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4화 (34/72)

“대공. 난 더 이상 기다릴 수가 없어.”

평범한 인간이 마력을 흡수하는 과정에서 어떤 고통을 감내해야 하는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수년간 이어져 왔던 실험을 책임져야 했던 것은 바로 그였다.

“저는 지금 당장이라도 북쪽 성의 지하로 내려갈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폐하.”

떨리는 목소리로 내뱉는 에리히를 보며 크리스티앙이 조금 낮아진 말투로 물었다.

“…나를 원망하는가?”

“당치 않습니다. 제국의 부강에 도움이 되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하는 것이 신하 된 자의 도리입니다.”

에리히의 인생은 그 목표를 위해 맞추어진 것과 다름없었다. 그는 유서 깊지만 무능했던 조상 탓에 가난과 빚에 찌든 공작가의 장자로 태어났다. 황금성 경비대의 지휘관이라는 초라한 보직을 맡고, 길지도 않은 일생에 그 어떤 반짝임도 없을 줄 알았다.

엎질러진 찻잔, 쓰러진 태후 앞에서 이글거리는 황금빛 눈동자를 부릅뜨며 숨을 몰아쉬고 있던 황태자와 마주친 그 밤 이후로 그의 인생은 완전히 바뀌었다.

“폐하께서는 제게 약속하셨던 모든 것보다 더한 것을 주셨습니다.”

“두고 봐. 장차 모든 귀족들이 하이데거 공작 가문에 고개를 조아리는 날이 올 것이네.”

책더미에 푹 파묻힌 채, 안경을 코끝에 걸고 자신만만하게 웃던 어린 크리스티앙을 기억한다. 스스로 내뱉은 말에 대해 한 치의 의심이 없던 그 눈빛 때문에 에리히는 그보다 한참이나 어린 주군에게 충성을 바칠 수가 있었다.

“짐은 대공을 원로원의 수장으로 만들 생각이야.”

그와 눈을 맞추게 될 정도로 키가 자라난 크리스티앙은 더 이상 스스로의 손에 피를 묻히지 않았다. 갈등을 조장하고 반역을 설계해 분란의 싹이 될 인물의 목을 자르고, 원로원을 이끄는 수장 자리에 당당히 하이데거의 이름을 올렸다.

“본 황제는 차기 황후로 미리엄 폰 하이데거 공녀를 맞이하기로 하였소만. 의의가 있으신지.”

첨예하게 다듬어진 칼날 같은 그의 예민함까지도 받아들인 결과는 이 땅에서 귀족으로 가질 수 있는 최고 권력이었다. 크리스티앙은 에리히의 막내 누이를 자신의 황후로 선택함으로써 그것을 증명했다.

날 때부터 몸이 불편해 그의 아비가 사교계에 데뷔도 시키지 않은 미리엄을 보지도 않고 선택한 황제의 의중이 무엇이었든, 그 결과는 상상했던 것 그 이상이었다. 에리히는 이미 그의 평생을 황제를 위해 바치기로 맹세한 후였다.

“에리히. 하나 묻겠네.”

크리스티앙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예, 폐하.”

에리히는 고개를 들었다. 열셋, 권력에 눈이 먼 어미를 죽이고 두 눈을 부릅떴던 어린 황태자가 그와 똑같은 얼굴을 하고 지금, 에리히를 바라보고 있었다.

“지금 그대의 눈앞에 누가 보이는가?”

에리히는 젖은 황금색 눈동자로 또렷하게 묻는 크리스티앙을 향해 그때와 똑같은 답을 주었다.

“…힘을 원하는 황제 폐하가 보입니다.”

“경. 그거 알아?”

크리스티앙이 그를 보며 붉은 입술을 비틀었다. 약하게 젖은 웃음이 그의 입술을 비집었다.

“그대의 대답은 단 한 번도, 날 실망시킨 적이 없어.”

에리히의 어깨를 짚은 크리스티앙의 손가락에 지그시 힘이 들어가자 바위 같은 대공의 몸이 조금 흔들렸다. 어둠을 담아 노랗게 변한 눈동자가 그를 보며 속삭이듯 명령했다.

“내가 원하는 걸 가지게 해 줘, 에리히.”

***

황후의 침실 문이 소리 없이 열렸다. 미리 전언을 들은 황후는 초야를 치를 준비를 끝낸 채,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새벽 시간에 갑작스레 황후를 방문하겠다고 전한 황제 때문에 그녀에게 시녀 몇 명이 달라붙었을지 예상이 가는 화려한 치장이었다.

“많이 피로할 것 같아 인사만 하고 가려 했는데.”

“송구합니다, 폐하.”

“괜히 황후를 번거롭게 만든 것 같소.”

크리스티앙이 낮게 속삭이듯 내뱉자 미리엄이 괘념치 말라는 듯 고개를 작게 흔들었다. 하이데거의 공녀는 소문대로 박색까지는 아니었으나 지극히 평범한 얼굴이었다. 온갖 빛나는 것으로 치장을 해 놓았지만 황후라는 타이틀이 아니라면 시선이 오래 머물지 못하는 흐릿한 인상이었다.

