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폐하의 품이 따뜻합니다. 기분이 좋군요.’
벽난로조차 없는 초겨울의 방은 입김이 나올 정도로 썰렁했다. 자그마한 창에서 햇빛 한 줄기가 흘러들어 올 뿐이었다.
얼마 정도의 시간이 흘렀을까. 베네딕트를 가만히 안고 있던 혜미가 팔에 힘을 풀고, 그가 앉아 있는 침대 아래쪽 바닥에 무릎을 대고 앉았다. 그리고 손마디가 잘려 나간 그의 손바닥을 조심스레 잡아 제 손에 마주 댔다. 잘린 신체에 대한 거부감보다 묵직하게 차오르는 슬픔의 크기가 더욱 컸다.
‘아프지 않았습니다.’
‘생각 읽지 말아요.’
‘마음대로 되는 일이 아닙니다.’
그녀는 그의 뭉툭한 손을 잠시 바라보다가 베네딕트의 무릎에 얼굴을 툭, 떨어뜨리듯 기댔다. 가슴이 울렁거리고 눈가가 간질거려 눈을 꽉 감아야 했다. 혜미의 속눈썹 뿌리 끝이 촉촉하게 젖어 들었다. 베네딕트가 상처가 아물지 않은 손을 들어 그녀의 머리를 어루만졌다.
‘겨우 이런 작은 일로 울지 마십시오.’
‘…운 적 없어요.’
‘안아 드릴까요, 에데르트 폐하.’
마치 오래전처럼 베네딕트가 그녀를 부드럽게 달랬다. 혜미는 뜨거워진 숨을 작게 들이켰다.
‘아니. 그냥 잠시만… 이러고 있으면 좋겠어요.’
‘그러죠.’
머릿속에서 들려오는 베네딕트의 목소리는 꿈을 꾸는 것처럼 아득했다. 이상한 일이었다. 온갖 좋은 것들로 꽉 차 있는 황금성 안의 어느 공간보다, 혜미는 베네딕트와 함께 있는 이 초라하고 작은 공간에서 안정을 느끼고 있었다.
…왜?
‘폐하의 무의식이 어린 시절 저와의 기억을 떠올리기 때문이겠지요.’
혜미의 소리 없는 질문에 베네딕트가 답을 주었다.
‘외로울 때마다, 두려워할 때마다 제가 그대의 곁에 있었으니까.’
‘…….’
‘기다리는 이의 입장이 되고 나니 알 것 같았습니다. 그때 폐하가 어떤 맘으로 저의 방문을 기대하였을지.’
‘…….’
‘새벽부터 폐하가 절 언제 찾아오실까 기다렸습니다. 어린 시절의 폐하도, 이렇듯 간절한 마음이었을까요.’
작게 숨을 들이쉬는 그녀의 머리칼을 쓸어내리며 그가 작게 속삭였다.
‘자, 이제 근위병의 눈을 속일 시간입니다.’
감시를 맡은 근위병은 명령에 따라 문 쪽에 선 채, 그들의 움직임을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었다. 황녀와 대마법사의 만남에 위험한 낌새가 있는지 엄격히 주시하라는 대공의 명령이 있었지만 그들은 그저 오랜만에 만난 연인들처럼 애틋하게 보일 뿐이었다.
황녀의 정부가 교황이었다는 말은 적어도 거짓이 아닌 것처럼 보였다. 둘 사이에는 서먹함보다 친밀함이 더욱 크게 느껴졌다. 마치 함께한 역사가 오래된 것처럼.
그의 무릎에 기대고 있던 혜미가 천천히 눈을 떴다. 자리에서 일어나 재킷을 벗는 황녀를 보고 근위병이 작게 숨을 들이쉬었다. 몸에서 벗겨지는 것은 재킷뿐만이 아니었다. 그녀가 걸치고 있던 블라우스까지 스르륵 바닥에 떨어졌다.
“…거기서 언제까지 지켜볼 셈이에요?”
그녀는 황녀의 신분이었지만 그 이전에 눈을 뗄 수 없이 아름다운 여인이기도 했다. 그는 얇은 슈미즈만 걸친 그녀를 차마 침착한 시선으로 바라볼 수 없어 고개를 푹 숙였다. 근위병의 입에서 당황스러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황녀 전하. 그는 죄인입니다. 저는 그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해야 하는 역할을 하는 것뿐으로….”
