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4화 (14/72)

“겨우 이거냐, 페터?”

혜미의 심장에서 뜨거운 열기가 솟았다. 아무런 생각도 할 수가 없었다. 또다시 입술이 마음대로 움직이고 있었다. 페터가 그녀를 보며 씩씩 숨을 몰아쉬었다.

“내 손에 뒈진 주제에… 말이 많잖아…!”

혜미는 크게 움직이지도 않았다. 휙, 휙, 쉼 없이 날아드는 페터의 칼을 빠르게 피하며 그녀가 잇새로 속삭였다.

“내가 널 죽이는 데는 단 1초도 걸리지 않아.”

자존심이 짓밟힌 페터의 두 눈이 검게 이글거렸다. 같은 나이였지만 이든의 실력은 늘 그보다 우수했다.

“페터, 오늘따라 검이 오른쪽으로 조금 치우치는데? 혹시 손목을 다쳤어? 내가 봐 줄게.”

계집애 주제에, 같은 나이 주제에, 건방지게 그에게 훈수를 두며 깔보았었다.

“저기 페터. 아까 쉬는 시간에… 프랑크 아저씨한테 왜 그렇게 화를 낸 거야? 나는 훈련 중에 육포 챙겨 주는 아빠가 있으면 진짜 좋겠는데.”

돼지 피가 잔뜩 묻은 냄새 나는 에이프런을 입은 채로 그에게 다가왔던 아버지를 피하고 싶었던 그의 마음을 알지도 못하면서 비난했다.

“으아아아!!!”

뼛속 깊은 열등감에 사로잡힌 페터가 그녀에게 달려드는 순간, 혜미의 몸이 위로 도약하며 발로 그의 턱을 강하게 걷어찼다.

“흐윽…!”

페터가 균형을 잃고 비틀거렸다. 순식간에 시야가 깜깜해질 정도의 엄청난 위력이었다. 간신히 검을 붙든 채 페터가 그녀를 향해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

“하아…. 너… 너…!”

공중에서 한 바퀴를 돌고 바닥에 착지한 혜미가 그를 향해 잇새로 중얼거리듯 내뱉었다.

“아파…?”

“으아아아!!!”

검을 들고 그녀에게 달려들었지만, 혜미는 어느새 그의 뒤에 있었다. 페터의 등을 발로 강하게 걷어차자 그가 신음하며 앞으로 밀려나듯 휘청거렸다.

“이 정도가 아프냐고!”

혜미가 그에게 소리를 질렀다.

“넌 파비안을 죽이고!”

페터의 팔목에서 검이 날아갔다. 얼굴과 배에 연달아 주먹이 내리꽂혔다. 페터의 코와 입술에서 피가 터졌다.

“리온과 발트리를 죽게 만든 것도 모자라 내 몸을 난도질했어!”

그녀의 곁에서 카플란과 싸우는 세르노티의 기사들의 귀에도 똑똑히 들릴만한 목소리였다.

“이든의 말이… 사실이야?”

빈센트가 땀을 훔쳐 내며 발터를 향해 인상을 찌푸렸다.

“페터가 아까 세드릭을 뒤에서 공격하는 걸 너도 똑똑히 봤잖아.”

발터가 한 놈의 목에 칼을 박았다 거칠게 빼내며 내뱉었다.

“복수는 그녀에게 맡겨. 우린 최대한 그녀를 비호한다.”

달려드는 카플란의 수는 3년 전의 기습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많았다. 빈센트가 진중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인 순간, 혜미가 발터의 이름을 크게 외쳤다.

“발터…!”

발터가 고개를 휙,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 눈발이 날리는 세르노티의 성. 두 쌍의 시선이 부딪쳤다. 혜미가 시뻘겋게 열기가 오른 눈동자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흐으…. 윽….”

그녀의 앞에서 검을 놓치고 쓰러진 페터가 두려움에 질린 표정으로 바닥을 기었다. 그리고 발터는 그녀의 눈빛이 하는 말을 읽었다.

휙!

발트리가 그녀에게 주었지만, 이든이 거부했던 기다란 검이 검집째 공중을 날았다.

탁.

혜미의 손이 공중으로 날아온 검의 손잡이를 잡는 것과 페터의 신음은 간발의 차를 두고 이어졌다.

“흐으윽!!!”

일어나서 도망치려던 페터의 등에서 검붉은 피가 터져 나갔다. 페터의 어깨와 가슴을 연달아 베어 냈다. 혜미는 그의 몸을 또 한 번 깊숙이 찔렀다가 검을 뺀 후, 다시 다리를 베었다.

뎅그렁.

겨울바람을 타고 종소리가 울려 퍼졌다. 혜미가 급소만을 피해 공격한 탓에 페터의 숨은 끈질기게 붙어 있었다.

“흐윽….”

페터의 가슴에서 붉은 피가 터지며 그녀의 몸에 흩뿌려졌다. 그가 그녀를 보며 킬킬대며 웃었다.

