 아니었다.

    “난 웬만한 자객과 붙어서는 지지 않아.”

    크리스티앙 역시 보이지 않는 시선의 끈으로 손발이 묶여 있다는 사실을 깨닫자 말이 더욱 쉽게 나왔다. 혜미는 그에게 한 발자국 더 가까이 다가섰다.

    “네가 황궁에서 보이지 않는 전쟁을 치를 동안 난 칼을 들고 직접 싸웠거든. 장갑 안에 숨겨진 손바닥에 굳은살이 배길 정도로 적의 목을 베었어. 암살 시도를 겪은 적은 이미 여러 번이라 이골이 날 정도고.”

    “저런. 설마 내가 사과해야 할 타이밍인가?”

    크리스티앙이 미간을 모은 채 작게 웃으며 혀를 찼다. 그의 뒤에서 붉은 달이 빛났다.

    “…그 답은 네가 알고 있겠지.”

    “멍청한 아랫것들이 멋대로 벌인 일일 뿐이야. 난 누님이 살아 있다는 것조차 몰랐으니까.”

    부정.

    혜미의 눈썹이 조금 꿈틀거렸다. 그녀는 자신을 자극하는 크리스티앙을 보며 그가 속을 다 드러내기로 결정했다고 생각했다. 오히려 이야기가 더 쉬워질 수도 있겠다는 기대가 있었는데, 마지막에 와서 발을 빼는 그의 심리가 이해 가지 않았다.

    “참. 내가 보낸 선물은 맘에 들었어?”

    혜미의 얼굴이 조금 굳었다. 며칠 전 베네딕트와의 만남 이후 후원을 나설 때였다. 문 앞에 무언가 놓인 것을 보고 걸음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도대체 누가 이런 짓을….”

    “황가의 문양이 조각된 상자를 마음대로 쓸 수 있는 이는 이 제국에 한 명뿐입니다.”

    장미가 섬세하게 세공된 금색 상자 안에 들어 있던 것은 인간의 목이었다. 얼굴 역시 낯설지가 않았다. 베네딕트와 그녀의 방 안에서 늘 지키고 서 있던 경비병은 눈도 감지 못한 채였다.

    “…일이 꽤나 재밌게 돌아가는군요.”

    크리스티앙이 보낸 끔찍한 선물을 보며 베네딕트가 작게 중얼거렸지만 혜미는 그의 말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다만 소름이 끼치는 것을 불사하고 죽은 경비병의 목을 후원에 묻어 준 후 돌아왔을 뿐이었다.

    “황궁의 법도를 하나 더 알려 주자면, 선물을 받은 이후엔 답례로 선물을 보내는 게 예의야. 가진 게 쥐뿔도 없다면 친필 서신이라도 보내는 게 예절이지. 앞으로 잘 알아둬.”

    “…도대체 왜 그런 짓을 한 거야?”

    혜미가 그를 보며 인상을 찌푸리자 크리스티앙이 또렷한 말투로 속삭였다.

    “황족에게 죄수의 음식을 처먹인 건 큰 죄니까.”

    “그렇다고 해서 목을 자를 필요까지는 없잖아.”

    “내 얼굴에 침을 뱉는 이를 내가 살려 둘 필요가 있나?”

    조소하는 크리스티앙의 얼굴은 싸늘했고 대답하는 말투는 태연했다.

    “그를 대체할 경비병은 이 성에 차고도 넘치는데.”

    그에게는 사람 목숨이 파리 목숨과 별반 다를 게 없다는 확신이 강하게 들었다.

    “누님도 그간 그자에게 볼꼴 못 볼 꼴을 다 보이며 모욕당했다는 기분이 들었을 거 아냐. 기분이 좋으면 좋다고 솔직하게 말해도 돼.”

    “…….”

    “내가 손에 넣은 권력의 달콤함을 더 많이 느끼고 싶지 않아?”

    “…….”

    “내가 그렇게 만들어 줄 수 있어.”

    “지금 나한테 무슨 소리를 하고 싶은 거야?”

    시선이 공중에서 부딪혔다. 찰나의 침묵 끝에 크리스티앙이 입을 열었다.

    “나의 기사가 되어 달라는 말.”

    혜미는 무거운 눈꺼풀을 감았다가 떴다. 우묵하게 들어간 눈매 안에서 크리스티앙의 아름다운 황금빛 눈동자가 그녀를 똑바로 직시하고 있었다.

    “내 것이 되어 달라는 제안.”

    마음의 동요가 없다고 하면 거짓이었다.

    “받아들인다면 섭섭하지 않을 정도로 신경을 써 줄 생각이야. 누님이 데리고 있는 기사들 중 그 누구도 다치지 않을 거라는 걸 약속하지. 황제의 이름을 걸고. 세르노티와 곡창의 대부분을 담당하고 있는 남쪽의 광활한 영지를 모두 주겠어. 이만하면 나쁘지 않은 거래라는 걸 알아주길 바라.”

    나쁘지 않은 정도가 아니었다. 단 크리스티앙의 말이 모두 사실이라면.

    “…거절할게.”

    혜미가 입을 떼자 그가 되물었다.

    “후회하지 않을 자신 있어?”

