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6화 (46/72)

“발터, 나 좀 봐.”

짙은 갈색 눈동자가 천천히 그녀를 향했다. 눈이 마주치자 바보같이 눈물이 먼저 핑 돌았다. 혜미는 숨을 한 번 짧게 들이마신 후, 그에게 속삭이듯 내뱉었다.

“미안해.”

밑도 끝도 없는 사과였다. 발터가 그녀를 보며 말없이 고개를 저었다. 툭 튀어나온 목울대가 일렁이고 가라앉은 목소리가 기다란 입술을 비집었다.

“네가 내게 사과할 일은 없다.”

“…베네딕트에게 그렇게 한 건….”

“설명할 필요도, 변명할 필요도 없어.”

가만히 말을 자르는 그의 말투가 담담했기에 더욱 가슴이 아팠다. 차라리 그가 그녀에게 화를 냈다면 이 정도로 가슴이 시리지는 않았을 것 같았다. 크리스티앙의 말이 사실이냐고 따져 묻기라도 했다면 설명할 기회라도 있었을 테지만 갤러리를 나온 후 발터는 그녀에게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피곤하겠다. 이만 쉬는 게 좋겠어.”

발터가 응접실과 연결된 그녀의 침실 문을 열었다. 문손잡이를 잡고 있는 그의 행동에서 그녀는 무언의 진심을 읽었다.

“…그래.”

그는 지금 그녀와 대화를 나누고 싶지 않은 것이다. 명령으로 꿇어 앉히지 않는 이상 못 할 것은 없겠으나 그것은 발터를 더욱 상처 입히는 꼴이 될 게 분명하다.

탁.

문이 닫혔다. 혜미는 힘없는 발걸음으로 공간을 가로질러 부드러운 침상에 털썩 주저앉았다. 깃털이 꽉 찬 이불에서 작은 깃털이 삐져나와 공중에 날렸다.

언젠가는 발터에게 베네딕트에 대한 이야기를 해야 할 거라는 사실은 그녀 역시 알고 있었다. 그녀의 모친과 관련된 오랜 역사 그리고 마법사의 피로 만든 보석으로 각인된 상대와 마법사에 대한 이야기까지도 털어놓아야 했다.

역대 황제들이 왜 마법사와 긴밀한 관계를 유지할 수밖에 없었는지, 한번 합일하면 육체를 거부할 수 없었기 때문에 그들을 소유하려 하고 다리를 부러뜨리면서까지 제 곁에 두려 했던 비틀린 욕망까지 설명할 셈이었다.

그리고 나는 절대로 그들처럼 되고 싶지 않다고. 그러기 위해서 마법사와 황족 간의 악연을 직접 끊어 낼 생각이라고. 긴 시간을 두고 그에게 모두 찬찬히 말해 줄 작정이었는데.

“…….”

촛불이 타오르는 어둑한 침실. 벽에 걸린 거울에 괴로운 표정으로 인상을 찌푸리고 있는 혜미의 얼굴이 비쳤다. 그녀는 마치 벽처럼 닫힌 문을 보며 입술을 깨물었다. 무릎 위에 놓인 손이 주먹을 꽉 쥐었다.

이런 건 싫어.

이렇게 답답한 채로, 서로를 오해한 채로 있는 건 더 이상 싫었다. 그녀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성큼성큼 걸어가 발터와 그녀 사이를 가로막고 있는 문을 활짝 열었다.

“암살자의 기본은 자신의 흔적을 남기지 않는 거야. 그림자에는 소리가 없다. 기척도 없어. 하지만 그들은 늘 주인을 따라다니지.”

“…나보고 쉬라면서.”

혜미가 자신의 코앞에 서 있는 발터를 흔들리는 눈으로 바라보며 작게 내뱉었다. 닫힌 문 뒤편에서 숨소리도 없이 우두커니 서 있던 발터는 말이 없었다. 다가오는 그녀의 발소리를 들은 그는 놀라지도 않았다. 다만 아까보다는 어둡게 짙어진 눈동자로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볼 뿐이었다.

“네가 그렇게 문 뒤에 지키고 서 있는데, 내가 발 뻗고 편히 쉴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

“…….”

“왜 넌 아무 말도 안 해?”

목소리에 울음이 번지는 것을 애써 참으며 혜미가 눈물이 고인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발터는 여전히 마른침을 삼키기만 할 뿐, 입을 떼지 않았다. 그는 잘못한 게 하나도 없는데도, 혜미는 괜히 그가 미워졌다. 주먹을 꽉 말아쥐고 그의 탄탄한 가슴을 퍽, 소리가 날 정도로 세게 내리쳤지만 앞에 선 남자는 미동도 없었다.

“오늘 내가 너 때문에 얼마나 곤란했는지 알아?”

혜미가 눈을 크게 뜨며 그에게 작게 속삭이듯 내뱉었다. 그를 책망할 처지가 못 된다는 것을 스스로도 잘 알고 있으면서도 억지로 그를 자극하듯 말을 이었다.

“네가 거기서 사고 치기라도 할까 봐 얼마나 당황했는지 알고 있냐고.”

“황녀 전하.”

굳게 다물렸던 발터의 입이 마침내 열렸다. 그의 옷깃을 쥔 혜미의 손이 긴장에 떨렸다.

