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7화 (17/72)

“간이 배 밖으로 튀어 나왔군. 고작 가문 간의 전쟁에 황제의 친위대를 요청하다니 말이야.”

“…송구합니다.”

“권력에 몸이 무거워진 늙은 여우가 사냥에 실패하는 것이 어디 경의 잘못이겠는가.”

마치 제 잘못인 것처럼 고개를 숙이는 에리히를 향해 크리스티앙이 느리게 눈을 깜빡였다. 죽은 태후를 빼다 박은 듯 화려한 금발과 같은 색으로 가지런히 난 눈썹, 쑥 들어간 눈두덩이 아래 숱 많은 속눈썹이 감싸고 있는 호박색 눈동자는 빛을 한껏 머금어 오묘하게 풀어져 있었다.

창백하게 보일 정도로 하얀 피부는 티끌 하나 없었지만 늘 불면에 시달림을 증명하듯 눈 아래 색이 조금 짙었다. 아마 이른 아침인 지금까지 한숨도 자지 못했음이 분명했다.

“하아….”

크리스티앙이 고개를 뒤로 꺾으며 낮게 한숨을 쉬었다. 오만한 각도로 굴곡 없이 완벽하게 뻗은 콧날, 그리고 그 아래에 색이 선명한 붉은 입술은 윗입술이 얇은 갈매기 모양으로 빠져 퇴폐적으로까지 보였다.

스물한 살, 예민함의 극치를 달리는 크리스티앙의 아름다움은 지금이 절정이었다. 마치 제국이 더 이상 확장되기는 불가할 정도로 넓고 광활해진 지금처럼.

“내게 할 말은 그것뿐인가?”

크리스티앙의 나직한 물음에 에리히가 소리 없이 마른침을 삼켰다. 황제의 외모에 불경한 감상을 더한 것이 들키기라도 한 듯 손에 땀이 잡혔다.

“오늘 새벽, 하르트만에서도 역시 전갈이 왔습니다.”

하르트만 역시 시작은 암살단이었으나 불미스러운 일에 휩쓸린 이후, 현재는 조용히 영지를 지키고 있는 귀족 가문 중 하나였다. 말없이 설명을 기다리는 황제를 향해 에리히가 신중한 어투로 말을 이었다.

“카플란의 지원 요청을 받은 후, 폐하의 윤허를 기다리고 있는 상태입니다.”

카플란이 하르트만까지 끌어들인다는 것은 상황이 심상치 않음을 증명하는 것이었다. 크리스티앙의 금빛 눈썹이 티 나지 않게 꿈틀거렸다.

“원하는 대로 행하라 전하게.”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가문끼리의 전쟁은 황제의 허가가 딱히 필요하지 않다는 사실은 모두 알고 있을 텐데. 다들 얼간이처럼 내 눈치를 보는 모습이 가히 좋지는 않단 말이야.”

크리스티앙이 두꺼운 책의 커버를 손가락으로 톡, 톡, 두드리며 다른 한 손으로 이마를 천천히 쓸었다. 미간을 찌푸리며 나른하게 웃는 미소에서 한기가 새어 나오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30년의 인생이 그리 긴 것은 아니었지만 공작가의 장자인 에리히는 그동안 적지 않은 사람을 보아 왔다. 크리스티앙은 그중 여러모로 단연 독보적이었다.

“제국의 법이며 원로원이며 교황청이며. 모두들 괜히 존재하는 게 아닌데….”

크리스티앙이 손에 들고 있던 책을 팔걸이 위에 툭, 하고 귀찮다는 듯 내려놓았다. 통창을 뚫고 비쳐드는 햇살에 세밀한 먼지가 공중으로 소리 없이 부유하는 모습이 보였다.

황제가 읽고 있던 붉고 두꺼운 커버의 책은 클라웨의 오래된 역사서 중 하나로, 에리히는 그가 해당 서적을 최소 스무 번 이상 정독했다는 데에 이름을 걸 수도 있었다. 오랜 시간 이어진 크리스티앙의 불면과 함께하는 것은 독서였다. 황궁 도서관을 채우고 있는 책들 중 황제의 손이 닿지 않은 것은 아마 없을 것이다.

그런 크리스티앙이 최근 원로원에게 내린 명령 중 하나는 정복 전쟁을 이어온 클라웨의 178년 역사를 새로이 편찬하라는 것이었다. 철저한 제국의 시각으로.

“이건 마치 내가 모든 것을 붙잡고 내 마음대로 휘두르는 폭군이라도 된 듯한 기분이잖아.”

“폭군이라니요. 당치 않은 말씀이십니다, 폐하.”

에리히가 진심을 담아 곧바로 부인했다. 크리스티앙은 선대 황제가 전쟁터에서 사망한 후, 열 살의 나이에 황제 대행권을 이어받았다. 태후와 원로원의 섭정을 거쳐야 했던 것은 당연한 일이었지만 크리스티앙의 그 뒤 행보는 달랐다.

꼭두각시 황태자에 불과하리라 생각했던 원로원의 예상을 꺾고, 크리스티앙은 그들 모두를 차례로 제압했다. 잠시 중단되었던 정복 전쟁을 새로이 일으키고 피의 역사로 쓰인 클라웨에 더욱 진한 피를 뿌리며 제국을 부강하게 만들었다.

