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8화 (28/72)

그가 가장 좋아하는 시간. 질문을 던지고 상대의 반응을 지켜보는 시간이었다.

“내가 교황을 시켜 그를 살게 했을까, 아니면 그냥 뒀을까?”

에리히는 대답을 망설이지 않았다. 그리고 그 대답은 여느 때처럼 그의 마음에 쏙 들었다.

강하게 내리는 비에 젖어 들어가는 황금성. 축축한 공기를 비집으며 크리스티앙의 만족스러운 웃음소리가 메아리치듯 울려 퍼졌다.

***

뼈마디가 시큰거리니 비바람이 몰려올 거라는 치매 영감의 말대로 로비나에는 줄곧 비가 내리고 있었다. 어릴 때 할머니가 무릎이 아프다고 하면 꼭 날씨가 궂어졌던 걸 생각하면 시대와 장소가 달라진다 해도 변하지 않는 무언가는 반드시 존재하는 것 같았다.

“춥지 않아?”

“응.”

앞서 걷던 발터가 뒤를 돌아보며 묻자 혜미가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비가 온다고 해서 언제까지 로비나에 머무를 수는 없는 일이었다. 기사들은 빗물이 새지 않는 가죽으로 만든 후드 망토를 뒤집어쓴 채 자일룬으로의 여정을 서둘렀다. 신발 안에 들어차는 빗물이 찝찝하게 느껴졌던 것도 길을 떠났던 처음 이틀뿐이었다. 기사들은 모두 하루빨리 목표지점에 도달해야겠다는 마음으로 열심히 행군 중이었다.

이제 이 산만 넘으면 자일룬이었다. 깎아지른 듯한 절벽을 굽이굽이 넘어가야 하기 때문에 말을 탈 수도 없었다. 절벽 아래는 깊이를 알 수 없는 푸른 폭포수가 넘실거리고 있었다.

“이럴 때면 진짜, 그 로즈라는 꼬마 마법사 능력이 너무너무 그립다! 그렇지 않아?”

얀이 얼굴로 들이치는 빗물을 손으로 닦아 내며 목소리를 높였다. 언제나 쾌활한 그의 수다는 모두가 지쳐 있을 때도 여전했다. 얀이 강아지같이 둥그런 눈을 굴리며 헤헤 웃었다.

“내가 마법사라면 지금 당장 손가락 하나 딱! 튕겨서 자일룬으로 이동할 수 있을 텐데 말이야.”

“네가 마법사라면 지금 여기서 우리랑 이러고 있겠냐? 당장 교황청이지!”

“그런가? 그럼 더 좋겠다! 어차피 우리의 최종 목표는 아메티스 입성이니까.”

킬킬거리는 기사들 틈에서 혜미는 아까부터 곰곰이 생각에 빠져 있었다.

“발터.”

“응.”

말고삐를 단단히 쥐고 폭이 좁은 절벽을 걸으며 발터가 그녀를 보았다.

“로즈가 그때 말했었잖아.”

“무슨 말?”

“네게도 마력이 희미하게 깃들어 있다고. 그게 무슨 뜻이야?”

발터의 주먹에 힘이 들어가는 바람에 그를 따라 걷던 말이 푸르릉, 하며 고개를 내저었다.

“…혹시 너도 다쳤었어? 그래서 교황이 너도 치료한 거야?”

잠시 멈추었던 발터가 이내 걸음을 옮기며 태연하게 대답했다.

“그의 치유 마력이 아무리 강하다고 해도 숨이 끊어진 지 한참이나 지난 자를 살려내는 데에는 시간이 필요하다고 했어. 내게 마력을 나눠 준 것도 아마 그 때문일 테고. 깨어나지 않았던 널 위해서.”

혜미가 곰곰이 생각을 하다가 그를 향해 어색한 눈길로 말을 망설였다.

“저기….”

발터가 그녀를 바라보며 걸음을 옮겼다. 애매한 표정을 짓는 혜미의 얼굴을 보니 슬며시 불안감이 앞섰다. 혜미는 그가 그녀의 주검 앞에서 스스로 목을 잘랐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굳이 알려야 할 필요도 느껴지지 않아 그 부분의 설명은 하지 않았었다.

“이런 거 물어보기… 나도 내키진 않는데 말이야, 발터.”

긴장하는 발터를 보며 혜미가 목소리를 잔뜩 낮추었다. 하지만 뒤이어 그녀의 입에서 튀어나온 말은 그의 예상을 현저히 벗어난 수준이었다.

“혹시… 너랑 베네딕트가 그… 함께 잔 거야…?”