“어차피 넌… 큭… 죽게 될 운명이다…. 이든….”

혜미가 페터를 향해 검을 공중에 치켜들었다. 높이 치켜든 검이 공중에서 부들부들 소리 없이 떨렸다.

몸속에서 뜨거운 분노를 실은 피가 돌았다. 혜미의 눈에는 눈물이 맺혀 있었다. 분노의 크기만큼 슬픔이 피어올랐다. 그것은 한때 동료였던 이를 향한 지독한 양가감정이었다.

페터가 그녀를 향해 기괴하게 눌린 목소리로 간신히 말을 이었다.

“두 개의 태양이 크흑… 한 하늘에 존재할 수 있다고 생각… 해? 크리스티앙이 있는 한, 넌 언제고 죽어야 하는…!”

“안녕. 페터.”

혜미의 입술에서 떨리는 작별 인사가 흘렀다. 은빛 궤적이 사선을 그린 순간, 페터의 머리가 공중에 날았다. 그의 목을 깔끔하게 잘라 낸 그녀의 검에서 핏빛 보석이 번쩍거렸다.

“하아….”

눈을 감지 못한 페터의 머리가 바닥을 굴렀다. 젖은 눈으로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는 그녀를 향해 발터가 크게 외쳤다.

“이든! 오른쪽!”

혜미의 고개가 반사적으로 돌아가며 적의 검을 막았고, 발터가 던진 단검이 적의 심장을 뚫었다. 몸을 완전히 관통한 단검을 집어 들고 혜미는 주변을 돌아보았다.

세르노티의 기사들이 고군분투하고 있는 모습이 똑똑하게 눈에 들어왔다.

안 돼.

아무도 죽어선 안 된다. 세르노티의 그 누구도 그녀 때문에 죽는 일은 없어야 했다.

그때. 그 밤처럼.

“흐… 아아아!”

혜미는 그들 사이로 뛰어들어 카플란을 무차별적으로 베어 내기 시작했다. 찌르고, 베어 내고, 막고 죽이는 동작이 반복되었다.

혜미는 이를 악문 채 그저 몸이 가는 대로 움직였다. 탑에서 보았던 세르노티의 기사 하나가 적에게 깔린 것이 보였다.

날듯이 몸을 던져 그녀의 목을 자르려는 카플란의 등을 찢었다. 생각을 할 필요는 없었다. 세르노티의 평화를 박살 내는 상대가 그 누구든 용서할 수 없다는 증오로 온몸이 불타올랐다.

“이든이… 이든이 돌아왔어…!”

누군가의 외침이 성안에 울려 퍼졌다. 그 누구도 그녀가 세르노티의 이든이라는 사실을 의심할 수 없었다. 게다가 긴 잠에서 깨어난 이든은 그동안의 공백이 무색하게도 더욱 강해져 있었다.

“이든을 비호해! 우리가 지켜야 할 이를 잊지 마!”

발터가 피를 뒤집어쓴 채 폭주하는 그녀를 따라붙으며 소리를 쳤다. 긴 싸움에 지쳐 가던 세르노티의 기사들이 전열을 가다듬었다. 부딪치는 검에 힘이 붙었다. 수적 열세는 문제가 되지 않았다. 검은 옷을 입은 시체의 수가 점점 늘어 갔다.

“흐윽…!”

마지막 한 놈이 입에서 피를 흘리며 바닥에 쓰러졌다.

동이 트기 직전, 가장 어두운 새벽에 세르노티를 급습한 73명의 암살자는 전멸했다. 피범벅이 되어 숨을 몰아쉬는 혜미의 손에서 마침내 툭, 하고 기다란 검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내가 무슨 짓을 한 거지.

멍했던 정신이 갑자기 돌아온 느낌이었다. 방금까지 일어났던 일들이 모두 기억하고 싶지 않은 꿈같이 흐릿했다. 하지만 그저 악몽이라고 치부해 버리기엔 얼굴에까지 튀어 코끝에 번지는 비릿하고 미지근한 피 냄새가 너무도 생생하다.

“이든.”

혜미가 눈을 크게 뜬 채 고개를 들어 발터를 보았다. 핏방울이 튄 뺨, 커다란 눈동자에는 두려움과 슬픔이 공존했다.

“내… 내가… 사람을….”

사람을 죽였다. 그것도 떼로. 사실을 인지하자마자 몸에 한기가 들어차 덜덜 떨렸다.

“페… 페터를….”

“네가 죽이지 않았다면 내가 했을 거다.”

발터가 그녀에게 낮지만 또렷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발터의 말이 맞아! 페터가 세드릭을 칼로 찌르려는 거, 똑똑히 봤다고.”

“어떻게… 페터가… 그럴 수가 있어?”

“그럼 아일라는 처음부터 페터를 죽이려고 왔던 거야? 그동안 카플란에 혼자 잠입했던 건가?”

