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0화 (50/72)

“놀리는 게 아니라 기분이 좋아서 그랬습니다.”

“…….”

“폐하의 마음에 공간이… 이만큼은 생겨난 것 같아서.”

베네딕트가 상처 난 자신의 손을 들어 그녀의 가슴에 살며시 가져다 댔다.

“…이것보다 조금은 더 많을까.”

혼잣말하듯 속삭이며 가볍게 웃는 말투에 심장이 간질거렸다. 그의 손이 닿은 곳에서 맥박이 강하게 진동한다. 혜미가 피 묻은 수건을 꽉 쥐고 흠, 하고 목을 가다듬었다.

“…갑자기 안 어울리게 왜 그래요. 닭살 돋아요.”

“죽을 때가 되면 사람도 바뀐다고 하지 않습니까.”

“자꾸 그딴 소리 할 거예요?”

혜미가 그를 매섭게 째려보았다. 그는 죽음에 초연할 수 있을지 몰라도 그녀는 아니었다. 베네딕트가 그녀 쪽으로 고개를 기울였다.

“왜요. 제가 죽는 게 싫으십니까?”

조금 가까워지는 그의 숨결에 혜미의 입술이 저절로 말랐다. 조금 서늘한 방 안의 공기가 순식간에 농밀하게 변하는 느낌. 일상적인 대화를 하다가도 갑자기 슥, 방향을 묘한 쪽으로 바꾸는 재주가 있다면 베네딕트가 단연 일등이었다.

“폐하께선 절 싫어하시는 줄 알았는데요.”

코끝이 닿을 정도로 가까워진 거리에서 베네딕트가 고개를 기울였다.

‘하긴. 제가 정말 싫다면 쓸모없어진 저를 굳이 찾아오지도 않으셨겠지요.’

머릿속에 울려 퍼지는 그의 목소리가 쓸데없이 달콤했다. 혜미가 파르르 떨리는 속눈썹을 살며시 아래로 깔았을 때였다.

“얼굴 안 닦아 주실 겁니까?”

베네딕트의 목소리가 순식간에 태연하게 바뀌었다.

“…네? 아….”

무엇 때문에 그가 키스할 거라고 확신했던 거지? 무안해진 혜미는 그의 얼굴에 희미한 미소가 걸린 것도 눈치채지 못했다. 코를 마구 비빈 후, 수건을 다시 손에 쥐었을 때였다.

“황녀 전하…! 죄송합니다! 들어가는 걸 허해 주십시오!”

다급한 노크 소리와 함께 밖에서 걸렸던 빗장이 벗겨지는 소리가 났다. 시종장의 목소리가 평소의 잘난체하는 목소리와는 달리 몹시도 다급했다. 어제는 문을 벌컥 열고 시간이 다 됐다고 했으면서 갑자기 허락을 구하는 게 이상하다.

“…무슨 일이에요?”

의아한 혜미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문이 벌컥 열렸다.

“정원 산책을 허한다는 황제 폐하의 명이 있었습니다…!”

“어, 진짜요?”

혜미의 눈동자가 대번 동그랗게 커졌다. 이곳에 오기 전 시종을 보내 운을 띄워 보았지만 안 된다고 바로 거절당해서 포기하고 있었는데. 오늘이야말로 베네딕트를 데리고 바깥 공기를 마시게 할 수 있다는 뜻이었다.

‘저와 산책을 하게 해 달라고 청하셨습니까?’

‘네.’

‘왜죠?’

왜긴 왜야. 이 감옥 같은 곳에서 데리고 나가고 싶으니까 그랬지.

“베니… 착하죠. 빨리 일어나요. 응? 어서요.”

혜미가 속말을 삼키며 친근한 연인을 대하듯 그의 손목을 잡아끌었다.

‘그 자식의 마음이 바뀌기 전에 빨리 가자고요.’

