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1화 (41/72)

발터가 짧게 긍정했다. 가장 힘이 될 수 있는 이를 그들의 편으로 만들기 위해, 자신이 내린 결론이 지금과 다를 리 없다.

“하아….”

혜미가 자조하듯 한숨을 길게 내쉬며 바람에 날리는 머리카락을 손으로 쓱, 쓸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여기서 개고생했을 거라는 소리네.”

어이없는 일이었지만 발터의 입에서 확인받은 사실에 가슴속의 응어리가 아주 조금, 한 귀퉁이만큼 사라지는 기분이 든다. 그리고 그 자리에 아주 조금의 아쉬움이 들어차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결국, 아무것도 피할 수 없었던 거라고 생각하면 좀 짜증 나.”

“일어나야 할 일은 의지에 상관없이 반드시 일어나고야 만다고 하잖아.”

발터가 그녀를 보며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 바람에 실려 오는 그녀의 체취를 깊숙하게 자신의 몸에 새기며 낮게 덧붙였다.

“난 이제 그 말뜻을 좀 알 것도 같다.”

혜미가 그를 향해 한 발 가까이 다가가며 예쁜 눈썹을 들어 올렸다. 구름에 반쯤 얼굴을 내민 달빛이 희끄무레하게 빛났다. 멀리서 부엉이가 울었다.

“넌 대체 언제부터 그렇게 운명론자였어? 난 운명 같은 거 개나 주라고 하고 싶은 심정인데.”

피식 웃는 그녀의 모습에 발터의 심장이 다시금 욱신거렸다. 거리가 가까워질수록 그녀의 체향이 더욱 짙어졌다. 바람에 헝클어지는 그녀의 머리카락을 손에 움켜쥐고 싶어진다. 그는 주먹을 꽉 쥐었다가 놓은 후, 혜미의 몸을 번쩍 들어 발코니의 석재 난간 위에 앉혔다.

“그러지 않으면 쓸데없는 욕심이 자꾸만 생기니까.”

그녀의 허리를 받치고 있던 뜨거운 손이 천천히 떨어졌다. 발터는 자신을 내려다보는 혜미에게 눈을 맞추었다. 짙은 눈꼬리가 호선을 그리며 길게 휘어졌다.

“그리고… 가신을 목숨처럼 생각하는 주군의 곁에서 사는 운명도 꽤 나쁘진 않아서.”

고혹한 달의 주변으로 빛나는 별이 하늘을 꽉 채운 까만 밤. 혜미는 오로지 시야에 그녀만 보이는 듯 행동하는 남자에게 시선을 마주치며 소리 없이 미소 지었다. 밤공기가 차갑게 목덜미를 스치고 지나갔지만 지금 이 순간을 빨리 끝내고 싶지는 않았다.

그녀는 자신의 앞에 선 커다란 남자를 보며 두 다리를 천천히 교차하며 흔들었다. 예전에도 이렇게 높은 곳에서 그를 내려다봤던 일이 많았던 것 같다. 그녀를 보는 그의 표정도 지금과 별반 다르지 않았으리라. 이것은 그녀의 무의식중에 남아 있는 기억일까.

“…난 너와 있었던 모든 일을 다 기억하고 싶은데…. 그게 생각처럼 잘 안 돼서 좀 답답해.”

어차피 같은 상황이 일어날 운명이었다면 대체 왜 이런 시련을 주었을까. 혜미는 몇 번이나 스스로 의문했지만 그 답은 아직도 알 수가 없었다. 다만 확실한 것은, 눈앞에 있는 남자의 마음만은 흔들리지 않는 바위처럼 굳건하다는 사실뿐.

“이든.”

“응.”

발터가 눈을 찌르는 앞 머리카락이 거추장스러운 듯 고개를 한 번 털었다.

“불경한 소릴 한 번 해도 돼?”

“…뭔데?”

무슨 말을 할지 긴장이 됐다. 낮게 헛기침을 한 발터가 그녀를 보며 심각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넌 옛날부터 기억력이 꽝이었어. 그렇게 맛있게 먹어 놓고선 지난밤 식사 메뉴가 뭐였는지도 기억을 못 했다. 세드릭이 널 돌대가리라고 부른 건 이유 있는 욕이었지.”

…뭐라고?

“야!”

혜미가 그를 보며 발끈해 목소리를 높였다. 심각하고 진지하던 공기가 순식간에 확 사라지는 매직이었다.

“어제 뭘 먹었는지가 뭐가 중요해!”

그녀는 난간에서 휙 뛰어내린 후 그의 얼굴을 양 손바닥 안에 가두었다. 발터는 조금 움찔했지만 그녀의 손을 피하지는 않았다.

“지금부터 뭘 먹을지가 더 중요한 거 아냐? 대답해 봐.”

“그래. 맞다.”

목덜미를 붉히던 발터가 피식 웃으며 아랫입술을 혀로 축였다.

“근데 왜 웃어?”

