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5화 (45/72)
  • ‘아프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베네딕트가 그녀를 향해 거짓을 속삭였다. 크리스티앙이 하이데거와 함께 수년에 걸쳐 시행한 마력 실험은 그의 예상보다 더욱 강력했다.

    하이데거가 마력을 흡수하고 나서 가장 먼저 한 일은, 크리스티앙이 주로 거주하는 이곳 플라틴성을 강력한 마력 결계로 휩싼 것이었다. 그 틈을 파고 들어가기는 베네딕트로서도 쉽지 않은 일이었다.

    ‘거짓말 좀 하지 말아요.’

    크리스티앙의 목을 손쉽게 따라고 마련했던 기회를 바보같이 발로 걷어찬 황녀이지만, 자신을 위해 눈물을 애써 참는 모습이 썩 보기 나쁘지가 않다. 베네딕트는 찢긴 입술로 그녀를 향해 부드럽게 웃어 보였다.

    ‘이런. 들켰습니까…?’

    ‘이 꼴을 보게 하려고, 저한테 황금성에 찾아오라고 했어요? 빛나는 곳에서 기다리고 있겠다는 말이, 이런 의미였냐고요.’

    혜미가 코를 들이마시며 벌게진 눈동자로 그를 보았다. 상처를 드러내 보이며 투정을 부리는 게 마치 그녀의 어릴 적 모습을 보는 것만 같았다.

    ‘이런 꼴로 뵙게 된 것도… 폐하께 그리 나쁜 것만은 아닌 것 같습니다만….’

    베네딕트가 뻥 뚫린 눈을 일그러뜨리며 다시금 미소 지었다. 이제야 그 모습이 웃는 모습이라는 것을 알아챈 그녀의 마음속에 퍼져 가는 괴로움이 느껴졌다. 전쟁 중 동료를 잃고 남들이 보이지 않는 곳에서 입을 틀어막고 홀로 울고 있던 그녀의 기억까지 고스란히 그에게로 흘러들었다.

    베네딕트의 예상은 틀리지 않았다. 에데르트는 충격을 받을 때마다 각성하는 종류의 인간이었다. 죽음, 혹은 죽음과 가까운 극한 상황,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충격을 받을 때마다 강해져 스스로 억제하고 있던 힘과 능력이 발휘되는 타입.

    거꾸로 말하자면 이런 극한의 상황이 아니라면 바보처럼 스스로를 죽이고 사는 존재라는 말이 된다. 역시나 손이 많이 가는 귀찮은 종류의 인간이지만, 그래서 더욱 사랑스럽다.

    ‘그동안 힘든 일을 많이 겪으셨군요. 가엾게도.’

    힘줄이 끊어진 손목, 마디가 몽땅 잘려 손가락이 아예 없는 손을 들어 그가 그녀의 머리칼을 쓰다듬었다. 그 틈을 타고 아주 미약하게 흘러드는 마법사의 온기. 이런 상황에서도 그녀를 위로하려 드는 그의 행동에 가슴 속에서 뜨거운 것이 울컥 치밀어 올랐다.

    ‘지금 내 걱정을 할 때예요?’

    ‘그것이 제 존재 이유였습니다. 에데르트.’

    ‘…그런 말 하지 말아요.’

    베네딕트의 말투가 묘한 과거형인 것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혜미가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약해지면 안 된다고요. 내 말 알아들어요?’

    그녀는 그를 구해 준다고 약속했었다. 평생을 황실의 꼭두각시처럼 살아야 하는 대마법사의 운명을 꼭 바꾸어 주고 싶었는데, 너무 늦어 버린 걸까? 그가 이렇게 된 게 자신 때문인 것 같아서 혜미는 자꾸만 눈물이 치솟았다.

    ‘폐하야말로 이제 많이 성장하셔서 제 도움이 더 이상 필요 없을지도 모르겠군요. 다행입니다만 왠지 섭섭한 느낌이 든다고 말하면 폐하께선 또 제게 눈을 사납게 흘기시려나요.’

    혜미는 울지 않으려 젖은 눈동자를 부릅떴다. 아니. 늦지 않았다. 빠른 포기는 그녀의 강점이었지만 지금은 그러기 싫었다. 적어도 베네딕트에게는 보여 주고 싶었다. 나는 이제 비겁하게 도망가지 않는다고. 내가 있는 자리에서,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한다고.

    바닥까지 떨어진다 한들, 죽는 것보다는 낫다. 삶을 구걸하는 이를 비웃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적어도 지금 혜미에게만큼은 그러했다.

    그녀는 피가 수차례 흘러내리고 굳기를 반복해 딱딱해진 베네딕트의 옷감을 부여잡고 머릿속으로 또렷하게 중얼거렸다.

    ‘뭐든 좋으니까 절대 죽으면 안 돼요, 베네딕트. 이렇게 끝낼 수는 없어.’

