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혜미의 몸은 그동안 몸을 섞지 않았음을 증명이라도 하듯 단박에 들어오는 발터의 성기를 빠듯하게 받아들였다. 그가 뒤에서 깊게 삽입해 오는 순간 아찔함에 고개가 번쩍 들릴 정도였다.
“아! 흣! 아아…!”
발터는 시작부터 뜨겁게 그녀를 몰아쳤다. 혜미가 바람에 반으로 부러진 나무를 붙잡고 선 채, 새된 신음을 뱉어냈다.
“발터, 아…. 천천히…. 흐응…!”
“미안해…. 아, 흣…!”
발터는 속도를 줄이지 못했다. 그녀의 가슴을 터뜨릴 듯 주무르며 허리를 강하게 박아 댔다. 그동안의 인내를 폭발시키듯 그의 성기는 제멋대로 움직였다. 그녀의 내벽을 두드리며 긁을 때마다 혜미의 엉덩이가 그의 몸에 세게 부딪혀 빨갛게 달아올랐다.
주르륵, 회음부를 타고 아래로 떨어지는 애액에 선액이 섞이고 끈적해졌다. 혜미는 숨도 쉬지 못하고 헐떡였다. 고개를 돌려 그를 보며 흥분에 가늘어진 눈으로 입을 벌렸다.
“으응! 흥! 키스, 해 줘, 발터…. 아…!”
“미치겠어…. 하아…. 네가 이럴 때마다 정말 미칠 것 같다….”
발터가 몸을 접어 그녀의 등에 가슴을 붙였다. 그동안 기사들의 눈을 피해 미치도록 키스하고 싶었던 것은 발터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는 혜미의 입술을 격렬히 빨며 허리를 세게 치받듯 왕복하며 움직였다. 뒤에서 박아 오는 힘이 너무 강한 탓에 혜미의 몸이 앞으로 밀려나려고 할 때마다 커다란 손으로 그녀의 골반을 꽉 잡고 제게로 끌어당겼다.
“하아…! 아…!”
쳐 대는 허릿짓은 느려질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젖은 살결이 부딪힐 때마다 퍽퍽 젖은 소음이 커다랗게 울려 퍼지고 혜미의 신음 소리가 그에 따라 높아졌다.
“아! 응! 흐읏! 바, 발터…. 응! 응! 아! 아응!”
음절에 따라 끊어지는 비명이 점점 간격이 짧아졌다. 혜미가 온몸을 경직시키며 부들부들 몸을 떨었다.
“하으읏…!”
절정으로 단숨에 밀어 붙여진 기분이었다. 온몸에 힘이 빠져 더 이상 서 있지도 못하겠다고 느끼는 순간, 발터가 그녀를 번쩍 안아 들었다.
철벅. 철벅.
물이 흐르는 냇가를 건너 토굴로 걸어 들어가는 발터의 발걸음에 흥분이 진하게 묻어났다.
“이런 데는 또 언제….”
“묻지 마.”
그녀를 바닥에 조심히 눕히며 속삭이듯 내뱉는 발터의 귀까지 붉었다. 자신의 시커먼 속내를 어떻게 제 입으로 솔직하게 털어놓을 수가 있을까. 머릿속이 온통 그녀와 이러고 싶다는 생각으로 가득했다는 부끄러운 진심을. 다른 이들 앞에서는 충성을 가장하며 위선을 떠는 주제에 뒤에서는 그녀를 떠올리며 부푼 욕망을 쥐고 흔드는 자신의 추함을.
그런 자신의 본질을 그녀가 몰랐으면 하는 동시에 눈치채 주길 원하는 비틀린 자아를 스스로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엉망으로 젖은 비부를 다시 비집고 들어가니 뜨겁게 풀어진 질벽이 절정의 여운을 담고 그를 조여들었다.
“발터….”
혜미가 가느다랗게 눈을 뜨고 그의 입술을 찾았다. 발터는 기다렸다는 듯 그녀의 입술을 빨며 다시금 허리를 깊숙이 쳐대기 시작했다.
희미한 달빛이 비켜 들어오는 토굴 안에 혜미와 발터의 밭은 신음이 연달아 울려 퍼졌다. 부드러운 가슴을 손안에 틀어쥐고 젖꼭지를 손가락 마디로 자극하자 붙은 입술 새로 혜미가 애원하는 신음 소리를 냈다.
“흐응…!”
