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8화 (48/72)

“세르노티에서 자일룬까지, 또 자일룬에서 이곳 아메티스까지 여행하면서 많은 걸 봤어요. 사람들이 전쟁으로 지쳐 있는 것도, 영주는 일 안 하고도 떵떵거리고 잘 사는데 농민들은 세금 내느라 뼛골이 빠지는 것도 봤어요.”

“그래서 폐하께서 원하는 게 뭡니까. 설마 세상을 바꾸는 걸 원하기라도 하시는지요.”

혜미의 어깨가 잠시 움찔했다. 그녀가 고개를 들어 그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럼 안 돼요?”

떨리는 목소리는 진심이었다. 언제 이렇게 성장한 걸까. 가슴속에 원인 모를 뿌듯함이 치밀어 오른다. 베네딕트는 그녀가 사랑스러워 입을 맞추고 싶은 충동을 기쁘게 억누르며 나직하게 되물었다.

“동화 속 영웅이라도 되고 싶으신 겁니까? 폐하께선 사람들의 찬사를 받는 삶을 꿈꾸시는 겁니까?”

“그건 뭐든 상관없어요. 그저… 저는….”

“말씀하십시오.”

“모두들 인간답게 살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을 뿐이에요.”

“…아이처럼 선한 마음이군요.”

베네딕트가 작게 웃으며 입을 떼자 혜미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그녀는 지금 이 순간 그의 눈이 보이지 않는 게 어쩌면 다행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본인이 말해 놓고도 너무 이상적인 소리를 지껄이는 것으로 들린다는 걸 모르는 게 아니었다. 한국에 있는 엄마가 듣는다면 남 걱정할 시간에 네 인생이나 똑바로 챙기고 살라고 타박을 할 소리였다.

하지만… 그녀의 위치가 다르다면 가능하지 않을까. 한국에 사는 스물셋 백수가 아니라 한 나라의 황제가 된다면 가능하지 않을까.

혜미는 숨을 조금 들이마시며 입매에 힘을 주었다. 그녀가 부족하다는 사실은 스스로가 제일 잘 알았다. 모두가 행복한 나라라는 건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유니콘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할 수 있다고, 그렇게 믿고 싶었다. 그게 아니라면 이 고생을 해 가면서 황제가 되는 건 의미도 없고 너무 억울할 뿐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럼, 크리스티앙은 어떻게 되죠?”

베네딕트의 질문에 혜미는 잠시 대답을 망설였다. 이 말을 만약 발터가 듣는다면 펄쩍 뛸 이야기라는 것도 잘 알았다. 너무 화가 나서 그녀를 다시는 보지 않으려 할 수도 있다.

“가능하다면 황위를 내놓고 스스로 물러나라고 말하고 싶어요.”

물론 그와의 전쟁에서 승리하는 것이 선행되어야 할 것이다.

“그는 거절할 겁니다. 목에 칼이 들어온다고 해도 차라리 죽기를 선택할 이입니다.”

베네딕트가 단언하듯 고개를 저었다. 사실 혜미 역시도 생각은 그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녀의 눈에 크리스티앙은 황제가 아닌 그 어떤 다른 옷도 어울리지 않는 사람처럼 보였으니까.

범부로도, 백수로도 잘만 살았던 자신과 크리스티앙은 뼛속부터 다른 종류의 인간이었다.

“그렇다면….”

“죽여야 합니다. 그는 살아 있는 한 폐하의 인생에 있어 가장 위험한 독이 될 것입니다.”

혜미는 목구멍이 부어오르는 느낌에 마른침을 삼켰다. 크리스티앙이 거절한다면 그녀는 어쩔 수 없이 그를 처형해야 할 상황이었다.

그녀에게 그를 죽일 이유는 차고도 넘쳤다. 이제껏 그녀에게 보낸 암살자들의 배후에 분명히 크리스티앙이 있을 거라는 사실은, 어제 갤러리에서 그를 제대로 만나고 난 후 직감했다.

그녀를 망설이게 만드는 것은 단 하나.

“결국 저도 클라웨의 저주를 따라가게 되겠네요.”

왕관을 차지하기 위해 형제를 죽여야 했던 클라웨의 전철을 그대로 밟는다는 뜻이었다. 선조 중 누군가는 그 비극을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 대마법사와 황위 후계자를 일찍이 각인시키는 의식까지 만들었지만 결국엔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그를 죽이는 게 망설여지십니까?”

아무리 야산에서 야만인들과 전쟁을 치렀어도, 눈이 돌아가게 화려한 황금성에 왔어도 혜미의 머릿속에는 아직도 그녀가 살았던 대한민국의 기억이 생생했다. 내가 과연, 그를 찌를 수 있을까.

“솔직히 말하면 많이 힘들 것 같아요.”

“왜요. 크리스티앙과 밀실에서 입을 맞추며 가슴이 떨리기라도 하셨습니까.”

혜미의 얼굴에 피가 확 몰렸다. 베네딕트가 알고 있을 거라 생각했지만 그걸 이런 상황에서 확인받을 줄은 예상치 못했다.

“아니에요…!”

“그럼 왜?”

“걘 제 동생이잖아요.”

그는 반쪽이나마 자신과 피를 나눈 형제였다. 혈육을 죽이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할 여유 같은 건 그녀에게 없었다.

“아뇨.”

베네딕트가 그녀를 또렷하게 부정했다. 혜미가 의문에 찬 표정으로 미간을 좁혔다.

“뭐가 아니에요…?”

“폐하. 그는 처음부터 황제의 자격이 없는 이였습니다.”