“…말을 아끼십시오.”

혜미는 그를 노려보았다. 적진의 심장부. 크리스티앙과 같은 성안에 있는 상황에 언행과 행동을 조심해야 한다는 그의 말에는 틀린 게 없었다. 하지만 거리를 두는 것 같은 그의 태도에 화가 치밀어 오른다.

“그래. 어차피 나도 너랑 말하려고 문 연 거 아니야.”

그럼 뭐냐는 뜻으로 발터가 그녀를 물끄러미 응시했다.

“…내게 입을 맞춰. 키스하고 싶으니까.”

침잠했던 발터의 동공에 시커먼 불길이 일어나는 것이 보였다. 혜미는 그의 멱살을 틀어쥔 손에 단단히 힘을 준 후, 그를 제 앞으로 끌어당겼다. 서로의 숨결이 닿을 듯 가까워진 거리에서, 그녀가 눈물이 일렁이는 눈을 한 채 잇새로 다시 한번 똑똑히 내뱉었다.

“명령이야, 발터 세르노티. 지금 당장 내게 입 맞추지 않으면 용서 안 할….”

그녀의 몸이 거칠게 안겼다. 발터의 커다란 손이 그녀의 뒤통수를 움켜쥐듯 고정했다. 훅, 내뱉어지는 뜨거운 숨결이 그녀를 잠식한 것은 순식간이었다. 거칠거칠하고 뜨끈한 입술이 그녀의 보드라운 입술을 집어삼켰다. 그것보다 더욱 뜨거운 혀가 그녀의 입 안에 들어와 제 것이 아닌 혀에 뒤엉켰다. 인간의 육체에서 가장 약한 부분의 돌기가 샅샅이 핥아졌다.

머리칼을 비집은 손이 부들부들 떨리고 허리를 휘어 감았던 다른 손은 그녀의 등을 정신없이 마찰하듯 어루만지고 있었다. 입술이 겨우 떨어지고 그가 엉망으로 긁힌 목소리를 내뱉었다.

“이제… 됐습니까?”

“하나도 안 됐어.”

“나한테 왜 이래.”

혜미가 괴롭게 중얼거리는 그를 보며 뜨거운 숨을 몰아쉬었다.

“날 왜 이렇게 괴롭혀.”

얼굴과 눈동자에 화끈거리는 열이 동시에 올랐다. 그 이유가 부끄러움인지 분노인지 죄책감인지, 알 수가 없다.

“몰라서 물어?”

“모르겠다.”

“널 가지고 싶어. 입맞춤으로는 부족해. 나만 이런 거 아니잖아. 너도… 너도 날 원하잖… 흣!”

말을 끝낼 수가 없었다. 그녀의 몸이 갑자기 위로 번쩍 들렸다. 그녀는 한 손으로 그녀의 엉덩이를 받쳐 든 발터의 허리에 양다리를 얽고 매달렸다. 이를 꽉 깨문 발터가 반쯤 열린 문을 걷어차자 경칩이 날아갔다. 부서진 문짝에 신경을 쓰는 이들은 아무도 없었다. 발터가 커다란 공간을 두 발자국 만에 가로질렀다.

“그래. 널 원해. 미치도록 원한다. 이런 내 자신이 증오스러울 정도로 널 원해.”

풀썩.

침대에 거칠게 내던져진 그녀의 몸 위로 폭신한 깃털이 또다시 날아올랐다. 기사복 상의를 단박에 벗어 던진 발터가 침상에 올랐을 때는 깃털이 조금 더 많이 날렸다. 키를 줄이며 타오르는 양초의 희미한 불빛이 공기 중에 낱낱이 드러난 그의 맨몸을 어둑하게 비추었다.

“그럼 넌 뭐지? 네 정부를 만날 때까지, 차마 기다릴 수도 없을 정도인 건가…? 그래서 날 이용해?”

일그러진 얼굴로 내뱉는 그의 목소리가 엉망으로 쉬어 거칠었다.

“…발터.”

혜미는 자신을 다리 사이에 가둔 채, 부들부들 떠는 발터에게 눈을 맞추었다. 담담함을 걷어치우고 욕망에 이글거리는 눈동자, 그 뒤편에 숨겨진 질투와 분노, 괴로움이 보였다.

“난 너한테… 거짓말하고 싶지 않아.”

그녀의 머리 양옆에 놓인 팔뚝에 핏줄이 툭툭 불거졌다. 발터가 시트를 움켜쥐자 부드러운 침상이 진동했다.

“그런데… 어디서부터 이야기해야 할지 모르겠어.”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발터가 제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혜미는 손을 들어 그의 입술을 이에서 떼어 냈다. 잔인할 정도로 강하게 깨무는 바람에 핏물이 맺혀 있었다. 발터의 목울대가 일렁였다. 떨리는 입술 새로 낮게 깔린 목소리가 느리게 흘렀다.

“그를… 사랑해?”

그가 얼마만큼 힘들게 이 말을 꺼냈는지 안다. 그렇기 때문에 그녀는 더욱 쉽게 대답을 줄 수가 없었다.

“아니. 그냥 대답하지 마라.”

발터가 고개를 세게 젓더니 그녀의 목덜미에 얼굴을 파묻었다. 뜨거운 숨결 사이로 떨리는 목소리로 귓가를 헤집었다. 차마 그녀에게 말 못 하고 그를 괴롭게 했던 일들이 입술 새로 느릿하게 흘러나왔다.

