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8화 (38/72)
  • 그를 포함한 모든 이들은 이제야 크리스티앙의 속뜻을 파악하고 있었다. 황제는 그들에게 쓸데없는 데 신경 쓰지 말고 입 닥치라고 내뱉는 중이었다.

    클라웨의 최고 권력은 황제인 크리스티앙. 아무리 황후를 들였다고 한들, 황후 역시 그보다는 낮은 지위였다. 황후에 대한 모욕적인 언사를 서슴없이 내뱉을 수 있는 이유는 그 때문이다.

    만일 이 자리에 하이데거가 있었다고 해도 크리스티앙은 태도를 전혀 바꾸지 않았으리라. 오히려 그의 충절을 시험하듯 그녀의 오라비로 하여금 황후를 직접 이 자리에 데려오게 만들었을지도 모른다.

    “부디… 롤랜드 후작에게 관용을 베풀어 주십시오, 폐하.”

    원로원의 대신들이 모두 고개를 숙이자 크리스티앙이 혀로 마른 입술을 축이며 싱긋 웃었다.

    “일어나게, 롤랜드 경.”

    롤랜드가 황제의 명령에 따라 자리에서 일어났다. 무릎이 후들거렸다.

    “경은 지금까지 그랬듯 맡은 일을 열심히 해 주게나. 국정보다 짐과 황후의 부부 생활에 관심이 더 있는 게 아니라면 말이야.”

    크리스티앙의 눈은 후작을 향해 있었지만 원로원에 있는 모두에게 하는 말과 다름이 없었다. 스타니 백작이 그 자리에서 몸을 잘렸던 것이 고작 몇 개월 전이었다. 얼룩 한 점 없이 깨끗이 닦인 회의장의 바닥에서 그가 흘린 비릿한 피 냄새가 올라오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황제의 예민함은 광증이라고 생각될 정도였고, 날이 갈수록 더욱 심해지고 있었다. 열두 명의 원로원 좌석 중 올 한 해 동안에만 세 개의 자리가 비어 나갔다.

    그다음 차례는 누가 될까. 자신의 목을 과연 부지할 수 있을까? 황제를 대할 때마다 매번 날카롭게 벼린 칼날 위를 아슬아슬하게 걷는 것 긴장의 연속이었다. 입을 꾹 다문 최고 귀족들은 호아킴이 어서 빨리 돌아와 균형을 잡아 주기를 진심으로 바랄 뿐이었다.

    “더 할 말 없으면 이만 해산할까?”

    크리스티앙이 산뜻한 목소리로 내뱉으며 일어나려 했을 때였다.

    “폐하.”

    서기관의 옆에서 유령처럼 침묵을 지키고 서 있던 교황 베네딕트가 입을 뗀 것은 그때였다. 자리를 물리려던 크리스티앙이 슬쩍 인상을 찌푸리며 옆눈으로 그를 보았다.

    뭐야. 이건 또.

    “하실 말씀이 있기라도 하십니까, 교황.”

    “예. 그러합니다.”

    빨리 자리를 뜨고 싶어 하는 원로원 대신들의 책망이 서렸다. 베네딕트는 평범하게 말하자면 역대 교황 중 가장 조용한 교황이었고, 나쁘게 말하자면 가장 존재감이 흐릿한 이였다. 크리스티앙과의 관계도 최악이라 결혼 예식에까지 제외되고도 아무런 이견을 보이지 않았던 그가 처음으로 입을 열었지만 관심이 있는 자는 아무도 없어 보였다.

    “원로원의 대신들이 모두 모인 이 자리에서 꼭 드려야 할 중대한 소식이 있습니다, 폐하.”

    쿵. 갑작스레 귓가에 들려오는 소음에 크리스티앙의 황금빛 눈썹이 일그러졌다. 그의 심장이 무겁게 내려앉는 소리였다.

    ‘중대한 소식?’

    가시방석에 있는 것 같은 표정이던 원로원의 얼굴에 의문이 삽시간에 퍼져 나갔다. 감히 황제의 입을 여는 자는 한 명도 없었지만 그들이 무언으로 떠들어 대는 소리가 그대로 들려오는 듯했다.

    ‘교황이 대체 무슨 말을 하려는 거지?’

    ‘이 상황에서 말을 꺼내는 걸 보면 확실히 중요한 소리인 것 같은데.’

    ‘흥. 크리스티앙의 손에 이제껏 죽어 나간 자들이 복수를 하러 칼 들고 찾아오기라도 한다는 말인가?’

    이제까지 자신이 주도하고 있던 공기의 흐름이 서서히 바뀌는 것을 느끼며 크리스티앙이 마른침을 삼켰다. 장갑 안의 손이 축축하게 젖어 들고 있었다. 그가 뒤에 선 베네딕트를 보지도 않고 정면을 직시한 채 말라가는 붉은 입술을 떼어 냈다.

    “교황.”

    “예, 폐하.”

    제기랄. 크리스티앙은 베네딕트의 차분한 목소리에서 감춰진 조소를 읽어 냈다. 베네딕트와 몇 번이나 대치한 자신이 그의 비웃음을 모를 수가 없었다.

    숱이 많은 황금색 속눈썹이 바짝 들린 채 그의 호박색 눈동자를 드러냈다. 몸속에서 심장이 불쾌하게 요동치고 있었다. 속으로 천천히 숫자를 세며 침착하려 노력을 했지만 불안한 예감은 사라질 줄은 모른다.

