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2화 (52/72)

“폐하께서도 절, 사랑하십니까?”

그녀의 눈앞에는 예전의 모습을 완벽하게 찾은 베네딕트가 있었다. 시커멓게 빛을 잃었던 머리카락은 다시금 길어져 별빛처럼 반짝였고 상처투성이이던 몸뚱이는 마치 이 세상 사람이 아닌 것처럼 환한 빛을 내뿜었다.

“대답해 주세요.”

심장이 격하게 울렁거렸다. 부정할 수 없는 눈앞의 진실. 혜미는 울음 섞인 목소리를 배 속에서부터 간신히 끌어 올려 속삭이듯 내뱉었다.

“…그런 것… 같아요….”

“그렇군요. 폐하.”

그런 거군요. 중얼거린 베네딕트가 그녀를 끌어안고 더욱더 까마득한 절정 속으로 그녀를 이끌었다. 하체를 치받는 움직임이 격해지자 혜미가 쾌감을 이기지 못해 턱을 치켜들고 소리 내어 울었다.

“아! 아아!!!”

바닥이 어딘지 모를 어둠에 쑥, 쑥, 발이 빠졌다. 진득한 쾌감은 그녀를 나락 끝으로 이끌고 있었다. 빠져나갈 수가 없다.

“말해 주세요. 사랑한다고, 황녀는 교황을 사랑한다고, 이 자리에서 늘 제게 말했던 것처럼 고백해 주십시오.”

혜미의 눈동자가 흐리게 뜨였다. 하얀 이가 입술을 지그시 씹었다.

“…못 하시겠습니까…?”

그녀의 귓가를 비집는 베네딕트의 목소리가 기묘하게 뒤틀렸다. 시야에 비치는 그의 머리카락 색이 빛을 잃는 것 같은 착각에 혜미가 그를 부둥켜안았다.

“…사랑해요….”

“마지못해 내뱉는 말은 상대에게 상처를 줄 뿐입니다.”

베네딕트의 푸른 눈이 흐릿하게 사라지는 듯했다. 혜미에게서 다급한 목소리가 터져 나갔다.

“…사랑해요…! 당신을 사랑해요…! 흐읏….”

그녀가 외치며 매달리는 순간 강렬한 쾌감이 몸을 휩쓸었다. 연이은 오르가슴에 온몸에 힘이 다 빠져나가는데, 몸이 무겁지 않고 가벼웠다. 차갑고 부드러운 구름 위를 나뒹구는 기분. 온몸을 치밀한 깃털로 간질이는 느낌.

하아, 하아, 소리도 내지 못하고 숨을 몰아쉬는 그녀의 귓가로 바깥에서 돌풍이 부는 소리가 아득하게 들린다.

“그렇군요.”

베네딕트가 고개를 숙여 그녀의 입술에 대고 속삭였다.

“그대와 저는 지금, 사랑을 하고 있는 거군요. 에데르트.”

달콤한 숨결이 온몸에 퍼지며 심장이 더 빨리 뛸 수 없을 것처럼 강하게 두근거렸다.

혜미는 그의 미끈한 허리에 두 다리를 휘감고 매달렸다. 베네딕트의 기다란 머리카락이 새파랗게 일렁이는 그의 눈동자를 가렸다. 푸른색이던 마력의 기운에 붉은색이 뒤엉키자 짙은 보랏빛이 되어 빛났다. 베네딕트의 심장에서 마법사의 보석이 그를 태울 듯 발열하고 있는 까닭이었다.

“…그대는 저를, 미천한 대마법사를 사랑하시게 된 거군요. 그렇죠?”

“응…. 응! 사랑해요, 아아, 사랑해요…. 흣…. 베네딕트…. 흣…!”

베네딕트가 신음하는 그녀의 입술을 진하게 빨며 격한 추삽질을 이어 나갔다.

“저 역시 그러합니다.”

이전보다는 조금 더 거칠고, 자제력이 없는 움직임이었다.

“…그대를 사랑합니다. 에데르트.”

황제를 위해 인생 전부를 희생하는 대마법사의 운명. 베네딕트는 자신의 운명을 거스르지 않기로 마음을 먹었다. 다만, 그 방법이 지금까지 했던 모든 이들과는 다를 뿐이다.

“그대에게 제 모든 것을 드립니다.”

혜미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녀에게 같은 말을 했던 남자. 발터가 머릿속에 떠오르는 순간, 베네딕트가 그녀의 눈을 직시하며 속삭였다.

“폐하께 사랑이란 감정을 가르쳐 준 많은 이들을 축복하겠습니다.”

“하, 하아….”

“폐하를 무사히 이곳까지 호위해 저에게 데려와 준 그 역시도.”

그의 아비는 그녀를 황궁 바깥으로 빼냈고, 그는 그녀를 이곳으로 되돌려 놓았다. 그것이 발터의 역할이었음을 강조하는 베네딕트의 목소리가 가늘게 낮아졌다.

철없던 황녀의 풋사랑은 이제 끝났다.

혜미가 그의 팔뚝을 강하게 움켜쥐자 베네딕트가 이를 꽉 물고 숨을 몰아쉬며 사정했다. 체액이 퍼부어져 혜미의 온몸에 스며들었다. 견디지 못하고 크게 울음을 터뜨리는 그녀의 목소리가 비를 뚫고 후원 밖까지 울려 퍼졌다.

억수같이 퍼붓는 비는 그 밤 내내, 멈출 줄을 몰랐다.