‘저는 주인이 산책시켜 주기만을 기다리는 강아지가 아닙니다만.’

머릿속에서 울려 퍼지는 베네딕트의 목소리에 옅은 웃음기가 뱄다.

‘개 말고 사람도 가끔 광합성이 필요해요. 바깥공기 안 쏘이고 안에만 있으면 정신이 이상해진단 말이에요. 안 그래도 제정신도 아니면서….’

“…안 가십니까?”

“아, 간다고요! 거참 성격 급하시네…!”

혜미가 눈을 부라리며 버럭 소리를 지르자 시종장이 눈을 깜빡였다.

어쩜 이렇게 욱하는 모습이 하나도 안 무섭지. 화가 나면 사람의 숨통을 틀어쥐고 압박하는 크리스티앙 폐하와 닮은 곳은 여전히 한 군데도 찾을 수가 없다.

“방금 전에 소리 질러서 미안해요. 하하. 시종장님. 근데 여기 산책하기 좋은 곳이 어디예요? 시종장님이 황금성 전문가인 것 같던데. 좋은 데 추천 좀 해 주세요. 네?”

금세 꼬랑지를 내리고 시종장의 비위를 맞추는 혜미의 곁에서 베네딕트가 소리 없이 웃었다.

***

혜미가 시종장의 안내를 받아 도착한 곳은 높다란 철문이 자리했다. 시종장은 자물쇠를 벗긴 후, 시간이 되면 돌아오겠다는 말을 남기고서 자리를 떴다. 왠지는 모르겠지만 인사를 하는 그의 태도가 어제보다 한 세 배 정도는 공손해진 것 같다는 착각이 들었다.

“…여긴.”

높다란 철문이 열리는 순간 혜미는 작게 숨을 들이쉬었다.

“기억이 나십니까?”

베네딕트가 그녀에게 조용히 물었다.

“불에 다 타 버린 줄 알았어요….”

이곳은 어린 그녀가 유모와 살았던 별궁이었다. 보자마자 알 수 있었다. 아련한 그리움이 밀려든 까닭이었다. 마치 마법처럼.

“화재로 없어진 것은 건물뿐. 자연은 시간이 지나면 본래의 모습을 회복하지요.”

잠시 그 자리에 서 있던 혜미는 마침내 아주 오래전, 그녀가 혼자 놀았던 정원을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그 옆을 베네딕트가 조용히 따랐다.

얕은 개울이 졸졸 소리를 내며 흐르는 주변을 걷자 붉은 산수유가 뒤덮었던 봄날의 풍경이 혜미의 머릿속에 그대로 펼쳐졌다. 물빛이 태양을 반사하는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는 자신의 모습. 그 곁에는 돌멩이로 쌓아놓은 탑들이 죽 늘어서 있다. 어린 황녀가 하루 종일 시간을 보냈던 이곳.

“슬프십니까.”

베네딕트가 나직하게 묻자 혜미가 잠시 망설이다 입을 뗐다.

“…그냥 좀 이상해요.”

가슴이 먹먹해지는 이 감정을 슬픔이라고 해야 하나. 닮았지만 미묘하게 결이 다른 느낌이다. 혜미가 고개를 들자 저 멀리 익숙한 곳에 커다란 나무가 보였다. 노랗게 물든 나뭇잎이 팔랑, 팔랑 바닥에 떨어져 쌓였다.

“…저곳에 그네가 있었는데.”

혜미가 눈을 모으고 중얼거리자 베네딕트가 조용히 답했다.

“더 이상 이용하는 사람이 없으니 누군가 치워 버렸겠죠.”

조금 싸늘해진 겨울바람에 혜미의 머리카락이 휘날렸다. 초점이 흐려진 그녀의 눈앞에 예쁜 드레스를 입고 그네를 타고 있는 어린아이가 보였다.

“하하! 더요…! 더 높이요… 더, 더…!”

