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0화 (40/72)
  • 처음에는 그저 아직도 흥분이 멈추지 않은 발터의 손이 저절로 떨리고 있는 줄로만 알았다.

    톡. 톡. 톡.

    발터의 짙은 눈동자가 그녀를 바라보며 그리 괴롭게 흔들리지만 않았더라도, 그가 제 입술을 피가 맺힐 정도로 세게 깨물고 있지 않았더라면, 그녀는 그 움직임이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톡. 톡. 톡.

    “발터. 이렇게 세 손가락으로 세 번 두드리면 좋다는 뜻이다.”

    “넌 좋은 게 너무 많잖아. 고기를 너무 좋아해서 훔쳐 먹는 바람에 나까지 이 고생이고.”

    그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기억들이 떨리는 손길을 타고 그대로 그녀에게 흘러들었다. 오래된 헛간이었다. 천장에 난 창문 틈으로 늦은 오후의 햇살이 비추었다.

    짚단에 기대어 발터와 나란히 벌렁 누운 채, 짤막한 머리칼을 한 소녀가 눈을 반짝이며 수신호를 만들고 있다. 벌을 받아 갇혀 있는 중이지만 그들의 얼굴에는 걱정이나 염려 따위가 보이지 않는다.

    “그러게 말이야. 근데 발터. 너는 내 작전에 끼지도 않았으면서 왜 같이 벌 받겠다고 했어? 너, 우리 여기서 사흘간 못 나가는 건 알아?”

    “알고 있으니 그만 강조해라. 그래서 수신호가 뭐라고?”

    발터가 짙은 얼굴을 조금 붉히며 재빨리 말을 돌리자 그녀가 벌떡 일어나 신이 난 표정으로 설명을 잇는다.

    “아. 응. 그러니까 이렇게 세 손가락으로 세 번 톡, 톡, 톡 두드리면. 이건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좋아 미치겠다는 뜻이야. 그냥 좋은 거랑은 비교도 안 돼.”

    “…말로 할 수 없을 만큼 좋아 미치는 것?”

    되묻는 발터를 향해 그녀가 지푸라기를 머리카락에 붙인 채로 강아지처럼 고개를 마구 끄덕인다.

    “응! 완전 사랑한다는 뜻.”

    “…사랑한다는 뜻.”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다 씩 웃으며 손가락을 허공에서 움직이던 발터의 손. 그 손이 긁히고 까진 그녀의 뺨을 같은 속도로 애처롭게 두드린다.

    사랑해.

    사랑해.

    널 사랑해. 이든.

    비밀스러운 그의 고백이 떨리는 손길을 타고 그녀에게 몇 번이나 닿아 왔다. 혜미는 발터의 커다란 손을 붙잡고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피 묻은 그의 손바닥에 천천히 입을 맞추었다. 언젠가 그가 그녀에게 했던 것처럼 길고 뜨겁게.

    발터의 몸이 딱딱하게 경직하며 긴장과 전율을 그대로 드러냈다. 혜미는 그의 격렬한 호응에 화답하듯 발터의 체향을 더욱 깊숙하게 들이마셨다. 감긴 눈가로 눈물 한 방울이 길게 흘러내려 그의 손을 적셨다.

    발터. 내가 너를 좋아하게 된 건 당연했다.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했던 나의 앞에서 절대적인 충성을 맹세하던 너를 보며 가슴이 떨렸다.

    내 손을 놓는 대신, 나를 끌어안고 망설임 없이 절벽 아래로 추락하는 네게 반하지 않을 수 없었다.

    짙은 눈동자에 열망과 흥분이 가득한 괴로움을 담고 있으면서도, 차마 내게 손대지 못하고 발길을 돌렸던 쓸쓸한 뒷모습을 보았을 때도 네가 좋아서 괴로웠다.

    지금 이 순간. 나의 마음은 네 마음과 같다. 사랑을 입 밖에 내지 않고 유예를 두는 건 네 마음속의 짐을 덜어주고 싶기 때문이야.

    그러니 너는 나를 기다려라, 발터. 내가 나의 자리를 되찾고 돌아가 너를 그림자에서 끌어내어 빛 속으로 인도할 그 순간을. 나의 충성스러운 부하로서. 그리고… 나의 연인으로서.

    죽은 짐승에게 박힌 칼에서 붉은 보석이 묵직한 빛을 내며 번쩍이기 시작했다. 지금껏 빛났던 것보다 훨씬 더 어둡고 진한, 클라웨를 뜻하는 붉은 핏빛이었다.

    제국력 179년 늦은 가을. 서기관의 기록.

    동쪽의 국경 도시 자일룬에 위치한 제트성은 본래 야만족의 침입을 막는 최전방의 요새였다. 그러나 제국력 175년, 야만족을 통합한 말라쿤의 왕인 리가스에 의해 총독이 살해되며 그들에게 수년간 점령된 상태였다.

