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에서 세드릭을 처음 만났을 때, 이 세상에 천사가 존재한다면 저런 모습이 아닐까 생각했었다. 그녀를 겁주던 커다란 까마귀를 쏘아 맞히고, 조심스레 걸어와 눈을 마주하던 그의 눈동자를 잊을 수가 없었다.
“아일라, 예쁜 이름이구나.”
줄곧 네 이름이 궁금했다고 다정하게 속삭이던 세드릭의 미소를 잊을 수가 없었다.
“저… 저는….”
아일라가 쥐고 있는 접시가 불안하게 떨렸다. 세드릭의 왼손이 그녀의 접시를 가볍게 들어 쟁반에 놓았다.
그녀도 알았다. 왼손으로도 검을 자유자재로 쓰는 세드릭이 스푼 따위를 쥐지 못할 리가 없다는 사실을. 이것은 도움을 가장해 그녀에게 베푸는 친절이라는 사실을.
그 누구보다도 오랫동안 남몰래 그를 흠모해 왔던 아일라가 그의 성격을 알지 못할 리가 없었다. 심장이 아프게 조여들었다.
그에게는 늘 빚을 지고 있는 느낌이었다. 처음 만남부터 지금까지 늘 그녀에게 다정했던 세드릭에게 더 이상 그 어떤 부담이나 짐을 씌우고 싶지 않았다.
세드릭이 자신에게 가지는 감정 중 가장 무거운 것은 책임감일 것이다. 그녀를 처음 발견해 성으로 데려온 이가 세드릭이었기 때문에 그녀를 각별히 챙기고 돌보았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하아….”
아일라의 입술에서 젖은 한숨이 흘러나왔다. 이제 그만해야 될 때라는 생각이 든 까닭이었다. 자신이 그를 진심으로 생각한다면 불순한 연정을 끝내는 것이야말로 옳은 일이었다. 세드릭의 친절에 보답하는 마지막 방법은 혼자만의 감정을 곱게 접는 것뿐이다.
“저는 제 이름을 버리고 싶었어요….”
세드릭은 아마도 다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를 감히 동경하고 원했던 그녀의 부끄러운 진심을.
“왜지?”
세드릭이 그녀에게 조용히 되물었다. 너무나 차분해서 때로는 차갑게까지 들리는 말투. 하지만 그가 누구보다 곧은 마음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은 아일라가 잘 알았다.
“세드릭 님의 곁에 있기에는 제가 너무 더럽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제가 가장 잘 아니까요…. 그래서… 매일 잠들기 전에 기도했어요. 잠이 들었다 깨면 모든 것을 잊은 채로, 내가 누군지도 기억하지 못하는 채로 눈뜨게 해달라고. 그러면 내게 저주 같았던 시간을 떠안긴 신을 용서하겠다고요.”
아일라가 자조하듯 흐리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하지만 그럴 수가 없다는 걸 알아요. 카트리나 아주머니를 도와서 빨래를 할 때 아주머니가 그랬었거든요. 한 번 물이 든 옷의 얼룩은 절대로 지워지지 않는다고. 그래서 항상 조심해야 한다고.”
“…….”
“세드릭 님이… 늘 세드릭 님인 것처럼. 설사 제 기억이 완전히 없어진다고 해도, 이미 엉망으로 더러워진 저는 변할 수가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어요.”
“날 봐, 아일라.”
세드릭이 그녀를 향해 낮게 속삭였다.
“어서.”
줄곧 그의 시선을 피하던 아일라가 간신히 고개를 들었다. 엉망으로 젖어 든 황금색 속눈썹이 가늘게 떨렸다. 그 속에 담긴 파란 보석 같은 눈동자가 젖어 흔들렸다. 커다란 눈, 작고 오뚝한 코, 여린 입술 모두가 발갛게 달아올라 엉망이었다.
이런 모습을 보여 주고 싶지 않아요.
그는 그녀의 눈빛이 간절히 외치는 바람을 무시하고 그녀를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차분한 잿빛 눈동자가 그녀를 직시했다.
“내 성의 뜻을 알고 있니?”
슈네.
하늘에서 내리는 눈이란 뜻이다. 희고 깨끗한 눈송이. 고결한 세드릭에게 너무나 어울리는 이름이었다.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는 아일라에게 눈을 맞추며 세드릭이 무어라 작게 속삭였다.
아일라가 숨을 멈추었다.
“네…. 네?”
커다란 눈동자가 더욱 커지며 그에게 꽂혔다.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짓는 아일라를 향해 세드릭이 옅게 미소 지었다. 그리고, 다시 한번 같은 말을 내뱉었다.
“너에게 슈네가의 성을 주고 싶다고 했어.”
연한 입술이 꽉 다물려 가늘게 떨렸다. 아일라는 양손으로 입을 가렸다.
“…받아 주겠니?”
입 안의 살을 피가 나도록 깨물어 보아도 터지는 눈물을 참을 수가 없었다.
주르륵.
“왜. 외팔이와 한 가족이 되는 건 싫어?”
“으흐윽…!”