    새하얀 장갑을 끼고 있는 크리스티앙의 손이 테이블 위에서 천천히 모였다. 양손을 엇갈려 깍지를 낀 후, 크리스티앙이 테이블에 팔꿈치를 댄 채 양 엄지로 자신의 뾰족한 턱을 받쳤다. 언뜻 봐서는 여유로운 동작으로 보였지만 실은 긴장에 일그러지는 얼굴 표정을 조금이나마 가리기 위해서였다.

    쿵. 쿵.

    천에 가려진 피부에 닿아 오는 호흡이 뜨거웠다. 제 심장 소리가 그의 귓가에 점점 크게 울려 퍼졌다. 씨팔…. 마지막으로 이 좆같은 기분을 느꼈을 때가 언제였는지는 몸이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자신의 열 살 생일이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였다. 선대 황제이자 아비인 클라웨 8세의 죽음 탓에 도시 전체의 분위기가 상중이었을 당시, 그는 늦은 새벽 태후의 침실에서 나오는 호아킴 장군을 처음 목격했다.

    “…호아킴 경.”

    “황태자 폐하. 여태 도서관에 있다 돌아가는 길이십니까.”

    “경이 어머니의 침실에는 왜….”

    “황제 폐하의 서거 이후, 두려움이 많아지셔서 잠이 드실 때까지 호위를 한 것뿐입니다.”

    “…….”

    “그리 오래 책을 읽으시면 건강을 해치십니다. 밤에는 잠을 주무셔야지요.”

    고개를 숙이던 호아킴에게서는 어미가 자주 쓰던 향유 냄새가 풍겼다. 그의 호위를 거절하고 홀로 침실로 돌아간 크리스티앙은 불쾌한 예감에 침대 안에서 밤새도록 뒤척여야 했다.

    그의 심증이 확신이 되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황제의 장례 의식이 끝난 이후 미망인이 된 황후는 더욱 조심성 없는 행동을 이어 나갔다. 이틀에 한 번꼴로 호아킴에게 침실 시중을 들게 했다. 황제의 암살이 의심되는 상황 탓에 두려워 홀로 잠들 수 없다는 핑계였다.

    하지만 두렵다는 말과는 달리 남편의 죽음 이후 3년간 그녀의 행보는 남달랐다. 아들인 크리스티앙을 황제 권한 대행으로 내세웠지만 실질적인 권력은 자신이 쥐고 흔들었다. 자신의 친정 쪽 먼 친척이었던 호아킴의 권력 역시 수직 상승한 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그리고 크리스티앙은 열셋이 되던 날 어미의 부정을 제 눈으로 직접 확인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태후의 침실에 숨어들어 두 연놈이 뒤엉키는 광경을 확인했을 때까지도, 크리스티앙은 정숙하지 못한 태후의 약점을 잡은 것에 쓴웃음을 지었을 뿐이었다.

    화려한 드레스 사이에 몸을 감추고 있던 그의 눈이 뒤집힌 것은, 약에 취한 태후의 입에서 기어코 나와서는 안 될 말이 튀어나왔을 때였을 것이다.

    “하…. 당신과 나의 아이가…. 크리스티앙이… 결국 황제가 되다니…. 아하하! 이걸로 클라웨의 대는 완벽하게 끊긴 거야…!”

    심장이 조여드는 기분이었다. 쿵, 쿵, 세차게 뛰는 심장에 구역질을 간신히 참았다. 크리스티앙은 제 귀로 들려오는 말을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3년 전, 황제의 장례식장에서의 일이 갑자기 뇌리를 스쳤다.

    “황제 폐하가 서거하여 슬프시지요, 황태자 전하.”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별다른 감정이 들지 않습니다, 호아킴 경. 저는 황제 폐하와 함께한 기억이 거의 없는걸요.”

    “아비가 아들의 손을 잡지 않을 땐 아들의 뒤를 지키고 있는 것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전하께서는 분명 사랑받는 아들이었고, 현재에도 또한 미래에도 그러할 것입니다.”

    자신을 보며 아버지보다 더 인자한 미소를 짓던 호아킴이 정말로 자신의 친아버지라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어머니. 저와 함께 차를 한잔하시겠습니까.”

    그녀를 독살한 것은 당연한 선택이었다. 기억도 나지 않는 어린 시절부터 그는 황태자였지만, 황궁 사람들은 그를 보면 자동으로 안타깝게 죽은 그의 이복누이를 떠올렸다.

    아비인 황제는 그를 거들떠보지조차 않았다. 어부지리로 얻은 자리라고 한들 그는 명백한 클라웨의 핏줄이거늘, 늘 부족하다는 열등감에 시달렸고 그래서 더욱 노력했다.

    “크리스티앙…. 네가… 네가 감히 나를…! 내가 널 위해서 어떻게까지 했는데…!”

    “부덕한 국모의 입에서 나올 말이 아닙니다.”

    태후는 부덕의 소치로 죽었다. 불륜을 저지른 것보다 더 용서할 수 없게 만들었던 것은 그녀의 입에서 튀어나온 ‘말’이었다. 대마법사의 보석을 받지도 못한 반쪽짜리 황태자의 자격을 완전히 없애 버릴 수 있는 위험한 비밀을 발설한 죄였다.

    “교황께서는 지금….”

