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3화 (43/72)

그가 물담배를 빨아들이고 길게 내뱉은 후, 여상한 말투로 물었다.

“호아킴은 언제쯤 도착할 예정이지?”

“예정대로라면 약 보름 후입니다. 북쪽은 눈이 빨리 내리는 지역이라 오는 길에 폭설로 지체만 되지 않는다면 겨울제 전에 도착할 수 있으리라 봅니다.”

“좋아.”

크리스티앙이 의자에 앉아 둥그런 테이블의 고리를 돌렸다. 테이블 위의 뚜껑이 열리며 안에서 지도가 나타났다. 선황들은 비밀 금고에 여러 가지를 숨겨 놓곤 했지만 크리스티앙이 가지고 있는 것은 클라웨의 지도 딱 하나뿐이었다. 이 넓은 세상이 고작 그의 손안이라는 생각을 하면 기분이 조금 나아진다.

“폐하.”

“음?”

호아킴이 어디쯤 오고 있을지를 지도 위로 가늠하며 크리스티앙이 건성으로 대답을 했다.

“제가 처리할 수 있습니다. 명령만 내려 주십시오.”

“무슨 뜻이지?”

“굳이 호아킴 장군이 오기를 기다리실 필요 없습니다. 제가 그녀를 처리할 수 있습니다. 폐하께서 염려하지 않으셔도 된다는 뜻입니다.”

크리스티앙의 계획은 호아킴이 이곳에 도착한 후, 황녀에게 반역의 죄를 뒤집어씌우고 처형하는 것이었다. 원로원의 입을 닥치게 할 만한 구실을 만드는 것이다. 크리스티앙이 물담배를 깊게 빨아들이자 잘록한 병 안에서 연기를 머금은 물이 보글보글 들끓었다.

“대공.”

“…예, 폐하.”

“내가 경을 왜 좋아하는지, 잊었나?”

크리스티앙이 의자에 몸을 기댄 채 그를 보며 싱긋 웃었다. 환각을 보게 할 정도로 강력한 연기가 사방을 자욱하게 꽉 채웠다.

“변하지 말아 줘.”

기어오르지 마.

짖지 마.

납작 엎드려 있어.

에리히가 관자놀이를 쿡쿡 쑤시는 두통에 인상을 찌푸렸다. 마력의 부작용은 시시때때로 그의 머릿속을 혼란하게 만들었다. 황제의 환청이 메아리치듯 들리는 것 같은 착각이 일었지만 표시를 낼 수는 없었다. 완벽을 추구하는 크리스티앙은 불량품을 감당할 만큼 인내심이 좋지 않았다.

“신경을 썼더니 좀 피곤하네.”

크리스티앙이 안경을 벗은 후 미간을 누르며 대공을 보았다.

“밀실을 준비시켜 줘. 내일 오전까지 잠을 좀 자야겠어.”

“…폐하.”

에리히가 잠시 망설이다 마침내 입을 열었다.

“왜 그러지?”

“제가 죽인 마법사들 가운데는 치유 마력을 가진 자도 있었습니다.”

“알지. 경에게 그 명단을 최종으로 넘긴 게 난데.”

“저는 오랜 불면으로 고통스러워하시는 폐하께 도움이 되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할 수….”

“에리히.”

크리스티앙이 그의 말을 잘랐다.

“그런 것 따위에 마력을 허비하지는 마.”

“폐하, 하지만….”

“내가 베네딕트에게 끝까지 손을 내밀지 않았던 이유가 단지, 그를 경멸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해?”

황제가 그의 어깨에 손을 짚은 채 눈을 가늘게 떴다.

“난 마력 따위가 내 몸에 들어오는 걸 받아들일 수가 없네.”

“…마법사들이 더럽다고 생각하시기 때문입니까?”

“아니.”

소름 끼치게 굴지 마라, 하이데거.

황제의 환청이 머릿속을 쿡쿡 쑤시며 다시 들려오는 느낌에 에리히가 주먹을 꽉 쥐었다 폈다.

오랜 불면으로 눈 밑이 어두워진 크리스티앙이 대공을 보며 조금 웃었다.

“중독이 될까 봐, 무언가에 의지하게 될까 봐 겁이 나기 때문이야.”

아주 가끔씩 보이는 황제의 깨질 듯 약한 모습. 그의 얼굴에서 열 살 황태자가 겹쳐지자 에리히를 괴롭히던 환청이 사라졌다.

“나약한 황제는 존재 의미가 없으니까.”

“…밀실을 준비하겠습니다. 폐하.”

***

성 안의 건물 사이를 이동하는 데만 해도 한참이 걸렸다. 마구간을 관리하는 대신은 오랜 여정에 지친 그들의 말을 커다란 마구간으로 인도한 뒤, 다섯 필의 백마가 끄는 황궁의 마차를 수십 대 준비했다.

리비에르의 지휘관들 중에서도 황금성 안까지 들어와 본 적 있는 이들은 적었다. 그들은 거대한 호수에서 뿜어져 나오는 분수, 각을 지어 관리된 정원과 키가 완전히 똑같다는 착각이 드는 오렌지 나무들을 보며 감탄을 애써 삼켰다.

입이 떡 벌어지는 광경에 놀란 것은 세르노티의 기사들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돈을 퍼부었다는 건 이런 걸 말하는 거군.”

얀이 조그마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이 엄청난 도시를 관리하기 위해 1년에 퍼부어지는 돈과 인력을 생각하면 세르노티에서 절약하며 살았던 것이 어리석게까지 느껴질 지경이었다.