    크리스티앙의 흰 치아가 입술 새로 드러났다. 그는 기분이 나쁘지가 않았다. 아니. 솔직히 말하면 정반대였다. 여기서 그녀가 알았다고 고개를 끄덕였다면 실망스러웠을 것이다. 게임이 너무 쉬우니까.

    그는 그녀를 향해 확인하듯 말을 되풀이했다.

    “이 정도의 기회는 거저 주어지는 게 아니야. 내가 누님에게 의사를 묻는 것은 처음이자 마지막일 테고.”

    흥분을 닮은 긴장감에 목소리가 억눌렸다.

    “다시 묻는다고 해도 거절이야. 난, 네게 기사의 맹세를 할 수가 없어.”

    “왜지?”

    “나는… 너를 모르니까.”

    ‘널 믿을 수가 없으니까.’

    진심을 말하는 대신 혜미는 그렇게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자신을 ‘누님’이라 부르며 조건을 내미는 크리스티앙을 신뢰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군주로 받아들이는 것은 더욱 큰 문제였다.

    “가끔은 인생에서 감을 믿고 결정을 내려야 할 때가 있다는 거, 알아?”

    크리스티앙이 그녀를 보며 웃었다. 그의 표정에는 기분 나쁜 기색이 없었다. 오히려 그녀가 이렇게 나올 줄 알고 있었다는 태도였다.

    “지금 이 결정을 후회할 순간이 올 거야. 그때 가서 내게 매달리며 우는 일은 없길 바라. 나는 분명 누님에게 기회를 주었다는 사실을 똑똑히 기억해 두기를.”

    “내 선택이었으니까, 어떤 결과가 나더라도 책임은 내가 져.”

    혜미의 목소리가 조금 떨렸다. 용기 있게 말을 내뱉었어도 격하게 뛰는 심장 박동까지 제어할 수는 없었다. 내가 정말 잘한 걸까. 현명한 선택을 한 걸까.

    “그래. 뜻은 잘 알았어.”

    크리스티앙의 눈매에 사악한 빛이 반짝였다.

    “내가 고심한 제안이 거절당했으니 다음번엔 어떤 선물을 보내야 할지 고민되는데?”

    “…선물은 이제 필요 없어.”

    혜미가 질린다는 표정으로 작게 말했다. 묵직하고 화려한 상자 안에 들어있던 것을 생각하면 지금도 소름이 끼쳤다.

    “필요가 있는지 없는지는 내가 결정해. 단지 내가 망설이고 있는 이유는 하나뿐이야.”

    “무슨 뜻이야?”

    크리스티앙이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오만한 황금빛 시선 끝에는 발터가 우뚝 서 있었다. 리비에르는 긴장감이 넘치는 표정으로 그의 곁에서 팔을 꽉 잡고 있는 중이었다. 마치 금방이라도 뛰어나갈 것 같은 그를 온 힘으로 진정시키기라도 하듯이.

    “누님이 더 즐거워할 쪽이 어느 쪽인지, 아직 감이 안 서서 말이야. 밤낮으로 황녀를 즐겁게 하는 호위 기사 쪽인지….”

    화려한 마스크 뒤에서 기다란 속눈썹이 빠르게 깜빡였다.

    “아니면 팔다리가 잘려 죽을 날을 기다리고 있는 정부 쪽인지.”

    “크리스티앙.”

    혜미가 그의 이름을 다급히 불렀다.

    “음?”

    “그런 쓸데없는 짓은 그만둬. 내가… 맘에 들지 않는다고 해서 다른 사람까지 괜히 피해를 줄 이유는 없잖아? 네가 시간이 남아도는 사람도 아니고.”

    크리스티앙이 서둘러 말을 잇는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짤막하게 물었다.

    “겁나?”

    “뭐?”

    “내가 당장이라도 그들의 목을 자르기라도 할까 봐, 겁이 나서 견딜 수가 없어? 지금 딱 그런 표정인데.”

    입술을 비트는 크리스티앙을 보며 혜미는 애써 태연하게 입을 열었다.

    “가면을 썼는데도 표정이 보인다니. 클라웨의 황제에게는 투시력이라도 있나 보네.”

    “눈빛은 거짓말을 못 하거든. 두려움이나 공포와 같은 극단적인 감정은 특히나 숨기기가 힘들지.”

    두근. 혜미의 보랏빛 동공에 크리스티앙이 가득 찼다. 이렇게 말하면 그의 눈을 피할 수가 없어진다. 그녀의 약점을 틀어쥔 이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걱정 마. 오늘은 다른 선물을 가져왔으니.”

    크리스티앙이 걸치고 있는 외투 안에서 무언가를 꺼내 들었다. 공간을 채우고 있는 부드러운 음악 소리 가운데에서도 모든 이들이 숨을 몰아쉬는 소리가 또렷하게 들렸다.

    “어머. 너무 아름다워요.”

    “폐하께서 동쪽의 광산을 가진 베르니 백작에게 특별히 부탁하셨다는 게 바로 저것이었군요.”

    “백작은 그 대가로 동부 해안에 있는 황실용 별장 한 채를 받았다고 하던걸요. 과연 역작이네요.”

