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8화 (18/72)

“알고 있다면 하루빨리 몸을 회복시키도록 해.”

아아. 밉상.

“네.”

아일라가 커다란 햄 위에 절인 양배추를 잔뜩 올린 후 꼭꼭 씹어 삼켰다. 그 모습을 힐끗 바라보며 세드릭이 물잔으로 입술을 축였다.

“몸도, 물건도 쓰지 않으면 녹이 스는 게 당연해. 검을 다루는 자들은 더욱 그러하다. 부상을 입은 후 치료 단계에서 가장 중요한 건 재활이란 걸 너도 잘 알고 있겠지. 산책할 정도로 움직일 수 있으면 하루빨리 훈련에 참가할 수 있도록….”

이어지는 지루한 잔소리. 엄청난 부상을 입고 깨어난 아일라가 이렇게 빨리 움직일 수 있게 된 것은 기적이라는 소리를 의사에게 들어 놓고도 저랬다. 그녀가 밤마다 몰래 나가서 무리해 검을 휘두르는 걸 알고 있으면서 스파르타도 이런 스파르타가 없었다.

다른 기사들이 눈빛을 교환하더니 이내 모두들 제 음식을 먹는 데 집중하기 시작했다. 세드릭의 설교에는 익숙해진 탓이었다. 그중 가장 불쌍한 건 그의 집중 공격을 받아 내야 하는 아일라였다. 아무리 그래도 밥 먹을 때는 좀 가만히 놔둬 주는 센스는 그에게 없는 것 같았다.

“세드릭, 다 먹었으면 좀 나가라.”

그녀의 마음을 대변해 준 것은 발터였다. 세드릭이 그를 보며 못마땅한 표정으로 눈썹을 들어 올렸다.

“뭐? 내가 왜. 난 아직 식사가 끝나지 않았다.”

“아까부터 먹지도 않을 빵 쪼가리만 자르면서 잔소리만 지껄이고 있잖아. 모두 다 아는 소리를 떠들어대는데 시끄러워서 귀가 따가워.”

두 줄로 질서 있게 진열된 빵조각을 접시 위에 둔 세드릭은 인상을 찌릿할 뿐, 반격할 기회를 찾지 못하고 있었다.

잘한다 발터!

혜미가 그를 보며 응원하듯 눈을 크게 뜨자 발터가 슬쩍 그녀에게 눈짓하며 왼쪽 눈을 깜빡였다.

어라. 언뜻 보면 두 눈을 다 깜빡인 것처럼 보이지만 확실히 달랐다. 혜미는 스치듯 지나가는 순간에 두근거려 마른침을 꿀꺽 삼켜야 했다. 발터가 태연한 표정으로 세드릭을 향해 공격을 이었다.

“내가 아일라라면 먹다가 체할 것 같으니까, 네가 진정으로 그녀의 회복을 생각한다면 먼저 자리를 뜨는 게 낫다는 소리지. 안 그래, 아일라?”

“아… 아뇨! 저는 전혀 체할 것 같지 않아요…!”

푹 숙였던 고개를 번쩍 쳐들고 세드릭의 편을 드는 아일라는 만만치 않았지만 발터 역시 멈출 생각은 없어 보였다.

“그럼 세드릭이랑 단둘이 밥 먹을래?”

“쿨럭쿨럭!”

아일라의 입술에서 커다란 기침이 터져 나갔다. 간신히 냅킨으로 입을 가렸지만 그녀의 얼굴이 벌게진 것은 숨길 수가 없었다. 발터에게 왜 애를 괴롭히는 거냐고 나무라려던 혜미가 순식간에 마음을 바꾸었다. 어쩌면 둘이 있을 기회를 만들어 주는 게 좋을 지도 모른다는 판단이 선 까닭이었다.

“좋은 생각이다. 우린 다 먹었거든? 여기서 세드릭이랑 아일라 말고 식사 안 끝낸 사람 있어?”

“나는 아직 덜 먹….”

빈센트가 손을 들려다가 누군가에게 손등을 찰싹 맞고는 끄응, 하며 한숨을 쉬었다. 세드릭과 아일라 사이 묘하게 흐르는 낯선 공기를 의식한 것은 기사단 모두 마찬가지였다.

“그럼 나가자.”

발터가 그녀의 손을 잡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동작이 빠른 기사단 동기들은 이미 음식이 수북하게 담긴 접시를 손에 들고 식당을 빠져나가고 있었다. 혜미는 그에게 잡힌 손을 한 번 본 후, 그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나 잘했지?”

