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6화 (26/72)

“저는 폐하의 마마가 아닙니다. 그분께서는 지금 하늘나라에 계시지 않습니까.”

입술을 깨물며 웃는 그의 미소가 왠지 슬퍼 보였다. 그 때문에 잠시 울음을 멈추었던 그녀도 덩달아 몹시 슬퍼졌다.

“으흐…. 흐….”

코를 훌쩍거리며 눈물방울을 뚝뚝 흘리는 그녀에게 그가 눈을 맞추었다. 연한 하늘색 눈동자가 물빛처럼 투명해지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그녀를 바라보는 유모의 따스한 눈과는 달리 차갑고 텅 빈 것 같은 눈이다.

“으으…. 응….”

왠지 무서워 그를 피하기 위해 버둥거렸지만 몸이 뜻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시선을 피하는 것조차 허락되지 않는다. 무섭고 아름다운 사람이 그녀를 뚫어져라 직시하며 나직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황후 마마께서는 폐하를 낳은 탓에 돌아가신 겁니다. 그리 아름답고 상냥하고 고우셨던 분이 고통스럽게 아파하며 혼자 쓸쓸히. 처절하게 말입니다.”

“흐으…. 으아아앙…!”

결국 입을 벌리고 소리 내어 울음을 터뜨리고야 말았다. 그가 그녀를 품에 안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런… 저런… 놀라게 해 드린 모양입니다….”

히끅. 울음과 함께 딸꾹질이 터졌다. 서러운 눈물이 멈추지를 않았다.

“괜찮습니다. 폐하의 곁에는 제가 있지 않습니까.”

토닥. 토닥. 그녀의 등을 두드리며 달래는 손길은 다정하고 느릿했다. 늘 시선 높이에 있던 풀밭이 쑥, 아래로 내려간 것이 무서웠다. 아름다운 사람은 늘 그녀를 돌봐 주는 유모보다도 훨씬 키가 컸다. 그녀는 눈을 꽉 감고 그의 어깨에 얼굴을 파묻었다.

“폐하가 그분의 옥체 안에 계셨을 때부터 제가 맹세하지 않았습니까. 무슨 일이 있어도 당신을 지켜 드리겠다고. 생각나지 않으십니까?”

“흐윽…. 흐으….”

그녀가 엄지손가락을 입에 넣고 쭉쭉 강하게 빨았다. 이유를 알 수 없는 서글픔과 외로움이 가슴 안에 차올랐다. 금실 수가 놓인 하얗고 부드러운 의복이 눈물과 콧물에 젖어 들었다.

“고개를 들어 보세요.”

그녀는 얼굴을 파묻고 고개만 세차게 저었다.

“폐하께선 역시 그분처럼 고집이 세십니다.”

낮은 웃음기가 번진 목소리가 그녀의 귓가에 들렸다. 그녀는 더욱 깊숙이 그의 목덜미에 얼굴을 확 박았다.

“좋은 선물을 드릴 테니 어서요.”

들리지 않을 것 같던 자그마한 고개가 슬그머니 위를 향했다. 그녀를 안아 든 이가 미소를 지으며 한 손을 들어 올렸다. 손안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히이… 잉….”

투정을 부리며 울음을 터뜨리려던 그녀가 얼굴 찡그림을 멈추었다. 아무것도 없는 그의 손바닥에 작은 구멍이 생기더니 작은 피의 결정이 맺히고 있었다.

아래로 떨어지지 않는 새빨간 핏방울이 손안에서 점점 커지는 모습을 바라보며 그녀가 연보랏빛 눈동자를 크게 떴다. 얼마 전 뒤뚱거리며 나비를 쫓다 넘어졌을 때 자신의 이마에서 빨간 피가 났던 게 생각났다.

“어… 아…?”

붉은 피의 결정이 이제 손바닥 절반을 채울 정도로 커졌을 때, 그녀가 작은 손이 그의 손을 움켜쥐었다. 고개를 세차게 흔들었다. 입 안에서 형태가 불분명한 말들이 흩어진다.

“…아…. 아파…. 아, 아프…!”

커져 가던 피의 결정이 그 상태로 멎었다. 그녀를 안아 들고 선 이가 인상을 살짝 찌푸렸다. 피의 결정은 이미 단단하게 굳기 시작하며 햇살에 다각도로 반짝이는 빛을 내는 중이었다.

