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7화 (37/72)
  • “말라쿤이 이곳의 존재를 알건 모르건 그게 중요한 게 아니야. 설사 안다고 해도 이쪽으로는 나오지 못하겠지. 우리 측 군사들의 진영 바로 앞이니, 그야말로 자살 행위나 다름없으니까.”

    혜미는 날카로운 칼로 표시를 내며 설명하는 그의 손을 뚫어져라 바라보는 채로 생각을 계속 이어 나갔다.

    발터는 그녀를 위해 날 때부터 지금껏 한 번도 떠난 적이 없는 세르노티를 떠나 이곳 자일룬에까지 왔다. 제트성을 되찾고 말라쿤의 우두머리인 리가스를 쓰러뜨리려는 이유는 리비에르를 그들의 편으로 만들려는 것. 즉, 혜미에게 힘을 실어 주기 위해서였다.

    “그래서요? 설마 그 비밀 통로를 이용해서 쳐들어가기라도 할 작정인가요?”

    조세핀이 까만 단발머리를 찰랑거리며 눈을 찌푸리자 발터가 흔들림 없는 말투로 짧게 수긍했다.

    “맞아.”

    성벽 꼭대기에서 지키고 있는 말라쿤의 군사들은 이쪽이 조금만 움직여도 동태를 알아챌 게 분명했다. 최대한 그들에게 이쪽의 움직임을 들키지 않고 급습하는 게 효과적일 것이다.

    “뭐? 대체 누가 가는데요? 성안에 놈들이 쫙 깔렸을 텐데. 자살하러 가고 싶은 사람이 있을 거라 생각해요?”

    혜미는 따뜻한 컵을 손에 쥔 채, 묵묵히 발터의 대답을 기다렸다.

    “세르노티가 전투에만 최적화된 집단이라고 생각했었나? 암살단의 존재가 세간에서 자취를 감췄다고 해서 그들이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니지.”

    “…그래서요?”

    “세르노티의 기사들 중 그 누구도 잠입을 두려워할 이는 없다는 뜻이다.”

    조세핀이 마른침을 꿀꺽 삼키며 목소리를 높였다.

    “비밀 통로의 존재를 알고 있다면 그 입구에도 분명히 누군가가 지키고 있을 거라는 생각은 안 해요?”

    “그럼 그 보초병들이 우리 손에 가장 먼저 죽는 말라쿤이 되겠군.”

    짙은 갈색 눈동자를 상대에게 박으며 확언하는 그의 모습에 새삼 가슴이 세차게 두근거린다. 한 치의 의심이 없는 그의 말투에 조세핀마저 입을 딱 다물었다.

    “내 계획은 이 비밀 통로를 역으로 이용해 우리 측에서 성안으로 잠입, 도르래를 끊어 내서 성문을 여는 거야.”

    “확실히 탑의 위치가 성문과 가깝긴 하군.”

    리비에르가 입술을 잘근거리며 가늘어진 눈으로 중얼거리자 발터가 그녀의 말을 받았다.

    “그래. 문이 열리면 그 틈을 타서 한꺼번에 몰아붙이는 거고.”

    “말은 참 쉽네.”

    한숨 쉬는 조세핀의 목소리에 숨길 수 없는 작은 흥분이 일었다.

    사실이었다. 어려울 것이 분명한 작전도 발터가 말하면 쉽게 들렸다. 충분히 잘 해낼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드는 것은 역시나 확신이 담긴 그의 태도 때문일 것이다.

    “우리가 성으로 진입해 공격하면 말라쿤은 두 갈래로 나뉘겠지. 성에 남아 싸우는 이들 그리고 혼란한 틈을 타서 도망치는 이들. 리가스가 말라쿤을 통합한 역사는 그리 오래되지 않았어. 단합은 어려울 거고 이탈자는 분명히 생긴다. 그들은 진영을 이루어 벌어지는 싸움에 익숙하지 않아.”

    “그래서?”

    “도주로는 성의 뒤편.”

    “지난밤 도망치던 말라쿤이 잡혔던 곳?”

    리비에르가 되짚는 곳은 제트 성 후문의 서쪽이었다. 수심이 얕고 강폭이 좁아 헤엄칠 수 있는 강을 넘어 척박한 땅을 약 이틀간 달리면 말라쿤의 본국과 연결되어 있는 곳이다.

    “물론 그쪽이 가장 많은 이탈자가 생기는 곳일 거야. 말라쿤의 군사들이 본국에서 넘어온다면 제일 쉽게 이용할 수 있는 곳이니까. 하지만 만일 내가 우두머리라면….”

    발터가 잠시 말을 멈추었다가 이었다. 그가 칼끝으로 비죽하게 솟아오른 산의 표식을 툭, 두드렸다.

    “나는 이쪽으로 몸을 피할 것 같다.”

    “하지만 랑켈산은 세가 너무 험해.”

    깎아지른 듯한 절벽과 암벽. 이미 세르노티의 기사들이 로비나에서 자일룬으로 올 때 통과해 본 적이 있는 산이었다. 고개를 젓는 리비에르를 보며 발터가 말을 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이쪽이야. 수적 열세에 몰렸을 경우, 몸을 숨겨 상대를 공격하면 이길 수 있는 확률이 조금이라도 높아지니까. 살아남을 확률은 말할 것도 없겠고.”

    확실히 일당백으로 정면에서 싸우는 것보다는 살 확률이 높다는 소리였다. 곰곰이 생각하던 리비에르가 잠시 침묵을 지키다 입을 열었다.

