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황께서 그들의 행방을 알지 못한다면 모른다, 한마디만 하면 될 일입니다.”
교황이 시치미를 떼려는 건지 아니면 황실의 근위대 전체를 모욕하는 건지. 둘 중 어느 것이라도 에리히의 기분을 최악으로 만들기는 마찬가지였다.
교황이 천천히 발걸음을 옮기며 목소리를 낮추었다.
“황실에서 늘 하던 대로 재능이 뛰어난 마법사들을 발탁해 없앤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건 아닌 모양이로군요.”
크리스티앙이 재위하자마자 벌이고 있는 거대한 프로젝트를 암시하는 말이었다. 에리히가 주먹을 꽉 쥐었다.
“없애는 게 아니라 더 부강한 대국을 위한 희생이오, 교황.”
“제국이 얼마만큼 더 부강해질지, 진심으로 기대가 됩니다. 그를 위해 희생당해야 할 마법사의 수가 과연 얼마나 늘어날 것인지도.”
에리히는 진심으로 베네딕트의 다리를 걷어차 바닥에 무릎 꿇리고 싶은 충동에 시달렸다. 그가 베일 뒤에서 어떤 표정을 하고 있을지 상상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크리스티앙의 분노를 이해할 수 있을 기분이었다. 본인조차 이렇게 화가 나는데, 황제의 입장은 어떠할지 상상만 해도 치가 떨렸다.
베네딕트의 어미 역시도 대마법사로 전대 교황이었다. 그녀가 황제의 죽음과 함께 죽어야 했던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이 황실과 생을 함께하는 대마법사의 운명이다.
지금 눈앞에서 조소하고 있는 베네딕트의 반골 성향에는 하등의 영양가가 없다는 뜻이었다.
“탈주한 마법사 103번의 마력이 뛰어나다는 사실은 알고 계실 겁니다.”
103번은 드물게 공간을 접는 마법을 사용할 줄 아는 이였다. 역사적으로 이 능력을 가진 마법사들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그들이 순간 이동할 수 있는 거리는 커다란 도시 하나에 국한했다. 탈주한 어린 소녀가 수도 전체에 깔려 있는 병사들에게 지금도 잡히지 않았다는 사실은 적어도 아메티스 바깥으로 도망쳤다는 사실을 의미했다.
“게다가 그녀가 파트너로 삼은 97번은 기억을 만지는 자입니다.”
황궁 경비병들이 계속 그들의 뒤꽁무니만 쫓는 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97번과 눈이 마주치면 모두들 괴로운 환영에 사로잡혀 이성을 잃어버리게 되는 까닭이었다.
정원에 핀 꽃에 물을 뿌리며 베네딕트가 말을 이었다.
“그들을 잡고 싶으시면 저를 보내시는 방법도 있습니다. 그들의 마법은 제게 통하지 않을 테니까.”
“…….”
에리히는 말없이 입술을 씹었다. 교황을 자리에서 뜨게 만드는 일은 있어서는 안 됐다. 역대 황족의 죽음은 모두 대마법사의 부재중에 일어난 탓이었다. 그가 죽을 때까지 크리스티앙과 같은 공간에 있어야 하는 이유였다.
“대공.”
베네딕트가 그를 보며 차분히 입을 열었다.
“할 말이 끝나셨으면 저의 장미밭에서 좀 나와 주시지 않겠습니까? 대공의 발밑에 짓밟히고 있는 제 꽃들이 비명을 지르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리기에 드리는 말씀입니다.”
싹이 움트기는커녕 아무것도 없는 붉은 흙을 밟고 선 에리히의 눈동자에 분노가 치밀었다.
“제 눈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습니다만.”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그것이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교황의 눈빛이 투명하게 변하자 그의 주변을 둘러싼 장미 덤불이 순식간에 그의 키보다 높게 자라나며 공간을 뒤덮었다. 피처럼 붉은 장미 꽃봉오리가 툭, 툭, 터지며 만개했고 얽히는 줄기 사이에 뾰족한 가시가 돋아났다.
“인간은 때로 가장 약하다 생각하는 것에게 치명적인 상처를 입고 어이없이 죽습니다. 그것이 바로 인간의 어리석음입니다.”
차기 대마법사를 찾는 황실의 노력은 계속되고 있었다. 언젠가 눈앞의 건방진 교황보다 더욱 뛰어난 자가 나타나기를 간절히 바라게 되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자중하시오, 교황.”
