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2화 (32/72)
  • “위… 위험하잖아!”

    우리 밖에 있던 기사들 중 누군가가 소리를 지름과 동시에 말라쿤이 발터에게 달려들었다.

    “으아아아…. 흑…!”

    빠득, 소리와 동시에 말라쿤의 목이 반대로 꺾였다. 발터는 축 늘어지는 몸의 양팔을 붙잡고 바닥을 질질 끌었다. 그리고 마치 원반을 던지듯 바깥으로 날렸다.

    “으아아아아!!!”

    모여 있던 리비에르의 기사들이 서둘러 옆으로 물러섰다.

    쿵!

    리비에르의 발밑에 말라쿤의 몸이 떨어졌다. 목뼈가 완전히 돌아가 즉사한 상태였다.

    휙!

    다시금 날아온 무언가가 그의 이마를 정확히 관통했다. 발터가 뽑아서 던진 울타리의 나무 조각이었다.

    “무… 무슨 짓이야!”

    고작 나무로 사람 머리뼈를 뚫었다. 힘과 기술, 둘 중에 어느 것 하나라도 받쳐 주지 않는다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멍해 있던 기사들 중 누군가가 소리를 질렀다.

    “위험하잖아!”

    “목 잘라 던질 때 편하시라고 손잡이를 만들어 드렸습니다만, 마음에 안 드십니까?”

    솨아.

    빗줄기가 굵어졌다. 발터는 거친 숨을 내뱉었다. 흥분을 가라앉히려 애쓰는 발터를 보며 리비에르가 잠시 눈을 깜빡이다 마침내 활짝 웃었다.

    “아뇨. 마음에 들어요. 자. 다들 이 정도면 확인은 충분한 것 같지?”

    리비에르가 빠른 걸음으로 다가와 울타리 문을 열었다.

    “환영합니다. 오늘 밤엔 파티를 열어야겠어요.”

    그들을 묘하게 깔아 보던 조금 전과는 달리 완전히 환대하는 분위기였다.

    “우리는 강한 아군을 얻었네요.”

    주르륵 나오는 기사들 사이에서 앞장선 발터를 향해 리비에르가 손을 내밀었지만 그는 눈도 마주치지 않고 스쳐 지나갔다.

    “가자.”

    혜미의 어깨에 손을 대고 비를 피한 채 앞으로 나설 뿐이었다. 혜미와 리비에르의 눈빛이 마주친 것은 찰나였다. 혜미는 그녀의 손끝을 살짝 잡고 고개를 까딱였다.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리비에르의 녹색 눈이 묘한 빛을 띠다가 이내 아래로 휘었다.

    “잘 왔어요.”

    “오늘 밤엔 파티다!!!”

    리비에르의 기사들이 크게 소리를 지르며 막사로 달려나갔다.

    “조. 세르노티의 기사들에게 막사를 안내해 드려.”

    “예, 지휘관님.”

    조세핀이 쭈뼛거리며 그들에게 다가왔다.

    “…따라와요.”

    “어이 조세핀! 아까 내뱉은 말은 지켜야지? 오늘 밤이 아주 후끈후끈하겠는데, 응?”

    기사 몇몇이 그녀의 머리를 툭, 치며 지나가자 조세핀이 날카롭게 목소리를 높였다.

    “씨팔 새끼가 죽고 싶어!”

    휙, 손을 거칠게 뿌리쳐 보았지만 그녀를 놀리는 동료들의 킬킬거림이 더욱 커질 뿐이었다.

    “야, 토비아스. 너도 한마디 해라.”

    얀이 칼을 챙겨 들고 걷는 토비아스를 어깨로 툭, 강하게 떠밀며 아직도 분이 안 풀린다는 얼굴로 중얼거렸다.

    “어? 나… 나는 할 말 없는데….”

    엉겁결에 앞으로 떠밀려 나간 토비아스를 보며 조세핀이 얼굴을 찌푸렸다. 가늘어진 눈매 안에 까만 눈동자가 아래를 향했다. 그녀가 목을 가다듬으며 애써 입을 뗐다.

    “내 막사는 오른쪽 맨 끝에서 두 번째. 기둥 위에 붉은 리본을 묶어 놓을 테니까 오늘 밤 환영 파티가 끝나면 거기서 보는 걸로….”

    “저기 미안하지만.”