아일라는 결국 큰 소리로 울음을 터뜨리고야 말았다.
“카플란을 쓰러뜨린 후, 네게 말해 주고 싶어서 지금껏 기다렸는데 네가 날 피해서 곤란했거든.”
세드릭이 희게 웃으며 한 손으로 그녀를 다정히 안았다.
“세르노티로 돌아온 걸 환영한다, 아일라 슈네.”
웃으며 속삭이는 세드릭의 목소리는 뺨에 닿았다 스르륵 녹는 눈송이같이 부드러웠다.
***
제국력 179년.
교황청, 수도 아메티스
화려한 촛대에 여러 개의 촛불이 불타오르고 있었지만 깊은 밤의 어둠을 완전히 몰아내기는 불가능했다.
황금성 북쪽, 늘 고요한 교황청의 성전에서 식기가 움직이는 소리가 부지런히 들렸다. 끄트머리가 지그재그로 가늘게 세공되어 날카로운 나이프가 접시 한가운데를 거침없이 가르자 부드러운 고기에서 핏물이 섞인 육즙이 배어났다.
“교황께서는 영 입맛이 없으신가 봅니다.”
크리스티앙이 핏덩이로 보이는 고기 살점을 우아하게 씹어 삼킨 후 입을 열었다. 기다란 테이블 맨 끄트머리에서 그를 독대하고 앉은 베네딕트가 말없이 그를 바라보았다.
“왜, 제국에서 제일가는 요리장의 최고급 요리가 맘에 들지 않으십니까?”
육식을 하지 않는 베네딕트의 눈앞에는 온갖 짐승 요리가 한가득이었다. 그가 식기를 손에 들지 않는 이유는 단지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이 시간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잠을 잘 시간이지요.”
늘 깊은 밤 예고도 없이 그를 찾아오는 크리스티앙이 대단히 우스운 이야기를 들었다는 듯 미간을 좁혔다.
“그런 시각에 깨어 일을 하고 있는 본 황제에 대한 감상은 그 어디에도 찾아볼 수가 없는 발언이십니다.”
뾰족한 나이프 끝이 나뭇잎이 화려하게 수놓아진 접시 끄트머리를 톡, 톡, 아슬아슬하게 두드렸다. 크리스티앙이 입술을 비틀며 그를 노려보았다. 빛을 담지 않은 그의 눈동자는 흡사 살쾡이의 그것처럼 노란색이었다.
“교황의 얼굴만 봐도 위장이 뒤틀려 구토할 것 같은 나도 겨우 이 시간을 참아 내고 있거늘.”
어두운 구석에 숨소리도 없이 앉아 있던 서기관이 움직이던 깃털 펜을 잠시 멈추었다. 표정이 없는 그의 손이 기록을 중지하고 다음에 이어질 말을 기다렸다. 역사서에 쓰인다 해도 아무 상관이 없을 대화를.
“제가 그리 불편하시면 폐하의 앞에 영원히 나타나지 않는 방법도 있습니다.”
“그럴 리가요.”
크리스티앙이 그가 마시고 있는 와인보다 붉은 입술을 씹으며 낮게 웃었다.
“황제를 위해 존재하는 교황청이 제국의 상징이 된 이 시점에서, 내가 어찌, 교황을, 갈기갈기 찢어 그 살점 한 조각조차 찾지 못하게 만들어 버릴 수가 있겠냐는 뜻입니다.”
테이블 중앙에 놓인 화려한 촛대에서 일렁이는 촛불이 교황을 노려보며 미소 짓는 황제의 얼굴에 여러 그림자를 만들었다.
“안 그런가, 하이데거 대공?”
“주군의 부름에 따르는 신하에게 알맞은 때와 장소란 없습니다. 황실을 위해 일생을 바치기로 맹세한 교황청의 주군 역시 황제이십니다.”
에리히의 말을 들은 크리스티앙이 눈썹을 위로 들어 올리며 와인으로 목을 축였다. 달에 한 번씩 교황의 얼굴을 마주해야 하는 것은 그로서도 몹시 달갑지 않은 일이었다.
“제가 도와드릴 일이 있겠습니까.”
베네딕트가 고요한 하늘색 눈으로 크리스티앙을 바라보았다. 크리스티앙은 그의 침잠한 눈빛을 뚫어져라 마주하며 눈을 가늘게 떴다. 그리고 그 안에 숨겨진 본질이 과연 무엇일지를 가늠했다.
“불면에 시달리고 계시다면 제게 치료를 받으시지요.”
“하하.”
크리스티앙이 인상을 찌푸리며 낮게 소리 내어 웃었다. 이번에는 정말로 조금 웃겼다. 자신이 베네딕트에게 손을 내미는 날이 있다면 아마도 그것은 그가 숨이 끊어지기 일보 직전일 것이다. 그나마도 의식이 남아 있다면 곤란할지도 모르겠다.