***

혜미는 황녀의 침실에 우뚝 선 채 골똘히 생각에 잠겨 있었다.

“다 되었습니다, 전하.”

며칠 전 후원에서의 일을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실체를 확실히 할 수 없는 찜찜한 기분이 든 탓이었다. 새벽이 밝아올 때쯤, 후원을 나서던 베네딕트의 모습은 그녀가 갤러리에서 그를 처음 보았던 처참한 모습으로 돌아와 있었다.

마력을 회복한 그의 위장술이라고 이해했지만,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자꾸만 이상한 느낌이다. 게다가 베네딕트가 흥분을 감추지 못할 때면 가끔 들려오던 그의 목소리가….

“황녀 전하…?”

“네?”

그녀가 퍼뜩 정신을 차렸다. 거울 안에서 시녀가 당황한 표정을 애써 감춘 채 공손히 고개를 숙였다.

“준비가 완료되었습니다.”

너무 깊이 생각에 빠져 있어 치장을 다 마친 것도 모르고 있었다. 원로원과 최고 귀족들이 모두 모인 황궁 주최의 무도회가 바로 오늘이었다.

“…이건 좀 너무 화려한 거 아닌가요?”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며 혜미가 중얼거렸다. 아무리 파티라지만 이건 좀 심한데.

“아름다우십니다.”

펭귄 대신이 한 땀 한 땀 심혈을 기울여 직접 제작했다는 순백의 드레스는 그녀의 몸에 맞춘 듯 잘 맞았다. 맞춤복이니 당연한 건가. 가슴이 깊게 파여 어깨선을 그대로 내보이는 드레스는 그녀의 몸 곡선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었는데, 소위 말하는 머메이드 드레스의 백 배쯤 화려한 버전으로 보였다.

양 골반에서 무릎 바로 위, 허벅지까지 밀착한 실크 위에는 역 괄호 모양으로 비스듬히 칼집 같은 틈을 냈다. 레이스를 덧대었어도 그 사이로 살이 비치는 것은 당연했다. 풍만한 골반과 긴 다리가 강조되는 것까지는 좋지만 맨살이 보이는 건 막을 수가 없다. 허벅지까지는 타이트하게 달라붙고 무릎 아래에서부터는 살짝 여유가 생기는 드레스는 마치 웨딩드레스처럼 뒤가 길었다.

“바닥 다 쓸고 다닐 것 같은데.”

“파티장의 청결 상태에 대해서는 염려하지 마십시오.”

시녀가 차분히 답했지만 혜미의 문제는 그뿐만이 아니었다. 거울을 보며 그녀가 양팔을 들어 보았다. 역시나 속이 훤히 비치는 하얀 레이스로 팔을 감쌌는데 투명한 나비의 날개처럼 보이는 착각이 들었다. 게다가 시스루 소매의 끄트머리는 드레스 자락과 풍성하게 연결이 되어 있었다.

“박쥐도 아니고 이게 뭐냐고요.”

“전하….”

“봐요. 이거. 응?”

양팔을 날갯짓하듯 펄럭펄럭 들어 보이는 그녀를 향해 시녀가 푸훗,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가 이내 표정을 갈무리했다. 황녀가 엉뚱한 말을 내뱉는 데에는 익숙해졌다고 생각했는데도 가끔 참을 수가 없어졌다.

“황녀 전하. 눈을 뗄 수 없을 만큼 아름다우셔요. 파티장에 참석한 모든 귀족들이 전하와 사랑에 빠질 게 틀림없답니다.”

“설마요. 다들 놀러 온 것도 아닌데.”

혜미가 허물없이 답하자 시녀의 말투에도 조금 긴장이 풀어졌다. 그녀가 가발을 붙여 우아하게 위로 틀어 올린 혜미의 머리카락을 매만져 주며 입을 열었다.

“황궁의 파티는 귀족이 즐길 수 있는 가장 고급 유흥인걸요. 게다가 이번은 황제 폐하가 직접 참석하시기 때문에 아메티스의 최고 귀족들을 전부 한 자리에서 볼 수 있는 것과 다름없답니다.”

“그래서 더 전쟁터 같지 않을까요?”

“전쟁터에서도 사랑은 할 수 있죠. 하물며 가면무도회라면 더더욱.”

지금은 그녀의 시중을 들고 있는 이 역시 귀족의 딸로 최근 엄격한 심사를 거쳐 입궁한 이였다. 흥분을 살며시 드러내며 그녀가 혜미에게 속삭였다.

“사이가 좋지 않은 집안들의 자제끼리 사랑에 빠져 곤란한 일이 일어난 게 한두 번이 아니랍니다. 뭐, 오늘의 주인공은 단연 황녀 전하이시겠지만요.”

혜미는 세월 좋은 소리를 하고 있는 시녀에게 뭐라고 할 말이 없어 화장대 위에 놓인 가면을 손에 들었다. 눈과 얼굴을 반을 가리는 가면이었는데, 보석이 잔뜩 박혀 화려했고 얼굴에도 잘 맞았다. 발톱 크기까지 잴 기세로 이리저리 사이즈를 재던 노력이 그저 쇼는 아니었던 모양이었다.

“흠.”

가벼운 노크 소리와 함께 침실 바깥에서 발터의 목소리가 들렸다.

“나가야 할 시간이야.”

“응, 발터.”

혜미는 가면을 손에 든 채, 응접실과 연결된 문을 열었다.

“…….”