에리히가 터져 나오는 욕설을 간신히 누르며 내뱉었다. 이제 장미 가시는 그의 동공을 찌를 듯 가까웠다. 꽃잎에서 터져 나오는 달콤한 장미 향이 독주처럼 숨결을 파고들었다.
“왜. 꽃이 마음에 들지 않으십니까? 날카롭고 잔인한 아름다움이야말로 대공이 가장 선망하는 것이 아닙니까?”
에리히는 교황청 안에서 칼을 뽑지 않으려 부들부들 손을 떨었다. 그리고 교황 베네딕트는 그런 그를 조소하듯 입을 놀리고 있었다.
“대공, 그거 아십니까? 장미는 칼로 베어 버리면 그만이라는 것을.”
이 와중에 에리히의 행동을 제한하게 만드는 존재는 단 하나뿐이었다. 그가 검의 손잡이를 꽉 잡은 채 이를 뿌득 갈며 교황을 향해 속삭였다.
“…이리 함부로 마력을 행사하시면 황제 폐하께서 노하실 텐데요.”
베일 뒤로 흐리게 비치는 교황의 입술에서 작게 웃음소리가 샜다. 이번에는 확실한 웃음소리였다.
‘아아 이런. 두려워서 온몸이 다 떨리는군요.’
머릿속으로 그대로 전달되는 교황의 조소에 오히려 그의 몸이 오싹해졌다. 에리히는 제 얼굴을 찔러 올 듯 가까운 장미 덤불 뒤에서 입술을 꽉 씹었다.
베네딕트는 확실히 강했다. 본인 스스로의 입으로 자신의 능력은 치유에 국한한다 말하고 있었지만 실제로 그가 가진 능력이 그 이상이라는 사실을 모를 수는 없었다.
이전 대마법사들과 비교할 수 없는 엄청난 힘을 가진 그가 왜 이곳에서 갇혀 몸을 웅크리고 있는 건지, 이유가 궁금해지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
기사들을 모조리 안으로 들어오게 한 후, 여관 주인이 피로한 얼굴로 입을 뗐다.
“그 애들이 나타난 건 열흘쯤 전이었나 보다. 거지꼴을 한 애들이 여관에 들어오더니 다짜고짜 남자애가 테이블에 있던 음식을 집어 들고 옆에 있던 애한테 주는 거야. 둘 다 얼마나 허겁지겁 음식을 먹는지… 처음엔 어디서 탈주한 노예들인 줄 알았다. 술 마시고 있던 피혁점의 페브르가 혼을 내려고 다가갔는데….”
그는 갑자기 눈을 뒤집고 쓰러졌다고 했다. 그런 그를 도우려 몰려간 사람들의 상황도 다르지 않았다. 소년과 눈이 마주친 이들은 모두 각자의 고통스러운 기억과 대면했다. 인생에서 가장 떠올리고 싶지 않은 괴로운 순간을 눈앞에서 본 사람들은 모두 정신이 나간 사람처럼 행동했다.
“그 아이들을 잡으려 했지만 허사였어. 정신을 차려 보면 뭐에 홀린 것처럼 서로에게 칼을 휘두르거나 주먹을 내지르고 있었거든.”
“그래서 그 아이들을 피해 지금 이렇게 숨어 계시는 겁니까?”
발터의 물음에 여럿이 고개를 끄덕였다.
“문을 닫은 상점 내부에 우리 같은 사람이 여럿이네.”
“아까 바깥에 있던 영감이 그 아이들이 어디 있는지 알아냈어. 영감은 치매가 있어서 하루가 지난 일은 전혀 기억을 못 하거든.”
“빌어먹을 사비오 놈들! 여기가 어디라고 와! 여긴 이제 우리 땅인데! 이제 와서 우릴 다 몰아내려고? 흥!”
“영감, 아가리 좀 싸물어요! 아휴. 이래서 곱게 늙지 못하면 차라리 뒈지는 게 낫다는 소리야.”
“아니, 잠깐만요. 저 할아버지가 지금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거예요?”
혜미의 질문에 누군가가 무겁게 한숨을 쉬었다.
“영감님 말에 따르면 여기가 아주 오래전 사비오족이 살던 곳이라고 하오.”
“사비오족이라면….”
“왜 있잖소. 마법사들의 조상 말이요.”
“하지만 지금 마법사들은 모두 수도에서 황실의 특급 대우를 받으며 살고 있잖아! 그 녀석들은 마법사가 아니라 그 뭐야… 악마에 쓰인 게 분명하다고!”
여기저기서 나이가 지긋해 보이는 사람들이 말을 보탰다.
