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5화 (15/72)
  • 그녀가 그렇게 돌아오고 싶었던 곳.

    쾅.

    잠시 자신이 죽은 건지를 생각하던 아일라는 무언가 바닥에 떨어지는 소음에 인상을 찌푸렸다. 천천히 고개를 돌리자 그곳에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세드릭이 있었다. 눈을 깜빡이는 그녀에게 세드릭이 입을 열었다.

    “네가 죽었다면 난 널 영원히 용서하지 않았을 거야, 아일라.”

    눈물이 고였지만 그의 앞에서 차마 울 수도 없었다.

    “카플란이었어?”

    “…지금은 아니에요.”

    변명으로 들릴 거라는 걸 알고 있으면서도 세드릭의 앞에서 초라하게 스스로를 변호한 것은 본능이었다. 그에게 미움받고 싶지 않은 초라하고 부끄러운 내밀한 진심.

    “페터 역시 카플란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던 거니?”

    “몰랐어요.”

    세드릭이 그녀에게 한 질문은 단 두 가지뿐이었다. 말을 끝낸 후, 그는 골똘히 생각에 잠긴 표정으로 그녀를 한참 동안 바라볼 뿐이었다. 그의 시선에 온몸이 뜨겁게 절절 끓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할 말은 산더미 같은데 어디서부터 말을 꺼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이든과… 둘이 이야기할 수 있을까요…?”

    이든을 부른 것은 그녀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어서이기도 했지만, 세드릭과 한 공간에 있는 것을 더 이상 견딜 수 없었기 때문이다. 부끄러워 도망치고만 싶었다. 감히, 자신 따위가 그를 마음에 몰래 품었다는 사실을 세드릭이 알아차리기라도 했을까 봐 두려웠다.

    “아일라.”

    혜미의 말에 상념에 빠져 있던 아일라가 고개를 들었다.

    “혹시나 해서 하는 말인데. 괜히 이상한 생각하면 절대 안 된다. 알았지?”

    황금색 아치형 눈썹이 흔들리는 것을 보며 혜미가 진지한 표정으로 말소리를 높였다.

    “그럴 리는 없겠지만, 네가 몰래 야반도주라도 한다면 과연 세드릭이 어떤 기분일까?”

    아일라가 딱 걸린 표정을 지었다. 혹시나 했는데 역시였다. 기억을 잃기 전 이든은 눈치라고는 찾아볼 수가 없었지만, 빡빡한 대한민국에서 구른 혜미는 달랐다.

    “그 성격을 생각해 봐. 얼마나 꼬장꼬장하고 재수가 없니…? 의심은 또 얼마나 많아? 아마 널 제대로 보살피지 못했다는 이유로 세르노티 기사들 여럿을 잡아 족칠 수도 있을걸?”

    이때다 싶어서 혜미는 맘 놓고 세드릭의 뒷담화를 시작했다. 말 한마디 잘못 내뱉었다는 이유로 다짜고짜 검을 휘둘렀던 싸늘한 눈빛이 아직도 생생했다.

    “이든, 세드릭 님을 나쁘게 말하지 마세요.”

    늘 그렇듯 자동적으로 세드릭을 변호하는 아일라를 보며 혜미가 검지를 치켜세웠다.

    “난 그저 사실을 말하는 거지.”

    아일라의 앞에서 세드릭의 버릇을 그대로 따라 하는 것도 나름 의도한 거였다. 혜미는 아일라가 혹여나 잘못된 판단을 하지 않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었다.

    “그 잘난 척하는 성격에 지금 얼마나 미칠 지경이겠냐고. 본인 때문에 네가 칼빵 맞은 것도 모자라서, 널 의심하기까지 했지. 그런데 네가 지금 이 상태로 도망이라도 가 봐. 아마 세드릭은 분을 못 참아서 한강에 뛰어들 수도 있을걸?”

    “…네?”

    묘하게 변하는 아일라의 표정을 보며 아차 싶어 혜미가 서둘러 말을 정정했다.

    “스스로 목숨을 끊을 수도 있다는 소리지.”

    “안 돼요!!!”

    역시나 효과는 직방이었다. 아일라가 소리를 버럭 지르다, 상처가 고통스러운지 인상을 확 찌푸렸다.

    “아일라. 흥분하면 상처가 벌어져.”

    너무 심했나 싶어 당황한 그녀가 아일라를 조심스레 침대 위에 다시 눕혔다.