“넌 예전에도 똑같이 말했거든.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그대로.”

“아무리 그래도 세드릭 그 자식은 사람한테 돌대가리가 뭐야?”

“괜찮아. 너도 그에게 복수했었으니까.”

“…어떻게?”

“수프에 개구리를 넣었다고 거짓말했어. 세드릭은 그 자리에서 토했다. 기사들 다 있는 앞에서.”

푸흡, 하고 실소가 터졌다. 혜미가 그를 놔준 후 소리 내어 웃었다.

“하하…. 그 깔끔한 녀석이?”

“응. 나중에 거짓말인 걸 알고는 열이 뻗쳐서 끙끙 앓아누웠지.”

“아 진짜 웃겨. 너무 고소하다!”

“그 뒤가 더 웃겨.”

“뭔데? 어떻게 됐는데?”

키득거리는 보라색 눈동자가 달빛에 반짝반짝 빛났다.

“누군가 네 수프에 진짜 개구리 뒷다리를 두 개 집어넣었거든. 근데 넌 발견하고도 맛있다고 잘 먹었어.”

“왠지 누가 그랬는지 알 것 같아!”

“누구, 세드릭?”

발터의 입술이 길게 늘어졌다. 혜미가 장난기 가득한 얼굴로 고개를 흔들었다.

“아일라 아냐?”

세드릭은 아마 개구리를 잡지도 못할 것 같았다.

“정답. 네가 수프 한 그릇을 다 비우는 걸 보고 아일라가 얼굴이 시뻘게졌었지.”

“하하. 왠지 그럴 것 같더라.”

경쾌하게 웃음을 터뜨리는 그녀를 마주하고 발터 역시 널찍한 어깨를 들썩이며 낮게 웃었다. 자일룬으로 온 이후, 그와 이렇게 마주 보고 편안하게 웃었던 적이 언제였는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그와 그녀는 분명히 같은 시간에서 같은 감정을 공유하고 있다. 그 사실에 감사해야겠지.

“하아….”

한참을 웃은 그녀가 길게 한숨을 쉬며 눈가에 맺힌 눈물을 닦아 냈을 때였다. 부드러운 목소리로 발터가 말을 이었다.

“예전 일은 내가 얼마든지 말해 줄 수 있어.”

“…넌 기억력 좋아?”

혜미가 그를 보며 짐짓 눈썹을 들어 올렸다.

“아니. 세드릭은 너와 나를 쌍으로 돌대가리라 불렀다.”

진지한 얼굴로 내뱉는 말에 다시금 웃음이 났다.

“그러면서 뭘.”

“저녁 식사 메뉴는 기억 안 나지만 네가 매 순간 어떤 표정을 지었는지, 무슨 말을 하며 웃었는지, 무엇 때문에 울었는지는 모조리 기억해.”

두근. 심장이 또 크게 뛰기 시작했다. 발터가 그녀를 직시하며 확고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한 번도 널 바라보지 않은 적이 없었다. 네가 내 시야에 없으면 내 눈은 어느샌가 너를 찾고 있었어. 숨소리와 발걸음, 너의 표정과 버릇까지 나는 모두 알아.”

“…….”

“그러니까 네 자신에게 발목 잡히는 실수는 하지 마. 답답해할 필요도 없다. 너는 너야.”

혜미의 가슴속에서 또다시 붉은 불씨가 타닥거렸다. 묵직하게 마음을 울리는 진심.

“내 눈에 보이는 건, 예나 지금이나 똑같은 한 사람이니까.”

“얼굴이… 똑같아서 그런 건 아니고?”

“꿈에서, 이곳과는 다른 세상에 있던 널 봤을 때 넌 검은 머리칼에 까만 눈동자를 하고 있었지만 난 그게 너라는 걸 의심하지 않았어.”

“어째서?”

“난 눈으로 널 보지 않아.”

“…그럼 뭐야?”

발터가 대답 대신 그녀의 손을 천천히 끌어 제 가슴으로 가져갔다.

“…너뿐이다. 이렇게 되는 것은.”

쿵, 쿵, 쿵, 쿵. 강하고 빠른 속도로 뛰는 심장 박동이 손끝을 타고 그대로 전달되었다. 혜미의 얼굴이 뜨끈하게 달아올랐다.

반칙이잖아. 이건 완전 반칙이야.

“너… 설렘사가 무슨 뜻인지 알아?”

“몰라.”

“모르면 됐어, 바보야.”

혜미는 그의 널찍한 가슴을 주먹으로 쿵, 한 대 때렸다. 쓸데없는 말을 뭐라도 내뱉지 않으면 가슴이 설레서 견딜 수가 없었다. 그를 향한 짙은 소유욕이 손끝에서 온몸으로 화악 번지는 것 같았다.

불길에 스스로가 너무 뜨거워져 버릴까 봐 간신히 참고 있는 그녀에게, 마치 바람을 일으키기로 작정한 사람처럼 굴고 있다는 사실을 발터 본인은 알까.