나무 그늘에 서 있는 사람은 그녀도 익히 아는 사람이다. 티끌 하나 묻지 않은 새하얀 의복을 입고 황녀를 바라보고 있는 베네딕트. 그의 시선을 따라 황녀가 탄 그네가 완만한 곡선을 그리며 앞뒤로 힘차게 솟았다.

“최고…! 베네딕트 진짜 최고…!”

나뭇가지 위로 넘어갈 듯 아찔하게 그네가 올라가고 있는데도 아이는 좋다고 꺄르르 웃음을 터뜨릴 뿐이었다. 아이는 베네딕트를 보려고 스무 밤이 훨씬 넘게 기다렸고 어제는 흥분해 밤을 뜬눈으로 새운 탓에 유모를 힘들게 만들었다. 아. 너무 좋다. 매일 매일 이렇게 교황님과 놀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이거… 지금 당신이 보여 주는 기억이에요?”

“아니요.”

낮게 묻는 혜미의 곁에서 베네딕트가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앞으로 폐하께서는 잃어버렸던 기억을 조금씩 찾게 될 겁니다. 각인한 상대와의 물리적 거리가 가깝기 때문에 얻게 되는 이득이죠.”

“그럼….”

혜미가 베네딕트를 바라보았다.

“예. 결국 전부 기억하시게 되겠지요.”

기억을 찾는다. 그렇게 소원했던 일인데 지금에 와서 망설여지는 이유는 뭘까. 그 안에 뭐가 들어 있을지 두렵기 때문일까.

혜미는 마른침을 삼킨 채, 베네딕트에게 팔짱을 끼고 그를 앞으로 이끌었다.

“저기 가서 좀 앉아요.”

낙엽이 흩날리는 나무 아래에 이제는 누구도 찾지 않는 벤치가 보였다. 오래전 베네딕트가 앉아서 자신을 바라보고 있던 장소였다. 그의 긴 머리에 어울리는 화관을 만들기 위해 열심히 꽃을 따다 고개를 쑥, 들면 알 수 없는 표정으로 또 생각에 잠겨 있던 베네딕트.

어린 황녀가 꽃을 손에 움켜쥐고 그에게 다다다 달려가다 바닥에 세게 엎어졌다. 상념에 빠져 있던 베네딕트가 그제야 다가와 그녀를 일으켜 주었다.

“괜찮으십니까, 폐하?”

에데르트가 고개를 끄덕였다. 교황님이 아픈 무릎을 어루만져 주자 아픔이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아프지 않은 발목도 만져 주고 흙이 묻은 얼굴을 털어 주는 베네딕트의 손길이 따스했다. 그의 옷소매를 꽉 움켜쥐고 고백하듯 내뱉었다.

“베네딕트. 있잖아요.”

“예, 폐하.”

“난…. 베네딕트가 황녀의 아빠였으면 좋겠어요.”

그녀를 바라보던 베네딕트의 연하늘색 눈동자가 천천히 가늘어지며 얼음장처럼 얼어붙었다. 또 화가 나게 만들어 버린 걸까.

“베네딕트…. 베네딕트… 화났어요?”

어린 황녀의 입술이 조심스레 열렸다. 가지런한 눈썹이 팔자를 그리며 아래로 축 처졌다. 보랏빛 눈동자가 어지럽게 흔들린다.

“…근데 교황님, 왜 울어요?”

얼어붙은 호수처럼 아름다운 베네딕트의 눈동자에서 길게 눈물이 흘러내렸다. 에데르트는 몹시 슬퍼졌다. 눈물은 어딘가가 아플 때만 나오는 건데. 몸이 너무너무 아플 때나 가슴속 어딘가가 너무너무 아플 때만 흐르는 건데.

“저는…. 폐하의 아비가 될 수 없습니다.”

주르륵. 다시 얼굴을 적시며 베네딕트의 눈에서 눈물이 떨어졌다. 하얀 그의 얼굴이 온통 젖어 든다. 색이 옅은 속눈썹도, 뺨도, 입술도.

