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드릭이 눈을 가늘게 뜨는가 싶더니 입술에 손을 가져다 댔다. 혜미는 다리 아래에 몸을 숨기고 그의 시선이 박힌 곳을 올려다보았다.
하르트만의 검은 방패 인장이 뚜렷하게 박힌 커다란 장막이 눈앞에 보였다. 다른 기사들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크기. 가주의 숙소는 강둑 바로 앞에 위치하고 있었다.
시작이 좋았다.
혜미가 다리 아래에 몸을 숨긴 채 그를 보자 세드릭이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셋.
둘.
하나.
혜미가 들고 있던 돌멩이를 휙 던지자 막사 앞에서 보초를 서고 있던 경비병 둘의 고개가 동시에 돌아갔다.
바람처럼 달려간 세드릭이 손으로 급소를 차례로 짚는 순간, 기사 둘이 소리 없이 쓰러졌다. 길이 뚫린 혜미가 숨을 몰아쉬며 달려가 장막을 걷었다.
“죄송합니…!”
그녀는 그 자리에서 얼어붙었다.
“누구신가. 이 늦은 밤 나를 찾아온 이는.”
촛불이 꺼진 막사 안에서, 차분히 가라앉은 조용한 목소리가 코앞에서 들렸다. 혜미가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저, 저는….”
그녀가 움직일 수 없는 까닭은 목에 겨누어진 칼 때문이다. 숨을 쉴 때마다 서늘한 기운이 느껴지는 것 같아 입술이 바짝 말랐다.
어둠에 완벽하게 익숙해진 그녀의 눈동자에 바로 한 발짝 앞에 선 인영이 보였다. 하르트만의 가주, 클라라 부인이었다.
말해야 해.
혜미는 떨리는 입술을 간신히 열어 목소리를 냈다.
“제 이름은 에데르트입니다.”
처음부터 이 말을 하러 이곳까지 온 거였다. 잠시 말이 없던 상대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오래간만에 들어 보는 이름이군요. 다시 듣게 되리라고는 생각지 않았던 이름인데.”
수 초간의 침묵이었지만 온몸이 떨릴 정도의 두려움이었다.
“그렇다면 지금 내 뒤에서 칼을 겨누고 있는 이는 매의 수호자, 세르노티인가요?”
장막을 빙 돌아 입구가 아닌 뒤편에서 클라라를 향해 칼을 겨누고 있는 세드릭의 존재까지 눈치챘다는 뜻이었다.
“세르노티의 기사, 세드릭 슈네입니다. 제 군주를 보위하기 위함이니 무례를 용서하시길.”
클라라의 뒤에서 장막을 사이에 두고 세드릭이 또렷하게 내뱉었다. 혜미에게 겨누어졌던 묵직한 칼이 스륵, 아래로 향했다.
“에데르트가… 정말 살아 있었다고…?”
파르륵.
기름이 타는 냄새가 나더니 막사 안이 희미한 빛으로 밝아졌다. 혜미는 어느새 한 걸음 떨어진 곳에서 그녀를 바라보고 있는 하르트만의 가주, 클라라 하르트만을 보며 마른침을 삼켰다.
“처음 뵙습니다. 이런 식으로 찾아뵙게 되어서 정말 죄송합니다.”
“바깥에 있는 자의 얼굴을 확인할 수 있을까요?”
색이 옅은 금발을 허리까지 길게 늘어뜨린 클라라는 온몸에서 기품이 넘치는 귀부인이었다.
“그대가 카플란이 보낸 자객이 아니라는 사실을, 나는 아직도 완전히 믿을 수가 없기에.”
“세드릭.”
혜미가 작게 속삭이자 세드릭이 소리 없이 안으로 들어왔다. 클라라가 그를 보며 작게 한숨을 쉬었다.
“예상외의 행보로군요, 세드릭 슈네.”
천재 기사가 출현했다고 떠들어 대던 군중의 관심을 뒤로하고 사라진 세드릭이 매의 수호자가 되었다는 소문은 그녀 역시 들은 적이 있었다. 그러나 모습을 감춰 버린 세르노티는 12년간 나타나지 않았으므로 세드릭에 대한 관심 역시 사람들의 기억 속으로 사라지던 참이었다.