“근위병의 역할에는 황족의 사생활을 감시하는 것도 포함돼요?”
“그, 그것이….”
혜미가 그를 향해 조금 높아진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이 그렇게 많지 않다는 거… 보면 알잖아요.”
당장 숨이 끊어져도 이상하지 않은 베네딕트의 상태를 염두에 둔 말이었다. 근위병의 눈동자에서 망설임이 스치기 시작했다. 혜미는 작정하고 목소리에 더욱 힘을 실었다.
“문 뒤에서 기다려 달라는 것뿐입니다. 부탁할게요. 연인을 만나는 시간을 방해받고 싶지 않은 간절한 바람입니다.”
“송구합니다, 황녀 전하. 전하께서는 제게 부탁을 하실 위치가 아니십니다.”
“그럼 명령을 할까요?”
근위병이 벌게진 얼굴로 그녀를 보았다가 눈을 어디에 둬야 할지 몰라 다시금 시선을 떨구었다.
“명령하면 나간다는 뜻이죠?”
슈미즈만 입은 채 한 발짝 다가오는 혜미의 모습에 어쩔 수 없이 회가 동한 탓이었다.
“제게는 황제 폐하의 명이 그 어떤 명령보다 선행합니다. 용서하시길.”
“미치겠네, 진짜.”
“죄송합니다.”
근위병은 벽창호였다. 짤막하게 잘린 머리칼을 쓸어 넘기며 낭패감에 입술을 씹자, 혜미의 머릿속에 베네딕트의 나지막한 음성이 울렸다.
‘크리스티앙의 명을 거역할 수 있는 이는 이 성에 아무도 없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잔인한 방법으로 죽기를 원하는 자가 아니라면.’
어쩔 수 없이 근위병의 눈앞에서 베네딕트와 ‘연인 같은’ 시간을 보내야 한다는 뜻이었다. 혜미는 결단을 내린 후, 부츠까지 벗어 던지고 침대 위로 올랐다. 그리고 침대 끄트머리에 앉아 벽을 향하고 있는 베네딕트의 상체를 돌려 그녀를 보게 했다.
“몸은 좀 어때요.”
‘아주 좋습니다. 폐하께서 친히 저를 찾아 주시다니…. 마치 제가 정말로 폐하의 연인이라도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
혜미는 머릿속에서 들려오는 베네딕트의 나직한 목소리를 무시하곤 그에게로 손을 뻗었다.
“역시 고통스러운 거군요. 가엾은 사람.”
‘연기에도 소질이 있으신 줄은 몰랐습니다만.’
그를 어루만지는 혜미의 손길을 받으며 베네딕트가 후후 웃었다.
‘그만큼 폐하께서 필사적이란 뜻이겠죠. 저에게.’
‘마력이 정말 없어진 거예요? 설마, 아니죠?’
소리 없이 묻는 그녀의 눈동자는 간절했다. 갤러리의 그림이 바뀌었다 돌아온 것은 아주 짧은 순간의 일이었지만 그건 그녀만의 착각이 아니었다. 그 자리엔 발터와 리비에르까지 있었으니까.
‘왜 대답 안 해요?’
‘폐하께 무슨 답을 해야 좋을지 망설이고 있는 중입니다.’
‘…왜요?’
‘실망하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기 때문에.’
의미심장한 그의 말에 혜미는 입술을 깨물며 말없이 숨을 들이쉬었다.
그래. 마력이 없어지지 않았다면 형벌을 받을 걸 뻔히 알면서도 왜 진작 성을 탈출하지 않았단 말인가. 그는 황금성에서 자일룬까지 말을 타고 보름이 넘게 걸리는 거리를 단번에 이동할 수 있는 대마법사였다. 그뿐만이 아니다.
이토록 고통스러운 고문을 당하면서 치유 마력을 쓰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비단 눈에 보이는 상처만이 아니었다. 그의 몸에서 느껴지는 생명력은 꺼져 갈 듯 희미했다. 대마법사의 보석으로 연결된 이의 상태가 고스란히 전달되는 것은 그녀를 더욱 조급하게 만들었다.