꿀꺽. 그녀 앞에 말없이 서 있는 남자를 보자 마른침이 절로 넘어갔다. 새삼스레 가슴이 두근거려 심장이 목구멍으로 튀어나올 뻔했다. 펭귄 대신이 그를 향해 지어 준 옷은 갑옷이었다.

“그 할아버지가 돌았나…. 정말….”

혜미가 마침내 떨리는 목소리로 중얼거리자 발터의 콧잔등이 붉어졌다.

“이런 무거운 걸 걸치고 어떻게 움직이라고….”

그의 가슴에 손을 얹던 혜미가 움찔하며 손을 멈추었다. 금속이라고 생각했던 것은 청회색 가죽이었다. 상박과 팔뚝이 분리되어 그의 커다란 몸통을 감싸고 있는 갑옷은 그의 골격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었다.

옷을 입은 것보다 벗은 게 더 아름다운 발터. 목 아래부터 발끝까지 살이 보이는 곳은 아무 데도 없었지만 그 때문에 더욱 금욕적인 아름다움이 느껴진다. 지금 당장이라도 그의 옷을 벗기고 싶을 만큼.

“몸은 좀, 괜찮아?”

며칠 전, 베네딕트와 헤어지고 나서 황궁으로 돌아왔을 때, 발터는 흠뻑 젖은 몸을 수건으로 닦고 있는 채였다. 이제껏 태어나서 단 한 번도 앓아누운 적이 없었다는 그는 이틀 동안 컨디션이 몹시 좋지 않아 보였다.

식은땀이 송골송골 맺혀 있는 것을 이틀째 보던 날, 혜미가 의사를 부르려 했지만 발터가 강력하게 거절했기 때문에 어쩔 수가 없었다.

그녀의 침대에 그를 들이고 괴로워하는 그의 땀을 닦아 준 게 어젯밤이었다. 오늘도 그가 아프면 무도회고 뭐고 핑계를 대고 무슨 수를 내서건 빠질 생각이었는데. 아침에 눈을 떴을 때 그녀는 침대 안이었고 언제 그녀를 옮긴 건지 알 수 없는 발터는 옷을 가져온 대신들을 응접실에서 응대하고 있었다.

“아직도 안 좋아?”

혜미가 재차 묻자 인상을 찌푸린 채 말없이 그녀를 바라보던 발터가 마른침을 한 번 삼킨 후, 낮게 입을 열었다.

“아무렇지도 않아.”

그의 얼굴은 여전히 조금 붉었다. 이제 봤더니 눈까지 빨간 것 같다. 역시 아직 아픈 걸까.

“어디 봐.”

혜미가 작게 중얼거리며 그의 이마에 손을 대자 발터가 고개를 비스듬히 떨어뜨렸다. 다행히 열은 없었지만 그녀의 눈을 피하는 것 같은 발터의 태도에 조금 거리감이 느껴졌다. 혜미는 멋쩍게 손을 아래로 떨구었다.

똑똑.

“황녀 전하. 아뢰옵기 송구하오나 이제 정말 내려가셔야 할 시간이라….”

바깥에서 시종장이 안절부절못하고 있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발터가 그녀에게서 멀어지며 얇은 금속으로 만든 마스크를 얼굴에 썼다.

이마부터 콧등까지를 가리는 마스크는 변태적인 펭귄 대신의 취향을 보여 주듯 발터의 이목구비를 그대로 재현해 놓은 것과 같이 뚜렷하고 섬세했다.

“후….”

감탄만 하고 있을 시간이 없었다. 무도회는 이미 시작되었고 귀족들도 모두 도착을 했다는 전갈을 이미 몇 시간 전에 전해 들었다. 주인공은 원래 가장 늦게 나타나야 하는 법이라며 따분한 소리를 지껄이던 시종장이 급하게 서두르는 걸 보니, 이제는 정말로 나가야 할 시간인 것 같았다.

“잠시만.”

발터가 뒤돌아 발을 떼는 그녀를 가볍게 돌려세웠다.

“…응?”

혜미의 손에 들려 있던 눈가리개를 씌워 주는 발터의 손이 보이지 않게 떨렸다.

“발터.”

갈색 눈동자가 이번에는 그녀를 피하지 않았다. 그가 말없이 그녀를 직시했다. 귀족들 앞에 공식적으로 나가는 순간의 긴장감. 크리스티앙을 또 한 번 마주쳐야 한다는 부담감에 어깨에 돌을 멘 듯 무거웠다. 혜미의 손이 그의 어깨 위에서 의미를 담고 신호를 그리며 움직였다.

나 괜찮을까.

가면 뒤로 그녀를 보는 발터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대신 그녀의 손을 이끌어 그의 팔짱을 끼게 할 뿐이었다. 얇은 갑옷 아래 발터의 단단한 몸이 닿았다. 살아 있음을 확신시키는 뜨거운 체온. 혜미는 그를 힘주어 꽉 잡았다. 떨리는 건 여전했지만 거짓말처럼 긴장이 한 꺼풀 옷을 벗는다.

‘나는 너의 곁에 있다. 이든.’

발터가 불사신이 아니라는 것은 알고 있다. 적으로 가득한 이 공간 안에서 그의 안전 역시 보장할 수 없다는 사실 역시. 하지만 단 한 가지 확실한 건.

그녀의 마지막엔 그 역시 함께할 거라는 것.

전쟁터 같은 이곳에서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만으로도 충분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시종장이 그녀를 기다리다 지쳐 결국 문을 열었다. 혜미가 정면을 보며 낮게 내뱉었다.

“가자, 발터.”

“예. 폐하.”