“뭐가… 대체 어떻게 된 거야?”

기사들이 웅성거리는 틈에서 혜미가 눈물 젖은 얼굴로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아… 아일라는…?”

“세드릭이 의사에게 데리고 갔을 거야.”

발터의 말에 혜미의 입술에서 탁, 하고 한숨이 풀렸다. 그가 그녀의 뒤통수를 끌어당기자 그녀의 이마가 그의 어깨에 닿았다. 혜미는 뜨거워지는 두 눈을 질끈 감았다.

“괜찮아.”

발터의 낮은 목소리를 듣자 감은 눈에서 뜨거운 눈물이 길게 흘러내렸다.

“다 괜찮아.”

묵직한 손이 그녀의 뒤통수를 쓸었다. 혜미가 그의 품 안에서 젖은 숨을 몰아쉬며 울먹였다.

“안 괜찮아…. 안 괜찮다고…. 흐윽….”

하나도 괜찮지가 않았다. 눈 떠 보니 낯선 곳인 것도 미치겠는데, 그녀를 죽이려는 사람들이 떼거리로 몰려온 것도 모자라 정신이 반쯤 나간 상태로 칼춤까지 췄다.

혜미는 정말이지 집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이불을 뒤집어쓰고 울고만 싶었다.

“잠깐 하늘 좀 볼래?”

그녀를 품 안에 끌어안은 막무가내의 남자가 또다시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내뱉었다.

“눈이 많이 온다.”

발터가 그녀의 귓가에 대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속삭였다.

그래서 그게 대체 뭐가 어쨌단 말인가.

“올해의 첫눈이야. 겨울의 시작이지. 이제부터 세르노티성이 얼마나 아름다워질지, 궁금하지 않아?”

그의 말대로 소리 없이 함박눈이 잔뜩 내리고 있었다. 피 묻은 시체가 즐비한 주변에 서서히 눈발이 내리깔렸다. 그녀의 머리칼 위에도, 어깨 위에도, 그녀를 끌어안고 있는 발터의 손등 위에도, 차갑고 부드러운 눈송이가 붙었다가 사르륵 녹았다.

“날이 밝으면 널 호수로 데려가 줄게.”

나직한 바리톤의 음성은 그녀를 어루만지듯 다정했다.

“겨울의 킬다 호수는 숨이 막힐 정도로 아름답거든. 처음 보는 사람도 모두 그 광경을 보면 사랑에 빠질 게 분명해. 너도 아마 그럴 거다.”

혜미의 입술에서 흐느낌이 커졌다. 발터는 그녀를 이든이라고 칭하지 않았다. 그는 적어도, 기억이 없는 그녀의 혼란스러운 상태를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울고 싶으면 울어.”

혜미의 입술에서 결국 커다란 울음이 터지고야 말았다. 발터의 가슴에 얼굴을 묻고 소리 내어 엉엉 울자, 그녀의 주위로 기사들이 원을 그리며 모여들었다.

“이든! 여전히 울보구나!”

“이든이 변할 리가 없잖아. 그나저나 이제 완전히 기억이 돌아온 거지?”

“아까 레나 죽이려던 놈, 뒤에서 난도질하는 거 못 봤어? 그렇게 무식하게 칼을 쓰는 건 우리 중 발터와 이든뿐이잖아!”

발터의 옷을 꽉 잡은 혜미의 손이 작게 떨렸다. 발터가 그녀의 마음을 안다는 듯, 안은 손에 힘을 주었다.

“이든, 왜 이렇게 떠는 거야? 설마 이제 와서 무서워서 그런 건 아니지?”

“네가 시체처럼 누워 있는데도 3년 동안 이곳을 지킨 우리가 있는데… 무슨 걱정이야!”

누군가 목소리를 높이며 애정 어린 손길로 그녀의 머리칼을 헝클이듯 쓸었다.

“그동안 발터가 얼마나 악귀같이 굴었는데. 그 시커먼 오라를 감당하면서까지 우리는 성에 남아 있었다고!”

“세드릭의 지옥 훈련은 또 어떻고? 덕분에 우린 모든 종류의 히스테리를 감당할 수 있게 됐어.”

누군가가 웃음기 어린 말투를 높였다.

“돌아온 걸 환영한다, 이든!”

“살아 돌아와 줘서 고마워!”

“우리는 네 편이야. 그거 알지?”

바닥에 떨어진 기다란 검 위에도 눈송이가 내리깔렸다. 칼 손잡이의 보석이 붉게 빛을 냈다.

어둠이 걷히고 아침이 밝아오는 세르노티성에 눈이 펄펄 날리기 시작했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모든 것을 다시 시작하려는 듯, 온 세상이 하얗게 옷을 뒤덮고 있었다.

***

손톱을 깨물며 문 닫힌 방 밖을 초조하게 왔다 갔다 하는 혜미를 향해 발터가 입을 열었다.