“폐하께서야 말로 쉬셔야 하는 상황입니다. 저는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하지만 크리스티앙은 그녀의 차분한 언행과 흔들리지 않는 눈빛이 마음에 들었다. 그가 자신의 신부를 바라보며 부드럽게 물었다.

“나와 말할 때는 눈을 바라보라고 그대의 오라비가 말하시던가.”

“대공은 폐하께서 진실한 이를 곁에 두고 싶어 하신다 말하였습니다. 사람의 진심을 보여 주는 것은 눈이라 생각하여 그리하였습니다만. 폐하께서는 제가 고개를 조아리기를 원하시는지요.”

“아니. 이걸로 좋아.”

미리엄이 그를 보며 아주 옅은 미소를 지었다. 긴장한 게 분명했을 텐데 떨리는 목소리를 내지 않는 걸 보면 에리히가 제 누이를 얼마만큼 교육시켰을지 상상이 갔다. 크리스티앙이 그녀를 시험하듯 뚫어져라 바라보다 얼굴에 표정을 지우고 낮게 내뱉었다.

“이리 가까이 와 봐.”

미리엄이 머뭇거린 것은 아주 찰나에 불과했다. 크리스티앙은 황후가 걸음을 디딜 때마다 그녀의 몸이 오른쪽으로 눈에 띄게 기울어지는 것을 조용히 응시했다. 사르륵. 사르륵. 황후의 옷자락이 소리를 내다가 그의 한 발자국 앞에서 멈추었다.

“짐은 황후와 초야를 치를 생각이 전혀 들지 않는다 말하면 날 원망하려나?”

미리엄은 당황하지 않았다. 눈을 두어 번 깜빡인 후, 차분한 어조로 대답했다.

“폐하께서는 좋은 토양에 뿌리를 내리셔야 할 분입니다. 저의 부족함은 누구보다 제가 잘 알고 있습니다.”

“평생 황제의 사랑을 받지 못한 황후로 기록될 터인데, 그래도 좋다는 뜻인가? 난 그대를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사랑할 수가 없을 것 같은데.”

“그리 과분한 소망을 바란 적이 없기에 제게는 큰일이 아닙니다.”

“그럼 아무것도 바라는 게 없어 보이는 황후의 소망은 대체 무엇인지 물어도 되겠소?”

크리스티앙이 미소를 감춘 채 황후에게 얼굴을 가까이하며 속삭이듯 물었다. 한 발 다가서자 그의 숨결이 황후의 이마에 닿아 되돌아오는 것이 느껴질 정도로 가까웠다.

보통이라면 눈동자를 떨려 할 만도 한데, 황후의 시선에는 작은 흔들림조차 없다. 과연 하이데거와 피를 나눈 형제였다. 미리엄이 그를 보며 조용하게 답했다.

“오라비가 말하길 폐하께서는 독서를 즐기신다 하였습니다. 지식이 얕아 말씀드리기 부끄럽지만, 건강한 육체로 태어나지 못한 죄 때문에 홀로 있는 시간이 많아 저 역시 책과는 가깝습니다. 가끔 폐하께서 정무에 지칠 때 잠시나마 읽은 책에 관하여 담소를 나눌 수 있다면 족합니다.”

“겨우 그것뿐이라고?”

“…폐하께 사랑을 받은 황후는 아니었으나 적어도 폐하를 부끄럽게 만드는 황후로 기록되지 않는다면 저는 더 바랄 것이 없습니다.”

“하하.”

크리스티앙의 붉은 입술에서 웃음이 샜다.

“하이데거의 여동생은 역시 그만큼이나 현명한 모양이군.”

황금빛 눈동자가 가늘어지고 커다란 눈꼬리가 아래로 접혔다.

“황후를 사랑하지 않을 거라는 말은 진심이오. 하지만 이것만은 약속하지.”

“…무엇입니까?”

“그대의 태를 통해 낳은 아이를 이 나라의 차기 후계자로 만들 거라는 걸 약속해. 그대는 내 성욕을 불러일으키지 못하니, 그대가 나의 아이를 임신하지 못해도 상관없어. 황후에게 좋은 씨를 뿌릴 수컷을 내 손으로 직접 뽑아 주지. 물론 그 뒤처리도 내가 해 줄 것이오.”

엄청난 말이었지만 미리엄은 미동 없이 그를 바라볼 뿐이었다.

“실망했나?”

“실망하지 않았습니다.”

미리엄이 그를 보며 작게 물었다.

“감히 한 가지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폐하.”

“뭐지?”

“혹여 마음에 담은 정인이 있으십니까?”

“본 황제의 마음은 협소하기 짝이 없지. 나는 평생 황후뿐만이 아니라 그 누구도 맘에 담을 생각도, 여유도 없는걸.”

“전 그걸로 되었습니다, 폐하.”

“…무슨 뜻이지?”

“말 그대로입니다.”

희미하게 내뱉는 미리엄을 보며 크리스티앙이 살짝 입술을 깨물었다. 그의 손가락이 그녀의 턱을 천천히 들어 올렸다.

“무슨 뜻이냐고 물었어.”

