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 옷은 왜요?”
“치료를 해야 할 거 아닙니까.”
“…됐어요. 괜찮아요.”
고개를 휙휙 젓는 그녀를 보며 베네딕트가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설핏 웃었다.
“왜 그러십니까, 폐하. 제게 몸을 보이는 게 부끄럽기라도 하십니까?”
“그 표정은 뭐예요? 남한테 맨몸 보이는 일을 즐기는 게 이상한 거 아닌가요?”
바깥에 들리기라도 할까 봐 목소리를 크게 높일 수도 없었다. 속삭이며 눈을 부라리자 베네딕트가 팔짱을 낀 채 그녀를 향해 고개를 갸웃했다.
“흠. 폐하의 표정은 꼭 제 손이 몸에 닿는 것이 두려운 것 같은 얼굴이로군요. 혹시 제 손길에 흥분이라도 할까 봐 그러십니까?”
상처의 열감이 얼굴로 옮겨붙은 기분에 혜미가 입술을 꽉 깨물며 부정했다.
“아니에요.”
“그럼 아이처럼 고집부리지 말고 제게 상처를 보이십시오. 황족의 질병이나 상처를 치유하는 건 제 의무입니다.”
“그러니까 지금… 저 때문에 출장 진료라도 하러 온 거라구요?”
혜미의 말에 베네딕트가 웃었다. 그의 얼굴 주변에서 가느다란 은발이 조금 날렸다.
“폐하께서는 제 노력을 하찮은 것으로 만드는 재주가 있으십니다. 모르는 것 같아 굳이 말씀드리자면 교황이 아메티스를 벗어나는 것은 황명에 어긋나는 일로, 발각되면 사형입니다.”
그녀 역시 세드릭이 작성한 양피지의 정보를 읽어 이미 알고 있는 정보였다. 그래서 남들에게 들리지 않도록 작은 목소리로 소곤거리는 것이지만, 그놈의 양피지 때문에 절벽에서 떨어져 발터와 함께 물귀신이 될 뻔한 걸 생각하면 울화가 치밀었다.
“그래서 지금 유세 부리시는 거예요? 죽음을 무릅쓰고 찾아와 줘서 고맙다고 인사해 달라는 건 아니시죠?”
“엎드려 절 받는 건 딱히 바라지 않습니다만.”
목소리도 높이지 않고 태연하게 받아치는 걸 보니 바짝바짝 약이 올랐다. 혜미는 어느새 그와 거리가 가까워졌다는 사실도 인지하지 못했다. 그녀가 베네딕트에게 얼굴을 들이밀며 따져 물었다.
“저 아픈 건 어떻게 알았어요?”
“마력이 강한 마법사는 자신의 피로 각인한 상대의 상태를 직간접적으로 느낄 수 있으니까요.”
그의 입에서 나온 말에 혜미가 다시 긴장하며 고개를 뒤로 물렸다. 베네딕트와 각인한 자신의 상황을 다시 한번 확인받는 느낌.
거기에 그녀의 의사는 없었다. 하지만 그 덕분에 그녀는 목숨을 구했다. 이건 그녀에게 불행일까, 아니면 행운일까.
“…….”
베네딕트가 손가락으로 기다란 은발을 쓸어 넘기며 특유의 여유로운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지금 느껴지는 폐하의 상태로 보았을 때, 전투는커녕 내일쯤 열이 올라 앓아누울 것 같군요.”
그의 말은 사실이었다. 그리 심하지 않다고 생각했던 상처는 밤이 깊어질수록 고통이 심해져 제대로 누울 수조차 없었다. 진통제도 다 먹어 버려 통증을 생으로 참아 내야 하는 상황이었다. 상처가 덧나 염증이 심해진다면 곤란했다. 큰 작전을 앞둔 시점에서 그녀가 아프면 모두가 힘들어진다.
혜미는 망설임을 멈추고 그를 향해 고개를 들었다. 그의 말마따나 지금은 고집을 부릴 때가 아니라는 판단이 섰다.
“사이비가 아니란 거 확실히 입증해 주세요.”
허락의 사인을 받은 베네딕트가 소리 없이 입술을 끌어 올렸다. 그가 시선을 내리깔았다가 올리자 혜미가 걸치고 있던 얇은 옷자락이 그의 눈동자의 움직임을 따라 저절로 위로 들렸다. 손 하나 까딱하지 않고 물건을 움직이는 능력은 여전히 놀라웠다. 몸까지 두둥실 뜨는 느낌에 혜미는 딱딱한 침상을 꽉 쥐었다.
감아두었던 붕대가 스르륵 풀려 아래로 떨어졌다. 길게 찢긴 옆구리의 상처를 잠시 바라보며 길게 숨을 내쉬던 그가 마침내 손을 뻗었다. 하얀 손에 붉고 푸른 기운이 넘실거리는 것이 혜미의 육안으로도 보였다. 닿지도 않았는데 벌써부터 피부에 퍼지는 생소한 감각에 그녀가 저도 모르게 말로 그를 저지했다.
