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4화 (44/72)
  • “눈을 뗄 수가 없는 게 사실이네요. 여러 가지 의미로.”

    “당연합니다. 이 작품을 완성하기 위해 당대 최고의 화가 세 명이 달라붙었고, 완성하기까지에는 장장 5년이란 시간이 걸렸지요. 특히나 저 새의 모습을 폐하께서 무척이나 고심하셨기에 더욱 힘이 든 작품이었습니다.”

    “새요?”

    혜미가 그를 향해 묻자 하이데거가 그림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짧게 대답했다.

    “예, 그러합니다. 스케치부터 채색, 붓질의 방향 하나까지 폐하의 의견이 들어가지 않은 곳이 없죠.”

    “예쁘긴 한데 저런 새가 실제로 날아다니는 건 본 적이 없는걸요.”

    “폐하의 미학 수준은 범인과 비교할 것이 못 됩니다.”

    혜미가 의문을 담은 얼굴로 어깨를 으쓱했다.

    “그것까지는 제가 잘 모르겠는데, 아무튼 초상화 같은 거 그릴 때 가장 중요한 것은 본인 모습 아닌가요?”

    희게 센 하이데거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휙 고개를 돌린 그가 입을 떼려 하는 순간, 그들이 들어온 입구의 반대편에서 벽에 장식된 부조라고 생각했던 커다란 문이 양쪽으로 활짝 열렸다. 생각지도 못했던 곳에 있던 문의 존재에 놀랄 틈도 없었다.

    “황제 폐하께서 오십니다.”

    시종의 나지막한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발소리가 들려왔다. 저벅저벅. 질서 정연하게 들려오는 발소리에 미세하게 움직임이 다른 발소리가 느껴졌다.

    훈련과 전투를 거치며 혜미의 청각은 이미 예민해져 있었다. 다른 이들이 모두 발을 맞추어 걷는 와중, 홀로 자유로이 걷는 발걸음 소리가 점점 더 가까워진다. 한 번도 제 발걸음 소리를 숨긴 적이 없는 자의 걸음걸이. 우아하고 당당하며 서두르지 않지만 주저함도 없는 발걸음이었다.

    크리스티앙.

    두근.

    드디어 올 게 왔다는 느낌에 혜미는 입 안의 살을 꽉 깨물었다. 발터가 옆에 있고, 리비에르까지 곁에 있었지만 긴장은 가실 줄을 몰랐다. 근위대의 발소리가 멈추었다. 또각. 또각. 얼굴이 비칠 정도로 반들반들하게 닦인 갤러리의 마룻바닥에 구둣발 소리가 홀로 공명음을 냈다.

    “하하. 그 대답은 내가 해도 되겠나, 에리히?”

    웃음기가 담긴 목소리가 공간에 울려 퍼졌다. 그녀가 있는 곳과 그가 등장한 곳은 족히 50보는 떨어진 거리였지만 그의 목소리만큼은 확실하게 들렸다. 크리스티앙의 목소리는 낮고 굵직하다기보다 약간 옥타브가 높아 또렷하고 청명했다. 마치 소년 같은 목소리였지만 위엄이 느껴지는 이유는 그의 귀족적인 어투 때문일 것이다.

    고개를 숙여 예를 취하는 하이데거를 향해 성큼성큼 걸어오는 상대를 보며 혜미가 눈을 가늘게 떴다. 햇살을 등진 역광이라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았다.

    크리스티앙이 거침없이 공간을 가로질렀다. 오전이었음에도 샹들리에에 걸린 촛대에는 불빛이 환했다. 우아한 걸음걸이가 이어질 때마다 역광에 그림자가 드리웠던 그의 모습이 점점 선명하게 다가온다. 크리스티앙이 특유의 또박또박한 말투로 말을 이었다.

    “나의 대관식 그림에서 저 새를 표현할 때 무엇보다 가장 심혈을 기울인 이유는 말이지….”

    최고급 가죽을 무두질해 손질한 부츠, 몸에 꼭 맞게 재단되어 길고 탄탄한 다리를 강조하는 하얀 블리오, 클라웨 가문을 상징하는 장미가 조각된 금장 단추가 가지런하게 달린 남청색 재킷, 포켓에 들어간 회중시계, 혹은 안경에 연결되었음이 분명한 화려한 금줄. 어두운 기라고는 하나도 없어 색이 연한 금발 위에 사뿐히 자리한 왕관에는 붉은색 다이아몬드가 족히 백 개는 박혀 반짝거리고 있는 듯했다.

    마치 세상의 화려한 것들은 모두 다 끌어다 모은 차림새였지만 그 모든 사치스러움에 정점을 찍는 것은 혜미를 보며 천천히 인상을 찌푸리는 크리스티앙의 얼굴이었다.

    …말도 안 돼.

    혜미의 입술이 소리 없이 벌어졌다. 놀라움과 당황함을 숨길 줄 모르는 동공이 커다랗게 확장되었다.

    눈앞의 황제는 그림 속 천사 같던 아이를 전혀 떠올릴 수 없는 모습이었다. 이목구비의 문제가 아니었다. 그림 속 소년이 순수함 그 자체였다면, 다 자라난 크리스티앙은 마치 검붉은 꽃봉오리가 터져나가며 매혹적인 꽃술을 훤히 드러낸 장미 같았다. 하지만 그녀가 놀란 것은 단지, 그의 화려한 외모에 압도되어서만은 아니었다.

