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3화 (53/72)
  • “…레나…?”

    레나의 목소리를 한 어여쁜 숙녀가 가면 뒤에서 그녀를 보며 활짝 웃었다.

    “세르노티의 마을 축제랑은 차원이 다르다. 그치? 얀은 오자마자 정신을 못 차리더라니깐.”

    입성한 후 쉴 틈 없이 바쁘게 움직여야 했던 건 그녀와 발터뿐만이 아니었다. 성의 구조를 익히며 경비 상태를 파악해야 하는 것은 세르노티의 기사들 역시 마찬가지다. 그들과의 만남을 의식적으로 자제해 온 혜미였지만 반가운 마음과 안도가 뒤섞여 길게 한숨이 터져 나갔다.

    “왜 그런 표정을 하고 있어. 이든, 어디 안 좋아?”

    “아, 아니. 그렇게 입으니까 다른 사람처럼 보여서.”

    거짓말은 아니었다. 옅은 푸른색의 얇은 드레스를 입고 있는 레나는 숲의 요정 같은 모습이었다. 방금 막 동화 속에서 튀어나온 것 같은 모습의 그녀를 보며 작게 감탄하자 레나가 가면 속에서 눈을 찡긋했다.

    “이든이야말로 이러고 있으니까 정말….”

    황제 같다.

    속삭이는 그녀의 앞에서 혜미가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애써 주위를 돌리자 다른 기사들의 모습도 눈에 들어왔다. 얀은 붉은 머리의 귀족 부인 하나와 이야기를 하느라 정신이 없었고 토비아스는 묵묵히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토비아스의 곁에 딱 붙어 있는 검은 머리칼의 여자는 체구로 봤을 때 조세핀인 듯했다.

    “얀이 지금 누구와 있는 거지?”

    “체셔 백작 부인이래. 황제의 애첩으로 한때 궁에 가장 많이 들락거렸다고 하더라.”

    발터의 물음에 레나가 즉각 답했다.

    “토비아스는 리비에르 쪽 동태를 살피고 있어. 뭐, 살핀다기보다 조세핀이 알아서 쫑알거리는 수준으로 보이지만.”

    “아까 네 곁에서 말을 걸었던 금발 여인은?”

    “뭐야. 다 보고 있었어?”

    발터의 말에 레나가 살풋 웃더니 이내 표정을 진지하게 바꾸었다.

    “원로원에 속한 후작의 딸이야. 슬쩍 떠보니까 호아킴 장군이 북부에서 돌아오는 게 거의 확실시된 듯해.”

    “황제가 우리 쪽에 일부러 붙인 여자일 수도 있다. 황녀는 권력에 전혀 관심이 없다는 사실을 어필해.”

    혜미가 황궁에서 취하기로 결정한 자세였다. 섣불리 행동해 편을 끌어들이는 것보다 낫다는 판단이었다. 귀족의 세력을 합하는 물밑 작업은 세드릭과 클라라 하르트만이 하기로 되어 있었다. 세드릭의 본가인 슈네 가문은 검술로 유서 깊은 공작가였고 하르트만 역시 생전에 청렴했기 때문에 따르는 이들이 많았다.

    “응. 우리는 괜찮으니까, 두 사람이야말로 조심해.”

    레나가 하늘을 보며 작게 중얼거렸다.

    “달이 붉어서 좀 불안한 느낌이 들어.”

    밤이 깊어 연주하는 악기가 하나하나 늘어 가고 빈 술잔이 늘어남에 따라 사람들의 긴장도 점점 풀리고 있었다.

    “폐하께서 설마 오지 않으시는 건 아니겠지요.”

    “주인공은 원래 가장 늦게 등장하는 법이잖아요. 기다림이 클수록 감동도 더욱 큰 법이니까요. 호호.”

    좀처럼 모습을 보이지 않는 황제의 이야기도 화두에 슬금슬금 오르기 시작했다.

    “그나저나 폐하께서는 역시 성군이십니다. 전대 교황이 그런 죄를 저질렀음에도 누이를 위해 개선문을 세워 주고 이렇게 성대한 파티까지 열어 주시다니요.”

    “그러니까요. 마법사들이 황성을 벗어나는 건 반역이나 마찬가지인데 말이죠. 게다가 황녀께서는 그자를 정부로 삼았다는 말도 돌던데….”

    누군가가 작게 혀를 찼다.

    “아무리 모자란 누이라도 내칠 수는 없는 법이지요. 피는 물보다 진하다지 않나요?”

    “그런 그래요. 그런데 저분이… 아마 황녀 저하이시겠지요?”

    혜미는 자신에게로 떨어지는 시선을 느끼며 자세를 바로 했다. 사람들의 눈초리 속에서 몇 시간이나 꼿꼿이 서 있었던 탓에 허리가 아파 어딘가에 철퍼덕 주저앉고 싶었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그녀가 입구에 등장하자마자 따갑게 쏠리던 시선을 생각해 보면 이 자리에 있는 사람 중 그녀의 존재를 모르는 이는 아무도 없어 보였다.

    얼굴을 가린 가면이 무색한 상황이었다. 하긴. 맨얼굴로 나왔다고 한들 그녀를 알아보는 귀족들은 거의 없었을 것이다. 그들이 혜미의 존재를 단박에 알아챈 것은 다른 이유 때문이었다.

    “황실의 파티에서 황족도 아니면서 흰 드레스를 입고 나타날 만큼 간이 부은 귀족이 과연 있을까요? 폐하께 목이 잘리고 싶은 게 아니라면 말입니다.”

    아일라가 예전에 지나치듯 읊었던 황실의 규칙이었다. 흰옷은 황족의 색이었고 크리스티앙이 가장 좋아하는 색깔이기도 했다. 무도회에서는 옷 색깔을 가지고도 기 싸움이 이뤄진다던 소리도 그때는 흘려들었지만 지금은 무슨 말인지 알 것 같은 느낌이다. 모두들 공작새처럼 잔뜩 꾸미고 오는 장소에서 충분히 있을 법한 이야기였다.

