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9화 (49/72)

“숨기고 있는 거라면.”

머뭇거리던 발터의 손이 그녀의 손등을 가볍게 스쳤다. 발터를 곁눈질하며 그녀에게 더욱 깊숙하게 입을 맞추던 베네딕트의 눈에 희미한 푸른빛이 반짝였던 것은, 단지 그의 질투가 불러일으킨 환영이었을까.

“그가 내게까지 힘을 숨기고 있을 이유가 없어. 크리스티앙이라면 몰라도.”

혜미가 그의 손을 슬쩍 피하며 단언하듯 고개를 저었다. 발터는 빈주먹을 천천히 쥐었다. 인상을 찌푸린 그녀가 의자에 등을 기대며 다시 한번 중얼거렸다.

“지금 이 상황에서, 내가 얼마나 사면초가인지 뻔히 아는 그가 그러는 건… 말이 안 된다고.”

그녀의 말에는 틀린 게 없었다. 오늘, 그들이 목격한 황궁 근위대의 수준은 예상했던 것 이상이었다. 황성만 지키는 이들이라 기강이 해이할지도 모른다는 기대 역시 무참히 부수었다. 근위대의 수장이자 원로원의 우두머리인 하이데거는 확실히 뛰어난 자였고, 그가 적이라는 것은 그들에게 매우 좋지 않은 상황이었다.

게다가 그는 마력까지 흡수했다. 크리스티앙이 들고 있는 강력한 패인 하이데거를 부수려면 무엇보다 베네딕트의 힘이 필요했지만 현재로서는 어려운 이야기였다.

“방법이… 있을 거야.”

“어떤? 혹시라도 그가 회복할 가능성이 있다는 건가?”

혜미가 대답을 망설였다. 어려운 숙제로 남은 이야기를 발터에게 털어놓는 건 도저히 불가능했다. 그녀는 발터가 집요한 질문을 시작하기 전에 화제를 돌렸다.

“그것보다, 그에게 중요한 말을 들었어.”

혜미가 심각한 표정으로 발터를 보았다. 베네딕트가 그녀에게 털어놓은 황가의 비밀, 크리스티앙의 출생에 대해서 말할 차례였다. 시작하기도 전에 긴장감에 마른침이 넘어갔다.

“뭐지?”

“사실은… 크리스티앙, 말이야….”

입을 떼는 순간, 그녀와 발터의 눈이 동시에 한 쪽으로 돌아갔다. 응접실 바깥에서 인기척이 느껴진 까닭이었다. 찰나의 침묵이 흐른 후 혜미가 목소리를 높였다.

“밖에 누구예요? 왜 쥐새끼처럼 발소리를 숨기는 거죠?”

“쿨럭.”

기침 소리가 들리더니 나이가 많은 남자의 당황한 목소리가 들렸다.

“송구합니다, 황녀 전하. 다름이 아니라….”

발터가 미간을 구긴 채 벌떡 일어나 응접실의 문을 휙 열었다. 늘 그렇듯 칼을 집어 드는 것도 잊지 않았다. 혜미가 뒤따라 섰지만 발터가 가로막고 선 탓에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뭡니까, 당신은.”

“황제 폐하의 명을 받고 왔습니다, 에헴.”

발터가 옆으로 비켜서고 나서야 키가 작고 머리가 센 노인이 보였다. 검은 재킷 안에 프릴 달린 블라우스를 입은 배는 빵빵해서 마치 아델리 펭귄을 보는 것 같았다.

“무슨 명이요?”

“무도회를 위해 황녀 전하의 드레스를 맞춤 제작 하라고 하셨습니다만.”

목에 줄자를 둘둘 매고 나타난 대신의 말에 혜미는 닷새 앞으로 다가온 무도회를 다시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안 그래도 바빠 죽겠는데 이 와중에 파티까지 참석해야 한다니. 정말 미칠 노릇이었다.

“일단 들어오세요.”

“예. 그럼.”

늙은 대신은 이런 일이 한두 번이 아닌 듯했다. 깃털 펜을 귀 뒤에 낀 채, 고급 종이 뭉치를 손에 들고 고개를 딱 치켜들었다.

“먼저 준비를 좀 하겠습니다.”

그가 손가락을 까딱거리자 시종이 작은 사다리를 들고 안으로 들어왔고, 또 다른 시종 둘이 기다란 막대기에 화려한 천이 달린 커튼처럼 가림막을 들고 따라 들어왔다. 대신의 취향을 보여 주는 듯 잔뜩 화려한 보석들이 달려 반짝거리는 보라색 비로드였다.

“일단 황녀 전하의 호위 기사님부터 시작하지요.”

“난 필요 없소.”

딱 잘라 거절하는 발터를 보며 그가 고개를 저었다.