    넓은 공간을 가로지르며 걸어온 젊은 황제가 마침내 자신의 대관식 그림 앞에 우뚝 섰다. 그는 이제 혜미와 마주 본 위치였다. 피처럼 붉은 입술의 연한 안쪽을 선홍빛 혀가 느리게 핥았다. 혜미는 그 자리에 얼어붙어 그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그 새를 특별히 신경 썼던 이유는, 얼굴도 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난 누님에 대한 존경의 표시였어.”

    쑥 들어간 눈두덩이 안에서 빛을 모조리 흡수하여 응집해 놓은 듯한 황금색 눈동자와 그녀의 눈동자가 정면으로 얽혔다. 한 올, 한 올, 누군가 공들여 심어 놓은 것 같은 눈썹이 미간에 모였다가 이내 보기 좋게 휘어진다.

    쿵. 쿵.

    “이렇게 살아 있는 줄은 꿈에도 모르고 말야.”

    넓은 공간의 소음이 사라지고 마치 속삭이는 그의 목소리만이 들리는 것 같았다. 혜미의 연보랏빛 동공이 어지럽게 흔들렸다.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지?

    그는 그녀가 어제 마주친 소년이었다. 햇살이 잔뜩 쏟아지는 온실 같은 곳에서 약에 취해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날개 꺾인 짐승처럼 쓰러져 있던 이였다.

    “황제 폐하께 예를 취하십시오.”

    귓속이 웅웅거리는 와중에 하이데거의 말이 희미하게 들렸다. 비단 고개가 땅에 닿을 듯 머리를 숙인 대공이 아니더라도, 크리스티앙의 머리 위에 사뿐히 자리한 왕관이 아니더라도, 그가 이 거대한 황금성의 주인이라는 사실은 단박에 알 수 있었다. 그가 등장하자마자 시종과 대신들을 감싸고 있는 공기의 흐름 자체가 달라지는 것이 느껴졌던 것이다.

    이건 말이 안 되잖아…!

    혜미는 다시 한번 속으로 소리쳤다. 그녀를 똑바로 직시하고 있는 황금색 눈동자는 초점이 정확했다. 무방비한 상태로 흐트러져 기다란 의자에 축 늘어져 있던 이라고는 상상도 할 수 없다. 그는 황금성의 사치스러움이 너무도 완벽하게 어울리는 이 제국의 황제, 크리스티앙이었다.

    정말 너였어? 네가… 크리스티앙이었다고?

    눈도 깜빡하지 않고 강렬한 시선으로 그녀를 바라보던 크리스티앙의 입술이 천천히 위를 향했다. 부드럽게 웃고 있었지만 이것이 그의 진짜 웃음이 아님은 직감할 수 있었다. 잔뜩 풀어진 모습으로 잘 빠진 눈썹을 찌푸린 채, 커다랗게 소리를 내며 웃던 그의 표정과는 억만금의 괴리가 있는 얼굴을 한 채로, 황제가 입을 열었다.

    “이제야 만나게 되었군, 나의 유일한 가족을.”

    혜미는 그녀에게로 가까이 다가오는 크리스티앙을 보며 마른침을 삼켰다. 머릿속이 너무나 복잡해서 준비했던 말조차 제대로 할 수가 없다.

    “…누님과 마침내 이렇게 마주하다니.”

    미소를 띠며 중얼거리는 크리스티앙의 눈에 샛노란 불꽃이 일렁이는 것은 착각이 아닐 테다. 혜미는 크리스티앙 역시, 지금 이 상황을 예상치 못했다는 것을 어렴풋이 짐작했다.

    “지금 이 기분은 뭐라 말로 표현이 안 되는군.”

    그가 그녀와 딱 한 발자국 떨어진 곳에서 멈춰 선 채 속삭이듯 물었다.

    “우리는 이런 식으로 만나서는 안 되는 거였어. 그렇지?”

    여러 가지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질문. 그녀야말로 하고 싶은 말이었다. 어제 오후의 일이 마치 오래전 일인 듯 아득했다. 이제야 왜, 마법사의 보석이 그녀를 그에게로 인도했는지 알 것 같은 기분이었다.

    “훨씬 더 좋은 방법이 많이 있었을 텐데. 이렇게 먼길을 돌아오다니.”

    의미심장한 그의 목소리를 듣자 주변의 공기가 1도쯤 낮아진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베네딕트는 아마도 마법사의 보석을 통해 그녀에게 기회를 주었던 게 틀림없었다. 극도로 무방비한 상태였던 황제가 몸에 걸치고 있던 거라고는 무기는커녕, 옷의 기능을 전혀 하지 못하던 얇은 실크 가운 하나뿐이었다.

    베네딕트가 그녀를 크리스티앙과 만나게 한 이유는 바로, 그를 죽이게 하기 위해서였다는 사실을 깨닫자 갑자기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그의 정체를 알아채지 못한 스스로에 대한 자괴감보다 더욱 근본적인 질문이 그녀의 머릿속을 파고들었다.

    그가 황제라는 사실을 알았다면, 나는… 결국 그를, 죽였을까?

    죽일 수 있었을까?

    “…잊게 해 줘. 전부다.”

    혜미는 현기증이 일어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떴다. 약에 취한 상태로 헐떡이며 자신에게 혀를 섞던 크리스티앙의 표정이 생각나 버렸기 때문이다.

    슬픈 미소를 가장한 채 그녀를 바라보는 크리스티앙 역시도 같은 생각을 하고 있는 게 틀림없었다. 만약 그가 자신의 정체를 알았다면 그렇게 흐트러진 모습을 보였을 리가 없었다. 그토록 증오해 몇 번이나 자객을 보냈던 이복누이와 그딴 식으로 만날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을 것이다. 반쪽이지만 피를 나눈 남매끼리 입을 맞춘 건 더더욱 끔찍한 일이었다.

