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6화 (36/72)

“폐하께서는 원치 않으시겠죠?”

혜미가 말없이 인상을 찌푸리자 베네딕트가 그녀를 향해 손을 들었다. 짤막하게 잘린 머리칼이 그의 손가락 사이에 부드럽게 걸리며 머리를 쓰다듬었다. 단순한 위로의 손길로 느껴졌으므로 혜미는 그를 떨쳐 내지 않았다. 그의 손길이 자연스럽게 느껴지는 것은 아마 오래전에도 어린 그녀를 그가 이런 식으로 달래 주었기 때문일 것이다.

“발터가 리비에르를 마음에 둘까 염려가 되십니까?”

“…리비에르 같은 여자가 좋다고 하면 싫을 이가 있을까요?”

마치 편한 친구에게 상담을 하는 느낌이었다. 베네딕트에게 그런 감정을 느끼는 스스로가 낯설면서도, 술술 말이 입에서 흘러나왔다.

“그렇다고 해도 무슨 상관입니까.”

“네?”

“설사 폐하의 개가 리비에르를 마음에 두었다고 한들 무슨 상관이냐고 물었습니다.”

의문이 섞인 혜미의 눈동자에 시선을 맞추며 베네딕트가 부드럽게 말을 이었다.

“그는 자신의 일생을 폐하를 위해 바치겠다고 충성을 맹세한 자입니다.”

“…그래서요?”

“그에게 명령하면 될 일이 아닙니까.”

“명령을… 하라고요?”

앵무새처럼 그의 말을 되풀이하는 그녀를 향해 베네딕트가 고개를 끄덕였다.

“예. 이번 일이 끝나면 평생 리비에르가 있는 방향으로는 눈길도 돌리지 말라고 명령을 하면 그는 분명 그리할 것이니까요.”

혜미가 고개를 들자 베네딕트가 그녀의 머리칼에서 손을 천천히 떼어 냈다. 인상을 찌푸린 채, 그녀가 작지만 또렷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런 식으로 하긴 싫어요.”

“왜죠?”

“그건 의미가 없으니까요.”

“폐하는 쉬운 길도 어렵게 가기를 원하시는군요.”

“사람한테는 진심이라는 게 있잖아요.”

“그래서 폐하의 진심은 무엇인지요.”

베네딕트가 되묻자 혜미가 대답을 망설였다.

“괜찮습니다. 혼란스러워하셔도, 괴로워하셔도 됩니다.”

“확실한 건요.”

혜미가 그의 말을 부정하듯 입을 열었다.

“제가 생각하는 사랑 같은 건… 일단 충성과는 거리가 먼 것 같아요. 사람과 사람의 마음이잖아요. 명령과 복종으로 강제할 수 있는 건 사랑이 아니라고 생각해요.”

베네딕트는 진지한 표정으로 그에게 말하는 그녀를 보며 자신의 마력이 소리 없이 일렁이는 것을 느꼈다. 동화 속 아름다운 세계에 사는 것 같은 그녀의 환상을 깨부수고 싶은 충동과 지켜 주고 싶은 충동이 동시에 드는 것은, 역시나 그가 뒤틀렸기 때문일 것이다.

“명령과 복종으로 강제해 주기만을 간절히 바라는 관계도 있습니다.”

발터가 원하는 것도 바로 그것이었을 것이다. 그는 주인이 명령한다면 당장이라도 옷을 벗고 그녀의 아랫도리를 핥을 수 있는 개였다.

“…그게 무슨 뜻이에요?”

베네딕트는 아무것도 모르는 표정으로 그에게 되묻는 혜미를 바라보며 소리 없이 숨을 들이쉬었다. 괴로운 것은 발터도 마찬가지일 게 분명했다. 제 욕심 때문에 죽음에 처한 연인을 제 쪽에서 먼저 끌어안는 것이 불가능한 것은 당연한 이야기였다.

그래서 방금 전에도 그리 애달픈 시선으로 그녀를 보았던 것일 테다. 정작 그녀는 질투와 불안감에 눈이 멀어 그가 보내는 모든 유혹의 사인을 알아채지도 못했지만.

무화과라니. 너무나 명백해서 하마터면 소리 내어 웃을 뻔했다.

“발터 세르노티가 진짜로 원하는 게 뭔지, 차마 폐하께 털어놓지 못한 진심이 뭔지 궁금하지 않으십니까?”

베네딕트가 입술을 슬쩍 씹었다. 그의 몸속에서 뒤틀린 욕망이 점점 크기를 부풀렸다.

“폐하에게 충성을 맹세한 부하가 홀로 있을 때 무슨 짓을 하는지 저도 궁금하군요.”

그의 뒤로 푸르스름한 연기가 일더니 혜미의 시야에 다른 공간이 보였다. 그녀가 현재 있는 곳과 비슷한 막사였다.

“이럴 줄 알았습니다.”