“나의 불면이 완벽하게 사라질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이 뭔지, 교황께서도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베네딕트가 기다란 테이블을 돌아 자신에게로 다가오는 크리스티앙의 그림자를 고요한 눈길로 응시했다. 그의 바로 곁에 선 크리스티앙이 일그러진 얼굴로 그에게 속삭이듯 내뱉었다.
“교황의 장례 의식을 치르는 그날, 나는 이제껏 살아왔던 것 중 가장 편안히 잠들 수 있을 것 같은 예감이 듭니다만.”
크리스티앙이 쥐고 있던 나이프가 베네딕트의 손등을 거칠게 뚫었다. 베네딕트의 하얀 손등에서 피가 흘러 테이블에 떨어지기가 무섭게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황제의 입술에서 쓴웃음이 흘렀다.
“이 꼴을 보면… 아마도 나는 영원히 잠을 이루지 못할 것 같단 말이지요.”
베네딕트의 은발이 스르륵 그의 얼굴선을 드러내며 어깨 위로 늘어졌다. 고통스럽게 울부짖기를 바라는 크리스티앙의 기대와는 정반대의 무심한 얼굴이 황제를 마주했다.
“제 의지와는 상관없이 가지게 된 능력이라는 걸 황제께서는 누구보다 잘 알고 계십니다. 이제껏 황실을 위해 일생을 바쳤던 대마법사들의 희생을 영민한 황제께서 모르실 리가 없다는 뜻입니다.”
“개소리는 닥치시길. 본 황제는 늙은 교황 따위에게 평가받을 인물이 아닙니다.”
열기를 띤 크리스티앙의 거친 숨소리가 베네딕트의 머리 바로 위에서 들렸다.
“100년 전, 멍청하기 짝이 없는 클라웨 4세가 벌인 일 중 가장 어리석은 일이 뭔지 아십니까?”
선대 황제에 대해 불경한 소리를 입에 담는 크리스티앙은 거침이 없었다. 뾰족한 나이프는 여전히 베네딕트의 손등을 관통해 박힌 채였다.
“불길하다 손가락질받던 마법사 부족을 완전히 불태워 버려 그 씨를 말리는 대신, 교황청이라는 개 같은 집단을 만들어 그곳에 앉힌 것입니다. 악마 같은 종자들을 죽여 없애지는 못할망정 그 손에 도리어 힘을 쥐여 주다니요…. 빌어먹을.”
그뿐인가. 클라웨 4세는 본인 스스로가 형제를 시해하고 황위를 차지한 주제에 후세에 피의 역사가 이어지면 안 된다는 이유를 들어 대마법사와 황위 계승자를 각인하도록 하는 악법을 만들었다. 여러모로 병신 같기가 그지없다.
“더러운 마법사들이 그때 다 죽어 버렸더라면… 이런 미친 종자들이 대를 거듭해 태어날 일이 없었을 텐데….”
크리스티앙이 손에 힘을 주자 베네딕트의 손등에서 뼈와 힘줄이 비틀리는 소리가 났다.
“그 덕에 교황께서 교황청에서 한 발짝도 나가지 못한 채 이리 수고롭게 사시는 일도 없지 않았겠습니까.”
대마법사의 능력은 신의 축복인 동시에 저주였다. 교황의 자리에 오르면 일평생을 클라웨 제국을 위해 충성하며 살아야 한다. 강제로 주어진 의무를 기쁘게 받아들인 대마법사는 많지 않았다.
결국 마력을 자신에게 쏟아부어 자살하는 비극을 맞이하거나, 황제를 위해 제 힘을 넘어서는 마력을 쓴 후 완전히 기력이 소진되어 죽는 최후를 보았다. 그렇지 않다면 황제의 죽음과 동시에 산 채로 함께 수장되거나.
“본 황제가 만약 대마법사였다면 악마와 손을 잡아서라도 이미 이곳을 탈출하고도 남았을 것 같은데 말이죠.”
크리스티앙의 호박색 동공이 길게 가늘어져 그를 노려보았다.
‘원하는 게 뭐야.’
베네딕트는 그의 눈빛에 속을 알 수 없는 시선으로 침묵할 뿐이었다.
크리스티앙은 할 수만 있다면 그의 사지를 찢어발겨서라도 교황의 본심을 듣고 싶었다. 카플란이 처리했음이 분명한 황녀에게 도움을 준 것은 그의 눈앞에 있는 빌어먹을 대마법사가 분명했다. 황녀의 출생 직후 그녀와 제 피로 만든 돌을 나눠 가졌으니 교황이 그녀에게 집착한다고 해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그렇다면 왜, 지금 당장 황녀에게 달려가지 않는 것인가.’
다섯 살 때 이미 죽은 줄 알았던 에데르트가 멀쩡히 살아 있다는 사실은 하이데거 대공이 카플란에 보낸 세작을 통해 전해 들었다. 카플란은 물론 그 길로 황궁에 송환되었다.
크리스티앙은 카플란에게 직접적으로 책임을 묻는 대신 자신을 실망시키지 말라는 한마디를 건넸다. 그의 성격을 잘 아는 카플란에게 그것은 충분한 위협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약 3년 전, 에데르트를 없애는 데 성공했다는 정보를 전해 들은 것을 마지막으로 크리스티앙의 골칫거리는 사라진 거라고 생각했었다. 교황이 지니고 있는 보석이 환하게 빛을 발하는 것을 보기 전까지는.