‘몸을 치료하려면 어떻게 해야 해요? 교황청에 가서 다른 마법사를 데려오면 돼요?’
무슨 수를 써서라도 운하 건너편에 있는 교황청으로 갈 생각이었다. 결의에 찬 표정을 한 혜미를 보며 베네딕트가 속삭였다.
‘일단 키스할까요. 지켜보는 이가 기대하는 것 같으니.’
그의 뺨에 닿은 혜미의 손이 조금 떨렸다. 어차피 두 눈을 부릅뜨고 감시하는 근위병을 안심시키려면 애정 행각을 보이긴 해야 했다.
그런데 도대체 어디까지 해야 하지?
혜미는 마른침을 삼키며 베네딕트에게 천천히 다가가 부드럽게 입술을 눌렀다.
‘좀 더 뜨겁게.’
베네딕트가 버석한 입술을 열며 중얼거렸다. 혜미가 혀로 그의 입술을 작게 핥자 그가 고개를 기울이며 더욱 깊숙하게 그녀의 키스를 받아들였다. 혓바닥의 돌기가 비벼지자 혜미의 목덜미와 귓바퀴까지 열이 훅, 올랐다. 베네딕트는 갤러리에서보다 더욱 농밀하고 진하게 응해 오고 있었다.
정말 이대로 남이 보는 앞에서 끝까지 갈 생각인 걸까. 갤러리에서는 그녀가 더욱 적극적이었다면 이번에는 반대였다. 혜미는 베네딕트가 그녀를 달굴 때 어떤 식으로 유혹의 입맞춤을 하는지, 알고 싶지 않아도 알고 있었다.
두근. 어쩔 수 없이 몸이 떨리고 심장이 반응한다. 이 뒤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 본인이 어떻게 반응할지 고스란히 짐작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혜미가 저도 모르게 주저하자 그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손을 들어 그녀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자 몸 안에서 성냥을 탁, 켠 듯 열기가 피어올랐다.
혜미가 몸을 살짝 떨며 얼굴을 돌리자 베네딕트가 고개의 각도를 기울여 그녀를 쫓았다. 조급하진 않지만 집요한 움직임. 베네딕트의 입술이 그녀의 아랫입술과 윗입술을 번갈아 달래듯 부드럽게 빨았다.
‘괜찮습니다, 에데르트. 느끼는 게 당연합니다. 저도 그러하니까요.’
‘하, 하지만….’
‘그대를 안고 싶습니다.’
베네딕트의 목소리에 짙은 욕망이 번졌다.
‘이런 꼴로도 폐하를 원하는 제가 혐오스러우십니까.’
‘…그런 게, 아니에요….’
‘그렇다면 증거를 보여 주십시오.’
혜미가 대답할 새도 없이 베네딕트가 타액으로 젖은 그녀의 입술을 다시금 깊게 머금었다. 혀뿌리가 감기고 빨리자 마침내 달콤한 신음이 혜미의 성대에서 울려 퍼졌다.
“하아….”
베네딕트의 입술이 조금 떨어지자 타액이 길게 늘어졌다. 눈을 감은 채 혜미가 그를 향해 고개를 치켜들었다. 그의 손이 상기된 그녀의 뺨을 어루만지자 혜미가 몸을 가늘게 떨었다. 서늘한 체온과는 달리 얼굴에 닿아 오는 베네딕트의 숨결이 몹시도 뜨겁게 느껴진 탓이었다.
이대로 나의 아이를 가지게 할까.
“응? 뭐라구요…?”
혜미가 감고 있던 눈을 스르륵 떴을 때였다. 눈이 도려내져 피딱지가 엉겨 붙었던 자리에 그의 하늘색 눈동자가 환하게 일렁이고 있었다. 그녀를 바라보는 새파란 눈동자에서 두려울 정도로 시린 욕망이 투명하게 보였다. 혜미는 놀라서 고개를 뒤로 휙 물렸다. 그의 얼굴은 이내 엉망으로 찢긴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와 있었다.
…착각이었나?
“방금, 뭐라고 했어요?”
