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7화 (27/72)

대마법사. 교황. 그녀를 살려 내고 영혼을 되돌아오게 만든 남자이자 그녀가 이 모든 문제의 시발점을 알기 위해서 반드시 만나야 할 사람!

그가 그녀의 마음을 읽은 듯 연한 입술로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상체를 천천히 일으켰다. 별빛을 머금은 기다란 은발이 인간의 것이라고는 믿을 수 없는 환한 나체를 따라 공중에서 흔들린다.

“베… 베네딕트…!”

혜미가 마침내 생각난 이름을 외치며 손을 뻗은 순간 눈이 번쩍 뜨였다.

“하아…. 하아….”

희미한 새벽빛이 밝아 오고 있는 객실에는 아무도 없었다. 심장이 쿵쿵 커다란 소리를 내며 뛰었다. 혜미는 벌떡 상체를 일으킨 후,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꽉 움켜쥐었다.

아직도 관계 후의 느낌이 생생하게 남아 있는 것 같은 아랫도리에서 주르륵, 무언가가 흘러내렸다. 혜미는 얼굴을 붉히며 자리에서 일어나 무의식적으로 검을 낚아챘다. 방 안을 휙휙 둘러 보았지만 여전히 공간은 조용했다. 창문은 단단히 잠긴 상태다.

‘대체…. 왜….’

가빠진 숨결이 그녀의 입술 새로 흘렀다.

‘그런 이상한 꿈을 꾼 거지…?’

물론 베네딕트를 꼭 만나고 싶다고 생각은 했다. 이 상황에서 그녀가 붙잡을 이는 그뿐이었으니까. 하지만 베네딕트를 떠올리며 이런 종류의 상상을 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녀가 제대로 기억하는 그와의 만남은 이 세계로 소환되기 직전일 뿐이었다.

그런데.

혜미는 아랫도리를 확인하곤 얼굴을 붉혔다. 인큐버스나 몽마의 존재를 믿는 것은 아니었지만 혹시 그녀가 그런 유령에라도 쓰인 것은 아닌지 의심이 갈 지경이었다.

‘아냐. 그냥 로즈에게 이상한 이야기를 들어서 그런 꿈을 꾼 것뿐이야.’

혜미는 지금쯤 세르노티에 도착해 있을 로즈와 타우를 떠올렸다.

“언니한테… 있어야 할 게 없어요.”

“…그게 뭔데?”

“아기집이요.”

로즈가 작은 목소리로 덧붙인 말을 듣고 나서야 혜미는 그녀가 이 세계에서 한 번도 생리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발터가 건네준 피임차의 영향이라고만 단순히 생각했었는데.

하지만 곧 그녀는 좋은 게 좋은 거라고 단순히 생각하기로 맘을 먹었다. 베네딕트가 죽은 그녀를 살려 내면서 거추장스러운 달 손님을 없애 준 이유에 대해서는 굳이 생각을 하지 않으려 했었다.

괜히 마음이 싱숭생숭해서 별 이상한 꿈을 다 꾼 것이다. 마법사 꼬마들을 만나고 머리가 혼란스러워져 그런 것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머릿속에서 떠오른 알 수 없는 기억들은 과연 뭘까. 햇살이 눈부신 화려한 실내 정원은 세르노티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장소이니 발터에게 들은 이야기일 리 만무했다.

대체 뭐지.

똑똑.

갑자기 들려오는 노크 소리에 방 안에서 서성거리던 혜미가 번쩍 고개를 들었다. 문 뒤에서 발터의 목소리가 들렸다.

“이제 슬슬 출발을 준비할 시간이다, 혜미.”

어느새 날이 밝아 아침이었다. 커튼 사이로 희미한 새벽빛이 비쳐 들었다.

“응! 자… 잠시만 기다려 주면 금방 나갈게!!!”

아무리 꿈이었다고 해도 지금 이 상황에서 발터의 얼굴을 보기가 민망했다. 축축한 속옷을 갈아입은 후, 서둘러 옷을 꿰는데 손끝에 이상한 이물감이 들었다.

투두둑.

혜미는 마룻바닥에서 반짝이는 것들을 보며 인상을 천천히 구겼다. 그리고 자신의 손톱 밑을 내려다보았다.

“…….”

꿈속에서 베네딕트의 등을 마구 긁었던 그녀의 손톱 아래, 자잘한 보석 알갱이 같은 붉은 보석이 붙어 반짝거리고 있었다.

‘꿈이… 아니었어?’

사흘째 내린 비로 도시 전체에 황량한 회색빛이 감돌았다. 제국의 모든 권력과 부가 집중되는 도시인 아메티스는 태양이 높이 떴을 때가 가장 아름다웠다.

그 아름다움의 정점을 이루는 것이라면 역시나 도시 한가운데에 위치한 황금성이었다. 하늘을 찌를 듯 날카로운 첨탑 위에 태양이 정확히 걸리는 모습은 마치 한 폭의 웅장한 그림 같았지만 비 오는 날은 달랐다. 추적거리는 빗방울이 흘러내리는 새하얀 회벽은 빛바래 초라한 느낌을 주었다. 마치 멸망해 없어진 나라에 버려진 어두운 성터처럼.

크리스티앙은 기다란 세티(settee)에 늘어지듯 몸을 기댄 채, 장식 유리에 연신 빗금을 그으며 떨어지는 빗방울을 한참 동안이나 응시했다.

내일쯤이면 비가 그치려나.

계속되는 불면에 몸은 무겁고 컨디션은 엉망이었다. 딱 두 시간만. 아니, 딱 한 시간만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고 깊이 잠들었다 깨어날 수 있다면 좋겠다고 그는 생각했다. 이렇게 축축하고 어두운 날, 그 어떤 음습한 사건이 일어나도 이상하지 않을 날씨에 잠드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은 스스로가 누구보다 더 잘 알고 있지만.