    자일룬은 비옥한 곡창 지대로 약탈에 시달렸지만 말라쿤의 목표는 비단 식량 찬탈만이 아니었다. 그들은 제트성을 거점으로 제국 내 서진이라는 거시적 계획을 세웠다.

    일찍이 이를 간파한 크리스티앙 디트리히 클라웨 9세는 노예 출신으로 작위를 거머쥔 리비에르 백작을 동쪽으로 파견하는 파격적인 인사 조치를 시행한다. 반년에 걸친 동부 출정의 결과, 리비에르 백작은 2천의 군대로 제트성 탈환에 성공한다.

    성을 잃고 도주하던 야만족의 왕 리가스는 랑켈 산맥에서 목이 잘리고, 이 여세를 몰아 리비에르의 군대는 본국에서 몰려온 말라쿤의 지원군을 격파, 대승을 거두어 낸다. 이 과정에서 희생된 아군의 수는 고작 2백 남짓으로 이는 제국 역사상 가장 희생이 적었던 승리이다.

    ***

    제트성의 창밖, 멀리 보이는 나무에서 붉게 물든 낙엽이 소리 없이 떨어졌다. 줄기차게 비를 뿌리던 양 이틀간의 전쟁이 끝난 이후 자일룬의 가을 날씨는 거짓말처럼 맑고 청명했다.

    말라쿤과의 싸움에서 사망한 리비에르의 군사는 251명. 그들의 합동 장례식이 치러지는 날이었다. 리비에르는 전투에서 승리한 군사들의 공을 치하하고 목숨을 바쳐 용맹하게 싸운 그들의 넋을 기리며 전사자의 가족에게 보낼 물자와 위로금을 약속했다.

    하지만 그 무엇도 죽은 자의 목숨값이 되지는 못하였다.

    장례 의식에 세르노티 기사들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들은 제트성 남향에 위치한 방에 모여 있었다. 따스한 볕이 드는 방 한가운데, 침상 위에서 빈센트가 눈을 감고 가늘게 숨을 몰아쉬었다.

    성으로 불려 온 자일룬의 의사는 피를 그토록 많이 흘린 그가 사흘 동안 버텨 준 것만 해도 기적이라고 말한 후, 오늘 새벽 씁쓸한 표정으로 자리를 떴다.

    “빈센트. 내 말 잘 들어.”

    그의 곁에서 레나가 또렷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녀는 사흘 만에 마치 다른 사람이 된 것처럼 수척했지만 빈센트를 바라보는 까만 눈동자만은 형형하게 빛나고 있었다.

    “나, 그때 너한테 베인 허벅지의 상처가 비 오는 날이면 쿡쿡 쑤셔. 아직도 되게 아프다고. 그거 알아?”

    힘겹게 눈을 깜빡이는 빈센트의 커다란 얼굴에는 도통 핏기가 없었다. 레나는 손등으로 코를 훔치며 물기가 들어차는 눈동자를 무섭게 부릅떴다. 차가워지는 그의 뺨을 손으로 어루만졌다.

    “나중에 내 신랑 될 사람한테 단단히 빌어야 해, 너. 예쁜 신부 허벅다리를 이 지경으로 만들어 놨으니 말이야. 응? 그렇잖아.”

    벽에 죽 늘어선 세르노티 기사들은 그런 그녀를 보며 차마 가까이 다가서지도 못한 채, 이를 꽉 물뿐이었다. 그들 모두 직감하고 있었다. 이것이 빈센트의 마지막이 될 거라는 사실은.

    그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 것은 단 한 사람. 혹시나 그가 정신을 놓기라도 할까 봐 끊임없이 그에게 말을 걸고 있는 레나뿐이었다.

    “너희 어머니한테도 싹 다 말해 버릴 거야. 아줌마가 사고 치지 말라고 그렇게 걱정했는데, 나한테 너 부탁한다고… 몇 번이나 신신당부를 하셨는데…. 이렇게 큰 대형 사고를 친 줄 알면… 진짜 화내실걸? 너 불쏘시개로 등짝 맞을지도 몰라…. 하아…. 그러니까 저… 정신 똑바로 차리고… 흐으….”

    그녀의 목소리에 울음기가 번졌다. 빈센트의 가족을 떠올리자마자 뜨거운 무언가가 가슴을 치고 올라오는 것을 참을 수가 없었다.

    “레, 레나…. 미, 미안해….”

    빈센트가 그녀를 보며 겨우 입을 뗐다. 그의 목소리에서 꺼져 가는 생명의 기운이 느껴졌다. 레나가 간신히 눈물을 삼키며 잇새로 내뱉었다.

    “미안하면 얼른 나아서 일어나…. 빈센트! 이렇게 누워 있지 말고 일어나라고!”

    “내 마… 막사에….”

    빈센트가 작은 눈을 힘겹게 뜨며 입을 열었다. 하얗게 말라붙은 입가가 안쓰러웠다.