    크리스티앙의 날카로운 턱이 오만한 각도로 위를 향했다. 그의 입술에서 부드럽게 가장했지만 칼을 내뱉는 듯한 말투가 천천히 흘러나왔다.

    “지금부터 본인이 할 말씀에 책임을 질 각오가 되어 있으신 거겠지요?”

    황제는 교황의 입에서 나올 말을 예상했다. 그의 최측근인 하이데거가 없는 지금. 핏줄인 탓에 아들인 크리스티앙을 도저히 배신할 수 없는 호아킴이 부재한 지금. 베네딕트는 원로원의 최고 귀족들이 전부 집결한 이 자리에 불붙은 장작을 던질 생각이었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불씨를 스스로 밟아 없애라, 베네딕트.’

    그것은 크리스티앙이 그에게 주는 마지막 기회였다. 그리고 베네딕트는 희미한 조소가 섞인 말투로 그의 호의를 걷어찼다.

    “황제 폐하께서는 제 입에서 나올 말이 두려워 제게 그리 묻기라도 하시는 겁니까.”

    “하하.”

    크리스티앙이 호박색 눈을 빛내며 낮게 웃었다. 그의 손에 가려진 입술 새로 뿌득, 이가 갈리는 소리가 났다. 베네딕트가 기어이 전쟁을 시작할 거라면 기꺼이 받아들여 줄 생각이었다.

    하지만 난, 지는 싸움은 하지 않아.

    “서기관.”

    그가 몸을 바로 하며 목소리를 높였다.

    “예, 폐하.”

    “말수가 적기로 유명한 교황 성하께서 지금부터 무척이나 중요한 말을 하실 모양이네. 토씨 하나 빠지는 일 없이 똑똑히 기록하도록.”

    “예, 폐하.”

    기록을 준비하는 서기관의 옆에서 베네딕트가 한 발짝 앞으로 걸어 나왔다. 얼굴을 가리고 있는 베일 뒤에서 그의 눈동자가 시퍼렇게 일렁였다.

    “클라웨의 제5 대 교황 베네딕트 블라이는 지금 이 시각, 승하하신 선대 황제의 첫 번째 핏줄이자 대마법사의 보석을 받은 황위 계승자였던 에데르트 아이나 클라웨 황녀가 살아 있다는 사실을 고합니다.”

    “……!”

    숨죽이고 있던 원로원의 대신들이 그 자리에서 얼어붙었다. 인상을 찌푸린 그들의 시선이 소리 없이 맞부딪혔다. 크리스티앙은 기다란 눈을 한 번 천천히 감았다 떴을 뿐이었다. 숱이 많은 촘촘한 속눈썹이 가늘게 파동했다.

    “…교황, 지, 지금 그게 대체 무슨 발언입니까!”

    “제1 황녀는 이미 오래전 별궁에서 난 화재로 사망하지 않았습니까! 황권을 모독하려는 겁니까?”

    “에데트르 황녀 폐하께서는 확실히 살아계십니다. 제가 두 눈으로 직접 확인을 하였으니까요.”

    나직하지만 또렷하게 내뱉는 베네딕트의 발언에 원로원은 확실히 동요할 수밖에 없었다. 크리스티앙은 소리 없이 복잡한 시선을 나누는 그들을 목도하며 조용히 입을 열었다.

    “어떻게 확인을 하셨습니까.”

    깍지를 낀 그의 손가락이 마치 나비가 날갯짓을 하듯 손등 위에서 천천히 움직였다.

    “이곳에 계신 교황께서 그 사실을 어떻게 확인하셨다는 말씀이십니까. 제 누이를 실제로 대면하기라도 하였다는 뜻인지.”

    “예. 직접 만나 뵈었습니다.”

    원로원에서 작은 탄식과 함께 웅성거림이 일었다. 크리스티앙이 속으로 다시 한번 숫자를 세며 솟구치는 살기를 잡아 눌렀다.

    진작 무슨 죄를 뒤집어씌워서건 교황의 사지를 갈기갈기 찢어 흔적도 없이 만들어 버렸어야 했다. 에리히의 충절을 시험하는 것을 일찌감치 끝내고 서둘러 일을 진행해 베네딕트보다 더 큰 힘을 가지게 해야 했거늘. 자신의 신중함에 발목을 잡힐 줄은 예상치 못했다.

    “별궁에 거주하던 에데르트 황녀는 화재 당시, 황제 폐하를 보위하던 암살단 세르노티에게 구출되어 성인이 될 때까지 그들과 함께 자랐습니다.”

    “뭐라고? 그게… 정말입니까?”

    누군가 떨리는 목소리로 조심스레 입을 떼자 또 다른 누군가가 소리를 높여 반발했다.

    “말이 안 되는 소리…!”

    “그녀가 진짜 에데르트 황녀인지 어찌 알 수 있습니까. 설사 본인이 그렇다 주장한들 무슨 수로 증명할 수 있단 말입니까…!”

    “제 피로 직접 뽑아낸 대마법사의 보석으로 각인한 상대입니다. 그녀가 가지고 있는 보석은 저의 것과 완전히 일치합니다.”

    귀족들의 눈이 소리 없이 흔들렸다. 교황인 베네딕트가 마법사의 보석을 꺼내 든다면 그것보다 더 확실한 증거는 없었기 때문이다.

    “교황청은 대체 그 사실을 언제부터 알고 있었던 것입니까?”

