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1화 (31/72)

‘저를… 속이셨군요…. 하하.’

마치 벽에 커다란 스피커를 단 듯 온 공간에서 베네딕트의 꽝꽝 울리는 듯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벽을 따라 담쟁이덩굴 같은 풀줄기가 길게 자라나고 있었다. 그녀가 마지막으로 열었던 기억의 방. 황후의 정원에서 시작된 덩굴은 마치 그녀를 향해 뻗어 오는 베네딕트의 손길 같았다.

“아아…!!!”

그녀는 소리를 지르며 더욱 빨리 뛰었다. 마침내 방향 지시 등 같았던 하얀 돌이 끝나는 지점. 아무것도 없는 캄캄한 벽을 향해 그녀가 몸을 던졌다. 기억의 문고리는 보이지 않았지만 있다고 해도 그것을 열 필요는 없었다. 그녀가 살아가야 하는 것은 과거가 아니라 현재. 그녀의 방을 만들 수 있는 사람은 바로 그녀 자신이었다.

“…….”

혜미가 숨을 몰아쉬며 눈을 번쩍 떴다. 차가운 수면이 뜨거운 동공을 식혔다. 고개를 돌리자 물속에서 정신을 잃은 채 서서히 가라앉는 발터가 보였다. 그의 등에서 붉은 핏방울이 마치 연기처럼 퍼져 나가는 것이 또렷했다. 그와 조금 떨어진 곳, 마치 소용돌이처럼 휘몰아치는 물보라가 보였다. 그 물살에 한 번 빠지면 끝장이라는 직감이 들었다. 그녀는 그에게로 손을 뻗었다.

발터의 몸이 사이로 빨려 들어가기 일보 직전, 그의 팔목이 혜미에게 잡혔다. 혜미는 그를 끌고 안간힘을 쓰며 물 위로 빠르게 올라갔다.

“하아…. 하아…!”

참았던 숨과 함께 기침이 터졌다. 혜미는 폭포수의 가장자리, 뭍으로 있는 힘을 다해 헤엄을 쳤다.

“발터…!!!”

그의 뺨을 후려치며 크게 소리쳤지만 발터는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젠장…! 발터!! 일어나!!!”

뭍가로 그를 끌어낸 후, 그의 가슴을 퍽, 세게 내려치자 그제야 발터가 물을 토해 내며 눈을 떴다.

“쿨럭….”

“발터. 너… 괜찮아…?”

“괜찮아….”

발터가 입을 떼자 그제야 혜미가 탄식하듯 소리 내어 한숨을 내쉬었다.

“아아…. 진짜….”

“입으로… 숨이라도 좀 불어넣어 주지 그랬어.”

정신을 차린 발터가 희미하게 웃으며 농담했다.

“네가 너무 세게 때려서 갈빗대가 다… 부서지는 줄 알았다.”

그녀의 뒤에서 달려오는 세르노티 기사들의 목소리가 들렸다.

“발터! 혜미! 찾았다!!! 여기 있어!!”

혜미는 안도감에 힘이 풀려 뒤로 주저앉고 말았다.

예상치 못했던 산사태였다. 죽을 고비를 간신히 넘긴 것은 절벽에서 떨어진 혜미와 발터뿐만이 아니었다. 산이 무너지는 바람에 기사들은 간신히 흙더미에 몸이 파묻히는 것을 피할 수 있었다. 짐을 실은 말들 중 다수는 실종되었고 그나마 간신히 살아남은 짐승들의 움직임에는 피곤이 역력했다.

온몸이 빗물과 흙탕물에 젖어 거지꼴로 간신히 산을 빠져나온 결과가 그리 나쁜 것만은 아니었다.

“어…!”

세르노티의 기사들의 눈에 보인 것은 나무에 커다랗게 글씨가 쓰여 있는 팻말이었다.

자일룬; 이곳부터 허가 없는 외부인은 출입을 금함

그들의 얼굴에 드디어 목적지에 도착했다는 안도감과 동시에 긴장감이 깃들었다. 외부인의 접근을 금한다는 팻말에서 느껴지는 위험한 분위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이제부터 그들이 싸워야 할 말라쿤족일 것이다.

“누구지? 소속을 밝혀라.”

마을 입구에 들어서자 경비병으로 보이는 두 명이 빗속에서 말을 탄 채 그들에게 다가왔다. 기사복의 후드를 뒤집어쓴 이들의 가슴에는 불꽃 모양의 문양이 그려져 있었다. 리비에르가 이끄는 기사단의 문장이었다.