“궁금하면 안에 들어가 봐.”

“아… 아냐. 조금만 더 기다릴래.”

혜미가 우뚝 발을 멈추고 고개를 저었다. 임시로 병실이 된 세드릭의 방 안에는 부상을 입고 쓰러진 아일라와 그녀의 곁을 지키는 세드릭이 있었다. 아일라의 상처를 봉합하고 열에 들뜬 그녀를 밤새 치료한 의사는 벌겋게 된 눈으로 어제 아침에야 간신히 성을 떠난 후였다.

“자상이 깊어 손상된 장기가 한두 군데가 아니야. 숨이 붙어 있는 게 기적인 것처럼….”

흰 수염이 가득한 늙은 의사는 주름진 눈매를 찌푸리며 조금 작아진 목소리를 이었다.

“눈을 떠 봐야 알 것 같지만 회복 속도는 장담하지 못해. 어깨와 팔의 근육이 잘리지 않은 것은 다행인데…. 아일라가 앞으로 예전처럼 검을 쓸 수 있을지는… 솔직히 나도 장담을 못 하겠구나.”

“약은 이틀 뒤에 가지러 가겠습니다.”

수심 어린 의사를 건조하게 배웅한 것은 세드릭이었다. 그리고 방으로 돌아간 그는 만 이틀째 아일라의 곁을 떠나지 않고 있었다.

삐걱.

나무문이 열리는 소리에 혜미와 발터의 고개가 동시에 돌아갔다. 세드릭이 마침내 바깥으로 걸어 나왔다. 혜미가 흔들리는 눈으로 그를 보았다.

“아… 아일라는….”

“…깨어났어.”

“아, 다행이다….”

탄식 같은 안도가 저절로 입술을 비집었다. 한꺼번에 긴장이 풀렸다. 그녀의 옆에 있던 발터가 힘이 쭉 빠져 조금 비틀거리는 혜미를 붙들었다.

“넌 괜찮은 거야?”

“난 아무렇지도 않아.”

발터의 질문에 짤막하게 대답하는 세드릭은 한층 더 날카로워진 얼굴이었다. 아일라가 쓰러져 있는 동안 그는 물만 조금 입에 댔을 뿐 아무것도 먹지 않았다.

“…아무렇지도 않아.”

세드릭이 혼잣말처럼 중얼댔다. 그의 표정은 이제껏 혜미가 봤던 것 중 가장 복잡한 얼굴이었다. 페터가 범인이었다는 사실을 그녀가 빨리 기억해 내기만 했었더라면 적어도 아일라가 다치는 일은 막을 수 있었을 거라는 생각에 미치자, 혜미는 갑자기 그가 무서웠다.

“그… 그럼 우리는 이만….”

또다시 검을 휘두르지는 않겠지만 그의 독설은 왠지 칼날처럼 날카로울 것 같다는 확신이 들었다. 혜미가 발터의 옷을 끌며 슬며시 자리를 피하려는 순간 세드릭이 고개를 들었다.

“이든.”

올 게 왔구나. 마른침을 꿀꺽 삼키는 그녀를 향해 그가 말을 이었다.

“아일라가 널 찾아.”

“…저, 저를요? 왜… 일까요?”

혜미가 눈을 깜빡이며 조심스레 되물었다. 아직도 이상한 말투를 쓰며 그에게 존대를 하는 그녀를 향해 세드릭이 인상을 조금 찌푸렸다.

쓰러진 아일라에게 집중하느라 정신이 없었던 때, 그녀가 변절한 페터를 죽이고 카플란의 암살단 수십 명을 처리했다는 사실을 전해 들었지만 그건 그때뿐이었던 것으로 보였다. 그녀는 또다시 한없이 쭈그러진 호박처럼 굴고 있었다.

세드릭이 낮게 한숨을 쉬며 눈썹을 미간에 모았다. 검지를 치켜세운 후 벽에 딱 달라붙은 혜미를 향해 날카로운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내 말 잘 들어. 아일라는 네가 정신이 오락가락한다는 걸 아직 몰라. 사경을 헤매다 깨어난 지 두 시간도 채 지나지 않았다. 그 아이가 혼란스러워할 이야기는 하지 않는 것이 여러모로….”

“들어가, 이든.”

길어지는 세드릭의 말을 중간에 뚝, 자르며 발터가 나무문을 열었다. 혜미가 마른침을 꿀꺽 삼키며 그를 보았다. 발터가 괜찮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용기를 내어 아일라가 누워 있는 공간 안으로 발을 내디뎠다.

세드릭의 방은 크지 않았지만, 그의 성격대로 먼지 하나 없이 깨끗이 정리되어 있었다. 작은 침대에 누운 아일라가 그녀를 보며 입술을 뗐다.

“…이든.”

