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6화 (16/72)
  • 발터가 그를 보지도 않고 내뱉었고, 세드릭은 왔던 것보다 더욱 빠른 속도로 시야에서 사라져 버렸다.

    “아아. 왠지 열 받은 것 같은데….”

    나이 이야기는 꺼내지 말 걸 그랬다.

    “신경 쓸 거 없어. 원래부터 넌 세드릭 속을 잘 긁었으니까.”

    “저기, 이번 건 내가 한 게 아닌 것 같거든…?”

    “잘 못 하는 것 같아서 내가 대신 해 준 것뿐이야.”

    발터가 그녀를 향해 흐릿한 미소를 지었다. 그녀와 둘만 있고 싶었다는 시커먼 속내는 마음속 깊이 감추었다. 앞으로 이든은 더욱 더, 황제의 자리에 점점 더 가까워지게 될 것이다.

    오늘 그녀가 내린 결정이 그 첫걸음이라는 것을 세드릭도, 그도 잘 알고 있었다. 지금 화려하게 지는 붉은 태양 뒤에 다시금 내일의 태양이 뜨리라는 것도. 그녀가 가장 빛나는 자리에 오르는 그날을 위해서라면 지금부터라도 남아 있는 그의 마음 따위는 정리하는 게 맞았다.

    그 마음이라는 것이 이성에 따라 움직여 주기만 한다면 얼마나 좋을까.

    찰랑.

    바람이 불어 바싹 마른 나뭇잎 하나가 휘잉 날았다. 발터가 눈을 살짝 찌푸리며 고개를 흔들었다. 갈색 이파리가 떨어지는 모습과 그의 입술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혜미가 조금 작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발터.”

    “응.”

    “세드릭에게는 말 못 했는데.”

    혜미가 잠시 망설이다 나직하게 혼잣말하듯 덧붙였다.

    “…솔직히 나 싸우는 거 무섭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자신만만하게 내뱉었지만 두려운 게 사실이었다. 전쟁이라니. 아무리 그녀가 분단국가에서 태어났다고 해도 이제껏 실제로 겪어야 한다고는 한 번도 상상해 본 적 없는 일이다.

    “두려운데도… 무서워 미치겠는데도 움직일 수밖에 없는 심정이 이런 건가 싶어.”

    “네가 카플란과 싸우겠다고 결심한 이유는 아일라 때문인가?”

    “…무모하다고 생각해?”

    “너답다고 생각해.”

    낮게 내뱉는 발터를 향해 혜미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 넌 잘못 알고 있어. 기억을 잃기 전에 내가 어땠는지 모르겠지만, 나 사실 엄청 겁쟁이거든.”

    “…다섯 살 때, 처음 성에 왔던 너도 굉장히 겁이 많았어. 일주일 동안 아버지의 바짓가랑이에 숨어서 날 훔쳐봤었거든.”

    “치. 그거랑 이거랑 어떻게 같아?”

    혜미가 힘 빠진 입술로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내 눈에 넌 기억을 잃기 전이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으니까.”

    “…….”

    말 없는 그녀의 곁에서 발터가 다시 한번 자그마한 돌멩이를 주워들더니 잔잔한 수면 위로 가볍게 띄웠다. 이번엔 다섯 번을 가볍게 넘어간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혜미가 문득 눈을 가늘게 떴다.

    “와아.”

    태양이 온통 주변을 붉게 물들이고 있었다. 조용한 수면이 온통 빛을 반사하며 반짝거렸다. 그녀는 작게 감탄하며 수면 아래로 서서히 자취를 감추는 커다란 태양을 바라보았다. 낙조는 숨이 멎을 정도로 근사했다. 발터가 왜 그녀에게 호숫가를 보여 주고 싶어 했는지 알 것 같은 기분이었다.

    “네 말이 맞았어. 여기 정말 안 왔으면 큰일 날 뻔….”

    혜미가 문득 말을 멈추었다. 그녀의 뺨에 떨리는 입술이 닿았다가 아쉬운 듯 떨어진 탓이었다. 천천히 고개를 돌리자 얼굴에 붉은 노을을 잔뜩 담은 발터가 있었다. 그가 색이 짙은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미안해.”

    잔뜩 갈라진 목소리가 그의 성대를 비집었다.

    “그냥… 존경의 뜻이라고 생각해 줘.”

    거짓말. 완벽한 거짓이다. 조금 전까지, 그녀를 여자가 아닌 주군으로 대해야 한다고 다짐했던 그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애끓는 눈빛조차 감추지 않는 자신은 얼마나 위선적인가. 발터는 마른침을 삼킨 후, 그 자신에게 맹세하듯 말을 이었다.

    “이제 더 이상 허락 없이 네 몸에 손대는 일은 없을 거라 약속할 테니….”

    그녀의 입술이 발터의 입술을 막았다. 언뜻 보면 그냥 부딪힌 것과도 같은 움직임이었다. 발터가 그 자리에서 굳었다.

    몸에서 열이 확 오르며 혜미의 귓바퀴가 빨갛게 물들었다.

    내가 지금 무슨 짓을 한 거지.

    “아… 미, 미안. 내가 더워서 미쳤나 보다.”

    날씨가 한겨울인데 덥다고 느끼는 것 자체가 제정신이 아니었다.

    “다들 걱정할 테니까 해지기 전에 얼른 성으로 돌아가야지….”