“아. 검 실력은 솔직히 예전보다 지금이 더 늘었고. 역시 실전만 한 게 없지.”

발터가 짙은 한쪽 눈썹을 장난스럽게 들어 올렸다. 혜미가 가라앉으려는 목을 가다듬으며 애써 입을 열었다.

“지금 잘난 척하는 거야?”

“그럴 리가.”

“그렇게 평가하듯 말하는 게 잘난 척하는 거거든?”

“그랬나. 미안.”

발터가 발코니 난간에 기댄 그녀를 바라보며 후후 웃었다. 밤바람이 그의 머리카락을 어루만져 남자다운 얼굴이 시원하게 드러났다. 혜미는 그에게 입을 맞추고 싶은 강렬한 충동을 느꼈다. 그를 안고 싶은 욕망이 일었다.

그는 그녀의 것이었다. 처음부터 그렇게 결정되었다. 어쩌면 베네딕트의 말이 일부는 맞을지도 몰랐다. 잔인한 클라웨의 피를 타고난 그녀는 사실 지독하게 이기적이고, 모든 것을 다 가져야 직성이 풀리는 성격일지도 모른다.

역시 나는… 이 남자를 아무에게도 줄 수 없어. 너의 몸과 마음은 전부 내 것이다.

“발터.”

또각.

때마침 문밖에서 들려오는 인기척에 발터가 고개를 조금 돌렸다.

“실은 나, 너한테 하고 싶은 말이 있어.”

그가 다시금 그녀에게 눈을 마주쳤다. 발소리는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혜미와 발터, 두 사람 모두 이 발소리의 주인공을 알고 있었다. 부러진 발목을 회복시키려 목발을 짚은 채 천천히 걷고 있는 리비에르다.

끼익. 무거운 문이 열리고 그녀가 안으로 들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리비에르가 고개를 갸웃하며 낮게 중얼댔다.

“…발터도 함께였나?”

혜미는 몇 시간 전, 자리를 떠나는 레나에게 부탁을 했다. 저녁 식사 이후에 발터를 이곳으로 불러 달라고. 그리고 차를 마실 시간쯤에는 리비에르도 보내 달라고 말했다. 레나는 그녀의 말을 정확히 들어준 것이다.

“무슨 일이야? 날 따로 보자니.”

다리를 절뚝이며 걸어오는 그녀를 저지하듯 혜미가 입을 열었다.

“잠시만.”

“응?”

“거기서 기다려 줄래? 내가 지금 발터와 이야기가 다 안 끝났거든.”

리비에르가 천천히 그 자리에 멈추어 섰다. 그리고 목발에 기댄 채 인상을 조금 굳혔다. 혜미의 말투가 조금 묘했던 탓이었다. 뭐랄까. 그럴 리가 없겠지만 마치 명령을 하는 것처럼 들리는 것은 착각일까.

“발터.”

혜미가 의문 섞인 얼굴을 한 발터를 향해 마른 입술을 뗐다. 준비해 왔던 시간이지만 막상 닥치니 긴장이 되는 건 어쩔 수가 없다.

“생각해 보니까 이제껏 난, 단 한 번도 네 기사의 맹세에 제대로 답한 적이 없더라고.”

발터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완전히 사라졌다. 짙은 눈썹이 소리 없이 꿈틀거렸다.

“그동안은 그럴 정신도 없었고, 준비도 안 됐었는데…. 이제는 괜찮을 것 같아.”

그녀의 허리에 찬 단검에서 붉은 보석이 빛나며 어둠을 밝혔다. 의아한 눈빛으로 바라보는 리비에르의 시선을 느끼며 혜미가 말을 이었다.

“다시 한번 말해 줄 수 있겠어?”

숨조차 쉬지 않고 있던 널찍한 발터의 가슴이 마침내 크게 부풀었다.

“발트리의 탑에서 네가 나한테 처음 했던 맹세를.”

“얼마든지.”

발터는 망설이지 않았다. 바닥에 한쪽 무릎을 꿇고 예를 취하는 그의 동작에 절도가 느껴졌다. 검을 바닥에 내려놓은 후, 발터가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헝클어진 머리카락 사이로 강렬하게 그녀를 바라보는 짙은 눈동자가 드러났다. 그는 천천히 심호흡을 했다.

그래. 너와 나는 결국 이렇게 될 운명이었다. 애끓는 목소리가 마침내 그의 성대를 비집었다.

“…세르노티의 가주, 저 발터 세르노티가 폐하의 것이 되기를 감히 원합니다. 저의 칼은 폐하를 위해서만 움직일 것입니다.”

낮아져 갈라진 목소리에 정염, 충성, 혹은 애절함이 뒤섞인 감정이 흘러넘쳤다. 이것은 실연(失戀)이다. 무릎 꿇고 실연을 갈구하는 순간이다. 주인 된 자의 아래에 영원히 머물며 감히 옆자리를 탐하지도, 바라지도 않겠다는 맹세이다. 발터는 단 한 사람을 위해 수백 번이고 같은 말을 반복할 수 있지만 목이 메어 오는 것까지 의지로 멈출 수는 없었다.