혜미는 아직도 흥분에 고양된 속눈썹을 빠르게 깜빡였다. 베네딕트의 마음의 소리를 들은 것 같았다. 그녀에게 생각을 전달할 때의 나긋하고 우아한 말투와는 확실히 거리가 있는 느낌이었다.
게다가 아이라니? 로비나에서 구해준 꼬마 마법사는 그녀의 배 속에 아기집이 없다고 말했었는데…?
생체 주기에 아무런 변화가 없는 걸 보면 그 애의 말이 거짓은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베네딕트의 치유 마력이 사라지지 않았다는 소리일까?
춥.
이마에 마치 아이에게 하는 것 같은 가벼운 입맞춤을 끝으로 베네딕트의 입술이 떨어졌다. 혜미는 무의식적으로 그를 붙잡으려 했지만 무리였다.
‘이 정도면 눈속임은 된 것 같습니다.’
당장이라도 그녀를 침대에 눕힐 듯 뜨겁게 굴던 베네딕트가 그녀를 밀어낸 것이다. 혜미의 눈동자가 확신과 불확신 사이에서 갈피를 잡지 못하고 흔들렸다. 그녀는 그의 속맘에 숨겨진 어두운 의도 대신 다른 쪽에 집중하고 있었다.
‘당신. 마력이 남아 있는 거죠?’
“아주 조금은.”
혀가 잘린 그의 입에서 제대로 된 말이 나오자 혜미는 깜짝 놀라서 휙 뒤부터 돌았다. 문 앞을 지키고 선 근위병은 시선을 뚫어져라 그들 쪽으로 고정한 채, 입을 헤 벌린 채로 얼어붙어 있었다.
“걱정 마십시오. 그는 방금 전 보았던 환상에서 벗어나지 못할 테니까요.”
근위병의 하체에서 벌렁 들린 앞섶이 보이자 혜미의 얼굴이 붉어진 것도 찰나였다. 그녀가 베네딕트에게 다시 시선을 박으며 작게 외치듯 속삭였다.
“이럴 줄 알았어…! 왜 안 도망가요? 빨리 안전한 곳으로 몸을 숨기라고요…!”
베네딕트가 대답 대신 길게 숨을 들이쉬며 심호흡을 했다. 일반 사람들은 종종 제 상태를 어찌할 수 없을 때 ‘미치겠다’는 말을 입버릇처럼 하곤 했지만 대마법사인 그가 여태껏 그 말을 제대로 이해한 적은 없었다. 그가 제일 잘하는 것은 절제였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베네딕트는 자신을 위해 눈물 젖은 눈동자를 크게 뜬 혜미를 보며 미칠 것 같다는 말뜻을 어렴풋이 이해했다.
사랑스러웠다. 자신을 위해 황녀가 하는 모든 행동이.
평정심을 유지하려 노력하고 있었지만 마력의 제어가 제대로 되지 않았다. 그의 육체는 그토록 증오했던 클라웨를 강하게 열망하고 있었다. 넘치는 정욕으로 온몸이 들끓었다. 누군가의 몸에 자신의 씨를 뿌리고 싶다는 번식 욕구가 든 것도 처음이었지만 그는 그녀를 안을 수가 없었다.
각인이란 때로 번거로운 상황을 야기했다. 몸이 닿으면 그 역시도 그녀에게 자신의 속내를 모조리 들킬 게 틀림없었다. 방금 전의 위험했던 상황처럼 말이다.
“제게는 이곳이 제일 안전합니다.”
베네딕트는 자신의 외향이 실수로라도 바뀌지 않도록, 하지만 그의 마력이 이 방 안에서 새어 나가는 일은 없도록 힘겹게 노력하며 낮게 입을 뗐다.
“뭔 개소리예요, 진짜…!”
혜미가 답답한 듯 인상을 잔뜩 찌푸렸다. 어린 황녀는 본성이 정에 약한 이였다. 지금 자신에게 가지는 안타까운 감정의 뿌리가 동정이라는 사실은 분명했다. 그러나 동정과 애정은 한 끗 차이. 베네딕트는 그녀의 유약한 부분을 정확히 치고 들어갔다.
“폐하께서 절 구해 주신다 약속하지 않았습니까.”