베네딕트가 작게 웃으며 중얼댔다. 연기 속에서, 침상에 걸터앉아 있는 이는 방금 전 이곳에서 돌아간 발터였다.

“하아….”

그의 널찍한 어깨가 느리게 움직였다. 혜미는 그 자리에 얼음처럼 굳어 소리 없이 눈을 깜빡였다. 바지춤을 풀어헤친 발터의 손에서 굵직한 살덩이가 흔들렸다. 눈앞에서 펼쳐지는 강렬한 이미지에 숨을 쉬는 것도 잊었다.

스륵. 스르륵.

괴로운 표정으로 거친 숨을 내뱉으며 자위하는 발터를 보고 베네딕트가 그녀의 귓가에 작게 속삭였다.

“맘에 드십니까? 주인을 생각하며 스스로를 위로하는 개의 모습이.”

“…그만둬요.”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혜미가 고개를 저었지만 눈앞의 영상은 사라질 줄을 몰랐다.

“아…. 흣…. 이든….”

발터의 커다란 손안에서, 팔뚝만 한 성기가 문질러지며 거칠게 흔들렸다. 다른 한 손은 제 입가를 가린 채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 핏줄이 불거진 그의 굵은 목덜미가 붉게 달아올랐다. 발터의 얼굴이 엉망으로 일그러졌다. 그의 손놀림은 점점 빨라지고 있었다.

“그는 아까도 폐하와 이러고 싶은 생각밖에는 없었을 겁니다. 약을 가지고 온 것은 폐하를 만나고 싶은 핑계에 불과했겠죠. 리비에르 따윈 안중에도 없다는 사실을 눈으로 직접 확인하시니 이제 좀 마음이 놓이십니까…?”

“그, 그만….”

혜미가 뜨겁게 달아오른 얼굴을 애써 돌리며 베네딕트를 향해 잇새로 속삭였다. 그 와중에도 욕망 어린 발터의 숨소리가 생생하게 울려 퍼지고 있었다.

“안심하셨군요.”

베네딕트가 흥분에 달아오른 그녀를 보며 슬쩍 고개를 기울였다.

“자. 그럼 고민을 해결해 드린 것에 대한 감사 인사는 아까 약속하셨던 입맞춤으로 받겠습니다.”

거부할 수가 없었다. 달콤한 숨결이 피부에 닿아 오는 것과 동시에 그녀의 입술이 베네딕트에게 부드럽게 삼켜졌다. 자석에 이끌리듯 혀가 뒤섞이자 몸이 찌르르 떨리며 반응했다.

“하아…. 응…!”

발터의 거친 숨소리가 귓가에 울려 퍼지자 다리 사이가 저절로 축축하게 젖어 들었다. 베네딕트는 그녀의 변화를 놓치지 않고 혀를 강하게 빨며 타액을 삼켰다.

“이든, 아…. 아아…. 젠장, 아흑…!”

쾌감의 정점을 찍은 발터의 욕망이 거칠게 터져 나갔다. 동시에 혜미가 있는 힘껏 베네딕트를 밀어냈다.

“하아…. 하아….”

밀어냈다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그의 어깨에 손을 짚으며 입술을 떨어뜨린 것에 불과했다.

“그만… 해요.”

“왜 그러십니까. 기분 좋지 않으십니까…?”

입술에서 가느다란 타액이 연결되어 늘어졌다. 스멀거리는 푸른 연기 저편에서 발터가 머리를 감싸며 괴로워하는 모습이 아직도 보였다.

“폐하의 몸이 뜨겁게 달아오른 것이 생생하게 피부로 전달됩니다만….”

“이런 건… 하아…. 흣…. 시, 싫어요.”

“싫다기엔 폐하의 몸이 너무나 뜨겁습니다.”

베네딕트가 탄식과 같은 신음을 내뱉으며 고개를 기울였다. 타액으로 젖은 혀가 그녀의 아랫입술을 핥았다.

춥, 춥, 내려오는 입술이 목덜미에 닿자 등줄기에 긴장이 내달리며 온몸이 녹아내리는 듯한 기분이 든다. 혜미는 흥분에 베네딕트의 목을 끌어안지 않으려 안간힘을 써야 했다.

“보는 것만으로는 만족을 못 하시겠지요? 욕심이 많은 폐하께선 지금 이 자리에 그를 불러들여 저와 함께 뒹구는 것이 더 좋으실까요…?

아득해지는 의식 속에서 그녀의 정신을 차리게 한 것은 그의 한마디였다.

“아… 안 돼요…!”

“원한다면 그로 하여금 꿈이라고 착각하게 만들 수 있습니다. 그가 폐하와 몸을 섞는 저를 보며 어떻게 나올지 궁금하지 않으십니까? 폐하께서 제 좆을 입에 문 채로 그에게 다리를 벌린다면, 그는 과연 어떤 선택을 할까요…. 그 유혹을 거부할 수 있을지, 저는 무척이나 궁금해지는데….”

안 된다. 절대 안 되는 소리였다.

