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1화 (21/72)
  • 그뿐만이 아니었다.

    “하르트만 부인한테 빚진 것도 있거든. 만약 하르트만이 카플란과 연합했다면 솔직히… 우리가 이기기는 힘들었을 테니까.”

    “하르트만이 너에게 뭘 원하기라도 했어?”

    발터가 못마땅한 표정으로 눈을 가늘게 뜨고 그녀에게 물었다. 전쟁에서 참전하지 않는 대가로 하르트만 부인이 혜미에게 거래라도 원했다면 그로서는 용납할 수가 없는 일이었다. 아직 황위를 되찾지 못했다고 해도 엄연히 그녀는 제국의 황녀였다. 그녀의 신분은 하르트만 가문이 감히 함부로 할 수 없는 까마득한 위치에 있었다.

    “아니. 꼭 나한테 뭔가를 원했다기보다는….”

    혜미는 억울하게 누명을 쓰고 자살한 남편의 복수를 하고 싶어 여태껏 기다렸다던 클라라 하르트만의 차분한 표정을 떠올렸다.

    “선대 황제를 죽인 사람이 누군지 알아내서 복수하고 싶다고 했어. 여태껏 조용히 살면서 병력을 키웠던 것도 그 때문이래.”

    “클라웨 8세를 암살한 건 카플란, 아니면 당시 황후의 편에 섰던 또 다른 누군가겠지.”

    발터가 하르트만 부인이 했던 말과 정확히 같은 소리를 내뱉었다.

    “응. 뭔가 선대 황제 시절부터 감춰진 비밀이 엄청 많은 것 같아.”

    도대체 어디서부터 꼬이기 시작한 걸까.

    “칭칭 꼬인 실타래를 던져 받은 기분이야. 여기서 매듭 하나만 딱 풀리면 모든 게 다 풀릴 것 같은 느낌이고. 뭔 말인지 알겠어?”

    “넌 그 실마리를 쥔 사람이 베네딕트일 거라고 생각하는 건가?”

    혜미는 오늘따라 그녀의 마음을 정확히 짚는 발터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응. 왠지 그 남자는 모든 진실을 알고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들거든.”

    “…그 느낌의 원인은 뭔데?”

    조금 가라앉은 목소리로 그녀에게 되묻는 발터의 얼굴이 왠지 어두워진 것도 같았다.

    “그냥….”

    혜미 스스로도 그 이유를 정확히 설명할 수가 없었지만, 그녀의 가슴속에서 근거 없는 믿음이 강하게 자리했다.

    “그는 내가 그를 찾아오길 간절히 바라고 있는 것 같아. 왠지 그런 확신이 들어.”

    “베네딕트가 네 영혼을 처음 찾아냈을 때도, 그 소릴 했다고 했지?”

    발터는 혜미가 지나치듯 했던 말을 기억하고 있었다. 혜미가 진중한 눈동자로 그를 보았다.

    “응. 가장 빛나는 곳에서 날 기다리고 있겠다고 말했었어.”

    “그게 무슨 뜻인지… 이제 알고 있지?”

    클라웨에서 가장 빛나는 곳은 수도인 아메티스에 위치한 황궁이었다. 비단 상징적인 의미뿐이 아니라 실제로도 태양 빛을 받아 빛나는 반짝임 덕에 황금성이라 불리는 곳이다.

    “응. 알아.”

    “교황이 차기 황제로 각인한 사람은 너뿐이다.”

    선대 황제의 첫 딸로 세상의 빛을 본 에데르트는 태어나자마자 교황의 보석을 받았다. 역대 황태자 혹은 황태녀 중 가장 빠르게 벌어진 의식이었다. 형제끼리 죽고 죽이는 피의 역사를 막으려는 클라웨 8세의 강력한 의지의 표현이기도 했다.

    교황은 그 사실에 동의했고 자신의 피로 만든 보석을 아직 아기였던 황녀와 나누어 가짐으로써 그녀와 각인했다. 카플란과의 전투에서 이든이 벌인 기적은 아마도 대마법사와 그녀가 각인한 증거인 보석에서 뿜어진 마력임이 분명할 것이다.

    “그 때문에 베네딕트 역시, 현재 클라웨의 황제는 크리스티앙이 아닌 너여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을 거고.”

    그랬기에 교황은 이든의 죽음을 미리 알고 달려와 그녀를 살려 냈음이 분명했다. 잊고 싶지만 절대로 잊을 수가 없는 그때의 상황을 떠올리며 발터가 이를 꽉 물었다.

    이든의 난도질 난 몸을 어루만지던 베네딕트의 손. 알 수 없는 빛을 띠며 가늘어지던 그의 눈빛과 만지면 가루가 묻어날 것 같던 이마에서 이든의 몸으로 툭, 하고 떨어지던 땀방울까지 선명했다.

    숨이 완전히 멎은 그녀를 되살리기 위한 방법이었음을 알고 있었지만, 발터는 그때의 일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스스로 제 목을 조르고 싶어졌다. 황녀였던 그녀가 세르노티에 오지 않았더라면 자신은 감히 그녀에게 손을 댈 수조차 없는 신분이었을 텐데도, 감히 그녀를 원하고 그녀에게 충성해야 하는 이들을 질투한다.

    “황제라….”