“제 미천한 목숨을 폐하를 위해 쓸 수 있도록 허락해 주시겠습니까?”

지난해 겨울, 같은 말을 했을 때 혜미는 놀라서 그의 어깨를 밀어내며 정색을 했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충성을 맹세하는 그를 바라보는 그녀의 표정은 모든 것을 결정한 듯 담담했다.

“신하 된 자로 간절히 청합니다.”

차가운 돌바닥에 무릎을 꿇은 발터가 흙이 묻은 그녀의 구둣발에 입을 맞추었다. 리비에르가 작게 숨을 몰아쉬는 소리가 들렸다.

“폐하께서 계셔야 할 자리로 돌아가실 때까지, 황좌를 찾으실 때까지, 그림자로 살다 죽는 무한한 영광을 제게 허락해 주시겠습니까?”

혜미가 마른침을 삼킨 후, 마침내 작지만 또렷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허락해.”

고개를 푹 숙인 발터의 너른 어깨가 움찔거리는 것이 보였다.

발터.

너는 지금 무슨 표정을 짓고 있을까.

“나는 그대의 주군으로서 도리를 다할 것이며 그대의 충성을 기쁨으로 받아들일 것이다.”

혜미는 바닥을 향해 있는 발터의 정수리를 내려다보며 입술을 지그시 씹었다. 이것은 레이디와 기사의 맹세가 아니다.

주군과 가신의 맹세. 그들 사이의 격차를 확실히 정립하는 의식이었다. 높은 곳에 있는 주군의 아래에 바짝 엎드림으로써 가신은 주군을 평생 우위에 두고 모시게 될 것이다.

“그대는 나의 명령에 죽음을 불사하여 복종해야 할 것이며, 나는 그 대가로 그대에게 충절에 걸맞은 보상을 약속할 것이다.”

기사를 향한 주군의 서약은 그녀가 마음을 정한 후 이미 수십 번 머릿속으로 연습한 말이었다. 그러나 그에게 실제로 내뱉는 것은 엄청난 용기를 필요로 했다. 발터의 몸이 딱딱하게 굳어 가는 것이 눈으로 보이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고개 들어 서약해라.”

발터의 고개가 천천히 들렸다. 기다란 입술이 열리며 실연의 순간에 마침표를 찍었다.

“영원히 폐하의 그림자로 살 것임을 맹세합니다. 심장을 바칠 것을 서약합니다. 제 모든 것을… 폐하께 드립니다.”

젖은 달빛을 담은 그의 눈동자, 소리 없이 일렁이는 목울대를 보며 혜미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그의 마음을 배반하지 않겠다고 몇 번이나 다짐했다.

“일어나라, 발터.”

혜미가 작게 내뱉자 발터가 그녀의 명에 따랐다. 그를 끌어안고 싶었다. 너를 내 발밑에 무릎 꿇리는 일 따위는 바란 적도 없고 하고 싶지도 않았다고 외치는 대신, 그녀는 지그시 입 안을 깨물었다.

발터. 그거 알아? 난 널 내 그림자로 둘 생각이 없어. 내가 황좌를 찾는 그날, 넌 그 지긋지긋한 족쇄에서 해방이다. 내가 그렇게 만들 거야.

“…이게 다 무슨 말이지?”

리비에르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공간을 갈랐다. 길게 굽실거리는 머리카락을 신경질적으로 쓸어 넘겼다. 그녀는 당혹감을 감추지 못해 인상을 쓴 얼굴이었다.

“증인이 되어 주어서 고마워, 지젤.”

리비에르가 하, 하고 기가 막힌다는 표정을 지었다.

“난 지금 설명해 달라고 말하고 있는 거야. 내가 보고 들은 게 대체 뭔지.”

정확히 말하면 혜미가 그녀에게 일부러 보여 준 이 상황이 무엇인지. ‘황좌’를 찾는다는 말이 대체 무슨 뜻인지.

“그래. 이야기할게. 그러려고 오라고 했으니까.”

혜미는 리비에르에게 몸을 돌리며 잠시 심호흡을 했다. 리가스는 죽었고 전쟁은 마무리되었다. 더 늦출 수도, 늦춰야 할 이유도 없었다. 이제는 진실을 이야기할 차례였다. 발터와 리비에르를 한 자리에 부른 까닭은 바로 그 때문이다.

“혹시 죽었다고 알려진 황녀에 대해서 들은 적이 있어?”

“…크리스티앙 폐하의 이복누이를 말하는 건가?”

“응.”

“그게 뭐 어쨌다는 거지…?”

이상한 예감에 리비에르가 얇은 눈썹을 미간에 모았다.

“내가 그녀야.”

밤바람이 휘잉 불어 혜미의 짤막한 머리카락을 날렸다.

“…뭐?”