그녀의 입술이 벌어진 채 소리 없이 떨렸다. 베네딕트는 그녀의 어깨를 짓누르고 있는 책임감에 더욱 강한 밧줄을 엮기로 했다. 어차피, 그녀는 처음부터 그의 것이었다. 황후인 다니엘라가 그녀를 잉태하였을 때부터 축복의 크기만큼 증오를, 증오의 크기만큼 애정을 태아에게 퍼부었다.
경멸하는 눈으로 조소하던 크리스티앙의 말은 틀린 게 없었다. 뒤틀리고 변태적인 성정을 가진 사비오족. 하지만 그들을 이렇게 만든 것은 황족인 클라웨였다. 일생을 황실의 꼭두각시로 이용만 당하며 살기에 그들의 힘은 너무 컸다.
“크리스티앙을 황위에서 끌어내리고 그 자리를 차지하면 절 풀어 주실 계획이지 않았습니까. 평생 클라웨 황족에게 얽매여 사는 마법사 일족에게 자유를 주려고 하신 게 아닙니까.”
속을 완전히 읽힌 혜미는 마른침만 삼킬 뿐이었다. 베네딕트가 속삭이듯 말을 이었다.
“지금 제가 몸을 숨겨 버리면 저는 영원히 세상의 눈을 피해 살아가야 합니다. 얼마 남지도 않은 생을 그렇게 끝내고 싶진 않습니다.”
“그런 식으로 말하지 마세요.”
말을 잇지 못하던 혜미가 마침내 입을 뗐다. 흔들리는 그녀의 눈동자가 그를 직시했다.
“…눈이 없어도, 손가락이 없어도 사람은 살아요.”
가슴 깊은 곳에서 차오르는 미안함을 주체할 수 없는, 떨리는 목소리였다.
정말 사랑스럽구나, 에데르트. 네 모든 감정을 뿌리 뽑아 나에게 심어버리고 싶을 만큼.
베네딕트가 그녀를 보며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혐오스러운 모습으로 일생을 살아가는 것에 두려움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폐하.”
마침내 황녀의 죄책감에 정점을 찍어 줄 시간이었다.
“저는 짧아진 제 수명을 말하고 있는 겁니다.”
“…뭐라고요?”
“제가 오래 살 수 없다는 걸 알고 계시는 줄 알았는데요.”
“대단해요. 뼛속 하나, 장기 하나하나에까지 마력이 깃들어 있어요…!”
꼬마 마법사 로즈의 말이 혜미의 뇌리에 스쳤다. 이제껏 혜미는 그것 때문에 줄곧 베네딕트에게 마음에 빚을 진 느낌이었다.
“…나 때문에?”
침묵. 긍정을 뜻하는 것이었다.
혜미는 그를 보며 더듬더듬 말을 이었다.
“날… 살리기 위해 수명의 반을 줄여 가며 마력을 허비했기 때문인가요?”
“이런. 폐하께선 뭔가를 잘못 알고 계시는군요.”
베네딕트가 고개를 저었다. 혜미의 눈에 의문이 들어찼다.
“…무슨 뜻이에요?”
“그건 ‘허비’가 아니라 당연한 ‘의무’였습니다. 그리고….”
베네딕트가 피딱지가 앉은 눈을 감은 채, 그녀를 향해 웃었다.
“제가 폐하를 위해 줄인 수명은 그렇게 짧지 않습니다.”
“…무슨 뜻이에요?”
혜미가 바보처럼 같은 말을 반복했다. 눈물 젖은 보라색 눈동자를 둥그렇게 뜬 그녀의 가슴속에서 심장이 쿵, 쿵, 불안한 예감으로 거칠게 뛰었다.
“아무리 대마법사라고 해도 숨이 완전히 끊어진 이를 살려 내기 위해서 치러야 할 대가는 큽니다.”
당연한 말이다. 혜미는 손이 차가워지는 것을 느꼈다.
“저는 폐하께서 상상하시는 그 이상의 힘을 사용해 말 그대로 폐하의 몸속에 마력을 퍼부었습니다. 그 과정에서 수명이 깎여나간 것은 당연한 일이었고요.”
“…어… 얼마나… 얼마만큼… 인데요…?”
“뭐가 말이죠?”