하이데거 공작가 역시 전쟁에서 공을 세운 후 크리스티앙에게 막강한 권력을 하사받은 가문 중 하나였다.

“단지 저는….”

에리히는 아무도 없는 공간을 다시 한번 둘러 살피고는 목소리를 조금 낮추었다.

“카플란의 행동이 탐탁지 않은 것뿐입니다. 그들이 친위대의 병력까지 이용하여 세르노티를 친다는 것은 확실히 좋지 않은 예감이 듭니다. 폐하.”

“경의 그 예감이 뭔지 내게 말해 봐.”

예상치 못한 크리스티앙의 물음에 에리히가 조금 멈칫했다.

“12년간 쥐 죽은 듯 숨어 살고 있는 죽은 가문 따위를 치는데 하르트만도 모자라 황궁 근위대의 병력까지 요청한 이유가 무엇일지 말이야.”

에리히는 마치 자신을 시험하듯 묻는 크리스티앙의 의도를 알 수 없었다. 그가 아는 황제라면 카플란이 병력을 요청한 상황에서 이미 모든 상황을 눈치채고도 남았어야 했다.

“…아뢰옵기 송구하오나 그들이… 교황의… 대마법사의 보석에 관련해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느낌입니다.”

에리히가 전갈을 받은 후, 날이 밝자마자 서둘러 입궁한 이유도 그것이었다. 그의 판단으로 카플란은 지금 심각한 위기상황에 빠진 것으로 보였다.

“대마법사의 보석이라면….”

크리스티앙이 그를 보며 미간을 슬쩍 모았다. 황금색 눈동자가 순식간에 가늘어졌다.

“18년 전에 불행하게 사망한 제1 황녀… 나의 누이 에데르트에 관한 일이겠군…. 아아. 이런 씨발.”

황제의 입술에서 비틀린 욕설과 낮은 신음이 함께 따라붙었다. 희고 길쭉한 손가락이 무릎에 놓인 푹신한 양털 담요를 거칠게 움켜쥐었다.

“송구합니다.”

에리히가 마른침을 삼키며 입 안을 씹었다. 크리스티앙이 흥분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3년 전에 정리가 끝난 줄 알았건만, 빌어먹을 카플란은 그 일을 제대로 처리하지 못한 게 틀림없었다. 에리히는 이번에야말로 모든 것을 깨끗이 정리하고 일을 지저분하게 만든 카플란마저 숙청할 생각이었다.

“카플란이 요청한 친위대의 병력을 허락하여 주십시오, 폐하. 무슨 수를 써서라도 황녀를 처리하고 교황의 보석을 손에 넣을 것입니다. 저는 그 말씀을 드리려고….”

“에리히 폰 하이데거 대공.”

한 올 한 올, 장인이 심어놓은 듯 아름다운 금빛 눈썹이 슬쩍 위로 치켜 올라갔다. 가늘어진 눈매와 비틀린 입술을 보며 에리히는 시선이 자동으로 아래로 꺾이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바닥을 볼 수는 없었다. 고개를 들라는 크리스티앙의 명령이 있었기 때문이다.

“예, 폐하.”

“자네는 대공 작위를 받은 최고 귀족인 동시에 현재 원로원의 수장이지. 그렇지 않은가?”

되묻는 크리스티앙의 목소리는 웃음기가 싹 빠져 차가웠다.

“…감읍합니다.”

“현재 황궁 친위대의 수는 황금성 안에서 국세를 낭비하고 있는 것들만 약 이천오백. 그중에 오백 정도가 역병으로 죽어 없어졌다고 역사에 기록한들 전혀 이상하지 않을 숫자야. 그렇지 않아?”

“옳은 말씀입니다.”

에리히의 목울대가 아래로 일렁였다. 장갑을 낀 손 안쪽에 땀이 흐르는 것이 느껴졌다. 크리스티앙의 호박색 눈동자가 점점 일그러지고 있었다. 여유 있게 미소 짓던 아름다운 입술에서 소리가 묘하게 높아져 비틀린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처먹은 것은 나이밖에 없어서 입만 열면 개 짖는 소리만 지껄이는 늙은이들의 목을 다 자르고 내가 자네를 그 자리에 올린 것은, 단지 자네가 내 곁에 두고 보기 좋은 허수아비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나?”

“…송구하여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에리히는 저절로 한쪽 무릎을 바닥에 꿇은 후 고개를 바닥에 닿을 듯 숙였다. 그의 눈에 크리스티앙이 덮고 있던 하얀 무릎 담요가 휙 날아와 계단 아래로 떨어졌다.

“할 말이 없어? 그렇다면 보기 좋은 그 두 다리를 잘라 버리기 전에 당장 일어나서 입 닥치고 내 말이나 듣는 게 어떨까.”

“폐, 폐… 하…!”

고개를 든 에리히의 시선이 굳었다. 커다란 의자 아래, 정확히 말하면 가운 새로 벌어진 크리스티앙의 두 다리 사이에서 숨죽인 채 덜덜 떨고 있는 시녀를 본 탓이었다.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여자는 숨소리가 새어 나올까 두려워 두 손으로 입을 틀어막은 채였다.