“이런… 역대 대마법사의 보석 중 가장 자그마한 보석이 되겠군요. 이래서 이 시간을 최대한 미뤄 왔건만….”

손안에 겨우 들어오는 크기의 보석을 쥐며 그가 자조하듯 쓰게 중얼거렸다. 색이 옅은 긴 은발이 바람에 날렸다. 긴 한숨 끝에 마침내 그가 입을 열었다.

“제 말을 기억하세요. 지금 폐하가 너무 어려 기억하고 싶지 않아도 뼛속 깊이 기억하시게 될 겁니다. 대마법사의 선혈로 만든 첫 번째 보석을 받은 존재는 이 나라의 황제가 될 운명입니다. 이제 폐하와 저는 영원히….”

그녀가 자그마한 양손을 뻗어 그의 손안에 들린 보석을 꽉 움켜쥐는 바람에 그가 말을 멈추었다. 연보랏빛 동공이 확 커져 빛을 담고 일렁이는 모습을 보며 대마법사가 비웃듯 색이 연한 입술을 틀었다.

“이기적인 클라웨의 피는 유전인가 보군요. 반짝이는 것을 본능적으로 제 손안에 움켜쥐려 하는 욕심 많고 잔인하기 짝이 없는 유전자 말입니다.”

쓴웃음 짓는 그의 앞에서 그녀가 피처럼 붉은 보석을 풀밭에 휙 내동댕이쳤다. 길게 빠진 수려한 눈썹이 위를 향했다.

“아… 아, 아파…. 아프, 다. 피 나…. 아파….”

그녀가 그의 손을 더듬더듬 붙잡았다. 피가 샘솟던 그 자리에 간질거리는 따사로운 숨결이 번졌다. 머리를 꽝 박은 그녀에게 유모가 해 주었던 것처럼 열심히 손바닥에 입김을 불어넣었다.

“호오…. 호….”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교황이 마침내 낮게 웃었다. 그의 연한 하늘색 눈동자에 초점이 흐려지며 비 오기 전의 하늘 같은 축축한 어둠이 번졌다.

“하나도 닮은 곳이 없는 줄 알았는데…. 그분의 피를 받은 건 맞나 보군요.”

“에데르트 폐하, 도대체 정원에는 또 어떻게…. 어마…!”

정원의 문을 열고 다가오던 유모가 그 안에 있는 낯선 이를 발견하곤 그 자리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누… 누구십니까….”

설마. 긴 은발을 늘어뜨리고 있는 이가 천천히 뒤를 돌았다. 황궁에서 저런 머리 색을 가지고 있는 이는 단 한 사람뿐이었다. 유모는 제국의 대마법사, 아름다운 교황의 얼굴을 확인하곤 고개를 푹 숙였다. 교황은 황족 외의 사람들에게 얼굴을 보여서는 안 됐다. 늘 베일을 쓰고 다니는 그는 맨얼굴이었다.

“때마침 잘 오셨습니다.”

아기 황녀를 품에 안은 대마법사가 천천히 유모에게로 가까이 다가왔다.

“이제 폐하와 저는 영원히 함께일 것입니다. 대마법사의 선혈로 만든 보석이 이를 증명합니다.”

교황이 아직 말도 제대로 떼지 않은 아기 황녀의 귀에 또렷하게 속삭였다. 황녀가 상처 없는 그의 손바닥을 보며 눈을 깜빡였다.

“황제 폐하께 황녀와의 각인이 완전히 끝났다고 전하십시오.”

그녀를 유모의 품에 넘겨준 후, 그가 풀밭에 나뒹구는 보석을 주워 들었다. 익숙한 체온의 품에 안기게 된 그녀가 손가락을 입에 집어넣으며 고개를 슬쩍 돌려 정원을 나서는 교황을 바라보았다. 그의 손에서 반으로 쪼개진 보석이 톡, 하고 그녀의 품에 떨어졌다.

오묘한 빛을 내는 연한 하늘색 눈동자를 힐끗 보며, 유모의 품에 안긴 채 그녀가 손가락을 빨았다. 누군가를 그리워하는 것 같은 눈빛이 계속 기억에 남았다가, 이내 팔랑이는 나비를 보자 그의 생각이 희미하게 사라졌다.