    혜미는 그의 팔목을 꽉 움켜쥔 후, 마침내 고개를 돌려 크리스티앙을 바라보았다. 분노를 애써 삭인 심장이 누가 움켜쥔 듯 아팠다.

    “황제 폐하.”

    그녀의 목소리가 떨렸다.

    “음?”

    그녀에게 눈을 맞추는 황제의 표정은 놀랄 만큼 태연했다. 엉망이 된 사람의 상태를 코앞에 두고도 마치 바닥에 굴러다니는 돌덩이를 보는 것 같이 무심한 표정이었다.

    “그를 풀어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황녀 전하. 폐하의 황명을 어긴 그의 죄는 가볍게 여길 수 없습니다.”

    하이데거가 옆에서 입을 열자 혜미가 눈을 어둡게 빛내며 그의 말을 잘랐다.

    “나는 지금 그의 죄의 경중을 논하고자 함이 아닙니다.”

    “그러나….”

    “황금성의 법도에서 대공이란, 클라웨의 황족의 대화에 끼어들 정도로 지위가 높은 건가?”

    혜미가 하이데거를 보지도 않고 내뱉었다. 대공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지만 그는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황족, 이라는 말로 자신과 황제를 한 범위에 묶은 발칙한 황녀 때문이다. 크리스티앙이 약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 누님. 하지만 에리히는 틀린 말을 하지 않았는걸. 내 대신 설명을 좀 해 주겠나, 대공?”

    “그는 황녀 전하를 살렸기 때문에 그나마 형벌이 이 정도에서 끝난 겁니다.”

    하이데거가 기다렸다는 듯 서늘한 목소리로 입을 뗐다. 혜미의 눈에 그의 등 뒤에서 불타는 검은 불길이 일렁이는 것이 보였다.

    “황제 폐하께서 너그러이 관용을 베푸시지 않았더라면 그의 시체는 이미 수백 조각으로 잘려 저잣거리에서 쥐와 벌레의 먹이가 되었을 것입니다.”

    그녀는 천천히 앉은 자세를 바꾸었다. 마치 조각 같은 모습으로 서 있는 크리스티앙을 향해 두 무릎을 공손히 꿇은 채로 고개를 들었다.

    크리스티앙을 잠시나마 하찮게 보았던 어제의 마음은 오간 데 없었다. 그는 피를 나눈 누이를 몇 번이나 죽이려 술수를 썼던 교활한 이이자, 잔인하기 짝이 없는 이 제국의 황제였다.

    절대로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그녀가 베네딕트에 대한 이야기를 꺼낼 것을 미리 예상하고 그를 이곳에 데려온 걸 보면 뻔했다. 몇 겹이나 덫을 쳐 놓았을 그의 함정에 빠지지 않으려면 그녀부터가 정신을 똑바로 차려야 했다. 모두를 살릴 수 있는 길. 피해를 최소화하는 길. 이대로라면 베네딕트는 분명히 죽는다.

    커다란 갤러리에 표정 없는 얼굴로 죽 늘어선 근위대의 시선이 느껴졌다. 이곳에서 조금이라도 수상한 짓을 벌였다간 그들 모두를 한꺼번에 상대해야 할 것이다. 혜미는 끓어오르는 열을 간신히 속으로 내리누르며 비참한 얼굴로 입을 뗐다. 그래. 크리스티앙. 네가 원하는 게 이런 종류의 굴종이라면 얼마든지 보여 줄 수 있다.

    “그는 사람 구실을 더 이상 하지 못합니다. 교황의 지위에서도 박탈당했으니 따를 이들도 없을 것입니다. 이리 처참한 모습을 보고 존귀하게 빛나던 대마법사의 모습을 떠올릴 리가 만무하고요.”

    “그래서?”

    “그를 성 밖으로 내보내는 것은 어떻습니까.”

    “흠. 실험의 결과로 봤을 때 그가 치유 마력을 쓸 수 없을 정도로 약해진 건 사실이지.”

    혜미는 바닥을 짚은 손으로 주먹을 꽉 쥐어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크리스티앙을 향해 달려나가 그의 멱살을 틀어쥐고 싶은 충동을 참아 낼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러니까요.”

    “그렇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건 허락할 수 없어, 누님. 한때나마 교황이었던 그에 대한 예의로 그는 황금성에 묻히게 될 거야.”

    “안 됩니다, 폐하.”

    이 상태로 죽기를 기다리라는 뜻이나 다름이 없었다. 혜미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왜 안 되지?”

    “그가 제 목숨을 구했으니까요. 저의 은인이나 마찬가지입니다.”

    “흐음. 단지 그 이유뿐이야?”

    되묻는 크리스티앙의 표정이 희한했다. 마치 먹잇감을 향해 눈을 빛내는 교활한 짐승 같은 모습이다.