    중언부언하며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혜미의 팔목에 뜨끈한 체온이 닿았다. 혜미는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네게 키스할 수 있게 허락해 줘.”

    꽉 낮아진 목소리로 발터가 내뱉었다. 그의 갈색 눈동자에 열망이 피어올랐다. 그에게 잡힌 팔목으로 심장이 옮겨간 것 같은 기분이었다. 하아. 무거운 하얀 숨결이 혜미의 입술 새를 비집었다.

    “존경의 키스 같은 건 원한 적도 없고 필요하지도 않거든…?”

    그녀가 고개를 젓자 발터의 눈동자에 그늘이 졌다. 목울대가 소리 없이 일렁였다.

    “무슨… 뜻이지?”

    마른침을 삼키며 괴로운 표정을 짓는 그를 향해 혜미가 미간을 찌푸렸다. 바보다. 여자에게 이 정도까지 직접 말하게 만드는 눈앞의 남자는 정말 바보 멍청이가 틀림없었다. 혜미는 새빨개져 마치 울 것 같은 얼굴로 목소리를 높였다.

    “허락이 필요한 키스라면 차라리 하지 않는 게 더 낫다는 뜻이잖아…!”

    팔목이 휙, 강하게 당겨진 순간 그에게 몸이 파묻혔다. 발터가 고개를 모로 기울이며 그녀를 보았다. 부들부들 떨리는 손과 짙은 갈색 눈동자에 끓어 넘치는 남자의 욕망이 생생히 전달된다.

    “허락한 걸로 알게.”

    “돼… 됐으니까 그냥 저리 가… 흐읍!”

    단단한 그의 가슴을 손으로 밀어내려 했지만 불가능했다. 발터가 낮은 신음을 내뱉으며 그녀의 입술을 잠식한 탓이었다. 혜미의 손이 닿은 남자의 흉곽이 단단하게 부풀어 오르고 성대에서 꽉 막혀 있던 숨이 탁, 풀렸다. 그녀의 입 안을 빨기 시작한 것은 그다음이었다.

    뜨겁고 축축하고 미끄러운 혀가 한데 뒤섞였다. 저절로 감기는 혜미의 시야에 거친 호흡을 내뿜는 발터의 얼굴이 잔상처럼 남았다. 그녀는 제 입 안을 샅샅이 훑는 발터에게 입술과 혀를 내맡긴 채, 몸을 가늘게 떨었다.

    발터가 혜미의 아랫입술을 죽 잡아당기듯 빨았다. 그녀의 허리를 휘어 감은 발터의 손에 더욱 힘이 들어갔다. 그녀가 처음 깨어난 날을 제외하면 그들이 몸을 맞댄 것은 처음이었다.

    “하아….”

    혀를 문대며 더욱 깊숙이 그녀를 파고드는 발터를 받아들이며 혜미가 참았던 숨을 간신히 내뱉었다. 발터는 그녀의 입술을 놓아줄 생각이 없는 사람처럼 끈질기게 그녀의 타액과 제 것을 섞었다. 그의 호흡과 그녀의 호흡 역시 한데 뒤섞였다.

    차가운 바람에 머리카락이 휘날릴 정도였지만 온몸에 열기가 피어올라 더울 지경이다.

    발터의 커다란 손이 그녀의 등을 샅샅이 어루만지는 걸로도 모자라 그녀의 얼굴에 닿았다. 떨리는 손가락이 그녀의 뺨을 문질렀다. 춥, 젖은 소리를 내며 떨어진 발터의 입술이 가늘게 떨리는 그녀의 속눈썹을 차례로 스쳤다.

    춥. 춥.

    달아오른 얼굴 전체에 발터의 입맞춤이 흩뿌려졌다. 걸치고 있는 옷이 점점 더 덥고 거추장스럽게 느껴졌다.

    “이든… 하아….”

    엉망으로 잠긴 목소리로 그가 그녀의 이름을 부르자 혜미가 눈을 살며시 떴다. 그녀를 원하는 열망으로 가득한 남자의 표정을 보자 몸이 달아오른 것과 별개로 가슴 깊숙한 곳이 욱신거렸다.

    “발터.”

    “응.”

    발터가 홀린 듯한 표정으로 그녀를 보며 중얼거렸다. 만약 그녀가 영원히 기억을 찾지 못한다 해도, 그는 지금과 같은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봐 줄까.

    “넌… 내 곁에 계속… 같이 있어 줄 거야?”

    혜미가 들릴 듯 말 듯 한 목소리로 작게 물었다. 그녀가 자꾸만 그에게 의지하고 싶어지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서 필요한 사람은 베네딕트뿐이라고 생각했지만 지금 현재는 그에게로 가는 길이 까마득하게만 보였다. 이런 상황에서 그녀가 믿을 사람은 많지 않았다.

    “난 이미 너에게 맹세했어.”

    뜨거운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진지하게 내뱉는 남자를 어떻게 붙잡지 않을 수가 있을까.

    “네가 허락하는 한….”

    발터가 말을 잇다 말고 기다란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아니.”

    고개를 젓는 그의 이마 위로 길어진 갈색 머리카락이 바람에 흔들렸다.

    “네가 허락하지 않아도 난 영원히 네 곁에 있을 거다, 이든.”