    “그럼 랑켈산으로 들어가는 입구에 우리 측 군사를 매복시키면 되겠군. 어차피 도망치는 말라쿤이 이쪽 도주로를 이용하든 이용하지 않든, 우리 쪽에서는 손해가 없으니까.”

    “그럼 그쪽에는 상대적으로 병력이 약한 조를 투입시켜서 대기하게 만들죠. 설마 말라쿤의 윗대가리인 리가스가 제 부하들을 모조리 놔두고 쪽팔리게 혼자 튀겠어?”

    “안 돼.”

    “아니.”

    조세핀의 물음에 발터와 혜미가 동시에 입을 열어 부정했다. 혜미가 발터를 감상하던 시선을 멈추고 조세핀을 향해 진지하게 설명을 덧붙였다.

    “…말라쿤이 지는 싸움을 하고 싶은 게 아니라면 우두머리인 리가스의 생존이 가장 중요한 문제일 거야. 어떻게든 그가 본국으로 돌아간다면 재차 쳐들어올 기회는 반드시 있으니까.”

    하지만 죽어 버리면 아무것도 할 수 없다. 혜미가 이미 경험으로 깨달은 진리였다. 가장 중요한 것은 살아남는 것, 즉 생존이었다. 책임져야 할 사람이 많을수록 더더욱 우두머리가 반드시 살아남아야 한다는 것을, 그녀는 이제야 확실히 알 수 있었다.

    “그래. 혜미의 말마따나 리가스가 이곳으로 도주할 가능성이 많다 치더라도 그 확률에만 의지해 강한 병력을 이곳에 매복하게 하는 것은 우리 측에서도 막대한 손실이야.”

    혜미의 말을 차분하게 들으며 리비에르가 심각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지휘관인 그녀가 염려하는 것은 또 다른 가능성이었다.

    “만일 리가스가 군사들과 함께 성에 남아 우리와 싸운다면 어떻게 될까?”

    그녀가 진지한 어투로 자문자답을 이어 나갔다.

    “그거야말로 총력전이다. 그는 강해. 야만족 일대를 통합한 자의 능력을 간과해선 안 된다는 소리야.”

    “그러니까 우리 측에서도 힘을 합쳐야겠지.”

    조세핀이 뾰족한 턱을 문지르며 혜미를 향해 되물었다.

    “구체적으로 뭘 어떻게 하잔 소리예요?”

    “발터, 그것 좀 줘 볼래?”

    혜미가 발터에게 손을 내밀자 그가 들고 있던 단도를 그녀에게 건네주었다.

    “여기.”

    본인은 날카로운 칼날을 잡고 그녀에게 칼자루를 쥐여 주는 그의 움직임에는 군더더기가 없었다. 마치 그들의 상황 같다는 기분이 든다. 이 관계에서 칼자루를 쥔 사람은 그녀였다. 그녀의 선택에 따라 그를 상처 입혀 피 흘리게 만들 수도,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혜미는 시도 때도 없이 뻐근해지는 가슴을 애써 가라앉히며 조심스레 칼을 받아 들었다. 그리고 발터가 그려 놓은 도식에 차례차례 엑스 자로 칼집을 내며 설명을 시작했다.

    “리가스가 아무리 강하다고 하더라도 우리 측에서도 군사들을 이끌 실력 있는 이가 없는 건 아니잖아? 비밀 통로를 이용하는 잠입조, 성문을 통해 쳐들어갈 공격조, 뒤편 도주로를 쫓는 추격조 그리고 산에서 기다리는 매복조로 나누어서 힘을 합치면 돼.”

    “…내 귀에는 힘을 합친다기보다 병력을 분산시키자는 평범한 소리로 들리는데.”

    리비에르는 마치 말장난을 하는 것 같은 혜미의 표현을 들으며 피식 웃었다. 그런 그녀를 향해 혜미가 싱긋 미소를 지었다. 그녀의 뒤편에서 떠오르는 태양이 지평선 너머로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난, 말에는 힘이 있다고 생각해.”

    혜미가 그동안 발터를 통해 깨달은 진실이었다. 그녀가 불안해할 때마다 확신에 찬 목소리로 내뱉어 주었던 발터의 한마디가 얼마나 힘이 되었는지 모른다.

    “카플란을 쓰러뜨릴 거라는 걸 약속해.”

    “누가 오래 잠수하는지… 내기하는 거다.”

    “리비에르는 반드시 우리와 같은 곳을 보게 될 거야.”

    “결국 한 가지 목표를 위해 함께 싸우는 거나 마찬가지니까.”

    그녀에게도 느끼게 해 주고 싶었다. 혼자가 아님을 알려 주고 싶었다.

    “우리는 반드시 이길 거야, 지젤.”

    “…….”

    리비에르는 잠시 말이 없었다. 새벽빛을 담은 혜미의 보랏빛 눈동자가 굳건한 의지로 반짝거렸다. 그것은 자신을 감추려 배를 부풀리는 허풍, 혹은 두려움을 감추기 위한 자기 최면 따위가 아니었다.

    그녀의 눈동자에 담긴 것은 강한 믿음이었다.

    “그래. 그럼 결정을 내려야겠네.”

    침묵하던 리비에르가 마침내 탁, 하고 양손을 제 무릎에 짚고 일어났다. 이제 하늘은 완전히 밝아져 있었다.

    “일단 진영을 정한다.”

    현재 제트성 탈환을 지휘하고 있는 총책임자는 그녀였다. 자신의 결정에 모든 것이 달려 있다는 말과 같았다. 자리에 있는 모두가 리비에르에게 시선을 집중했다.