“치, 치료만 하세요.”
“이런 꼴로 대체 뭘 걱정하시는 건지.”
베네딕트가 작게 혀를 차며 속삭였다.
“이상한 짓 하지 말고…. 흣….”
마침내 그의 손이 피부에 닿았다. 닿기도 전에 느낄 수 있었다. 욱신거리던 상처에 열감이 사라지고 시원한 감각이 화악 번졌다. 정신이 온전한 상태에서 치유 마력을 제대로 느끼는 것은 처음이었다. 혜미는 저도 모르게 길게 숨을 내쉬었다.
“아아….”
베네딕트가 손으로 상처를 어루만지듯 감싸자 염증이 천천히 사라졌다. 칼에 찢겼던 피부가 천천히 봉합되는 느낌이 생생히 전달되었다. 따끔거림이 사라지고 간질거리는 느낌이 찾아왔다. 혜미의 몸이 가늘게 떨렸다.
“흠. 상처 자체는 그리 깊지 않은데….”
그가 중얼거리며 혜미에게 연하늘색 눈동자를 마주쳤다. 옆구리에서 왼쪽 가슴으로 베네딕트의 손이 느리게 이동하자 갑자기 심장이 두근, 세게 뛰며 몸속에서 뜨거운 것이 울컥 치밀어 올랐다.
“지금 뭐 하는…. 하아….”
하루 종일 그녀의 마음속을 불안하게 만들었던 감정이 그의 손길을 따라 마치 바람결에 섞여 날아가듯 천천히 이동하는 느낌이었다.
“저런. 상처받은 것은 몸뿐 만이 아니셨군요.”
그가 부드럽게 속삭이며 그녀의 맨살을 천천히 쓰다듬었다.
“인간의 몸은 유약하기 짝이 없어 마음의 상태에 따라 깊은 영향을 받죠. 자상의 염증이 심해진 이유는 바로 그 때문인 듯합니다.”
혜미는 베네딕트의 손을 쳐 내고 싶었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울렁거리던 마음이 그의 손길에 진정되는 듯한 착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지금 나한테 또 무슨 짓 하는 거예요….?”
“불안해하는 영혼을 달래어 치료하는 중입니다.”
“…사이비 같은 소리 하지 말고요.”
“그럼 관둘까요?”
베네딕트가 옅게 웃으며 그녀에게서 손을 떼어 냈다. 느릿하게 가라앉던 마음에 다시 불안함이 들어찼다. 삽시간에 밀려드는 울적한 기분을 참을 수가 없었다. 혜미가 아랫입술을 살짝 깨물며 그를 향해 중얼거렸다.
“당신은 진짜… 괜찮은 사람인지 안 괜찮은 사람인지 도통 종잡을 수가 없어요.”
“제게 지금 화풀이를 하시는 거군요.”
슬쩍 미소 짓는 여유 있는 모습도 열 받기는 마찬가지였다. 베네딕트가 그녀를 향해 차분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그러셔도 됩니다. 무엇이 폐하의 마음을 복잡하게 하는지, 제게 말해 보세요. 화풀이 상대가 되어 드릴 테니.”
“당신한테 말하면 뭐가 어떻게 달라지는데요?”
“기분이 좀 나아질 수도 있지 않습니까. 물론 가장 좋은 치료 방법은 저와 정신적 교감을 나누는 것이지만.”
“…정신적 교감은 어떻게 나누는데요?”
“몸을 섞으며 같은 느낌을 공유하면 됩니다. 이미 한 번 해 보시지 않았습니까.”
“그게 되게 기분 나빴거든요.”
절벽에서 떨어져 정신을 잃었을 때의 일이 떠올랐다. 혜미가 눈을 사납게 흘기자 베네딕트가 작게 웃었다. 그의 은발이 소리 없이 흩날렸다.
“폐하께서 원치 않으시니 어쩔 수 없지만.”
베네딕트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며 길쭉한 손가락으로 그녀의 이마를 톡, 하고 스치듯 건드렸다. 푸른 파장이 다시금 그녀의 눈앞에 반짝였다. 짤막한 터치 하나에도 머리가 지끈대는 두통이 사라지는 것은 아마도 착각이 아닐 것이다. 그녀를 치료하러 왔다는 그의 말은 정말인 듯했다.
원래 교황이란 황제를 위해서 이 정도까지 해야 되는 걸까. 칼에 좀 베이고 두통이 있다고 해서 생명이 위독한 건 아닌데.
“아. 폐하의 머릿속을 꽉 채우고 있는 고민은 아마도 ‘사람’ 때문이군요.”
“맘대로 생각 읽지 마세요.”