“설사 영감이 헛소리하는 게 아닐지라도 이게 말이나 되는 소린가? 백 년도 더 지났는데 이제 와서 자기네 땅이라고 우기는 게 뻔뻔하기도 하지!”
“옳소!”
쾅!
발터가 테이블을 주먹으로 내려치자 시끌시끌하던 장내에 순식간에 침묵이 감돌았다.
“한 사람씩 천천히 입을 열어 주시겠습니까?”
그리고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 혜미가 갑자기 싸해진 분위기를 환기하듯 조심스레 질문했다.
“이제 여러분들은 어떻게 할 생각인데요? 계속 이렇게 숨어 지내려는 건 아닐 테고.”
“시장 뒤편, 커다란 떡갈나무 숲에 있는 오두막인데… 오늘 밤 우리가 단체로 죽이러 갈 생각이야. 황궁 근위대를 기다리는 것도 이제 지쳤네. 이러다 다 죽게 생겼으니까.”
혜미가 꿀꺽, 마른침을 삼킨 후 입을 열었다.
“…그건 별로 좋은 계획이 아닌 것 같은데요?”
“뭐? 외지인은 참견하지 말게! 이건 우리 마을의 존폐가 달린 문제라고! 그 빌어먹을 애새끼들을 절단을 내서라도….”
“저희가 대신 갈게요.”
혜미의 말에 주먹을 들며 씩씩거리던 남자 하나가 미심쩍은 표정으로 되물었다.
“당신들이라고 안 당할 것 같소?”
“밑져야 본전이잖아요. 저희가 갔다가 실패하면 그 뒤에 마을 사람들 다 끌고 가세요.”
남아 있는 이들이 모두 줄초상 치르는 걸 보고 싶지 않아서 하는 말이라는 진심은 속에 담아 두었다.
혜미의 대꾸에 겁먹은 표정으로 입을 꾹 다물고 있던 마을 사람 여럿이 고개를 끄덕여 동의했다.
“속는 셈 치고 한 번 믿어 봅시다.”
“이 친구들, 세르노티라고 했잖소. 행색은 거지꼴이어도 칼 휘두르는 구색 정도는 갖추고 있겠지.”
상상도 못한 엄청난 무시에 기사 여럿의 얼굴색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탁, 하고 칼자루를 강하게 잡는 아일라의 얼굴에 모욕감이 깃드는 것을 보며 혜미가 황급히 목소리를 높였다.
“대신 저희가 그 애들을 처리하고 오면 뭘 해 주실 수 있으세요?”
“뭘 원하오? 말만 하시오!”
“따뜻한 잠자리, 뜨끈뜨끈한 목욕물 그리고 배 터지는 진수성찬이요. 참고로 여기 있는 저희 모두, 인당 5인분씩은 기본이에요.”
혜미는 기다렸다는 듯 거래 조건을 말하자 여관 주인이 그 정도야 당연한 일이라며 마을 사람들의 동의를 구했다.
순식간에 거래를 성사시킨 혜미를 보며 기사들이 침을 꿀꺽 삼켰다. 혜미가 자신을 보며 미소짓는 발터를 향해 왼쪽 눈을 지그시 깜빡였다.
***
그들이 도착한 곳은 레나의 설명대로 온갖 나무 열매가 주렁주렁 열린 정원 앞이었다. 삐뚤빼뚤하게 박힌 울타리 너머에 있는 통나무 집을 바라보며 혜미가 한 발 앞으로 나섰다.
“그럼 다녀올게. 내가 나올 때까지는 들어오지 말고 여기서 기다려 줘.”
기사들이 진지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울타리를 조심스레 열고 통나무집 앞까지 다가간 후, 혜미가 뒤따라온 발터에게 다시 한번 눈짓을 했다.
‘절대, 그 아이의 눈을 쳐다보지 마. 알았지?’
‘알았다.’
셋. 둘. 하나.
마음속으로 셋을 센 후, 발터가 문을 열었고 그 순간 혜미가 안으로 빠르게 진입했다.
“뭐… 뭐야!”
뒤따라온 발터가 서둘러 문을 닫아 도망갈 경로를 차단하자 혜미는 집 안을 빠르게 눈으로 훑었다. 빗속에서 사라진 소년과 소녀가 그곳에 있었다.
보글보글, 계피 향과 귤 향이 나는 무언가를 끓이고 있던 소년이 혜미를 발견하고 후닥닥 뛰어가 침대에 기대 누운 소녀에게로 달려갔다.
“죽고 싶어! 어딜 들어와!”