클라라는 검술 대회에서 우승한 후, 자신을 빤히 바라보던 세드릭의 어린 모습을 떠올렸다. 어깨에 힘이 잔뜩 들어가 있던 어린 기사가 세르노티로 숨어들어 죽은 황녀를 위한 암살단이 되었을 줄이야.
“모든 이들이 남들의 예상대로 살아야만 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르트만 경.”
세드릭이 그녀를 향해 공손하지만 또렷하게 속삭였다. 클라라가 작게 미소지었다.
“나는 자신만의 철학이 있는 사람을 좋아합니다. 하지만 그게 나에게도 철학이 있어야 한다는 뜻은 아니라고 생각해요.”
그녀가 고개를 치켜든 채 천천히 눈을 깜빡였다. 초점이 흐릿해진 시선은 차가웠다.
“나의 남편이 그런 종류의 사람이었거든요. 자신이 피로 섬기겠다고 맹세한 주군을 암살했다는 누명을 받는 것은 그에게 치욕이었을 겁니다. 그 오명을 벗으려 애를 쓰는 대신 황제가 준 칼로 목숨을 끊었죠. 마지막까지 피로서 충성한 거예요. 바보 같게도.”
혜미는 그녀가 덧붙이는 마지막 말에 희미하게 드러나는 안타까움을 놓치지 않았다.
“저희를 도와주시면 하르트만 경의 결백을 반드시 증명하겠습니다.”
세드릭의 말에 혜미가 고개를 세차게 끄덕였다. 클라라가 그들을 보며 다시금 살포시 인상을 찌푸리며 웃었다.
“결백을 증명하는 것 따위, 내게는 관심이 없습니다.”
“그럼… 뭐가 필요하신데요…?”
혜미의 물음에 클라라는 대답을 망설이지 않았다.
“나는 내 남편의 복수를 하고 싶은 것뿐이에요. 선대 황제를 죽인 건 아마도 카플란, 아니면 황후의 편에 섰던 귀족들 중 누군가겠죠. 황태자인 크리스티앙을 도통 달갑지 않아 하던 황제가 사망해야지만, 황태자에게 어쩔 수 없이 모든 권력이 집중될 수 있었을 테니까요.”
느릿하지만 또렷한 어투로 내뱉는 그녀의 홍안에 날카로운 빛이 서렸다.
“그런 이유에서 내가 현 황제인 크리스티앙을 지지할 수 없는 것은 당연하겠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영지 안에서 병력을 키워 왔던 이유는 바로 지금 이 순간을 위해서였을지도 모르겠고요.”
가주가 불명예스러운 누명을 안고 죽은 상황에서 가문을 끝까지 유지하는 것은 누구에게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클라라 하르트만은 죽은 그녀의 남편과는 달리 매우 현실적인 이였다. 죽은 듯 납작 엎드려 복수의 날을 기다렸다.
크리스티앙의 폭정을 감내하며 자신은 현 정부에 대한 불만이 전혀 없다는 증거로 엄청난 양의 전쟁 물자를 대며 살아남았다. 십수 년간 권력의 달콤함에 익숙해진 카플란이 의심도 없이 하르트만에게 도움을 청한 것도 바로 그 때문이었다.
세르노티가 반역을 꾀하고 있다는 첩보가 들어왔으니 그 가문을 멸살하는 것이 황실에 대한 충성일 것이라는 카플란의 전언을 들었을 때, 클라라의 육감이 작동한 것은 필연이었다.
“몸이 무거워질 대로 무거워진 카플란이, 이미 전설 속으로 사라져버린 조그마한 암살단 가문 따위를 칠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는데. 정말로 황녀께서 살아계셨을 줄이야.”
클라라의 눈빛에 불꽃이 타오르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그 말은, 저희를 도와주신다는 뜻입니까?”
“하하.”
세드릭의 질문에 클라라가 가볍게 웃었다. 기품이 넘치는 태도였지만 친근하고 따스한 미소는 아니었다. 혜미는 오히려 그녀의 웃음에서 그녀가 오랜 시간 동안 가슴속에서 축적해 온 화를 느낄 수가 있었다.
“크리스티앙에 대적할 만한 상대라면 그 누구라도 돕겠습니다. 황녀께서 지금 이 제국의 꼭대기에 선 크리스티앙에 맞설 수 있는 강하신 분이라면 돕죠. 돕고 말고요. 하지만 제 눈앞에 보이는 건….”