    “리가스가 도주를 택하건 성에 남아있건, 현재로서는 그가 가장 위험한 인물이라는 건 기정사실이야. 누구보다 그를 죽이고 싶은 나지만, 군사들의 사기를 생각한다면 제트성을 정면에서 치는 공격조에 내가 빠지는 건 말이 안 돼.”

    그녀는 성문이 열렸을 때 치는 정공법으로 나가겠다는 소리였다.

    “성의 뒤편, 서쪽 도주로는 나이젤을 중심으로 이미 진영이 짜여 있으니 바꿀 이유는 없다. 지난 보름 동안 익숙해졌을 테니까.”

    리비에르의 부지휘관 중 하나인 나이젤이 지키고 있는 그곳의 군사에는 얀도 포함되어 있었다. 어제 도망치는 말라쿤의 목을 신나게 베어 온 것도 그였다.

    “남은 것은 비밀 통로로 잠입하는 잠입조와 동쪽 산맥 초입에서 매복을 할 매복조다.”

    리비에르가 그녀의 오른편에 있는 조세핀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조, 네게 먼저 선택권을 줄게. 넌 어디로 가고 싶어?”

    조세핀이 숨을 길게 내쉰 후, 입을 열었다.

    “…제가 잠입을 맡겠습니다.”

    지하로 연결되는 비밀 통로. 누군가 불이라도 지르면 다 죽는 그곳으로 기어가 성문을 열겠다는 소리였다.

    “난 토비아스가 잠입에 제격이라고 생각하는데. 그라면 움직임이 날렵해서 설사 보초가 지키고 있다고 한들 들키지 않고 처리할 수 있을 테니까.”

    발터가 의견을 표하자 조세핀의 얼굴이 잠시 굳어졌다가 이내 평정을 되찾았다. 그녀가 며칠 전에 그에게 고백했다가 비참하게 차인 것과는 별개로 지금은 사적인 감정을 개입할 때가 아니었다.

    “그렇다면 더더욱 내가 함께 따라가야겠네요. 세르노티의 기사들만 믿고 맡기기에는 불안하니까요.”

    “…겨우 그 이유뿐인가?”

    조세핀이 미심쩍은 시선을 보내는 발터에게서 고개를 휙 돌린 후, 리비에르를 향해 까만 눈동자를 빛냈다.

    “지휘관님을 위해 반드시 성문을 열겠습니다. 실패하지 않을게요.”

    리비에르가 그녀를 보며 작게 웃음 지었다. 믿는다는 표정이었다.

    “좋아. 그럼 매복조는….”

    그녀가 발터와 혜미에게 차례로 눈길을 돌렸다. 그들이 입을 뗀 것은 거의 동시였다.

    “내가 하지.”

    “내가 할게.”

    혜미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리비에르가 발터에 이어 연달아 목소리를 내는 혜미를 보며 얼굴을 조금 굳혔다. 살짝 목을 가다듬고 난 후, 최대한 중립적인 말투로 반대 의견을 냈다.

    “강한 병력을 매복조에 둘씩이나 배치시키는 건 그리 효과적인 방법이라고 할 수 없어.”

    전투력이 강한 발터와 혜미를 함께 보낼 수는 없다는 소리였다. 혜미는 그녀의 말에 적극 동의했다.

    “응. 나도 그렇게 생각해. 그래서 발터는 지젤과 함께 공격조를 이끄는 게 맞는 거라고 봐. 괜찮다면 매복조는 내가 지휘할게.”

    발터의 짙은 눈썹이 험상궂게 휘며 미간에 모였다. 한눈에 봐도 못마땅함이 가득한 얼굴이었다.

    혜미가 아까부터 계속 자신을 빤히 바라보며 이유 없이 헤실거리는 탓에 자꾸만 신경이 그쪽으로 분산되었던 것은 당연한 소리였다. 안 그래도 간밤에 꾸었던 악몽 탓에 잠을 한숨도 자지 못하고 뒤척여 신경이 곤두선 상태였는데, 그 꿈의 주인공이 자신을 계속 쳐다보자 속을 다 들킨 듯 안절부절못했던 것이다.

    이 상황에서 혜미의 입에서 나온 말이 자신은 홀로 싸우겠다는 소리였다.

    ‘대체 무슨 생각인 거야.’

    “차라리 내가 혼자 매복조로 가지.”

    그가 단언하듯 내뱉자 혜미가 곧바로 반박했다.

    “아니, 발터. 그건 위험해.”

    “…설마 날 걱정하는 거야?”

    혜미가 찌푸린 얼굴로 되묻는 그를 보며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그녀의 표정은 혼란스럽지도 불안하지도 않았다. 다만 그에 대한 믿음으로 가득 차 있을 뿐이었다.

    “발터는 나와 달리 지금껏 여러 전투에서 지젤과 함께 맨 앞에 나섰어. 난 주로 뒤로 빠져서 힘을 보탰고.”

    세르노티의 기사들의 눈앞에 닥친 목표는 말라쿤을 처리해 제트성을 탈환하는 것이었지만, 그들 모두가 제1 순위로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은 역시나 혜미의 안전이었다. 그동안 그녀가 뛰어난 검술에도 불구하고 전투를 선두에서 이끈 적이 없는 이유이기도 했다. 세르노티의 기사들은 이제껏 티 나지 않게 그녀를 보호하며 싸우고 있었다.