    “…뭐?”

    귀를 가져다 댄 그녀에게 그의 희미한 속삭임이 들려왔다.

    “주머니 안에… 보… 복숭아, 제… 젤리 있… 다….”

    주르륵.

    결국 레나의 눈에서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렸다.

    이 바보가. 전쟁 중에 막사가 모두 불타 엉망이 된 것도 기억하지 못하는 거야?

    “저… 전투가 끝나면… 주, 주려고 했는데….”

    레나가 코를 들이마시며 고개를 저었다. 떨리는 목소리가 벌게진 입술 새를 비집었다. 그러지 않으려고 해도 자꾸만 희한한 목소리가 튀어나온다.

    “직접… 흐윽…. 네가… 직접 줘.”

    “미안… 해….”

    빈센트가 고통에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다시 한번 같은 말을 반복했다. 레나의 얼굴 역시 소리 없이 구겨졌다. 그녀가 고개를 마구 흔들었다.

    “안 돼. 안 돼…. 빈센트…. 흐윽…. 안 된다고….”

    “파, 파비안과 야… 약속했는데….”

    레나와 파비안의 아버지는 그들이 어릴 때 사냥을 하다 늑대에게 목을 물려 죽었다. 어머니는 전염병에 걸려 돌아가셨다. 그래서 훗날, 레나가 결혼할 때 파비안이 그녀의 손을 잡아 줄 예정이었다. 무슨 일이 생겨서 파비안이 그 자리에 없을 경우에는 빈센트가 그 역할을 대신하자고 약속했다. 그들 셋은 가장 가까운 친구이자 가족이었으므로.

    “약속을… 못 지킬 것… 같다….”

    빈센트의 작은 눈에도 눈물이 맺혔다. 또다시 미안, 하고 속삭이는 그의 목소리는 꺼져 가는 불꽃처럼 희미했다.

    “안 돼! 안 돼애!!!”

    결국 레나는 그의 손을 잡아채며 큰 소리로 울부짖었다. 그녀가 고개를 세차게 저을 때마다 굵은 눈물이 아래로 뚝, 뚝, 떨어져 빈센트의 손등을 적셨다.

    “너… 너마저 날 떠나면…. 난… 난 어떻게 살아…? 빈센트… 난… 나는!”

    몸을 덜덜 떨며 오열하는 그녀의 손을 잡고 빈센트가 중얼거렸다. 그의 눈앞이 점점 흐려지고 있었다.

    “레, 레나…. 우리가 어릴 때 다 함께 불렀던 노래…. 기억해…?”

    “흑…. 흐윽…!”

    “빈센트! 아까 나랑 연습한 노래 해 보자! 까먹은 거 아니지?”

    “아… 아니다.”

    “그럼 해 봐! 어디 한 번.”

    “흠. 흠…. 비, 빛나는 태양과 함께하는 그림자. 내 이름은 빈센트. 가장 큰 그림자. 추운 겨울 버티는 백곰 같은 그림자.”

    “백곰이 아니라 불곰이잖아!”

    “내… 내 얼굴은 하얀색인데.”

    “불곰이 더 카리스마 있어! 불곰으로 해.”

    빈센트의 얼굴에 아주 희미한 미소가 번졌다.

    “그 노래… 가 지금, 생각 나….”

    “내 이름은 레나. 가장 작은 그림자. 머리칼이 새까만 사슴 같은 그림자!”

    “에헴. 그중에 나는 가장 멋진 그림자. 빠르고 용맹한 표범 같은 그림자.”

    “에이. 파비안 오빠가 표범이라고? 고양이면 모를까, 그건 아니다! 그치, 빈센트?”

    “으, 응. 레나 말이 맞는 것 같다. 그리고 고양이도 멋져.”

    “어휴. 빈센트, 넌 저 깍쟁이 같은 게 죽으라면 죽을 거지? 속 터진다.”

    “파비안이… 보고 싶다….”

    레나가 초점이 흐려진 얼굴로 중얼거리는 그의 가슴에 무너져 오열했다.

    “으흑…. 으으으…. 으흐윽…!”

    떼를 써도, 고집을 부려도 그녀의 말이면 허허실실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던 빈센트였다. 그녀가 붙여 준 노랫말처럼, 커다란 불곰같이 강하던 그가 그녀를 떠나려는 현실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먼저… 가서 그와, 놀고… 있을… 게.”

    빈센트가 그녀에게 잡힌 손에 힘을 주었다.

    “레나, 너는 천천히… 반드시 천천히… 와라.”

    마지막 사력을 다해 그녀의 손을 잡으며 속삭이는 그를 보며 레나가 정신 나간 사람처럼 흐느꼈다.

    “안 돼…. 싫어…. 싫다구…! 빈센트, 가지 마, 제발…. 흐윽…. 제바알!!!”