호위 무사의 팔짱을 끼고 거침없이 발을 내딛는 황녀의 앞으로 끝도 없이 죽 늘어선 시종들이 일제히 고개를 숙였다.

***

아메티스는 겨울에 얼음이 얼지도 눈이 내리지도 않았다. 상대적으로 온난한 기후라고 말할 수 있었지만, 황량한 초겨울의 바람까지 피해갈 수 있는 수준은 아니었다. 오히려 수도 내 사람들은 겨울나기를 더욱 힘들어했다. 제국 내 다른 지역에 비해 난방을 신경 쓰지 않는 탓이었다.

클라웨에서 가장 큰 축제가 겨울에 열리는 이유 역시, 침체된 도시에 활기를 불어넣기 위함이었다. 겨울제가 예정되어 있는 달을 앞두고 사교계는 파티를 자제했다. 손님 접대와 준비로 귀족 가문부터 평민들까지 모두 바쁜 시기였기 때문이다. 아메티스의 초겨울은 사교계가 가장 조용한 기간이었지만 올해만은 달랐다.

“헤세 자작가의 마차 두 대 통과합니다.”

“초대장을 확인하겠습니다.”

“베르니 남작 영애가 도착하셨습니다.”

11월. 싸늘한 밤공기를 뚫고 화려한 사륜마차가 황금성을 향해 달렸다. 황궁 경비대를 통과하는 기나긴 행렬이 연신 이어졌다.

자신의 결혼식까지 약식으로 치러 버린 황제가 18세의 대관식 이후 수년 만에 처음 주최하는 파티였다. 초대장을 받은 귀족들이 열 일을 제쳐두고 흥분해 모여든 것은 당연했다.

“개선문을 세운 것도 모자라 파티까지 여시다니. 폐하께서 그만큼 누이를 신경 쓰고 계시다는 뜻이 아니겠어요?”

“그런데… 우리를 어디로 인도하는 거죠?”

연회장을 지나 자꾸만 건물의 위로 향하는 경비원을 따르며 귀족들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도착하였습니다.”

삼엄한 경비를 뚫고 황궁 중심부에 들어온 귀족들이 안내된 연회 장소는 그들의 입을 떡 벌어지게 만들었다. 문이 열리는 순간, 귀족들의 반응은 한결같았다.

“정말… 대단해요.”

그들의 눈앞에는 다른 세상이 펼쳐져 있었다.

두 건물의 옥상을 연결하여 만든 거대한 테라스. 구름다리로 이어진 플라틴 제3 성과 제4 성의 꼭대기는 아름다운 공중정 원으로 탈바꿈해 환하게 불을 밝혔다. 황제가 그들을 초대한 곳은 그 어느 연회장이나 대저택의 정원과도 비교할 수 없는 화려한 공간이었다. 가면 뒤에서 잔뜩 흥분한 눈동자가 반짝거렸다.

“폐하께서 직접 파티를 주최하신 것은 대관식 이후 처음이라 예상은 했었지만….”

“이건 정말 엄청나군요.”

아메티스 시내를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는 장소였지만 그렇기 때문에 더욱 현실감이 없었다. 그들이 마치 하늘 위에서 인간 세상을 바라보며 연회를 즐기는 신이 된 듯한 착각에 사로잡히는 것은 당연했다.

“오늘 이곳에 초대받지 못한 촌뜨기들이 안타까워질 정도네요.”

굽이굽이 꺾인 형태의 키가 높은 관상수의 이파리들은 계절을 무시하고 풍성한 잎사귀를 자랑했다. 둥그런 초로 만든 수만 개의 전등이 나뭇가지에 걸린 별처럼 반짝였다. 여기저기서 횃불처럼 불타오르는 불꽃들은 조명과 보온 기능을 동시에 행하고 있어 추위를 느낄 틈이 없었다.

하필이면 달무리도 붉은 밤이었다. 본격적인 춤곡이 시작되기 전, 파티의 시작을 알리는 아름다운 피리 소리가 고혹적인 달빛에 어우러져 더욱 몽환적인 분위기를 내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한 거죠…?”

섬세하게 세공된 조각상을 배경으로 곳곳에서 분수가 힘차게 물을 뿜어냈다. 성의 꼭대기까지 이 정도의 물을 끌어 올리는 것은 보통의 인력 가지고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분수의 주위로 타오르는 불빛을 물이 반사해 마치 녹인 황금이 흘러내리는 듯한 착각마저 주었다.

“하이데거 대공이 마력을 얻은 게 사실인가 보군.”

“공작저에서 한동안 두문불출하는 바람에 무슨 역병이라도 걸린 것이 아닌가 하는 소문이 들리기까지 했었는데….”

“쉿. 말을 아끼시오, 부인.”

두 건물을 잇는 구름다리의 아치형 지붕은 만개한 연분홍 장미꽃이 뒤덮고 있었다. 계절이 무색한 풍경을 바라보며 누군가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이건 역대 교황들도 하지 못한 일이 아닌가요…? 이걸로 차기 교황은 확정인 셈이군요.”

“공석이 된 교황 자리를 그대로 둘 순 없는 노릇이니까요. 민심을 안정시키기 위해서라도 그러할 겁니다.”

수군거리며 대화를 나누는 귀족들에게서 멀찍이 떨어진 채 혜미가 낮게 한숨을 삼켰다. 입 모양을 읽을 수 있는 것은 자신뿐만이 아니었다. 지금 그녀의 곁에 말없이 서 있는 발터 역시 그들의 대화를 알아듣고 있는 중일 테다. 그들이 달갑지 않은 파티에 참석해야 하는 이유 중 가장 큰 것은 역시 귀족들의 동태를 살피기 위함이었다.