씩 웃으며 속삭이는 얼굴에 가슴이 두근거릴 것 같아 혜미는 시선을 옆으로 돌려 버렸다.

***

매의 탑 꼭대기 층에 위치한 성주의 방에서 혜미가 두꺼운 이불로 몸을 칭칭 감싼 채 중얼거렸다.

“세드릭 말야. 왜 이렇게 아일라에게 냉정하게 대하는 거야?”

테이블에 앉아 검을 닦으며 발터가 무심한 어투로 답했다.

“그 녀석은 원래 차가워서 별명이 얼음 송곳이야. 자기 이름이랑 딱 잘 어울리는 성격이지.”

세드릭의 성인 슈네는 하늘에서 내리는 눈이라는 뜻이었다.

“그래도 아일라가 누구 때문에 죽기 직전까지 다쳤는데. 너무한 거 아닌가? 진짜 아까 식당에서는 때려 주고 싶더라.”

“한 대 패지 그랬어.”

발터가 검을 공중에 들어 잘 벼려진 날을 확인하며 중얼거리듯 내뱉었다.

“아휴. 그러다 무슨 사달이 나려고?”

“뒷일은 내가 책임질 테니까.”

“칼 들고 그런 소리 하면 되게 살벌한 거 알아?”

“걔한텐 좀 그래도 돼.”

발터가 그녀를 보고 씩 웃는 모습이 너무도 태연해서 웃음이 다 났다. 혜미가 손안에 있는 따끈한 우유를 홀짝였다. 데운 우유에 살짝 볶은 오트와 꿀을 섞은 것이었는데 놀랍도록 달콤하고 고소해서 맛이 좋았다. 요리장인 카트리나 아줌마는 타고난 금손이었다.

“이거, 아일라한테도 갖다 줄까? 야식으로. 기분 좀 풀리게 할 겸.”

“그럴 필요 없을걸?”

“왜?”

“아까 세드릭이 쟁반 들고 들어가는 거 봤거든. 10초 만에 다시 나왔지만.”

혜미가 입술에서 바람 빠지는 소리를 냈다. 챙겨 줄 건 다 챙기면서 그 태도는 뭐람.

“세드릭은 친절한 건지 냉정한 건지 도통 모르겠다니까. 다른 사람들 앞에서는 아일라한테 완전 화난 사람처럼 굴면서.”

짝사랑하는 상대가 자신에게 찬바람이 쌩쌩 날리게 행동하면 그 누구라도 상처받을 것이다. 혜미는 죄 없는 발터를 향해 괜히 따지듯 인상을 찌푸렸다.

“아일라만큼이나 마음이 복잡한 건 세드릭도 매한가지일 거야.”

그가 검집에 검을 부드럽게 집어넣은 후, 말을 이었다.

“누구보다 카플란을 치고 싶은 건, 아마 세드릭일 수도 있고.”

수년간 함께 지내 온 세드릭의 성격을 발터가 모를 수는 없었다.

날카롭게 쏘아붙이는 냉소적인 성격이 그의 타고난 기질이라면, 규칙과 질서를 중시하는 태도는 후천적인 교육에 의한 것이었다.

세드릭은 엄밀히 따지자면 발터와 친척 간이었으나, 날 때부터 세르노티에서 자랐던 그와는 엄연히 성격이 다를 수밖에 없었다. 열두 살 때 가문을 떠나기 전까지 기사가 되는 것을 엄격하게 교육받았던 세드릭이다. 그가 유서 깊은 귀족가의 자제라는 사실은 세드릭의 높은 자존감에서 드러났다. 만일 세드릭이 누이를 따라 세르노티로 오지 않았다면 그는 클라웨 제국에서 제일가는 기사로 명성을 떨쳤을 것이다.

“세드릭이 강한 건 그 때문이지. 그는 남들한테만 엄격한 게 아니라 스스로에게도 철저하게 구니까.”

“어쩐지….”

혜미가 입술에 우유 거품을 묻힌 채 진지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성격이 처음부터 나랑 진짜 안 맞더라. 나는 내 스스로한테 제일 관대하거든.”

발터가 그런 그녀를 보며 낮게 웃었다. 슬쩍 미소 지으며 그녀를 바라보는 눈동자에 열기가 일고 보기 좋은 기다란 입술이 조금 말랐다.

“여튼 세드릭은… 스스로에 대한 의심이 없어. 의심이 생길 여지를 줄 만한 성격도 아니고. 자기 자신에게까지 말이야.”