“악몽을 꿨다…. 너무도 생생한… 네가… 네가 그에게 뜨겁게 안기는…. 하아….”

발터가 말을 잇지 못하고 숨을 거칠게 몰아쉬었다. 바위처럼 딱딱해지는 그의 몸을 느끼며 혜미는 눈을 질끈 감았다. 엉망으로 갈린 목소리가 그녀의 귓가에 박혔다.

“죽고 싶었다.”

감았던 눈이 번쩍 뜨였다.

“차라리 죽는 게 낫다고 생각했어.”

혜미는 그의 흐트러진 머리칼에 손을 넣어 꽉 움켜쥔 후 자신을 보게 했다. 낮아진 목소리가 그녀의 입술에서 흘러나왔다.

“네가… 이따위로 약하게 굴까 봐 말 못 했던 거야.”

발터가 어금니를 꽉 물자 턱이 경직했다. 혜미는 약해지려는 마음을 다잡고, 그에게 매달리고 사랑한다 울부짖고 싶은 충동을 억누르며 눈을 크게 떴다. 눈물 젖은 눈동자가 그를 똑바로 직시했다.

“내 위치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건, 너 아냐? 넌 내가 지금 사랑 타령하고 있을 때라고 생각해?”

미안해, 발터.

“나와 소꿉놀이라도 하고 싶은 거야? 네가 원하는 게 그거였어? 그러기 위해 날 관속에서 꺼내면서까지 이 빌어먹을 일들을 겪게 만들었어?”

넌 날 위해 너무도 쉽게 목숨을 버릴 수 있는 사람이다. 난 그게 너무 두려워.

“대답해라, 발터.”

그가 뜨겁게 내뱉는 숨결에 온몸이 녹아내릴 것 같았다. 혜미는 그의 분노를 여과 없이 느낄 수 있었다. 이것은 발터의 진짜 모습이었다. 어릴 적 그녀와 수도 없이 다투고 멱살잡이를 했던, 그녀를 집어 던질 수 있는 자의 눈빛이다.

“그럼 왜… 날… 이리 가지고 놀지? 너에게 손끝 하나 대지 않겠다고 다짐한 나를.”

그가 그녀를 상처 입히지 않는 이유는 단 하나뿐.

“네게 이미 무릎을 꿇고 충성을 맹세한 날, 왜 이렇게 괴롭게 만들어….”

발터의 이글거리는 눈동자가 그녀를 집어삼켰다. 그의 커다란 손이 그녀의 뺨을 감싸 쥐었다.

“이따위로 내 심장을 찢어 놓지 않아도 충분하잖아.”

혜미를 꽉 잡은 힘은 약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녀는 그게 맘에 들었다. 아무렇지도 않은 척하는 발터보다, 분노를 터뜨리는 그의 모습에 훨씬 더 안심이 되었다.

“너랑 자고 싶으니까.”

우려했던 것과는 달리 목소리는 떨리지 않았다. 다만 그녀의 얼굴이 불타오르는 듯 붉게 달아올랐을 뿐이었다. 촛불이 희미한 것이 다행이다. 할 수만 있다면 이 방의 불을 모조리 꺼 버리고 싶었다.

“다시 한번 지껄여 봐라, 이든.”

“…너와의 섹스가 가장 맘에 들기 때문, 흑…!”

“다시 한번 날 누군가와 줄 세워 봐.”

그녀의 어깨를 꽉 잡은 발터에게서 짐승 같은 신음 소리가 흘렀다. 혜미는 몇 번이나 말할 수 있었다. 이게 그녀의 진심이었으니까.

“너랑 하는 게 제일 좋다고…!”

그녀의 목덜미가 아프게 물렸다. 쭉, 빨리는 아찔함에 혜미가 도리질을 쳤지만 발터는 그녀를 힘으로 가뿐히 내리눌렀다.

“나한텐 너밖에 없어서 비교가 불가능해. 하지만 감히 불공평하다 짖어선 안 되겠지. 난 그래야 하니까. 난 너의 개니까.”

흥분에 격하게 떨리는 발터의 손이 그녀의 다리 사이를 거칠게 더듬었다. 혜미가 응접실과 침실을 가로막고 있던 문을 연 순간부터, 발터의 이성은 사라지고 있었다.

“네가 나를 개 취급하기로 마음먹었다면… 좋아.”

블리오와 속옷을 벗지도 않았는데 강하게 움켜쥐는 그의 손에 내벽에서 울컥, 뜨끈한 물이 쏟아진다.

“개처럼 빨아 줄 테니 기대해라, 이든.”

발터가 그녀의 허벅지를 말아쥐고 가로로 휙 잡아 벌렸다. 뜨끈한 혓바닥이 널찍하게 음핵 전체를 핥아 올리는 느낌. 혜미의 몸이 저절로 뒤틀렸지만 그녀는 움직일 수가 없었다. 발터는 그녀를 결박하듯 다리를 더욱 넓게 벌린 후, 눈앞에 훤히 드러난 그녀의 음부를 짐승처럼 애무하기 시작했다.