    토비아스가 그녀의 말을 중간에 끊었다. 그녀를 놀리고 지나가려던 동료들 그리고 세르노티 기사들의 귀가 쫑긋거리며 집중되었다.

    “안심하세요. 안 갈 거니까.”

    “뭐요?”

    “그렇게 불안해할 것 없다고요.”

    토비아스가 손에 빗물을 묻혀 주근깨가 깔린 콧등을 훔쳤다. 피가 튄 얼굴을 씻으며 조세핀을 향해 마른 어깨를 으쓱했다.

    “당신이 날 끔찍해하는 건 알아요. 하지만 당신 역시… 내가 밤을 함께 보내고 싶은 타입은 아니거든요.”

    그의 말투는 차분했다. 그녀의 뒷말을 기다리지 않고 얼굴을 돌리는 동작에는 군더더기가 없었다. 조세핀의 새하얀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오르는 것은 모든 사람들의 눈에 똑똑하게 보였다.

    ***

    “와하하하!”

    문이 열린 고성 안은 북적거렸다. 자일룬의 사람들은 그들을 지켜 주려 출정한 리비에르의 군대에게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리비에르의 군사들이 아니었으면 매일같이 약탈을 일삼는 말라쿤족 때문에 마을에 남아 있을 사람은 아무도 없었을 것이다. 모두들 평생을 살아온 지역을 떠나야 한다는 소리였다.

    “먹어. 먹어.”

    “여기 맥주랑 와인 좀 더 가져다줘!”

    “네네, 갑니다!”

    세르노티의 기사들은 정신없이 먹고 또 먹었다. 육즙이 풍부한 고기와 신선한 야채, 달콤한 과일을 연신 배 속에 집어넣고 술로 포만감을 달랬다.

    “암살단은 우리 아버지 때의 이야기인 줄 알았는데 기사단이 되어 돌아오다니.”

    “어이, 예쁜 기사님. 세르노티가 카플란을 완전히 깔아뭉갰다는 것도 사실이야? 잔인하기로 악명 높은 그 헬무트가 완전히 개작살이 났다며!”

    “사실인데요. 못생긴 기사님.”

    “와하하! 친해진 김에 이야기 좀 해 보자. 세르노티에 세드릭 슈네가 있다는 말도 진짜야? 나 어렸을 때 완전 우상이었다고. 카플란과의 전쟁 때 부상당했다는 소릴 들었는데. 그래서 이번에 같이 출정하지 않은 건가?”

    “질문이 너무 많으니 하나하나 대답해도 될까요?”

    “응? 으응. 그렇게 해.”

    뾰족한 아일라의 말에 술이 오른 기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첫째. 저는 당신과 친하지 않고요. 둘째. 부상을 당했어도 세드릭 님의 실력은 변하지 않아요. 부상당한 상태에서 헬무트를 처리한 것도 바로 세드릭 님이십니다.”

    “오오, 역시!”

    “그리고 세드릭 님이 출정하지 않은 이유는….”

    아일라가 남아 있는 맥주를 원샷한 후, 입을 손등으로 닦았다.

    “그분의 뜻이 있기 때문이겠죠.”

    “오오. 우리 까칠한 기사님이 세드릭 슈네의 수제자라도 되는 건가?”

    “그것보다 더 깊은 관계인데요.”

    “뭐, 뭐? 설마….”

    “세드릭 님은 제 아버지십니다.”

    떨떠름한 표정으로 아일라를 바라보던 기사 하나가 크게 목소리를 높여 웃었다.

    “와하하! 술 많이 마시더니. 어린 기사님이 완전 취했구만.”

    테이블마다 각종 이야기가 꽃피었다.

    “아까 정말 대단했어. 토비아스라고 했지? 마셔, 마셔.”

    “아… 제가 술을 잘 못해서.”

    “어이 조! 이리 와서 술 좀 따라 봐라.”

    “뒈지고 싶냐?”

    몸을 씻고 뒤늦게 합류한 조세핀이 턱, 하고 벤치에 앉자 토비아스가 조용히 자리를 조금 비켰다.

    “아까 일은 잊어요. 리비에르 님께서 이미 말씀하셨지만 이곳에 오는 사람들에 대한 기억이 좀 안 좋아서 처음부터 강하게 나간 것뿐이니까.”

    조세핀이 술병을 들어 그의 잔을 채우려 하자 토비아스가 낮은 목소리로 대꾸했다.

    “알겠습니다. 그런데 술은 내가 따라 마실 수 있어요.”