    “만일 네가 없다면 적군도 분명 이상하다고 생각할 거야. 군사들의 사기가 떨어질 수도 있고. 지금 상황에서는 상대적으로 얼굴이 잘 알려지지 않은 내가 매복을 하는 게 맞아.”

    “하지만….”

    발터가 뒷말을 잇는 대신 제 입술을 지그시 씹었다.

    …난 네가 위험해질까 두려워.

    “설마 지금, 날 걱정하는 거야?

    혜미가 그의 말을 그대로 따라 하며 장난스레 눈을 접었다. 그녀를 보며 입 안을 꽉 깨무는 발터를 향해 그녀가 활기찬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내 실력을 무시하는 건 아니지? 지젤. 레나와 빈센트를 내게 지원으로 붙여 줘. 그럼 리가스가 아니라 리가스 할아버지가 도망친대도 다 잡을 자신이 있으니까.”

    발터. 내가 너를 믿는 만큼 너도 나를 믿어줘.

    그녀의 말에 반기를 드는 사람은 없었다. 수많은 전쟁을 지휘했던 리비에르 역시 혜미의 의견에 동의하는 바였다. 모두가 조용히 침묵을 지키는 가운데 가장 심란한 이는 발터뿐이었다.

    ***

    차가운 빗방울이 흩뿌리듯 대지를 적시고 있는 깊은 밤. 달이 차오르고 멀리서 이름 모를 새가 우는 소리가 크게 들렸다. 주인이 없는 리비에르의 막사 안에서 아일라가 똥을 씹은 얼굴로 중얼거렸다.

    “왜 이딴 옷을 입고 싸워야 하는지, 솔직히 지금도 전혀 이해가 안 가요.”

    머리카락을 어둡게 물들인 아일라는 목소리를 애써 높이지 않았지만 현재 그녀의 기분이 매우 좋지 않다는 것은 표정만 봐도 확실했다.

    “숨 참아, 아일라. 알겠지? 모아야 하니까.”

    미안해서 입을 꾹 다물고 있는 혜미와는 달리, 레나는 그녀가 그러거나 말거나 아일라의 뒤에 달라붙어 용을 쓰는 중이었다.

    “모으긴 대체 뭘 모아요…. 아흑…!”

    “내가 널 완전히 리비에르 뺨치게 만들어 줄게, 기다려! 별 쓸모도 없다고 생각했던 위장술을 드디어 발휘할 날이 오는구나.”

    혜미는 끼어들지도 못하고 아일라의 눈치만 보았다. 언제나 긍정적인 레나를 함께 데려온 게 다행인지 불행인지 알 수가 없었다.

    “흐음. 아무래도 좀 헐렁한데….”

    레나가 매끈한 콧잔등에 주름을 잡으며 한숨을 쉬었다. 붉은색 가죽 갑옷에 걸린 끈을 끝까지 잡아당겨 보았지만 천이 손바닥 한 뼘은 남았다.

    “가슴골 쪽을 좀 꿰매든지 해야 되겠다. 아일라 네가 가슴이 작은 편은 아닌데, 아무래도 리비에르에 비해 갈비뼈가 가늘어서 그런가 봐. 이래서는 무슨… 엄마 옷을 훔쳐 입은 애 같잖아.”

    “전 누구처럼 야한 옷 입고 싸우는 게 체질이 아니라 뭐라도 상관없는데요.”

    째려보며 대꾸하는 아일라는 뚜껑이 단단히 열린 것으로 보였다. 오래전 카플란에서 노예로 살았던 그녀의 과거를 떠올리면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일이었다. 아일라는 평소에도 몸을 드러내는 일을 꺼렸다. 혜미가 당황한 얼굴로 그들 사이에 끼어들었다.

    “레나는 네가 싸우다가 혹시라도 옷이 흘러내리면 민망할까 봐 그러는 거야. 그렇지, 레나?”

    “하하. 싸우다가 옷 찢어지는 게 대수인가. 이왕 위장하는 거 완벽한 게 좋으니까 그런 거지.”

    눈치도 없는 레나가 생긋 웃으며 남는 옷감에 작게 표시를 남겼다.

    “리비에르랑 피부색만 좀 비슷했어도 내가 가는 건데…. 막내 아일라가 고생하게 됐네.”

    건강하게 그을린 콧잔등을 찡그리며 속삭이는 레나의 진심이 느껴졌기에, 아일라가 뭐라 불평하려던 입을 다물었다. 까만 눈동자를 반짝이며 레나가 목소리를 높였다.

    “괜찮아. 빈센트한테 네 가슴 흘끔거리는 놈들 있으면 다 죽여 놓으라고 할게.”

    “…빈센트가 죽이기 전에 제가 죽여요.”

    아일라의 퉁명스러운 말투는 조금 누그러져 있었다.

    “히힛. 그건 그렇다.”

    표시를 끝낸 레나가 아일라의 등을 탁탁 두드렸다.

    “됐다, 아일라. 얼른 고쳐 줄 테니까 갑옷 벗어.”

    “…레나는 바느질 못하잖아요.”

    아일라가 미심쩍은 표정으로 그녀를 보자 레나가 어깨를 으쓱했다.

    “토비아스한테 맡길 생각이야. 걘 찢어진 살갗도 잘 꿰매는데 이딴 천 쪼가리가 문제겠어?”

    말이 안 되지만 반박할 수 없는 교묘한 논리였다.

    “레나. 토비아스는… 지금 엄청 바쁘지 않을까?”

