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3화 (33/72)
  • 자신의 방으로 돌아온 베네딕트가 손바닥을 폈다. 자그마한 붉은색 보석이 나타났다. 해가 잘 들지 않은 가장 북쪽의 성이었지만 새벽 별빛은 충분했다.

    보석을 가만히 바라보는 베네딕트의 엷은 입술이 소리 없이 위를 향했다. 그를 향해 숨을 씩씩 몰아쉬던 에데르트를 떠올렸다.

    “당신은 황후를 사랑했던 거죠?”

    그를 보며 기대와 신뢰에 찬 눈을 반짝이던 어린아이의 입에서 뱉어진 날카로운 말에 심장이 조금 움찔하지 않았다면 거짓말이었다.

    ‘제게 그리하시면 아니 되지요. 폐하.’

    베네딕트는 손 안에 쥐고 있는 붉은 보석을 가만히 응시했다. 보석의 빛이 어둡게 일렁이고 있었다. 갈라졌지만 이어져 있는 다른 반쪽의 주인, 에데르트 역시도 이 순간 혼란한 감정에 고민하는 것으로 보였다. 예정된 수순이었다.

    “내가 사랑한 게 엉망으로 비틀린 당신이 아니라 발터라서 천만다행이라고요!”

    그와 몸을 섞으면서도 감히 사랑을 입에 올리던 그녀의 얼굴을 떠올리자 입술에서 차가운 조소가 흘러나왔다.

    ‘그 사랑 때문에 고통스러우실 텐데, 그래도 원하시는 겁니까.’

    에데르트는 어릴 때부터 자신의 마음을 숨길 줄 몰랐다. 그 성정만은 누군가를 꼭 닮았다고 생각했었다. 솔직하기 때문에 남을 상처 줄 수 있는 마음. 악의가 아닌 선의를 베풂으로써 상대를 초라하게 만들었던, 그러나 스스로는 그 사실을 죽을 때까지 알지도 못했던 한 사람.

    다니엘라

    그의 눈앞에서 황금색 글자가 나타났다가 자잘한 금가루처럼 번지며 날아가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소리 내어 입 밖에 내뱉는 것조차도 감당할 수가 없이 무거워서, 아무도 모르게 써왔던 그녀의 이름이었다.

    베네딕트는 그가 그녀를 처음 보았던 날을 떠올렸다. 그때도 태양이 찬란한 여름이었다. 화려하게 빛나는 황금성은 차려입은 귀족들로 가득했고 성의 곳곳에서는 밝고 생동감 있는 음악이 커다랗게 울려 퍼졌다. 황제의 결혼 예식이 이뤄지는 날이었다.

    베네딕트는 그날, 황제 클라웨 8세의 공공연한 정부이자 그의 어머니였던 전대 교황 베아트리체의 옆에서 그녀가 진행하는 의식을 말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맹세의 키스를 하기 위해 신부의 베일을 걷는 황제를 보며 경멸을 애써 감추었던 순간.

    “네. 맹세합니다.”

    누구에게나 평생 잊을 수 없는 순간이 있다. 마치 시간이 멈춘 것 같았던, 묘하게 눅눅했던 공기의 흐름이 멈추었던 것 같은 그날. 그 오후의 햇살 속에서 환하게 웃고 있던 다니엘라를 기억한다.

    영원한 사랑의 서약을 말하던 그녀. 이제 갓 성년이 된 다니엘라의 눈동자는 눈앞의 황제를 향해 지금부터의 인생에 대한 기대감을 발하며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사랑에 빠진 소녀의 눈이었다.

    그리고, 열일곱 소년이었던 베네딕트는 다른 이를 바라보며 행복하게 웃는 어린 황후를 처음 본 순간 깨달았다. 이것은 역대 교황들이 클라웨 황가와 더럽게 얽힐 수밖에 없게 만든 누군가의 뿌리 깊은 저주라는 것을. 이제부터 그의 삶이 제 어미와는 완전히 다른 방향으로 괴로워질 거라는 사실을.

    “안녕하세요. 궁을 여기저기 탐방하다 길을 잃었어요. 이곳은 마치 미로 같은데요? 한번 발을 들이면 나가기가 불가능한 곳 같아.”

    부끄러운 얼굴로 겸연쩍은 듯 코끝을 찡그리며 웃던 다니엘라를 다시 만났을 때, 베네딕트는 그 저주를 확신했다.

    “괜찮으시면 절 좀… 도와주실 수 있을까요?”

    “…물론입니다, 폐하.”

    차기 교황 자리에 내정된 대마법사와 황족의 만남을 저지할 수 있는 이는 없었다. 베네딕트는 황후가 정원을 꾸미는 것을 돕는다는 핑계로 그녀와 함께할 수 있는 기회를 손쉽게 얻었다. 그녀가 자랐던 따뜻한 남쪽의 꽃들로 뒤덮인 유리 정원을 보며 다니엘라는 가슴에 손을 모은 채 환하게 웃었다.

    “친절한 사람. 마법사님은 너무나 다정한 분이시군요.”

    “…꽃을 가꾸는 것은 황후 폐하의 몫입니다. 남부의 꽃씨를 모조리 싹틔운 탓에… 앞으로 폐하께서 일이 많아지실 거예요.”

    진심이 들키기라도 할까 민망해 그녀의 눈빛을 피하는 베네딕트에게 눈을 맞추며 황후가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너무 좋아요. 할 수 있는 일이 생기는 거, 나한테는 너무 기쁜걸요.”