    이 사태를 도대체 어떻게 해결해야 할까. 아니, 해결하는 것이 가능하기나 할까.

    “본 황제에게 친애의 키스를 허락해 주겠어?”

    그녀와 정확히 같은 사고의 흐름을 하는 것을 증명하듯, 크리스티앙이 그녀를 향해 의미심장한 목소리로 물었다. 혜미의 눈동자가 당황해 흔들렸지만 그는 대답을 기다리지 않았다.

    “마음이 급한 아우의 결례를 용서하길.”

    그가 그녀의 손을 부드럽게, 그러나 단단히 잡았다. 크리스티앙이 착용한 하얀 벨벳 장갑이 축축하게 젖어 들었다. 그녀의 손에서 난 진땀 때문인 것 같았다.

    황제가 그녀를 보며 우아한 동작으로 고개를 숙였다. 작은 소음과 함께 손등에 입술이 닿았다가 떨어졌다.

    촉.

    그저 격식을 차리는 인사일 뿐이었지만 찰나의 입맞춤은 강렬했다. 피부에 닿아 오는 크리스티앙의 숨결이 뜨거웠던 탓이었다. 이 체온만은 어제와 똑같았는데, 오히려 그 점이 혜미를 더욱 당황스럽게 만들었다. 그녀가 손을 빼려는 순간, 크리스티앙이 그녀의 손을 더욱 힘주어 잡았다.

    “……?”

    잠시 떨어졌던 붉은 입술이 그녀의 손등이 부드럽게 문질러지고, 뒤이어 바늘로 살짝 찌르는 것 같은 따끔한 고통이 느껴지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아…!”

    혜미는 저도 몰래 작은 신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연한 피부에 붉은 흔적이 또렷했다. 이를 박아 넣지도 않았는데 혀와 입술의 압력만을 사용하여 낸 생생한 입술 자국. 시선을 들어 혜미에게 눈을 맞추며 입술이 가려진 크리스티앙이 그림처럼 눈으로만 웃었다.

    한 발짝 떨어져 그 상황을 지켜보는 발터가 주먹을 꽉 쥐었다. 그의 허벅지가 딱딱하게 경직하는 것이 눈으로도 보일 정도였다. 발터의 동요를 본 혜미는 그제야 정신을 차렸다. 발터는 그녀와 크리스티앙의 말도 안 되는 첫 만남에 대하여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다. 그에게 이 상황이 위협으로 간주될 여지는 충분했다.

    아니. 이건 확실히 위협이다.

    “그만.”

    그녀가 인상을 찌푸린 채 손을 휙, 빼내자 크리스티앙이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입맛을 다시듯 아랫입술을 빠는 동작마저도 계산된 듯 여유롭다.

    “이제라도 누님을 만나게 되어 정말 다행이야.”

    “…황제 폐하를 처음 뵙습니다.”

    머릿속에서 수십 번 연습한 인사를 내뱉는 그녀의 목소리가 잦아드는 것은 당연했다. 크리스티앙의 얼굴에 찰나의 조소가 스쳐 갔다.

    처음이라니. 말이 안 되잖아? 마치 눈으로 비웃는 것 같은 느낌.

    “왜 내게 진작 찾아오지 않았지? 누님은 어째서 이제야 내 눈앞에 나타난 거야.”

    그녀에게 묻는 크리스티앙의 말투는 태연하기 짝이 없었다. 희미한 비웃음은 이내 사라졌고, 이제는 정말로 궁금해서 답을 알고 싶다는 얼굴이었다.

    “그건….”

    너도 알고, 나도 아는 답을 입 밖으로 낼 수가 없는 그녀를 향해 크리스티앙이 한숨을 쉬며 말을 이었다.

    “내게는 가족이 단 한 사람도 남아 있지 않아. 열 살에 선황께서 승하하시고 태후마저도 내 곁을 떠나신 열세 살 이후 이 넓은 황금성에 클라웨는 나 혼자뿐이었어. 피를 나눈 내 누이가 살아 있다는 사실을 진작 알았더라면, 나는 홀로 외로움과 사투할 필요가 없었을 텐데. 난 누님을 이제야 내게 보내 준 신을 원망하고 싶은 심정이야.”

    그의 입술에서 마치 미리 준비한 것 같은 말이 술술 흘러나왔다. 처음부터 끝까지 진심이라고는 한 톨도 느껴지지 않는 말을 들으며 혜미는 주먹을 꽉 쥐었다.

    “지금이라도 누님을 만나게 해 준 신께 감사를 드려야 마땅한데도.”

    그가 빙긋 웃었다. 크리스티앙의 원래 계획은 이것이었을 것이다. 이복누이에 대한 적대감 따위는 가져 본 적도 없다는 듯 여유 있고 친근하게 자신을 맞이하는 것이 모두의 앞에서 그가 준비한 무대였다. 어제 그와 미리 맞닥뜨리지 않았더라면, 그에 대한 긴장을 늦추지 않은 그녀 역시도 고개를 갸웃할 만큼이나 완벽한 태도였다.

    혜미는 이 젊은 황제가 이런 식의 상황을 몇 번이나 겪으면 이렇게 익숙하게 스스로를 연기할 수 있는지가 궁금했다.

    “리비에르 경. 아니, 이제는 리비에르 공이라고 해야 하나? 그대의 노고에 깊이 감동했어.”

    “송구합니다.”

    리비에르가 한쪽 무릎을 꿇고 황제에 대한 예를 취했다.