    혜미가 그녀에게 슬쩍 운을 뗐다. 이제 몇 시간 후면 토비아스는 조세핀과 함께 조를 짜서 비밀 통로로 잠입할 예정이었다.

    “안 그래도 확인해 봤는데, 빈센트 말로는 잠입 준비는 아까 전에 다 끝났대. 토비아스, 말로는 못한다 못한다 하면서도 은근히 실전에 강한 타입인 거 알지? 지금쯤 마인드 컨트롤 하고 있을 텐데, 그 살쾡이 같은 여자한테 시달리는 게 싫어서라도 내가 가 주는 게 좋을 거야.”

    조세핀을 말하는 것이었다. 레나가 동그란 이마에 주름을 잡으며 말을 이었다.

    “그리고 원래 바느질 같은 단순 노동이 정신 집중하기엔 딱이거든.”

    “…레나는 바느질 못한다면서 그건 어떻게 알아?”

    “으응. 나두 빈센트네 어머니한테 주워들은 이야기야. 빈센트는 누나가 많아서 어머니가 늘 옷을 지으셨거든. 덕분에 나랑 오빠도 여러 벌 얻어 입었었는데. 빈센트의 어머니는 내 결혼식 때 옷을 지어 주기로 약속까지 해 주셨어.”

    언제나처럼 쾌활하게 수다를 이어 가는 그녀의 옆에서 아일라가 군소리 없이 묵직한 리비에르의 갑옷을 벗었다.

    “그럼 다녀올게…! 어? 비가 오네.”

    레나가 가죽옷을 들고 비가 뿌리는 막사 바깥으로 후다닥 사라졌다. 막사가 조용해지자 아일라가 이마를 손등으로 문질렀다. 혜미가 그녀를 마주한 채, 연보랏빛 눈동자에 미안함을 담고 속삭였다.

    “고마워, 아일라.”

    “…고마우면 나중에 맛있는 걸 실컷 사 주시든가요.”

    언젠가 혜미가 했던 말을 되풀이하며 아일라가 속옷 차림으로 작게 내뱉었다. 혜미는 그녀를 보며 크게 심호흡을 하며 웃었다.

    “꼭 그럴게.”

    토비아스가 총 오십 명의 병사를 데리고 제트성을 향해 출발하는 것은 자정을 넘긴 깊은 새벽이었다. 비상시 성에서의 탈출을 위해 만들어 놓은 비밀 통로는 성인 둘이 겨우 몸을 숙여 나란히 움직일 수 있을 정도로 낮고 좁았다. 길이도 상당했거니와 군사들이 무기를 들고 이동해야 했으므로 그들의 도착 예정 시간은 아무리 빨라도 출발 후 두 시간 뒤였다.

    성안으로 침투한 그들이 성문을 열고 내부를 혼란시켜 시간을 버는 동안 공격조가 들이닥치고, 동이 트기 전에 성의 함락을 끝내는 것이 그들의 계획이었다. 그리고 아일라는, 발터와 함께 선두에서 싸우는 역할이었다.

    “세드릭이 함께 있었다면 그도 이 작전에 동의했을까…?”

    혜미가 혼잣말하듯 중얼거리자 아일라가 작게 속삭였다.

    “그분은 혜미의 뜻이 무엇이든, 그대로 따르셨을 거예요.”

    더욱 부담이 되는 말이었다.

    “아일라….”

    “전 괜찮아요.”

    당연히 공격조로 갈 줄 알았던 리비에르는 장고 끝에 혜미와 함께 랑켈 산맥 입구에서 매복을 하는 쪽을 선택했다. 무엇이 그녀의 결심을 바꾸었는지는 리비에르 자신만이 아는 것이었다. 확실한 것은 리비에르가 리가스의 목을 직접 자르고자 하는 의지가 엄청나다는 것이었다.

    그 때문에 리비에르는 공격조에서 군사들을 이끌 그녀의 대역을 찾아야 했고, 그 자리에 아일라를 선택했다. 처음에는 단지 머리카락이 길다는 이유인 줄 알았지만 수차례 전쟁을 승리로 이끈 지휘관의 눈은 역시나 날카로웠다. 밝은 금발을 어둡게 물들이고 그녀의 갑옷을 입은 아일라는 멀리서 봤을 때 언뜻 착각할 만큼 리비에르와 흡사하게 보였다.

    “왜 이렇게 긴장이 되는지 모르겠어. 네가 잘 해낼 걸 아는데…. 네 실력을 내가 절대 모르지 않는데도….”

    막상 결전의 날이 다가오니 불안한 마음을 감출 수가 없었다.

    “전 절대 안 죽어요. 싸우러 가는 게 아니라 호위받으러 가는 것 같아 이상할 지경이에요.”

    레나는 아일라를 걱정하는 혜미의 마음을 알아채고, 원래 매복조였던 빈센트를 공격조로 합류시키자는 의견을 내놓았다. 리비에르도 흔쾌히 승낙을 해 주었지만 그래도 염려가 되는 마음은 어쩔 수가 없다.

    아일라가 장밋빛 입술을 열어 속삭였다.

    “걱정 말아요.”

    누군가 선풍기를 앞에서 틀기라도 한 것처럼 콧잔등이 간질거렸지만 의연한 아일라 앞에서 약한 모습을 보이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혜미가 그녀를 보며 떨리는 목소리를 애써 붙잡고 태연하게 내뱉었다.

    “그나저나… 세드릭이 준 갑옷을 입지 못하게 돼서 어쩌지…?”