    “…무슨 뜻입니까?”

    “교황은 본디 황실을 위해 그 목숨까지 내놓는 것이 의무이거늘. 누님께서는 왜 이미 역할이 끝난 자를 이토록 감싸고 도는 거냐고 묻고 있는 거야.”

    크리스티앙이 그녀를 보며 천천히 다가왔다. 또각. 또각. 티끌 하나 내려앉지 않은 부츠가 그녀의 앞에 멈추었다.

    “고문을 하면서 그의 정신세계를 엿본 이가 흥미로운 말을 해 주더군.”

    도대체 무슨 말을 하려고 저러는 걸까. 의심에 짙어진 보라색 눈동자를 바라보며 크리스티앙이 입술을 삐뚜름하게 들어 올렸다. 하얗고 뾰족한 이가 드러난다.

    “마법사가 고통에 시달릴 때마다 그의 머릿속에 떠올랐다던 이미지가 뭐였는지 알아?”

    “…글쎄요.”

    ‘동요하지 마십시오, 에데르트.’

    베네딕트가 속삭였고 크리스티앙이 낮게 명령했다.

    “서기관. 이제부터는 기록을 중지하도록.”

    “예, 폐하.”

    그들이 나누는 대화를 모조리 받아 적고 있던 서기관이 깃펜을 내려놓았다. 황제의 공식적인 언사는 끝났다는 것을 뜻했다. 크리스티앙이 그의 앞에 무릎 꿇은 혜미를 내려다보며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누군가와 진하게 섹스를 하는 장면을 떠올리며, 쾌감을 견딜 수 없어 교성을 터뜨리며 울부짖는 여자의 얼굴을 떠올리며 살이 찢기는 고통을 견뎠다는 거야. 사비오족이 남들과 다른 변태적인 정신세계를 가지고 있다는 건 문헌에도 적혀있는 이야기지만, 실제로 들으니 정말 혐오감이 들지 않아?”

    혜미의 눈매가 순식간에 일그러졌다. 그녀의 뒤에서 피나게 입술을 깨물고 있는 발터 역시 마찬가지였다.

    크리스티앙이 가늘게 눈을 떴다. 교양이 넘치는 말투를 집어치운 그의 입술에서 기다렸다는 듯 험악한 말이 우르르 쏟아져 내렸다.

    “누님은 모를 수도 있으니 내가 친절히 알려 주자면, 교황의 일거수일투족은 황실에 모두 보고되는 게 법도거든. 근데 내가 아는 한 저 천한 자는 지난 세월 동안 단 한 번도, 교황청 안에서 그 어떠한 여인과도 교합을 한 적이 없어. 남색을 했다면 내 손에 직접 찢어발겨졌을 텐데 그것도 아니었지. 그럼 그가 온몸의 근육이 모조리 잘리면서도 떠올렸다는 상대는 누구일까? 고통스러워 남들이라면 진작 백번이고 혀를 빼물고 자살했을 상황에서도 양물에서 씨물을 뚝뚝 흘렸다는데…. 저 역겨운 미친놈에게 다리를 벌리고 씹질을 한 더러운 창녀는 도대체 누구냔 말이야.”

    혜미의 눈매가 완전히 일그러졌다. 그녀의 뒤에 서 있던 발터 역시 마찬가지였다. 크리스티앙의 목소리는 마치 흥분한 듯 격양되어 있었다. 오만하게 턱을 치켜든 그의 얼굴에서 노란 눈동자가 번쩍거리며 빛을 냈다.

    “누님은 혹시 그 상대를 알고 있어?”

    ‘대답할 필요 없습니다, 에데르트.’

    “베네딕트가 황금성을 빠져나갔을 때, 누님 외에 만난 이가 있는지를 묻고 있는 거야.”

    ‘휘말리지 마십시오.’

    베네딕트의 말이 머릿속에 울렸지만, 바닥에서 꽉 움켜쥔 혜미의 주먹은 이미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크리스티앙이 낮게 혀를 차며 빙긋 웃었다.

    “뭐. 누님께서 알 리가 만무하지. 변태적인 사비오족의 헛된 망상이려니 생각하면 이해를 못 할 것도 아니지만….”

    “그 상대가 접니다.”

    혜미의 입술에서 나직하고 또렷한 말이 튀어나왔다. 크리스티앙이 아랫입술을 지그시 한 번 물었다.

    “뭐라고?”

    “베네딕트가 떠올렸다던 그 상대가 저라고요.”

    순순히 수긍하는 혜미를 쏘아보며 크리스티앙이 차갑게 조소했다.