“10년 전만 해도 이런 일을 그 누가 상상이나 했었을까요. 빚으로 망하기 직전의 한미했던 가문이 이토록….”

귀족 부인 하나가 깃털이 달린 부채로 입을 가렸다. 이어지는 뒷말은 쉽게 상상할 수 있었다.

현재 황제를 제외하고 제국 내에서 가장 강력한 힘을 가진 이는 하이데거 가문이었다. 공작가의 장자인 에리히 폰 하이데거. 원로원의 수장이며 황궁 경비대의 총지휘관, 게다가 황후까지 배출한 공작가의 권력을 따라올 이는 아무도 없었다. 물론 거기에 뒷배를 확실히 실어 준 이가 크리스티앙이라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하지만.

혜미의 생각은 조금 더 복잡했다. 그녀가 만약 크리스티앙의 상황이라면 어떨까. 그는 딱 봐도 의심이 많고 예민한 성격이었다. 정신을 잃을 때까지 입 안에 약을 털어 넣지 않으면 잠을 이루지 못한다는 것만 봐도 그랬다. 권력의 정점에 선 하이데거가 마력까지 얻은 지금 상황에 크리스티앙은….

‘불안하지 않을까?’

그녀의 마음속에 불쑥 고개를 쳐든 의문이었다. 혜미는 은으로 된 트롤리를 밀며 바쁘게 움직이는 시종을 바라보며 생각을 이어 나갔다.

온몸이 찢긴 베네딕트를 벌레 보듯 응시하던 크리스티앙의 시선을 떠올렸다. 오래된 세월이 쌓이고 쌓여 축적된 증오는 그녀의 눈에도 또렷하게 보였다. 그리고 숨길 수 없이 위를 향하던 붉은 입술까지도. 크리스티앙은 진심으로 그의 고통을 즐거워하고 있었다.

이해하지 못할 일은 아니었다. 농담으로라도 베네딕트의 성격이 좋다고 할 수는 없었다. 그녀에게 다정하게 대한다고 해서 그의 비틀린 화법이나 사람 속을 부글부글 끓게 만드는 기술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베네딕트는 크리스티앙의 최대 약점인 출생의 비밀까지 알고 있으니, 교황과 황실의 선택을 받지 못한 황제라는 점을 이용해 그를 열받게 만들었을 게 당연했다. 사실 그럴 때마다 크리스티앙 역시 그를 난도질하며 화를 풀었지만 혜미가 거기까지 알 수 있는 방법은 없었다. 그저 그녀는 황제가 교황을 증오하게 된 동기를 어렴풋이 넘겨짚을 뿐이었다.

천적 같은 존재. 눈엣가시 같았을 교황 베네딕트를 좌천시키려는 것은 아마도 크리스티앙의 큰 그림 중 하나였을 거라는 예감이 들었다. 그가 마법사들을 교황청에 가둬 두고 무슨 일을 벌였을지도 대충 예상이 갔다.

황제는 베네딕트를 내치고 새로운 교황을 세우기 위해 마력 실험을 계속해 왔고, 그 자리에 직접 하이데거를 선택해 앉혔다. 그만큼 그의 충절이 남달랐다는 뜻일 테다.

하지만 워낙 의심이 많은 크리스티앙이다. 아무리 자신이 직접 손에 쥐여 준 권력이라 한들, 그것이 통제가 불가능할 정도로 커지는 걸 바라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이제 와 그가 하이데거를 내치는 것도 말이 되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최후의 보루로 믿을 수 있는 것이 핏줄이라지만, 지금 크리스티앙에게는 아무도 없었다. 그의 어머니인 황태후가 사망한 이후, 그녀의 가문은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영지를 황실에 반납한 후 권력에서 동떨어진 서쪽의 작은 성으로 이주했다. 유일하게 남은 이복누이는 태생부터가 그와는 적이었고, 실은 아버지마저 달라 완벽한 남남이었다.

‘…어.’

거기까지 생각하던 혜미는 잠시 멈칫했다. 베네딕트에게 미처 확인하지 못했던 한 가지가 떠오른 까닭이었다. 그녀는 제 입술을 슬쩍 깨물었다.

왜 가장 중요한 사실을 묻는 것을 까먹었던 걸까. 크리스티앙의 친부가 만약 살아 있다면, 현재 황제가 신뢰할 수 있는 마지막 보루는 아마도 그쪽이었다.

‘아아, 진짜….’

혜미가 낭패감에 길게 숨을 들이켰다 내쉬었다. 자신이 물어보지 않았다고 해서 말해 주지 않은 베네딕트도 짜증 나기는 마찬가지였지만, 지금은 그 사실을 따질 때가 아니었다.

“왜 그래?”

발터가 고개를 돌려 의문 섞인 시선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상태를 눈치채는 발터의 본능은 거의 동물적이었다. 혜미는 트롤리에서 술잔을 두 잔 들어 발터에게 하나를 자연스레 건넸다.

“좀 걸을까, 우리?”

아까부터 눈치를 살피며 그녀의 주위에서 얼쩡거리는 시종에게서 벗어나기 위함이었다. 발터가 알아듣고 짤막하게 고개를 숙였다.

“…예.”