혜미가 그를 빤히 바라보았다. 또 무슨 폭탄 같은 말을 꺼내려고 저럴까.

“크리스티앙의 혈관에 클라웨의 피는 단 한 방울도 흐르지 않습니다, 폐하.”

“네? 그게 무슨….”

“폐하와 그는 남남이라는 뜻입니다. 그는 태후의 부정으로 태어난 죄악의 씨앗이니까. 그의 존재 자체가 있어서는 안 될 이였죠.”

혜미의 눈이 둥그렇게 커졌다. 심장이 쿵쿵 소리를 내며 거칠게 빨라졌다.

“그를 주의하십시오. 크리스티앙이 가진 것 중 가장 커다란 재능에 빠지지 마시길.”

“…그게 뭔데요?”

“깨질 듯 위태로운 연약함입니다. 교활함으로 감추고 있는 그의 본성이죠.”

그건 약점이잖아.

“아뇨.”

베네딕트가 그녀의 생각을 부정했다.

“그건 크리스티앙의 가장 큰 강점입니다. 본인조차 모르고 있는 능력일 테지만.”

“…네?”

“그의 결핍에 절대 속지 말라는 뜻입니다. 언젠가 제 말뜻을 아시게 될 날이 올 겁니다.”

혜미는 수수께끼 같은 베네딕트의 말을 도무지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그녀의 머릿속에는 크리스티앙과 자신이 완전히 남남이라는 충격적인 사실만이 남아 있을 뿐이었다.

“크리스티앙도… 그 사실을 알고 있나요? 자신이… 클라웨가 아니라는 걸?”

“물론입니다.”

베네딕트가 웃었다. 만약 그 스스로가 몰랐더라면, 크리스티앙의 지옥은 지금처럼 지독하지 않았으리라.

“죽을 때까지 자신의 입으로 그 사실을 말하는 일은 없을 테지만요.”

혜미의 어깨에 힘이 털썩 빠졌다. 그녀는 오늘 베네딕트를 만난 것이 잘한 일인지 그 반대인지 확신이 없어졌다. 이곳에 오기 직전, 시종장은 닷새 후에 승전을 기념하는 파티가 있을 거라고 전해 왔다. 크리스티앙과 공식적으로 또 한 번 마주쳐야 한다는 소리였는데, 이렇게 되면 도대체 그를 어떤 식으로 대해야 할지 알 수가 없어진다.

“이거면 크리스티앙을 죽일 충분한 이유가 되겠지요?”

“…그걸 왜 이제 말해 주는 거예요…?”

“원래는 끝까지 말하지 않을 생각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왜요?”

그대가 혈육을 죽였다는 자괴감에 죽을 때까지 괴로워하길 바랐으니까.

베네딕트는 속을 숨긴 채 나지막하게 속삭였다.

“크리스티앙의 아름다움에 폐하께서 혹시나 눈이 머실까 봐 겁이 났습니다.”

“…그런… 말도 안 되는….”

혜미가 고개를 저으며 말끝을 흐리다 입안을 살짝 깨물었다. 크리스티앙과의 첫 만남이 생각난 까닭이었다. 빛나는 공간 안에서 가장 빛나고 있던 존재는 바로 그였다.

“기억하십시오. 그를 죽이지 않으면 폐하께서 죽는다는 것을.”

베네딕트가 팔을 뻗어 그녀를 품에 감쌌다. 나직한 목소리가 그녀의 귓가에 닿아 왔다.

“그를 뒤흔드는 건 괜찮으나… 그에게 흔들리지는 말라는 뜻입니다.”

그의 입술이 그녀의 뺨을 두드리며 서서히 내려와 입술에 닿았을 때, 바깥에서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약속된 시간이 끝났다는 사인이었다.

***

커다란 유리창으로 햇살이 쏟아졌다. 빛을 받은 채 나체로 우뚝 선 크리스티앙의 곁에서 옷을 짓는 대신이 부지런히 움직였다. 그가 아무리 황금성 최고의 실력자라고 한들 보는 눈이 까다로운 황제의 연미복을 닷새 만에 제작하는 건 도전이었다.

“신체 치수는 왜 다시 재는 거지?”

목둘레를 재려 낑낑거리는 대신에게 키를 맞추며 크리스티앙이 귀찮은 티를 냈다.

“제가 마지막으로 연미복을 지었을 때보다 폐하의 신장이 더 자라셨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더 커지면 키만 멀대 같은 허수아비처럼 보이겠는데?”

황제의 말투에 조소가 번지자 머리가 하얗게 센 늙은 대신이 황급히 부정했다.

“당치 않은 말씀이십니다. 소신은 폐하께서 어린 꼬꼬마, 아니 황태자였던 시절부터 옷을 지었지만 폐하의 아름다움에 매번 감탄하였으며 지금도 가끔 어쩌면 이렇게 외양과 내양이 쌍으로 고귀하신지 손이 벌벌 떨릴 지경….”

“그만해. 머리털이 모조리 곤두설 것 같으니.”

“예. 폐하.”

대신이 얼른 입을 다물었다. 크리스티앙이 정말로 기분이 나쁘다는 표정으로 인상을 찌푸리며 금실 같은 머리칼을 털었다. 그 모습조차도 아름다워 눈을 뗄 수 없는 게 사실이었다.

“이번 무도회에 참석하는 귀족들은 폐하와 함께할 수 있어 너무도 영광스러울 것입니다.”

“과연 그럴까?”

크리스티앙이 피식하며 입술을 비틀자 대신이 두려움도 잊고 줄자를 목에 칭칭 감은 채 목소리를 높였다.