    발터의 내적 갈등을 전혀 알지 못하는 혜미가 후, 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에게는 아직도 현실감이 없이 멀리만 느껴지는 이야기였다. 혜미가 힘이 조금 빠진 얼굴로 발터를 보며 물었다.

    “세르노티의 다른 기사들도 너처럼… 내가 황제가 되길 원하겠지…?”

    “크리스티앙의 폭정이 이어진다면 클라웨는 내리막길이니까.”

    발터가 건조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이든이 시체처럼 잠들어 깨어나지 않았던 3년간, 그는 이전까지는 관심도 없었던 제국의 실정을 파악하기 위해 노력했다.

    결과적으로만 봤을 때 황제로서 크리스티앙의 성과는 대단했다. 전쟁에서는 패배보다 승리가 많았고, 이에 영토를 공격적으로 확장해 가고 있었지만 그만큼 부작용도 심했다.

    크고 작은 내전이 이어졌고 봉토를 하사받은 영주들은 부패했다. 수도인 아메티스와 황금성으로 집중되는 세금을 바치기 위해 평범한 농민들은 눈을 떠서 감을 때까지 노동에 시달리며 살아야 했다. 전쟁을 위한 물자를 대는 것은 또 다른 문제였다. 현재 클라웨의 국민들은 끝이 없이 이어지는 전쟁에 피로감을 느끼고 있는 상황이었다.

    “내가 지금 크리스티앙을 독대하는 건, 확실히 너무 위험하겠지?”

    혜미가 발터를 보며 답이 뻔한 이야기를 물었다.

    “…걔가 아무리… 내 배다른 동생이라고 해도, 아마 걘 날 보자마자 죽이려 들 거야. 그렇지?”

    악어의 입 속으로 기어들어 가는 것과 다를 바가 없었다. 아무리 세르노티의 기사들이 훌륭하다고 한들 수도인 아메티스에 주군하고 있는 황궁 근위대만 해도 수천이다.

    “세드릭의 방식대로 말하자면….”

    발터가 대답을 망설이다 쓰게 내뱉었다.

    “승산이 높을 것 같진 않아.”

    혜미가 그의 어깨를 툭, 건드리며 가볍게 웃었다.

    “뭘 그렇게 미안한 표정으로 이야기해? 누가 보면 그게 네 잘못인 줄 알겠다.”

    발터는 말갛게 웃는 혜미를 보며 마른 입술을 혀로 축였다. 입 밖으로 튀어나오려는 진심을 꾹 눌러 가슴 밑바닥에 감추었다.

    ‘…그러지 못해서 미안하니까.’

    할 수만 있다면 이든을 위해 지금 당장이라도 황금성에 잠입한 후 크리스티앙의 목을 베고 싶었다. 그의 목을 따고 그 자리에서 처형되는 것은 두렵지 않았다. 황제를 위한 암살단에 어울리는 최후였으니까. 하지만… 발터는 눈앞에 있는 그녀를 영원히 보지 못하게 되는 것이 두려웠다.

    …아직까지는 너와 함께 있고 싶다. 이든.

    “발터. 내가 비밀 하나 말해 줄까?”

    어디선가 하얀 민들레 홑씨가 날아와 작게 속삭이며 웃는 그녀의 머리칼에 붙었다.

    “발터…! 내가 마술을 보여 줄게. 눈을 감아 봐!”

    눈썹을 삐뚜름하게 찌푸리며 그녀의 앞에서 눈을 감은 어린 자신이 있다. 그리고 그를 마주하고 민들레 풀을 든 채 후우, 하고 크게 숨을 불어 내쉬는 이든이 있다.

    “이제 눈 떠 봐!”

    “…….”

    “짠! 다 없어졌지!”

    “…바보 아냐?”

    “헤헤. 웃었다. 발터.”

    헝클어진 갈색 머리카락에 민들레 홑씨를 잔뜩 묻히고서 이든은 마치 지금처럼 눈을 반짝이며 웃었다. 너의 웃는 모습을 다시는 볼 수 없는 것. 나는 죽는 것보다 그게 더 겁이 나.

    말없이 그녀를 바라보는 발터를 향해 혜미가 마치 비밀을 말하듯 낮아진 목소리로 고백하듯 내뱉었다.

    “내 편이라고 생각되는 사람들이 있어서 이렇게 든든한 거… 나 난생처음이었어.”

    3년 전 자신의 가슴에 칼을 박은 장본인이 누구였는지는 또다시 까맣게 잊은 채, 그녀가 환하게 웃으며 속삭였다. 어디선가 기분 좋은 금목서 향이 솔솔 바람을 타고 불었다.

    “그러면서… 이상하게 욕심이 생긴다?”

    혜미가 예쁜 콧잔등에 주름을 잡으며 길게 한숨을 내뱉었다. 투명한 하얀 피부에 열기가 어렸다.

    “나는… 좋은 사람도 아니고, 강한 사람은 더더욱 아닌데…. 좋은 사람이 되고 싶고, 강해지고 싶어. 조건 없이 날 믿어 주는 사람들한테 고맙고… 또 미안해서 그 사람들 믿음에 어떻게든 보답하고 싶다는 느낌이 들어. 위선이라고 해도, 가식적이라고 해도 할 말은 없는데… 부족하고 모자란 날 아껴 주는 사람들에게 더욱 더 좋은 사람이 되고 싶다는 욕심이 생겨.”