    “제가 그녀를 처음 인지한 것은 약 4년 전, 카플란이 황녀를 암살하기 위해 보낸 자객 때문에 세르노티에서 조용히 숨어 살던 황녀 폐하의 목숨이 경각에 달하였을 때였습니다.”

    “……!”

    베네딕트의 입에서 흘러나온 ‘암살’이라는 두 단어가 주는 충격은 상당했다. 질문을 던진 원로원 석에서 숨죽인 탄식이 터져나갔다. 그들이 소리 높여 흥분할 수 없는 이유는 물론, 흔들리지 않는 바위처럼 고요하게 꼿꼿이 앉아 베네딕트의 말을 경청하는 크리스티앙 때문이다.

    “제가 나눠 가진 보석의 빛이 파동하는 것을 보고 에데르트 폐하의 위험을 직감했고, 교황의 의무를 다해 세르노티의 거처를 찾아 그녀를 치료하였습니다.”

    “저런. 교황께서는 당시 아무것도 알지 못했던 본 황제에게 그런 중요한 사실을 직접 고해야겠다는 생각은 들지 않으셨습니까?”

    크리스티앙이 미간을 모은 채 그에게 반문했다. ‘아무것도 알지 못했다’는 그의 말투는 너무도 태연해 섬뜩하게까지 들렸다. 황녀의 암살에 크리스티앙이 관련하지 않았을 거라고 생각하는 이는 물론 이 자리에 아무도 없었다.

    카플란은 와해되기 직전까지 크리스티앙의 최측근 중 하나였다. 이쯤 되면 황녀 암살에 실패한 카플란을 황제가 일부러 몰살시킨 것은 아닌지 의심이 갈 정도다.

    복잡한 원로원의 얼굴과는 반대로 입을 여는 베네딕트는 차분했다.

    “황녀의 상처가 너무 깊어 되살아날 거라고 생각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과거를 잊고 조용히 살고 있는 황녀로 인해 태평성대인 황실이 혼란에 빠지게 만드는 것 또한 교황청의 도리가 아니라 여겼습니다.”

    크리스티앙은 진하게 치밀어 오르는 살기를 또 한 번 애써 참아 냈다. 교황의 말에 어폐가 있는 것은 당연한 소리였다. 그의 말이 진심이라면 지금 이 순간, 자신의 견고한 성에 낙뢰를 떨어뜨리는 짓은 하지 말아야 했다. 그는 베네딕트의 보기 좋은 입을 반드시 직접 찢고 혀를 자르리라고 다시 한번 맹세했다.

    “온몸이 갈기갈기 난도질당해 도저히 살아날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던 에데르트 황녀께서는 숨만 붙어 있는 상태로 3년 동안 누워계시다, 지난해 겨울에 깨어나셨습니다. 그리고 카플란은 마치 황녀의 회복에 맞춘 것 같기라도 한 것처럼 세르노티와의 전쟁을 시작하게 됩니다. 그 결과가 어떠하였는지는 여기 계신 대신들 모두 알고 계시겠지요.”

    카플란과 함께 출정한 하르트만은 특별한 이유도 없이 갑작스러운 중립을 선언했고, 세르노티와 격돌한 카플란의 군사는 흔적도 없이 와해되어 모조리 죽었다.

    “하지만 지금 세르노티는 동쪽으로… 리비에르 기사단을 도우러 출정하지 않았소…?”

    귀족 중 한 명이 혼란스러운 목소리를 애써 감추며 입을 떼자 베네딕트가 차분히 답했다.

    “자일룬에서 싸우고 있는 세르노티의 기사단에 에데르트 황녀가 포함되어 있는 것 또한 확인하였습니다.”

    무거운 침묵이 또 한 번 공간에 내리깔렸다. 마치 공기가 머리를 짓누르는 듯한 압박감이었다. 원로원 석에 앉은 귀족들의 머릿속에 수없이 많은 생각이 빠르게 스쳐 지나가는 것이 눈으로도 보일 지경이었다.

    죽은 줄 알았던 황녀가 살아 있고, 그녀는 지금 신분을 드러내지 않은 채 동쪽에서 전쟁을 벌이고 있는 중이다. 과연 그것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일까.

    적어도 한 가지는 확실했다. 죽기 전 유일한 황위 계승자였던 그녀가 자신의 죽음을 발판 삼아 황제 자리에 오른 크리스티앙의 편에 서기 위해서는 절대 아닐 것이다.

    어쩌면 새로운 황녀의 존재는 폭군의 지배가 이어지는 클라웨의 판도를 바꿀 수 있는 새로운 희망이 될 수도 있다.

    탁.

    크리스티앙이 턱을 받쳤던 손을 내린 후, 천천히 입을 열었다. 어두운 기라고는 하나도 없는 블론드가 감춘 이마에 두 주름이 깊게 팼다. 그가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

    “교황께서는 그리 중요한 사실을 왜, 이제야 말하시는 겁니까.”

    또각.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난 크리스티앙이 그를 향해 걸었다. 발을 감싸고 무릎까지 올라온 하얀 부츠의 굽이 바닥을 울리는 소리가 조용한 공간 안에 울려 퍼졌다.

    “제게 얼굴을 보이시지요, 교황.”

    “황제 폐하의 명에 따르겠습니다.”

