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2화 (42/72)
  • “지휘관님…! 여기 계신 줄 모르고… 하아…. 한참 찾았습니다!”

    황급히 들어온 조세핀이 숨을 헉헉 몰아쉬었다. 리비에르는 충격받은 표정을 이내 갈무리하고 그녀에게 물었다.

    “무슨 일이냐, 조세핀?”

    “황금성에서 황제 폐하의… 서신이 도착했습니다…!”

    커다란 방 안에 순식간에 긴장감이 감돌았다. 휙, 고개를 돌린 것은 혜미와 발터 역시 마찬가지였다. 조세핀의 곁에서 은쟁반을 들고 있는 또 다른 부하의 모습이 그제야 보였다. 소식을 듣고 달려온 다른 지휘관들도 있었다. 수도에서 반년 만에 도착한 황제의 친필 서신에 모두 긴장해 상기된 얼굴이었다.

    “…들어와.”

    “예, 지휘관님.”

    리비에르는 쟁반 위에 놓인 봉투를 낚아챈 후, 방문을 쾅 닫았다. 황제의 직인이 찍힌 봉투를 연 후, 조세핀에게 내밀었다.

    “읽어라, 조세핀.”

    리비에르는 글을 읽지 못했다.

    “예.”

    조세핀이 떨리는 손으로 상관에게서 편지를 받아 들었다. 궁에서 온 소식에 기대감에 찬 얼굴은 그녀라고 다를 바가 없었다.

    “…….”

    눈을 깜빡이며 빠르게 읽어 내려가는 눈동자가 파들거리며 흔들렸다. 뭔가 이상하다. 쉽게 말을 잇지 못하는 조세핀을 보며 리비에르의 직감이 불안하게 작동하기 시작했다.

    “뭐라고 쓰여 있지?”

    “…….”

    “말해라, 조세핀.”

    “리… 리비에르 님.”

    조세핀의 하얀 얼굴에서 핏기가 사라졌다. 리비에르는 그녀에게 버럭 소리를 질렀다.

    “당장 말하라고!!!”

    “폐하께서… 지젤 리비에르 경에게 고, 공작의 지위를 수여한다고….”

    신분 격상. 더러운 양 떼 사이에서 잠들던 노예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녀가 자신을 부리던 영주의 목을 자른다 해도 이제 아무도 토를 달 사람이 없을 것이다.

    분명히 좋은 소식이었는데, 이보다 더 영광스러운 일은 없는 게 틀림없는데도, 그 소식을 전하는 조세핀의 표정이 심상치가 않았다.

    “…그리고?”

    조세핀이 붉은 입술을 꽉 깨물었다. 부릅뜬 눈 흰자위에 핏발이 들어찼다. 방 밖으로 들리지 않게 간신히 속삭이는 그녀의 목소리는 마치 울음을 간신히 참는 듯 들렸다.

    “리비에르 공작은 제국의 겨울제가 시작되기 전, 군대와 함께 북방의 성으로 이동하라고… 쓰여 있습니다.”

    “뭐라고…?”

    리비에르의 입에서 쇳소리가 튀어나왔다.

    북방의 성. 그곳은 1년 내내 눈보라가 몰아치는 겨울이었다. 바다가 얼어붙을 정도로 추운 곳. 귀향살이나 다름없는 척박한 곳이었다. 그것뿐일까. 이제는 자취를 감춘 마물이 아직도 존재한다고 알려진 위험한 곳이다.

    말도 안 돼.

    리비에르의 몸이 딱딱하게 바위처럼 굳었다. 그녀의 입술이 부들부들 떨렸다. 부러진 발목이 시큰거리며 고통을 주었다. 목발을 놓친 그녀가 비틀, 중심을 잃자 조세핀이 당황해 그녀를 부축했다.

    “지휘관님!”

    “줘 봐.”

    리비에르는 그녀를 거친 손길로 뿌리치곤, 손에서 편지를 낚아채듯 빼앗아 들었다. 황제의 낙인이 찍힌 편지를 가득 채운 꼬부랑글자들이 마치 그녀를 비웃는 듯 보였다.

    “하아….”

    리비에르의 손에서 황실에서만 쓰는 고급 종이의 귀퉁이가 우직, 소리를 내며 구겨졌다. 그녀가 부들부들 떨며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

    “흐으…. 하아….”

    “리비에르 님….”