    조세핀이 민망한 표정을 애써 감추며 말없이 손을 거두었고 기사들은 킥킥대며 웃었다.

    “그런데 다들, 말라쿤족에 대해서 잘 알고 온 거 맞아요?”

    “클라웨에서 그들을 모르는 사람도 있나요?”

    레나가 새침하게 입을 떼자 리비에르 측 기사 한 명이 엄지를 치켜들었다.

    “와. 알고도 찾아왔다니. 그럼 정말 우리처럼 황제 폐하에 대한 충성심이 넘친다는 말씀이네. 웬만한 사람들은 여기 올 생각도 안 하거든. 우리 집사람도 나 출정한다는 소리 듣고 과부를 만들 셈이냐며 어찌나 화를 내던지.”

    충성심. 혜미는 아직 황제가 아니었지만 엄밀히 따지자면 틀린 이야기는 아니었다. 세르노티의 기사들은 그녀를 위해 기꺼이 위험한 출정길에 올랐으니까. 레나가 웃으며 테이블에 있는 칠면조 다리를 북 찢어 혜미에게 내밀었다.

    “안 죽고 돌아가면 되는 거죠. 황제 폐하 역시도 아랫사람들의 죽음을 달가워하시진 않을 테니까요.”

    “…고마워, 레나.”

    혜미는 생긋 웃는 레나에게서 고기를 받아 들고 질겅거리며 씹었다. 입은 음식을 먹고 있었지만 긴장되는 마음을 다스릴 수가 없었다. 그녀의 눈은 돌아다니며 기사들과 수없이 잔을 부딪치는 리비에르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신탁을 받고 출정해 노예에서 귀족이 되었다는 리비에르. 뛰어난 검술뿐만 아니라 아름답고 현명해서 가는 자리마다 따르는 이들의 줄이 끊이지 않는다는 그녀를 제 편으로 만들어야 한다. 하지만 어떻게 다가가야 하지…?

    “자자. 흥도 웬만큼 올랐으니 이제 게임이나 할까?”

    술을 마시던 리비에르가 크게 소리를 지르자 기사들이 박수를 치며 환호했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럼 역시 게임의 종류는 제군들이 가장 원하는 걸로 가야겠군.”

    날카로운 휘파람 소리가 이리저리 들리는 공간에서 리비에르가 테이블 위에 의자를 휙 올렸다. 몸을 날려 의자 위에 앉은 후, 다리를 꼬고 누군가가 건네주는 물담배를 깊숙하게 빨았다. 상체를 깊숙이 숙여 가슴골을 보며 주며 초록빛 눈을 가늘게 떴다.

    “리비에르가 말하기를….”

    그녀의 기사들이 모두 양 손바닥으로 테이블을 마치 북 치듯 두드리며 자체 음향 효과를 만들었다. 혜미는 생경한 분위기에 고개를 거북이처럼 천천히 뺀 후, 주변을 둘러보았다.

    뭔가 생각했던 거랑 좀… 다르다는 느낌인데.

    “좌측 맨 끝에서부터 반시계방향으로 68번과 69번. 지금 이 자리에서 바로 뜨겁게 입을 맞춘다.”

    “오오!”

    리비에르가 동요하는 기사들을 향해 한쪽 눈을 야하게 깜빡이며 낮게 덧붙였다.

    “키스하다 몸이 동할 시, 모두의 앞에서 바지 벗고 본 게임으로 들어가는 것도 물론 대환영.”

    “와아아아아!!!”

    …뭐지? 혜미가 미간을 중앙에 모았다. 의도가 다분히 불순한 술 마시기 게임을 하며 질펀하게 노는 리비에르는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그것은 비단 혜미뿐만 아니라 다른 이들도 마찬가지였다.

    “리비에르 장군이 지금… 뭔 헛소리를 하는 거야…? 딸꾹.”

    술을 어지간히 마셔서 콧잔등이 붉어진 얀이 눈을 껌뻑였다. 적응되지 않는 분위기에 얼떨떨한 세르노티 기사들을 뒤로하고, 리비에르 측 기사 하나가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커다랗게 소리를 내며 테이블에 앉은 순서대로 숫자를 세기 시작했다.

    “66, 67… 68번 조세핀 당첨!”

    다리를 꼰 채 청포도를 하나씩 터뜨려 입 안에서 우악스레 씹다 말고 조세핀이 쫙 찢어진 눈을 사납게 부라렸다.