    “그러니까 내 말은, 자책은 그만하고… 빨리 몸을 치료해서 낫는 데만 집중하라는 거였어.”

    “…….”

    “세드릭 말고도 세르노티의 모든 사람들이 널 걱정하고 있거든. 그중엔 나도 포함이고.”

    아일라가 그녀를 보며 말없이 눈을 깜빡였다. 3년 만에 만난 이든은 예전과 변함없이 솔직했지만, 어딘지 모르게 살짝 변한 것 같았다. 그녀가 더욱 친근하게 느껴지는 이유는 아무에게도 이야기하지 못한 자신의 과거 이야기를 털어놓아서일까. 잠시 생각하던 아일라가 불안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이든… 제가 아까 말한 일에 대해서는….”

    “걱정하지 마. 카플란에서 네게 있었던 일은 세드릭에게도, 발터에게도 말하지 않을 거야.”

    혜미가 그녀의 마음을 읽은 듯, 염려 말라는 얼굴로 덧붙였다.

    “이 방에서 있었던 이야기는 죽을 때까지 너와 나의 비밀로 할게. 지금 다른 기사들은 네가 실종된 후, 혼자 카플란에 잠입해 이중 첩자가 된 걸로 알고 있거든.”

    평소 세드릭에 관한 충성심이 남달랐던 아일라가 스스로 그런 판단을 내린 게 분명하다고 모두들 입을 모았고 세드릭 역시 그 사실에 대해 별다른 부정을 하지 않았다.

    진실이 항상 사람들에게 다정한 것은 아니었다. 세상에는 좋은 거짓말도, 분명 존재하는 것이다.

    “그럼 가 볼게. 마음 편하게 먹고 쉬는 거다?”

    아무 말이 없는 아일라를 보며 혜미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문을 나서는 그녀를 아일라가 불러 세웠다.

    “이든.”

    혜미의 고개가 자연스레 돌아갔다.

    “응?”

    “고마워요.”

    혜미가 그녀를 보며 말없이 웃었다.

    “고마우면 나중에 밥 사 줘.”

    삐걱.

    나무문이 닫혔다. 복도에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는 발터의 모습이 보였다. 그를 향해 걸어가는 혜미의 얼굴에는 웃음이 싹 걷혀 있었다.

    ***

    머리가 멍했다. 혜미는 말없이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발터를 향해 낮게 물었다. 혹여나 방 안에 있는 아일라에게 들리기라도 할까 불안했다.

    “세드릭… 어디 있어?”

    “약초를 받으러 간다고 했으니까 아마 금방 돌아올 거야.”

    “세드릭이 돌아오면 조용한 곳에서… 이야기 좀 할래?”

    발터는 잠시 그녀를 응시하다 고개를 끄덕였다. 아일라를 만나고 난 혜미의 표정이 심상치 않다는 것을 눈치챈 까닭이었다.

    “호숫가에서 기다리자. 빈센트에게 말을 전해 놓을게.”

    “…응.”

    혜미는 앞장서는 발터를 따라 탑을 나섰다. 막사를 지나자 여기저기 불에 탄 마구간으로 돌아온 말들이 그녀를 보며 약하게 푸르릉대는 소리를 냈다.

    일주일 가까이 내리던 눈은 잠시 소강상태였고 성안은 온통 하얗게 변해 있었다. 며칠 전의 전투가 꿈이었던 것처럼 평화로운 광경이었다.

    “이든, 발터! 산책이라도 가는 거야?”

    마구간의 울타리를 고치고 있던 기사들 중 하나가 그들을 보며 반갑게 웃었다.

    “응. 이든이 잠시 바람을 쐬고 싶다고 해서.”

    “그래. 그동안 계속 누워 있었으면 좀이 쑤실 만도 하지. 카트리나 아주머니께 먹을 거라도 좀 챙겨 달라고 할까? 안 그래도 다들 출출하던 참이었거든.”

    “그럴래?”

    발터가 혜미를 보며 물었다. 머뭇거리는 그녀를 보며 레나가 목소리를 높였다.

    “당연한 걸 묻고 그래. 이든이 먹을 걸 거절할 리가 없잖아. 잠시만 기다려. 금방 다녀올게…. 읏차.”

