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2화 (22/72)
  • “네 위장 실력은 우리 중 늘 빵점이었잖아!”

    차마 그녀에게 눈을 맞추지 못하고 딴 데를 보는 기사들의 표정을 보아하니 세드릭이 거짓말을 하는 것은 아니었다. 충격을 받은 그녀의 얼굴을 보고 테이블 끝에서 자리를 지키고 있던 아일라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이든, 어차피 세르노티를 벗어나면 이 넓은 땅덩어리에서 이든의 얼굴을 정확히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누군가 초상화를 그린 것도 아니니까요.”

    “…아아.”

    혜미의 입에서 작은 감탄사가 터졌다.

    “우리 중에 여자가 이든밖에 없는 것도 아니잖아요.”

    그건 맞다. 혜미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일라를 제외하고도 레나와 알리시아, 율리안까지 세 명이나 더 있다.

    “그러니까 이든은 그냥 이름 정도만 바꿔도 되지 않을까요?”

    모두가 알고 있는 정답을 친절하게 말해 주는 아일라를 보는 혜미의 눈동자가 감동에 반짝였다. 남들에게 불리는 것만으로도 부담스러운 이름을 바꿀 수 있는 절호의 기회!

    “아일라, 세드릭의 말이 맞았어. 넌 천재야.”

    혜미가 그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그녀는 진심으로 아일라가 천재임이 분명하다 생각했다. 세르노티의 기사들은 여전히 변함이 없는 그녀를 보고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낮게 웃었다.

    ***

    따스한 봄볕이 내리쬐는 오전부터 성안은 분주했다. 막사에서 마지막으로 나온 아일라가 제 짐을 수레 위에 실었다. 최소한 짐을 줄이기로 하고 떠나는 여정이었지만 꾸러미 하나에 다 들어가는 아일라의 짐은 단출하기 짝이 없었다.

    “정말… 괜찮겠어, 아일라?”

    “뭐가요?”

    손을 탁탁 털며 아일라가 파란 호수 같은 투명한 눈으로 혜미를 보았다.

    “마지막으로 딱 한 번만 물어볼게. 아일라 너, 정말 우리랑 같이 가도….”

    “전 정말 괜찮아요.”

    아일라가 같은 질문을 여태껏 열 번은 넘게 반복해 온 혜미의 말을 딱 잘랐다.

    “필립 아저씨도 말씀하셨잖아요. 제가 검을 쓰는 데는 전혀 무리가 없을 거고, 장기 여행도 괜찮을 거라고요. 이든…. 아니, 혜미도 똑똑히 들었죠?”

    “어? 응. 으응. 그랬지.”

    “설마 제가 가는 게 일행들에게 방해가 될까 봐 그러시는 거라면 그룹에서 떨어져서 혼자 떠날게요.”

    “아… 아냐. 내가 괜한 말을 했다. 그럼 짐 싸.”

    “다 쌌어요.”

    “알았어. 그럼 이따 보자.”

    누가 저를 놔두고 가기라도 할까 봐 서슬이 시퍼런 아일라를 보며 혜미가 한발 물러섰다. 그리고 발터를 찾아 마구간 앞으로 빠르게 걸었다.

    “발터, 잠시만.”

    “왜?”

    “아일라 말이야. 정말 데려가도 되는 걸까?”

    혜미가 똥 마려운 강아지 같은 표정으로 그를 보았다. 그들이 자일룬으로 떠나는 날이 바로 오늘이었다. 이제 성을 나서면 세르노티로 언제 돌아올지 기약이 없는 여행이 시작되는 것이다. 혜미는 아일라가 후회할 일을 하는 것을 바라지 않았다.

    “본인이 가고 싶다는데 말릴 도리가 없지. 아일라도 세르노티의 일원이잖아. 방법이 있다면 아일라를 리스트에서 제명하는 건데….”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해?”

    아일라가 듣기라도 할까 겁이 나서 혜미가 눈을 홉떴다.

    “그러니까.”

    어깨를 으쓱하는 발터의 대답은 건조했다. 혜미가 주변을 휙휙 둘러보며 목소리를 더욱 낮추었다.

    “그럼 세드릭은 어떻게 해?”

    “…그는 성을 지키기로 했잖아. 남아 있는 이곳 영지 사람들을 위해서라도 세드릭같이 단단한 인물이 반드시 필요해.”

    발터가 말의 고삐가 풀리지 않게 단단히 매며 스스로에게 되뇌듯 내뱉었다. 혜미의 입술에서 무거운 한숨이 흘렀다.