“에데르트 아이나 클라웨. 그게 황궁에서의 내 이름이다. 세르노티의 기사들은 날 이든으로 불러. 난 그들과 함께 15년 동안 세르노티에서 숨어 살았고.”

리비에르의 입술이 소리 없이 벌어졌다. 차분한 혜미의 얼굴은 재미없는 농담 혹은 장난과는 거리가 멀었다.

“위험해, 이든! 안 돼!!!”

리가스를 따라붙는 혜미를 향해 눈을 크게 뜨고 소리 지르던 레나.

“이든은 어딨지? 어디 있냐고!!!”

제트성에서 달려온 발터가 포효하듯 외치던 모습이 연달아 떠올랐다. 리비에르의 머릿속에서 이제껏 이해가 되지 않고 헷갈렸던 모든 일들이 퍼즐처럼 맞추어지기 시작했다. 세르노티의 기사들이 왜 혜미를 눈에 띄지 않게 보호했는지. 특히나 가주인 발터가 왜 그리도 그녀를 신경 썼는지가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왜… 존재를 숨겨 온 거지?”

리비에르는 당혹감과 분노를 표출하기 이전에 가장 중요한 정보를 먼저 물었다. 그녀가 알고 있는 사실이 정확하다면 죽은 황녀는 대마법사의 보석을 받은 클라웨의 후계자였다.

황태자 시절이 길었던 황제가 가장 어려움을 겪었던 것 역시, 보석을 받지 못한 그가 후계자로 적합하지 않다는 국민들의 인식 개선이었다.

“어릴 때부터 끊임없이 누군가 날 죽이려 했기 때문이야.”

놀랍지 않은 대답이었다. 현재 그녀가 생존해 있다는 사실이 알려진다면 나라 전체가 혼란에 휩싸일 게 분명했다. 누구보다 가장 곤란해질 사람은 모든 난관을 딛고 황위에 오른 현 황제, 크리스티앙이다. 리비에르가 조금 낮아진 목소리로 그녀를 향해 물었다.

“…현재 그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은?”

“세르노티의 기사들, 하르트만의 가주 그리고 아마도 크리스티앙의 최측근들.”

리비에르의 머릿속이 복잡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카플란과의 전쟁에서 하르트만의 가주인 클라라 부인이 중립을 선언하고 뒤로 빠진 것도 그 이유에서였다.

카플란을 격파한 세르노티에게 천운이 따랐다고 생각했었는데, 그 내부의 핵이 황실을 뒤흔들 가장 강력한 위험인물일 줄은 상상하지도 못했다.

“거기다 오늘부로 한 사람이 더 포함되었구나.”

담담히 말을 잇는 혜미를 보며 리비에르가 붉은 입술을 잘근, 씹었다. 발코니를 통해 불어온 바람이 그녀의 어깨를 스쳤다. 새하얗게 드러난 팔뚝에 소름이 일어났다.

황녀라니.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가 있을까.

이제껏 혜미에 대한 리비에르의 감상은 간단했다. 동료애가 깊고 전투력은 최상급이지만 나이에 비해선 아직 순진한 성격. 좋게 말하면 양보를 잘하고 나쁘게 말하면 욕심이 없는 쉬운 상대.

자신이 사람을 잘 본다고 생각했던 그녀의 예상은 모조리 다 틀렸다.

스스로가 황녀임을 밝히는 방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었다. 하지만 혜미는 자신이 보는 앞에서 세르노티 기사단의 가주인 발터 세르노티를 무릎 꿇렸다. 자신의 유혹에는 꿈쩍도 하지 않던 철옹성 같은 남자가 흙으로 엉망진창인 그녀의 부츠를 핥을 기세로 입을 맞추었다.

그의 옆에 서 있던 리비에르는 고개를 아래로 떨어뜨린 발터의 표정이 어떠했는지 확실하게 볼 수 있었다.

애절하게까지 느껴지는 눈꺼풀의 떨림, 입술을 질끈 깨무는 것은 쇼가 아니었다. 그는 누군가에게 거짓으로 충성을 맹세할 수 있는 종자가 못 되었다. 그의 맹세는 진심이었다. 그를 따르는 세르노티의 기사들 역시도 그러하겠지.

자신의 신분을 드러내는 방법 중 이보다 더 확실하고 잔인한 것은 없을 것이다. 리비에르는 마치 신경도 안 쓰던 상대에게 뒤통수를 맞은 기분이었다.

“도대체… 날 속이고 접근한 이유가 뭐지?”

자그마치 두 계절이 넘어갈 시간 동안 그녀는 까마득하게 속아 넘어간 것이나 다름없었다.

스르릉.

시퍼런 날이 달빛을 반사했다.

“날 죽이려는 목적이었어? 그래서 반란이라도 일으키려고?”

검을 뽑아 든 리비에르의 앞을 발터가 막아섰다. 발터가 그녀를 향해 칼을 겨눈 채로 인상을 썼다.

“널 죽이려 했다면 그동안 기회는 차고 넘쳤다.”