    쌍둥이 오빠인 파비안의 갑작스러운 죽음은 그녀의 반쪽을 잃는 느낌이었다. 그 시간을 견뎌 낼 수 있었던 건, 그와의 추억을 함께한 빈센트가 늘 곁에 있어 주었기 때문이다.

    “나는 혼자 못 해. 아무것도 할 수 없어…! 너마저 떠나면…. 나는… 나는 어떻게 해? 흐윽…. 왜 내가 소중하게 생각하는 모든 사람들은 나를 떠나는 건데! 왜…!”

    “…그게 아니다…. 레나.”

    빈센트가 처음으로 그녀의 말을 부정했다. 눈물로 엉망이 된 얼굴로 매달린 그녀를 보며 안간힘을 쓰듯 마지막 목소리를 끄집어냈다.

    “떠나는 게… 아니라…. 잠시 떨어져 있는 것….”

    숨이 가빠 온다. 시야가 흐려진다. 빈센트의 머릿속에 오래전 어린 레나와 파비안이 떠들던 목소리가 메아리치듯 들려왔다.

    “에헴. 친구는 아무리 떨어져 있어도 친구거든. 너는 오늘부로 영원히 우리 쌍둥이의 친구가 되는 거다. 어디에 있든, 뭘 하든 영원히 친구. 알았냐?”

    “으, 으응.”

    맹세의 증표로 마을에서 수령이 가장 오래된 나무 아래에 각자 지니고 있던 소중한 물건을 묻었다. 반짝이는 구슬. 오래된 목각 인형. 늑대의 송곳니로 만든 목걸이까지.

    “그래서 너 못생겼다고 놀린 애들이 누구라구? 흐응. 다 죽었어!”

    “나와… 친구 해 주어서… 정말 고맙다. 레나.”

    빈센트는 레나의 품 안에서 조용히 눈을 감았다. 묵직한 그의 고개가 옆으로 힘없이 떨구어졌다. 레나는 그를 끌어안고 미친 듯이 울부짖었다.

    “내가 잘못했어, 빈센트…! 내가 다… 내가 잘못했어! 그러니까 제발 일어나…. 응? 제발…. 흐으윽…. 아아…. 오빠…. 파비안…! 이러지 마…. 빈센트 데려가지 마. 아빠, 제발 도와주세요…! 으흑…. 으허어억. 으흐으윽….”

    빈센트의 임종을 차마 지켜볼 수 없어 문 뒤에 서 있던 혜미가 양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차갑게 떨리는 몸이 주르륵 미끄러져 아래로 주저앉았다.

    “레나…. 레나!!!

    정신을 잃은 레나에게 달려가는 세르노티 기사들의 외침이 화살이 되어 그녀의 심장에 툭, 툭, 박히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빈센트의 장례식은 간략하게 치러졌다. 레나의 뜻에 따라 그의 유골은 항아리 안에 담겼다. 그의 유해는 반드시 세르노티로 데려가서 묻어 줘야 한다는 그녀의 강력한 의지 때문이다.

    부드러웠던 가을바람은 하루하루가 다르게 점점 차가워지고 있었다. 부상을 당한 군사들은 하나둘씩 자리에서 일어나 몸을 움직이기 시작했고, 전쟁으로 엉망이 되었던 성의 안팎은 차례차례 정리되고 있는 중이었다.

    “레나.”

    작게 그녀를 부르자 레나가 고개를 들었다. 그녀는 아직도 바닥에 핏자국이 채 가시지 않은 방에 홀로 앉아 있었다. 리가스가 시체들을 주르륵, 매달아 놓았던 곳. 빈센트가 그의 칼을 맞고 쓰러진 곳이었다.

    “옆에 앉아도 돼?”

    “그럼. 당연한 소릴 하네.”

    레나가 힘없는 얼굴로 혜미를 보며 웃었다. 늘 여러 갈래로 촘촘하게 땋아 내렸던 그녀의 머리카락은 길게 풀어져 있었다. 건강한 혈색으로 반짝이던 그녀의 얼굴은 볼이 쑥 들어가 수척했다. 열린 발코니에서 바람이 불어오자 헝클어진 레나의 머리가 아무렇게나 흩날렸다.

    “참 이상하지.”

    낙엽이 떨어지는 걸 보고 있던 그녀가 문득 중얼거렸다.

    “…뭐가?”

    “빈센트가 죽고 나서는… 내가 그렇게나 환장하던 복숭아 절임을 봐도 아무런 느낌이 안 드는 거 있지.”

    혜미는 목구멍이 부어오르는 걸 느끼며 멍하니 눈을 깜빡이는 그녀의 옆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레나가 초점 없는 시선으로 창밖을 보며 말을 이었다.

    “어쩌면 나는 단것보다, 그걸 많이 먹으면 이앓이를 한다는 녀석의 잔소리가 더 좋았나 봐.”