    “…….”

    “사람들은 내게 아무것도 할 필요가 없다고 말해요. 황후의 존재 의미는 그냥 그 자리에 있는 걸로 충분하대요. 그들이 무슨 뜻으로 그런 말을 하는지 알아요. 근데 나는… 그 말이 가끔 슬픈 거 있죠.”

    결혼식을 치르자마자 전장으로 돌아간 황제는 1년 동안 아메티스로 돌아오지 않았다. 계절이 한 바퀴를 돌아 황후가 처음 황금성으로 들어왔던 여름이 되었을 때도, 그녀는 혼자였다. 건강한 빛으로 그을려 장난꾸러기 같던 황후의 얼굴에 핏기가 없어지기에는 충분하고도 남은 시간이었다.

    “있잖아요. 베네딕트. 내가 궁으로 가기로 결정이 났을 때, 부모님과 형제자매들은 사실 그리 반가워하지 않으셨어요.”

    다니엘라가 커다란 정원 안에서 그를 보며 조용히 찻잔을 기울이며 옅게 미소 지었다. 그녀는 더 이상 크게 소리 내어 웃지 않았다. 마치 소리 내어 웃는 법을 잊은 사람 같이, 그림처럼 쓸쓸히 웃었다.

    “아버지는 마지막까지 말씀하셨어요. 네가 궁에 가고 싶지 않다면 황제 폐하 앞에 무릎을 꿇겠다고. 난 염려하는 아버지를 끌어안고 고개를 세차게 저으며 입을 크게 벌려 웃었죠. 아빠, 나는 행복해요. 지금 이 순간, 너무 떨려서 가슴이 터질 것 같아요.”

    달칵.

    찻잔을 내려놓으며 “차가 조금 쓰네요.” 하고 중얼거리던 그녀의 얼굴을 베네딕트는 지금도 기억했다.

    “나는 항상 그림으로만 보았던 아메티스에 오고 싶었거든요. 커다란 분수가 있는 화려한 도시, 별처럼 빛나는 예쁜 사람들이 바쁘게 오가고, 멋진 음악을 함께 듣고 의견을 나눌 수 있는 곳. 남부에 있는 시골 촌구석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아름다운 곳이었으니까요. 제가 스치듯 본 황제 폐하를 짝사랑하게 된 건 당연한 수순이었죠. 황제 폐하께서는 그 무엇보다 가장 빛나는 분이셨으니까요.”

    베네딕트는 그녀의 이야기를 모두 들어야 했다. 클라웨 8세가 그녀에게 어떻게 청혼을 하였는지, 그녀의 부모님과 대화하고 자리를 물리면서 그녀에게 슬쩍 눈길을 줄 때 그의 표정이 어떠하였는지, 결혼식 때 그녀의 베일을 올리고 처음 눈이 정확히 마주쳤을 때, 그녀가 다시 한번 사랑에 빠질 수밖에 없었던 이야기까지도.

    “지금은… 조금 후회가 들어요. 왜 그때 내가 언니 대신 차 시중을 들었을까, 하고.”

    물론 그 자리에서 결혼 예식을 주관했던 이가 황제의 정부였다는 잔인한 사실을 그녀에게 말해 주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갈수록 차분함을 넘어 어둠이 번지는 그녀의 표정을 보는 것만으로도 그녀가 얼마만큼 외로움에 지쳐 가고 있는지 알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녀에게 고통을 더해 줄 필요는 없었으니까.

    “베네딕트 님께서 차기 교황으로 확정되었다는 소식, 들었나요?”

    “예정되었던 일 아닌가요? 그분은 베아트리체 님의 아들이시잖아요. 황제 폐하가 절름발이 교황 성하의 환심을 사기 위해 바닥에 무릎을 꿇을 정도라던데. 푸흡.”

    “누가 들으면 큰일 날 소리를… 어마, 황후 폐하!!!”

    베네딕트는 장미를 가꾸던 다니엘라의 손에서 피가 나게 만든 시녀들을 용서하지 않았다. 황후가 보지 않는 곳에서 그들의 혀를 자르고 고통스레 죽였다.

    “손을 치료해 드리겠습니다, 황후 폐하.”

    “베네딕트. 그거 알아요?”

    “…….”

    “이 넓은 궁 안에서 날 유일하게 사람 취급해 주는 사람은 당신이라는 거.”

    다니엘라가 눈물이 고인 얼굴로 그를 보며 웃었다.

    “마법사님 같은 친구가 없었다면, 난 아마 외로움에 미쳐 죽었을 거야.”

    그것은 그녀의 잘못이 아니었다. 그 누가 황후 자리에 오르게 되었건, 불행한 결혼 생활은 예정된 미래였다. 다니엘라를 제외한 모두가 알고 있었던 미래. 클라웨 8세는 첫정을 나눈 교황 베아트리체에게 이미 지독하게 집착하고 있었던 까닭이었다.

    “…….”

    베네딕트는 곧은 자세로 앉아 허공을 응시하며 천천히 눈을 깜빡였다. 다니엘라는 태생이 악함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었다. 황제와 교황의 더러운 관계를 알고 나서도 그녀의 아들인 자신을 이전과 똑같이 대했다.

    그리고 그는, 선대 황제와 교황을 둘 다 갈기갈기 찢어 죽여 버리고 싶은 마음에 밤마다 괴로움을 참아야 했다. 그때의 부정적인 감정은 자신의 마력 상승에 강력한 계기가 되었을 것이다.