발터가 우뚝, 걸음을 멈추었다. 짙은 눈썹이 위로 휘었다.

“지금 무슨 소릴 하는 거지?”

혜미가 붉어진 얼굴로 말을 이었다.

“내가 처음 깨어났을 때… 그러니까… 너랑… 침대 위에서 그러고 있었잖아…? 그게 내게 마력을 나눠 주기 위해서였다면…. 응… 그러니까 나랑, 아니 너랑 베네딕트도 설마….”

말을 하면 할수록 두서없이 꼬이는 느낌에 당황하자 발터가 그녀의 말을 중간에 딱 잘랐다.

“마력을 나누는 방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는데. 신체적 접촉 역시 그 방식 중 하나일 뿐이다.”

발터는 베네딕트의 설명을 떠올렸다. 마력은 공기 중으로도 이어질 수 있고, 언어로도 이어질 수 있다고.

“그러니까 널 매일 밤 안고 자며 마력을 나눈 건….”

발터가 인상을 지그시 찌푸렸다.

“그냥 내 선택이었다.”

그의 짙은 콧잔등에 주름이 잡히는 것을 보며 혜미는 알았다고 고개를 황급히 끄덕였다.

“…오해해서 미안해.”

“아니. 이제라도 물어봐 줘서 고맙군. 그런 식으로 오해를 받을 거라고는 개미 눈곱만큼도 상상을 해 본 적이 없는데.”

혜미는 자신의 엄한 상상력을 자책하며 말없이 걸음을 옮겼다. 며칠 전. 로비나를 떠나기 전날 밤에 꾸었던 꿈이 계속 머리를 맴돌고 있었다.

꿈인지 현실인지도 확실치 않은 그 상황에서 베네딕트와 몸을 섞은 것도 문제였지만, 다분히 일방적이었던 대화가 더욱 그녀를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아마도 베네딕트의 것인 듯한 생소한 기억들도 마찬가지였다.

환하고 아름다웠던 정원에서의 여자의 배는 분명 눈에 띄게 불러 있었다. 이틀 동안 생각해 본 결과 그녀는 아마도 자신의 어머니일 거라는 결론에 다다른 후였다.

그랬다면 왜, 베네딕트는 그녀의 앞에서 무릎을 꿇고 그리도 슬픈 눈을 하고 있었던 거지?

“저기, 발터….”

때마침 거친 바람이 불며 빗줄기가 거세지는 바람에 그녀의 목소리가 묻혔다.

“조금 쉬었다 가자!”

발터가 크게 외치자 기사들이 기다렸다는 듯 절벽의 벽 쪽으로 바싹 몸을 붙였다.

“아 진짜, 날씨 한번 개떡 같네. 비 때문에 앞이 하나도 안 보여.”

“날아가겠다, 아주.”

발터는 짐을 실은 말들을 단단히 단속했고, 기사들은 각자의 주머니에서 주전부리를 꺼내 소비한 열량을 채우기 시작했다.

“이거 먹어요, 혜미.”

그녀의 곁에 자리를 잡은 아일라가 로비나에서 챙겨 온 말린 바나나 칩을 내밀었다.

“고마워.”

아일라가 어깨를 으쓱하며 물병으로 목을 축였다.

“아일라, 근데 있잖아.”

혜미는 말린 바나나를 까드득 깨물며 그녀를 불렀다.

“나 뭐 하나 물어봐도 돼?”

돌부리에 말의 고삐를 단단히 묶고 있는 발터에게 물어보려 했지만 더 이상 그 일에 대해서 캐묻는 것은 좋지 않은 생각 같았다. 발터는 방금 전 그녀의 열린 질문에 상당히 불쾌해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으니까.

“하세요.”

아일라는 세르노티에서 분명히 우등생이었을 것이다. 발터 대신 그녀에게 물어볼 생각을 왜 진작 하지 못했을까.

“내가 역사 공부를 별로 안 좋아해서 말인데.”

“네.”

“이제 봤더니 그게 되게 중요한 것 같더라고.”

“음. 뭐가 궁금하신데요?”

“혹시 마법사의 능력에 관해서 아는 거 좀 있어?”

아일라가 얼굴에 비키는 빗물을 손으로 닦아 내며 고개를 저었다.

“마법사들에 관해서는 알려진 자료가 거의 없어요. 그나마 얼마 없는 자료도 황실이 극비로 관리하고 있다고 들었어요.”

혜미가 작게 한숨을 쉬었다. 역시 베네딕트에 대해서는 직접 알아보는 수밖에 없는 건가.

하지만 무슨 수로…?