실낱같이 생기려던 아주 자그마한 호감이 확 사라졌다. 그녀가 이를 꽉 물고 중얼거리자 베네딕트가 눈썹을 들어 올렸다.
“그냥 넘겨짚어 봤습니다만, 설마 사실이었습니까?”
점점 놀림당하는 것 같아 기분이 나빠지는 혜미와는 달리 베네딕트는 여유롭기 짝이 없었다.
“이런, 이런. 이 전쟁 통에 고작 사람 하나 때문에 상처가 덧날 정도로 고민을 하시다니요. 폐하.”
표정만 봐서는 이 시간을 즐기고 있는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였다.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치료 다 끝났으면 이만 가 주시는 게….”
혜미가 말을 잇다 말고 딱 멈추었다.
“쉿.”
바깥에서 인기척이 느껴진 탓이었다. 흐릿한 촛불 하나가 켜진 막사 밖에서 커다란 그림자가 일렁였다.
누구지? 그녀가 걱정이 된 토비아스가 다시 돌아온 걸까. 설마 이 시간에?
“…혜미.”
머뭇거리다 나온 발터의 목소리에 혜미가 그 자리에서 굳었다.
“바… 발터…!”
작게 입을 연다는 게 의지와는 달리 커다란 목소리가 튀어나와 스스로 놀랄 정도였다.
“…불이 켜져 있어서 와 봤어. 아직 안 자고 있으면 들어가도 될까.”
머뭇거림 끝에 낮게 내뱉은 발터의 말에 혜미는 당황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채 베네딕트를 노려보았다. 베네딕트는 그 자리에 그대로 앉아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고만 있을 뿐이었다.
‘왔군요. 폐하를 힘들게 하는 고민의 원인이.’
혜미는 너무나 당황해서 베네딕트가 머릿속으로 그녀에게 말을 걸었다는 사실도 망각한 채 그의 입을 틀어막았다.
쪽.
베네딕트가 그녀의 손바닥에 진하게 입을 맞추었지만 손을 뗄 수도 없었다. 입이 가려진 그의 눈이 기다랗게 휘어지며 웃고 있는 것 같은 착각도 들었다.
째깍. 째깍. 머릿속에서 초침 소리만 들리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발터에게 갑자기 베네딕트가 튀어나온 이 상황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죄를 지은 것은 아니었지만 지금 상황이 셋이서 다과회를 할 분위기는 아니라는 건 그녀도 알았다.
어떡하지? 어떡하지…?
찰나의 침묵이 흐르자 장막 뒤에서 발터가 낮게 헛기침을 했다.
“토비아스가 네 상처에 대해서 말해 줬어. 통증에 좋은 약을 가져왔으니 그것만 전달하고 갈게.”
뒤에 덧붙이는 그의 말투는 어딘가 긴장이 서려 있는 듯했다. 베네딕트가 그녀에게 다시 말을 걸었다.
‘들어오라고 하시죠. 어서.’
지금 당장 그러지 못하는 이유가 누구 때문인데. 혜미가 그를 향해 눈을 부릅뜨며 맘속으로 크게 외쳤다.
‘빨리 가요!’
‘어딜?’
베네딕트가 그녀를 향해 눈썹을 들어 올렸다.
‘어디든 좋으니까 빨리요!
그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혜미…. 내 말… 듣고 있….”
“듣고 있어! 흠…. 자, 잠시만…!”
베네딕트가 그의 입을 가리고 있던 그녀의 손을 부드럽게 잡아 내리며 의미심장하게 눈을 빛냈다.
‘폐하의 개를 위해 사라져 드리면 제게 입을 맞출 기회를 주시겠습니까?’
이 사람이 진짜…! 끝까지 사람을 긁어 놓는 재주가 있었다.
‘약속해 주십시오, 폐하.’
‘알았어요. 뭐든 알았다고요!’
혜미가 입을 꽉 다물고 소리치자 마침내 그가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그리고 마치 공기 중에 흡수된 것처럼 사라졌다. 눈앞에서 벌어진 마법에 놀랄 틈도 없었다. 혜미는 목을 가다듬으며 좁은 막사를 가로질러 장막을 걷었다. 두꺼운 천을 걷어 내는 손이 조금 떨렸다.
“…발터.”
발터는 그녀의 코앞에 있었다. 이렇게 가까이 마주한 게 얼마 만일까. 자일룬으로 온 이후 처음인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발터에게서 쌉쌀한 풀냄새와 함께 그만의 체향이 섞여 흘렀다. 땀에 젖어 조금 남성적인 그의 체취가 느껴지자 묘한 기분에 입 안이 조금 말라 온다.
“약을… 가지고 왔다고 했어?”
그녀가 조심스레 묻자 말없이 그녀를 바라보고만 있던 발터가 그제야 눈을 깜빡이며 입을 뗐다.