양팔을 벌리고 선 소년이 혜미를 향해 눈을 부라리며 소리를 질렀다. 그가 아무리 정신을 집중해 봐도 눈앞의 상대는 멀쩡했다. 앙상한 등에 식은땀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얘들아. 난 너희를 해치러 온 게 아니라 이야기를 하고 싶어서….”
“입 다물어!”
어디선가 혜미의 얼굴을 향해 부웅 날아온 찻잔을 발터가 손으로 쳐 냈다. 움직임을 감지한 반사적인 행동이었다.
쨍그랑.
산산조각이 나며 찻잔이 깨지자 소년이 이를 뿌득 갈았다. 그를 보지 않는 상대를 향해 집 안의 모든 식기를 날렸다. 발터는 거침없이 날아오는 물건들을 쳐 내며 인상을 찌푸렸다.
소년은 자신을 보지 않는 발터 때문에 씩씩거리다 벌떡 일어나 그에게 다가왔다.
“야, 너 지금….”
놀란 혜미가 그를 향해 말을 걸었지만, 그녀를 손으로 턱, 밀어냈다.
“비켜.”
발터의 허리까지밖에 오지 않는 소년이 몸을 붕 띄웠다. 발터는 피할 새도 없이 그의 코앞까지 다가온 소년의 물빛 눈동자를 마주할 수밖에 없었다.
연한 하늘색 눈동자가 투명해지며 커다란 거울처럼 바뀌자 발터의 짙은 눈썹이 미간에 모였다. 그 안에서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얼음이 낀 냇가를 달리는 자신의 모습이 보였다. 그 후의 일은 지금도 머릿속에 생생했다. 동굴 안에서 난도질당해 쓰러진 그녀의 연인과 정신이 나가 절규하는 그.
“발터…!”
혜미가 곁에서 불안한 목소리로 그의 이름을 부르는 게 들렸다. 그녀는 살아 있다. 죽지 않았어. 매 순간 발터를 버티게 하는 것은 그 사실 하나였다. 그가 그 사실을 잊을 리가 없었다.
나는 너를 두 번 다시 잃지 않아.
턱.
발터의 커다란 손이 소년의 눈을 가렸다.
“이거 놔! 이거 놓으라고!!!”
소년이 팔다리를 버둥거렸지만 소용없었다. 발터는 그의 머리통만 잡고 번쩍 든 채 뚜벅뚜벅 걸어가 테이블 위에 거칠게 앉혀 놓았다.
“이씨…!”
소년이 내지르는 주먹이 턱, 하고 발터의 주먹 안으로 사라졌다. 발터가 소년을 향해 건조하게 내뱉었다.
“나는 너와 이야기를 하고 싶은데, 너는 나와 싸우고 싶어?”
“이거 안 놔…? 흣…!”
“싸우고 싶다면 그렇게 해 주지. 대신 난 어리다고 봐주지 않아.”
발터에게 꽉 잡힌 주먹이 아파 왔다. 소년이 계속 힘을 줘 봤지만 고통만 더해갈 뿐이었다.
“죄송합니다. 제가 대신 사과 드릴게요!”
소년 대신 입을 연 것은 침대 위에서 등을 기대고 앉아 있던 소녀였다. 그녀가 몸을 일으켜 주춤주춤 그들에게로 다가왔다.
“타우, 그러지 말라고 했잖아. 아무에게나 마력을 쓰는 건….”
“넌 아무것도 모르면서!!!”
소년이 머리가 까치집처럼 짤막하게 잘린 소녀를 보며 버럭 소리를 질렀다. 소녀가 입을 다물고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다시 그곳으로 돌아가고 싶어서 그래?”
소녀가 풀 죽은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한 발자국도 나갈 수 없는 그곳으로? 감옥 같은 그곳으로? 밥이나 축내는 돼지 취급을 받는 그곳으로?”
말없이 고개를 젓는 소녀를 보며 혜미가 한 발짝 앞으로 다가섰다.
“저기…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어떻게 도와줄 수 있는 일이….”
“가까이 오지 마!!!”
소년이 공격적인 눈을 빛내며 버럭 소리를 질렀다. 휙, 그녀에게 날아오던 의자가 반대편으로 방향을 바꾸어 날아가더니 벽에 부딪혀 산산조각이 났다.
“로즈!!!”
자신의 공격을 막은 소녀를 향해 타우가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소녀가 그를 보며 어쩔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나쁜 사람들 아니잖아.”
“야! 그걸 네가 어떻게 알아!”
타우가 소리를 버럭 지르자 로즈가 조용히 손을 들었다.
“…저걸 가지고 있잖아.”