    아무리 까막눈이어도 숫자는 읽을 수 있었다. 크리스티앙의 이름 옆에 적힌 날짜는 한 달 전.

    제트성 앞에 진영을 치기도 전이었다. 리비에르가 제트성 전투를 시작하기도 전에, 황제는 이미 그녀를 북방으로 내쫓을 계획을 세웠다는 뜻이었다.

    리가스의 목을 따건 말건 상관없이 그녀의 거취는 정해져 있었다. 그녀가 이제껏 목숨 걸고 싸워 왔던 시간이 부질없는 짓이었다는 것과 다름이 없었다.

    “어떻게….”

    어떻게 내게 이러실 수 있습니까. 폐하.

    “…제기랄….”

    잇새로 욕설을 내뱉는 리비에르의 눈동자에서 뜨거운 분노가 터져 나갔다. 조용한 분노를 불꽃처럼 터뜨리는 리비에르를 보며 혜미는 복잡한 감정을 느꼈다.

    “알겠어. 자일룬으로 가서 리비에르란 사람을 돕는 건 좋아. 하지만 전투에서 이긴다고 해도 문제잖아. 크리스티앙과 그녀의 관계가 더욱 돈독해지는 계기가 되는 게 아닐까?”

    “크리스티앙은 절대, 리비에르를 황금성으로 불러들이지 않을 거야.”

    세르노티의 탑에서 처음 리비에르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을 때였다. 발터는 크리스티앙이 가장 견제하는 건 귀족들의 권력이 커지는 일이라고 말했다. 절대 왕정을 추구하는 군주라면 누구나 그러했고, 특히나 어릴 때부터 세도 정치에 휩쓸려야 했던 크리스티앙은 그 도가 지나칠 정도로 모든 힘을 자신에게 집중시키길 원했다.

    “장기판의 말로 쓰는 것도 유분수지….”

    리비에르가 이를 뿌득 갈았다. 크리스티앙의 행보는 그들의 예상대로였다. 과연 리비에르는 어떤 선택을 할까. 그녀의 손을 잡아 줄 것인지를 지켜보며 혜미가 긴장에 마른침을 삼켰다.

    “지휘관님…. 저는 무조건 지휘관님의 행보를 따를 겁니다….”

    조세핀의 곁에서 홀로 눈을 빛내던 리비에르가 마침내 혜미 쪽을 향해 고개를 들었을 때였다.

    쿵쿵!

    밖에서 누군가 문을 거칠게 두드렸다.

    “누구야!”

    리비에르 대신 조세핀이 버럭 화를 내며 소리쳤을 때였다. 문밖에서 부지휘관, 나이젤의 난처한 목소리가 들렸다.

    “지휘관님…! 황금성에서 손님이… 헉…!”

    그가 말을 채 끝내기도 전이었다. 닫힌 문에서 불꽃이 일어나더니 활활 타오르다 마침내 뻥, 날아간 것이다.

    “…뭐야!”

    문 가까이에 서 있던 리비에르와 조세핀이 경악하며 한 발짝 뒤로 물러섰다. 그리고 본능적으로 검을 뽑아 들었다.

    방의 맨 끝, 발코니 쪽에 서 있던 혜미와 발터 역시 놀라기는 마찬가지였다. 혜미가 공격 태세를 취하며 눈을 크게 떴다.

    누구지? 설마 베네딕트인가…?

    이 상황에서 이런 마력을 쓸 이는 그밖에 없어 보였다. 그러나 마침내 완전히 모습을 드러낸 사람은 그녀의 예상과는 달리 처음 보는 이였다.

    “오래간만이오, 리비에르 경.”

    키가 큰 남자가 값비싸 보이는 연푸른 제복을 탁, 탁, 털며 딱딱한 말투로 입을 열었다. 한눈에 봐도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이라는 티가 났다. 저만치 날아간 문짝이 바닥에서 여전히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하이데거… 대공…?”

    리비에르가 미간을 모으며 작게 내뱉자 상대가 또렷하게 중얼거렸다.

    “여전히 기억력이 좋군.”

    기억하지 못할 리가 없었다. 그는 아직 리비에르가 노예 신분이었을 시절, 검투 시합에서 15명을 꺾고 우승했을 때 황제의 곁에서 마치 그녀를 시험하듯 날카롭게 눈을 빛내고 있던 이였다. 원로원의 수장이자 공작가의 서열 중 가장 첫 번째 가문의 장자이며, 최근 그녀의 막내 누이가 황후가 됨으로써 권력의 최고 꼭대기에 선 자다.