발터의 등에 짤막한 손톱을 세웠지만 그는 멈추지 않았다. 멈출 수가 없었다. 달빛에 홀린 듯, 그녀의 몸에 홀려 버린 듯했다.
“아! 흣! 아! 하앙! 아! 바…!”
다시금 혜미가 허리를 치켜들며 커다란 신음을 내뱉었다. 발터가 푹푹 쑤셔 대는 내부가 엉망으로 달아올랐다. 온몸이 녹아내리는 기분이었다. 혜미의 엉덩이를 꽉 틀어쥔 손에 손자국이 날 정도로 힘이 들어갔다. 어느새 눈가에 맺힌 눈물을 핥으며 발터가 쉰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조금만 더….”
“아…. 흐응…. 안 될 것 같은…. 아…!”
“조금만… 조금만 더….”
그가 그녀의 가슴을 틀어쥐고 입술로 유두를 강하게 빨았다. 혜미가 몸부림치며 신음하자 발터가 혓바닥으로 젖꼭지를 간질이며 물었다.
“…싫어…?”
혜미는 대답 대신 그의 허리에 미끈한 두 다리를 감았다.
“조금만… 천천히… 해.”
발터가 그녀의 몸을 번쩍 들어 제 위로 올렸다. 그의 몸에 올라탄 자세로 혜미가 그에게 눈을 맞추었다. 발갛게 달아오른 눈매로 혜미가 발터에게 속삭였다.
“몸에 힘이 하나도 안 들어가서… 나 못 움직일 것 같아…. 너무… 오랜만에 했나 봐….”
“넌 아무것도 할 필요 없어.”
발터의 굵은 페니스가 그녀의 속살을 안으로 말듯 꾹, 누르며 들어갔다가 바깥으로 빠져나오기를 반복했다. 그럴 때마다 안에서 정액이 기둥을 타고 바깥으로 흘러내렸다.
그의 커다란 손이 그녀의 엉덩이를 천천히, 하지만 집요하게 주무르며 자극했다. 발터가 그녀의 몸을 밀어 흔들며 허리를 깊숙하게 움직였다.
“흐읏….”
혜미가 자극을 참지 못하고 단단한 그의 팔뚝을 꼬집듯 잡았다가 놓았다. 발터가 제 가슴에 얼굴을 파묻은 그녀의 목덜미에 입술을 묻고 빨자, 그의 성기를 품은 내벽에 힘이 들어가며 그를 아득하게 조였다.
“아…. 발터….”
마치 새끼 고양이가 앓는 듯한 소리를 내며 혜미가 칭얼거렸다. 그녀가 고개를 들고 애원하듯 그를 바라보았다.
“기분 좋아.”
“기분 좋게 해 달라고 했잖아.”
“더, 세게 해 줘….”
“…응.”
발터는 쉽게 움직이지 않았다. 다만 허스키한 목소리로 속삭이며 그녀를 느리게 달구는 데 열중할 뿐이었다. 그는 그녀와 단단히 이어진 채로 숨 막히는 이 쾌감을 더욱 길게 유지하고 싶었다.
결국 혜미는 미약하게 허리를 흔들기 시작했다. 그를 다리 사이에 품고 사타구니를 조였다.
“하아….”
발터의 손에 힘이 더욱 꽉 들어갔다. 유두를 꼬집듯 자극하자 애액이 뜨겁게 흘러내리며 그의 성기를 적셨다. 찔걱, 찔걱, 거리는 소리가 혜미가 움직일 때마다 번졌다. 발터가 아래에서 강하게 위로 쳐올리기 시작한 것은 그때였다.
“아! 아아!”
아랫배에서 시작되는 쾌감이 또다시 온몸을 아찔하게 물들였다. 혈관을 타고 퍼지는 아찔함에 혜미가 마른 입술을 벌리고 몸을 뒤틀었다. 예고 없이 들이닥치는 격렬한 동작에 머릿속에서 아득한 불꽃이 터져 나갔다.
혜미가 그의 입술에 자신을 묻고 빨았다. 발터가 강하게 치받는 바람에 그의 입술이 혜미의 이에 엉망으로 씹혔지만 그는 상관하지도 않았다.
“하아…. 하읏! …아, 흣…!!!”
발터는 그녀를 품에 꽉 끌어안고 쾌락의 끝을 내달렸다. 숨을 쉴 수 없을 때까지 달리는 사람처럼 끝없이 움직였다. 그녀와 함께 흥분의 한가운데를 가로질렀다.
