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4화 (24/72)
  • “얀…!! 위험해요!”

    잠에서 깨자마자 몸을 날린 아일라가 바닥으로 떨어지려는 그를 끌어안고 간신히 난간에서 떼어 냈다. 바닥에 엉덩방아를 찧은 그녀에게 붙들린 얀의 눈빛은 텅 빈 것처럼 공허했다.

    ‘서… 설마…?’

    “빈센트의 눈동자가 텅 비어 버린 것 같았어.”

    레나의 말을 떠올린 아일라가 그를 보며 인상을 찌푸렸을 때였다.

    “어… 엄마….”

    얀이 그녀의 가슴으로 손을 뻗는 순간, 아일라가 흠칫했다.

    “얀, 정신 차려요.”

    “엄마….”

    어릴 때 돌아가신 엄마를 찾는 얀의 눈동자에 아일라는 없었다. 당황한 그녀가 그의 손목을 틀어쥔 채, 혜미를 향해 고개를 돌렸을 때였다. 혜미의 뒤편에 있는 누군가와 눈이 마주친 순간, 아일라의 머릿속에서 무언가가 툭 끊어졌다.

    “아아아악!!!”

    아일라가 커다랗게 비명을 질렀다. 다리로 퍽, 하고 그를 걷어차자 방어 의지가 전혀 없는 얀의 몸이 힘없이 날아가 벽에 처박혔다.

    “뭐야, 무슨 일이야?”

    “아일라, 왜 그래…. 왜 그래…!”

    소동에 깨어난 기사들이 영문을 모르고 그녀의 이름을 외쳤다.

    “내 몸에 손대지 마…. 손대지 말라고!!!”

    달려온 기사들에게 주먹을 휘두르는 아일라의 푸른 눈동자가 텅 빈 것처럼 확대되었다.

    “아… 아일라…?”

    그녀가 악을 쓰며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얀은 그런 그녀를 향해 또다시 동공이 풀린 눈으로 엉금엉금 기어갈 뿐이었다.

    “어… 엄마….”

    얀의 눈에는 그녀가 젖을 떼기도 전에 죽은 그의 어머니로 보인 까닭이었다. 그런 그의 얼굴에 카플란이 겹쳐져 괴로운 것은 아일라도 마찬가지였다.

    “이게 대체… 어떻게 된 거지…?”

    혜미가 아일라에게 달려드는 얀의 어깨를 뒤에서 강하게 잡고 결박했다.

    “얀, 정신 차려. 응?”

    “죽여 버릴 거야. 온몸을 난도질을 낼 거야!!!”

    “토비아스! 아일라의 검을 치워!!!”

    그녀가 기사들에게 소리치자 토비아스가 재빨리 아일라의 검을 낚아챘다. 그가 주방 근처에서 어둠에 몸을 숨긴 작은 소년을 발견한 것은 그때였다.

    이제 열 살이나 되었을까. 머리칼이 엉망으로 헝클어져 꼬질꼬질한 모습의 어린 소년이었다.

    “너… 누구야…?”

    토비아스가 소년의 어깨를 잡았다. 그의 몸을 돌리자 소년이 인상을 찌푸리며 토비아스의 손을 탁, 쳐냈다.

    “이씨….”

    자그마한 소년이 눈을 빛내며 알 수 없는 언어를 중얼거렸다. 미간을 찌푸린 채 그를 바라보고 있던 토비아스가 소리를 지르며 뒤로 물러섰다. 그의 눈동자에 순식간에 초점이 흐려졌다.

    “흐아아아…!”

    “왜 그래? 왜 그래…. 토비아스!”

    누군가 그에게 외치자 토비아스가 욕설을 내뱉었다.

    “거, 거미가!!”

    “거미?”

    토비아스의 눈에 보이는 것은 보통 거미가 아니었다. 반들반들 새까만 몸통에 붉은 반점을 지닌 엄청난 크기의 독거미였다. 그것도 한두 마리가 아니었다. 그의 키만 한 독거미들이 여관을 꽉 채우고 있었다. 이대로라면 기사들이 위험한 것은 당연했다.

    “토비아스, 괜찮아…?”