    혜미의 눈동자가 소리 없이 일렁였다. 다른 세계까지 그녀를 찾으러 왔던 그였다. 숨을 쉬는 시체에 불과했던 그녀의 곁을 3년 동안 지켰다는 발터였다. 매일 시체를 끌어안고 한 침대에서 잠드는 발터가 이러다 정신이 완전히 나가버리는 건 아닌지 걱정했다던 기사들의 말은 그저 우스갯소리가 아닐 것이다.

    “그럼….”

    혜미가 뒷말을 삼킨 채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내가 너에게 의지해도 될까?’

    생각만 해도 몸이 떨릴 정도로 두렵지만 카플란과는 이미 싸우기로 결정했다. 내뱉은 말을 도로 주워 담을 수도 없는 이 상황에서. 세드릭의 말대로 정신이 오락가락하는지도 모를 이 상황에서 내가 너에게 기대도 될까.

    “하아….”

    깨물린 잇새를 무거운 한숨이 비집었다. 도저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를 향해 떠오르는 지금의 감정이 단순한 믿음인지 아니면 난생처음 살을 맞댄 남자에 대한 그 어떤 핑크빛 감정인지조차 혼란스러웠다. 전자라면 마치 그의 순정을 이용하는 것 같아 죄의식이 들었고, 후자라면….

    후자라면 두려웠다. 발터의 눈에 비친 그녀는 기억을 잃기 전의 이든이었다. 발터가 사랑하는 상대가 자신이면서도 자신이 아니라는 사실에 실망하는 모순적인 기분.

    가슴속에서 또다시 원인 모를 뜨거운 열기가 울컥거렸다.

    넌 내 거잖아.

    이 남자의 몸도 마음도 완벽히 내 것이다.

    스스로도 익숙하지 않은 감정. 발터를 향한 낯선 감정은 기억의 편린일까, 아니면 나의 진심일까.

    “이든.”

    발터의 엄지가 그녀의 입술을 어루만졌다. 뜨끈하게 느껴지는 체온 끝에 떨림이 전달되었다. 혜미의 시선이 그의 흔들리는 눈동자와 짙어진 눈매 그리고 주름진 콧잔등으로 내려와 뜨거운 호흡을 내뱉고 있는 기다란 입술에 닿았다. 혜미는 그제야, 이곳이 그들이 처음 물속에서 입을 맞추었던 장소라는 것을 인지했다. 발터의 눈동자에 숨길 수 없는 흥분이 짙었다.

    “혹시 지금… 나랑, 하고 싶어?”

    혜미가 그에게 물었던 것은 어쩌면 충동적인 발언이었다. 발터가 괴로운 표정으로 마른침을 삼켰다. 바람이 불자 그녀의 머리카락이 날리며 핏줄이 솟은 그의 손등을 간질였다. 그의 상박이 부풀고 뜨거운 호흡이 입술 사이로 흘렀다.

    평소의 그녀라면 죽어도 하지 못했을 말이었다. 하지만 알고 싶다. 그에 대한 자신의 마음이 어떤 건지. 혜미는 확인하고 싶었다.

    “난 너랑 지금 자고 싶어.”

    그녀가 들릴 듯 말 듯 한 목소리로 간신히 속삭이자 발터의 기다란 눈동자가 더욱 가늘게 일그러졌다. 그가 경직된 목소리로 간신히 내뱉었다.

    “하지만 여긴….”

    기억을 잃고 돌아온 이든이 바깥에서 하는 섹스에 기겁했던 것이 생각났던 탓이었다.

    “왜? 기억을 잃은 나랑은… 하기 싫어?”

    그녀가 동그란 눈으로 발터를 응시하며 불안한 목소리를 작게 내뱉은 순간, 그의 고민은 씻은 듯 자취를 감추었다. 그가 그녀를 얼마나 원하고 있는지, 그녀에게 가장 보여 주고 싶은 것은 바로 그 자신이었다. 억눌린 신음 같은 목소리가 성대를 비집었다.

    “…하고 싶어 미칠 것 같아.”

    가지고 싶다. 지금도 고통스러울 정도로 널 원한다.

    “흣…!”

    발터가 그녀의 입술을 강하게 잠식하며 겉옷을 팽개치듯 벗었다. 마른 풀이 자라난 바닥에 푹신하고 두꺼운 옷이 깔렸다. 발터는 혜미를 번쩍 들어 바위를 기대게 앉힌 후, 바지와 가죽신을 차례로 벗겨 냈다.

    “하아…!”

    바람이 슥, 하고 휑한 아랫도리를 스치고 지나간 것은 잠시였다. 발터가 바닥에 머리가 닿을 듯 몸을 낮추어 그녀의 다리 사이에 얼굴을 파묻는 순간, 순식간에 온몸으로 열기가 번졌다.

    “흐응…!”

    예민한 음부는 그와 키스할 때부터 이미 젖어 있었다. 발터가 뜨끈한 입으로 음핵을 빨자 혜미가 바위에 기대어 무릎을 벌린 채 허리를 뒤틀었다. 그의 부드러운 머리카락이 허벅지 안쪽을 간질이는 것조차 자극이었다. 안에서 줄줄 흘러내리는 것을 확인하곤 얼굴을 뗀 발터가 그녀의 아래를 손으로 매만졌다.

    “…춥지 않아, 이든?”

    “아니, 안 추… 하응…!”

    마디가 툭툭 불거진 기다란 손가락이 그녀의 안을 비집었다. 부드럽게 만지는 손길에 질벽이 녹아내리는 느낌이었다. 혜미는 자신에게 키스하려 다가오는 발터의 얼굴을 보며 눈꺼풀을 가늘게 떨었다.