“드디어… 폐하…. 에데르트 폐하께서 드디어… 흑….”

유모가 왜 감동에 젖은 표정으로 울먹이는지 알 수가 없을 뿐이었다.

친절한 유모는 자주 울었다. 며칠 전, 그녀의 동생이 태어났다는 소식을 전하면서도 눈물을 찍었고 그녀를 찾아오지 않는 황제의 마음을 이해하셔야 한다는 이야기를 하면서도 눈물을 글썽였다.

이번에도 유모가 왜 우는지 정확한 원인을 알지 못하지만 왠지 슬퍼졌다.

“폐하, 이걸 꼭 소중히 간직하셔야 합니다. 아시겠죠?”

그녀는 반짝거리는 보석을 손안에 만지작거리며 울다 지쳐 잠이 들었다.

***

작은 마을 로비나의 영주는 골칫거리를 해결해 준 세르노티의 기사들을 위해 흔쾌히 자신의 성문을 열어 객실을 허락했다. 야외 취침이 아니라 개별로 주어진 방 안, 폭신한 침대에서 제대로 잠을 취한 것은 오래간만이었다.

기사들은 간만에 가지는 달콤한 휴식에 환호하며 일찍부터 잠자리에 들었지만 혜미는 쉽게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그간 숲속에서 자는 것에 익숙해지기라도 한 모양이었다. 일찌감치 침대에 누운 혜미는 오래도록 뒤척이나 밤늦게야 잠이 들었다.

스르륵.

무언가 아주 가벼운 것이 그녀의 얼굴을 간질였다. 혜미는 잠결에 조금 고개를 흔들었다. 기분 좋고 달콤한 향이 코끝에 퍼졌다. 마치 꽃향기가 가득한 정원에라도 있는 느낌이었다.

꿈인가.

반쯤 잠이 들고 반쯤 깨어 있는 상태로 혜미가 멍하니 생각하는 순간, 부드러운 것이 뺨을 스쳤다. 마치 꽃잎이 닿았다가 떨어지는 것 같은 가벼운 입맞춤이 다시 다른 쪽 볼에 이어졌다.

발터…?

그의 것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도 조심스러운 입맞춤에 그녀가 눈을 뜨려는 순간, 달콤한 향이 입 안을 채웠다.

“흐음….”

까맣게 잊고 살았던 기묘한 달콤함이었다. 마치 잔뜩 익은 과일을 입에 머금은 것 같은 느낌에 혜미가 그 대상을 애타게 빨았다. 한숨이 터지는 것 같은 목소리가 머릿속에 울렸다.

‘지금 저를 보채시는 겁니까…?’

웃음기가 섞인 목소리. 알 것도 같고 모를 것도 같은 목소리에 눈을 떠 상대를 확인하려 했지만 눈꺼풀이 천근만근인 듯, 올라가지를 않았다.

“아….”

답답한 마음에 고개를 치켜들자 그녀의 몸을 덮고 있던 담요가 침상 아래로 떨어졌다.

부드러워.

너무도 부드러운 것이 그녀의 몸에 닿았다. 어색하다. 딱딱한 굳은살이 박인 거친 손이 아니라 마치 벨벳처럼 부드러운 느낌의 살결이 어색했다.

눈을 뜨려고 하는 순간, 부드러운 손이 그녀의 가슴을 가볍게 쥐었다. 젖꼭지 끝에 살짝 입 맞추는 느낌에 허리가 저절로 들렸다. 살갗이 반응하면서 몸이 훅, 하고 더워지는 느낌이 들며 입 안이 말랐다.

“하아….”

부드러운 살덩이가 그녀의 유륜 위로 원을 그리듯 움직였다. 간질간질한 느낌을 견딜 수가 없어 손을 뻗어 그의 머리를 움켜쥐려 했지만 무리였다. 부드러운 머리카락이 그녀의 몸 위에서 살랑거리며 흔들렸다.

“흐으….

어떻게 된 영문인지 손끝 하나 움직일 수가 없었다. 가위를 이런 식으로 눌릴 수도 있을까. 혜미는 그제야 그녀가 왜 눈꺼풀을 들어 올릴 수 없는지 알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보다 깃털로 간질이듯 괴롭혀지는 젖꼭지가 더욱 문제였다. 강하게 씹으며 빨리고 싶은 본능에 몸이 저절로 움찔거렸다.