    “뭐라고?”

    리비에르가 싱글거리며 그녀의 곁에 앉은 이를 향해 목소리를 높였다.

    “그리고 69번은…? 어머나, 이런 우연 중에 대 우연이! 오늘 파티의 주인공이군? 토비아스 가일란!”

    술에 취한 기사들 몇몇이 휘파람을 세게 불었다. 누군가가 벤치 위에 올라간 후 윗옷을 벗어 공중에서 원을 그리며 돌려댔다. 순식간에 공간에 후끈후끈한 열기가 들어찼다.

    “지휘관님! 이거 의도하신 거 아닙니까?”

    “맘에 안 들면 조세핀 네가 내 대신 지휘관을 하렴.”

    “와하하! 역시 우리 리비에르 님은 농담도 잘하셔!”

    시끄러운 만담을 보는 것 같아 정신이 혼미했다. 혜미의 눈에 보이는 건 젊은 기사들인데 분위기는 마치 중년들로 꽉 찬 선술집에 온 느낌이었다. 맥주 냄새가 코끝까지 올라왔다. 누군가 뿔피리를 불며 환호하고 다른 누군가는 테이블을 부서져라 두드려 대고, 시장 북새통처럼 공간이 시끌벅적했다.

    “키스해!”

    짝!

    “키스해!”

    짝!

    “하기 싫으면 눈앞에 있는 맥주를 통째로 원샷하면 됩니다.”

    테이블 위에 맥주가 꽉 채워진 나무통이 육중한 자태를 자랑하고 있었다. 그냥 봐도 엄청난 크기였다.

    “야. 그냥 입술 붙이고 대충 하는 척만 하면 되니까….”

    조세핀이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토비아스에게 작게 속삭인 순간이었다.

    “걱정 말아요.”

    중얼거리며 벤치에서 일어난 토비아스가 테이블 위에 있는 무거운 맥주 통을 손쉽게 안아 들었다.

    콸콸.

    마치 폭포수를 받아 마시듯 토비아스가 공중에서 쏟아지는 맥주를 통째로 들이켰다. 그 광경을 지켜보는 조세핀이 인상을 팍 썼다. 저치가 지금 제정신인가?

    “와! 조랑 키스하는 것보다 저거 다 마시고 그냥 쓰러지는 게 낫다, 이건가?”

    “역시! 사나이는 말보다 행동으로 보여 준다!”

    “와하하!”

    그녀의 얼굴이 점점 더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뭐야, 당신 정신 나갔어?”

    조세핀이 이미 반절이나 사라진 토비아스의 맥주 통을 우격다짐하듯 빼앗아 들고 버럭, 소리를 질렀다.

    “……?”

    토비아스가 흠뻑 젖은 입가를 손등으로 닦아 내며 왜 그러느냐는 표정으로 눈을 깜빡였다. 그는 조세핀이 왜 앙칼진 고양이처럼 화를 내는지 알 수가 없었다. 예전에 집에서 키우던 고양이도 틈만 나면 이유 없이 그의 손을 꽉 물곤 했는데, 딱 그 짝이었다. 그가 주근깨가 흐트러진 콧잔등을 찌푸리며 말을 이었다.

    “어차피… 당신도 내가 마음에 안 들잖아요? 난 그래서 대신 마셔 주는 건데…. 이런 말 직접 하긴 그렇지만 오히려 내게 고마워해야 하는 거 아닌지….”

    토비아스는 말을 이을 수가 없었다. 앙칼진 고양이, 아니 조세핀이 그의 멱살을 잡고 입술을 꾹 눌러 막았다 뗀 탓이었다.

    “말라쿤이 언제 쳐들어올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숙취로 뒈지고 싶어요? 술병 나는 거 막아 줬으니, 이제 그쪽이 나한테 고마워해야지. 알아?”

    토비아스의 미간에 느리게 주름이 팼다. 그녀를 바라보는 옅은 초록색 동공이 집약되며 작게 뭉쳤다.

    “약하다! 약해!”

    “지금 소꿉놀이하냐?”

    주변에서 기사들이 입가에 손을 가져가 우우, 하며 야유하는 소리가 들렸다. 조세핀이 여전히 토비아스의 옷깃을 틀어쥔 채로 인상을 확 쓰며 꽉 다물린 잇새로 남들에게 들리지 않게 속삭였다.