“…이거.”
그가 손에 들고 온 것은 기다랗고 작은 유리병이었다.
“토비아스가 하는 말을 들었다. 상처가 심하다며. 염증을 가라앉히는 데 좋은 약이야.”
“…고마워.”
혜미는 그에게서 약병을 받아 들었다. 작은 유리병 안에서 보기만 해도 쓸 것 같은 진초록 물약이 흔들렸다.
“되도록 빨리 마시는 게 좋아.”
옆구리의 상처는 이미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는 말을 차마 꺼낼 수가 없었다. 그렇게 된 원인을 설명하는 것도 복잡했지만 솔직히 말하자면 그녀를 생각해 찾아온 발터의 호의를 거절하고 싶지 않은 마음이 더욱 컸다. 혜미는 코르크 마개를 이로 딴 후, 숨을 참고 물약을 단번에 들이켰다.
“하…. 쓰다.”
그녀가 손등으로 입을 훔치며 작게 중얼거렸다. 쓴 약을 마신 건 그녀인데 표정이 일그러지는 쪽은 발터였다. 그가 주머니에서 다른 무언가를 꺼내더니 양손으로 짓이기듯 쪼갰다.
“좀 나을 거야.”
잘 익은 무화과를 내미는 손이 조금 떨렸다. 혜미는 그에게서 반으로 갈라진 과일 한 쪽을 받아들고 수만 개의 꽃술로 이루어진 과육을 베어 물었다. 입 안에 퍼지는 느낌이 달콤했다.
“너도 먹어 봐. 되게 달다.”
발터가 잠시 망설이다 자신의 손에 남겨진 반쪽의 과육을 입으로 가져갔다. 느릿하게 입을 움직이며 먹어 치우는 모습을 보자 이유 없이 얼굴이 화끈거렸다.
“다… 먹었어?”
발터와 눈이 마주치자 그의 목울대를 감상하고 있던 혜미의 심장이 쿵, 소리를 내며 크게 뛰었다.
“응…? 아, 응.”
“그거 이리 줘.”
발터가 그녀의 손에 들린 무화과 껍질을 받아들었다. 버릴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그는 과육이 얼마 붙어 있지도 않은 그것을 입가로 가져갔다.
“그, 그걸 왜….”
“…전부 달아서.”
발터가 낮게 중얼거리며 남은 조각을 입에 집어넣고 천천히 씹었다. 방금까지 자신의 입술이 닿았던 부분을, 발터가 자연스레 먹어 치우고 있었다. 얼굴이 화끈하게 달아올랐지만 신경 쓰는 것은 혜미 혼자뿐인 것 같았다.
구름에 가려진 달빛이 붉어진 그녀의 얼굴빛을 가려 주기를 간절히 바랄 뿐이었다.
오늘따라 막사는 지금이 전쟁 통이라는 사실을 잊게 할 정도로 고요했다. 흐릿하게 들리는 매미 울음에 발터가 느리게 씹는 소리 그리고 마침내 꿀꺽 삼키는 소리까지 생생하게 다 들렸다. 날벌레를 쫓으려 피워놓은 모닥불에서 타닥, 불씨가 튀어 올랐다.
“…그럼, 갈게. 쉬어.”
마침내 빈손이 된 발터가 꽉 잠긴 목소리로 내뱉었다. 혜미는 아직까지 막사 입구에 서 있는 채였다. 그녀는 뜨거운 눈동자로 자신을 보던 발터가 느리게 시선을 떨어뜨린 후, 마침내 주먹을 꽉 쥐고 몸을 휙 돌리는 것을 바라보았다. 걸음을 옮기는 그의 뒷모습을 보자 가슴속에서 뜨끈한 무언가가 울컥거리며 튀어 오르는 기분이 들었다.
“…발터.”
속삭이듯 아주 작게 그의 이름을 불렀을 뿐이었다. 발터가 그 자리에서 걸음을 우뚝 멈추었다. 혜미는 손에 든 약병을 괜히 쥐었다 펴며 여전히 등을 보이고 선 발터를 향해 애써 말을 뱉었다.
“…잠깐, 안에 들어올래?”
세르노티에서는 매일같이 한 방에서 잠들었는데. 이 말을 하기가 왜 이렇게 어려워졌을까. 어느새 생겨 버린 거리감에 서글픔이 밀려온 것도 잠시였다.
우두커니 서 있던 발터가 뒤돌아 저벅저벅 빠르게 다가오기 시작했다. 혜미는 마른침을 꿀꺽 삼키며 한 발짝 물러섰다.
“정말, 들어가도 돼?”
“…당연하지.”
가리고 있던 입구가 열리자 발터가 고개를 숙여 키를 낮춘 후, 그녀의 막사 안에 조심스레 발을 들였다.