대체 누굴까.

이렇게 사람의 애를 태우듯 부드러운 터치는 절대 발터가 아니었다. 그였다면 아무리 꿈에서라도 그녀를 이런 식으로 가질 리가 없다는 확신이 있었다.

그 사실을 인지하면서도 혜미는 도무지 눈을 뜰 수가 없었다. 당장 깨어나야 한다는 이성과는 반대로 이 지독한 쾌감을 이어 나가고 싶다는 본능에 목이 바짝바짝 말랐다.

할짝, 할짝.

바짝 선 자그마한 유두를 혀끝으로 톡톡 건드릴 때마다 체온이 1도씩 상승하는 기분이었다.

“으응…!”

단단해진 젖꼭지가 마침내 통째로 입 안에 물렸다. 부드럽게 혀로 둥글리며 빨아들이는 동작은 여유롭기 짝이 없었다. 혜미가 괴롭게 입술 새로 신음하자 부드러운 입술이 작은 소음을 내며 떨어졌다.

쪽.

쪽.

가슴에서 시작된 습한 입맞춤이 점점 아래로 향했다. 손을 움직이지도 않는 것 같은데 그녀의 잠옷이 스르륵, 벗겨져 내렸다. 순식간에 나체가 된 혜미의 위에서 꽃내음을 담은 숨결이 번졌다.

“하아…. 아….”

그의 입술과 손이 온몸에 닿았다. 온몸에 꽃잎이 살랑거리며 내려앉는 느낌. 여린 귓불과 목덜미, 빗장뼈와 옆구리, 팔꿈치와 손가락에까지 스칠 듯 말 듯 한 입맞춤이 이어지자 피부의 솜털이 바짝 일어난다.

마침내 손가락이 뭉근히 빨리자 혜미가 가쁘게 숨을 몰아쉬었다. 손끝에 느껴지는 혀의 감촉이 중독적이어서 저도 모르게 혀를 매만지자 작은 숨결이 그녀의 손바닥을 간질였다.

“기억나십니까? 우리가 처음 만난 날, 폐하께서 제게 이렇게 했던 것.”

상대가 후후 웃으며 그녀 손바닥의 손금을 혀로 핥았다.

‘무슨 말이지?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거지…?’

이해할 수가 없는 상대의 말에 갑자기 심장이 쿵쿵 빠르게 뛰었다. 원인 모를 아득한 그리움에 가슴속이 젖어 드는 것 같은 착각이 인다. 그녀의 왼쪽 가슴을 주무르고 떨어진 손이 그녀의 아랫배로 향했다.

“흐응…!”

음모를 부드럽게 움켜쥔 후, 손가락이 소음순을 익숙하게 헤쳤다. 동그랗게 부풀어 오른 음핵을 손가락으로 문지르자 아랫도리가 더욱 뜨겁게 달아올랐다.

“그동안 한층 더 민감해지신 모양입니다….”

낮게 웃으며 속삭인 입술이 그녀의 다리 사이로 향했다.

“폐하를 이리 만든 이는… 역시 폐하를 따르는 충성스러운 개들 중 하나입니까?”

대답조차 할 수가 없었다. 못 견디게 뜨겁고 부드러운 입술이 음핵을 살짝 입술로 문 탓이었다. 뜨끈한 혀의 돌기가 부드럽게 클리토리스를 둥글리자 공중으로 치켜 올라간 혜미의 허리가 덜덜 떨렸다. 이미 질척하게 젖은 아래에서 미끄럽고 뜨거운 체액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혀와 점막이 부딪히는 작은 소음이 사타구니에서 계속 흘렀다.

“아…. 아….”

그는 서두르지 않았다. 욕망을 참지 못해 음핵을 뽑아 버릴 듯 쭉쭉 빨고 점막 사이로 흐르는 애액을 들이마시는 대신, 부드럽게 혀로 그림을 그리듯 그녀의 여린 핵을 핥고 빨았다. 열망에 점점 달아올라 괴로운 것은 그녀 쪽이었다.

“흐…. 으읏….”