“세르노티 기사단의 발터 세르노티입니다. 말라쿤과의 전쟁을 위해 출정하였습니다.”

선두에 선 발터가 낮게 내뱉자 짧고 검은 머리칼을 가진 기사 하나가 미간을 조금 찌푸렸다.

“세르노티의 기사단…?”

아무리 날씨가 험하다고 한들 그들의 꼬락서니가 형편이 없는 까닭이었다. 방금 전까지 산사태에 구르고 온 탓이었지만 처음 보는 사람이 그것을 알 리가 없었다.

“지휘관님께 일단 보고하지.”

미심쩍은 말투로 내뱉고 말 머리를 돌리는 기사의 옆에 있던 다른 기사가 그들에게 손짓을 했다.

“따라오지 않고 뭐 하고 있나? 그러고 있으면 말라쿤이라도 쳐들어온 줄 알고 마을 사람들이 겁을 집어먹을 것 같은데.”

“푸하하.”

앞서 말을 몰던 이의 입술에서 날카롭고 높은 웃음소리가 삐져나왔다.

“너도 멀리서 보고 그렇게 생각했었잖아.”

“그야 꼴이 너무 더러우니까 그럴 수밖에.”

발터를 포함한 다른 기사들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로비나에서도 겪었던 일이었지만 대놓고 무시하는 태도에 열이 받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말라쿤이라니…. 지금 사람을 뭘로 보고….”

혜미는 얼굴이 벌게진 얀을 조심스레 제지했다.

‘조금만 참자. 얀. 부탁 좀 할게.’

그녀가 눈빛으로 말하는 무언의 대화를 알아들은 얀이 애써 얼굴을 풀고 싱긋 웃었다.

“그냥 쟤들 확 뜯어 먹어서 기대라도 충족시켜 줘야 하나…? 근데 저 앞에서 있는 쟤는 비쩍 말라서 맛도 없을 것 같다.”

얀의 말에 모두들 피식 웃었다. 그들의 실력을 알면 아무도 무시할 수 없을 거라는 사실을 상기하자 기분이 조금 나아졌다.

“빨리 오지 않고 뭘 수군거리고 있는 거지?”

“갑니다, 가요! 주민들 겁 안 주고 조심스레 갈 테니까 걱정 마세요! 충성!”

얀이 능청스레 목소리를 높였다. 그때까지만 해도 그들은 어떠한 신고식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을지 알지 못하고 있었다.

***

“여기 뭐야….”

인상을 찌푸리며 레나가 작게 중얼거렸다. 그녀의 곁에 있던 빈센트가 우직하게 입을 열었다.

“커다란 돼지우리 같다. 아니면 더러운 마구간.”

“...내가 잘못 생각하고 있는 거 아니지?”

누군가 옆에서 당황함을 감추지 못한 목소리로 말을 보탰다.

“아니, 도와주러 온 사람들한테 이런 대접이 어디 있어 대체?”

말을 탄 기사 두 명을 따라 한참 동안 걸어온 후였다. 엄청난 수로 정렬한 리비에르 군대의 막사를 발견한 것까지는 좋았다. 문제는 대기하라고 그들을 몰아넣은 곳이 마치 천장이 없는 커다란 우리 같은 공간이라는 데 있었다.

“으아…. 으아아아아….”

게다가 벽을 대신해 박아 놓은 것 같은 빽빽한 울타리 너머에서는 이상한 소리까지 들려오고 있었다.

“저거 사람 소리야, 뭐야?”

기사들의 불쾌함은 정점을 찍었다. 동물의 울음소리는 아니었지만 인간의 것이라고 하기에는 모호한 신음 소리였다.

“내가 가 봐야겠다.”

발터가 칼을 챙겨 들며 낮게 내뱉었을 때였다.

“…세르노티라고 했나?”

경계선처럼 박힌 낮은 울타리 너머로 빗속을 뚫는 높다란 목소리가 들렸다. 혜미를 포함해 우리 안에 갇힌 모든 이들의 시선이 한쪽으로 몰렸다. 죽 늘어선 기사들이 빗속에서 그들을 향해 뚜벅뚜벅 걸어오고 있었다. 그 가운데에 선 여자가 씩 웃으며 말을 이었다.

“지원군이라니. 예상치도 못했는데.”