“일어나라고 하지 않았나, 대공.”

에리히는 자리에서 일어난 후, 제 무지를 증오하며 입 안의 살을 피가 나게 씹었다. 크리스티앙의 반응이 묘하게 평소와 다르다는 것을 알아채지 못한 스스로의 멍청함에 온몸의 피가 차갑게 식는 기분이었다. 시녀가 있는 것도 알아채지 못한 채 그의 앞에서 입을 함부로 놀린 것도 모자라 교황의 보석과 이미 죽은 걸로 알려진 황녀의 이야기까지 꺼냈다.

크리스티앙이 당장 그의 목을 자른다 한들 이상하지 않은 결과였다. 에리히의 손이 떨렸다.

“내게 주인의 먹이를 기다리는 애완견은 필요 없어. 나는 주인의 명령 없이도 그 기분을 알아채고 사냥감을 물어 오는 사냥개를 원하네. 그 사냥개가 품종까지 좋으면 더욱 완벽하지. 마치 경처럼 말일세.”

크리스티앙이 그를 보며 눈을 가늘게 떴다. 에리히는 입술을 씹으며 황제를 향해 작게 속삭이듯 내뱉었다.

“무지를 벌하여 주십시오. 어떠한 벌이든 달게 받겠습니다. 폐하.”

“내가 어찌 경을 벌하겠어. 내 손으로 원로원의 수장 자리에 앉힌 나의 소중한 부하를. 그거야말로 스스로의 얼굴에 침을 뱉는 우스운 꼴이 아니겠는가.”

송구하다는 말을 내뱉는 것조차 송구해 에리히는 그저 황제의 분부를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등줄기에 땀이 흐르고 뱃가죽이 뻣뻣하게 당겼다.

“에리히.”

“예, 폐하.”

“자네의 충직함은 족히 알고 있으니. 앞으로는 나를 실망시키지 말아 줘.”

“…제국과 폐하를 위해 목숨을 바치겠습니다.”

“누가 들으면 이곳이 피 터지는 전쟁터라도 되는 줄 알겠어. 하하.”

크리스티앙이 가볍게 웃으며 시선을 슬쩍 아래로 내렸다. 그의 다리 사이에 납작 엎드려 덜덜 떨고 있는 나체의 여자가 보였다.

“너. 이름이 뭐라고 했지?”

“…라 …라티아입니다.”

“라티아.”

황제의 부름에 궁녀가 고개를 푹 숙인 채, 양손으로 가슴을 가리고 몸을 떨었다. 작은 입술과 얼굴, 속눈썹과 머리카락까지 미끈거리는 정액이 튀어 엉망이었다. 에리히의 등장 이후에도, 그녀는 담요 안에서 크리스티앙의 성기를 입에 물고 있어야 했다.

대마법사의 보석. 그리고 사망한 그의 누이 이야기를 꺼낼 때 크리스티앙은 그녀의 입 안에 강하게 사정했다. 놀라서 고개를 뒤로 물리는 바람에 얼굴이 엉망진창이 되었지만 지금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니었다.

“덕분에 즐거웠다, 라티아.”

크리스티앙이 그녀를 보며 미소 띤 얼굴로 다정히 속삭였다. 젊고 눈부시게 아름다운 황제의 눈에 들기 위해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거울을 보며 단장하던 신입 시녀는 이제 그를 바라보기만 해도 목이 졸리는 것 같은 두려움만을 느낄 뿐이었다.

아무리 나이가 많지 않다 한들 그녀도 알 건 알았다. 황제와 대공이 나눈 이야기는 심상치 않았다. 듣지 말아야 할 이야기를 들어 버렸다는 사실에 온몸이 덜덜 떨리게 두려웠다.

“그만 가 보렴.”

“예? 그럼 저는 이제 물러가도….”

황제가 눈물 젖은 얼굴의 그녀를 향해 그러라는 뜻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정신을 차린 라티아는 자신의 옷을 움켜쥐고 비틀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난 후, 후들거리는 다리로 간신히 계단을 밟았다.

황제의 앞에서 발을 잘못 디뎌 넘어지는 꼴을 보이는 불상사는 없어야 했다. 이곳을 나가면 넓은 궁의 구석에 숨어 평생 바닥을 닦는 청소만 할 것이다. 황제의 그림자도 밟지 않을 각오로 한 걸음, 숨소리조차 내지 않을 각오로 다시 한번 한 걸음, 마침내 그녀의 자그마한 두 발이 무사히 바닥을 밟았을 때였다.

휙!

에리히의 허리춤에 걸려 있던 검이 검집에서 분리됨과 동시에 그녀의 몸이 옆으로 쓰러졌다. 시녀는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쓰러져 숨을 거두었다. 붉은 피가 매끈한 바닥에 소리 없이 퍼져 나갔다.

“무례를 용서하십시오, 폐하.”

“저런.”

에리히가 쓰게 내뱉으며 피 묻은 검을 집어넣자 크리스티앙이 작게 혀를 찼다.

“귀여운 아이였는데 안됐어.”