이틀 전 밤의 일을 생각하자 괜스레 목덜미에 열이 올랐다. 만약 다음에 그를 만나는 일이 있다면 그따위로 그녀를 덮친 일에 대해서는 분명히 짚고 넘어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력을 주기 위해서도 아니었다면 대체 왜 다짜고짜 입부터 맞춘단 말인가.

“근데 그건 왜요?”

아일라의 물음에 혜미가 자신의 허리에 차고 있는 검에 눈길을 주었다. 손잡이에 붉은 보석이 박힌 검은 그냥 보기에는 평범한 스피어였다.

“아일라. 너 혹시 데우스 엑스 마키나라고 들어봤어?”

“그게 뭐죠?”

“음… 쉽게 말하면 막다른 상황에서 짠하고 튀어나와서 모든 문제를 뚝딱 다 해결해 주는 거.”

“그런 게 실제로 존재한다면 저도 가지고 싶네요.”

“이게 꼭 물건만을 뜻하는 건 아닌데…. 암튼 그때 우리가 카플란이랑 전쟁했을 때 말이야.”

“네.”

“얼어붙은 강이 쩍쩍 갈라지면서 한 번에 녹은 걸 보면… 대마법사의 보석이 뭔가 한 건을 한 것 같긴 하단 말이야.”

“아…. 그래서 마법사의 능력에 대해서 궁금해지신 거네요.”

“응. 어디까지 할 수 있을지, 어디까지 가능한지 궁금해지는 게 당연하니까.”

“만약 그 보석이 그 정도로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다면….”

아일라가 잠시 생각하다 말을 이었다.

“혜미가 이 고생을 하면서 힘들게 아메티스까지 갈 이유는 없는 것 같아요.”

“역시 그렇겠지?”

혜미의 결론도 늘 그녀와 같았다. 하루빨리 자일룬으로 가야 하는데 빗줄기는 잦아들기는커녕 점점 굵어지고 있었다. 하늘은 온통 시꺼먼 구름으로 뒤덮인 채였다. 길게 한숨을 쉰 후, 벽에 등을 기댄 채 혜미가 그녀에게 지나치듯 물었다.

“그럼 혹시 선대 황제나 황후에 대해서도… 잘 모르지?”

“그건 좀 알아요.”

별 기대 없이 물어본 질문이었는데 예상치 못한 답이 돌아왔다.

“정말?”

아일라가 대답 대신 꾸러미를 뒤적거리더니 무언가를 꺼내 들었다. 가죽으로 된 양피지 뭉치를 받아 들고 혜미가 눈을 깜빡였다.

“이게 뭐야?”

“세드릭 님께서 챙겨 주셨어요.”

“세드릭이…?”

“혜미가 나중에 자신의 출생에 대해 물어볼 날이 오면 그때 이걸 전해 주라고요.”

새삼 세드릭의 철저한 준비성에 감탄이 나오는 순간이었다. 혜미가 그의 자료를 덥석 쥐며 감탄하자 아일라가 어깨를 으쓱했다.

“세드릭 님이 예상하셨던 것보다 좀 일찍 물어봐서 놀랐네요.”

“으응?”

“혜미의 성격대로라면 아마 아메티스에 입성했을 때쯤 되어서야 궁금해할 거라고 하셨거든요.”

아아 진짜. 밉상.

“세드릭 걔는 도대체 날 뭘로 보고 있는 거야? 그냥 너한테 뻐기면서 잘난 척하려고 나 이용하는 거 아냐?”

“안 읽고 세드릭 님 험담하실 거면 그거 도로 주세요.”

“이, 읽을 거거든? 아일라 너 은근히 성격 급한 거 아니?”

“그런 소리 가끔 들어요. 고치려고 하는데 이게 좀 어렵네요. 세드릭 님께서도 제 급한 성격이 검술에서 드러난다고 자주 지적을 하셨었는데….”

혜미는 갑자기 진지한 얼굴로 자기반성을 시작한 아일라를 내버려 두고 그녀가 건네준 양피지 뭉치를 들추었다. 그곳에는 세드릭이 훗날 그녀를 위해 준비한 정보들이 일목요연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트리스탄 루드비히 클라웨 8세>

그녀의 생물학적 아버지의 이름을 보았지만 아무런 느낌이 들지 않았다. 혜미는 무릎을 세우고 돌벽에 등을 기댄 채, 세드릭의 반듯한 필체를 읽어 나갔다.

제2 황자였던 트리스탄은 15세의 나이에 교황이었던 베아트리체의 보석을 받아 황태자로 책봉된다. 대마법사인 베아트리체는 당시 25세로 그녀에게는 마법사 간의 교배를 통해 얻은 아들이 있었는데, 이 아들이 현 교황인 베네딕트 블라이.