일부러 자기소개를 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그들이 말로만 듣던 리비에르를 실제로 마주하는 순간은 강렬했다. 구불구불하고 숱이 많은 갈색 머리는 허리까지 길었고, 타이트하게 몸에 붙는 붉은색 가죽 갑옷은 무려 어깨를 드러내는 것이었다.

그녀가 걸음을 옮길 때마다 풍만한 가슴이 조금씩 흔들렸다. 커다란 골반과 터질 것 같은 허벅지는 말 그대로 육감적이라고밖에 표현할 수가 없다.

꿀꺽.

누군가 침을 삼키는 소리가 들리는 것도 같았다. 옆으로 주르륵 늘어선 기사들 가운데에서 당당하게 걸어오는 그녀는 마치 짐승 떼의 우두머리 같은 모습이었다.

“폐하의 명이 아니라면 이곳으로 자진해 출정하는 기사단은 몹시도 드물거든. 안 그래, 조세핀?”

리비에르가 그녀의 오른쪽에 선 기사를 곁눈질하며 물었다. 자로 잰 듯 눈썹까지 잘린 앞머리와 턱선을 정확하게 가리는 검은 머리칼. 처음 마을에서 그들을 발견했던 이들 중 하나였다. 성질 나쁜 고양이를 연상시키는 뾰족한 얼굴을 한 그녀가 입술을 삐딱하게 올리며 리비에르의 말을 받았다.

“암요. 밤일을 끝내주게 잘하는 동정남 찾기만큼이나 드문 일이죠. 축 늘어진 고춧값도 못하는 쓸모없는 것들이 수두룩하게 깔린 이 세상에.”

“하하하!”

죽 늘어선 기사들 사이에서 높다란 웃음이 터져 나갔다. 우리 안에 갇힌 모양새인 세르노티 기사들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명백한 무시와 성희롱을 동시에 당한 거나 다름없었다. 발터가 어두워진 눈을 빛내며 한 발 앞으로 나섰다. 색이 짙은 눈썹이 꿈틀거렸다.

“힘을 보태기 위해 먼 곳에서 온 아군을, 늘어진 좆같이 대접하는 것도 흔한 일은 아니오.”

“무엄하다. 말을 조심해라!”

조세핀이라 불린 기사가 가늘게 찢어진 여우 눈을 부라리며 목소리를 높였다.

“예의를 갖추지 않는 상대에게 내가 딱히 왜 그래야 하지?”

발터가 울타리를 사이에 둔 채 그녀를 노려보며 말을 이었다.

“클라웨에서 모두가 충성해야 할 상대는 단 한 사람이다. 그를 위해 당신들도 이곳에서 나와 있는 걸 테고.”

“뭐?”

조세핀이 하얀 얼굴에 노기를 담자 발터가 그녀를 비웃었다.

“골목대장 놀이는 너희 골목에서나 하란 소리야.”

“지휘관님!”

작위를 받은 리비에르는 그 출신을 막론하고 현재 세르노티의 기사단보다 높은 지위에 있는 귀족이었다. 조세핀이 이 모독을 두고 봐야겠냐는 표정으로 리비에르를 바라보자 그녀가 웃으며 한 발 앞으로 다가섰다.

“괜찮아, 조.”

리비에르가 울타리 앞으로 점점 더 가까이 다가오자 세르노티의 기사들이 모두 마른침을 삼켰다. 정확히 말하자면 세르노티의 남자 기사들이.

“이곳으로 출정한 이들은 정확히 두 부류로 나눠지지.”

리비에르가 한 걸음씩 내디딜 때마다 중앙에 터질 듯 모인 가슴이 출렁였다. 가까이서 보니 이목구비는 더욱 뚜렷하다.

“첫 번째는 황제 폐하의 명으로 울며 겨자 먹기 식으로 억지로 출정했거나.”

주위의 시선을 단번에 집중시키는 외모였다. 그리고 그 사실을 잘 알고 있는 여자였다. 가슴을 강조하고 몸매를 드러내는 어두운 붉은 색의 가죽 갑옷은 전투와는 매우 거리가 멀어 보였지만 그녀를 약하게 보이게 하지는 않았다.

“음유시인들이 나불대는 내 소문을 듣고 몸이 동해 출정했거나. 뭐였더라…?”

리비에르가 기다란 장갑을 낀 양팔을 울타리에 척 걸친 채, 발터를 보며 입술을 끌어 올렸다. 납작하게 잘린 통나무에 짓눌린 가슴골이 깊었다.