    “그냥 하는 척만 하라고요. 어차피 파티에서 즐기기 위한 쇼로 나랑 당신이 운 없게 당첨된 거니까…. 고집부리지 말고 좀!”

    길게 한숨을 내쉰 토비아스가 마침내 그녀를 바라보며 작게 입을 열었다.

    “고집부리는 거 아닌데.”

    “그럼 뭐예요?”

    조세핀이 눈을 부라리자 토비아스가 차분히 말을 이었다.

    “나는 하는 척만 하는 건 싫거든요.”

    “뭔 소리야…?”

    까만 흑표범의 빛나는 털처럼 윤기가 흐르는 그녀의 머리칼에 토비아스의 손가락이 헤집고 들어왔다. 조세핀이 그 자리에서 얼어붙었고 토비아스가 조금 가라앉은 목소리로 혼잣말을 하듯 중얼거렸다.

    “…난 뭐든 열심히 한다는 소리예요.”

    그의 다른 한 손이 그녀의 허리에 부드럽게 감겼다.

    “소질 없는 건, 특히나 더요.”

    토바아스가 얼굴을 기울인 채 다가오며 그녀를 향해 속삭였다.

    “눈 좀 감아 줄래요.”

    그의 속눈썹이 아래로 내리깔렸다. 그리고 그가 조세핀의 자그마한 입술을 혀로 핥은 후, 진하게 머금었다.

    “흡…!”

    토비아스의 숨결에서 홉이 진한 맥주 향이 감돌았다. 하지만 취하는 느낌은 비단 그 때문만은 아니었다.

    맙소사. 대체 이 남자가 손으로 무슨 짓을 하는 거지? 알 수가 없었다. 조세핀은 꽉 감은 눈을 뜰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주변에서 기사들이 좋다고 더욱 목소리를 높이며 박자에 맞춰 테이블을 탕, 탕, 두들겼다.

    “섹스해!”

    탕!

    섹스해!”

    탕!

    조세핀의 귓가에서 주변의 소음이 아득해지고 대신 다른 소리가 크게 들렸다. 눈앞의 남자가 젖은 혀를 부딪치며 내는 작은 숨소리 그리고 그와 함께 점점 커지는 그녀의 심장 소리였다.

    소질이 없기는 개뿔. 샌님같이 생긴 남자의 키스는 정중함과 거침, 서투름과 능숙함, 그 어딘가의 사이에 있었다. 무엇이든 열심인 토비아스에게는 당연한 일이었지만 그의 성격을 완벽히 알지 못하는 그녀로서는 당황스러운 일이었다.

    게다가 그의 손이 부드럽게 등골을 쓰다듬는 감각에 거짓말을 보태지 않고 온몸이 녹아 버리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조세핀이 저도 모르게 혀를 뒤로 물렸지만 토비아스는 멈추지 않고 부드럽게 다가왔다. 그녀의 혀뿌리를 얽으며 타액을 퍼 올렸다. 예민한 부분이 모조리 매만져지는 느낌에 성대에서 자연스레 신음이 터지자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힘이 풀린 혀를 찾아 보드랍게 빨아 온다.

    ‘뭐야…. 이 자식 대체 뭐야…?’

    촉.

    마침내 조세핀의 아랫입술을 진하게 빨고 떨어진 토비아스가 사람들을 둘러보며 조심스레 물었다.

    “…이제 됐나요?”

    “안 충분하다! 더 보여 줘라!”

    터지는 휘파람 소리 사이에서 토비아스가 쑥스럽다는 듯 고개를 저으며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다시금 자신의 맥주잔을 집어 들어 갈증이 나는 목을 축였다.

    “조! 얼굴이 불타는 고구마처럼 시뻘게졌는데?”

    쾅!

    조세핀이 테이블을 주먹으로 부서져라 내려친 후, 바깥으로 나갔다. 리비에르의 기사들은 이유 없이 매우 좋아하며 토비아스에게 하이파이브를 청했고, 토비아스는 정중히 거절했다. 기사들은 다시 낄낄거리며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

    “다들 즐거워 보이지 않나요?”

    눈앞에서 벌어진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혜미가 퍼뜩 고개를 돌렸다. 리비에르가 다가와 있었다. 멍하니 있던 혜미가 얼른 술잔을 들었다.

    “네? 아… 네.”

    “말라쿤은 이틀에 한 번씩 지치지도 않고 쳐들어와요. 지금 이 시간에도 누군가는 돌아가며 경비를 서고 있죠.”