무표정하게 창밖을 바라보던 크리스티앙이 무릎에 놓인 두꺼운 책으로 다시 시선을 돌렸다. 빗소리만이 울려 퍼지는 조용한 공간에 간간이 책장을 넘기는 소리가 뒤섞였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준비를 권하는 시종의 말에 크리스티앙은 쓰고 있던 안경을 벗고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숨소리도 없이 대기하고 있던 시녀가 기다렸다는 듯 다가와 그의 옷 시중을 도왔다.

연푸른색의 기다란 제복은 크리스티앙의 흰 피부와 황금빛 머리칼을 돋보이게 하는 색이었다. 며칠간 잠을 이루지 못했음을 증명하듯 그의 눈 밑이 어두웠지만 젊은 황제의 눈부신 외모에 오점을 남길 수준은 아니었다.

제국에서 가장 아름답다는 이유로 선대 황제의 두 번째 황후로 발탁된 그의 어미, 카트린을 빼닮은 얼굴이었다. 다른 점이 있다면 인상만큼은 선하고 정숙했던 태후와는 달리 크리스티앙의 날카로운 외모는 검붉은 장미처럼 색정적이라는 것이었다. 그의 전속 시녀마저 가끔 넋을 놓고 바라보게 될 만큼이나.

툭.

크리스티앙은 옷에서 바닥으로 허망하게 떨어지는 단추를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고집스레 다물린 붉은 입술이 슬쩍 벌어지며 낮은 한숨이 샜다. 빗줄기가 잦아들기는커녕 오히려 굵어지는 것을 새벽에 본 이후, 오늘 하루가 재수 없는 날이 될 거라는 것은 이미 감지했다.

“소, 송구합니다. 폐하. 지금 즉시 다른 의복을….”

시녀가 죽을죄를 지었다는 얼굴로 말을 더듬었다. 크리스티앙은 됐다는 뜻으로 가볍게 손을 물린 후, 얼어붙은 시녀를 지나쳐 회의장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는 비 오는 날을 그리 좋아하지 않았다. 아메티스는 본래 비가 적은 지방이었지만 1년 중 비 오는 날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었다. 빛이라고는 한 줌도 찾을 수 없이 태양이 자취를 감춘 축축한 날이면 몸속에서 원인을 알 수 없는 짜증이 들끓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황제 폐하께서 오십니다.”

원로원 회의를 위해 모여 있던 귀족들이 일제히 자리에서 일어나 예를 표했다. 천장이 높은 대회의장. 본래라면 정오의 태양이 환하게 들이쳐야 할 곳이었지만 우천 탓에 어둑어둑한 실내를 수백 개의 촛불이 환하게 밝히고 있었다.

크리스티앙은 그들을 지나쳐 중앙 상석으로 발걸음을 옮기며 길게 늘어진 의자의 개수를 속으로 하나하나 셌다. 열두 개의 의자 중 두 개가 비어 있었다. 몇 달 전 하이데거의 손에 의해 목이 잘린 귀족들의 것이다.

화려한 의자를 빼내는 시종 뒤, 중앙 상석에서 조금 떨어진 구석에 얼굴을 베일로 가린 채 마치 석상처럼 서 있는 베네딕트가 보였다. 갑자기 퀴퀴하고 불쾌한 냄새가 코끝까지 치미는 기분이 들었다. 크리스티앙은 뾰족한 콧날을 우아하게 찡그리며 고개를 정면으로 돌렸다.

“날씨가 궂은 날 모이느라 다들 고생이 많으셨네.”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폐하.”

“폐하께서 부르시는 곳이라면 시간과 장소를 불문해야 할 것입니다.”

황제에게 집중되는 원로원의 눈동자가 제각각의 욕망을 대변하며 빛을 냈다. 열두 개로 갈라진 제국의 각 지방을 대표하는 귀족들로 이루어진 원로원 역시 눈엣가시이기는 마찬가지였다. 교황청과 원로원. 둘 다 죽여 버리고 싶지만 순서를 따진다면 누가 먼저일까. 아니, 어느 쪽이 더 재미있을까.

따분한 시간을 타개하기 위해 머릿속으로 즐거운 상상을 하며 크리스티앙이 빙긋 웃었다.

“그럼 시작할까?”

젊은 황제의 명령이 떨어짐과 동시에 분기별로 이루어지는 공식적인 원로원 회의가 시작되었다. 회의의 주된 쟁점은 역시나 동쪽의 국경지대에서 지난하게 이어지고 있는 전투 상황이었다.

“자일룬에서 들리는 새 소식은 아직 없습니다. 그리 좋지 않은 상황으로 간주됩니다.”

“말라쿤의 기세를 잡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닐 테니까요. 리비에르가 이끄는 군사 지휘관의 대부분이 일생 동안 검을 잡아 본 적도 없는 이들이라 들었습니다”

크리스티앙은 그 말투에 깃든 희미한 불만을 감지했다. 유서 깊은 가문의 최고 귀족들로 이루어진 원로원이다. 노예 출신으로 작위를 받은 기사 리비에르를 탐탁지 않아 하는 것도 당연했다.

천한 노예 따위가 시민들의 입에서 위대한 장군으로 칭송되다니.

스타니 백작의 희끗한 눈썹이 보이지 않게 꿈틀거렸다. 크리스티앙이 그를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경의 염려를 모르는 바는 아니오.”

크리스티앙의 어미인 태후가 살아 있을 때만 해도 스타니 백작의 권력은 지금보다 훨씬 강력했다. 제 어미의 치마폭에 싸여 아무것도 할 줄 모른다고 생각했던 어린 황태자는 태후의 죽음을 시발점으로 타고난 본색을 서서히 드러냈다.

크리스티앙은 어쩔 수 없이 잔인한 클라웨의 이름을 가진 자였다. 모든 이들을 짓밟고 꼭대기에 서고도 만족하지 못하는 지배자. 더불어 그는 교활하기까지 했다. 노예 출신 기사인 리비에르에게 작위를 내리는 파격적인 인사 조치를 단행한 것은 최고 귀족으로 이루어진 원로원의 반발을 일으켰지만, 나라의 국민들을 현혹해 전쟁터로 이끌게 하는 계기가 되었던 것이다.

“폐하. 지금이라도 북부의 장군 호아킴 경에게 출정을 맡기심이 어떠할는지요.”