“최고 귀족들이 모두 참여하는 무도회에 황녀 전하의 호위 기사가 그런 거지 같은, 아니 허름한 기사복을 입고 출현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

“…뭐라고?”

“황제 폐하의 명령입니다.”

“발터.”

혜미가 그에게 눈짓을 했다. 대충하고 끝내자는 사인이었다. 펭귄을 연상시키는 대신은 딱 봐도 위험인물과는 거리가 멀어 보였다.

“가림막 안으로 들어가서 준비를 하시지요.”

발터가 귀찮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됐으니 그냥 재시오.”

“홀랑 벗으십시오, 그럼.”

발터가 짙은 눈썹을 험악하게 모았다. 대신은 자신을 한 대 칠 것 같은 황녀의 호위 기사를 향해 목을 가다듬으며 최대한 겁먹지 않은 태도로 입을 열었다.

“옷을 입은 채로 몸의 치수를 잴 수는 없습니다.”

“…싹 다 벗으란 말이오?”

“물론입니다.”

“…….”

발터가 저벅저벅 걸어가더니 가림막의 기둥을 한 손으로 번쩍 들어 제 앞에 놓았다. 혜미는 응접실 의자에 앉아 가림막 위로 머리가 불쑥 튀어나온 발터의 얼굴을 애매한 표정으로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짙은 갈색 눈동자와 눈이 마주치자 그가 후, 하고 길게 한숨을 쉬었다. 혜미가 미안하다는 뜻으로 양손을 입술에 모으자 발터가 탈의를 하며 피식 웃었다.

“헉.”

시종이 설치한 작은 사다리에 착착 올라가 발터의 어깨 사이즈를 재던 대신이 약하게 탄성을 터뜨렸다.

“히익.”

이번엔 뒤로 돌아 등 너비를 쟀을 때였다. 발터의 강인한 턱이 불만족스럽게 꿈틀거렸다.

“흐어억.”

대신이 발터의 허벅지 둘레를 쟀을 때, 발터는 도저히 참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

“도대체… 지금 뭘 하고 있는 거요?”

그의 고간에 줄자를 대는 대신을 노려보며 낮게 내뱉자 대신이 눈앞의 사이즈에 가히 충격받은 얼굴로 입을 열었다.

“신체 치수를 재는 중입니다만. 호, 혹시 지금….”

“그런 곳까지 꼭 재야 하는 거요?”

발터의 목소리에는 미약한 짜증이 느껴질 뿐, 불경함이 비치는 흥분은 전혀 없었다. 대신은 믿을 수가 없어 고개를 붕붕 돌리며 목소리를 높였다.

“저는 클라웨 제국의 황제, 크리스티앙 디트리히 클라웨 9세께 황녀 전하와 세르노티의 기사들을 위한 완벽한 의복을 지어 올리라는 명을 받았습니다…!”

영광스러운 일에 토를 달지 말라는 말투였다. 발터는 ‘이건 도저히 말이 안 된다’고 아까부터 자꾸만 중얼거리는 대신을 내려다보며 인상을 썼다.

“난 아무거나 걸쳐도 되니 빨리 끝내시오.”

발터가 불만을 토로하거나 말거나 대신은 혼잣말을 멈추지 않고 끊임없이 이었다.

“아무거나…? 요런 몸을 두고 내가 누더기를 지을 수는 없지. 암. 닷새 가지고 되려나? 허얼. 미쳤군. 미쳤어.”

혜미는 가림막 뒤에서 분주히 움직이는 대신의 그림자를 바라보고 있다가 드디어 모든 일이 다 끝날 때쯤 의심스러운 말투로 입을 뗐다.

“설마… 제 치수도 할아버지가 재는 건 아니죠?”

“원래는 제가 직접 재는 게 마땅하나….”

검은 튜닉을 걸친 발터가 가림막을 휙, 하고 거칠게 걷어 내며 그를 매섭게 노려보았다. 대신이 히익 놀라며 목소리를 애써 가다듬었다.

“흠흠. 이번엔 특별히 여자 시종이 대신 재 드릴 겁니다.”

당연한 소리였다.

“그럼 벗으시지요, 전하.”

대신이 혜미를 보며 태연하게 말을 내뱉었다. 혜미는 잠기려는 목을 괜히 가다듬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망설여 봤자 민망함만 더해 가니 그냥 빨리 끝내 버리는 게 좋을 것 같았다. 짧은 고민을 끝내고 그녀가 비로드 커튼을 열었을 때였다.

“거긴 왜 들어가십니까?”

“벗으라면서요.”

대신은 굳이, 라는 표정을 하며 입을 열었다.

“클라웨의 황족은 아랫것들에게 몸을 보여 주시는 게 당연한 일입니다만, 흠흠. 뭐 황녀 전하께서 원하신다면 들어가시지요.”