가늘게 한숨 쉬는 그의 목소리에서 안타까움이나 동정은 찾을 수 없었다.

“…처음 치고는 좆도 꽤 잘 빨았는데.”

중얼거리듯 내뱉는 혼잣말이 또렷하게 들렸다. 크리스티앙이 나체에 가운만 걸친 채, 자리에서 일어나 터벅, 터벅, 계단을 내려왔다. 에리히는 벌어진 가운 사이로 드러난 황제의 눈부신 나체에 감히 시선을 내리지 않으려 애를 쓰며 속삭이듯 고했다.

“이 시녀는 황제 폐하께 마지막으로 이름을 불리고 죽은 것을 영광으로 알아야 할 것입니다.”

벌어진 가운의 허리끈을 돌려 매던 크리스티앙이 손을 멈추고 그를 빤히 쏘아보았다. 찰나의 침묵이 둘 사이에 흘렀다. 날카롭게 깨진 유리를 밟고 선 느낌이었다.

에리히가 긴장에 땀이 나는 손을 쥐었다 폈을 때, 마침내 피처럼 붉은 크리스티앙의 입술 새로 청량한 웃음이 커다랗게 터져 나갔다.

“하하…!”

창으로 비쳐 든 햇살이 그의 옆얼굴을 환하게 비추었다. 에리히는 천진하게까지 보이는 크리스티앙의 웃음을 보며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몰라 마른침만 삼켰다.

“경은 지금 진심이군.”

시녀의 시체를 지나 그의 코앞까지 다가온 황제가 고개를 모로 기울이며 아랫입술을 살짝 씹었다.

“이래서 나는 경이 참 맘에 들어.”

“…부족한 저를 늘 용서하시니 몸 둘 바를 모를 따름입니다.”

크리스티앙이 그를 격려하듯 어깨를 두드렸다. 길쭉하고 아름다운 손가락이 행진하듯 옷자락에 가볍게 내려앉았을 뿐인데도 허리가 긴장에 빳빳하게 굳었다. 에리히는 자세를 흐트러뜨리지 않으려 다리에 힘을 꽉 주었다.

“온 김에 테라스로 올라가서 나와 아침 식사를 같이 하지. 아메티스를 발아래 내려다보며 먹는 아침은 환상적이거든.”

“아메티스뿐만이 아니라 클라웨 제국 전체가 폐하의 발밑입니다.”

크리스티앙이 웃음기가 남은 말투로 그와 어깨동무를 하고 걸었다.

“알았으니까 그만 가자고. 갑자기 식욕이 솟구치는데? 오늘은 덜 익힌 송아지 고기가 당겨. 경도 고기를 좋아하던가?”

“예.”

크리스티앙이 맨발로 걸을 때마다 반질반질한 돌바닥에 피 묻은 발자국이 길게 늘어졌다.

“식사를 하면서 곧 있을 결혼 예식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는 것도 좋겠군. 나의 비는 잘 있지?”

“입궁할 날을 기다리며 매일같이 교육을 받고 있는 중입니다. 식에 대해서는 폐하께서 신경 쓸 일이 없도록 확실히 준비하겠습니다.”

“아. 그런데 경.”

도서관을 걸어 나가던 크리스티앙이 문득 생각났다는 듯 걸음을 멈추고 에리히를 보았다. 묘하게 눈을 찌푸리는 크리스티앙을 마주하고 선 에리히가 소리 없이 마른침을 삼켰다.

“만일 아까 내 다리 사이에서 나를 즐겁게 해 주던 여자가 나의 예비 신부….”

가늘어진 황금빛 눈동자가 태양을 가득 담고 소리 없이 빛났다.

“그러니까 경의 사랑스러운 막내 누이였다면.”

그의 귀에 얼굴을 가까이 대고 속삭이듯 묻는 크리스티앙의 목소리에 즐거움이 담겼다.

“그래도 자네는 그녀를 단칼에 베었겠는가?”

에리히는 대답을 주저하지 않았다. 주저할 필요가 느껴지지 않았다. 답을 들은 크리스티앙의 만족스러운 웃음소리가 넓은 공간에 울림을 주며 퍼져 나갔다.

***

기다란 테이블 맨 끄트머리에서 세드릭이 끝이 뾰족한 대나무 지시대로 양피지를 툭, 가볍게 쳤다.

“카플란은 이번에 분명 이곳을 이용할 거야.”

따끈한 차를 훅훅 불어 마시며 혜미가 코를 훌쩍였다. 한겨울의 날씨는 점점 더 추워지고 있었다. 레나의 말에 따르면 세르노티의 겨울 중 가장 춥다는 열흘이 다가오는 중이었다.

“지금까지는 트리바 산맥을 통해 성으로 급습하는 방법을 썼다면, 이번엔 강 아래에 진을 치고 전면전을 준비할 가능성이 커.”

크림색 양피지에는 세르노티의 영지가 섬세하게 그려져 있었다. 테이블 위에 숯으로 슥슥 그려내던 발터와는 다른 필체로 봤을 때 그것은 아마도 세드릭의 작품이 분명한 것 같았다.