“이런 데서 사는 사람들한테 뭔 걱정이 있을까?”

“…얀. 입 좀 다물어요. 침 떨어지겠어요.”

핀잔을 주는 아일라 역시도 주눅이 든 건 마찬가지였다. 황궁의 마차는 일렬로 훈련을 하고 있는 황군 근위대의 연무장을 지나쳤다. 마차가 일부러 이런 코스를 선택했나 싶을 정도였다. 절도 있게 줄을 지어 늘어선 군대는 어림잡아 보아도 오백 명은 훨씬 넘어 보였다.

“연무장은 동, 서, 남, 북에 하나씩 위치하고 있습니다.”

대신의 안내에 모두들 숨을 죽였다. 이 같은 군대가 황궁에만 셋은 더 존재한다는 뜻이다.

발터와 혜미는 성을 지나치며 곳곳을 머릿속에 집어넣었다. 세르노티에서 세드릭과 지도를 보며 연구했던 것과는 조금씩 달라져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들이 보던 지도는 20년 전 발트리가 사용하던 성의 지도였다. 조금씩 증축과 수리를 거듭해 묘하게 달라져 있었던 것이다.

‘…강?’

강처럼 폭이 넓은 운하였다. 그 끝에 홀로 뚝 떨어져 있는 성 하나가 보였다. 대리석으로 화려하게 장식된 성과는 달리 그 성은 어딘지 모르게 음침한 기운을 풍겼다.

“교황청일 거야.”

발터가 작게 중얼거리는 말에 혜미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

마법사들이 갇혀 있는 곳. 그리고 교황이 평생 거주해야 한다고 여겨지는 곳이다. 베네딕트는 지금 저곳에 있는 걸까…?

“여기서 갈라지겠습니다.”

그들을 실은 마차가 강 아래, 두 갈래로 나눠진 중심에 섰다. 그리고 맨 앞에서 인도하던 대신 하나가 말에서 내려 종이를 펼쳐 들었다.

“…음?”

콧수염을 멋들어지게 관리한 대신이 눈을 세게 깜빡였다.

“아… 하마터면 실수할 뻔했군.”

작게 중얼거린 후, 그는 속으로 깊이 안도했다. 마지막으로 확인을 하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중요한 일을 실수했을 때 벌어질 뒷일은 생각하고 싶지도 않았다.

“리비에르 경과 지휘관들은 이쪽 엘데이라성으로. 그리고 황녀 전하와 세르노티의 지휘관들은 플라틴성으로 가시죠. 성에서의 안내는 담당 시종관이 따로 맡을 것입니다.”

마차가 두 갈래로 갈라졌다. 대신이 다시 집어넣은 종이 안에서 글자들이 소리 없이 위치를 바꾸었다. 물론, 알아차린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멀리, 교황청을 배경으로 검은 새가 후드득 날았다.

혜미와 세르노티의 기사들이 묵게 된 플라틴성은, 성 안에서 길을 잃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넓었다. 시종장의 말에 따르면 황족과 황족의 직계 가족들이 대대로 머무른 성이라고 했다. 그럼 크리스티앙도 지금 같은 장소에 있는 거냐고 묻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지만 간신히 참았다.

“황제 폐하와의 접견이 내일 오전에 준비되어 있습니다. 그때까지 편히 쉬십시오.”

성은 넓었지만 인도된 방의 개수는 기사들의 머릿수에 비해 부족했다. 아일라는 레나와 토비아스는 얀과 같은 방을 썼다. 그리고 혜미는 특별히 마련된 객실로 인도되었다.

발터는 그녀의 방과 문 하나로 이어진 작은 응접실에 묵기를 자처했다. 시종장은 조금 곤란한 표정을 지었지만 혜미가 황녀라는 사실을 깨닫고는 조용히 고개를 숙이고 물러났다. 황족이라는 자신의 지위가 고마운 것은 난생처음이었다.

달칵.

발터는 문이 닫히자마자 커다란 방 안을 샅샅이 훑으며 검사를 했다. 혹시나 숨겨져 있을지 모르는 위험 여부를 확인해 보더니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난 후에야 짤막하게 숨을 내쉬었다.

“저녁 식사 전까지라도 좀 쉬는 게 좋겠다. 그를 내일 만나려면.”

먼길을 달려오느라 제대로 쉬지도 못했고 잠도 설친 그녀의 상태를 염려한 것이다.

“난 저기서 세드릭에게 편지를 쓰고 있을게.”

발터가 응접실을 턱짓했다. 혜미는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 호랑이 굴 속으로 들어온 거나 다름없는 지금, 긴장이 날카롭게 곤두선 것은 사실이었지만 그렇다고 뜬눈으로 밤을 지새울 수는 없는 일이었다.

발터는 문을 아주 살짝 열어 놓은 후 방과 연결된 응접실 테이블에서 편지를 쓰기 시작했다. 그들의 계획에는 세드릭의 도움이 필요했다. 진지한 얼굴로 암호를 쓰는 데 집중하는 그를 보며 혜미가 커다랗고 푹신한 침상에 풀썩 누웠다.

“…….”

화려한 방이었다. 창문이 없었지만 오히려 그쪽이 더 안심이 되었다. 적어도 누군가 창을 넘어 그녀에게 칼을 들이댈 일은 없을 테니까.