    가뭄에 콩 나듯이 황궁으로 돌아오던 황제는 의무적으로 다니엘라와 관계를 맺었고, 다니엘라는 마침내 그녀가 그토록 바라던 회임을 했다. 클라웨 8세는 다음 후계자를 무조건 그녀의 첫아이로 정하겠다는 말로 자신의 의무를 다했다. 아니, 다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 말이 황후를 더욱 상처 주었다는 것을 그는 알고나 있을까.

    아니… 알아도 신경이나 썼을까.

    “베네딕트. 내 아이는 꼭 황제가 되었으면 좋겠어요. 그게 아니라면 나는… 나란 존재는… 정말 너무 아무것도 아닌 게 되어 버리는 것 같아서…. 흑….”

    “아기님께서는 반드시 황제가 되실 겁니다, 폐하.”

    다른 남자를 사랑하기 때문에 괴로워하는 여자를 위로하는 게 그의 몫이었다. 자신의 시커먼 속내를 꺼내어 보이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를 친구라 철석같이 믿고 있는 황후를 배반함으로써 그녀를 더욱 괴롭게 만들 수가 없었다.

    그의 감정을 그녀의 배 속에 있는 태아에게 모조리 쏟아부었던 것은 스스로도 제어할 수 없었던 행위였다. 감히 다니엘라에게는 말하지 못했던, 그의 추악한 본능이었다.

    ‘저는 당신의 딸이 당신을 닮기를 바랐습니다.’

    에데르트

    베네딕트의 눈앞에서 다니엘라의 황금빛 글자가 지워지고 새로운 글자가 떠올랐다.

    자신이 붙여 주었던 이름이었다. 그녀를 따르는 이들이 무어라 부르든 상관없이 베네딕트의 마음속에 그녀는 영원히 에데르트였다. 가질 수 없는 존재를 향한 그의 애달픈 마음을 모조리 전했던 단 한 사람이기도 했다.

    회임과 출산을 홀로 겪었던 황후의 울증이 그녀를 낳은 이후 극에 달할 거라는 사실을 미리 알았더라면 그는 다른 선택을 했었을 것이다. 에데르트를 축복하는 대신 저주하고 그녀를 태어나지 못하게 만들었을 것이다.

    “하아….”

    베네딕트가 길게 숨을 들이쉬었다 내뱉었다. 황후의 죽음 이후, 클라웨 황가를 향한 그의 증오심은 한계치에 다다랐다.

    클라웨 8세는 나라의 이기적인 지도자의 전형적인 모습을 띠고 있었다. 원로원의 요구에 따라 두 번째 황후를 맞이하였으나 그가 마음에 품은 이는 오직 베아트리체 하나뿐이었다.

    교황을 황후로 들이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국법에 따라 황제는 귀족의 여식과, 마법사인 사비오족은 사비오족들끼리만 혼인하도록 정해져 있었기 때문이다. 나라의 근간을 뒤흔드는 일을 황제가 할 리가 만무했다. 그는, 자신에게 시달릴 대로 시달려 몸과 정신이 피폐해진 베아트리체와 강력한 황권 중 아무것도 포기하고 싶지 않아 했다.

    황녀인 에데르트를 별궁에서 보호하며 길렀던 것도 그 까닭이었다. 클라웨 8세는 궁정에서 벌어지는 정치적 암투를 눈치채고 일찍이 후계자 선정을 함으로써 새로운 황후를 중심으로 한 분란의 싹을 뿌리 뽑으려 했던 것이다.

    베네딕트는 예정대로 교황 취임식을 치렀고, 황녀와 대마법사의 보석을 나누어 가졌다. 클라웨 8세는 후계자까지 책봉한 이후 자신의 의무를 하나씩 이루어 간다고 생각하고 있었겠지만 실상은 모든 것이 눈에 보이지 않는 속도로 천천히 무너져 가고 있었다.

    베네딕트는 별궁에서 자신을 보며 매달리는 에데르트를 볼 때마다 기묘한 양가감정에 시달렸다. 자유로운 영혼이었으나 갇혀 살다시피 했던 황후와 똑같은 운명으로 살아가는 그녀의 딸.

    에데르트는 다니엘라의 딸이기도 했지만 그녀를 끝까지 괴롭게 만들었던 황제의 씨앗이기도 했다.

    태아 때부터 교황의 축복을 받아 제 아비와 어미의 완벽한 부분만 빼닮은 에데르트의 얼굴을 보면 그녀를 보호하고 싶은 동시에 죽여 버리고 싶었다. 티 없이 맑은 얼굴로 웃는 모습을 보면 목을 졸라 버리고 싶은데 서럽게 눈물을 뚝뚝 흘리며 우는 모습을 보면 품에 안아 들게 되었다.

    어린아이였던 에데르트의 얼굴에 완전히 성장한 그녀의 얼굴이 겹쳐졌다. 단 한 번도 에데르트에게서 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던 표정.

    “불쌍한 사람. 복수할 상대를 잘못 찾았어요. 난 그녀가 아니라고요.”

    베네딕트는 소리 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시선을 휙 돌리자 공중에 띄워져 있던 붉은 보석이 세게 날아가 벽에 부딪히더니 바닥에 떨어져 뒹굴었다.