    “그건 그렇지만….”

    세르노티의 기사단의 출정에서 세드릭은 제외되었다. 발터라고 해서 그의 부재가 달가운 것은 아니었다. 팔을 하나 잃었다고 해도 그는 세드릭 슈네다. 그가 여전히 훌륭한 기사라는 사실을 부정할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하지만 세드릭은 자진해서 성에 남기를 청했다. 영지를 돌볼 사람이 한 명은 필요하다는 이유였지만, 워낙 남에게 민폐를 끼치는 것을 싫어하는 그가 혹여나 자신이 짐이 되기라도 할까 스스로 뒤로 빠졌다는 사실을 짐작하지 못하는 이는 없었다.

    “난 아일라도 남기를 바랐어. 세드릭이 아일라와 함께 성을 지킬 줄 알았다고.”

    짐을 싣던 아일라는 출정 준비를 모두 끝내고 결심까지 마친 기사의 표정이었다. 허리에 찬 벨트에 칼 두 개와 창, 단검까지 꽂고, 먼 길을 대비해 종아리까지 올라오는 단단한 가죽 신발을 신었다.

    세드릭에 대한 그녀의 마음을 아는 혜미로서는, 그녀가 세드릭을 뒤로 한 채 기사들을 따라 자일룬으로 떠나는 것이 도무지 내키지가 않는 상황이었다.

    “혜미.”

    발터가 그녀에게 장갑을 건네주며 눈을 맞추었다. 이름을 바꾸어 부르기로 한 게 벌써 며칠 전의 일이었지만 이제는 우습게도 그가 그녀의 본명을 부르는 것이 가끔 어색하게 들리기까지 했다. 혜미는 저도 몰래 빨개지려는 얼굴을 감추려 고개를 한 번 털었다.

    “응.”

    “아일라는 세르노티가 길러 낸 훌륭한 정예 기사다. 그녀만큼 뛰어난 검사를 찾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고.”

    그녀의 검술 실력을 눈앞에서 본 혜미도 인정할 수밖에 없는 사실이었다.

    “그런 이를 출정시키지 않고 성에 남게 한다는 건, 가주인 내가 아니라 그 누가 생각해도 옳은 결정이 아니지.”

    “…그럼 역시나 세드릭이 아일라의 등을 떠민 걸까?”

    “그랬을 거라고 생각하세요?”

    “엄마, 깜짝이야!”

    조용히 속삭이던 혜미가 화들짝 놀라며 뒤를 보았다. 그곳에는 언제 왔는지 귀신처럼 서 있는 아일라가 있었다. 발터가 한숨을 쉬며 낮게 내뱉었다.

    “사람 옆에 가까이 올 때는 인기척을 좀 내라, 아일라.”

    “죄송해요. 버릇이 돼서.”

    소리 없이 움직이기로는 세드릭 못지않은 아일라가 짧게 사과한 후, 진지한 표정으로 혜미를 보았다.

    “세드릭 님은 제게 아무런 강요도 하지 않았어요.”

    정말일까.

    아일라가 그녀의 눈빛을 읽은 듯 고개를 끄덕였다.

    “혜미를 따라가겠다고 한 건 전적으로 제 결정이었고, 세드릭 님은 제 결정을 존중해 주셨을 뿐이에요.”

    듣지 않아도 뻔했다. 그의 성격상 ‘아일라, 나는 네가 자랑스럽구나….’ 등등을 시전하며 그녀에게 묘하게 돌려서 압박을 주었을 게 분명하다.

    “세드릭 님이 만약 제가 떠나길 원하셨다고 해도, 제가 가고 싶지 않았다면 전 가지 않았을 거예요. 제가 떼를 써도 세드릭 님은 어쩔 도리가 없겠죠. 이제 그분과 저는 가족이니까.”

    아일라가 그녀의 마음을 읽은 것처럼 말하며 환하게 웃었다.

    “그러니까 이건 전적으로 제 결정이랍니다.”

    미소 짓는 아일라를 물끄러미 바라보는 혜미를 향해 아일라가 물었다.

    “…왜 그렇게 보세요?”

    “그냥.”

    장밋빛 뺨을 붉히며 부끄러워했던 아일라의 미소와 지금 그녀의 미소가 어딘가 확실히 다르다는 기분이 들었다. 뭘까. 뭐가 다른 거지.

    “아일라.”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더니. 때마침 뒤에서 세드릭이 걸어오는 바람에 혜미는 생각을 멈추었다.