발터는 이번 작전 계획을 모두 세드릭에게 맡겼고, 혜미를 포함한 기사들의 이견은 없었다. 그들 중 세드릭보다 신중한 이는 없을 거라 생각한 까닭이었다.

세드릭이 양피지 위에 지시대로 동그라미를 그리며 설명을 이었다.

“군대의 수가 많을수록 이쪽이 더 편할 테니까. 전쟁이 길어질 경우를 대비해 물자를 끌고 온다면 더더욱 그렇겠지.”

그가 가리키고 있는 곳은 킬다 호수가 이어지는 커다란 강이었다. 강 아래편에는 영지민들이 가꾸는 농지와 평지가 펼쳐져 있고 그 위에는 트리바 산맥과 울창한 숲으로 둘러싸인 세르노티성이 있다. 오래전 수업 시간에 배운 희미한 지식을 토대로 하자면 성은 완벽한 배산임수의 위치였다.

“영지민들이 살고 있는 곳은 주로 베른강의 아래쪽. 강의 위와 아래를 잇는 다리가 있긴 하지만 적들이 군대를 끌고 이곳을 건너기엔 폭이 너무 좁아 무리가 있어.”

그런데 어떻게 저 강을 건너서 온다는 걸까. 설마 배를 타고 온다는 이야기는 아닐 텐데.

의문 어린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는 혜미의 곁에서 발터가 낮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강이 얼어붙는 시간을 이용하겠군.”

‘…강이 얼어?’

혜미가 그녀의 맞은편에 앉아 있는 레나에게 눈짓하며 작게 입 모양으로 물었다.

‘아주 꽝꽝.’

레나가 역시나 작게 입 모양으로 답하는 걸 보며 혜미가 소리 없이 숨을 들이쉬었다.

“하지만 그들이 세르노티의 사람이 아니라면 그 사실을 알 리가 없….”

말을 잇던 기사 중 하나가 끝을 흐렸다. 페터가 생각난 까닭이었다.

“그동안 세작을 통해 세르노티의 기후에 대해선 충분히 조사했을 테니. 곧 베른강이 얼어붙는다는 사실은 알고도 남을 거야.”

세드릭이 까칠한 표정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세르노티에서 강이 얼어붙을 정도의 한파는 1년 중 딱 열흘. 카플란은 아마 그 시기에 얼어붙은 강을 넘어 쳐들어올 것이 분명했다.

“카플란은 우리보다 확실히 병력의 수가 많아. 세르노티에서 노인과 아이를 제외하고 싸울 수 있는 기사의 수는 현재 300명이 채 안 된다. 만약 카플란이 우리보다 훨씬 많은 수를 끌고 온다면 확실한 작전을 세우지 않으면 안 돼.”

“일단 영지민들은 모두 성으로 불러들이는 편이 낫겠군.”

발터의 무거운 말에 세드릭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성주가 나서는 편이 일이 빨리 진행될 테니까 네가 수고 좀 해 줘.”

“그럼 작전은 어떻게 할 생각이야?”

발터가 그에게 가장 중요한 질문을 했다.

“내 생각은….”

세드릭이 둘러앉은 기사들을 슥, 눈으로 훑으며 소리 없이 마른침을 삼켰다. 어려운 작전을 말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긴장되는 것은 냉정한 세드릭이라도 매한가지였다.

“치고 빠지기다.”

자리에 앉은 기사들이 그에게 동의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 방법밖에는 없지.”

그가 의미하는 바를 알 수 없는 혜미만이 영문 모를 표정으로 눈을 껌뻑일 뿐이었다.

“인원은 약 50명 정도로 생각하고 있어. 우리가 다 가는 건 안 돼. 몇 명만 선발대로 나서서 기사들을 이끌고 나머지는 성에서의 공격을 준비한다.”

“응. 내가 갈게.”

세드릭이 말이 끝나자마자 레나가 선뜻 손을 들며 입을 열었다.

“솔직히 나보다 말을 빨리 달리는 사람 이 중에 있어? 내가 치러 갈 테니까 뒤만 확실히 봐 줘.”

“나도 낀다.”

“나도 갈래. 몸이 아주 근질근질해서 견딜 수가 있어야지.”

그녀 외에도 대여섯이 목소리를 높이며 말을 얹었다.

“좋아. 그럼 레나와 토비아스 그리고 얀이 나와 함께 쫓는 매가 되어 선발대로 간다.”

“왜 나는 빼지?”

“넌 너무 무겁잖아, 빈센트! 갑옷까지 다 합하면 우리 셋보다 무게가 많이 나갈 텐데. 넌 널 태울 말한테 미안하지도 않아?”

“난 무거운 게 아니라 큰 거다.”

“그게 그거라구.”

레나가 2미터 거구의 빈센트를 향해 작게 혀를 찼다. 세드릭이 지시대를 내려놓으며 혜미와 발터에게 번갈아 눈길을 주었다.

“이든은 발터와 함께 성을 지키고. 이해했지?”

혜미가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저기….”

일단 그들이 말하는 치고 빠지기 작전이 일단 뭔지 알아야 이해했다는 흉내라도 낼 수 있었다. 도움을 청하는 눈으로 발터를 보자 그가 혜미를 향해 낮은 목소리로 설명했다.