    “젠장…. 제기랄…!”

    그가 가죽신에서 단검을 빼 들었다. 그리고 그에게로 달려드는 커다란 거미의 수많은 다리 중 하나를 찍어 눌렀다. 거미가 빽빽한 거미줄을 빠르게 타고 올라갔다.

    “토비아스!!!”

    테이블을 딛고 난간으로 몸을 날려 그의 공격을 피한 기사들 중 누군가가 소리를 쳤다. 하지만 토비아스의 눈에 그녀는 소름이 돋을 정도로 징그러운 커다란 벌레로 보일 뿐이었다. 물리면 온몸에 반점이 생기고 독이 혈관을 타고 퍼져 사람을 죽게 만드는 위험한 독거미였다. 실제로 이 거미에 물려 죽은 시체가 얼마만큼 처참했는지는 어린 그의 머릿속에 똑똑히 남아 있었다.

    “죽여 버리겠어!”

    도약하며 따라붙는 토비아스의 공격을 또다시 간신히 막아내며 율리안이 손을 부들부들 떨었다. 토비아스의 눈에는 초점이 없었다. 레나를 죽일 듯 공격했다는 빈센트의 얼굴이 이러했을까.

    “레나! 얀을 좀 잡아 줘.”

    혜미는 얀을 결박해 안아 든 채 난간 아래로 뛰어내렸다. 다른 기사들은 난동을 부리는 아일라를 저지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응…!”

    레나가 얀의 옷깃을 꽉 잡았다. 아직도 정신을 차리지 못한 얀의 눈동자는 텅 비어 있었다. 그가 그녀의 목덜미에 파고들며 눈물을 뚝뚝 흘렸다.

    “어… 엄마…. 흑….”

    얀을 멀리 던져 놓고 난 후, 혜미가 율리안에게 칼을 휘두르는 토비아스에게로 몸을 날렸다. 토비아스는 이제 방향을 바꾸어 그녀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혜미는 그녀의 얼굴을 내리찍는 토비아스의 손목을 꽉 잡아 저지한 채 커다랗게 소리를 높였다.

    “정신 차려! 토비아스!! 지금 환상을 보고 있는 거야!!!”

    토비아스가 주춤하며 움직임을 멈추었다. 그의 손에 들린 뾰족한 칼날이 금방이라도 혜미의 눈을 찌를 듯 가까웠다.

    “빈센트가 그랬던 것처럼! 너도 환영을 보는 거라고!!!”

    “아아….”

    “우리는 한편이잖아! 넌 세르노티의 기사단이잖아!!”

    혜미가 악을 썼다. 토비아스가 거칠게 숨을 들이마신 후, 환영을 떨쳐내려 고개를 흔들었다. 흐려졌던 그의 눈앞에 초점이 서서히 돌아왔다.

    “토비아스. 괜찮아?”

    “아이가… 아이가 있었어….”

    혜미가 숨을 몰아쉬며 그의 시선이 향하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주방 근처에 있는 소년과 눈이 마주쳤다.

    “누구지…?”

    뚫어져라 토비아스를 바라보고 있던 소년이 이제는 혜미를 노려보며 알 수 없는 말을 중얼거렸다. 혜미가 그에게 한 발자국 더 가까이 다가서자 아이가 흠칫 놀라며 얼굴을 구겼다.

    “혹시 네가 우릴 이렇게 만든 거야…?”

    색이 없을 정도로 흐릿한 물빛의 눈동자를 바라보는데 이상한 기시감이 들었다. 분명 처음 보는 얼굴인데 눈빛이 마치 어디서 본 것처럼 익숙하다. 혜미가 소년을 향해 날카롭게 목소리를 높였다.

    “너… 누구야? 지금 뭐 하고 있는 거니!”

    소년이 흔들리는 눈동자로 입술을 잘근잘근 씹으며 인상을 썼다. 혜미는 그 아이가 이 모든 사태의 원인이라는 사실을 직감했다.

    “대답해!”

    “이씨…. 왜…? 왜 안 통하지…?”