혜미는 한 손에는 술잔을 들고 다른 한 손으로는 발터의 팔짱을 낀 채 정원을 천천히 걸었다. 사람들의 시선을 받으며 커다란 나무로 걸어간 후, 오렌지빛 과실을 구경하는 척하며 조용히 입을 열었다.

“발터, 북부를 지키고 있다는 그 장군 이름이 뭐였지?”

“호아킴을 말하는 건가?”

가물가물했던 이름이 이제야 기억났다.

“그… 클라웨에서 가장 많은 군대를 거느리고 있다는 사람이지?”

“맞아.”

크리스티앙이 아직 황태자였던 시절, 그를 북부 경계선으로 좌천시킨 것도 당연한 일이었을 것이다. 그가 아메티스에 계속 있었다면 지금 하이데거가 가지고 있는 막강한 권력은 양분되었을 게 틀림없었다. 발터의 설명을 들으며 자연스레 술잔에 입술을 갖다 대는 혜미의 눈빛이 조금 더 어두워졌다.

“만약… 그가 아메티스로 귀환한다면 어떻게 될까?”

웬만해서는 말을 망설이지 않는 발터가 수 초간 침묵했다. 황궁 근위대가 나누는 대화를 엿들어 본 결과, 황실에서는 호아킴 장군이 돌아올지도 모른다는 소식이 돌고 있었다. 황태후가 서거한 후 북부 정벌을 위해 떠났으니 햇수로는 9년 만이었다.

“…그가 우리의 손을 잡는다면 가장 좋겠지만.”

“…….”

“낙관적인 가정이겠지.”

혜미가 마른침을 삼켰다. 덤덤하게 말하고 있었지만 발터의 대답이 의미하는 바는 컸다. 호아킴과 싸우는 것이 그만큼 힘들다는 뜻이다.

“하지만 호아킴 역시 본인이 수년간 내돌려진 것에 대한 불만은 분명히 있을 거야.”

발터의 말에는 일리가 있었다. 자일룬의 왕인 리가스를 쓰러뜨린 직후, 리비에르는 황제의 전언을 받았다. 군대를 이끌고 북부로 떠나라는 명이었다.

혜미는 그 당시 얼굴이 하얗게 질린 리비에르가 얼마만큼 충격을 받았었는지 똑똑히 기억했다. 리비에르는 황제의 서신을 손안에서 구기며 온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어찌… 어찌 폐하께서 내게 이럴 수가 있습니까…!”

그들이 전쟁을 치른 야만족은 그나마 인간이었다. 하지만 북부에서 그들이 싸워야 하는 것은 이따금 출몰해 도시를 쑥대밭으로 만드는 마물이었다. 마물이 지나간 자리에는 한 해 동안 곡식도 자라지 않는다고 했다. 북부에서 사는 주민들이 힘들어하는 이유는 바로 그것이었다.

그나마 호아킴과 그의 군대가 주둔해 있었기 때문에 마물이 남하하는 것을 간신히 막고 있는 상태다.

하이데거가 나타나 황제의 첫 번째 전언을 태워 버리고 리비에르에게 수도로 돌아오라는 새로운 명령을 전달했지만, 리비에르는 아마 그 일을 쉽게 잊을 수 없을 게 분명했다. 그녀는 성공과 그에 다른 보상을 누구보다 중요시하는 인물이었으니까.

리비에르는 명예욕과 전시욕이 강했다. 그것이 평민 이하 신분이었던 그녀를 지금 이 자리까지 오르게 한 힘이었다.

“크리스티앙 역시 호아킴을 회유하려 하겠지. 북부를 비우는 위험을 무릅쓰고 이 상황에 그를 불러들이는 이유는 그쪽일 가능성이 가장 높아.”

발터는 선황 클라웨 8세의 죽음에 크리스티앙의 어미가 깊게 관련되어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황제가 서거했던 마지막 전쟁에 참여했던 가문은 여럿이었다. 그중에는 하르트만과 호아킴의 군대도 포함되어 있었다. 하르트만이 황제를 암살했다는 누명을 쓰고 자결한 후, 하르트만 후작 부인인 클라라 하르트만은 납작 엎드려 살았다.

“반대로 권세를 얻은 쪽은 호아킴이었어.”

“어째서?”

“태후가 당시 열 살이었던 황태자 크리스티앙을 앞세워 섭정을 했던 건 알고 있지?”

“응.”

“호아킴 장군은 태후 카트린의 동향이었고 고향에 있을 때는 그녀의 호위 기사였다.”

혜미의 팔뚝에 갑자기 살갗이 오소소 일어났다. 태후 카트린은 크리스티앙의 친모다. 그녀와 호아킴의 관계가 가까웠다는 사실을 듣자 불안한 예감이 감돌았다.

“호아킴이 북부로 떠난 게 언제였다고?”

“태후가 급작스레 사망한 이후.”

황실의 근위대장이자 태후의 호위 기사였던 호아킴은 책임을 지고 물러나야 했다. 그것은 태후가 의문사한 이후 당시 황태자였던 크리스티앙이 가장 먼저 내린 단독적인 결정이었다. 이후 원로원에 불었던 피바람의 시초가 되었던 사건이기도 했다.

“만약 호아킴이 북부로 떠난 게 압박에 의한 것이 아니었다면?”

“…무슨 뜻이야?”

혜미가 그의 손을 잡자 발터가 조금 움찔했다. 그녀의 손가락이 빠르게 글씨를 이어 나갔다.

베네딕트의 말에 따르면 크리스티앙은 선황의 친자가 아니야.

“…뭐라고?”