    “…대체 무슨 일이죠…?”

    놀랄 일은 그가 문을 불태우고 나타난 것뿐이 아니었다. 리비에르는 그때와는 확연히 달라진 하이데거의 모습에 인상을 찌푸릴 수밖에 없었다. 어깨를 넘긴 머리를 하나로 묶은 단정한 모습이던 하이데거의 머리카락은 그 색이 다 빠져 백발에 가까웠다.

    또한 그의 얼굴은 마치 가면을 쓰고 있는 것처럼 매끈해 10년은 어려진 것 같았는데, 그 모습이 어딘지 모르게 매우… 기분 나쁘게 묘했다.

    ‘…이것 또한 마력인가?’

    하이데거가 차갑게 입을 뗐다.

    “황제 폐하의 칙령을 들을 준비를 하시오.”

    “…황제 폐하의… 명이라고?”

    “그게 아니라면 내가 이곳까지 직접 올 이유가 있다고 생각하나?”

    리비에르를 쏘아보며 되묻는 그의 말투가 묘한 것은 착각이 아니었다. 하이데거 대공은 황제의 서신 따위를 전하러 오기에는 신분이 너무 높다.

    “…전하시죠.”

    리비에르는 그를 바라보며 마른 입술에 혀를 축였다. 하이데거가 고개를 돌려 바라본 것은 혜미가 서 있는 발코니 쪽이었다. 혜미는 그의 차가운 눈빛에 순간 움찔했다. 그의 눈동자에 가득한 살기를 느낀 것은 발터 역시 마찬가지였다. 저절로 검에 손이 간 그의 옷깃을 잡아당기며 혜미가 그를 저지했다.

    저자는 위험해.

    그의 몸에서 풍기는 위험한 기운이 그녀의 눈에 똑똑하게 보였다. 마력이었다. 에리히 폰 하이데거. 분명히 알고 있는 이름이었다. 세드릭의 지시에 따라 최고 귀족들의 이름을 파고들 때 가장 먼저 외웠던 이름이기도 했다.

    현재 황제 크리스티앙의 오른팔이자 원로원의 수장. 황궁 근위대의 총지휘관. 하지만 그가 마법사라는 정보는 들은 기억이 없는데…?

    그의 몸에서 희미하게 일렁이는 검은 기운은 그녀의 눈에만 보이는 걸까…? 하이데거가 그녀를 뚫어져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크리스티앙 폐하께서는….”

    그는 날 알고 있다.

    확실한 직감에 심장이 쿵, 쿵, 불안하게 뛰었다.

    “자일룬에 계신 에데르트 아이나 클라웨 황녀께, 지금 즉시 아메티스에 있는 황금성으로 입궁할 것을 명하셨습니다.”

    “……!”

    영문을 모르는 조세핀을 제외한 모든 이들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겁니까, 하이데거 대공.”

    한 발 나서 침착하게 입을 뗀 것은 리비에르였다. 하이데거가 그녀를 바라보며 하얗게 센 눈썹을 치켜올렸다.

    “모르고 있었나?”

    “무엇을 말이죠.”

    “…개 같은 년이 앙큼한 거짓말은.”

    혀를 찬 하이데거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조세핀이 귀를 의심하며 작은 눈을 부릅떴다.

    “이자가 지금… 뭐라 했습니까…?”

    “가만있어라, 조세핀.”

    하이데거가 부자연스러운 움직임을 하며 목을 옆으로 이리저리 꺾었다. 그 모습이 기이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그에게서 한 발 물러서는 리비에르를 향해 그가 입을 열었다.

    “실언을 했소. 내가 병중이라 가끔 속말을 감추기가 힘이 들어서.”

    혜미와 발터. 두 쌍의 시선이 짧게 마주쳤다. 발터의 눈에 짙은 살기가 이는 것을 보며 혜미가 보이지 않게 고개를 흔들었다.

    안 돼, 발터. 그는 위험하다.

    그의 마력이 어느 정도인지 알 수 없는 이 상황에서 섣불리 공격했다가 피해를 입을 수는 없었다.

    “또한 크리스티앙 폐하께서는….”