    “네 안은 뜨거워….”

    발터가 그녀의 입술을 빨며 손가락을 하나 더 늘렸다. 쿨쩍거리는 소음이 희미하게 번져 나가고 있었다. 혜미가 무릎을 오므리려 했지만 허사였다. 끝까지 완전히 들어온 두 손가락이 그녀의 질벽 안을 부드럽게 파헤쳤다.

    “하아, 하아…!”

    혜미가 숨을 헐떡이며 손으로 발터의 목을 붙잡았다. 겉옷을 벗어 던진 그는 얇은 튜닉 하나만 걸치고 있었지만 온몸이 뜨거웠다. 단단한 어깨와 가슴을 손으로 더듬듯 내려오자 발터의 호흡이 더욱 거칠어졌다.

    “아아, 이든….”

    발터가 애원하듯 속삭이며 온통 젖은 손가락을 그녀의 비부에서 빼냈다. 길게 혀를 내밀어 손등까지 흐르는 애액을 핥았다. 혜미가 벌게진 얼굴로 울먹였다.

    “그런 거 왜… 핥아….”

    “아까워서.”

    의미가 불분명한 말을 내뱉던 발터가 숨을 몰아쉬었다. 그녀의 흔적을 모두 빨아먹은 후, 그가 혜미의 등과 바위 사이에 부드럽게 손을 집어넣었다.

    “아….”

    그의 몸이 그녀의 무릎 사이로 들어오자 허벅지가 점점 벌어졌다. 어느새 발터의 바지춤은 풀려 아래로 내려가 있었다. 혜미를 향해 고개를 기울이며 발터가 꽉 잠긴 목소리를 냈다.

    “날 안아.”

    혜미의 두 팔이 그의 목을 끌어안자 그녀의 엉덩이가 그의 양손에 잡혔다. 커다란 손으로 꽉 붙들리는 느낌에 저도 모르게 몸을 가늘게 떠는 순간, 좁은 음부를 비집는 단단한 살덩이가 느껴졌다.

    “아아, 이든.”

    질벽은 발터의 혀와 손이 지나간 탓에 완전히 녹아 있는 상태였지만 그의 거대한 페니스를 받아들이기에는 여전히 빠듯했다. 뜨겁고 좁은 문이 귀두부터 조이자 발터가 어금니를 꽉 물며 허스키하게 신음했다. 고집스레 쑥, 밀어 넣자 부푼 질벽이 딱 그의 부피만큼만 길을 내며 벌어졌다. 벅차게 들어오는 느낌에 혜미가 짧게 소리 내며 그에게 매달렸다.

    “흐응…!”

    춥, 춥, 달아오른 얼굴에 입맞춤이 떨어졌다. 습한 입맞춤을 흩뿌리며 발터가 무릎으로 선 채 왕복을 시작했다. 달아오른 내벽이 그의 페니스를 조이듯 압박하며 애액을 뿜어 댔다. 자신이 뜨겁게 달아올랐다는 사실은 누구보다 혜미가 가장 잘 느낄 수 있었다.

    “바… 발터…. 하아…!”

    그녀는 정신을 잃지 않으려 안간힘을 썼다. 흥분에 흐려진 시야에서도 발터의 얼굴이 너무나 잘 보였다. 일몰 직전의 노을은 세상의 온갖 색을 뒤섞어 놓은 듯한 아름다운 팔레트였다. 그 하늘을 뒤로하고, 가장 뚜렷한 색채를 지닌 남자가 뜨거운 눈으로 그녀를 보았다.

    “…아름답다. 너.”

    키스하기 직전, 떨리는 목소리로 고백하는 그의 목소리에 가슴이 울렁였다. 깊게 삽입하고 묵직하게 누르는 감각에 혜미가 참지 못하고 몸을 떨었다.

    “아, 아아…!”

    오르가슴은 예고가 없었다. 약하게 신음을 내뱉자 그녀의 아랫입술을 부드럽게 빨던 발터가 살짝 얼굴을 뒤로 물렸다. 혜미의 질벽이 경련하며 몸 안에 삽입한 그를 쥐어짠 탓이었다.

    “벌써… 했어?”

    집어넣고 몇 번 움직이지도 않았는데 가 버렸다. 혜미는 그 사실이 못 견디게 민망해 말을 더듬었다.

    “아, 아니… 그게 아니라…. 하응…!”

    “부끄러워하지 마.”

    발터가 뿌리 끝까지 박은 채로 허리를 움직이며 쉰 목소리로 속삭였다.

    “기분 좋았던 거지…? 응?”

    발터는 혜미가 느끼는 부분을 잘 알았다. 가장 민감한 내벽의 한 부분이 쿡쿡 짓눌리자 혜미의 입술에서 신음이 계속 흘러나왔다.

    “아, 하아…. 으응…!”

    춥, 춥. 입술에 다시 부드럽게 키스하며 발터가 그녀의 엉덩이를 쥔 채 안에서 페니스를 흔들었다. 뜨거웠다. 좁은 내벽이 이리저리 짓눌리는 빠듯한 느낌이 못 견디게 기분 좋았다. 혜미가 달뜬 표정으로 그의 혀를 받아들이며 타액을 빨자 발터가 뒤로 쑥 빠졌다가 단번에 허리를 박았다.