“적은 수의 선두 부대가 먼저 적진을 급습한 후, 사기가 높아진 상대 병력을 끌고 우리 쪽 진영으로 들어오는 거야.”

혜미와 그동안 함께 있어 그녀의 상태를 어느 정도 눈치챈 기사들도 한마디씩 거들었다.

“그래서 말을 잘 다루는 사람들이 선두에 서는 게 중요해. 치고 빠지는 데 가장 관건은 스피드거든. 매가 괜히 빠른 게 아니잖아.”

“웬만큼 싸우는 척을 하다가 후퇴하면 적은 우리를 따라붙게 되어 있어. 병력의 차이가 나니까 압도적으로 우세를 느끼지.”

“아아. 그렇겠구나.”

혜미가 그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 그들을 완전히 끌고 들어왔을 때, 우리 진영에서 활을 우수수 쏴서 다 죽여 버리는 거지. 활은 성벽에 숨어서 쏠 수도 있으니까, 적보다 우리의 숫자가 적을 때 훨씬 유리해.”

“사정거리가 길면 아무리 명사수라도 적을 맞히기가 힘들지 않을까?”

아무리 단련된 스나이퍼라도 죽이는 건 한 사람씩이었다. 혜미가 조심스레 묻자 누군가가 걱정 말라는 듯 목소리를 높였다.

“하늘에서 수백 개의 화살이 계속 떨어지면 피하는 게 더 어렵지!”

혜미가 문득 인상을 썼다. 그들이 말하는 작전이 어떤 것을 말하는지 예상이 간 까닭이었다.

‘설마…?’

영화에서 본 적이 있는 것 같았다. 선두에 선 사람들이 적을 끌고 들어오면 그들을 모조리 죽이기 위해서 화살을 비처럼 쏘아야 했다. 적군과 아군을 분리해서 한 명씩 쏴 죽일 시간이 없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자살 공격인 셈이었다.

“안 돼.”

혜미가 벌떡 일어나 주먹을 꽉 쥐고 고개를 저었다. 그녀의 맞은편에서 레나가 괜찮다는 표정으로 살짝 웃어 보였지만 혜미의 불안만 가중될 뿐이었다. 그녀가 고개를 세차게 흔들었다.

“…그럼 치고 빠지는 사람들이 너무 위험하잖아…!”

세드릭이 그런 그녀를 보며 건조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전쟁에서는 희생이 불가피하다, 이든.”

그다음 이어지는 말투는 조금 더 예리했다.

“선두에 서서 사냥꾼 노릇을 하는 이들이 가장 위험하다는 사실은 여기 있는 너뿐만 아니라 모두들 알고 있지.”

혜미의 눈동자가 소리 없이 흔들렸다.

“다 알고서도 한다고 하는 거야. 모두들.”

기사들이 그 자리에 얼어붙은 혜미를 향해 웃으며 목소리를 높였다.

“죽기 아니면 까무러치기로 한 번 싸워 보는 거지, 이든. 이럴 때 아니면 우리가 언제 검을 휘둘러 보겠어?”

“설마 우릴 못 믿는 거야? 걱정하지 말고 넌 발터와 함께 성을 지키라고. 카플란은 우리가 보란 듯이 다 끌고 와 줄 테니까.”

“네 복수는 우리가 해 준다! 징글징글한 놈들. 이든이 아기였을 때부터 죽이려 들었다고 하니까, 지금까지 도대체 몇 번째야?”

또다시 가슴속에서 뜨끈한 것이 울컥거렸다. 그녀의 나이와 별반 다르지 않은 기사들이 그녀를 위해 목소리를 높이는 것을 보자 머리가 멍했다. 어떻게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나설 수 있을까. 그들을 움직이게 하는 의지는 어디에서 나오는 걸까.

“…발터.”

혜미가 고개를 돌려 발터를 보았다. 도움을 청하는 듯한 흔들리는 눈동자를 보며 발터가 나지막하게 입을 열었다.

“여기 있는 우리 모두는 스스로가 매의 수호자, 세르노티라는 사실에 자긍심을 가지고 있는 이들이다, 이든.”

그렇지 않았다면 이든이 시체 같은 상태로 잠든 지난 3년간 세르노티는 와해되고도 남았어야 했다.

“우리는 존재 의미를 스스로 찾는 것뿐이야.”

씩 웃는 기사들의 눈동자에 담긴 것은 긴장감과 두려움을 뛰어넘는 무언가였다.

혜미의 입술에서 깊은 한숨이 저절로 길게 흘렀다. 이 자리에 있는 모두는 지금 그녀를 믿고 있었다. 그것이 기억을 잃기 전 자신을 향한 믿음이라고 해도 혜미가 그들의 진심을 외면하고 도망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선두에는 내가 설게.”

“이든, 그러지 않아도 다들 충분히 훈련된 상황이라….”

“아니.”

혜미가 발터의 말을 낮게 잘랐다.

“치고 빠지기 작전, 나도 뭔지 대충 알겠거든.”

그녀가 떨리는 목소리를 애써 가다듬었다. 그리고 허리에 차고 있던 검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손잡이에서 붉은 보석이 희미하게 빛을 냈다.