혜미가 그녀의 쇄골에 이를 박는 베네딕트의 어깨를 강하게 움켜쥐었다. 베네딕트의 몸에서 붉고 푸른 기운이 섞여서 넘실거렸다. 그녀의 다른 손이 그의 은발을 헤치고 머리를 꽉 잡았다. 연한 하늘색 눈동자의 색이 짙어지며 가늘게 변했다. 혜미가 숨을 헐떡이며 입술을 꽉 깨물었다. 밀어내야 하는데 밀어낼 수가 없어서 미칠 것 같았다.

“제발… 부탁이니까…. 제발….”

사라락. 기다란 머리카락이 그녀의 무릎 위에서 흔들렸다. 그녀의 얼굴을 감싸 쥔 채, 베네딕트가 그녀의 아래로 손을 내렸다. 질척하게 흘러내려 옷을 적신 것은 흥분의 산물이 분명했다.

자신의 손에 의해 달아오른 이가 다른 사람을 생각하며 애원하는 모습에 베네딕트의 심장이 저릿하게 울려 왔다. 잊었다고 생각한 감정. 다시는 느낄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던 박탈감.

그 모든 것을 감추고 베네딕트가 흐릿하게 미소 지었다.

“예. 폐하.”

“그러지 마요.”

“무엇을?”

“발터를… 흐윽…. 상처 주지 마….”

그의 손길에 절정에 올라 버린 혜미의 입술에서 결국 울음이 터지고야 말았다.

“저런….”

베네딕트가 그녀의 아랫도리에서 손을 뗀 후, 그녀를 제 품에 꼭 끌어안았다.

“농담이었습니다, 폐하.”

“하아…. 흐으…. 윽….”

주르륵. 진한 쾌감과 안도감, 자괴감이 뒤엉킨 눈물이 그녀의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이리 조금만 겁을 주어도 약점을 쉬이 드러내 보이시면 어떡합니까.”

토닥, 토닥 그녀의 등을 두드리는 손길에 다정함으로 감춘 욕망이 희미하게 일었다.

“발터가 그렇게 좋으십니까.”

“…좋아 …요.”

혜미가 그의 품에서 눈물을 뚝뚝 흘리며 속삭였다. 베네딕트가 색이 연한 제 입술을 지그시 물었다. 그를 사랑한다 말하던 어린 황녀는 이제 그의 품에서 다른 사람의 이름을 부르며 울고 있다.

“저는 안 됩니까…?”

베네딕트가 그녀의 귀에 작게 내뱉었다. 그의 몸에서 일렁이는 색의 기운은 점점 커져 넘실거렸다.

“…뭐라고요…?”

베네딕트가 그녀에게 눈을 맞추었다. 엉망으로 구겨졌던 얼굴에 다시금 미소가 덧씌워졌다. 방울방울 맺혔다가 떨어지는 눈물을 뺨에서 덧그리는 손가락이 집요했다.

“저로는 안 되겠냐고 묻고 있습니다. 폐하.”

그녀를 바라보는 눈동자의 색은 깊은 바다색으로 짙었다.

“…베네딕트….”

혜미가 그를 보며 미간을 모은 채 숨을 몰아쉬었다. 그의 심장 박동과 그가 지금 느끼고 있는 감정의 색이 맞닿은 피부를 통해 고스란히 전달된 탓이었다. 그녀의 눈동자가 더욱 커다랗게 뜨이며 혼란에 흔들렸다.

왜? 어째서….?

이건 마치 그녀가 발터를 생각하며 느끼는 불안, 혹은 조바심, 혹은 질투와 닮아 있는 감정이었다.

날 싫어하는 게 아니었어?

“…왜요…?”

대체 왜? 혜미가 애원하듯 되묻자 베네딕트가 미간을 찌푸리고 설핏 웃었다.

‘세상에는 폐하가 이해하지 못하는 종류의 감정도 존재합니다.’

머릿속에서 베네딕트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녀가 믿지 못하겠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천천히 저었다.

‘발터가… 그가 날 생각하며 괴로워하는 모습은 왜 보여 준 거예요? 왜 나를 안심시킨 거예요?’

혜미의 몸이 딱딱한 침상에 넘어갔다. 그녀에게 몸을 겹친 베네딕트가 손으로 그녀의 몸을 부드럽게 쓸었다.

‘쓸데없는 걸로 괴로워하는 폐하의 모습을 보는 게 썩 유쾌하지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옷이 부드럽게 올라가고 그가 그녀의 가슴을 손에 쥐었다. 빳빳하게 솟은 유두를 입에 물고 진하게 빨자 혜미의 허리가 바짝 들려 휘었다.

‘흣…. 난, 이해할 수가 없어요…. 대체 당신이 나한테 바라는 게 뭔지….’

이해할 수 없는 게 당연했다. 베네딕트 그 자신조차도 스스로의 내면에서 벌어지고 있는 변화를 따라갈 수가 없어 혼란스러운 게 사실이었다.