    당황해 혜미를 노려보는 아이의 얼굴에 낭패감이 서렸다. 그의 마력이 그녀에게는 통하지 않은 탓이었다. 중얼거리며 집중하는 소년을 향해 혜미가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크게 외쳤다.

    “당장 그만둬!!!”

    그녀의 허리에 찬 검에서 보석이 번뜩이는 빛을 내는 순간 소년이 제 머리통을 꽉 붙잡았다.

    “흣…!”

    소년이 눈을 감고 비틀거리자 공간에 넘실거리던 보이지 않는 마력이 단박에 깨졌다.

    “왜… 내가 왜 이러고 있지…?”

    정신을 차린 얀이 레나의 몸에서 퍼뜩 제 몸을 떼어 냈다.

    “…괜찮아?”

    “하아….”

    과거의 환영을 보며 괴로워하다가 정신을 차린 것은 아일라 역시 마찬가지였다.

    “아일라, 정신이 좀 들어?”

    “제, 제가 왜…?”

    머리칼을 움켜쥔 소년이 잇새로 욕설을 내뱉었다. 마법이 더 이상 통하지 않음을 깨달은 까닭이었다.

    “이씨…!”

    후닥닥. 소년이 입술을 꽉 씹으며 문을 향해 달려 나갔다. 혜미는 문밖으로 뛰어나가는 그를 황급히 따라붙었다.

    “다들 나오지 마! 위험해!!! 난 괜찮으니까!”

    혜미가 소리를 지르자 그녀와 눈을 맞춘 기사들이 어쩔 줄을 몰라 망설였다.

    “명령이야. 아무도 나오지 마!”

    혜미는 여관의 문을 쾅, 닫은 후 멀리 도망가고 있는 소년을 뒤쫓았다. 죽을힘을 다해 도망치고 있는 소년은 날랬지만 그녀에게 따라 잡히는 건 시간문제였다.

    “하아…. 하아…!”

    “이봐! 거기 서 봐!!! 너!!!”

    그때 나무 뒤에서 망토를 뒤집어쓴 자그마한 인영이 나타났다.

    “…타우?”

    “로즈, 어서. 어서…! 도망가야 돼!”

    소년이 금방이라도 숨이 넘어갈 듯 헐떡이며 그녀에게 다가가자 로즈라 불린 소녀가 그에게 다급히 손을 내밀었다.

    “타우, 여기!”

    “얘들아… 거기 서 봐. 얘들아!!!”

    소리를 지르며 뛰던 혜미가 숨을 몰아쉬었다.

    번쩍.

    하늘에서 섬광이 빛나더니 곧이어 하늘이 무너질 듯한 천둥이 쳤다.

    “…하아….”

    혜미는 쏟아지는 빗물 속에서 눈을 세게 비볐다. 눈앞에는 커다란 나무뿐. 소년과 소녀는 눈 깜짝할 새 사라지고 없었다. 마치 누군가 마법이라도 부린 것 같은 상황이었다.

    ***

    “바… 발터….”

    “이제 정신이 좀 드는 거냐?”

    빈센트가 거친 숨을 몰아쉬는 발터를 향해 말없이 눈을 껌뻑였다. 발터의 몸은 빗물과 흙에 젖어 엉망이었고 그 역시 마찬가지였다.

    “내가… 왜…?”

    빈센트가 공중에 치켜든 제 주먹과 그를 마주하고 선 발터를 번갈아 보며 멍한 표정으로 눈을 깜빡였다.

    “정신 차렸으면 이만 돌아가자. 모두들 기다리고 있을 거야.”

    멀리 날아간 검을 챙기며 발터가 고갯짓을 했다. 인적이라고는 없는 컴컴한 마을, 그가 쏟아지는 빗속에서 빈센트를 찾는 데는 시간이 한참 걸렸다. 커다란 나무 아래에서 머리를 붙잡고 웅크리고 있는 빈센트를 발견했을 때는 이미 새벽이 가까운 시각이었다.

    “다가오지 마…. 오지 마…!”