혜미는 주먹을 꽉 쥐었다 편 후 그녀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침대 옆에는 왜인지 의자가 옆으로 툭 쓰러져 있었다. 그녀는 등받이가 없는 스툴을 일으켜 세운 후, 조심스레 앉았다.

“좀… 괜찮아…?”

세드릭의 염려를 상기하며 혜미는 최대한 자연스러운 말투로 아일라에게 말을 건넸다.

사흘 전, 페터의 칼을 맞고 쓰러지는 아일라를 보며 그녀는 온몸에 피가 끓었다. 이건 아니라는 예감에 머리가 깨질 듯이 아프고 심장이 분노로 울렁거렸다. 덕분에 예전의 일이 단편적으로 떠오른 것은 사실이었지만 단지 그 순간뿐. 아일라에 대한 기억은 발터에게 들은 이야기가 전부였다.

처음 대면하는 거나 다름없는 그녀에게 어디서부터 말을 꺼내야 할까. 머뭇거리는 혜미를 향해 아일라가 먼저 말을 꺼냈다.

“미안해요.”

“…응?”

혜미는 갑자기 사과를 하는 아일라를 보며 영문 모를 표정을 지었다. 아일라가 자그마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모두에게 미안하지만… 이든에게는 꼭 사과해야 한다고 생각했었어요.”

“뭐를…?”

“그냥 다요. 솔직하게 말하지 못했던 게 맘에 걸렸어요. 이든은 항상 내게 거짓이 없었는데.”

“괜찮아. 정말 괜찮아, 아일라.”

혜미가 고개를 저으며 강하게 부정했다. 푸른 눈동자를 가진 아름다운 소녀가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죽지 않고… 살아나서 미안해요.”

“그런 말이 대체 어디 있어.”

혜미가 인상을 찌푸렸지만 아일라는 멈추지 않았다.

“3년 전, 그날 밤에 이든을 지키지 못해서… 미안해요. 배신자는 페터뿐만이 아니라 비겁하게 도망친 나 역시 마찬가지예요.”

“아일라….”

아일라가 시선을 아래로 떨군 채, 나직하게 말을 이었다.

“처음부터 세르노티도 아니었던 내가… 그런 말을 할 자격이 없는 걸 아는데…. 5년 동안 모두와 함께 지내면서 착각을 했나 봐요.”

“…….”

“새들 틈에서 자란 오리같이…. 저도 하늘을 날 수 있다고… 바보같이 그렇게 착각했었나 봐요.”

흐리게 자조하는 그녀의 모습에 가슴이 쿡쿡 쑤시듯 아팠다. 혜미는 잠시 망설이다 그녀를 향해 조심스레 물었다.

“…어떻게 된 건지 나한테 말해 줄 수 있니?”

아일라가 고개를 들어 혜미를 바라보았다. 기다란 황금색 속눈썹이 느리게 깜빡였다.

“넌… 처음부터 카플란이었던 거야?”

세르노티성으로 온 것도 의도적이었을까. 대체 아일라가 긴 시간 동안 털어놓지 못했던 이야기는 과연 무얼까.

“카플란의 노예에 불과했던 제가 암살단으로 활동하게 된 건….”

긴 침묵 끝에 아일라가 입을 열 때까지만 해도, 혜미는 그녀의 입에서 나올 이야기를 상상하지 못했다.

“절 범하려던 장군 하나를 제가 죽인 직후였어요.”

혜미가 잠시 숨을 멈추었다. 아일라의 푸른 눈동자의 초점이 마치 먼 곳을 보듯 흐릿하게 변했다. 타닥거리는 모닥불 소리가 조용한 공간에 더욱 크게 들렸다.

“노예 출신인 여자에게 강제로 몸을 빼앗기는 것은 일상적인 일이었어요. 제 어머니도 노예였고, 제 여동생도 노예였고… 제 어머니의 어머니도 노예였다고 들었어요.”

눈에 띄는 외모를 가진 노예의 인생은 험난할 뿐이었다. 그녀는 카플란의 가주인 헬무트 카플란과 그의 형제 다섯의 방에 매일같이 불려갔다.

“벌거벗은 채 눈알을 번뜩이며 자신의 차례를 기다리는 그들의 눈빛은 짐승의 그것과 다를 바가 없었어요. 아니… 차라리 짐승한테 목이 뜯기는 편이 낫다고 생각했어요.”

혜미의 눈썹이 미간에 모였다. 미간이 뜨끈해지고 호흡이 거칠어진다.

“자기들끼리는 그걸 연대라고 불렀어요. 술과 약에 진탕 취한 채, 노예 하나를 공동으로 가지는 일을 말이죠.”

개소리다. 미친 소리다.

가슴속에서 뜨거운 분노가 치밀어 올라 참을 수가 없었다. 혜미는 입술을 아프게 깨물었다. 입 안이 바짝바짝 말랐다. 가슴속에 돌멩이를 매단 것처럼 심장이 무거워지고 눈자위가 뜨겁게 달아올랐다. 무릎에 놓인 그녀의 손이 소리 없이 떨렸다.