“암요…. 폐하…! 폐하의 초대를 받다니 가문의 영광이지요!!”

크리스티앙이 고개를 저으며 낮게 웃었다.

“그렇게 진심 어린 표정으로 말하면 짜증을 낼 수가 없잖아.”

천사같이 웃는 얼굴을 보니 마치 어릴 적 그의 모습을 보는 것 같아 늙은 대신은 주책맞게 눈물이 핑 돌았다.

“폐하의 곁에서 평생 영광스러운 일생을 살았으니 저는 죽어도 여한이 없습니다. 물론 폐하의 연미복을 다 완성하고 난 뒤에 죽고 싶습니다만.”

“알았으니 아첨은 그쯤 하고 빨리 일이나 끝내 주겠어? 난 자네의 말장난을 듣고 있을 정도로 한가하지가 않아.”

황제가 그에게서 시선을 거두며 우아하게 몸을 쭉 폈다. 대신은 서둘러 줄자로 그의 어깨와 팔 길이를 쟀다.

“예, 폐하.”

황금성은 그동안 귀족들을 위한 크고 작은 무도회를 주최해 왔지만, 크리스티앙이 무도회에 참석하는 것은 그가 황제 즉위식을 치렀던 18세 이후 처음이었다. 자일룬 전투에서 귀환한 리비에르 군대의 승리를 기념하는 가면무도회에 황제가 참석한다는 소식이 알려지자 도시 전체가 들썩이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역대 최고로 화려하고 아름다운 무도회가 예상되는 가운데, 귀족들의 이목을 집중시키는 것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죽은 거로 알려졌지만 그간 동생을 위해 재야에 묻혀 살았던 에데르트 황녀. 파티의 비공식적인 주인공이라 할 수 있는 그녀와 황제를 한 공간에서 볼 수 있다는 사실이었다.

“끝났습니다, 폐하.”

“수고했어.”

“혹여 특별히 원하시는 디자인이 있으면 말씀해 주십시오. 부족한 능력이나마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늙은 대신이 그를 보며 고개를 조아렸다. 그의 정수리 위로 푸른 벨벳 가운을 걸치는 크리스티앙의 또렷한 목소리가 떨어졌다.

“음…. 가장 나다우면서 가장 나답지 않은 것?”

대신이 주름진 눈을 껌뻑였다. 까다로운 젊은 황제는 늘 그에게 쉽지 않은 명령을 내리곤 했다. 그리고 나이가 들어도 여전히 클라웨 제국 최고의 감각을 자랑하는 옷 장인은 항상 주군의 명령을 영광스럽게 수행해 왔다.

“할 수 있겠어?”

“예, 폐하.”

크리스티앙이 낮게 되묻자 잠시 생각에 빠져 있던 대신이 그를 보며 고개를 더욱 깊이 숙였다.

“모두가 절대로 잊을 수 없는 시간이 될 것입니다.”

“기대하지. 아, 그리고….”

대신에게 명령을 한 가지 더 추가한 후, 홀로 남겨진 크리스티앙은 가운을 입은 채 벽난로에 기대섰다. 폭신한 양탄자가 신발을 신지 않은 맨발에 감겼다. 붉은 포도주를 들이켜며 벨을 울리자 하이데거 대공이 나타났다.

“취소되었던 무도회를 진행하느라 경이 수고가 많군.”

“아닙니다. 폐하의 주최라는 말이 퍼진 후, 참석하겠다는 귀족의 수가 배로 늘어 명단을 추리고 있었을 뿐입니다.”

“그럴 필요 있나. 아메티스에 거주하는 귀족들은 전부 다 오라고 해.”

크리스티앙이 붉은 입술을 들어 올리며 대공에게 시선을 맞추었다.

“가끔은 그들이 보고 싶어 하는 것을 확실히 보여 주는 것도 올바른 군주의 태도가 아니겠나?”

귀족들이 무도회에서 가장 기대하는 장면은 무얼까. 역시나 황제와 황녀가 함께 있는 모습일 것이다. 지난 역사를 보았을 때, 그들의 관계는 껄끄러워야 마땅했기 때문이다. 파티 장소에는 원로원의 이들도 모조리 참석할 게 틀림없었다. 그중엔 분명, 황제와 황녀의 반목을 바라고 에데르트에게 몰래 접근하는 사람도 있을 게 뻔했다.

“확실히 만족시켜 줘야겠지. 번거롭겠지만 대공이 신경을 좀 써 주게.”

크리스티앙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며 술잔을 조금 더 기울였다. 하이데거는 여전히 황실의 근위 대장이었지만 마력을 흡수한 이후, 이전보다 쓸모가 다섯 배쯤은 많아진 참이었다.

“실망하시는 일이 없도록 철저하게 준비하겠습니다.”

대공이 절도 있는 태도로 고개를 조아렸다. 황제가 참석하는 무도회는 그의 권위를 보여 주기 위해 이제까지의 파티와는 차원이 다르게 화려해야 할 것이다. 그를 위해 하이데거는 닷새 동안 매우 바쁘게 움직여야 했다.

“황녀는 지금 뭘 하고 있지?”

“오전에 베네딕트의 처소를 찾아 약 두 시간 동안 머무르다 떠났습니다.”

크리스티앙의 황금색 눈썹이 소리 없이 휘었다. 잔을 쥔 그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눈뜨자마자 씹질을 하러 갔단 소리인가? 지금 이 시간에?”

“…아뢰기 송구하지만 그러합니다.”

“그 새끼와 진짜 몸을 섞었다는 말이군.”