    “이럴지도 모르겠다고 생각은 했었는데….”

    혜미가 발터의 곁에서 쓴웃음을 지으며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설마 인사를 해 오는 사람이 단 한 명도 없을 줄이야.”

    무도회가 시작된 지 두 시간 째. 교황청 꼭대기에 걸려 있던 붉은 달이 서쪽으로 조금 기울 때까지, 그녀에게 다가오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모른 척 춤을 신청하는 사람조차 전무하다는 것이 뜻하는 건 한 가지뿐이다. 의식적인 배제란 소리다.

    “예상하고 있었잖아. 신경 쓸 것 없다.”

    발터가 낮게 내뱉었다. 다른 이도 아니고 황제가 직접 주최하고 참석까지 하는 파티였다. 파티의 대외적인 목적은 물론 전쟁에서 대승한 리비에르를 축하하고 황녀의 존재를 공식적으로 소개하는 것이지만 이곳은 황궁의 중심이다. 황녀에게 접근하는 귀족들의 일거수일투족이 황제에게 보고될 확률은 백 퍼센트였다.

    단순한 인사일지언정 망설이게 되는 이유는 그것이었다. 죽었다가 살아 돌아온 황녀는 원래 황위 계승자였다. 황제와는 태생적으로 엇갈리는 관계. 황녀가 아무리 야만족을 토벌함으로써 충성을 증명했다고 한들, 황제의 심리를 짐작할 수 없는 이 상황에 그녀에게 쉽게 다가갈 수 있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클라웨에서 크리스티앙과의 반목은 죽음의 다른 말과도 같았다.

    “이럴 때 친근하게 다가오는 사람을 경계해야 하는 것도 매한가지고.”

    낮은 목소리로 덧붙이는 발터의 눈을 보며 혜미가 보이지 않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말에는 틀린 게 없었다. 현재 제국에는 크리스티앙의 폭정으로 불만을 가진 귀족들이 분명히 존재했다.

    세금의 대부분이 전쟁 준비와 황금성의 유지 보수에 집중된다는 것은 그만큼 큰 희생을 강요하는 것이었으니까.

    그녀와 크리스티앙의 불화를 바라고 접근하는 이들도 있을 테지만 이렇게 눈과 귀가 모두 열린 곳에서는 그럴 가능성이 적었다. 오히려 크리스티앙 측에서 심어 놓은 간자(間者)일 가능성을 염두에 두는 쪽이 더욱 말이 되었다.

    “여기들 있었네.”

    익숙한 목소리가 커다랗게 들려오는 쪽으로 혜미가 고개를 돌렸다.

    “지젤.”

    “아아, 말을 거는 사람들마다 일일이 다 상대해 줬더니 벌써부터 녹초가 된 기분이야.”

    오랜만에 보는 리비에르 역시 다른 기사들과 같이 잔뜩 치장한 모양새였다. 머리를 한쪽으로 땋아 굽실굽실하게 늘어뜨린 우아한 모습에서 가죽 갑옷을 입고 장검을 휘두르던 평소의 모습을 떠올릴 수는 없었다.

    하지만 낯선 모습임에도 그녀에게 거리감은 느껴지지 않았다. 전쟁터에서 말라쿤과 함께 죽을 고비를 넘기며 몇 달간이나 싸웠던 그들이다. 가시를 딛고 맨발로 서 있는 것 같았던 혜미의 마음이 조금 풀리는 것은 당연했다.

    “구석에 잔뜩 얼어서는 뭘 하고 있는 거야. 오늘의 주인공이.”

    리비에르가 손에 걸린 술잔을 단박에 비워냈다.

    “이런 때일수록 기세가 중요하다고. 점잔 떠는 이 동네 사람들한테는 더더욱.”

    우아한 차림새와는 달리 행동에 변화는 없어 짐짓 웃음이 샜다. 그녀가 입고 있는 녹색 공단 드레스는 그녀에게 썩 잘 어울렸다. 언제 봐도 터질 것같이 아슬아슬한 가슴골에서 시선을 떼어낸 후, 혜미가 입을 열었다.

    “…그동안 잘 지냈어?”

    그러지 않으려고 했지만 말이 조금 떨려 나왔다. 그녀가 리비에르와 마지막으로 만났을 때는 크리스티앙을 함께 알현했던 갤러리 안이었다. 예상치 못했던 베네딕트와의 사건을 떠올리면 그녀에게 왠지 모를 부채감이 들었다.

    리비에르는 아직, 발터에 대한 마음이 남아 있을까. 발터를 호위 기사로 삼고 침대로 초청하기까지 한 주제에, 모두의 앞에서 다른 남자를 정부로 선언한 자신을 뭐라고 생각하고 있을까.

    “발터에게 이야기 못 들었나? 나 정말 바빴어.”

    혜미의 염려와는 달리 리비에르의 태도는 이전과 별로 다를 바가 없었다. 그녀가 시종을 불러세우더니 알이 큰 초록색 포도를 서너 개 따서 휙, 하고 입에 집어넣고 질겅질겅 씹어 삼켰다.

    “전쟁 끝나서 좀 편하게 지내겠다 했는데, 황궁 근위대의 훈련을 매일 참관하라는 게 말이나 되는 소리야? 나의 기사들은 방금 전까지 흙바닥에서 구르고 왔어. 파티라도 열리지 않았다면 그들의 원성에 아마 내가 파묻혀 죽었을걸?”

    말라쿤과 코앞에서 대치하고 있던 전시 중에도 즐기는 걸 잊지 않았던 리비에르의 군대다웠다. 초청된 기사들은 연회장에서 춤을 추며 가장 시끄럽게 떠들고 있었는데, 덕분에 서로의 눈치를 보고 있던 귀족들의 긴장도 조금씩 풀리는 듯했다.

    “발목은 좀 어때?”

    “…어라. 정말 못 들었나 보네. 발터가 정신을 빼놓고 있을 이는 아닌데.”