“발터, 흑, 아, 발터. 아, 안 돼, 천, 천천…! 응! 앙! 아아앙! 흐윽! 아아아앙!”
“흣, 아아…. 이든, 으, 흐으…. 하아! 아! 아! 아흐읏!!!”
발터가 짐승같이 거칠게 헐떡이며 그녀와 함께 절정에 올랐다. 혜미가 오르가슴에 달하는 순간 질벽이 경련하듯 욱신거리며 그를 조였다. 쏟아져 내리는 폭포수처럼 아득한 만족감이 온몸에 퍼졌다.
“진짜…. 너… 너 때문이다. 이거 내 실수 아냐.”
혜미가 새빨개진 얼굴로 숨을 몰아쉬며 그에게 눈을 흘겼다. 발터는 자신의 음모와 아랫도리가 흠뻑 젖어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지만 그에게 별문제가 되는 일은 아니었다.
“난 기분 좋아.”
“…뭐? 뭐가?”
발터가 잠시 망설이다 짙어진 콧잔등에 주름을 잡으며 작게 속삭였다.
“네가 못 참을 정도로 느끼는 거… 나도 기분 좋다고.”
혜미는 성기를 쑥 빼낸 후, 흠뻑 젖은 그녀의 사타구니에 다시 얼굴을 파묻으려는 그의 가슴을 발로 걷어차듯 밀어냈다.
“씻고 싶어…!”
발터는 혜미의 몸을 안아 들고 토굴을 나와 폭포수 안으로 천천히 걸어 들어갔다. 왠지 부끄러워 그의 어깨를 주먹으로 퍽, 아프게 때렸지만 발터는 상관도 하지 않았다. 다만 달아오른 그녀의 몸에 천천히 물을 끼얹을 뿐이었다.
“발터.”
“응.”
“아까 진짜 민망하긴 했는데….”
“내 주군께서는 민망할 것도 많군.”
발터가 물속에서 그녀의 몸을 구석구석 어루만지며 살결에 입술 도장을 찍었다. 씻기는 건지 애무를 하는 건지 도통 모를 일이다.
“그래도….”
결국 그녀의 가슴을 주무르며 빠는 발터의 머리카락을 손으로 휘감으며 혜미가 작게 속삭였다.
“기분은 끝내주더라.”
스스로 내뱉고서도 부끄러워 달아나려는 혜미의 몸이 다시금 그에게 붙들렸다.
“난 아직….”
욕심 많은 그의 자아가 불쑥, 고개를 쳐들었다.
“명령 이행 다 못했어.”
깊은 숲속에 이지러진 둥근 달이 환했다.
“여긴데….”
빈센트가 수염을 긁적이며 고개를 갸웃했다. 그의 먼 인척이 운영하는 술집 겸 여관은 안이 텅 비어 있었다.
“아무도… 없나 봐.”
기사들의 얼굴에 실망이 어렸다. 한 달 보름이 넘어가는 야영에 지친 그들이었다. 맛있는 음식과 맥주를 함께 즐기며 잠시나마 여독을 풀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마을은 입구부터 썰렁했다.
상점은 모두 문을 닫았고 길거리에는 흔하게 소리를 지르며 떠드는 아이들도 없었다. 흡사 역병이라도 돈 마을처럼 황량한 거리를 걸을 때부터 뭔가 이상하다고 생각은 했었다.
“어떻게 된 거야, 빈센트? 분명히 돌아가신 너희 아버지 소꿉친구의 아는 분이 여기서 혼자 여관을 하신다고 했잖아?”
레나가 까만 눈을 굴리며 기억하기도 복잡한 관계도를 읊자 빈센트가 난감한 얼굴로 말을 흐렸다.
“분명히… 한 달 전까지만 해도 멀쩡히 운영하고 있다고 했는데….”
세드릭을 통해서 보낸 전갈에 여관 주인은 흔쾌히 기사들을 위해 숙소를 제공하겠다고 답했었다.
하지만 여관 안은 썰렁했다. 테이블 위에 검게 말라붙은 음식이 보였다. 바닥에는 맥주잔이 부서진 채 산산조각 나 있고 의자 몇 개가 나뒹굴고 있었다. 마치 싸움이라도 난 것 같은 현장이었다.