“그럼 이건 왜 들고 온 거예요?”

“그야 전하가 아닌 다른 이를 위해서였지요. 한창 혈기 왕성한데 타인 앞에서 나체가 되는 게 부끄러울 수도 있으니까요.”

“그럼 나는요?”

혜미가 진심으로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묻자 대신이 친절하게 설명을 이었다.

“이곳에서 저희는 황제 폐하의 사용인일 뿐입니다, 전하. 황녀 전하의 위치도 그러하지요. 황족과 저희의 위치는 같지 않습니다. 황녀 전하께서 몸을 보이시는 걸 부끄러워하시는 건, 처음부터 있을 수가 없는 일이란 뜻입니다. 노예의 눈을 신경 쓰는 주군이 없듯이 말입니다.”

아랫사람들 앞에서 예를 차리지 않을 수 있는 것은 귀족만이 가지는 특권이었다.

“호위 기사와 황녀 전하의 위치 또한 같을 수가 없지요.”

발터와 혜미 모두 말이 없어졌다. 인상을 찌푸리고 있던 혜미가 마침내 침묵을 깨고 입을 열었다.

“…치수는 여자 시종과 침실에서 잴 테니까 할아버지는 들어올 생각도 하지 마세요. 다른 남자 시종들도 마찬가지예요. 특히 발터.”

이런 식으로 그들의 달라진 위치를 확인받을 때마다 뱃속이 울렁거리고 기분이 이상해서 견딜 수가 없다.

“너는 절대 들어오지 마라. 난 너 완전 신경 쓰이거든. 다른 사람도 있는데 네 앞에서 홀딱 벗고 서 있는 거 엄청 민망하고 부끄러워. 내 말 무슨 말인지 알지?”

목덜미가 붉어진 채 그녀를 보며 입술을 씹는 발터를 뒤로하고 혜미가 휙 뒤를 돌았다. 당황한 여자 시종 하나와 함께 침실로 들어간 혜미는 그녀의 부탁에 따라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고 선 채,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황궁 안이 그녀의 상식과는 다른 세상이란 걸 확인할 때마다 매번 새롭게 당황한다.

“시작하겠습니다.”

조심스럽게 내뱉은 시녀는 이내 그녀의 온몸을 샅샅이 조사하듯 줄자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녀가 유두와 유륜의 지름까지 쟀을 때는 입술이 조금 말랐다.

“송구하지만 다리를 조금 벌려 주시겠습니까, 전하.”

“저기요, 그런 데는 재지 않아도….”

“파티용 드레스에는 속옷이 따로 제작됩니다.”

혜미는 조용히 집중하는 시녀의 앞에서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고깃덩어리처럼 재단되는 느낌. 자신의 말 한마디에 조용히 웅성거리는 시종과 대신의 눈빛을 볼 때마다 일거수일투족이 평가당하는 느낌이다.

이런 곳에서 내가 과연 잘할 수 있을까. 다 때려치우고 도망치고 싶다는 생각이 오랜만에 들었다.

***

초겨울의 햇볕이 커튼 사이를 비집었다. 살짝 열어놓은 창문 틈 사이로 바람이 불어 집중하는 크리스티앙의 앞머리를 흐트러뜨렸다.

“폐하. 식사가 준비되었습니다.”

사각. 사각. 가느다란 목탄을 측백나무 사이에 끼워 만든 연필을 종이 위로 움직이며 크리스티앙이 낮게 입을 뗐다.

“거기 둬.”

“폐하.”

시종장이 자리를 물리지 않고 머뭇거렸다. 이를 눈치챈 크리스티앙이 한 손으로 턱을 괸 채 눈만 들어 그를 보았다.

“뭐지.”

태양빛을 잔뜩 머금은 벌꿀색 시선과 눈이 마주치자 시종장이 저도 모르게 긴장하며 입을 뗐다.

“아뢰옵기 송구하오나 요리장이 요즘 혹여나 자신의 실력이 부족함이 있는 것은 아닌지 자책을 하고 있습니다.”

“내가 식사를 거른 적이 있었나?”

“…송구하오나 그는 흔적을 보면 폐하가 음식을 즐기셨는지 아니었는지를 안다고 합니다. 제가 이런 말씀을 구태여 드리는 것은 혹여 그의 음식이 폐하께 맞지 않는 것은 아닐까….”

크리스티앙이 연필을 툭 던지고 자리에서 일어나자 시종이 지레 놀라 말을 멈추었다. 황제는 시녀 둘이 밀고 들어온 은수레로 다가간 후 의자를 빼내었다. 편한 자세로 등받이에 기댄 채 그레이비소스를 끼얹은 칠면조의 넓적다리를 느릿하게 베어 물었다.