    리비에르는 갑자기 손에서 느껴지는 뜨거운 감각에 흠칫 놀라 손을 털었다. 그녀가 쥐고 있던 황제의 편지가 활활 불타오르고 있었다. 하이데거의 눈길을 따라 불길이 공중에 두둥실 떠올랐다. 조세핀이 얼굴이 경악에 차 흔들렸다. 멀쩡한 공간에 불을 일으키는 것은 마법사들이나 할 수 있는 일이었다.

    “폐하께서는 말라쿤과의 전쟁을 승리로 이끈 경의 노고를 치하, 성대한 개선문을 세우고 리비에르 경과 군대 모두를 아메티스로 입성시키라 명하셨네.”

    “…흣!”

    종이를 태우며 활활 몸집을 키우는 불꽃이 혜미가 있는 쪽으로 휙, 날아온 것은 순식간이었다. 그녀의 얼굴로 정확하게 날아오는 불꽃이 발터의 검에 의해 반으로 잘려 아래로 떨어졌다.

    “이게 무슨 짓이야!!!”

    발터가 눈을 부릅뜨며 숨을 몰아쉬었다. 그의 검 끝에서 불씨가 튀었다.

    “이곳은 아메티스와는 달리 바람이 거칠군요.”

    하이데거가 그녀를 향해 걸어오며 고개를 깍듯이 숙였다. 인상을 찌푸린 채 그를 노려보는 혜미의 앞에서 머리 숙인 그가 눈만 들어 올렸다. 푸른 동공이 확장되어 일렁이고 있었다.

    “괜찮으십니까, 황녀 전하?”

    “…….”

    “내일 황금성으로 떠나게 되실 예정입니다. 각별히 모시라고 한 황제 폐하의 명을 받들어 불편한 점 없이 호위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발코니에서 휘잉, 하고 바람이 불었다. 마치, 계절의 끝을 알리는 것 같은 경고장이었다.

    ***

    그들은 날이 밝자마자 아메티스로 떠났다. 리비에르의 군사들은 혜미가 죽은 줄 알았던 황녀라는 사실에 놀라고 당황했지만, 이내 황금성으로 입성할 수 있다는 기쁨에 취해 빠르게 말을 몰았다. 황족과 전장에서 함께 싸웠다는 것은 가문의 영광이기도 했다.

    대외적으로 그녀는 황녀라는 신분을 숨긴 채 크리스티앙을 위해 위험한 전쟁에 출정한 인물로 포장되어 있었다. 본인조차 알지 못하는 소문이 어디서부터 흘러나왔는지는 굳이 추리할 필요도 없는 일이었다.

    아메티스로 향하는 보름 동안, 도시를 지날 때마다 사람들이 떠들어대는 말을 들을 때마다 혜미는 머릿속이 복잡했다. 반쪽이지만 같은 피를 나눈 이복동생. 그녀를 필사적으로 죽이려 하는 상대에 대한 실낱같은 호기심이 들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보다 더 큰 불안과 긴장에 잠을 쉽게 이룰 수가 없었다.

    나는 과연, 그와의 싸움에서 이길 수 있을까.

    “와아!!!”

    “리비에르 장군!!!”

    아메티스에 들어서자 커다랗게 울려 퍼지는 환호에 얀이 소리 죽여 중얼거렸다.

    “뭐야…. 엄청나잖아….”

    도시 전체가 축제 분위기였다. 그들이 지나가는 길에 군중들이 주르륵 모여선 채, 기사들이 움직일 때마다 손수건을 흔들고 이름을 환호했다. 바구니에서 꽃잎을 뿌려 대는 이도 있었다. 나팔 소리와 북소리가 땅을 뒤흔들 듯 둥둥 울렸다.

    “나이젤 님 사랑해요!!!”

    “예쁘다, 조세핀!!!”

    전쟁에 수차례 참여한 리비에르의 군사들은 이미 겪어 본 적이 있는 상황이라 태연하게 말을 몰고 있었다. 누군가는 꽃을 받아 드는 여유까지 보였지만 이런 종류의 환대를 처음 받아본 세르노티의 기사들은 적잖이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어머, 저 무섭게 생긴 기사님은 누구야?”

    “완전 잘생겼다. 호호! 손 좀 흔들어 주세요!”

    부채로 얼굴을 가린 채 크게 외치는 이도 있었다.

    “얀. 정신 차려.”

    레나가 얀의 옆구리를 검집으로 쿡, 찔렀다. 드레스를 입은 여인들에게 헤벌쭉한 얼굴로 손을 흔들고 있던 얀이 소리 죽여 불평을 했다.