“한 방에서 그를 감시하던 근위병의 보고를 방금 들은 참입니다.”

하이데거는 그에게 들은 자세한 내용은 생략했다. 근위병의 눈에 비친 황녀는 천하의 요부가 따로 없어 황제에게 말을 전하는 것조차 불경하게 느껴진 탓이었다. 크리스티앙의 입술에서 작은 탄식이 터졌다.

“하.”

관자놀이가 쿡, 하고 쑤셔 온다. 하이데거가 그의 빈 잔을 채웠다.

“에리히. 그 창녀가 발터 세르노티에게 개처럼 뒤로 박히며 신음했던 게 바로 어젯밤 아니었나? 혹시 내 기억력에 문제가 생긴 건 아닌지 해서 묻는 거야.”

“아닙니다.”

하이데거가 짤막하게 대답하자 크리스티앙의 입술에서 사나운 웃음이 터져 나갔다. 그는 한참 소리 내어 웃다가 기다란 손가락으로 축축해진 눈매를 닦아 냈다.

“짐의 누이라는 미친 여자는 정말 상상을 초월하는군. 아아.”

쑥 들어간 그의 눈두덩이 안에서 금빛 눈동자가 어둡게 이글거렸다.

“호위 기사가 싸지른 정액이 채 식지도 않은 시간에 몸도 성치 않은 다른 연인을 찾아 떡을 치러 가는 여자라니. 하하, 씨발….”

크리스티앙이 날카로운 웃음기를 머금은 채 붉은 입술 새로 포도주를 단번에 털어 넣었다. 달콤하고 미지근한 술이 식도를 타고 내려가자 몸이 더욱 뜨거워진다.

“피가 반밖에 섞이지 않은 이복누이에게 현명함과 정숙함을 바랄 정도로 내가 욕심이 많지는 않아. 하지만 입궁한 지 사흘도 넘지 않은 시점에서 그녀가 벌인 일들을 내가 어떻게 이해해야 좋을지 모르겠군.”

무식함과 천박함에도 정도라는 게 있었다. 모두가 그녀의 행동을 주시하고 있을 이 상황에서 황족의 법도와 예절 따위는 신경도 쓰지 않으며 활개 치고 다니는 모습에 어이가 없어 웃음도 나오지가 않는다.

“폐하께서 모욕감을 느끼시는 것은 전혀 무리가 아닙니다. 폐하. 그녀는 황족의 대우를 받을 자격이 전혀 없습니다. 본인 스스로 말했듯 성 바깥에서 짐승과 같은 무리들과 뒹굴며 천한 생활을 이어 간 그녀는 20년 동안 올바른 군주가 되기 위해 모든 것을 바치신 폐하와는 비교할 자격조차 없는, 클라웨의 고귀한 혈통을 더럽히는 존재일 뿐입니다.”

크리스티앙의 노란 눈동자가 순간 그를 뚫어져라 노려보았다. 찌를 듯한 살기에 에리히가 묵묵히 고개를 숙였다.

“제 무례를 벌하셔도 달게 받겠습니다.”

“…아니. 자네의 말이 다 맞아. 하나도 틀린 게 없네.”

마침내 입을 연 크리스티앙이 도자기 잔 바닥에 깔린 붉은 술을 노려보며 낮게 중얼거렸다.

“그 더러운 창녀를 꿇어앉히고 뺨을 갈기고 싶어 돌아 버릴 것 같은 이유가 바로 그것이었군.”

하이데거는 지금 당장이라도 그럴 수 있다는 말을 꾹 눌러 삼켰다. 크리스티앙은 본래 계획이 바뀌는 걸 싫어하는 이였다. 모든 것의 밑그림을 그리고, 하나하나 쌓아 올려 완벽한 성을 짓는 방식으로 자신의 제국을 만든 크리스티앙이 지금 얼마나 분노를 참고 있는지는 모를 수가 없었다. 그가 술의 빛깔보다 더욱 붉은 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다.

“난 그녀와 지금 이 성안에 함께 있다는 것 자체를 용납하지 못하는 거야. 그래서 이렇게 열이 받는 거겠지. 그래. 맞아.”

지난밤, 크리스티앙은 새벽에 입궁해 그의 침대 시중을 들던 체셔 백작 부인을 목 졸라 죽일 뻔했다. 그 자리에 하이데거가 있었던 것은 다행인 일이었다. 그 결과 그의 치유 마력을 황제도 확인하는 계기가 되었기 때문이다.

“폐하가 인내하셔야 할 날이 끝나는 것도 머지않았습니다. 호아킴 장군이 바다를 건넜다고 합니다.”

“그래?”

크리스티앙이 그를 보며 기다랗게 빠진 눈썹을 치켜세웠다.

“예, 폐하. 이제 그가 아메티스에 도착하기까지는 열흘도 채 남지 않았습니다.”

“잘됐군.”

크리스티앙이 에리히를 보며 싱긋 웃었다. 분노를 갈무리한 표정이었지만 육체의 흥분까지는 감출 수 없었다. 대공은 황제의 하체로 감히 시선을 내리지 않으려 애를 써야 했다.

“열흘 동안 세상이 뒤집히는 일은 없을 테니까.”

모닥불이 타닥, 튀기며 불씨가 날았다. 크리스티앙은 마시던 술을 벽난로에 흩뿌렸다. 벽난로의 불길은 잦아들지 않고 더욱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이봐요, 정신 차려요. 괜찮아요…?”