    “하하, 누님. 지금 클라웨의 황족이자 제국의 황제인 내 누이가, 저 마법사와 더럽게 정을 통했다고 말하는 건가? 그가 떠올린 장면은 치료 따위가 아니었지. 색에 미쳐 헐떡이며 붙어먹는 남녀의 교합,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고. 저자가 성교하며 어떤 더러운 말을 지껄였는지 그의 기억을 엿본 고문관이 하나부터 열까지 다 기록해 놨거늘. 그런데 그게, 클라웨의 황녀였다?”

    “…예. 맞습니다.”

    혜미는 짓눌리는 것 같은 기분을 느끼면서도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 공간에 발터가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게 아니었다. 그를 떠올리면 가슴이 먹먹해진다.

    리비에르까지 지켜보고 있는 상황에서, 황궁 근위대와 시종들이 모두 자리한 이곳에서 자신이 얼마나 우스워질지를 생각하지 못하는 게 아니었다. 하지만 이 방법밖에는 없었다. 크리스티앙은 지금 그녀를 남들 앞에서 모욕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그녀 역시 그 사실을 역으로 이용하는 수밖에 없다.

    “누이를 위한 일이라고 생각하고, 그를 풀어 주면 안 됩니까? 황금성에서 나가게 하는 것도 바라지 않습니다. 그저, 그를 제가 볼 수 있는 곳에 머무르게 해 주면 안 되는 걸까요.”

    이것 봐라. 크리스티앙이 애원하듯 말하는 그녀를 바라보며 고개를 저었다.

    “황실에는 법도라는 게 있어, 누님.”

    “제가 그를 저의 정부로 삼는다면요?”

    공간에 무거운 침묵이 또다시 내리깔렸다.

    “황금성의 동쪽. 플라틴성의 경비는 워낙 철저해. 이곳에 머무를 수 있는 이는 황족이거나 그의 허가를 받은 귀족. 혹은….”

    “…혹은?”

    “그들의 정부뿐이야.”

    세르노티의 탑에서 발터의 말을 들었을 때만 해도, 그 정보를 이렇게 쓰게 될 줄은 상상도 못 했다. 그녀가 떨어지지 않는 입술을 애써 열었다.

    “황실의 법도 중 황족의 연인은 함께 머무를 수 있다고 알고 있는데, 아닌가요?”

    “맞아.”

    크리스티앙이 묘한 표정으로 짧게 수긍했다.

    ‘그리할 필요 없습니다. 에데르트.’

    머릿속에서 들리는 베네딕트의 말을 무시하며 혜미가 크리스티앙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렇다면 그를 제 정부로 삼겠습니다. 이제 교황의 위치에 있는 것도 아니니 불가능하지는 않겠지요.”

    “불가능하지 않지. 그런데 문제가 있는걸.”

    “…뭐가 문제입니까?”

    크리스티앙이 흰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나는 누님이 지금의 저자와 정을 통하는 모습을 상상할 수가 없거든. 더 솔직히 말하면 맘 약한 누이가 저자의 술수에 빠지기라도 해서 그를 구하려 임기응변을 벌이는 것은 아닌지 의심스러워. 설마, 교황 자격을 박탈당한 대마법사와 함께 실로 위험한 어떤 일을 꿈꾸는 것은 아닐 테고 말이야.”

    혜미는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떴다. 크리스티앙은 기어이 그녀를 바닥으로 끌어내릴 생각인 듯 보였다. 그러나 여기서 질 순 없다. 혜미는 고개를 돌려 눈이 있던 자리에 피딱지가 대신 말라붙은 베네딕트의 얼굴을 양손으로 부드럽게 잡았다. 그의 목소리가 머릿속에 울려 퍼졌다.

    ‘저를 위해 어찌… 이 정도까지 하십니까….’

    나직한 말투는 여전했지만 끝이 미약하게 떨리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혜미는 마치 그의 푸른 눈동자가 시야에 보이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당신을 구해 준다고 약속했으니까요.’

    ‘하하. 이런 바보 같은 방법일 줄은 상상도 못 했습니다만.’

    혜미의 얼굴이 그에게로 가까이 다가오자 따스한 온기가 담긴 숨결이 베네딕트의 뺨을 간지럽혔다.

    “잘생긴 게 행운인 줄 아세요”

    혜미가 작게 중얼거리자 베네딕트가 엉망인 입술을 들어 올려 웃었다. 농담으로라도 아름답다고는 말할 수 없는 표정이었지만 혜미에게는 달랐다. 크리스티앙을 수년간 곁에서 지켜본 그가 스스로의 행동이 가져올 파장을 알지 못했을 리 없었다. 그리고 그녀는, 자신을 위해 희생한 사람을 외면할 수 있는 이가 아니었다.

    설사 그 상대가 정말 마음에 안 드는 사람일지라도.