    “손 흔들어 달라잖아…!”

    “지금이 팔자 좋게 그럴 땐가요?”

    뒤에서 중얼거리는 아일라의 말에 얀이 끄응, 하며 시선을 앞으로 돌렸다. 주위의 소란한 광경은 신경도 쓰지 않고 앞장서 말을 몰고 있는 발터가 보였다.

    “못 보던 얼굴은 전부 세르노티의 기사들인가 봐!”

    “에데르트 황녀님이 누굽니까!”

    군중 속에서 누군가 크게 외치자 말고삐를 잡은 혜미의 어깨가 딱딱하게 경직했다. 꼬마 아이들 한 무더기가 우르르 따라붙으며 저마다 소리를 높였다.

    “황녀님이 리비에르 장군을 도와 리가스를 무찔렀대요!”

    “크리스티앙 폐하께 힘을 보태려 여태껏 숨어 살았대요!”

    “폐하의 충신이래요!”

    앞만 보고 말을 몰던 발터의 짙은 눈썹이 미간에 모였다. 그가 소리가 난 쪽으로 슬쩍 고개를 돌렸다. 젊은 여인들이 숨을 짤막하게 들이쉬었고, 아이들은 사나운 그의 얼굴에 놀라서 찔끔하며 입을 다물었다.

    “힝, 무서워.”

    “뭐야. 멋지잖아.”

    수군거리는 목소리를 지나치며 발터가 혜미를 향해 작게 속삭였다.

    “신경 쓸 것 없다.”

    “응. 난 괜찮아.”

    혜미가 애써 태연하게 답한 후, 정면을 바라보았다. 초겨울, 먼지 하나 없는 하늘은 새파란 빛을 띠고 있었다. 멀리, 강을 끌어다 만든 거대한 운하의 끝에 우뚝 선 수십 채의 황금성이 보였다.

    흰 대리석이 태양을 받아 눈이 부시게 빛나며 위용을 자랑하고 있었다. 세르노티나 자일룬 그리고 다른 도시들을 지나치며 보아 왔던 성과는 차원이 다른 화려함이다.

    “…크리스티앙.”

    혜미는 그를 어떻게 만나게 될지 그동안 수백 번도 더 넘게 생각했다. 그때마다 결론은 하나였다. 크리스티앙과 대면하는 날, 둘 중 하나는 죽게 될 거라는 것. 마주한다면 암살이나 전쟁 때일 거라 생각했었는데 그와 이런 식으로 대면할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

    그를 위한 전쟁에서 대승한 공으로 개선문을 통과하게 될 줄이야. 크리스티앙이 그녀를 위해 준비한 무대는, 황제와 황녀의 반목 따위는 상상도 할 수 없을 만큼 화려한 환영식이었다.

    “하이데거 대공이라고 했나요?”

    “일단은 그러합니다.”

    제트성에 나타난 대공의 대답은 묘했다. 뭘 해도 기분 나쁜 남자였다. 이런 사람을 수족처럼 부리고 있는 크리스티앙에 대해 더욱 거리감이 느껴질 만큼.

    “크리스티앙이 날… 어떻게 알고 있죠?”

    “…황녀 전하께서는 황제 폐하를 무척이나 친근하게 부르시는군요.”

    “묻는 말에 대답하라. 하이데거 공작.”

    그녀는 그의 기에 눌리지 않으려 주먹을 꽉 쥐어야 했다. 대공이라 해도 황족의 신분에 비할 수는 없었다. 클라웨에서 가장 극상의 지위에 있는 것은 황제. 그리고 그다음이 황족과 교황이었다. 하이데거의 턱에 힘이 들어가는 것이 똑똑히 보였다.

    “…전대 교황 베네딕트가 원로원 회의에서 밝혔기 때문입니다. 죽은 자가 살아 있다고.”

    그녀를 노려보던 하이데거 대공의 얼굴은 당장 그녀를 무덤에 도로 처넣고 싶어 하는 표정이었다. 혜미에게 중요한 건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전… 교황이라고?”

    “아. 그는 황명 없이 황금성을 떠난 죄로 교황 자격을 박탈당했기 때문입니다. 원래라면 사형이었지만 황족을 살린 노고를 치하한 폐하께서 자비를 베푸셔서 목숨만은 부지하였습니다. 그 때문에 현재 클라웨의 교황 자리는 공석이 되었죠.”