반박할 수가 없는 사실이었다. 그녀가 이제껏 발터의 앞에서 의도적으로 무방비하게 있었던 적은 손에 꼽힐 정도로 많았다. 리비에르는 마치 위험 요소를 대하듯 자신의 움직임을 살피고 있는 발터가 지금 이 순간, 아무런 망설임 없이 자신을 찌를 수 있는 인물임을 확실히 깨달았다. 칼끝이 조금 떨렸다.

“그럼 뭐지? 날 감쪽같이 속인 이유가 뭐냐고!”

“난… 널 우리 편으로 만들고 싶었어.”

혜미가 발터를 부드럽게 저지하며 앞으로 한 발을 내디뎠다.

“난 이미 황제 폐하께 충성을 맹세한 몸이다.”

리비에르가 이를 꽉 깨물고 중얼거렸다. 칼 손잡이를 꽉 잡은 그녀의 손에 진땀이 묻어났다.

“도대체 여기까지 내가 어떻게 올라왔다고 생각하는 거지…? 난 크리스티앙 폐하를 위해 이제껏 죽음을 무릅쓰고 싸웠다. 그딴 회유에 넘어갈 거라고 진심으로 생각했던 거야?”

이를 갈듯 내뱉는 그녀를 향해 혜미가 고개를 저었다.

“지젤. 크리스티앙은 언젠가 널 무너뜨리고 말 거야.”

“뭐?”

쇳소리가 튀어나왔다. 혜미가 다시 한번 또렷하게 중얼거렸다.

“널 외면할 거라고.”

“…개소리하지 마.”

“그는 네게 자일룬 출정을 지시하며 고작 2천의 군대를 보냈다. 네가 가진 군사의 반의반에도 못 미치는 숫자지. 그리고 남은 군대는 아메티스에 발을 묶어 두었어. 그것만으로도 확실하지 않아? 크리스티앙은 처음부터 너에게 불가능한 임무를 맡긴 거다.”

“그럴 이유가 없잖아!”

“충분히 그럴 이유가 있지, 넌 강하니까!!!”

그녀를 똑바로 쏘아보며 소리를 높이는 혜미의 목소리는 평소와는 달리 날카로웠다. 리비에르가 그녀를 보며 코웃음을 쳤다.

“내 엉덩이를 핥을 기세로 나온다고 해서 네 손을 잡지는 않아!”

“넌 네 스스로의 가치를 몰라? 크리스티앙은 네가 세력을 확장할까 봐 두려워하고 있어. 이제껏 늘 힘든 싸움에 널 출정시킨 것도 그 때문이었겠지. 네가 불가능한 상황에서도 악바리같이 적들을 격파할 때마다 온갖 감정이 다 들었겠지! 리가스의 목을 벴다는 소식이 지금쯤 그의 귀에 들어갔을 테니, 난 그가 네게 어떤 명령을 내릴지 궁금해.”

리비에르의 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부러졌던 발목이 욱신거리며 통증을 유발했다.

“폐하께서는 날 아메티스로 부르실 거다. 나의 노고를 치하하며 내 군대에 상을 내리실 게 당연하잖아…!”

“과연 그럴까?”

혜미가 씁쓸한 표정으로 반문했다. 그녀는 전쟁이 끝나면 황금성으로 돌아가 코가 비뚤어질 때까지 마시고 취하고 싶다는 리비에르의 말을 똑똑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하지만….

자일룬에서 전투를 거듭할수록 확실히 알게 되었다. 리비에르의 군대는 끊임없이 유입되는 말라쿤과 대적하기에 터무니없이 부족한 숫자였다.

그것뿐일까? 그들은 막판에 배를 곯아 가며 싸워야 했다. 부족한 전쟁 물자를 충당하는 방법은 적군을 약탈하는 것뿐이었는데 말라쿤의 토질이 척박해 그것마저도 불가능했다. 처음에는 호의적이었던 자일룬의 시민들도 길어지는 전쟁에 점점 지쳐 갔다. 물자 지원이 어려워지는 것은 당연한 이야기였다.

“넌 크리스티앙을 어떻게 믿어? 그가 네게 대체 뭘 해 줬길래?”

“…황제 폐하는 내게 귀족 작위를 주었어. 대체 그 누가 노예인 내게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해!”

리비에르가 소리를 버럭 지르자 혜미가 그녀를 향해 인상을 찌푸리며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웃었다.

“귀족 작위? 하하. 네 맘을 움직인 게 겨우 그거야?”

“…겨우?”

리비에르의 녹안에 분노의 불빛이 튀었다. 노예 출신의 그녀가 이 자리에 올라오기까지 어떤 위험을 무릅써야 했는지, 직접 귀로 들은 혜미의 입에서 나온 말을 믿을 수가 없었다.

“아무리 황녀라 해도… 내 인생을 비웃는 건 용서치 않아!”

챙!