“적들이 쫓아오게 하는데 가장 좋은 미끼는 바로 나잖아. 그들이 목표로 하는 게 이걸 가지고 있는 사람일 테니까.”

기사들이 모두 숨을 죽이고 그녀를 보았다.

“선두에는 내가 설 테니까…. 카플란이든 누구든 모조리 끌고 오자. 대신….”

혜미는 목이 부어오르는 느낌에 마른침을 삼켰다.

“아무도 죽지 마. 아무도 다치지 마.”

그녀는 말없이 자신을 뚫어져라 바라보는 기사들에게 눈을 맞추며 입 안을 꽉 깨물었다. 아일라가 칼을 맞던 모습을 상상하자 가슴이 또다시 꽉 죄듯이 아파 왔다.

“나 부탁하는 거 아니거든…?”

자신이 이런 말을 하게 될 줄은 몰랐지만 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쓴웃음마저 났다. 혜미가 깊게 한숨을 내쉰 후, 그들을 보고 또렷하게 내뱉었다.

“…이건 명령이야.”

***

“하하하!”

으깬 감자와 치즈를 섞은 샐러드를 그릇에 퍼다 나르며 레나가 눈꼬리를 접으며 맑은 목소리로 웃었다.

“이든은 정말 우리가 다 죽으러 가는 줄 알았나 봐.”

“덕분에 내 코끝이 다 찡했지 뭐야.”

“그녀는 좋은 황제가 될 거다.”

평소에는 말수가 무척이나 적은 빈센트마저 그녀를 향해 부드럽게 웃었다.

“아. 하하….”

오늘 저녁 식사 화제의 주인공인 혜미는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은 심정이었다.

“먹어.”

발터가 턱, 하고 그녀의 접시에 두툼하게 썰린 고기를 얹었다. 혜미가 고개를 휙 돌려 흰 눈으로 그를 째려보자 발터가 눈썹을 들어 올렸다.

“왜. 더 줘?”

“아니.”

“근데 왜 그렇게 봐.”

세드릭이 말하는 작전이 자살 공격인 줄 알았던 자신의 예상이 살짝 오버한 거였다는 사실을 그녀는 나중에야 알았다. 발터가 후에 구스 할아범이 만든 갑옷은 세르노티의 화살이 뚫지 못하게 특수 제작되어 있다고 알려 줬을 때 혜미가 느낀 감정은 엄청난 안도감 그리고 뒤이어 몰려온 지독한 부끄러움이었다.

“아까 내가 잘못 짚은 거 알았으면 빨리 말해 줬어야지…!”

혜미가 인상을 쓰며 작게 그를 추궁했지만 발터는 태연했다. 짭짤하고 맛있는 냄새가 나는 적갈색 소스를 국자로 휘저으며 어깨를 으쓱할 뿐이었다.

“그 상황에서 말할 분위기가 아닌 것 같아서.”

“난 진짜 쪽팔려 죽는 줄 알았다고…!”

그를 따라 뜨거운 소스를 썰린 고기 위에 끼얹으면서도 혜미는 입을 멈추지 않았다.

“다른 애들이 감동 받고 있는 상황에 찬물 뿌리고 싶지 않았을 뿐이야. 아마 다들 같은 생각이었을걸?”

혜미는 슬쩍 웃는 그의 허벅다리를 꼬집어 주려다가 그만두었다. 테이블에 쭉 늘어앉은 기사들은 왁자지껄하게 웃음을 터뜨리며 아직도 아까의 일을 신나게 떠드느라 정신이 없었다.

“아무도 죽지 말라고 진지하게 이든이 외치는데, 나 진짜 웃기면서도 가슴이 울컥하더라니까.”

“나 부탁하는 거 아니거든!”

붉은 기가 도는 곱슬곱슬한 갈색 머리의 기사, 얀이 테이블을 탁, 소리 나게 손바닥으로 짚었다. 다분히 극적인 말투였다. 강아지 같은 눈망울을 모두에게 돌리자 누군가 고양된 목소리로 그의 말을 받았다.

“이건, 명령이야…!”

와하하 크게 웃는 기사들의 웃음소리를 들으며 혜미가 눈을 질끈 감았다 떴다.

망했다. 이걸로 완전한 흑역사 하나가 생성된 것이 분명했다.

“저기 다들 그만 좀….”

듣다못해 끼어들려 했지만 신이 난 기사들을 막을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역시 이든은 누가 뭐래도 이든이지 않아? 기억 안 돌아왔다고 해서 걱정했는데 괜한 염려였어.”

“이든이 우리한테 한 처음 명령이 죽지도, 다치지도 말라는 거라니. 와. 나 일기장에 써 놨잖아. 나중에 이든이 황제 됐을 때 서기관 시켜서 기록해 놓으라고 할 거야.”

역시 이 자리를 뜨는 게 나을 것 같았다. 안 그러면 얼굴이 불타는 고구마처럼 빨개질 게 뻔했다.

“난 아일라에게 음식을 좀 가져다주러 갔다 올게.”

“그럴 필요 없어.”

“…응? 왜?”