\근위병이 식사를 내가자 문이 닫혔다. 어제 이후, 황제는 방 안에서 그들을 더 이상 감시하지 않아도 된다는 명령을 내렸다. 혜미에게는 한결 편한 일이었다.

“오늘은 어쩐 일로 혼자 오셨습니까.”

베네딕트가 작게 입을 뗐다.

“발터는 일이 있어서요.”

“그에게 주군을 지키는 것 외에 또 다른 일이 있습니까?”

젖은 수건으로 그의 얼굴에 엉겨 붙은 피딱지를 떼는 데 집중하며 혜미가 미간을 모았다.

“리비에르를 만나러 갔어요. 오늘 서쪽 근위대의 훈련을 보러 간다고 했거든요. 그동안 리비에르와 제대로 이야기할 기회가 없었으니까요.”

그녀의 도움이 절대적인 상황이다. 발터는 리비에르를 홀로 만나기를 자처했고 혜미는 그를 말릴 수가 없었다. 그녀 앞에서 선포하듯 발터를 침실로 청한 주제에 베네딕트를 정부로 삼았으니, 리비에르가 지금쯤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지는 뻔했다. 일단 그녀의 동태를 살피고 설득이든 뭐든 시작하는 게 나았다.

만약 리비에르가 그녀의 손을 잡길 거절한다면 그다음은…. 정말 어떡해야 하지?

“이제 그와 리비에르가 단둘이 만나도 무릎에 고개를 박고 혼자 울진 않는군요.”

베네딕트가 툭 내뱉는 말에 혜미의 양 뺨이 화끈하게 달아올랐다. 남은 생사가 걸린 심각한 고민을 하고 있는데 지금 그게 할 소리인가.

“저기, 미안한데 운 적은 없거든요?”

“그럼 울기 직전이었다고 해 두죠.”

그녀는 눈을 세모꼴로 뜬 채 후후 웃는 베네딕트를 바라보았다. 하늘색 유리알 같은 눈동자가 가늘어지는 것이 눈앞에 보이는 것만 같다.

“사람 놀리면 재밌어요?”

“놀리는 게 아니라 기분이 좋아서 그랬습니다.”

“…….”

“폐하의 마음에 공간이… 이만큼은 생겨난 것 같아서.”

베네딕트가 상처 난 자신의 손을 들어 그녀의 가슴에 살며시 가져다 댔다.

“…이것보다 조금은 더 많을까.”

혼잣말하듯 속삭이며 가볍게 웃는 말투에 심장이 간질거렸다. 그의 손이 닿은 곳에서 맥박이 강하게 진동한다. 혜미가 피 묻은 수건을 꽉 쥐고 흠, 하고 목을 가다듬었다.

“…갑자기 안 어울리게 왜 그래요. 닭살 돋아요.”

“죽을 때가 되면 사람도 바뀐다고 하지 않습니까.”

“자꾸 그딴 소리 할 거예요?”

혜미가 그를 매섭게 째려보았다. 그는 죽음에 초연할 수 있을지 몰라도 그녀는 아니었다. 베네딕트가 그녀 쪽으로 고개를 기울였다.

“왜요. 제가 죽는 게 싫으십니까?”

조금 가까워지는 그의 숨결에 혜미의 입술이 저절로 말랐다. 조금 서늘한 방 안의 공기가 순식간에 농밀하게 변하는 느낌. 일상적인 대화를 하다가도 갑자기 슥, 방향을 묘한 쪽으로 바꾸는 재주가 있다면 베네딕트가 단연 일등이었다.

“폐하께선 절 싫어하시는 줄 알았는데요.”

코끝이 닿을 정도로 가까워진 거리에서 베네딕트가 고개를 기울였다.

‘하긴. 제가 정말 싫다면 쓸모없어진 저를 굳이 찾아오지도 않으셨겠지요.’