혜미는 그녀의 날카로운 붉은 눈을 보며 저도 모르게 긴장해 숨을 멈추었다.
“겁이 많고 맘씨가 여린 아가씨 한 분이로군요.”
혜미의 입술에서 떨리는 호흡이 새어 나갔다. 어쩌지. 완벽히 간파당했다. 이걸로 그녀의 계획은 수포가 되는 걸까. 세르노티는 결국 카플란과 하르트만을 상대로 힘든 싸움을 벌여야 하는 걸까.
“사실 궁금하기도 해요. 모두의 예상대로 살지 않기로 선택한 세드릭이 당신을 군주로 선택하고 따르게 된 이유에 대해서는.”
클라라가 간절한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혜미를 향해 말을 이었다.
“이번 전투에는 참가하지 않겠습니다. 가문 간의 전쟁은 황제의 권한 밖이니 제 결정에 토를 다는 사람은 없을 테니까요.”
“……!”
“맘 여린 황녀께서는 부디 살아남으시길.”
“…감사합니다!”
놀란 눈동자로 그녀를 보며 재차 감사하다고 고개 숙이는 혜미를 보며 클라라가 소리 없이 눈을 깜빡였다.
“정말 감사합니다. 더 길게 인사를 드리고 싶은데… 저희가 지금 진짜 바빠서요…. 감사합니다, 하르트만 경. 진심이에요.”
“그럼 이만.”
세드릭의 재촉에 자리를 뜨면서도 연신 중얼거리는 황녀의 태도는 뜻밖이었다. 만약 그녀와 운명이 뒤바뀐 크리스티앙이었다면 어떠했을까. 자존심이 상해 자신의 목에 칼부터 들이밀었을 게 분명했다.
“만일 이번에 살아남으신다면, 황녀께 제가 가장 필요한 순간에 한 번은 도움을 드리겠습니다.”
“지… 진짜요…?”
“예.”
“아… 진짜 대박이다…. 알았어, 알았다고, 세드릭.”
클라라가 스스로도 예상하지 못했던 말을 내뱉은 이유는 단 하나였다. 잔인한 클라웨의 피를 받았다고는 전혀 상상할 수 없는 황녀가 어떤 결과를 보여 줄지, 그녀 스스로가 궁금해지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
여우 사냥은 새벽빛이 밝아 오기 직전, 가장 어두운 시각에 이뤄졌다.
“가자!”
멀리서 연기가 피어오름과 동시에 세르노티 성문이 열리고 오십 명의 기사들이 말을 타고 달려나가기 시작했다.
“히럇!”
평원을 가로지른 것은 순식간이었다. 가장 앞서 달리는 발터의 머리카락이 바람에 거칠게 흩날렸다. 말발굽에 미끄러지지 않는 정을 박은 말들이 강을 건너기 시작했다.
“잘했어…. 잘했어…!”
말을 탄 채, 양손에 말 두 마리의 고삐를 들고 달리는 레나가 말 못 하는 짐승들을 격려했다.
발터가 속력을 내는 만큼 그들도 빨리 따라갔다. 기습에서 중요한 것은 속도였다. 적들이 진영을 차린 것은 오늘 오후. 먼 길을 달려왔으므로 가장 피곤한 시기였다.
“히럇!”
단단히 얼어붙은 강 위를 반쯤 지났을 때, 멀리 오른쪽에서 혜미와 세드릭의 모습이 보였다. 밧줄이 휙 날아가는 순간 세드릭이 줄을 잡았다. 혜미는 세드릭이 말한 대로 그의 팔을 꽉 잡았다.
“꽉 잡아!”
휙, 얼음을 미끄러지며 두 몸이 움직였다.
“올라타! 이든!”
혜미가 눈을 질끈 감고 몸을 날려 안장 위로 올라갔다. 세드릭 역시 달리는 말 사이를 휙 지나가 그의 말 위로 자리를 잡았다.
“…괜찮아?”
발터가 그녀의 곁으로 말을 달리며 물었다. 혜미는 투구 사이로 이글거리는 그의 눈동자를 보며 빠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응. 괜찮아.”
그녀의 머리 위로 투구를 씌워 준 발터가 짙은 숨을 내쉬었다.
“하르트만이 이번 전투에는 참여하지 않겠다고 중립을 선언했다!”