“대체… 수명을 얼마나 줄인 거냐고 묻잖아요.”
혜미가 태연하게 되묻는 그의 옷깃을 꽉 그러쥐며 눈을 일그러뜨렸다. 얼음장 같은 손이 벌벌 떨려 왔다. 베네딕트가 그녀를 향해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제가 앞으로 살날이 얼마만큼 남았냐고 묻는 것이 더 옳은 표현인 것 같습니다만.”
“뭐든 빨리 대답해요…!”
소리를 지르지 않으려 어금니를 꽉 물고 재촉하는 혜미의 앞에서 베네딕트가 잠시 망설였다. 숨 막히는 찰나의 침묵이 흐르고, 마침내 그의 입에서 선고 같은 대답이 떨어졌다.
“…봄이 오기 전까지.”
“…….”
“이번 겨울이 제가 맞이하는 마지막 계절이 되겠군요. 폐하가 그 전에 황금성에 도착하셔서 다행입니다. 마지막 인사는 폐하와 제 추억이 깃든 곳에서 하고 싶었기에.”
결국 혜미의 눈에서 무거워진 눈물이 툭, 떨어졌다. 그것을 기점으로 주르륵, 양 볼을 적시며 길게 눈물이 흘러내렸다.
“울지 마십시오.”
미치겠다.
목이 졸리는 기분이었다. 눈가와 코, 입 주변이 벌게진 채 그녀가 더듬더듬 말을 이었다.
“왜 그렇게 했어요? 당신 바보예요?”
“대마법사와 황족의 각인은 그런 겁니다. 폐하를 살리는 건 제 의무입니다. 만약 같은 일이 다시 벌어진다면 저는 분명 같은 선택을 할….”
“흑…!”
혜미가 울음을 터뜨리며 베네딕트를 다시 꽉 끌어안았으므로 그는 말을 끝내지 못했다. 그녀의 품속에서 그의 나직한 목소리가 진동하며 울려 퍼졌다.
“저는 괜찮습니다, 폐하.”
“분명 방법이 있을 거예요. 분명. 분명히.”
그녀의 어지럽고 복잡한 심경이 베네딕트에게로 그대로 흘러들어 왔다. 놀라움. 미안함. 고마움. 감동. 걱정. 염려. 불안. 슬픔. 동정. 그리고 또 하나.
“바보같이…. 똑똑한 척은 다 하면서 진짜 멍청이같이…. 흐윽….”
그 속에 뒤섞여 있는 실낱같이 부드럽고 희미한 감정.
그녀의 심장 박동 소리에 귀를 댄 베네딕트의 푸른 눈동자가 소리 없이 빛났다.
‘어떻게 하면 되지…? 어떻게…. 내가 어쩌면 좋지…?’
혜미의 생각이 느껴졌다. 베네딕트는 그녀의 품 안에서 그녀에게 조용히 답을 주었다.
“폐하께서 저를 살리시면 됩니다.”
“…어떻게요?”
마치 어렸을 때처럼. 그에 대한 염려와 걱정이 가득한 눈동자를 하고 황녀가 그에게 물었다.
“제가 폐하를 살렸던 것처럼. 폐하의 몸속에 가득한 마력을 제게 나눠 주시는 겁니다.”
“할게요. 지금 당장이라도 할게요…!”
혜미가 고개를 세차게 끄덕였다.
“마법사가 아닌 이가 몸속에 흐르는 마력을 통제하고 이용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괜찮아요. 뭐든 할 수 있어요. 아! 발터도… 발터도 제게 그 일을 했었잖아요…!”
당장이라도 옷을 몽땅 벗고 그를 끌어안으려 하는 혜미를 저지하며 베네딕트가 흐리게 웃었다.
“마력을 전달하는 방법 중 가장 강력한 것이 성교인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성공하는 이들은 극히 드물죠. 사비오족이 아닌 일반인이라면 더더욱.”
“발터는… 성공했잖아요.”
그는 영혼이 도망가 버린 그녀를 찾아내 자신을 깨우기까지 했다.
“발터가 왜 성공했는지 아십니까…? 제가 왜 그를 저 대신 폐하의 곁에 붙여 두었는지 아십니까?”
혜미가 흔들리는 눈동자로 말없이 그를 바라보았다.