    “네, 세드릭 님.”

    늘 그의 앞에서 주눅 들기 일쑤였던 아일라의 표정은 평온했다. 세드릭이 그녀를 향해 무언가를 내밀었다.

    “…이건….”

    “구스 할아범의 말에 따르면 이게 본인 인생 최대의 역작이라고 했다더군. 네 몸에 맞게 조금 변형했다.”

    아일라는 세드릭이 내민 갑옷을 뚫어져라 바라보다 천천히 받아 들었다. 그녀가 몇 해 전 마을에서 열린 맥주 마시기 대회에서 우승했을 때 받은 상품이었다. 세드릭이 이용하는 걸 한 번도 본 적이 없어서 버려진 줄로만 알았는데. 갑옷은 누군가가 매일 닦아 광을 내기라도 한 듯 새것처럼 반짝였다.

    “이건 네 거니까.”

    아일라가 갑옷을 꾸러미에 넣고 말안장에 고정시킨 후, 작지만 또렷한 목소리로 세드릭을 불렀다.

    “세드릭 님.”

    “응.”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제가 옷의 끈을 묶어 드려도 될까요.”

    “얼마든지.”

    다른 사람에게는 제 옷에 손도 못 대게 하는 세드릭이 그녀를 보며 자상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혜미와 발터는 아일라가 그에게 다가가 세드릭의 튜닉 가슴 부분에 늘어진 끈을 신중하게 묶는 것을 바라보았다. 그녀가 세심하게 손가락을 움직이자 가죽끈에 보기 좋게 매듭이 졌다.

    “괜찮은가요?”

    “완벽해.”

    세드릭의 칭찬에 아일라가 뺨을 물들이며 웃었다. 그녀의 미소에는 행복함과 두근거림이 공존했다.

    “세드릭은… 정말 찐 변태가 분명해.”

    말고삐를 잡은 채 두 명을 뒤로하고 걸으며 혜미가 진지하게 중얼거렸다.

    “동의하는 바야.”

    발터가 고개를 주억이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아일라에게 내 성을 주기로 했다. 이제 아일라 슈네가 되는 거지.”

    기사들이 왁자지껄 떠들던 저녁 식사 시간이었다. 세드릭의 갑작스러운 폭탄 발언에 가장 놀라고 기뻐한 것은 혜미였다. 무척이나 세드릭다운 고백이라고 생각했었다.

    “사귀지도 않고 바로 결혼? 와. 세드릭…. 이제 봤더니 의외로 한 방이 있네. 상남자다, 진짜. 최고.”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거지, 이든…?”

    세드릭이 잿빛 눈을 가늘게 뜨며 정색할 때까지만 해도 혜미는 그가 그저 부끄러워하는 줄로만 알았다.

    “아일라, 이제 그럼 슈네 부인이라고 불러야 하는 건가?”

    “나는 아일라를 나의 수양딸로 삼기로 결정했다. 그런데 지금 무슨 미친 소리를 하는 거야?”

    “…너 지금 뭐라고 했냐. 딸?”

    발터가 인상을 구기며 낮게 되묻는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혜미는 멍한 표정으로 세드릭과 그의 곁에서 말없이 식사를 하고 있는 아일라를 번갈아 보았다.

    조용히 식사를 이어 가는 아일라의 표정은 의외로 차분했다. 오히려 기분이 좋아 보이기까지 했다. 복잡한 표정을 짓고 있는 것은 그 둘을 제외한 모든 기사들이었다.

    “도대체 그 무슨 변태 같은 소리가 다 있냐고…! 발터. 여기서 여자가 결혼하면 남편 성을 따르는 거 맞아?”

    “맞아.”

    발터가 간단히 수긍했다.

    “나만 이상하게 생각한 거 아니지?”

    “아니야.”

    그의 대답은 이번에도 빨랐다. 너와 같은 성을 쓰고 싶다고 말하면 일반 사람은 모두 혜미처럼 생각할 게 당연했다. 내 아내가 되어 달라는 뜻이 아니라 내 딸이 되어 달라는 뜻이라고 생각할 사람은 세상천지에 단 한 사람, 아마 세드릭 슈네뿐임이 분명했다.

    “네 말대로 세드릭이 정말 변태이거나, 제 마음을 눈치채지 못하는 천하의 등신이거나… 둘 중 하나겠지.”

    “내가 아일라였으면 진심으로 극혐했을 것 같은데….”