“음.”

크리스티앙이 턱을 기울이며 고심하는 표정을 짓다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리비에르가 출정한 지 이제 백일도 채 지나지 않았으니 조금 더 지켜보아도 늦지 않다고 보네.”

설마, 하는 기대감을 가지던 원로원들이 인상을 구기지 않으려 마른침을 삼켰다. 예상했던 답변을 그대로 내뱉을 거면 진지한 표정으로 생각하는 척이라도 안 하면 좋을 것이다.

“게다가 호아킴 장군은 이제 좀 쉴 때도 되지 않았나. 짐이 황태자였던 시절부터 그가 쳐부숴 온 크고 작은 왕국들만 해도 몇인가. 이제 전장에서 물러나 편안히 여생을 즐겨도 된다고 보네만.”

크리스티앙이 황금색 눈썹을 미간에 모은 채 부드럽게 웃었다. 언뜻 보기에는 나라를 위해 노력한 신하를 예우하는 지도자의 모습으로 보일 테지만, 그 말투에 깃든 속뜻을 모르는 이는 없었다. 젊은 황제는 현재 클라웨에서 가장 많은 수의 군대를 가진 호아킴을 견제하고 있는 것이 틀림없었다.

실제로 호아킴이 내란이라도 일으킨다면 그 누구도 결과를 쉽게 보장할 수 없는 것이 사실이었다. 태후 때부터 엄청난 권력을 가졌던 호아킴에게 접근한 귀족들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문제는 크리스티앙에 대한 호아킴의 충성심이 예상보다 더 강력하다는 데 있었다.

태후의 최측근이었던 호아킴은 그 아들인 크리스티앙에게 대적할 생각은 꿈에도 하지도 않는 것으로 보였다. 기후가 척박하다 못해 1년 내내 겨울인 북부로 쫓겨나듯 발령을 받고도 아무런 군소리 없이 군대를 끌고 떠난 것을 보면 알 수 있었다.

“정 리비에르가 못 미더우면 그녀가 실패한 후에 호아킴의 군대를 보내도 늦지는 않을 테니까.”

크리스티앙이 두껍게 쌓인 눈앞의 서류를 지그시 내려다본 채, 손으로 눈앞 머리를 지그시 눌렀다.

“혹여나 리비에르 장군이 말라쿤을 정복하기라도 한다면 그 역시 제국의 경사일 테고 말일세.”

뭐든 크리스티앙의 입장에서는 손해 볼 것이 없는 장사다.

“물론 제국의 안전을 최우선으로 여기며 충언하는 경들의 진심을 짐이 모르는 것은 아니오.”

크리스티앙이 주르륵 앉은 원로원들에게 눈을 맞추며 소리 없이 웃었다. 어린 시절에는 황궁의 모든 이가 천사의 강림이라 감탄하던 미소는 축축한 주변의 공기를 더욱 무겁게 만들 뿐이었다.

추적추적 내리는 빗줄기가 천장을 덮고 있는 유리를 연신 적시며 흘렀다. 뾰족한 송곳니를 드러내며 크리스티앙이 말을 이었다.

“산 인간의 살점을 씹어 먹는다는 야만족이 자일룬을 통째로 집어삼킨 후 제국 내로 서진을 할까 그리도 걱정이 되신다면, 이 자리에 있는 경들 중 그 누군가가 홀로 싸우고 있는 용맹스러운 리비에르에게 힘을 보태는 것이 어떠하신지.”

그의 질문에 대답하는 원로원 귀족은 아무도 없었다. 크리스티앙이 쐐기를 박듯 덧붙였다.

“본 황제는 몹시도 환영이네만.”

지금 당장 당신들의 군대를 끌고 동쪽으로 출정하지 않을 거면 개소리 닥쳐.

원로원의 머릿속에 황제의 속말이 들리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장내의 순식간에 침묵이 흐르자 번쩍, 번개가 쳤다. 뒤이어 하늘이 우르르 무너지는 소리와 함께 천둥이 하늘을 흔들었다. 어디선가 바람이 들어와 수백 개의 초가 순식간에 꺼지자 순식간에 장내에 어둠이 내리깔렸다. 크리스티앙이 쯧, 하고 가볍게 혀를 찼다.

“…송구합니다.”

대기하고 있던 시종들이 소리 없이 다가와 서둘러 촛대에 붉을 밝혔다. 크리스티앙이 웃으며 고개를 까딱 움직였다. 그의 하얀 얼굴에 촛불이 만들어 낸 그림자가 일렁였다.

“자일룬에 관해 언급할 것이 더 남아 있으신가.”

하문하는 황제의 말투와 표정은 여유롭기 짝이 없었다. 황태자 시절부터 그를 주목하는 눈들 틈에서 자연스레 몸에 밴 습관이었다. 그의 손짓과 눈짓 하나에서까지 허점을 찾으려 눈이 시뻘겠던 귀족들 틈 사이에서 자란 탓이다.

“대공. 다음 안건 진행하게.”

그로 인해 쌓여 가는 불안감과 의심, 그리고 불면은 크리스티앙의 숨통을 조르고 있었지만 본래 왕관의 무게란 가볍지가 않았다.

“폐하의 결혼 예식은 계획대로 진행할 예정입니다.”

이어지는 사안은 곧 있을 크리스티앙의 결혼 예식에 관한 것이었다.

“한 달 뒤였나?”

“보름 뒤입니다.”

에리히가 전혀 서운한 티를 내지 않고 그의 말을 정정하자, 크리스티앙이 대수롭지 않게 고개를 끄덕였다.

“대공이 수고가 많겠군.”

“천만의 말씀입니다. 폐하.”

황태자 시절부터 태후의 섭정에 질릴 대로 질린 크리스티앙은 수년에 걸쳐 서서히 원로원의 물갈이를 진행했고, 그것은 제위에 오른 후에도 이어지는 중이었다.

원로원의 수장 자리에 공작가의 젊은 장자, 에리히 폰 하이데거를 앉힌 것 역시 그 노력의 일환이었다. 그를 위해 에리히는 5년 동안 수차례의 전쟁에 출정하며 목숨을 바쳐 자신의 충성을 증명해야 했다.