“폐하께서 저를 다른 이들보다 과하지도, 덜하지도 않게 똑같이 대해 주신다면 제가 감히 갖지도 못하는 감정 때문에 괴롭거나 투기할 일은 없을 테니, 그걸로 되었다는 뜻입니다.”

미리엄은 그런 그를 말간 눈동자로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그 눈빛 안에 신랑을 향한 애정이나 기대는 없었다. 크리스티앙은 그녀의 눈동자 저편에서 일렁이는, 애정의 욕구보다 더욱 큰 무언가를 보았다.

“말을 정정하지.”

“…….”

“그대의 오라비는 그대의 발끝도 따라가지 못하겠군.”

미리엄의 입술 끄트머리가 미세하게 떨리다가 이내 멈추었다. 크리스티앙이 그녀의 귓가에 느릿하게 속삭였다.

“오늘 밤 여기서 지내고 가야겠어.”

“…폐하.”

미리엄이 예상치 못했다는 표정으로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크리스티앙이 그녀의 귓불을 핥으며 말을 이었다.

“순수한 얼굴을 한 주제에 음탕한 속을 가지고 있는 여인과의 성교는 늘 꽤나 만족스러워서.”

흣, 하고 몸을 움츠리는 미리엄의 눈동자가 소리 없이 흔들렸다.

“처녀성을 증명하지 못했다고 하여 황후와의 혼인을 파기할 일은 없을 테니 걱정하지 않아도 돼.”

크리스티앙이 그녀의 몸을 번쩍 안아 들었다. 미리엄의 시선에 당황함이 번지는 것을 보니 모든 것이 그의 예상대로였다.

크리스티앙은 이 조숙하고 머리 좋고 커다란 야망까지 숨기고 있는 공녀의 몸을 가진 것이 누구였을지 궁금해졌다. 사교계에 나간 적이 없으니 그녀가 다른 귀족들을 만날 기회는 전무하였을 것이다.

그럼 누굴까. 무식한 마구간지기, 혹은 늙은 집사에게 박혔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자 몸속에서 분노와 흥분을 반반씩 섞은 열이 뜨끈하게 오르며 아랫도리에 피가 몰렸다.

“대신, 그만큼 날 만족시켜야 할 거야. 난 여자를 거칠게 다루는 편이라.”

아름다운 황제가 작게 웃으며 화려한 휘장이 드리워진 침대로 천천히 걸었다. 세상은 역시 아직 살아갈 가치가 있을 만큼 재미있었다. 침실의 문이 소리 없이 잠겼다. 황후의 교성이 높다랗게 울려 퍼졌다.

***

녹초가 된 모습으로 혜미가 막사를 향해 걸었다. 자일룬에 도착한 첫날부터 그들을 습격한 말라쿤은 리비에르가 말하였듯이 하루가 멀다 하고 쳐들어왔다. 막사를 공격하지 않으면 마을이었다. 덕분에 매일이 지옥 같은 전투의 나날이었다.

“아깐 고마웠어요.”

리비에르가 혜미를 따라 걸으며 내뱉었다. 그녀에게 도끼를 휘두르던 말라쿤을 처리한 것을 말하는 것이었다. 리비에르는 군사를 이끄는 지휘관이었으므로 그녀를 공격하는 말라쿤의 수는 늘 너무 많았다. 혜미가 작게 고개를 까딱하며 미소를 지었다.

“함께 싸우는 거니까 당연한 거죠.”

“그런데 아까 옆구리 쪽을 다치지 않았어요?”

리비에르의 눈은 예리했다.

“좀 벤 거라 괜찮습니다. 토비아스가 상처를 봐 줬어요.”

“토비아스라는 기사, 의외로 재주가 많네요.”

“그 정도면 대놓고 많은 거죠.”

혜미가 눈썹을 들어 올리며 그를 두둔하자 리비에르가 조금 웃었다.

“하하. 그런가요? 하긴. 조세핀이 그의 욕을 하면서도 주위를 뱅뱅 도는 걸 보면 확실히 그래요.”

“그건 지휘관님께서 첫날 그… 이상한 게임을 시키셔서….”

“조세핀은 부끄러움을 많이 타는 성격이라 내가 밀어 준 것뿐인데.”

“…네?”

“몰랐어요? 조세핀은 자기 맘에 드는 사람을 일부러 찍어서 괴롭히죠. 귀엽지 않나요?”

“으음. 전 딱히….”

고개를 젓는 그녀를 보며 리비에르가 목소리를 낮추었다.

“조세핀 말로는 둘이 이미 잤다던데.”

“헉. 정말이요?”

이번에는 진심으로 놀랐다. 혜미가 눈을 동그랗게 뜨자 리비에르가 어깨를 으쓱했다.

“모르죠, 또. 잤다는 소문을 내서 토비아스를 일찌감치 자기 남자로 만들려는 귀여운 속셈일지도.”

“만약 그게 사실이라면 귀엽다기보다 전 좀 무서운데요.”

“진짜 잤을 수도 있고요. 남녀 사인 원래 당사자가 아니면 아무도 모르니까.”

시답잖은 대화를 나누며 어깨를 마주하고 걷다 보니 그들은 어느덧 혜미의 막사 앞이었다. 먼저 들어가기가 뭐해 슬쩍 눈치를 보았지만 리비에르는 그녀를 빤히 바라볼 뿐 쉽게 자리를 뜨지 않았다.