한참 단꿈을 꾸고 있는 그를 방해하던 다급한 목소리가 떠올랐다. 천금같이 무겁게 느껴지던 눈을 간신히 떴을 때, 놀란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던 눈동자까지 생생했다. 놀라움과 당황스러움 그리고 안도감이 차례로 스쳐 가던 표정도 잊을 수가 없었다.

“아, 미안. 죽은 줄 알고….”

마치 그가 죽기라도 할까 봐 걱정한 것 같은 말투. 지금 생각하면 촌극이 따로 없는 상황이었지만 그녀를 그대로 놔둔 것은 약과 술에 엉망으로 취해 판단력을 상실했기 때문이 틀림없었다.

그때 죽였어야 하는 건데.

하이데거이건 누구건 불러서 황제의 밀실에 침입한 정신없는 년의 목을 잘랐어야 옳았다.

무식하게 힘만 세고 멍청하기 짝이 없는 여자는 그다음 날 갤러리에서 크리스티앙의 뒤통수를 거하게 날렸다. 당황한 표정을 감추지도 못하고 입을 떡 벌리던 바보 같은 얼굴도 머릿속에서 떨쳐지지가 않았다.

경멸을 감추고 그녀의 손등에 키스한 것은 혹시나, 혹시나 약에 취했던 자신이 사람을 착각했던 건 아니었을까, 하는 한 줄기 희망이었다. 움찔하던 보랏빛 눈동자를 보았을 때, 손에서 펄떡펄떡 뛰던 맥박의 진동을 느꼈을 때, 크리스티앙은 좌절해 그녀의 피부에 송곳니를 세울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는 형제처럼 자란 제 친우입니다…!”

애인과 의리를 운운하던 입에서 다급한 말이 떨어졌을 때, 크리스티앙은 그녀의 속내를 직감했다. 황녀는 그간 제 수준처럼 저급한 이들과 어울린 듯 보였고, 그것은 그녀의 곁에서 사나운 송곳니를 숨기지도 못하고 공격적인 눈빛을 드러내던 사냥개의 태도가 왜 그따위였는지를 단번에 이해시켰다.

거기까지는 그래도 참을 수 있었다. 황녀가 데리고 다니는 호위 기사 따위는 당장 죽여 버리면 그만이었으니까.

하지만 황녀의 기행은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베네딕트를 제 정부로 들인다면요?”

황녀와의 만남 장소를 갤러리로 택한 것이 어떤 의미인지 안다면 거기서 그에게 그런 모독을 행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역대 황제들의 초상화와 대관식 그림이 가득한 그곳에서, 제국의 역사를 보여 주는 상징적인 장소에서 황녀는 교황에게 입을 맞추었던 것이다.

“하아….”

대마법사와 황녀가 육체적인 관계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 공공연하게 알려진 사실이라 해도 그것을 남들 앞에서 대놓고 드러내는 것은 말이 안 되는 것이었다. 아무리 베네딕트가 교황의 직책에서 끌어내려졌다고 하더라도 그따위 모습을 보여 주는 것은 황족의 권위를 땅바닥에 떨어뜨려 짓밟는 것이나 다름이 없었던 것이다.

차라리 베네딕트 어미의 발목을 분질렀다던 그녀의 아비, 클라웨 8세의 행동이 더욱 현명했다. 혈기 왕성한 근위병들 중 황녀가 교황의 혀를 개처럼 핥는 걸 보며 좆을 세우지 않은 이는 한 명도 없었을 것이다.

그따위로 천박하게 행동한 것도 모자라 그녀는 베네딕트와 연인 관계라고 털어놓은 날 밤, 호위 기사를 유혹해 침대에 들였다. 크리스티앙은 그녀가 침실을 벗어나 응접실 문을 스스로 열고 그에게 다가가는 모습을 똑똑히 목격했다.

“씨팔….”

걸레같이 제 음부를 손으로 벌리던 그녀의 모습을 보았을 땐 거울을 다 때려 부수고 싶은 충동을 참을 수가 없었다. 곁에 하이데거가 있었던 것은 불행 중 다행이었다. 만일 혼자였다면 크리스티앙은 분노를 참지 못해 그길로 황녀의 침실로 들이닥쳤을지도 몰랐다.

따귀를 서너 차례 갈기고 온몸을 꽁꽁 묶어 놓은 후, 정액이 줄줄 흐르는 더러운 음부에 자신의 좆을 거세게 처박아 넣고 짤막한 머리채를 손아귀에 움켜쥔 채 그 자그마한 입술에서 흐느낌이 터지게 만들고 싶은 폭력적인 충동을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젠장. 제기랄. 빌어먹을!!

크리스티앙은 맨발로 서재를 걸어 나섰다. 성큼성큼 그가 지나는 자리마다 환한 샹들리에가 흔들렸다. 문을 몇 개 통과하자 근위병들이 서둘러 고개를 숙였다.

“…폐하…?”

그는 응접실에서 시녀들의 시중을 받으며 책을 읽고 있던 황후를 번쩍 들어 침실로 향했다.

“…흣!!!”

침대에 던져 놓은 후, 가운을 벗어 던지고 그녀를 뒤로 뒤집었다. 드레스를 말아 올리자 페티코트가 드러났다. 크리스티앙은 짜증스러운 손길로 속옷을 찢어발기듯 연 후, 그녀의 뒤에서 귓가에 입술을 붙였다.

“황후.”

“하아…. 예…. 폐하….”

온다는 말도 없이 갑자기 들이닥친 황제 때문에 여간해서는 당황하는 일이 없는 황후 미리엄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렸다.

“부탁이 있는데.”

“말씀… 하십시… 흐응…!”