원로원의 귀족 중 누군가는 다른 방식으로 권력을 공고히 하기를 꿈꾸었다. 따분하지만 가장 확실한 방법은 역시 외척을 만드는 것이었다.

그들은 크리스티앙의 반려, 즉 차기 황후 자리에 자신의 가문을 앉히려 부단히 노력했다. 그가 황태자였던 시절부터 끊임없이 뒷공작을 벌여 왔지만 크리스티앙은 문란한 사생활과는 별개로 황비조차 들이지 않았다. 그리고 최근 하이데거 공작가의 공녀를 자신의 황후로 지목했다. 흔치 않은 박색이라 사교계의 데뷔탕트조차 치르지 못했다는 그녀는 에리히 폰 하이데거의 막내 누이였다.

이는 황제가 자신의 최측근 세력을 더욱 견고하게 늘리겠다는 뜻이나 다름없었다. 원로원의 눈에 벌써부터 황후의 세력을 등에 업고 권력을 휘두를 하이데거 가문의 미래가 보이는 것만 같았다.

“각계 귀족층이 모이는 큰 행사가 될 예정으로, 예식이 열릴 교황청의 경비를 평소의 다섯 배로 강화할 계획입니다.”

결혼 예식의 준비를 맡은 대공의 보고를 경청하던 크리스티앙이 느릿하게 입을 뗐다.

“그럴 것 없네. 대공.”

황제의 성정을 잘 아는 에리히는 급하게 그의 말을 되묻는 실수를 범하지 않았다.

“따로 생각하시는 바가 있으신지요, 폐하.”

크리스티앙은 신중한 태도로 자신의 다음 말을 기다리는 에리히와 원로원의 귀족들을 차례로 보며 또렷하게 입을 열었다.

“짐의 결혼 예식은 최대한 소박하게 치르고 싶네. 국민들의 고혈과도 같은 국세를 낭비하고 싶지 않고… 큰 행사를 치르며 사랑스러운 짐의 신부를 피곤하게 만들고 싶지도 않기 때문이오.”

원로원 귀족들의 표정이 티 나지 않게 동요했다. 개중에는 인상을 찌푸리지 않으려 노력하는 이도 있었다.

수도 아메티스 한가운데에 상징처럼 우뚝 선 50여 채의 황금성. 모든 권력과 부가 집중되는 그곳은 제국 귀족들이 발 디디고자 하는 염원의 장소나 다름없었고, 크리스티앙은 그 사실을 가장 잘 알고 이용하는 황제 중 하나였다.

빛나는 성의 유지와 관리를 위해 지금도 퍼부어지는 국세를 생각하면 황제가 방금 한 말은 말이 안 되는 소리다. 게다가 크리스티앙은 자신의 황후가 될 공녀와 공식적인 만남을 가진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런 그녀를 사랑스럽다 칭하는 크리스티앙의 말을 진심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아마도 그녀의 오라비인 하이데거 대공 정도임이 틀림없었다.

“따라서 교황의 주례도 생략할까 하네만.”

크리스티앙이 진짜 하고 싶은 말이 이제부터라는 것을 눈치챈 것 또한 에리히뿐이었다.

“경들은 본 황제의 의견을 어찌 생각하는가?”

크리스티앙이 마침내 그들에게 질문을 던지자 귀족들의 표정이 한층 굳었다. 너른 공간에 잠시 이유 있는 침묵이 흘렀다. 팔걸이에 팔꿈치를 대고 턱을 괸 채 그들을 바라보는 크리스티앙의 호박색 눈이 조용히 빛을 냈다.

그들이 가장 피하고 싶은 순간은 황제가 이런 식으로 속을 알 수 없게 나올 때였다. 크리스티앙이 약하게 웃으며 머릿속이 복잡해 보이는 그들을 독려했다.

“의견 교환을 위해 모인 자리가 아닌가. 짐의 선택이 정답만은 아니라는 것을 모를 만큼 어리석지는 않네.”

원로원이 저마다 머리를 굴리며 크리스티앙의 의중이 과연 무엇인지 짐작하려 애를 썼다. 그의 질문이 함정이 아닐지를 생각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젊은 황제는 교활했다. 의견을 묻는 척하며 그들을 떠보는 것은 한두 번 있는 일이 아니었다.

크리스티앙이 어려운 이유는 이 때문이다. 마냥 황제의 비위를 맞추어 속내를 숨긴다면 그는 이 자리에 있는 귀족들을 쓸모없다며 갈아치우고도 남을 성격이다.

게다가 크리스티앙은 지금, 자신의 결혼 예식에 교황을 불참시키겠다는 전무후무한 결정을 내렸다. 황실을 위해 충성하는 교황청의 우두머리, 대마법사를 빼고 제국의 가장 커다란 행사라고 할 수 있는 황제의 결혼식을 진행한다는 뜻이었다.

크리스티앙이 무슨 생각으로 그 말을 꺼냈는지는 알 수가 없었다. 원로원이 쉽게 입을 열 수가 없는 것도 당연했다. 눈알 굴러가는 소리까지 들릴 정도로 조용한 장내에서 마침내 크리스티앙이 입술을 뗐다.

“교황.”

“예, 폐하.”

마치 벽의 일부분이기라도 한 것처럼 미동 없이 서 있던 베네딕트의 입에서 나지막한 대답이 흘렀다. 크리스티앙이 그를 보지도 않고 물었다.

“설마 이 자리에 있는 모든 원로원의 혀를 굳게 하는 마력이라도 발휘하신 건지.”

웃음기가 담긴 말투였지만 그 속에 담긴 뼈를 눈치채지 못할 이는 없었다. 베네딕트가 그의 질문에 지루하게 들릴 만큼이나 차분한 어조로 답을 했다.

“교황청은 황명이 없이는 황궁 안에서 마력을 사용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이 자리에 있는 원로원, 소위 나라의 최고 귀족이란 이들은 모두 생각 따윈 없이 머릿수를 채우러 온 허수아비라는 뜻인가.”