    강철 갑옷을 벗어 던지고 몸을 한껏 드러낸 채 화려하게 싸우는 것은 지젤 리비에르의 상징적인 이미지였다. 아무것도 두려울 것이 없고 자신을 숨기지도 않는다는 그녀의 의지의 표현이었고, 그 덕에 많은 군사들에게 강한 인상을 남길 수 있었던 효과적인 수단이기도 했다. 아일라가 혜미를 보며 대수롭지 않은 표정으로 대꾸했다.

    “그건 원래 안 입어요.”

    “…응? 왜? 전투할 때면 매번 챙겨 입는 거 아니었어?”

    어린 아일라가 마을에서 열린 맥주 대회에서 우승한 후, 세드릭에게 주었다가 다시 되돌려 받은 갑옷이었다. 그녀가 세르노티를 배반했다는 오해를 받았던 지난 3년. 아일라의 이름을 기사단에서 제명시킨 세드릭이었지만 그녀에게서 받은 갑옷은 차마 버리지 못하고 간직했다는 말과도 같았다.

    둘 사이의 역사를 담고 있는 의미 있는 물건이었기에 아일라가 부적처럼 늘 사용할 거라고 생각했었는데.

    “아까워서 그걸 어떻게 입어요.”

    “…….”

    “세드릭 님에게 되돌려 받은 이후, 그 갑옷은 한 번도 사용한 적 없는걸요.”

    “그럼 뭐 했어? 끌어안고 자기라도 한 거야?”

    “…비슷해요.”

    혜미가 흔들리는 눈동자로 짤막하게 한숨을 뱉었다. 정말, 이 답답하고 미련한 이들을 어쩌면 좋을까.

    “아일라. 너… 아끼면 똥 된다는 말도 몰라?”

    “몰라요. 그리고 갑옷은… 제가 매일 저녁마다 닦고 광내서 그럴 일은 절대 없어요.”

    작게 속삭이는 아일라의 푸른 눈이 보석처럼 반짝이며 가늘게 접혔다. 혜미는 부끄러운 듯 얼굴을 붉히며 미소 짓는 그녀를 보며 젖은 눈으로 마주 웃어 버리고 말았다.

    “못 말리겠다, 정말.”

    짝사랑을 정말이지 지독하게도 이어 가는 그녀도 참 미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혜미는 그런 그녀가 싫지 않았다.

    “나중에 세드릭 님을 만났을 때 제가 이 전투에서 얼마나 멋있었는지, 꼭 말씀해 주실 거죠?”

    “그건 네가 직접 말해야지. 세드릭이 널 얼마나 자랑스러워하겠니?”

    오만한 얼굴로 기뻐할 잿빛 머리의 모습이 눈앞에 선했다.

    “제 입으로 말하는 건 제 성격이랑 안 어울리잖아요. 혜미가 제 칭찬을 하면 저는 그 옆에서 가만히 듣고만 있을게요.”

    “너 이제 봤더니 은근히 계략 쓰는 캐릭터다.”

    “네?”

    “근데 난 매복조잖아. 너랑은 따로 움직여야 해.”

    “그럼 가주에게 부탁을 해야 하나….”

    차라리 빈센트가 낫겠네요, 하며 중얼거리는 아일라를 보며 혜미가 손을 뻗어 그녀의 손을 잡았다.

    “아일라.”

    “네.”

    “난 널 믿어.”

    그러니, 무사해. 제발.

    “…그 믿음 절대로 배신하지 않을게요.”

    낮게 속삭이는 아일라의 얼굴은 몹시도 차분했다. 혜미는 그녀의 모습을 똑똑히 머릿속에 집어넣었다. 후일 세드릭을 다시 만나게 되는 날에 반드시, 아일라는 그의 곁에서 웃게 될 것이다.

    총 4개로 나뉜 조의 병사들에게 작전은 모두 전달되었다.

    제국력 179년. 싸늘한 비가 내리던 10월의 보름.

    지젤 리비에르 백작이 이끄는 군대 2천은 세르노티 기사단과 합작, 야만족 말라쿤이 점령한 제트성 탈환 작전을 실행한다.

    ***

    제국력 179년 가을, 아메티스 황금성

    사각, 사각.

    유려한 글씨체로 꽉 채워진 서류 위에서 깃털로 된 펜이 움직였다. 크리스티앙이 하얀 장갑에 튄 작은 잉크를 응시하며 나직하게 입을 열었다.

    “짐은 자일룬에서 동향을 보고 받는 대로 호아킴 장군에게 전언을 보낼 생각이네.”

    “…호아킴 장군을 동쪽으로 출정시키겠다는 말씀이십니까?”

    원로원의 귀족 하나가 조심히 입을 뗐다. 크리스티앙이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리비에르 백작이 가장 최근 보내온 서신은 겨울이 오기 전까지 임무를 완수하겠다는 내용이었어. 그러니 곧 결과가 나지 않겠나? 호아킴이 그쪽으로 떠나야 할지, 아닐지.”

    사실 크리스티앙에게는 그녀가 말라쿤의 왕인 리가스를 처리하건, 그렇지 못하건 크게 상관이 없었다. 이미 그의 머릿속에 그녀에 관한 계획은 처음부터 정해져 있었다. 과정이 무엇이 되었든 결과는 같았다. 확 불타올랐다 사그라든 불꽃 같은 존재로 기억되는 편이 리비에르에게도 좋을 것이다. 천한 태생으로 누릴 수 있는 것은 이미 차고 넘치게 주었으니까.