“침대에서도 전장에서도 리비에르에게는 언제나 항복뿐…. 뭐 이런 내용이었던가?”

정확히 말하면 ‘전장에서도 침대에서도 늘 승리하는 아름다운 리비에르여. 그녀의 발치에 무릎 꿇는 자들에겐 아군과 적군을 막론하여 리비에르의 애정이 깃들지니, 그 애정을 바라여 무릎 꿇은 이들이 한 도시를 메운다고 하더라.’였다.

리비에르의 두 눈에 콱 박힌 녹색 눈동자가 빗속에서 반짝이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그대는 어느 쪽이죠?”

“그 어느 쪽도 아닙니다.”

“말투가 바뀌었네?”

“받은 대로 돌려주는 것뿐.”

리비에르와 발터의 소리 없는 충돌을 보는 기사들 사이에 알 수 없는 긴장이 서린 침묵이 흘렀다. 발터의 옆에 선 혜미 역시 말없이 주먹을 꽉 쥐었다 폈다.

리비에르는 그녀가 자신의 편으로 만들어야 할 사람이었다. 그렇게 원하던 이가 앞에 있는데 혜미는 그녀의 분위기에 압도되어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그녀를 대신해 리비에르를 상대하는 발터가 대단하게 느껴질 뿐이었다.

“기백이 좋은데요?”

“경을 따르는 기사들은 그렇지 않은가 봅니다.”

“하하.”

다른 사람은 아무도 보이지 않는 듯, 발터를 뚫어져라 바라보는 리비에르의 눈동자에 흥미로운 빛이 깃들었다. 모든 것이 축축한 무채색을 띠는 곳에서 그녀는 생생한 색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었다. 비에 젖어 더욱 구불거리는 머리카락은 마치 불꽃 같았고 그 속에 꽉 박힌 녹색 눈동자는 의지를 담고 반짝거린다.

“그래서 출정한 이유가 뭐라고요? 미스터….”

“세르노티.”

“난 당신의 이름이 알고 싶은걸요.”

“발터 세르노티.”

발터. 그의 이름을 작게 입 안에서 굴리며 리비에르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대답해 보세요. 발터.”

“세르노티가 자일룬으로 출정한 이유는 말라쿤과 싸우고 있는 리비에르 백작께 힘을 보태어 잃어버린 제트성을 탈환하기 위함이며 거시적으로는 클라웨의 평화를 되찾아 황제 폐하께 충성하기 위함입니다.”

주저 없이 내뱉는 발터의 말에 거짓은 없었다. 다만 그가 뜻하는 ‘황제’와 리비에르가 생각하는 ‘황제’가 다를 뿐이었다.

“황제 폐하에 대한 충성심으로 출정한 것이다….”

리비에르가 그를 보며 작게 혼잣말하듯 중얼거리다 잘 빠진 눈썹을 들어 올리며 웃었다.

“그러면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 확인해 볼 기회가 필요하겠군요.”

그녀의 뒤에 죽 늘어선 기사들이 즐거운 표정을 지으며 울타리로 가까이 다가오기 시작했다. 발터가 그녀를 보며 얼굴을 조금 일그러뜨렸다.

“지금. 아군끼리 싸우자는 겁니까?”

“그럴 리가.”

리비에르가 작게 고개를 저었고 그녀의 옆에 있던 조세핀이 쿡쿡 웃었다.

“말라쿤은 하루가 멀다 하고 쳐들어와 이곳에서 난동을 부리고 있어요. 그들의 왕인 리가스가 지금 제트성에 머무르고 있거든요. 그래서 보란 듯이 더, 자일룬의 사람들을 겁주는 거죠.”

리비에르가 설명을 이었다.

“그래서 우린 이달 내로 그들의 거점인 제트성을 탈환할 계획이에요. 방해가 되는 이들의 도움 따위는 필요 없죠. 세르노티에 대한 소문은 익히 들어 알고 있어요. 하지만 지금 우리는 전설로 사라진 암살단의 명성 따위에 기댈 상황이 아닙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실력, 다시 말하자면 눈에 보이는 결과예요. 당신들이 거슬리는 존재가 될지, 아니면 우리에게 도움이 될지, 이 자리에서 증명하라는 소립니다.”

리비에르의 눈이 반짝거리며 의미심장한 빛을 냈다.