황궁 안에 그가 입맛이 없다는 소문이라도 퍼지면 곤란하다. 발이 없는 말이 사람들을 거치며 어떻게 변화하는지는 그가 제일 잘 알았다. 어디가 아파도 티를 낼 수가 없는 것은 황태자 시절부터 지금까지 변함이 없다.

“요즘 입맛이 너무 돌아 식욕대로 먹다간 큰일이 날 것 같아 조절 중일 뿐이라 전해.”

“예, 폐하.”

“간만에 연미복의 치수를 쟀는데 사이즈가 바뀌어 버리면 낭패잖아?”

그제야 시종장이 이해가 간다는 표정으로 입을 조금 벌렸다. 황제의 빈틈없는 성격상 귀족들이 대거 참여하는 이번 무도회에 완벽한 모습으로 등장해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가 밥을 깨작거리고 묘하게 입맛이 없어 보이는 이유가 그 때문이라는 사실을 깨닫자, 자신의 무지에 자책감마저 들었다. 하이데거 대공이었다면 황제 폐하의 깊은 뜻을 미리 헤아리고도 남았을 텐데.

“에리히는 지금 무얼 하고 있지?”

선 채로 속을 들킨 듯 뜨끔하며 시종장이 고개를 숙였다. 크리스티앙은 산딸기 잼이 발린 훈제 햄을 두 덩어리째 먹어 치운 후, 시녀에게 손을 닦게 하는 중이었다.

“무도회 준비로 분주하게 움직이고 계십니다. 폐하께서 직접 참석하시는 만큼, 들어가는 품이 남다를 것으로 사료됩니다.”

흐응. 하고 대수롭지 않게 고개를 끄덕인 크리스티앙이 차를 들어 입술을 축였다.

“황녀는 일정을 잘 수행하고 있나?”

“예. 오전에 황궁 도서관에 들르셨고, 그 후엔….”

계속 말하라는 듯 황제가 그를 빤히 바라보았다.

“정부의 방에서 함께 식사를 하셨습니다.”

아주 살판났군. 크리스티앙이 식사를 억지로 이어나가며 입을 열었다. 염소젖으로 만든 치즈와 호두를 으깨어 흩뿌린 샐러드가 입 안에서 까끌거렸다.

“그녀가 정부에게 음식을 가져다준 건가?”

“아뇨.”

“그럼?”

“…황녀께서는 죄인의 음식을 함께 드셨다고 합니다.”

베네딕트는 원래가 육식을 하지 않는 데다 현재 그의 방에 들어가는 음식은 죄수가 먹는 음식으로 평범한 사람이 보았다면 도저히 입 안에 넣을 수가 없는 상태였다.

“그걸, 먹었다고.”

여간해선 되묻지 않는 크리스티앙이 시종장을 향해 미간을 모았다.

“아뢰옵기 황공하오나 황녀 전하께서는 그릇을 싹 비웠다고 들었습니다.”

슥, 고깃덩어리를 반으로 잘라 내는 크리스티앙의 속이 부글거리며 구역감이 치밀어 올랐다.

“다른 특이사항은 없고?”

“특별할 것은 없는데… 아, 오늘 오전에 근위병에게 부탁을 하셨다고 들었습니다.”

“어떤?”

날카롭게 빠진 금빛 눈썹이 조금 위로 들렸다.

“정부인 베네딕트 블라이와 함께 정원을 산책하고 싶다고 말한 모양입니다.”

“…난 처음 듣는 소린데?”

“죄인을 주관하는 것은 황궁 근위대의 관리하에 있으므로 하이데거 공의 선에서 거절을 하는 것으로 처리했다 들었습니다.”

달칵. 크리스티앙이 결국 은으로 된 나이프를 접시에 던지듯 떨어뜨리자 시종장이 몸을 움찔했다. 황제가 부드러운 냅킨으로 입을 닦은 후, 날카롭게 입을 뗐다.

“하나 묻지. 시종장.”

“예, 폐하.”

시종장의 심장이 불안하게 뛰었다. 황제가 질문을 예고한다는 것은 좋은 징조가 아니었다.

“이 땅에서는 황제보다 대공의 발언이 우선하는가?”

“그, 그럴 리가….”

“그녀가 누구의 누이인지, 다들 잊은 건가, 그럼?”

버터처럼 부드럽던 황제의 눈동자가 순식간에 날짐승 같은 빛을 띠었다.

“말해 봐. 황궁 근위대 수장인 하이데거의 주관이 죄인을 다스리는 것인지 아니면 황족을 다스리는 것인지.”

그의 목소리는 너무나 싸늘했다. 시종장은 그제야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뒤늦게 깨달을 수 있었다. 하이데거의 권력이 아무리 크다 한들 황족의 것에는 비교할 수가 없었다. 황녀에게 명령할 수 있는 이는 황금성에서 단 한 사람. 황제가 유일하다. 그것이 상이든 형벌이든.