하. 도대체 언제까지 이렇게 칼날 위를 걷는 것 같은 긴장을 느끼며 살아야 하는 걸까. 혜미는 고개를 돌리며 눈을 깜빡였다.

금장 장식이 된 거울, 아름다운 천사가 장식된 시계와 장식물이 눈에 띄었다. 침상을 뒤덮고 있는 것은 피부에 살짝 스치기만 해도 미끄러질 것 같은 기분 좋은 천이었고, 캐노피에 드리운 커튼은 금실과 온갖 레이스가 박혀 화려했다.

책에서나 보았던 공주 같은 방. 실제로 공주들이 머물렀음이 분명한 방이라도 크리스티앙과 한 건물에 있는 지금 이 순간은 전혀 달갑지 않았다. 이제 내일이면 크리스티앙과 얼굴을 마주하게 된다.

혜미는 일부러 그 상황을 머릿속에 떠올리지 않으려 애를 썼다. 상상만으로도 심장이 기분 나쁘게 뛰며 불안해지는 것과는 별개로, 크리스티앙이 어떻게 나올지 예상이 안 되는 지금은 생각해 봤자 헛수고라는 결론이 들었기 때문이다. 일단 대책은 그를 직접 만나고 난 뒤에 세우는 게 더 낫다.

도저히 잠이 올 것 같지는 않았지만 내일의 만남을 위해서라도 잠을 청해야 한다는 생각에 뒤척거리고 있을 때였다.

‘…응?’

고풍스러운 단풍나무 협탁 위에 내려놓은 단검에서 보석이 희미한 빛을 내고 있었다. 혜미는 인상을 찌푸리며 그 빛을 눈으로 따랐다. 마치 어둑한 공간에서 랜턴을 비추는 것처럼 이리저리 이동하는 빛을 보며 그녀가 소리 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혹시 베네딕트인가…?’

그의 피로 만든 마법사의 보석은 베네딕트와 연결되어 있다. 이곳으로 오는 동안 리비에르의 병사들이 수군거리는 말을 들었다. 황명을 어긴 교황은 목숨만 부지했을 뿐 죽기 일보 직전일 거라고 혀를 찼다. 엄격한 황제의 성격상 그를 가만두지 않았을 거라는 말과 함께.

혜미는 보석의 빛이 이리저리 비추다 마침내 멈춘 곳을 바라보았다. 침대의 맞은편 벽에 걸린 화려한 거울이었다. 소리 없이 자리에서 일어난 그녀는 거울 앞에 섰다.

이제는 조금 적응이 된 자신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는데 거울이 일렁이는 것이 느껴졌다. 얼굴이 사라지며 마치 시커먼 물처럼 움직이는 모습에 그녀는 하마터면 소리를 지를 뻔했다.

‘뭐야…. 뭐냐고….’

보석의 빛은 더욱 강하게 발하고 있었다. 그녀는 발터가 거울을 뚫고 나타났던 것을 떠올렸다.

‘…마력?’

혜미가 거울에 손을 댄 순간이었다. 무언가가 자신의 몸을 흡입하듯 쑥 빨려 들어가는 느낌이 들었다. 놀라서 손을 뗀 후, 그녀는 속으로 열을 셌다.

‘서두르십시오….’

머릿속에 베네딕트의 꺼져 가는 목소리가 울려 퍼지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그녀는 눈을 질끈 감았다 뜬 후 거울 앞으로 한발을 내디뎠다. 이번에는 피할 수도 없었다.

“흑…!”

강력하게 끌어당기는 힘에 그녀가 숨을 급하게 들이쉬었다.

처음 그녀를 덮친 것은 깜깜한 어둠. 그리고 환한 빛이었다. 눈동자를 강하게 찌르는 빛에 혜미가 손으로 눈을 가렸다.

이 방은… 대체 뭐지…?

손가락 사이로 바라본 곳은 낯선 곳이었다. 혜미는 인상을 찌푸린 채, 홀린 듯 그 안으로 들어섰다. 거울을 벗어난 공간은 채광이 엄청난 방이었다. 햇살이 가득 쏟아지는 방. 마치 온실같이 사면이 유리로 된 공간에 천장은 아치형이었다. 아름다운 새장을 방불케 하는 곳에서 빛이 여러 갈래로 나뉘었다.

‘…거울…?’

유달리 눈이 부신 이유는 사방에 걸려 흔들리는 아름다운 선 캐처였다. 반사되는 햇살을 크리스털이 다시 반사하며 공간을 온통 눈부시게 만들었다. 선 캐처는 천장에만 달려 있는 것이 아니었다. 정교하게 만들어진 투명한 벽이 마치 미로처럼 바닥에서 솟아나 있었다.

혜미는 눈썹 아래에 손을 대고 간신히 눈을 뜬 후, 그 사이를 홀린 듯이 천천히 걸었다. 기다랗게 매달려 빙글빙글 돌아가는 크리스털 탓에 그녀의 얼굴에도 프리즘처럼 여러 가지 빛이 드러났다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

혜미의 보랏빛 눈동자가 천천히 가늘어졌다. 사람이 보인 탓이었다.

남자 하나가 공간의 끝, 커다란 창 아래 기다란 벨벳 소파에 축 늘어져 쓰러져 있었다.

처음에는 잘못 본 줄 알았다. 환영인 줄 알았다. 반짝이는 황금빛 머리카락, 반 나신인 육체는 조각상인 듯 아름답고 매끈했다. 소파 팔걸이 아래로 툭, 떨어지는 손가락의 움직임을 보고 혜미는 그제야 그녀가 보고 있는 것이 살아 있는 인간임을 깨달았다.