“뭐…. 내일부터 당장이라도 눈앞에 마주해야 할 상대에 대한… 연습이라고나 할까?”

그녀가 가볍게 손가락을 튕기자 멀리 있던 누군가 줄을 잡아당겼고, 벽처럼 보이던 울타리가 옆으로 밀려났다.

“……!”

시야를 가리고 있던 장막이 걷히고 짐승처럼 울부짖던 것의 실체가 드러나자 세르노티 기사들의 눈동자가 모두 얼어붙었다. 울타리 뒤에서 벌떡 일어난 것은 반삭을 한 거구의 남자였다. 목에 쇠사슬이 감긴 채 이쪽을 노려보고 있는 그의 눈동자가 형형했다. 분명히 인간이었지만 표정은 짐승의 그것과도 같았다.

“으아아!!!”

벌거벗은 채 중요 부위만 가리고 있는 그는 마치 짐승처럼 울부짖으며 그들을 보고 혀를 길게 내밀었다. 뿌드득. 뿌득. 이를 박박 갈며 위협하듯 노려보는 그를 보는 것만으로도 머리가 쭈뼛하며 공포감이 들 정도였다.

“이틀 전에 마을에서 소녀를 강간하려다 붙잡힌 말라쿤이에요. 독이 아주 잔뜩 오른 상태죠. 내일 동이 트면 목을 잘라 제트성으로 날려 보낼 작정이었는데, 마침 잘됐습니다.”

리비에르가 손뼉을 딱, 치며 빙긋 웃었다.

“보다시피 상대는 무기가 없습니다. 싸우는 쪽도 공평해야겠죠? 일대일. 맨몸으로 부딪치는 싸움이지.”

말라쿤이 날뛰자 그의 목을 칭칭 감은 쇠사슬이 차르릉거리는 소리를 내며 당겨졌다. 리비에르와 그녀를 따르는 기사들의 얼굴에 흥분이 번지는 것을 똑똑하게 볼 수 있었다.

“다들 물러서.”

발터가 낮게 내뱉은 후, 내피가 가죽으로 된 겉옷을 벗었다. 비에 젖어 몸에 달라붙은 튜닉마저 벗어 던지자 무섭게 갈라진 탄탄한 근육이 빗속에 모습을 드러냈다.

휘익!

여기저기서 휘파람 부는 소리가 들렸다. 마치 구경거리가 난 듯 우르르 울타리 근처로 다가오는 기사들의 얼굴에 즐거움이 번져 나갔다.

“끝내주는데? 그 누더기 같은 건 왜 걸치고 있었던 거지?”

“저 허벅지 좀 봐. 내 허리통만 하겠군.”

기사들이 킬킬거리는 가운데에서 리비에르가 팔짱을 낀 채 고개를 작게 저었다.

“아뇨. 발터 당신은 빠져요.”

“…뭡니까?”

“딱 봐도 거기 있는 이들 중 당신이 가장 강해 보이는데. 그러면 재미가 없잖아.”

“그렇지!”

리비에르의 말에 옹호하듯 기사들이 주먹 쥔 손을 치켜들었다.

“무슨 뜻이죠?”

인상 쓰며 되묻는 발터를 향해 리비에르가 싱글거리며 초록빛 눈동자를 짓궂게 빛냈다.

“원래 제일 강한 사람이 맨 나중에 처발리는 게 가장 재밌거든.”

“하하하! 옳으신 말씀!”

소리 높여 웃는 그녀의 기사들을 보고 얀이 한 발 앞으로 나선다. 쇠사슬에 묶인 채 이쪽을 향해 살기를 빛내는 말라쿤의 덩치는 그의 두 배는 되어 보였지만 더 이상의 모멸감은 참아 낼 수가 없었다.

“씨발, 보자 보자 하니까 저것들이 진짜…!”

강아지같이 아래로 처져 늘 귀여워 보이는 그의 눈빛에서 분노가 터져 나갔다.

“가주, 내가 갈게.”

얀이 욕설을 터뜨리며 옷을 훌렁 벗어 던짐과 동시에 빈센트도 차고 있던 무기를 벗어 던지며 목소리를 냈다.

“아니. 내가 간다.”

기사들이 기다렸다는 듯 저마다 앞으로 나섰다. 빗줄기가 굵어져 그들의 알몸을 고스란히 적셨다. 조세핀이 붉게 칠한 입술을 비딱하게 들어 올리며 날카로운 목소리를 냈다.