    만약 그녀였다면 세드릭에게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거냐고 정색했을 테지만 아일라는 그의 말도 안 되는 제안을 받아들이기로 결정한 듯 보였다.

    “세드릭은 아마 아일라를 처음 만났을 때 그녀가 너무 어렸던 게 아직도 머릿속에 박혀 있는 것 같다.”

    발트리 못지않게 꽉 막혀 고지식한 세드릭이라면 있을 수 없는 일도 아니었다.

    “이제 아일라도 어엿한 성인이라고. 세드릭이 늙어 보여서 그렇지 겨우 네 살 차이인데….”

    “됐어. 난 이제 관심 끈다. 너도 신경 쓰지 마.”

    발터의 말을 들으며 혜미 역시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의 말마따나 더 이상 깊이 생각하지 않으려 마음을 먹었다. 알다가도 모를 일이 남녀 관계였다. 제삼자가 노력한다고 될 일이었으면 이 세상의 모든 웨딩 플래너가 매칭 확률 100%를 자랑할 게 분명하다.

    “이든… 아니, 혜미!”

    아직 새로운 이름이 입에 붙지 않았다며 얀이 곱슬머리를 긁적였다.

    “출발 준비는 다 끝났어. 모두들 바깥에서 기다리고 있다.”

    “응. 갈게.”

    혜미가 그를 향해 고개를 끄덕인 후, 말의 고삐를 잡고 성문으로 향했다. 성안의 모든 사람들뿐만 아니라 강 아래 마을 사람들까지 모두 그들을 배웅하기 위해 성문까지 온 바람에 그곳은 왁자지껄했다.

    혜미는 그들의 얼굴에 스치는 긴장과 염려, 걱정을 애써 숨기며 환하게 웃는 모습까지 하나하나 뇌리에 담았다.

    “사고 치지 말고 똑바로 해라. 알겠니, 빈센트?”

    “사고 안 칩니다, 어머니.”

    덩치가 커다란 빈센트가 자신보다 키가 배는 작은 것 같은 엄마 앞에서 쩔쩔매며 고개를 숙였다.

    “다녀올게요, 세드릭 님.”

    “다녀오렴.”

    세드릭이 아일라를 향해 부드럽게 웃었다. 아일라는 그녀가 건넨 것을 그가 수년 동안 곱게 보관했다가 다시 돌려준 갑옷 꾸러미를 손으로 꽉 잡았다. 아일라에게 세드릭의 잿빛 시선을 마주하는 것은 전처럼 어렵지만은 않았다.

    ‘절 기다려 주세요, 세드릭 님. 제가 얼마나 강해져서 돌아오는지, 그래서 당신께 떳떳이 고백할 수 있게 되는 그날을 꼭 기다려 주세요.’

    그때까지 세드릭 역시, 자신의 마음의 색깔을 확실히 가늠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될 것이 분명했다. 그때 가서 그의 선택이 지금과 같다고 한들, 아일라와 그가 한 가족으로 영원히 함께한다는 사실이 변하는 것은 아니었다. 아일라가 마음 편히 떠날 수 있는 이유이기도 했다.

    “부탁한다.”

    발터의 한마디에 세드릭이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마주치는 시선에 모든 진심이 집약되어 있었다.

    “고마워, 세드릭.”

    세드릭이 가볍게 웃으며 혜미가 내민 왼손을 잡았다. 바싹 마른 그의 손은 의외로 따사로웠다.

    “…넌 잘할 거다.”

    그의 짤막한 한마디에 부끄럽게도 눈가가 뜨거워졌다. 세드릭이 말해 주면 왠지 다 진짜 같았다. 변태인 것 같긴 하지만 빈말은 하지 못하는 그의 성격을 알기 때문에 더욱 그랬다.

    혜미는 모두 앞에서 볼썽사납게 훌쩍이는 모습을 보이기라도 할까 봐 서둘러 말에 뛰어올랐다. 하아, 하고 크게 숨을 몰아쉰 후 그녀를 바라보는 기사들을 향해 눈을 맞추었다.

    “다들, 준비됐지…?”

    발트리가 그토록 바라왔던 날이었다. 세르노티의 정예 기사들이 단 하나뿐인 그들의 주군을 향해 힘차게 외쳤다.

    “예!”

    “가자!”

    세르노티의 성문을 뒤로하고 기사들을 태운 말이 차례로 달려 나가기 시작했다.

    제국력 179년, 크리스티앙 재위 4년째 봄.