리비에르가 이를 갈며 그녀에게 달려드는 순간 발터의 칼이 그녀를 쳐 냈다. 혜미가 한 발짝 다가서며 길게 숨을 내쉬었다.

“잊고 있는 것 같아서 말해 줄 테니 똑똑히 들어. 크리스티앙이 네게 귀족 딱지를 붙여 사지로 몰아내는 동안, 나는 널 위해 내 목숨을 걸었다.”

잇새로 쓴 약을 내뱉듯 중얼거리는 혜미의 연보랏빛 눈동자가 짙어져 확대되었다. 바람에 그녀의 짤막한 머리카락이 마구 날렸다. 그녀는 더 이상 웃고 있지 않았다. 그녀의 목소리가 격양되어 떨렸다. 미끈한 콧잔등에 주름이 잡혔다.

“전쟁에서 죽은 251명을 기억해? 그들은 너를 따라 출정했고 널 위해 싸우다 죽었어. 그리고 사망자는 한 명이 더 있지! 나를 따라 이곳까지 와서 싸우다가 리가스의 칼을 맞고 죽은 빈센트야. 그의 주군은 크리스티앙도, 너도 아니었어! 그는 내 명령에 따라 이곳에 온 거다.”

이제 그의 가족은 그를 영원히 볼 수 없다.

“가슴이 갈기갈기 찢어지는 것 같았다. 내 욕심 때문에 그를 죽음의 길로 몰아넣은 것 같아서 지금도 고통스러워! 그것뿐일까? 빈센트가 리가스의 칼에 맞아 피를 흘리고 있을 때, 난 뭘 하고 있었는지 알아?”

“가까이 오지 마!”

무기도 없이 한 발 더 바짝 가까이 다가서는 혜미를 보며 리비에르가 한 발 물러서며 사납게 소리를 질렀다.

소용이 없었다. 발터를 밀치고 성큼성큼 다가오는 그녀의 보라색 눈동자가 광인처럼 번쩍거리며 빛났다. 혜미는 마치 처음 보는 사람 같은 낯선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녀가 이렇게 큰 소리를 낼 줄 아는 사람이었던가?

“난! 발목이 부러져 울부짖는 널 위해 목숨을 걸고 리가스를 쫓았어! 전쟁에서 이기는 것만으로 부족하다는 네 마음이 보였기 때문에! 기필코 리가스의 목을 베려는 네 의지를 외면할 수 없었기 때문에 밧줄에 몸이 질질 끌려가면서도 줄을 끊지 않았다.”

혜미가 그녀를 향해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 심장이 쿵쿵, 격한 속도로 뛰며 온몸으로 뜨거운 피를 전달했다. 터져 나가는 말이 생각의 속도를 따라잡지 못했다. 토해 내지 않으면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부하를 위해 싸우는 우두머리가 이 세상에 없는 건 아니겠지. 충직한 부하를 위해 목숨을 거는 대단한 성군도 어딘가에는 존재하겠지…! 하지만 난!!! 내가 누군지도 모르는 널 위해서… 날 죽이려는 크리스티앙을 주군으로 생각하는 널 위해 리가스를 쫓았어!”

씹힌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리비에르는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혜미의 말은 거짓이 아니었다. 그녀는 리가스에 손에 죽을 수도 있음을 알고도 홀로 그를 따랐다.

“네 식대로 말해 볼까, 지젤? 네가 그렇게나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모든 귀족의 작위. 그중에서도 그 가장 꼭대기에 있는 황족인 내가….”

리비에르를 마주한 혜미의 입술에서 쐐기를 박는 말이 떨어졌다.

“노예 출신의 기사를 위해 목숨을 걸고 싸웠단 뜻이다.”

“…….”

“이게 무슨 뜻인지, 정말 모르겠어?”

스르륵.

리비에르의 칼끝이 아래로 떨어진 후, 탁 소리를 내며 검집 안으로 사라졌다. 그녀는 자신을 위해 목숨을 건 사람에게 칼을 겨눌 수 있는 이가 못 되었다. 전장에서 함께 싸워 본 이만이 안다. 죽음을 코앞에 두고 싸워야 하는 심정을. 그 상황에서 나보다 남을 더 생각하기가 얼마나 어려운지를.

대의 따위를 집어 던지고, 그녀만 바라보고 있는 군대를 버리고 도망가고 싶었던 적은 그녀 역시 수없이 많았다.

“무슨 뜻인데…?”

“널 내 편으로 만들고 싶다는 뜻이야.”

혜미가 그녀를 보며 마른침을 삼켰다. 목소리는 쉬어 가라앉아 있었지만 광휘의 눈동자는 여전했다.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세상은 노예와 귀족이 동등하게 칼을 경쟁할 수 있는 세상이다, 지젤.”

리비에르의 동공이 소리 없이 흔들렸다. 혜미가 그녀를 향해 말을 이었다.

“양털을 깎는 노예도 실력만 있다면 검투 시합에 나갈 수 있는 게 당연한 세상이라고.”