    그녀의 눈동자 색을 닮은 보랏빛 자수정. 눈물 모양처럼 생긴 커다란 보석의 테두리에는 섬세하게 세공된 자그마한 다이아몬드가 빽빽이 매달려 있었다. 한눈에 봐도 장인의 솜씨가 깃든 화려한 작품이었다.

    “폐하께서는 누이를 정말, 아끼시나 봐요.”

    “이러니저러니 해도, 가족을 다 잃은 후 그간 황궁에서 홀로 얼마나 외로우셨겠어요.”

    그 자리에서 우뚝 선 채 인상을 찌푸린 혜미에게로 크리스티앙이 마치 포옹하듯 양손을 뻗었다. 환하게 드러난 그녀의 목에 달칵, 소리를 내며 목걸이가 걸렸다.

    “집으로 돌아온 걸 축하해.”

    크리스티앙이 가면을 벗어 다리 아래로 떨어뜨린 후, 붉은 입술을 깨물며 웃었다. 숨 막히게 아름다운 황제가 얼굴을 드러낸 것이 신호였다.

    팡!

    정원을 밝히고 있던 불이 모조리 꺼지고 별빛만 가득한 밤하늘에 형형색색의 불꽃이 아름답게 내리깔렸다. 파티의 하이라이트. 귀족들이 탄사를 내지르며 황제가 새로운 마법사를 통해 보여 주는 아름다운 세계를 보았다.

    구름다리의 양쪽 입구에 있는 높다란 분수에서 물이 거꾸로 떨어지며 무지갯빛을 내는 투명한 장벽을 만들었다. 앞뒤가 차단된 공간. 공중에 붕 떠 있는 구름다리 위에서 크리스티앙의 입술이 그녀를 집어삼킨 것은 그때였다.

    “……!”

    미친. 혜미는 놀라서 뒷걸음질 치다 이곳이 5층 높이의 다리 위라는 것을 깨닫고 간신히 움직임을 멈추었다. 피할 수도, 도망칠 수도 없는 장소에서 크리스티앙은 그녀에게 키스한 것이다. 차라리 그가 칼을 들고 공격해 왔더라면 이처럼 당황하지 않았을지도 몰랐다.

    크리스티앙이 그녀를 꽉 안고 고개를 기울여 각도를 깊이 했다. 뜨끈한 혀가 입술을 진득하게 핥아 올리자 머리카락이 쭈뼛하며 팔에 소름이 돋았다. 가늘어진 금색 동공에 놀란 그녀의 모습이 박혔다.

    “흐으…!”

    입술을 꽉 닫은 채 고개를 돌리려는 행동에 크리스티앙의 손이 그녀를 저지했다. 벨벳 장갑을 낀 기다란 손가락이 위로 틀어 올린 그녀의 머리카락 새를 우아하게 비집더니 이내 거칠게 움켜쥐었다.

    “흡!”

    “선물에 대한 답례는 받아야지.”

    “너 정말 미쳤어?”

    “그 답은 아까 이미 한 것 같군.”

    크리스티앙이 자신의 타액으로 젖은 그녀의 붉은 아랫입술을 장갑 낀 엄지로 툭, 툭, 배려 없이 건드렸다. 혜미가 인상을 쓰며 이로 자신의 입술을 꽉 깨물자 크리스티앙이 작게 혀를 찼다.

    “뭐 하는 거야? 상처가 나잖아.”

    부드러운 목소리와는 달리 그녀의 아래턱을 잡아 내리는 손길은 우악스럽기 짝이 없었다.

    “무슨 상관이야?”

    “당연히 상관있지.”

    가늘어진 황금빛 눈동자가 그녀를 직시했다.

    “이제부터 내가 본격적으로 물고 빨 예정이거든. 이 안에 내 혀도 넣고, 좆도 넣을 거야. 그런데 더러운 피가 묻으면 되겠어?”

    혜미가 입을 딱 벌린 채 숨을 멈추었다. 당황시키려는 수법이라면 성공이었다. 혜미가 일그러진 눈으로 그를 바라보며 간신히 내뱉었다.

    “너, 너… 내가 누구인지 몰라서 이래?”

    혜미는 자신의 입으로 이런 말을 하게 될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그녀가 공식적으로 그와 남매라는 사실을 방패로 사용하는 일이 벌어질 줄이야. 크리스티앙이 인상을 찌푸린 채 어이가 없다는 듯 하하 웃는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네가 누군데?”

    여전히 웃음기가 묻어 있는 얼굴. 그러나 온도가 뚝 떨어진 목소리로 그가 중얼거리듯 물었다.

    “네가, 누구냐고.”

    그녀의 아랫입술을 꾸욱 눌러 문지르는 엄지에 힘이 붙었다. 벌어진 입가로 타액이 흐르기 직전이었다. 혜미는 커진 눈동자로 그를 보며 말없이 숨을 몰아쉬었다.

    그녀는 자신이 누구냐고 묻는 크리스티앙의 질문에 어떤 대답을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간단한 그 한마디에 허를 찔린 느낌이었다. 어이없게도.

    “네가… 대체 뭔데, 씨발.”