세드릭의 외침에 말을 모는 기사들에게서 제각각 환호가 터져 나왔다.
“해냈구나!”
“자…! 여우 잡으러 한번 그럼 가 보자!”
혜미는 고삐를 꽉 쥐고 입술을 꽉 깨물었다. 붉은 여우의 인장이 그려진 카플란의 진영이 코앞에 있었다. 그들을 발견한 보초가 황급히 북을 때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둥. 둥.
“기습이다!”
세르노티의 기사들의 손에서 동시에 검이 뽑혀 나갔다.
***
“하아… 하아…!”
벌써 몇 명을 베어 냈을까. 카플란의 군사들이 점점 더 늘어나고 있었다. 황궁 근위대까지 포함한 그들의 숫자는 약 오백. 오십 명의 기사들로는 오래 버티기가 힘든 상황이었다.
“죽어…! 흑!!!”
토비아스가 자신보다 체구가 두 배는 커다란 이의 몸을 창으로 뚫었다. 이를 악물고 힘을 쓰는 그의 뒤에서 달려드는 카플란의 적군 하나가 발터의 칼에 목이 잘렸다. 피 칠갑이 된 발터의 갑옷을 보며 혜미가 투구 속에서 숨을 몰아쉬었다.
‘하아…. 지금이야… 발터…?’
그녀 역시 몇 명을 상대했는지 셀 수조차 없었다. 그녀의 눈빛을 본 발터가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이다, 이든.’
아무리 두려워도 작전대로 행해야 했다. 여기서 그녀가 무너지면 다 죽는다.
그녀는 쓰고 있던 투구를 벗어 던진 후, 들고 있던 검으로 달려드는 카플란을 단번에 베어 냈다. 그리고 붉은 보석이 박힌 검을 보란 듯이 높이 치켜든 채, 악을 쓰듯 외쳤다.
“성으로 후퇴한다! 세르노티의 기사들이여!”
희미한 새벽빛을 받아 검 손잡이에 달린 보석이 붉게 반짝였다. 얼굴을 드러낸 혜미를 본 카플란 중 하나가 크게 소리를 쳤다.
“여자를 쫓아라!”
“선두에 있는 년을 죽여야 한다!”
“이대로 세르노티성까지 진격한다! 반역자들을 모조리 처단하라!”
순식간에 카플란의 군사들이 모두 그녀를 쫓기 시작했다.
“가자!!!”
혜미는 몸을 낮추어 빠르게 말을 몰았다. 그녀의 뒤로 기사들이 달려드는 카플란을 쳐 내며 줄지어 따라붙었다. 말들이 엄청난 속도로 달려 나가기 시작했고 세르노티의 뒤로 적군이 까만 점처럼 따라붙었다. 푸른 강 위에 양변이 기다란 삼각형이 늘어진 형태였다.
“하아…. 하아…!”
혜미는 이를 악물고 달렸다. 그게 그녀의 역할이었다. 기사들을 이끌고 가장 빠르게 선두로 달리는 것.
베른강을 넘어 성벽에 최대한 가까워지기만 하면 된다. 성벽에서 활을 든 기사들과 함께 대기하고 있는 것은 부상당해 아직 몸을 쓰기도 힘든 아일라였다. 세드릭의 불같은 화에도 검을 잡겠다고 끝까지 나서던 그녀를 생각하며 혜미는 전력으로 말을 몰았다.
챙! 챙!
“돌아보지 마! 그냥 앞만 보고 달려라, 이든!”
발터가 그녀의 바로 옆까지 따라붙는 적을 베어 내는 소리가 바람 소리에 섞여 실려 들었다. 혜미 역시 고개를 돌릴 수가 없었다. 무수히 많은 적들이 칼을 들고 그녀에게 달려드는 모습을 보면 감당할 수가 없을 것 같았다.
“하아!”
강둑을 뛰어넘는 순간, 매의 탑에서 커다랗게 종이 울렸다.
뎅그렁.
성에서 떨어진 무리들을 관찰하고 누구보다 빠르게 종을 울린 것은 동생 토미와 아빠를 걱정하던 소년일 것이다. 그에게 아무것도 잃게 하고 싶지 않았다.
뎅그렁.