    레나가 싱긋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나 엉덩이를 털었다. 카플란에게 깔려 찔릴 뻔했던 그녀를 구해 준 이든이 고마웠다. 쌍둥이 오빠였던 파비안의 복수를 대신 해 준 것은 말할 필요도 없는 소리였다.

    “어….”

    레나가 자리에서 일어나 조금 굳어진 표정으로 말을 흐렸다. 혜미는 발터와 함께 레나의 시선이 향한 쪽을 바라보았다.

    “다들… 배가 고플 것 같아서…. 파이를 좀 가져왔는데….”

    커다란 덩치에 여기저기 헝클어진 붉은 머리카락, 옅은 초록색의 눈동자를 보니 기시감이 일었다.

    “프랑크 아저씨.”

    레나가 그를 보며 조금 낮아진 목소리를 냈다. 혜미는 그제야 그가 페터의 아버지, 도축사 프랑크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가 천이 덮인 바구니를 내밀었다. 손가락 마디에 털이 수북한 큰 손이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금방 구운 고기와 치즈를 넣어서 아직 따뜻할 거야. 추우니까 어서 먹고들 해….”

    기사들은 레나의 눈치만 볼 뿐, 선뜻 프랑크의 바구니를 건네받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 그들 앞에서 발터가 한 발 나서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

    “주세요. 아저씨.”

    “발터….”

    차마 말을 잇지 못하는 프랑크에게서 시선을 뗀 후, 발터가 레나에게 바구니를 내밀었다.

    “자.”

    혜미는 말 없는 레나의 까만 동공이 흔들리다가 흰자위가 발갛게 젖어 들어가는 것을 똑똑히 보았다.

    세르노티성 사람들은 이제 모두, 페터가 카플란의 세작이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발터는 그의 아비인 프랑크와 만 하루 동안 이야기를 나누었고, 그가 페터의 변절 사실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몰랐다고 결론을 내린 후였다.

    하지만 기사들도 인간이었다. 그들이 프랑크를 예전처럼 바라볼 수 없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어떡할까. 레나. 버릴까?”

    발터의 목소리는 낮았지만 또렷했다. 혜미는 미간을 찡그리며 그를 바라보았다. 범죄자의 가족과 피해자의 가족이 얼굴을 마주해야 하는 고통스러운 시간. 레나에게 선택을 종용하는 발터가 잔인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발터.”

    혜미가 그의 옷깃을 잡아당겼을 때였다. 하아, 하고 길게 숨을 내쉰 레나가 바구니에서 파이 하나를 꺼내 덥석 베어 물었다.

    “…맛있네.”

    말을 잇지 못하는 프랑크를 향해 레나가 눈에 눈물을 달고 웃었다.

    “다들 뭐해? 프랑크 아저씨의 고기 파이는 세계 최고인 거 몰라? 너희들 안 먹으면 내가 다 먹고.”

    레나의 눈치를 보던 기사들이 그제야 앞다투어 바구니에 수북한 파이를 하나씩 꺼내 베어 물었다.

    “맛있어요, 아저씨.”

    “아… 진짜 배고파 죽는 줄 알았어.”

    프랑크는 그런 그들 앞에서 벌게진 얼굴로 숨을 몰아쉴 뿐이었다.

    “우리도 하나 먹자.”

    발터가 그녀에게 낮게 내뱉었지만 혜미는 손을 내밀 수가 없었다. 그와 닮은 얼굴의 페터가 눈에 어른거린 탓이었다. 그의 목을 베어 내던 자신의 모습도 머릿속에 생생했다.

    “이든….”

    그런 그녀를 조심스레 부른 것은 프랑크였다. 혜미는 흠칫 놀라 한 발자국 뒤로 물러섰다. 페터의 아버지와 마주하는 것만은 피하고만 싶었다. 그가 바구니 안에서 가장 크고 따끈한 파이를 집어 들어 혜미에게 내밀었다.

    “…깨어나 줘서 고맙다.”

    혜미는 차마 그를 똑바로 바라볼 수가 없었다. 아무리 범죄를 저질렀다고 해도 프랑크는 페터의 부모였다. 자식의 목을 자른 그녀를 원망하기는커녕 미안하다는 눈길로 바라보는 프랑크에게 도저히 눈을 맞출 수가 없었던 것이다.

    “이제 너를 예전처럼 대하면 안 된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커다란 녹색 눈동자가 젖어 들며 흔들렸다.

    “내 마음속에 너는 아직도… 내 가게에서 손 들고 벌서던 그 꼬마같이 보여서….”