왜, 어째서. 그는 다른 남자에게 사랑을 말하는 여자에게 마음을 빼앗겨 버리는 것일까. 이 또한 대마법사들이 겪어야 하는 저주받은 숙명 중 하나일까.

“…폐하께서 어릴 적 제게 약속하셨거든요.”

베네딕트가 그녀의 양손을 결박한 채, 눈을 가늘게 떴다. 아니. 이번에는 다르다. 그녀의 처음은 그였다. 그것만은 누가 뭐라고 해도 확실했다.

“황녀는 베네딕트와 결혼할 거예요!”

“…약속을 지켜 주셔야겠습니다, 폐하.”

“베네딕트는 황녀 때문에 손이 많이 아팠으니까, 황녀가 베네딕트를 매일매일 웃게 해 줄 거예요. 행복하게 해 줄 거예요!”

이루지 못할 꿈이라는 사실은 베네딕트 스스로가 가장 잘 알았다. 그의 인생에 행복이라는 두 글자는 없는 거였다. 각인한 상대와 그 고통을 나누며 영원히 살아가면 되는 것이다. 그의 감정은 감히 ‘사랑’이라는 허상 같은 말로 표현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난 발터를 좋아해요….”

혜미가 잇새로 흐느끼듯 내뱉었다.

“착각입니다. 그저 폐하께서는 그를 소유하고 싶으신 것뿐.”

그녀가 부정하듯 고개를 저었다. 베네딕트는 그녀의 연보라색 눈동자를 뚫어져라 바라보며 유혹적인 체액이 뚝뚝 흘러내리는 아랫도리를 그녀에게 문질렀다.

‘그를 포기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는 폐하의 명령이라면 괴로움을 무릅쓰고라도 곁에 남아 있을 테니까.’

베네딕트가 그녀의 다리를 벌리며 몸을 묻었다. 쑥 빨려 들어가는 기분에 그의 얼굴이 쾌감으로 일그러졌다.

“그럼…. 다… 당신은요…?”

‘무슨 말씀입니까. 폐하….’

하나가 된 채로 베네딕트가 그녀의 얼굴을 손안에 담았다.

“다른 이를 사랑하는 사람을 마음에 담는 거…. 이제 하지 말았으면 좋겠어요.”

‘왜죠?’

그의 허리가 자연스레 움직이기 시작하자 그녀가 쾌감에 흐느꼈다. 그의 어깨를 꽉 짚은 채, 눈가에 눈물을 달고도 애써 교성을 지르지 않으려 노력하는 모습이 더욱 색정적이기 짝이 없다.

“더 이상… 상처받지 않았으면… 흑…. 좋겠어요….”

아아. 에데르트.

베네딕트의 조각 같은 얼굴에 흥분을 담은 표정이 드리웠다. 낡은 침상이 삐걱거리기 시작했다. 베네딕트가 그녀의 얼굴에 부드러운 입맞춤을 흩뿌렸다. 그의 입술이 지나갈 때마다 혜미가 몸을 바르르 떨며 그에게 매달려 왔다.

‘…사랑스러운 나의 에데르트. 지금 날 염려하십니까?’

자신이 얼마나 위험한 지도 모르고 남을 걱정하는 성격은 태생이었다. 말 못 하던 어린 시절에도 마찬가지였다. 클라웨의 전대 황제들이 그리도 원했던 대마법사의 보석이 어떤 의미인지도 모르고 바닥에 집어 던진 후, 피가 나는 그의 손을 부여잡고 입김을 불어 넣었다. 아무 의미도 없는 그 숨결은 무척이나 미약하고… 따뜻했다.

“하아…. 하아…!”

‘이리 약해 빠지셔서 교활하기 짝이 없는 크리스티앙과 대적할 수 있으시겠습니까….’

타박하는 말투와는 달리 그의 손길은 더욱 뜨거워졌다. 허리를 치대는 움직임이 더욱 격동적으로 변해 갔다. 오랜 전투로 몸과 마음이 지친 혜미는 그를 거부하지 못했다.

‘하지만 괜찮습니다. 제가 폐하의 곁에 있으니까요….’

베네딕트는 그녀를 끌어안고 진한 입맞춤을 나누며 체액을 뒤섞었다. 교황의 기다란 머리카락이 부드럽게 그녀의 알몸에 쏟아지기를 반복했다.

‘몸을 섞을 때마다 폐하께 저의 마력을 쏟아 부어드리겠습니다. 폐하를 강하게 만들어 드리겠습니다.’

혜미의 눈동자가 일그러졌다. 불현듯 꼬마 마법사의 말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대단해요. 장기 하나, 뼛조각 하나하나에까지 대마법사의 마력이 깃들어 있네요. 아마 이를 위해 대마법사님께선….”

그녀의 몸에 자그마한 손을 가져다 대며 놀란 표정으로 속삭이던 로즈의 말이 떠올랐다.

“수명의 반 이상을 줄이셨을 거예요.”