…뭔가 할 말이라도 있는 걸까.

혜미가 그녀를 보며 지나치듯 입을 열었다.

“잠시 안에 들어오시겠어요? 세르노티에서 가져온 차가 있는데.”

“오. 정말? 그래도 되나요?”

마치 기다렸던 사람처럼 행동하는 리비에르를 보니 그녀의 예상이 맞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혜미는 자신의 막사 안에서 리비에르를 잠시 기다리게 하고 난 후, 막사 앞에 지핀 모닥불에서 뜨거운 물을 받아 돌아왔다.

물기 없는 찻잔을 마른 헝겊으로 한 번 더 닦고 찻잎을 넣어 우리자 좁은 공간 안에 기분 좋은 냄새가 퍼졌다. 혜미는 꿀과 우유를 넣은 차를 리비에르에게 내밀었다.

“드세요.”

“고마워요.”

리비에르가 철제로 된 찻잔을 손에 감싼 후, 연기를 길게 불어 식혔다. 전투가 방금 전이었다는 사실을 보여 주듯 그녀의 얼굴 여기저기에 아직도 핏물이 가득했다. 혜미의 외관도 그리 다르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

“정말 좋은데요? 마시는 것만으로 좀 긴장이 풀리는 것 같아.”

“…원하시면 챙겨 드릴까요?”

“그런 뜻이 아니었는데. 남의 것을 괜히 빼앗는 느낌이라 미안한걸요.”

“아니에요. 욕심 부려서 많이 챙겨 오긴 했는데. 그동안 차 마실 시간도 없어서 꽤 많이 남았거든요.”

“하긴. 매일 매일 피 터지는 싸움이라 정신이 없긴 했죠.”

리비에르가 싱긋 웃으며 따끈한 차를 다시 홀짝였다. 혜미는 딱히 대꾸할 말이 없어 자신의 잔을 들어 입술을 축였다.

“오늘이 크리스티앙 폐하의 결혼식이 끝나는 날이었는데. 알고 있죠?”

“아… 네.”

리비에르의 군사들이 불평하는 소리를 그녀 역시 들어서 알고 있었다. 수도에 남겨진 리비에르의 군대는 축제 분위기에 취해 맛있는 음식을 실컷 먹고 즐겼을 텐데, 그들은 전쟁 중이라 매일 밑 빠지게 싸움이나 하고 이게 뭐냐는 자조도 있었다.

“그대의 최종 목표도 역시 황금성인가요?”

리비에르가 혜미를 보며 아무렇지도 않게 물었다. 아니라고는 할 수 없어 혜미가 작게 고개를 끄덕이자 리비에르가 작게 미소 지으며 동의했다.

“나도 그래요. 기사치고 그 영예를 바라지 않는 사람은 아무도 없겠죠. 이제 그 길이 가깝게 보이는 것 같아서 말라쿤을 잡는 마지막 작전은 절대 실패하고 싶지 않고요.”

리비에르가 어깨를 으쓱하며 혜미를 보았다.

“함께 황금성에서 잘 먹고 잘살면 좋겠네요. 그대도. 나도.”

웃으며 내뱉는 리비에르의 말투에 악의는 느껴지지 않았다. 혜미는 그녀를 보다 문득 물었다.

“지휘관님께서는 황제… 폐하를 직접 본 적이 있나요?”

“그럼요.”

“크리스티앙… 황제 폐하께서는 어떤 분이세요?”

반은 충동적인 물음이었다. 혜미는 리비에르의 눈에 비친 황제가 어떤 모습이기에 그녀가 따르는지 궁금했다. 그리고 과연 그녀를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일 가능성이 있는지도.

“폐하는 사람이 원하는 걸 정확히 꿰뚫는 무서운 분이시죠.”

리비에르가 웃으며 나직하게 대답했다. 그녀의 초점이 먼 곳을 보는 것처럼 조금 흐려졌다.

“절 영웅으로 만들어 주신 분이기도 하고요.”

후룩. 차를 들이켜며 그녀가 말을 이었다.

“음유시인들이 노래하는 신탁 이야기, 당신도 들어본 적이 있나요?”

혜미가 고개를 끄덕였다. 리비에르의 출사표. 꿈에서 황제를 위해 목숨을 바치라는 신탁을 받고 전쟁에 출정했다는 내용이었다.

“그거, 사실 크리스티앙 폐하가 지어낸 이야기예요.”

“…….”

“날 영웅으로 만들어 주겠다고 약속하셨고 결국 그렇게 되었어요. 사람들은 나의 이야기에 온갖 영웅 서사를 가져다 붙였고, 난 그 사람들의 기대를 충족해야 할 의무감에 더욱 열심히 싸웠죠.”

혜미는 뭔가 듣지 말아야 될 이야기를 들어 버린 것 같은 느낌에 말없이 차만 홀짝였다. 대체 그녀가 왜 자신의 옛이야기를 꺼내는지 알 수는 없었지만 지금은 잠자코 있는 게 나을 것 같았다.