로즈가 가리킨 곳은 혜미가 차고 있는 검이었다. 붉은빛을 빛내는 보석을 보자 타우가 입술을 꽉 깨물었다. 대마법사의 보석에서 느껴지는 기운을 가장 잘 알아차릴 수 있는 이들은 마법사였다. 타우의 주먹에서 힘이 스르륵 빠지자 발터가 그제야 그의 손을 놓아 주었다.
“넌 뭔데… 그걸 가지고 있어…?”
혜미의 입술에서 어색한 미소가 흘렀다.
“나도 몰라. 어쩌다 보니 이렇게 됐어.”
“마법사의 보석은 그것과 각인한 사람들에게만 반응해.”
타우가 그녀를 보며 물빛 눈동자를 일렁였다.
“네가 혹시… 황제야?”
얼굴을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황제. 황성의 모든 이들이 찬양하는 황제가 그들을 직접 찾으러 온 것일까. 그의 곁에서 로즈가 문득 입을 열었다.
“그런데 왜 우릴 황성에서 못 나가게 가둬 놔요?”
혜미를 보며 살짝 아래로 처진 눈동자를 깜빡였다.
“우린 아무 짓도 하지 않았는데. 왜 바깥에 못 나가게 해요? 위험한 짓 하지 않겠다고 약속할 수 있는데. 다들 그냥 함께 놀고 싶을 뿐인데.”
로즈의 옅은 눈썹이 아래로 휘었다.
“제 친구들은 어디 있어요? 제 엄마는 왜 돌아오지 않아요? 타우의 형은요?”
“미안해. 나는 황제가 아니라 잘… 모르겠어.”
혜미는 그들이 원하는 질문의 답을 줄 수가 없었다. 당황한 표정의 발터 역시도 처음 듣는 정보에 인상을 찌푸리고 있을 뿐이었다.
100년 전, 클라웨 4세가 트리바 산맥 동쪽에 숨어 살던 마법사 부족을 통째로 수도로 불러들인 이후, 이 땅에서 마법사들의 씨는 서서히 말라 갔다.
마법사가 나타나면 무조건 수도로 보내졌다. 범인들은 그들을 만날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았다. 제국을 위해 충성하는 교황청에서 신관 대접을 받으며 산다는 것이 그들이 알고 있는 정보였다.
“언니는 우릴 죽일 건가요? 대마법사님의 보석을 가지고 있는 이유는 그 때문이에요?”
로즈의 마지막 질문에 혜미가 황급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야. 너희가 우릴 해치지 않는다면 우린 아무 짓도 하지 않을 거야. 약속해.”
로즈와 타우가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연한 하늘빛을 띤 두 쌍의 눈동자에는 의심이 가시지 않았다.
“너희들… 마법사인 거지?”
혜미의 질문에 소녀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왜… 여기에서 이러고 있는 거야…?”
“도망쳤으니까 그렇지.”
당연한 걸 왜 묻고 있냐는 것 같은 퉁명스러운 말투였다.
“왜… 도망친 건데?”
혜미가 조심스레 이유를 묻자 소녀의 얼굴에 그늘이 졌다.
“로즈를 데려가려고 했으니까.”
타우가 입술을 꽉 깨물며 중얼거렸다.
“병사들이 데리고 나간 마법사들 중, 황궁으로 되돌아온 마법사는 여태까지 단 한 명도 없다구.”
“그래서 도망친 거예요. 타우는 제가 걱정이 되어서요. 다음번은 제가 가게 될 거라고 35번 할머니가 살짝 말해 줬거든요. 아, 35번 할머니는 별의 움직임에 따라 미래를 보는 능력이 있어요. 가끔 안 맞을 때도 있지만 타우는 할머니가 근위병들에게 끌려가지 않으려고 거짓말하는 거래요.”
로즈가 동그란 눈을 깜빡이며 얼빠진 듯한 표정의 혜미를 향해 방긋 웃었다.
“아메티스는 여기서 하루 온종일 말을 타고 달린다 해도 한 달은 넘게 걸리는 곳이야. 너희 둘이서… 어떻게 도망을 친 거지?”
발터가 물었다. 그러자 로즈가 빙긋 웃더니 눈 깜짝할 사이에 그들의 앞으로 다가섰다. 세르노티의 기사들이 아무리 빨리 움직인다고 해도 이 정도는 아니다.
이것이 마법인가. 발터는 제 눈으로 보고도 믿지 못할 광경에 마른침을 삼켰다. 옛날 사람들이 마법사를 두려워했던 이유를 어렴풋이 알 것도 같았다.