“세르노티에 눈을 즐겁게 해 줄 근육질 남자들은 많은데, 말라쿤과 정면 상대할 깡이 있는 여자 기사는 하나도 없는 모양이지요?”

쇠사슬을 박은 말뚝을 잡아당기며 울부짖는 말라쿤의 기괴한 신음이 점점 커져 갔다. 알아들을 수 없는 외국 언어였지만 그것이 그들을 자극하는 욕이라는 것은 분명이 느낄 수가 있었다.

“이봐요, 지금 대체 무슨 소리를…!”

참다못해 혜미가 소리를 높이자 그녀의 앞을 레나와 아일라가 차례로 가로막았다.

“여자가 없긴 왜 없어요?”

“레나는 다리 부상이니 제가 가요. 온몸을 갈기갈기 찢어서 죽여 버리겠어.”

리비에르가 발터의 옆에 주르륵 늘어선 기사들을 차례로 훑은 후, 어깨를 으쓱했다.

“지원자가 너무 많네? 네가 선택해라, 조.”

“그러죠.”

조세핀은 망설이지 않았다. 그녀의 손가락이 향한 곳은 발터도, 혜미도, 그 외에 앞으로 나선 다른 기사들도 아니었다.

“저기… 작대기같이 애처롭게 떨고 있는 저 사람이 좋겠어요.”

구석에서 칼 손잡이를 꽉 잡은 채 입술을 꽉 깨물고 있는 토비아스였다. 조세핀이 그를 보며 눈을 가느다랗게 뜨며 웃었다.

“흥을 돋우려면 역시 제일 약하게 보이는 놈이 처발리는 걸로 시작해야죠.”

“와하하하! 조세핀은 역시 성격이 참 더러워!”

“이봐. 당신들 눈엔 지금 이게 유흥으로 보이나…?”

발터가 그녀에게 다가가 이글거리는 눈빛을 빛냈다.

“오, 한 대 치겠는데?”

“자진으로 병력을 지원하는 아군 대접이 이따위면 못 할 것도 없지.”

울타리를 꽉 붙잡은 그의 손등에 핏줄이 불거졌다. 금방이라도 우리를 부숴 버릴 것 같은 발터를 보며, 토비아스가 간신히 목소리를 냈다.

“…가주. 내가 할게.”

“무리할 것 없다, 토비아스.”

“아니. 어쩌면 저들의 말이 맞을지도 몰라.”

토비아스의 눈동자가 흔들리다가 이내 평정을 되찾았다.

“…실력이 없다면 모두에게 방해밖에 되지 않으니까.”

작게 중얼거린 그가 무기를 벗어 차례로 바닥에 내려놓았다. 그러고는 옷을 벗은 후, 단정하게 개어 한쪽 구석에 놓았다. 바지와 신발도 마찬가지로 가지런히 그 옆에 놓였다. 비가 억수같이 퍼붓는 와중에 그의 몸동작은 느리고 차분했다. 모든 이들의 이목이 그에게 집중되었다.

“하하. 조신한 저 움직임 좀 보라지?”

리비에르 측에서 누군가 목소리를 높이자 묘한 침묵이 흐르던 공간에 다시 날카로운 웃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10분 버틸 수 있다는데 실버 하나 건다.”

“난 15분! 그래도 명색이 세르노티라잖아?”

“조, 너는?”

조세핀이 마침내 알몸이 된 채 일어선 토비아스를 보며 쿡쿡 웃었다. 샌님 같은 외모와는 달리 의외로 몸에는 자잘한 근육이 빼곡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녀의 판단에 영향을 미칠 정도는 아니었다.

“난….”

고양이같이 잘 빠진 눈이 더욱 사납게 위를 향했다.

“30초?”

풉! 하고 주변에서 웃음이 터졌다.

“30초 내에 저 비실이가 항복을 선언하지 않고 버틴다면 오늘 밤 내 침대로 쟬 초대하지.”

“저… 미친 또라이가 뭔 소릴 지껄이는 거야…!”

“괜찮아, 얀.”

얀이 욕설을 씹어 뱉었지만 토비아스는 동요하지 않았다. 다만 고개를 한 번 까딱한 후, 작게 내뱉을 뿐이었다.

“시작… 해도 될까요?”

“준비가 되었다면 언제든지.”

만면에 미소를 띤 리비에르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그가 휙, 하고 몸을 날렸다. 말라쿤이 그를 보며 어서 오라는 듯 울부짖었고 싸움이 시작되었다.