발터가 그녀의 공간을 천천히 둘러보듯 느리게 시선을 움직였다. 혹시나 해서 불안했던 혜미의 염려와는 달리 베네딕트는 완전히 사라진 듯했다.
“뭐… 마실 거라도 줄까…?”
그녀의 개인 막사에 발터가 들어온 것은 처음이었다. 아일라나 레나, 심지어 토비아스와 리비에르까지 들였던 공간이었지만 발터는 아니었다.
리비에르의 군사들은 그들의 지휘관이 일부러 발터의 개인 막사를 그녀와 가까운 곳으로 둔 것이라고 킬킬거렸다. 발터의 막사와 그녀의 막사가 정반대 방향에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는 솔직히 실망한 것도 사실이었다. 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오히려 그와 우연으로라도 마주칠 일이 줄어 다행이라고 생각하던 참이었다.
오늘은 시선으로 그의 뒤를 좇는 처량한 짓을 하다가 적의 칼에 베이기까지 했다. 모두가 목숨을 걸고 싸우는 전쟁터에서. 한심하기 짝이 없는 일이었다. 혜미는 정신을 차리자고 스스로에게 다짐하며 작게 헛기침을 했다.
“발터?”
“…응.”
방금까지 그녀가 앉아 있었음을 증명하듯 구겨진 침상을 보며 숨을 깊게 들이쉬던 발터가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지금 뭐라고 했어?”
혜미가 짙은 눈썹을 미간에 모으며 되묻는 그를 향해 애써 웃었다.
“술은 좀 그렇고 차라도 마실래…?”
“아. 아니.”
가라앉은 목소리로 내뱉는 발터의 가슴이 크게 부풀었다가 제자리를 찾기를 반복했다. 안 그래도 좁은 공간 안에 그가 들어오자 막사 안이 꽉 차는 기분이었다. 그의 머리가 천막의 중앙을 받치고 있는 기둥 맨 꼭대기에 닿을 듯 가까웠다.
의자에 앉지도 않고 어색하게 서 있는 그를 보며 혜미가 이마를 손으로 문질렀다. 필요도 없는데 마신 약의 부작용 탓인지 손에 닿는 피부에 뜨끈하게 열이 올랐다.
“약. 고마워. 사실 토비아스가 진통제를 가져다주긴 했는데 다 먹어서….”
어떤 화제를 꺼내야 할지 몰라 두서없이 내뱉자 발터가 마른침을 삼켰다.
“자일룬성의 의사가 만든 약이라 효과가 다를 거야.”
“…어디서 났는데?”
“지젤에게 부탁해서 받아 왔어.”
“…지젤?”
혜미의 목소리 끝이 가늘게 흔들렸다. 발터는 너무도 자연스레 리비에르의 이름을 부르고 있었다.
“아. 버릇이 돼서.”
발터가 슬쩍 인상을 찌푸리자 이마에 주름이 깊게 팼다. 빌어먹을 리비에르는 어느 순간부터 그에게 자신의 이름을 부르기를 종용했고, 다르게 칭하면 아예 대답을 하지 않았다.
“리비에르 말로는 염증을 가라앉히는 데 가장 좋은 약이라고 하더라.”
혜미는 잠시 망설이다 내용물이 사라진 약병을 조심스레 낡은 테이블 위에 놓았다. 애써 삼킨 약이 속에서 울렁거리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그녀는 속을 가라앉히려 노력하며 짐짓 아무렇지 않게 입을 열었다.
“리비에르 장군 말야. 역시, 소문대로 정말 대단한 기사야. 그렇지?”
발터가 침묵했다. 그것을 동의로 받아들인 그녀가 말을 이었다.
“전투 중에도 긴장하거나 당황하는 모습이 전혀 안 보여. 조금만 이야기해 봐도 정말 강한 사람이라는 느낌이 들고.”
“아군이 강한 건 좋은 일이지.”
그가 짧게 답했고 혜미는 애써 태연하게 말을 이었다.
“게다가 소문은 들었지만 그렇게 미인일 거라고는 생각 못 했는데 말야…. 하하…. 정말 같은 여자가 봐도 매력적이더라. 남자 군사들이 왜 그렇게 그녀에게 목을 매는지 이해할 수 있는….”
“혜미.”
발터가 길어지는 그녀의 말을 잘랐다.
“응?”
“우리에 대해서, 리비에르에게 언제 말을 할 생각이야?”
진지한 얼굴로 묻는 발터를 보며 혜미는 하마터면 착각을 할 뻔했다.
“계획을 언제 말할 거냐고.”
발터의 질문의 뜻은 그녀의 정체를 언제 밝힐 거냐는 말이었다. 지금 상황에 가장 중요한 건 그쪽인데도, 바보처럼 이상한 쪽으로 자꾸만 생각이 간다. 혜미는 자꾸만 커지는 자괴감을 견딜 수 없어 주먹을 꽉 쥐었다 폈다.