“일단 사람을 찾아야 할 것 같다.”
발터의 말에 레나가 목소리를 높였다.
“일단 내가 마을을 한 번 둘러보고 올게.”
“나도 간다.”
레나의 뒤에서 빈센트가 자연스레 검을 챙겨 들었다.
“인적이 있는지만 확인하고 바로 돌아와.”
발터가 확인하듯 말하자 빈센트가 고개를 끄덕였다.
“어두워지기 전에 올 거다.”
둘이 떠난 후, 기사들이 짐을 다시 정리했다. 이 마을을 떠나면 자일룬까지 약 열흘이라는 시간을 꼬박 달려야 했다. 이곳에서 오랜 여정에 지친 말을 쉬게 하고 여장을 정비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
“비가 많이 오는데….”
누군가 창을 두드리는 빗줄기를 보며 중얼거리듯 입을 열었다. 어두워지기 전에 돌아오겠다고 말하고 떠난 레나와 빈센트는 아직도 소식이 없었다.
“혹시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건 아니겠….”
탁!
나무 문이 거칠게 열리는 소리에 모두의 시선이 단박에 돌아갔다.
“어? 왔나 보다!”
문틀에 기대 숨을 몰아쉬는 레나를 보며 반색하던 기사들의 표정이 굳었다.
“…레나?”
“하아…. 흐으…!”
레나가 공포에 질린 표정으로 절뚝거리며 숨을 몰아쉬었다. 옷을 찢어 동여맨 허벅지가 피에 젖어 시뻘겠다. 그녀가 부상 당했다는 사실을 깨달은 혜미가 놀라서 벌떡 일어났다.
“레나, 괜찮아?”
하늘에서 꽝! 하는 굉음과 함께 쏟아지는 빗줄기가 굵어졌다. 비틀거리며 안으로 들어온 레나의 까만 속눈썹을 타고 빗물에 섞인 눈물이 줄줄 흘러내렸다.
“비, 빈센트는 어디 있는 거야? 대체 무슨 일이야 레나!”
“흐윽… 모르겠어.”
레나가 입술을 꽉 깨물며 흐느낌을 참았다.
“상처를 보여라, 레나.”
“…별거 아니야.”
“어서!”
발터가 낮지만 또렷한 목소리로 명령하자 레나가 떨리는 손을 다리에서 떼어 냈다. 상처를 압박한 천을 풀자 찢긴 옷 사이로 뼈가 보일 정도로 깊게 베인 자상이 보였다.
“젠장….”
발터가 낮게 내뱉으며 입술을 씹었다. 기사단원들을 보내는 게 아니라 자신이 직접 갔었어야 했다는 후회가 뒤늦게 밀려왔다.
“토비아스, 마취약을 가져와.”
“…여 …여기!”
토비아스가 서둘러 짐 꾸러미를 뒤져 마취약을 찾아냈다. 발터는 코르크 마개를 딴 후, 레나에게 약병을 내밀었다. 마비 성분이 강한 약초이긴 했지만 고통을 완전히 없애는 것은 불가능했다. 하지만 이대로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보다는 나았다.
“토비아스.”
발터가 심각한 얼굴로 낮게 이름을 부르자 한 발 뒤에 선 토비아스의 어깨가 움찔했다.
“자상이 너무 깊다. 상처를 꿰매야 해.”
긴장한 표정의 토비아스가 눈을 질끈 감았다 떴다. 손에 식은땀이 배고 몸이 덜덜 떨렸다.
“내… 내가…?”
“여기 너 말고 그럴 수 있는 이가 누가 있지?”
그를 직시하며 낮게 되묻는 발터의 말에 토비아스는 드디어 올 게 왔구나, 라는 생각을 했다. 그는 세르노티의 다른 남자 기사들에 비해 체구도 작았고 전투 실력도 잘 봐줘야 보통 이상이었다. 그나마도 뒤떨어지지 않으려 본인 스스로가 엄청난 지옥 훈련을 했기 때문에 이 정도다.
다른 기사들에 비해 그다지 출중하지 않고 소심한 성격의 그가 정예 기사단으로 발탁된 이유를 스스로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토비아스.”
그를 향해 간절한 눈빛을 보내는 혜미를 보며 토비아스가 주먹을 한 번 꽉 쥐었다 폈다.
“…이대로라면 피가 멈추는 데 시간이 너무 많이 소요될 거야.”