“나의 아버지는 양치기 농노였어요. 처음 태어날 때부터 나도 양털만 질리도록 깎고 살았는데…. 어느 날 영주의 아들이 스승과 칼을 대련하는 걸 볼 기회가 있었던 거예요. 난 눈을 뗄 수가 없었어요. 정신없이 빠져들었죠. 나도 할 수 있을 것 같았어요. 가슴이 두근두근 뛰었고요. 영주 아들의 녹슨 검을 주워 혼자 연습을 했어요. 물론 폼이며 기술은 엉망이었을 거예요.”

그녀가 그때의 기억을 떠올리는지 잠시 생각에 잠기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하하. 그래도 난 좋았어요. 검을 휘두를 때면 내가 강해지는 것 같았거든요. 누군가에게 매일 전하, 전하, 하며 허리를 굽신거리면서도 내가 당신보다는 강하다고 속으로 자부할 수 있었거든요. 그리고 난 결국, 그 영주의 아들이 검술 시합을 하는데 몰래 따라붙었어요. 수도인 아메티스까지 갔던 거죠. 난 검을 대련하고 싶었지만 노예의 신분으론 아무도 나와 검을 마주 대지 않았거든요.”

리비에르가 씁쓸히 웃으며 말을 이었다.

“검술 시합은 황궁의 주최였고, 그 자리에 크리스티앙 폐하가 있던 것이 내 운명을 바꾸어 놓았어요. 나는 미리 준비했던 대로 신분을 속이고 출전하려 했는데… 그 영주의 아들이 변장을 한 나를 어떻게 알아보고 말을 해 버린 거죠. 귀족만이 출전하는 대회에 천한 양치기 농노의 자식이 출전을 하였다고.”

그녀가 후후 웃으며 의자에 다리를 아무렇게나 올린 채, 차를 마셨다. 혜미는 조용히 그녀의 이야기에 집중했다.

“소란이 벌어졌고 크리스티앙 폐하께서 그걸 알게 되었죠. 난 그때 끌려가면서 겁도 없이 소리를 쳤어요. 검을 써서 나라를 위해 싸우는데 좆같은 계급이 대체 무슨 상관이냐고. 다들 양치기 농노의 딸에게 이길 자신이 없는 거냐고. 후후. 그 자리에 있는 고매하신 귀족들이 모두들 혈압이 올라 쓰러질 만한 이야기였죠.”

그리고 크리스티앙은 그녀를 죽이는 대신 기회를 주었다.

“폐하께서 날 따로 불러 말씀하셨어요. 우승을 한다면 나를 인정해 주겠다는 말이었어요. 만약 우승하지 못하면 전 사형이라는 말도 함께요. 그리고 작게 덧붙였죠. 만약 내가 우승을 하면 상패를 건네는 전년도 우승자의 목을 베라고.”

“…그래도 되는 거였어요?”

“물론 안 되죠. 전년도 우승자는 제가 감히 쳐다봐서도 안 될 높은 지위의 귀족이었으니까. 칼을 뽑는 것만으로도 난 목숨을 부지할 수 없었을 거예요.”

“…그래서요?”

혜미는 왠지 답을 알 것 같으면서도 그녀에게 물었다.

“난 폐하의 말에 따랐어요. 난생처음 일어난 사건에 심장이 터질 것 같이 뛰고 머리가 어떻게 되었는지도 모르겠어요. 난 결국 우승을 했고, 날 치하하는 전년도 우승 기사를 칼로 베었어요. 그리고 곧바로 황제 폐하의 부름을 받았죠. 그 귀족이 수도로 가는 세금을 뒤로 빼돌리고 있었다는 사실은 그때서야 알았어요.”

리비에르가 혜미를 보며 싱긋 웃었다.

“크리스티앙 폐하께서는 내가 얼마만큼 황제를 신뢰하고 있는지 목숨을 걸어 증명해 보이게 하는 동시에 반역자를 처단한 거죠. 대단한 분이에요.”

“아.”

혜미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손에 든 차가 서서히 식어가고 있었다. 세르노티의 기사들이 아닌 다른 사람의 입에서 듣는 크리스티앙의 평가는… 솔직히 그녀의 기분을 묘하게 만들었다. 그녀라면 하지 않았을 선택을 순간마다 내리면서 크리스티앙은 도대체 어떤 기분이었을까. 그리고 그의 시험을 통과하지 못했던 수많은 사람들의 말로는 어떠하였을까.

“그 뒤는 아까 말했던 대로예요. 폐하께서는 나를 신탁을 받아 전쟁에 출정하는 전설의 기사로 만들었죠. 승리할 때마다 군대는 늘었고, 나는 제국 역사상 최초로 일개 농노에서 백작 작위를 받은 귀족이 되었어요. 나는 내 실력에 따른 정당한 인정을 받고 싶었고, 폐하께서는 그걸 제게 주셨죠.”

“…매 순간, 순간이… 마치 목숨을 건 시험처럼 들리네요.”

리비에르가 그녀를 보며 조금 의외라는 표정을 짓다가 이내 미소를 머금었다.

“그게 잘못된 건가요? 엄격한 시험을 통과해서 그에 걸맞은 정당한 대우를 받는 게?”