“헬무트는 자신의 마음에 드는 부하에게 절 하룻밤 선물로 주곤 했어요. 제가 처음… 죽인 사람도 그중 하나였고요.”

사냥 대회에서 우승을 한 지휘관의 집에 바쳐졌던 날 밤, 아일라는 몇 시간 동안 맞기만 했다.

“얼마만큼 맞았는지 기억나지도 않아요. 입 안에 피가 터지고 코가 핏덩이에 막혀서 두 배로 부어올랐어요. 아릿한 정신으로 생각했던 것 같아요. 아. 얼굴이 엉망진창이 됐으니 내일은 아무도 상대하지 않아도 되겠구나. 하고.”

혜미는 짤막한 손톱이 손바닥에 박힐 정도로 주먹을 꽉 쥐었다. 온몸이 부들부들 떨리는 그녀와는 달리 아일라는 차분했다. 그 모습이 오히려 혜미의 마음을 더욱 시리게 만들었다.

“피투성이가 된 저를 보며 그가 웃었어요. 맘에 든다고 했어요.”

아일라가 희미하게 조소하듯 입술을 비틀었다.

“이제야 좀 할 맛이… 난다고.”

혜미는 이를 꽉 깨물었다. 단언컨대, 지금 그놈이 그녀의 눈앞에 있다면 무슨 수를 써서건 죽일 수 있을 것 같은 확신이 들었다.

“흥분된다고.”

어떻게.

악마가 아니라면 어떻게 그럴 수가 있을까.

그가 피로 범벅이 된 그녀에게로 몸을 겹친 순간, 아일라는 침상 옆에 있던 꽃병을 깨서 그의 눈을 찔렀다.

“그 뒤에 일어난 일은 잘 기억이 나지 않아요. 다만 정신을 차리고 보니 거구의 장군이 온몸이 난도질된 채 쓰러져 있었다는 것뿐.”

아일라의 푸른 눈동자에 새까만 그림자가 깔렸다. 혜미는 뭐라고 대꾸도 할 수가 없었다. 죽음보다 끔찍한 공포를 홀로 감당해야 했던 그녀 앞에서 터지려는 눈물을 애써 참는 것밖에는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처형당할 걸 알았지만 두렵지는 않았어요. 깔끔하게 목이 잘리는 게 차라리 낫다고 생각했어요. 그리고… 절대로 다시 태어나지 않기를 바랐어요.”

아일라의 목소리는 얼음이 낀 호수처럼 서늘했다.

“제게는 이 세상이 너무 끔찍했거든요.”

“…아일라.”

“근데… 더 끔찍한 일이 일어난 거예요.”

카플란의 가주인 헬무트 카플란은 그녀 몸집의 세 배가 넘는 지휘관의 몸을 갈기갈기 찢어발긴 아일라를 신기하게 여겼다. 그리고 아일라를 처형하는 대신, 그녀를 암살단으로 훈련시켰다. 어머니와 여동생은 더 이상 노예 취급을 받지 않게 되었으나 아일라가 만일 카플란을 배신한다면 그들의 미래가 어떻게 될지는 뻔한 이야기였다.

“지옥 같은 훈련을 1년 정도 받고 난 후 그들은 저를 트리바 산맥 남단 지점에 버렸어요. 어떻게든 세르노티 성안에 들어가라는 명령과 함께요.”

맨몸으로 버려진 아일라는 보름 동안 맹수가 창궐하는 울창한 숲을 헤맸다. 그들이 그녀에게 내린 명령은 세르노티 안에 잠입해 대마법사의 보석을 찾으라는 것이었다.

“대마법사의 보석이 대체 뭔지 물어봤지만 아무도 가르쳐 주지 않았어요. 시간이 지나고 발트리의 수업을 듣고 나서야 그들이 뜻하는 것이 뭔지 알았지만…. 처음 숲에 버려졌던 저는 정말로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였죠.”

아일라의 목소리가 한층 더 낮아졌다.

“세르노티가 어딘지도 몰랐어요. 이든도 알다시피 암살단은 거처를 숨기는 게 일반적이고, 특히나 세르노티 같은 경우는 선대 황제가 죽은 후 12년간 모습을 감추었기 때문에 더욱 그랬죠. 아마 저 말고도 수많은 카플란이 세르노티를 찾다가 죽었을 거라고 생각해요.”

혜미는 미간을 일그러뜨린 채 주먹을 쥐었다 펴기를 반복했다. 카플란은 아일라를 철저하게 도구로만 대했을 뿐이었다. 쓰다 버려도 아무런 문제가 없는.

“밤이면 늑대를 간신히 피하고 낮에는 걸었어요. 아무것도 제대로 먹지 못한 저는 굶어 죽기 일보 직전이었어요. 눈앞이 자꾸만 희미해지고 걸음을 걸을 수가 없었어요. 자꾸만 제 위를 따라다니며 빙빙 도는 커다란 까마귀를 보곤, 그 새가 제가 죽기만을 기다린다는 사실을 알았죠.”