    “자네를 갤러리에 부른 것도 그 때문이야. 저기, 빈자리에 이번 자일룬 전투가 걸릴 예정이거든. 현재 최고의 화가가 이미 작업을 시작했지. 야만족의 왕을 무릎 꿇려 그의 목을 자르는 공의 용맹한 모습은 황금성 한가운데 걸려 오래도록 역사 속에 회자될 것이네.”

    “폐하, 하지만….”

    리가스의 목을 자른 것은 그녀가 아니었다. 리비에르가 뭐라 말을 잇기도 전에 크리스티앙이 작게 혀를 차며 그녀의 다리에 눈길을 주었다.

    “아. 리가스와 맞서다 생긴 부상에 대해선 이미 들었어. 그건 염려하지 말게. 하이데거 대공이 오랜 시간 동안 수련한 결과 마력을 다루는 방법을 터득한 건 혹시 알고 있나?”

    “…알고 있습니다.”

    리비에르가 어딘가 딱딱해진 목소리로 답을 했다. 눈앞에서 문짝을 불태워 박살 내던 대공의 기억은 잊을 수가 없었다.

    “황명을 내려 그대를 깨끗이 치료케 할 테니 안심해.”

    “저절로 두면 자연히 낫는 상처입니다. 저는 괜찮습니다. 폐하.”

    묘하게 굳어 있는 리비에르의 말투 따위는 거슬리지도 않는다는 듯 크리스티앙이 빙긋 웃으며 여유 있게 되물었다.

    “리비에르 공작. 혹시, 내가 그대에게 서운하게 대하기라도 한 건가?”

    “…천만의 말씀입니다.”

    “그게 아니라면 사양하지 마. 황명이 어떤 의미인지 자네는 잘 알지 않나.”

    리비에르는 더 이상 부정하지 못하고 그저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었다. 지금 이 상황에서 그의 호의를 거절한다면 황명을 거부하는 모양새가 되는 것이다.

    “예, 폐하.”

    “대공은 리비에르 경과 시간을 맞추어 보도록. 알겠나, 에리히?”

    “그리하겠습니다, 폐하.”

    이것이 그의 본 모습이리라. 친절을 가장해, 이 관계의 주도권이 자신에게 있다는 사실을 확실히 주입시킨다. 술과 약에 절어 한심하게 보였던 어제의 모습은 오간 데 없었다. 비집고 나올 작은 틈 하나 용납하지 않는 크리스티앙을 보며 혜미는 도대체 어느 쪽이 그의 참모습인지 궁금해질 지경이었다.

    “성안에서 지내기에 불편한 건 없는지, 리비에르 경.”

    “없습니다. 엘데이라성 앞에 바로 연무장이 있어 더욱 좋습니다. 황실 근위대의 절도 있는 훈련을 보니 자극이 되기도 합니다.”

    “엘데이라?”

    되묻는 크리스티앙의 표정이 기묘했다. 그의 뒤에 서 있던 하이데거 대공의 어깨가 움찔했다. 밀실에 들어갔던 크리스티앙은 이곳에 오기 직전에 방을 나왔다. 제복을 입고 황녀를 대면할 준비를 하는 그의 얼굴은 얼음장 같이 차가워 말을 붙일 수조차 없었다.

    극도로 예민해진 크리스티앙의 상태 때문에 관리자의 소홀로 숙소가 뒤바뀌었다는 사실을 차마 알릴 시간이 없었던 것이다.

    “폐하, 드릴 말씀이….”

    “나중에.”

    “아아. 이제야 모든 게 이해가 좀 가는군.”

    혼잣말처럼 중얼거린 크리스티앙이 피식 웃으며 말을 이었다.

    “확실히 노을을 배경으로 서쪽 수비대가 열을 맞춰 훈련하는 모습은 장관이지. 천하의 리비에르 장군이 두 눈을 부릅뜨고 지켜본다고 생각하면 황궁 근위대의 군기가 바짝 들어가겠는데?”

    “당치 않은 말씀이십니다.”

    장난스러운 말투와는 달리 크리스티앙의 눈빛은 묘하게 차가웠다. 하지만 혜미는 그것에 신경을 쓸 여유가 없었다.

    “자네가 세르노티의 가주로군.”

    리비에르를 지나친 황제가 발터에게로 화제를 넘겼기 때문이다. 그 자리에 석상처럼 우뚝 선 채 미동이 없는 발터를 향해 대공이 날카로운 목소리를 냈다.

    “세르노티의 가주는 지금 당장 황제 폐하께 예를 취하라.”

    “배움과 지식이 얕아 궁정 예절을 알지 못합니다. 용서하시길.”

    낮게 깔린 목소리가 발터의 성대를 억지로 비집었다. 혜미는 그의 목소리만 듣고도 발터가 지금 자신과 세 발짝 거리에 있는 크리스티앙의 목을 비틀고 싶은 충동을 간신히 억누르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폐하, 송구합니다. 이자를 무릎 꿇리는 것을 허락해 주십시오.”

    “하하, 괜찮아. 그리 딱딱하게 굴 것 없지 않은가. 가끔은 이리 신선한 태도를 가진 이를 만나는 것도 즐겁거든.”

    “하지만….”

    “발터라고 했던가?”

    대공을 부드럽게 저지한 크리스티앙이 짧게 웃으며 입을 뗐다.

    “자네의 아비가 오래전 나의 누이의 생명을 구했다 들었네. 아들인 그대에게 대신 감사의 인사를 전하지. 상을 내리고 싶은데, 원하는 게 있나?”