    빈센트는 레나가 털어놓았던 말 그대로 행동했다. 발터는 텅 빈 눈으로 그를 공격하는 빈센트의 칼을 제일 먼저 빼앗았다. 그리고 본인의 검마저 멀리 내던진 후 그와 육탄 공격을 벌였다. 손과 발을 묶어 질질 끌고서라도 그를 데려갈 생각이었는데, 다행히도 빈센트는 조금 전의 천둥소리에 정신을 차린 것으로 보였다.

    “레… 레나는…?”

    정신이 웬만큼 돌아온 빈센트의 입에서 가장 먼저 레나의 이름이 튀어나왔다. 빈센트의 머릿속에서 그녀에게 검을 휘두르던 자신의 모습이 희미하게 겹쳐졌다. 설마.

    빈센트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그를 향해 울부짖던 레나의 얼굴이 뇌리에 섬광처럼 스친 탓이었다.

    “…계속 널 걱정하고 있어. 그러니까 얼른 서둘러.”

    발터의 말을 들으며 빈센트는 불안함에 주먹을 꽉 쥐었다 펴기를 반복할 수밖에 없었다.

    고개를 푹 숙인 채 발터를 뒤따라 들어오는 빈센트를 보며 레나가 의자에서 벌떡 일어났다. 다리를 절뚝거리며 다가오는 그녀를 보며 빈센트가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자그마한 눈동자가 중심을 잃고 흔들렸다.

    “너 이제 괜찮은 거야…?”

    “레… 레나….”

    빈센트가 까만 눈동자에 눈물을 글썽거리는 레나를 바라보며 말을 더듬었다. 이럴 때면 머릿속이 하얗게 백지가 된 것 같았다. 끔찍한 꿈이기를 바랐던 모든 것이 사실이었다. 레나에게 칼을 휘두르는 미친 짓을 저지르다니.

    죽도록 미안하다고 말을 해야 하는데 너무 긴장해서인지 입이 떨어지지 않는다. 빈센트는 이럴 때면, 남들보다 확실히 둔한 자신의 언어 체계가 원망스러워 죽을 지경이었다.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할지 몰라 우두커니 서 있는 그를 향해 레나가 먼저 입을 열었다.

    “미안해. 빈센트. 내가 잘못했어.”

    “아… 아니. 네가 왜… 왜 사과를….”

    빈센트가 어쩔 줄 모르는 얼굴로 말을 더듬자 레나가 굳은살이 잔뜩 박인 그의 커다란 손을 맞잡았다.

    “예전에… 내가 탑에서 장난쳤던 거 정말 미안해. 그동안 말은 안 해도 실은 계속 내가 밉고 원망스러웠던 거지…? 진심으로 사과할게. 오빠랑 내가 많이 잘못했어. 정말.”

    받아들이는 사람이 하나도 재미없는 장난은 폭력일 뿐이라는 사실을 그때는 알지 못할 만큼 어렸다. 빈센트의 기나긴 트라우마가 얼마만큼 심각했는지를 두 눈으로 확인한 레나의 마음에 죄책감이 드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아니다. 그건 절대 아니다, 네가 오해하는 거다. 레나.”

    그가 어두워진 낯빛으로 고개를 마구 저었다. 손톱만 한 빈센트의 눈 안, 자그마한 동공이 당황해 갈피를 잡지 못하고 어지럽게 흔들렸다.

    “한 번도 네가 미웠던 적은 없다. 내가… 내가 어떻게 널 미워해.”

    그는 태어날 때부터 또래 아이들보다 덩치가 배는 큰 데다 우락부락하게 생긴 것답지 않게 부끄러움을 많이 탔다. 위로 주르륵 나이 많은 누나들에게 늘 놀림을 받고 자란 탓에 말수도 적었다.

    입 다물고 있으면 무척이나 무서워 보이는 그에게 스스럼없이 다가와 함께 놀자고 제안한 것은 레나와 파비안이 처음이었다. 장난을 치려고 했을 뿐인데 놀라서 졸도까지 해 버린 자신의 나약함을 자책하며 빈센트가 말을 이었다.

    “내가… 내가 바보라서 그랬다. 겁쟁이라 그런 거다. 네가 미웠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어.”

    “진짜… 나 안 미워…?”

    레나가 그를 보며 조심스레 물었다. 빈센트는 고개를 끄덕이며 망설임 없이 내뱉었다.