    혜미는 그가 내민 파이를 두 손으로 받아 든 채, 오래도록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

    설원에 숨겨진 호수는 아름다웠고, 그녀의 예상보다 훨씬 더 궤적이 컸다. 얼어붙기 직전의 수면을 따스하게 반사하는 겨울 햇살이 수백 개로 굴절되어 눈 부신 빛을 뿜어냈다.

    “프랑크 아저씨 말이야.”

    호수 앞, 마치 벤치처럼 길쭉하고 네모진 바위에 앉아 혜미가 문득 물었다. 바람은 싸늘했지만 안감을 가죽으로 만든 옷은 생각보다 따뜻했다. 발터가 꺼내 준 옷이었다.

    “응.”

    “카트리나 아주머니랑 어떻게 됐어?”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자 발터가 눈을 천천히 깜빡였다. 그의 기다란 입술에서 하얀 입김이 샜다.

    “둘이 같이 살아. 지난겨울부터니까, 1년쯤 됐나.”

    “…잘됐다.”

    혜미가 코를 쓱 훔친 후, 잠시 망설이다 물었다.

    “페터의 시체는… 어떻게 처리했어?”

    “프랑크 아저씨와 함께 페터가 태어난 생가에 묻었어. 그 위에 나무도 하나 심었고.”

    발터가 높낮이에 변화가 없는 목소리로 차분히 대답했다. 혜미가 다시 수면으로 고개를 돌리곤 혼잣말처럼 중얼댔다.

    “…정신없었는데. 그동안 이것저것 신경 쓰느라 힘들었겠다.”

    그녀는 문득 같은 나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발터가 크게 느껴졌다. 그가 조약돌을 하나 집어 수면을 향해 가볍게 날리듯 던졌다.

    “영지 사람들의 장례와 결혼을 주관하는 것 역시 가주의 일이니까. 당연한 거지.”

    그제야 혜미는 발터가 세르노티의 가주라는 사실을 상기했다. 그리고 그가 떠맡고 있는 무거운 책임감도.

    자그마한 돌멩이가 퐁, 퐁, 퐁, 널을 뛰듯 수면 위를 튕기다 아래로 잠겼다.

    “…넌 뭐든지 잘하는구나.”

    “물수제비는 너도 아마 잘할걸.”

    발터가 허리를 굽혀 조약돌을 고른 후, 그녀의 손에 하나를 쥐여 주었다. 매끈하고 납작한 까만 돌을 손으로 만지작거리던 혜미가 잠시 머뭇거리다 수면 위로 휙 팔을 뻗었다.

    퐁당.

    호선을 그리며 수면 밑으로 수직 낙하하는 돌멩이를 보며 혜미가 인상을 찌푸렸다.

    “뭐야….”

    “하하. 여전히 못 하네.”

    “설마 거짓말한 거야?”

    “네가 죽어도 나한테 그건 안 배우겠다고 고집을 피웠었거든.”

    발터가 기다란 입술을 늘어뜨리며 낮게 웃었다. 시리고 차가운 입김을 뿜어내며 미소 짓는 모습에 저절로 시선이 갔다. 정신없이 그를 빤히 쳐다보고 있다는 사실을 스스로 알아챌 때쯤, 발터가 그녀를 향해 눈을 맞추었다.

    “…가르쳐 줄까?”

    늦은 오후, 겨울 햇살에 비치는 발터의 눈동자가 그녀를 가만히 응시했다. 진중한 갈색 눈에 온기가 스며드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심장이 조금 울렁대는 느낌에 혜미는 괜히 목을 가다듬으며 다시 호수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나중에.”

    그의 시선을 계속 마주하면 얼굴이 붉어질 것만 같았다. 호수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며 혜미가 방금 생각났다는 듯, 화제를 돌렸다.

    “근데 말이야.”

    “응.”

    “내 얼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예쁘잖아. 왜 처음부터 말 안 해 줬어?”

    발터가 대답 대신 낮게 소리 내어 웃었다. 겨울바람 소리에 그의 나직한 웃음소리가 번졌다.

    “어어. 농담인 줄 아네. 난 진짜 깜짝 놀랐는데.”

    사실이었다. 탑 안에는 거울이 없었고, 그곳을 나올 당시는 한가롭게 거울을 찾고 있을 상황이 아니었다.