혜미가 의문 섞인 눈으로 세드릭을 바라보자 건조한 대답이 돌아왔다.

“아일라는 오늘부터 모두와 함께 식사할 거니까.”

“어! 아일라다!”

고개를 돌리니 입구에서 머뭇거리고 있는 아일라의 모습이 보였다. 기사들이 웅성거리며 고개를 학처럼 길게 쭉 뺐다.

“이제 괜찮은 거야?”

아일라가 성큼 안으로 들어오지 못하고 망설이자 세드릭이 특유의 날카로운 말투로 입을 열었다.

“몸을 움직일 수 있는데 언제까지 다른 이들의 시중을 받으며 방 안에서 식사를 해결할 생각은 아니었겠지. 카플란이 언제 쳐들어올지 모르는 이 상황에 그만큼 한가한 사람은 그 누구도 없다.”

그의 시선은 아일라를 보지도 않은 채 접시를 향해 있었다. 어쩔 줄 모르고 당황해하는 그녀의 눈빛이 멀리서도 보이는 것 같았다.

‘진짜… 어쩜 저렇게 맞는 말도 재수 없게 할까….’

혜미는 아일라에게 이유 없이 쌀쌀맞게 구는 세드릭을 몰래 째려본 후, 그녀에게 손을 번쩍 들었다.

“아일라! 여기! 이리 와서 앉아!”

우물쭈물하던 아일라가 마침내 혜미의 옆자리에 조심스레 의자를 빼고 앉았다. 꼿꼿이 허리를 세우고 나이프를 움직이는 세드릭과는 대각선에 있는 위치였다.

“이제 몸은 좀 괜찮아? 걱정 진짜 많이 했다, 아일라.”

“그동안 어떻게 지냈던 거야? 카플란엔 어떻게 잠입했던 거고? 이야기 좀 해 주라. 우리 완전 궁금해 죽을 뻔했어!”

부상을 입고 회복하는 동안 아일라는 거의 방 밖으로 나오지 않았기 때문에 기사들이 그녀의 근황을 궁금해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나… 나중에요.”

아일라는 왁자지껄하게 소리를 높이는 그들에게 뭐라고 대답을 해야 할지 몰라 작게 속삭이며 접시에 음식을 대충 담았다.

“몸을 치료할 생각이 있긴 한 거니, 아일라?”

세드릭이 잿빛 시선을 그녀에게 흘깃 던졌다.

“…네?”

차분하지만 차가운 세드릭의 말투에 접시를 내려놓던 아일라의 손이 가늘게 떨렸다.

“충분한 영양 섭취는 치료에 기본이다. 지금 네 접시를 보면 빨리 회복해야겠다는 의지가 전혀 보이지 않는 걸로 생각되는데. 다른 사람들에게 계속 민폐를 끼칠 생각은 아닐 테고.”

“저기, 세드릭…!”

보다 못한 혜미가 목소리를 높였다. 세드릭 앞에서 죄지은 사람처럼 아무 말도 못 하고 쫄아 있는 아일라는 보는 것도 힘이 들었고, 도대체 그가 그녀에게 왜 이렇게 냉정하게 구는 건지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왜?”

세드릭이 그녀를 보며 날카로운 눈빛으로 되물었다. 잿빛 눈썹이 비딱하게 위를 향했다. 내가 틀린 말 한 거냐는 그의 눈빛을 보니 또다시 슬그머니 기가 죽었다. 혜미는 그의 손에 쥐어진 빛나는 은색 나이프에 시선을 내리지 않으려 노력하며 목소리를 애써 높였다.

“흠. 원래 심하게 앓고 나면 입맛이 없는 건 당연한 거 아니야?”

말을 편하게 하라고 한 건 본인이었으니 설마 식기로 찌르진 않겠지. 세드릭이 그녀를 향해 어이가 없다는 듯 코웃음을 쳤다.

“다른 누구도 아닌 네 입에서 나올 말은 아닌 것 같은데.”

“내… 내가… 뭘?”

“배탈이 심하게 나서 아무것도 먹지 말라고 했을 때도 몰래 뭘 주워 먹었다가 새벽에 나 죽는다고 소리를 질러 소동을 피운 건 생각이 안 나는 모양이군.”

세드릭이 가볍게 혀를 차며 고개를 흔들자 혜미의 얼굴이 벌게졌다.

…진짜일까?

휙, 고개를 돌려 발터를 보자 그가 보일 듯 말 듯 고개를 까딱했다. 발터 역시 못마땅한 눈빛이었으나 세드릭의 사실 적시에는 할 말이 없는 것으로 보였다. 혜미는 그때나 지금이나 넘치는 자신의 식욕을 원망하며 애써 말을 돌렸다.

“지금 그거랑 네가 아일라를 쥐 잡듯이 잡는 거랑 무슨 관계가 있다는 거야…?”

“아니에요, 이든.”

옆에서 간신히 입을 뗀 것은 아일라였다. 그녀가 테이블 중앙에 놓인 트레이에서 제 접시 위로 음식을 가득 채워 담으며 말을 이었다.

“세드릭 님은 절 잡으려 그러는 게 아니라, 그저 제가 여… 염려되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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