    술을 꽤나 들이켠 리비에르의 목소리에는 취한 기색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기사들과 함께 목소리를 높여 깔깔거리던 것과는 상반되는 차분한 느낌에 혜미가 말없이 눈을 깜빡였다.

    “이런 마약 같은, 원색적인 즐거움이 아니라면 그들에게 현실이 너무 빡빡하잖아요?”

    혜미는 그녀에게 잔을 들어 올리는 리비에르에게 잔을 부딪치고 입술에 가져갔다.

    “힘든 곳에 와 줘서 감사하고, 환영해요.”

    리비에르가 그녀를 보며 미소 짓고는 옆자리 발터의 어깨를 톡톡 두드렸다. 말없이 술을 들이켜던 발터가 그녀를 올려다보자 리비에르가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

    “발터는 나와 이야기 좀 할까요?”

    “용건이 있으십니까?”

    “지휘관들 사이에는 원래 중요한 말이 많이 오가는 법이니까요. 그대가 세르노티 기사단의 우두머리잖아요?”

    “경의 군대는 작전 회의를 술 마시다 하는 모양입니다.”

    “네. 나의 군대는 술을 마시다가도 전투를 합니다.”

    잠시 길게 숨을 내쉰 발터가 짙은 갈색 눈동자로 혜미를 보았다. 아까 신고식처럼 치러졌던 말라쿤과의 일로 발터가 리비에르를 못마땅하게 여긴다는 사실은 알 수 있었다.

    ‘다녀올게.’

    그를 이곳까지 오게 만든 사람은 바로 그녀, 자신이라는 사실도 안다.

    “내가 더 기다려야 하나요?”

    그리고 리비에르는 아마도 발터에게 호감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도.

    머릿속을 비집는 쓸데없는 감정을 떨쳐 내듯 혜미가 고개를 보이지 않게 끄덕였다.

    ‘응. 부탁해. 발터.’

    리비에르는 세르노티가 크리스티앙과 맞서기 위해 꼭 필요한 이였다. 혜미는 그녀가 무엇을 위해서 이곳까지 왔는지를 떠올리며 애써 웃었다. 발터 역시 그런 그녀의 마음을 모르지 않았고, 그는 무슨 수를 써서든 리비에르를 도와 그들의 편으로 만들기 위해 애를 쓸 것이다.

    “나가시죠.”

    낮은 목소리로 대답을 한 발터가 일어나자 리비에르가 그를 뒤따랐다. 차례로 문을 나서는 둘을 보는 혜미는 문득 가슴 한구석이 저릿해 깊게 숨을 내쉬며 술잔을 잡았다.

    매력적이고 강한 사람.

    리비에르는 섹시하다는 표현이 가장 잘 어울리는 ‘여자’였다. 비단 육감적인 몸매뿐만이 아니었다. 사람을 직시하는 눈빛과 나직한 목소리 그리고 자신감에 찬 걸음걸이까지 매력이 흘러넘치게 보이는 것은 비단 혜미의 착각만이 아니었다.

    “와. 리비에르 님께서 아무래도 오늘 밤 파트너를 찾으신 모양인데?”

    “아까부터 한 사람한테 눈을 못 떼시는 거 보면 몰라?”

    기사들이 술잔을 비우며 목소리를 웃었다. 테이블을 지키는 세르노티의 기사들이 슬쩍 혜미의 눈치를 보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 상황에서 목소리를 높인 것은 레나였다.

    “뭐예요, 다들? 리더들끼리 작전 회의하러 간 게 당연하잖아요. 다들 이성한테 쫄쫄 굶어서 그 생각밖에 안 나는 거예요?”

    “전쟁터에 있다 보면 제일 궁한 게 그건데. 조금만 지내 보면 아마 다들 우리 같아질걸?”

    기사 하나가 허리를 앞으로 쑥 내밀었다 뒤로 빼기를 반복하며 짐승처럼 훅훅 숨을 몰아쉬었다.

    “저런 건 보지 마라.”

    빈센트가 레나의 눈앞을 몸으로 가리자 그녀가 속이 터진다는 듯 한숨을 내쉬며 맥주를 들이켰다.

    “혜미, 슬슬 정리하고 막사로 돌아가자.”

    “…응.”

    밤이 깊어질수록 술자리는 점점 음담패설로 흘러가고 있었다.

    “아. 리비에르 님이 한 번만 더 날 안 불러 주시려나.”