    “…….”

    “하루에도 몇 번씩 다 때려치우고 도망가고 싶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여기서 내 편이 더 많아졌으면 좋겠어. 지금도 이렇게나 든든한데 더 많아지면 어떨까, 부담스러울 것 같으면서도 싫지는 않아.”

    혜미가 여린 입술을 빨며 그를 향해 애매한 표정으로 웃었다

    “…네가 생각해도 나, 되게 웃기지?”

    이곳으로 오기 전까지는 자신한테 있는지도 몰랐던 감정들이 마구마구 샘솟았다.

    “우습지 않아.”

    발터가 손을 들어 그녀의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스치듯 만졌다. 아직까지 남아 있던 민들레 홑씨가 바람을 타고 멀리 날아갔다.

    “그런데 왜 자꾸 웃어?”

    내가 웃고 있었나…? 스스로에게 의문하며 발터가 낮게 중얼거렸다.

    “내가 웃는 편이 더 보기 좋다며.”

    “…응?”

    “무표정하게 있으면 커다란 나무껍질에 눈코입 그려 놓은 것 같다는 말이 좀 충격이었나 보지.”

    혜미가 그를 보며 낮게 소리 내어 웃었다. 사소한 말 한마디를 모두 기억하는 발터와 함께 있으면 마음이 따스하고 편안해진다. 그녀가 보라색 눈동자를 가늘게 접으며 작게 속삭였다.

    “네가 내 편이라서 내가 얼마나 고마운지… 얼마만큼 안심하고 있는지 너는 아마 상상도 하지 못할 거야.”

    발터가 그녀를 보며 마른침을 삼켰다. 툭 불거진 목울대가 소리 없이 일렁였다. 단단한 남자의 흉곽이 더욱 크게 부풀었다.

    앞으로 너는 더, 더 많은 사람들을 네 편으로 끌어들이게 될 거야. 그 옆에 나의 자리가 과연 있을까. 이든.

    불안한 그의 마음을 마치 읽기라도 한 것처럼 그녀가 입을 열었다.

    “물론 앞으로도 너 같은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 같으니까….”

    혜미가 길게 숨을 내쉬며 조금 상기된 얼굴로 그에게 부탁했다.

    “끝까지 내 편이 되어 줘, 발터.”

    두근. 누구의 것인지 모를 심장이 크게 박동 소리를 내며 뛰었다. 발터가 잠시 눈을 내리깔고 아랫입술을 혀로 핥았다. 그리고 시선을 들어 그녀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명령입니까?”

    언뜻 보면 무표정한 듯 보이는 그의 얼굴에 은근한 미소가 드리운 것을 눈치채지 못할 수는 없었다.

    혜미는 이제 그가 짓는 표정에 담긴 의미를 알았다. 심각한 듯 찌푸린 짙은 눈썹 미간이 슬쩍 흔들리면 그것은 장난이다. 혜미가 짐짓 근엄하게 고개를 치켜들며 웃음을 참았다.

    “명령이오.”

    “주군의 명령을 제가 어찌 거부할 수 있겠습니까. 폐하를 위해 납작 엎드려 평생 충성할 것을 피로 맹세합니다.”

    발터가 낮은 목소리로 또렷하게 속삭이자 혜미의 입술에서 쿡, 하고 참았던 웃음이 샜다. 이곳에서 처음 눈을 뜬 날 밤의 일이 떠오른 탓이었다. 탑 꼭대기에서 그녀의 앞에 무릎을 꿇고 괴로운 얼굴로 충성을 맹세하던 커다란 남자와 자신이 황제라는 사실을 듣고 경악하며 이불을 발로 차고 싶었던 그때 자신의 모습까지도.

    생각해 보면 이제 겨우 넉 달 정도밖에 되지 않은 일인데, 마치 오래전 일처럼 까마득했다. 아마도 그 이후에 엄청난 사건들이 연속으로 일어났기 때문일 것이다.

    그때의 자신은 넉 달 후의 자신이 칼을 들고 싸우고, 말을 달려 전쟁을 하게 되리라고 상상이나 했을까. 마주하는 것만으로도 몸이 덜덜 떨리던 커다란 남자와 마주 앉아 이런 농담을 주고받게 될 줄 알았을까.

    반년 후에는 그리고 1년이 지난 후에 나는 과연 어디에서 무얼 하고 있을까. 그곳이 어디라도 눈앞의 커다란 남자와 함께라면 숨지 않고 앞으로 나아갈 수는 있을 것 같았다.

    그녀가 장난스레 입술을 씰룩이며 발터를 향해 말을 이었다.

    “왜, 또. 그대는 내 발바닥이라도 핥을 기세로 나올 참인가?”

    회심을 담은 공격에도 발터는 굴하지 않았다. 오히려 미간을 더욱 좁히며 진지한 얼굴로 그녀를 향해 내뱉는다.

    “폐하께선 제가 고작 그것만 할 수 있다 생각하십니까?”

    “푸흣…!”

    혜미가 그의 어깨를 퍽, 때렸지만 바윗덩어리 같은 남자는 쉬이 뒤로 밀리지도 않았다. 그녀가 소리 내어 웃으며 항복의 표시로 손을 내저었다.