“리가스를 잡으면… 모두 이야기해야지.”
“리비에르는 어리숙한 사람이 아니야. 우리가 지금, 이 싸움에 얼마만큼 최선을 다하고 있는지 충분히 알고 있어. 그러니까….”
발터가 잠시 말을 멈추었다가 그녀의 눈을 직시하며 작게 덧붙였다.
“걱정할 것 없다.”
두근.
“불안해할 것 없어.”
그의 한마디에 가슴이 찌르르 울리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의 나지막한 목소리 하나만으로 몸속에 스멀거리던 불안이 자취를 감추었다. 발터 역시 마법을 쓰기라도 하는 걸까.
“…고마워.”
혜미가 작게 속삭이자 발터가 아주 잠깐 머뭇거리더니 이내 낮은 어조로 입을 열었다.
“상처를 좀 보자.”
“어… 어?”
그의 말에 혜미가 당황해 눈을 빠르게 깜빡였다. 이미 흔적도 없이 사라진 상처를 보이는 것이 불가능했기 때문이지만, 발터는 그녀의 반응을 다르게 착각한 모양이었다. 서둘러 변명하듯 설명을 더하는 목덜미가 붉었다.
“토비아스가 나한테까지 이야기한 걸 보면 꽤나 깊은 상처일 게 분명해. 심하면 일단 회복에 집중했다가 나중에 작전에 합류하는 게 더 나아. 어차피 시간 싸움이니까.”
이틀 뒤, 그들은 공성전을 시작할 예정이었다. 제트성을 차지한 말라쿤의 식량 보급로를 차단하고 시간을 끈 뒤, 여러 진입로를 통해 분산 공격을 벌이는 본격적인 작전이다. 리비에르는 제트성 탈환 작전의 타임라인을 한 달 이상으로 잡았다. 말라쿤이라면 성안에서 서로를 살육해 식량으로 삼을 것까지 예상에 둔 계산이었다.
“아니.”
혜미가 황급히 입을 열었다.
“난 괜찮아. 발터. 지금 당장이라도 튀어 나가서 싸울 수 있다고.”
“혜미.”
인상을 찌푸리는 발터는 그녀가 무리한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발터에게 정말로 옷을 벗어 보일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몇 시간 전에 토비아스가 염증에 퉁퉁 부어오른 상처를 확인하고 돌아간 상황에서, 흉터 하나 없이 매끈해진 피부를 설명하려면 베네딕트의 이야기까지 꺼내야 했다.
교황이 황족을 치유하는 건 당연한 일이지만 발터에게는 그 사실을 알리는 게 싫었다. 왜인지는 그녀 자신이 가장 잘 알고 있었다.
각인한 상대인 교황이 발터의 앞에서 그녀에게 닿기라도 할까 두려웠기 때문이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베네딕트의 신체적 접촉에 어쩔 수 없이 반응해 버리는 자신의 몸 상태가.
더럽다고 생각할 게 분명했다. 무슨 짐승도 아니고, 마음에도 없는 상대에게 몸이 자동으로 반응하는 걸 보고 거부감이 들지 않으면 비정상이었다.
“괜찮은지 안 괜찮은지는 내가 판단할 테니까….”
그녀에게 한 발짝 다가오는 발터를 보며 혜미가 뒤로 주춤, 물러났다. 그녀의 팔을 가볍게 잡았던 발터의 손이 조금 떨리며 경직되더니 천천히 떨어졌다.
“상처를 확인하려는 것뿐이었어. 단지… 그뿐이었다.”
갈 곳을 잃은 발터의 커다란 손이 제 얼굴을 마른세수하듯 천천히 쓸었다.
“…내 본분이 뭔지, 내가 무엇 때문에 여기까지 왔는지는 나 스스로가 가장 잘 알고 있으니까.”
발터가 낮게 되뇌었다. 혜미는 그의 몸이 딱딱하게 굳는 것을 눈으로 지켜보았다. 툭 불거진 목울대가 몇 번이나 느리게 움직이며 꽉 쥔 커다란 주먹이 허벅지 근처에서 부르르 떨리는 것을 보았다. 손등에 핏줄이 불거지는 것을 보며 죄책감에 입 안을 지그시 깨물었다.
“리가스는 반드시 잡을 거야. 실패하지 않을 거라고 약속해.”
예상보다 길어지고 있는 이번 작전에서 가장 힘든 것은 발터였다. 혜미는 리비에르가 완벽하게 그들을 신뢰할 때까지 그녀의 정체를 밝히고 싶지 않아 했다. 올바른 판단이었다. 리비에르를 확실히 포섭하지 못한 상황에서 혜미가 죽은 줄로만 알려진 제1 황녀라는 사실이 밝혀진다면 그녀의 신변이 위험해질 수도 있었다.