    입술이 부드럽게 엉키자 공간의 소음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혜미가 그를 끌어안고 입을 맞추는 모습을 보는 이들 사이에 정적만이 내리깔렸다. 근위대 중 몇몇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입술이 부딪혔다가 떨어지자 베네딕트가 입을 벌리고 숨을 길게 내쉬었다. 혜미가 그의 입 속으로 혀를 넣어 잘린 혀를 어루만지자 젖은 소음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명백한 욕망이 실린 남녀의 입맞춤. 그런 키스를 보고 몸이 동하지 않을 이는 없었다. 저런 식으로 입맞춤을 나누는 이들이 서로 처음일 리가 만무했다.

    촉.

    몇 번이나 부드럽게 서로를 문질렀던 입술이 서로의 타액을 머금은 채 천천히 떨어졌다. 크리스티앙은 그런 그들의 모습을 뭐라 설명할 수 없는 표정으로 바라보다 마침내 입을 열었다.

    “베네딕트 블라이를 누님의 정부로 인정하지. 내가 허락할 수 있는 것은 거기까지야.”

    “폐하.”

    ‘약속을 받아 내십시오, 에데르트.’

    베네딕트가 말하지 않아도 그러려고 했었다. 혜미가 크리스티앙의 시선을 잡아채며 입을 열었다.

    “약속을 해 주십시오, 폐하.”

    “무엇을?”

    되묻는 크리스티앙의 얼굴에는 미소가 싹 사라져 있었다. 혜미는 그의 눈에 담긴 경멸을 고스란히 읽었다.

    “그를 황족인 저의 정부로 인정한다고. 제 눈에 닿는 처소에 머무르게 하겠다고요.”

    “지금 내가 한 말을 듣지 못했어?”

    “황제의 위치로 서기관에게 지금의 말을 기록하게 해 주십시오.”

    ‘이 망할 년이. 진짜.’

    하이데거의 귀에 크리스티앙의 생각이 그대로 읽혔다. 그는 황제에게 그럴 필요가 없다고 말할 생각이었으나 입을 열 기회는 없었다. 크리스티앙의 노란 눈동자에 불꽃이 튀었다. 그가 고개를 돌려 서기관을 보며 서슬이 시퍼런 표정으로 입을 뗐다.

    “지금 이 시각부터 황녀의 정부를 플라틴성의 정부 처소로 이동시키고 그 방에서 지키도록.”

    “예, 폐하.”

    “그를 누님의 정부로서 인정한다 해도 죄를 사하는 건 불가해. 그를 찾아갈 수 있는 건 하루에 한 번뿐. 만날 때는 근위병을 대동해야 하고.”

    “괜찮습니다.”

    혜미의 입술에서 긴 숨이 흘러나왔다. 무릎 꿇은 다리가 그제야 저리기 시작했다. 아직도 긴장은 풀리지 않았지만 이걸로 일단 급한 불은 끈 셈이었다. 크리스티앙은 적어도 공식적인 석상에서 기록된 말을 번복할 수 있는 위치가 아니었다.

    “더 이상 내게 할 말이 없다면 그만 일어날까? 나의 하나뿐인 가족이 내게 또 어떤 어려운 부탁을 할지 두려워져서 말이지.”

    “…감사합니다, 폐하.”

    크리스티앙이 농담인지 진담인지 모를 말을 내뱉으며 휙 뒤를 돌았다.

    “가지.”

    크리스티앙이 휙, 뒤를 돌자 하이데거가 그의 뒤를 따랐다. 근위병들은 들어왔을 때와 똑같은 속도로 공간을 빠져나갔다. 베네딕트를 데려왔던 이들 역시, 그를 거칠게 일으켜 세운 후 갤러리 반대편으로 질질 끌고 나갔다.

    ‘조금만 기다려 줘요. 겨울제까지만. 베네딕트.’

    혜미는 그의 뒷모습을 보며 마음속으로 속삭였다. 이제 하루에 한 번씩 그를 만날 수 있다. 그것만 해도 대단한 성과였다. 적어도 오늘은 아무도 죽지 않았어.

    ‘폐하는 정말… 매번 색다르게 저를 놀라게 하시는군요.’

    점점 희미해지는 베네딕트의 목소리에 설핏 웃음기가 밴 것 같은 착각도 들었다.

    ‘제게 입 맞추셨으니 저도 선물을 하나 드릴까요.’

    ‘여유 부리지 말고 몸조리나 잘하세요. 곧 찾아갈 테니까.’

    ‘예. 즐겁게 기다리겠습니다.’

    황제의 발소리가 완전히 사라지고 끌려가는 베네딕트의 모습마저 문 뒤로 사라졌을 때였다. 저린 다리를 두드리며 간신히 자리에서 일어난 혜미의 눈에 인상을 잔뜩 찌푸린 리비에르의 얼굴이 제일 처음 보였다. 그녀가 충격받은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발터의 얼굴을 볼 낯도 없었다.

    “리비에르… 미안한데 설명은 나중에….”