“아일라가 자기 때문에 다친 거에 대한 죄책감이 생각보다 더 큰 모양이네.”

“음.”

발터가 애매하게 덧붙였다.

“그것뿐이라고 하기엔 녀석의 태도가 좀 더 이상하긴 해.”

“무슨 뜻이야?”

“요즘의 세드릭을 보면 약간 어디 한 군데 나사가 빠진 사람처럼 굴거든.”

“…세드릭이?”

기사들을 모아 놓고 매일 같이 강도 높은 훈련을 하고, 매일 밤 정예 기사들과 작전 회의를 하는 세드릭은 혜미의 눈에는 그저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나올 사람처럼 완벽해 보일 뿐이었다. 덕분에 혜미는 정신이 나가지 않은 상태에서도 검을 휘두르고 그녀의 키보다도 훨씬 큰 말 위에 올라타고 달릴 수 있게 되었다.

“가끔 멍하게 있을 때가 있어. 불러도 모를 정도로.”

발터는 한밤중에 광장 한복판에 서 있던 세드릭을 떠올렸다. 먼 하늘을 뚫어져라 바라보는 그는 이제까지 본 것 중 가장 낯선 표정을 짓고 있었다.

“뭐 해?”

“…….”

“세드릭.”

“아. 너냐.”

우두커니 서서 뭐 하는 거냐고 묻는 질문에 세드릭은 잿빛 눈동자를 가늘게 뜨며 또렷하게 답했다.

“강이 얼어붙기를 기다리고 있다.”

혜미가 따뜻한 우유를 꿀꺽, 한 모금 다시 삼켰다. 강이 얼어붙는다는 것은 디데이가 가까워짐을 뜻했다. 카플란과 정면으로 싸워야 하는 날이었다.

“발터, 혹시 말이야.”

“응.”

“나 그때 아일라가 처음 깨어나고 날 찾아서, 둘이서만 이야기했을 때 있잖아. 그때… 세드릭이 혹시나 문밖에서 엿듣거나 뭐… 그랬던 건 아니지?”

“그 자존심에 내 앞에서 그럴 리가 없지.”

혜미는 그제야 안심했다. 혹시 아일라의 과거를 세드릭이 알아채기라도 한 걸까 불안했기 때문이다.

“왜. 그 안에서 세드릭이 들으면 안 될 이야기라도 했어?”

“아, 아니!”

되묻는 발터를 향해 혜미가 재빨리 부정했다.

“그건 절대 아니고. 그냥… 세드릭이 혹시나 아일라 때문에 더더욱 전쟁을 빨리 치르고 싶은 건 아닌가 했던 것뿐이야.”

“세드릭이 아일라 때문에 화가 나서 카플란을 치고 싶어 할 만한 이유가 있다는 소리야?”

꿀꺽. 저절로 마른침이 넘어갔다. 도대체 이 커다란 남자는 이럴 때만 왜 이렇게 촉이 좋은 걸까. 혜미는 제 말을 그대로 반문할 뿐인 발터에게 오히려 소리를 높였다.

“절대 아니야!”

발터는 물끄러미 그녀를 바라볼 뿐 더 이상 묻지 않았다. 대신 잠시 망설이다 느릿하게 입을 열었다.

“아일라가 혼수상태에서 깨어나지 못했을 때, 세드릭이 그 방에서 이틀 동안 나오지 않았던 거 기억하지?”

“응. 아무도 가까이 못 오게 하고 문까지 걸어 잠갔잖아.”

그 탓에 혜미와 발터를 포함한 기사들 모두 상황도 모르고 가슴을 졸여야 했다.

“아일라를 치료했던 필립 아저씨가 하는 말을 우연히 들었어. 열에 들떠서 심하게 헛소리를 한다고. 악몽을 꾸며 발작하는 것 같다고.”

혜미는 뭐라고 대꾸해야 할지 몰라 입을 꾹 다물었다. 발터가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에게로 다가왔다. 그리고 빈 컵을 꽉 쥐고 있는 그녀의 손에서 부드럽게 컵을 건네받아 협탁 위에 올렸다.

“세드릭은 예전부터 눈치가 빨라. 우리가 숨기고 싶은 일이 있어도 그는 다 알고 있었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어.”

만약 아일라의 과거를 세드릭이 알아챘다면.

혜미가 소리 없이 긴 숨을 내쉬었다. 그가 얼마만큼 카플란을 치고 싶을지 예상이 간 탓이었다. 날카로운 그의 상태는 초조함을 반영하는 것이 분명하다.

휘잉.