    리비에르가 발터를 힐끗 보자 그가 인상을 조금 찌푸리며 목을 가다듬었다.

    “바쁜 건 이쪽도 마찬가지였으니까. 이렇게 만났으니 본인의 입으로 말하는 게 좋겠군.”

    “둘이 내외해?”

    “지젤.”

    발터의 목소리가 낮아지자 리비에르가 입맛을 다시며 혜미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하이데거 대공 덕분에 부상은 깔끔하게 나았어. 달리기 시합에 나가도 될 정도야.”

    크리스티앙은 분명 하이데거에게 그녀를 치료하라는 명을 내리기는 했었다. 조금 긴장하는 혜미를 보며 리비에르가 말소리를 조금 낮추었다.

    “찝찝했지만 그의 마력이 어디까지인지 확인해 보는 방법은 그것밖에 없었다.”

    “…어떻다고 생각해?”

    “대체 뭔 짓을 한 건진 몰라도 대공의 마력은 상상했던 수준 이상인지도 모르겠어. 일단 그가 만들어 놓은 이 공간만 봐도… 이건 보통 인력으로 할 수 있는 게 아니고.”

    리비에르가 곤란한 표정으로 깊게 한숨을 쉬었다. 그녀의 말을 부정할 수 없어 혜미는 주먹만 쥐었다 놓았다. 역시 베네딕트의 도움이 없으면 그와 대항하기가 힘들다는 말과 같았다. 하지만 베네딕트의 마력이 완전히 돌아왔는지는 아직도 미지수였다.

    호아킴이 만일 크리스티앙의 편이라면 정말 산 넘어 산. 그들은 리비에르의 도움이 누구보다 간절한 상황이었다. 리비에르가 가진 것은 그녀가 이끄는 강한 병력만이 아니었다. 제국 최초로 노예에서 귀족 작위를 거머쥔 이가 가지는 상징성은 민중을 뒤흔들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뭐지?”

    발터의 말에 그녀가 술잔을 단숨에 털어 넣은 후, 씩 웃었다.

    “힘든 싸움이 될 거라는 소리지.”

    리비에르가 한쪽 눈을 지그시 감으며 작게 속삭였다. 혜미는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심장이 두근, 두근, 세차게 박동했다. 리비에르의 지금 말뜻은, 그녀의 손을 잡기로 결정했다는 소리일까. 그렇다면 그녀를 위해 목숨을 걸었던 시간이 전혀 아깝지 않았다. 전쟁에서 이길 수 있는 키는 리비에르가 쥐고 있는 것이나 매한가지였으니까.

    “이제껏 힘들지 않았던 적이 있었나?”

    고마움이 커서 오히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망설이는 혜미의 곁에서 발터가 아무렇지도 않게 내뱉었다.

    “뭐?”

    “앓는 소리를 할 거면 가서 술이나 마셔.”

    발터의 퉁명스러운 대꾸에 리비에르가 픽 웃었다.

    “안 그래도 코가 비뚤어지게 마시고 싶은데 아직 폐하가 안 와서 참고 있거든?”

    “하이데거와는 어떻게 하기로 했지?”

    실실 웃던 리비에르의 표정이 확 바뀌었다.

    “발터. 간만에 파티를 즐기고 있는데 짜증 나는 얘기는 피해 주는 센스 정도는 갖춰.”

    “짜증 난다고 해서 피할 수 있는 건 아니니까.”

    혜미가 모르는 화제였다. 그녀는 가만히 그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리비에르가 땅이 꺼져라 깊게 한숨을 쉬더니 착잡한 표정으로 입을 뗐다.

    “황명이야. 지금 상황에서 거부하는 것도 이상해.”

    “그렇다면….”

    “응. 일단 받아들이는 걸로 했다. 날짜는 최대한 늦출 거야.”

    “…괜찮겠나?”

    리비에르를 직시하는 발터가 낮게 물었다. 그의 목소리가 조금 서늘해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어차피 위장일 뿐이니까.”

    리비에르가 잘빠진 눈썹을 미간에 모으며 작게 욕설을 내뱉었다.

    “이런 씨발, 악마도 제 말하면 온다더니….”

    고개를 돌리니 그들이 있는 쪽으로 하이데거가 천천히 다가오고 있었다. 황궁 근위대장의 제복을 입고, 파티에 참석한 이들 중 유일하게 칼까지 찬 그는 가면을 쓰지 않은 맨얼굴이었다.

    “황제가 사흘 전, 리비에르에게 하이데거와의 혼인을 명했어.”

    발터가 입을 떼자 혜미가 눈을 크게 떴다.

    “…뭐?”

    “리비에르는 일단 받아들일 모양이군.”

    생각지도 못한 뜻밖의 소식에 혜미가 황당함을 애써 감추었다. 그걸 왜 지금 말하는 거냐고 물을 시간이 없었다. 싸늘한 표정의 하이데거가 어느새 코앞에 있었기 때문이다. 리비에르가 목소리를 조금 높였다.

    “가면무도회라는 명칭이 무색하군요. 회춘하신 건 알겠는데 외모 자랑도 너무 심하면 경박스럽지 않겠습니까?”

    하이데거가 낮게 코웃음을 쳤다.

    “저는 파티를 주관하는 이이지 참여하는 이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리비에르 경. 가면을 쓰지 않은 이유도 그 때문이고요.”

    리비에르를 하대하던 하이데거의 말투가 바뀌어 있었다. 아마도 황명 때문일 것이다.

    “오직 파티를 즐기러 온 이들과는 차이가 있다는 뜻입니다. 황제 폐하께서 주최하신 파티에서 코가 비뚤어질 정도로 마시고 싶어 하는 수준 낮은 이들이 있을까 싶습니다만.”

    상대를 묘하게 돌려 까는 하이데거의 말투를 들으며, 혜미는 그 역시도 이 결혼을 달갑지 않아 한다는 사실을 눈치챘다.

    “아, 그러시다면 대공께서는 제가 다른 이와 첫 곡을 추어도 괜찮으시겠군요.”