    “아, 이제 그만, 그만해. 손발이 오그라들어서 도저히 못 하겠다.”

    “제가 주군을 위해 어디까지 할 수 있는지, 시험해 보고 싶지 않으십니까…?”

    웃음기 어린 얼굴을 들이밀며 발터가 그녀의 목덜미를 파고들었다.

    “하하…. 야! 무, 무엄하다…!”

    “벌해 주십시오. 달게 받겠습니다.”

    뜨거운 숨결을 내뱉으며 속삭이는 발터의 목소리는 녹은 초콜릿처럼 달콤하고 부드러웠다.

    “푸흣, 진짜지…?”

    혜미가 고개를 확 돌려 그의 얼굴을 양손으로 붙잡고 아랫입술을 벌주듯 꽉 깨물었지만 헛수고였다. 발터는 신음하나 없었다. 눈썹을 삐뚜름하게 올린 채 그녀에게 짧게 되물을 뿐이었다.

    “이게 답니까…?”

    꽉 잠긴 목소리로 내뱉는 그를 보니 밑도 끝도 없는 오기가 생겼다. 아예 혀를 깨물어 버리려고 발터의 입 속을 헤집는 순간, 반대로 그녀의 보드라운 혀가 발터에게 강하게 빨렸다.

    “흐응…!”

    혜미가 아찔한 느낌에 신음하며 발터의 어깨를 꽉 쥐었다. 발터의 커다란 손이 그녀의 뒤통수를 압박하듯 감쌌다. 혀의 돌기를 비비며 타액을 나누는 진득한 키스가 이어졌다. 발터가 허스키하게 신음하며 그녀의 입 안을 빨자 온몸의 힘이 쭉 빠져나가는 느낌이 들었다.

    입맞춤이라는 행위가 이토록 가슴이 찌르르해지는 무언가라는 사실도 이전에는 미처 몰랐던 일이었다. 발터의 키스는 늘 뜨거웠고, 떨리는 갈급함이 있었다.

    그녀의 아랫입술을 쭉 빨아들이며 발터가 뜨거운 숨을 길게 내쉬었다. 부드러운 머리카락 새를 파고든 굵직한 손가락 끝에 열망이 뚝뚝 떨어졌다. 고개를 뒤로 물리려고 하자 불꽃이 타오르는 가느다란 눈으로 그녀를 보며 꽉 잠긴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나는 아직… 벌을 덜 받았는데.”

    대답할 새도 없이 다시금 진득하게 혀를 섞어 온다. 이런 키스를 거부할 수 있는 여자는 많지 않을 게 분명했다. 길고 긴 입맞춤 끝에 젖은 입술이 간신히 떨어졌다. 혜미는 어느새 풀밭에 드러누운 그의 몸 위에 몸을 겹치고 있었다.

    …이래서야 내가 꼭 그를 덮친 것 같은 기분이잖아…!

    혜미는 뒤늦게 민망해져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했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쪽. 쪽.

    발터가 그녀를 끌어안은 채 고개를 들고 그녀의 입술과 얼굴에 가벼운 입맞춤을 흩뿌렸다. 두꺼운 통나무 같은 그의 팔뚝이 그녀의 몸을 꽉 결박하고 있었으므로 움직일 수가 없었다.

    “가… 하하…. 간지러… 워…. 그만…. 응?”

    “그럼 아프게 하길 원하십니까…?”

    발터가 그녀의 성감대인 귓불을 잘근잘근 씹으며 속삭이자 아랫배에 힘이 꽉 들어갔다. 다리 사이에서부터 간질간질하게 번져 가는 자극을 참을 수 없었다. 혜미가 그의 하체를 무릎으로 지그시 누르자 발터가 낮게 신음하며 거친 숨을 터뜨렸다.

    “아, 이든…. 흐으….”

    “벌하라고 했으니까 벌줘도 되지…?”

    혜미는 이때다 싶어 그를 다리로 꽉 압박한 채 허리를 세웠다. 장난기와 흥분이 동시에 어린 얼굴로 그를 내려다보았다. 단단히 성이 난 팔뚝만 한 페니스가 헐렁한 바지를 뚫을 기세로 솟구쳐 있었다.

    “이거 언제부터 이렇게 됐어?”

    “…몰라.”

    발터가 괴롭게 신음했다. 혜미는 그를 조금만 놀려 줄 생각에 하체로 그의 중심을 천천히 문지르며 장난을 쳤다.

    “어허. 황제 앞에서 이렇게 세우다니 무엄하도다.”

    혜미가 키득거렸지만 발터는 웃을 수가 없었다. 그가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턱을 치켜들었다.

    “아흣…. 이든….”

    흥분에 덜덜 떨리는 손으로 그녀의 엉덩이를 꽉 틀어쥐고 제 바지춤을 내리려는 발터의 손목을 저지하자 발터의 목덜미에 굵은 핏줄이 섰다.

    “억지로 넣어도 되나?”

    “당연히 안 되지.”

    “그럼 넣게 해 줘.”

    발터가 뜨거운 눈으로 그녀를 보며 애원하는 표정이 보기 좋았다. 그의 성기가 쿡쿡 찌르고 있는 혜미의 사타구니도 움찔거리며 더 큰 자극을 원하고 있기는 마찬가지였다.