    베네딕트가 얼굴을 가린 베일을 걷었다. 마치 그를 시험하는 것 같은 표정. 한 치의 흔들림도 없는 연한 하늘색 눈동자가 그를 응시하는 것을 보며 크리스티앙이 낮고 또렷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우선 본 황제는 교황께 깊은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불의의 사고로 세상을 떠난 줄 알았던 나의 누이를 찾아낸 것도 모자라 위독한 그녀를 살려 내셨다니.”

    교황의 연한 입술이 희미한 미소를 띠었다. 크리스티앙은 그의 뺨을 거세게 후려치고 싶은 충동을 억누르며 말을 이었다.

    “클라웨의 황족으로서도, 같은 피를 나눈 아우로서도, 진심으로 교황의 노고를 치하합니다.”

    “대마법사의 의무를 다한 것뿐입니다.”

    베네딕트가 베일 뒤에서 나직하게 입을 뗐다. 크리스티앙이 그를 향해 붉은 입술을 비틀었다.

    “그러니까 교황의 말에 따르면 짐의 누이는 죽은 게 아니라 살아 있고,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야만적인 말라쿤과 용맹하게 맞서 싸우고 있다는 뜻이로군요. ‘본 ?황?제?를 ?위?해?서?’ 말입니다.”

    마지막 문장을 강조하는 크리스티앙의 눈동자에 소리 없는 불꽃이 튀었다. 교황이 그를 보며 짤막하게 물었다.

    “기쁘십니까?”

    “뭐?”

    크리스티앙의 입술에서 뒤틀린 음성이 샜다. 저도 모르게 튀어 나간 말이었다. 베네딕트가 그를 보며 눈썹을 천천히 들어 올렸다.

    “그래서 기쁘시냐고 여쭈었습니다. 폐하의 누이가 죽지 않고 살아 있다는 사실이.”

    “물론입니다, 교황. 기쁘지요. 이 자리에서 무릎을 꿇고 신에게 감사하다 외치고 싶을 정도로 기쁩니다. 하지만….”

    베네딕트를 노려보는 크리스티앙의 얼굴이 엉망으로 일그러졌다. 그를 갈기갈기 찢어 죽이고 싶어 하는 표정으로 크리스티앙이 속삭이듯 내뱉었다.

    “그것과는 별개로 교황께서 황명 없이 아메티스를 멋대로 떠나신 벌은 제대로 받으셔야겠습니다.”

    “뜻대로 하십시오.”

    베네딕트는 아름답고 정교한 유리 세공품 같은 크리스티앙을 보며 흐릿하게 웃었다. 주변의 장애물들을 모두 치워 버림으로써 가장 높은 자리에 오른 크리스티앙. 조금의 바람만 불어도 추락해 산산조각으로 부서질 자신의 말로를 알지 못하는 그가, 못내 안타까워 사뭇 사랑스럽게 느껴졌으므로.

    클라웨의 피를 받지 못하였으나 그 누구보다도 클라웨이기를 원했던 소년은 이미 제 어미를 죽인 그 순간 고통스러운 운명에 한 발을 스스로 디딘 것이나 다름없었다.

    자. 이제 나의 즐거움을 위해 마지막까지 발버둥을 쳐 보렴. 제국이 낳은 비운의 젊은 황제여.

    팔랑.

    호아킴에게 부치지 못한 크리스티앙의 편지가 테이블에서 아래로 천천히 떨어졌다.

    친애하는 호아킴 장군,

    이 전언이 경에게 도착할 때까지는 약 한 달의 시간이 걸리겠군.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지. 이 서신을 받는 즉시 아메티스로 돌아오게. 경이 꼭 해 줬으면 하는 중요한 일이 있어. 서신으로는 긴 이야기를 할 수 없음을 이해할 거라 생각하네. 되도록 빨리 돌아와 주기를.

    추신. 짐은 이제 경이 나의 뒤를 지키기보다 내 손을 잡아 주길 바라네.

    ***

    드디어 도착한 건가…?

    도무지 끝날 것 같지 않은 기다란 비밀 통로의 끝에서 아주 희미한 불빛이 새어 들어오고 있었다.

    ‘…우물?’

    무리를 이끌고 앞장선 조세핀은 인상을 조금 찌푸렸다. 비밀 통로의 시작점은 성인 키의 세 배 정도 되는 우물로 보였다. 물이 말라붙어 있다는 사실은 두 개 중 하나였다. 이곳이 이용되지 않은 지 오래되었거나 처음부터 우물이 물을 풀 용도로 만들어지지 않았거나.

    이 경우엔 후자로 보였다.

    톡. 톡.

    뒤에서 조세핀의 등을 살짝 두드린 토비아스가 그녀에게 한 번 눈길을 주더니 여기서 기다리라는 사인을 보냈다. 자신이 위에 가서 먼저 확인을 한다는 뜻이었다.

    턱.

    조세핀은 그의 어깨를 짚고는 인상을 찌푸렸다. 불빛 한 점 없는 어둠 속에서 세 시간을 기어 오다시피 한 토비아스의 얼굴은 평소와 다를 바가 없었는데, 그 모습을 보니 왠지 짜증이 치밀었다. 그녀는 한참 동안 허리를 구부정하게 굽히고 걷느라 온몸의 근육이 비명을 지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뒤에서 따라붙은 오십 명의 병사들도 아마 마찬가지임이 틀림없었지만 그들에게 약한 모습을 보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조세핀이 꽉 잡은 그의 어깨를 거칠게 잡아당겼다.