혜미가 어두워진 눈으로 목소리를 낮추었다. 그녀의 조심스러운 말투에 내포하고 있는 뜻 역시 모를 수가 없었다. 레나가 위험하다는 뜻이다.
피를 너무 많이 흘린 탓에 죽었던 리온을 떠올리는 순간 그의 눈동자에 결심이 섰다. 그는 마른침을 꿀꺽 삼킨 후, 가지고 있던 기다란 주머니 형태의 가방을 열었다.
“조… 조금만 참아 줘, 레나.”
토비아스의 아버지는 마을의 이발사이자 의사였다. 아버지가 수술을 할 때면 늘 곁에서 보조하던 그였지만 아버지의 도움 없이 홀로 환자를 치료하는 것은 처음이었다.
“…고마워, 토비아스.”
그를 보며 작게 속삭이는 레나의 표정에는 한 점 의심이나 불안도 없었다. 그녀는 그를 완전히 믿고 있다.
토비아스는 숨을 크게 들이쉰 후, 마취 약을 마신 레나의 상처를 봉합하기 시작했다. 살점이 꿰뚫리고 있었지만 레나는 신음 한 번 없었다. 그녀의 머릿속은 온통 조금 전 빈센트의 충격적인 행동으로 꽉 차 혼란스러울 뿐이었다.
“대체 누가 이런 거야…? 빈센트는 어디 있어, 레나?”
혜미가 소리 없이 떨리는 레나의 창백한 손을 꽉 잡아 주며 물었다. 레나가 일그러진 표정으로 입술을 꽉 깨물며 그녀의 손을 마주 잡았다.
설마 빈센트가 당하기라도 한 것일까.
염려하는 혜미를 향해 레나가 젖은 눈동자를 맞추었다.
“…빈센트가 위험한 것 같아….”
잦아드는 목소리로 간신히 내뱉자 발터가 인상을 찌푸렸다. 감이 좋지 않았다.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
열중한 얼굴로 레나의 상처를 봉합하는 토비아스의 이마에 식은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장갑을 낀 그의 손이 검붉은 피로 엉망이었다.
“괜찮아. 괜찮으니까… 솔직히 말해 줘. 응?”
혜미가 입술을 꽉 깨물고 말을 망설이는 그녀에게 눈을 맞추었다. 레나의 눈에 두려움과 염려가 가득했다.
“빈센트는… 잘못한 거 없어.”
“알아. 그러니까 어떻게 된 일인지 자세히 설명해 줘. 그래야 우리가 빈센트를 구할 수 있어.”
혜미가 애타는 말투로 덧붙이자 레나가 마침내 결심한 듯 입을 열었다. 울음을 참느라 떨리는 목소리였다.
“빈센트와 함께 마을을 돌다가 시장 뒤편에서 오두막을 하나 발견했어. 그런데 뭔가가 이상한 거야. 지금은 장미가 만개할 시기가 아니잖아. 그런데 그 오두막 주변에만 이상하게 온갖 꽃들이 활짝 피고 나무에선 열매가 주렁주렁 열려 있어서….”
기이하게 보이는 부자연스러운 모습이었다. 레나가 빈센트에게 눈짓하며 발걸음을 돌렸다.
“저기 가 보자, 빈센트.”
“응.”
사람이 연기처럼 사라진 듯 인적도 없고 색채도 없는 이 마을에 이상하게도 그 오두막만 환하게 빛나고 있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그 와중에 마치 어린아이가 박아 놓은 것 같은 삐뚤빼뚤한 울타리는 조잡하기 짝이 없었다. 레나와 빈센트는 키가 낮은 울타리를 도움닫기도 없이 훌쩍 뛰어넘었다.
“실례합니다.”
주먹으로 두 번, 문을 강하게 두드렸지만 안에서는 아무 기척이 없었다. 빈센트가 고개를 들어 오두막의 지붕을 보았다. 주방과 연결되어 있는 굴뚝에서 밥 짓는 연기가 피어오르는 걸 보면 분명 안에 사람이 있다는 소리였다.
“내가 들어가서 안을 확인한다. 넌 바깥에 있어라.”
“응.”
빈센트의 말에 레나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빈센트가 문을 잡아당겨 보자 문은 의외로 쉽게 열렸다.