    “리비에르 장군이 리가스의 목을 내게 바친다면 호아킴은 번거로운 일이 하나 줄어들 뿐이니.”

    크리스티앙의 호아킴의 이름이 적힌 서신 아래, 자신의 이름을 써넣는 칸을 공란으로 남겨 놓은 채로 낮게 내뱉었다.

    “폐하. 자일룬에서의 전쟁이 끝난 후, 리비에르 백작의 거취는 어떻게 정할 생각이십니까.”

    귀족들 중 하나가 용기를 내어 그에게 물었다. 크리스티앙이 그를 보며 잠시 침묵하다 입을 열었다.

    “짐은 이 전쟁이 끝나면 리비에르와 그녀의 군대를 북쪽으로 파견하고, 북부에서 오래도록 고생한 호아킴 장군을 아메티스로 불러들일 생각이네만.”

    자리에 모인 최고 귀족들의 얼굴이 단박에 화색을 띠었다. 미천한 출신 때문에 귀족들 눈엣가시 같던 리비에르를 척박한 북쪽으로 보낸다는 말은 듣던 중 반가운 이야기였다.

    크리스티앙의 심기에 거슬릴까 감히 말은 내뱉지 못했지만, 비어 있는 원로원 회의석에 리비에르가 등장하는 참사가 일어나기라도 할까 염려하고 있는 이는 한둘이 아니었다.

    천한 핏줄과 동등한 위치에서 황제를 대면해야 한다는 것 자체가 그들에게는 크나큰 모욕이었다.

    “혹여 호아킴 장군을 아메티스로 불러들이는 것에 대해 다른 의견이 있으신지.”

    크리스티앙이 원로원 석을 보며 되묻자 귀족들이 저마다 신중한 표정을 얼굴에 올렸다.

    “호아킴 장군 역시 북부에서 수년간 머무르며 국경을 지켰으니 이제 폐하의 곁에서 힘을 보탤 때가 되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제 의견 역시도 그러합니다.”

    이때다 싶어 몇몇 나이 많은 이들이 목소리를 높였다. 클라웨에서 현재 황제인 크리스티앙을 제외하고 가장 강력한 권력을 가진 이라고 한다면 원로원의 수장이자 황궁 근위대를 이끄는 하이데거 대공 그리고 수년 전 수도인 아메티스와 가장 멀리 떨어진 북부로 발령을 받은 호아킴 장군이라고 할 수 있었다.

    태후가 살아 있을 때는 상황이 조금 달랐다. 그녀가 친자인 크리스티앙을 대신해 섭정을 할 당시, 클라웨에서 권력을 양분하고 있던 주축은 당시 황실 근위대 지휘관이던 호아킴과 암살단인 카플란 가문이었다. 카플란이 세르노티와의 전쟁으로 인해 완전히 와해된 지금 호아킴 장군은 태후의 측근 중 살아남은 유일한 이였다.

    원로원들은 황제인 크리스티앙이 그와 반목하지 않은, 아니 못한 이유를 호아킴이 거느리는 강한 군사력으로 보았다. 떠오르는 전쟁 영웅인 리비에르가 전쟁 포로와 용병을 상당수 흡수했다고 하지만 오랜 세월 클라웨에서 힘을 지켜온 호아킴과는 비교가 불가능했다.

    크리스티앙은 벌써 몇 년 동안이나 호아킴을 척박한 변방 지역으로 내돌린 상태였다. 원로원들 중 황제가 그를 견제하고 있는걸 짐작하지 못할 이는 없었다.

    “호아킴 장군이 돌아온다면 완벽한 황금성의 경비는 더욱 철저해져 강대국의 위상을 빛낼 것입니다.”

    황궁 근위대를 지휘하는 하이데거 대공이 황제의 결혼예식 이후, 알 수 없는 병증으로 공석에 나서지 않고 있는 지금이 적기였다. 원로원들은 호아킴이 황금성으로 돌아와 황제와 대립할 수 있는 권력이 되어 주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었던 것이다.

    크리스티앙이 왜 호아킴을 북부로 보냈고, 또 왜 지금과 같은 상황에 다시 불러들이는지에 대한 이유는 짐작도 하지 못한 채.

    “경들이 모두 찬성하니 그럼 그리 진행을 하도록 하지.”

    “예, 폐하.”

    호아킴이 돌아온다는 말에 화색을 감추지 못하던 원로원들의 얼굴을 하나하나 머릿속에 새기며 크리스티앙이 슬쩍 운을 띄웠다.

    “설마 회의가 너무 길어져 다들 빨리 끝낼 생각만 하고 그저 내 말이면 무엇이든 따르겠다고 답하는 건가?”

    분기별로 이루어지는 황실과 원로원의 회의는 길기로 유명했다. 회의 시작 직전, 시종이 밝혀놓은 촛대 위의 초들은 이미 바닥을 드러내는 중이었다. 앉은 자리에서만 네 시간이 넘었다는 뜻이다. 이미 수차례 곤란을 겪어 왔던 귀족들 중 몇몇은 바지 아래 단단히 조치를 하고 온 후였다.

    “천만의 말씀입니다. 폐하!”

    “충심을 곡해하지 말아 주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그래. 자네들의 충심은 가슴속에 깊이 새겨 주지.

    “하하. 농담이네.”

    크리스티앙이 깃털로 된 펜을 툭, 하고 내려놓으며 싱긋 웃었다.

    “이번에도 공사가 다망한 와중에 입궁하느라 고생이 많으셨소.”

    “당치 않은 말씀입니다. 폐하.”