    리비에르가 그를 보며 입술을 들어 올리자 하이데거가 웃음기 없는 얼굴로 답했다.

    “아직 정식으로 청혼하지 않았으니 약혼자의 행실을 지금부터 신경 쓸 필요는 없겠지요. 대공비가 된다면 다르겠습니다만.”

    리비에르가 반색했다.

    “황녀 저하, 그럼 제게 저하의 기사와 춤을 출 기회를 주시겠어요?”

    혜미는 그녀의 눈빛을 읽었다. 하이데거가 이 자리에 나타난 이상, 편하게 이야기를 나눌 수가 없었다. 리비에르는 가시방석 같은 이 자리를 빠져나감과 동시에 발터와 대화를 할 기회를 찾고 있는 것이다. 성별이 다르다는 건 이럴 때 도움이 된다.

    “사실 황녀 저하께서 제 부상을 계속 염려하고 계셨거든요.”

    “경의 발목은 더 이상 치료가 필요 없을 텐데요.”

    “네. 대공 덕분에 아주 깨끗이 나았다는 걸 보여드리기 위한 좋은 기회라고 생각합니다만.”

    “그는 황궁에 소속되어 작위를 받은 기사가 아니라 황녀 저하 개인에게 속한 자입니다. 제게 물을 일도, 제가 신경을 써야 할 일도 아니겠지요?”

    하이데거가 가면을 쓰지 않아도 쓴 것 같은 미끈한 얼굴로 혜미를 보았다. 언제 봐도 기분이 나쁜 남자였다. 가시를 숨길 의도조차 없는 날카로운 말투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가 그녀 곁에 가까이 오기만 해도 살기가 뚝뚝 흘러내린다. 그와 대화하는 게 달가울 리가 없었지만 그렇다고 발터가 리비에르와 자연스레 대화를 나눌 수 있는 모처럼의 기회를 방해할 수는 없었다.

    “발터.”

    그녀는 발터를 한 번 바라보았다. 어차피 그와 그녀 둘 중 누구도 파티를 즐길 마음으로 온 사람은 없었다. 거절할 거라고 생각지는 않았지만 발터는 망설이는 기색도 없이 리비에르의 손을 잡았다.

    “곧 돌아오겠습니다.”

    때마침 춤곡이 시작되었다. 가면을 쓴 귀족들이 춤을 추기 시작했다. 발터와 리비에르 역시 마찬가지였다. 장신의 리비에르는 발터와 함께 있으면 키가 한 뼘은 작아 보였다. 발터는 정중하고도 능숙한 태도로 리비에르를 리드하고 있었다.

    “파티는 잘 즐기고 계십니까.”

    하이데거가 그녀의 곁에서 무기질 같은 얼굴로 입을 뗐다. 혜미는 춤추는 이들을 조용히 응시하며, 정확히는 발터와 리비에르를 바라보며 솔직하게 답을 했다.

    “이런 종류의 유흥은 별로 익숙하지가 않아서요.”

    “폐하께서 누이를 위해 손수 준비하신 파티입니다. 저하께서는 당신 한 사람을 위해 이토록 성대한 연회를 베풀어 주신 폐하께 감사하는 마음이 전혀 없으신가 보군요.”

    “준비는 대공이 하지 않았나요?”

    “폐하의 뜻이 바로 제 뜻이니까요.”

    하이데거의 목소리는 당연한 걸 묻는 그녀를 조소하는 것처럼 들렸다. 혜미가 술을 꼴깍 입에 넘긴 후, 천천히 입술을 뗐다.

    “리비에르 경과 결혼을 하실 거라 들었습니다. 굉장히 의외라서 깜짝 놀랐어요.”

    희게 센 하이데거의 눈썹이 조금 꿈틀거렸다. 역시. 혜미의 예상대로 그는 그 사실을 불쾌해하고 있었다. 그것도 매우.

    “제 말뜻을 오해하지 말아 주셨으면 해요. 물론 리비에르 경과 대공 모두 누가 더 잘났다 우열을 가리기가 힘들 정도로 훌륭하긴 하지만 왠지… 두 분의 조합은 상상이 안 가서요.”

    그녀의 눈에만 보이는 게 분명한 살기가 확실히 크기를 키워 일렁이고 있었다. 혜미는 긴장을 숨기며 모르는 척 되물었다.

    “그것은 폐하의 뜻인가요, 아니면 대공의 뜻인가요?”

    “…질문의 의도를 잘 모르겠습니다만.”

    혜미가 보랏빛 눈을 깜빡이며 양손의 검지를 하나씩 치켜들었다.

    “아, 죄송해요. 폐하의 뜻이 대공의 뜻이라고 했었죠. 폐하께서 두 분의 결혼을 원하시니 대공께서도 물론 그러시겠죠.”

    “황녀 저하께서는 지금 저와 말장난을 하고 싶으신 겁니까?”

    하이데거가 양 손가락을 맞부딪혀 엑스 자를 만드는 그녀를 보며 가면 같은 미소를 얼굴에 올렸다. 언뜻 보면 베네딕트와 닮아 있는 미소였지만 느낌은 확실히 다르다.

    혜미가 그에게서 시선을 돌린 후, 시종이 들고 다니는 은쟁반에 손을 뻗었다. 구운 머랭을 집어 들고 바삭, 씹으며 말을 이었다.

    “전 또. 대공께서 리비에르 경의 발목을 치료하면서 둘 사이에 어떤 연애 감정이라도 싹튼 게 아닌지 생각했을 뿐이에요.”

    “그녀와 동침하라는 황명이 있었다면 그랬을지도 모르겠군요.”

    혜미의 예상보다 조금 더 센 반응이 돌아왔다. 베네딕트의 미소가 차가우면서도 여유가 있다면 하이데거의 미소는 분노를 억누르는 것처럼 보였다.

    실제로 그는 지난 만남에서부터 계속 어딘가가 불편해 보이는 모양새였다. 초조해 보이는 것 같기도 했고 통증을 참고 있는 듯한 표정과도 비슷했다. 그를 뚫어져라 바라보는 혜미를 향해 하이데거가 조소와 닮은 웃음을 흘렸다.