    랑켈 산맥에서 빈센트의 부상 소식을 들었을 때만 해도 레나는 애써 씩씩하게 손을 내저으며 말했었다. 빈센트는 워낙 튼튼하고 강해서 괜찮을 거라고. 마치 자신에게 주문을 걸듯 몇 번이나 되풀이했다.

    피투성이가 되어 의식을 잃은 빈센트를 눈앞에서 마주했을 때만 해도 그녀는 의연했다. 의사의 옆에서 꼬박 밤을 새우며 그를 간호했고 본인이 쓰러지면 안 된다고 열심히 밥까지 챙겨 먹을 정도였다.

    “할머니가 그랬거든? 신은 인간이 감당할 수 있을 만큼의 슬픔을 준다고. 견딜 수 있을 만큼만 힘들게 한다고. 아빠가 죽었을 때도, 엄마가 죽었을 때도, 오빠가 죽었을 때도, 같은 말을 했었어. 근데… 그거 거짓말 같아.”

    마치 혼이 빠진 사람처럼 중얼거리는 레나는 며칠 전과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어 버린 것 같았다. 혜미는 저도 모르게 두려워져 그녀의 손을 붙잡고 말았다.

    “말이 안 되는 것 같아….”

    레나가 그녀를 바라보며 길게 숨을 내쉬었다. 빨갛게 물든 낙엽이 바람을 타고 날아들었다. 까만 눈동자에 투명한 눈물이 차오르고 있었다.

    혜미는 레나가 감당할 수 없는 슬픔에 괴로워하고 있는 걸 알았다. 모를 수가 없었다. 늘 밝게 웃던 레나의 무너짐은 기사단 중 그 누구도 손을 쓸 수 없는 지경이었다. 벌써 며칠째 밥을 굶었다.

    “…빈센트 대신 내가 갔어야 했는데.”

    원래 빈센트는 레나와 함께 랑켈산에서 매복을 할 예정이었다. 하지만 리비에르인 척하고 선두에서 싸워야 할 아일라를 염려한 탓에 이곳으로 보내졌고, 리가스의 칼에 찔려 결국 숨을 거두었다.

    “미안해, 레나.”

    혜미가 꺼져 들어가는 목소리로 그녀에게 속삭이듯 내뱉었다. 당시 혜미는 부상당한 빈센트를 붙들고 마법사의 보석을 문지르는 미친 짓을 몇 번이나 반복했다. 이번엔 아무도 그녀를 비웃지 않았다. 그만큼 빈센트의 회생이 간절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다. 붉은 보석은 뚝뚝 떨어지는 그녀의 눈물을 머금을수록 더욱 환하고 아름답게 빛을 내고 있을 뿐이었다.

    “정말 미안해.”

    죄책감이 가득한 표정으로 다시 한번 되뇌는 혜미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레나가 희미하게 웃었다. 그녀의 탓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다. 설사 그녀의 탓이었다고 해도, 아무도 그녀를 원망할 수 없다는 사실도.

    “어릴 때 우리 꿈은 가장 멋진 그림자가 되는 거였거든.”

    “…….”

    “노래까지 지어 불렀어.”

    레나의 입술에서 희미한 노랫소리가 흘러나왔다. 세르노티에 살던 사고뭉치 삼총사의 이야기였다. 한 명은 덩치가 크고 못생겼다고 놀림을 받았고, 쌍둥이인 두 명은 고아인 탓에 차림새가 지저분했다. 그렇지만 그들에겐 꿈이 있었다.

    빛나는 황제의 그림자가 되는 것이었다.

    한 명은 키가 아주 컸고, 한 명은 반대로 작았다. 다른 한 명은 날래고 빨랐다. 세 그림자가 동시에 움직이면 아무도 대적할 수 없었다. 아무도 그들을 놀릴 수가 없었다.

    “부탁이 있어, 이든.”

    노래를 끝낸 후, 레나가 혜미를 향해 떨리는 입술을 간신히 열었다.

    “빈센트는 가장 크고 멋진 그림자였다고… 말해 줄래?”

    “…레나.”

    “폐하의… 입으로 직접 말해 주시겠습니까…?”

    혜미는 그녀의 앞에서 울지 않으려 안간힘을 써야 했다. 가장 가까운 이를 잃은 슬픔을 감히 이해한다고 말할 수가 없었다.

    “빈센트는….”

    “…….”

    “나 따위에게는 과분할 정도로 강하고 훌륭한 그림자였어.”

    다리가 부러진 작은 새가 우는 듯한 흐느낌이 레나의 입술에서 흘러나왔다.

    “나는 날 위해 싸우다 죽은 그의 희생을 절대, 죽어도, 잊지 않을 거야. 맹세해.”

    빈센트의 핏자국이 흐트러진 바로 그 자리에서 무릎 꿇은 채, 혜미가 이를 꽉 물었다. 눈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그녀는 눈을 부릅뜨고 레나를 향해 피를 토해 내듯 한 글자 한 글자를 곱씹어 뱉었다.