    “흐읍!”

    무겁게 치받히는 느낌이 강렬해 혜미가 몸을 떨었다. 그의 목을 껴안고 매달리자 발터가 같은 움직임을 두어 번 반복했다.

    “아! 아앙!”

    혜미의 신음에 발터가 꽉 잠긴 목소리로 그녀에게 속삭였다.

    “다리, 더 벌려 줘.”

    혜미가 그의 말에 따라 다리를 벌리자 발터의 몸이 더욱 수월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뒤는 단단한 바위였고 앞에는 호수가 있었다. 어둠 직전의 찬란한 하늘빛을 그대로 담아 수만 가지 색으로 반짝이는 물결이 혜미의 머릿속을 강렬하게 파고들었다.

    “하아, 이든, 아아, 흐읏, 아아, 이든…!”

    그녀의 목에 입술을 비비며 발터가 연신 잠긴 목소리로 그녀를 불러 댔다. 강하게 치받는 허릿짓에 힘이 붙었다. 성기 끄트머리까지 빠져나갔다가 뿌리 끝까지 완전히 틀어박힐 때마다 숨 막히는 압박감과 비례하는 쾌락이 온몸을 잠식했다.

    바위와 그의 몸 사이에 깔려 움직일 수도 없이 그가 주는 쾌락을 감당하고 있을 뿐이었다. 뜨거운 발터의 입술과 혀가 그녀의 목, 여린 귓불, 뺨을 잘근잘근 씹듯이 핥고 빨았다.

    “흐응…! 으응! 하아! 아!”

    혜미는 팔을 둘러도 양손이 닿지 않는 발터의 널찍한 등에 손가락을 세운 채 아찔하게 신음했다. 질벽이 저절로 욱신거리며 박동하는 페니스를 조였다. 발터가 한숨 같은 신음을 잇새로 내뱉었다.

    “가슴, 만지고 싶어.”

    거칠게 호흡하며 그녀에게 이마를 붙이는 발터의 온몸이 뜨거웠다. 옷깃을 비집고 튜닉의 끈을 풀어 내린 후, 부드러운 가슴을 터뜨릴 듯 움켜쥐는 그의 손 역시 뜨겁기는 매한가지였다. 민감한 유두가 툭 불거진 손가락 관절에 닿는 순간, 혜미가 날카롭게 신음하며 허리를 치켜들었다. 발터는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속도를 올렸다.

    “하아…. 흐으응! 으응! 흣! 아!!!”

    격렬해진 동작에 짤막한 신음이 연이어 터져 나갔다. 치받는 발터의 허릿짓에 힘이 붙었다. 마찰을 계속하자 끈적해진 애액이 외음부를 타고 주르륵 흘러내렸다.

    굵직한 페니스가 질벽을 긁으며 안쪽을 강하게 쳐 댈 때마다 피가 몰려 부풀어 오른 음핵까지 콱콱 짓눌렸다. 혜미는 새빨갛게 달아오른 얼굴로 커다랗게 신음했다.

    “아아, 발터…. 아흐응…!”

    사방에 어둠이 내리깔리고 있었지만 무섭지도, 외롭지도 않았다. 발터가 그녀의 몸을 깊숙하게 비집자 이제껏 두려웠던 모든 감정이 사라지고 오직 그와 함께하고 싶다는 마음만 들었다.

    “내가… 나도… 흐으응…!”

    그에게도 그녀가 느끼는 만큼의 쾌락을 주고 싶었지만 말을 이을 수가 없었다. 발터는 그런 그녀의 마음을 읽은 듯 행동했다. 그녀의 양다리를 제 허리에 감게 한 후, 자신은 뒤로 앉아 혜미를 제 몸 위에 올렸다.

    어느새 그녀의 앞섶은 완전히 풀어 헤쳐진 채였다. 발터는 헐렁한 가죽끈 사이로 출렁이는 부드러운 가슴에 얼굴을 묻고 뜨거운 호흡을 내뿜었다.

    “하아…. 아흑….”

    혜미가 그의 위에서 허리를 움직여 원을 그리며 그를 삼키기 시작했다. 그녀의 몸은 완벽하게 둘만의 쾌락을 위해서 맞춘 듯 움직이고 있었다.

    자신이 움직일 때마다 맞붙은 비부에서 찐득거리는 소음이 샜다. 소리가 커질 때마다 아찔한 감각을 느끼는 발터의 얼굴이 눈앞에 생생하게 보였다. 부끄러움과 더불어 쾌감은 배가 되었다.

    “바, 발터…. 발터…. 흣…!”

    “좋아…. 너무… 흣…. 좋다, 이든….”

    그녀에게 눈을 맞추며 뜨거운 목소리로 간신히 내뱉는 그의 얼굴 역시도 붉었다. 어둑해진 하늘을 담은 그의 눈동자에, 그와 같은 열기를 담고 있는 자신이 있었다. 심장이 거칠게 뛰며 가슴이 울렁이고 그를 품은 채 움직이는 아랫도리에는 더욱 힘이 붙었다.

    “아아, 이든…. 아…!”

    “좋아…?”

    “…하게 해 줘.”

    혜미는 괴롭게 내뱉는 그의 얼굴을 양손에 가둔 후, 떨리는 입술을 그에게 맞추었다.

    “조금만 더.”

    혀가 닿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벌어지는 남자의 입술 새를 비집고 그를 부드럽게 휘감았다. 온몸에 열기가 확장되는 느낌.