크리스티앙의 심기가 불편해진 이유였다.

“하이데거가 내게 보고하는 것을 잊을 동안, 자네는 뭘 하고 있었나.”

“폐… 폐하….”

“죄수 따위가 먹는 쓰레기 같은 음식을 황족에게 처먹인 후 뒤에서 그녀를 비웃기라도 한 거냐고 묻고 있네만.”

“송구합니다, 폐하!”

시종장이 바닥에 머리를 박으며 피를 토하듯 소리를 쳤다. 그런 그를 내려다보며 크리스티앙이 얼굴에 가면 같은 미소를 띠었다.

“시종장.”

“예!”

“앞으로 에데르트 황녀에 관한 보고는 내게 직접 하도록 조치하도록. 그녀의 지위를 잊고 있는 게 아니라면 말이야. 알겠나?”

“명심하겠습니다, 폐하…!”

“가서 황녀에게 전하게. 그녀의 정부와 함께 정원 산책 하는 것을 허한다고.”

“예, 폐하!”

“장소는 플라틴 제2 성의 후원으로.”

“당장 고하겠습니다.”

입 속으로 몇 번이나 되뇌는 시종장의 얼굴은 사색이었다. 자리에서 일어나며 크리스티앙이 시녀에게 명령했다.

“겉옷을 가져와. 볕을 가리는 양산과 흰 장갑 그리고 흙을 밟을 수 있는 부츠도 함께 가져오도록.”

열어놓은 창문에서 바람이 흘러들어왔다. 팔랑. 나갈 채비를 하는 크리스티앙의 옆으로 그가 낙서하듯 스케치하던 그림이 날려 바닥에 떨어졌다.

“아니. 이리 줘.”

그림을 제자리에 올려놓으려던 시녀가 크리스티앙에게 공손한 태도로 그림을 건넸다.

찌익. 주저 없이 반으로 찢겨 나간 그림이 벽난로에 던져졌다. 아름다운 여자가 그려진 종이는 바스락, 소리를 낼 틈도 없이 활활 타들었다.

크리스티앙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저벅저벅 방을 걸어 나섰다.

뱃속에서 불길이 끓었다. 황녀가 미치게 짜증 나는 것과 별개로 다른 이가 그녀를 모욕하는 것은 참을 수가 없었다. 돼지 사료 같은 음식을 감히 그 방에 처넣은 자의 목을 자를 것이다. 그녀를 벌할 수 있는 이는 이 땅에 단 한 사람, 크리스티앙 본인뿐이었다.

“…그 씨팔 새끼가 분수를 모르고.”

대공 역시 죽여 버리고 싶다는 살기가 치밀어 올랐다. 권력을 쥐여 주었더니 아예 기어오르려고 하는 하이데거가 점점 마음에 들지 않는다. 힘을 가졌다, 이건가? 마력 실험을 끝까지 망설인 것은 바로 이런 상황 때문이었는데.

반질반질한 바닥을 디디는 발걸음이 빨라졌다. 역시나 크리스티앙이 가장 죽이고 싶은 이는 따로 있었다. 모든 일의 원흉. 처음 나타난 날부터 지금까지 그의 머릿속을 쑤시고 들어와 멋대로 활개 치고 있는 건방진 년.

쿵. 쿵. 심장 박동이 가라앉을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그림이 아니라 실재하는 인물을 벽난로에 집어넣고, 그의 이름을 부르며 살려 달라 외치는 그녀의 비명을 들으면 이 마음이 가라앉을 것 같다는 확신이 들었다.

“클라웨의 황족은 아랫것들에게 몸을 보여 주시는 게 당연한 일입니다만, 흠흠. 뭐 황녀 전하께서 원하신다면 들어가시지요.”

“그럼 이건 왜 들고 온 거예요?”

“그야 전하가 아닌 다른 이를 위해서였지요. 한창 혈기 왕성한데 타인 앞에서 나체가 되는 게 부끄러울 수도 있으니까요.”

“그럼 나는요?”

혜미가 진심으로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묻자 대신이 친절하게 설명을 이었다.

“이곳에서 저희는 황제 폐하의 사용인일 뿐입니다, 전하. 황녀 전하의 위치도 그러하지요. 황족과 저희의 위치는 같지 않습니다. 황녀 전하께서 몸을 보이시는 걸 부끄러워하시는 건, 처음부터 있을 수가 없는 일이란 뜻입니다. 노예의 눈을 신경 쓰는 주군이 없듯이 말입니다.”

아랫사람들 앞에서 예를 차리지 않을 수 있는 것은 귀족만이 가지는 특권이었다.