    “워낙 유명하지 않습니까. 음유시인들이 리비에르 장군의 매력에 대해 노래를 지어 불렀을 정도이니까요.”

    그 노래는 그녀의 자유로운 사생활에 관한 것이 대부분이었다. 말이 자유로운 사생활이지, 그녀가 침대에서 정복한 남자가 전장에서 정복한 남자보다 더 많을 거라는 질 낮은 수준이다.

    “하이데거 대공, 지금 말씀은 전장에서 목숨을 걸고 그녀와 함께 싸운 이로서 조금 불쾌합니다. 전쟁에 여럿 참여하여 그 위험을 충분히 알고 계신 대공께서 그런 말을 하는 것도 조금, 이해가 가지 않고요.”

    “그러셨다면 죄송합니다. 다만 저는 그녀가 제 신붓감으로 충분히 매력적이라는 사실을 표현하고 싶었을 뿐입니다.”

    순순히 사과한 후, 하이데거가 묘한 표정으로 그녀를 보았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뱀 같은 시선이 훑어 내리다 다시 얼굴로 올라왔다.

    “뭐, 제 눈앞에 계신 황녀 저하도 매력으로 따지면 못지않을 거라 생각합니다만.”

    혜미는 저도 모르게 그에게서 조금 물러나며 인상을 찌푸렸다. 매우 기분이 나빴다. 방금 전 눈을 가늘게 뜬 비릿한 표정은 특히나 더욱 그러했다. 마치 그녀를 보며 무언가를 떠올리는 것 같은 얼굴이었다.

    “…지금 무슨 뜻이에요?”

    “말 그대로입니다.”

    심장이 울렁거리며 기분 나쁘게 뛰었다.

    “대공.”

    “팔다리가 잘린 황녀 저하의 정부는 안녕하십니까?”

    “…지금 그 말을 하는 이유가 뭐죠?”

    “돌아오신 후, 폐하께 가장 처음 공식적으로 요청한 사항이 정부를 들이는 것이 아니었습니까. 안부를 묻는 것뿐입니다만.”

    이것은 확실한 모욕이었다. 당하고 있을 수만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혜미가 턱을 조금 치켜들며 그를 향해 한발 다가섰다.

    “왜, 대공께서 그 자리를 탐내기라도 하셨나요?”

    “그럴 리가요. 설사 그렇다 해도 그 자리에는 이미 줄을 선 자들이 많은 걸로….”

    하이데거가 말을 잇다 말고 멈추었다. 춤곡이 딱 끊기고 웅성웅성하던 귀족들의 대화 소리도 일시에 사라진 것은 수 초 뒤의 일이었다.

    갑자기 공기의 흐름이 일순 정지하는 느낌. 타는 횃불마저 소리를 죽였고 분수에서 뿜어 나오던 물줄기도 끊겼다. 혜미의 시선이 모두를 따라 이동한 것은 당연했다.

    별빛이 내려앉은 고요한 공중 정원을 가로지르며 한 남자가 천천히 걸어오고 있었다. 원로원을 포함한 귀족들이 모두 낮게 숨을 몰아쉬었다.

    그가 눈에 띄게 천천히 걷는 이유는 곁에서 팔짱을 끼고 걷는 여자 때문이다. 다리가 불편한 여자의 보조를 맞추고 있었지만, 그래서인지 그는 더욱 여유로워 보였다. 한 발, 한 발, 우아한 걸음걸이를 뗄 때마다 귀부인들이 양손을 모으고 뒤로 물러났다. 기사들은 주먹을 왼쪽 가슴에 붙여 충성을 뜻하는 예를 표했다.

    “…….”

    클라웨에서 가장 부드럽다는 검은 새의 깃털로 만든 외투, 그 안에 걸친 하얀 실크 블라우스는 그의 몸이 훤히 비칠 정도로 얇았다. 일부러 다 잠그지 않은 단추 탓에 그가 움직일 때마다 벌어지는 옷깃 사이로 매끈한 조각상을 방불케 하는 피부가 그대로 드러났다.

    기다란 다리에 보기 좋게 달라붙은 검은색 블리오는 비율 좋은 신체를 확실히 돋보이게 만들었다. 얼굴의 반을 가리고 있는 검은 마스크 역시 화려하기 그지없었다.

    권위적인 황제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지만 모두가 다른 의미로 그에게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비단 지나치게 화려한 옷차림 때문만이 아니었다.

    화공들이 찬양하던 황금빛 머리카락을 새까맣게 물들인 크리스티앙의 퇴폐적인 매력은 마스크를 뚫고 뚝뚝 흘러 떨어지고 있었다. 왕관이 없어도, 화려하다 못해 천박하게까지 느껴지는 옷차림을 하고 있어도 그는 황제였다. 모두의 시선을 집중시키는 힘이 있는 이였다.

    크리스티앙이 악단 쪽으로 슥, 시선을 주었다. 그와 동시에 악사들이 연주를 시작했다. 가면무도회의 본격적인 시작을 알리는 연주였다.

    혜미는 황후와 춤을 추기 시작한 크리스티앙을 바라보았다. 황제는 몸이 불편한 황후를 능숙하게 리드했다. 황후가 따라 하기에는 무리가 있는 빠른 스텝이 나오자 크리스티앙이 그녀를 품에 끌어당겨 안았다. 멈춰 선 그들의 주위로 귀족들이 빙글빙글 돌자 풍성한 레이스 치마가 마치 만개한 꽃처럼 펼쳐졌다.

    하얀 장갑을 낀 황제의 손이 황후의 등을 천천히 쓸어내렸다. 마스크가 가리지 못한 황금빛 눈동자가 약 열 발자국 정도 떨어진 곳에 있는 혜미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붉은 입술이 황후의 귓불에 닿으며 무어라 움직이자 혜미는 인상을 찌푸릴 수밖에 없었다.

    ‘나의 누이가 그대와 같은 옷을 입고 있군.’