“로즈는 공간을 접는 능력이 있어. 몇 번만 접으면 이 세계의 끝까지도 눈 깜짝할 사이에 이동할 수 있다고. 힘만 센 주제에 잘 알지도 못하면서.”
타우가 아직까지 그에 대한 불만이 남아 있는 목소리로 투덜댔다.
“하필이면 이곳으로 도망친 이유는… 이곳이 예전 사비오족이 살던 곳이기 때문인가?”
“네.”
로즈가 고개를 끄덕였다.
“저희는 궁에서 태어나서 다른 곳을 한 번도 가 본 적이 없어요. 그런데 35번 할머니가 말해 줬거든요. 아주아주 먼 옛날에 우리도 산속에서 자유롭게 살았던 적이 있었대요. 35번 할머니도 할머니의 할머니에게 들은 이야기인데요. 사람들이 아프면 도와줬대요. 위험한 사람들을 위해 불을 피우고 바람을 부르고, 누군가를 즐겁게 하기 위해 꽃을 피웠던 적이 있었다고요. 그때는 아무도 서로를 미워하지 않았대요. 모두 다 행복했다고요.”
“그래서 한 번도 가 본 적도 없고 알지도 못하는 곳을, 그저 머릿속에 떠올리는 것만으로 올 수 있었다는 거야?”
“상상과는 조금 달랐지만요.”
로즈가 입술을 깨물며 애매하게 웃었다. 순간적이었지만 어린아이의 표정이라고는 여겨지지 않는 그녀의 모습에 혜미는 그들이 이곳에서 마을 사람들에게 어떤 취급을 받았을지를 어렴풋이 예상할 수 있었다.
진실은 말하는 사람이 누구냐에 따라 달라지기 나름이었다. 달의 어두운 뒷면을 직접 보지 않으면 그 색을 알 수 없는 것처럼.
“혼자라면 금방 잡히고 말았을 거예요. 경비병들이 없는 곳이 없더라고요. 그나마 타우가 있어서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거예요. 근처까지 쫓아온 황궁 경비병들을 서로 싸우게 만들어 퇴치했거든요.”
“아… 그, 그래… 그랬겠지.”
자랑스럽게 말하는 로즈를 향해 혜미가 떨떠름한 얼굴로 말을 흐렸다. 타우의 마력 때문에 괴로워하던 기사들의 모습이 눈앞에 떠오른 까닭이었다. 그녀의 표정을 보며 로즈가 타우를 변호하듯 입을 열었다.
“타우가 괴로운 기억만 끄집어내는 건 절대 아니에요.”
“이상한 소리 하지 마!”
“사실이잖아.”
로즈가 어깨를 으쓱하며 말을 이었다.
“타우는 기분 좋은 환상도 볼 수 있게 해요.”
양손을 가슴에 모은 로즈의 표정은 꿈을 꾸는 듯 행복해 보였다.
“덕분에 황궁에 갇혀 있을 때도 온 세계를 다 돌아다닌 기분이었어요. 타우가 낯선 사람들에게 무섭게 굴긴 하지만… 맘씨는 착하거든요. 제 이름을 지어 준 것도 타우인걸요.”
발터는 슬쩍 눈을 돌려 인상을 찌푸리고 있는 소년을 바라보았다. 삐죽삐죽 고슴도치같이 가시를 바짝 세우고 있는 녀석도 의외로 귀여운 면이 있는 건가.
“이름을 지어 줬다고…?”
“우린 원래 이름이 없으니까.”
소년의 목소리는 조금 풀이 죽어 있었다.
“그게… 무슨 말이야?”
로즈가 조용히 손을 들어 이마를 가리고 있던 앞머리를 들추었다. 혜미와 발터의 표정이 동시에 굳었다. 붉은 잉크로 선명하게 적힌 숫자 103이 또렷하게 보였다.
“우리 모두는 번호를 가지고 있거든요. 저는 103번이고요, 타우는….”
그제야 왜 그들의 머리카락이 엉망으로 잘려 이마를 덥수룩하게 가리고 있는지 알 것 같았다. 대체 사람 몸에 번호를 새기는 이는 제정신일까…?
“상관없어.”
혜미가 고개를 저으며 입을 열었다.
“타우가 몇 번이었는지, 그런 거 궁금하지 않아.”
“그럼 뭐가 궁금해요?”
“난 너희들이 이제 어떻게 할 생각인지가 궁금해.”
타우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사실 앞이 막막했다. 로즈의 공간 이동은 그 장소가 구체적으로 그녀의 머릿속에 그려질 때만 가능한 것이었다.