크리스티앙의 까칠한 덧붙임에 마침내 결정을 내린 것은 스타니 백작이었다.

“폐하. 말씀드리기 송구하오나….”

“괜찮으니 어서 말해 보시게. 스타니 경.”

크리스티앙의 표정이 밝아지는 것을 보며 스타니 백작이 최대한 공손하게 입을 뗐다.

“폐하의 결혼 예식에서 교황을 배제하는 것을 다시 생각해 보심이 어떨지 조심히 말씀드립니다.”

“짐이 결정을 재고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확인하듯 되묻는 크리스티앙의 말투는 평온했다. 스타니 백작이 내심 안도하며 말을 이었다. 어차피 답은 정해져 있었고, 이 자리에 있는 귀족 중 그 답을 모르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선대 황제 클라웨 4세께서 재위하신 이후, 역대 황제 중 그 누구도 대마법사인 교황 없이 국가의 중요한 의식을 치른 적은 없었습니다. 폐하.”

원로원의 귀족들이 교황 베네딕트를 탐탁지 않아 하는 황제의 속내를 모르는 것은 아니었다. 구석에서 마치 존재하지 않는 유령처럼 우두커니 서 있는 대마법사가 왜 먼지보다 못한 취급을 받아야 하는지도 모두 알고 있었다.

베네딕트가 각인한 이는 지금의 황제 크리스티앙이 아니라 이미 죽은 첫째 황녀 에데르트였기 때문이다. 작은 결점 하나 용납하지 못하는 완벽한 크리스티앙의 서사에 오점이라고 한다면 바로 그것 하나뿐이었다.

황제가 염려하는 것이 그것이라면 이번 기회를 통해 만회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 아니, 오히려 국민들에게 확실히 증명할 수 있는 좋은 기회일지도 몰랐다.

“뜻이 깊은 폐하께서 심려하시는 부분을 모르지 않습니다. 하지만 폐하, 배우지 못하여 무식하고 우매한 대부분의 국민들에게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진실을 눈앞에 들이밀어 주는 것입니다.”

크리스티앙은 진지한 얼굴로 읍소하는 스타니 백작의 말을 경청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경청하는 척을 했다.

“흠.”

고개를 끄덕이며 스타니 백작이 감히 입에 올리지 못한 속내를 천천히 읊었다.

“확실히 제국의 대소사에 교황이 불참하는 것은 국민들이 의아할 수 있는 일이겠지요. 게다가 그 교황이 각인한 이가 불운하게 죽은 짐의 누이라는 사실을 온 국민이 알고 있는 이 시점에서, 본 황제가 그를 공식적인 행사에 줄곧 배제한 것도 모자라 결혼 예식에서까지 제외한다면….”

크리스티앙이 의자 팔걸이에 팔꿈치를 올린 채 턱을 괬다. 까딱, 까딱 움직이는 손가락이 마치 그의 머릿속에서 스쳐 가는 생각을 대변하는 듯 보였다.

“국민들 사이에서는 본 황제가 대마법사의 축복을 받지 못한 것도 모자라 그와의 관계를 결국 회복시키지 못했다는 소문이 퍼져 나갈 수도 있고 말이지.”

의자에 앉은 대부분의 귀족들이 그의 말에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힘차게 끄덕였다.

“확실히 경의 말은 일리가 있소.”

한발 물러서는 황제를 보며 스타니 백작은 더욱 힘을 얻었다. 아마도 그는 크리스티앙이 원하는 정답을 짚어 낸 모양이었다. 그렇다면 이 기회를 더더욱 놓치지 않아야 했다.

“부족한 제 뜻을 헤아려 주셔서 감읍할 따름입니다. 어리석은 국민들의 생각이 바뀌는 것에는 오랜 시간이 걸린다는 것을 생각하여 주십시오. 만약 교황이 그 자리에서 황명에 따라 마력이라도 발휘한다면 그 파급 효과는 더더욱 클 것으로 예상됩니다. 폐하.”

“마력이라?”

크리스티앙이 흥미롭다는 표정을 지었다.

“예, 폐하. 아뢰옵기 황공하오나….”

“말하시게.”

“치유 마력을 가진 역대 대마법사들이 공교롭게도 모두 여자였기 때문에 우매한 대중들 사이에는 아직도 그의 능력에 대해 불경한 소문이 떠돌고 있기 때문입니다.”

크리스티앙의 붉은 입술이 슬쩍 위를 향했다. 드디어 늙은 돼지 같은 스타니의 입에서 그가 듣고 싶었던 본론이 끄집어내진 것이다. 속으로 열을 셀 때까지 이 화제가 안 나오면 에리히를 시켜 그 입을 찢어 버릴까 생각했었는데.

“이번 결혼 예식을 통해 크리스티앙 폐하야말로 교황의 축복을 받은 신실한 육체라는 것을 증명한다면 불경한 소문을 불식시킬 수 있을 것이라 사료됩니다.”

크리스티앙의 황금색 눈썹이 슬쩍 위를 향했다. 역대 교황의 성별은 모두 여자. 특히나 치유 마력을 가진 자들은 역대 황제들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해 왔다. 그 관계에 성교는 당연히 포함되는 것으로 역사서에까지 기록되어 있었다.

크리스티앙은 당장이라도 스타니의 목을 잘라 버리고 싶은 것을 간신히 참았다. 배울 만큼 배웠다는 이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멍청한 소리에 목덜미가 뻣뻣하게 당겨올 지경이다.

이제껏 교황이 모두 여자였던 이유는 단 하나뿐이었다. 당대 최고의 능력을 가진 마법사들이 모두 여자였기 때문이다. 황궁에 쌓여 있는 마법사에 관한 기록을 조금만 뒤져 봐도 알 수 있는 일이다.

교황의 교체 시기는 그들의 죽음이 아니었다. 마력이 더욱 뛰어난 자가 나타나면 선대 교황이 스스로 자리를 내놓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베네딕트 이전의 대마법사들이 모두 여자였던 것은 그들의 마력이 그만큼 강했기 때문,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역사적으로 이루어져 왔던 대마법사와 황제 간의 비밀스러운 의식에서 신체적 접촉은 항상 있어 왔으니…. 경이 왜 그런 의견까지 내야 했는지 이해를 못 할 일은 아니지.”