끈덕지게 핥는 데서 끝나는 게 아니었다. 둔덕을 혀로 쑤셔 피가 몰려 통통해진 그녀의 음핵을 찾아낸 후, 젖꼭지를 빨 듯 쭈욱 빨아들이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아흑, 아아, 발터…. 그렇게 세게…. 흐윽…!”

그녀의 말에 빠는 힘이 더욱 강해졌다. 혀끝으로 돌리는 것은 덤이었다. 쭉, 쭉, 집요하게 빠는 속도가 빨라지자 헐떡이는 혜미의 숨소리 또한 빨라졌다.

안 돼. 아. 흑…!

혜미가 손을 뻗어 발터의 머리칼을 거칠게 잡아챘다. 그리고 발터가 더욱 깊게 둔덕에 얼굴을 묻었다. 이미 안에서는 애액이 줄줄 흘러내려 회음부가 젖은 지 오래였다.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 절정에 오를 거라는 건 몸이 먼저 알았다.

“흐응…!”

그녀의 납작한 아랫배가 울렁이는 순간, 발터가 얼굴을 치켜들었다. 그리고 그의 성기가 예고도 없이 그녀의 질을 쫙 벌리며 뿌리까지 단박에 쑤셔 박혔다.

“아아!!!”

“흣…!”

발터와의 합일을 기다렸던 만큼, 그녀의 몸은 더욱 열렬히 그를 환영하듯 반겼다. 환영 정도가 아니었다. 그간의 부재를 증명이라도 하듯, 그녀는 발터가 강하게 두 번 박아 올리자마자 숨 막히는 절정에 올라 몸을 떨었다.

“하응…! 흐아앙…!”

그녀의 머리통을 꽉 잡는 발터의 시선이 무섭도록 어두웠다. 질투라는 감정이 이토록 사람을 악하게 만들 수 있을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 목줄이 완전히 끊긴 개처럼 발터가 이를 드러내고 거칠게 으르렁거렸다. 이런 상황에서도 그녀를 원하는 자신이 엉망으로 비참했다.

“네가 내게 원하는 게 이런 거였다면, 그동안 한심하게 고민할 필요는 없었을 텐데.”

“하아, 발터, 하아….”

“미천한 개는, 주인과 흘레붙는 상상을 하며 혼자 좆을 쥐고 흔들지 않아도 됐을 텐데.”

발터의 목덜미에 푸른 핏줄이 툭, 툭, 불거졌다.

“아아! 으응! 흑! 아아!”

헐떡이며 혜미가 그의 등을 더듬었다. 발터는 자존심이 강한 이였다. 그런 그의 입에서 자신을 비하하는 말이 나온다는 것의 의미가 무엇인지 모를 정도로 멍청하지는 않았다.

미안. 미안해, 발터.

울퉁불퉁한 근육이 빼곡하게 짜인 그의 등을 강하게 끌어안으며 그녀가 몸을 떨었다.

“발터…! 아…!”

“내 이름 부르지 마.”

발터가 이를 꽉 물고 낮게 중얼거렸다. 세르노티의 낡은 헛간에서 지독하게 뒹굴던 오래전을 떠올리면 참을 수가 없어지기 때문이다. 그는 거기서 그녀에게 청혼했고 그녀는 머리카락에 지푸라기를 붙인 채 키득거리며 그러겠노라 약속했다.

…약속했었다.

“나도 네 물건을 빨고 싶어, 발터.”

“…갑자기?”

“싫어?”

“싫다고 한 적 없다.”

“푸하하. 그럼 빨리 바지 내려. 맘 바뀌기 전에.”

매번 그의 크기에 벅차하면서도 그녀는 한 번도 그를 뱉어 낸 적이 없었다. 그녀의 성격만큼 바보 같고 고집스레 그에게 매달리던 그녀다.

…그랬는데.

“발터…! 아아!!”

혜미의 질벽을 쑥, 쑥, 격하게 비집던 성기가 거칠게 빠졌다. 흐릿한 불빛 아래에서도 팔뚝만 한 성기가 흥건한 애액으로 젖어 반짝이는 것은 생생히 보였다.

“…흐읍…!”

끄트머리조차 담기 벅찬 페니스가 혜미의 입 안을 비집었다. 한계까지 벌어진 그녀의 입술을 타고 핏줄이 불거진 거대한 살덩이가 맥동했다. 마치 살아 움직이는 것 같은 그것을 간신히 담은 입가로 타액이 뚝뚝 떨어졌다.

“흐… 흠…!”

침대 머리를 잡은 채 혜미의 얼굴을 내려다보고 있는 발터의 표정은 엉망이었다. 분노와 괴로움, 그보다 더 큰 욕망과 흥분이 뒤섞인 그는 한 마리의 커다란 짐승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흡…! 흐음…!”

너무 커서 다 들어가지도 않은 성기를 그녀의 입 안에서 짓쳐 올리듯 움직이자 그녀의 몸이 자동으로 꿈틀거렸다. 붉어진 눈가에 눈물이 맺히고, 하얀 피부는 시뻘겋게 달아오른 지 오래였다. 그녀의 혓바닥에 발터의 기둥이 문질러졌다. 입가가 찢어질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지만, 혜미는 그를 밀어내지 않았다. 돌덩이 같은 그의 허벅지를 붙잡고 그를 올려다보았다.