    “저게, 뭐지?”

    리비에르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손을 들어 올렸다. 혜미는 무언가 이상한 느낌에 뒤를 휙 돌았다. 그리고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

    그녀가 등지고 있던 크리스티앙의 대관식 그림. 그것과 똑같은 모양의 새가 공중에서 날갯짓을 하고 있었다. 마치 그림 속에서 고스란히 빠져나온 것 같은 아름다운 모습이었다. 하얀 새가 날개를 펄럭일 때마다 형형색색의 아름다운 빛이 마치 보석처럼 쏟아져 내렸다. 혜미는 처음 보는 광경에 그저 입을 벌리고 멍하니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아니. 이것은 처음 보는 광경이 아니었다.

    “울음을 그치면 선물을 드리죠.”

    “…훌쩍. 서, 선물이요?”

    “예. 에데르트 폐하.”

    빛의 결정들이 하나둘 모여 일정한 형태를 이루었다. 이것은 어린 그녀를 달래기 위해 베네딕트가 쓰던 마법이었다. 어린 그녀가 가장 좋아했던, 베네딕트의 손끝에서 펼쳐지던 빛의 마법.

    ‘마력을 잃은 게… 아니었어…?’

    달려가서 따져 묻고 싶었지만 베네딕트는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황궁 근위대가 혹시나 달려와 이 광경을 목격할까 싶어 큰 소리를 낼 수조차 없었다. 혜미는 반짝이는 보석 알갱이 같은 빛들이 하나둘 모이며 영롱하고 아름다운 왕관의 형태를 만드는 것을 지켜보았다.

    마침내 그녀의 머리 위로 자리한 왕관을 보며 그 모습을 지켜보는 발터와 리비에르 모두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녀의 머리 위에서 발하던 왕관이 팟, 하고 터지며 별빛처럼 그녀의 몸을 감쌌다.

    빛으로 된 커다란 새는 천천히 시야에서 사라졌다. 혜미는 고개를 돌려 커다란 그림을 쳐다보았다. 그림 속에서 사라진 것은 새뿐만이 아니었다. 교황마저 사라진 커다란 그림 안에는 아무것도 없는 허공을 향해 손을 뻗고 있는 아름다운 소년 하나만이 외로이 존재했다.

    ***

    휙!

    쨍그랑!

    유리잔이 책장으로 날아가 산산조각이 났다.

    “대체 어떻게 된 건지 설명해.”

    “숙소를 안내하는 대신이 실수를 하여 리비에르와 세르노티의 거처가 뒤바뀐 사실을 저도 오늘에야 알았습니다.”

    “실수?”

    연초가 든 물담배 병이 날아가 바닥에 뒹굴었다. 사이드 테이블은 부서졌고 소파는 나이프에 찢겼다. 벽에 처박힌 포도주병에서 붉은 와인이 흘러나와 양털 카펫을 붉게 적셨다.

    “참으로 좆같은 실수로군.”

    크리스티앙이 커튼을 움켜쥔 채 창문을 노려보며 내뱉었다. 단정하게 채워져 있던 단추는 어지럽게 풀려 있고 머리카락은 흐트러져 엉망이었다. 그는 의자에 몸을 거칠게 묻은 후, 딱 세 번 심호흡을 했다.

    “폐하, 정 힘드시면 안정에 도움이 되는 약이라도….”

    “자네의 눈에도 내가 정신병자로 보이나?”

    “폐하.”

    “닥치고 꺼지게.”

    하이데거는 입술을 씹은 후, 고개를 숙였다. 마력의 부작용은 날이 갈수록 심해지고 있었다. 다른 이가 느끼는 감정의 파동이 그대로 전달되는 것은 매우 달갑지 않은 일이었으나, 지금은 달랐다. 비단, 황제에게서 직접 느껴지는 어마어마한 분노와 떨림이 아니더라도 그의 흥분을 알아채지 못하기는 힘이 들었다.

    크리스티앙은 열세 살 이후 단 한 번도 대신들 앞에서 여유를 잃은 모습을 보인 적이 없었다. 화를 낼 때조차 황족의 품위를 잃지 않았던 그는 오늘, 황녀의 앞에서 거친 말을 쏟아 내었다.

    서기관이야 그렇다손 치더라도 대신들과 황궁 근위병의 수가 적지 않은 곳에서 천한 것들이나 지껄이는 쌍욕을 내뱉었다는 사실은 그의 참을성이 한계에 다다랐다는 사실을 의미했다.

    “폐하. 황녀의 거처는 어떻게 하길 원하십니까.”

    “생각할 시간이 필요해.”

    쑥 들어간 눈으로 낮게 내뱉는 그를 보며 하이데거는 조용히 서재 문을 닫고 물러났다. 문이 닫히는 소리를 들으며 크리스티앙이 눈을 천천히 감았다.