선대 황제들이 대대로 그들의 몸을 탐했던 이유는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만약 베네딕트가 자신과 같은 성별이 아니었다면 크리스티앙 역시 그녀의 사지를 결박한 후 기절할 때까지 범하며 그 마력의 끝이 어딘지를 실험하였을 테니까.

하지만 그 사실은 왜곡되고 순화되어 기록되었다. 그 누가 역사서에 황제가 자신의 사사로운 욕심을 위해 교황의 몸을 탐했다 적을 수 있겠는가. 교황과 황제의 ‘의식’으로 표현된 시간에 무슨 일어나는지는 황제만이 선택할 수 있는 일이었다.

그가 교황청에 가두어 놓은 마법사들을 이용해 비밀리에 실험해 본 결과, 신체적 접촉, 성교를 통해 성력이나 마력을 한꺼번에 빨리 주입하는 방식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렇게 한다면 마법사는 자신의 수명을 엄청나게 줄이는 위험을 겪게 되었다.

만일 마력을 받아들이는 이의 거부가 있다면 위험은 더했다. 마력을 받는 쪽의 정신이 나가 버리거나 그 반대의 경우도 간간이 존재했다. 수년간 여러 마법사들을 수차례 희생시킨 결과로 얻어낸 값비싼 정보였다.

“멀리 갈 필요도 없이 선대 황제께서도 선대 교황을 황후보다 더욱 총애하셨다고 하니… 현재 대마법사가 나와 성별이 같은 남성인 이 상황에서 황제로서의 나의 당위성이 흔들리는 것도 당연한 일이고.”

크리스티앙이 서슴지 않고 내뱉자 원로원이 모두 당황한 표정을 감추며 입을 다물었다.

선대 황제 트리스탄 루드비히 클라웨 8세.

크리스티앙의 아비인 트리스탄이 그보다 열 살이나 나이가 많았던 선대 교황 베아트리체, 즉 베네딕트의 어미에게 광적으로 집착했다는 사실은 원로원의 오랜 귀족이라면 공공연히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트리스탄이 베아트리체를 처음 알게 된 것은 황태자에 책봉되었던 15세 때로, 당시 교황의 자리에 막 오른 베아트리체에게는 아들도 하나 있었다. 3년 뒤 황제가 된 트리스탄은 베아트리체와 거의 모든 시간을 함께했고 그 결과 황제가 전장에서 사망하였을 때 그녀는 산 채로 그와 함께 묻혔다.

총애를 넘어 정신병 수준인 트리스탄의 행동에 이미 반쯤 미쳐 버렸던 베아트리체는 모든 것을 포기한 듯, 제 운명을 순순히 받아들였다. 그녀의 아들이자 현 교황인 베네딕트는 여전히 공간의 일부분인 듯 말없이 움직이지도 않고 서 있을 뿐이었다.

“무얼 그리들 놀라시는가. 본 황제 역시도 이제 남녀의 색사에 관해서도 알 만한 나이가 되었소만.”

크리스티앙이 색이 짙은 붉은 입술을 혀로 축였다. 황금색 눈썹을 삐딱하게 들어 올리며 웃는 미소에 의도된 음란함이 슬쩍 내비쳤다. 그가 침소로 처음 시녀를 불렀을 때 나이가 결코 많다고 할 순 없었다. 여자에 대해서 모른 척할 수 있는 처지는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라면 모를까.

황궁의 대신들은 크리스티앙의 문란한 성정마저 위대한 황제는 모두가 호색가였다는 말로 포장해 왔다.

“그러니 경들과 허심탄회하게 이런 말도 할 수 있는 거 아니겠는가?”

그렇기 때문에 특히나 더, 원로원의 귀족들은 크리스티앙과 교황이 절대로 섞일 수 없는 관계라고 판단을 내린 후였다. 고고한 크리스티앙은 남색을 하는 황제로 역사에 기록되는 것보다 차라리 자살하는 것을 택할 테니까.

“왜 그렇게 표정들이 굳어 있는 거지. 경들의 눈에는 아직도 짐이 솜털도 안 빠진 어린 짐승 같은 상태로 권한 대행 자리에 올라야 했던 열 살 황태자로 보이는가?”

크리스티앙이 부드럽게 말하며 옅게 웃었다.

“폐하. 당치 않은 말씀이십니다. 원로원의 기우를 헤아려 주시니 그저 감읍할 따름입니다.”

“아니네. 황족을 치유하는 것은 대마법사의 주된 의무임에도 불구하고, 저기 계신 교황께서 대단한 능력을 발휘할 기회가 그리 많이 없었지. 아니.”

크리스티앙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을 덧붙였다.

“없었다고 생각들을 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지. 이해하네.”

귀족들 앞에서 교황을 칼로 찔렀던 적이 수차례나 있었는데, 그걸로는 부족한 모양이었다. 머리를 쓸어 넘기는 크리스티앙의 유려한 손가락 사이로 질 좋은 금발이 스르륵 빠져나갔다.

“교황.”

“말씀하십시오, 폐하.”

크리스티앙이 베일을 쓰고 선 베네딕트를 향해 고개를 슬쩍 기울였다.

“클라웨 제국의 국민들은 대마법사의 치유력이 신체적 접촉을 통해서만 발휘된다고 생각하는 것 같은데. 그래서 본 황제가 교황과 그리 거리를 두는 것이라 믿는 모양이오. 이에 대해 하실 말씀이 있으십니까.”

“폐하께선 딱히 제가 무엇을 말하기를 바라시는지요.”

크리스티앙이 소리 없이 흐릿한 조소를 삼켰다. 베일 뒤에서 연하늘색 눈을 가늘게 뜬 채 그와 같은 표정을 짓고 있을 베네딕트의 얼굴이 눈앞에 그려지듯 보였다. 똬리를 칭칭 튼 뱀 같이 속이 시커먼 교황과 그의 마음이 맞을 때는 역시 이런 상황뿐이었다.