자그마한 신음이 말라 가는 입술 새로 번졌다. 제발 좀 그만해 주었으면 싶은데 상대는 입술을 떼지 않았다. 허벅지가 저절로 떨리자 여린 살갗에 입맞춤이 떨어졌다. 이를 세우고 지그시 빨아들이는 감각에 혜미가 허리를 뒤틀었다. 질구가 경련하듯 움직이며 안에서 애액을 뿜어 댔다.

“빠… 빨리….”

그녀가 속삭이듯 애원하자 상대가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그녀의 위로 몸을 묻었다. 귓가에 춥, 하고 작게 입 맞춘 후 들릴 듯 말 듯 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기분이 좋으십니까…?”

뭐지?

낯설지만 익숙한 말투였다. 분명 어디선가 들어 본 적이 있는 것 같은 기분에 기시감마저 들었다. 혜미가 인상을 쓰며 눈을 뜨려는 순간 그녀의 다리가 옆으로 벌어졌다. 툭, 하고 무언가가 질구에 닿는 느낌에 혜미가 몸을 가늘게 떨었다.

기다란 페니스가 좁은 질구에 닿는 것만으로 약한 쾌감을 선사했다. 그가 천천히 밀어 넣으며 얕게 숨을 몰아쉬었다.

“또다시 도망가실 수는 없을 겁니다. 폐하의 육체 곳곳에 저를 새겨 놓았으니까요.”

그의 말을 증명이라도 하듯 그녀의 질은 낯선 침입자를 빨아들이듯 강하게 빨아들이고 있었다. 온몸이 두둥실 떠오르는 것 같은 느낌. 그동안 인지하지도 못하고 있었던 몸 구석구석의 고통이 씻은 듯 싹 사라지며 오로지 쾌감이라는 감각만이 커다랗게 뭉쳐졌다. 턱이 덜덜 떨리는 아찔한 기분이 머릿속을 잠식했다.

“하아…!”

“폐하와 제가 이럴 수밖에 없는 운명이라는 사실을 이제 아시겠습니까…?”

혜미의 손끝이 움찔거리기 시작했다. 간신히 몸을 움직이게 된 그녀의 손이 저절로 그를 끌어안은 것은 필연적인 상황이었다.

“뿌리까지 다 넣겠습니다.”

삽입이 깊어졌다. 혜미는 그를 끌어안고 부들부들 몸을 떨었다.

“흐읏…. 으응…!”

온몸이 터질 것 같은 충족감. 눈가에 열기가 일었다.

“그럼, 시작하겠습니다.”

갈린 얼음같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그가 그녀의 귓가에 속삭이듯 중얼거렸다. 나체로 그녀에게 삽입하고 있는 지금 상황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신성한 말투였다.

삐걱.

삐걱.

그가 움직이자 고풍스러운 침대가 느릿하게 울부짖는 소리를 냈다. 깊숙하게 들어왔다가 서서히 빠져나가며 그의 성기가 그녀의 내벽을 모조리 자극했다.

“아… 아아…!”

혜미가 그를 껴안고 매달렸다. 온몸의 살갗이 다 달라붙는 느낌이었다. 코끝을 맴도는 강력한 꽃향기와 귓가를 간질이는 아득한 숨소리. 모든 것이 그녀의 알 수 없는 흥분을 가속화시키고 있었다.

“더… 흐윽…. 더… 아아…!”

삐걱, 삐걱, 삐걱.

“저를 싫어하는 것 같습니다.”

“아니. 좋아하는 거예요. 신이 나서 움직이고 있는걸. 지금까지는 잠을 자고 있었거든.”

짹짹거리는 새소리를 배경으로 머릿속에서 젊은 남자의 목소리와 차분한 여자의 목소리가 번갈아 들렸다. 뭐지…? 가슴속에서 또다시 그 원인을 정확히 알 수 없는 그리움이 치밀어 오른다.

“황후께선 제가 밉지 않으세요?”

“그대처럼 아름답고 상냥한 이를 내가 어찌 미워하겠습니까…? 이것 보세요. 배 속의 내 아이도 그렇다고 하잖아요.”

“제게 왜… 이렇게 친절하십니까…? 그 여자의… 아들인 저를 증오하셔도 됩니다.”

“착한 사람.”

반짝이는 정원에서 풍성한 갈색 머리를 늘어뜨린 채, 누군가가 희미하게 웃었다.

“…그대가 내 아이와 각인할 사람이라 안심이 되어요.”