돌벽으로 막아 놓은 창문 너머로 차가운 바람이 마른 나뭇가지를 통과하는 소리가 강하게 들렸다. 한겨울의 달은 이제 손톱만큼 작아져 있었다.

이제 강이 얼어붙기까지는 약 이틀. 카플란은 강이 얼어붙기 시작한 후, 열흘 이내에 세르노티를 공격할 것이 분명했다.

“우리에게는 이겨야 할 이유가 너무 많아.”

침대 끄트머리에 앉은 발터가 그녀의 손을 붙잡았다. 발터가 입을 맞추는 손등에 부드러운 온기가 스며들었다.

“반드시 이길게.”

짙어진 밤색 눈동자가 그녀를 보았다. 혜미는 그에게 잡힌 손에 힘을 주며 환하게 미소지었다. 여전히 두렵고 떨리는 건 사실이었지만, 그와 함께라면 적어도 도망치고 싶다는 마음은 들지 않았다.

“응. 그러자.”

그녀가 고개를 끄덕이는 순간, 그녀의 손이 그에게로 가볍게 이끌렸다. 발터의 뜨거운 입술이 닿아 온 것은 그다음이었다.

“잘 자, 이든.”

아랫입술을 빨았다 떨어지는 입맞춤은 보통의 굿나잇 키스와는 거리가 멀었다. 그가 젖은 숨을 삼키며 낮게 중얼거리듯 속삭이자 혜미의 귓바퀴가 붉게 물들었다.

“이렇게 입 맞추는 건… 반칙 아냐?”

툭 불거진 발터의 목울대가 위아래로 일렁였다. 아까부터 그녀의 입술을 훔치고 싶어 견딜 수가 없었다는 속내를 말하는 대신, 또다시 구차한 핑곗거리를 만들었다.

“내 황제가 허락을 구하는 키스는 필요 없다 하시기에.”

꽉 잠긴 목소리가 느릿하게 발터의 성대를 갈랐다.

“내 말을 그렇게 잘 듣는다면, 명령 하나 해도 돼?”

“얼마든지.”

혜미는 빨개진 얼굴로 그를 보며 말을 머뭇거렸다.

“오늘은 의자 위에서 불편하게 자지 말고, 침대 위에서 자.”

발터의 진한 눈매가 그녀를 말없이 응시했다. 혜미는 귓바퀴를 붉게 물들이며 황급히 입을 열었다.

“그게… 그러니까 나는 이상한 뜻이 아니고… 그냥 너무 좁고 불편할 것 같아서…. 원래 여긴 네 침대이기도 하고….”

“…이제 안 아파?”

호숫가에서 몇 시간 동안 발터와 있었던 일 때문에 하루 정도 기침을 했던 일을 말하는 것이었다. 아. 설마 감기가 옮을까 봐 그러는 걸까. 싸우는 사람들은 몸이 생명일 테니까. 혹여나 괜한 소리를 한 건가 싶어 혜미가 서둘러 입을 열었다.

“아. 내가 그때 감기 걸린 것 때문에 신경 쓰여서 그러는 거면 어쩔 수 없는데….”

발터가 그녀의 뒤통수를 감싸고 입술을 진하게 맞추는 바람에 혜미는 더 이상 말할 기회를 잃었다. 혀를 진하게 섞고 떨어진 그가 끓는 눈동자로 그녀를 보았다.

“…너와 한 침대에 있으면….”

타액에 젖은 입술에서 떨리는 목소리가 샜다.

“이거보다 더한 걸 하고 싶어질까 봐 그랬어.”

“…어, 어?”

“내 티끌만 한 자제력으로는, 도저히 널 안지 않을 자신이 없어서 그랬다고.”

혜미가 빨개진 얼굴로 그의 가슴을 떠밀었다.

“그럼 그냥 가. 내려가서….”

“늦었어. 이제.”

발터가 그녀의 귀에 낮게 속삭이며 혀로 목덜미를 빨았다.

“가… 감기 옮을 수도 있어.”

“난 23년 동안 앓아누운 적이 단 한 번도 없는데. 넌 기억하지 못하겠구나.”

그를 밀어낼 기회를 원천 봉쇄하는 발터의 커다란 몸 아래에서 혜미가 꿀꺽, 마른침을 삼켰다.

“발터.”

“응…?”

“아까 그거 한 번만 더 해 봐.”

“뭐.”

“왼쪽 눈 깜빡이는 거.”

“이렇게?”