‘…뭐야….’

첫 문단부터 새로운 정보들이 와르르 쏟아지는 기분이었다. 일단 그녀를 놀라게 한 것은 그녀의 아비, 즉 클라웨 8세가 두 번째 황자였다는 사실이었다. 첫 번째 황녀였던 자신을 일찍이 후계자로 책봉하였다는 말을 듣고, 막연히 그가 장자나 외아들일 거라고 생각했었는데 제2 황자였다니. 그럼 1 황자는 어떻게 되었다는 이야기일까.

아마도 죽었을 거라는 예감이 강하게 들었다.

베네딕트의 어머니가 선대 교황이었다는 것도 새로 안 정보였다.

교황도 설마 대를 잇는 걸까…? 마법사 간의 ‘교배’라는 표현은 또 뭐지?

그가 허튼소리를 하는 성격은 아니었지만 세드릭의 단어선택이 찝찝한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혜미는 미간을 모은 채 다음 문단을 보았다.

3년 뒤 18세의 나이로 황위 즉위식을 치른 클라웨 8세는 교황청을 화려하게 증축시키고, 대마법사를 포함한 모든 마법사가 수도 아메티스를 벗어나는 경우 사형에 처하는 강력한 법을 제정한다. (황명 제외)

무슨 죄수들도 아니고. 마법사들을 본격적으로 핍박하기 시작한 역사가 그녀의 아버지였다니. 이마에 번호를 문신으로 새기고 있던 로즈와 타우가 떠오르자 슬그머니 죄책감이 일었다.

클라웨 8세 재위 초기.

황제는 자신의 20대를 남쪽 지방의 정복 전쟁에 힘을 쏟으며 보낸다. 당시 교황이었던 베아트리체는 치유 마력이 강한 대마법사였기 때문에 전장에 있던 황제와 24시간 함께 지내는 임무를 수행한다.

재위 5년 차, 남부 지방 정복 전쟁에서 클라웨 8세가 교황의 부재중 부상을 입는 사건이 일어난다. 대마법사가 탈주하여 교황청으로 자신의 아이를 보러 갔던 일로 원로원은 극노, 대마법사 베아트리체를 맹렬히 비난하지만 클라웨 8세는 원로원의 고위 귀족들 앞에서 교황의 발목을 부러뜨리며 수치를 주는 것으로 형벌을 대신한다.

당시 베아트리체는 치유 마력을 자신에게 사용하지 않았기 때문에 선대 교황은 죽을 때까지 절름발이로 살았다고 알려져 있다.

혜미의 입술 새로 절로 희미한 탄식이 샜다. 그녀의 아비라는 전대 황제는 미친놈이었나? 크리스티앙의 잔인한 성정은 유전인 듯 보였다.

혜미는 서둘러 그 다음 장을 훑었다. 세드릭은 그의 성격대로 정보를 나열할 뿐 사견을 제시하지 않았기 때문에 모든 것은 그녀가 느끼는 대로 받아들여야 할 뿐이었다.

클라웨 8세 재위 12년.

미혼이던 클라웨 8세는 원로원의 강력한 의견에 따라, 서른 살의 늦은 나이에 남부 지방 정복 전쟁에 가장 많은 물자를 지원한 공작가의 여식, 다니엘라 빌테레를 황후로 맞이한다.

대한민국에서 서른 살은 더 이상 결혼에 늦은 나이가 아니었지만 이곳 클라웨 제국에서는 아마 그러할 것이다. 게다가 대를 이어야 하는 황제의 경우에는 더더욱.

‘그나저나 다니엘라…였구나.’

처음 듣는 그녀의 어머니의 이름이었다. 황녀 에데르트를 낳고 곧 죽었다는, 그래서 결혼 생활을 길게 가지지도 못했다는 비운의 황후였다.

황후 다니엘라가 황녀 에데르트를 임신했을 때, 클라웨 8세는 차기 교황 자리에 베아트리체의 아들인 베네딕트의 이름을 올린다. 원로원은 17세 소년에 불과했던 베네딕트 블라이의 능력에 의심을 품었으나, 그의 마력이 어미인 베아트리체를 뛰어넘음을 인지한 후 그를 교황으로 인정한다.

“그대가 나의 아이와 각인할 사람이라 안심이 되어요.”

다니엘라를 바라보던 물빛 눈동자 그리고 그 눈동자에 스치던 부드러운 은발이 떠올랐다. 앞머리를 겨우 가리는 짤막한 길이였지만 그런 색의 머리카락을 쉽게 잊을 수는 없었다.

“역시… 베네딕트였어.”