    “너 막상 한 달 전에 지휘관님 막사로 초대받았을 땐, 쫄아서 세우지도 못했다며! 꿈도 크다! 와하하!”

    자리에서 일어나는데 혜미의 시선이 자꾸만 다른 쪽으로 갔다. 그들의 막사가 있는 방향은 발터와 리비에르가 나간 쪽과 반대 방향이었다.

    “세르노티의 가주는 어떨까나?”

    “빌어먹을. 아까 옷 벗어 던질 때 못 봤어? 딱 보면 사이즈 나오지 않나? 킬킬. 리비에르 님께서도 본능적으로 감이 팍 온 거지! 어떤 수컷이 자신을 만족시킬 수 있을 만한 배포를 가졌는지 말이야.”

    “아까 보니까 그는 별로 관심이 없어 보이던데.”

    “등신아. 그러니까 네가 아직 애송이라는 거야. 딱 봐도 그 친구는 지휘관님께 제 몸값을 올리려는 거지! 하긴. 어려운 남자를 정복하는 쾌감이 얼마나 짜릿한지 수컷들이 알기나 할까.”

    “하하 맞아. 모르긴 몰라도 아마 오늘 하룻밤이 모자랄 거라는데 은화 다섯 개….”

    듣지 않으려고 해도 자꾸만 이상한 말이 들려오며 뒤통수를 잡아끌었다.

    “더 있을 필요 없는 것 같아요. 빨리 가요. 혜미.”

    아일라가 작은 목소리로 혜미를 재촉했다.

    “으… 응.”

    혜미는 배정받은 막사로 들어가 불도 켜지 않은 채 침상에 걸터앉았다. 리비에르는 앞선 무례한 신고식에 사과한다는 뜻으로 세르노티 기사들에게 1인용 막사를 배정했다.

    “…….”

    기분이 이상했다. 분명 모두가 무사히 자일룬에 도착했고, 리비에르는 그들을 아군으로 받아들였다. 나쁘지 않은 시작임에도 왜 이렇게 기분이 가라앉는 걸까.

    혜미는 무릎을 올려 그사이에 뜨거운 얼굴을 파묻었다. 혼자 있을 수 있는 시간이 이렇게 안도되는 것은 처음이었다. 자신이 왜 이렇게 울적한 기분이 드는 건지, 아무에게도 설명할 수 없을 것 같았다.

    발터는 그녀의 명령대로 이곳에 왔을 뿐이었고, 설사 그가 리비에르와 가까워진다고 한들 그것은 혜미가 간섭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오히려 리비에르가 발터를 신뢰한다면 그녀로서는 반가운 일이어야 했다.

    …그런데 왜 이렇게 울고 싶어지는 걸까.

    자신은 베네딕트와 그런 짓까지 해 놓고선, 발터가 혹시나 리비에르에게 반하기라도 할까 봐 지레 겁을 먹는 스스로에게 자괴감이 들었다.

    “욕심 많으신 분. 다 가져야 하실 분.”

    혜미는 고개를 들어 칼날이 부러진 그녀의 검을 바라보았다.

    “잔인한 클라웨의 유전자를 타고나신 분. 사랑하는 이를 고통스럽게 만드실 분.”

    희미한 빛을 내는 붉은 보석을 통해 베네딕트의 조소 섞인 목소리가 들려오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역시 내가… 이기적인 걸까.

    혜미는 어둠 속에서 양손으로 머리를 꽉 움켜쥐었다. 모두가 이 고생을 하면서 여기까지 온 것은 그녀 때문인데 시작부터 이런 사적인 마음에 괴로워지면 어쩌란 말인가.

    그러니까 황제 같은 거, 나한테 어울리지 않는 자리라고 말했잖아. 대상을 알 수 없는 누군가에게 화풀이하듯 속으로 외쳤다. 부러진 칼 손잡이에 박힌 보석이 어둡게 일렁였다.

    “또 도망치시려고요?”

    머릿속에서 울려 퍼지는 차가운 목소리를 들으며 그녀가 입술을 꽉 깨물었을 때였다.

    둥! 둥!

    갑자기 들려오는 북소리에 혜미의 고개가 위로 번쩍 들렸다.

    뭐지?

    그녀의 머릿속에서 벌어지는 환청이 아니었다. 귓바퀴를 통해 또렷하게 들려오는 소음이었다.

    “습격이다!”

    누군가가 크게 외치고 있었다.