머릿속에 울려 퍼지는 그의 목소리가 쓸데없이 달콤했다. 혜미가 파르르 떨리는 속눈썹을 살며시 아래로 깔았을 때였다.

“얼굴 안 닦아 주실 겁니까?”

베네딕트의 목소리가 순식간에 태연하게 바뀌었다.

“…네? 아….”

무엇 때문에 그가 키스할 거라고 확신했던 거지? 무안해진 혜미는 그의 얼굴에 희미한 미소가 걸린 것도 눈치채지 못했다. 코를 마구 비빈 후, 수건을 다시 손에 쥐었을 때였다.

“황녀 전하…! 죄송합니다! 들어가는 걸 허해 주십시오!”

다급한 노크 소리와 함께 밖에서 걸렸던 빗장이 벗겨지는 소리가 났다. 시종장의 목소리가 평소의 잘난체하는 목소리와는 달리 몹시도 다급했다. 어제는 문을 벌컥 열고 시간이 다 됐다고 했으면서 갑자기 허락을 구하는 게 이상하다.

“…무슨 일이에요?”

의아한 혜미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문이 벌컥 열렸다.

“정원 산책을 허한다는 황제 폐하의 명이 있었습니다…!”

“어, 진짜요?”

혜미의 눈동자가 대번 동그랗게 커졌다. 이곳에 오기 전 시종을 보내 운을 띄워 보았지만 안 된다고 바로 거절당해서 포기하고 있었는데. 오늘이야말로 베네딕트를 데리고 바깥 공기를 마시게 할 수 있다는 뜻이었다.

‘저와 산책을 하게 해 달라고 청하셨습니까?’

‘네.’

‘왜죠?’

왜긴 왜야. 이 감옥 같은 곳에서 데리고 나가고 싶으니까 그랬지.

“베니… 착하죠. 빨리 일어나요. 응? 어서요.”

혜미가 속말을 삼키며 친근한 연인을 대하듯 그의 손목을 잡아끌었다.

‘그 자식의 마음이 바뀌기 전에 빨리 가자고요.’

‘저는 주인이 산책시켜 주기만을 기다리는 강아지가 아닙니다만.’

머릿속에서 울려 퍼지는 베네딕트의 목소리에 옅은 웃음기가 뱄다.

‘개 말고 사람도 가끔 광합성이 필요해요. 바깥공기 안 쏘이고 안에만 있으면 정신이 이상해진단 말이에요. 안 그래도 제정신도 아니면서….’

“…안 가십니까?”

“아, 간다고요! 거참 성격 급하시네…!”

혜미가 눈을 부라리며 버럭 소리를 지르자 시종장이 눈을 깜빡였다.

어쩜 이렇게 욱하는 모습이 하나도 안 무섭지. 화가 나면 사람의 숨통을 틀어쥐고 압박하는 크리스티앙 폐하와 닮은 곳은 여전히 한 군데도 찾을 수가 없다.

“방금 전에 소리 질러서 미안해요. 하하. 시종장님. 근데 여기 산책하기 좋은 곳이 어디예요? 시종장님이 황금성 전문가인 것 같던데. 좋은 데 추천 좀 해 주세요. 네?”

금세 꼬랑지를 내리고 시종장의 비위를 맞추는 혜미의 곁에서 베네딕트가 소리 없이 웃었다.

***

혜미가 시종장의 안내를 받아 도착한 곳은 높다란 철문이 자리했다. 시종장은 자물쇠를 벗긴 후, 시간이 되면 돌아오겠다는 말을 남기고서 자리를 떴다. 왠지는 모르겠지만 인사를 하는 그의 태도가 어제보다 한 세 배 정도는 공손해진 것 같다는 착각이 들었다.

“…여긴.”

높다란 철문이 열리는 순간 혜미는 작게 숨을 들이쉬었다.