탑의 종이 울리는 순간은 성벽에 몸을 숨긴 기사들의 준비 신호였다. 전력으로 달려오는 혜미와 세르노티 기사들 뒤로 까만 점처럼 몰려오는 적군들을 보며 긴장한 것은 성안의 기사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이 몰려와 성문을 부수고 성벽을 기어오르는 것은 일도 아니었다.
“준비하세요.”
굳게 잠긴 성벽 위, 아일라의 또렷한 목소리에 모두들 활시위를 당겼다.
“지금입니다…!”
아일라가 화살을 쏘아 올린 것이 신호였다. 성벽에 붙은 기사 이백 명이 일제히 바깥을 향해 화살을 날렸다. 동시에 발터가 투구를 쓰지 않은 그녀의 머리를 팔로 감싸 안았다.
후드득.
하늘에서 화살 비가 떨어졌다. 화살이 성 바깥에 꽉 찬 병사들의 몸과 바닥에 푹푹 꽂혔다.
“제… 기랄!”
몸을 가볍게 하기 위해 얇은 철사를 꼬아 만든 갑옷을 입은 카플란의 병사 수십이 말에서 아래로 떨어졌다.
“다시…!”
아일라의 외침에 기사들이 일제히 시위를 당겼다 동시에 놓았다. 굳게 닫힌 성문을 향해 달려가고 있는 카플란은 새벽빛이 밝아오는 청명한 하늘에서 또다시 우수수 내려오는 화살을 피할 재간이 없었다.
“윽!”
“흐윽!”
히이잉.
카플란을 태운 말들이 놀라서 앞발을 치켜들었다. 날아드는 화살을 검으로 베어 보았지만 한꺼번에 떨어지는 수백 개의 화살을 모두 베어 내는 것은 무리였다.
“공격해!”
설상가상으로 그들이 쫓던 세르노티가 검을 들고 반격하기 시작하자 공간은 순식간에 아비규환으로 변했다.
후드득.
다시 한번 화살이 쏟아졌다. 허수아비처럼 푹푹 쓰러지는 것은 카플란뿐이었다. 날카로운 화살은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무장한 세르노티의 기사들의 두꺼운 갑옷을 뚫지 못했다. 갑주를 얹은 말 역시 마찬가지였다.
“후퇴하라! 진영으로 돌아가!”
성급한 판단을 내렸다는 사실을 깨달은 지휘관이 목소리를 높였다. 성문이 열리는 순간, 대기하고 있던 세르노티의 기사들이 우르르 쏟아져 강으로 달아나는 그들을 쫓았다. 전세는 이제 완전히 역전되어 세르노티로 기울어져 있었다.
“젠장…. 제기랄…!”
강의 한복판으로 말을 달리던 카플란의 가주 헬무트가 이를 뿌득 갈았다. 바퀴벌레 같은 세르노티를 박멸하는 것에 실패한다고 해도, 황녀 에데르트의 목을 기필코 가져가야 했다.
“죽어라…!”
말을 돌려 달려드는 그의 앞을 가로막은 것은 세드릭이었다. 하필이면 그 순간, 미끄러운 얼음 위에서 세드릭의 말이 헛발질을 한 것도, 그 때문에 그의 몸이 휘청인 것도 동시에 일어난 일이었다. 한 번도 비껴간 적이 없는 세드릭의 공격이 빗나갔다.
“세드릭!!!”
혜미의 입술에서 고성이 터져 나갔다. 커진 눈동자에 검을 든 세드릭의 오른팔이 갑옷째로 잘려 날아가는 모습이 생생히 각인되었다.
“안 돼애!!!”
수평선 너머로 떠오르기 시작한 아침 햇살이 얼어붙은 강을 비추었다. 얼음 위에 뒹구는 세드릭의 팔이 눈이 시리게 빛을 반사하고 있었다.
“하아….”
세드릭이 왼손으로 허리에 차고 있던 두 번째 검을 뽑아 들었다. 카플란은 그를 보며 투구 뒤로 인상을 찌푸렸다.
세드릭 슈네.
열두 살 때 검술 대회에서 우승한 세드릭은 왼손잡이 검사였다.
“이제 좀 공평히 싸울 수 있겠군.”
잘려나간 오른 팔뚝에서 피가 철철 흘러내리고 있었지만 세드릭은 상관하지 않았다. 검이 부딪히는 소리가 빠르게 울려 퍼졌다.