    크리스티앙이 한숨을 쉬듯 욕설을 내뱉으며 길게 빠진 눈썹을 가운데로 모았다. 여유를 가장하고 있던 미소가 씻은 듯 완벽히 사라진 자리에 혼란과 분노, 간신히 억누르고 있던 충동과 위험한 욕망이 들어찼다. 그녀가 처음 보는 황제의 민낯이었다.

    쿵, 쿵, 심장이 거칠게 뛰었다. 혜미가 혼란함을 감추고 표정을 재정비한 채 가까스로 입을 열었다.

    “너, 지금 여기가 어딘지 잊은 건 아니지?”

    사람들의 시선이 아무리 다른 곳에 팔려있다고 한들, 물줄기에 가려져 안이 잘 보이지 않는다고 한들, 공개적인 장소에서 누이에게 이런 식의 키스를 하는 건 정신 나간 짓이었다.

    “확실히 알고 있지. 우리의 만남을 주목하고 있는 수백 쌍의 시선 속에서 넌 아무 짓도 못 할 거라는 사실도.”

    “…더 이상 다가오면 네 입술을 물어뜯어 버릴 거야.”

    “재밌겠는데?”

    크리스티앙이 고개를 모로 기울이며 속삭였다. 여전히 그녀의 입술을 장난감처럼 이리저리 만지는 채였다. 벌어진 입술 안쪽에 맺힌 타액에 그의 장갑 끄트머리가 촉촉하게 젖어 들었다.

    “춤이 끝난 후, 내 입술에서 피가 흐른다면 떠들기 좋아하는 호사가들이 과연 뭐라고 지껄일까?”

    혜미가 인상을 찌푸리고 숨을 몰아쉬었다. 이 무대 자체가 크리스티앙이 만들어 놓은 화려한 덫임을 깨달은 까닭이었다. 인정해야 했다. 사람들의 이목을 이용하는 연극에는 그가 그녀보다 한 수 위였다.

    그의 계산은 어디까지였을까. 그녀를 회유하려 미끼를 던지며 손을 내미는 것까지? 거절한 그녀에게 키스하며 조롱하는 것까지 포함인가?

    “혀를 줄 테니 어디 한 번 잘라 보세요, 누님.”

    그가 젖은 웃음을 흘리며 다시 그녀의 입 안을 비집었다. 쑤욱, 보란 듯이 길게 혀를 내밀어 기만하듯 안으로 쑤시는 동작에는 거침이 없었다. 움츠러드는 그녀의 혀를 찾아 뒤섞는 기술은 여전했고 쭉, 빨아 당기는 힘은 취해 있을 때보다 훨씬 강했다. 피가 저절로 얼굴을 향해 치솟는다.

    혜미는 헐떡거리며 그의 어깨를 강하게 밀었다. 허리를 감는 팔의 힘은 그가 약골일 거라는 그녀의 예상을 깨고 의외로 탄탄했으며 손목을 잡아채는 동작은 둔하지 않았다.

    적어도 전문가에게 호신술을 배워 둔 게 틀림없는 움직임이었지만 세르노티에서 10년이 넘게 훈련한 그녀가 꺾어 비틀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다만 그녀를 망설이게 만든 것은 귓바퀴를 뜨끈하게 핥으며 속삭이는 그의 한마디였다.

    “남매끼리 붙어먹는 좋은 구경시켜 주려면 그렇게 하라고.”

    순식간에 뺨을 지나 입술에 다다른 뜨끈한 혀가 그녀의 입술 선을 따라 그리듯 천천히 움직였다. 크리스티앙이 그녀를 완전히 집어삼키기 전, 갈라진 목소리로 웃었다.

    “뭐. 클라웨의 개족보에 하나를 더 추가한들, 그리 충격은 없으려나?”

    속이 울렁거릴 정도로 심장이 거칠게 뛰었다. 그와의 키스는 처음이 아니었다. 밀실에서 처음 만났을 때, 약에 취해 헐떡이던 크리스티앙과 키스한 적이 분명히 있었다.

    하지만 지금의 키스는 제정신이 아닌 상태에서도 나른하고 유혹적이라 여유가 있던 그때와는 사뭇 다른 입맞춤이었다. 그는 마치 그녀를 집어삼킬 듯 거칠게 흡착하며 빨아들이고 있었다.

    조롱이라 치부하기엔 너무나… 격렬하다. 마치 진심인 것처럼. 그녀를 원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흐음…. 흐읍…!”

    “제대로 하는 게 좋을 거야. 누구 하나 죽여 버리기 전에.”

    아니. 이것은 그냥 욕망과는 조금 달랐다. 크리스티앙은 지금 화를 내고 있었고, 혜미는 그가 분노하는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누가 코와 입을 틀어막은 것처럼 숨이 턱턱 막혔다. 크리스티앙이 가쁘게 들이마셨다 내쉬는 더운 호흡이 코끝에 생생했다. 혀가 문질러지자 어쩔 수 없이 혀뿌리에 끈적끈적한 타액이 차올랐다. 크리스티앙의 타액이 그녀의 것과 엉망으로 뒤섞여 입 안에서 그가 마시던 포도주의 단맛이 났다.

    펑! 퍼엉!