    카플란을 모두 처치하고 피와 검댕에 젖은 얼굴을 씻을 때, 그녀는 물에 비치는 제 얼굴을 처음 확인하곤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이곳으로 와서 가장 맘에 드는 게 있다면 달라진 외모 하나뿐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넌 남자라서 잘 모를 수도 있는데. 단발머리가 이렇게 잘 어울리기가 쉬운 게 아니거든. 여배우 사진만 보고 머리 잘랐다가 이상과는 다른 현실에 피눈물을 흘린 사람이 엄청 많단 말이야. 근데 왜 내 외모가 평균 이상 수준이란 걸 어떻게 단 한마디도 안 해 줬냐고.”

    그랬다면 갑자기 난데없는 곳으로 끌려온 판국에 기분이 조금이나마 나아졌을지도 모른다.

    말을 하다 보니 흥분해 목소리가 높아지는 그녀를 보며 발터가 여전히 입술을 길게 늘어뜨린 채 낮게 속삭이듯 내뱉었다.

    “나무 위에서… 햇살에 비친 네 웃는 얼굴에서 시선을 뗄 수가 없었다고 말하지 않았나?”

    “치. 그런 식으로 빙빙 돌려 말하면 누가 알아들어?”

    “난 지금도 심장이 떨리는데.”

    “…응?”

    “네가 눈을 뜨고 나를 바라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뛴다고.”

    주저하지도 않고 내뱉는 발터의 말에 오히려 혜미의 얼굴이 빨개졌다.

    “충성을 바쳐야 할 주군을 보고 이런 생각이 드는 나는 아마 최악의 기사이겠지.”

    고집스레 툭 불거진 발터의 콧잔등 색이 은근히 짙어지고 있었다.

    “이런 날 용서해라, 이든.”

    말하라고 한 건 그녀였지만, 또다시 훅 들어오는 그의 말에 뭐라고 답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소름이 끼쳐서 도저히 더는 못 들어 주겠군.”

    뒤에서 들려오는 세드릭의 날카로운 목소리에 혜미가 화들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앉은 자세에서 엉덩이가 위로 5센티 정도 들린 것도 같았다.

    “이든도 모자라 발터 너마저도 머리가 좀 돌아 있는 상태인 건가? 아니면 치즈를 너무 많이 처먹어서 그렇게 끈적해진 거야?”

    발터가 고개를 흘깃 들고 그를 보았다.

    “왔으면 인기척을 좀 내라, 세드릭.”

    세드릭은 그의 출현을 눈치챘으면서도 태연하게 내뱉는 발터를 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혹시나 이든의 엉덩이가 시리기라도 할까 밑에 양털로 만든 깔개까지 챙겨 온 발터를 보니 기가 찼다.

    그래놓고 뭐? 용서하라고?

    세드릭은 발터가 스스로를 과연 객관적으로 보고 있을지가 궁금했다. 이든을 대하는 발터의 태도는 부하라기보다 그녀의 사랑을 뜨겁게 갈구하는 남자, 그 자체였다.

    “이든이 놀라잖아.”

    기억을 잃은 그녀를 대하는 발터의 태도는 더욱 우스웠다. 불면 날아갈까 잡으면 깨질까 전전긍긍하는 이유를 짐작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지만 이건 좀 심하다는 느낌이었다.

    “담에는 200보 앞에서부터 뿔피리를 불면서 걸어오지.”

    혜미가 세드릭을 보며 민망함을 감추지 못하고 흠, 흠, 헛기침을 했다. 그녀가 그러거나 말거나 세드릭은 여전히 기분 나쁘다는 표정을 유지한 채, 조금 떨어진 길쭉한 돌에 걸터앉았다.

    “날 찾았다던데.”

    팔짱을 끼고 다리를 꼰 모습이 무척이나 다가가기 어렵게 느껴졌다. 세드릭으로서는 그녀의 명령을 거부할 수 없는 위치에 있었지만, 혜미는 아직도 그를 보면 긴장감이 들었다. 그녀가 작게 목을 가다듬은 후, 입을 열었다.

    “네. 상의할 게 있어서 보자고… 했어요.”

    “그게 뭐지?”

    “세드릭은 앞으로 카플란이 어떻게 나올 거라고 생각해요?”

    그에게 단도직입적으로 묻는 그녀의 옆에서 발터가 슬그머니 인상을 찌푸렸다.