    그날 밤, 혜미는 발터의 침소에서 한숨도 자지 못하고 생각에 생각을 거듭했다.

    “당장 빠져나가야 해, 이든. 이대로 황금성으로 가는 건 자살 행위다.”

    “그럼 다른 기사들은?”

    “알아서 할 거니까 신경 쓰지 않아도 돼.”

    발터는 당장 몸을 숨기고 후일을 계획해야 한다고 말했지만, 혜미의 생각은 달랐다. 그녀는 아메티스로 떠나겠다는 결론을 내렸다.

    “가야겠어. 황금성으로.”

    “그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널 죽이려고 할 거야. 몰라?”

    꽉 쥔 발터의 주먹에 툭, 툭, 핏줄이 불거졌다. 그의 표정은 험악하게 느껴질 정도로 일그러져 있었다. 혜미 역시 위험하다는 건 충분히 알고 있었다. 그것은 발톱을 숨기고 있는 맹수의 아가리에 직접 걸어 들어가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는 사실은 세르노티의 기사들 모두가 짐작할 수 있었다. 하지만….

    “…혹시 교황 때문인가?”

    “응?”

    “그를… 구하고 싶어서?”

    발터가 그녀를 보며 쓰게 물었다. 혜미가 고개를 끄덕이자 그의 얼굴이 한층 어두워졌다. 이전부터 느꼈지만 발터는 베네딕트를 그리 달가워하지 않는 게 분명했다.

    그와 관련된 일을 언젠가는 발터에게 모두 설명해야 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 시간이 모두에게 힘든 상황이 되리라는 것도 분명하다. 그러나 지금 당장은 그것에 신경 쓸 때가 아니었다. 그녀가 서둘러 말을 덧붙였다.

    “베네딕트도 문제지만…. 그게 다는 아니야.”

    “그럼?”

    “이건 나만 숨는다고 해서 해결될 일이 아니니까. 나와 연관된 다른 이들이 모두 위험해질 수도 있어.”

    이 상황에서 그녀가 몸을 숨긴다면 그거야말로 반역의 불씨를 증명하는 것이었다. 리비에르와 그녀가 이끄는 군사들까지 동조자로 몰릴 수 있었다. 게다가 세드릭은 아직 세르노티에 있다. 전언을 보내더라도 그가 사실을 알게 되기까지는 시간이 걸린다. 크리스티앙이 군대를 파견해 그와 마을 사람들을 몰살시키기에 충분한 시간인 것이다.

    “이든. 제발. 그렇다고 해서 널 그와 독대하게 둘 수는 없어.”

    혜미는 괴로운 얼굴로 낮게 내뱉는 발터의 손에 제 손을 올리고 작게 속삭였다.

    “크리스티앙은 날 쉽게 죽이지 못해. 원로원이 다 모인 자리에서 교황이 공식적으로 내 존재를 밝힌 이상, 날 존중하는 척이라도 해야 할 거라고.”

    베네딕트가 원한 것도 바로 그 부분이었을 것이다. 그런 엄청난 일을 벌일 거면 미리 귀띔이라도 해 주면 좀 좋을까. 생각할수록 열이 뻗쳤다. 황금성에서 그를 만나게 된다면 그 부분에 대해서는 반드시 따져 물을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는 괜찮을까…? 교황 자격을 박탈당했다는 이야기를 꺼낼 때, 대공의 의미심장한 표정이 떠올랐다. 그리고, 전쟁 직전에 막사를 찾아왔던 베네딕트와의 마지막 시간도.

    “내가 당신을 꼭 구해 줄게요…!”

    그런 뜻으로 말한 게 아니었는데, 꼭 미래를 예측한 말이 되어 버린 것 같아 기분이 께름칙했다.

    “알았어. 그럼 황금성으로 간 후, 내가 크리스티앙을 처리하지.”

    결심한 표정으로 낮게 내뱉는 발터의 말에 혜미는 눈을 크게 뜨며 그의 손을 꽉 붙잡았다. 그 의미가 무엇인지 모를 수가 없던 까닭이었다.

    “…어쩌면 일을 더 빨리 끝낼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절대 안 돼. 발터.”

    “왜 안 되지? 그건 내게 주어진 본래 역할이다. 이든.”

