혜미는 거친 숨을 몰아쉬며 위를 올려다보았다. 자신이 몸을 날린 탑의 꼭대기는 보기만 해도 까마득했다. 13층 높이의 탑에서 떨어졌는데 어디 한 군데 부러지기는커녕 사지가 멀쩡했다. 잠시 멍하게 정신이 나간 그녀의 시야에 발터의 검에 찔려 중심을 잃는 남자의 모습이 보였다.
“으아아악!”
그녀를 뒤에서 노리던 놈이었다. 커다래진 그녀의 동공에 중심을 잃고 창밖으로 떨어져 추락하는 남자의 모습이 점점 가까워졌다.
쿵!
채 눈을 감을 새도 없었다. 엄청난 소리를 내며 그녀의 옆으로 시체가 떨어졌다. 목이 반대로 돌아간 남자의 뒤통수에서 붉은 피가 서서히 퍼져 나갔다.
“아…!”
시체를 보자 또다시 정신이 번쩍 들었다. 혜미는 얼굴을 일그러뜨린 채 벌떡 일어나 성안을 달려나가기 시작했다.
나가야 해.
최대한 멀리 성에서 도망쳐야 한다. 그녀가 생에 대한 의지를 이토록 강력하게 느껴 본 것은 처음이었다. 한 명도 두려운 판국에, 탑 꼭대기에 침입해 그녀를 죽이려 하는 이들이 도대체 몇 명인지 가늠도 되지 않았다.
그 안에서 혼자 여럿을 상대로 싸우고 있는 발터가 머릿속을 스쳤지만, 혜미는 이내 그 생각을 떨쳐 냈다. 발터가 직접 말했듯 그가 충성하는 상대는 황제가 될 이든이었다. 그 마음이 충성이건 사랑이건, 과거의 기억이 하나도 없는 그녀를 향한 것은 아니다.
“하아…. 하아…!”
차가운 새벽 공기가 달리는 그녀의 뺨을 스쳤다. 가로등 하나 없는 컴컴한 어둠 속에 달마저 숨었으나 어둠에 익숙한 눈동자는 시야를 훤하게 밝히고 있었다.
탑 밖으로 나온 것은 처음이었음에도 어디로 가야 할지 고민도 들지 않았다. 그녀의 머릿속에 세르노티 성안의 지도가 그린 것처럼 펼쳐진 탓이었다.
“하아…!”
달리던 그녀가 작은 오두막 앞에 우뚝, 멈추어 섰다. 성주의 탑. 그리고 그 뒤에 위치한 오래된 헛간. 아무도 쓰지 않는 오래된 무기들이 쌓여 있는 곳. 발터와 이든이 어릴 적부터 무수히 많은 시간을 함께 보냈던 곳이었다.
발터가 해 준 이야기 속의 기억인지 스스로가 그려 낸 상상의 나래인지 모를 순간들이 혜미의 머릿속을 비집었다.
“이든, 만약 내가 세르노티의 가주가 되는 불행한 일이 일어난다고 해도….”
지푸라기가 깔린 바닥에 엎드려 누운 이든의 옆에 나란히 누운 발터. 마디가 툭툭 불거진 손가락이 행진하듯 부드럽게 그녀의 맨 살결을 두드린다. 조심스러운 손이 마침내 도착한 곳은 그녀의 입술. 다정하게 그녀의 입술을 매만지며 발터가 꽉 잠긴 목소리로 속삭인다.
“내게 황제보다 중요한 건 너라는 걸 잊지 마라.”
“와. 성주님이 들으면 혈압 올라서 쓰러지시겠네.”
“아버지는 강한 분이니 이겨 내시리라 믿어.”
“너 진짜 불효자다.”
빙글거리는 이든의 목덜미로 파고들며 발터가 그녀의 귓바퀴를 아프지 않게 잘근거린다.
“대신 네게는 최고의 남편이 되겠지.”
“그런 소리 직접 하면 안 민망해?”
“사실, 조금.”
발터의 나직한 웃음소리. 뒤이어 다가온 입술. 이어졌던 달콤한 키스. 어두운 밤을 희미하게 밝히며 키를 줄이던 양초들. 몸을 묵직하게 비집던 발터의 체온. 그의 땀방울. 나지막하게 울리던 그의 허스키한 목소리.