“내가… 너에게… 철없는 소년 같은 마음을 품어서는 안 된다는 건 내가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발터는 장막 뒤에서 들려오던 리비에르와 그녀의 대화를 떠올렸다. 불쾌했던 첫 만남 이후 그에게 적극적으로 접근하는 리비에르의 의도에 대해서는 관심도 없고 딱히 알고 싶지도 않았다. 리비에르가 부족해서는 아니었다. 단지 발터는 그녀와 단둘이 있다고 해도 아무런 느낌이 들지 않을 뿐.
그것뿐이었다.
한 공간에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사람을 미치게 긴장시키는 누군가와는 비교 자체가 불가능했다. 그가 누구와 만나든 상관없다는 혜미의 단정적인 말을 듣자마자 심장이 바닥에 거칠게 내팽개쳐지는 기분이 들었다.
발터의 모든 감정은 오직 한 사람을 향해 있었다. 그녀를 제외한 다른 사람에게 신경 쓸 마음도, 여유도 없는 것은 당연했다.
“…발터.”
이렇게 그녀를 가까이 대할 수 있는 것도 지금뿐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녀가 황위를 되찾게 된 이후에는 영원히 그녀의 그림자로 살아야 하는 게 자신의 운명이었다. ‘연인’ 같은 건 평생 마음에 품어서도 안 되는 헛된 꿈에 불과했다. 실망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머리로는 알고 있는데, 마음은 그렇지가 않다.
“…미안.”
발터가 그녀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그의 목소리가 꽉 잠겨 낮았다.
“리비에르는 반드시 우리와 같은 곳을 보게 될 거야.”
혜미는 스스로에게 다짐하듯 내뱉는 발터를 보며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그가 빈 약병을 손에 들고 걸음을 뗐다.
“토비아스에게 내일 오전에 상처를 보러 오라고 할게.”
그의 뒷모습에서 눈이 떨어지지 않았다. 발터가 장막을 걷고 조용히 사라졌을 때에야 그녀는 온몸에 힘이 빠져 침상에 털썩 주저앉았다.
“…저런.”
아무것도 없는 허공에서 베네딕트의 모습이 유령처럼 드러났다. 거울을 찢어발기고 나왔던 발터의 모습을 보며 기겁했던 과거의 그녀는 없었다.
“아직 안 간 거예요?”
“예.”
“다 봤어요?”
“예.”
“그럴 줄 알았어.”
혜미가 길게 한숨을 내쉬며 무릎을 세운 채 얼굴을 양 손바닥 안에 묻었다.
“이건 마치….”
베네딕트가 조용히 다가와 그녀의 옆에 앉았다. 고개를 슬쩍 옆으로 기울여 그녀를 바라보자 질 좋은 은발이 스르륵 아래로 향했다.
“마치 풋사랑에 고민하는 어린 자식을 보는 느낌인걸요?”
혜미가 얼굴을 들 생각도 하지 않은 채 중얼거리듯 내뱉었다.
“변태 같은 소리 좀 그만해 주실래요? 진짜 팔뚝에 소름 돋으니까.”
“하하.”
베네딕트가 작게 소리 내어 웃었다. 혜미는 그의 얼굴을 보지 못했지만 그의 웃음은 이제껏 중 가장 진정성이 섞인 미소였다.
“부정하지 않겠습니다.”
“안다니 다행이고요.”
“…발터 세르노티는 폐하가 원하는 것을 손에 쥐여 주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는 걸로 보이는데, 폐하께서는 뭐가 마음에 안 드십니까.”
혜미가 얼굴에서 손을 떼며 피곤한 얼굴로 입을 다물었다.
“…말하고 싶지 않아요.”
“타고나길 강하게 태어난 사내입니다. 게다가 폐하를 향한 그의 충성심은 제 아비의 그것을 진작 뛰어넘었죠. 강한 데다 확고한 의지가 있는 자의 능력치는 그저 강하기만 한 자의 그것과 비교할 수가 없습니다. 그는 아마 무슨 수를 써서라도 리비에르 장군을 폐하의 편으로 만들 것입니다.”
혜미의 어깨가 소리 없이 움찔하자 베네딕트의 눈이 가늘어졌다.
“아…. 바로 그게 문제인가 보군요.”
역시 그거였나. 베네딕트가 새까만 속을 숨긴 채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폐하의 고민이 제가 생각하는 그것이라면, 간단히 처리할 수 있습니다만.”
혜미가 고개를 슥 돌려 그를 보았다. 연한 보랏빛 동공이 긴장에 흔들렸다.
“…어떻게요?”
“리비에르를 죽여 버리면 간단한 일 아닙니까?”
베네딕트의 얼굴은 믿기지 않을 정도로 태연자약했다.
“…지금 농담하는 거죠?”
“그녀를 싫어하시지 않습니까.”
“싫어하는 게 아니라….”