    황제의 친위대가 쫙 깔린 곳에서 그를 암살하고도 발터가 무사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그녀의 마음을 읽은 듯 발터가 눈을 마주쳤다. 무서울 정도로 진심인 그의 눈동자는 차분했다.

    “난 네게 기사의 맹세를 했어. 죽음이 두렵지 않아.”

    “절대 안 된다고 말했잖아…! 그게 내 명령이다, 발터.”

    “그럼… 크리스티앙이 네게 덫을 치는 걸 가만히 앉아서 기다리라는 뜻인가?”

    혜미는 결국 그의 멱살을 거칠게 잡고 뺨을 때렸다. 그를 향한 보랏빛 눈동자가 젖은 채로 일렁였다. 때린 손보다, 변함없는 눈으로 그녀를 응시하는 그를 보는 마음이 더 아팠다.

    “죽여 버리기 전에 빨리 대답해. 쓸데없는 짓 하지 않겠다고, 어떠한 일이 있더라도 네 목숨을 스스로 위험하게 만들지 않겠다고 맹세해라.”

    발터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는 것을 생각하기만 해도 심장이 불안한 속도로 터질 듯이 뛰었다. 그의 마음도 그녀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는 않을 거라는 사실을 짐작할 여유는 그녀에게 없었다.

    발터의 입에서 반강제로 약속을 받아 내고 괴로워하는 그를 설득하는 데 그날 하룻밤을 꼬박 소비했다. 혜미가 황제의 암살 카드 대신 뽑아 든 카드는, ‘혁명’이었다.

    “크리스티앙 폐하 만세!”

    “제국이여 영원하라!”

    “아메티스여 영원히 빛나라!”

    마치 광신도처럼 그의 이름을 부르짖는 군중들의 목소리를 들으니 입 안이 썼다. 제국의 부와 권력이 모조리 집중된 이곳, 아메티스.

    리비에르와 그의 군사들이 왜 그토록 이곳에 집착했는지 알 수 있었다. 그들이 지난 보름 동안 말을 달려 거쳐 온 크고 작은 촌락들과는 완전히 다른 광경. 혜미가 황녀라는 사실을 전해 들은 사람들은 그녀의 발밑에 무릎을 꿇었다.

    “부디 전쟁을 끝내 주셔요….”

    “군대의 차출을 그만 멈춰 주십시오….”

    “영원하라! 영원하라!!!”

    아름다운 옷을 입고 나와 있는 이들의 모습에 추레한 차림의 사람들의 모습이 겹쳐졌다. 군중들이 추앙하는 젊은 황제는 태어나서부터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아메티스를 떠난 적이 없다고 했다. 아니, 황금성 자체를 떠난 적이 없다고 했던가.

    크리스티앙.

    성 밖으로 나와서 현실을 봐.

    겨울 햇살을 반사하며 환하게 빛나고 있는 황금성을 보며 혜미가 입술을 꽉 깨물었다. 그는 지금 어떤 심정일까. 말고삐를 잡고 고개를 치켜든 그녀의 손에 힘이 더욱 꽉 들어갔다.

    ***

    “승전보를 울린 군대의 귀환은 언제 봐도 아름다운 모습이야. 그렇지 않아?”

    발코니에 나온 크리스티앙이 금줄이 걸린 망원경을 눈에서 뗀 채, 인상을 조금 찌푸리며 웃었다. 개선문을 통과하고 있는 군대의 행렬과 그 옆을 개미 떼처럼 메우고 있는 인파가 보였다.

    “오늘은 군중이 특히나 더 흥분해 있군. 발정이 난 짐승들처럼 말이야.”

    중얼거리는 그의 뒤에서 하이데거 대공이 조심스레 입을 뗐다.

    “폐하. 괜찮으십니까?”

    크리스티앙이 휙 뒤를 돌았다.

    “괜찮을 리가 있겠나?”

    차가운 바람이 부드러운 금발을 흐트러뜨렸다. 열흘째 잠을 이루지 못한 황제의 눈동자가 붉었다. 지금 당장 쓰러진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았다. 그가 눈을 가늘게 뜨며 잇새로 내뱉었다.

    “그리운 누이를 볼 생각에 흥분이 되어서 오줌을 쌀 지경이네. 사람의 신경이 극도로 과민해져 죽을 수도 있는지 실험해 보고 싶은 심정이야.”

    “…폐하.”