    “흐으…. 흣….”

    뜨끈한 혀가 뒤섞였다. 아니. 온몸이 뒤섞이는 것도 같았다. 찬란하던 태양 빛과 어둠이 절묘하게 맞물리는 하늘의 색처럼.

    뜨거운 호흡이 뒤엉키고 서로의 타액이 쉼 없이 교환되었다. 혜미의 몸은 발터의 페니스와 맞물린 채 집요하게 움직였다. 옷 뒤로 느껴지는 발터의 가슴이 돌덩이처럼 경직되고, 코끝에 번지는 숨결이 델 듯이 뜨거워졌지만 혜미는 움직임을 멈추지 않고 그를 품은 채 아랫도리를 흔들었다.

    찔걱. 찔걱. 젖은 소음이 빨라졌다. 더 이상 참지 못한 발터가 무릎을 세운 채 허리를 털었다. 아래에서 위로 꿰뚫듯 박히는 강렬한 느낌에 혜미가 입술을 떼고 고개를 들었다.

    “흐으, 흐, 읏, 하아…. 이, 이든, 아흑…!”

    사정에 임박한 발터가 그녀의 입술을 원하는 모습이 보였다. 혜미는 그런 그에게서 얼굴을 뒤로 물린 채, 온몸으로 자극을 느끼는 남자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몰아치듯 박아 대던 발터는 더 이상 참아 내지 못했다. 그가 그녀의 허벅지를 손자국이 나도록 꽉 움켜쥐었고, 뜨끈한 사정액이 몸 안에 길게 분출했다.

    혜미는 숨을 몰아쉬며 그를 더욱 꽉 조였다. 사정하며 쾌락으로 일그러진 발터의 얼굴이 생생하게 보였다.

    “흣…! 으흣…!”

    혜미는 그가 수차례 뿜어낼 때까지 아랫도리를 흔들었다. 절정에 이른 남자의 얼굴은 지독하게 야했고, 눈을 뗄 수 없을 정도로 중독적이었다.

    “이든….”

    그녀의 뒤통수를 끌어당기며 마지막까지 입 맞추기를 갈구하는 남자의 표정에 원인을 알 수 없는 가학심이 치밀어 올랐다. 혜미는 그의 입술을 거부하며 그의 목덜미에 얼굴을 파묻어 버렸다.

    그의 눈에 비친 그녀가 정말로 자신일까. 그가 부르는 이름이 정말로 내 이름일까.

    …그런데 나는, 왜 그걸 이렇게 신경 쓰고 있는 걸까.

    문득 두려웠다. 자신 안에 이런 본능이 어디 숨어 있었는지 알 수가 없다. 이 남자의 모든 것을 가지고 싶다는 마음이 왜 자꾸 드는 걸까. 발터가 사랑하는 건 기억을 잃기 전의 이든인데. 내 머릿속은 온통 뿌연 안개처럼 모든 것이 흐릿한데.

    눈자위가 시큰했다.

    “하아….”

    허벅지를 단단하게 굳히며 발터가 긴 사정을 끝냄과 동시에 혜미의 움직임도 멈추었다. 이제 분위기에 휩쓸려 그와 자는 일만은 피해야 한다는 느낌이 들었다.

    “이든.”

    발터가 쉰 목소리로 그녀를 불렀다. 혜미는 힘이 들어가지 않는 다리를 애써 움직였다.

    “이… 제 그만… 돌아가자….”

    몸을 떼고 일어나려 했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날 봐.”

    발터가 그녀의 몸을 꽉 끌어안은 채 사정의 여운이 채 가시지 않은 목소리로 중얼거리듯 속삭였다.

    “사람들이 걱정할 것 같…!”

    커다란 짐승처럼 숨을 거칠게 몰아쉬며 발터가 그녀를 바닥에 휙 돌려 눕혔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혜미의 두 다리가 그의 팔에 강하게 휘감겼다.

    “왜… 날 외면해?”

    발터가 그녀를 원망하듯 낮게 속삭였다. 잠시 떨어졌던 아랫도리가 다시 붙었다. 발터는 하얀 정액이 고인 그녀의 비부에 미끄러운 페니스를 단박에 박아 넣었다.

    “날 봐 줘.”

    허벅지를 결박하듯 팔로 휘감고 그녀의 성감대를 두드리는 허릿짓에 속도가 붙었다. 마지막 순간 그를 외면하듯 고개를 돌린 그녀를 벌주듯 감당 못 할 쾌감을 넘치게 퍼부었다.

    “나는 너와 입 맞추면서 함께 가고 싶었어.”

    “흣, 응! 흣! 아! 흑! 아… 앙! 앗!”

    발터가 허리를 빠르게 털어 대자 혜미의 입술에서 신음이 뚝뚝 끊어졌다. 흠뻑 젖은 내벽에서 그의 정액이 페니스를 타고 길게 흘러내렸다. 혜미는 그의 팔뚝에 손톱을 박고서 쉼 없이 흔들렸다. 몸이 이상해질 것 같았다. 참아 낼 수 없을 것 같았다.

    “아, 안 돼, 흣, 발터, 흑, 아, 그, 그만 흐응…!”

    혜미의 미약한 거부에 발터가 이를 사리 물었다.

    “그만두지… 못하겠어.”