“이든, 내가 네 모든 것을 가지게 허락해 줘.”
“이미… 다 줬는걸?”
열기 띤 발터의 갈색 동공에 가쁜 숨을 내뱉는 그녀의 모습이 담겨 있다.
“날… 사랑해?”
“사랑해, 발터.”
“계속 말해 줘.”
땀방울이 뚝, 떨어지는 그의 얼굴을 붙들고 그녀가 아득한 절정에 몸부림을 쳤다.
“사랑해…! 아아…. 널 사랑해, 발터.”
혜미는 주먹을 꽉 쥐고 고개를 돌렸다. 심장이 울렁거리며 아득하게 슬픈 기분이 들었지만, 그건 그녀가 발터의 이야기에 과하게 몰입했던 탓이었다.
단지 그뿐이다.
머릿속을 비집는 발터의 생각을 뒤로하고 혜미가 다시 앞으로 달려나갔다. 일단 숲으로 갈 생각이었다. 거기서 숨어 있다가 어떻게든 사태가 일단락 난 후에 추후의 일을 결정하는 것밖에는 방법이 없었다.
이히이잉!
말이 울부짖는 소리에 혜미가 고개를 돌렸다. 차가운 바람 속을 뚫고 노란 불빛이 넘실거리며 타오르고 있었다.
막사 1층. 기사들이 키우는 말이 모여 있는 곳이었다. 불길에 활활 타오르고 있는 곳은 마구간을 보자 혜미의 눈동자가 황망하게 흔들렸다. 앞발을 치켜들며 울부짖는 말들을 모른 체하고 떠나려 했으나 무리였다.
쾅!
되돌아온 혜미가 불이 붙은 울타리를 발로 부수었다. 신고 있는 가죽신에 뜨거운 열기가 일었다. 발로 바닥을 세차게 내리쳐 신발에 옮겨붙은 불씨를 제거한 후, 천장에 주르륵 걸려 있는 안장을 휘두르며 안으로 진입했다.
“쿨럭…. 쿨럭…!”
다행히 안에는 불길이 번지지 않았지만 밖에서 타오르는 연기가 더욱 심각했다. 그녀의 키보다 훨씬 큰 말들이 거칠게 울었다.
“괜찮아…. 괜찮아….”
혜미는 팔로 코를 막은 채, 굴러다니는 손도끼를 들고 고삐를 거칠게 끊어 냈다. 축사에 갇혀 질식하기 일보 직전이던 말들이 우르르 밀려 나왔다.
“얼른 나와…. 얼른…!”
마지막 한 마리까지 바깥으로 나온 걸 확인한 후, 혜미는 숨을 몰아쉬며 바깥으로 빠져나왔다.
챙! 챙!
광장에 가까워질수록 칼이 부딪치는 날카로운 소음과 함께 기사들이 소리치는 목소리가 점점 크게 들렸다. 성의 중앙에 위치한 넓은 광장은 이미 세르노티와 카플란의 싸움터로 변한 후였다.
“하아…. 어쩌지…? 어떡하지…?”
혜미는 저장고 뒤편에 등을 댄 채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등줄기에 식은땀이 흘러내려 옷이 척척하게 젖었다. 죽고 죽이는 명백한 살인의 현장.
도저히 가까이 가고 싶지 않았지만, 성을 나가는 문은 광장을 반드시 통과해야만 했다. 주먹을 꽉 쥐고 결정을 내린 후, 그녀는 광장 중앙에 위치한 커다란 나무 그림자를 향해 빠른 속도로 뛰어 몸을 숨겼다.
“흐윽…!”
“아아아!!!”
지난 밤, 탑에 모였던 기사들이 전력을 다해서 싸우고 있었다. 그리고 그 중심에서 크게 소리치는 세드릭이 보였다.
“흩어지지 마! 탑에는 발터가 있다! 탑은 그에게 맡기고, 모두들 자리를 지켜. 눈앞의 적에게만 집중해!”
명령을 내리는 세드릭을 보며 카플란의 누군가가 외쳤다.