베네딕트가 혜미의 생각을 그대로 읽고는 옅게 웃었다.

‘이제야 제 희생이….’

안 돼.

‘폐하의 눈에 조금 보이십니까?’

뜨겁게 입을 맞추는 그와 뒤섞이며 혜미는 눈을 꽉 감았다. 고백 아닌 고백을 토해 내는 베네딕트의 말을 듣자 모든 것이 조금 더, 또렷하게 다가왔다.

그녀의 마음이 향하는 이는 발터였다. 하지만 스스로를 점점 파멸로 이끄는 베네딕트의 고통을 덜어 주고 싶다는 욕구가 강력하게 치밀었다.

“마력은… 필요 없어요….”

혜미가 그에게 간신히 내뱉었다. 베네딕트가 그녀를 보며 땀 흘리는 얼굴로 미소 지었다.

‘이상하군요. 역대 황제들이 교황을 곁에 두며 바란 것은 바로 그것이었는데.’

평범한 인간에게 넘치는 마력을 주입하면 강해지는 대신 인간성을 서서히 상실한다. 하지만 클라웨의 황제에게 인간성 따위는 중요한 게 아니었다.

‘제 말뜻을 모르시겠습니까? 저는 지금 폐하께 가장 강력한 힘을 드린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혜미가 고개를 저으며 힘이 쫙 빠져나가는 손을 애써 움직였다. 베네딕트는 위험했다. 지금 당장이라도 산산이 부서질 것 같은 사람처럼 굴었다.

“황금성으로 가서… 하아….”

그녀의 손가락이 베네딕트의 매끈한 얼굴을 더듬었다.

“내가 꼭 당신을 구해 줄게요.”

그를 속박하고 있는 보이지 않는 굴레에서 그를 해방시켜 주고 싶다는 충동이 몸 안에서 피어올랐다. 얽히고 꼬인 실타래를 풀어 엉망으로 비틀린 그를 구하고 싶었다.

“폐하께서… 저를요?”

베네딕트가 그녀를 보며 느릿한 목소리를 냈다. 혜미가 고개를 마구 끄덕였다. 빚이라고 해도 상관없었다. 기억도 나지 않는 어린 시절의 향수라고 해도 상관이 없었다. 베네딕트의 과거사를 모조리 알아 버린 이상, 그녀는 그가 더 이상 불행하지 않기를 원했다. 가슴이 쿵, 쿵, 세차게 뛰었다.

“약속… 흣…. 약속할게요, 베네딕트.”

아름다운 교황이 그녀를 다시금 깊숙이 비집으며 흐릿하게 웃었다.

찾았다.

아직도 괴로워하며 침상에서 뒤척이고 있는 발터의 꿈에 보여 줄, 그야말로 딱 알맞은 장면을.

리비에르의 군대가 제트성 앞에서 진을 친 지는 이제 보름째였다. 한 달은 버틸 거라고 생각했던 말라쿤에게서 느껴지는 전조가 심상치 않았다.

“어제도 성의 뒷문으로 달아나던 말라쿤 일곱 명이 우리 쪽에 의해 처리되었어. 못 견뎌서 이탈하는 걸 보면 그 아무리 말라쿤이라 해도 자기 동족을 잡아먹지는 않는 모양이지.”

아직도 어스름한 새벽빛이 깔린 가운데에서 리비에르가 입을 뗐다. 매일 아침 동이 트기 직전에 벌어지는 작전 회의였다.

“모든 군대가 성을 포위하고 있는 이 상황이 길게 이어진다면, 자일룬의 시민들이 위험에 빠질 수도 있어.”

그녀의 맞은편에서 발터가 눈이 쑥 들어가 까칠해진 얼굴로 입을 열었다. 그들의 군대는 지금, 제트성에 문을 걸어 잠그고 모여 있는 말라쿤을 바깥에서 기다리고 있는 것과 다름이 없었다. 본격적인 전투는 벌어지지 않았지만 군대를 지휘하는 이들, 즉 이곳에 모여 있는 사람들이 늘 긴장을 바짝 세우고 있는 것은 당연했다.

“리가스가 제트성에 주둔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저기 있는 이들이 말라쿤의 전부는 아니니까.”

리비에르가 말린 육포를 질겅질겅 씹으며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발터의 말은 사실이었다. 말라쿤이 납치해서 포로로 가둔 자일룬 주민들의 목 수백 개가 성벽에서 날아온 것이 바로 이틀 전 일이었다. 귀가 뜯기고 뺨의 살점이 잘린 인간의 얼굴. 목이 잘린 그들의 시체가 어떤 꼴을 당했을지, 생각만 해도 입 안이 썼다.

게다가 발터가 짚었듯이 말라쿤은 성안에 있는 이들이 다가 아니었다. 리비에르의 군사들 중 거의 대부분의 병력이 제트성 근처에 모두 포진되어 있는 이 상황에서 말라쿤의 본국에 있는 이들이 쳐들어와 자일룬의 시민들을 모조리 약탈할 가능성도 적지 않았다.