그녀가 보고 있는 것은 과연 누구의 기억일까. 가슴속에서 울컥거리며 뜨거운 감정이 퍼져 나갔다.

“당신이 소중하게 여기는 대상은 제게도 소중합니다. 제 평생을 바쳐 본분을 다하겠습니다. 주제넘게 행동하지 않을게요.”

그러니 그리 슬피 울지 마세요.

머릿속에 그대로 전달되는 남자의 속마음에 이유를 알 수 없이 슬퍼진다. 남자의 물빛 눈동자가 투명해지자 밝은 햇살이 내리쬐는 정원에 바람이 불어온다.

“가여운 사람. 부디 자신도 소중하게 여기기를. 불행해지지 않기를.”

혜미는 저도 모르게 그를 꽉 끌어안은 팔에 힘을 주었다. 도대체 이건 누가 느끼는 감정인지 알 수가 없었다. 확실한 것은 떨리는 물빛 눈동자를 외면할 수가 없다는 사실이었다.

“하아….”

상대가 작게 신음하는 소리에 흐릿한 기억이 자취를 감추었다. 오래된 나무 침대의 소음이 서서히 빨라졌다. 기다란 머리카락이 그녀의 뺨을 간질이며 흔들렸다. 끈적끈적한 페니스가 잔뜩 풀어져 뜨거운 질 속을 자유로이 오갔다.

“으응…. 흐으응…. 아아…. 아응…!”

출렁이는 그녀의 가슴이 부드럽게 잡혔다. 가슴을 집요하게 주물대자 혜미의 잇새로 앓는 듯한 신음이 끊이지 않고 흘렀다.

“좋으실 겁니다. 그렇지 않을 리가 없지요….”

남자가 그녀의 목덜미에 키스하며 습하게 중얼거렸다.

“아주 오래전부터 단 한 사람만을 위해 준비된 육체입니다. 폐하의 몸 또한 제가 그리 만들었으니 어떻게 저를 거부하실 수 있겠습니까.”

남자의 말은 사실이었다. 그에게 만져지는 모든 곳의 피부 세포가 격하게 손길을 환영하는 것 같았다.

“하아…. 아아….”

몸 안에 알싸한 무언가가 퍼지며 혈관 곳곳에 퍼져 나가자 무겁던 머릿속이 깔끔하게 변하는 기분이었다. 솜사탕 같은 구름 위에서 뒹구는 느낌만이 그녀의 온몸을 감쌌다.

“더… 하아…. 더….”

이 느낌을 계속 만끽하고 싶었다. 깃털이 잔뜩 싸인 곳에 온몸을 파묻고 뒹굴고 싶었다. 그를 끌어안고 앓는 듯 중얼거리는데 상대가 서서히 상체를 일으켰다.

“여전히 욕심 많으신 분.”

상대의 말투에 희미한 웃음기가 번졌다.

“아! 아아…!”

그녀의 몸이 두둥실 떠오르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아니. 그것은 착각이 아니었다. 그녀의 몸은 침상 위에서 한 뼘 정도 떠오른 채였다.

무릎을 꿇고 앉은 상대가 그녀의 다리를 팔로 결박하듯 감아쥐었다. 세게 쥔 것 같지도 않은데 엄청난 힘에 그녀의 몸이 그에게로 곤두박질치듯 부딪혔다.

“아!”

벌어진 질이 그의 성기를 집어삼킬 때마다 허리가 뒤틀릴 정도로 쾌감이 튀었다. 고환이 회음부를 세게 때릴 때마다 날카로운 쾌감이 튀었다.

“응! 으응! 아! 아흑! 하! 응! 으응!”

그녀가 감은 눈에 눈물을 달고 커다랗게 신음하자 상대가 그녀를 끌어안고 쉬이, 하며 작게 속삭였다.

“폐하께 불경한 일이라도 생길까 전전긍긍하는 사냥개가 짖을지도 모르니까요….”

“…흣…!”

혜미의 목덜미를 길게 핥으며 상대가 퍽, 퍽, 강하게 내벽의 한 부분을 두 번 처박았다.

“아흑!!!”

“그중 제일 거친 개의 이름이… 무엇이었죠? 세르노티의 가주 말입니다….”