퍽!

토비아스의 맨발이 말라쿤의 턱 부근을 강타했다. 갑작스러운 공격에 말라쿤이 비틀거렸다.

“오오! 선공인가?”

바깥에서 구경하던 이들이 더욱 가까이 붙었다. 공중을 날았다가 바닥에 착지한 토비아스의 얼굴에 흙탕물이 촤악 뿌려졌다.

“하아….”

토비아스가 손등으로 구정물을 닦아 낸 후, 그를 덮치는 말라쿤의 배에 빠르게 주먹을 꽂았을 때였다.

…강하다.

주먹이 들어가지 않을 정도의 단단한 근육을 느낀 순간, 그의 몸이 번쩍 들렸다.

“저럴 줄 알았어!

“체격부터 일단 상대가 안 되잖아!”

리비에르의 기사들이 흥분해 목소리를 높였다. 누가 아군인지 적군인지는 상관없는 듯, 영락없이 싸움을 구경하는 관중의 모양새였다.

“으으으으….”

노랗게 보이는 말라쿤의 동공이 토비아스의 얼굴 가까이에서 이글거렸다. 말라쿤은 그의 목을 꽉 졸라 공중에 들어 올린 채였다. 토비아스의 얼굴에 시뻘겋게 피가 몰렸다. 양다리가 공중에서 버둥거린다.

“크윽….”

“토비아스!!!”

말라쿤이 그의 머리통을 후려친 것과 토비아스가 무릎으로 다시 그의 얼굴을 뻑, 하고 날린 것은 거의 동시에 일어난 일이었다.

“흑…!”

같은 곳을 연타로 맞은 말라쿤의 분노는 엄청났다. 짐승처럼 울부짖으며 그에게 손을 뻗었지만 말뚝에 묶인 쇠사슬 때문에 토비아스에게 닿지 못했다.

“하아…. 하아….”

바닥에 엎어진 토비아스의 몸이 진흙으로 엉망이 되었다.

“벌써 튀는 거냐? 하하!”

“이제 겨우 30초 지났는데 항복은 너무하잖아!”

토비아스는 흐려진 눈으로 앞을 바라보았다. 말라쿤에게 세게 맞은 머리가 어질어질했다. 숨이 멈추기 직전까지 목이 졸린 것도 한몫을 하고 있었다.

“토비아스!”

고개를 들어 뒤를 보았다.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얼굴을 일그러뜨린 동료들이 보였다. 발터가 조세핀과 리비에르를 향해 무어라 고함을 치고 있었다. 레나와 빈센트, 얀을 포함한 기사들이 안타까운 눈으로 그를 보는 게 보였다.

그리고 주먹을 꽉 쥔 채 그에게 커다란 연보랏빛 눈동자를 마주치는 혜미의 얼굴도.

“할 수 있어, 토비아스.”

“이든…. 내가 정말로 할 수 있을까?”

“당연하지! 고작 검술 시험 떨어졌다고 죽어? 그리고 네가 진짜 잘하는 건 따로 있잖아.”

그의 어깨를 탁탁 두드리며 격려하던 이든의 표정이 떠올랐다.

“우리 중 급소 짚기를 너보다 더 잘하는 사람 있으면 나와 보라고 해.”

“…그게 무슨… 기술이라고….”

“토비아스! 아마 넌 눈 감고도 사람 기절시킬 수 있을 거라는 데 오늘 내 저녁을 건다. 내 말이 그냥 하는 게 아니라는 거, 믿지?”

한 치의 의심도 없는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며 진지하게 내뱉던 이든의 얼굴이 혜미에게 정확히 겹쳐졌다.

토비아스.

그녀가 그에게 눈으로 말하고 있었다. 토비아스는 제 머리를 한 번 세차게 때리고 정신을 차린 후,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오. 버틸 모양인데?”

“하하! 이쯤에서 그만하는 게 낫지 않을까?”

난 할 수 있다.

난… 할 수 있어.

토비아스가 그에게 달려드는 말라쿤을 향해 뛰어올랐다. 예상했던 것처럼 그에게 멱살이 잡히고 그의 몸이 바닥으로 거칠게 내동댕이쳐졌다. 어깨가 으스러지는 것 같은 고통이었다.

“흑!”

“토비아스! 피해!!!”