    “그는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지나친 겸손은 오만으로 간주되기 십상이라네. 원하는 걸 말해 봐. 뭐든 들어 줄 테니.”

    “발트리에게 상을 내리시는 거라면 저는 진심으로 그가 자격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사양하겠습니다.”

    “…왜지?”

    무장을 한 채 죽 늘어선 황궁 근위대를 거느리고서, 크리스티앙이 흥미롭다는 표정으로 그를 보았다. 발터가 낮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는 죽을 때까지 황녀 폐하가 머무르던 별궁에서 일어난 화재 사건의 진상을 제대로 규명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호선을 그리고 있던 황제의 입술이 그 상태로 움직이지 않고 정지했다. 그가 발터의 앞으로 천천히 다가와 섰다. 타고나길 무사의 몸집인 발터와 정면으로 대치하자 늘씬한 황제와의 체격 차이가 더욱 현저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젊은 황제는 그의 기에 조금도 영향을 받지 않는 오만한 표정이었다.

    “궁정 예절을 익힐 시간이 없어 자네의 말투가 그따위인 건 너그럽게 용서하겠네.”

    부드럽게 웃는 얼굴이었으나 내뱉는 말투는 살얼음이 끼인 듯 차갑고 날카로웠다. 이제껏 제 누이에게 향하던 부드러운 말투는 집어치운 목소리였다.

    “그런데 세르노티는 군주의 앞에 무릎 꿇어 시선을 낮추어야 한다는 기본적인 사실조차 모를 정도로 천박한 가문이던가?”

    순식간에 주변에 정적이 흘렀다. 크리스티앙이 고개를 삐딱하게 기울이며 더욱 또렷하게 목소리를 높였다.

    “아니면 자네의 아비는 황족의 생명을 구했다는 자부심에 심하게 도취된 나머지, 황실의 개에 불과한 그림자 가문이 황족을 대할 때의 태도를 그따위로 가르친 것인가.”

    혜미의 입술이 소리 없이 벌어졌다. 그녀는 눈을 부릅뜬 채 크리스티앙의 뒤통수를 노려보았다.

    “자네의 아비에게 묻고 싶어도 이미 죽었으니 소용이 없잖아.”

    최악이었다. 시공간을 초월해서 부모를 들먹이며 욕하는 것이 가장 비열하다는 것은 기정사실이다. 게다가 크리스티앙은 발터가 가주로 있는 가문까지 싸잡아 모욕을 했다. 그녀조차 손이 떨릴 지경인데, 당사자인 발터가 느끼는 굴욕감이 어느 정도인지 상상할 수가 없었다.

    “대답하라. 어느 쪽이냐고 묻지 않았나.”

    발터는 황제의 멱살을 틀어쥐고 바닥에 내팽개치는 대신, 고개를 숙인 채 어금니를 꽉 물었다. 바닥만 뚫어져라 응시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크리스티앙과 시선이 마주쳤을 때 그를 죽이고 싶은 욕구를 참아 낼 수 없을 것 같아서였다.

    몇 번이나 암살을 시도해 그녀를 죽이려 했던 크리스티앙이 팔 하나 뻗을 거리에 있는데,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스스로가 참을 수 없이 괴로웠다. 혜미와 한 약속 따위는 없던 걸로 하고 모든 것을 끝장내고 싶은 충동에 숨이 뜨거웠다.

    “둘 중 어느 쪽도 아닙니다.”

    발터는 차가운 바닥에 천천히 무릎을 꿇었다. 반들거리는 마룻바닥이 이글거리는 그의 얼굴 표정까지는 비춰 주지 않는 것이 다행이었다. 소리 없이 숨을 내쉬는 그의 흉곽이 느리게 부피를 늘렸다 줄이기를 반복했다.

    “고개를 들게.”

    시선을 바닥에 고정하고 있던 발터가 얼굴을 천천히 들었다. 타오르는 갈색 눈동자가 크리스티앙에게 향하는 순간, 황제의 눈썹이 티 나지 않게 조금 휘었다. 크리스티앙의 뒤에 서 있던 하이데거에게까지 느껴지는 엄청난 살기였다. 크리스티앙이 붉은 입술을 비틀며 그에게 한 발짝 가까이 다가섰다.

    “나의 누이가 기르는 사냥개의 품종은 꽤나 엉망인 모양이군. 난 개들의 눈을 보면 알거든. 이게 조교를 해서 교정이 가능한 종자인지, 아닌지 말이야.”

    모욕적인 언사에도 발터는 몸을 움찔하지도, 동요하지도 않았다.

    “그대는 처음부터 그런 수고가 시간 낭비인 쪽으로 보이는데. 내 말이 틀린가?”

    그는 여전히 어둑한 눈으로 크리스티앙을 직시하며 낮게 내뱉었다.

    “주군에 대한 제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으신다면 제 충절을 다른 방법으로 증명해 보일 수도 있습니다.”

    커다란 공간에 낮고 묵직한 목소리가 울렸다.

    “어떻게?”

    “칼을 주시면 보여드리겠습니다.”

    망설이지 않고 대답하는 발터를 즉시 반박한 것은 눈을 사납게 부라린 하이데거였다.

    “황제 폐하의 앞에서 황명 없이 무기를 지니는 것이 반역이란 사실을 모르고 지껄이는 소리인가? 폐하. 송구하지만 저자를 용서하시면 안 됩니다.”

    “괜찮아. 무식한 건 확실히 죄가 되지만 난 솔직한 사람을 좋아하니까.”

    크리스티앙은 손을 들어 대공을 저지한 후, 발터를 향해 되물었다.