    숨이 완전히 끊어졌던 에데르트를 살리기 위해 그녀의 몸에 마력을 넘치게 쏟아부은 것이 잘못이었을까. 그녀와 몸을 마주 대었던 순간부터 거칠게 반응하는 심장의 속도를 주체할 수가 없었다. 그녀를 얽어매기 위해 내던졌던 ‘각인’이라는 올가미가 그의 몸까지 조여 대고 있었다.

    “…만약 내가 당신을 사랑했더라면 나는 아마도 당신을 위해 죽었겠죠.”

    연보랏빛 눈동자로 그를 보며 속삭이던 그녀의 모습이 떠올랐다.

    좋지 않았다.

    의지와는 상관없이 아랫도리에 뻐근하게 열기가 쏠리며 중심이 단단해졌다. 입술을 지그시 깨물며 눈을 감은 베네딕트의 몸 주위로 푸른빛이 일렁였다.

    “내 곁에 있던 사람이 베네딕트 당신이었다면. 에데르트는 정에 굶주린 아이였으니까 자신에게 마음을 연 사람과는 무조건 사랑에 빠졌을 거예요.”

    당당하게 지껄이던 다니엘라의 딸은 제 어미와는 확연히 달랐다. 다니엘라가 만일 황후가 되지 않고 남부의 시골에서 자유롭게 살았다면, 평범한 여염집에서 태어났다면 그러한 성격이었을까. 그의 눈으로 직접 보지 않았으니 알 수 없는 가정에 불과했다.

    에데르트

    공중에 황금빛 글자가 나타났다가 금가루를 흩뿌리며 사라졌다.

    에데르트

    그 곁에 같은 이름이 또 한 번 쓰였다. 눈을 감은 베네딕트의 주변을 둘러싼 모든 공간이 온통 금빛으로 에데르트의 이름으로 둘러싸이며 환하게 빛을 냈다.

    베네딕트는 인상을 찌푸리며 정신을 집중했다. 이름이 사라지는 속도보다 다시 나타나는 속도가 더욱 빨랐다. 그 스스로도 주체할 수 없는 이미지들이 그의 머릿속을 잠식하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하아…! 아아…! 으응…!”

    생각나 버렸다. 뜨거운 호흡이 뒤엉키고 젖은 숨결을 나눈 후 짐승처럼 얽혀들었던 입맞춤. 그의 몸에 뜨겁게 매달린 채 숨을 몰아쉬며 진득하게 그를 조이던 그녀의 몸 안.

    그가 느끼는 것과 똑같은 크기의 쾌감을 느끼며 전율하던 에데르트의 달아오른 얼굴이 생각나는 순간, 그를 감싸고 있던 침잠한 푸른 기운에 온갖 색이 물들었다. 화려한 색의 잉크가 물에 번지듯 마력이 수많은 색으로 일렁였다. 조각상 같은 그의 얼굴이 서서히 일그러졌다.

    이건 매우 좋지 않았다. 다른 이유도 아닌 하찮은 욕정 따위에 마력이 혼탁해지는 것 따위는 이전에 염두에 두지도 않았던 일이었다.

    “평생 저 말고는 여자와 몸을 섞어 본 적도 없는 주제에….”

    교황이라고 다른 이와 성교하지 않아야 하는 것은 아니었다. 클라웨 8세 이전의 황제들은 오히려 마법사들 간의 성교와 회임을 장려하기까지 했다. 마력이 강한 이들을 결합시켜 더욱 강한 마법사를 배출하려 했기 때문이다. 베네딕트 역시 그로 인해 세상에 빛을 보게 된 결과였다.

    “예. 사실입니다.”

    그가 다른 이와 몸을 섞지 않았던 이유는 단순했다. 그에게서 성적인 욕구가 일찍이 거세되었기 때문이다. 그 누구도 아닌 그 스스로 자신을 그리 만들었다.

    황후에게 불순한 마음을 품고 싶지 않았던 몸부림이었다. 하지만 그가 스스로 없앴다고 생각했던 욕망은 에데르트와 몸을 섞자마자 거대한 불길이 되어 그를 집어삼켰다.

    “이렇게 좋아하시면서 그만하라고 거부하는 건, 저를 자극하기 위해서입니까? 아니면 강제로 박히는 기분이 들어 흥분되기 때문입니까.”

    에데르트의 귀에 음란한 말을 지껄이고 흉흉히 일어난 욕망을 숨기지 않으며 그녀의 몸을 뜨겁게 비집었다. 괴로울 정도로 느끼고 있으면서 자신을 밀어내려는 그녀의 손가락을 부러뜨리고 싶은 욕망과 핥고 싶은 욕망에 고민하다 결국 후자를 택했다.

    “하아….”

    베네딕트의 입술에서 차가운 한숨이 흘렀다. 꿈속을 비집고 들어가 잠든 그녀에게 입을 맞춘 것이 잘못이었을까, 아니면 절벽에서 떨어져 의식을 잃은 그녀에게 과거의 기억을 보이며 혼란스럽게 만들려 했던 것이 잘못이었을까.

    확실한 것은 몸속에서 치밀어 오르는 원초적인 본능 때문에 그의 마력에 구멍이 생긴 것은 처음 있는 일이라는 것이었다. 베네딕트는 입 안의 살을 더욱 꽉 깨문 채 정신을 집중했다. 크리스티앙의 결혼 예식 때문에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지냈던 지난 열흘간 불처럼 치밀어 오르는 욕정을 다스리려 온몸을 스스로 채찍질했던 것은 허사였다.