    매의 수호자, 암살단 세르노티 가문은 세르노티 기사단의 이름으로 클라웨 제국의 동부 국경지대, 자일룬으로 출정한다.

    ***

    세르노티에서 자일룬까지의 이동은 트리바 산맥을 거치면 약 두 달이 소요되는 거리였다. 세드릭의 말대로 쌓여 있던 눈은 대부분 녹아 움직이는 데 크나큰 어려움은 없었다.

    “이제 내일쯤이면 산을 빠져나갈 수 있는 거겠지?”

    모닥불 주위에 둘러앉아 복숭아 펀치를 들이켜며 레나가 입을 열었다. 강을 건너지 않기 위해 험준한 산맥에서 캠프를 하며 이동한 지도 한 달 보름째였다. 여행을 위해 가져온 절인 복숭아도 이제 바닥을 보이는 걸 생각하니 기분이 조금 가라앉았다.

    “지붕 있는 곳에서 좀 자고 싶다. 망할 놈의 날벌레도 없는 곳에서 말야.”

    얀이 목덜미를 벅벅 긁으며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래도 별은 완전 가깝게 보여서 좋지만.”

    혜미가 주섬주섬 일어나 얀에게 벌레 약을 내밀었다.

    “아, 혜미. 고마워.”

    얀이 그녀를 보며 싱긋 웃었다.

    “우리 옛날에 숲에서 훈련했을 때 생각난다. 그때 준비물 담당이 약을 깜빡하고 안 챙겨서.”

    혜미의 주변에 빙 둘러앉은 다른 기사들이 그때 일을 떠올리며 피식거렸다.

    “여름이라 벌레가 엄청 많았었지. 다들 성으로 돌아왔을 때는 얼굴이며 팔다리가 엉망진창이라서….”

    “카트리나 아줌마가 우리 단체로 전염병이라도 걸린 줄 알고 기겁을 했었지.”

    혜미는 왠지 민망해 불을 쬐며 애매하게 웃을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좋다. 이렇게 함께할 수 있어서.”

    빈센트가 그녀를 보며 툭, 내뱉자 다른 기사들도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그래.”

    “이렇게 다시 빙 둘러앉아서 불 쬐는 날이 오리라고는 생각도 못 했었어.”

    “세드릭도 함께였다면 좋았을 텐데.”

    말없이 불쏘시개로 불을 쑤시던 아일라가 잠시 손을 멈추다 다시 움직였다. 누군가 그녀의 눈치를 보며 목소리를 높였다.

    “우리말이야, 언젠가 아메티스에 당당히 입성할 날이 있겠지?”

    “당연하지.”

    “황궁은 진짜 황금으로 만든 것처럼 번쩍번쩍 빛난다던데. 사실일까?”

    “거짓말일 거야. 그게 말이 되냐.”

    “근데 설마, 우리 시골에서 왔다고 수도 사람들한테 무시당하는 건 아니겠지? 나, 스타일 이 정도면 괜찮지 않아?”

    “넌 도대체 무슨 자신감으로 그런 말을 해?”

    “와. 미치겠네. 혜미, 너 황제 되면 꼭 쟤부터 좀 어떻게… 아야!”

    목소리를 높이던 얀의 옆구리를 누군가가 쿡 찔렀다.

    “말조심 좀 해. 며칠 전에 발터한테 왕창 깨져 놓고선 또 그러네.”

    “아, 미안.”

    얀이 그제야 머리를 긁적이며 입을 닫았다. 부드럽게 풀어졌던 주변의 공기에 보이지 않는 묵직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너 때문에 그녀가 위험에 처하는 일이 발생한다면 난 가주의 이름으로 네 목을 베는 걸 서슴지 않을 거다.”

    모두의 머릿속에 며칠 전 캠프의 분위기를 얼어붙게 만들었던 가주의 말이 떠오른 탓이었다. 아침을 준비하던 얀이 혜미를 실수로 ‘이든’이라 부른 직후였다.

    “발터, 실수로 그런 거잖아.”

    “우린 결코 실수해서는 안 되는 이들이니까.”

    혜미가 얀의 편을 들어 보았지만 발터의 심각한 눈동자는 더욱 어둡게 가라앉을 뿐이었다. 얀은 그 앞에서 마치 벌을 받는 사람처럼 묵묵히 입술을 씹을 수밖에 없었다. 한 번의 실수가 얼마만큼이나 큰 파장을 불러오게 되는지 그라고 모르는 게 아니다. 황제를 지켜야 하는 위치에 있는 그들이라면 더더욱.