“…뭐야…?”

그녀는 마치 길을 막듯 천장에 걸려 있는 크리스털 조각들을 지나 그에게로 다가갔다. 흘러내리는 부드러운 천 사이로 미형의 나신이 그대로 드러났다. 소년과 청년의 경계에 있는 듯한 이였다.

“이봐요. 괜찮아요? 저기요!”

혜미는 그의 고개를 받쳐 들었다. 남자는 축 늘어진 채 머리를 들지도, 눈을 뜨지도 못했다. 그의 기다란 눈꺼풀을 빽빽하게 감싸고 있는 황금색 속눈썹이 얼마나 긴지 감탄할 새가 없었다. 정신을 잃은 남자를 보며 더럭 겁이 난 그녀는 그의 목덜미를 잡은 후, 티끌 하나 없이 하얀 뺨을 소리가 날 정도로 조금 세게 탁탁 두드렸다.

“정신 차려요! 거기 누구 없어요?”

거울을 통해 떨어진 방 안에는 그와 그녀를 제외하곤 아무도 없었다. 베네딕트가 또 환영을 보여 주는 건가? 아니면 그가 실수했나? 꿈을 꾸고 있는 건 아닌지 헷갈릴 정도였다. 그녀는 쓰러진 남자의 코에 귀를 가져다 댔다. 미약한 숨결이 귓가에 닿는 순간, 결심이 들었다. 안 되겠다.

“이봐요. 일어나 봐요.”

그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신발도 신지 않은 맨발. 입은 건지 벗은 건지 알 수 없는 얇은 옷. 무기라고는 평생 잡아 본 적도 없는 것 같은 손. 한눈에 봐도 너무나 약해 보이는 이였다. 쏟아지는 햇살 속에서 너무나 무방비하게 자신을 드러내고 있는 소년을 보며 혜미가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아씨…. 은근히 무겁네.”

혜미는 그를 부축하려다 실패했다. 숨만 간신히 쉬고 있을 뿐, 일어설 의지가 전혀 없는 남자를 일으켜 세우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녀는 심호흡을 하고 소파와 그의 몸 사이에 양팔을 집어넣었다. 그리고 하나, 둘, 셋을 중얼거린 후 번쩍 안아 들었다. 한국에서라면 상상도 못 할 일이었지만 역시, 훈련으로 단련된 이 육체는 힘이 천하장사가 틀림없었다.

아. 그래도 다리는 조금 후들거리는데….

“지금… 무슨 짓을 하는 거지…?”

귓가에 들리는 작은 목소리에 간신히 걸음을 옮기던 혜미가 퍼뜩 놀랐다.

“정신 들었어요?”

고개를 휙 돌려 눈이 마주치는 순간, 그녀는 숨을 멈추었다. 소년 같은 얼굴을 한 남자가 축 늘어져 일그러진 눈을 천천히 깜빡이고 있었다. 그는 말을 잇기도 힘들어 보였다. 소리 없이 벌어진 붉은 입술에서 희미한 목소리가 간신히 흘러나왔다.

“미친 게… 틀림없군.”

“아….”

바짝 말려 올라간 속눈썹이 그의 눈동자를 닫았다가 열 때마다 금가루가 뚝뚝 떨어지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그보다 더 놀라운 것은 남자의 눈동자였다. 숨이 막힐 정도로 오묘한 황금색. 잘 익은 올리브 같기도 했고, 햇살을 담은 결정이 아름답게 깨진 호박 같기도 했다.

눈 감고 있을 때도 그랬지만 눈 떠보니 감탄이 절로 나올 정도로 아름다운 남자였다. 천사를 그린 명화와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화려하게 생긴 남자다.

“…내 몸에 손을 대는 걸 누가, 허락했냐고 물었… 하아….”

기다랗게 숨을 내쉬며 남자가 중얼거렸다. 흐트러져 숨을 헐떡이는 모습이 색정적으로까지 느껴져 의지와는 상관없이 목덜미가 달아올랐다. 가느스름한 눈동자로 그녀를 바라보는 시선은 마치 몸이 아픈 성질 나쁜 고양이가 눈을 깜빡, 깜빡하는 것 같았다.

“당장… 안 내려… 놔…?”

“아, 미안. 죽은 줄 알고.”

“흑…!”

당황한 혜미가 그를 소파에 던지듯 내려놓자 남자가 수려한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

“…너, 정신이 온전치 못한가…?”

“뭐…?”

“…돌았냐고 묻는 것이다.”

솔직히 말하면 머리가 좀 이상한 것은 그녀가 아니라 그인 것 같았다. 그녀보다도 어려 보이는 데 웬 영감 같은 말투를 쓰는 것도 이상했다.

“너야말로… 괜찮은 거야? 너 여기 어떻게 들어왔니?”

술에 잔뜩 취한 걸까. 술 냄새는 나지 않았지만 지금 그가 제정신이 아니라는 건 알 수 있었다. 그녀를 보며 멋대로 풀린 눈동자가 그것을 증명하고 있었다. 이상한 약이라도 먹은 걸까?

“…시녀인가…?”

잠시 초점을 맞추려 애쓰려던 크리스티앙이 고개를 저었다. 그럴 리가 없다. 이곳은 대공조차 들어오지 못하는 그만의 공간이었다. 죽을 각오가 되어 있지 않다면 그의 잠을 방해할 이가 있을 리 만무했다.