갈라진 요도 끄트머리에서 흐르는 선액을 삼키려 입을 오물거리자 발터가 어금니를 꽉 깨물며 몸을 굳혔다. 쪼갠 바윗덩어리 같은 허벅지에 피가 몰리고 그녀의 입 안을 비집는 허릿짓은 더욱 거칠어졌다.

혜미는 눈가로 눈물을 줄줄 떨어뜨리면서도 그를 밀어내기는커녕 기쁘게 받아들였다. 그의 허벅지를 꽉 움켜쥐며 매달리자 그의 성기에서 폭력적이리만큼 강렬하게 사정액이 뿜어져 나왔다.

“…흣…!”

비강을 통해 그의 맛이 생생하게 느껴졌다. 발터의 속내만큼이나 진한 체향이 흐르는 그것을 몇 번이나 삼키고 나서야 발터가 허리를 뒤로 물렸다. 하지만 움직임을 끝낸 것은 아니었다. 사정 후에도 여전한 크기의 남성이 그녀의 다리 새로 단박에 쑤셔 박혔다.

“하아…!”

발터는 이번에도 강하게 쳐 대며 몸을 움직였다. 그를 밀어낼 생각도 없는 그녀의 팔목을 꽉 붙들어 침대에 고정한 후, 엄청난 각도로 그녀를 내리찍듯 삽입했다.

“아흑! 으흣! 아아!”

그녀가 시트를 구겨 쥐며 교성을 터뜨렸다. 발터의 손에 의해 그녀가 붙들고 있던 깃털 이불이 공중에 휙 날아가 바닥을 굴렀다. 지탱할 곳이 없어 혜미는 그의 팔뚝을 꽉 잡을 수밖에 없었다. 삽입의 깊이는 더욱 깊어지고, 세기는 더욱 강렬해졌다.

“아! 발터, 흑! 아응!”

그녀의 허벅지를 말아쥔 채, 발터가 제게로 강하게 끌어당기며 페니스를 쑤셔 박았다. 회음부와 고환이 세게 부딪쳐 그녀의 엉덩이가 벌겋게 물들었지만 신경을 쓸 여유는 없었다. 발터의 성기가 그녀의 내벽을 강하게 짓쑤실 때마다 쾌감이 짜릿하게 등줄기를 타고 올라왔다.

“그래. 얼마든지 나를 이용해도 돼. 넌 나의 주인이니까.”

발터가 쓴 약을 내뱉듯 잇새로 중얼거렸다. 부드러운 침상이 출렁거리며 흔들리기를 반복했다.

“나의 심장도, 좆도, 이 몸뚱이까지도 모두 네 것이니까… 네가 날 어떻게 쓰든 상관없다.”

눈을 가늘게 뜨고 박히던 혜미가 간신히 눈을 뜨며 그를 꽉 쥐었다. 마치 흔들리는 그의 마음을 부여잡듯 꽉 움켜쥐는 것은 그의 팔만이 아니었다.

“흣…!”

그녀의 내벽이 페니스를 엄청난 힘으로 조이며 달라붙었다. 엉망으로 쳐 대고 있는데도 착실히 반응하며 마치 늪처럼 그를 잡아당기는 그녀에게서 떨어지는 것은 불가능했다. 발터는 그동안 너무 오래 참았다.

“아아…!!!”

발터의 손이 그녀의 몸을 들 듯이 안았다. 무릎으로 지탱한 채, 그가 빠르게 추삽질을 이어 나갔다. 혜미의 젖가슴이 딱딱한 그의 상박에 뭉개지듯 짓눌렸다. 아랫도리에서 선액과 정액이 사정없이 튀었다. 발터의 움직임은 끝날 줄을 몰랐다.

“아, 흑! 으응! 아! 아앙! 흐윽!

그녀의 내벽이 저절로 수축과 이완을 반복하며 그를 자극했다. 미끈한 외음과 달리 움푹움푹 역동적인 잔근육으로 뒤덮인 그녀의 질벽이, 그의 페니스가 움직일 때마다 살덩이를 긁고 조여댔다. 발터의 짙은 눈썹이 엉망으로 휘어 떨렸다.

“누군가와 진하게 섹스를 하는 장면을 떠올리며, 쾌감을 견딜 수 없어 교성을 터뜨리며 울부짖는 여자의 얼굴을 떠올리며 살이 찢기는 고통을 견뎠다는 거야.”

“저자가 성교하며 어떤 더러운 말을 지껄였는지 그의 기억을 엿본 고문관이 하나부터 열까지 다 기록해 놨거늘. 그런데 그게, 클라웨의 황녀였다?”

크리스티앙이 내뱉었던 말이 발터의 머릿속에 계속, 메아리치듯 울려 퍼졌다. 그곳에서 발터는 크리스티앙와 교황을 동시에 죽이고 싶은 충동을 참아 내려 손톱이 손바닥에 박히도록 주먹을 꽉 쥐어야 했다.

“하읏…. 으응…! 아, 미치겠…. 흐으, 발터…!”

몇 번째인지도 모를 오르가슴에 오른 혜미가 그를 끌어안고 열에 들뜬 얼굴로 고개를 치켜들었다. 그는 신음하는 그녀의 입술을 물어뜯을 듯 키스하며 짐승 같은 호흡을 토해 냈다.