    “당연하지.”

    “진짜?”

    “어머니의 이름을 걸고 맹세한다!”

    빈센트가 믿어 달라는 듯 작은 눈을 더 작게 만들며 제 가슴을 주먹으로 아프게 쿵쿵 두드렸다. 그제야 레나가 긴장이 풀린 얼굴로 작게 혼잣말하듯 내뱉었다.

    “다행이다.”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친구를 잃기라도 할까 봐 얼마나 무서웠는지.

    레나가 속으로 안도하며 생긋 미소 지었다. 사슴 같은 까만 눈동자가 예쁘게 접혔다.

    “빈센트.”

    “응.”

    “기분이다. 그럼 이건 아주머니한텐 비밀로 해 줄게.”

    “으… 응?”

    갑자기 호랑이 같은 그의 어머니 이야기를 꺼내는 레나를 보며 빈센트가 버릇처럼 수염을 긁적였다. 레나가 팔짱을 낀 채 그를 향해 목소리를 낮추었다.

    “너 사고 칠까 봐 걱정하셔서 아주머니가 나한테 마지막까지 우리 막내 잘 부탁한다고 신신당부하신 거 알지? 그러니까 내가 이 일은 통 크게 입 다물어 준다구.”

    언제나처럼 기세가 단숨에 역전되었다. 빈센트가 저도 모르게 쩔쩔매며 고개를 주억였다.

    “…고맙다.”

    “고마우면 뭐 해 줄 건데?”

    레나가 빈센트를 보며 싱글거렸다. 어쩔 줄 모르는 표정으로 열심히 생각하던 빈센트가 목소리를 높였다.

    “보… 복숭아 펀치를 만들어 줄게.”

    “그건 이미 다 먹었잖아.”

    “사실은… 내 짐 안에 절인 복숭아 한 병이 더 있다.”

    “뭐라구?”

    레나의 눈동자가 동그랗게 변했다. 이가 썩어 자그마한 얼굴이 퉁퉁 붓고 마침내 어금니를 빼는 고통을 겪었음에도 레나는 달콤한 거라면 환장을 했다. 그녀를 위해 몰래 챙겨온 복숭아 절임이 이렇게 쓰일 거라고는 생각을 못 했다.

    “진짜? 진짜 있어?”

    “있다.”

    “역시…! 내 맘을 알아주는 건 빈센트 너밖에 없어! 친구 좋다는 게 이런 거구나?”

    “레나. 나는 아직도 네 친구, 맞아?”

    겨우 내뱉은 소리에 레나가 그의 등짝을 팡, 소리 나게 두드렸다.

    “당연하지! 무슨 바보 같은 소리를 하구 있어? 너 나 말고 친구 있어? 없잖아.”

    “그건 맞다.”

    “뭘 또 그게 맞아. 기사단 애들은 네 친구 아니니?”

    “걔들은 함께 일하는 동료.”

    “하하하! 빈센트 너 오늘따라 말을 좀 잘하는데?”

    그제야 표정이 풀린 빈센트와 꺄르르 웃는 레나를 멀리서 보며 혜미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다행이다.”

    테이블 위에 엎드려 숨을 내쉬는 그녀의 손을 발터가 덮었다. 혜미는 그의 손에 깍지를 낀 후, 그를 향해 물었다.

    “저 두 사람 괜찮은 거겠지?”

    “응. 저 둘은 항상 저런 식이니까.”

    어떻게 시작해도 끝은 같다. 빈센트는 쩔쩔매고 레나는 그런 그의 곁에서 소리 높여 깔깔거리는 게 그들의 일상이었다. 겉으로 봤을 때 하나도 닮은 점이 없어 보이는 두 사람은 소위 말해 절친이었다. 그것은 지금껏 한 사람만이 노력해서 만들어 온 관계가 아닐 것이다.

    레나와 빈센트가 지금까지 수많은 기억을 함께 공유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일 것이다. 혜미의 눈에 그들이 보내온 시간이 보이는 것만 같았다.

    그럼 나와 발터는 어떨까. 기억이 없는 나와 발터의 유대는 과연 그들만큼이나 강력할 수 있을까.