아일라의 푸른 눈이 눈물에 반짝 빛났다.

“그리고… 제 눈앞에 천사가… 나타났어요.”

여린 어깨를 단단히 감은 붕대에서 붉은 피가 서서히 퍼져 나갔다. 혜미가 놀라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일라, 상처가….”

“세드릭이 화살 사위를 당겼을 때 전 생각했어요. 아. 저 아름다운 천사가 날 고통 없이 죽여주려는 거구나. 그런데… 그런데… 흣….”

여지껏 아무런 동요가 없던 아일라가 그녀를 바라보며 입술을 아프게 깨물고 있었다.

“세드릭이 화살을 쐈고, 소름 끼치는 소리를 내며 울던 검은 새가 제 옆으로 떨어졌어요.”

이제껏 차분하던 아일라의 목소리가 엉망으로 떨리며 젖어 들었다. 눈물 젖은 눈으로 그녀를 보며 아일라가 속삭이듯 내뱉었다.

“있잖아요, 이든. 저를… 구해 준 사람은… 세드릭이 난생처음이었어요.”

혜미는 뜨거운 눈을 일그러뜨리며 입술에 힘을 꽉 주었다.

아일라.

“아무도 제 외침을 들어 주지 않았어요. 싫다고 몸부림치면 그들은 절 때리며 창녀면 창녀답게 남자를 받는 걸 감사히 여기라고 했어요. 아프다고 울면 우는 모습이 사람을 더 미치게 한다고…. 더 크게 울어 보라고 했어요…. 그런데… 그런데….”

두서없이 내뱉는 말이 점점 빨라지고, 서러운 목소리가 한층 더 높아졌다.

“세드릭이 우… 울지 말라고 했어요…. 으흑…!”

결국 아일라는 커다랗게 울음을 터뜨리고야 말았다. 보석 같은 푸른 눈이 질끈 감기자 갇혀 있던 눈물방울이 뺨을 타고 길게 흘러내렸다. 혜미는 그동안 혼자 감춰왔던 쌓여왔던 감정을 터뜨리는 그녀의 말을 도저히 멈출 수가 없었다.

“울지 말라고…. 이제… 이제 위험하지 않다고…. 흐윽…. 세드릭이… 겁낼 거 없다고 말해 줬어요….”

그동안 아일라가 누구에게도 말한 적 없는 세드릭과의 첫 만남이었다. 늘 그녀를 탐하려 드는 징그러운 손길만 받아 왔던 아일라에게, 다리 사이에 남근을 달고 있는 인간들을 모두 증오하던 그녀에게, 세드릭은 인간 그 이상의 존재였다.

“보름 동안 씻지도 못하고 엉망에… 냄새 나는 절 안아 들고… 그가 절 세르노티로 데려가 줬어요. 따뜻한 사람들이 가득한 그곳에서… 제게 안심하라고 했어요. 아무도 상관하지 않았던 제 이름을 알고 싶었다고 했어요, 으흑, 절 때리고 비웃는 대신 칭찬해 줬어요. 대단하구나, 아일라. 하아… 넌 천재가 틀림없어, 아일라. 나는… 나는 네가 자랑스럽구나, 아일라…. 하아…. 저는 제 이름이 그렇게 다정하게 불릴 수 있다는 걸 처음 알았어요, 으흐윽…!”

혜미가 이를 꽉 문 채 숨을 끅끅 몰아쉬는 아일라의 손을 잡았다. 아일라의 얼굴은 흘러내린 눈물에 온통 엉망이었다. 엉망으로 부상당한 아일라를 꽉 끌어안을 수 없는 것이 못내 안타까웠다.

“할 수만 있다면 영원히….”

투둑. 아일라의 뜨거운 눈물이 혜미의 손등에 떨어졌다.

“영원히… 세르노티에서 신분을 감추고 죽을 때까지 살고 싶었어요.”

아일라는 성주인 발트리가 1년에 한 번씩 자리를 비울 때마다 두려웠다. 아직도 카플란에는 그녀의 가족이 볼모로 잡혀 있었기 때문이다.

“성주님께서 돌아오시고 나서야… 시간이 왔다는 사실을 깨달았죠.”

아일라에게 그보다 두려운 일은 없었다.

눈이 내리던 겨울밤, 기사들을 모두 소집한 발트리가 대마법사의 보석이 박힌 검을 꺼냈을 때. 그리고 그 검의 주인이 이든임을 공표했을 때. 아일라가 패닉 상태에 빠진 것은 당연했다.

“무작정 숲으로 도망쳤어요. 카플란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지만… 발이 떨어지질 않았어요. 머릿속에 어머니와 여동생이 자꾸만 떠오르는데도….”