“…하아. 씨발….”

중얼거리던 크리스티앙이 간신히 손을 뻗어 그녀의 옷자락을 쥐었다. 수면제와 미약의 부작용일까. 현실과 환상의 경계가 대체 어디까지인지 알 수가 없었다.

“응? 뭐라고? 너 지금 욕한 거 아니지?”

혜미는 작게 속삭이는 것 같은 그의 말을 들으려 얼굴을 가까이 붙였다.

“역시 환각이군.”

도저히 잠을 잘 수가 없어 약을 평소보다 너무 많이 들이킨 게 원인인 듯했다. 그렇다고 해서 이렇게 정신 나간 계집이 눈앞에 보일 줄이야.

“…너.”

“응.”

크리스티앙은 그녀를 향해 중얼거리듯 속삭였다. 꿈이라면 상관없다. 이 지독한 불안감에서 해방될 수만 있다면 그는 누구에게나 애원할 수 있었다.

“잊게 해 줘….”

“응? 뭘?”

“벌레처럼 들러붙어 내 머릿속을 좀먹는 불안을.”

그를 바라보는 보랏빛 눈동자가 말없이 깜빡거렸다.

할짝.

약에 취한 눈동자에 황금색 나비가 내려앉았다. 눈을 감은 크리스티앙은 뜨겁게 풀어진 혀로 그녀의 입술을 핥았다. 그녀가 당황할 새도, 경악할 새도 없었다. 혀로 그녀의 입술을 뜨끈하게 만지고 떨어진 크리스티앙이 입을 벌리고 하아, 야하게 웃었다. 쑥 들어간 눈두덩이 안에서 눈동자가 가느스름하게 휘어진다.

“…좋은데?”

붉은 입술이 소리 없이 크게 벌어졌다. 도무지 눈을 뗄 수가 없는 퇴폐적인 모습이었다. 미친. 도대체 이 자식은 무슨 약을 처먹은 걸까.

“…야, 지금 뭐 하는…!”

입맛을 다시듯 제 아랫입술을 핥은 크리스티앙이 혀를 길게 내밀고 다가왔다. 피할 새도 없이 선홍빛 혀가 그녀의 입술 새를 쑤시고 들었다. 자연스레 벌어진 입술 새를 비집고 혀를 장악하는 기술이 장난이 아니다.

진한 포도주 향이 번지는 달콤한 숨결. 순식간에 타액이 쭉 빨리자 혜미의 보랏빛 동공이 가늘어졌다. 태양이 위치를 조금 바꾸자 사방에서 빛을 반사시키는 바람에 눈이 시렸다.

“하아….”

크리스티앙이 그녀의 입 안을 마음대로 휘젓고 난 후, 아랫입술을 주욱 빨아 당겼다. 아릿한 아픔과 쾌감이 함께 느껴지자 그제야 정신이 들었다. 혜미는 그의 머리를 퍽, 하고 주먹으로 밀어낸 후 손등으로 입술을 벅벅 문질렀다.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너 지금 뭐 하는 짓이야!”

휙 밀쳐진 남자가 잠시 눈을 느리게 깜빡였다. 자신에게 지금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가늠하는 듯 보였다. 그가 혜미를 향해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느리게 입을 열었다.

“지금… 제정신인가…?”

“내가 할 소리야!”

혜미는 그에게 버럭 소리를 질렀다.

“너 뭐야? 미쳤어?”

“환각이… 아니었어….”

눈을 가늘게 뜬 남자는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지만 너무 취해 중심을 잡지도 못했다. 벨벳 소파의 팔걸이를 간신히 그러쥐는 그를 보며 혜미가 휙, 뒤를 돌았다.

“변태 아냐? 진짜… 어린 놈의 새끼가 확 그냥.”

저벅저벅 걸어가는 그녀의 뒤에서 남자가 중얼거렸다.

“너….”

“뭐!”

혜미가 고개를 휙 돌렸다. 짤막한 단발머리가 붉어진 뺨 아래에서 흔들렸다. 말수가 제법 또렷해진 남자가 소파에 간신히 기댄 채 숨을 헐떡이며 그녀를 쏘아보았다.

“지금 나가면 넌 죽는다.”

“웃기고 있네.”

혜미는 그를 보며 코웃음을 쳤다. 제 육신 하나 건사하지 못해서 약인지 술인지에 취해 빌빌대는 한심한 주제에 웃기지도 않았다. 허우적거리는 폼을 보니 파리 새끼 하나도 못 죽일 움직임이었다.

“돌아오지 않으면 넌, 내 손에 죽어.”

“이봐.”

혜미가 저벅저벅 다가와 의자에 늘어진 그의 앞에 섰다. 그녀를 낚아채 잡으려는 듯 남자가 공중에 손을 들어 올렸다. 혜미가 그 손에 짝, 하고 하이파이브를 하자 남자의 표정이 기묘하게 바뀌었다.

“너나 잘해요. 대낮에 이러고 있다가 너 큰일 난다, 정말. 여기 있는 거 보면 너도 대단한 귀족이나 그 시종쯤 되는 거 아냐?”

“뭐?”

그의 입술에서 큭, 하는 웃음이 새어 나왔다. 의지와는 상관없이 터진 웃음이었다. 혜미가 길게 한숨을 쉬며 그를 향해 허리를 굽혔다.