혜미가 뒷말을 흐렸다. 베네딕트에게 어디까지 설명을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발터 세르노티가 바깥에 있는 걸 알면서도 일부러 폐하께 그따위 질문을 던진 여잡니다. 그녀는 그에 대한 폐하의 진심 따위는 상관없었을 겁니다. 그녀가 이끌어 내려고 했던 것은, 발터가 누굴 만나든 상관없다는 폐하의 단 한마디였을 테니까요.”
“…리비에르가 저한테 물어본 거 어떻게 알았어요?”
“지금 상황에서 폐하께 중요한 게 그겁니까?”
“궁금하니까 말해 줘요.”
“지난번 폐하와 만났을 때 각인한 보석에 투영 마력을 집어넣었습니다. 쉽게 말하면 마법사의 눈이라는 소립니다.”
혜미는 불그스름한 빛을 내고 있는 칼의 손잡이를 힐끗 본 후, 길게 한숨을 쉬었다.
“설사 그녀가 발터가 바깥에 있는 걸 알고 일부러 그랬다고 해도… 결국 대답을 한 건 나잖아요. 그녀는 제게 그런 답을 강요하지 않았어요.”
하지만 리비에르에게 솔직한 마음을 말할 수가 없었다. 연인 따윈 없고, 만들 생각도 없다고 말했다는 발터의 말을 전해 들은 직후였기 때문이다. 혜미가 무릎을 세워 모은 채 혼잣말하듯 말을 이었다.
“같이 있을수록 그녀가 강하다는 걸 확실히 알겠어요. 아까 당신이 그랬죠? 의지가 있는 사람의 능력치는 어마어마하게 강하다고. 리비에르도 그래요. 지금 그녀를 이끄는 원동력은 자신의 실력에 대한 인정과 보상이에요. 전혀 나쁘다고 할 수 없는 동기죠. 그래서 더 걱정이 되지만.”
“뭐가 걱정이 되십니까?”
베네딕트가 희미한 미소를 얼굴에 띄운 채, 그녀에게 물었다. 혜미가 허공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그녀가 그것을 가지지 못했을 때 일어날 일이 염려가 돼요. 크리스티앙이 그녀를 편으로 만드는 게 아니라 위험 요소로 생각해 적으로 돌린다면 리비에르는 분명히 반란을 일으킬 거예요. 그리고….”
혜미가 마른침을 삼킨 후, 나지막하게 내뱉었다.
“둘 중 하나는 죽겠죠.”
“그동안 깊은 생각을 많이 하셨군요, 폐하.”
베네딕트의 시선이 저도 모르게 한층 풀어진 빛을 띠었다. 혜미가 그를 힐끗 보며 투덜거리듯 입술을 비쭉거렸다.
“저도 크리스티앙에게 개죽음당하고 싶지 않은 건 마찬가지거든요.”
결국 황좌를 찾아야 하는 이유도 그것 때문이다. 그녀가 길게 한숨을 쉬며 무릎에 옆얼굴을 기댔다. 베네딕트는 푸른 눈으로 그런 그녀를 조용히 바라볼 뿐이었다. 마치 아주 오래전, 어린 황녀가 갇혀 살던 별궁에 찾아가 그녀의 이야기를 들었을 때처럼.
“그러니까 리비에르는 분명 내 편으로 만들어야 하는 사람이 맞는데….”
“그런데?”
“모르겠어요. 내가 초라해지는 기분이에요.”
혜미는 베네딕트를 보며 부끄러운 기분으로 씁쓸히 웃었다.
“…나 한심하죠?”
누구에게도 할 수 없는 말이었다. 고민의 대상인 발터에게는 더더욱 불가능한 말이다. 사실, 리비에르는 혜미가 오래전부터 되고 싶었던 이상향에 가까운 여자였다. 강하고 아름다우며 자신감이 넘친다. 목적하는 바가 확실하며 그를 위해서 최선을 다해 노력한다.
“…저런. 폐하께서는 지금 질투를 느껴 괴로운 거군요. 한낱 노예 출신 기사 하나 때문에.”
베네딕트의 말이 그녀의 가슴을 쿡, 찔렀다. 혜미는 마른침을 한번 삼킨 후 허탈한 표정으로 답했다.
“질투하는 거 맞아요. 그리고 리비에르는 한낱 노예 출신 기사라 부르기엔 아까운 사람이고요.”
“질투하는 이를 욕하기보다 높이는 건 폐하의 위선입니까?”
“제 마지막… 자존심이에요.”
덧붙이는 혜미의 목소리는 작지만 또렷했다.
“그녀를 깔아뭉갠다고 해서 내가… 나 아닌 다른 무언가가 되는 건 아니니까.”
“갑자기 입을 맞추고 싶어졌는데.”
베네딕트가 슬쩍 웃으며 사랑스럽다는 듯 그녀를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