레나는 안으로 들어간 빈센트를 확인한 후, 고개를 돌려 오두막의 정원에 차례로 시선을 던졌다. 아무리 봐도 이상한 것투성이었다. 지금 이 계절에 주렁주렁 탐스럽게 달려 익어 가는 복숭아라니. 일러도 한참은 이르다.
‘진짜 열매… 맞을까…?’
미심쩍은 표정을 지으며 그녀가 나무로 다가갔을 때였다.
쾅!
문짝이 통째로 떨어져 나가는 소리에 레나가 휙, 얼굴을 돌렸다. 오두막에서 검을 들고 허겁지겁 달려 나오는 빈센트가 보였다.
“빈센트…!”
그의 커다란 얼굴은 회색빛으로 핏기가 없었고 푸르스름한 눈동자의 동공은 한계까지 커져 확대되어 있었다. 흡사 유령이라도 본 듯한 얼굴을 보며 레나가 황급히 그에게 다가갔을 때였다.
“무슨 일이야, 왜 그래…!”
“으아아아!!!”
빈센트가 포효하듯 소리를 지르며 그녀에게 달려들었다. 놀란 레나는 반사적으로 그를 피하며 바닥으로 몸을 굴렸다.
“흣…!”
대뜸 그녀에게 주먹을 휘두르는 빈센트의 공격에 차마 대비를 할 시간도 없는 상황에서는 그게 최선이었다. 장갑을 끼지 않은 손바닥이 흙바닥에 갈려 아팠지만 그게 문제가 아니었다.
“비… 빈센트!!!”
빈센트가 집 밖으로 달려 나가기 시작한 것이었다. 육중한 그의 몸이 얼기설기 박힌 울타리를 단박에 부수었다. 레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그를 쫓아 달렸다. 그를 따라잡는 것은 그녀에게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빈센트, 너 괜찮아? 안에서 도대체 무슨 일이…!”
숨을 몰아쉬던 레나가 그 자리에서 얼어붙은 듯 멈춘 채 미간을 가운데로 모았다.
“…빈센트….”
자그마한 입술에서 탄식 같은 말투가 새어 나왔다. 그녀는 자신을 향해 검을 뽑아 든 빈센트를 믿을 수가 없었다.
“오지 마! 가까이 오지 마라!!!”
그녀에게 칼을 겨누고 선 빈센트의 눈이 공포에 질려 있었다. 빈센트에게 대체 무슨 일이 생긴 걸까. 레나의 가슴속에서 뜨거운 것이 울컥 치밀었다.
“빈센트. 나야. 괜찮아…. 응?”
간신히 목소리를 가다듬어 내뱉었지만 소용이 없었다. 빈센트가 이를 덜덜 떨며 고개를 뒤로 물렸다.
“저리 꺼져…. 저리 꺼져라!”
“빈센트, 나야. 나 레나라구…!”
가슴을 손바닥으로 꽉 짚는 레나의 까만 눈동자에 투명한 눈물이 고였다. 그에게는 그녀의 울먹이는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 듯했다. 빈센트가 그녀를 향해 검을 휘두르며 땅이 쩌렁쩌렁 울리게 고성을 질렀다.
“입 닥쳐, 이 악마야!!”
레나는 검을 들고 달려드는 빈센트의 눈에 보이는 것이 자신이 아님을 그제야 깨달았다. 그가 이 정도로 공포에 질린 것을 본 것은 아주 오래전 일이었다.
“어릴 때 다 함께 매의 탑에 놀러 갔을 때, 오빠랑 내가 빈센트를 놀려 주려고 장난을 쳤었어. 내가 머리를 풀고 유령인 척을 했었는데… 빈센트가 그걸 보고 놀라서 계단에서 정신을 잃었거든.”
레나가 잇새로 무거운 숨을 길게 내쉬었다. 빈센트가 지금도 가끔 악몽을 꾸는 이유는 그 때문이다. 기절했다가 깨어난 빈센트에게 장난이었다고 솔직하게 말했었지만 그 일은 어린 그에게 엄청난 트라우마로 남았다.
“오늘 본 빈센트는 꼭 과거로 돌아가기라도 한 것처럼 굴었어. 뭐가 눈에 뒤집어쓰였다고 해야 할까…. 하아.”
레나가 혼잣말하듯 말을 이으며 괴로운 얼굴로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혜미는 그녀를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마치… 누군가 그의 시야를 마법으로 조종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말이야.”