“호위 기사와 황녀 전하의 위치 또한 같을 수가 없지요.”

발터와 혜미 모두 말이 없어졌다. 인상을 찌푸리고 있던 혜미가 마침내 침묵을 깨고 입을 열었다.

“…치수는 여자 시종과 침실에서 잴 테니까 할아버지는 들어올 생각도 하지 마세요. 다른 남자 시종들도 마찬가지예요. 특히 발터.”

이런 식으로 그들의 달라진 위치를 확인받을 때마다 뱃속이 울렁거리고 기분이 이상해서 견딜 수가 없다.

“너는 절대 들어오지 마라. 난 너 완전 신경 쓰이거든. 다른 사람도 있는데 네 앞에서 홀딱 벗고 서 있는 거 엄청 민망하고 부끄러워. 내 말 무슨 말인지 알지?”

목덜미가 붉어진 채 그녀를 보며 입술을 씹는 발터를 뒤로하고 혜미가 휙 뒤를 돌았다. 당황한 여자 시종 하나와 함께 침실로 들어간 혜미는 그녀의 부탁에 따라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고 선 채,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황궁 안이 그녀의 상식과는 다른 세상이란 걸 확인할 때마다 매번 새롭게 당황한다.

“시작하겠습니다.”

조심스럽게 내뱉은 시녀는 이내 그녀의 온몸을 샅샅이 조사하듯 줄자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녀가 유두와 유륜의 지름까지 쟀을 때는 입술이 조금 말랐다.

“송구하지만 다리를 조금 벌려 주시겠습니까, 전하.”

“저기요, 그런 데는 재지 않아도….”

“파티용 드레스에는 속옷이 따로 제작됩니다.”

혜미는 조용히 집중하는 시녀의 앞에서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고깃덩어리처럼 재단되는 느낌. 자신의 말 한마디에 조용히 웅성거리는 시종과 대신의 눈빛을 볼 때마다 일거수일투족이 평가당하는 느낌이다.

이런 곳에서 내가 과연 잘할 수 있을까. 다 때려치우고 도망치고 싶다는 생각이 오랜만에 들었다.

***

초겨울의 햇볕이 커튼 사이를 비집었다. 살짝 열어놓은 창문 틈 사이로 바람이 불어 집중하는 크리스티앙의 앞머리를 흐트러뜨렸다.

“폐하. 식사가 준비되었습니다.”

사각. 사각. 가느다란 목탄을 측백나무 사이에 끼워 만든 연필을 종이 위로 움직이며 크리스티앙이 낮게 입을 뗐다.

“거기 둬.”

“폐하.”

시종장이 자리를 물리지 않고 머뭇거렸다. 이를 눈치챈 크리스티앙이 한 손으로 턱을 괸 채 눈만 들어 그를 보았다.

“뭐지.”

태양빛을 잔뜩 머금은 벌꿀색 시선과 눈이 마주치자 시종장이 저도 모르게 긴장하며 입을 뗐다.

“아뢰옵기 송구하오나 요리장이 요즘 혹여나 자신의 실력이 부족함이 있는 것은 아닌지 자책을 하고 있습니다.”

“내가 식사를 거른 적이 있었나?”

“…송구하오나 그는 흔적을 보면 폐하가 음식을 즐기셨는지 아니었는지를 안다고 합니다. 제가 이런 말씀을 구태여 드리는 것은 혹여 그의 음식이 폐하께 맞지 않는 것은 아닐까….”

크리스티앙이 연필을 툭 던지고 자리에서 일어나자 시종이 지레 놀라 말을 멈추었다. 황제는 시녀 둘이 밀고 들어온 은수레로 다가간 후 의자를 빼내었다. 편한 자세로 등받이에 기댄 채 그레이비소스를 끼얹은 칠면조의 넓적다리를 느릿하게 베어 물었다.

황궁 안에 그가 입맛이 없다는 소문이라도 퍼지면 곤란하다. 발이 없는 말이 사람들을 거치며 어떻게 변화하는지는 그가 제일 잘 알았다. 어디가 아파도 티를 낼 수가 없는 것은 황태자 시절부터 지금까지 변함이 없다.

“요즘 입맛이 너무 돌아 식욕대로 먹다간 큰일이 날 것 같아 조절 중일 뿐이라 전해.”

“예, 폐하.”

“간만에 연미복의 치수를 쟀는데 사이즈가 바뀌어 버리면 낭패잖아?”

그제야 시종장이 이해가 간다는 표정으로 입을 조금 벌렸다. 황제의 빈틈없는 성격상 귀족들이 대거 참여하는 이번 무도회에 완벽한 모습으로 등장해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가 밥을 깨작거리고 묘하게 입맛이 없어 보이는 이유가 그 때문이라는 사실을 깨닫자, 자신의 무지에 자책감마저 들었다. 하이데거 대공이었다면 황제 폐하의 깊은 뜻을 미리 헤아리고도 남았을 텐데.