발터를 떠올리는 순간 그가 다시 한번 쾌락의 핵을 강하게 짓눌렀다. 혜미는 참아 내지 못했다. 예고 없는 오르가슴이 잘게 그녀의 몸을 후려치고 지나갔다.

“구경꾼을 신경 쓰는 것 아닙니다만… 폐하께 불필요한 상처를 드리고 싶진 않습니다. 주인의 무덤까지 파헤칠 수 있는 개라면 주인과의 연대도 그만큼 깊다는 뜻일 테니. 눈앞에서 그 개가 혀를 빼물고 죽는 걸 보고 싶지는 않으시겠죠.”

“그만… 그, 그마…. 아… 으흐응!!!”

잇새로 내뱉어 보았지만 상대는 그녀를 놔주지 않았다. 오히려 더욱 빠른 속도로 허릿짓을 하며 그녀의 내벽을 격렬히 박아 댔다.

“하아! 응! 앗! 아흥! 응! 으응!!!”

“그를 사랑하십니까…?”

그녀는 남자의 물음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정확히 알았다. 모르는 상대와 몸을 섞으며, 그의 몸이 들이닥치는 대로 흔들리며 발터에 대한 감정을 입에 올릴 수는 없었다. 설사 이게 원인을 알 수 없는 이상한 꿈일지라도.

혜미가 괴롭게 이를 깨물며 끙끙거리자 상대가 낮게 웃었다. 마치 싸늘한 초겨울 바람 같은 마르고 버석한 웃음소리였다.

“포기하십시오. 이미 한번 실패하지 않으셨습니까. 잔인한 클라웨의 피를 받은 황족에게 사랑 따위는 어울리지 않습니다. 폐하께 가장 어울리는 건 바로 이런 것이죠. 자신의 쾌락을 위해 모든 이를 희생시키고 슬프게 만드는 것. 소중한 이를 홀로 울게 만드는 것. 인간은 어리석은 실수를 반복하고 클라웨의 미친 역사는 되풀이됩니다.”

격렬하게 내벽을 박아 대고 있었지만 남자는 숨소리 하나 흐트러짐이 없었다. 상상도 하지 못할 절정감이 또다시 온몸을 덮쳐 왔다. 혜미는 이제 두려울 지경이었다. 바싹 마른 입술을 혀로 축이며 알 수 없는 상대에게 애원하듯 내뱉었다.

“그. 그마…. 아…. 그만…. 흣….”

“그만하라며 이리 저를 조이시는 건, 폐하께서 저를 시험하기 위함입니까…?”

상대의 목소리에 쾌감이 번졌다. 혜미는 그가 허리를 뒤로 물렸다가 다시 한번 강하게 처박자 허리를 뒤로 휘며 신음했다.

“아니면 몸과 정신을 모두 바쳐 황실에게 충성하는 본분을 따르고 있는 저를… 치하하기 위함이십니까….”

그의 목소리에 깃든 흥분을 감지하며 혜미가 그의 성기를 꽉 조였다. 의지대로 한 것이 아니었다. 그녀의 몸은 마치 그와 맞춘 것처럼 꽉 맞물려 돌아가고 있었다.

“흐… 으응…! 아…!”

“하아…. 아…. 폐하….”

상대의 목소리에 열기가 일고 있었다. 그가 속삭이는 목소리가 귓가에 뜨끈하게 번졌다. 빨라진 숨결을 내뱉으며 그가 그녀를 더욱 깊숙하게 파고들었다.

“태아 때부터 각인한 육체와 하나가 되는 의식을 치르는 느낌이 어떠하십니까….”

“하아…. 하아…!”

혜미가 대답을 하지 못하고 숨을 헐떡이자 상대가 그녀를 향해 고개를 기울였다.

“예. 소원대로 키스해 드리겠습니다.”

아니라고 말할 기회도 없었다. 낮게 속삭인 상대가 벌어진 그녀의 입술에 제 혀를 바로 물린 탓이었다.

“흐읍….”

알싸한 꽃향기가 나는 호흡이 뜨겁게 뒤섞였다. 이제껏 버드 키스만 뿌리던 혀가 그녀를 질척하게 뒤섞으며 깊숙하게 타액을 빨았다. 머릿속이 백지가 되는 것 같은 쾌감이 온몸을 잠식했다.

찔꺽. 찔꺽. 스륵. 찔꺽.