    그제야 혜미는 자신이 입은 옷이 황후의 것과 완벽히 같은 디자인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크리스티앙에게 시선을 빼앗겼던 귀족들도 그 사실을 뒤늦게 눈치채고 수군거리고 있었다.

    몸의 곡선을 그대로 드러내는 드레스는 혜미에게 맞춘 듯 잘 어울렸지만, 키가 작고 체구가 여릿한 황후에게는 그다지 어울리는 옷이 아니었다. 마치 어린아이가 어른의 옷을 무리해서 입은 것 같은 이질적인 느낌이었다. 잘못한 것도 없는데 혜미가 당황하는 것도 당연했다.

    흠칫, 몸을 떠는 황후를 안은 손에 힘을 주며 크리스티앙이 그녀에게 고개 숙여 입을 맞추었다. 황후에게 혀를 섞으며 진하게 키스하면서도 그의 눈동자는 여전히 같은 드레스를 입은 한 사람에게 꽂혀 있는 채였다. 혜미가 이를 뿌득 갈았다.

    ‘저 미친 자식이 진짜….’

    음악이 고조되며 촛불이 일렁였다. 분수가 다시 물꽃을 쏘았다. 귀족들의 저택에서 열리는 가면무도회는 본래 퇴폐적이었고 귀족 남녀가 비밀스럽게 회동하는 만남의 장이었다. 많은 이들 앞에서 황후에게 진하게 키스하며 포문을 연 황제 덕분에 파티의 분위기는 언제 얼어붙었었냐는 듯 본격적으로 후끈 달아오르고 있었다.

    “황후 폐하와 같은 드레스라니, 공교로운 일이군요.”

    혜미는 그녀의 곁에서 중얼거리는 하이데거의 얼굴에 주먹을 날리는 대신, 침착하려 애를 쓰며 웃었다.

    “중간에서 뭔가 잘못된 거겠죠. 이런 유치한 장난을 칠 사람은 어린애밖에 없을 테니까요. 황금성의 수준이 그 정도는 아닐 거라 믿을래요.”

    “황녀 저하, 말씀이 조금 지나치십니다.”

    “그렇다면 대공께서 제게 먼저 예의를 표하는 게 중요할 것 같군요.”

    “저하.”

    “말하게.”

    이 건방진 년이. 하이데거가 그녀를 마주하며 눈썹을 들어 올렸을 때였다.

    “둘이 친해?”

    혜미와 하이데거의 얼굴이 동시에 일그러졌다. 황후를 내버려 두고 그녀에게 다가온 늘씬한 사내의 붉은 입술이 천천히 움직였다.

    “대공이 춤을 청하고 있는 상황이 아니라면, 내가 청하고 싶은데.”

    지금 이 공간에 있는 모든 시선이 그들에게 쏠린 것을 느낄 수가 있었다. 혜미는 궁중의 법도대로 한발 물러서며 그를 향해 썩은 미소를 지었다.

    “죄송하지만 저는 춤을 배운 적이 없습니다.”

    신사가 숙녀에게 춤을 청할 때 돌려 말하는 거절의 표시였다.

    “하하.”

    자그마한 웃음소리가 들리더니 크리스티앙의 기다란 손이 스스로 가면을 벗겨 냈다. 창백한 피부와 새까만 머리카락. 피처럼 붉은 입술의 황제였다.

    “그게 문제가 돼?”

    젠장.

    이렇게 되면 거절할 수가 없다. 얼굴을 드러낸 이상 크리스티앙은 그저 그녀에게 춤을 청하는 귀족이 아닌 황제의 위치였다. 이 상황에 그의 손을 잡지 않는다면 황명 위반이 되는 것이다.

    “내가 이 자리에서 누군가를 안고 바닥을 구른다 한들, 제대로 된 춤이 아니라 욕할 수 있는 이는 아무도 없을 텐데.”

    말 없는 혜미의 곁에서 하이데거가 날 서린 목소리를 낮추었다.

    “폐하의 앞에서 홀로 얼굴을 가리는 것은 황궁의 법도가 아닙니다, 황녀 저하.”

    “아니. 그대로 둬.”

    크리스티앙이 가면을 벗겨 내려는 그녀를 저지하며 손끝을 가볍게 붙잡아 내렸다. 장갑과 장갑이 닿았다가 떨어졌을 뿐인데 긴장되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크리스티앙이 다시 제 가면을 얼굴에 쓴 후, 미소를 지었다.

    “이편이 내게도 더 편할 것 같으니.”

    하얀 손바닥이 우아하게 위를 향한 채 그녀의 눈앞으로 다가왔다. 혜미는 자신을 향해 내밀어진 크리스티앙의 손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그 위에 제 손을 얹었다.

    어차피 그와 단둘이 대면해야 한다고 생각은 하고 있었다. 모두가 보는 앞이라 차라리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크리스티앙이 적어도 돌발 행동은 하지 않을 거라는 믿음에서였다.

    두 사람이 연회장의 가운데로 나서자 약속이라도 한 듯 음악이 시작되었다.

    혜미는 치맛자락을 붙잡고 한 발 뒤로 물러서 살짝 무릎을 구부렸다. 크리스티앙이 한 손을 반대쪽 허리에 대고 고개를 숙여 인사하며 슬쩍 웃었다.

    한 발짝 다가와 그녀의 허리를 감으며 크리스티앙이 속삭였다.

    “배운 적 없다더니.”

    우아한 그의 스텝을 정확히 따라 밟으며 혜미가 작게 속삭였다.

    “첫 파티에서 망신당하면 안 된다는 생각에 한 곡 정도는 연습을 했거든요.”

    시녀가 그녀를 하도 들들 볶는 바람에 어쩔 수가 없었다. 가면 뒤에서 웃음 짓는 크리스티앙의 얼굴이 보이는 것 같았다.

    “하긴. 누님은 몸 쓰는 일은 뭐든 잘하는 것 같긴 해.”