“흑…. 아아아!!!”
혜미가 소리를 지르며 말에서 뛰어 내렸다. 세드릭의 팔을 집어 들려고 했지만 이미 늦은 일이었다. 앞다투어 달아나는 카플란의 말발굽에 엉망으로 짓이겨지는 세드릭의 신체 일부분을 보며 그녀가 소리를 지르며 오열했다.
“안 돼…. 안 돼…!”
세드릭은 헬무트 카플란을 쫒아 까마득한 적지로 달려가는 중이었다. 주변에는 퇴각하는 카플란의 군사들이 가득했다. 발터와 기사들은 온몸에 피 칠갑을 한 채, 마지막까지 그들을 따라붙으며 베어 내느라 여념이 없었다.
다 죽어 버렸으면.
카플란 따위, 하나도 빠짐없이 다 죽어 버렸으면…!
“으흐…. 으흐윽…!”
그녀가 검을 얼음 바닥에 내리꽂은 순간이었다.
지직.
그것은 검 끝에서부터 시작된 아주 작은 균열이었다. 높게 떠오른 아침 햇살에 검 손잡이에 붙은 붉은 보석이 찬란히 빛을 냈다.
지지지직.
작은 균열은 순식간에 얼어붙은 강물에 거미줄처럼 퍼져 나갔다.
“강이….”
쩍, 쩍, 갈라지는 소리가 곳곳에서 들리기 시작했다.
“강이 녹고 있어!!!”
누군가가 다급하게 외쳤다. 눈물 젖은 눈으로 멍하게 앞을 바라보던 혜미의 몸이 휙, 붙들려 순식간에 말 위로 얹혔다.
“세, 세드릭…!”
미친 듯이 말을 모는 발터의 앞에서 혜미가 뒤를 돌아보았다.
내가 무슨 짓을 한 거지…?
얼음이 쩍쩍 갈라지며 그 사이에서 카플란의 병사들이 속수무책으로 강물 속에 빠지고 있었다.
“으아아악!”
해빙된 얼음이 빠른 속도로 물살을 타고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들이 빠져나올 수 없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발터. 세… 세드릭이…! 세드릭이 뒤에 있다고!”
정신없이 달려 나가는 발터의 말 위에서 혜미가 떨리는 목소리로 외쳤다.
“녀석을 믿어. 세드릭은 분명히 돌아온다!”
발터가 고삐를 꽉 잡으며 그녀에게 소리쳤다.
“하아… 하…!”
뒤를 돌아 본 혜미가 젖은 눈동자로 숨을 몰아쉬었다. 저 멀리서 세드릭이 달려오고 있었다. 한 손에 무언가를 휘어 쥐고서 갈라진 얼음 사이를 날 듯이 뛰고 있었다.
“세드릭!!”
녹아내리는 얼음을 밟고 달려오는 세드릭의 왼손에 들린 것은, 눈을 부릅뜬 헬무트 카플란의 잘린 목이었다.
***
클라웨 9세 재위 3년 - 서기관의 기록.
제국력 178년 겨울. 아메티스 서쪽의 공작 가문 카플란은 세르노티와의 전쟁을 일으킨다. 제국 내에서 가문 간의 전쟁은 황제의 권한 밖이라는 사실을 이용, 원로원의 허가를 받아 황궁 근위대 500명을 데리고 출정했으나 패배한다.
카플란과 연합했던 남부의 하르트만은 진영에까지 왔지만 카플란의 군사가 전멸하는 것을 보고 출정을 거부한다. 하르트만은 본인의 영지로 돌아왔고, 하르트만으로 보내졌던 황궁 근위대 250명은 황궁으로 돌아오던 중 역병을 만나 전멸했다.
이에 크리스티앙 디트리히 클라웨 9세는 제국 내 가문 간의 전쟁이 황제의 권한 밖이라는 사실을 악용해 벌어진 사건이라고 판단, 내전을 반역으로 여기는 법을 선포하고 황궁 근위대 협조를 허락한 원로원 두 명을 숙청한다.
***
“뭐지?”
세드릭이 방에 들어선 혜미와 발터를 보며 특유의 날카로운 말투를 던졌다.
“살 만한가 보네.”
발터가 의사에게 받아온 약을 내려놓자 세드릭이 낮게 코웃음을 쳤다.