“나는 정말이지….”
크리스티앙이 황금색 눈썹을 아래로 늘어뜨리며 작게 웃었다. 분명히 난도질을 해 숨이 끊어진 것을 확인했다던 에데르트를 살려 낼 수 있을 만한 이는 단 한 사람, 베네딕트뿐이었다. 그가 에데르트의 생존을 알고 있다면 그녀의 곁에서 힘을 보태고 크리스티앙의 황위를 빼앗는 데 도움을 주는 게 오히려 당연했다.
그런데 왜. 교황이 대체 왜 이런 굴욕적인 상황을 견디고 있는 건지 그 잘난 입술을 통해 듣고 싶었다.
“교황께서 이 신성한 얼굴로 무슨 생각을 하고 계시는지 도통 모르겠단 말입니다.”
크리스티앙의 나지막한 질문에 베네딕트가 색이 연한 입술을 느리게 열었다.
“수를 읽는 능력이 누구보다 뛰어나신 폐하께서는 잘 알고 계시리라 생각합니다만….”
베네딕트가 무표정한 얼굴로 황제를 마주한 채 잠시 말을 멈추었다. 나이를 가늠할 수 없는, 여자로도 남자로도 보이는 묘한 얼굴을 한 교황이 황제를 보며 눈을 아래로 내리깔았다.
“…제가 원하는 것은 오로지 클라웨 제국의 번영과 평화입니다.”
젊은 황제는 21년 동안 황궁 안에서 다양한 인간 군상들을 만났다. 베네딕트의 연한 하늘색 눈동자에 즐거움이 설핏 스치는 것을 놓칠 수가 없었다. 와인처럼 붉은 입술에서 잔인한 조소가 번졌다.
“…씨팔.”
베네딕트의 손등을 뚫었던 나이프가 거칠게 뽑혀 나가며 공중에서 다시 휘둘러졌다.
서기관은 펜을 잉크 위에 꽂은 후, 조용히 뒤를 돌았다. 매달 반복해서 되풀이되는 황제와 교황의 지리한 싸움을 모두가 자세히 알아야 할 필요는 없었다.
***
“오래간만에 푹 잘 수 있는 느낌이 드는군.”
성으로 돌아온 크리스티앙이 황금색 속눈썹에 튄 피를 손가락으로 슥 훑어 내며 중얼거렸다. 눈엣가시 같은 교황과의 만남을 그가 딱히 거부하지 않는 이유 역시 이것이었다.
교황의 피를 뒤집어쓰면 그날 밤은 숙면을 취할 수 있었다. 아무리 베어 내도 신음 소리 한 번 터뜨리지 않는 유령 같은 이와 대면하는 것은 그로서도 충분히 에너지 소모가 큰일이었다.
“목욕물을 준비시키겠습니다.”
티끌 하나 없는 황제의 피부에 핏방울이 이리저리 튀어 있는 것을 보며 에리히가 작게 고했다. 명령에 대기하고 있던 시녀가 그의 눈치를 본 후 발소리도 내지 않고 자리를 떴다.
“하르트만의 동향은 좀 어떠한가.”
창가에 걸터앉은 크리스티앙이 창틀에 고개를 기대듯 기울인 채, 에리히에게 시선을 맞추었다. 마치 잘 빠진 고양이가 나른하게 휴식을 취하는 것 같은 모습이었지만 그 눈빛은 날카로웠다.
“하르트만에서 특별한 움직임은 없습니다. 황궁 근위대를 시해한 죄로 수도에 불러들여 처형해도 상관은 없을 듯 보입니다.”
에리히의 목소리에 은근한 긴장감이 묻어났다.
석 달 전, 카플란은 세르노티와의 전투에서 완벽하게 패배함으로써 황궁 근위대 500명을 파견한 그의 노력을 헛수고로 만들었다.
그 보고를 들은 황제는 잠시 침묵하다가 기다랗고 섬세한 손으로 얼굴을 가린 채 한참을 발작하듯 웃었다.
“한 명도 빠짐없이 다 죽었다고?”
이윽고 손가락으로 눈물을 훔쳐 내며 물었던 그의 얼굴에는 놀라움과 동시에 즐거움마저 서려 있었다.
“죽지 않고 살아난 소수의 군사도 뿔뿔이 흩어져 달아난 모양입니다.”
“이건 뭐… 능력도 없고, 자존심도 없고… 카플란의 민낯은 개판이었단 소리가 아닌가.”
“…송구합니다.”
고개를 숙이는 에리히의 앞에서 크리스티앙은 차갑게 조소할 뿐이었다. 황제를 위한 목적을 달성하지 못한 카플란의 윗선이 택할 수 있는 선택지는 도망, 아니면 죽음이었다. 살아서 돌아간다고 해도 황제의 관용을 기대하기는 힘들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았을 것이다. 크리스티앙은 3년 전, 이미 카플란에게 무언의 용서를 베푼 적이 있었다.