가늘게 여러 갈래로 땋아 묶은 레나의 까만 머리카락에서 빗물이 뚝뚝 흘러내렸다. 고개를 든 그녀가 젖은 숨을 길게 내뱉었다.
“검을 들고 달려드는 빈센트의 눈에는 내가 없었어. 마치 동공이 텅 빈 것 같았는데… 그가 날 유령으로 착각하는 게 확실했어. 어떻게든 그를 진정시키려고 해 보았지만….”
레나는 입술을 꽉 깨물 뿐 뒷말을 잇지 못했다. 그녀에게 칼을 휘두르던 빈센트의 모습을 떠올리는 것만으로 심장에 돌덩이를 단 듯 무겁고 아팠다.
“끄… 끝났어. 레나.”
상처의 봉합과 소독까지 끝낸 토비아스가 땀에 젖은 얼굴을 들었다.
“고마워. 토비아스.”
레나가 작게 속삭이듯 내뱉었다. 기사들의 시선이 꼼꼼하게 봉합된 기다란 다리 상처에 닿았다가 이내 서로를 향했다. 낭패감이 서린 눈빛이 엇갈렸다.
빈센트가 레나에게 칼을 휘두른 것도 모자라 실제로 찔렀다. 레나의 말이라면 늘 그게 맞다며 옳다고 고개를 끄덕이는 우직한 바보 같은 빈센트가.
“…마… 말도 안 돼….”
누군가 탄식하듯 중얼거리자 레나의 입술에서 흑, 하는 신음 같은 울음이 번졌다. 그녀가 눈을 질끈 감자 여태껏 참고 있었던 눈물이 또르르 까무잡잡한 피부를 타고 흘러내렸다. 누구보다 이 사실을 믿을 수 없는 것은 바로 레나 자신이었다.
쌍둥이 오빠인 파비안과 그녀 그리고 빈센트는 어렸을 때부터 옆집에 살았다. 말 없고 우직한 빈센트와 시끄럽고 쾌활한 쌍둥이는 좋은 앙상블이었다. 서로의 집을 드나들며 매일같이 함께 밥을 먹고 놀았다. 매일 셋이서 어울려 다녔고 기사단에도 나란히 손을 잡고 함께 들어왔다.
“오빠가 하는 건 나도 할 수 있어!”
“그거 맞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빈센트 너도 할 수 있어!”
“…정말?”
“그럼! 당연하지! 우린 다 함께 세르노티의 정예 기사단이 될 거라구!”
아무리 레나가 긍정적이고 유쾌한 성격의 소유자였다고 해도 혈육인 파비안의 사망이 충격적이지 않았을 리가 없었다. 당시 빈센트가 레나의 곁을 묵묵히 지켜 주지 않았다면 그녀가 무척이나 힘들었을 거라는 건 모두가 인정하는 바였다.
“레나, 빈센트는 지금 어디 있지?”
발터가 미간을 모은 채 레나에게 묻자 그녀가 떨리는 입을 열었다.
“모르겠어. 그를 따라가고 싶었지만… 그럴 수가 없었어.”
울먹이는 레나의 까만 동공이 눈물에 젖어 축축했다.
“빈센트와 진짜로 칼을 맞대고 싸우게 될까 봐… 무서워서… 도망쳤어.”
혜미가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며 마른침을 삼켰다. 혼란스러운 레나의 마음을 알 것 같은 기분이었다. 말수는 적지만 커다란 덩치만큼이나 듬직한 빈센트에게 대체 무슨 일이 생긴 걸까.
“레나의 추측이 맞아. 빈센트는 아마도 이상한 마력 같은 데 걸려든 거라고.”
“이 마을, 그러고 보면 처음부터 뭔가 분위기가 이상했잖아.”
기사들이 작은 목소리로 웅성거리는 와중에 발터가 검을 챙겨 자리에서 일어났다. 빈센트가 위험한 상황이라면 더더욱 빨리 움직여야 했다.
“내가 가 봐야겠다.”
“나도 같이 가.”
혜미가 염려하는 얼굴로 일어나자 발터가 고개를 저으며 낮게 내뱉었다.
“넌 여기서 기사들과 함께 있어.”
발터가 기사들을 둘러보며 눈을 맞추었다.
“혜미와 함께 여기서 한 발자국도 나가지 마라. 내 말, 무슨 말인지 알아듣지?”
기사들이 모두 진지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바깥에 무슨 위험이 도사리고 있을지 모르는 상황이었다. 위험 상황일수록 그들이 지켜야 할 이가 누군지는 확실해진다.