크리스티앙이 그녀의 귓바퀴를 잘근 씹었다.

“오늘은 정숙한 척은 집어치우고 매음굴의 창녀처럼 굴어 줘. 알겠지?”

“그,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하악…!”

“이제 곧 알게 될 거야.”

크리스티앙이 그녀의 머리채를 거칠게 휘어잡았다. 황후의 다리 사이를 억지로 비집으며 그는 지난밤 거울에 비쳤던 황녀의 모습을 떠올렸다. 분노의 크기만큼 아찔한 쾌감이 쑥 들어간 등줄기를 타고 내달렸다. 그의 잇새에서 억눌린 듯 괴로운 신음이 터져 나갔다.

늦은 저녁 식사가 끝나자 긴장이 풀렸는지 피로가 한꺼번에 몰려들었다. 방과 연결된 응접실에서 멍한 표정으로 앉아 있는 혜미의 앞에 발터가 찻잔을 내밀었다.

“마셔.”

시녀가 밀고 들어온 차 수레에 혹시나 이상한 독이라도 든 건 아닌지 일일이 확인하고 건네는 발터는 24시간 긴장 상태로, 그녀보다 더하면 더했지 힘이 덜 들진 않을 것이다.

“…많이 피곤해?”

“응. 만난 사람이 너무 많아서 진이 다 빠지는 기분이야.”

혜미가 찻잔을 받아들며 솔직하게 답했다. 오전에 베네딕트를 방문한 이후에 그녀는 황궁 근위대의 훈련 모습을 지켜보아야 했다. 동쪽 근위대의 훈련대장은 황제 폐하의 명을 받고 기다리고 있었다며 그녀에게 예를 취해 고개를 숙였다.

훈련의 강도는 그녀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욱 강했다. 잘 훈련된 군대가 일사불란하게 검을 움직이는 모습에 압도당하는 느낌마저 들었다.

황녀의 일과는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하루 만에 다 돌아보기가 불가능한 황금성 곳곳을 살피며 궁정 대신들에게 얼굴을 비추는 것이 현재 그녀에게 주어진 공식적 임무였다.

성대한 개선문을 세운 것으로 미리 짐작했지만, 크리스티앙은 갑자기 나타난 자신의 이복 누이를 감추지 않고 세상에 당당히 드러낼 생각인 것으로 보였다. 혹시나 모를 남매끼리의 반목설을 일찍이 차단하기 위함이었지만, 그녀로서는 성안의 경비 상태를 살펴볼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하였으므로 거절할 수가 없었다.

“오래 걸리지 않을 거야.”

“응.”

발터의 말에 혜미가 짧게 답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전쟁보다 그걸 기다리는 시간이 더욱 피가 말랐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클라웨 제국의 가장 큰 행사라고 할 수 있는 겨울제. 세르노티에 몸을 숨기고 살던 그들에게는 별 감흥이 없는 축제였지만 이곳, 아메티스에서는 달랐다. 겨울에도 얼음이 얼지 않는 아메티스에서 보름 동안 이뤄지는 축제에 도시 전체가 벌써부터 들뜬 분위기였다.

노예들은 귀족들의 눈을 즐겁게 할 검투 시합을 준비하느라 몸을 단련하는 데 한창이었고, 양조장은 쉼 없이 가동하며 연일 달콤한 술을 빚어냈다.

각 지방의 영주들은 제국에 대한 자신의 충성을 증명하기 위해 자신이 거느리는 식솔과 최정예기사들을 모조리 데리고 수도를 방문할 예정이었다. 도시의 술집과 여관을 겸하는 숙박업소와 매음굴은 곧 밀려들 손님들을 맞을 준비를 하느라 행복한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혜미와 세르노티의 기사들이 결전의 날을 겨울제로 정한 것은 당연했다. 아일라를 통해 전언을 받은 세드릭은 약속대로 하르트만 부인에게 연락을 취할 것이고, 만약 일이 일사천리로 진행된다면 그들은 겨울제에 맞춰 군대와 함께 수도에 입성할 것이다.

“허점을 알아내려면 매일 같이 이 성 곳곳을 탐방해도 모자라니까.”

혜미가 작게 입술을 움직이자 발터가 고개를 끄덕였다. 어릴 때부터의 훈련이 빛을 발하는 것은 이럴 때였다. 소리 없이 입술의 움직임만 보고도 상대가 무슨 말을 하는지 유추할 수 있는 것이다. 발트리는 그것도 모자라 암호와 수신호까지 만들었다. 암투가 만연한 황궁의 생리를 직접 겪었던 까닭이었다.

“아일라는 괜찮겠지…?”

속삭이는 혜미의 질문에 말없이 차를 마시던 발터의 목울대가 작게 일렁였다. 소리 없이 찻잔을 내려놓은 후, 그가 조용히 입을 뗐다.

“당연한 소리.”

말은 그렇게 하지만 발터 역시 긴장하고 있다는 사실은 혜미도 알았다.

이틀 전, 아일라는 단 두 줄뿐인 전언을 몸에 새긴 채 먼 길을 떠났다. 스스로는 볼 수 없는 곳. 그녀는 자신의 목덜미에 문신을 새겨 달라 부탁했다.

“편지를 들고 갈 순 없어요. 위험하니까요.”

“그럼 그냥… 아일라 네가 직접 말로 전달하면 되잖아. 왜 몸에 자국을 남기려는 거야.”