    “제발.”

    “하아…. 아, 알았어…. 그럼 조금만….”

    그녀가 손을 아래로 내려 발터의 허리춤을 더듬거리는 순간이었다.

    “두 분, 바쁘신데 방해해서 몹시 죄송한데요.”

    갑자기 들려오는 카랑카랑한 아일라의 목소리에 혜미의 고개가 휙 돌아갔다.

    젠장. 망했다. 발터의 허리끈을 풀던 손이 부끄러워 아래로 떨어졌다.

    “무슨 일이지?”

    얼굴이 시뻘게져 그 자리에 석상처럼 얼어붙은 혜미를 대신해 발터가 낮게 입을 열었다. 그의 구릿빛 피부 역시 열이 올라 짙은 건 마찬가지였지만, 이 상황이 부끄러워 숨고만 싶은 혜미와는 달리 그는 이 상황을 방해받은 것에 대한 불만이 더욱 컸다.

    “세드릭 님이 회의 시간이라고 두 분 다 지금 당장 성으로 돌아오라고 하셨어요.”

    “작전 참모 혼자서는 회의 진행이 안 되나?”

    발터의 목소리에는 다분히 짜증이 섞여 있었지만 아일라는 굴하지 않았다.

    “가주와 주군이 없는 상태에서 무슨 회의를 하냐고도 전하라 하셨습니다.”

    못 볼 꼴을 봤다는 표정을 숨기지 않으며 아일라가 말을 후루룩 내뱉었다.

    “저는 말을 전했으니 그럼 이만.”

    그녀는 할 말만 마치고 휙 몸을 돌려 사라졌다. 혜미는 민망함을 감추며 애써 그의 몸에서 자신을 떼어 냈다.

    “가… 가자, 이만.”

    “…녀석은 갑자기 회의 시간을 왜 바꾸는 거지?”

    낮게 중얼거리는 발터의 콧잔등도 슬며시 붉어져 있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혜미가 팔꿈치로 그를 툭, 건드렸다.

    “발터.”

    몸을 툭, 털며 발터가 아직도 열기가 남은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오랜만에, 할까?”

    “하자.”

    “내가 뭘 하자고 할 줄 알고?”

    “뭐든 내 흥분을 가라앉힐 수 있는 무언가겠지.”

    그가 부끄럽지도 않은 얼굴로 번쩍 들린 그의 바지를 향해 시선을 내렸다 들었다.

    “이 꼴로 성에 돌아가면 웃음거리가 될 게 뻔하지 않겠어?”

    “아, 알았어. 그럼 시작한다…! 어, 어!”

    혜미가 말을 끝내기도 전에 발터가 커다란 소리를 내지르며 언덕 아래를 달려가기 시작했다.

    “야, 발터! 그거 반칙이잖아!!”

    “왜! 이길 자신이 없어?”

    “웃기시네!”

    혜미가 목소리를 높이며 빠르게 그의 뒤를 달렸다. 그동안 세드릭의 지옥 훈련을 겪으며 그녀가 깨달은 것이 있다면, 체력이나 전투 기술에 있어 자신은 결코 약하지 않다는 사실이었다.

    “하아…! 하아…!”

    “너무 느려서 어깨에 메고 가야겠다, 너.”

    갑자기 방향을 바꿔 달려오는 발터의 모습을 보며 혜미가 더욱 빨리 두 다리를 움직여 달아났다.

    사방에서 달콤한 꽃향기가 퍼지는 봄날이었다. 혜미는 이 계절이 세르노티에서 그녀가 맞이하는 마지막 계절이 되리라는 것을 직감했다.

    ***

    “요 며칠 새 날이 급속도로 풀렸다. 지금쯤이면 트리바 산맥의 눈도 다 녹았을 거야.”

    세드릭이 진지한 얼굴로 기사들을 모두 소집한 용건은 예상대로였다.

    “이제 움직일 때가 된 것 같다.”

    그들이 이대로 세르노티에 계속 머물러 있을 수는 없었다. 카플란과의 전쟁에서 승리함으로써 12년간 모습을 감추었던 세르노티 가문이 세상에 드러난 탓이었다.

    크리스티앙의 최측근이었던 카플란의 말로가 세간에 오르락거리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이제는 전설로만 남아 버린 ‘암살단’의 존재를 믿는 사람들은 많지 않았지만 그들의 존재가 알려진 이상 숨어서 지내는 것은 불가능했다. 싫건 좋건 결정을 내려야 할 시간이었다.

    “어떻게 생각해, 이든?”

    혜미가 길게 숨을 한 번 내쉰 후, 고개를 끄덕였다.

    “응. 떠나야 한다고 생각해.”

    결정을 내려야 할 사람이 그녀라는 것은 이제 잘 알고 있었다. 그녀를 바라보는 기사들의 눈에 조용한 긴장감과 흥분이 동시에 어렸다. 이든이 마음을 먹었다는 사실은 그녀가 크리스티앙과 맞붙어 빼앗겼던 황위를 되찾는 것을 의미했다.

    “계획은?”

    세드릭이 건조한 말투로 그녀를 향해 물었다. 혜미는 그동안 발터와 함께 생각해 왔던 계획을 천천히 읊기 시작했다.