    “더 이상 아무도 희생하지 않아도 될 수 있도록 강한 사람이 될게. 내가 노력할게. 그러니까… 제발 버텨 줘, 레나. 무너지지 말아 줘.”

    레나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그녀의 간절한 진심이 느껴진 까닭이었다.

    “내게 고개 숙이면 안 되는 거…. 몰라?”

    “난 그런 거 모르겠어. 내가 고개 숙여서 빈센트가 살아날 수 있다면 백번이고 천 번이고 그럴 거야. 무릎 꿇고 빌 거다.”

    “…이든.”

    그렇게 해도 죽은 사람은 살아 돌아올 수 없다는 걸 안다.

    “정말 미안해, 레나.”

    레나의 까만 눈동자에서 이제 다 말랐다고 생각한 눈물이 다시금 또르륵, 흘러 그녀의 뺨을 적셨다. 태양이 위치를 바꾸자 창밖의 나무 그림자가 그들의 몸 위로 길게 늘어졌다. 마치 빈센트의 커다란 그림자 같았다.

    ***

    레나가 떠나고 난 후에도 그녀는 한참 동안 텅 빈 공간을 지켰다. 말라쿤이 퇴각한 후 재건이 활발하게 이루어지는 제트성 내에서도 이곳은 사람들의 발길이 드물었다. 공간을 꽉 채우고 있던 시체들은 이미 사라졌음에도 잔인하게 희생된 그들의 비명이 들리는 착각이 든다고 했다.

    활짝 열린 발코니로 걸어 나가 바람을 맞았다. 붉은 태양이 하늘의 구름을 온통 핏빛으로 물들이다 저무는 모습을 바라보았고, 어둠이 소리 없이 밀려와 그 자리를 채우는 것을 조용히 응시했다.

    한국에서는 이렇게 오래도록 하늘을 바라볼 기회가 많이 없었는데. 가로등도, 번쩍이는 네온사인도, 높은 고층 건물도 없는 이곳에 오고 난 후에는 하늘을 쳐다보는 일이 늘었다.

    하늘의 풍경은 매일 달랐다. 1년이 365일이라면 하늘은 365개의 캔버스를 가지고 있는 게 틀림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아래에 서 있는 그녀 역시 마찬가지다. 껍데기는 같을지언정 어제의 그녀와 오늘의 그녀는 분명히 달랐다.

    전쟁을 치르기 전과 후. 빈센트가 죽기 전과 후. 리비에르를 만나기 전과 후. 카플란과 싸우기 전과 후. 클라웨에 떨어지기 전과 후가 같을 수 없는 것은 당연했다.

    그렇다면 기억을 잃기 전의 이든과 지금의 나는… 같은 사람일까 아니면 다른 사람일까. 이대로 한국으로 돌아간다면 어떻게 될까. 그녀는 예전과 같이 적당히 지루하고 적당히 평화로운 삶을 살 수 있을까. 과연 그게 가능하기나 할까.

    아니. 다 떠나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들기는 하나.

    발코니의 돌벽을 짚은 혜미의 손에 힘이 꽉 들어갔을 때였다.

    탁.

    문이 열리고 닫히는 인기척에 그녀가 고개를 돌렸다.

    “발터.”

    어두운 발코니에서 희미한 달빛을 등지고 서 있는 그녀의 앞으로 발터가 천천히 다가왔다.

    “레나가 가 보라고 해서 왔어.”

    “…레나는 좀 어때?”

    “기사들과 식사를 같이 했다. 얀이 괜히 분위기를 띄우려고 시끄럽게 떠들다가 레나에게 타박을 들었어.”

    특별할 것 없이 식사 자리에서 늘 벌어지던 일상적인 일이었는데, 그 이야기를 들으니 괜히 눈시울이 뜨끈해진다.

    “춥지 않아?”

    “응. 괜찮아.”

    “혼자서 뭐 하고 있는 거야. 저녁도 먹지 않고.”

    “생각을 좀 했어.”

    “…그랬군.”

    발터는 그녀의 곁으로 다가와 설 뿐, 별다른 질문을 하지 않았다. 저녁 식사가 끝난 성 밖은 조용했다. 멀리서 커다란 매가 날개를 펼치고 날아갔다. 얼마 전에 이곳이 불화살에 휩싸였다는 것이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정적인 풍경이었다. 성벽 너머, 마치 새까맣고 거대한 성처럼 보이는 랑켈산을 바라보며 그녀가 입을 열었다.

    “발터.”

    “응.”

    “리비에르의 병사들이 지나가듯 그러더라? 크리스티앙은 지금, 제국의 179년 역사를 집대성한 책을 편찬하는 중이라고.”

    다른 이들은 그것을 역사광인 황제의 손이 많이 가는 취미 정도로 생각하는 듯했다.