    그의 말투는 사람들 앞에서와 확연히 달랐다. 장갑을 꼈음에도 그의 손바닥에서 뜨끈하게 체온이 느껴졌다. 허리를 감아올 때마다 몸의 밀착이 조금 심한 것 같은 느낌도 들었다.

    “방금, 동작이 틀린 것 같은데요.”

    “내가 말했잖아. 지금 이 자리에서 내가 누님의 목을 물어뜯는다 해도 나의 춤 동작에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크리스티앙이 그녀의 허리를 제 쪽으로 바짝 당겨 붙이며 속삭였다. 깊게 파인 네크라인 위로 그의 숨결이 그대로 느껴졌다.

    “시험해 볼까?”

    흡, 하고 숨을 들이마시며 혜미가 자연스레 다시 뒤로 멀어졌다. 음악은 느릿한 왈츠의 리듬에 탱고의 선율을 섞어 놓은 듯 무겁지 않으면서도 농밀했고 어딘가 모르게 애절했다. 크리스티앙이 작게 웃으며 그녀의 허리를 잡고 살짝 들었다 놓으며 위치를 바꾸었다.

    수만 개의 촛불이 빛을 내고, 그보다 더 많은 별들이 하늘에 흐트러진 밤이었다. 로맨틱하다면 할 수 있는 이 순간, 긴장할 수밖에 없는 건 상대가 상대이기 때문이다. 박자가 자연스레 빨라지자 그녀의 호흡 역시 조금 빨라졌다.

    “드레스가 잘 어울리네.”

    혜미가 그의 어깨를 짚은 손에 힘을 꽉 주었지만 크리스티앙은 그저 입술을 더욱 위로 들어 올릴 뿐이었다.

    “라파엘이 솜씨가 좋은 줄은 알았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어.”

    “…재봉사에게 같은 옷을 짓게 한 건 일부러 그러신 겁니까?”

    크리스티앙이 그녀의 양손을 잡고 제게로 휙 끌어당겼다. 너무 직접적인 걸 물은 건가? 조금 긴장하는 혜미의 귓가에 크리스티앙이 나긋하게 속삭였다.

    “당연한 걸 뭘 물어.”

    이 개자식이 진짜.

    째려보려고 했지만 동작은 서로 등을 마주하는 스텝이었다. 곁눈으로 그녀를 내려다보며 하하, 소리 내어 웃는 크리스티앙은 매우 즐거워 보였다. 귀족들의 눈에 그는 황후와 같은 드레스를 입고 나오는 우를 범한 누이를 기꺼이 용서하고 있는 관대한 군주로 보일 뿐이었다.

    “가면무도회에서 황제와 함께 춤을 춘다는 게 뭘 뜻하는지 알고 있어?”

    그녀의 앞으로 돌아와 손목을 다시 잡으며 그가 물었다.

    “글쎄요.”

    “황제가 춤을 추는 상대는 단 두 종류지. 피와 법으로 묶인 가족이거나.”

    크리스티앙이 그녀를 리드하며 또렷하게 중얼거렸다.

    “파티가 끝난 후 처소로 데려갈 여자이거나.”

    혜미는 이제 확실히 숨이 가빴다. 고작 춤을 추었을 뿐인데 조금 더워질 정도였다. 체온이 오른 것은 크리스티앙도 마찬가지로 보였다. 이마를 스쳐 가는 그의 호흡에 열기가 일었다.

    “…그럼 남매가 춤을 추는 건 이상한 일이 아니겠네요.”

    혜미가 최대한 자연스러움을 가장하며 입을 뗐다. 그들은 둘 다 서로가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남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크리스티앙은 아직 그녀가 안다는 사실을 모른다. 가면을 쓰고 있는 게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 세상에 혜미가 못하는 건 많았지만 표정을 숨기는 건 그중 몹시 어려운 축에 속하는 것이었다.

    “전혀 이상하지 않지.”

    크리스티앙이 마른침을 꿀꺽 삼키는 그녀의 보랏빛 눈동자를 바라보며 입술을 비틀었다.

    “그런데, 왜 긴장해?”

    “…폐하와 함께 있는데 긴장하지 않을 사람이 과연 있을까요.”

    “나와 처음 만났을 때는 긴장감이 전혀 없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귓가에서 크리스티앙이 작게 속삭이자 가면 뒤로 혜미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음악이 끊기고 춤이 끝났지만 크리스티앙은 그녀를 놔주지 않았다.

    망설이는 사이 두 번째 곡이 시작되었다. 혜미는 어쩔 수 없이 크리스티앙과 춤을 이어 갈 수밖에 없었다. 크리스티앙이 그녀를 유려하게 이끌며 속삭이듯 물었다.

    “우리 처음 만났을 때 기억해?”

    “갤러리를 말씀하시는 건가요?”

    구름다리 앞에 있는 분수의 옆이었다. 물소리와 음악 소리가 한데 어우러져 그녀의 떨리는 숨소리를 숨겼다. 크리스티앙의 입술이 천천히 호선을 그렸다.

    “장난하지 말고.”

    그의 말투는 잘 벼려진 칼이 공중을 슥, 가르는 소리와 닮아 있었다. 부드럽고 우아하지만 곁에 있는 이를 충분히 긴장시키게 하는 소리.

    “…송구하지만 잘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일단 시치미를 떼자 크리스티앙이 그녀를 바라보며 고개를 슬쩍 기울였다. 황금빛 머리카락만큼 그에게 어울리는 것은 없다고 생각했는데 착각이었나. 검은 머리칼이 스르륵, 내려와 그의 이마를 가렸다.

    “황제의 오수를 방해한 죄는 작지 않아. 내 몸을 패대기친 것과 용안에 손을 댄 것을 포함하면 양팔을 잘라야 하거든.”

    다정한 미소와는 상반되는 그의 잔인한 목소리에 혜미는 목덜미가 오싹했다. 크리스티앙은 이제 춤에는 관심 없다는 듯, 한 손은 그녀의 손을 잡고 다른 한 손은 허리에 두른 채 마주 보고 이야기를 이어 갈 뿐이었다.