“너 말이야. 대체 뭘 먹었길래 아까 그렇게 기절해 있었던 거야?”

“수면제.”

“역시.”

“그리고 포도주.”

“약이랑 술을 같이 먹었다고?”

“최음제도 먹었는데.”

미친놈이 진짜!

혜미의 눈동자가 커다랗게 뜨였다.

“야, 너 죽으려고 환장했니?”

“잠이 안 와서.”

나직하게 내뱉는 그를 보며 혜미가 길게 한숨을 쉬었다.

“아무리 그렇다고 위험한 걸 잔뜩 먹고 대낮부터 이렇게 늘어져 있으면 어떡하니? 무슨 일이라도 나면 어쩌려고? 노인네 같아서 이런 말은 하기 싫은데, 너 아직 앞길이 창창한데 술 처먹고 앞으로 뭐 되려고 그래?”

“하하… 하하하하!!!”

한 번 터진 웃음은 강둑에서 물길이 터진 듯 커져 갔다. 어깨를 들썩이느라 꼴이 말이 아니었다. 옷이 다 흘러나와 배며 발기한 성기까지 다 보이는 걸 아는지 모르는지. 그는 부끄러움이라고는 없는 사람처럼 굴었다.

‘아니, 그거보다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아랫도리를 세울 수가 있지? 설마 귀족 부인의 숨겨 놓은 정부 같은 거? 대체 베네딕트는 날 왜 이딴 곳으로 보낸 거냐고!’

복잡한 혜미의 심정 따위는 상관도 없다는 듯, 그가 다리를 쫙 벌린 경박한 자세로 그녀를 향해 숨을 몰아쉬었다.

“…너 이름이 뭐야.”

크리스티앙이 그녀에게 시선을 박은 채 물었다. 그녀에게 박힌 황금색 눈동자에 이채가 돌았다. 흰자위는 벌겋게 충혈되어 있었지만 바라보는 눈동자는 초점이 확실했다.

“이름?”

혜미가 잠시 망설이다 머리카락을 헝클이듯 긁었다.

“…이름이 너무 많아서 뭘 말해야 될지 모르겠다.”

“차라리 죽기 싫다고 내 발밑에 빌어라.”

“뭔 소리야. 네 이름은 뭔데?”

혜미가 사뿐히 그의 말을 무시하자 또다시 그의 입술 새로 발작적인 웃음이 샜다. 역시 머리가 좀 어떻게 된 게 틀림없는 것 같았다. 혹시 교황이 도움 요청을 보내는 건가 싶어서 이 악물고 구하러 왔더니 웬 미친놈을 만나게 될 줄이야.

“됐다. 나 간다.”

“내 이름은 다음에 만날 때 알게 될 거야.”

“아니. 만날 일 없길 바랄게.”

“죽기 전에 내 침대 시중을 들게 할 테니 영광으로 알길.”

뭐야. 미친놈이 아니라 심각한 나르시시스트인가? 얼굴값을 희한하게 하고 있네.

“싫거든? 나 애인 있어.”

“그래서?”

그가 그녀를 향해 태연하게 되물었다. 그게 뭐가 어쨌냐는 표정이었다. 이제 봤더니 인상을 쓰지 않은 표정의 그의 표정은 몹시 도도하고, 어딘지 모르게 사람을 무시하는 태도가 가득했다. 웃고 있는데도 마치 놀리는 것 같아 기분이 좀 나빠진다.

“싱글 아니라고요.”

“그게 문제가 돼?”

“너 머리만 나쁜 게 아니라 의리도 없구나?”

혜미가 혀를 쯧쯧 차자 크리스티앙이 그녀를 보며 조소했다.

“원래 지능이 떨어지는 이들이 의리 따위를 따지느라 중요한 걸 다 잃는 법이지.”

확실했다. 점점 정신을 차리는 건지 말투가 또렷해진 그는 정말이지 재수가 없는 타입이었다. 이런 놈을 구해 주려고 하다니. 시간 낭비도 이런 시간 낭비가 없다.

혜미는 이마를 한 대 딱, 때려 주고 싶은 그를 향해 직구를 날리기로 결정했다.

“굳이 애인이 없어도 넌 탈락이야.”

“탈락?”

크리스티앙이 다시 풉, 하고 웃음을 참으며 그녀의 말을 반복했다. 혜미가 그를 보며 고개를 마구 끄덕였다.

“그래. 난 미친놈보다는 마초남이 취향이거든.”

“그 미친놈이 설마 날 말하는 건가?”

혜미가 당연한 걸 뭘 묻냐는 표정을 지었다.

“그럼 넌 설마 네가 근육질이라고 생각하는 거니?”

“너, 이름이 뭐라고?”

“알 것 없다니까.”

크리스티앙이 팔걸이에 팔꿈치를 걸친 채, 그녀를 빤히 바라보았다. 얼굴은 기가 막히게 그의 타입이라 처음엔 환각인 줄 알았다. 그런데 알고 봤더니 어디가 모자란 게 틀림없는 여자였다.

아까 그녀가 휘두른 주먹에 맞은 관자놀이에서 아직도 미미한 통증이 느껴졌다. 아니. 그 전엔 어땠더라. 그의 몸을 무식하게 번쩍 안아 들었다.

이 방에서 나가면 그녀는 분명히 죽는다. 황제의 몸에 손을 댄 것만으로도 사형이었다. 게다가 황제의 육체에 관한 품평이라니. 사형에 사형을 거듭해도 부족한데, 이 상황이 너무 어이가 없어서 웃음을 멈출 수가 없었다.