    “거기에는 우리의 이번 전투가 어떻게 적힐까.”

    “…위대한 승리로 적히겠지.”

    잠시 망설이다 대답하는 발터의 곁에서 혜미가 중얼거렸다.

    “아무래도 그렇겠지?”

    “응.”

    “나는 그게 맘에 안 들어.”

    가라앉은 그녀의 말투는 평소와는 달리 차가웠다. 발터가 고요한 시선으로 그녀의 옆모습을 바라보았다. 기억을 잃기 전에도 동료에게 깊이 의지하던 이든이다. 가족이 없는 그녀에게 성안에서 함께 자라고 훈련한 기사들은 동료 그 이상의 존재였다.

    “아니. 맘에 안 드는 정도가 아니야. 희생한 이들의 이름이 지워지고 마치 모든 것이 승리를 위해 당연한 거였다고 여겨지는 게 참을 수 없이 화가 나는 거 있지.”

    “…빈센트는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해 싸웠어.”

    발터가 낮게 중얼거리자 혜미가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그의 죽음을 헛되이 하지 않는 방법은 우리도 그만큼 최선을 다하는 것뿐이다.”

    혜미는 그의 표정에 깊게 숨겨진 슬픔을 읽었다. 모두가 슬픔을 애써 꾹꾹 눌러 참고 있을 뿐이었다. 레나와 발터만이 아니라 세르노티의 기사들 전부가.

    “그래. 이런 식으로 책임감이 하나둘 쌓여 가는 거구나.”

    길게 숨을 내쉬며 그녀가 눈을 깜빡였다.

    “위로 올라갈수록 내 어깨는 더욱 무거워질 거라는 예감이 들어. 솔직히 생각만으로도 압사할 것 같다. 궁전을 떠난 내가 왜 기억을 잃었는지도 이해가 돼.”

    “…….”

    “어린 나였어도 본능적으로 알았던 거겠지. 황녀로 산다면 이 난리를 계속 겪어야 한다는 사실을 직감했던 것 같아.”

    나직하게 혼잣말하듯 내뱉는 그녀의 곁에서 발터가 주먹을 꽉 쥐었다 폈다. 그녀가 지금 힘들어하고 있다는 사실은 그가 가장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 피하지 않으려고.”

    혜미가 그를 향해 입술을 올려 흐릿하게 웃었다. 발터는 그녀의 얼굴을 말없이 직시했다.

    “좋은 황제, 대의를 가진 성군. 그런 건 어떻게 되는 건지 아직도 모르겠다.”

    앳된 얼굴로 속삭이던 스무 살 이든의 얼굴이 그녀의 표정에 겹쳐진다.

    “난 그냥… 내 사람들을 지키고 싶은 생각뿐이야. 더 이상 나 때문에 아무도 다치지 않았으면 좋겠어.”

    혜미는 아무 말 없이 그저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는 발터의 속내를 알아차리지 못하고 물었다.

    “내가 너무 감상적이라고 생각해? 뜬구름 잡는 소리만 한다고, 바라면 안 되는 걸 바란다고 생각하니?”

    “아니.”

    발터가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차가워진 바람이 코끝을 스쳤다. 겨울. 그가 평생 잊을 수 없는 그 계절이 다가온다는 뜻이다. 그들이 사랑을 나누던 동굴 안. 그가 피워 놓은 모닥불의 불씨가 아직 꺼지지도 않은 곳에서 피투성이가 된 채 쓰러져 있던 그녀를 떠올리기만 해도 심장이 저릿하게 아파 왔다. 그때는 아무것도 못 했지만 지금은 조금 다를까.

    나는 네가 흔들릴 때, 믿고 기댈 수 있는 안전한 기둥이 되어 줄 수 있을까. 이든.

    발터가 잠기는 목을 가다듬었다.

    “아버지가 항상 설교하던 소리가 있었어.”

    “…뭔데?”

    “아무리 암살단이라 해도 인간의 목숨을 파리처럼 여겨서는 안 된다고. 살인은 최후의 선택일 뿐, 그걸 오직 목적을 위한 단 하나의 수단으로 여겨서는 안 된다고.”

    “…암살단한테는 안 어울리는 소리 아냐?”

    옅게 웃는 혜미를 향해 발터 역시 희미한 웃음을 지었다.

    “맞아. 사람을 가장 효과적으로 죽이는 방법을 가르치면서 그게 무슨 말이냐고, 넌 대놓고 발트리에게 물었다.”

    “꼴통 짓 한다고 혼났을 것 같은데.”

    “발트리는 널 아꼈어. 흐뭇한 표정으로 바라봤었지. 아들인 내가 질투가 날 정도로 깊고 애틋한 시선으로 널 봤어. 난 나중에야 그 이유를 알았고.”

    “…….”