발터가 또다시 느릿한 움직임으로 눈꺼풀을 붙였다 떼어 냈다. 쑥 들어간 눈두덩이에서 은근한 열기를 품은 밤색 눈동자가 사라졌다 나타나는 모습을 보자 저절로 입안에 침이 말랐다. 아. 이건 좀 너무 위험하다.

“그냥 하지 않는 게 좋겠어.”

“이렇게?”

발터가 그녀에게 얼굴을 들이대며 재차 눈을 깜빡였다. 얼굴을 피하려는 순간 달콤한 키스가 이어졌다.

세상을 몽땅 얼릴 듯 추운 바람이 부는 밤. 혜미는 발터의 따뜻한 체온 아래에서 막연히 생각했다.

기억을 잃기 전 그녀가 왜 이곳을 떠나고 싶지 않아 했는지 알 것 같다고. 세르노티는 겨울에도 너무나 따스한 곳이었다.

***

“성주님…!”

헐레벌떡 뛰어온 아이가 무릎을 짚은 채 숨을 학학 몰아쉬었다. 얼마나 온 힘을 다해 달려왔는지 얼굴을 새빨갛게 달아오르고, 한겨울임에도 옷깃이 땀에 젖어 척척했다.

“그래. 붉은 여우의 인장이 보였어?”

아이가 마른침을 삼키며 고개를 세차게 끄덕였다.

“네…! 성주님이 말씀하신 대로 풍차 꼭대기에 숨어서 계속 보고 있었는데… 모래바람 사이에서 분명히… 그 깃발이 보였어요…!”

세르노티의 다음번 정예 기사 지망생인 아이는 영지에서 가장 눈이 밝았다.

“숫자는?”

“500명이요…!”

아이가 손바닥을 쫙 펴며 외치자 발터의 뒤에 선 기사들의 표정에 긴장이 서렸다. 500명이면 그들보다 약 200명이 많은 숫자다.

발터는 굳은 입가에 미소를 올리며 아이의 자그마한 어깨를 두드렸다.

“수고했어. 이제 성안에서 어른들을 돕는 거다.”

“그… 그런데요! 아… 고맙습니다!”

“여기 이거 마셔.”

시원한 레몬수를 꿀꺽꿀꺽 들이켠 후, 아이가 음료를 건넨 혜미를 보며 입을 헤 벌렸다.

“헤에… 이든이다.”

죽었다가 살아난 불사조 같은 그녀를 눈앞에서 본 꼬마가 혜미를 신기하게 여기는 것은 당연했다. 아빠는 이든이 황제라는 사실을 그 누구에게도 말하면 안 된다고 했으니 비밀은 지킬 테지만, 그래도 가슴이 뿌듯해지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아 참. 그런데요!”

아차. 하마터면 중요한 사실을 말하지 않을 뻔했다.

“붉은 여우 깃발 뒤에, 또 다른 깃발이 하나 더 보였어요.”

“…어떤 문양이었지?”

심각한 얼굴로 조용히 경청하던 세드릭이 한 발 다가오며 아이에게 물었다.

“검은색으로 된 방패 모양에 창이 요렇게, 요렇게, 사선 모양으로 두 개 꽂혀 있었는데….”

양팔을 엑스자로 겹치며 열심히 설명하는 아이의 앞에서 세드릭이 인상을 찌푸렸다.

“…하르트만?”

동시에 발터의 눈빛이 진해졌다. 아이가 설명한 형태의 인장을 가진 가문은 하르트만밖에 없었다. 하르트만은 선대 황제의 죽음을 막아 내지 못했다는 이유로 변방에 물러난 귀족 가문이었다. 카플란이 쳐들어오며 다른 가문을 끌어들이는 것은 그들이 생각지 못했던 변수였다.

“숫자는?”

발터가 중요한 사실을 물었다. 심각한 그의 표정에 긴장한 아이가 조금 작아진 목소리로 말을 덧붙였다.

“…여우의 수만큼이요.”

카플란의 병력과 하르트만을 합치면 도합 천.

그들이 세르노티의 기사 삼백으로 감당해야 할 상대의 수를 확인하는 순간, 넓은 광장에 잠시 침묵이 흘렀다.

“수고했다. 얼른 가 보렴.”

발터가 그의 머리를 쓸어 주자 뒤돌아 달려가려던 아이가 문득 멈춰 섰다.

“…근데요, 이든.”

추위에 볼이 빨개진 아이가 혜미를 향해 머뭇거리다 입을 열었다. 혜미는 긴장이 서린 표정을 애써 풀며 아이를 향해 눈을 맞추었다. 천 명이라는 숫자는 현실감이 없었다. 단지 세르노티의 기사들의 세 배가 넘는 수라는 것밖에는.