한쪽 다리가 그의 팔에 단단히 감겼다. 혜미의 질 근육이 그의 성기를 꽉 조이며 집어삼켰다. 붉은 속살이 선홍빛 페니스에 딸려 나왔다 사라질 때마다 젖은 소음이 뜨겁게 번졌다.

‘느껴지십니까, 폐하…?’

키스하고 있는 상황에서 상대가 또렷하게 말하는 목소리가 뇌리에 그대로 박혔다.

‘폐하께서 저와 혀를 섞으며 이리 즐겁게 제 몸을 받아들이시는 것 말입니다…. 이건 마치… 연인이 나눌 법한 뜨거운 정사와 같지 않습니까…? 저와의 의식을 달가워하시니 저 역시 기쁠 따름입니다만.’

방의 공기가 달아올라 후끈했다. 느리지만 집요하게 쑤셔지는 음부에서 하얀 거품이 일었다.

“아! 아! 하앗! 흐응!!!”

그가 입술을 떼자 잇새로 신음이 샜다. 공중으로 치켜 올라간 혜미의 종아리가 하염없이 앞뒤로 흔들렸다. 눈을 뜨고 싶었지만 불가능했다. 혜미는 그저 알 수 없는 누군가가 퍼부어 대는 쾌감을 감당해야 할 뿐이었다.

“흐응! 하응!!! 싫! 아! 싫어…. 아!!!”

아랫배를 간질이던 쾌감이 또다시 단단하게 뭉치기 시작했다. 터지기 일보 직전. 혜미의 손이 그의 하얀 등을 아프게 긁었다.

“아앙…. 아아아앙…!”

혜미가 간헐적으로 몸을 떨며 절정에 올랐다. 짤막한 손톱이 상대의 살점에 꽉 박혔다.

“흣….”

이를 살짝 깨무는 것 같은 신음 소리. 뒤이어 뜨끈한 정액을 분출한 그의 성기가 늪 같은 질 속에서 쑥, 빠졌다.

“하아…. 하아…. 흐읍….”

사정을 끝내지 않은 그의 성기가 그녀의 입 안을 예고 없이 비집었다.

“으흡…!”

알싸한 맛의 정액이 또 한 번 터져 나가 그녀의 식도를 타고 몸 안으로 흘러내렸다. 채 담아내지 못한 정액이 입가로 흐르자 상대가 그것을 손으로 훑어 그녀의 입 속으로 집어넣었다. 손가락으로 혓바닥의 돌기를 어루만지는 느낌에 또다시 몸이 떨렸다.

“흡…!”

혜미는 그의 손가락을 깨물며 세게 빨았다. 그러자 그가 웃으며 다정하게 속삭였다.

“욕심 많으신 분. 다 가져야 하실 분. 황실의 진정한 피는 바로 이런 걸 말하는 것이겠죠. 자신의 약함을 교활함으로 감추고 있는 크리스티앙이 아니라 말입니다.”

‘크리스티앙?’

그에게서 나온 이름에 혜미의 눈꺼풀이 소리 없이 움찔거렸다.

쪽.

하는 소리와 함께 그의 손가락이 간신히 혜미의 입 속에서 빠져나왔다.

“하아…. 하아….”

그의 입술이 감긴 채 파르르 떨리는 그녀의 두 눈동자를 차례로 스쳤다.

“저는 여전히, 저의 자리에서 폐하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토록 무겁던 혜미의 속눈썹이 느리게 위를 향했다. 흐릿한 새벽빛을 가득 담은 은색 머리카락에서 별빛이 쏟아지는 듯한 착각이 일었다.

“기억하십시오, 폐하.”

흐려진 초점에 서서히 초점이 돌아오며 그녀를 향해 속삭이는 이의 연한 하늘빛 눈동자가 선연했다.

나는 이 사람을 알고 있다. 기억나지도 않는 아주 오래전부터. 그런데 누구… 였더라? 분명히 아는 사람인데 이름이 쉽사리 떠오르지 않았다.

그가 그녀의 이마에 부드럽게 입 맞춘 후, 낮게 속삭였다.

“폐하의 처음과 끝은 저라는 사실을.”

혜미의 얼굴이 서서히 굳었다. 눈앞의 남자가 누군지 그제야 깨달은 탓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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