    “우리가 지금 당장 수도인 아메티스로 가는 건 무리겠지. 세르노티에 있는 기사들을 다 끌고 간다고 해도 크리스티앙의 친위대를 대적하기는 현실적으로 힘이 들 테니까.”

    기사들이 진지한 표정으로 그녀의 말을 경청했다.

    “우리 영지와 가장 가까이에 있는 하르트만에서도 최대로 끌어들일 수 있는 병력은 채 500명이 되지 않는다고 들었어.”

    혜미는 마른침을 삼키며 최대한 차분하게 자신의 의견을 전달하려 애를 썼다. 쉽지 않은 계획이라는 것은 알고 있었다. 이제껏 조건 없이 그녀를 믿고 따라 주던 이들을 설득하는 것이 그녀의 첫 번째 관문이었다.

    “그럼 어떡하지…?”

    “크리스티앙의 친위대는 황궁 내에만 2천이 넘는다던데.”

    예상했던 대로 기사들의 얼굴에 염려하는 표정이 서렸다. 혜미는 마른침을 한 번 삼킨 후 떨리는 입술을 열었다.

    “내 생각엔, 자일룬으로 가면 어떨까 해.”

    순간 세드릭을 포함한 모든 기사들의 시선이 그녀에게로 동시에 꽂혔다.

    자일룬.

    크리스티앙의 영토 확장으로 엄청나게 커진 제국의 맨 끝 동쪽에 있는 곳이었다. 약탈을 일삼는 말라쿤족을 막아내며, 크리스티앙의 지시에 따라 제트성을 탈환하려고 하는 지휘관 리비에르의 군대가 있는 곳이기도 했다.

    “설마… 이든. 리비에르에게… 손을 내밀어 보려는 거야?”

    누군가 목소리를 높이자 공간에서 놀란 시선이 이리저리 엇갈렸다. 입 안이 바싹 마르는 걸 느끼며 조용히 숨을 들이쉬자 테이블 아래에서 발터가 그녀의 손을 꽉 잡았다. 긴장에 잠기려는 목을 가다듬던 혜미가 고개를 끄덕였다.

    “응. 그러려고 해.”

    지난 7년 동안 각종 전쟁에 참여한 리비에르는 원래 평범한 양치기 농노의 딸이었다. 전쟁에서 승리를 거듭한 공으로 3년 전에는 크리스티앙에게 백작 작위까지 받았다.

    그녀를 따르는 군대는 점점 늘어 갔고 치르는 전투마다 압승이 이어졌다. 현재 클라웨 제국 내에서 시쳇말로 가장 핫한 기사라고 한다면 모두들 지젤 리비에르 장군을 꼽을 정도였다.

    그리고 그녀는 혜미가 지금 현재, 가장 자신의 편으로 만들고 싶은 상대이기도 했다.

    “하지만 리비에르는 지금은 동쪽을 정찰하느라 꼼짝도 못 하고 있지 않아…? 게다가 그녀의 군대 중 절반은 수도에 묶여 있다고 들었는데.”

    누군가 조심스럽게 질문하자 발터가 낮은 목소리로 설명을 보탰다.

    “그녀가 수도로 돌아오는 것을 누구보다 경계하고 있는 건 크리스티앙일 거야. 그래서 그녀에게 가장 골치 아픈 지역을 맡겼을 테고. 군대도 반으로 갈라 놓았겠지.”

    승전보를 울린 군대가 수도에 입성하면 시민들이 환대하는 것은 당연했다. 크리스티앙이 염려하는 것은 이미 높이 올라간 리비에르의 인기가 더욱 하늘을 치솟는 것일 테다. 혜미가 그녀를 선택한 것은 그 때문이다.

    “리비에르가 내게 힘을 보태 준다면 크리스티앙과의 싸움에서 이길 가능성이 늘어날 뿐 아니라 민심도 잡을 수 있다고 생각해.”

    “아, 맞네!”

    레나가 손뼉을 치며 눈을 반짝였다.

    “리비에르가 처음 출정하면서 했던 말, 다들 알고 있지? 꿈에서 누군가가 그녀에게 제국을 위해서 충성하라고 신탁을 내렸다고 한 거잖아.”

    음유시인의 노래를 통해 제국 전체에 회자되었던 리비에르의 출사표였다. 혜미가 반드시 그녀를 만나야겠다고 결심한 이유이기도 했다. 지나치듯 들은 리비에르의 이야기는 혜미가 알고 있는 역사적 인물과 닮아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리비에르가 역사책 속에 실재했던 인물일 리는 절대 없었다. 하지만 왠지 이제껏 자신이 느꼈던 크리스티앙이라면 그녀를 곱게 살려 두지 않을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만약 리비에르가 이든의 편에 선다면 완벽한 당위성을 가질 것도 같고 말이야. 이든이 클라웨의 황제가 될 운명이라는 거.”

    “…에이. 그건 그냥 지어낸 말 아닐까? 멋있어 보이려고?”

    “아씨, 뭐가 됐든. 일단 리비에르는 강하잖아. 적으로 두는 것보다 일찍이 우리 편으로 포섭하는 편이 낫다구.”

    주르륵 모여 앉은 기사들이 작게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클라웨 제국에서 현재 가장 많은 병력을 가지고 있는 이는 북쪽에서 해안을 지키는 대장군, 호아킴으로 크리스티앙의 어미였던 태후의 최측근이었다.