“응.”

“저기 아래 풍차 아래 있는 집이 우리 집이에요. 지붕에 빨간색 흙으로 덮어 놨고요, 저랑 제 동생이 얼마 전에 텃밭에 토끼 우리도 만들어 놨어요.”

“아… 그래…?”

“참. 제 동생은 다섯 살이에요. 이름은 토미구요. 말썽은 많이 부리는데 얼굴은 되게 귀엽게 생겼어요.”

혜미가 아이를 보며 작게 미소 지었다.

“우리가 키우는 토끼가 원래 두 마리였는데 지금은 열네 마리로 불었어요. 그래서 토끼 우리를 만든 거거든요. 지금은 성안으로 다 데리고 왔고요.”

“응. 나도 봤어. 다들 엄청 건강해 보이던데. 그 애들을 너희가 다 키운 거구나?”

“헤헤, 네.”

칭찬을 들은 아이가 자랑스러운 표정으로 웃다가 사뭇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엄마가 그러는데… 전쟁이 길어지면 우리 집이 없어질 수도 있대요. 불에 탈 수도 있대요. 토미가 그 말을 듣고서 자기는 성으로 안 오고 집을 지키겠다고 하는 바람에 엄마한테 되게 혼났어요. 자기는 전쟁 같은 거 싫다고 떼를 써서 아빠도 속상했을 거예요. 아빠도 세르노티니까 싸우는 게 당연한 건데 걔는 진짜 바보 같죠?”

“…….”

“토끼 우리가 없어지면 토미는 아마 바닥에 주저앉아서 엉엉 울 거예요. 하지만 괜찮아요. 토끼 우리는 제가 또 만들어 주면 되니까요. 집이 없어져도 괜찮아요. 아빠가 또 지으면 되니까요. 토미는 정말 바보라서 뭐가 중요한지도 모른다니까요.”

옅은 주근깨가 드리운 콧잔등을 찡긋거리며 아이가 혜미를 보았다. 그녀를 바라보는 아이의 눈동자에는 간절한 바람이 있었다.

“우리 아빠는… 이든을 위해 용감하게 싸우고 돌아오시는 거 맞죠?”

싸늘한 바람이 빨개진 아이의 뺨을 다시 한번 스치고 지나갔다.

“이든은 황제가 될… 아니… 아니다.”

아이가 눈물 어린 표정으로 뒤통수를 긁적이며 환하게 웃었다.

“이든은 진짜 진짜 강하니까… 우린 다 무사할 거 맞죠…?”

아이가 헐레벌떡 달려온 다음 날, 얼어붙은 강의 남쪽에 두 개의 진영이 펼쳐졌다. 세르노티 성을 등지고 왼쪽은 카플란, 오른편은 하르트만이었다.

“하르트만이 이든의 존재를 알고 찾아온 걸까?”

세드릭이 팔짱을 낀 채 허공을 주시하며 혼잣말하듯 중얼거렸다. 발터가 고개를 저었다.

“발트리가 설교할 때 말하던 그 하르트만이라면 이든을 죽이려는 카플란의 계획에 동참했을 리가 없어.”

“…왜?”

혜미가 묻자 발터가 그녀를 향해 설명을 이었다.

“선대 황제 클라웨 8세. 그러니까 이든, 네 아버지가 전쟁에서 사망했을 당시 그를 보위하던 가문이 하르트만이야. 황제는 전투 중에 사망한 걸로 알려져 있지만 사실은 전투를 준비하던 날 밤, 암살당했어. 그때 가장 의심을 받았던 것은 함께 전쟁에 출정했던 하르트만이었는데, 하르트만의 가주는 자신의 결백을 증명하기 위해 황제에게 하사받은 검으로 자진했다.”

혜미가 인상을 찌푸린 채 숨을 잠시 멈추었다가 내쉬었다.

“하르트만의 경우, 선대 황제에 대한 충성심이 발트리만큼이나 엄청났어. 발트리는 아마도 하르트만 역시 생전에 그의 지시를 받은 암살단으로 활동했을 거라고 예측했고.”

“그럼 지금 하르트만을 이끄는 가주는 누군데…?”

세드릭이 낮게 숨을 내쉬며 혜미를 보았다.

“자진한 전대 가주의 부인, 클라라 하르트만.”

“…세드릭 넌 본 적이 있었다고 했나?”