미칠 것 같은 것은 그였다.

자일룬에서 전투를 앞두고 악몽을 꾸었다. 그녀의 몸이 교황과 뒤엉켜 있는 모습을 보며 목이 졸리는 기분에 깨어났던 새벽, 죽고 싶었다는 그의 말은 거짓이 아니었다. 죽은 그녀를 살리기 위해 교황이 그녀와 합일했던 모습은 이미 본 적이 있었지만, ‘베네딕트’의 이름을 부르면서 쾌감에 우는 그녀를 보는 충격에 비교할 수는 없었다.

전쟁을 코앞에 둔 상황에서 머릿속은 온통 그 생각으로 가득해 괴로워 정신이 나가 버릴 것 같았다. 제어할 수 없는 질투에 속이 새까맣게 타들었다.

하지만 오늘 끌려 나온 교황은 신성하리만큼 완벽하던 이전의 모습을 찾아볼 수가 없었다. 마음 한구석이 기묘한 만족감으로 들끓었다. 몸이 엉망진창으로 잔인하게 찢긴 모습을 보며 오히려 살 것 같은 기분이 들었던 그를 누군가 악마라 욕한다 한들 무리가 아니었다.

“그를 내 정부로 삼겠습니다.”

엉망이 된 그의 얼굴을 붙잡고 입을 맞추던 그녀의 얼굴을 끝까지 볼 수가 없었다.

너는 어떤 얼굴을 하고 있었나.

지금처럼, 이토록 사람의 마음에 불을 지를 정도로 색정적이고 유혹적인 얼굴이었을까.

“하아…. 하응…. 흐윽…!”

발터는 그녀의 엉덩이를 꽉 쥐고 자신을 뿌리 끝까지 틀어박았다. 이렇게 완벽하게 이어져 있는데도 공허함에 몸이 뻥 뚫린 것 같았다. 그 지독한 느낌을 쾌감으로 뒤덮고 싶었다. 발터의 움직임이 더욱 빨라졌다. 고급 침상이 삐걱거리는 소리가 울부짖듯 커져 갔다.

“흣! 아! 아아!”

“아흑! 으응! 흑!!!”

그녀의 목덜미와 가슴에 이를 박으며 체향을 들이마셨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전부 그의 것이 될 거라고, 한 치의 의심도 없이 믿었던 때가 있었다. 발터는 마치 그때처럼 짐승같이 그녀를 물고 빨았다.

또다시 격렬한 사정감이 배 속을 휩쓸었다. 억눌린 쾌감이 다시금 터져 나가 그녀의 내벽을 적셨다. 발터는 뜨끈해진 몸을 그녀에게 붙인 후, 온몸을 딱딱하게 경직시키며 신음을 토해 냈다.

수차례 사정이 끝난 후, 혜미가 손으로 그를 밀었다. 발터는 힘없이 밀려난 후, 그녀를 바라보며 침음했다. 그녀의 온몸이 그가 물어뜯은 잇자국과 입술 자국으로 빼곡했다. 이로 씹힌 젖꼭지는 살갗이 까졌는지 시뻘게진 채였다.

“발터.”

심하게 대한 걸 부정할 셈은 아니었다. 자괴감에 몸을 떠는 그에게 혜미가 손을 뻗어 얼굴을 들어 올렸다. 그리고 눈가에 눈물을 매단 채 눈썹을 장난스레 치켜올렸다.

“설마, 벌써 끝난 건 아니지…? 아직 개처럼 박으려면 멀었잖아.”

아무 말 하지 못하는 그의 다리 아래로 엉금엉금 기어간 그녀가 침대에 무릎을 꿇고 엎드렸다. 엉덩이를 위로 치켜들자 벌게진 살 틈으로 주르륵, 그가 싸질러 놓은 욕망의 흔적이 흘러내렸다. 혜미가 얼굴을 바닥에 박은 채, 양손을 뒤로 돌려 제 음부를 더욱 활짝 벌렸다.

“…내가 이렇게 하는 건….”

고통스러운 쾌감의 산물을 온몸에 주렁주렁 달고서, 그가 너무도 잘 아는 여자가 거울에 비친 발터를 향해 씩 웃었다.

“너뿐이다. 발터.”

***

“그만.”

거울을 뚫어지게 바라보던 크리스티앙이 조용히 입을 뗐다.

“예, 폐하.”

하이데거가 기다렸다는 듯 손을 움직이자 거울이 흐릿해지더니 원래대로 바뀌었다. 목소리까지는 들리지 않았지만 흐릿한 불빛 아래 정사를 나누고 있는 그들의 모습은 생생히 보였다. 황제가 아무 말도 하지 않았기에, 하이데거는 그의 곁에서 마치 개처럼 헐떡이며 정사를 벌이는 황녀와 그의 기사의 모습을 그대로 지켜보아야 했다. 곤혹스럽기 짝이 없는 일이었다.

“오늘 밤 체셔 백작 부인을 불러 내 침실 시중을 들게 하게.”

아메티스에서 제일가는 명기로 유명한 그녀는 크리스티앙이 자주 찾았던 여자였다. 하이데거 역시 그녀의 밤 기술을 확인한 적이 있었다. 확실히 대단한 여자였다.

그가 군말 없이 고개를 숙였다.

“그리하겠습니다.”