    발터는 그녀와 이어져 있을 때만큼은 절제하고 싶지가 않았다. 그의 위에서 움직이던 그녀의 눈빛은 분명 그를 원하는 이든의 눈빛이었다. 발터가 이든을 제 것으로 하고 싶었던 만큼, 이든 역시 그의 전부를 소유하기를 원했다. 그 대상은 적지만 뭐 하나에 꽂히면 반드시 가져야 했던 이든이었다. 덕분에 어릴 적부터 헛간에 처박힌 적이 수도 없이 많았다.

    “나는 지금 너를 원한다고… 네 전부를 내 것으로 하고 싶다고 말하고 있는데, 이 바보 같은 자식이…!”

    욕구를 주체하지 못해 울먹이던 이든의 얼굴을 지금도 생생히 기억한다. 그리고, 방금 전 그를 원망하듯 눈가를 붉히던 그녀의 얼굴까지도.

    “너도 날 원했잖아. 그리고….”

    “흐응…!”

    그가 허리를 물려 완전히 빠져나갔다가 단박에 그녀의 몸 안을 깊숙하게 비집었다. 그럴 때마다 그녀의 비부가 소리 없는 비명을 지르듯 욱신거리며 그를 조였다.

    “…지금도 원하고 있잖아.”

    발터가 그녀의 몸을 반으로 접으며 쉰 목소리로 속삭였다.

    “난 그거면 돼.”

    혜미는 양다리를 그의 어깨에 걸친 채, 눈꼬리를 붉게 물들인 얼굴로 젖은 숨을 헐떡였다. 어둠이 점점 더 짙게 내리깔릴수록 싸늘한 바람이 불어왔지만 추위를 느낄 새는 없었다.

    발터가 그녀에게 허리를 쳐 대며 입술을 빨았다. 절정으로 빠르게 이끄는 그의 움직임을 참아 내는 것은 불가능했다. 급속도로 커진 불씨가 마침내 펑, 터지는 것처럼 강렬한 오르가슴이 몸을 휩쓸었다.

    “흐으응…!”

    발터의 성기가 질 속을 격렬하게 오갔다. 발터는 절정에 몸부림치는 혜미를 꽉 끌어안고 그녀를 끝까지 밀어붙였다.

    그녀가 이 순간, 그를 원하는 것 외에는 아무런 생각도 할 수 없도록.

    발갛게 달아오른 그녀의 얼굴 전체에 뜨겁고 습한 키스를 흩뿌렸다. 그녀가 가장 애달파 하는 몸속 깊은 부분을 귀두로 쑤시고 쾌감을 머금어 부풀어 오른 질벽을 기둥으로 긁었다.

    한 번으로는 만족할 수가 없었다. 몇 번이나 그녀를 가지고 쾌감에 몸부림치게 하고 싶었다. 그들이 늘 그랬던 것처럼.

    “흐윽….”

    그녀를 품 안에 가둔 채 짐승처럼 추삽질을 이어 가던 발터가 문득 움직임을 멈추었다.

    “…왜?”

    어두운 보라색 하늘을 머금은 젖은 눈동자에서 길게 눈물이 떨어진 탓이었다. 발터가 그녀를 보며 괴로운 표정을 지었다. 그것은 쾌감을 못 견뎌 흘리는 눈물이 아니었다.

    “나도… 모르겠어….”

    혜미가 숨을 몰아쉬며 그를 향해 얼굴을 찡그렸다. 그녀조차도 자신이 왜 울고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이제 주위는 밤이 내리깔려 완전히 어두웠다. 커다란 나무 그림자가 드리운 발터의 얼굴 역시도 그랬다. 가슴이 꽉 조이며 외로워지는 이 느낌. 이유도 원인도 알 수 없는 실체 없는 슬픔을 설명할 길이 없었다.

    “나는… 이제 내가 누군지도… 잘 모르겠어.”

    그녀를 응시하는 발터의 짙은 갈색 눈매가 가늘어졌다.

    “그래서… 너한테….”

    마지막 말은 혜미의 입 속에서 속삭이듯 흘러나왔다.

    “미안해.”

    “…뭐가.”

    너를 기억하지 못해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 널 욕심내서.

    뒷말을 차마 잇지 못하는 그녀의 눈을 말없이 바라보는 발터의 목울대가 소리 없이 일렁였다. 그가 그녀의 얼굴을 손으로 조심스레 감쌌다. 그래. 그녀라면 충분히 그럴 수 있었다.

    “넌 여전히 바보구나.”

    발터는 지금 이 순간 맘속 깊은 곳에서 피어나는 안도감을 느끼며 스스로를 또 한 번 저주했다. 너의 혼란함을 이용해 또다시 네 마음을 욕심내는 나야말로 네게 가장 위험한 존재인지도 모르겠다. 이든.

    춥.

    기다란 입술이 뺨으로 흐르는 눈물을 훔쳐 낸 후, 붉어진 입술에 조심스레 닿았다가 젖은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기억하지 않아도 상관없다.”

    그가 혜미에게 눈을 맞추며 중얼거리듯 내뱉었다. 그리고 지금 그녀가 가장 불안해할 부분을 정확히 짚었다. 보이지 않는 선의 경계에서 그에게 다가오기를 망설이는 그녀의 손을 꽉 쥐고 제게로 잡아끌었다.

    “네가 날 영원히 몰라도 상관없어.”

    혜미는 벌게진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머릿속을 송두리째 읽은 것처럼 구는 발터를 보며 숨을 몰아쉬었다.