“로즈가 말한 대로 이 나라 곳곳에는 경비대들이 깔려 있어. 너희 같은 아이들 둘이 이동한다면 발각되는 건 시간문제지. 도망가는 데도 한계가 있으니까.”
“나도 알고 있어. 그래서 좋은 곳을 찾고 있는 중이라고!”
문제는 그들이 수도인 아메티스와 마법사들의 고향으로 불리는 이곳, 로비나를 제외한 다른 지역에 대한 지식이 전무하다는 데 있었다. 황성에서 나고 자란 그들이 성 바깥의 세계를 알 리가 만무했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
타우가 주먹을 꽉 쥐고 숨을 씩씩 몰아쉬었다. 발터가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다 혜미를 향해 시선을 던졌다.
“너희들한테 딱 알맞은 곳이 한 군데 있긴 해.”
혜미는 발터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것 같았다.
“문제는 여기서 좀 멀다는 건데….”
“로즈는 아무리 먼 거리라도 단숨에 이동할 수 있어. 아마 여기서 땅끝까지도 갈 수 있을걸. 거기가 어딘지 알기만 한다면.”
혜미가 안심하고 설명을 보탰다. 그들에게 가장 안전한 곳이라면 한 군데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세르노티 기사단이 공식적으로 출정한 이 상황에서 일부러 비어 있는 영지를 공격할 가능성도 낮았다.
“이 산을 넘어서 열흘 정도만 가면 긴 강이 있는데, 그 긴 강을 따라 거슬러 올라가면 숲이 사라지고 커다란 떡갈나무가 있는 평원이 나와. 지금은 봄이라 온 세상이 초록이고 민들레 꽃씨가 사방에 날아다니고 있을 거야. 평원을 마구 달려서 내려가면 큰 호숫가가 나오는데… 낮에는 햇살이 반짝이고 밤에는 별빛이 반짝여. 강물에는 사시사철 건강한 물고기가 퍼덕이지. 마을 한가운데에는 커다란 풍차가 돌아가는데, 그 아래 오른쪽을 보면 붉은 흙을 바른 지붕 집이 있어. 거기에는 토끼 스무 마리를 기르는 토미와 랄프라는 형제가 살고 있고. 지금도 아마 토끼풀을 뜯고 있겠다.”
“와…!”
로즈의 눈이 반짝거렸다. 그녀의 눈앞에 조용하고 평화로운 마을이 펼쳐지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곳에는… 아무도 우릴 가둬 두지 않나요…?”
“절대 안 그래.”
“마음껏 뛰어놀 수 있어요? 숨바꼭질해도 돼요?”
“호수 뒤는 풀숲이라 숨을 곳도 엄청 많고.”
로즈의 얼굴이 더욱 밝아졌다.
“먹을 것도 마음대로 먹을 수 있어요?”
“황궁 음식과는 비교할 수 없을 테지만….”
“그런 거 필요 없어요!”
혜미가 말하자 로즈가 소리를 높였다. 처음 들어보는 큰소리였다. 그녀의 얼굴이 흥분에 반짝반짝 빛이 났다.
“갈 수 있어.”
로즈가 타우에게 확인하듯 눈을 맞추었다.
“타우. 나, 갈 수 있을 것 같아.”
“알았어. 거기로 가자.”
발터가 식탁보를 찢어 낸 후, 그 위에 세드릭에게 보내는 전언을 썼다. 부탁한다는 간단한 한 줄이었지만 세드릭은 그의 말뜻을 알아들을 것이다.
“그곳에 도착하면 무조건 성주의 탑으로 가서 세드릭을 찾아라. 그라면 너희들을 잘 보호해 줄 거야. 물론 가둬 두는 것과는 거리가 한참 멀고. 내 말 무슨 말인지 알아듣지?”
타우가 진지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다짜고짜 그들을 황궁 경비대에 넘기지 않은 걸로 봐서 그들이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무엇보다 여자가 들고 있는 대마법사의 보석은 가짜가 아니었다.
“저기 언니. 하나만 약속해 줄 수 있어요?”
“뭔데?”
“친구들….”
로즈가 타우의 눈치를 슬쩍 보며 말을 흐렸다. 타우가 입술을 깨물며 낮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황성에 아직 친구들이 많아. 다 데리고 도망치고 싶었는데 그러면 꼬리가 길어질까 봐 그러지 못했어. 그리고 누군가 배신하면….”
타우가 코를 슥, 훔쳤다.
“다 죽으니까.”
“걱정 마.”