“오래간만에 자네도 함께하지.”

크리스티앙이 하이데거를 자신의 침실에 끌어들여 함께 정사를 벌였던 것 역시도 기억이 나지 않을 만큼 오래된 일이었다.

“…저는 괜찮습니다만.”

“사양하지 마. 방금 내 눈으로 본 구역질 나는 상황을 잊을 수 있는 강한 무언가가 필요하니까.”

“…예, 폐하. 명령하실 일은 그것뿐입니까?”

“가면무도회를 계획대로 여는 게 좋겠어.”

“그 건이라면….”

“맞아. 취소하려 했는데 생각이 바뀌었네.”

크리스티앙이 그를 돌아보며 붉은 입술을 뒤틀었다.

“창녀 하나한테 받아야 할 빚이 떠올랐거든.”

***

플라틴성의 내부는 완전히 다 파악하려면 한 달은 족히 걸릴 것처럼 넓고 복잡했다. 혜미는 시종의 안내에 따라 붉은 융단이 깔린 기다란 복도를 걸었다.

겉으로는 아무런 표시도 내지 않았지만 그녀의 머릿속은 이제까지 걸어온 길에 대한 정리로 복잡했다. 그녀의 곁에서 숨소리도 내지 않고 따라오는 발터 역시도 마찬가지일 거란 생각이 들었다.

“와. 이렇게 크고 멋진 성은 처음이에요. 생각했던 것보다 더 화려하고요. 다른 성들도 다 이러한가요?”

혜미가 감탄사를 내뱉으며 말문을 열자 젊은 시종장이 황녀의 질문에 차분히 답했다.

“황금성의 건물은 총 48채입니다. 아메티스를 방문하는 귀족들이 머무르는 공간이므로 부족함이 없는 것은 당연하지만 그중 단연 으뜸은 지금 황녀께서 계신 이곳 플라틴성입니다.”

공손하지만 은근한 자긍심을 감출 수 없는 말투였다.

“이곳 플라틴성은 다섯 채의 성이 연결되어 있는 구조로 황금성 내부에서 가장 넓은 대지 면적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왜 이렇게 넓은 건데요? 황족의 수가 많은 것도 아닌데.”

시종장은 순진한 표정으로 묻는 황녀를 보며 작게 헛기침을 감추고 말을 이었다.

“황제 폐하께서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시는 곳입니다. 이 넓은 클라웨 제국 전체를 다스리시는 분께 이 정도가 넓다 할 수는 없겠지요.”

“성의 크기에 비해 경비병의 수가 부족하지 않은가.”

시종장의 귀가 쫑긋거렸다. 그는 발터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는 것을 놓치지 않았다.

“대공께서 마법을 체득하신 이후, 플라틴성의 경비는 한층 강화되었습니다. 황녀 전하께서 머무르시는 숙소는 이 세상에서 가장 안전한 곳이라는 뜻입니다. 혹여 염려하시는 바가 그것이라면 안심하셔도 됩니다.”

바꿔 말하자면 세상에서 가장 안전한 요새 속에 몸을 숨기고 있는 크리스티앙을 공격하기란 하늘의 별 따기란 뜻이었다.

“마법이 어떻게 경비를 강화시킬 수 있는데요?”

혜미는 호기심이 섞인 말투로 그의 말꼬리를 잡았다.

“막 경비병을 하나에서 둘로 늘리는 게 가능한가요? 분신술처럼?”

“아, 저 그것은 아니고….”

처음 만나는 황녀와의 대화에 익숙하지 않은 시종장이 당혹스러움을 애써 감추었다. 시녀와 대신들이 황녀 전하께서는 조금 특이하다고 쑥덕거리는 것을 혼낸 적이 있는데, 그 말을 이제야 좀 이해할 것 같았다.

죽었다가 살아 돌아온 에데르트 황녀는 좋게 말하자면 격의가 없고 굳이 나쁘게 말하자면 단순한 성격이었다. 뭐든 여러모로 아우인 크리스티앙 폐하와는 닮은 점이 하나도 없었다.

“대공께서는 마법의 눈동자를 이 플라틴성 곳곳에 심어 두었습니다. 허가받지 않은 누군가가 성안에 침입하는 것은 절대로 불가능하다는 뜻입니다.”

“아하.”

마법의 눈동자? 무슨 뜻인지 알 수가 없었지만 혜미는 감탄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시종장의 설명에 귀를 기울였다. 그에게서 최대한 많은 정보를 알아내야 한다는 직감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녀의 마음을 알아챈 듯 발터가 미심쩍은 말투로 물었다.

“외부인의 침입을 금한다고 한들 위험 요소가 완벽히 사라지는 건 아닐 텐데?”

“물론 그뿐만이 아니죠.”

예상대로 젊은 시종장이 작게 발끈하며 설명을 이었다.

“대공의 마력으로 성의 구조를 바꾸는 것도 가능합니다. 방을 미로처럼 숨길 수도, 공간을 뒤섞는 것도 가능하다는 뜻입니다.”

“와아….”

혜미가 놀란 마음을 애써 감추며 눈을 휘둥그레 떠 보였다.