“가운데 잿빛 머리를 먼저 처리해라! 저자가 세드릭 슈네다!”
세드릭 슈네.
그는 대를 이어 검술사 집안으로 유명했던 귀족, 슈네 가문의 촉망받는 어린 기사였다. 친정에 다니러 온 자신의 큰 누이가 비밀리에 결혼한 상대가 ‘매의 수호자’ 세르노티의 가주라는 것을 알게 된 그는 그녀를 따라 세르노티로 나선 후 가문에서 모습을 감춰 버렸다.
하지만 칼을 쓴다는 사람들 중, 열두 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검술 대회에서 우승을 한 세드릭 슈네의 이름을 모르는 이는 거의 없었다.
“하아….”
혜미는 시커먼 나무 그늘에 몸을 숨긴 채 불안하게 숨을 몰아쉬었다. 잘근잘근 씹힌 입술이 엉망이었지만 그녀는 스스로 의식하지도 못했다. 성안을 급습한 적의 수는 딱 봐도 그 수가 기사들의 배는 훨씬 넘었고, 그중 세드릭에게 붙은 이들만 열 명은 되어 보였다.
챙! 채챙!
세드릭이 적의 가슴을 찔렀다 빼고, 또다시 달려드는 다른 상대의 목과 어깨를 쉴 틈 없이 쳐 내는 모습을 보고 있는데 도무지 발이 떨어지지가 않았다. 세드릭이 간신히 공격을 막아낼 때마다 초조해 손에 진땀이 잡혔다. 엉망진창이 된 입술에서 연신 희미한 신음 소리가 멋대로 흘렀다.
아아. 어떡하지…. 어떡하지…!
거칠거칠한 나무껍질에 걸린 혜미의 손가락이 바들바들 떨렸다. 도망갈 기회는 지금이었다. 모두들 생사를 걸고 싸우느라 정신이 팔려 있는 이때 당장 달아나야 함이 마땅한데도 자꾸 주저하게 되어 미칠 지경이었다.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세드릭! 위… 위험해! 뒤에!!!”
뒤에서 세드릭을 공격하는 놈을 보고 소리를 질러 버린 것이다. 혜미는 멋대로 열린 제 입을 양손으로 틀어막았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하아…!”
허리를 완전히 뒤로 굽혀 일격을 피해 낸 후 상대를 찔러 처리한 세드릭이 소리가 난 쪽으로 휙 고개를 돌렸다. 나무 그늘에 숨어 있던 혜미의 존재를 알아챈 것은 세드릭만이 아니었다. 카플란 중 하나가 그녀에게 눈을 번뜩이며 달려오기 시작했다.
빨라.
엄청난 속도에 혜미는 그 자리에서 얼어붙고 말았다.
“이든!!!”
세드릭이 그녀의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희미했다. 순식간에 가까워진 남자의 쑥 들어간 눈에 가득한 것은 살기였다.
휙!
칼을 들고 그녀에게로 달려드는 남자의 앞에서 혜미가 눈을 질끈 감았을 때였다.
“흐윽…!”
세드릭이 도약하듯 몸을 날려 그녀에게 달려드는 놈을 등 뒤에서 푹 찔렀다. 남자는 혜미의 코앞에서 비명을 삼키며 쓰러졌다.
“괜찮아? 발터는 어디 있는 거지?”
“타… 타, 탑에….”
세드릭이 성의 북쪽을 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발터는 아마도 그녀를 혼자 도망치게 한 후, 탑에 침입한 자들을 모조리 도륙 내고 있는 모양이었다.
“죽은 놈의 검을 잡아라, 이든.”
세드릭이 그녀를 보며 고갯짓을 했다. 하지만 혜미는 바닥에 엉덩이를 찧고 넘어진 상태로 덜덜 떨고 있을 뿐이었다. 바닥에 쓰러진 남자의 두 눈동자를 잊을 수가 없었다. 세드릭이 1초만 늦었어도 그녀는 죽었을 것이다.
“당장 잡지 않고 뭐 하고 있는 거야!”
세드릭이 눈을 번뜩이며 답답하다는 듯 버럭 소리를 쳤지만 무리였다. 쓰는 법을 알지도 못하는데 어떻게 잡으란 말인가. 혜미가 일그러진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모… 못 해요. 나는….”