    “왜. 내가 자네에게 칼을 주면 심장을 스스로 찔러 자결이라도 해 보일 셈인가?”

    “주군께서 원하신다면 못할 것이 없습니다.”

    “만약 내가 자네의 심장을 찌르겠다면 어쩔 셈인가.”

    혜미가 인상을 구기며 눈을 크게 떴다.

    “그리하셔도 상관없습니다.”

    발터를 쳐다보고 있던 크리스티앙의 붉은 입술에서 조소가 일었다.

    “이런. 짐의 누이께서 기르는 사나운 사냥개는 지금 진심이로군. 왠지 이번에는 진짜 재밌는 광경을 볼 수 있을 것 같아.”

    흰 벨벳 장갑이 감싼 양손이 공중에서 작게 부딪쳤다.

    “나를 진심으로 감동시킨다면 대공에게 황명을 내려 그대의 심장을 되돌려 놓게 할 테니 걱정할 필요는 없네. 알겠지?”

    “뜻대로 하십시오.”

    크리스티앙이 싸늘한 목소리로 빠르게 중얼거렸다.

    “칼 가져와, 에리히.”

    혜미는 더 이상 지켜볼 수가 없었다. 발터의 목소리에서 무언의 결심이 읽힌 탓이었다. 크리스티앙은 체격으로 보나 기술로 보나 애초부터 발터의 상대가 되지 않는다. 발터는 그의 손에 칼 아닌 무언가가 잡혀 있더라도 수초 내에 그것을 빼앗을 수 있는 이였으니까. 그렇지만….

    “황제 폐하…!”

    머리보다 몸이 더 먼저 움직였다. 그들 사이를 가로막으며 혜미가 목소리를 높였다. 옷깃 사이로 드러난 목덜미가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왜 그러지, 누님?”

    심장이 거칠게 쿵쿵거리며 뛰었다. 일촉즉발의 상황에서 이 자리가 난투로 변해 피로 물들 수도 있다는 불안한 예감이 강하게 뇌리를 스쳤다. 크리스티앙의 뒤에 정렬하고 늘어선 수십 명의 근위병은 허수아비가 아니다. 이를 뿌득 갈고 있는 하이데거의 마력 역시도 그녀의 예상 범위보다 훨씬 강력할 수 있었다.

    “발터는 제게 속한 기사이며 세르노티에서 함께 자란 형제 같은 사람입니다.”

    혜미는 마른침을 삼키며 최대한 자연스럽게 말을 이어나갔다. 혹여나 황제에게 자신의 본심을 들킬까 봐 심장이 세차게 뛰며 입술이 바짝 말랐다. 지금 이 상황에서 크리스티앙이 가장 죽이고 싶은 상대는 그녀, 단 한 사람일 것이다. 거기에 수를 늘릴 필요는 없었다.

    발터를 위험에 처하게 만드는 것은 지금 현재 그녀가 가장 피하고 싶은 일이었다. 발터의 앞을 가로막은 혜미는 발터의 꽉 쥔 주먹이 허벅지 가까이에서 소리 없이 떨리고 있는 것을 보지 못했다.

    “그래서 누님이 지금 내게 하고 싶은 말이 무언지.”

    얼굴에는 미소를 띠고 있지만 크리스티앙의 눈동자는 그녀의 마음속을 꿰뚫을 듯 날카로웠다. 혜미는 그런 그를 향해 과하지도, 덜하지도 않은 태도를 취하려 안간힘을 썼다.

    “저와 그는 철이 들기 이전부터 자일룬으로 떠나기 전까지 줄곧 산속에서 자랐기 때문에, 저잣거리에서 뒹굴며 일생을 산 평민들과 별반 다를 게 없다는 뜻입니다. 황족을 대하는 올바른 태도도, 귀족 사회의 예의 바른 말투도 알지 못하니 무례가 있다면 부디 용서해 주십시오.”

    크리스티앙이 흥미롭다는 듯 그녀를 바라보았다. 팔짱을 낀 채 기다란 손가락으로 자신의 팔등을 천천히 두드렸다.

    “황녀의 위치에서 제가 대신 폐하께 용서를 구합니다.”

    고개를 깊이 숙인 그녀를 묵묵히 바라보고 있던 그가 이내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아아. 형제처럼 자랐다는 말이 그냥 하는 소린 줄 알았는데. 그는 누님과 정말 각별한 정을 나눈 친우인가 보군. 더 이상 장난을 쳤다간 누님이 울어 버릴 것 같으니 이쯤에서 그만할까?”

    웃으며 말을 건네는 크리스티앙의 태도는 마치 진짜 오누이를 대하는 것처럼 격의가 없었다. 이제까지의 언동이 정말로 장난이었기라도 한 듯 경쾌한 말투였다. 혜미는 크리스티앙의 두꺼운 낯짝에 감사하며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이해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천만에.”

    크리스티앙이 그녀를 보며 빙긋 웃었다. 그의 곁에서 서기관이 지금의 상황을 부지런히 기록하고 있었다.

    “이 세상에 하나뿐인 나의 피붙이를 위해 내가 못할 게 있겠어? 에리히. 칼을 거두게.”

    “예, 폐하.”

    대공이 발터를 향해 경멸하는 눈동자를 숨기지도 않은 채 검을 거두었다.

    “세르노티 기사들에게 필요한 게 있으면 뭐든 제공하도록. 내 누이를 대하는 것처럼 공손하게 대하도록 시종과 대신들에게 이르는 것도 잊지 말고.”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자, 그럼 오늘은 이쯤하고 헤어질까?”