    “우린 소꿉장난이나 하려고 세르노티를 떠난 게 아니야. 확실한 목표를 가지고 출정했다. 그 목표가 뭔지, 이 중에 모르는 사람 있어? 모르겠다면 일어나서 검을 잡아. 내가 똑똑히 가르쳐 줄 테니까.”

    혜미의 눈동자가 둥그렇게 커졌지만 발터는 말을 멈추지 않았다.

    “이 기회를 통해 확실하게 말하지. 그녀를 더 이상 예전처럼 편하게 여기는 것도 곤란해. 우리가 목숨 걸고 지켜야 할 이가 누군지, 뭘 위해서 세르노티의 이름을 받았는지 매 순간 되새기고 긴장을 놓지 말라는 뜻이다.”

    한 마디, 한 마디 곱씹듯 내뱉는 발터의 얼굴은 그가 그토록 따분해하고 질려 했던 전대 가주, 그의 아버지인 발트리의 표정과 몹시도 닮아 있었다. 혜미가 입을 연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내 신분이 뭔지는 철저하게 감추는 대신, 나를 옛날처럼 편하게 대하는 건 안 되니 확실히 알아 모시라고? 발터, 솔직히 앞뒤가 안 맞는 이야기라고 생각하지 않아?”

    “아니.”

    혜미가 목소리를 높여 보았지만 발터의 대답은 간결했다. 기사들이 진지한 표정으로 모두 그녀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발터의 말뜻을 이해한 까닭이었다.

    “동료로서 너를 아끼는 것과 주군을 위해 충성하는 것은 그 무게감 자체가 다르니까.”

    더 이상 동료의 위치가 아닌 윗사람으로서 혜미를 대하라는 뜻이었다. 평소에 친구처럼 편하게 그녀를 대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그녀의 신분을 감추기 위한 위장일 뿐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라는 뜻이다.

    발터는 자신이 한 말을 증명이라도 하듯 모두가 보는 앞에서 그녀의 발치에 무릎을 꿇었다. 기사들이 숨을 죽인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매일 그녀와 치고받고 싸우던 발터의 고개가 땅에 닿을 듯 가까웠다.

    “제 말이 불복종, 혹은 모독으로 느껴지셨다면 제 목을 베셔도 좋습니다.”

    혜미의 눈동자가 소리 없이 흔들렸다.

    캠프를 떠난 후, 발터는 그녀와 묘하게 거리를 두었다. 이제 곧 리비에르의 군대와 합류해야 하기 때문이었다.

    혜미라고 해서 그의 속내를 짐작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었다. 언젠가는 달라져야 할 관계라면 지금부터 확실히 해 두는 편이 좋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게다가 둥지 같은 세르노티를 떠나 더 이상 안전하지 않은 세상으로 나아가는 이 상황에서는 더더욱.

    다만, 기억이 없는 그녀가 다른 기사들과 겨우 가까워진 이 상황을 굳이 어색하게 만드는 발터가 원망스러운 마음까지는 멈출 수가 없었다.

    “…그래. 뭐든 다 좋은데 아침부터 칼 들고 분위기 싸하게 만드는 건 좀 그만둬 줘.”

    그녀가 차갑게 입을 열자 주변 공기가 더욱 무거워졌다. 혼자만의 시간을 가지려 했지만 그룹에서 떨어지면 위험해질 가능성이 있다고 그것도 저지당했다. 못 참겠다 싶어서 목소리를 높이려는 그녀 대신, 발터가 아침 식사 자리를 떠남으로써 그날의 사건은 마무리되었다.

    혜미는 그날 이후로 지금까지 발터와 서먹하게 지내고 있었다. 그와는 처음 겪는 갈등이었다.

    “근데 발터는 어딜 간 거지?”

    타닥. 모닥불에서 불씨가 튀었다.

    “주변을 둘러보러 갔을 거예요. 내일 떠날 길도 확인할 겸.”

    “그럼 이제 우리도 슬슬 정리를 해야겠다. 꼭두새벽부터 출발하려면 잠 좀 자 둬야지.”

    이야기꽃을 피워 내던 기사들이 하나둘 자리에서 엉덩이를 툭툭 털며 일어섰다. 혜미 역시 남은 와인을 마셔 버리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혜미, 어디 가?”

    “응. 화장실 좀.”

    “그럼 같이 가자.”