“…하하. 그게 가능하다고 생각해?”

간신히 입을 열어 자조하듯 뱉은 말이었다. 말도 안 되는 소리였는데, 어이가 없게도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리비에르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눈가가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불가능할 건 또 뭔데?”

툭 내뱉는 혜미를 보며 리비에르가 말없이 붉은 입술을 비틀었다. 비웃고 싶은데 그게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 혜미의 표정은 진지했다.

“네게 귀족 작위는 약속하지 못하겠어. 그렇지만 네 등 뒤에서 칼을 꽂지는 않겠다고 약속해.”

혜미는 그녀와 눈을 마주치며 말을 이었다.

“나는 네가 내 편이 되길 원해.”

“…….”

“네가 나와 같은 곳을 바라보기를 원해.”

앞으로 내민 혜미의 손을 보며 리비에르는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황녀의 손을 잡는다는 것. 그것은 크리스티앙과 반목한다는 것을 뜻했다. 그녀가 이제껏 그렇게 가지고 싶어 발버둥 쳤던 것을 놓아 버린다는 것을 말했다.

“…목숨을 걸고 제안해 줬으니 고려는 해 보지.”

리비에르의 입에서 마침내 흘러나온 대답이었다.

“하지만 기대는 하지 않는 게 좋을 거야.”

휙, 뒤를 돌아 공간을 가로지르는 그녀를 보며 혜미가 마침내 길게 숨을 내쉬었다.

드디어 사실을 말했다.

다리가 후들거렸다. 등줄기에 바람이 들어와 길게 흘러내리는 식은땀을 식혔다. 처음부터 리비에르를 한 번에 설득할 수 있을 거라는 기대는 하지 않았다. 최악의 상황에서 그녀와 칼을 마주하고 싸우게 되는 상황까지 생각했었는데, 이 정도면 나은 상황이라고 볼 수 있었다.

그러나 아직 정리해야 할 일은 끝나지 않았다.

“발터.”

“응.”

혜미가 리비에르의 뒷모습을 보며 아직도 긴장의 끈을 놓지 않고 있는 발터를 향해 낮게 입을 뗐다.

“오늘….”

조금 차가운 밤바람이 열이 오른 얼굴에 닿아왔다. 이미 주사위는 던져졌고 그녀는 더 이상 아무것도 숨기고 싶지 않았다. 발터에 대한 그녀의 마음까지도. 모든 것을 알고 난 후, 선택은 리비에르가 직접 할 일이었다.

“오늘 밤, 네 방에서 자고 가도 될까?”

리비에르의 발걸음이 우뚝 멈추었다. 고개를 돌려 혜미를 바라보는 발터의 짙은 눈동자가 격하게 흔들렸다. 차분했던 시선에 격랑이 이는 것은 잠시였다. 고개를 숙이며 낮게 답하는 목소리 끝이 떨렸다.

“…뜻대로.”

신하를 어떻게 쓰든, 그것은 주인된 이의 마음대로였다. 몸도 마음도 완벽하게 종속된 그에게 거절할 수 있는 권리 따위는 주어지지 않는다.

“아니.”

혜미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모든 용기를 끌어 올려 간신히 내뱉었다.

“난 지금 명령하는 게 아니라 네 의사를 묻는 거야.”

발터가 고개를 들었다. 인상을 써서 가늘어진 시선이 그녀에게 맞추어졌다. 일렁이는 목울대, 부피를 늘렸다 줄이는 널찍한 가슴, 힘이 꽉 들어간 주먹을 차례로 보며 혜미가 마른침을 삼켰다.

잔인하다고 말해도 상관없다. 비겁하다고 말해도 상관없어. 그녀의 마음을 교묘히 떠보았던 리비에르에 대한 유치한 복수일지도 몰랐다. 혹은 발터가 듣고 있는 줄도 모르고 그를 상처 주었던 것에 대한 사과의 표현일지도 모른다. 중요한 건, 그의 답을 기다리는 지금이 몹시도 떨린다는 것이다.

“오늘 밤, 나랑 같이 있자. 발터.”

발터의 기다란 입술이 흰 이에 질끈 씹혔다. 찌푸린 얼굴에 흐릿한 미소가 번졌다.

“…좋아.”

아무것도 없는 공간에 그의 낮은 목소리가 공명음을 내며 멀찍이 울려 펴졌다.

“얼마든지 좋아. 매일 밤이라도 좋다.”

붉어진 얼굴로 거친 숨을 몰아쉬며 발터가 커다란 손으로 마른세수를 하듯 얼굴을 쓸었다. 한 발짝 앞으로 다가온 그의 열기가 눈으로도 느껴지는 듯했다.

“지금 당장이라도 좋아.”

실연의 순간. 그 충격은 지위와 관계없이 모든 사람들에게 공평하게 다가온다.

끼익! 인상을 구긴 리비에르가 거칠게 문을 열어젖혔을 때였다.

탁탁탁!

복도를 울리는 발소리가 요란하게 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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