    하지만 전쟁을 거듭하며 전쟁 포로를 자신의 군대로 삼아 온 리비에르의 병력 역시 만만치가 않았다.

    “자일룬으로 끌고 간 리비에르의 군대만 해도 지금 거의 3천에 육박하니까, 리비에르가 우리에게 힘을 보탠다면 크리스티앙의 황궁 근위병과 맞설 수 있는 숫자긴 하다.”

    빈센트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던 얀이 뾰족한 턱을 손으로 문질렀다.

    “그럼 그녀를 어떻게 설득하지…? 처음부터 까놓고 말하기엔 너무 위험 부담이 크지 않아? 리비에르가 정말로 현 황제 크리스티앙에 대한 충심이 너무 강하다면, 이든이 그 말을 꺼내자마자 칼을 뽑을 수도 있어.”

    반역자의 처단은 주군을 모시는 신하의 기본 도리이기 때문이다. 크리스티앙의 입장에서 봤을 때 황위를 찾으려는 이든의 행위는 반역이나 다름없었다.

    “응. 나도 그렇게 생각했어. 그래서 말인데….”

    혜미가 떨리는 목소리를 애써 가다듬으며 소리 없이 심호흡을 했다.

    “리비에르가 현재 자일룬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이유는 일단… 그 말라쿤족 때문이잖아.”

    클라웨 제국의 동쪽 끝, 국경지대 자일룬은 늘 범죄의 온상이었다. 크리스티앙마저 정복을 유예시킨 동부에는 야만족이라 불리는 말라쿤의 왕국이 있었다. 말라쿤족은 틈만 나면 국경지대인 자일룬으로 쳐들어와 식량을 약탈하고 부녀자들을 강간하기가 일쑤였다.

    리비에르가 동부로 가게 된 계기는 말라쿤의 왕이 자일룬에 파견된 총독을 죽이고 제트성을 함락시켰기 때문이다.

    말라쿤의 왕인 리가스는 식인을 즐긴다는 소문이 돌 정도로 잔인한 이로 유명했다. 실제로 총독의 최후가 입에 담지 못할 정도로 잔인했다는 사실은 자일룬을 퍼져 수도까지 퍼져 나갔고, 그 결과 크리스티앙은 현재 제국에서 가장 뛰어난 기사로 여겨지는 리비에르에게 군대의 반을 끌고 동쪽에 주둔하라는 명을 내린 것이었다. 제트성을 탈환하기 전까지 그녀는 동쪽에서 꼼짝할 수가 없는 운명이었다.

    “우리가, 자일룬으로 가서 그녀를 도와주면 어떨까 해.”

    기사들 사이에 침묵이 흘렀다. 혜미가 잠기려는 목을 가다듬으며 애써 말을 이었다.

    “…얼굴 한번 본 적 없는 상대가 갑자기 나타나서, 자기가 진짜 황제랍시고 충성할 걸 요구하는 것보다… 그쪽이 더 나을 거라고 생각했거든.”

    마른침을 꿀꺽 삼키는 소리가 크게 들릴 정도로 고요한 공간. 누군가가 작게 중얼거리듯 내뱉었다.

    “그럼… 리비에르를 돕는다는 말은, 우리도 말라쿤족과… 싸워야 한다는 소리인가…?”

    야만적이기가 이루 말할 데가 없어 크리스티앙마저 동진을 유예하게 만든 족속들.

    깔끔하게 목이 잘려 죽는 것은 차라리 나았다. 인간의 살점을 씹어 먹는다는 괴물 같은 상대와 싸우기를 달가워하는 기사들이 없는 것은 당연한 말이었다.

    “물론, 될지도 안 될지도 모르고… 위험한 작전에 쉽게 따라나설 수 없다고 해도 난 이해해. 진짜. 빈말이 아니고 진심이야.”

    혜미가 기사들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생각만 해도 손에 땀이 잡히고 등골이 서늘해지는 것은 그녀 역시 마찬가지였다. 해가 갈수록 점점 나빠지는 자일룬의 상황과 인육을 먹는다는 말라쿤족의 이야기를 들었던 날 밤, 그녀는 악몽을 꾸기까지 했다.

    “세르노티에 남고 싶은 사람이 있다면 당연히 그래야 하고.”

    “…남다니. 이든이 지금 뭔 소리 하는 거야?”

    기사들이 그녀를 보며 무슨 말을 하냐는 표정으로 인상을 찌푸렸다.

    “말라쿤은 말라쿤이고 이든은 이든이지.”

    “어… 어?”

    혜미가 작게 되묻자 레나가 그녀를 향해 양 주먹을 꽉 쥐어 보이며 사슴 같은 눈동자를 예쁘게 휘었다.

    “괴물 같은 말라쿤과 대치하고 있는 리비에르가 대단한 건 사실이지만, 그녀도 할 수 있는 걸 우리가 못 할 리가 없잖아?”

    “그거 맞다.”

    빈센트가 구레나룻을 따라 짙게 난 수염을 긁적이며 그녀의 곁에서 조용히 수긍했다.

    “여기서 이든 따라서 안 갈 사람 있어? 난 무조건 콜이야.”