“짐은 원로원의 대신들 앞에서 제국의 대마법사가 가진 능력이 어느 정도인지 직접 보여 드리는 것이 가장 빠른 방법이라 생각되오만, 교황의 의견은 어떠하신지.”

“교황청은 황실을 위해 존재합니다. 제 의견은 언제나 황제 폐하의 뜻과 같을 것입니다.”

마음에 드는 대답을 째깍 잘도 내뱉어 주는 걸 보면 베네딕트 역시 이 상황을 즐기고 있음이 틀림없다는 뜻이었다. 크리스티앙이 입 안의 살을 슬쩍 씹은 후, 에리히를 향해 고개를 까딱였다.

“하이데거 대공. 짐에게 가까이 오게.”

에리히가 그에게 다가오자 크리스티앙이 명령했다.

“칼을 뽑게.”

에리히는 황제의 명령을 망설이지 않고 이행했다. 스르릉. 잘 벼린 칼이 칼집에서 분리되자 크리스티앙이 스타니 백작을 향해 물었다.

“왼팔과 오른팔, 둘 중 하나를 선택하게나.”

크리스티앙이 양 손바닥을 위로 보이게 차례로 공중에 펼쳐 들자 스타니 백작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렸다.

“…예?”

“교황의 치유 능력이 어느 정도인지 이 기회에 경의 눈으로 직접 확인하라는 뜻이네.”

“폐… 폐하….”

크리스티앙이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그를 향해 어서 말하라는 듯 손짓했다.

“무얼 망설이는가. 제국의 백성들의 앞에서 이런 종류의 쇼를 보이라고 제안한 건 스타니 경이 아니던가. 짐은 연습을 하고 싶을 뿐이네.”

스타니 백작의 얼굴은 허옇게 질린 채 창백함을 넘어 회색빛이었다. 연푸른색 의복 사이로 드러난 크리스티앙의 하얀 팔을 차마 쳐다볼 수가 없었다. 칼을 들고 선 에리히를 바라볼 수 없는 것 역시 마찬가지였다.

“폐, 폐하. 제, 제발 명을 거두어 주십시오.”

“짐이 한 번 더, 같은 말을 반복해야 하겠는가.”

황제가 그를 보며 낮은 목소리를 내뱉었다. 웃고 있었지만 목소리는 날이 선 듯 날카로웠다.

“폐하…! 제가 어찌 그럴 수 있겠습니까. 신이 황권을 모독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하하…. 하하하….”

애타는 목소리로 읍소하는 스타니 백작을 보며 크리스티앙이 소리 내어 웃었다. 축축한 공기가 내리깔린 대회의장에 청명한 웃음소리가 작게 메아리치며 울려 퍼졌다. 숱이 풍성한 황금색 속눈썹에 물기가 맺혔다. 크리스티앙이 고개를 살짝 털어 내며 우아하게 웃음을 갈무리했다.

“스타니 경께서 무언가 착각을 하고 있는 모양이오.”

“…폐하…?”

“대마법사의 의무는 황족을 치유하는 것이지만 황명에 따라 타인을 치유할 수도 있지 않은가.”

그제야 스타니 백작은 하이데거 대공의 칼끝이 황제가 아닌 자신을 향해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크리스티앙의 붉은 입술은 바짝 호선을 그리며 올라가 하얀 송곳니까지 보여 주었고, 가늘어진 샛노란 눈동자에 광기 어린 불꽃이 이글거리고 있었다.

“클라웨 제국의 국민. 그 국민들을 대표하는 지방의 영주. 그 영주를 대표하는 최고 귀족 관료가 바로 여기 계신 자네들이 아닌가. 이 나라의 꼭대기, 최고 정점까지 올라온 이들마저 본 황제의 당위성을 의심한다면 제국의 국민들의 불신도 당연한 이야기 아니겠는가?”

흥분에 고양된 목소리로 즐겁게 말을 잇는 황제의 모습은 주변인을 공포에 질리게 하기에 충분했다.

“폐… 폐하.”

늙은 원로의 손이 덜덜 떨렸다. 바닥을 소리 없이 적시는 물기를 보며 크리스티앙이 혀를 찼다.

“스타니 경께서 실금하셨군. 하이데거 대공이 대신 선택해야겠네.”

“폐, 폐… 흑!”

피할 겨를도 없었다. 에리히의 검이 날아 그의 오른쪽 팔꿈치 아래를 깔끔히 잘라 냈다.

“으흐으으으윽…!”

스타니 백작이 상처를 움켜쥐었다. 그를 지켜보는 원로원 귀족들의 눈이 충격에 굳는 것은 당연한 이야기였다.

“폐, 폐하…. 부디 용서를….”

스타니 백작이 크리스티앙과 구석에 선 베네딕트를 번갈아 보았다. 잘린 팔에서 터진 피는 멈출 줄을 모르고 꿀렁거리며 바닥을 적시고 있었다. 끔찍한 고통에 숨이 멎을 것 같았다.

“교황.”

크리스티앙이 스타니 백작에게서 고개를 돌려 베네딕트를 보았다. 황금색 미간을 중앙에 모은 채, 다분히 연극적인 말투로 그가 물었다.

“왜 스타니 경을 치유하지 않습니까. 이리 고통스러워하시는데.”

베일 뒤에서 베네딕트가 차분하게 대답했다.

“교황청은 황제 폐하의 명령이 없이는 황궁 안에서 마력, 특히나 치유 마력을 사용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종전에 한 말의 반복.

정답이다.

“폐… 폐하…! 부디 황명을…!”

크리스티앙이 벌레처럼 꿈틀대며 고통스러워하는 스타니 백작을 보며 터져 나가는 웃음을 간신히 참았다.

“아, 참. 그렇지요.”

교황의 말은 사실이었으므로 이 중 아무도 의문하는 이는 없었다. 일례로 에데르트의 어미가 죽었을 때, 황제는 전쟁터에 있었다. 당시 소년이었던 베네딕트는 이미 범접할 수 없는 마력으로 대마법사의 자리에 오른 후였으나 황제의 명이 없다는 이유로 그녀를 치유하지 못했다.