입고 있는 차림새를 보아하니 그녀는 플라틴성에서 길을 잘못 찾아든 리비에르의 기사쯤 되는 듯했다. 그런데 그 독종인 리비에르가 이렇게 덜떨어진 부하들을 끌고 다니는 이였던가?

“너 정말 간이 배 밖으로 나온 게로구나.”

“네, 네. 마음대로 생각하십시오, 마마.”

그녀는 또다시 미친 듯이 웃기 시작한 그를 비웃어 준 후, 저벅저벅 문을 향해 걸었다. 이 문을 열면 그녀가 빠져나왔던 거울이 있었다. 내일, 크리스티앙과 대면할 생각을 하면 불안해서 죽을 것 같은 이 상황에 별 이상한 경험을 다 한다 싶었다. 혜미가 방을 나서기 전 뒤를 돌아 그를 보았다. 그녀를 바라보고 있는 그와 눈이 마주쳤다.

“마지막으로 잔소리 하나만 할게.”

“마음대로.”

이제껏 그녀가 지은 죄에 하나를 더 한다고 해도 달라질 것은 없었다. 여전히 소파에서 일어날 줄도 모르는 비스듬한 자세로, 크리스티앙이 그녀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선 캐처들 사이에서 그의 아름다운 얼굴이 온통 무지갯빛을 드리우자 혜미는 작게 감탄을 했다.

어떻게 인간이 저렇게 생겼지? 그래. 이건 네가 재수는 없지만 너무 잘생겨서 굳이 해 주는 충고다. 저렇게 예쁘게 생긴 애가 일찍 죽으면 안타까울 것 같으니까.

“불안해서 잠이 안 올 때는 몸을 혹사시키는 게 최고더라.”

“그래?”

“응. 녹초가 될 때까지 땀 흘리고 나면, 잠은 어찌어찌 들게 되더라고.”

“다음에 한 번 시험해 보지.”

너와 함께 내 침소에서.

크리스티앙은 문밖으로 빠져나가는 그녀의 뒷모습을 보며 낮게 소리 내어 웃었다. 황녀의 일만 생각하면 짜증이 나서 미칠 것 같은 이 판국에 그나마 재미있는 일이 일어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저 아름다운 얼굴에서 눈물을 뚝뚝 흘리며 그의 앞에 무릎을 꿇고 비는 모습을 보면 매우 즐거울 게 틀림없었으니까.

“여기서 기다리시면 됩니다.”

그들을 인도한 대신이 깍듯한 태도로 고개를 조아린 후, 자리를 물렸다. 혜미와 발터 그리고 리비에르가 들어선 곳은 벽에 여러 가지 그림이 걸려 있는 커다란 공간이었다.

신화에 나오는 각종 여신이 섬세하게 조각된 대리석 기둥, 사람 키의 세 배는 될 것 같은 높은 천장까지 화려한 벽화로 장식되어 마치 이 방 자체가 하나의 커다란 예술품처럼 보였다.

“화려하지? 원래는 무도회장이었던 공간을 크리스티앙 폐하가 즉위한 후 갤러리로 바꾸었다고 들었어.”

크기에 압도당한 혜미의 마음을 읽은 듯 리비에르가 낮게 입을 열었다. 그녀의 목소리는 크지 않았지만 방해물이 없는 넓은 공간 안에서 또렷하게 공명음을 내며 울려 퍼졌다.

오늘, 이곳에서 드디어 크리스티앙을 처음 만나게 된다. 혜미는 긴장을 감추며 짧게 답했다.

“응. 대단하네.”

벽에 죽 진열된 그림은 역대 황제들의 초상화 그리고 유명한 전투를 승리로 이끈 장군을 기념하는 작품들이었다. 클라웨의 지난 역사를 차례차례 보여 주고 있는 공간. 이 갤러리 자체가 제국 역사의 축약품이라고 볼 수 있었다. 혜미는 크리스티앙이 왜 이곳을 자신과의 최초 접견 장소로 선택했는지 어렴풋이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수많은 그림들 중 단연 눈길을 끄는 것은 중앙에 걸린 직사각형의 거대한 그림이었다. 사실 혜미는 이곳에 처음 발을 들이자마자 그 작품에서 눈길을 뗄 수가 없었다.

가로로 열 발자국이 넘을 것 같은 압도적인 크기의 캔버스. 마치 그린 이의 혼이 느껴지는 것 같이 화려하고 아름다운 색채의 그림은 이 공간의 주인이 자신이라는 사실을 온몸으로 표현하는 듯 보였다.

“…….”

그녀의 발걸음이 저절로 움직였다. 화폭에 담긴 배경은 햇볕이 내리쬐는 화창한 봄날의 정원이었다. 달콤한 벌꿀색 블론드. 하얀 피부를 가진 어린 소년이 허공에 양팔을 쭉 뻗고 있었다. 이미 완성된 이목구비를 자랑하며 천사같이 환하게 웃고 있는 소년의 팔이 향한 곳에는 붉은 보석이 박혀 빛나는 왕관이 보였다.

왕관의 바로 위에는 아름다운 하얀 새가 날개를 펼치고 하늘로 도약하듯 날아오르고 있다. 마치 소년에게 왕관을 떨어뜨려 주고 떠나기라도 하는 모습이었다.

크리스티앙 디트리히 클라웨 9세. 대관식, 165.