발터의 질문에 세드릭이 고개를 끄덕였다.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부인을 봤을 때는 검술 시합에서였어. 당시에는 남편이 죽어 검은 옷을 입고 시합을 관전했던 게 생각나.”

“…상중인데 시합을 관전하러 갔다고?”

“그녀는 내가 출전하기 전년도 검술 대회 우승자였다. 전대 우승자로서의 예의로 참석한 거지.”

제국 내 검술 대회 우승자라면 실력이 보통은 아니라는 소리였다. 산 너머 또 산이다. 혜미는 하아, 하고 무거운 한숨을 내쉬며 테이블 위에서 머리를 감쌌다.

상대 진영의 숫자를 들은 이후, 세드릭과 발터를 포함한 기사들은 몇 시간 동안이나 이어진 전술 회의를 나누었지만 결론은 나지 않았다. 그들이 계획했던 치고 빠지기 작전은 그 수가 해 볼 만할 때여야지 가능한 전술이었다.

300명이 채 되지 않는 기사들로 천 명의 적을 대항하는 것은 아무것도 모르는 혜미가 생각해도 상식적으로 불가능한 것이었다.

“이야기를 해 보는 건 안 될까…?”

문득 내뱉은 혜미의 말에 발터와 세드릭이 동시에 그녀를 보았다.

“하르트만이 황제를 암살했다는 누명을 쓰고 자살했다고 했지.”

“맞아.”

“만약 내가 그 아내라면 난 지금도… 너무 억울할 것 같아. 남편이 하지도 않은 일 때문에 죽은 거잖아.”

“…그래서?”

“내가 가서, 이야기를 해 볼게. 내게는 교황의 보석이 있으니까. 가서 카플란이 이제껏 한 일들을 직접 말하고 도움을 청하는 건….”

“안 돼.”

“나쁘지 않은 생각이야.”

발터와 세드릭이 동시에 입을 열었다.

“세드릭…!”

발터가 잇새로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 세드릭이 그에게 손을 들어보이며 침착하게 입을 뗐다.

“내가 만났던 하르트만 부인은 정도를 지키는 검사였어. 남편이 자진한 후 자신이 가문을 이끌며 지금껏 이름을 유지하고 있는 걸 보면 그녀의 자존심이 얼마만큼이나 강한지를 알 수 있지. 보통의 가문이라면 누명을 썼다는 그 자체로 와해되고도 남았을 테니까.”

“그래서 지금 이든을 보고 죽으러 가라는 소리인가? 불길에 직접 뛰어들라고? 말이 되는 소리를 해라, 세드릭.”

세드릭이 눈을 가늘게 뜨고 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다.

“뭔가 확실히 이상하다는 느낌이야. 카플란이 하르트만을 끌어들인 건 변수였지만 이해가 안 가는 건 아니다. 우리 영지와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가장 큰 병력이 하르트만이니까. 하지만….”

그가 고개를 저으며 미간을 찌푸렸다.

“카플란과 동시대에 활동한 하르트만이… 황제가 죽은 후, 그들이 어떻게 세력을 넓혔는지 아는 상태에서 그들에게 힘을 보태는 게 말이 안 된다고 생각하지 않아? 선대 황제를 죽인 배후 중 가장 심증이 가는 이들이 카플란인데?”

“하르트만이 설마 우리의 상황을 알고 도와주러 왔을 거라는 개소리를 지껄이려는 건 아니지? 그러려면 움직여도 한참 전에는 움직여야 했다. 카플란이 공식적으로 세르노티를 치기 위해 쳐들어온 지금이 아니라.”

세드릭을 노려보는 발터의 목소리는 조금 낮아졌지만 안에서 들끓는 열기는 여전했다. 그 곁에서 심각한 표정으로 곰곰이 생각을 이어가던 혜미가 고개를 들고 입을 열었다.

“확인하고 싶었을 수도 있잖아.”

발터가 일그러진 얼굴로 그녀를 보았다. 혜미가 진지하게 눈을 빛내며 서둘러 말을 이었다. 머릿속에서 여러 가지 의문이 동시에 떠올랐다.

“카플란이 하르트만에게 도움을 청할 때, 날 죽이러 간다고 순순히 말했을 것 같지는 않아. 그랬다면 문제가 어마어마하게 커지게 되는 걸 아니까.”

죽은 걸로 공표된 황녀가 살아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나라가 들썩거릴 수 있는 문제였다. 거기에다 만약 황녀 살해를 지시한 배후에 크리스티앙이 있었다면 카플란은 쥐도 새도 모르게 멸살 당해도 이상하지 않을 노릇이었다.