    ‘저리 비켜. 내가 먼저 올라갈 테니 넌 내 뒤를 따라와.’

    조세핀이 그에게 사납게 구는 이유는 비단 한 달 전에 그녀가 그에게 차였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작전을 지휘하는 이는 엄연히 조세핀이었다. 그녀가 토비아스를 향해 사납게 눈을 부라리자 그가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며 고갯짓을 했다.

    ‘알았어요.’

    할 거면 빨리 하라는 소리였다. 조세핀이 뒤를 돌아 대기하는 병사들을 보았다.

    ‘위에 가서 먼저 확인한다. 신호를 보낼 때까지 여기서 대기해.’

    어둠 속에서 눈동자만 보이는 병사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턱.

    조세핀의 가벼운 몸이 날렵하게 뛰어올라 우물에 튀어나온 돌을 잡았다. 사다리는 없었지만 여기저기 툭툭 걸려 있는 돌이 발 받침 역할을 해 주는 걸 보니, 비상 탈출용인 우물의 용도가 더욱 실감이 났다.

    휙. 휙.

    몸을 날린 조세핀은 두 번의 도약으로 우물의 끄트머리에 도달했다. 지도에 따르면 비상통로는 성 밖의 동태를 살피기 위한 관제탑의 바로 아래쪽으로 통한다고 되어 있었다. 경비가 있을 게 분명했다.

    살짝 고개를 들어 살피니 과연 돌탑이었다. 일단 아래쪽에 두 명. 그리고 위편에 몇 명이 있을지는 알 수 없었다.

    “으하아아아암!”

    갑자기 들려오는 커다란 목소리에 조세핀이 흠칫하며 숨을 들이쉬었다. 성문 쪽에서 걸어오는 말라쿤 하나가 소리를 지르며 잠을 깨려 제 얼굴을 퍽, 치는 게 보였다.

    ‘뭐야 저 새끼들….

    지쳐 있을 거라는 예상과는 달리 제트성 안의 말라쿤은 상태가 나쁘지 않았다.

    ‘힘이 펄펄 나잖아….’

    하지만 정작 그녀를 놀라게 한 것은 따로 있었다. 걸어온 말라쿤이 성벽에서 다 타 버린 나무 장작을 빼내고 새로운 장작에 불을 붙여 꽂았다. 밝아진 시야에 우물 속으로 얼른 몸을 감춘 조세핀이 가느다란 눈을 찌푸리며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돌벽을 짚은 손에 슬며시 힘이 들어갔다.

    ‘수가 너무… 많은데?’

    그들이 예측한 제트성 안의 인원은 많아야 천오백 안팎이었거늘. 우물에서 성벽까지는 약 이백 걸음. 어둠 속에서 희미하게 모습을 드러낸 말라쿤의 머릿수가 까마득했다. 바닥에 드러누워 있는 이들도 있었고 칼을 마주 대며 저들끼리 시끄럽게 싸우는 이들도 있었다.

    톡. 톡.

    어느새 그녀의 곁으로 다가온 토비아스가 그녀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자 조세핀이 흠칫 놀라 몸을 돌렸다.

    토비아스가 염려스러운 표정으로 그녀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조세핀은 정신을 차리고 눈을 빠르게 깜빡인 후,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여기까지 와서 겁쟁이같이 굴 순 없었다. 손으로 꽉 잡은 돌에서 자잘한 돌가루가 아래로 떨어졌다.

    어둠 속에서 고개를 든 조세핀은 아까 커다랗게 하품을 하던 놈을 주시했다. 성벽에 불을 다 밝힌 그는 이제 탑 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저벅저벅. 그녀가 있는 우물을 지나치며 말라쿤이 버릇처럼 코를 킁킁거렸다. 조세핀은 어둠 속에 몸을 감춘 채 숨을 딱 멈추었다. 탑의 뒤편. 계단으로 향하는 그를 보며 그녀가 입술을 슬쩍 깨물었다. 그리고 허리에 찬 검을 빼든 채 우물 밖으로 몸을 날렸다.

    “…으큭…!”

    조세핀의 장검이 제 덩치의 세 배만 한 말라쿤의 심장을 뒤에서 뚫었다. 급습당한 그가 소리를 지르려 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이게, 어딜.

    말라쿤이 단말마의 비명조차 내지 못하고 털썩, 쓰러져 몸을 떨었다.

    “…흣…!”

    더럽게 무겁네.

    조세핀은 그의 시체가 바닥에 떨어지며 쿵 소리가 나지 않게 시체를 몸으로 지탱한 후, 슬쩍 밀어뜨렸다.

    “하아….”

    칼에서 피를 털어 내며 숨을 몰아쉬고 있자니 탑 위쪽에서 말라쿤 몇 명이 짜증스레 무어라 말하는 말소리가 들렸다. 죽은 놈은 아마도 경비를 교대할 시간이 되어 올라가려 했던 모양이었다.

    위에 몇 놈이 있는지는 알 수 없었다. 관제탑의 크기를 생각했을 때, 열 명 이상은 아닐 거라는 예상이 들었다. 그 정도면 해 볼 만하다. 조세핀은 소리 없이 우물 바깥으로 빠져나온 토비아스를 돌아보며 작게 속삭였다.

    “내가 먼저 올라갈 테니까…!”