    “아까 네가 한 말을 듣는다면 가장 기뻐할 사람도 그라고 생각해. 발트리는 고지식한 이상주의자였거든. 자신의 사람을 소중히 여기고 생명을 경시하지 않는 군주를 분명 자랑스러워했을 거야.”

    “솔직히… 인간이라면 그건 당연한 거 아냐?”

    혜미가 의문을 담은 얼굴로 그에게 되물었다. 사이코패스가 아니라면 그 누가 사람을 죽이는 걸 좋아할까. 전투가 끝난 후, 물가에서 몸에 말라붙은 피를 씻어 낼 때면 아직도 기분이 이상해지는데. 게다가 가까운 친구의 죽음에 태연할 수 있는 사람은 또 어디 있단 말인가.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에게 그건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니까. 높이 올라갈수록… 아마 더 그런 모양이다.”

    중얼거리듯 말하는 발터의 표정은 조금 씁쓸했다. 혜미는 그를 잠시 바라보다 문득 물었다.

    “발터. 만약 내가 그때 죽지 않았었다면 말이야.”

    “…….”

    희미한 달빛이 비추는 얼굴이 조금 움찔거렸다.

    “4년 전 겨울, 내가 페터의 칼에 살아남았더라면 그 이후엔 어떤 일이 일어났을까?”

    발터가 마른침을 삼키자 목울대가 소리 없이 일렁였다. 잠깐의 침묵 끝에 그가 낮지만 또렷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누군가가 페터를 죽였겠지.”

    높은 확률로 그것은 아마 발터의 손에 의해 이루어졌을 것이다.

    “…그리고 카플란은 날 찾는 걸 멈췄을까?”

    “아니. 정보는 어떻게든 새 나갔을 테고 그들은 우리를 쳤을 거야.”

    결국 카플란과의 전쟁은 피할 수 없었을 거라는 말과도 같았다. 혜미의 머릿속에 한쪽 팔을 잃은 세드릭이 스쳐 지나갔다. 그녀가 마른침을 삼켰다.

    “그리고 누군가는 다쳤겠지…?”

    “아마도.”

    희생 없는 싸움이란 절대 불가능하다는 사실은 이제 그녀도 뼈에 사무치게 잘 알았다. 세드릭이 다치지 않았더라도 그보다 더 큰 희생이 일어나지 않았으리라는 보장이 없는 것이다.

    “그 후에는?”

    “결국 너는… 결단을 내릴 수밖에 없었을 거라고 생각한다.”

    “무슨 결단?”

    혜미가 그를 보며 눈을 깜빡였다. 그의 시선이 짙어지고 발터의 목소리가 조금 더 낮아졌다.

    “결국 네 출생의 운명을 받아들이기로 결정하지 않았을까.”

    그의 얼굴이 조금 쓸쓸해 보이는 것은 그녀만의 착각이 아니었다. 혜미가 그의 말을 의심하듯 목소리를 조금 높였다.

    “내가 클라웨라는 사실을 가장 싫어했던 건 내 자신이었다면서. 도망치고 싶어 했다면서. 잊고 싶어 했다면서.”

    “널 위해서가 아니라….”

    발터가 잠시 말을 멈추고 아랫입술을 잘근 씹었다. 억눌린 목소리가 그의 성대를 비집었다.

    “우리를 지키기 위해서 그랬을 거란 뜻이야. 그러지 않는다면 결국… 널 숨긴 발트리와 세르노티 전체가 위험에 빠지게 된다는 것을 깨달았을 테니까.”

    발터는 이든의 성정을 잘 알았다. 그녀는 함께 자란 가족과 같은 기사들이 다치고, 죽어 나가는 비극을 도저히 견딜 수 없었을 것이다.

    인상을 쓴 혜미의 눈 아래 근육이 가늘게 파들거렸다.

    “그럼… 나 말고 너는?”

    자신의 출생에 담긴 비밀을 알고 충격받았던 것은 발터 역시 마찬가지였을 게 틀림없었다. 그녀와 결혼하고 그녀를 닮은 아이를 낳고 싶어 했던 그는, 평범한 꿈이 산산조각 났을 때 과연 어떤 선택을 했을까.

    “지금과 같았을 거다.”

    발터가 나직하게 입을 열었다. 짙은 속눈썹이 위로 들리며 갈색 눈동자 속에 담긴 그의 진심을 그대로 드러냈다.

    “…무슨 뜻이야?”

    “네 앞에 무릎 꿇고 기사의 맹세를 했을 거란 뜻이다.”

    “…….”

    “영원히 충성하겠다고. 그림자로 살겠다고.”

    네 연인이 될 수 없는 나는, 그렇게라도 네 곁에 남아 있고 싶었을 테니까.

    두 쌍의 시선이 공중에서 부딪치다가 느리게 얽혔다. 그들은 잠시 마주 보고 서서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결국 우리는 자일룬으로 왔을 거라는 뜻이야?”

    “맞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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