혜미의 입에서 저절로 말이 튀어나왔다. 어린애의 이마에 번호를 박고 가둬 두는 미친 짓을 하는 이들은 도대체 누구란 말인가. 황궁에 있는 이들임은 분명했다. 그 위에 크리스티앙이 있는 걸까. 가슴속에서 뜨거운 열기가 울컥 치밀었다.
“네 친구들 꼭 다시 만나게 해 줄게. 약속해.”
그녀가 새끼손가락을 내밀자 로즈가 머뭇거리다 다가와 그녀에게 손을 내밀었다.
“…고맙습니다.”
그녀와 손이 닿자 로즈가 혜미를 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어…?”
자그마한 다른 손이 양해도 구하지 않고 그녀의 몸을 살짝 짚었다. 보이지 않는 따스한 빛이 퍼져 나가는 기분. 혜미가 숨을 짧게 몰아쉬었다.
“아… 타우의 마법이 왜 통하지 않았는지 알겠어요.”
로즈가 그녀를 올려다보며 입을 열었다.
“대마법사님의… 마력이 몸 안에 깃들어 있네요. 이분에게는. 그리고….”
그녀가 발터에게 시선을 던지며 말을 이었다.
“희미하긴 하지만 저분에게도 느껴져요.”
발터가 조용히 마른침을 삼켰다. 베네딕트와 그들 사이에 일어났던 일을 이 꼬마 애들이 알 리가 없었다. 하지만 그의 몸에 깃든 베네딕트의 마력까지도 느껴진다는 소리였다.
그 와중에 로즈가 하얀 손을 더듬더듬하며 혜미를 살폈다. 그녀의 목소리에 점점 놀라움이 실렸다.
“완벽해요. 모든 장기와 뼛조각 하나하나에까지 엄청난 마력이 실려 있어요…. 이건….”
로즈가 인상을 찌푸린 채 숨을 몰아쉬었다. 그녀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엄청난 기운을 손끝에 느낀 탓이었다. 보이지 않는 강한 마력이 그녀의 손을 뜨겁게 데우는 것 같은 느낌.
이것은 클라웨에서 가장 마력이 강한 대마법사의 축복을 받은 육체임이 틀림없었다. 이를 위해 대마법사는 자신의 수명의 반 이상을 줄였을 것이다.
“…그런데….”
“응?”
로즈가 고개를 갸웃하며 잠시 말을 망설였다. 혜미가 그녀를 향해 어색하게 미소 지었다.
“왜… 그래? 무슨 문제 있어?”
로즈가 그녀를 빤히 바라보았다. 혜미가 그녀에게 키를 맞추어 고개를 숙이자 자그마한 손이 그녀의 귓가로 다가왔다.
속삭이는 로즈의 말에 혜미의 인상이 조금, 찌푸려졌다.
***
아름다운 풀밭이었다. 시선 높이로 자란 풀들 사이에서 이름 모를 노란 꽃들이 하늘하늘 흔들렸다. 날개의 색깔이 영롱하게 파란 나비 하나가 수줍은 노란 꽃에 살며시 내려앉았다. 검은색과 쨍한 파란색은 여태껏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예쁜 색깔이었다.
그녀는 나비를 만지려 걸었다. 마음과는 달리 나비는 손에 쉽게 닿지 않았다. 보폭은 너무 좁아 아장아장 걷는 느낌이고 중심은 잡히지 않아 걸음은 뒤뚱거린다. 마음은 급한데 몸의 반응은 너무나 느렸다. 그녀는 다리가 꼬여 풀밭에 꽈당 넘어지고 말았다.
“흐… 흐으…. 아….”
얼굴이 박힌 곳은 폭신한 풀밭이었으므로 별로 아프지도 않았는데 갑자기 서러워 눈물이 터져 나왔다. 그녀는 엎어진 채 입을 벌리고 소리 내어 울었다.
“이런, 이런. 조심하셔야지요.”
누군가 다가와 그녀에게 눈을 맞추며 속삭였다.
“고운 얼굴에 상처라도 나면 큰일이니까요.”
그녀는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으로 눈앞의 사람을 올려다보았다.
“아…?”
무릎을 꿇은 채 키를 낮추어 시선을 맞추는 사람은 머리카락이 아주 길었다. 색이 옅은 은발이 햇살에 반짝반짝 빛이 났다. 그녀의 머릿속에서 파란 날개 색이 영롱하던 나비는 오간 데 없이 사라지고, 눈앞의 아름다운 사람에게만 시선이 갔다.
“마… 마, 마….”
반짝거리는 머리카락으로 손을 뻗는 그녀를 보며 상대가 희미하게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