    탑 위로 몸을 움직이려 했을 때였다. 토비아스가 그녀의 입을 틀어막으며 탑 아래, 필로티처럼 비워진 공간에 몸을 숨겼다. 조세핀을 어둠 속으로 밀어붙인 채 토비아스가 인상을 조금 굳히나 싶었다.

    쿵. 쿵. 쿵.

    땅이 가늘게 울리는 소리와 함께 탑 아래에서 뛰어내린 말라쿤이 그들이 서 있던 곳을 밟고 서 있었다. 어둠 속에 밀어 넣은 시체의 발이 비죽 나와 있는 것을 보고 그가 다가오는 순간, 토비아스가 쏜살같이 움직였다.

    “……!”

    무릎 뒤 인대와 급소를 차례로 잘린 말라쿤이 쓰려졌다. 탑에서 뛰어내린 말라쿤은 한 명이 아니었다. 순식간에 말라쿤 세 명이 다리가 풀려 픽, 픽, 쓰러졌다.

    빠르다. 군더더기라고는 하나도 없는 동작이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조세핀은 그가 칼을 휘두르는 것도 보지 못했다. 아마 작은 단검으로 치명적인 부분만 공격한 것이 분명했다. 성대를 잘라 소리를 낼 가능성을 원천봉쇄한 것은 덤이었다.

    ‘역시 암살단이라… 정면승부보다 급습에 더 강한 건가?’

    토비아스가 그녀가 있는 쪽을 힐끗 바라보았다. 조세핀은 마른침을 꿀꺽 삼킨 후 얼른 움직였다. 그의 실력을 멍하니 감상하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그녀는 탑으로 올라가는 입구를 확보해 준 토비아스에게 고개를 까딱해 보인 후, 계단을 타고 탑 위로 몸을 날렸다. 머릿속에서 벌써 몇 번이나 되풀이해 곱씹었던 작전 계획을 떠올리면서.

    “제트성에서 가장 높은 곳은 바로 여기, 비밀 통로 뒤편에 위치한 탑이다. 성 밖의 움직임을 제일 먼저 볼 수 있는 곳이지. 잠입조는 이곳을 가장 처음 점령한다.”

    “그러고는?”

    “성문을 열어야지.”

    “하아…. 하아…!”

    탑 위에 올라서자마자 보초를 서고 있던 말라쿤들이 눈을 부라리며 그녀에게 달려들었다. 심각한 표정으로 중얼거리던 지휘관 리비에르의 얼굴, 그리고 자기가 갈 것도 아니면서 자신 있게 맞받아치던 세르노티 가주의 재수 없는 얼굴이 동시에 뇌리를 스쳐 지나간다.

    “잠입조가 실패하면 이 작전은 시작도 못 하게 되겠군.”

    “실패하지 않으면 돼.”

    “으아아!”

    달려드는 적을 베고, 또 베며 조세핀이 입술을 꽉 깨물었다. 이곳은 그들의 계획이 시작하는 곳이었다. 반드시, 성공해야 해.

    촤악!

    마지막 말라쿤을 베는 순간, 그녀의 하얀 얼굴에 핏물이 흩뿌려졌다. 높아진 시야에 성문에 쫙 깔린 말라쿤 병사들이 더욱 선명히 보였다. 성문 앞 경비가 삼엄한 것은 당연하다지만 실제로 눈으로 확인하니 수가 너무 많았다. 조세핀과 함께 비밀 통로로 잠입한 숫자는 겨우 오십.

    반드시 성공해야 하는 작전임은 알고 있다. 하지만 저 많은 수의 적들을 뚫고 성문을 여는 게 과연 가능할까…?

    “흣…!”

    그녀의 정신이 흐트러지는 순간, 발목이 세게 잡혔다. 숨이 완전히 끊어지지 않은 말라쿤이었다.

    쿠쿵!

    “흑…!”

    잡아당기는 힘이 무지막지했다. 바닥에 세게 엉덩이를 찧은 그녀가 발버둥을 치는 순간이었다.

    “큭…!”

    그녀의 발목을 낚아채려는 손목이 뎅강 잘렸다. 탑 아래에서 그녀를 엄호하며 올라온 토비아스가 몸을 날린 까닭이었다. 그는 조세핀을 공격하려던 말라쿤을 처리한 후, 몸에서 분리된 후에도 그녀의 발목을 잡고 있는 시체의 손을 휙, 치워 냈다. 그리고 얼빠진 얼굴로 나동그라져 있는 그녀의 손을 잡아 일으켰다.

    “성문 앞, 경비가 가장 삼엄한 건 당연해요. 저기만 뚫으면 뒤는 쉽습니다.”

    토비아스는 성문을 바라보는 조세핀의 눈빛이 흔들리는 것을 보았던 게 분명했다. 입구에 포진한 말라쿤의 숫자를 보고 동요한 그녀의 마음을 읽은 것 같은 말투였다. 그에게 잡힌 손에서 두근, 두근, 맥박이 뛰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조세핀은 숨을 몰아쉬며 그의 손을 탁, 밀쳤다.

    “그건 나도 알아.”

    “네. 그러니까 우린 작전대로만 하면 되는 거예요.”

    그가 신호를 보낸 탓에 시커먼 우물에서 무언가가 쑥, 쑥, 올라오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오십 명의 병사들이 좁은 통로를 통해 가져온 사다리였다. 조각조각 분해되어 옮겨진 가느다란 철제 사다리가 탑의 꼭대기를 향해 키를 키워 나갔다. 성벽에서는 탑의 그림자에 가려 보이지 않을 것이다.