“기억이 나십니까?”

베네딕트가 그녀에게 조용히 물었다.

“불에 다 타 버린 줄 알았어요….”

이곳은 어린 그녀가 유모와 살았던 별궁이었다. 보자마자 알 수 있었다. 아련한 그리움이 밀려든 까닭이었다. 마치 마법처럼.

“화재로 없어진 것은 건물뿐. 자연은 시간이 지나면 본래의 모습을 회복하지요.”

잠시 그 자리에 서 있던 혜미는 마침내 아주 오래전, 그녀가 혼자 놀았던 정원을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그 옆을 베네딕트가 조용히 따랐다.

얕은 개울이 졸졸 소리를 내며 흐르는 주변을 걷자 붉은 산수유가 뒤덮었던 봄날의 풍경이 혜미의 머릿속에 그대로 펼쳐졌다. 물빛이 태양을 반사하는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는 자신의 모습. 그 곁에는 돌멩이로 쌓아놓은 탑들이 죽 늘어서 있다. 어린 황녀가 하루 종일 시간을 보냈던 이곳.

“슬프십니까.”

베네딕트가 나직하게 묻자 혜미가 잠시 망설이다 입을 뗐다.

“…그냥 좀 이상해요.”

가슴이 먹먹해지는 이 감정을 슬픔이라고 해야 하나. 닮았지만 미묘하게 결이 다른 느낌이다. 혜미가 고개를 들자 저 멀리 익숙한 곳에 커다란 나무가 보였다. 노랗게 물든 나뭇잎이 팔랑, 팔랑 바닥에 떨어져 쌓였다.

“…저곳에 그네가 있었는데.”

혜미가 눈을 모으고 중얼거리자 베네딕트가 조용히 답했다.

“더 이상 이용하는 사람이 없으니 누군가 치워 버렸겠죠.”

조금 싸늘해진 겨울바람에 혜미의 머리카락이 휘날렸다. 초점이 흐려진 그녀의 눈앞에 예쁜 드레스를 입고 그네를 타고 있는 어린아이가 보였다.

“하하! 더요…! 더 높이요… 더, 더…!”

나무 그늘에 서 있는 사람은 그녀도 익히 아는 사람이다. 티끌 하나 묻지 않은 새하얀 의복을 입고 황녀를 바라보고 있는 베네딕트. 그의 시선을 따라 황녀가 탄 그네가 완만한 곡선을 그리며 앞뒤로 힘차게 솟았다.

“최고…! 베네딕트 진짜 최고…!”

나뭇가지 위로 넘어갈 듯 아찔하게 그네가 올라가고 있는데도 아이는 좋다고 꺄르르 웃음을 터뜨릴 뿐이었다. 아이는 베네딕트를 보려고 스무 밤이 훨씬 넘게 기다렸고 어제는 흥분해 밤을 뜬눈으로 새운 탓에 유모를 힘들게 만들었다. 아. 너무 좋다. 매일 매일 이렇게 교황님과 놀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이거… 지금 당신이 보여 주는 기억이에요?”

“아니요.”

낮게 묻는 혜미의 곁에서 베네딕트가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앞으로 폐하께서는 잃어버렸던 기억을 조금씩 찾게 될 겁니다. 각인한 상대와의 물리적 거리가 가깝기 때문에 얻게 되는 이득이죠.”

“그럼….”

혜미가 베네딕트를 바라보았다.

“예. 결국 전부 기억하시게 되겠지요.”

기억을 찾는다. 그렇게 소원했던 일인데 지금에 와서 망설여지는 이유는 뭘까. 그 안에 뭐가 들어 있을지 두렵기 때문일까.

혜미는 마른침을 삼킨 채, 베네딕트에게 팔짱을 끼고 그를 앞으로 이끌었다.

“저기 가서 좀 앉아요.”