그가 그녀의 손을 꽉 움켜쥐듯 잡았다. 짙은 눈썹이 꿈틀거리며 날카롭게 휘어졌다. 발터의 반응은 이 사실을 처음 들었던 그녀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가면을 쓰고 있는 게 다행이었다. 가면 뒤에서 그의 얼굴이 어떤 엄청난 표정을 하고 있을지 눈에 보이는 듯 선명했다.

“왜 진작 내게 말하지 않았어.”

“네가 아팠잖아.”

갈색 눈동자를 이글거리는 발터를 향해 혜미가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침대가 흠뻑 젖을 정도로 땀 흘리며 앓는 사람한테 복잡한 이야기 하고 싶지 않았어.”

“이든.”

한숨 쉬며 그녀의 손을 꽉 쥔 발터의 손바닥에서 맥박이 강하게 뛰었다. 찌푸린 미간에서 그의 심정이 보이는 것만 같아 혜미가 재빨리 입을 뗐다.

“그래서 지금 말하고 있잖아.”

그가 마른침을 삼킨 후, 들릴 듯 말 듯 한 목소리로 입을 뗐다.

“…증거는?”

혜미가 작게 고개를 저었다.

“없어.”

하지만 심증이 가는 것은 당연했다. 선황이 황녀의 공식적인 죽음 이후, 죽을 때까지 후계자를 따로 책봉하지 않았다는 사실 역시 많은 것을 시사했다.

선황은 크리스티앙을 친자로 인정하지 않았고, 에데르트가 성인이 되어 제 편을 만들고 궁으로 돌아올 때까지 그녀의 존재를 안전하게 숨긴 채 기다렸던 것이다.

호아킴의 출신이 태후인 카트린의 호위 기사였다는 사실 역시 발터의 머릿속을 지끈거리게 만들었다. 눈앞에 서 있는 그녀와 자신과의 관계를 대입해 보니 어쩔 수 없이 목덜미가 뜨끈하게 달아오른다.

“넌 그럼, 그의 친아비가….”

발터가 뒷말을 잇지 못하고 흐렸다. 혜미가 진지한 얼굴로 짧게 동의했다.

“응. 아직은 가정일 뿐이지만.”

길게 빠진 그의 눈매가 더욱 심각함을 띠고 가늘어졌다. 당시 열셋이었던 크리스티앙에게 뒤에서 힘을 실어 준 게 호아킴이었다면, 그리고 황제와 그가 혈육으로 묶인 관계라면 일은 그들에게 매우 불리했다. 호아킴을 회유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다는 뜻이다. 그것은 발터가 생각하고 있던 계획과도 전면적으로 어긋났다.

“연회가 끝나자마자 교황을 만나야겠어.”

발터가 낮게 중얼거렸다.

“…네가 직접 만나겠다는 뜻이야?”

“…안 되나?”

그녀를 향해 짤막하게 되묻는 발터의 눈빛에 스치는 괴로움이 스쳤다. 그 시선에 담긴 아픔을 혜미가 모른 척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건 아니지만….”

두 사람이 만나는 것을 마냥 반가워할 수만은 없는 입장이었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는 그녀를 향해 발터가 입을 열었다.

“이든, 난 그를 믿을 수 없어. 그가 네게 하는 말이 진실인지 아닌지 매 순간 의심스럽다.”

발터는 베네딕트를 불신하는 본인의 감정이 남자의 치졸한 질투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애써 잡아 눌렀다. 그녀에 대한 애정만큼이나 자신의 충성심이 강하다는 사실을 스스로 상기했다. 지금 그의 목표는 이든을 본래 자리로 돌려놓는 것뿐이었다.

“발터….”

“내 말뜻을 오해하지 마. 그저 위험을 최소화하려는 것뿐이야. 호아킴에 대해서도 확실히 확인할 겸.”

“그래. 내가 무슨 수를 써서건 자리를 마련해 볼게.”

결국 혜미가 고개를 끄덕였다. 교황이 속으로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는 건 그녀 역시 마찬가지였다. 어쩌면 그녀가 미처 생각하지 못하는 정보를 발터가 물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이… 다 잘 끝난다고 해도 걱정이네.”

어쩔 수 없이 가라앉은 분위기를 환기시키려 혜미가 화제를 바꾸었다. 그녀는 발터에게서 시선을 떼곤 머리 위로 늘어진 나뭇가지에 열린 과실을 손가락으로 툭, 건드렸다. 잘 익은 과일의 빛깔은 윤기가 흘러 아름다웠지만 향기가 없었다.

베네딕트가 가꾸던 후원과 하이데거가 만들었을 이 정원이 다른 점은 바로 이런 것들이었다. 교황의 손이 닿는 곳에는 늘 축축한 흙냄새와 싱그러운 꽃향기가 감돌았다.

“뭐가?”

발터가 묵직한 시선으로 그녀의 옆모습을 응시하며 낮게 물었다. 혜미가 눈을 천천히 깜빡이며 혼잣말하듯 중얼거렸다.

“북부가 비게 되니까. 리가스를 잡을 때도 죽다가 살았는데 마물이라니. 거길 누가 가려고 하겠어.”

“내가 간다.”

나무 열매를 보고 있던 혜미가 시선을 휙 돌려 발터를 바라보았다.

“…뭐?”

얼굴을 가리는 가면을 쓰고 있는 까닭에 그녀가 볼 수 있는 것은 발터의 진심 어린 갈색 눈동자뿐이었다.

“모든 일이 다 끝나게 되면 내가 북부로 가.”

“…왜?”