“아뇨. 그냥….”

혜미가 말끝을 흐리다 고개를 들었다.

“그 끝이 보이지 않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을 뿐이에요.”

인정을 받기 위해서 끝없이 자기 자신을 증명해야 한다는 뜻이었다. 실수는 용납하지 않는다. 목숨을 걸어 충성을 증명하고 아니면 말라는 뜻이었다. 장기판의 말이 되는 것 같은 기분.

“…그러다 지쳐 버리면 어떻게 하나, 하고.”

혜미는 자신이 무심코 내뱉은 말에 스스로 조금 놀랐다. 그녀 역시도 발터에게 말한 적이 있었다. 그녀를 아무 조건 없이 믿어 주는 주변인들의 기대를 충족시키기 위해 더 노력하고 싶다고. 크리스티앙과 리비에르가 서로의 이해관계를 위해 손을 잡았다고 한들, 그것 역시 비판받아야 할 일은 아니다.

“하하. 그런 말을 들을 줄은 상상도 못 했는데.”

“죄송해요. 제가 주제넘었습니다.”

깔끔하게 고개를 숙이는 그녀를 보며 리비에르가 손을 내저었다.

“아뇨. 틀리지 않았어요. 이렇게 반복되는 전투에서 지치지 않을 사람은 없죠. 아마 폐하께서도 알고 계실 거예요. 끝이 없는 전투를 원하는 기사는 아무도 없을 거라는 사실을.”

리비에르가 길게 한숨을 내뱉으며 덧붙였다.

“하지만 이제 이 짓도 드디어 끝이 보이네요. 작전이 바로 이틀 후니까요. 우린 반드시 성공할 거예요.”

제트성 탈환 작전은 신중하게 계획을 짜는 그녀와 발터 덕분에 미뤄지고 미뤄졌다. 혜미가 눈을 빛내는 리비에르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리비에르를 도와 전투에서는 반드시 승리해야 했다. 그것이 세르노티의 기사들이 자일룬까지 온 이유였다.

“리가스의 목을 전시하면 황제 폐하께서도 저를 수도에 불러 주시겠죠.”

“…….”

“황제 폐하가 제 능력을 신임하고 있다는 걸 알아요. 하지만 뺑뺑이로 오지에만 돌려지는 것도 이제 좀 신물이 나서요. 절 따르는 군사들은 따뜻한 집과 맛있는 음식, 그리고 승전보를 울린 군대에 걸맞은 대우를 원하죠. 크리스티앙 폐하께서는 제게 그걸 주시겠다 말하셨고요.”

리비에르가 후후 웃었다. 혜미는 양손을 깍지 껴 쭉 뻗는 그녀를 보며, 잠시 묘한 기분이 들었다.

“황금성엘 가면 코가 비뚤어질 정도로 온전히 취하고 싶네요.”

술을 마셔도 취할 수 없는 전시 중의 상황을 자조하듯 혼잣말하는 리비에르의 앞에서 혜미는 점점 마음이 복잡해졌다.

자신의 입장에서는 크리스티앙과 리비에르의 사이가 나쁜 것이 더 좋은 게 당연했다. 하지만 그녀가 원하는 것을 이루었으면, 하는 인간적인 감정이 솟는 이유는 뭘까. 아마 전쟁터에서 말라쿤과 뒹굴며 개고생을 한 전우애 같은 것일지도 몰랐다.

“지휘관님.”

“지젤이라고 불러도 돼요.”

“…지젤.”

혜미가 그녀의 이름을 작게 불렀다.

“네, 혜미.”

“주제넘다고 생각하실 수도 있는데….”

“나와 적지에서 함께 칼을 휘두르는 이들 중 내게 주제넘은 자는 아무도 없습니다.”

혜미가 그녀를 보며 마른침을 꿀꺽 삼킨 후, 결심을 한 듯 입을 뗐다.

“…충분히 대단해요.”

“무슨 뜻이죠?”

“지휘관… 아니, 지젤은 정말 대단해요. 이렇게 많은 수의 군대를 일사불란하게 지휘하고 싸우는 건 같은 인간으로서… 멋있다고 생각하고 존경합니다.”

드디어 말했다. 그것은 만난 첫날 이후 리비에르에게 느끼는 흐릿한 열등감을 제외한 혜미의 진심이었다. 매일 같은 전투에도 긴장을 놓지 않고 군사들에게 올바른 상벌을 내리며 그들을 강하게 훈련시킨다.

지휘관으로서 그녀의 능력은 상상 그 이상이었고, 발터와 함께 있을 때면 더욱 힘을 발했다. 리비에르는 할 수만 있다면 꼭 그녀의 편으로 만들어야 할 인재였다. 여기까지는 객관적인 사실이다.

“혜미, 혹시 내게 반했나요? 그럼 곤란한데.”

리비에르가 눈동자를 짓궂게 반짝이며 그녀를 보자 혜미가 서둘러 손을 내저었다.

“아뇨, 절대 그런 쪽은 아니고….”

“다행이네요.”

“누군가의 인정이 없어도 당신은 충분히 대단하다고, 그냥… 말하고 싶었을 뿐이에요.”