    막 잘 준비를 끝내고 침낭에 몸을 집어넣으려던 레나가 다시 일어서는 것을 보며 혜미가 손을 저었다.

    “아냐, 나 혼자서 갈 수 있어.”

    “내가 함께 가지.”

    어느새 그녀의 뒤로 다가온 발터가 건조하게 내뱉었다. 됐다고 말할 새도 없이 그가 앞장을 서기 시작했으므로 혜미는 그를 뒤따를 수밖에 없었다.

    캠프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서 볼일을 본 후, 돌아오는 길에도 발터는 말이 없었다. 기름을 먹인 솜으로 불을 켠 램프를 든 채 앞만 보고 걸을 뿐이었다.

    서로 대화가 없어진 지가 며칠이나 되었다고, 뭐라고 말을 붙여야 할지 모르겠다. 화제를 찾는 것도 포기한 후 말없이 걷던 혜미가 문득 발을 멈추었다.

    “발터.”

    “응.”

    “…근데 캠프는 저쪽 아냐?”

    발터가 그녀를 이끄는 곳은 간이 숙소 주변, 모닥불의 연기가 희미하게 피어오르는 곳과 반대 방향이었다.

    “보여 줄 게 있어서.”

    발터의 목소리는 낮게 가라앉아 있었다. 며칠 전의 일 때문에 조용한 데서 이야기라도 하고 싶은 걸까. 혜미는 가만히 그의 뒤를 따랐다. 이 어색한 상태를 바꿀 수 있는 거라면 뭐라도 좋을 것 같았다.

    축축한 밤공기를 가득 담은 숲의 내음이 점점 진해지고 어딘가에서 물소리가 들리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얼마나 걸었을까. 숲이 끝나는 지점, 그녀의 눈앞에 높이가 엄청난 폭포수가 나타났다.

    “와.”

    혜미가 고개를 들며 저절로 감탄했다. 밤하늘에 빽빽하게 들어찬 별들이 손에 닿을 듯 가까웠다. 별빛을 받으며 폭포수가 한꺼번에 쏟아져 내리는 모습은 그야말로 장관이었다.

    그들은 잠시 그 자리에서 몇 분 동안 말없이 침묵했다. 때로는 거대하고 아름다운 자연 앞에서 아무런 말이 필요 없어지는 순간이 있다.

    “여긴 어떻게 찾아낸 거야?”

    혜미가 마침내 조용한 목소리로 입을 뗐다. 여전히 시선은 큰 소리를 내며 쏟아지는 폭포수에 고정한 채였다.

    “어제, 빈센트와 함께 불쏘시개 삼을 나무를 찾다가.”

    “…고마워.”

    발터가 뚫어져라 그녀를 바라보았다.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가 내뱉어 보았지만 날뛰는 마음을 가라앉히기는 힘이 들었다. 달빛을 받고 서 있는 이든, 아니 혜미의 옆모습이 새삼 숨 막히게 아름답다. 마치 이 세상이 사람이 아니기라도 한 것처럼. 이토록 가까이 있는데도 손을 대면 다시 사라져 버리기라도 할 것 같다.

    너와 함께 있는 매 순간에도, 나는 너를 잃을까 두려워져. 과욕의 소치가 나를 얼마만큼 절망하게 했는지가 지금도 생생한데, 함께 있는 시간이 더해갈수록 커져 가는 욕심을 숨기기가 어렵다.

    마치 지금처럼.

    “나한테 화가 많이 난 거 알아.”

    발터가 낮은 목소리로 꺼낸 말에 혜미는 말없이 마른침을 삼켰다. 두근. 두근.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별빛을 담고 떨어지는 폭포수를 뚫어져라 바라보던 그녀가 고개를 돌려 그를 마주했다. 붉어진 콧잔등, 주름이 깊게 팬 미간이 꿈틀댔다. 발터가 마른침을 삼키자 툭 튀어나온 목울대가 위아래로 일렁였다.

    “…하지만 잘못했다고 말하고 싶지 않아. 위험한 걸 뻔히 알면서도 그걸 모른 체할 수는 없으니까.”

    굳이 덧붙이는 말투는 고집스럽기 짝이 없었다. 애원하는 것 같은 표정과 어울리지 않는 말투를 들으며 혜미가 짐짓 눈썹을 모으며 샐쭉한 표정을 지었다.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뭔데…? 혹시 설교하려고 나 여기까지 데리고 온 거야?”

    “아니.”

    “그럼?”

    “네가… 화를 풀었으면 좋겠다.”