    연신 터지는 불꽃이 하늘에 형형색색의 수를 놓는 걸 보며 사람들은 환호성을 지르고 있었다. 분수의 물줄기가 더욱 거세졌다.

    “하아….”

    크리스티앙이 그녀의 아랫입술을 이로 문 채, 눈을 가늘게 치켜떴다. 빽빽한 황금빛 속눈썹이 위로 들리며 마치 사냥감에 집중하는 맹수처럼 작아진 동공과 열기 오른 흰자위를 그대로 드러냈다. 그의 아랫배에서 둥, 둥, 북을 울리는 것처럼 뜨거운 감각이 요동쳤다.

    처음에는 그저 그녀에게 수치감을 주려는 것뿐이었다. 창녀에게 어울리는 말을 잔뜩 지껄여 얼굴이 시뻘게지는 걸 보고 싶었고 그의 의도는 성공했다. 하지만 문제는 다른 데 있었다.

    그가 두 남자의 화제를 입에 올렸을 때, 그녀의 보랏빛 눈동자에 확 떠오른 두려움이 읽힌 탓이었다. 온갖 더러운 말에도 태연한 척하던 여자가 눈에 띄게 당황하는 것을 보니 약점을 낚아챘다는 확신과 함께 원인 모를 불쾌감이 치솟았다.

    입술을 집어삼킨 것은 본능에 따른 결과였다. 살이 닿자마자 정욕이 폭발했다. 가면을 떨어뜨리는 것을 신호로 사람들의 이목을 다른 쪽으로 돌리라는 것은 그가 하이데거에게 내린 명령이었다. 마력을 써서 세밀한 물줄기로 시야를 가린 것도 그였으니, 이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도 확인하고 있을 테다.

    “그만둬.”

    “뭘 말이지? 우리는 친애의 키스를 하고 있을 뿐이거늘.”

    “…크리스티앙. 이건… 정말 아냐. 이러지 마.”

    그에게 빨려 잔뜩 붉어진 그녀의 입술이 크리스티앙의 눈앞에서 어른거렸다. 이 안에 내 것을 처박아야 한다.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 이제 크리스티앙은 그를 괴롭게 하던 문제가 무엇인지 정확히 깨달았다. 그 해결책까지도 확실히.

    그녀의 귓가에 속삭였던 저질스러운 행위들을 직접 실행하고픈 욕망에 황제의 몸이 뜨겁게 달았다. 황녀를 당황하게 만들어 망신시키려던 그의 본래 의도는 흔적도 없이 사라져 있었다.

    “역시 키스만으로는 만족이 안 되나 보군.”

    베네딕트의 허리 위에 올라탄 채 음란하게 헐떡이고, 개처럼 엎드린 자세로 호위 기사의 좆을 받으며 교성을 터뜨렸던 그녀를 죽여 버리고 싶은 욕망의 크기만큼 그녀를 가지고 싶어 견딜 수가 없었다.

    그들이 가진 걸 내가 왜 갖지 못하는가. 네가 뭔데. 너 따위가… 대체 뭔데.

    “말로 할 때 당장… 그만두라고…. 흣…!”

    네크라인이 깊게 파인 그녀의 드레스 안에서 부푼 가슴이 헐떡였다. 크리스티앙은 이로 장갑 끄트머리를 거칠게 끌어당겨 벗은 후, 그녀의 타액이 묻은 장갑을 외투 안에 쑤셔 넣었다. 곧이어 뜨끈하게 젖은 그의 맨손이 가슴골에서 살짝 들린 드레스를 찢어발길 듯 움켜쥐었다.

    하이데거는 그의 밀회를 방해할 수 없었다. 귀족들 앞에서 황제의 체면을 땅바닥에 처박지는 못할 테니 계속 마력으로 그를 지킬 게 뻔했다.

    “말로 안 하면 어쩔 건데.”

    크리스티앙이 얇은 옷감에 밀착된 그녀의 유두를 엄지로 빙글빙글 돌리며 끔찍하게 야한 표정으로 웃었다.

    “여기, 섰네?”

    혜미의 귓불에 불이라도 붙은 듯 후끈, 뜨거워졌다. 크리스티앙이 민감해진 그녀의 유두를 손가락으로 거칠게 비틀었다. 고통과 쾌감이 짜릿하게 퍼지는 감각에 몸이 절로 떨렸다.

    “피를 섞은 동생에게도 흥분하는 몸인가?”

    “하읏…!”

    그가 지껄이는 말이 사실이 아닌 것과는 별개였다. 어쩔 수 없는 생리적 반응에 당황한 그녀가 크리스티앙의 손목을 강하게 움켜쥔 것은 본능적인 반응이었다. 손바닥에 닿는 그의 맥박이 펄떡펄떡 거칠게 진동하고 있었다.

    “아니면, 동생이기 때문에 더욱 달아오르는 건지.”

    “그만하라고, 흣, 분명히 말했어.”

    “흥분해서 잊었나 본데.”

    크리스티앙이 얼어붙은 얼굴로 내뱉으며 부푼 유실을 손안에 강하게 틀어쥐었다.

    “나는 명령을 받는 위치가 아니라 내리는 위치야. 똑똑히 기억해라.”