“하르트만으로 갔던 황궁 근위대는 몇이었지?”
“절반인 250명입니다. 하르트만은 카플란이 전멸하는 것을 눈앞에서 보고 철수했다고 합니다.”
“하르트만에 보내졌던 황궁 근위대가 아메티스로 돌아오기 전, 모두 처리하게. 250명 전부.”
명령을 내리는 크리스티앙의 목소리는 감정이 없이 서늘했다. 황궁 근위대의 사망 이유는 역병으로 기록될 것이다.
“실수 없도록 움직이겠습니다.”
“앞으로 제국 내에서 일어나는 내전은 반역으로 간주하는 특별법을 제정하고 황궁 근위대 파견을 허락한 원로원 둘을 숙청하도록.”
황궁 근위대 파견을 지시한 원로원의 수장은 하이데거, 본인이었다. 이번 기회를 통해 세르노티를 완벽하게 쓸어 버려 황제의 염려를 덜고자 했기 때문이다.
긴장에 입술을 깨물며 차마 대답을 하지 못하는 에리히를 향해 크리스티앙이 피식 웃었다.
“처형 집행은 대공이 직접 하면 되겠군. 자네 눈에 가장 맘에 들지 않는 둘을 뽑아 목을 베어도 내게는 상관이 없네.”
크리스티앙은 카플란의 작전 실패가 누구의 탓도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암살단 전쟁에서 패한 오래된 가문의 전멸 역시 황제의 관심 밖이었다. 오히려 배가 불러 엉덩이가 무거워지고, 아는 게 많아 입이 가벼워진 늙은 여우들이 몽땅 죽어 한편으로는 후련하기까지 했다.
문제는 다른 곳에 있었다.
“즉시 이행을 원하십니까? 허락하신다면 병력을 풀어 하르트만의 가주 클라라 하르트만을 바로 황궁으로 압송하겠습니다.”
에리히가 진지한 얼굴로 황제에게 고했지만 크리스티앙은 말이 없었다. 화려하게 조각된 파이프를 입에 물자 연초가 작은 소리를 내며 타들어 갔다. 살짝 벌어진 붉은 입술에서 연기가 둥그렇게 퍼져 나갔다.
“아니. 조금 두고 보지.”
크리스티앙이 천천히 입맛을 다셨다. 선홍빛 혀가 안쪽으로 갈수록 색이 짙어지는 아랫입술을 느리게 핥았다.
“하르트만의 전대 가주의 죽음이 꽤나 재미있었지, 아마?”
자신이 보위하던 황제를 암살했다는 의심을 견디지 못하고 자진한 부하였다. 뛰어난 검술로 유명했던 그의 부인은 현실 감각 역시 보통 이상이었다. 원로원의 동정표를 이용해 처형을 간신히 면하고, 재야로 물러나 가문을 돌보며 주인이 바뀐 제국을 위한 전쟁에도 여럿 참여했다.
카플란이 하르트만에게 손을 벌린 이유도 아마 그 때문일 것이다. 크리스티앙은 10년이 넘는 시간 동안 잠잠했던 하르트만 부인이 지금 어떠한 표정을 짓고 있을지를 생각하며 연기를 깊게 들이마셨다.
“남편에게 지지 않는 극적인 죽음을 부인에게도 선사해 주는 편이 공평하잖아.”
“예.”
에리히가 고개를 숙였다.
“동쪽의 상황은 어떠하지?”
“여전히 고전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말라쿤족의 야만적인 기세를 잡는 것은 그 아무리 리비에르라 하더라도 쉬운 일이 아닐 테니까요.”
크리스티앙이 뿌옇게 피어나는 연기 틈에서 낮게 웃었다.
“험준한 동쪽 목장에서 양 떼나 몰던 노예의 여식이 그리도 강한 기사였을 줄은 그 누가 알았겠어. 국민들 사이에서 용맹한 리비에르에 대한 칭송이 끊이지 않는 것도 당연한 일이야.”
크리스티앙이 천천히 눈을 깜빡이며 혼잣말하듯 중얼거렸다.
“그녀가 돌아온다면 수도에서 개선문을 세우고 성대한 환영식이라도 거행해야 할 것 같은 기분이군.”
에리히는 그의 말속에 숨은 뜻을 단박에 눈치챘다.
“폐하, 그리 훌륭한 장군이야말로 제국의 마지막 관문인 동쪽의 토벌을 위해 그곳에 머무르는 것이 당연하다고 사료됩니다.”
쉽게 말하자면 지젤 리비에르는 현재 그들이 골치를 썩고 있는 동쪽 토벌을 위해 이용하기 좋은 수단일 뿐이란 소리였다.
전쟁에서 공을 세운 노예 출신 병사에게 작위를 내리는 파격적인 인사를 행한 것은 크리스티앙 본인이었다. 리비에르는 클라웨 제국을 위해 충성을 다하는 이였다. 가장 험난한 동쪽 토벌에 보내졌음에도 불평이 없었다.