아. 아름다운 국법이여.

첫 번째 황후가 비참하게 죽은 후, 클라웨 8세는 원로원의 의견에 따라 두 번째 황후를 맞이하게 되었고 그로 인해 자신이 태어났으니 결국 베네딕트에게 감사라도 해야 하는 걸까.

그의 어미인 태후 카트린이 죽었을 때는 어떠했던가. 황제 대행 권한을 가지고 있던 그가 명령하지 않았으므로 베네딕트는 늘 그렇듯 교황청에서 한 발짝도 움직이지 않았다.

“푸흣…. 하하하….”

크리스티앙의 입술에서 참을 수 없는 웃음이 새어 나왔다.

“폐, 폐하…. 흑…. 부디… 신의 만용을 용서하소서.”

한 팔이 잘린 스타니 백작이 공포에 질린 눈으로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이제 방법은 황제에게 납작 엎드려 비는 수밖에는 없었다.

“말도 안 되는 선동에 넘어가는 이들은 그 태생이 열등하고 천한 이들이네. 짐이 대체 왜 그런 것들을 설득해야 하지? 말을 듣지 않고 날뛰는 짐승은 길들이는 것보다 팔다리를 잘라 목줄을 매는 편이 더 효율적이라는 사실을, 경들은 정녕 모르는가?”

크리스티앙의 얼굴은 분노보다는 실망감이 가득한 표정이었다.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설레설레 흔드는 표정이 미친 사람처럼 보였다.

“신의 만용을 용서하여 주십시오. 폐하. 부디 자비를 베풀어….”

“스타니 경에게 칼을 주게, 대공.”

“예, 폐하.”

에리히가 그의 명령에 따랐다. 긴 칼이 스타니 백작이 무릎 꿇고 있는 바닥에 툭, 떨어졌다. 크리스티앙이 턱을 치켜든 채 그를 내려다보았다.

“제임스 스타니 경. 지금 당장 그 칼로 본인의 심장을 찔러 자진한다면, 내 경에게 자비를 베풀겠네. 이 칼로 스스로의 심장을 정확히 뚫는다면 그 즉시 대마법사에게 경을 치유하라 명하지.”

“폐하…. 폐하…!”

“정확히 왼쪽 심장을 찔러야 하네. 알겠지?”

확인하듯 속삭이며 되묻는 크리스티앙의 눈에 노란 촛불이 활활 타오르는 것 같았다. 빛을 담지 못해 동공이 잔뜩 작아진 살쾡이의 눈을 보는 것 같았다.

“흐…. 흐으….”

스타니 백작은 그제야 알 수 있었다. 교활하기 짝이 없는 크리스티앙은 처음부터 자신을 죽이기 위해 무려 한 시간 동안 덫을 판 것이나 다름없었다.

“크… 크리스티앙….”

성한 팔로 검을 낚아채는 그의 손이 덜덜 떨렸다. 스타니 백작의 칼끝이 향한 곳은 제 몸뚱어리가 아니었다.

“클라웨가 악마를 황제 자리에 앉혔다는 사실은 이 자리에 있는 모두가 알고 있…!”

그가 크리스티앙에게 달려드는 순간 에리히의 칼이 그의 심장을 정확히 뚫었다.

“컥…!”

살집이 늘어진 스타니의 다리에 힘이 풀렸다.

뚝. 뚝.

칼을 타고 바닥으로 흐르는 뜨거운 피를 바라보며 크리스티앙이 혀를 낮게 찼다.

“클라웨에서 반역죄는 사형이오. 스타니 경.”

안타까운 말투와는 달리 그의 표정에는 즐거움이 가득했다.

“회의는 이쯤에서 마칠까 하네만, 다른 의견이 있으신지.”

얼어붙은 회의장에는 아무런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오직 커지는 빗줄기 소리만이 천장을 두드리고 있을 뿐이었다.

“식사를 하시겠습니까, 폐하.”

원로원이 해산한 뒤, 집무실로 향하는 크리스티앙을 따라 걸으며 에리히가 물었다.

“그럴까? 오래간만에 내장 요리가 당기는데.”

“요리장에게 특별식을 주문하라 명하겠습니다.”

“날 챙겨 주는 건 역시 경뿐이란 말이야.”

크리스티앙이 희게 웃으며 걸음을 옮겼다.

“당치 않은 말씀이십니다. 클라웨 제국 전부가 폐하의 무병장수를 바라고 있습니다.”

“오래 살아야 되겠는데?”

크리스티앙이 농담하듯 눈썹을 들어 올리자 에리히가 진지하게 답했다.

“예. 성군께서는 천수를 누리실 겁니다.”

“별로. 그러고 싶은 마음은 없네만.”

“폐하.”

목소리를 낮추는 에리히의 미간에 깊게 주름이 팼다. 크리스티앙이 그를 슬쩍 올려다보다가 손을 들어올렸다. 유려한 검지가 에리히의 주름진 미간을 슥, 스치며 문질렀다.

“농담이네. 일찍 죽기에는 이 세상이 너무 재밌잖아.”

크리스티앙이 혼잣말하듯 웃으며 긴장해 딱딱하게 굳은 에리히의 어깨를 툭, 쳤다.

잠시 끊어졌던 발걸음이 다시 이어졌다. 크리스티앙은 말 없는 에리히와 함께 끝이 어딘지 모르게 넓은 복도를 걸었다. 크고 작은 황금성 50채의 곳곳이라면 눈을 감고 지도를 그리라고 해도 할 수 있었다. 지금 그의 눈앞에는 쥐새끼 한 마리 없어 보이지만 숨어 있는 눈과 귀가 없는 것은 아니다.

“에리히, 그런데 만약에 말이야.”

뭔가 생각났다는 듯 걸음을 멈춘 크리스티앙이 그를 보았다.

“스타니 백작이 정말로 제 심장을 직접 뚫어 자진했다면, 아니, 자진하는 척이라도 했다면.”

가늘어진 크리스티앙의 눈동자가 어둡게 반짝였다.

“경은 내가 어떻게 했을 거라고 생각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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