“에리히는 지금 무얼 하고 있지?”

선 채로 속을 들킨 듯 뜨끔하며 시종장이 고개를 숙였다. 크리스티앙은 산딸기 잼이 발린 훈제 햄을 두 덩어리째 먹어 치운 후, 시녀에게 손을 닦게 하는 중이었다.

“무도회 준비로 분주하게 움직이고 계십니다. 폐하께서 직접 참석하시는 만큼, 들어가는 품이 남다를 것으로 사료됩니다.”

흐응. 하고 대수롭지 않게 고개를 끄덕인 크리스티앙이 차를 들어 입술을 축였다.

“황녀는 일정을 잘 수행하고 있나?”

“예. 오전에 황궁 도서관에 들르셨고, 그 후엔….”

계속 말하라는 듯 황제가 그를 빤히 바라보았다.

“정부의 방에서 함께 식사를 하셨습니다.”

아주 살판났군. 크리스티앙이 식사를 억지로 이어나가며 입을 열었다. 염소젖으로 만든 치즈와 호두를 으깨어 흩뿌린 샐러드가 입 안에서 까끌거렸다.

“그녀가 정부에게 음식을 가져다준 건가?”

“아뇨.”

“그럼?”

“…황녀께서는 죄인의 음식을 함께 드셨다고 합니다.”

베네딕트는 원래가 육식을 하지 않는 데다 현재 그의 방에 들어가는 음식은 죄수가 먹는 음식으로 평범한 사람이 보았다면 도저히 입 안에 넣을 수가 없는 상태였다.

“그걸, 먹었다고.”

여간해선 되묻지 않는 크리스티앙이 시종장을 향해 미간을 모았다.

“아뢰옵기 황공하오나 황녀 전하께서는 그릇을 싹 비웠다고 들었습니다.”

슥, 고깃덩어리를 반으로 잘라 내는 크리스티앙의 속이 부글거리며 구역감이 치밀어 올랐다.

“다른 특이사항은 없고?”

“특별할 것은 없는데… 아, 오늘 오전에 근위병에게 부탁을 하셨다고 들었습니다.”

“어떤?”

날카롭게 빠진 금빛 눈썹이 조금 위로 들렸다.

“정부인 베네딕트 블라이와 함께 정원을 산책하고 싶다고 말한 모양입니다.”

“…난 처음 듣는 소린데?”

“죄인을 주관하는 것은 황궁 근위대의 관리하에 있으므로 하이데거 공의 선에서 거절을 하는 것으로 처리했다 들었습니다.”

달칵. 크리스티앙이 결국 은으로 된 나이프를 접시에 던지듯 떨어뜨리자 시종장이 몸을 움찔했다. 황제가 부드러운 냅킨으로 입을 닦은 후, 날카롭게 입을 뗐다.

“하나 묻지. 시종장.”

“예, 폐하.”

시종장의 심장이 불안하게 뛰었다. 황제가 질문을 예고한다는 것은 좋은 징조가 아니었다.

“이 땅에서는 황제보다 대공의 발언이 우선하는가?”

“그, 그럴 리가….”

“그녀가 누구의 누이인지, 다들 잊은 건가, 그럼?”

버터처럼 부드럽던 황제의 눈동자가 순식간에 날짐승 같은 빛을 띠었다.

“말해 봐. 황궁 근위대 수장인 하이데거의 주관이 죄인을 다스리는 것인지 아니면 황족을 다스리는 것인지.”

그의 목소리는 너무나 싸늘했다. 시종장은 그제야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뒤늦게 깨달을 수 있었다. 하이데거의 권력이 아무리 크다 한들 황족의 것에는 비교할 수가 없었다. 황녀에게 명령할 수 있는 이는 황금성에서 단 한 사람. 황제가 유일하다. 그것이 상이든 형벌이든.

크리스티앙의 심기가 불편해진 이유였다.

“하이데거가 내게 보고하는 것을 잊을 동안, 자네는 뭘 하고 있었나.”

“폐… 폐하….”

“죄수 따위가 먹는 쓰레기 같은 음식을 황족에게 처먹인 후 뒤에서 그녀를 비웃기라도 한 거냐고 묻고 있네만.”

“송구합니다, 폐하!”

시종장이 바닥에 머리를 박으며 피를 토하듯 소리를 쳤다. 그런 그를 내려다보며 크리스티앙이 얼굴에 가면 같은 미소를 띠었다.

“시종장.”

“예!”

“앞으로 에데르트 황녀에 관한 보고는 내게 직접 하도록 조치하도록. 그녀의 지위를 잊고 있는 게 아니라면 말이야. 알겠나?”