    진지하고 심각한 얼굴. 입술 새를 살며시 비집는 웃음을 참지 못할 것 같았다. 혜미가 얼굴을 감추려 몸을 돌리자 그녀의 등 뒤로 따뜻하다 못해 뜨거운 체온이 감겨들었다. 순간 몸속에서 요 며칠간의 긴장이 뚝 풀리며 가슴이 찌르르 떨린다.

    “화 풀어. 제발.”

    뒤에서 그녀를 끌어안은 발터가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쏟아지는 물줄기에서 느껴지는 차가움과는 반대로 그의 뜨끈한 체온이 등을 감싸는 기분이 좋았다.

    “네가 날 외면하면 괴로워서 죽을 것 같다.”

    떨리는 목소리에 그가 지금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지 보이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혜미는 목덜미에 다가오는 그의 뜨거운 숨결에 잠시 몸을 떨다가, 그의 품 안에서 그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나 화 안 났어.”

    그녀가 발터를 가만히 지켜보다 발꿈치를 들어 입술을 꾹, 눌렀다.

    “네가 날 위해서 일부러 악역 자처한 것도 알고.”

    “…….”

    “내가 먼저 사과하려고 기회만 살피고 있었는데.”

    그의 떨리는 숨결이 코끝에서 느껴졌다. 허리 뒤편에서 딱딱하게 느껴지는 감각에 혜미가 잠시 말을 멈추었다. 숨길 수 없는 신체적 반응 탓에 붉어진 발터의 콧잔등이 달빛 아래 생생하다.

    “…한심하지.”

    발터가 마침내 허스키한 목소리로 내뱉었다. 성을 떠난 이후 24시간 늘 기사들과 함께였다. 일인용 침낭 같은 잠자리도 다닥다닥 붙어 있었고, 밤중이면 한 사람씩 돌아가며 보초를 섰기 때문에 둘이만 있을 기회는 전무하다시피 했다. 게다가 며칠 전 있었던 자그마한 충돌 때문에 그녀의 곁에는 갈 생각도 하지 못했다.

    “이런 상황에서도 네 손길 하나에 이렇게 되는 내가 한심하기 짝이 없지.”

    “아니.”

    혜미가 자조하는 그를 보며 작게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조심스레 손을 아래로 내린 후, 발터의 바지춤으로 살며시 밀어 넣었다.

    “하아….”

    그녀를 빤히 응시하는 발터의 얼굴이 괴로운 듯 일그러지며 부들부들 떨렸다. 그녀가 단단히 일어난 발터의 성기를 가만히 쥐었다. 맥동하는 살덩이가 빳빳하게 들리며 단단해졌다.

    차마 한 손으로 쥐기도 힘든 페니스를 살며시 끌어당기듯 마찰하자 발터의 얼굴이 더욱 구겨지고 짙은 눈썹이 엉망으로 휘었다.

    “한심하지 않아.”

    혜미가 그의 흥분을 손으로 문지르며 속삭였다. 미끈하게 묻어나는 그의 반응을 느끼며 마른 입술을 혀로 축였다. 발터의 숨결이 거칠어지는 소리가 물소리를 뚫고 똑똑히 들렸다.

    “발터, 여긴 우리 빼고는 아무도 없을까…?”

    “…인간은 없는데 짐승은 있는 것 같다.”

    그중엔 그 역시 포함이다. 혜미가 그의 눈을 바라보았다. 진중하고 뜨겁고 깊어서 한 번 마주치면 외면하기가 힘든 그의 눈동자.

    “발터, 넌 내가 명령하는 건 다 할 수 있어?”

    “널 위한 거라면 뭐든 해.”

    “있잖아.”

    혜미가 양손을 뻗어 그의 얼굴을 잡았다. 발터의 얼굴을 제 키에 맞게 잡아당긴 후, 그 자리에서 굳어 버린 그의 귀에 달콤하게 속삭였다.

    “그럼 나 좀 기분 좋게 해주라.”

    말을 끝낸 그녀가 쪽, 하고 귓가에 입을 맞춘 순간 발터의 인내심이 한계를 넘었다. 짐승처럼 거친 숨을 몰아쉬며 그가 그녀를 끌어안았다.

    튜닉의 끈이 언제 풀어진 건지, 바지가 언제 벗겨졌는지 알 수도 없었다. 발터는 쏟아지는 폭포수를 앞에 두고 그녀의 밀부를 단번에 잠식하며 참았던 신음을 터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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