아직까지는.
“국가를 위해 수고하고 있는 리비에르 경 역시도 그리 생각하길 바라야지.”
서기관의 손이 쉼 없이 움직이는 것을 바라보며 크리스티앙이 다시 한번 길게 연기를 내뿜었다.
“…영원히. 천한 노예 주제에 장군의 위치까지 올라갈 수 있었던 것이 누구 덕분인지 기억하며, 제 처지에 감사하며 말일세.”
머릿속에 아지랑이가 피어오르며 몸이 묵직하게 녹아드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이걸로 정오까지는 잠에 빠질 수 있을지도 몰랐다.
“폐하.”
“말하게.”
크리스티앙이 나른하게 눈을 깜빡였다. 기다란 황금색 속눈썹이 창백한 피부에 그늘을 드리웠다.
“세르노티는 어떻게 할 생각이십니까…?”
“경은 내게 몹시도 당연한 걸 묻고 있군.”
크리스티앙이 섬세하게 깎인 파이프의 물부리를 이로 지그시 물었다. 뾰족한 송곳니가 붉은 입술 새로 드러났다.
“반역을 꿈꾼다면 처형할 것이고, 제국에 충성한다면 상을 내려야겠지.”
창틀에서 아래로 내려온 후, 크리스티앙이 문을 향해 터벅터벅 걸었다. 그가 가까이 가자 문이 자동으로 활짝 열렸다.
“오랜 시간 모습을 감추었던 세르노티가 실제로 존재한다면, 그 존재 의미를 보여 줘야 할 때이지 않겠나.”
크리스티앙은 문에서 문으로 이어지는 수십 개의 방들을 통과하며 걸었다.
“세르노티는 매의 수호자, 혹은 황제의 그림자로 불린다지…?”
그가 다가설 때마다 모두 활짝 열리는 문 뒤에서 바닥에 닿도록 고개를 숙인 이들의 뒤통수가 보였다.
“이 땅에 황제가 나 말고 또 존재하던가?”
그들이 복종하는 이는 그 누구도 아닌 자신이었다. 크리스티앙은 이 자리에 오르기까지 무수한 불면의 밤을 거듭했다. 수많은 사람들의 목을 베었다.
“내게 그림자 따위는 어울리지 않는다는 게 문제지만.”
크리스티앙이 초점이 흐려진 눈으로 나직하게 중얼거리며 마지막 문을 통과했다. 오전의 햇살이 쏟아지는 침실이 나타났다. 그는 침실과 연결된 공간을 또 한 번 지나쳤다. 벨벳 커튼이 열리자 대기하고 있던 시녀들이 그에게 다가와 피가 이리저리 튄 황제의 의복을 조심스레 벗겨 냈다.
크리스티앙의 하얀 나체가 눈부시게 빛이 났다. 그는 상아로 된 커다란 욕조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찰랑.
체온보다 조금 더 따끈하게 데워진 물이 꽃향기를 내며 찰랑거렸다. 크리스티앙이 머리를 뒤로 기대자 천장에 뚫린 유리를 통해 태양이 환하게 그의 얼굴을 비추었다.
‘친애하는 나의 누이여.’
태어날 때부터 모든 운을 다 가지고 태어난 첫 번째 황녀.
단 한 번도 직접 본 적이 없지만 그 이름만으로 자신에게 패배감을 선사하는 존재.
단 한 번도 누이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음에도 자신이 그 사실을 부정하는 것조차 불가능하게 만드는 골칫덩어리.
어둠이 깔린 시각에는 도저히 잠을 이룰 수가 없는 황제의 얼굴이 따끈한 물 아래로 서서히 잠겼다.
‘누이께서 정녕 내 손에 직접 죽기를 원하는 거라면… 내가 기꺼이 그리 해 드리지요.’
몸에 힘이 점점 빠지기 시작했다. 부력을 이기지 못한 몸이 욕조 위로 두둥실 떠올랐다. 크리스티앙의 호박색 눈동자가 아래로 천천히 감겼다.
오래간만에 좋은 꿈을 꿀 수 있을 것 같았다.
***
청명한 하늘에 새가 줄지어 날았다. 추운 겨울을 피해 떠났던 철새들이 돌아오는 계절이었다.
혜미는 봄바람이 불어오는 언덕 위에 벌렁 누워 새들의 움직임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커다란 삼각형으로 날다가 휙, 일제히 방향을 바꾸는 새들의 움직임이 희한했다.
얼어붙은 강에서 그녀의 뒤에 따라붙던 카플란이 아마 저런 모습이었을까, 잠시 떠올리다가 고개를 흔들며 생각을 멈추었다. 이렇게 평화로운 봄날, 죽어라 싸우던 일을 생각하고 싶지는 않았다.
“와. 하늘 한 번 진짜 격하게 넓다.”