    “왜 내가 아니라 세드릭에게 묻는 거지? 그 정도라면 나도 답해 줄 수 있어.”

    세드릭이 발터를 향해 코웃음을 쳤다. 뒤끝이 가득한 말투에 뾰족하게 날이 섰다.

    “다짜고짜 동료에게 칼부터 빼내고 보는 너보다 내가 더 신뢰가 갔나 보지.”

    “그거야 네가 먼저 이든에게 칼을 휘둘렀기 때문이잖아.”

    짐승처럼 눈을 시커멓게 빛내는 발터를 향해 세드릭이 어깨를 으쓱했다.

    “그랬음에도 불구하고 이든이 내게 의견을 묻는다는 건, 내 판단이 더 신빙성이 있다는 말 아니겠어?”

    “저기요, 둘이 말하는데 죄송한데요.”

    혜미가 그들 사이에 조용히 끼어들었다. 그리고 진지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전 그냥 나이순으로 물어보는 것뿐이에요.”

    그들의 오해는 풀어 줘야 했다. 특히나 자존심 상한 얼굴로 피부색이 붉어진 발터를 보니 더욱 그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제가 은근히 유교걸이라서. 연장자 존중이 몸에 뱄거든요.”

    “…지금 이든이 뭐라고 지껄이는 거지?”

    세드릭이 길게 빠진 눈썹을 삐딱하게 올렸다.

    “네가 우리 중 제일 늙었다는 뜻인 것 같다.”

    발터가 넓은 가슴을 쭉 펴며 당당히 내뱉었다. 혜미가 돌덩이 같은 그의 허벅지를 손으로 꽉 움켜쥐자 발터가 낮게 신음 같은 한숨을 내쉬었다. 짙은 피부색이 슬쩍 변하며 굵직한 목덜미까지 열이 올랐다.

    “이든. …나중에.”

    발터가 뜨거워진 눈으로 혜미를 보며 의미심장하게 중얼거렸다. 그녀는 더욱 미칠 지경이었다. 뭐… 뭐? 그런 뜻으로 허벅지를 잡은 게 아니라고!

    당황한 그녀를 구해 준 것은 세드릭의 일침이었다. 그가 한쪽 눈썹을 삐딱하게 들어 올리며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지금 내 앞에서 둘이 염병을 떨기 위해 날 부른 건가?”

    “아뇨! 아니에요. 말하세요, 세드릭.”

    세드릭이 목을 조금 가다듬고는 마침내 날카로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카플란이 3년 전 보낸 이들의 수는 어림잡아 스물 그리고 일주일 전에 보낸 암살자들의 수는 아일라를 제외하고 73명이었다.”

    “…원래 백 명이었는데 오는 길에 아일라가 스물일곱을 처리했다고 들었어요.”

    아일라의 이름이 나오자 세드릭의 눈빛이 한층 더 날카로워졌다.

    “그럼 백 명이었군. 카플란의 규모가 아무리 크다고 한들 백 명을 한꺼번에 보낸 건 적은 숫자가 아니야. 네가 다시 깨어났다는 사실을 알고 난 후, 작정을 하고 쳐들어온 거지. 근데, 카플란이 누군지는 알고 있는 거지?”

    “네. 발터를 통해서 이야기를 들었어요.”

    혜미가 진지한 표정으로 그에게 물었다.

    “카플란이 크리스티앙의 군대를 빌려 쳐들어오는 대신 새벽에 몰래 급습한 이유는, 역시 이 일이 카플란의 단독행동이기 때문일까요?”

    세드릭이 신중하게 답을 했다.

    “현 황제가 배후에 있는 거냐고 묻는다면, 난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고 본다.”

    “무슨 뜻이야?”

    발터가 세드릭을 향해 묻자 세드릭이 낮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그동안 생각을 좀 해 봤거든. 클라웨 황실은 피의 역사 때문에 형제들 간의 패권 싸움을 지양하려 노력해 왔어. 그런데 만약 이 상황에서 제1 황녀가 죽지 않고 살아 있었다는 사실이 알려진다면 어떻게 될까. 그리고 그녀를 시해하려 한 이가 크리스티앙의 어미인 태후였다는 사실이 밝혀진다면?”

    “…귀족들이 반발이 생길 수 있다는 소리야?”