말라쿤이 그의 몸을 타고 올라오며 숨을 씩씩 내쉬었다. 그동안 갇혀서 모욕을 당할 대로 당한 탓에 그의 살기는 최고조였다.

퍽!

그의 얼굴에 주먹이 세게 꽂혔다. 세르노티의 기사들은 저마다 숨을 몰아쉬었지만 토비아스는 피하지도 않고 그의 공격을 받아 내고 있었다.

“저러다 죽는 거 아냐?”

“토비아스!!!”

한 번, 두 번.

거친 주먹이 연달아 떨어졌다. 피가 터진 얼굴로 웃고 있는 토비아스를 향해 말라쿤이 약 오른 얼굴로 제 머리통을 들이받았을 때였다. 토비아스가 그의 머리칼을 잡아채고 눈을 찔렀다.

“으아아아아아…!”

눈을 가리고 포효하는 그의 귀 뒤 급소 그리고 명치를 차례로 정확히 짚는 것은 토비아스에게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으윽…!”

말라쿤의 다리가 거짓말처럼 풀리며 토비아스의 몸 위로 쿵, 쓰러졌다. 찰나의 침묵이 흐른 순간, 토비아스가 육중한 그의 몸을 발로 차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아….”

토비아스가 훅, 하고 입 안에 고인 피를 내뱉자 그의 입 안에서 부러진 어금니가 튀어나왔다.

“4… 45초 만에 쓰러트렸어!”

“버티기만 해도 용하다고 생각했는데!”

“이 정도면 우리 중에서도 신기록이지 아마?”

리비에르 측 기사 중 누군가가 소리를 질렀다. 토비아스가 말라쿤을 쓰러뜨릴 때까지 걸린 시각은 정확히 45초였다.

“토비아스…!”

기사들이 안도의 한숨을 내뱉었다. 발터가 성큼성큼 다가와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

“수고했다, 토비아스.”

토비아스는 그가 끝낼 때까지 나서지 않고 기다려 준 발터의 마음을 알고 있었다. 만약 말라쿤과 싸워 실력을 증명해야 하는 상대가 다른 이였다고 해도, 그는 기사들의 자존심을 스스로 지키게 만들었을 것이다.

“벼… 별거 아닌데 뭘.”

피투성이가 된 얼굴로 토비아스가 어깨를 으쓱했다. 그의 손을 잡고 일어나자 긴장이 풀린 다리가 그제야 후들거렸다.

“그럼 이제 뒷정리를 해도 되겠습니까? 리비에르 경.”

발터가 울타리 밖에서 웃고 있는 리비에르를 쏘아보며 낮게 물었다.

“정리? 하하 이미 다 끝났는데 그게 무슨…?”

그는 그녀의 말을 듣지도 않고 구석으로 성큼성큼 발을 옮겼다. 쓰러진 말라쿤의 목에 걸린 쇠사슬을 지탱하고 있는 말뚝으로 다가섰다.

“읏…!”

쇠사슬을 손목에 감고 말뚝을 통째로 잡아 뽑기 시작하자 울타리 밖에선 리비에르 기사들의 표정이 점점 굳었다.

지금 뭐 하는 거지…?

발터의 행보를 짐작할 수 있는 것은 세르노티의 기사들뿐이었다.

“…평소 같았으면 말렸을 텐데.”

팔짱을 끼고 중얼거리는 레나의 옆에서 얀이 가래침을 퉤, 뱉으며 말을 받았다.

“지금은 속이 다 시원하네.”

발터가 단단히 열이 받았다. 발트리가 그의 아들인 발터를 일찍이 가주로 세우지 않은 이유 중 하나는 발터가 간신히 억누르고 있는 성질 때문이라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스무 살을 기점으로 가주가 된 이후에는 불같은 성격을 눌러 오고 있었지만 지금 그의 상태는 참을 수 있는 한계를 넘었다.

“혜미가 있어서 저 정도지, 없었다면 리비에르고 뭐고 분명히 한 판 떴을 거라는데 내 이름을 건다.”

“동의해.”

힘을 주는 발터의 팔뚝에서 힘줄이 튀어나올 듯 불거지고 근육에 피가 잔뜩 몰려 터져나갈 듯 팽창이 되었다.

마침내 말뚝이 바닥에서 쑥 뽑혀 나가는 순간, 쓰려져 있던 말라쿤이 정신을 차리고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몸을 구속하고 있는 족쇄가 없어지는 것을 감지한 본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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