    크리스티앙의 대외적인 태도는 완벽했다. 그는 힘든 전쟁에서 승리한 리비에르 장군의 공을 치하했고, 무례를 저지른 초면의 기사를 용서하였으며, 껄끄러운 관계일 수도 있는 이복누이에게 아낌없는 지원을 약속했다.

    “아쉽지만 하필 겨울제가 코앞이라 밀린 일정을 소화해야 하거든. 오늘 누님과 못다 한 이야기는 축제를 즐기며 천천히 하는 것도 나쁘지 않겠어. 누님의 등장으로 이번 황금성의 겨울 축제는 그 어느 때보다 뜻깊은 시간이 될 것 같으니 말이야.”

    혜미는 신중한 태도로 황제의 말을 기록하는 서기관 그리고 고개를 까딱한 후 뒤를 도는 크리스티앙을 보며 저도 모르게 입을 열었다.

    “폐하.”

    “음?”

    크리스티앙이 비스듬히 고개를 돌렸다. 햇살이 쏟아져 그의 얼굴 반쪽을 환하게, 또다른 반쪽에 그림자를 만들었다.

    “내게 할 말이 남았어?”

    “부탁이 있습니다.”

    혜미는 그의 기다란 황금색 속눈썹을 바라보며 짧게 호흡을 들이쉬었다. 말해야 한다.

    “이야기해 봐. 황제의 앞에서 무기를 소지하겠다는 것만 아니면 뭐든 들어줄 테니.”

    웃음기가 담긴 크리스티앙의 말속에 가시를 느끼며 혜미가 마른침을 삼켰다.

    “베네딕트를 만나고 싶습니다.”

    천천히 눈을 깜빡이던 황제가 뒤를 돌았다. 혜미는 베네딕트를 공식적으로 마주할 수 있는 시간이 지금뿐이라는 사실을 간파했다. 이것은 직감이었다. 지금이 아니면 그와 직접 대화할 수 있는 기회가 없을지도 모른다.

    “그는 황명을 어긴 죄로 교황의 자리에서 축출되었어. 누님이 그자를 만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하는데.”

    “그가 황명을 어기고 궁을 빠져나온 건 결과적으로 저 때문이었으니까요.”

    “흠….”

    잠시 생각하는 척을 하던 크리스티앙이 부드럽게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후회하지 않겠어?”

    무슨 뜻이지? 잘 익은 올리브 같은 그의 눈동자가 마치 즐거움에 반짝이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불안한 예감이 몸속을 단박에 내달렸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베네딕트를… 만나게 해 주시길 부탁드립니다.”

    “그래. 알았어. 누님이 정 원한다면야.”

    의외로 순순히 답하는 것도 이상하긴 마찬가지다. 혜미는 표정을 감추며 애써 고개 숙여 예를 표했다.

    “감사합니다.”

    “데려와.”

    크리스티앙이 짧게 명령하자 갤러리의 옆문이 활짝 열렸다. 도대체 이 공간에 숨겨진 문이 몇 개인지 놀랄 틈도 없었다.

    “폐하 앞에서 정신 똑바로 차리지 못해?”

    황궁 근위대가 질질 끌고 오듯 데리고 나타난 이를 보며 혜미가 숨을 멈추었다. 비명이 절로 튀어나올 것 같아 그녀는 한 손으로 제 입을 틀어막아야 했다.

    “흣…!”

    저게… 베네딕트라고…?

    보라색 동공이 충격에 얼어붙었다. 사람이라고 보기조차 힘든 그는 스스로 걸을 수 없는 지경이었다. 근위대 두 명이 손을 놓자 바닥에 그의 몸이 철퍽, 널브러지듯 쓰러졌다. 온몸은 피투성이에다 시커먼 거적을 하나 둘러 끌고 온 그는 시체처럼 보였다.

    혜미는 입을 막은 채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이제 봤더니 시커먼 거적은 그가 늘 입고 다니던 새하얀 의복이었다. 피를 하도 쏟아 흰 부분은 찾아볼 수가 없는 옷. 어떤 일을 겪었는지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얼굴을 가리고 있는 기다란 은발은 반짝임을 완전히 잃었다. 검은 피로 물들어 여기저기 뭉쳐 있는 머리칼을 보며 그녀가 고개를 좌우로 거칠게 흔들었다.

    아냐. 저 사람이 베네딕트일 리가 없다.

    “…이든…!”

    발터가 그녀를 저지할 틈도 없었다. 혜미는 베네딕트에게로 달려가 바닥에 축 늘어진 그의 고개를 양손으로 붙들었다. 확인해야 했다. 크리스티앙이 또 그녀에게 잔인한 장난을 치는 것은 아닌지 두 눈으로….

    “…베네딕트…. 흡…!”

    혜미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마치 피눈물을 흘린 것처럼 뺨이 젖어 든 그의 얼굴. 그는 베네딕트가 분명했다. 마법사의 피로 각인된 육체에서 느껴지는 강한 이끌림을 피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하지만 그의 얼굴에는 늘 차분히 그녀를 바라보던 아름다운 푸른 눈동자가 없었다. 마치 눈꺼풀째 칼로 도려낸 것 같은 처참한 모습이었다.

    “이게… 대체… 어, 어떻게…!”

    “아… 으….”

    입술이 길게 찢긴 그에게서 희미한 신음 같은 뭉개진 발음이 흘러나왔다. 그의 혀 또한 잘렸다는 사실을 깨달은 순간, 혜미는 심장이 죄는 고통에 숨을 제대로 쉴 수가 없었다.

    “흡….”

    ‘드디어 돌아오셨군요. 폐하가 계셔야 할 곳으로.’