“네?”

그녀의 곁에서 물을 마시던 아일라가 고개를 돌렸다. 혜미는 뭐라고 답을 해야 할지 몰라 그저 애매하게 어깨를 으쓱했다.

“아… 교황에 대해서 생각하고 있었어. 여기 보니까 열일곱 살에 교황 됐다고 쓰여 있네. 나 같았으면 의무고 뭐고 다 때려치우고 싶었을 텐데.”

“대마법사들이 모두 힘든 길을 걸었던 건 사실이죠.”

아일라가 작게 중얼거리며 그녀의 말에 동의했다.

“음유시인들의 노래에 따르면 그의 어머니였던 선대 교황은 클라웨 8세의 죽음과 함께 무덤에 같이 매장되었다는 소리가 있거든요.”

“…응? 설마 산 채로?”

“역사서에는 마력을 다 사용한 후, 평범한 범인이 되어 저잣거리로 돌아갔다고 쓰여 있다는데… 사실은 함께 순장되었을 거라는 설이 지배적이에요.”

혜미의 눈이 둥그렇게 뜨였다. 빗줄기는 점점 더 거세지고 있었다. 이대로라면 잉크가 엉망으로 번져 글씨를 알아볼 수가 없을 것 같았다. 그녀는 양피지를 둥그렇게 말아 품 안에 끼운 후, 아일라를 향해 목소리를 낮추었다.

“설마… 교황들은 다 그딴 식으로 죽어야 해?”

황제가 죽으면 산 채로 함께 생매장이라니. 이게 무슨 야만적인 방법이란 말인가.

“다 그런 식은 아니었지만 모두 끝이 좋지는 않았대요.”

“끝이 좋지 않다는 게 무슨 말이야?”

“다들 황제를 위해 마력을 소진해 정신이 나가 버리거나, 자살하는 방법을 택했다고 들었어요.”

“그건 너무… 불행하잖아.”

“어쩔 수 없잖아요.”

아일라가 빗물을 막는 덮개를 조금 더 앞으로 씌우며 작게 덧붙였다.

“그게 황실에 충성해야 하는 그들의 운명이었으니까요.”

혜미가 고개를 돌려 정면을 바라본 채 길게 숨을 내쉬었다. 비가 많이 내려 떨어진 기온 탓에 내뿜는 숨결이 하얗게 눈앞에서 번졌다.

“…….”

혜미는 잠시 자신이 베네딕트의 입장이라면 어떨까, 하고 생각해 보았다.

어머니가 그런 식으로 잔인하게 죽었다면 나는 어떠한 기분이 들까. 첫째로는 어머니를 그렇게 만든 사람이 증오스러울 것 같았다.

두 번째로는 자신 역시 어머니의 전철을 밟게 될까 두렵고 싫을 게 분명하다.

“그 여자의 아들인 제가… 밉지 않으세요?”

소년 베네딕트의 떨리는 말투가 머릿속에 떠올랐다. 베네딕트가 말하는 ‘그 여자’는 분명 선대 교황이었던 베아트리체를 말하는 것일 테다. 보통 사람이 어머니를 지칭하는 표현으로 자주 쓰일 말은 아니었다.

베네딕트는 그의 부모와 유대감이 적었던 걸까. 베아트리체가 선대 황제와 각인했을 때 그는 갓 태어난 아기에 불과했다고 했다. 황제가 전장에서 보낸 긴 시간 동안 그가 베아트리체를 만날 기회는 거의 없다시피 했을 것이다.

“당신에게 소중한 것은 제게도 소중합니다. 평생 제 본분을 다하면서 살게요. 주제넘게 굴지 않을게요.”

대마법사의 본분이라면 황실을 위해 죽을 때까지 충성하는 것을 말했다. 입술을 꽉 깨문 후, 떨리는 목소리로 내뱉는 소년의 말투는 거짓이 아니었다. 그의 태도는 흡사 맹세라도 하는 것처럼 진지했다.

그 말을 했을 때 베네딕트는 도대체 무슨 심정이었을까.

아름다운 갈색 머리의 여자, 황후 다니엘라는 그런 그를 향해 슬픈 눈으로 미소를 지었다. 연민이 담긴 눈동자였지만 그 이상은 아니었다. 그녀는 무척이나 외롭고 지쳐 보였다.

“아아. 미안해요. 햇살에 눈이 부셔서.”

따스한 햇살이 비쳐드는 공간에서 미간을 우아하게 찌푸린 그녀의 눈동자에 눈물이 차올랐다. 꽉 막힌 공간, 바람 한 점 들어올 틈이 없는 곳 어딘가에서 꽃향기를 담은 미풍이 불어온다. 그녀를 위해 마법을 부린 베네딕트를 보며 눈물이 고인 얼굴로 황후가 웃었다.