그 경계를 알 수 없을 정도로 끝이 없는 하늘에 몽글몽글한 구름이 엄청난 크기를 자랑하고 있었다. 입까지 살짝 벌리고 멍하니 하늘만 바라보던 혜미의 얼굴 위로 커다란 그림자가 졌다. 나부끼는 새하얀 구름 대신 구릿빛 통나무 같은 남자의 얼굴이 시야를 가렸다.
“뭐 하고 있어?”
“취미 생활 중.”
“…응?”
“내 취미가 누워서 아무것도 안 하고 멍 때리는 거거든.”
발터가 피식 웃으며 그녀의 옆에 자리하고 앉았다. 녹색 풀잎이 파릇파릇하게 싹을 틔우는 봄이었다. 커다란 나무 잎사귀 사이로 산들바람이 기분 좋은 소리를 내며 지나갔다.
“하긴. 이러고 있기 딱 좋은 날씨긴 하네.”
“응. 모처럼 훈련 없으니까 진짜 살 것 같아.”
카플란과 일생일대의 결투를 벌인 후, 벌써 넉 달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꽁꽁 얼어붙었던 베른강은 이제 완전히 녹았고 사방이 초록으로 뒤덮이는 봄이 찾아왔다. 졸졸 경쾌한 소리를 내며 흐르는 샘 주변에는 겨우내 웅크리며 버틴 생명들이 앞다투어 싹을 틔워 내고 있었다.
“이러다가 진짜 특전사 될 것 같은 기분이라니까.”
혜미가 나지막하게 투덜거렸다. 상처가 아물기도 전에 자리를 박차고 일어난 세드릭 덕분에 지난 시간 동안 훈련은 쉬지 않고 이어졌다.
“한국에 돌아가면 미친 척하고 철인 삼종 경기 같은 거 한 번 출전해 볼까 봐.”
“그게 뭐지?”
“그런 거 있어. 엄청나게 몸을 혹사시키면서 즐거워하는 좀 이상한 스포츠.”
“…왠지 익숙하게 들리는데. 우리 둘 모두에게 딱 맞는 경기 같다.”
“너나 그렇지 난 아니거든요?”
발끈하는 혜미를 말없이 바라보던 발터가 그녀의 곁에 몸을 눕혀 길게 누웠다. 팔을 세워 머리를 받친 채, 그녀를 바라보는 그의 이마 위로 살랑 바람이 불었다.
헝클어진 앞머리가 짙은 갈색 눈썹 아래로 흔들렸다. 칼로 쓱쓱 마구잡이로 자른 것 같은 머리카락도 그답다는 느낌이다. 바람이 불 때마다 짙은 갈색의 머리칼 사이로 드러나는 눈동자가 깜빡이지도 않고 그녀를 빤히 바라보았다. 몸으로 하는 싸움이라면 다 잘하는 것 같은 발터는 아마 눈싸움도 잘할 게 분명했다.
“…왜? 뭐?”
어색해서 괜히 시비를 걸듯 입을 떼자 발터가 태연하게 되물었다.
“내가 뭘.”
“자꾸 왜 그렇게 보냐고.”
“내가 어떻게 보고 있는데?”
사람을 아주 싹싹 벗겨 먹을 것처럼 보고 있다고 전하는 대신, 혜미가 말을 조금 순화했다.
“완전 배고픈 사람처럼 보고 있거든.”
“내가?”
꼬르륵.
민망한 소음은 왜 하필 이럴 때 터지는 걸까. 배가 고픈 건 발터가 아니라 아마도 그녀 자신인 모양이었다. 발터가 혜미를 보며 가볍게 웃더니 몸을 일으켜 들고 왔던 주머니의 끈을 풀었다.
“먹어.”
“어, 이거 뭐야?”
천에 싸인 것은 길쭉한 빵에 소시지를 끼운 핫도그 모양이었다.
“카트리나 아주머니가 줬어. 아줌마는 네가 점심을 안 먹으면 하늘이 무너지는 줄 알아.”
“하하, 진짜?”
“응. 요즘 하는 행동만 봐서는 어깨에 힘이 잔뜩 들어가서 벌써 본인이 황궁의 요리장이라도 된 기세다.”
칠면조 고기에 후추와 각종 허브를 넣어 만든 커다란 소시지와 빵을 한입 베어 문 혜미의 두 눈이 감동에 반짝거렸다. 맙소사. 황궁의 음식이 얼마나 맛 좋을지 모르겠지만 이걸 안 먹었다면 정말 후회했을 것이다.
혜미가 부지런히 입을 오물거리다 그를 보며 물었다.
“넌 안 먹어?”
“이따가.”
발터는 열심히 음식을 씹어 삼키는 그녀를 구경하듯 빤히 바라보고만 있었다. 동물원 원숭이가 된 것 같은 느낌에 혜미가 그를 힐끗 보며 물었다.
“왜 자꾸 안 먹고 구경만 해?”
“한눈팔면 갑자기 네가 사라지기라도 할까 봐. 불안해서.”
“쿨럭…!”
그녀가 돌아간다는 말을 할 때마다 그의 심장이 돌덩이를 매단 듯 무겁게 아래로 가라앉는다는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혜미는 불편한 표정으로 기침을 간신히 참아 낼 뿐이었다.