    장갑을 낀 손안은 땀이 흥건해 기분이 더러웠다. 그는 이로 장갑 끄트머리를 차례로 물어 벗어던진 후,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짚었다.

    어제 밀실에서 잔뜩 취해 정신 나간 계집 하나를 만난 후 그는 모처럼 잠을 푹 잘 수 있었다. 황녀를 만나야 한다는 사실 하나에 집중했던 정신이 분산되는 순간, 거짓말처럼 숨통이 트이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여자는 어딘가 나사가 하나 빠진 게 분명했다. 그녀를 어떤 식으로 벌하는 것이 가장 즐거울지를 생각하다 보니 어느새 잠이 들었고 중간에 깨지도 않았다.

    그런데, 그 정신 나간 계집이 바로 황녀였다니.

    “씨발…. 돌아 버리겠네.”

    그가 붉은 아랫입술을 버릇처럼 핥으며 중얼거렸다. 마치 누군가가 그를 비웃기 위해 설계해 놓은 거라고 해도 믿을 수 있을 만큼 모욕적인 첫 만남이었다. 분명, 리비에르의 부하 중 하나라고 생각했다.

    황녀와의 달갑지 않은 만남을 해치운 이후, 리비에르에게 인상착의를 넌지시 설명해 그 계집을 족치며 스트레스를 풀 예정이었는데. 모든 것이 뒤죽박죽 엉망진창이 되어 버린 것이다.

    “제가 그를 정부로 삼는다면요?”

    갤러리 안에는 그와 그녀 외에도 지켜보는 눈이 수십이었다. 황족은 그따위 천박한 말을 공식적으로 지껄여서는 안 되는 위치에 있었다. 바닥에 엎어져 있던 베네딕트의 어깨가 소리 없이 들썩였던 이유도 바로 그것 때문일 것이다.

    그 멍청한 년 때문에 모든 게 엉망진창이었다.

    파르륵.

    그는 연초에 직접 불을 붙인 후, 길게 연기를 빨아들였다. 독한 담배를 피워도 머릿속이 진정되기는커녕 흥분을 가라앉힐 수가 없었다.

    갤러리 옆의 응접실에 베네딕트를 대기시킨 것은 그의 계산 중 하나였다. 황녀를 더욱 궁지에 몰게 하기 위한 작전. 황명을 거부하거나 반역을 꿈꾸면 교황마저도 걸레짝처럼 갈기갈기 찢어 버릴 수 있다는 그의 의지의 표현이었다.

    “하아….”

    역겨운 창녀라고 깔아뭉갰거늘, 보란 듯이 그와 입을 맞추던 모습을 떠올리자 더욱 기분이 더러워지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상처투성이인 괴물 같은 얼굴의 베네딕트와 키스하던 그녀의 모습은 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묘하게 찌릿한 감정을 불러일으켰다. 뒤통수를 후려치는 것 같은 엽기적인 상황에 흥분한 것은 비단 크리스티앙 자신뿐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나 애인 있거든.”

    그녀가 지껄이는 말에 신경도 쓰이지 않았던 것은, 그는 그럴 만한 위치에 있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이 세상에서 크리스티앙이 무릎 꿇리지 못하는 여자는 없었다. 남편이 있건 말건, 정인이 존재하건 존재하지 않건, 수백의 남자에게 다리를 벌렸건 말건 그가 원하면 모두 그의 다리 사이를 싹싹 빨아 핥아야 했다.

    “넌 성격만 나쁜 게 아니라 의리도 없구나?”

    “그 더러운 창녀 같은 게 어디서 나를….”

    크리스티앙이 잇새로 씹어뱉듯 중얼거렸다. 약에 흠뻑 취해 그녀와 키스했던 자신의 입술에 더러운 벌레가 기어가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아니. 가장 밑바닥 매음굴에서 굴러먹던 창녀라고 해도 그에게 이 정도의 충격을 주지는 못할 것이 분명했다.

    “하아….”

    발터 세르노티. 자신이 가장 경멸하는 베네딕트와 붙어먹은 여자의 곁에 우두커니 서 있던 시커먼 개 같은 눈빛도 함께 떠오르자 기분이 더욱 나빠졌다. 여러모로 황제의 권위가 땅바닥에 추락한 날이라는 느낌이다.

    “…상관없어…. 씨팔.”

    크리스티앙이 다시 깊숙이 연기를 빨아 내뱉으며 중얼거렸다. 한 해의 마지막 주인 겨울제까지는 이제 쉰 밤도 채 남지 않았다. 북부에 있는 호아킴이 계획대로 빨리 도착해 주기만 하면, 그는 즉시 계획에 착수할 예정이었다. 빌어먹을 황녀를 올해를 넘겨서까지 볼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황실의 예절대로라면 황후가 그녀를 대접해야 하겠으나, 그 둘을 만나게 할 생각 또한 없었다. 원로원이 시끄럽게 군다면 황후에게 그럴 만한 이유가 있는 것으로 퉁치면 될 일이었다.