“가여운 사람. 부디 자신도 소중하게 여기기를. 불행해지지 않기를.”

설마….

베네딕트가 황후를 좋아하기라도 한 걸까?

두근.

심장이 큰 소리를 내며 뛰었다. 그녀의 시선이 저절로 허리에 찬 검을 향해 내리깔렸다. 붉은 보석이 희미하게 빛을 낸다고 느껴지는 순간, 바람이 거칠어지며 돌풍이 불었다.

히잉!

자잘한 돌가루가 몸을 때리자 말들이 동요하며 앞다리를 치켜들었다. 혜미가 품 안에 끼고 있던 양피지가 공중에 흩어진 것도 동시에 일어난 일이었다.

“어… 어…!”

그녀는 허망하게 날아가는 양피지를 붙잡으려 손을 뻗었다. 빼곡한 정보를 아직 다 읽지도 못했는데 이대로 날려 보낼 수는 없었다.

“혜미, 위험해요…!”

아일라가 놀라 소리를 질렀을 때는 이미 일이 벌어진 후였다. 비에 흠뻑 젖은 진흙탕을 밟는 순간, 혜미는 그 아래가 까마득한 낭떠러지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아. 이런…!

훅, 하고 바람이 얼굴을 감싸며 몸이 아래로 추락하고 있었다. 혜미는 본능적으로 허리에서 칼을 뽑아 들고 뒤로 꽂았다.

타르륵.

기다란 검이 돌벽을 그으며 두 동강으로 부러졌다. 지지할 곳을 찾지 못한 칼 손잡이를 부여잡고 혜미는 아래로 다시 추락했다.

“흐읏…!”

짧아진 칼끝에 힘을 주자 돌벽 사이의 틈에 간신히 칼날이 꽂혔다. 내려다보기만 해도 아찔한 폭포수 속으로 팔랑팔랑 사라지는 양피지가 보였다.

“젠장, 이든!!!”

발터가 달려와 그녀를 내려다보며 일그러진 얼굴로 포효했다.

“바… 발터….”

칼 손잡이를 간신히 쥐고 매달려 있는 혜미를 본 그는 행동을 망설이지 않았다. 자신의 몸에 밧줄을 묶어 기사들에게 던진 후, 절벽 아래로 몸을 날렸다. 발터는 한 번에 그녀가 있는 곳까지 다가왔다. 그녀의 허리를 강하게 휘어 감으며 발터가 짧게 물었다.

“괜찮아?”

혜미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얼굴을 적시며 쏟아지는 비에 시야가 흐릿했지만 그녀를 바라보는 발터의 갈색 눈동자는 선명했다. 흠뻑 젖은 머리카락에서 물방울을 뚝뚝 떨어뜨리며 발터가 그녀에게 낮게 내뱉었다.

“아래 보지 말고 하나, 둘, 셋 하면 올라간다.”

“응.”

발터가 숫자를 세는 순간, 혜미는 돌부리 속에 박힌 검을 거칠게 빼내며 힘껏 위로 발을 굴렀다.

“줄을 당겨!”

발터의 신호와 함께 기사들이 밧줄을 잡아 끌어 올렸다.

“젠장…! 바람이 너무 심해!”

폭풍에 두 사람의 몸이 위험하게 흔들렸다. 위에서 그들을 잡고 있는 기사들도 휘청거리기는 마찬가지였다. 진자 운동을 하는 것처럼 벼랑에 세게 몸이 부딪치려는 순간, 발터가 발로 벽을 짚으며 충격을 간신히 흡수했다.

“줄을 타고 그냥 올라간다! 단단한 곳에 밧줄만 지지해!”

빈센트와 기사 여럿이 달려들어 밧줄을 끌어당겨 커다란 바위에 단단히 묶었다. 강풍에 몸을 움직이기조차 힘이 들었다.

“날 꽉 잡아.”

발터가 절벽 중앙에 매달린 채, 혜미에게 속삭였다. 혜미는 그를 꽉 잡은 채 덜덜 떨리는 턱을 간신히 붙였다.

밧줄을 잡은 발터의 팔뚝에 핏줄이 거칠게 불거졌다. 줄타기는 훈련 시 수도 없이 많이 했다. 아래가 보는 것만으로도 까마득한 낭떠러지였던 적은 없지만 본질은 변하지 않는다. 그의 아버지는 말했었다. 할 수 없는 것을 생각하지 말고 할 수 있는 것을 생각하라고.