    불빛이 희미하게 어두워지고 음악이 점점 더 느려졌다. 악사들은 마치 황제의 기분에 따라 보이지 않는 지휘를 받기라도 하는 듯 연주하고 있었다. 그에게 잡히지 않은 혜미의 손이 크리스티앙의 가슴 위에서 오갈 데를 모르고 살며시 주먹을 쥐었다.

    “상대가 누군지 상상도 할 수 없었기에 벌어진 일입니다.”

    벌어진 옷깃 사이로 뻗은 황제의 유려한 목선에 푸른 핏줄이 돋아났다. 혜미의 허리를 감싼 크리스티앙의 손에 슬며시 힘이 들어갔다.

    “그건 내가 할 말이지, 누님.”

    “…놔 주십시오.”

    혜미의 입술이 바짝 마르는 이유는 마주 닿은 몸에서 느껴지는 긴장감 때문이다. 그녀의 짐작이 착각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려 주기라도 하듯, 크리스티앙이 하체를 더욱 바싹 붙였다. 얇은 옷감 탓에 모른 척하려고 해도 그럴 수가 없다. 그의 성기는 발기해 있었다. 그것도 아주 단단히.

    ‘이 자식이 지금… 뭐 하자는 거지?’

    그녀는 크리스티앙이 지금 내보이는 반응이 성욕이라고는 생각할 정도로 어리석지는 않았다. 그러기엔 그의 황금빛 시선은 분노에 가까웠으니까.

    그는 지금 그녀를 당황시키려는 게 분명했다. 하얀 드레스 위로 드러난 어깨와 목에 열기가 솟구쳤다. 밀치고 빠져나가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으나 귀족들의 시선이 집중된 상황에서 실랑이를 하는 모습을 보일 수는 없었다.

    혜미는 그와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눈을 피한 이유가 그가 두렵기 때문은 아니었다. 지금 이 순간, 그의 멱살을 잡아 패대기치는 비상사태를 일으키지 않겠다는 결심이 더욱 컸다.

    참자. 참자.

    혜미가 속으로 반복하며 마른침을 삼켰다. 유약을 발라 구운 도자기 같은 그의 흰 피부 덕에 상대적으로 붉은 입술 색이 더욱 또렷해 보였다. 새빨간 장미 꽃잎 같은 입술이 움직일 때마다 흰 치아와 선홍빛 혀가 모습을 슬쩍 드러냈다가 감추기를 반복했다.

    “상대가 누님인 줄 미리 알고 있었다면….”

    크리스티앙이 고개를 숙이고는 시선을 아래로 깔고 있는 그녀의 귓가에 다시 입술을 붙였다. 마치 비밀 이야기를 하듯 손으로 입을 가린 채였다. 손안에 갇힌 그의 뜨거운 숨결에 몸이 저절로 떨렸지만 피할 수는 없었다. 정확히 말하면 몸이 굳었다는 말이 옳았다.

    ‘난 그 자리에서 누님을 범했을 거야.’

    크리스티앙이 그녀의 귀에 가느다랗게 속삭인 말이었다. 혜미의 보랏빛 동공이 충격을 받아 확장되었다. 이어지는 그의 음성이 그녀의 동그란 귓바퀴를 타고 머릿속으로 생생하게 전달되었다. 그녀가 들은 말이 실제임을 확인시키듯 한 음절, 한 음절, 또렷하고 정확한 황제 특유의 말투였다.

    “먼저 누님이 걸치고 있던 그 누더기 같은 기사복을 찢어발기고 알몸으로 만들었겠지. 팔목과 발목을 연결해 보랏빛 벨벳 끈으로 묶고, 수치스러운 자세로 양 다리를 활짝 벌리게 만든 후, 차례로 뚫린 두 구멍 모두에 내 씨물이 줄줄 흐르도록 만들었을 거야. 그 역사적인 자리에 화가를 불렀을 수도 있겠군.”

    혜미의 목덜미에 소름이 오소소 돋았다.

    “천박한 음부와는 달리 작고 예쁜 누님의 입 안이 황제의 양물을 담고 우악스레 벌어지는 모습을 화폭에 담는 거야. 눈물이 흐를 때마다 뺨을 세차게 때려 그 창백한 얼굴이 탐스러운 사과 빛으로 물들게 만들면 생기가 돌아서 보기가 좋을 것 같아. 엉덩이도 같은 색이라면 더욱 좋겠어.”

    쪽, 하고 귓가에 입을 맞추는 입맞춤 소리가 생생했다. 뒤이어지는 작은 웃음소리까지도.

    “반쪽이라지만 피를 나눈 동생에게 강간당하는 기분이 어땠을까? 소감을 누님의 입으로 직접 들었으면 즐거웠을 텐데.”

    혜미가 일그러진 얼굴로 고개를 휙 뒤로 물렸다. 더 이상 참는 건 한계다. 튀어나오는 진심을 막을 수는 없었다.

    “…너 미쳤니?”

    “아마도?”

    그녀는 말문이 턱 막혔다. 숨결 탓이라고만은 할 수 없는, 무언가로 축축하게 젖은 귓불의 감각이 생생했다.

    크리스티앙의 황금빛 속눈썹이 살포시 아래를 향했다. 눈을 휘며 웃는 얼굴은 가면을 쓰고 있음에도 아름다웠다. 그가 작게 소리 내어 웃으며 다시 춤 동작을 이었다.

    “농담이었어.”

    그녀를 리드하는 손길은 정중하기 짝이 없었다. 이제껏 그녀의 귓가에 지껄인 더러운 말을 내뱉은 사람이라고는 상상할 수 없는 태도였다. 혜미가 이를 갈며 이글거리는 눈으로 그를 쏘아보았다.

    “농담은 상대가 재밌으라고 하는 거야.”

    “누님이 뭔가 착각하고 있는 것 같은데.”

    크리스티앙이 미간을 모으며 고개를 조금 기울였다.

    “내가 농담할 땐 남을 위해서가 아니라 날 위해서인걸.”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