    황녀와의 공식적인 만남은 이미 끝났으니 그의 할 일도 끝이 났다. 이제 그녀를 따로 만나야 할 자리는 없을 것이다. 재회하게 된다면 반역자를 묶어 산 채로 불태우는 기둥 앞일 테다.

    그래. 괜찮아. 단지 처음이 삐끗했을 뿐이다. 모든 것은 그가 계획한 대로 차질없이 흘러가게 될 것이다. 이제껏 그래 왔듯, 세상이 내 손바닥 안이다. 마치 최면을 걸듯 속으로 내뱉자 가슴속을 태우던 분노의 불길이 조금은 잠잠해지는 듯한 느낌이었다.

    “대공.”

    문 앞에서 대기하고 있던 하이데거가 조심스레 안으로 들어와 고개를 숙였다.

    “부르셨습니까.”

    “플라틴성에 자네가 걸어 놓은 마법 말인데.”

    “예.”

    하이데거의 목소리에 긴장이 서렸다.

    “성안의 모든 공간을 보는 것이 가능한가?”

    크리스티앙의 노란 눈동자가 그를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하이데거는 마른침을 삼키며 조심스레 입술을 뗐다.

    “이 성안에서라면 거울을 이용해 투영 마력을 쓸 수 있습니다. 목소리까지는 들리지 않을 테지만 무얼 하고 있는지 비추는 것은 가능합니다.”

    “그럼 황녀를 감시하는 것도 가능하단 뜻이겠군.”

    “예.”

    “시험해 봐.”

    “…예?”

    웬만해서는 되묻는 법이 없는 하이데거가 그에게 다시 물었다. 크리스티앙이 오래전부터 마력을 통제하고 싶어 했던 이유는 그것을 끔찍이 싫어하기 때문이다. 교황청 지하에서 그가 벌인 실험의 가장 큰 비중을 차지했던 것이 마력을 제어하는 것이라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는 일이었다.

    불면증에 시달린 지 수년째임에도 마법사로 하여금 그에게 손끝 하나 대지 못하게 했던 그가, 눈앞에서 마법을 시연하라 명하고 있는 것을 믿을 수가 없었다.

    “황녀의 방을 당장 비추라는 뜻이네. 지금 무슨 작당을 벌이고 있는지 내 눈으로 직접 봐야겠으니.”

    크리스티앙이 눈을 빛내며 이를 갈았다. 그는 하이데거의 의문을 읽어 내지 못할 정도로 흥분한 상태였다.

    그 망할 계집은 지금쯤 무얼 하고 있을까. 그를 한 방 먹였다는 생각에 깔깔거리고 있을까, 아니면 어제 그가 보였던 한심했던 모습에 대해 주변에 떠들어 대고 있을까. 생각만으로도 미칠 것 같다. 당장이라도 잡아 죽이고 싶은 심정을 억누를 수가 없었다.

    “머리가 세더니 귀까지 먹었나, 대공?”

    방으로 돌아온 후, 혜미는 몇 시간 동안 방 안을 끊임없이 서성거렸다. 식사를 방에서 해결할 수 있는 것은 이 황금성에서 그나마 맘에 드는 몇 안 되는 것들 중 하나였다. 생각을 정리하기 전에는 그 누구를 만나도 이야기에 집중할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시종이 트레이를 가지러 왔어.”

    응접실과 침실을 잇는 문 앞에서 발터가 낮은 목소리를 냈다.

    “아.”

    혜미는 그제야 몸을 일으키며 저녁 식사 트레이를 들고 응접실로 걸어 나섰다. 발터는 그녀에게서 쟁반을 받아든 후, 시종이 들고 들어온 은색 수레에 실었다. 이미 실려 있는 발터 몫의 접시를 보고 혜미는 작게 한숨을 삼켰다. 식욕이 없었지만 빵이라도 억지로 뜯은 그녀와는 달리, 발터의 접시는 처음부터 손도 대지 않은 듯 깨끗했다.

    “발터.”

    시종이 사라지는 것을 지켜본 후 발터가 그녀 쪽으로 몸을 돌렸다. 혜미는 자신에게 눈을 맞추지 않고 내리깐 그를 보며 목에 메이는 것을 애써 참으며 입을 열었다.

    “나랑… 이야기 좀 할래?”

    찰나의 침묵.

    “…명령이라면.”

    낮게 내뱉는 그의 대답에 또다시 가슴이 푹, 찔리는 것 같았다. 그의 말은 명령이 아니라면 지금 그녀와 대화하고 싶지 않다는 뜻이었다. 혜미는 그에게 한 발짝 다가선 후,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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