    그가 손아귀에 힘을 주자 자극에 단단해진 유두가 손가락 관절 사이에서 천천히 짓눌렸다. 수치스러운 신음이 튀어나올 것 같아 숨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이제 황명을 들을 준비가 되었나?”

    황금빛 눈동자가 그녀를 집어 삼킬 듯 활활 타올랐다. 쉰 목소리를 내뱉는 붉은 입술이 잔인하게 비틀렸다.

    “무릎 꿇고 입 벌려.”

    “…뭐?”

    기다란 손가락이 뚜렷하게 융기한 블리오의 앞섶으로 향하는 걸 보는 순간, 혜미의 눈동자가 크게 뜨였다.

    “너, 너 지금…!”

    말도 안 된다. 흥분을 온몸으로 내보이고 있는 크리스티앙은 위험 수위였다.

    “선물에 대한 답례는 그것으로 받지.”

    크리스티앙이 그녀의 엉덩이를 틀어쥐고 제 쪽으로 붙였다. 마치 그의 상태를 똑똑히 확인시키듯 발기한 성기를 그녀의 아랫도리에 느리게 문질렀다. 충격적인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는 그녀의 작은 입술이 그의 것을 가득 담아 억지로 벌어지고, 붉어진 눈에서는 뜨끈한 눈물이 터지는 모습을 보고 싶은 충동에 손끝마저 저릿했다.

    “…강제로 꿇어 앉히길 원해?”

    “이 미친 자식이 진짜…!”

    혜미가 그의 손목을 강하게 비틀어 쳐 내려는 순간이었다.

    “아아악!!!”

    파티와는 어울리지 않는 날카로운 비명이 터지며 황금성의 후끈한 공기를 갈랐다. 크리스티앙의 눈썹이 사납게 일그러졌다. 황후의 목소리였다.

    ‘뭐지?’

    혜미는 당황해 움직임을 멈추었다. 찢어지는 비명 소리는 조금 전까지 그들이 있었던 플라틴 제3 성의 꼭대기에서 들려오고 있었다. 당황한 것은 크리스티앙도 마찬가지인 듯했다. 혜미는 그의 손에서 힘이 빠진 틈을 타 크리스티앙을 밀치고 구름다리 위를 빠르게 내달렸다.

    불안한 예감에 심장이 거친 속도로 뛰었다.

    다리 끝. 장벽같이 시야를 가린 분수의 물줄기를 뚫고 뛰쳐나오는 순간, 그녀의 입술이 놀라서 벌어졌다.

    “발터…!”

    테이블 하나가 날아간 자리에 발터가 얀을 온몸으로 짓누르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바닥에 깔린 얀의 푸른 눈동자는 초점이 없었지만 반항하는 힘은 대단했다.

    “죽여…. 주, 죽여야 해…! 한 놈도, 흣, 빠짐없이 죽여야…!”

    공포감에 질린 표정. 텅 빈 눈동자. 혜미는 얀을 보자마자 강한 기시감이 들었다. 자일룬으로 출정을 떠나는 길에 들렀던 로비나 마을에서도 이미 한 번 벌어졌던 일이었다. 초점이 사라진 눈으로 마치 최면에 걸린 것 같이 행동하는 얀은 지금 눈앞의 환영과 싸우고 있는 것이다.

    “얀, 정신 차려라… 얀!!!”

    발터가 그의 어깨를 바닥에 강하게 눌러 붙이며 잇새로 몇 번이나 내뱉었지만 소용없었다. 얀은 엄청난 힘으로 그를 밀치며 저것을 죽여야 한다고 반복해서 소리치고 있을 뿐이었다.

    혜미는 얀이 가리키는 쪽을 보았다. 그곳에는 창백해진 얼굴로 하이데거의 부축을 받은 채 오들오들 떨고 있는 황후가 있었다. 젠장. 일이 단단히 잘못 돌아가고 있었다.

    “얀!!!”

    “이쪽으로 오지 마십시오!!”

    발터가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달려오는 혜미를 보며 커다랗게 소리쳤다.

    “위험합니다. 가까이 오면 안 됩니다.”

    얀의 목에 팔을 단단히 감은 채 그가 고개를 사납게 저었다. 깊게 파인 미간. 그 아래 일그러진 갈색 눈동자가 말하고 있었다. 오지 말라고. 이 일에 너는 관계없다 선을 그으라는 뜻이었다.

    하지만….

    혜미는 발터의 강인한 팔뚝에 숨이 막혀 컥컥거리는 얀을 바라보며 주먹을 꽉 쥐었다. 어떻게 해야 하지? 내가 어떻게 해야 하지?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죠?”

    “바닥에 깔린 저 남자가 갑자기 황후 전하에게 달려들어 목을 조르는 걸 봤습니다.”

    “어머나, 세상에….”

    웅성거리는 귀족들을 뚫고 무장한 경비대가 우르르 도착하자 긴장감은 더욱 심화되었다. 들떠 있던 파티 분위기가 순식간에 얼어붙은 것은 당연했다.

    “말하시오.”

    하이데거가 황후의 앞에서 어쩔 줄 모르고 있는 체셔 백작 부인을 향해 서늘한 목소리로 추궁했다.