낙엽이 흩날리는 나무 아래에 이제는 누구도 찾지 않는 벤치가 보였다. 오래전 베네딕트가 앉아서 자신을 바라보고 있던 장소였다. 그의 긴 머리에 어울리는 화관을 만들기 위해 열심히 꽃을 따다 고개를 쑥, 들면 알 수 없는 표정으로 또 생각에 잠겨 있던 베네딕트.

어린 황녀가 꽃을 손에 움켜쥐고 그에게 다다다 달려가다 바닥에 세게 엎어졌다. 상념에 빠져 있던 베네딕트가 그제야 다가와 그녀를 일으켜 주었다.

“괜찮으십니까, 폐하?”

에데르트가 고개를 끄덕였다. 교황님이 아픈 무릎을 어루만져 주자 아픔이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아프지 않은 발목도 만져 주고 흙이 묻은 얼굴을 털어 주는 베네딕트의 손길이 따스했다. 그의 옷소매를 꽉 움켜쥐고 고백하듯 내뱉었다.

“베네딕트. 있잖아요.”

“예, 폐하.”

“난…. 베네딕트가 황녀의 아빠였으면 좋겠어요.”

그녀를 바라보던 베네딕트의 연하늘색 눈동자가 천천히 가늘어지며 얼음장처럼 얼어붙었다. 또 화가 나게 만들어 버린 걸까.

“베네딕트…. 베네딕트… 화났어요?”

어린 황녀의 입술이 조심스레 열렸다. 가지런한 눈썹이 팔자를 그리며 아래로 축 처졌다. 보랏빛 눈동자가 어지럽게 흔들린다.

“…근데 교황님, 왜 울어요?”

얼어붙은 호수처럼 아름다운 베네딕트의 눈동자에서 길게 눈물이 흘러내렸다. 에데르트는 몹시 슬퍼졌다. 눈물은 어딘가가 아플 때만 나오는 건데. 몸이 너무너무 아플 때나 가슴속 어딘가가 너무너무 아플 때만 흐르는 건데.

“저는…. 폐하의 아비가 될 수 없습니다.”

주르륵. 다시 얼굴을 적시며 베네딕트의 눈에서 눈물이 떨어졌다. 하얀 그의 얼굴이 온통 젖어 든다. 색이 옅은 속눈썹도, 뺨도, 입술도.

살랑. 봄바람이 불자 그의 아름다운 은발이 뺨에 달라붙었다.

어떡하지. 나 때문에. 내가 떼를 써서 교황님이 울어.

“흐윽….”

에데르트는 어쩔 줄 모르고 있다가 유모가 챙겨 준 자그마한 주머니 가방을 허둥지둥 열었다. 늘 같이 다니는 곰 인형, 유모는 늘 차고 다녀야 한다고 했지만 무거워서 빼놓은 보석 목걸이가 잔디밭에 휙휙 날아갔다. 마침내 에데르트가 가방 맨 아래에 뭉쳐 있는 손수건을 찾아냈다. 고사리같이 작은 손이 베네딕트의 눈앞에 내밀어졌다.

“여기….”

“다시는 그런 말씀을 하지 마십시오.”

손수건을 받는 대신 고개를 젓는 베네딕트의 눈가가 섧게 붉었다. 아름다운 입술이 젖어 소리 없이 떨린다. 이제껏 그가 무섭게 화를 내고 그녀를 혼낸 적은 있었어도 우는 것은 처음 보았다.

“울지… 울지 마요… 베네딕트… 그냥… 황녀는… 그랬으면 좋겠어서….”

에데르트를 보며 그가 목이 멘 듯 간신히 말을 이었다.

“또 그런 말씀을 하시면 저는 두 번 다시 이곳에 오지 않겠습니다.”

확 커진 연보랏빛 눈동자에 순식간에 눈물이 그렁그렁 고였다. 그녀가 고개를 마구 저었다. 베네딕트의 품에 뛰어들며 매달렸다.