혜미는 검을 챙겨 들고 나서는 발터의 뒷모습을 보는 레나의 불안한 눈빛을 그대로 읽었다. 뭐라고 말을 할 듯 머뭇거리다 차마 입을 열지 못하는 그녀의 시선에는 소꿉친구에 대한 걱정이 가득했다.
“…발터.”
문을 나서는 그의 팔을 붙잡고 혜미가 작게 속삭이자 발터가 고개를 돌렸다.
‘괜찮은 거지…?’
그는 차마 속내를 그대로 말하지 못하는 그녀의 눈빛을 읽었다. 그리고 진지한 표정으로 혜미가 가장 염려하는 부분을 짚었다.
“걱정하지 마. 빈센트의 팔다리를 꽉 묶어서라도 무사히 데려올 테니까.”
***
빗줄기는 밤이 깊어질수록 점점 더 굵어졌다. 바람까지 몰아치는 바람에 여관의 창문이 요란히 들썩거렸다. 발터가 바깥으로 나간 지는 벌써 몇 시간 전이었다. 시각은 자정에 가까웠다.
1층, 식당에 모두 모인 기사들은 초조한 표정을 감추며 애써 아무렇지도 않은 듯 행동하고 있었다.
“먹을 게 아직 좀 남아 있더라. 양해는 나중에 구하더라도 일단 우리부터 좀 정신 차리자.”
얀이 주방에서 찾은 음식들을 테이블 위에 늘어놓았다. 여관의 뒤편 저장고에는 적지 않은 음식이 있었다. 상하지 않은 음식의 상태로 봤을 때, 마을이 폐허가 된 지는 오랜 시간이 흐르지 않은 것으로 보였다.
“빈센트… 대체 어떻게 된 걸까…?”
“그야 아무도 모르지.”
레나는 상처가 덧나지 않게 하는 독한 약을 마시고 겨우 잠에 빠진 후였다. 긴 의자를 붙여 만든 의자에서 자고 있는 그녀에게 들리지 않도록 누군가가 작게 속삭였다.
“이 마을 전체가 이상한 게 확실해. 날이 밝자마자 여길 떠나는 게 좋을 것 같다, 혜미.”
“응. 내 생각도 그래.”
혜미가 낮게 내뱉자 얀이 길게 한숨을 쉬며 손톱을 잘근 씹었다.
“그런데 빈센트, 정말 괜찮을까? 그가 발터를 못 알아보고 덤빈다면 발터 역시 가만히 있을 수가 없을 텐데….”
그의 얼굴에 서린 불안감을 보며 혜미가 애써 표정을 가다듬으며 입을 열었다.
“발터는 아마 나한테 한 말 때문이라도 빈센트를 무사히 데려올 거야. 걱정하지 마.”
“그건 맞는 말이다. 가주가 허튼소리를 내뱉는 성격은 아니니까.”
기사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시체처럼 잠들었던 그녀의 곁을 3년 동안이나 지킨 남자다. 선대 가주인 발트리의 맹목적인 충성심과 비견했을 때, 혜미에 대한 발터의 마음은 그것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는 않을 것이다.
“일단… 오늘 밤은 여기서 다 함께 모여서 기다리자. 괜찮겠지?”
혜미의 말에 모두가 동의했다. 기사들 모두 적당한 곳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테이블을 붙여 누운 이도 있었고, 계단에 앉아 벽에 등을 기댄 이도 보였다. 아침이 오기를 기다리며 작게 이야기를 나누다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하나둘씩 소리 없이 잠에 빠졌을 때였다.
삐걱.
희미한 소음이 들렸다. 문 가까이에 있는 의자에 앉아 발터를 기다리다 선잠에 빠진 혜미가 눈을 번쩍 떴다.
삐걱.
폭이 좁은 2층 난간에 올라선 채, 아무것도 없는 허공을 향해 손을 뻗고 있는 얀이 보였다. 그는 금방이라도 추락할 듯 위태롭게만 보였다. 높은 데서 뛰어내리는 낙법은 그들이 늘 몸에 익혀야 했던 것이지만 한눈에 봐도 얀은 위험했다.
…뭐 하고 있는 거지?
벌떡 일어선 혜미가 달려가는 것보다 2층 창가에서 잠들었던 아일라가 그를 저지하는 것이 다 빨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