리비에르가 잠시 침묵하며 그녀를 바라보다 입을 뗐다.

“음… 내가 사실 당신에게 한 가지 물어볼 게 있는데.”

혜미는 리비에르의 말투에서 그녀가 진짜 하고 싶은 말이 이제부터라는 것을 직감할 수 있었다.

“왠지 가까워진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 말하기가 한결 편하네요.”

“하세요.”

혜미가 긴장을 감춘 채 그녀를 바라보자 리비에르가 그녀를 똑바로 직시하며 물었다.

“혹시 발터 세르노티와 내 사이를 도와줄 수 있나요?”

꿀꺽. 혜미는 어느새 차갑게 식은 찻물이 목 아래로 내려가는 것을 느끼며 잠시 침묵을 지켰다. 이번만큼은 대답을 쉽게 할 수가 없었다. 사적인 감정이 스며드는 순간, 그녀는 더 이상 객관적일 수가 없었다. 그 화제가 최근 그녀의 머리를 복잡하게 만드는 발터라면 더욱더.

“무슨… 말씀이시죠?”

간신히 입을 열어 묻자 리비에르가 자연스레 대답했다.

“당신이 그와 가장 친밀한 사이인 것 같아서 하는 말이에요.”

의외의 말이었다. 혜미는 자일룬에 도착한 이후로 계속 머리가 복잡했으므로 발터를 일부러 멀리했기 때문이다. 매일같이 벌어지는 전투 때문에 길게 이야기를 할 여유가 없다는 것은 그를 피할 좋은 변명거리가 되어 주기도 했다.

“그가 당신을 신경 쓴다는 것은 멀리서도 보이는 일이죠. 사실, 내 착각이 아니라면 그뿐만이 아니라 세르노티의 기사들 전부, 보이지 않는 선에서 당신을 신경 쓰며 챙기는 기분이 들어요.”

예리하다면 예리한 관찰력이다. 혜미는 말없이 입술에 힘을 주었다.

“나는 그게 기사단을 이끄는 발터와 당신이 친밀한 관계에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고요. 제 말이 틀렸나요?”

어디까지가 맞고, 어디까지가 틀린 이야기인지 입 밖에 낼 수가 없었다. 혜미가 혼란스러운 얼굴을 애써 감추며 작게 한숨을 쉬었다.

“만약 그렇게 생각하신다면 제게 왜 도움을 청하는지 물어봐도 돼요?”

“발터에게 이미 질문을 했었거든요. 혹시 연인이 있냐고.”

혜미가 마른침을 삼켰다. 목구멍이 부어오르는 듯한 착각이 든다.

“내가 아무리 자유분방하게 살았지만 연인이 있는 사람은 건드리지 않는 철칙이 있어요. 실제로 귀족 사회에서 만연히 이뤄지는 불륜을 매우 혐오하기도 하고요.”

리비에르가 그녀를 보며 간단히 말을 이었다.

“발터는 없다고 답하더군요.”

혜미의 심장이 조금 저릿했다.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알 수 없어 입 안의 살만 깨물었다.

“전쟁 통에 연애할 생각도 없고, 앞으로도 연인 같은 건 만들 생각이 없다고 딱 잘라 말하는 것도 잊지 않았고요. 그래서 물어본 거예요. 만약 혜미도 그와 같은 마음이라면, 둘의 친밀한 관계가 그저 우정일 뿐이라면 날 도와줄 수 있을지 하고요. 사실 나는 발터가 매우 마음에 들거든요. 이 전투가 끝나도 계속 그와의 인연을 이어가고 싶을 정도로.”

솔직하다. 리비에르는 자신의 마음을 표현하는데 거침이 없었다. 혜미는 이유 없는 열패감을 느끼며 떠듬떠듬 말을 이었다.

“저… 그게…. 사람 사이의 감정에 대해서는… 제가 어떻게 도와드릴 수 있는 방법이 없을 것 같아요. 그런 개인적인 일은… 당사자와 직접 대화해서 해결하는 게 나을 것 같은데요.”

겨우 내뱉은 한마디였다. 가슴이 너무 세게 뛰어서 집중을 할 수조차 없었다. 차라리 말라쿤이 쳐들어왔다는 북소리가 났으면 좋겠다는 이율배반적인 느낌이 들 정도다.

“죄, 죄송합니다. 제게 어렵게 이야기 꺼내셨다면.”

“아니. 어렵지 않았어요. 내가 그에게 반해 있는 건 군대 내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을걸?”

웃으며 말하는 리비에르의 목소리에 부끄러움이나 민망함 따위는 찾아볼 수가 없었다. 혜미는 진심으로 이 자리가 불편해지기 시작했다.

“그럼 마지막으로 한 가지만 물어볼게요.”

리비에르가 깔끔히 비워진 찻잔을 테이블 위에 올리며 물었다.

“혜미, 당신은 괜찮아요?”

“…뭐가요?”

“내가 발터를 나의 남자로 만들어도, 괜찮으냐고요.”

리비에르의 말은 질문이라기보다 이제부터 그를 자신의 남자로 만들겠다는 선전 포고로 들렸다. 혜미는 더 이상 그녀와 말을 이어 나가기가 힘이 들었다. 이러다가 감정을 주체하지 못해 그녀를 붙잡고 처음부터 끝까지 다 말해 버릴 것 같아 불안했다.