아래에 쓰인 설명을 볼 필요도 없었다. 그림 속 소년은 그녀의 직감대로 크리스티앙이었다.

혜미는 마른침을 꿀꺽 삼키며 시선을 옆으로 돌렸다. 공중에서 떨어지는 왕관을 향해 환하게 웃음 짓는 소년의 등 뒤. 장미 덤불 속에 어깨 너머로 은발을 드리운 사내가 서 있었다.

정면을 바라본 채 눈을 감고 있는 남자의 얼굴은 낯이 익었다. 대지를 축복하기라도 하듯 양팔을 부드럽게 벌리고 있는 교황 베네딕트는 한 떨기 꽃처럼 아름다웠지만 무언가가 기묘해 섬뜩한 느낌까지 주었다. 마치 배경 속에 묻힌 정물 같은 모습, 아니 더욱 솔직하게 말하자면 관에 놓인 죽은 시체 같은 모습이었다.

이 그림에서 살아 움직이는 인간처럼 보이는 것은 단 하나, 그가 가진 무한한 가능성을 보여 주듯 반짝반짝 빛나는 소년 하나뿐이다.

“원래대로라면 황제가 교황에게 왕관을 직접 받는 모습을 그린 초상화여야 하겠지. 바로 저들처럼.”

어느새 그녀의 곁으로 다가온 발터가 낮은 목소리로 내뱉었다. 그의 말이 맞았다. 크리스티앙 이전 황제들의 대관식은 모두 여신처럼 아름다운 대마법사에게 왕관을 하사받는 장면을 묘사한 그림들이다.

“크리스티앙 폐하께서는 자신의 역사를 스스로 만든 거야.”

설명을 덧붙이는 리비에르의 목소리가 낮게 깔렸다. 이곳에 들어온 것이 처음은 아니었지만, 매번 왠지 모를 경이감이 드는 것은 의지와는 상관없는 일이었다.

“교황에게 마법사의 보석을 받은 황녀는 사고로 죽었지만 결국 그것은 폐하가 황위에 오를 수밖에 없었던, 하늘이 선택한 운명이었다는 걸로 말이야. 선황의 죽음으로 황제 대행권을 물려받았을 때, 크리스티앙 폐하의 나이는 겨우 열 살이었어. 역대 대관식을 묘사한 그림들 중 이 작품이 가장 아름답고 특별하다는 찬사를 받고 있는 건 아마 그래서일 테고.”

혜미는 리비에르가 말하고자 하는 크리스티앙의 의도를 정확히 이해할 수 있었다. 누구도 미워할 수 없는 천사 같은 얼굴의 아름다운 아이는 교황을 등지고 있다. 대관식에 교황이 등장해야 한다는 것은 제국의 법도였지만 이 그림에서 중요한 것은 베네딕트가 아니었다. 홀로 제국의 황제가 된 아름다운 소년인 것이다.

그 서사에 정점을 찍는 것은 마치 하늘을 뚫을 듯, 캔버스가 좁아 그림 바깥으로 나오기라도 할 듯 높이 날아오르는 새였다. 왕관을 크리스티앙에게 떨어뜨려 주고 미지의 세계로 자유롭게 날아가는 모습. 마치 한편의 동화 같은 이 그림은 크리스티앙이 황제가 될 수밖에 없었던 이야기를 완벽하게 그려 내고 있었다.

“그럼 이 새가… 나란 뜻이구나.”

혜미가 그림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착잡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새는 백조라고 하기엔 크기가 작았고 그저 갈매기라고 하기에는 몸의 곡선이 우아했다. 실제로 이런 종류의 새는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이 땅에 존재하지 않는 것이 분명해 보이는 신성한 모습의 새.

그녀가 이 성에서 지냈던 시간은 단 5년이었다. ‘보호’를 이유로 별궁에 갇혀 산 어린 황녀는 그 흔한 초상화 하나 남기지 않고 죽었다.

그 때문에 황녀의 얼굴을 표현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을 것이다. 상상으로 그린다 하더라도 그것이 사람들의 인정을 받을 리 만무하다. 하지만 인외 존재라면 달랐다. 어린 황녀가 죽어서 한 마리 새가 되었다면 고개를 끄덕거릴 사람이 존재할지도 모른다는 뜻이다.

“…대단하네. 정말.”

그녀의 입술에서 저절로 쓴웃음이 났다. 누이의 죽음마저도 극적으로 이용해 신화를 만드는 크리스티앙의 영리함, 혹은 교활함. 혜미는 그를 만나기도 높다란 벽에 봉착한 기분이었다.

사실 지난밤, 그녀는 노력에도 불구하고 한숨도 자지 못했다. 날밤을 꼬박 새운 것은 응접실에 있었던 발터 역시도 마찬가지였다. 그녀에게 명백한 악의를 가지고 있는 황제를 직접 대면해야 한다는 부담감에 심장이 계속 빨리 뛰었다. 청심환이 있었다면 혜미는 이미 그것을 몇 알이나 삼키고도 남았을 것이다.

“그림이 마음에 드십니까?”

갤러리에 있던 세 명의 고개가 동시에 뒤로 돌아갔다. 흰 백발을 검은 리본으로 단정하게 하나로 묶은 하이데거 대공이 안으로 걸어 들어오며 입을 열었다. 그의 인기척조차 들려오지 않았기에 혜미가 놀란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녀는 애써 표정을 감추고, 언제 봐도 기분 나쁜 대공을 향해 차분히 입을 열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