“그가 폐하를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말을 끝내자마자 훅, 하고 숨을 들이쉬는 혜미의 격한 반응이 그대로 느껴졌다.
“그게 지금 이 이야기랑 무슨 관계가 있는데요?”
베네딕트는 가엾게도 떨고 있는 그의 어린 황녀를 보며 그녀가 받아들이기 힘들 진실을 털어놓았다.
“성교를 통한 마력의 전달은 상대에 대한 애정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효과가 없습니다.”
베네딕트가 그녀를 보며 흐리게 웃었다. 황녀는 과연 그의 말뜻을 모조리 알아들었을까.
“…그건 마법사도 마찬가지인가요…?
알아들었군요.
베네딕트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그 대상이 폐하가 아니었다면… 저는 실패했을 거란 뜻입니다.”
“하지만 나는… 당신이 나를 사랑했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혜미의 눈동자가 처량할 정도로 황망한 빛을 내며 떨렸다. 베네딕트가 한 말에는 많은 어폐가 있었다.
“폐하가 그리 생각하든 생각하지 않든, 제게는 상관이 없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만은 확실합니다. 이건 폐하께서 믿으실 것 같군요.”
베네딕트는 그녀의 어깨에 툭, 하고 고개를 떨어뜨렸다. 그에게서 흘러나오는 목소리는 놀랍도록 차갑고 또렷했다.
“저는, 애정이 없는 상대를 위해 목숨을 걸 정도로 선한 이가 아니라는 것.”
크리스티앙의 앞에서 처참하게 무너진 그를 위해 무릎을 꿇었던 에데르트를 보며 베네딕트는 다짐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녀의 끝을 저로 만들겠다고.
나는 그대의 처음과 끝.
그대는 결국 제 곁일 겁니다, 에데르트.
“과연, 폐하께선 절 살리실 수 있을까요.”
과연, 폐하께선 저를 사랑하실 수 있겠습니까.
혜미는 눈을 질끈, 감았다 떴다. 혼란스러움을 가득 담은 얼굴로 그녀가 작게 속삭였다.
“조금만… 시간이 필요해요.”
“예, 폐하.”
베네딕트는 더 이상 그녀를 궁지에 몰아넣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언제가 됐건 겨울이 끝나기 전에 황녀는 그와 합일할 것이 확실했기 때문이다.
“오래 기다리게 하지 않을게요.”
“부담을 드리고 싶지 않습니다.”
베네딕트는 발터를 사랑한다 울먹이던 황녀의 마음이 거짓이 아니라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았다. 하지만 그녀는 자신을 위해 희생한 사람의 손을 내칠 수 있는 성정이 아니었다.
적어도 에데르트는 베네딕트를 살리기 위해 합일하는 그 한 순간만은 그를 사랑하기 위해 노력할 것이 분명했다. 대마법사는 그 시간을 기쁘게 기다릴 수 있었다.
“살려 달라 애원하는 일은 없다는 뜻입니다.”
“…….”
“사랑해 달라 무릎 꿇는 일도 없을 겁니다. 그러니 안심하세요.”
겨우내 얼어붙어 있던 꽃눈이 터지듯 자신조차 자각하지 못했던 애정이 움트는 순간을.
사랑인지 동정인지, 두려움인지 떨림인지 모를 불확실한 감정에 쐐기를 박는 것은 하나가 된 후 찬란했던 과거의 모습을 되찾는 그의 모습일 것이다.
“그럼 일단 제게 크리스티앙을 어떻게 처리할지, 그 계획부터 말해 주시겠습니까?”
혜미가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베네딕트를 진심으로 사랑하는 것과 크리스티앙을 죽이고 황위를 차지하는 것. 그녀에게는 둘 다 가능이나 할까 싶을 정도로 힘든 일이었지만 일단 후자를 생각하는 편이 더 나았다. 그녀가 황위에 오른다면 교황청에 갇혀 사는 마법사들 한 명 한 명을 다 만나서라도 치유 마력을 가진 자를 찾으면 될 일이었다.
“겨울제가 시작되는 날, 황금성을 공격할 계획이에요.”