    “저, 저자가 황후 전하께 인사를 드리다가 갑자기 빌어먹을 말라쿤이라 외치면서….”

    입술이 퍼렇게 질린 체셔 백작 부인은 차마 말을 끝내지 못하고 무릎을 꿇었다.

    “폐, 폐하…!”

    “무슨 일이지?”

    혜미의 뒤에서 크리스티앙의 또렷한 목소리가 들렸다. 하이데거가 뚜벅뚜벅 걸어오는 그를 향해 예를 취하며 고개를 숙였다.

    “폐하, 황후께서 갑자기 공격을….”

    “파티의 계획대로라면 불꽃이 끝나는 것과 동시에 분수를 멈추게 하기로 하지 않았나? 그러지 않은 이유가 뭐냐고 묻고 있어.”

    크리스티앙의 젖은 머리카락에서 물방울이 뚝, 뚝, 떨어졌다.

    “덕분에 내 꼴이 이렇군.”

    그가 젖은 얼굴을 손으로 닦아내며 픽 웃었다. 동시에 물에 푹 젖어 무거운 외투를 벗어 바닥에 떨어뜨렸다. 맨얼굴의 황제가 등장하자 귀족들은 가면을 모두 벗었지만 눈을 어디에 둬야 할지 몰라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었다. 황제가 걸치고 있던 얇은 실크 셔츠는 완전히 젖은 채 피부에 달라붙어 그의 맨살을 그대로 비춰 내고 있었다.

    “폐, 폐하….”

    황제의 곁으로 시종이 허겁지겁 달려와 언제 준비했는지 모를 수건을 내밀었다. 크리스티앙은 그에게서 수건을 가볍게 낚아챈 후, 보지도 않고 휙 집어 던졌다. 혜미는 눈앞으로 날아드는 커다란 수건을 반사적으로 붙들었다.

    “흠뻑 젖은 몸을 함부로 드러내는 건, 사창가에서나 어울리는 짓이 아니던가.”

    분수를 뚫고 달려온 것은 그녀 역시 마찬가지였다. 혜미는 자신 역시 물에 빠진 생쥐 꼴이라는 사실을 그제야 깨달았다. 속옷까지도 흰색인 까닭에 피부 중 색이 짙은 은밀한 부분까지 확연히 비치는 모습이었다.

    “송구합니다. 폐하의 용안을 적신 무례를 부디 용서하여 주십시오.”

    하이데거가 낮은 목소리로 내뱉으며 바닥에 한쪽 무릎을 꿇었다. 크리스티앙은 누가 봐도 아수라장이 된 이 상황에서조차 그에게 원칙을 지키라고 암묵적으로 강요하고 있는 것이다.

    “원인을 고하게.”

    시종에게서 수건을 하나 더 집어 든 크리스티앙이 젖은 머리칼을 털어 내며 무심하게 입을 열었다. 마치 대공의 인내심을 시험하기라도 하는듯한 태도였다.

    하이데거가 마른침을 삼킨 후, 끓는 목소리를 애써 가라앉혔다. 그의 시선이 발터의 몸 아래에서 축 늘어져 기절한 얀에게로 향했다. 경멸을 숨길 수 없는 눈동자가 시퍼렇게 일렁였다.

    “저자가 황후 전하께 인사를 가장해 접근한 후, 공격을 시도하였습니다.”

    “…그래?”

    크리스티앙이 황후에게로 천천히 다가섰다.

    “그대, 몸은 괜찮으신지.”

    황후 미리엄은 옅은 미소를 띠며 묻는 그의 얼굴을 보며 침착하려 애를 썼다. 방금 전, 멀쩡히 인사하다 눈이 뒤집혀 그녀에게 달려든 사내의 일을 떠올리면 쉽게 진정하는 건 불가능했다. 하지만 그녀는 이런 상황에서도 무엇이 더 중요한지 판단을 내릴 만큼은 눈치가 빨랐다.

    크리스티앙은 지금 무언가 뒤틀려 있는 상태였다. 이유를 짐작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큰일을 당할 뻔한 그녀의 안위가 걱정되어서는 아니었다.

    오늘의 파티는 귀족과 원로원들 앞에서 황제가 그녀의 누이를 만나는 공식적인 첫 석상이었다. 항간에 나도는 불화설을 잠식시키고, 귀족들에게 자신의 권위를 확신시킴과 동시에 누이에게는 그가 일궈 낸 화려한 권력의 총체를 보여 주는 중요한 자리.

    완벽주의자인 그로서는 황후 한 사람 때문에 중요한 자리가 엉망이 되었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남이 들으면 무정하다 할 수 있는 이야기였지만 그 주인공이 눈앞의 젊은 황제라면 충분히 가능하고도 남았다.

    “황후.”

    “…예, 폐하.”

    “놀라서 말하는 법을 잊기라도 한 거요?”

    눈썹을 들어 올리며 슬쩍 웃는 그를 보며 황후는 방금 전 자신의 생각이 오판이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의 기분은 단지 불쾌한 것을 넘어 최악이었다. 맨살을 맞대고 배를 맞춘 사이에 어쩔 수 없이 육감적으로 알 수 있는 게 있었다. 황제는 지금 얼음 같은 분노를 간신히 삼키고 있는 중이었다.