아일라의 고민을 알 수 있을 것만 같았다. 혜미는 그저 그녀의 손을 잡은 손에 조금 더 힘을 주는 것밖에는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세드릭 님이라면 옳은 판단을 내려 줄 거라 생각하고 다시 돌아왔지만….”

아일라가 그때의 일을 떠올리듯 입술을 꽉 깨물었다. 아일라가 뒤늦게 세르노티로 돌아가려 했을 때는 이미 사건이 일어난 후였다.

“이미 세르노티 성안은 엉망이 된 후였고, 범인은 제가 되어 있었어요.”

“아일라를 ‘매의 수호자’ 세르노티의 리스트에서 제명한다.”

아일라가 젖은 눈동자로 혜미를 보며 떨리는 입술을 열었다.

“카플란이 저 말고 다른 세작을 심어 놨다는 사실은 나중에야 알았어요. 그게 페터라는 건, 정말 몰랐어요. 진심이에요.”

“널 믿어, 아일라.”

혜미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일라가 그녀를 보며 붉어진 눈으로 말을 이었다.

“카플란으로 돌아가야겠다고 결심을 내린 건 그때였어요. 아무것도 모르는 척, 길을 헤맸다는 핑계를 대고 카플란으로 뒤늦게 돌아간 후 사건의 전말을 모두 들었어요. 아버지를 따라 자주 숲 밖을 나가던 페터가 카플란에게 그 사실을 전했다는 것도. 그리고 그가… 이든을 죽였다는 사실도요.”

죽은 줄로만 알았던 이든이 다시 살아났다는 사실을 페터가 또다시 전해 왔을 때, 아일라는 때가 왔다고 생각했다. 카플란이 보내는 자객의 틈에 섞여 세르노티로 돌아왔다.

“백 명의 암살단 중 오는 길에 스물일곱을 죽였어요. 어렵지 않았어요. 매일 밤 그들을 남몰래 숲으로 유인하고, 발가벗고 무장을 해제한 그들을 찔러 죽이는 것뿐이었으니까.”

혜미는 이제 어렴풋이 아일라의 행동을 이해할 것 같았다.

“페터를 죽이고, 남아 있는 카플란도 모조리 죽일 생각이었어요. 그러다가 세드릭 님의 칼을 맞고 죽는다면… 나쁘지 않은 결말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아일라.”

혜미가 마른침을 삼키며 간신히 입을 뗐다. 그녀의 갈색 눈동자가 눈물에 젖은 채, 아일라를 직시했다.

“대체 네가 죽긴 왜 죽어야 하는 건데.”

아일라가 그녀를 보며 황금색 눈썹을 내리깔았다가 다시 들었다. 벌겋게 달아올라 엉망인 얼굴로 아일라가 혜미를 향해 작게 속삭였다.

“저도… 세르노티니까요….”

주군을 지키지 못한 죄는 피로 갚는다. 발트리의 연설에 늘 등장하는 말이었다. 아일라는 세르노티의 일원으로 죽고 싶었다.

“그러면 세드릭 님이 절 용서해 주실 거라는 희망을 품었어요. 그것마저… 불가능했지만.”

혜미가 그녀를 보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 대신 더 엄청난 일을 했잖아.”

아일라의 젖은 눈이 흔들리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혜미는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목이 부어오른 것처럼 아팠다. 아니. 아픈 건 심장인지도 몰랐다.

“세드릭을 구하려고… 네가 대신 칼을 맞았잖아.”

“…그건….”

머리가 생각해서 한 행동이 아니었다. 그저 몸이 반사적으로 움직였을 뿐이다. 말을 잇지 못하는 아일라를 향해 혜미가 애써 입술을 끌어 올렸다.

“그렇게 극단적인 고백이 대체 어디 있어…. 이 바보야.”

아일라가 그녀를 보며 슬픈 얼굴로 마주 웃었다. 화덕 앞에서 나누었던 예전의 대화가 떠오른 탓이었다. 그게 아마 그녀가 기억하는 이든과의 마지막 대화였다.

“이든은… 처음부터 알고 있었던 거예요?”

“뭐. 네가 세드릭을 좋아하는 거? 그건 솔직히 모르는 게 더 이상한 거 아니었을까?”

창백하게까지 보였던 아일라의 얼굴이 조금 붉게 물들었다. 그녀가 절망적인 표정으로 중얼거리듯 물었다.

“아마… 세드릭 님도 마찬가지겠죠.”

그거야 본인만이 아는 거였다. 혜미가 말을 망설이자 아일라가 작게 속삭였다.

“그래서 더… 세드릭 님을 못 볼 것 같아요, 이제.”

살갗이 타들어 가는 것 같은 작열감을 느끼며 눈을 떴을 때, 그녀의 시야에 처음 들어온 것은 익숙한 천장이었다. 카플란에서는 자라지 않는, 참나무로 덧댄 오래된 천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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