“그러니 더더욱 그들의 수장이라 할 수 있는 리가스를 확실히 제거해야 해. 야만족을 통합한 우두머리가 없어진다면 말라쿤의 기세는 꺾이고 예전처럼 그들끼리 숨어 살게 될 테니까.”

리비에르가 물로 목을 축이며 내뱉었다. 옆에 있는 조세핀이 그녀의 빈 수통을 깨끗한 물이 채워진 수통으로 바꾸었다.

자일룬의 시민들은 지금 식량을 모조리 챙겨 자일룬성으로 대피한 상태였으므로 그들에게 원조를 대는 것에도 한계가 있었다. 전쟁이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힘든 것은 비단 적군뿐만이 아니라 이쪽 편도 마찬가지다. 딱딱한 빵 두 쪽과 마실 물이 든 수통 하나 그리고 말린 육포 세 점이 병사들에게 허락된 하루 식량이었고 지휘관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한 달이 넘을 거라고 예상했는데 벌써부터 말라쿤 쪽에서 이탈자가 나온다면… 아, 고마워. 발터.”

혜미가 발터에게서 뜨거운 물이 든 잔을 받아 들며 입을 열었다. 빵이 너무 딱딱해서 씹어 삼키는 데 애를 먹는다는 사실을 눈치챈 그의 배려였다. 돌덩이처럼 단단한 빵을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컵 위에 올려놓은 후, 혜미가 말을 이었다.

“그들이 지치고 있다는 증거라고 봐도 되겠지?”

매일 같이 이어지는 작전 회의가 거듭될수록 리비에르와 발터, 혜미는 어느 순간 자연스레 말을 놓게 되었다. 그들 모두가 같은 나이대라는 것을 알고 나서부터는 더욱 쉬웠다.

“우리는 리가스의 목을 딸 수 있는 기회를 이번에야말로 절대 놓치고 싶지 않을 뿐이에요.”

조세핀이 날카롭게 찢어진 까만 눈을 가늘게 뜨며 입을 열었다.

“리비에르 님께서 신중하신 만큼, 다들 그래 줬으면 하고요.”

마치 꼭 세상을 두 번 산 것 같이 애늙은이처럼 이야기하는 조세핀은 알고 봤더니 막내인 아일라와 동갑이었다. 발터가 이로 수통의 뚜껑을 따며 그녀를 향해 낮게 대꾸했다.

“실패하고 싶지 않은 건 다들 마찬가지야. 하지만 혜미. 제트성에 말라쿤이 마지막으로 군사를 들인 게 언제였지?”

“두 달이 좀 넘었어.”

혜미가 수증기에 몰랑해진 빵을 우물거리며 씹어 넘긴 후, 짤막하게 답했다. 새벽빛에 반짝이고 있는 그녀의 보랏빛 눈동자와 시선이 마주치자 발터가 수통 끄트머리를 이로 잘근거렸다.

“그리고… 그전에는?”

“우리가 여기 처음 도착했던 날. 새벽.”

토비아스가 그들을 대표해 신고식을 치른 후, 다들 환영 파티를 하느라 술에 취해 정신이 없었던 날이었다. 자일룬에 입성한 첫날부터 진영에 급습한 말라쿤과 싸워야 했던 일은 지금도 잊을 수가 없었다.

술에 잔뜩 취한 채 칼을 휘둘러야 했던 얀은 지금도 그날 일만 생각하면 등줄기에 소름이 돋는다고 했다. 아니, 오히려 술이 덜 깬 상태라 두려움이고 뭣도 없이 막 싸울 수 있었다고 했던가.

“그래 맞아. 약 넉 달 전이지. 그게 무슨 의미일까.”

“응?”

혜미는 짙은 시선으로 자신을 응시하는 발터를 마주 보았다.

‘네가 직접 말해.’

젖은 입술을 손으로 훔치며 그가 눈으로 그녀에게 말하고 있었다. 발터는 그녀가 자신의 의견을 조금 더 확실히 발언하기를 원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직접 핵심을 짚지 않고 그녀의 답을 기다리는 이유는 바로 그 때문일 것이다.

어두웠던 새벽하늘에 동이 트며 파랗게 밝아지고 있었다. 이전에는 보이지 않던 것들이 조금씩 또렷하게 보였다. 혜미는 그에게서 시선을 거두고 리비에르를 향해 신중한 말투로 입을 열었다.

“지젤. 리가스는 지금 약 두 달에 한 번씩 본국에서 제트성으로 자신의 군사를 데려오고 있어.”

“그만큼 우리 손에 많이 죽어 나갔지.”

진지한 표정으로 리비에르가 낮게 응수했다. 혜미가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그동안은 합류하는 말라쿤의 수가 그리 많지 않았기 때문이야.”

“…그래서?”

리비에르의 녹빛 눈동자가 반짝 빛났다.