세르노티 기사들에게 그녀가 말할 수 없는 비밀스러운 작전이란 없었다. 혜미가 가족같이 믿는 이들은 그녀를 위해 목숨을 걸고 싸웠던 그들뿐이었다. 하지만 아일라는 듣고 싶지 않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세드릭 님은 신중하신 분이에요. 난 그런 그분을, 제가 하는 말이 진짜인지 가짜인지 같은 걸로 고민하게 만들고 싶지 않아요. 하지만 발터의 필체를 본다면 망설이지 않을 테니까요. 그리고….”

“…그리고?”

“만약의 경우를 대비해서라도, 제가 전언의 내용을 아예 모르는 편이 더 나아요.”

“만약의… 경우 뭐…?”

혜미를 빤히 바라보던 아일라는 담담하게 말했다.

“제가 붙잡혀서…. 취조당할 최악의 경우요.”

만약 중간에 누군가에게 공격받아 암살을 당하게 되더라도 아일라는 적에게 아무런 정보를 말할 수 없다. 그녀도 내용을 모르니까.

그녀에게 또다시 부담감을 지웠다는 죄책감에 가슴 한구석이 쿡, 찔렸다. 혜미의 마음을 알아채기라도 한 듯, 발터가 나지막하게 말을 이었다.

“그녀에겐 꼭 만나야 할 가족이 기다리고 있잖아.”

“…그건 그렇지?”

“그래. 아일라는 무조건 세르노티에 도착한다. 그녀를 믿어.”

혜미는 발터의 덧붙임에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훗날, 모든 일이 다 끝난 후 세드릭을 만나 그들의 재회가 어떠했는지 웃으며 물어보게 될 날을 간절히 기다렸다.

“넌, 잘할 거다.”

출정을 떠나던 그녀에게 왼손으로 악수를 청했던 세드릭이 떠올랐다. 기억을 잃고 깨어난 그녀에게 다짜고짜 칼을 휘둘렀던 잿빛 머리의 사내는 그녀를 위해 싸우다 팔 하나를 잃었다.

황금성에서 보낸 마차에 선물을 가득 싣고 돌아오겠다고 마을 처녀들 앞에서 큰소리를 치던 얀을 생각하니 웃음이 나왔고, 커다란 덩치로 어머니에게 쩔쩔매던 빈센트와 그 옆에서 아줌마는 저만 믿으시라며 쾌활하게 웃던 레나의 모습까지 떠오르자 어쩔 수 없이 미간이 시큰거렸다.

내일 당장 어떤 일이 일어날지 아무것도 모른 채 모두가 한뜻으로 세르노티를 떠났던 그날 이후, 벌써 반년이 훌쩍 넘었다.

높다란 언덕에 벌러덩 누워서 멍 때리며 바라본 세르노티의 평화로운 하늘도 잊을 수는 없었다. 한가하게 흘러가던 구름 사이로 슥, 하고 얼굴을 들이대던 발터. 그와 함께 어깨를 마주하고 편하게 빵을 씹던 그날. 바람에 민들레 홑씨가 날아다니고 따스한 햇볕이 몸에 내리쬐던 날.

나는 그런 봄을 다시 맞이할 수 있을까. 거기까지 생각하다가 혜미는 순간 얼굴을 굳혔다.

“이번 겨울이 폐하와 함께하는 마지막 계절이 될 것입니다.”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처럼 피곤한 이유는 비단 꽉 찬 일정 때문에 이곳저곳에 불려 다녀야 했던 까닭만은 아니었다. 황궁 근위대의 훈련 모습을 볼 때도, 각 부서의 대신들을 소개 받을 때에도 혜미의 머릿속에서는 베네딕트와 나누었던 대화가 몇 번이나 되풀이되고 있었다.

잔인하게 고문당해 죽어 가는 그를 살리기 위해선 자신이 받은 마력을 돌려주는 것밖에는 방법이 없다. 그리고, 마력을 돌려주는 방법이란 것이….

도대체 베네딕트는 왜 뭐든 처음부터 제대로 알려 주는 법이 없는 걸까. 비밀이 많은 남자는 이래서 상대하기가 피곤하다. 만약 그녀가 황금성에 오는 것이 조금 더 지체되었더라면, 베네딕트는 살 수 있는 조금의 가능성도 없이 그냥 죽음을 맞이해야 했다는 뜻이 된다. 대마법사가 수명을 왕창 줄였다는 꼬마 마법사의 말이 그 가정을 뒷받침하고 있었다.

이렇게 표현하기는 싫지만 이래서는 베네딕트의 삶 자체가 그녀를 위한 도구였다는 뜻밖에 더 될까. 잘난 척은 혼자 다 하면서 정말 바보 아닌가 싶었다. 혜미는 나중에 기회가 생긴다면 베네딕트를 앉혀 두고 그 머릿속에 도대체 뭐가 들어 있는지 하루 종일 인터뷰라도 하고 싶은 마음이었다.

성교에 의한 치유 마법에 숨겨진 비밀도 충격이기는 마찬가지였다. 애정이라는 감정이 선행되지 않으면 마력 전달 자체가 불가능하다니.

그렇게 안 생겨서는 사랑을 엄청 좋아하는 족속이 따로 없었다. 역대 대마법사들도 황제를 사랑했을까. 황제에게 마력을 쏟기 위해 반강제로 섹스하며 그들은 군주를 사랑하기 위해 노력해야 했을까.

몸을 섞다 보니 어느 순간 의지와는 다르게 마음이 저절로 움직였을 수도 있다. 이해하지 못할 상황은 아니다. 몸 정이라는 말이 괜히 나온 건 아닐 테니까.