    얀이 테이블을 탁, 내려치며 신난 표정으로 눈을 빛냈다. 붉은 기가 도는 부드러운 고수머리가 경쾌하게 흔들렸다.

    “나도! 이후에 역사서에 이름이 적히게 될 절호의 찬스인데, 이걸 어떻게 빠져?”

    기사들이 여기저기서 목소리를 높이기 시작했다.

    “와. 리비에르 장군, 노래 들어 보니까 겁나 예쁘다던데. 직접 본다고 생각하니까 벌써 좀 두근거린다.”

    “너같이 고추에 솜털이 부숭부숭한 애송이를 리비에르가 과연 상대해 주려나?”

    “야 이 새끼야, 네가 내 거 봤어!”

    “그럼 여기서 까고 보여 주든가.”

    “아우 진짜. 다들 변태 같은 소리 그만 안 할래? 그러니까 너희들이 아직 싱글인 거야, 이 바보들아!”

    레나가 주변 기사들의 등짝을 손바닥으로 퍽, 퍽, 때리자 만담을 이어 가던 기사들이 나 죽는다고 엄살을 피웠다.

    다행이다. 정말.

    혜미의 입술에서 안도의 한숨이 탁 풀렸다. 발터를 바라보자 그가 그것 보라는 듯 옅게 웃으며 왼쪽 눈을 지그시 깜빡였다. 그녀가 누구보다 긴장하고 있음을 가장 잘 아는 사람은 역시나 한 사람뿐이었다.

    “아, 난 오늘부터 짐 싸기 시작해야겠다.”

    “나도!”

    “그런데, 이든. 우리가 자일룬으로 간다는 건, 세상에 나간다는 의미이잖아…?”

    문득 되묻는 레나의 말에 혜미가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레나의 까만 눈동자에 조용한 염려가 스치고 지나갔다.

    “이든의 존재를 모르는 사람이 대부분이라고 해도, 아는 사람 역시 분명 있을 거야. 얼굴을 보지 않았다고 해도 말이지.”

    그녀의 말에도 일리는 있었다. 카플란의 세작 활동으로 인해 ‘세르노티의 기사 이든’이라는 존재를 누군가는 알고 있을 가능성이 컸다. 혜미라고 그 부분을 생각해 보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그래서 말인데.”

    혜미는 잠시 망설이다가 진지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이건 아직 발터에게도 말하지 않은 특급 계획이었다.

    “나, 남장하는 거 어떻게 생각해?”

    웅성거리던 공간에 갑자기 찬물을 끼얹은 듯 침묵이 흘렀다. 다들 허를 찌르는 그녀의 아이디어에 깜짝 놀란 것이 분명했다. 혜미라고 해서 매일 19금 콘텐츠만 본 것은 아니었다.

    “머리만 짧게 손보면 괜찮을 것 같지? 목소리는… 음, 내가 입 열면 실수할 가능성이 많으니까 최대한 말을 줄이면 되고. 안 그래?”

    영화나 드라마에서 너무나 몹시도 자주 나왔던 단골 소재라는 것은 가능성이 있다는 말이 아닐까.

    물론 혜미가 봤던 콘텐츠의 그녀들이 고속 열차를 타고 지나가면서 봐도 남자라고는 절대로 생각되지 않는 외모라는 사실은 접어 두기로 했다. 현실에 꽃미남이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그들이 다 화면 속에 있긴 하지만.

    “난 안 된다고 본다.”

    발터가 그녀의 말을 딱 잘랐다.

    “왜?”

    “말이 안 되잖아.”

    기사들 모두 발터를 보며 말없이 눈짓으로 동의했다. 이든이 변장을 한다니. 그것도 성별을 바꾸어서.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하지만 가주의 입에서 뒤이어 나온 말은 그들을 더욱 뜨악하게 만드는 것이었다

    “이든만큼 아름다운 남자가 세상에 어디 있지?”

    “헉….”

    “게다가 넌 가슴도 너무 크고 예쁘….”

    혜미가 발터의 입을 손으로 틀어막아 간신히 뒷말을 막았다. 발터는 그녀를 보며 인상을 쓰긴 했지만 그녀의 손을 뿌리치지는 않았다.

    혜미는 그에게 제발 입을 다물어 달라고 눈빛으로 애원한 후, 한쪽 눈썹을 들어 올리고 묘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는 세드릭을 향해 어색하게 도움을 청했다.

    “괜찮을 것 같지 않아?”

    “…이든.”

    세드릭이 잿빛 눈썹을 미간에 모으며 멀쩡한 손으로 입가를 가렸다. 그러지 않으면 진지하게 묻는 그녀의 얼굴에다 비웃음을 터뜨리고 말 것 같았다.

    기억을 잃기 전 이든이 골 때리게 굴었던 것은 그리 특별한 일도 아니었다. 하지만 기억을 잃은 후까지 엉뚱한 아이디어로 사람의 말문을 막히게 하는 것은 재주라면 재주였다.

    “번거롭게 뭔 남자인 척을 한다는 거야? 네 성격에 하루도 못가서 들킬 게 뻔한데.”

    “내가 그렇게 발연기일 것 같아? 난 어릴 때 주일 학교에서 연극을 한 적도 있어.”

    호소하듯 자신을 애써 포장하는 혜미를 향해 세드릭이 날카롭게 목소리를 높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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