    혜미가 물끄러미 발터를 바라보자 그가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나 없는 사이에 이곳에서 한바탕 난리가 났었다며.”

    낮게 깔리는 목소리를 들으니 마음이 조금 놓이는 기분이었다. 적어도 지금 이 순간, 그녀가 발터를 믿는다는 건 확실하다. 유약하기 짝이 없는 속을 내보여도 상관없고 센 척할 필요도 없는, 지금으로서는 유일한 단 한 사람.

    “…응. 좀 그러긴 했어.”

    “괜찮았어?”

    발터의 물음에 혜미가 희미하게 웃었다.

    “식겁하긴 했는데, 뭐. 그래도 다행이지. 아무도 다친 사람이 없잖아.”

    발터가 그늘이 드리운 얼굴로 낮게 중얼거렸다.

    “네가 가장 위험할 때마다 네 곁에 없는 내 자신이 짜증 나 미칠 지경이다.”

    매번 결정적인 순간에 그녀를 혼자 두고 마는 자신이 무능하게까지 느껴졌다. 한숨을 쉬는 대신 입술을 세게 씹는 그를 향해 혜미가 문득 입을 열었다.

    “발터.”

    “응.”

    “너한테 가장 괴로웠던 기억이 뭐야?”

    “…그건 갑자기 왜.”

    발터가 인상을 조금 굳히며 짙은 눈썹을 한가운데로 모았다. 혜미가 그의 손을 놓치지 않으려 꽉 잡은 채 천천히 말을 이었다. 그녀의 목소리는 느릿느릿 차분했다.

    “그 꼬마 말이야. 아무래도 사람의 기억 중 가장 아프거나 괴로웠던 순간만을 끄집어낸 모양이더라고. 대체 무슨 마술을 부린 건진 모르겠지만.”

    “…….”

    발터에게 가장 괴로운 기억이 무언지 대답을 듣지 않아도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세상에서 가장 단단해 보이는 남자가 오열하며 무너졌을 때는 딱 한 번뿐, 죽은 그녀를 품에 안아야 했을 때뿐이었다.

    “네가 울부짖으면서 슬퍼하는 거, 난 눈앞에서 볼 수 없었을 것 같아.”

    “…꼴이 추했던 건 사실이라 부정할 수가 없군.”

    “아니. 그런 게 아니야.”

    혜미가 가만히 고개를 저었다.

    “무너지는 너를 보면 나까지 무너질까 봐, 도저히 그 순간을 감당할 수 없을 것 같아서.”

    혜미의 말에 발터가 마른 입술을 혀로 한번 축였다.

    “내가 너무 이기적인가?”

    “그럴 리가.”

    말없이 시선을 내리깔았다가 이내 다시 올리며 부정하는 갈색 눈빛이 짙었다. 혜미가 붉어진 얼굴의 그를 보며 부드럽게 웃었다.

    “그래서 아까 이 자리에 네가 없는 게 다행이란 생각을 했어.”

    툭 튀어나온 목울대가 소리 없이 일렁였다. 뜨끈해지는 속을 내리누르며 발터가 간단히 내뱉었다.

    “내일 날이 밝으면 빈센트와 레나가 발견했다는 그 집으로 가 볼 생각이야. 아무래도 이 마을이 이 정도로 초토화된 거에 그 애들이 관련 없을 거란 생각이 안 드니까.”

    당장에라도 그들의 목을 차례로 잘라 버릴 것 같은 발터를 향해 혜미가 고개를 들었다.

    “나도 같이 가.”

    “위험해.”

    “아니. 그 꼬마의 마법인지 초능력인지. 나한테는 확실히 통하지 않았어.”

    혜미가 진지한 얼굴로 고개를 저으며 그를 보았다.

    “이번에야말로 내가 직접 가야 돼, 발터.”

    ***

    날이 밝았다. 혜미는 할 수만 있다면 혼자 가고 싶었지만 말도 안 된다는 기사들의 반대에 부딪혔고 고민을 하다가 모두 다 함께 가는 쪽을 택했다. 기사들만 여관에 남겨 두었다가 불상사라도 일어난다면 감당할 수 없을 것 같은 기분이었다.