“싫어…! 싫어!”

“저는 폐하의 아버지가 아닙니다. 그딴 건… 영원히 될 수 없어….”

그녀의 귀에 속삭이는 베네딕트의 말투에 물기가 번졌다. 에데르트는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베네딕트는 지금 아픈 거였다. 너무 아프고 너무 슬퍼서 화가 나고 눈물이 나는 거다. 나 때문에. 내가 아빠가 되어 달라고 해서 화가 났다. 결혼해 달라고 할 때도 울지 않았었는데. 흐윽.

“으응! 흑, 응! 나도 아빠 같은 거 필요 없어요, 하나도 필요 없어…! 그러니까 가지 말아요, 나는… 나는 베네딕트만 있으면 된단 말이야, 흐아, 아아… 흐으으윽….”

결국 베네딕트의 눈물을 닦아 주려고 했던 손수건은 그녀의 눈물로 흠뻑 젖어 들었다. 에데르트는 엉엉 울다가 결국 그의 품 안에서 잠이 들었다.

휘잉.

초겨울 바람이 그녀의 짤막한 머리를 헝클어뜨리고 지나갔다.

“지금 생각해 보면…. 당신이 오면 울 수 있어서 좋았던 것 같아요.”

베네딕트가 말없이 그녀의 말을 경청했다. 혜미의 입술에서 자그마한 속삭임이 흘러나왔다.

“당신과 함께 있으면 늘, 엉엉 울 수 있는 핑계가 생겼거든요.”

“…확실히 폐하께서는 못 말리는 울보였습니다.”

혜미가 옅게 웃었다. 가늘게 뜬 보랏빛 눈동자가 흐리게 젖어 들었다.

“이곳에 가만히 앉아 있으면 시간은 너무 느리게 갔어요. 멍하니 햇볕을 쬐고 있다가, 나비를 쫒고, 개울가에 물이 졸졸 흐르는 걸 한참 동안 손으로 찰박거리며 노는데도 하루는 도통 끝날 기미를 보이지 않는 거예요.”

“…….”

“유모와 숨바꼭질을 하고, 꼭꼭 숨어서 그녀가 날 찾을 때까지 기다리다 나무 뒤에서 잠이 들었어요. 그러다 밤이 되어 혼자 깨면 이유도 없이 슬퍼졌어요. 하늘을 까마득히 채우고 있는 별들은 다 친구가 있는데 이 땅에는 나 혼자밖에 없는 것 같았거든요.”

어린 에데르트는 외로움이라는 단어를 인지하기도 전에 몸으로 먼저 그것을 깨쳤다.

“베네딕트.”

혜미가 그를 향해 고개를 돌리며 입을 열었다.

“얼굴 만져도… 돼요…?”

그녀의 목소리에 울음기가 번졌다. 에데르트는 늘 베네딕트의 얼굴을 만지기를 원했다. 그의 이목구비를 눈으로 보는 것만으로는 부족해서 손으로 확인하고 싶었다.

“…원하신다면.”

그래서 그가 없을 때도 그의 얼굴을 가물가물하지 않고 완벽하게 떠올리고 싶었다.

“아빠가 되어 달라고 말했던 건, 당신과 더 가까워지고 싶어서였어요.”

“그 전엔 제게 청혼했었죠.”

베네딕트가 자신의 얼굴에 살며시 양손을 대는 그녀를 느끼며 나직하게 웃었다. 혜미가 눈물어린 얼굴로 입을 뗐다.

“맞아요. 비비아나에게 물어봤었거든요. 한 사람과 영원히 같이 있고 싶으면 어떻게 해야 하냐고.”

“유모가 말했어요. 나는 교황과 각인한 후계자라고. 그러니까 황제가 될 거라고요.”

“예. 맞습니다.”

“그러면 황녀는 베네딕트와 결혼할 거예요. 교황님을 제 부마로 삼을 거예요…!”

“왜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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