“그런데 만약… 하르트만 부인이 뭔가 이상하다는 낌새를 알아차리기라도 했다면…?”

발터와 세드릭은 둘 다 말이 없었다. 그녀의 말에 일리가 있었기 때문이다.

“조용하던 카플란이 본격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한 걸 보고, 하르트만이 뭔가 수상하다는 걸 눈치챘을 수도 있잖아.”

“예를 들자면?”

세드릭이 신중한 눈으로 그녀를 보며 되물었다. 혜미의 목소리가 조금 낮아졌다.

“크리스티앙의 최측근인 카플란이 반드시 죽여야만 할 존재가 세르노티에 있다는 것.”

발터의 주먹에 꽈악 힘이 들어가는 것을 보며 혜미가 결심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입 밖으로 내뱉으니 모든 게 더 선명하게 보였다.

“아무래도 그분을 만나 봐야겠어.”

이렇게 죽으나 저렇게 죽으나 위험한 건 마찬가지라면, 조금이라도 더 가능성이 높은 쪽에 운을 걸어볼 수밖에 없었다. 혜미가 괴로운 표정의 발터를 향해 진지한 얼굴로 물었다.

“하르트만의 가주를 만나려면… 어떻게 해야 해, 발터?”

***

구름에 달도 숨은 어두운 새벽이었다. 소리 없이 달려가는 두 개의 그림자도 보이지 않을 만큼 깜깜한 어둠이었다.

얼어붙은 강을 들키지 않고 도보로 건너는 것은 불가능했다. 남쪽에 위치한 하르트만의 진영 앞에 있는 다리를 건너야만 했다. 하지만 다리 위를 달린다는 것은 적진에게 그들의 움직임을 광고하는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슥. 슥.

날카로운 칼날을 거꾸로 박아 넣은 신발이 얼어붙은 강물을 지치며 움직였다. 혜미는 앞선 그림자의 뒤에 바짝 따라붙었다.

“일이 끝나면 불을 피워. 연기를 보는 순간 작전이 시작될 거야. 최대 예상 소요 시간은 30분. 30분이 지나면 난 무조건 기사들과 함께 카플란을 친다.”

“세드릭.”

떨리던 발터의 목소리를 떠올리며 혜미가 작게 그를 불렀다.

“왜.”

다리 아래 그림자에 몸을 숨긴 채 슥, 하고 얼음을 지치며 그가 퉁명스럽기 짝이 없는 목소리로 내뱉었다. 이런 상황에서도 변함이 없이 세드릭의 태도에 오히려 안도감이 들었다.

“함께 와 줘서 고마워.”

“너희 둘 다 정상적인 사고가 되지 않는 건 아닌 것 같아 다행일 뿐이야. 발터가 끝까지 가겠다고 고집을 피웠다면 정말 짜증이 났을 텐데.”

그녀가 하르트만의 가주를 독대하려면 진영으로 숨어드는 것밖에는 방법이 없었다. 전쟁 중에도 협상은 가능하다지만 지금은 상황이 너무나 급박했다.

발터는 혜미가 결심을 하자마자 그녀와 함께 가겠다고 내뱉었다.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일이었고 혜미 역시도 그러길 바랐지만 세드릭의 생각은 달랐다.

“이든이 아무리 대마법사의 보석을 가지고 있다 한들, 그걸 직접 보지 못한 사람들에게는 그저 돌덩어리로 보일 수도 있다.”

세드릭은 신중한 하르트만 부인을 위해서는 안면이 한 번이라도 있는 자신이 가는 게 맞는 거라며 발터를 설득했다.

“녀석은 네 죽음에 트라우마보다 더한 고통을 겪었으니 이해를 못 하는 건 아니지만.”

어둠 속에서 세드릭이 나지막하게 덧붙이는 말을 들으며 혜미는 조금 전의 일을 떠올렸다.

“…그럼 이따 보자.”

세드릭을 따라 떠나려는 그녀의 몸이 휙 돌아가는 순간 발터가 그녀에게 입을 맞추었다. 찰나의 입맞춤이지만 충분히 뜨거웠다.

“이번엔… 늦지 않을 거야.”

떨리는 목소리로 내뱉는 발터가 어떤 심정인지 알 것만 같아서, 혜미는 차마 그의 얼굴을 오래 쳐다보지도 못하고 고개를 돌릴 수밖에 없었다.

“하르트만의 가주. 클라라 부인 말이야.”

“그래.”

“…어때? 무서운 분이야? 되게 여장부… 스타일이겠지?”

“만나 보면 알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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