    검게 일렁이는 붉은 보석을 보자마자 또다시 머릿속을 지배하는 대상 때문에 정신을 집중할 수가 없었다. 이래서는 그의 계획에 차질이 생길 게 분명했다. 차라리 크리스티앙이 그를 불러내어 매달 치르는 행사처럼 자신을 칼로 난도질해 주는 편이 더 나을 것 같았다.

    스스슥.

    그가 숨을 몰아쉬자 아무것도 없는 마룻바닥에서 장미 넝쿨이 자라나기 시작했다. 보통의 장미 가시보다 배는 크고 날카로운 가시들이 그의 몸을 서서히 휘감았다. 키를 높여 자란 줄기가 그의 은발을 비집고 조각상같이 무표정한 그의 얼굴까지 칭칭 감았다.

    “베네딕트! 황녀는 베네딕트를 사랑해요…!”

    천진하게 내뱉던 에데르트의 얼굴이 머릿속에 떠오른 순간 베네딕트가 인상을 찌푸리며 숨을 몰아쉬었다. 장미 가시가 뾰족한 칼날로 변하며 그의 몸 전부를 사정없이 찔렀다. 그의 하얀 얼굴과 몸 전체에서 붉은 피가 주르륵 한꺼번에 흘러내렸다.

    가시덩굴이 그의 몸을 점점 더 강하게 조이자 칼날이 그의 몸에 더욱 깊게 파고들었다. 베네딕트는 저절로 발현하려는 치유 마력을 최대치로 억눌렀다.

    그가 걸치고 있는 의복이 서서히 피투성이로 변해 갔다. 얼굴과 머리카락도 마찬가지였다. 바닥으로 떨어진 피가 흥건하게 뭉쳐 얼룩을 만들었다. 그의 머릿속에 에데르트의 목소리가 다시 한번 울려 퍼졌다.

    “당신은 내 감정과 선택, 그 어느 하나도 지배할 수 없었을 거라고요!”

    베네딕트가 눈을 번쩍 떴다. 그의 눈썹이 일그러지며 미간에 모였다. 그를 칭칭 감싸고 있던 가시넝쿨이 휘리릭 풀리더니 한꺼번에 날아가 천장에 붙었다.

    피투성이가 되었던 그의 얼굴에서 핏자국이 소리 없이 사라지고 칼에 찢겼던 피부는 언제 그러했냐는 듯 매끈하게 바뀌었다. 베네딕트의 연한 하늘색 동공이 시퍼렇게 변해 커다랗게 일렁였다.

    아니.

    폐하는 틀렸습니다.

    그가 고개를 돌리자 바닥에 떨어져 있던 붉은 보석이 휙, 날아와 그의 눈앞에 자리했다. 베네딕트가 한 발짝 다가서자 보석을 둘러싼 붉은 빛이 마치 그를 피하려는 듯 아슬아슬하게 일렁인다.

    “에데르트.”

    베네딕트의 입술이 천천히 움직여 그녀의 이름을 소리 내어 불렀다. 가늘게 일렁이는 파장 끝에 에데르트의 불안이 희미하게 잡혔다. 그의 하늘색 눈동자에 붉은빛이 반짝였다.

    그녀는 완전히 틀렸다. 그는 에데르트를 완전하게 지배할 수 있는 사람이어야 했다. 그녀의 몸과 정신을 모두 그의 것으로 만들고 싶다는 욕구에 가슴이 뜨거워졌다.

    그의 계획은 에데르트가 갖은 고초를 겪으며 황금성에 오게 한 후, 약해빠진 크리스티앙을 황좌에서 직접 끌어내리고 황제 자리에 오르게 만드는 것이었다. 에데르트에게 근원적인 열등감을 가지고 있는 크리스티앙을 파멸시키는 데 가장 어울리는 방법이었다.

    결국 동생을 죽이고 황좌에 오를 에데르트가 느껴야 할 감정은 진하게 밀려드는 허무함 그리고 그 자리에 오르기까지 수없이 많이 희생된 이들의 피를 떠올리며 느껴야 할 괴로움일 것이다. 그것이 베네딕트가 원하는 그녀의 첫 번째 고통이었다.

    두 번째 고통은 더욱 직접적이어야 했다. 황제가 된 그녀가 각인한 상대인 그를 거부할 수 있을 리 만무했다. 이제까지 그녀가 믿고 있던 사랑, 우정, 신의 따위의 감정은 한낱 착각이며 존재하지 않는 신기루에 불과하단 것을 깨닫게 할 것이다.

    에데르트가 사랑한다 착각하는 이는 그녀의 사랑을 독차지할 수 없어 괴로워할 것이다. 교황과 벌거벗고 얽혀 있는 그녀를 감내해야 할 것이다. 황제에게 버려져 외로워하던 어미의 고통을 그녀가 가장 사랑하는 상대를 통해 느끼게 해 줄 것이다.

    아무것도 알지 못하면서 감히 저를 도발하신 벌입니다. 폐하. 제 고통은 그 뿌리가 깊어 그리 함부로 동정할 수 있는 종류의 감정이 아닙니다. 폐하께서도 그 모든 고통을 겪으신다면 저를 조금이나마 이해하시겠지요.

    베네딕트는 붉은 보석에 조심스레 입을 맞추었다. 그의 눈동자가 차분한 빛을 되찾았다. 계획을 조금, 앞당겨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더 필요한 건 없으십니까, 폐하.”