“장기가 찢기지도 않았는데 뭐가 문제야.”
혜미는 세드릭의 옆에 길게 풀어져 헝클어진 붕대를 보았다. 피투성이인 붕대를 스스로 간 것은 세드릭 본인이 분명했다. 팔꿈치 아래가 잘린 세드릭의 오른팔을 보니 가슴에 뜨거운 것이 턱, 막힌 것처럼 말이 차마 나오지 않았다.
“…용서해라, 이든.”
세드릭이 그녀를 보며 낮게 입을 뗐다. 혜미는 눈을 깜빡이지 않으려 부릅뜬 채 그를 보았다.
“뭐가…?”
“명령 불복종이잖아. 죽지도, 다치지도 말라고 했는데 부상을 당해서… 할 말이 없군.”
“그 정도라 운 좋은 줄 알아라.”
툭, 내뱉는 발터의 마음이 무겁다는 것쯤은 혜미도 알았다. 아무렇지도 않게 행동하는 세드릭과 발터를 보며 어떻게 입을 떼야 할지 모를 뿐이었다.
“내 주군이 누군지 확인한 순간부터, 내가 운이 좋다고 생각한 적은 한 번도 없었는데?”
“외팔이 주제에, 말이 많네.”
“너 정도와는 한 팔로 싸워도 거뜬하지.”
피식 웃는 그를 보며 혜미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고마워. 세드릭.”
“뭐가?”
“헬무트를 처리해 줘서.”
“이거 왠지 굉장한 충신이 된 것 같은 느낌인데? 사사로운 욕심이 없었다고는 말을 못 하겠는데도.”
혜미가 그를 보며 작게 한숨 쉬듯 웃었다. 녹아내리는 강을 달리던 세드릭의 눈빛이 기억난 탓이었다. 헬무트의 잘린 머리를 들고 성문을 넘었던 세드릭을 보던 성벽 위의 아일라도.
세드릭의 상처를 동여매는 기사들의 앞에서 얼굴에 핏기가 사라진 아일라가 그를 보며 소리내어 울부짖던 모습도.
그런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세드릭은 괜찮다고 웃었다. 그제야 혜미는 알 수 있었다. 세드릭이 마음만 먹으면 다정하게 웃을 수 있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발터. 나, 황궁에 꼭 가야 할 만한 이유가 하나 더 늘었어.”
“…왜?”
“베네딕트를 만나서 세드릭의 팔을 치료해 달라고 할 거야. 그 사람 대마법사라며. 죽은 나도 살렸다고 했잖아.”
“됐거든. 그런 거 찝찝해서 필요 없다.”
세드릭이 그녀를 보며 어이가 없다는 듯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지만 혜미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꼭. 꼭 갈 거야.”
혜미가 주먹을 불끈 쥐고 스스로에게 다짐하듯 되뇌었다. 베네딕트에게 명령을 내릴 수 있는 자는 황제뿐이라는 사실을 상기시켜 줄까, 하다가 발터는 그만두었다.
똑똑.
바깥에서 조심스러운 노크 소리와 함께 나무문이 열렸다.
“시… 식사를 가져왔는데….”
쟁반을 들고 나타난 것은 아일라였다. 금방이라도 눈물을 터뜨릴 것 같은 그녀의 모습을 보며 혜미가 몸을 일으켰다. 기사들이 굳이 아일라에게 세드릭의 식사 심부름을 시킨 이유를 알 것 같았기 때문이다.
“흠. 우린 이제 그만 나가 보자.”
“왜? 좀 더 이따가 나가자. 세드릭이 한 손으로 식사하는 걸 구경도 좀 할 겸.”
눈치도 없이 느긋하게 구는 발터를 보며 혜미가 흰 눈을 떴다.
“좀 나와, 빨리.”
손이 잘 들어가지도 않는 딱딱한 허벅지를 꽉 꼬집자 그제야 발터가 그녀를 따라나섰다.
달칵.
닫힌 나무문에 귀를 바싹 붙이고 있는데 방 안에서 세드릭이 목소리를 높였다.
“너희 둘. 안 가냐?”
숨소리도 내지 않고 있었는데 어떻게 알았지. 도대체 둘이 무슨 말을 하는지 몰래 들으려고 했던 계획은 망한 모양이었다. 혜미는 어쩔 수 없이 발터와 함께 자리를 뜰 수밖에 없었다.