지금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최대한 빠른 속도로 위로 올라가서 그녀를 구하는 것. 발터의 양손이 굵은 밧줄 위를 타기 시작했을 때였다.

번쩍. 번개가 하늘을 밝히더니 주변을 무너뜨릴 듯한 천둥이 내리쳤다.

우르릉. 쾅!

밧줄을 타던 발터의 미간이 순간 일그러지며 중앙에 모였다. 젠장. 그가 줄을 놓은 후, 암벽에 튀어나온 돌부리를 맨손으로 움켜쥐었다.

“…발터?”

“밧줄을 끊어.”

그가 혜미를 향해 빠르게 내뱉은 것과 위에서 누군가가 소리를 지른 것은 거의 동시에 일어난 일이었다.

“엇!!! 산이 무너지고 있어!”

“조심해…!!! 피해!!!”

지지하기 위해 밧줄을 묶은 바위가 서서히 뽑혀 나가고 있었다. 강한 바람과 폭우에 일어난 산사태였다.

“제기랄…!”

굴러오는 돌덩이를 보며 혜미가 칼을 들어 발터의 몸을 묶은 굵은 밧줄을 자르기 시작했다. 돌이 아래로 떨어져 그 무게를 감당해야 한다면 그대로 추락이었다. 한 손으로는 발터의 몸을 끌어안고 있었기 때문에 힘을 주는 것이 여간 쉽지가 않았다.

“흑… 제발…. 제발…!”

날이 부러진 칼로 간신히 밧줄을 잘라 내는 순간, 바위가 아래로 떨어졌다.

“흣…!”

커다란 돌덩이가 발터의 어깨를 스치듯 때리고 추락했다.

“아악…!”

그 반동에 혜미가 주르륵, 그의 몸을 타고 미끄러지자 발터의 한 손이 그녀의 팔목을 간신히 낚아채듯 잡았다.

“하아…. 하…!”

한 손으로는 돌벽을 잡은 채, 다른 한 손으로는 혜미의 팔목을 잡은 발터의 온몸에 핏줄이 툭, 툭, 불거졌다.

“…발터.”

발터의 손목을 마주 잡은 혜미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바람이 너무 거칠었다. 위에서는 자잘한 돌덩이들이 계속 떨어지고 있었고, 아래에는 비에 불어난 폭포수가 엄청난 물살로 소용돌이치는 소리가 들렸다.

“올라와. 할 수 있다.”

발터가 그녀를 꽉 잡은 채 잇새로 낮게 내뱉었다. 그에게 매달려 위로 올라가려고 안간힘을 썼지만 무리였다. 바람 때문에 몸은 마구 흔들리고 빗물과 땀에 젖어 미끄러운 손에는 점점 힘이 빠지고 있었다.

“바, 발터….”

혜미가 그를 보며 눈을 일그러뜨렸다. 한 손으로 버티고 있는 발터가 그녀의 무게를 언제까지 감당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은 탓이었다. 그녀가 손에 쥔 대마법사의 보석은 아무런 소용도 없었다. 데우스 엑스 마키나는 빌어먹을…!

이 세계에서 결국 이렇게 죽는 걸까. 거친 숨결이 그녀의 입술을 타고 흘렀다. 좋다. 이 상태로 머리가 깨지면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한 채로 그녀의 방 안에서 졸린 눈을 뜨며 일어나기를 기대할 수도 있으니까. 하지만 발터는…? 잘못한 게 아무것도 없는 발터까지 저승으로 끌고 갈 수는 없었다.

“발터. 나… 나, 안 되겠어. 그러니까, 그… 그냥….”

그녀의 속을 안다는 듯 발터가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다.”

돌벽을 간신히 붙들고 있는 그의 맨손에 점점 힘이 빠져 갔다. 기사들이 간신히 던진 밧줄은 바람 때문에 멀리 날려 잡기가 불가능하다.

“내가 하나, 둘, 셋, 하면….”

발터가 그녀를 보며 낮게 속삭이듯 내뱉었다.

“눈을 감는 거야.”

3초. 그가 버틸 수 있는 최대 시간이란 뜻이었다. 작별 인사를 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하나.”

미안해 발터. 혜미가 일그러진 눈동자로 그에게 속삭였다.

“둘.”

이번 생에 함께해 줘서 고마웠고 다음 생에는 되도록 만나지 말자. 빗물인지 눈물인지 모를 뜨거운 것이 뺨 위에 흘렀다.

“셋.”

안녕. 속으로 작별 인사를 끝낸 혜미가 눈을 질끈 감았다. 발터의 손을 놓고 홀로 떨어지려 했지만 불가능했다. 절벽에 매달려 있던 오른손을 놔 버린 쪽은 발터였다. 발터는 자유로워진 양팔로 그녀를 품에 끌어안았다.