크리스티앙을 치기 위해선 당신이 필요한데, 당신과 발터가 가까워지는 건 겁이 난다고. 발터가 기억을 잃은 내게 잘해 주는 게 그저 충성심인지 연심인지 헷갈려서 괴로우며, 이 상황에 베네딕트까지 얽혀서 미치겠다는 유치한 속내까지 줄줄이 다 말해 버리고 싶은 충동이 차오른다.

“대답, 안 해 줄 건가요?”

혜미가 간신히 주먹을 꽉 쥐고 입을 열었다.

“…그건 제가 상관할 일이 아닙니다.”

간신히 내뱉은 말에 리비에르가 싱긋 웃었다.

“충분한 답이 된 것 같네요. 그럼 이만 나가 볼게요. 차, 잘 마셨어요.”

자리에서 일어나는 리비에르를 배웅할 힘도 없었다. 힘이 들어가지 않는 다리로 의자에서 한 박자 늦게 일어나는데, 어느새 막사의 천막을 걷고 나간 리비에르의 목소리가 들렸다.

“어머. 발터. 여기 있는 줄 몰랐는데.”

예상치도 못한 이름이 들려오자 혜미가 테이블을 손으로 짚었다. 무릎 뒤에 갑자기 힘이 빠지는 느낌이었다.

“…작전 회의를 위해 만나자고 절 부른 건 경이십니다.”

낮지만 확실히 들려오는 발터의 딱딱한 목소리에 혜미의 얼굴에 핏기가 가셨다. 가라앉은 그의 목소리를 듣자 불안한 예감에 정수리가 저렸다.

설마. 다 들은 걸까…?

“아. 그랬었죠. 혜미와 이야기를 하느라 시간 가는 줄 몰랐네. 그렇다고 여기까지 날 찾으러 온 거예요?”

발터는 대답하지 않았다. 리비에르가 경쾌하게 웃었다.

“회의 전에 목욕을 좀 하고 싶은데, 내 시중을 좀 들어 줄래요?”

“우습지도 않은 농담에 대꾸할 기분이 아닙니다.”

“농담한 거 아닌데.”

“경의 목욕 시중을 들 사람은 군대에 널려 있지 않습니까?”

“어머 발터. 지금 질투해요?”

“헛소리 좀 집어치우시죠.”

대체 어디까지 들었을까. 막사의 천막은 있으나 마나 한 존재로 방음의 역할을 전혀 하지 못했다. 발터가 온 것을 눈치채지 못했던 것은 그녀가 리비에르와의 대화에 너무도 당황해서 정신이 없었기 때문이 분명했다.

리비에르가 막사에서 나가기 전 그녀와 했던 마지막 대화를 떠올리자 심장이 더욱 절망적으로 조여들었다. 리비에르가 그를 만나도 상관없다고 했던 그녀의 말이 발터에게는 어떻게 들렸을까.

“일단 밥이나 먹으면서 회의해요. 내 막사에서.”

그들의 목소리가 점점 멀어졌다. 발터가 뭐라고 말하는지 더 듣고 싶었지만 희미했다. 혜미는 막사 천막을 꼭 쥔 채, 고개를 푹 숙이고 입술을 아프게 깨물었다. 소리쳐 부르면 닿을 거리에 있는 발터가 오늘따라 너무 멀게 느껴졌다.

“…아, 따가워라….”

토비아스가 막사에 들러 건네주고 간 약을 상처에 바르자 불을 지른 듯 쓰라린 느낌이 들었다.

“어. 상처가 덧날지도 모르겠는데. 많이 아프지 않아?”

자기 전에 소독을 꼭 하고 자라며 당부하던 그의 말이 떠올랐다. 옆구리 상처에 뜨끈한 열감이 일며 욱신욱신했다. 혜미는 상의 끄트머리를 반쯤 벗어 목에 걸친 채, 토비아스가 가져다준 깨끗한 붕대를 상처에 돌려 감았다.

“저런. 다친 겁니까?”

갑자기 들려온 목소리에 혜미는 화들짝 놀라 고개를 번쩍 쳐들었다.

“…엄마, 깜짝이야.”

흐릿한 촛불 하나만 켜진 비좁은 막사 안에 나타난 베네딕트를 보며 그녀가 서둘러 옷에 팔을 꿰었다. 조용히 다가온 그가 마치 제집처럼 침상 앞 의자에 턱, 걸터앉았다. 갑자기 난입한 불청객을 보며 혜미가 미간을 모았다.

“뭐예요? 당신 여기 어떻게 왔어요?”

“탈주한 꼬마 마법사들의 능력을 이미 보지 않았습니까?”

이것도 꿈인가 싶었지만 그러기엔 말라쿤의 칼에 베인 옆구리 상처가 너무 아팠다. 베네딕트가 고통에 인상을 찌푸리는 그녀를 향해 단조롭게 명령했다.

“옷을 벗으십시오.”

다짜고짜 옷을 벗으라는 명령에 혜미가 눈을 세모꼴로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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