    그녀의 머릿속에 베네딕트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베네딕트….”

    ‘이런 꼴로 폐하를 뵙고 싶진 않았는데.’

    베네딕트를 바라보는 보랏빛 눈동자에 뜨끈한 눈물이 차올랐다. 어떻게… 어떻게 사람을 이 꼴로 만들 수가 있는 거지?

    ‘울면 안 됩니다, 에데르트 폐하.’

    “하아….”

    ‘약한 모습은 크리스티앙을 즐겁게 할 뿐입니다.’

    혜미는 그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 듯, 고개를 푹 숙인 채 황제를 향해 물었다.

    “폐하. 사람한테 이게 도대체 무슨 짓입니까…?”

    “그는 죄인이라 법대로 벌을 받았을 뿐이야.”

    크리스티앙의 무심한 대답에 눈물에 젖은 혜미의 눈동자가 시퍼렇게 뜨였다.

    “교황은 황명 없이 함부로 황금성을 떠나서는 안 되거든, 누님. 그게 아무리 황족을 위한 일이었다고 해도 법을 어긴 사실이 변하는 게 아니니까.”

    “…….”

    “게다가 그는 최고 귀족이 모두 모인 공식적인 자리에서 황명을 어긴 사실을 당당히 발표했지. 내가 그를 용서하였다면 지금껏 황실이 지켜 왔던 법도와 질서가 모조리 무너지는 것은 당연하지 않을까? 황제의 위치는 그런 거야, 누님. 안타깝게도.”

    안타깝다는 말과는 달리 그의 목소리에는 즐거움이 가득했다.

    베네딕트가 원로원 회의에서 자신의 존재를 처음 꺼낸 이유는 황제의 숨통을 틀어쥐기 위함이었다는 사실은 혜미 역시 알고 있었다. 아무리 폭군이라 해도 제 이복누이를 죽이는 건 여론에 극악이었다. 제국의 국민들은 피로 얼룩진 클라웨의 역사에 반감을 가지고 있었으니까.

    그녀의 존재를 세상에 알리는 것은 크리스티앙의 손발을 묶어 놓을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었을 것이다.

    “아무리 그래도 이건 너무 심하지 않습니까…?”

    조여들었던 심장이 강력한 수축을 반복하며 분노를 실은 피를 온몸으로 뿜어냈다.

    “음. 아마 그는 이런 결과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을 거라 생각하는데.”

    크리스티앙이 고개를 갸웃하며 희미하게 웃었다.

    “아닌가?”

    승리의 쾌감이 엿보이는 미소였다.

    “후후….”

    두 눈이 파인 베네딕트가 잘린 혀로 낮게 웃었다. 걸레짝 같은 모습으로 바닥에 주저앉아 어깨를 들썩인 채 웃는 그를 보며 대마법사의 모습을 떠올릴 이는 아무도 없었다. 크리스티앙이 뾰족한 턱을 오만하게 치켜들며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그 역시 누님을 다시 만나게 되어 기쁜 모양인데? 누이가 혹여 마음이 쓰일까 싶어 옆방에서 대기하라고 하면서도 달갑지가 않았는데…. 반가워하는 걸 보니 내가 옳은 일을 한 것 같아 마음이 놓이는군.”

    피투성이인 베네딕트를 붙들고 있는 혜미가 이를 뿌득 갈았다. 입술 새로 가느다란 신음 소리가 흘렀다. 베네딕트는 그녀의 분노를 정확히 감지했다.

    황녀는 태생이 악한 크리스티앙과는 상극이었다. 크리스티앙이 가진 능력 중 가장 뛰어난 것, 자신의 권력을 이용해 모욕을 퍼붓는 상황을 감당할 수 없는 것이 분명했다. 그녀가 느끼는 폭발적인 감정이 고스란히 베네딕트에게로 흘러들었다. 쿵쿵 거칠게 요동치는 심장 소리가 그대로 들려온다.

    그는 대마법사였다. 눈이 없다고 해서 볼 수 없는 게 아니었다. 오히려 시야가 제한되니 다른 감각으로 모든 것을 더욱 선명하게 느낄 수 있었다. 울음이 터져 나가려는 것을 간신히 참고 있는 그녀의 분노가 전달되자 육체를 비집던 고통마저 흐릿하게 약해진다. 황녀의 이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 그간의 고통에 값을 치른 것 같은 느낌이었다.

    ‘저는 괜찮습니다. 그의 말은 틀린 게 없습니다. 저는 폐하를 이곳에서 드디어 만나게 되었다는 사실이 순수하게 기쁩니다.’

    베네딕트가 미소를 지었지만 혜미에게는 그저 얼굴을 고통스레 찡그린 것처럼 보일 뿐이었다.

    “…흐으….”

    ‘이곳까지 오느라 고생 많으셨습니다. 잘하셨습니다. 상을 드리고 싶을 정도로요.’

    ‘왜 자신을 치유하지 않았어요? 당신 마법사잖아. 왜 마력을 쓰지 않았어요?’

    혜미가 그의 말을 무시하며 울먹이는 눈으로 되물었다. 크리스티앙과의 접견을 위해 치워 두었을 단검 손잡이에서 환하게 발열하고 있는 보석의 기운이 점점 커지고 있었다.

    황녀에게 준 보석은 그의 피로 만든 결정. 베네딕트의 마력 형성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것은 고통, 괴로움, 질투와 분노 같은 부정적인 감정이었다. 그녀가 가지고 있는 보석 역시도 그러함이 분명했다.

    ‘그럴 필요가 없었으니까요.’

    ‘무슨 뜻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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