    “긍정적인 거야, 낭만적인 거야?”

    조세핀이 입술을 뒤틀며 물었다. 이 작전이 실패하면 가장 먼저 죽는 것은 그들이 될 것이다. 알면서도 자원한 것은 조세핀도, 토비아스도, 우물 아래에서 몸을 숨긴 군사들도 마찬가지였다.

    “조세핀.”

    토비아스가 예의 가느다란 음성으로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왜.”

    “내 막냇동생이 당신과 동갑이에요.”

    이 샌님이 설마 지금 나이 많다고 자랑하는 건가? 이 상황에?

    “갑자기 뭔 소리야?”

    못마땅한 표정을 짓는 조세핀을 향해 토비아스가 빠르게 말을 이었다.

    “하지만 내 동생은 세르노티의 견습 기사 시험도 통과하지 못했어요. 당신은 내 동생보다 훨씬 강하죠. 리비에르를 따라 전쟁에 처음 참여했을 때가 열다섯 살 때라고 들었으니까. 리비에르 경이 당신을 신뢰하는 것도 당연하다고 생각하고.”

    병 주고 약 주기도 이 정도면 수준급이다. 조세핀의 흰 콧잔등이 붉게 달아올랐다.

    “…재수 없어 죽겠네. 진짜.”

    토비아스가 중얼거리는 그녀를 보며 한 발짝 더 가까이 다가왔다. 어느새 사다리는 탑 꼭대기를 넘어가고 있었다. 우물에서 탑 위로 기척 없이 올라온 군사들이 키를 넘어선 높은 사다리를 꽉 붙잡았다.

    “탑의 꼭대기에서 성문의 꼭대기까지 공중에서 이동하는 편이 가장 빨라.”

    “…어떻게? 그 탑은 수레로 끌어 움직일 수 있는 종류가 아니다. 탑을 움직이지 못하는 상황에서 어떻게 공중으로 이동한다는 거지?”

    “세르노티 기사단들 등에는 날개라도 달려 있나 보죠.”

    반문하는 리비에르의 곁에서 조세핀이 이죽거렸지만 설명을 잇는 발터의 얼굴에는 타격감이 없었다.

    “구름다리를 만드는 거야. 아버지가 살아계실 때, 세르노티에서 몇 번 해 본 적이 있다.”

    “그럼 내가 성문으로 이동해 도르래를 끊어 내면 되겠네.”

    발터에게 불려오고 나서 한마디도 하지 않다가 마침내 입을 뗀 토비아스의 표정 역시 침착하기는 마찬가지였다.

    “토비아스. 괜찮겠어?”

    “응. 할 수 있어.”

    오히려 미안한 표정으로 토비아스에게 되묻는 혜미의 눈빛이 더욱 떨리는 듯 보였다. 그녀가 그 대신 가지도 않을 거면서 말이다.

    “잠깐만요, 지휘관님. 성벽 위에서 지키고 있는 말라쿤들에게 이 사람이 포위될 가능성이 너무 크지 않습니까?”

    “그들이 달려오기 전에 내가 줄을 끊고 탑으로 되돌아가면 됩니다, 조세핀.”

    조세핀의 마음속이 부글부글 끓었던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난 최대한 빠른 속도로 저걸 끊고 되돌아올 거예요.”

    수백 번 머릿속으로 되풀이한 작전을 다시금 되짚어 말하는 토비아스의 얼굴은 마치 어린애에게 설명이라도 하듯 진지했다.

    알아. 이게 말도 안 되게 네게 불리한 작전이란 건, 나도 안다고!

    “지휘관님, 그럼 전 뭘 하죠?”

    “조세핀은 군사들과 함께 그를 최대한 엄호한다.”

    “하지만….”

    차마 리비에르의 명령에 거역할 수 없어 말을 흐리는 조세핀의 주먹은 부르르 떨리고 있었다. 토비아스가 너무 위험한 역할이라는 말을 차마 입 밖으로 내뱉을 수가 없었다. 그때와 똑같은 얼굴을 하는 그녀를 보며 토비아스가 나직하게 속삭이듯 내뱉었다.

    “나는 당신을 믿고 달릴 겁니다.”

    조세핀의 심장이 긴장과 알 수 없는 무언가로 뒤엉켜 쿵쿵 뛰었다.

    “…연결해.”

    그녀의 나직한 명령에 가느다란 사다리가 하늘을 찌를 듯 높이 솟아오르기 시작했다.

    멀리, 성벽을 지키는 말라쿤의 눈에 본래 탑 길이의 두 배는 되어 보이는 그림자가 길게 솟는 것이 기이하게 보이는 순간이었다.

    [이봐. 저게 뭐지?]

    [엉? 내 눈에 헛것이 보이나.]

    휘익.

    그것은 소리 없이 천천히 공중에서 사뿐히 궤적을 그리며 움직였다. 성문 위에 턱, 하고 걸린 사다리 끝에 둥그렇게 몸을 움츠리고 걸려 있는 이가 사람이었다는 것을 깨달은 것은, 그가 성문을 지탱하고 있는 도르래의 쇠사슬에 도끼질을 하기 시작한 후였다.

    퍽!

    [뭐, 뭐야?]

    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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