    “아니. 괜찮네.”

    예복을 벗지도 않은 채 집무실로 돌아온 크리스티앙이 의자에 몸을 기댄 채 낮게 내뱉었다. 열흘에 걸친 결혼식이 드디어 끝이 난 날이었다. 교황의 주최 없이 이루어진 그의 결혼 예식은 제국에 흩어진 고위 귀족들이 모조리 참석했다. 흥겨운 파티라기보다 기나긴 회의를 연상시키는 시간이었다.

    “시녀에게 폐하의 침실을 준비시키라 명하겠습니다.”

    결혼식은 혹시나 있을지 모를 반란의 동태를 살피는 핑계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에리히 역시 잘 알고 있었다. 크리스티앙은 수백 명에 달하는 지방 영주와 고위 귀족들의 알현을 거부하지 않고 모조리 받았다. 밤에는 잠을 이룰 수 없는 그가 쓰러지지 않은 것이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황후의 침실로 가야 하지 않겠나. 오늘 같은 날은.”

    크리스티앙이 장밋빛 포도주가 담긴 화려한 술잔으로 입술을 축였다.

    황금빛 속눈썹이 아래로 내리깔렸다가 피곤을 담고 천천히 들렸다. 에리히가 고개를 살짝 숙이며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황후께서는 폐하의 피로함을 짐작하고 계실 것입니다.”

    에리히는 더 이상 그의 누이를 하대하지 않았다. 이제는 자신보다 높은 신분이 된 황후의 격을 높이는 그를 보며 크리스티앙이 조금 웃었다.

    “현명하고 아름다운 여인이 내 신부가 되어 기쁠 따름이야. 경에게 감사하네.”

    “당치 않습니다. 하이데거 가문에게 주어진 극상의 영광입니다.”

    에리히가 짧게 소감을 토로했다. 그의 막내 누이인 미리엄은 말수가 적으나 조숙하고 영리한 이였다. 어리지만 자신의 본분이 무엇인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입궁할 날을 기다리며 크리스티앙을 내조하기 위한 교육을 매일같이 게을리하지 않았다.

    “에리히.”

    “예, 폐하.”

    “내가 경을 처음 보았던 날.”

    에리히의 고개가 천천히 들렸다. 단정한 눈썹이 조금 흔들렸다.

    “그때 내가 했던 말을 기억하는가?”

    크리스티앙이 그에게 자신이 마시던 술잔을 건넸다. 에리히는 잠시 망설이다 그에게 술잔을 받아 들었다. 단번에 비워 낸 후, 낮게 답했다.

    “기억하고 있습니다.”

    “뭐라고 했었지?”

    “폐하께서는 제 눈앞에 지금 뭐가 보이느냐고 하문하셨습니다.”

    크리스티앙이 그를 보며 붉은 입술로 옅은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자네가 뭐라고 답했던가.”

    “황제가 서 계신다고 고하였습니다.”

    “아니지. 에리히.”

    크리스티앙이 그를 보며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정확히는 ‘힘을 원하는 황제가 서 계십니다.’라고 답하였네. 나는 그때 날 보며 말하던 경의 표정을 지금도 잊을 수가 없어.”

    “…천지 분간을 하지 못하여 제가 폐하께 무례를 범하였지요.”

    “에리히. 경은 나를 황제라 칭한 첫 번째 사람이야.”

    “폐하께서는 황제의 권한 대행을 이행하셨던 열 살 때부터 이 제국의 황제이셨습니다.”

    “그래. 하지만 진심으로 그리 생각한 이는 아무도 없었지.”

    에리히는 옅게 조소하는 크리스티앙의 빈 잔에 포도주를 채웠다. 크리스티앙이 서슴없이 그가 썼던 잔을 입술에 가져갔다. 에리히는 그를 처음 가까이서 대면하였던 밤을 회상하며 조금 감상에 빠지는 자신을 느꼈다.

    “나는 그때 열셋이었고, 믿을 수 있는 내 편이 필요한 상태였어. 열 살 때 선대 황제가 승하한 이후, 내 주변에 승냥이 같은 것들이 득실댔으니 내가 꼭두각시 황태자로 살아야 했던 건 당연한 결과였지.”

    지금으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그의 과거를 말하는 크리스티앙의 목소리는 차분했다.

    “힘을 원하는 황제가 서 계십니다.”

    크리스티앙이 에리히를 뚫어져라 바라보며 붉은 입술을 천천히 열었다.

    “내가 태후에게 독이 든 차를 건넸던 그날, 소리를 지르며 쓰러진 태후를 발견한 경이 나를 보며 한 말이었네.”

    “폐하.”

    에리히가 주변을 둘러보며 얼굴을 굳혔다. 크리스티앙의 개인적인 집무실에 아무도 들어오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지만 당황할 수밖에 없는 이야기였다. 크리스티앙은 아무 상관도 없다는 듯 그를 직시하며 말을 잇고 있었다.

    “경은 나에게 면죄부를 주었어. 내 어미를 내 손으로 죽일 수밖에 없었던 내 선택을 권력의 이름으로 정당하게 만들었지.”

    “권력이 여러 갈래로 새어 나가는 제국은 결국 무너질 수밖에 없습니다. 황제 폐하께서는 영민하시어 어린 나이에 그 사실을 인지하셨을 뿐입니다.”