    지난밤 소년에 대한 주의는 확실하게 익혀 두었다. 모두가 그의 눈을 본 순간, 원인을 알 수 없는 괴로운 환영을 떠올리게 되었으므로 그들은 아이와 시선을 마주치지 않기로 단단히 맘을 먹은 후였다.

    “새벽에 목이 말라서 바깥에 나가려고 했는데, 문 앞에 꼬마애 하나가 서 있는 거야. 쥐새끼처럼 살금살금 들어오는 게 이상해서 말을 걸려다가 눈이 마주쳤고 그 뒤는… 아… 진짜….”

    얀이 붉은 고수머리를 긁적이며 강아지 같은 눈동자를 굴렸다.

    “나 마마보이 아니다. 진짜 그것만은 믿어 주라. 응?”

    기사들이 말없이 그의 어깨를 툭, 툭, 한 번씩 두드렸다. 이해한다는 뜻이었다.

    “진짜 아니라고!”

    “누가 뭐랬냐.”

    “근데 왜 다들 날 그런 측은한 눈빛으로 보는 건데?”

    “힘내라, 얀. 엄마 젖이 만지고 싶으면 내 이두박근을 만져도 좋다.”

    “아아 진짜! 빈센트 너까지!”

    머리칼을 엉망으로 헝클어뜨리던 얀의 눈에 태연하게 앞만 보며 걷고 있는 아일라가 보였다.

    “…어젠 미안, 아일라.”

    얀이 얼굴을 붉히며 아일라에게 낮게 내뱉자 그녀가 특유의 무심한 표정으로 어깨를 으쓱했다.

    “아니에요. 세게 걷어차서 저도 죄송합니다. 불알이 많이 아프셨을 텐데.”

    “아… 아일라. 막내야, 너 정말 많이 컸구나. 그런 단어가 네 입에서 나올 줄이야….”

    “그런 단어 뭐요? 불알이요? 그건 그냥 신체 일부 아닌가요?”

    여기저기서 서로에게 사과를 하며 머리를 긁적이는 소리가 들렸다. 민망한 상황이긴 했지만 오래도록 꽁해 있는 이는 없었다.

    “토비아스가 욕도 할 줄 아는 사람인 거 처음 알았네.”

    “아… 아버지가 어릴 때부터 하도 독충을 조심하라고 해서….”

    “어젠 정말 고마웠어. 경황이 없어서 인사도 못 했네.”

    레나의 말에 토비아스가 얼굴을 붉히며 볼을 긁적였다.

    “아팠을 텐데 잘 참아 줘서 내가 오히려 고맙지.”

    “아까 화장실 갔을 때 혜미가 진지한 표정으로 그러던데 넌 화타고 난 관우래.”

    “응? 그게 무슨 소리야…?”

    눈을 껌뻑이는 토비아스를 향해 레나가 알쏭달쏭한 표정으로 어깨를 으쓱했다.

    “명의라는 뜻이라는데 난 그 말 맞는 것 같아. 진짜 고마워.”

    “아, 아냐. 내가 명의는 무슨.”

    손을 내젓는 토비아스의 얼굴에 민망함과 뿌듯함이 함께 스쳤을 때였다.

    “어?”

    노인 하나가 어딘가에서 확 튀어나와 그의 어깨를 세게 치고 지나갔다. 인기척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이 마을에서 유일하게 나타난 사람이었다.

    “저기, 말씀 좀 묻겠습니다!”

    노인은 그들의 말이 들리지 않는 듯 씩씩거리며 어딘가를 향해 걷고 있었다.

    “빌어먹을 사비오 족속들. 씨를 말렸어야 하는 건데!”

    “영감님, 그게 무슨 말이죠?”

    빠르게 다가선 발터가 그를 붙잡고 물었다. 노인이 히익, 하며 놀랐지만 발터는 그를 꽉 쥔 손을 놓을 줄을 몰랐다.

    “켁… 켁…!”

    “버둥거리면 목이 더 졸립니다. 가만 계시고 대답만 하십시오.”