    세드릭이 발터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아무리 크리스티앙이 귀족들에게 공포정치를 시연하고 있다고 해도, 제국은 이제 너무 커졌다. 이든의 존재를 이용하려는 사람들이 분명히 나타나겠지. 그걸 막기 위해서라도, 내가 크리스티앙이라면 나는 널 쥐도 새도 모르게 처리하는 데 온 힘을 다할 거야.”

    혜미가 꿀꺽 마른침을 삼켰다. 역시. 세드릭이 브레인이라고 생각했던 그녀의 판단은 틀리지 않았던 모양이었다.

    “그럼 작정을 하고 보낸 암살단이 전부 다 멸살당한 이 시점에서는 어떻게 되는 거예요?”

    “너 지금 몰라서 묻는 거야?”

    “…네.”

    혜미가 진지한 눈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탄식하듯 길게 한숨을 내뱉은 세드릭이 헛소리를 하기 전에, 발터가 먼저 입을 열었다.

    “클라웨 제국에서 가문끼리의 전쟁은 황제의 관여 밖이야, 이든.”

    전쟁.

    짤막한 단어를 듣는 순간, 혜미의 한쪽 관자놀이가 지끈거렸다.

    “카플란이 가문 간의 전쟁을 일으킬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어. 아니….”

    세드릭이 단언하듯 말을 마쳤다.

    “난 확실히 그럴 거라고 생각한다.”

    혜미가 짧게 숨을 몰아쉬었다.

    “그럼… 만약 카플란이 전쟁을 일으킨다면 우리의 선택은 어떻게 되는 건데요…?”

    “그건 네가 결정해야지.”

    “제가 왜요?”

    “넌 대마법사의 보석을 받은 클라웨의 황위 계승자니까. 세르노티는 주군을 위해 움직여.”

    세드릭의 대답은 망설임이 없었다. 이럴 때만 꼭 황제 카드를 꺼내는 그의 표정은 발터와 닮아 있었다. 혜미는 왠지 모르게 그들의 이마를 한 대씩 찰싹 때려주고 싶다는 마음을 애써 참으며 툭, 던져 물었다.

    “그럼 내가 짐 싸 들고 다 같이 도망가자고 하면 그렇게 할 거예요?”

    “이든, 그건….”

    세드릭의 단정한 눈썹이 미간에 모였다. 어차피 다들 이렇게 나올 거면서 선택의 여지는 왜 주는 건지, 혜미는 도대체 이해를 할 수가 없었다.

    “그냥 해 본 말이에요. 긴장 푸세요.”

    샐쭉하게 내뱉은 후, 그녀가 크게 한 번 심호흡을 했다. 어차피 그들에게 할 말은 처음부터 정해져 있었다. 결심은 했지만 긴장이 되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그녀는 땀이 나는 주먹을 꽉 쥐고 입술을 열었다.

    “저요. 세드릭이 기억을 되찾으라고 했지만 사실 실패했어요. 그날 밤에 페터의 일을 떠올려 낸 건, 어떻게 된 영문인지 저도 확실히 모르겠어요. 아마도 아일라가 그렇게 억울하게 당하는 걸 보고 있는 제 머리가 그 상황을 견뎌 내질 못한 것 같아요. 가끔은 스스로도 설명할 수 없는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나곤 하잖아요. 세드릭은 제 말이 무슨 뜻인지 아시겠죠?”

    “알 것 같군.”

    역시. 머리 좋은 사람은 다르다. 발터와는 다른 반응을 보는 혜미의 눈이 감동에 조금 흔들렸다. 하지만 드디어 말이 통하는 사람을 만난 것 같다는 느낌은 잠시였다. 세드릭이 회색 눈동자를 무섭게 번뜩이며 날카롭게 말을 이었다.

    “너 때문에 세르노티의 기사 하나가 억울하게 죽었다면 나는 널 저 호수에 반죽을 때까지 처박았을 거야. 살아야겠다는 본능이 육체를 지배하는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나 천만다행이구나, 이든.”

    “죽고 싶어?”

    발터가 눈을 가늘게 뜨며 낮게 으르렁거렸다. 또다시 세드릭에게 칼을 내뽑을 기세인 발터를 막듯, 혜미가 목소리를 높였다.

    “저기요, 둘 다 그만!”

    동시에 그녀를 향한 두 쌍의 시선을 보며 혜미가 양 주먹을 슬쩍 쥐었다.

    “저 지금… 되게 중대한 발표를 할 거예요. 그러니까 집중해 주세요.”