    에리히가 그를 누구보다 강한 주군으로 생각하는 것 역시 그러한 이유에서였다.

    “경은 그 뒤에 내가 했던 말도 기억하는가?”

    “예.”

    에리히가 짧게 답했다. 그를 보며 술잔을 기울이는 크리스티앙을 향해, 어린 황태자가 그에게 요구했던 것을 그대로 읊었다.

    “폐하의 편에 선다면 결코 후회하지 않을 거라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자네는 그리하였지. 나를 못마땅히 여겨 무능하다 호도하는 원로원의 목을 베고, 내게 무릎 꿇지 않는 건방진 귀족들을 반역으로 잡아 가두었을 때도 그대는 묵묵히 나를 지지했네. 태후의 사망 이후에도 날 성가시게 했던 늙은 여우 카플란을 구슬림과 동시에 뒤에서 감시하며 그들이 내 뒤통수를 칠 싹을 잘랐지.”

    암살단 카플란에게 어린 에데르트를 죽이고 별궁에 불을 지르라 지시한 것은 태후였다. 태후는 죽을 때까지 자신이 아들을 위해 대단히 큰일을 했다고 착각했지만 그것은 말 그대로 어리석은 착각에 불과했다.

    “내가… 내가 널 위해서 어떻게까지 했는데…! 감히 크리스티앙, 네가… 나를…!”

    “부덕한 국모의 입에서 나올 말이 아닙니다.”

    태후의 사망은 그를 한층 더 성장하게 만들었다. 크리스티앙은 자신을 대면할 때마다 무언가를 숨기고 있는 듯한 카플란의 눈빛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에리히를 통해 수년에 걸쳐 그를 감시했고 마침내 카플란이 황녀 암살에 실패하였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그리고 완전 범죄를 꿈꾸기 위해 오랜 기간 동안 세르노티를 찾아 헤맸다는 것도. 태후의 장례 의식에서 카플란의 얼굴에 스쳤던 안도감은 바로 그 때문이었다.

    죽은 줄로만 알았던 황녀가 멀쩡히 살아 있다는 사실은 비극을 넘어 분노로 다가왔지만 크리스티앙은 그것을 카플란의 숨통을 틀어쥘 구실로 삼았다.

    “모든 건 나 혼자서는 불가능한 일이었을 거야.”

    크리스티앙이 팔걸이에 팔꿈치를 댄 채 비스듬히 얼굴을 괴고 웃었다.

    “그것뿐인가. 의심 많은 본 황제가 경을 믿지 못하여 5년간 전쟁터로 보냈을 때도, 경은 죽음과 정면에서 맞서 싸우며 모든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네. 그리고 돌아와 내게 말했었지.”

    “이 세상이 폐하의 발밑입니다.”

    에리히가 그를 보며 진지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저는 다시 태어난다 해도 그리할 것입니다. 감히 말씀드리옵건대, 폐하께서는 클라웨 역사상 가장 강하고 현명한 황제이십니다.”

    “경처럼 충직한 신하를 마침내 가족으로 맞이하게 되다니… 기분이 묘해.”

    “…….”

    말없는 에리히의 앞에서 크리스티앙이 마치 혼잣말하듯 중얼거렸다.

    “오늘따라 벅찬 이 기분을 말로 다 할 수가 없군.”

    조용히 그를 바라보던 에리히가 마침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혹여 제게 특별히 하명하고픈 일이 있으십니까, 폐하.”

    좀처럼 내밀한 속을 보이지 않는 크리스티앙이었다. 에리히가 그의 의중을 짚자 크리스티앙이 낮게 웃으며 머리를 괴었던 팔을 내렸다.

    “…이런.”

    그의 황금색 눈동자가 조금 가늘게 길어졌다.

    “내가 꼭 경에게 부탁이라고 하고 싶어 오래된 옛이야기까지 꺼낸 모양새가 되지 않나.”

    “천만의 말씀입니다, 폐하. 폐하께서는 제게 부탁하실 필요가 없습니다. 그저 명하십시오.”

    크리스티앙이 잠시 그를 응시하다 창으로 고개를 돌렸다. 숱 많고 기다란 옅은 색의 속눈썹이 느리게 몇 번 움직였다. 에리히는 달빛에 비친 황제의 옆모습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리고 황제가 쉽사리 입 밖으로 꺼내지 않는 사항이 무엇일지를 생각해 보았다.

    황후에 관련된 이야기일까. 그의 누이동생인 미리엄은 현명한 아이였다. 자신의 본분을 다하며 크리스티앙을 거슬리게 만들지 않을 게 분명하다. 감히 욕심을 부린다면 그는 자신의 누이동생이라 한들 목을 벨 준비가 되어 있었다.

    “내가 그간 마법사들을 이용해 실험을 했던 이유를 경은 잘 알고 있겠지.”

    “예, 폐하.”

    크리스티앙에게서 나온 이야기는 에리히의 예상과는 다른 주제였다. 그는 조금 긴장하며 허리를 꼿꼿이 세웠다.

    “사비오족을 가두어 황실의 지배하에 둔 것도. 하지만 그들을 직접 전쟁터로 보내 이용하지 않는 이유도 경이라면 알고 있을 것이네.”

    크리스티앙은 타고난 책략가였다. 그는 지는 전쟁을 원하지 않았다. 싸우는 이유는 이기기 위해서였다. 그가 만약 전쟁을 운에 맡긴다면 그 역시 생각하는 바가 있어서였다. 현재 동쪽에서 고군분투하고 있는 리비에르에게 군사를 지원하지 않는 것도 그러한 이유에서였다.