발터가 건네준 주스를 들이켠 후, 혜미가 조금 붉어진 얼굴로 그를 보았다.
“진짜 사람 밥도 못 먹게 한다, 너.”
“그래서 아무 말도 안 하고 보기만 한 건데.”
그렇게 쳐다보는 것도 엄청 신경 쓰인다는 말을 차마 할 수가 없었다. 입 다물고 다시 음식에 집중하는 그녀의 곁에서 발터가 제 몫의 빵을 꺼내다 문득 생각난 듯 물었다.
“근데 이든.”
“응?”
“대체 칼 손잡이는 왜 틈만 나면 계속 문지르고 있는 거지?”
발터가 그동안 궁금했던 의문을 토로하자 혜미가 잠시 망설이다가 그를 보았다. 그리고 멍 때리는 와중에도 한 손에 꽉 쥐고 있던 검을 슬쩍 들어 보이며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그때 강이 갑자기 녹았던 거… 얘랑 관계있다고 생각하지 너도?”
“아마도.”
발터가 낮게 동의했다. 베른강이 어는 시기는 1년에 열흘. 강을 꽁꽁 얼리는 한파가 끝나면 한 달에 걸쳐 서서히 녹아내리는 것이 보통이었다. 얼어붙은 강이 그렇게 한순간에 폭발하듯 갈라진 것은 직접 눈으로 보고도 믿기 힘든 상황이었다.
“교황이 대마법사니까 그 사람의 피로 만든 보석이라면….”
혜미가 신중하고 진지한 얼굴로 그를 향해 입을 열었다.
“이걸 문지르면 안에서 베네딕트가 확 튀어나올 수도 있지 않을까 하고.”
마치 램프의 요정 지니처럼.
발터가 잠시 침묵한 채 그녀를 바라보다 말없이 고개를 돌렸다. 남은 빵을 통째로 입 안에 구겨 넣어 두 입 만에 씹어 끝낸 후, 마침내 조용히 입을 열었다.
“내 생각엔 그것보다 대마법사의 보석에 그의 마력 일부가 깃들어 있다고 보는 편이 더 가능성 높을 것 같다.”
혜미가 그를 향해 대뜸 목소리를 키웠다.
“그래서 나도 계속 노력해 봤어. 교황이 치유 마법사라고 하길래 혹시나 이게 효과가 있을까 싶어서 별별 노력을 다해 봤거든. 근데….”
세드릭의 옆에 몰래 다가가 상처에 칼을 문지르다가 된통 망신만 당했다.
“지금 뭐 하는 거지? 네 칼을 내 옷으로 광내는 중인 건가 설마?”
“아, 아니. 세드릭. 난 그냥 네 상처를 치료할 수 있을까 해서….”
“이든, 신하된 도리로 진지하게 충언하는데 제발 미친 모습은 너 혼자 있을 때만 보여라.”
“…아무 일도 안 일어나더라고.”
“마법을 자유자재로 쓸 수 있는 이들은 마법사뿐이야. 그게 된다면 넌 마법사겠지.”
발터가 풀이 죽은 그녀를 위로하듯 중얼거렸다. 혜미의 검 손잡이에 박힌 교황의 보석이 마력을 발휘했다는 데에는 그 역시 동의하는 바였다. 원래부터 마법을 달갑지 않아 하는 세드릭은 이상 기후 때문에 갑자기 일어난 현상일 거라고 했지만 베네딕트의 능력을 눈앞에서 직접 본 발터로서는 혜미의 말을 믿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게. 역시, 베네딕트를 만나려면 직접 그를 찾아가는 수밖에 없나 봐.”
혜미가 길게 숨을 내쉬며 혼잣말하듯 중얼거렸다.
“여기 계속 있으면 더 떠나기가 힘들어질 것 같기도 하고.”
세르노티에서 가장 높은 언덕 위에 앉아 있으니 강 건너 평원이 한눈에 펼쳐졌다. 풍차 아래, 지붕을 붉은 흙으로 바른 집을 보니 혜미의 얼굴에 미소가 절로 지어졌다. 얼굴에 주근깨가 귀엽던 소년과 그와 꼭 닮은 동생 토미가 생각난 탓이었다. 성을 떠나 집으로 돌아간 그들은 아마 지금쯤 열심히 토끼에게 줄 풀을 뜯고 있지 않을까.
“…네가 베네딕트를 만나러 가는 이유는… 역시 돌아가고 싶기 때문인가?”
잠시 망설이던 발터가 그녀를 보며 낮게 물었다. 혜미가 무릎을 세워 끌어안은 채, 그 위에 턱을 대고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음. 이유가 좀 늘어나긴 했어.”
집으로 돌아가고 싶은 건 여전히 사실이지만 그 전에 해결해야 할 문제들이 생겼다.
“베네딕트를 만나면 일단 다친 세드릭을 고쳐 달라고 부탁이라도 해 보려고.”
세드릭은 질색을 하겠지만 그것만은 반드시 이야기해 볼 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