“지금 시간을 끌고 있는 건 우리뿐만이 아니라 그들도 마찬가지일 수 있어. 만일 리가스가 지금 제트성을 걸어 잠그고 그 안에서 도움을 기다리고 있는 거라면, 우리야말로 독 안에 든 쥐가 되는 거잖아.”

그야말로 사면초가. 말라쿤의 군사들에게 앞뒤로 에워싸이는 형국이 될 것이다. 혜미가 아직도 따뜻한 잔을 손에 쥔 채 말을 이었다.

“지쳐 있는 상황에서도 그들이 딱히 이렇다 저렇다 할 반격을 전혀 하지 않는다는 건… 역시나 더 큰 무언가를 기다리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어.”

“더 큰 무언가라면…?”

리비에르가 중얼거리자 팔짱을 낀 채 침묵을 지키던 발터가 낮게 말을 보탰다.

“현재 우리 측 군대의 3분의 2 이상이 제트성 주변에 주둔하고 있는 상황에서 만일 말라쿤이 수적 우세를 점유한다면 상황이 뒤집히는 건 순식간이라는 뜻이겠지.”

혜미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 와중에서도 차분하게 그녀의 생각을 정리해 주는 발터가 멋지게 보이는 것은 단지 그녀의 눈에 두꺼운 콩깍지가 씌었기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오늘따라 널찍한 그의 어깨가 더욱 듬직해 보였다.

“설명 고마워, 발터.”

그를 향해 입을 벌리고 환히 웃어 보이자 눈이 마주친 발터가 인상을 조금 굳히며 이내 고개를 다른 쪽으로 돌렸다. 아. 너무 반한 눈빛으로 바보같이 쳐다봐서 민망했던 걸까. 혜미는 손으로 간지러운 콧등을 쓱 훔쳤다. 꼭두새벽이라 코끝에 닿는 바람이 서늘했다.

“하긴. 우리 쪽은 지금 병력 지원을 전혀 기대할 수 없는 상황이긴 하죠.”

조세핀이 손톱을 칼로 깎아 내며 낮게 중얼거렸다. 황실에서는 리비에르가 손을 벌리기 전까지는 군대 지원을 하지 않을 것이고, 리비에르는 자신의 능력을 스스로 증명하기 위해서라도 먼저 도움을 청하지는 않을 이였다. 그것이 바로 수천 명의 군대를 홀로 지휘하는 리비에르가 가진 신념이자 자존심이었다.

“그래서. 지금 정면 돌파를 하자는 이야기야?”

춥지도 않은지 아직도 어깨를 훤히 드러낸 채인 리비에르가 길게 꼰 다리를 까딱이며 되물었다.

“어차피 해야 한다면 타이밍은 지금이라는 소리야.”

한 치의 머뭇거림이 없는 진지한 표정으로 리비에르와 의견을 나누는 발터를 보며 혜미는 마음속으로 확신을 더욱 크게 키웠다.

부상당한 그녀를 치료하기 위해 베네딕트가 갑자기 찾아왔던 그 밤. 발터가 약을 전해 주고 괴로운 표정으로 입술을 씹다가 되돌아갔던 그 밤. 혜미는 복잡하고 혼란했던 스스로의 마음을 확실히 정리할 수 있었다.

그녀는 발터를 좋아하고 있었다. 좋아하는 게 아니면 이 마음을 달리 표현할 길이 없다.

자신을 향한 발터의 마음이 세르노티의 가주로서 가지는 충성심인지, 한때나마 연인으로 있었던 이에 대한 미련인지, 아니면 기억을 잃어버린 채로 현실과 싸워야 하는 그녀에 대한 동정인지는 알 수 없었다.

다만 확실한 것은 그게 뭐가 됐든, 현재 발터가 그녀에게 솔직할 수 있는 상황은 절대 아니라는 것이었다.

어떠한 일을 결정하는 순간에 조금의 머뭇거림도, 망설임도, 두려움도 없는 남자가 그녀의 앞에서만은 무수히 머뭇거리고 망설인다. 마치 두려운 사람처럼 입술을 잘근거리고 손을 쥐었다 펴기를 반복한다.

“때로는 명령과 복종으로 강제해 주기만을 간절히 바라는 관계도 있습니다.”

어쩌면 가장 쉬운 방법일 수도 있었다. 발터는 거절하지 않을 테니까. 하지만 그녀는 베네딕트가 말했던 것처럼 강압적인 관계를 발터에게 요구하고 싶지 않았다. 다만, 발터가 더 이상 그녀를 위해 스스로를 숨긴 채 그림자로 남을 필요가 없는 상황을 주고 싶었다.

남은 방법은 단 한 가지. 이 모든 뒤엉킴을 풀어내고 그녀가 황금성으로 가서 자신의 자리를 찾는 것뿐이었다. 그러면 발터가 마음속에 가지고 있는 빚이 조금이나마 없어질 테니까. 그 과정에는 눈앞에서 연인의 시체를 끌어안고 울부짖어야 했던 그의 트라우마를 없애 주는 것 역시 포함이다.