“바, 발터….”

바람이 얼굴을 마구 때려 숨을 제대로 쉴 수가 없다. 까마득한 절벽 아래를 향해 엄청난 속도로 추락하며 혜미가 발터의 옷깃을 꽉 틀어쥐었다.

“너 미쳤어…?”

그녀의 보랏빛 눈동자가 눈물에 젖어 엉망으로 흔들렸다. 발터가 외치는 소리가 바람결에 흘러들었다.

“이제부터 백을 셀 거야!”

“뭐… 뭐?”

발터의 품 안에서 혜미가 물기가 가득한 얼굴을 들었다. 그녀를 위해 절벽에서 몸을 날린 남자가 인상을 찌푸리며 웃고 있었다. 어떻게… 왜…? 미친 거 아니야…? 혜미는 가슴에서 울컥거리는 속말을 차마 내뱉을 수가 없어 그의 가슴을 꽉 움켜쥘 뿐이었다.

“셋까지 셌으니 아직 한참 남았어.”

물살이 불어날 대로 불어난 폭포수. 하얀 물보라가 치는 수면을 몸이 뚫기 직전, 그녀의 머리를 감싸며 귓가에 내뱉는 발터의 목소리가 또렷했다.

“누가 오래 잠수하는지, 내기하는 거다.”

여기가 어디지?

분명 엄청난 물살이 얼굴을 때리며 휩쓸려 나가는 것이 마지막이었는데, 눈을 떠보니 주변은 그저 어둡고 컴컴한 공간이었다.

…저승인가?

공간은 마치 불 꺼진 극장과도 같았다. 내부가 얼마만큼 큰지도 그 안에 누가 있는지도 알 수가 없었다. 깜깜한 주변을 둘러보던 혜미의 시야에 무언가가 들어왔다. 마치 자리를 표시하는 비상등처럼 하얀 돌이 바닥에 일정한 간격을 두고 박혀 있었다.

혜미는 홀린 듯이 하얀 돌을 따라 걸었다. 한 걸음, 한 걸음 앞으로 내디딜 때마다 어둠의 밀도가 더욱 짙어지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분명 평면적인 길이었는데 마치 깊은 굴속으로 파고들어 가는 느낌이라고 할까. 대체 어디까지 이어진 거야.

‘…문?’

순간 불안해져 걸음을 멈춘 혜미의 눈에 보인 것은 툭 튀어나온 문고리였다. 혜미는 지금껏 걸어온 길을 뒤돌아보았다. 이제 봤더니 하얀 돌이 박혀 있는 곳마다 벽에 희미한 문고리가 있었다.

바깥으로 통하는 문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자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문고리를 잡는데 희미한 열기가 느껴졌다. 문을 확 열자마자 얼굴에 끼치는 뜨거운 화염에 혜미가 뒤로 물러서며 눈살을 찌푸렸다.

문 뒤는 불에 활활 타고 있는 커다란 방이었다. 고풍스럽고 화려한 가구들로 장식이 된 방에 정신을 잃고 쓰러진 여인이 보였다. 그 옆에서 쿨럭이던 어린 꼬마 아이가 그녀를 흔들며 울고 있다. 여자아이의 얼굴을 본 혜미가 미간을 찡그리는 순간 날카로운 파열음이 들렸다.

쨍그랑!

유리를 깨부수고 나타난 누군가가 울고 있는 아이를 품에 안았다.

“에데르트 폐하!”

어린아이를 품에 안고 일어서는 남자는 발터와 묘하게 닮은 인상이었다. 그녀는 그가 세르노티의 전대 가주인 발트리라는 사실을 직감했다. 그리고 그의 품에 안긴 꼬마 아이가 어린 그녀라는 사실도.

“으흑…. 으흐윽…!”

발트리의 품에 안긴 어린 황녀 에데르트가 눈물로 엉망이 된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머리카락이 지금보다 훨씬 길고 레이스로 된 드레스를 입고 있는 인형 같은 모습이긴 하지만 그녀가 자신의 얼굴을 모를 수는 없었다.

발트리가 문을 향해 달리자 에데르트가 쓰러진 유모를 향해 손을 뻗었다.

“비비아나… 으흐윽…!”

발트리가 주춤하다 다시 뒤를 돌았다. 그리고 바닥에서 뒹굴고 있는 붉은 보석 목걸이를 집어 들었다. 에데르트가 그게 아니라는 듯 고개를 저으며 울먹였다.

“유모, 유모는… 흐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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