“명심하겠습니다, 폐하…!”

“가서 황녀에게 전하게. 그녀의 정부와 함께 정원 산책 하는 것을 허한다고.”

“예, 폐하!”

“장소는 플라틴 제2 성의 후원으로.”

“당장 고하겠습니다.”

입 속으로 몇 번이나 되뇌는 시종장의 얼굴은 사색이었다. 자리에서 일어나며 크리스티앙이 시녀에게 명령했다.

“겉옷을 가져와. 볕을 가리는 양산과 흰 장갑 그리고 흙을 밟을 수 있는 부츠도 함께 가져오도록.”

열어놓은 창문에서 바람이 흘러들어왔다. 팔랑. 나갈 채비를 하는 크리스티앙의 옆으로 그가 낙서하듯 스케치하던 그림이 날려 바닥에 떨어졌다.

“아니. 이리 줘.”

그림을 제자리에 올려놓으려던 시녀가 크리스티앙에게 공손한 태도로 그림을 건넸다.

찌익. 주저 없이 반으로 찢겨 나간 그림이 벽난로에 던져졌다. 아름다운 여자가 그려진 종이는 바스락, 소리를 낼 틈도 없이 활활 타들었다.

크리스티앙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저벅저벅 방을 걸어 나섰다.

뱃속에서 불길이 끓었다. 황녀가 미치게 짜증 나는 것과 별개로 다른 이가 그녀를 모욕하는 것은 참을 수가 없었다. 돼지 사료 같은 음식을 감히 그 방에 처넣은 자의 목을 자를 것이다. 그녀를 벌할 수 있는 이는 이 땅에 단 한 사람, 크리스티앙 본인뿐이었다.

“…그 씨팔 새끼가 분수를 모르고.”

대공 역시 죽여 버리고 싶다는 살기가 치밀어 올랐다. 권력을 쥐여 주었더니 아예 기어오르려고 하는 하이데거가 점점 마음에 들지 않는다. 힘을 가졌다, 이건가? 마력 실험을 끝까지 망설인 것은 바로 이런 상황 때문이었는데.

반질반질한 바닥을 디디는 발걸음이 빨라졌다. 역시나 크리스티앙이 가장 죽이고 싶은 이는 따로 있었다. 모든 일의 원흉. 처음 나타난 날부터 지금까지 그의 머릿속을 쑤시고 들어와 멋대로 활개 치고 있는 건방진 년.

쿵. 쿵. 심장 박동이 가라앉을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그림이 아니라 실재하는 인물을 벽난로에 집어넣고, 그의 이름을 부르며 살려 달라 외치는 그녀의 비명을 들으면 이 마음이 가라앉을 것 같다는 확신이 들었다.

근위병이 식사를 내가자 문이 닫혔다. 어제 이후, 황제는 방 안에서 그들을 더 이상 감시하지 않아도 된다는 명령을 내렸다. 혜미에게는 한결 편한 일이었다.

“오늘은 어쩐 일로 혼자 오셨습니까.”

베네딕트가 작게 입을 뗐다.

“발터는 일이 있어서요.”

“그에게 주군을 지키는 것 외에 또 다른 일이 있습니까?”

젖은 수건으로 그의 얼굴에 엉겨 붙은 피딱지를 떼는 데 집중하며 혜미가 미간을 모았다.

“리비에르를 만나러 갔어요. 오늘 서쪽 근위대의 훈련을 보러 간다고 했거든요. 그동안 리비에르와 제대로 이야기할 기회가 없었으니까요.”

그녀의 도움이 절대적인 상황이다. 발터는 리비에르를 홀로 만나기를 자처했고 혜미는 그를 말릴 수가 없었다. 그녀 앞에서 선포하듯 발터를 침실로 청한 주제에 베네딕트를 정부로 삼았으니, 리비에르가 지금쯤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지는 뻔했다. 일단 그녀의 동태를 살피고 설득이든 뭐든 시작하는 게 나았다.

만약 리비에르가 그녀의 손을 잡길 거절한다면 그다음은…. 정말 어떡해야 하지?

“이제 그와 리비에르가 단둘이 만나도 무릎에 고개를 박고 혼자 울진 않는군요.”

베네딕트가 툭 내뱉는 말에 혜미의 양 뺨이 화끈하게 달아올랐다. 남은 생사가 걸린 심각한 고민을 하고 있는데 지금 그게 할 소리인가.

“저기, 미안한데 운 적은 없거든요?”

“그럼 울기 직전이었다고 해 두죠.”

그녀는 눈을 세모꼴로 뜬 채 후후 웃는 베네딕트를 바라보았다. 하늘색 유리알 같은 눈동자가 가늘어지는 것이 눈앞에 보이는 것만 같다.

“사람 놀리면 재밌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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