하지만 문제는 그 다음이었다. 결국 몸도 주고 마음까지 준 후에는? 아무리 황제를 사랑한다 해도 대마법사는 평생 교황이라는 지위에 갇혀 살아야 했다. 국법에 따르면 클라웨는 사비오족과 혼인할 수 없다고 들었다. 아무리 사랑한다 한들 평생 반려가 될 수 없고 이용만 당하는 그들. 감정이 증오로 변하는 것은 당연한 게 아니었을까.

혜미는 빠른 시일 내에 황궁 도서관을 찾기로 마음을 먹었다. 마법사에 관한 문헌은 모조리 황궁에 보관되어 있다고 했으니, 그녀의 가정에 확신을 세울 만한 뭔가를 찾아낼 수 있을지도 몰랐다.

당사자가 아닌 이상 그들을 완벽히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사실은 알고 있다. 하지만 적어도 한 가지는 확실했다. 혜미가 마법사라면 클라웨의 ‘클’ 자도 보기 싫을 것 같았다. 교황이 되는 것은 그중 가장 최악이었다. 그런데 베네딕트는 왜. 어째서 나를.

“…….”

생각해 보면 위기의 순간에는 항상 그가 있었다. 변절한 페터의 칼을 맞고 죽은 그녀를 살린 것도 그였고, 빌어먹을 양피지 때문에 낭떠러지에서 추락했을 때 시간을 벌어 준 것도 그였다. 안 그랬다면 발터와 그녀 둘 다 폭포수에서 익사하고 말았을 테니까.

그것만이 아니다. 리비에르와 발터 사이를 혼자 상상하며 괴로워하고 있을 때 막사를 찾아와 그녀를 위로한 것도 베네딕트였다. 잘 생각해 보면 그녀의 영혼이 가출했을 때 혜미의 방으로 그녀를 찾아왔던 것은 발터보다 베네딕트가 먼저였다.

뭐야. 진짜.

혜미가 손톱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가슴이 울렁거리며 심장이 또다시 아플 정도로 세게 뛰었다. 한번 물꼬가 터지니 그동안 기억도 못 하고 있었던 그와의 일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며 머릿속에 떠올랐다. 베네딕트와 처음 관계했던 새벽녘의 일 역시도.

‘저는 여전히 저의 자리에서 폐하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때 이미 그는 자기가 곧 죽을 거란 걸 알고 있었음이 틀림없었다. 그럼에도 베네딕트는 그에 대해 입도 뻥긋하지 않았다. 하여튼 이상한 사람이다.

혜미의 미간에 더욱 깊게 주름이 팼다. 그럼 다니엘라는 뭘까. 절벽에서 떨어진 후 훔치듯 엿본 그의 기억 속에서 베네딕트는 분명히 그녀의 어미인 황후 다니엘라를 연모하고 있었다.

엄마도 사랑하고 그 딸도 사랑한다…?

너무도 확실하게 변태 같은 이야기였지만 그녀가 지금까지 알아 온 베네딕트라면 왠지 충분히 가능한 소리로 들렸다. 그리고 예상과는 달리 기분도 그다지 나쁘지 않다는 게 더 묘했다. 그저, 베네딕트가 너무 바보 같다는 생각이 들 뿐이다.

…이제 어쩌지?

그를 살릴 열쇠는 그녀가 쥐고 있는데, 그는 끝까지 고고하게 잘난 척을 하고 있었다. 살려 달라고 매달리지도, 사랑해 달라고 애원하지도 않겠다던 베네딕트의 말은 허풍이 아니다. 그가 크리스티앙의 성정에 대해 단언했던 것처럼, 혜미 역시 그것만큼은 단언할 수 있었다.

베네딕트가 그녀에게 매달리는 일은 절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혜미는 그가 누군가에게 고개 숙여 부탁을 하는 모습 자체가 상상이 가지 않았다.

그래서 더욱, 이렇게 그를 생각하면 심장이 쿡쿡 쑤시게 아픈 걸까. 베네딕트는 영영 행복해지지 못하는 걸까. 바보같이 이루어지지 못할 사랑만 평생 두 번 하다가 온몸이 갈기갈기 찢겨 죽을 운명인 건 너무 심하잖아.

후, 하고 저도 모르게 무거운 한숨을 쉬는 혜미를 보며 발터가 입을 뗐다.

“베네딕트 말인데.”

혜미가 흠칫 놀라며 고개를 들자 발터가 그녀를 직시하고 있었다. 오늘 하루 종일 계속 생각하던 사람의 이름이 발터의 입에서 나오자 꿀꺽, 저도 몰래 마른침이 넘어갔다. 혜미가 손바닥에 난 땀을 문질러 닦는 걸 보며 발터가 나직이 입을 열었다.

“마력이 확실히 없어진 거 맞아?”

“응. 아주 조금 남아 있긴 해도 이전 같은 힘은 기대할 수 없는 것 같아. 지금 상태를 보면 알잖아.”

혜미의 힘 빠진 목소리에 발터가 짙은 눈썹을 미간에 모았다. 오전의 일을 떠올리자 어쩔 수 없이 그의 온몸에 힘이 꽉 들어갔다.

황녀에게 허락된 시간이 끝나고 베네딕트가 갇혀 있던 방문이 열렸을 때, 베네딕트는 그녀와 입을 맞추고 있었다. 혜미는 발터를 등진 채였으므로, 그가 볼 수 있는 것은 잘린 손으로 그녀의 뒤통수를 어루만지며 고개를 기울이던 베네딕트의 옆얼굴뿐이었다.

“만약, 그게 아니라면?”

“…무슨 뜻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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