    언제 봐도 연장자 존중의 자세는 전혀 없는 것 같은 발터를 보며 혜미가 그의 옆으로 다가가 작게 속삭였다.

    “발터, 멱살 좀 놓고 말해.”

    “응.”

    발터는 대답만 한 채 아무 행동도 취하지 않았다. 혜미가 한숨을 쉬며 그의 손을 억지로 옷에서 떼어 냈다. 콜록거리던 영감이 기침을 멈추고 이내 다시 발길을 돌렸다. 혜미는 황급히 그의 앞을 가로막으며 물었다.

    “지금… 뭐라고 하셨어요?”

    “나? 난 아무 말도 안 했는데.”

    노인이 그녀를 보며 주름진 눈살을 찌푸렸다. 시치미를 떼는 걸로는 보이지가 않았다.

    “아니. 지금 방금 사비오라고 분명히….”

    “사비오족! 저주받은 마법사들! 어서 황실에 알려서 그들을 데리고 가라고 해야 해…!”

    노인이 목소리를 높였다. 딱 봐도 횡설수설하는 노인은 정신 상태가 멀쩡하지는 않아 보였다.

    “할배! 위험하게 바깥에서 뭐 하는 거야! 빨리 들어와요…!”

    빼꼼히 열린 상점들 사이로 누군가가 소리를 낮추어 손짓하다 혜미와 기사들을 보고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혹시… 황실 근위대가 도착한 건가!”

    그의 말을 듣고 뒤에서 고개를 빼고 그들을 바라보던 남자 하나가 실망한 표정으로 혀를 찼다.

    “황실 근위대라면 저렇게 초라한 행색일 리가 없잖소.”

    전쟁에서 한몫을 잡아 챙기려는 용병들이 분명했다. 자일룬으로 가는 길목에 있는 마을에서 으레 볼 수 있는 이들이었다.

    “저기… 저기요…! 잠깐만요! 뭐 하나만 여쭤볼게요!”

    혜미가 재빨리 달려가 닫히려는 문을 손으로 턱, 잡았다. 안에 있는 이가 문을 닫으려고 했지만 허사였다. 그녀의 힘은 어지간한 성인 남자들보다 훨씬 강한 수준이었다.

    “이거 왜 이러슈…. 정말!!!”

    “저희는 세르노티 기사단입니다. 이 마을에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거죠? 다들 어디로 간 거예요?”

    “세… 세르노티…?”

    누군가가 뒤에서 놀란 목소리로 내뱉었다.

    “파트리샤 아주머니!”

    “…어머머, 너… 빈센트구나!”

    빈센트를 발견한 여관 주인의 눈이 커다래졌다. 꽉 붙잡고 있던 상점의 문이 활짝 열렸다. 그 안에는 사라진 줄 알았던 마을 사람들이 바글바글 숨어 있었다.

    ***

    제국력 179년. 봄.

    수도 아메티스. 교황청

    “대공께서 어쩐 일이십니까.”

    “탈주한 마법사 둘에 관해 아는 것이 있습니까?”

    정원을 걷던 베네딕트가 에리히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반투명한 베일 뒤에서 희미한 목소리가 흘렀다.

    “마법사들의 관리는 교황청이 아니라 황실의 소관이지요.”

    희미한 조소가 담긴 듯한 교황의 말투에 에리히가 차오르는 경멸을 간신히 억눌렀다.

    한 세기 전, 그들은 그저 집 없이 떠돌아다니던 거지 같은 부족에 불과했다. 황제의 승은을 입어 수도인 아메티스, 제일 빛나는 자리에 오른 것을 감사해해도 모자랄 판국에 수많은 마법사들이 그들의 운명을 거부하다 죽었다.

    “대마법사인 교황께서 그저 견습 마법사에 불과한 둘의 자취를 찾아내지 못한다는 말씀이오?”

    “제 능력은 치유에 국한합니다. 사냥은 개의 몫이고요.”

    순식간에 개 취급을 당한 에리히의 수려한 눈썹이 가운데로 모였다.

    “이 커다란 황성 안에 고작 견습 마법사에 불과한 둘의 자취를 뒤쫓을 이가 그리 없으리라고는 생각되지 않습니다만….”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