과연. 뭔가 이상하다고 생각했었는데 사실이었다. 계단을 세 번이나 올라간 것 같은데 창밖으로 보이는 풍경은 변함이 없었다. 붉게 물든 나뭇잎이 살랑이며 흔들리는 각도까지도 똑같다. 웬일인지 성안을 빙글빙글 돌고 있다는 느낌이 드는 것은 착각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런 일이 어떻게 가능한 거죠?”

대체 하이데거의 마력은 어느 정도 수준까지 올라간 걸까. 혜미는 입 안의 살을 잘근거렸다.

“마법사의 능력을 일일이 설명하기에는 제 지식과 경험이 부족합니다. 황녀 전하. 그리고….”

중문들을 몇 개나 지나 도착한 방 앞에는 경비병 두 명이 무장을 한 채 서 있었다. 시종장이 짤막하게 입을 뗐다.

“요청하셨던 대로 베네딕트 블라이의 방에 도착하였습니다.”

발터의 발걸음이 소리 없이 멈추었다. 혜미는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그녀와 지난밤을 함께 보낸 발터는 새벽빛이 밝아 오기 전에 조용히 침대를 떠났고,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아침에 그녀를 문안했다. 베네딕트를 만나서 이야기를 해야겠다고 미안한 표정으로 입을 떼는 그녀를 보고서도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며 시종장을 불렀을 뿐이었다.

“…황녀 전하?”

시종장이 그녀를 부르자 혜미가 고개를 들었다. 피한다고 해결될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일단 지금은 베네딕트를 만나 사태 파악을 하는 것이 옳았다. 급하게 아메티스로 오는 바람에 리비에르마저 완전히 그녀의 편으로 포섭하지 못한 상황이다. 누구도 믿을 수 없는 황금성 안에서 그나마 그녀가 의지할 수 있는 것은 베네딕트 한 사람뿐이었다.

“연인을 만나고 싶습니다. 문을 열어 주세요.”

삐걱.

무거운 문이 열렸다. 내부의 모습이 드러나자 혜미는 인상을 찌푸리며 입술을 꽉 깨물었다.

지금까지 지나쳤던 화려한 황금성의 내부와는 비교할 수도 없을 만큼 대조적인 초라한 방이었다. 가구도, 창문도, 벽난로도 없는 차가운 방. 썰렁한 공간 안에 침상이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그리고….

이불도 없는 침상 위에서 양 발목에 수갑이 채워진 채, 조용히 앉아 있던 베네딕트가 고개를 들어 그녀가 있는 쪽을 바라보았다.

“베네딕트.”

텅 빈 눈. 피로 물든 얼굴. 어제 보았음에도 여전히 익숙해지지 않는 처참한 모습에 목소리가 절로 떨렸다.

‘오셨습니까. 나의 연인.’

찢어진 입술이 미소를 지었다. 머릿속으로 나직하게 울려 퍼지는 예의 장난스러운 말투에도 심장 한구석이 저릿해진다.

“…문을 닫아 줘요. 둘만 있고 싶으니까.”

방 안으로 한 발짝을 떼자 근위병 한 명이 그녀의 뒤를 따라 들어와 문을 닫은 후 걸쇠를 걸었다. 혜미가 그를 보며 못마땅한 표정으로 물었다.

“…뭐 하는 거예요?”

“송구합니다만 폐하의 명입니다, 황녀 전하.”

‘일단 절 안아 주시겠습니까, 폐하.’

베네딕트의 목소리가 머릿속에 들려왔다.

‘그는 본인이 목도한 것을 그대로 보고할 테니까요.’

혜미는 근위병을 한번 노려본 후 베네딕트에게로 천천히 다가갔다. 차가운 감옥 같은 이곳에 갇혀 있는 그를 보자 참으려고 해도 어쩔 수 없이 눈동자에 열기가 몰린다. 주먹을 꽉 쥔 채 망설이는 그녀를 향해 베네딕트가 고개를 들었다.

‘왜 그러십니까. 저의 몰골이 끔찍하며 포옹할 기분이 들지 않으십니까?’

‘분위기 잡는 중이니까 산통 좀 깨지 말아 줄래요.’

“…하하….”

베네딕트가 작게 소리 내어 웃었다. 혜미는 젖어 드는 눈을 애써 부릅뜨며 그에게 팔을 뻗었다. 그리고 마치 오래된 연인을 만나는 것처럼 침대 끄트머리에 앉은 베네딕트를 품 안에 깊숙하게 감싸 안았다. 그의 얼굴이 스르륵 몸에 닿아 오자 왠지 모르게 가슴에서 무언가가 울컥하며 뜨끈하게 치밀어 올랐다. 혜미는 그를 안은 팔에 힘을 주었다.

‘저를 위로하려 하십니까?’

안으랄 때는 언제고. 그의 변덕스러운 말투와 행동에도 더 이상 짜증이 일지 않았다. 어제 갤러리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베네딕트와 입을 맞추자 말도 안 되는 상황임에도 불안이 사라지며 기묘한 안도감이 가슴속에 피어났다. 마치 따스한 미풍이 불어와 온몸을 어루만지는 느낌. 황금성에 도착하자 이전보다 훨씬 더 강력하게 느껴지는 감정이었다. 그를 안고 있으니 위로받는 건 마치 그녀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면 안 돼요?’

혜미가 중얼거리자 베네딕트가 그녀의 품에 뺨을 기대며 길게 숨을 내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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