    대공의 안색이 어두워지자 크리스티앙이 발코니로 이어진 집무실 안으로 뚜벅뚜벅 걸어 들어오며 픽 웃었다.

    “농담이야. 자네는 좀 쉬지. 마력을 써서 먼 거리를 이동하느라 힘이 들었을 텐데.”

    “힘들지 않습니다, 폐하.”

    하얗게 센 백발을 단정히 하나로 묶은 에리히가 그를 보며 차분히 답했다. 수백 명의 마법사의 마력을 강제로 몸에 흡수한 그는 죽음과 조우하는 고통에 바닥을 기다 간신히 살아났다.

    그의 육체와 상성을 일으키는 마력은 흡수하기가 쉬웠지만, 그렇지 않은 마력을 주입할 때면 눈알이 뽑혀 나갈 정도로 힘이 들었다. 내장이 뒤틀리는 구토와 함께 온몸에서 배설물이 줄줄 새어 나오는 순간을 견뎌야 했다. 마력 흡수의 부작용은 아직도 계속되는 중이었다. 지금도 속이 울렁이며 두통이 일었다.

    “다행이야. 역시… 내 눈이 잘못되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어.”

    크리스티앙이 산뜻하게 웃으며 눈썹을 들어 올렸다.

    “이렇게 빠르고 쉽게 마력을 흡수하다니. 자네야말로 교황 자리에 가장 적합한 인물이지 않아?”

    “…황송합니다.”

    의자에 앉은 크리스티앙은 희미하게 일그러지는 그의 표정 따위는 신경 쓰이지 않는다는 듯 화제를 금방 돌렸다.

    “그들의 입성 후, 일정이 어떻게 되지?”

    “리비에르는 이곳 플라틴성에, 세르노티는 황금성 서쪽인 엘데이라성에 거주하기로 되어 있습니다.”

    리비에르를 대대로 황족이 거주하는 플라틴성에 머무르게 했다는 말에 크리스티앙이 입술을 비틀며 웃었다.

    “잘했군. 일개 노예가 황금성의 정점, 황제와 같은 성에 머무르게 되다니. 이보다 더 영광스러운 일이 있겠는가?”

    “그녀는 폐하께 더욱 충성할 것입니다.”

    빌어먹을 교황 때문에 계획이 완전히 바뀌었지만, 위기를 기회로 바꾸는 것이야말로 그가 가장 잘하는 일이었다. 리비에르는 어떤 쪽에 줄을 대는 것이 현명한지, 아니 그녀의 목숨을 부지하게 될 일인지 곧 알게 되리라.

    권력의 힘을 한번 맛본 자는 그 달콤함에서 쉽게 벗어날 수가 없는 법이었다. 크리스티앙은 승리를 확신하며 말을 이었다.

    “그러고는?”

    “오늘 밤, 폐하의 침실에서 리비에르의 알현을 받기로 되어 있고 내일 오전, 아침 알현 이후에는 황녀와의 공식적인 만남이 있을 예정입니다.”

    오랜 시일을 두고 황궁에 방문하는 귀족들은 황제의 취침과 기상 시간에 맞추어 알현하는 것이 법례로 정해져 있었다. 아무리 의식적인 절차라고는 해도 불면에 시달리는 크리스티앙으로서는 그다지 달갑지 않아 하는 시간임은 당연했다.

    “알현은 취소하고 공식적인 만남만 가지도록 하지.”

    “예. 그렇게 하겠습니다.”

    “황녀와의 접견은 어디서 이루어질 예정이지?”

    “갤러리입니다.”

    “나쁘지 않군. 나와 그녀, 단둘인가?”

    “리비에르 장군과 세르노티의 가주가 함께할 예정인데, 바꾸길 원하십니까?”

    “아니. 그대로 둬.”

    그녀와 둘이 있으면 상대를 죽이고 싶은 충동을 도저히 참을 수가 없을 것 같았다. 크리스티앙이 고개를 까딱였고, 에리히가 사무적인 말투로 보고를 이어 나갔다.

    “승전을 기념하는 가면무도회가 곧 있을 예정입니다. 현재 아메티스에 거주하고 있는 모든 귀족들이 참석합니다.”

    “새로운 세력에 줄을 댈 계획으로 눈들이 시뻘게져 있겠는데?”

    황제가 작게 코웃음을 치자 대공이 즉각 답했다.

    “철회하겠습니다.”

    “간단한 만찬으로 바꾸도록.”

    “예, 폐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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