    회의의 끝을 알리는 그의 한마디에 대신 여러 명이 앞다투어 입을 열었다.

    “폐하께서야말로 바쁜 정무 탓에 건강을 소홀히 하실까 걱정됩니다.”

    “결혼 예식을 치른 지 이제 겨우 두 달밖에 되지 않으셨으니 말입니다.”

    “클라웨의 국민들은 황제 폐하의 혼인에 연이을 기쁜 소식을 간절히 바라고 있을 것입니다.”

    달칵.

    크리스티앙이 금테를 두른 하얀 도자기 잔을 내려놓았다. 조금도 줄어들지 않은 찻물은 완전히 식은 채였다. 그의 곁에서 늘 조용히 자리를 지키던 에리히의 부재가 새삼 실감이 났다.

    비단 황제의 찻잔이 안전한지 검수할 이가 없어서는 아니었다. 에리히가 없는 회의장의 공기는 오직 그만이 느낄 수 있을 정도의 미묘한 차이가 났다. 대신들 측에서 쓸데없는 말이 늘어나는 것이 그 증거였다.

    이번 모임은 원로원의 수장인 하이데거 대공이 불참한 첫 번째 회의였다. 교황청의 지하에서 고통을 겪고 있을 그를 생각하면 딱한 마음이 들었지만, 이럴 때면 역시 아쉬워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늙은 하이에나 같은 원로원들의 아첨 어린 혀를 싹둑싹둑 잘라 내고 싶은 충동에 배가 뒤틀린다.

    크리스티앙이 웃으며 입을 뗐다.

    “하하. 예식을 올린 지 이제 겨우 두 달밖에 되지 않았거늘, 경들은 벌써 내게 후세를 기대하고 있기라도 하는 것인가.”

    원로원의 몇몇이 상석에 앉은 황제의 표정을 살피며 서둘러 입을 뗐다. 그들의 눈에 젊은 황제의 기분은 그리 나빠 보이지 않았다.

    “아뢰옵기 황공하오나 그것이야말로 제국의 경사일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이 자리에 모인 저희뿐 아니라 모든 국민들이 그 소식을 기다리고 있을 것입니다. 후계자가 빨리 결정되는 일은 결코 나쁜 일이 아닙니다, 폐하.”

    “그래? 좋아.”

    크리스티앙이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다음번 회의 때는 이 자리에 황후를 부르지. 그리고 교황과 원로원의 대신들이 모두 지켜보는 앞에서 그녀를 회임시켜 보도록 하겠네.”

    웃으며 내뱉는 황제의 말투는 태연했다. 지금 그들이 들은 말에 대해 귀를 의심하는 원로원 좌석에서 잠시 얼음 같은 침묵이 흘렀다. 누군가가 간신히 입을 뗐다.

    “흠…. 폐, 폐하. 농이 지나치십니다.”

    “농담이 아니야. 모두의 앞에서 내 씨를 받은 황후가 회임을 하기라도 한다면, 그야말로 후계자로서의 완벽한 자격을 갖추는 게 아니겠는가? 난 그렇게 생각하네만.”

    크리스티앙의 눈빛은 그의 말마따나 농담하는 걸로는 보이지 않았다.

    “아니, 굳이 다음번까지 기다릴 필요도 없겠군.”

    그가 고개를 돌려 주르륵 대기하고 있는 시종을 보았다.

    “황후에게 당장 이리 올 준비를 하라 일러.”

    “예, 폐하.”

    “하이데거 대공이 이 자리에 없는 게 다행인가? 난 상관이 없지만 황후는 오라비 앞에서 다리를 벌리는 게 수치스럽지 않겠나.”

    크리스티앙이 붉은 입술을 혀로 쓸었다. 원로원은 그가 진심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시종은 이미 황후를 데리러 조용히 자리를 뜬 상태였다. 크리스티앙은 정말로 모두의 앞에서 그녀를 안는 미친 짓을 할 성정이었다. 당황해 어쩔 줄 모르는 이들 중 누군가가 간신히 목소리를 냈다.

    “폐하. 황후께서는 몸도 약하신데 그러다 크게 탈이라도 나실까 걱정이 됩니다.”

    “마리오 롤랜드 후작.”

    “예, 폐하.”

    꿀꺽. 이름이 불린 귀족이 마른침을 삼켰다. 품성이 온화하여 남쪽 지방에서 영주들의 두터운 신임을 받는 자였다. 크리스티앙이 그를 향해 부드럽게 웃었다.

    “그럼 자네가 내 대신 황후의 침실로 들어가 그녀의 긴장을 풀어 주기 위한 노력이라도 한번 해 보겠나?”

    “……!”

    “경의 부인은 그대에게서 자식을 다섯이나 보았지. 사용인들에게도 다정하기로 유명한 그대라면 몸이 약한 나의 미리엄을 부드럽게 다룰 수 있을 것 같은데. 안 그래?”

    붉은 입술을 잘근거리며 웃는 크리스티앙의 하얀 피부가 창백하리만큼 차가운 빛을 띠었다. 롤랜드 후작은 더 이상 망설이지 않았다. 그의 가족 관계와 사용인에 대한 평판까지 모조리 꿰뚫고 있는 철저한 황제에게 무어라 말을 더 붙였던 것이 잘못이었다.

    그가 자리에서 일어나 크리스티앙의 발치에 무릎을 꿇고 목소리를 높여 읍소했다.

    “감히 황제 폐하의 의중을 미처 헤아리지 못하고 불필요한 의견을 발설한 점을 용서하여 주십시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