    “황후 전하.”

    하이데거가 답답하다는 듯 목소리를 애써 낮추며 그녀를 재촉했다. 그녀는 황제의 기분을 읽지 못한 채 섣불리 행동하는 제 오라비를 이해할 수 없었다.

    마력을 얻은 이후, 에리히는 어딘지 모르게 상태가 불안해 보였다. 냉정하지만 황실에 대한 충성심만큼은 강직해 믿음직스러웠던 오라비가 혼란스러워 보이는 가운데 그녀라도 정신을 똑바로 차려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황후 미리엄이 원하는 것은 오직 한 가지. 하이데거 가문의 권세와 영광뿐이었다.

    선대 공작인 아비가 도박으로 재산을 모조리 탕진한 후, 그들은 하인을 부릴 여력도 되지 않아 강제로 청빈한 생활을 유지해야 했다.

    텅 비고 싸늘한 공작저 안에서는 실내임이 무색하게도 말할 때마다 희미한 입김이 흘렀다. 나이프가 들어가지 않을 정도로 딱딱한 빵을 씹어야 했고 묽은 수프에서는 풋콩 냄새만이 진동했다.

    공작이라는 허울뿐인 작위 때문에 남들에게는 없는 티를 낼 수도 없었던 아주 어린 날의 트라우마가 그녀를 강력히 지배하고 있었던 것이다.

    “…다친 곳은 없습니다.”

    황후의 입에서 차분하지만 끝이 떨리는 목소리가 샜다. 크리스티앙은 결혼 첫날, 그녀에게서 얻은 자식을 후계자로 세우겠다고 약속을 했다. 그녀는 황실에서 결혼이란 정치적 의도를 가진 가문의 결합일 뿐이라는 사실을 모르지 않았다.

    황제를 현혹시켜 베갯머리송사로 제국을 좌지우지하겠다는 원대한 욕심은 그녀에게 없었다. 글을 익히기도 전에 황궁의 암투를 먼저 겪었을 젊은 황제는 그녀가 짐작했던 것만큼이나 계산에 밝았고,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잔인한 성정이었다. 태후의 친정이자 황제의 외척이 지금 아무런 권력도 가지지 못하고 쥐죽은 듯 살고 있는 것은 많은 것을 시사하고 있었다.

    미리엄 역시도 바보는 아니었다. 가난한 공작저에서 몸이 불편하게 태어난 그녀는 살아남기 위해 본능적으로 눈치와 셈을 익혔다. 그녀는 제 오라비가 그러했듯 크리스티앙의 권력에 힘을 실어 주며 죽는 날까지 편안한 여생을 살 계획이었다. 그녀를 대놓고 무시했던 귀부인들이 자신의 발밑에 고개를 조아리는 것을 보면서.

    황제의 애첩이었던 체셔 부인에게 일부러 다가가 자신에게 인사하게 만든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다. 그녀 곁에 있던 기사가 눈이 뒤집혀 달려들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미리엄, 어서.”

    하이데거가 뜨뜻미지근하게 구는 제 여동생을 향해 작게 눈살을 찌푸렸다. 공식적인 자리에서 그가 그녀의 이름을 부른다는 것은 그만큼 동요하고 있다는 뜻이었다. 황후는 침착하려 애쓰며 최대한 떨리지 않는 목소리로 입을 뗐다.

    “저자가 목을 조르려는 순간… 저기… 있는 기사분이 뛰어들어서… 큰 사고를 면하였습니다. 저는 괜찮습니다.”

    “황후 전하를 암살하려 한 시도입니다. 절대로 좌시해서는 안 됩니다, 폐하.”

    크리스티앙이 황후의 곁에서 날카롭게 목소리를 높이는 하이데거를 향해 태연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좌시할 생각은 물론 없네. 짐이 직접 개최한 파티에서 소란을 피워 댄 죄는 작은 것이라 할 수 없으니.”

    하이데거의 꽉 다물린 입술 끄트머리가 조금 떨렸다.

    소란. 황제는 공식적인 자리에서 황후가 공격받은 사건을 단지 소란이라 간단히 명했다.

    말 한마디가 가지고 있는 힘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황제였다. 그런 그는 지금 일부러 가벼운 단어를 골라 뱉음으로써 이 상황이 별것 아니라 치부하고 있었다. 다른 누구도 아닌 황후가 목이 졸릴 뻔한 이 상황에서.

    하이데거는 그의 주군이 도대체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읽으려 정신을 집중해 보았지만 제대로 되지가 않았다. 듣기 싫을 때는 그대로 들려오던 황제의 생각이 지금은 깊은 심해처럼 시커먼 암흑이었다.

    유리 파편이 박힌 것처럼 관자놀이가 욱신거리기 시작했다. 그는 일그러지는 표정을 감추려 안간힘을 쓰며 내뱉었다.

    “…범죄자를 벌하는 것을 허락하여 주십시오, 폐하.”

    “대공께서는 어떤 처분이 합당하다 생각하는가?”

    크리스티앙이 또렷한 말투로 그에게 의견을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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