“발터. 설마 아무런 작전도 없이 정면 돌파하자는 허무맹랑한 소릴 하는 건 아니겠지?”

리비에르가 그를 보며 눈썹을 치켜올리자 발터가 낮게 내뱉었다.

“…난 책임지지 못할 말은 꺼내지 않아.”

슬쩍 인상을 찌푸리는 얼굴도 가슴이 두근거릴 정도로 믿음직스러웠다. 그가 허튼소리를 내뱉는 성격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기 때문에 더욱 그랬다.

“해결책이 없는 탁상공론은 피차 시간 낭비일 뿐이니까.”

혜미는 간이 의자에 조용히 앉아 등받이에 팔꿈치를 댄 채 턱을 괴고, 마치 근사한 조형물을 보듯 발터를 감상했다. 길게 빠진 진지한 갈색 눈매와 조금 길어져 이마를 가리고 있는 짙은 머리카락, 기대고 싶을 정도로 널찍한 어깨와 마디가 툭툭 불거진 커다란 손을 차례차례 눈으로 훑었다.

발터가 뜨거운 시선을 의식했는지 옆자리에 있는 그녀를 슬쩍 바라보았다. 소리 없이 빙긋 웃는 그녀와 눈이 마주치자 짙은 눈썹이 꿈틀거리며 미간에 모였다. 그는 커다란 손으로 까칠해진 옆얼굴과 턱을 쓸어내리곤 시선을 거둔 뒤, 수통의 물을 단숨에 비웠다. 툭 튀어나온 목울대가 오르락내리락하며 일렁였다.

…완전 멋지잖아.

혜미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너무 금방 사랑에 빠져 버리는 타입이 아니냐고 누군가 놀린다 해도 어쩔 수가 없다. 클라웨에서 눈 떴던 것이 지난해 겨울 그리고 지금은 어느덧 여름을 지나 가을의 문턱에 있었다. 금사빠라고 하기엔 그녀가 발터와 함께 보낸 시간은 결코 짧지 않았다.

몸을 섞다 보니 마음까지 간 거냐고 스스로에게 자문해도 정확한 답은 모르겠다. 그렇다면 그녀는 베네딕트에게도 발터와 똑같은 감정을 느껴야 했으니까. 베네딕트를 생각하면 마음 한구석이 아득하게 슬퍼지는 것은 사실이었다.

그의 과거를 생각하면 더욱 그랬다. 자신에게 집착하는 그의 심정을 어렴풋이나마 이해할 수 있었기 때문에 그를 도와주고 싶다는 마음이 앞섰다. 하지만… 발터를 생각할 때처럼 조바심이 나고 마음이 떨리지는 않았다.

이든으로 살았던 기억이 완벽하게 없어졌음에도 그가 다시 좋아졌다는 것이 의미하는 건 분명하지 않을까. 혜미는 그에게 이대로 제대로 고백도 못 한 채로 흐지부지 끝내고 싶지 않았다.

“또 진지해지기는.”

“그럼 지금이 농담할 상황인가?”

리비에르가 인상을 구기는 발터를 보며 가볍게 웃었다. 리비에르 역시도 혜미와 같은 감상을 느끼고 있을 게 분명했다. 발터는 강한 남자가 취향인 이성에게 무척이나 매력적인 남자였으니 그가 다른 사람 눈에도 좋게 보이는 것은 당연했다.

그 사실에 쓸모없는 자괴감을 느끼고 싶지 않았다. 중요한 건 타인이 그를 어떻게 생각하느냐가 아니라 발터의 진심이 무엇이냐는 것이었다. 혜미는 고작 이 간단한 사실을 깨닫는데 지난 한 계절을 모조리 소비했다.

이제 혜미가 그와의 관계에서 바라는 것은 확실했다. 그녀는 황족이라는 감투 따위를 벗어던진 채, 발터와 사람 대 사람으로 이야기하고 싶었다. 그러기 위해서 그녀가 황제가 되어야 한다는 것은 아이러니한 일이었지만. 고집이 센 남자를 좋아한다는 건, 원래 이렇게 어려운 걸까.

“그래. 그럼 네 생각을 말해 봐, 발터.”

발터가 새벽이슬이 맺힌 널찍한 나무 합판을 손으로 쓱쓱 문질러 물기를 닦았다. 거칠거칠한 테이블 표면에 그와 어울리는 시원시원한 표식이 늘어 갔다.

“제트성에는 10년 전, 성을 증축하며 만들어 놓은 지하 통로가 있잖아. 바로 여기. 적의 동태를 관찰하기 위해 세워 놓은 탑의 아래쪽에.”

“흠. 말라쿤이라고 그걸 모를까? 넌 아직 듣지 못한 모양인데 제트성을 관할하던 이전 총독이 그리로 도망가려다 리가스에게 잡혀 양다리가 잘렸어.”

리비에르가 쓰게 중얼거리자 발터가 고개를 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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