    “마법사들에게 권력을 주는 것은 무의미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맞아.”

    크리스티앙이 물담배를 깊게 빨아들였다. 그가 염려하는 것은 마법사들의 반란이었다. 소수이지만 그들이 가진 힘은 강력했다. 마법사들을 가두어 황금성 외부로 나갈 수 없게 만든 것도, 그들이 힘을 모아 황권에 도전하는 것을 염두에 둔 행동이었다.

    그들을 전쟁터로 내돌리지 않는 이유 역시 그러했다. 크리스티앙은 마법사들이 적군과 손을 잡아 반대로 클라웨를 공격하기라도 할까 두려워했던 것이다.

    “본 황제는 아무도 믿을 수가 없네. 그래서도 안 되고 그럴 수도 없는 자리에 있지.”

    “신중한 것은 결코 지도자의 흠결이 되지 못합니다, 폐하.”

    축축한 풀 향이 섞인 연기가 공간에 맴돌았다.

    “나는 그간 수많은 마법사들을 희생시키며 그 마력을 흡수하는 방법을 알아내었네. 그 과정에서 평범한 인간들도 많이 죽어 나갔지. 황금성의 뒷문으로 나가는 수레들의 천을 걷으면 모두 시체일 거라는 말이 괜한 소리나 괴담 같은 것이 아님을 자네도 잘 알고 있을 거야.”

    “폐하께서는….”

    크리스티앙이 빈 잔에 술을 채워 다시 내밀었다. 에리히가 양손으로 잔을 받으며 말을 이었다.

    “대업을 위해 죽어 간 노예들의 삶을 가치 있게 만드신 것뿐입니다.”

    “그대가 지금 내게 하는 말이 단순히 입에 발린 소리가 아님을 알고 있어. 그 때문에 짐은 그대를 선택하기로 하였네.”

    에리히는 잠시 움직임을 멈추었다. 그제야 황제가 자신에게 하고 싶은 말이 무언지 어렴풋이 깨달은 까닭이었다.

    크리스티앙은 찰나의 망설임을 거둔 에리히가 술잔을 천천히 비워 내는 모습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마침내 빈 잔을 내려놓은 후, 그가 바닥에 한쪽 무릎을 꿇었다.

    “하명하십시오, 폐하.”

    “내가, 경에게….”

    크리스티앙이 그를 내려다보며 길고 커다란 눈을 천천히 깜빡였다.

    “부탁을 해도 되겠어?”

    젊은 황제는 마법사들의 마력을 통솔하기를 꿈꾸었다. 이전의 황제들이 못했던 것을 그는 해내고 싶었던 것이다.

    대마법사인 교황은 표면적으로는 황실을 위해 존재했지만, 그 힘에 의지할 수밖에 없는 것이 황제의 민낯이었다. 크리스티앙이 불면의 시간 동안 탐독한 수많은 역사서를 보고 내린 결론은 하나였다.

    마법사들의 마력을 통솔할 수 있는 방법은 없었다. 인간은 약한 존재였고 그들의 마력은 상상 이상이었다. 대마법사의 능력은 말할 필요가 없는 것이었다.

    “나는 첫 번째 태후의 자궁을 찢고 태어나지 못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후계자 자리에 오를 기회조차 없었어.”

    “…폐하.”

    “교황은 내가 얼굴도 보지 못한 나의 누이와 각인해 대마법사의 보석을 나누었지. 그조차도 내가 선택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네.”

    에리히는 그를 향해 눈을 깜빡이지도 않고 중얼거리는 크리스티앙을 보며 세운 무릎을 꽉 쥐었다.

    “예식을 위해 동쪽에서 온 남작 하나가 이틀 전 의미심장하게 눈을 빛내며 내게 고하더군. 세르노티가 자일룬 출정에 합류한 모양이라고. 그 말이 무얼 뜻하는지는 경도 알 걸세.”

    “…폐하.”

    “나의 누이는 내 자리로 점점 가까이 다가오고 있어. 그 배후에는 저기 북쪽 성에서 독사 같은 혀를 감춘 교황이 있겠지. 그는 그녀를 기다리고 있을 거야. 그래서 그녀가 날 파멸시키는 모습을 보고 싶은 거겠지. 하지만 난 그의 수작에 놀아나고 싶은 계획이 전혀 없거든.”

    속도가 빨라진 그의 말투에 열기가 일렁였다. 크리스티앙이 목소리를 낮춘 채 일그러진 얼굴로 중얼거렸다.

    “나는 나만을 위한 제국을 만들 것이다, 대공. 그를 위해 내가 가장 신뢰하는 이를 교황 자리에 올릴 거야. 그러기 위해서는 눈엣가시인 대마법사를 찢어 죽일 수 있는, 강력한 마력을 가진 자가 필요하지. 난 그 자리에 자네를 선택하였네.”

    “…무한한 영광입니다. 폐하.”

    마침내 입을 연 에리히의 푸른 동공에 물기가 번졌다. 그는 이제 크리스티앙이 원하는 것을 완벽하게 알았다. 마법사들을 죽기 직전, 극한의 공포로 밀어 넣고 그 상황에서 발생하는 마력을 추출해 평범한 인간에게 주입하는 실험은 그 끝을 바라보고 있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