    코웃음 칠 거라고 생각했지만 의외로 세드릭은 조용했다. 발터 역시 특유의 진중한 표정으로 그녀를 뚫어져라 바라볼 뿐이었다. 혜미는 길게 한숨을 내쉰 후, 결심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솔직히 말하면 저는 황위나 전쟁 같은 거 정말 관심도 없고요. 할 수만 있다면 피하고 싶어요. 성인이 되어서 이런 말 부끄럽지만 저는 원래 정치 같은 것도 머리 아파서 싫어하거든요. 그런데….”

    혜미가 말을 잠시 멈추었다. 그녀의 눈동자가 가늘어져 빛났다.

    “근데, 아무리 생각해도 붉은 여우인지 구미호인지, 그 카플란은 못 참겠어요. 그 새끼는 진짜 나쁜 놈이에요.”

    나직하게 내뱉는 그녀의 목소리가 떨렸다. 혜미가 고개를 들어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발터와 세드릭에게 차례로 눈을 맞추었다. 아일라의 끔찍했던 과거사를 들으면서 줄곧 생각했던 결심을 털어놓는 그녀의 눈가가 뜨끈하게 달아올랐다.

    “저는… 카플란의 수장을 죽이고 싶어요. 아니….”

    붉게 타는 해가 서쪽 하늘에 넘어가고 있었다. 그녀의 젖은 눈동자에 선명한 의지가 불꽃처럼 타올랐다.

    “반드시 죽일 생각이에요.”

    아일라가 그토록 원했던 세르노티의 이름으로.

    처음부터 이러려고 그들을 부른 거였다.

    “그러니까 절 좀 도와주세요.”

    ***

    잠시 말이 없는 세드릭을 보며 혜미는 속으로 조금 당황했다. 하지만 그녀의 결심을 바꿀 수는 없었다.

    “…무모하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겠지만….”

    “아니. 좋은 생각이야.”

    세드릭이 그녀의 말을 자르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가 여태껏 했던 말 중, 어쩌면 가장 내 맘에 드는 말인지도 모르겠다.”

    “…발터, 네 생각은 어때?”

    “바라던 바야.”

    발터가 그녀를 보며 낮게 내뱉었다. 왠지 마음이 든든해지는 것을 느끼며 혜미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그럼 할 말은 끝난 거지?”

    세드릭이 자리에서 일어나는 걸 보며 혜미가 고개를 쭉 뺐다.

    “어디 가세요?”

    “작전도 짜지 않고 무작정 싸울 순 없잖아. 난 누구처럼 단순하지가 않아서.”

    세드릭의 존재도 든든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그가 내뱉는 날카로운 말투에도 그새 익숙해진 모양인지 밉지가 않았다.

    “아일라에게 약도 가져다 줘야 하고.”

    “저기 세드릭.”

    혜미가 그를 보며 잠시 망설이다 입을 열었다.

    “아일라에게 카플란에서 있었던 일에 대해서는 너무 캐묻지 말아 주셨으면 해요.”

    “걱정 마라. 네가 오지랖을 부리지 않아도 내 일은 내가 알아서 하니까.”

    쓸데없는 말을 하냐는 표정으로 내뱉고 돌아서려던 세드릭이 문득 생각난 듯 휙, 고개를 돌렸다.

    “근데 언제까지 내게 극존칭을 쓸 생각이지? 지금 나보고 네게 존대하라고 돌려서 압박을 주고 있는 건가 설마?”

    “그럴 리가요!”

    “이든은 사고가 단순해서 너처럼 비비 꼬인 생각 같은 건 못 해.”

    혜미는 도대체 거드는 건지 한 방 먹이는 건지 모를 말을 지껄이는 발터를 찌릿 노려보았지만 그는 어깨를 한 번 으쓱할 뿐이었다.

    “전 그저, 세드릭이 저랑 한 살 차이밖에 안 난다고 하기엔 너무….”

    “늙어 보여서 그렇단 소리지.”

    적당한 표현을 고르는 그녀를 대신해 발터가 간단히 말을 정리했다. 혜미가 당황하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니, 전 어른스러워 보인다는 말을 하려고…!”

    황급히 손을 내저었지만 변명할 기회는 주어지지 않았다. 잿빛 눈썹이 미간에 모이는가 싶더니 세드릭이 말도 없이 휙, 뒤를 돌았다.

    “잘 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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