혜미의 입술에서 바보 같은 질문이 튀어나왔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녀가 떨리는 목소리로 재차 물었다.

“네가, 왜?”

“그게 네가 날 가장 잘 쓸 수 있는 방법이니까.”

발터가 하는 말이 그냥 내뱉는 소리가 아니라는 건 그녀가 제일 잘 알았다. 그녀를 협박하기 위해 꺼낸 말도, 베네딕트와 관련된 일로 상심한 마음에 괜히 열을 내는 것도 아니었다.

애초부터 발터는 그런 성격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는 정말로 떠나겠다고 마음먹은 것이다. 혜미의 입술이 소리 없이 벌어졌다.

“호아킴에게 내가 북부로 자원하겠다는 이야기를 꺼내며 대화를 시작하려고 했는데, 네 예측이 사실이라면 그건 좀 두고 봐야겠어.”

충격받은 혜미의 귀에는 그가 뭐라고 덧붙이는 소리가 잘 들리지 않았다. 위험한 북부로 자원한다는 건 이별 통보와 같았다. 끝까지 그녀를 뒤에서 지키겠다는, 세상에서 가장 다정한 이별 통보.

발터다운 선택이다.

“발터, 나, 나는…!”

“이든.”

쏟아지는 별빛 속에서 환하게 빛나는 그녀를 보며 발터가 혼잣말하듯 그녀의 이름을 입 속에서 굴렸다.

“…폐하.”

눈이 부시게 아름다운 나의 연인. 나의 주군.

그녀가 베네딕트와 빗속의 후원에서 반나절을 보내고 나왔던 날. 그는 흠뻑 젖은 몸을 나무 뒤에 숨길 수밖에 없었다. 베네딕트와 발맞춰 천천히 걷는 그녀를 지켜보는 것밖에는 할 수 없는 게 그의 위치였다.

뒷길로 미친 듯이 달려 성에 돌아온 이후, 사흘 동안 식은땀을 흘리며 앓았다. 몸의 병이 아니라는 사실은 알고 있었다. 그가 앓았던 것은 마음의 병이다.

심장에서 불길이 터져 나가 손끝 발끝이 뜨거웠다. 찬바람을 맞아도 이마가 절절 끓었다. 폭발하는 열을 내면으로 감춘 까닭에 슬픔이 온몸을 축축하게 적셨다.

눈물이 땀이 되어 온몸에 소금기가 일었다. 천만다행이었다. 눈가를 적시며 감정을 토해 내는 순간, 또다시 이든의 앞에서 무너지지 않으리라는 법이 없었기 때문이다.

“네게는 이곳이 눈부시게 어울린다.”

드레스를 입고 머리를 틀어 올린 그녀를 처음 보았을 때, 발터는 확실히 깨달았다. 이제껏 머리로는 알고 있었지만 마음 한구석에서는 자그마한 유리 파편처럼 남아 있던 한 조각 감정의 잔여물까지 깨끗이 사라지는 기분이었다.

“이곳이 네가 있을 자리야.”

발터는 그녀를 향해 그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미소를 지으며 간신히 내뱉었다. 세르노티에서 흙바닥을 함께 뒹구는 것이 가장 어울린다고 생각했던 모습은 찾아볼 수가 없었다. 그녀는 발터가 감히 시선을 줄 수 없을 정도로 아름다웠다.

“발터, 하지만 나는….”

“그 이야기는 나중에 하자.”

발터가 눈에 띄게 당황한 표정으로 입을 여는 그녀의 말을 부드럽게 잘랐다. 그가 내린 결론은 하나였다. 그녀가 황제가 된다고 해도, 다른 이를 곁에 두고 사랑한다고 해도 발터의 마음은 변하지 않았다. 그럴 수가 없다.

자신의 심장은 이미 그녀에게 주었으니까. 하지만 다른 이의 품에 안긴 그녀를 감당해야 하는 것은 또 다른 문제였다. 평생을 고통 속에서 살아가는 것은 두렵지 않았다.

다만, 그는 자신의 한계가 두려웠다. 스스로가 어느 날 폭주해 그녀가 겨우 손에 넣은 행복을 망쳐 버릴 수는 없었다. 그녀의 삶을 한 번 빼앗은 것으로 이미 충분했다.

“일단은 눈앞의 일에 집중하는 게 중요하니까.”

그의 팔뚝을 꽉 잡은 그녀의 손이 가늘게 떨렸다. 발터가 그녀의 손등에 부드럽게 손바닥을 포갰다. 그리고 마치 스스로에게 되뇌듯 내뱉었다.

“나중 일이야.”

혜미는 긴장에 말라가는 입술을 축이며 마음을 가라앉히려 노력했다. 진정할 수 없는 것은 당연했다. 발터가 곁에 없는 자신을 떠올리는 것만으로 모든 게 무너지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여기서 그에게 가지 말라고 울고불고 매달리는 모습을 보일 수는 없었다. 모든 것을 다 내던지고 이곳까지 그녀를 호위한 발터의 진심을 안다면 그래서는 안 되는 일이다.

“그래, 발터.”

그의 말마따나 지금은 할 수 있는 일에 집중하고 모든 일이 끝난 후, 발터의 자리는 직접 찾아주면 될 일이었다. 그가 떠난다는 말만 들어도 심장이 죄는 것은 어쩔 수가 없어서 그녀의 곁에 있는 그를 더더욱 꽉 움켜쥐었을 때였다.

“이든.”

인기척이 들리자 혜미가 휙 뒤를 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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