겨울제는 이제 쉰 밤도 채 남지 않았다. 아일라는 발터의 암호가 적힌 서신을 몸에 지닌 채 오늘 아침 세르노티로 떠났다. 고향에서 약혼자가 전쟁이 끝나기만을 기다리고 있으니 그녀를 보내 달라는 혜미의 명령에 플라틴성의 경비 단장은 아일라를 순순히 내보내 주었다. 황금성에 들어오는 것은 무척이나 어려웠지만 나가는 것은 생각보다 엄격하지 않아 다행이었다.
“크리스티앙은 폐하의 아군이 성에 적으면 적을수록 좋을 테니까요.”
베네딕트가 낮게 말을 덧붙였다.
“폐하의 부하가 세르노티에 무사히 도착했으면 좋겠군요.”
의미심장한 말이었다. 혜미는 눈을 질끈 감았다 뜨고 말을 이었다.
“아일라는 강해요.”
“크리스티앙이 거느리는 군대에서 그녀만큼 강한 이가 과연 없을까요?”
물론 있을 것이다. 교활한 크리스티앙이 몰래 미행을 붙일 가능성이 있다는 사실도 간과하지 않았다.
하지만 혜미는 아일라를 믿었다. 그녀의 실력과 불굴의 의지를 믿었다. 배신한 페터에게 복수하기 위해 3년 동안 모두를 속이고 인내하다 세르노티로 돌아온 아일라였다. 세드릭을 위해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페터의 칼을 맞았던 아일라. 그녀는 무슨 일이 있더라도 세드릭에게 반드시 돌아갈 것이다.
발터 역시 그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전언을 보내는 데 그녀를 선택했을 것이다. 혜미는 스스로에게 주문을 외듯 불안한 예감을 떨치고 베네딕트에게 설명을 이어 나갔다.
“세드릭에게 하르트만의 가주에게 연락을 취하라고 일러두었어요.”
“클라라 하르트만 말입니까?”
베네딕트가 고개를 기울이며 그녀에게 되물었다.
“네. 그녀를 만나서 제 정체를 밝혔을 때, 카플란과의 전쟁에서 승리한다면 딱 한 번, 제가 꼭 필요할 때 도움을 주기로 약조한 적이 있었거든요.”
“아. 그랬습니까?”
베네딕트가 그녀를 대견한 듯 바라보았지만 혜미는 그것을 눈치채지 못했다.
“네. 세르노티에 남아 있는 병력과 하르트만의 병력을 모아 겨울제가 시작되는 날, 황금성을 칠 거예요.”
“그럼 폐하는요?”
혜미의 계획은 아메티스에 남겨진 리비에르의 군대와 합공을 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리비에르의 마음이 확실히 이쪽으로 옮겨졌는지 확실하지 않은 상황에서 긴장이 되는 것은 어쩔 수가 없다. 최후의 방패라고 생각했던 베네딕트가 완전히 손발이 잘린 이 상황에서는 한층 더 어려워질 게 분명하다.
“황금성 안에서 그들을 맞이해야겠죠. 그 전에 리비에르를 완전히 설득해야 하겠지만요.”
베네딕트가 낮게 입을 뗐다.
“폐하.”
“네.”
“폐하께서는 크리스티앙을 암살하는 게 가장 간단한 방법이라는 생각을 해 본 적 없습니까?”
물론 있었다. 발터 역시도 그 방법을 가장 먼저 말했었으니까.
“그 생각도 안 해 본 건 아니에요.”
“그런데 왜?”
왜 쉬운 길을 놔두고 먼 길로 어렵게 돌아가냐는 듯한 말투였다. 혜미가 입술을 살짝 빨고 난 후, 짤막하게 한숨을 쉬며 입을 뗐다.
“그건 클라웨의 기존 세력이 뒤바뀌는 것밖에는 되지 않으니까요.”
혁명과 반란은 다르다. 그리고, 그녀가 원하는 것은 전자였다. 기득권 싸움은 아무것도 바꿀 수 없다. 그저 웃대가리만 바뀔 뿐, 궁극적인 변화는 없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혜미는 자신 역시 그들과 똑같은 선상에 있기는 싫었다. 한 번 죽었다가 살아난 삶이라면, 더욱 의미 있게 써야 한다는 느낌마저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