    “자일룬이다! 모두 무기를 챙겨!”

    그녀가 생각을 깊이 할 시간은 오래 주어지지 않았다. 캄캄하던 바깥이 타오르는 횃불로 환하게 밝아오는 것을 보며, 혜미는 바깥으로 튀듯이 달려나갔다.

    그들이 자일룬에 도착한 첫날, 여름의 시작이었다.

    ***

    제국력 176년, 여름.

    아메티스 황금성.

    “성하.”

    대신의 부름에 베네딕트가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그가 쓰고 있던 글씨가 황금색으로 빛나며 공중에 흐트러져 사라지는 모습을 멍하니 보고 있던 대신 하나가 이윽고 정신을 차렸다.

    “이제 나오셔도 괜찮다는 황제 폐하의 명이십니다.”

    공간을 자유로이 이동할 수 있는 베네딕트에게 감금은 어울리지 않는 말이었다. 하지만 그는 크리스티앙의 명령대로 작은 방에 틀어박혀 열흘간 나오지 않았다.

    “예식은 잘 끝났나?”

    “예. 귀족들은 모두 퇴궁했고 폐하께서도 자리를 물리셨습니다.”

    “그렇군.”

    베네딕트가 나직하게 내뱉은 후, 자리에서 일어났다. 공간이 흐리게 번지며 교황의 침실을 비추자 그가 한 발 앞으로 다가섰다. 대마법사인 그에게 문은 필요가 없었다.

    로즈의 마법이 물리적인 거리를 확 줄이는 방식이라면 베네딕트가 이용하는 마법은 공간을 눈앞에 불러들이는 마법이었다. 타인의 꿈이나 무의식의 세계를 이용해 이동하는 것도 가능했다.

    “그동안 고생이 많으셨습니다, 성하.”

    “아니.”

    베네딕트가 자신의 방으로 들어가기 전, 대신을 보고 희미하게 웃었다.

    “방해받지 않아 좋았다.”

    대신이 의문하는 표정을 지었지만, 베네딕트는 그에게 물어볼 기회도 주지 않고 자신의 방으로 사라졌다. 결혼 예식에 참석조차 하지 못하는 모욕을 겪었음에도 교황의 얼굴에는 불쾌한 기색조차 없었다.

    “…이게 뭐지…?”

    그가 떠난 자리, 바닥에 흐릿하게 말라붙은 핏자국을 보며 어린 대신이 고개를 갸웃했다. 이제 보니 사용감이 없는 침상에도 자잘한 핏방울이 튀어 있었다.

    “보고를 뭐라고 해야 하나….”

    대신은 잠시 망설였다. 황제의 결혼 예식이 이루어지는 주간 동안, 이 방에 출입한 사람은 물론 아무도 없었다. 교황은 열흘간 물과 음식마저 거부했다. 식사 시중을 든 사람도 없었으니 이 흐릿한 핏방울의 주인공은 대마법사 하나뿐이었다.

    ‘대체 무슨 생각이신 걸까.’

    방금 전 본 교황의 모습은 상처나 흉터 따윈 찾아볼 수 없는 편안한 모습이었다. 교황이 가끔 온몸을 자해하며 마력을 집중한다고 수군거리던 이들의 소문이 사실이었나…?

    어린 대신은 인상을 찌푸리며 관자놀이를 긁적였다.

    황제 폐하와 교황의 관계가 좋지 않다는 사실은 황궁 안에 공공연하게 퍼진 이야기였다. 들리는 말에 따르면 교황은 그 관계를 개선시킬 생각이 없는 것처럼 보인다고도 했다.

    대체… 왜?

    교황청에 살고 있는 수많은 마법사들이 감금되어 있는 이 상황에서, 가장 큰 힘을 가진 대마법사는 그들의 처우 개선을 위한 노력은 전혀 하고 싶지 않은 걸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내 일도 아닌데 뭘.’

    어린 대신은 이내 상념을 떨치고 화려한 의복의 먼지를 탁탁 턴 후, 집무실을 향해 걸었다. 인간은 자신의 이익이 가장 중요한 존재이고 모든 사람이 편하게 사는 것은 어차피 불가능한 꿈이었다. 쓸데없는 데 신경을 쓸 이유는 없다. 황금성에 자유자재로 출입하며 녹을 받아먹고 살 수 있는 존재라는 데 자부심을 가지면서 이 태평성대가 영원하기를 바라면 되는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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