    이런 상황에서 그런 말을 하는 건 반칙이잖아.

    발터가 뜨끈한 혀로 주룩 흘러내리는 그녀의 눈물을 개처럼 핥았다. 힘을 주어 바들바들 떨리는 혜미의 입술에 몇 번이나 입을 맞추었다.

    “혼란스러워해도, 두려워해도 돼. 네 두려움을 달래려 날 이용해도… 나는 상관없다. 그게 내 존재 이유야.”

    나직하지만 진심이 철철 흘러넘치는 목소리. 인생 전부를 그녀에게 건 남자의 애끓는 구애였지만 혜미에게는 그저 그런 그가 다정하게만 느껴질 뿐이었다. 부드럽고 뜨겁게 자신을 감싸는 눈동자를 외면하는 것은 그 어떤 여자라도 불가능할 것이라고 막연히 생각할 뿐이었다.

    “…발터.”

    “나는… 네 곁에 있을 수 있는 것만으로, 살아 눈떠서 널 볼 수 있는 것만으로….”

    발터가 기다란 입술을 비틀며 옅게 웃었다. 붉어진 콧잔등과 보기 좋은 미간에 주름이 잡히고 짙은 눈썹 산이 아래로 휘어졌다.

    “가끔 이렇게 혼란한 네가 체온을 나눠 주는 것만으로도 만족하며 살 수 있으니까….”

    그의 미소에 마음이 저리며 또다시 심장이 욱신거렸다.

    “넌 내 모든 걸 그냥 가지면 돼.”

    혜미는 뜨거워지는 눈을 감으며 그를 끌어안았다. 눈물 젖은 키스는 이전보다 조금 더 뜨거웠고, 조금 더 길었다.

    이걸로 그녀가 그를 정말 좋아하게 되어 버린다 해도, 전적으로 발터의 탓이었다.

    ***

    제국력 178년 겨울.

    클라웨의 수도 아메티스, 황금성

    100년 전, 클라웨 4세가 제국의 노예 30만을 동원하여 증축한 황금성은 각각 크기가 다른 첨탑 건물만 50채에 육박했다.

    해가 뜨고 지는 순간마다 성의 하얀 돌벽이 황금색으로 빛났으므로 수도의 시민들은 그 성을 황금성이라고 불렀다.

    황금성의 가장 동쪽에 위치한 플라틴성의 맨 꼭대기에 이른 오전의 겨울 햇살이 내리쬐었다.

    팔랑.

    가볍게 책장을 넘기는 소리가 울려 퍼질 정도로 고요한 공간이었다. 둥그런 황궁 도서관의 벽면을 꽉 채우고 천장까지 닿아 있는 책장은 모두 고서와 장서로 꽉 차 있었다. 그 한가운데, 마치 제단처럼 솟은 공간에는 커다랗고 푹신한 의자가 있었다. 벨벳이 깔린 의자는 자그마한 침대를 방불케 할 정도로 널찍했다.

    “알현을 청합니다, 폐하.”

    문이 없이 아치형으로 뚫린 입구에서 하이데거 대공이 고개를 숙였다.

    “좋은 아침이네, 대공.”

    청명한 목소리를 들으며 그가 상대를 향해 너른 도서관을 가로질렀다. 뚜벅, 뚜벅, 굽이 박힌 구두의 울림소리가 작은 공명을 남기며 이어지다가 계단 아래, 열 발자국의 거리를 남기고 멈추었다.

    “어쩐 일인가. 이 시간에 입궁이라니.”

    하이데거 대공이 한쪽 무릎을 꿇은 채, 예의 바른 어조로 입을 열었다.

    “송구합니다, 폐하. 긴히 전할 말씀이 있어서 결례를 무릅쓰고 찾아뵙습니다.”

    계단 위에서 웃음기 섞인 작은 한숨 소리와 함께 책을 덮는 소리가 이어져 들렸다.

    “짐은 경을 탓하려는 게 아니야. 일어나서 고개를 들게, 에리히.”

    이름이 불린 하이데거 대공이 그제야 자리에서 일어나 제 눈높이보다 위에 있는 상대를 올려다보았다. 젊은 황제가 의자에 기댄 채 그를 보며 엷게 미소 지었다.

    “무슨 일이지?”

    커다란 창으로 비치는 햇살이 하얀 가운을 걸친 그의 등을 비추고 있었다. 붉은 이불이 덮은 무릎 위에는 그가 지금까지 읽고 있던 책이 얌전히 놓여 있었다. 에리히는 그의 군주를 올려다보며 잠시 눈이 부시다는 생각을 했다.

    크리스티앙 디트리히 클라웨 9세.

    다섯 살 때 황태자로 책봉되어 선대 황제가 사망한 열 살 때부터 황제 권한 대행을 맡았고, 열여덟 살에는 정식으로 황위에 오른 제국의 아홉 번째 황제. 아름다운 외모만큼이나 잔인한 성정의 그는 날 때부터 다른 이들을 군림하기 위해 태어난 이였다.

    “카플란이 500명의 친위대 병력 지원을 요청하였습니다.”

    “이유는?”

    “…세르노티와의 전쟁입니다.”

    “하하.”

    크리스티앙이 긴장한 말투로 내뱉는 에리히를 보며 작게 웃었다. 뾰족한 송곳니가 피처럼 붉은 입술 아래에 희게 드러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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