***
“천천히 드시고… 모자라면 말씀해 주세요.”
“고마워.”
아일라가 쟁반을 테이블에 내려놓은 후, 한 발 뒤로 물러섰다.
“그럼 저는 이만….”
죄지은 듯 고개를 푹 숙이고 자리를 뜨려는 그녀를 향해 세드릭이 다정하게 입을 열었다.
“아일라.”
“네?”
“왜 날 제대로 보지 않지?”
아일라는 여전히 시선을 아래로 내리깐 채 침묵할 뿐이었다. 그녀가 그토록 죽이고 싶었던 카플란의 머리를 베어 온 세드릭을. 그와 싸우다 한 팔을 잃은 그를 어떻게, 무슨 얼굴로 봐야 좋을지 알 수가 없었다.
“내가 팔 한쪽이 없어서 징그러운 거니?”
세드릭의 나직한 질문에 아일라가 고개를 번쩍 쳐들었다.
“그…! 그럴 리가 없잖아요…!”
소리를 버럭 지르고 나서 제풀에 놀란 아일라의 눈에 물기가 어렸다. 얼음이 낀 호수 같은 하늘색 동공이 녹아내리듯 둥그렇게 궤적을 넓혔다. 한껏 작아진 목소리로 속삭이는 그녀의 목소리에 울음기가 번졌다.
“제가 세드릭 님을 그렇게 생각할 리가 없는 걸… 아시잖아요….”
세드릭이 그녀를 보며 그제야 옅은 미소를 지었다.
“그럼 날 좀 도와줄래?”
“…네?”
“왼손으로 식사를 해 본 적이 없어서. 어릴 때 내 부모님은 식사 예절을 지키지 않으면 엄하게 혼을 내셨거든.”
“…….”
“옷이 더러워질까 봐 겁이 나서 그래.”
아일라가 크게 숨을 몰아쉬었다. 그가 지금 한 말이 그녀가 이해한 것이 맞는지 헷갈렸다.
‘제… 제가 세드릭 님의 식사를요…?’
세드릭이 그녀의 눈빛에 대답하듯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아일라는 천천히 걸음을 옮겨 그의 옆에 앉았다.
그와 한 뼘 거리에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온몸이 떨렸다. 이런 상황에서도 감히 그를 연모하는 스스로에게 자괴감이 들었다. 그를 돕는다는 핑계로 세드릭의 곁에서 영원히 함께할 수 있기를 소망하는 자신이 저주스러웠다.
팔이 하나 없다고 그가 세드릭이 아닌 다른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닌데도.
스푼으로 접시에 담긴 수프를 뜨는 아일라의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장밋빛 입술을 아프게 깨물어 보아도 가슴속에서 터져 흐르는 감정을 막을 길이 없었다. 뜨거운 눈물이 접시 안에 뚝, 뚝, 떨어졌다.
“아아….”
이러면 안 되는데. 깔끔한 세드릭의 음식에 더러운 이물질이 들어가는 일은 있어서는 안 됐다.
“음식을… 다시 가져오겠습니다….”
스푼을 접시에 내려놓으려던 아일라가 움직임을 멈추었다. 세드릭의 왼손이 그녀의 팔목을 들어 올린 탓이었다.
세드릭은 그녀의 손목 아래를 마치 깃털처럼 가볍게 두 손가락으로 들었다. 그리고 고개를 살짝 숙여 아일라가 쥐고 있는 스푼을 입 속에 넣었다. 깔끔하고 정갈한 동작으로 음식을 삼킨 후, 그가 그 자리에서 얼어붙은 아일라를 보며 부드럽게 웃었다.
“맛있구나.”
아일라의 아랫입술이 소리 없이 가늘게 떨렸다. 눈물을 참아 내느라 엉망이 된 얼굴로 그녀가 급하게 숨을 들이쉬었다. 울고 싶지 않은데, 원망스러운 눈물이 다시금 툭, 굴러 세드릭의 손바닥에 떨어졌다. 세드릭의 손이 꽃잎이 닫히듯 천천히 쥐어졌다.
“울지 마.”
세드릭이 마치 그때처럼 속삭였다. 아일라의 어깨가 가늘게 떨렸다.
“…울지 마. 이제 괜찮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