세드릭이 이를 꽉 씹었다. 그의 눈앞에서 얼굴에 검댕을 묻히고서 검을 잡지도 못하고 덜덜 떨고 있는 이든은 파리 새끼 한 마리 못 죽일 것 같이 굴었다. 기억을 잃은 그녀에게 이든의 실력을 기대할 수는 없었다.
“차라리 숨어라, 이든.”
세드릭이 날카로운 시선으로 나무 위를 눈짓하며 낮게 내뱉었다. 3년 전, 급습을 당한 사건 이후 세르노티성의 기사들은 철저하게 훈련하며 같은 상황에 대비했다. 카플란의 기술이 아무리 뛰어나다 해도 그들 역시 약한 것은 아니었다. 정면으로 붙었을 때의 승부는 오히려 더욱 자신이 있었다.
변수는 기억을 잃고 돌아온 이든이었다. 그들이 카플란을 멸살시키더라도 이든이 죽으면 의미가 없어진다.
“우리가 적을 다 해치울 때까지 몸을 숨기고 있어. 알겠지?”
혜미가 그를 보며 두려움에 질린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도와줘! 으흣!”
칼이 부딪치는 소리에 누군가의 비명 소리가 섞였다. 세드릭과 혜미의 얼굴이 동시에 돌아갔다.
“흑!”
세르노티의 훈련생인 페터가 찢어진 어깨에서 피를 흘리고 있었다. 그런 그를 향해 검을 휘두르며 엄청난 속도로 몰아붙이고 있는 카플란의 상대는 후드를 뒤집어쓰고 있어 얼굴이 보이지 않았지만, 한눈에 봐도 무서운 실력자였다.
“…….”
세드릭이 이를 깨물며 눈을 가늘게 떴다. 설마…? 불안한 예감이 검을 쥔 그의 손끝에 번졌다.
“숨소리도 내지 말고 숨어 있는 거다, 이든.”
중얼거리듯 낮게 내뱉은 후, 그가 궁지에 몰린 페터를 향해 달려나갔다.
휘릭!
세드릭의 검이 공중에서 빠르게 궤적을 그린 순간이었다. 그의 검 끝에 암살자의 얼굴을 가리고 있던 검은 천의 목 부분이 깔끔하게 잘려 나갔다. 상대가 황급히 팔꿈치를 들어 얼굴을 가리려 했으나 허사였다.
휘잉.
겨울바람이 불자 후드에서 빠져나온 금실 같은 머리카락이 어둠 속에서 휘날렸다. 분노와 한이 서린 푸른 눈동자, 바람에 발갛게 달아오른 뺨. 몇 번이나 짓씹어 붉게 물든 장미 꽃잎 같은 입술에서 하얀 입김이 흘렀다.
혜미는 그녀가 누구인지를 직감할 수 있었다.
“…아일라!!!”
세드릭이 피를 토하는 목소리로 외쳤다. 아일라가 주춤한 것은 잠시였다. 그녀는 그를 외면하고 다시금 페터를 향해 무차별적으로 칼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왜지?”
혜미는 세드릭의 표정이 분노를 담고 차갑게 일그러지는 것을 똑똑하게 응시했다.
“세, 세드릭…. 도와줘!”
궁지에 몰린 페터가 간신히 아일라의 공격을 피한 채 뒤로 물러났다. 잠시 주춤했던 아일라가 얼굴을 구긴 채 소리를 지르며 페터에게 달려들었다.
“아아아!!! 죽어!!!”
챙!
그녀의 일격을 막아낸 것은 세드릭이었다. 아일라의 검술을 세드릭이 모를 리가 없었다. 그녀에게 검을 쥐는 법부터 가르친 사람은 바로 그였다.
공중에서 맞부딪친 검이 가늘게 떨렸다. 얼어붙은 호수 같은 아일라의 젖은 눈동자가 세드릭을 보며 무참히 흔들렸다.
“…아일라.”
세드릭이 낮게 중얼거렸다. 검날 뒤로 그녀를 노려보는 차가운 회색 시선에 싸늘한 분노가 일었다. 그의 잇새로 거친 호흡이 흘러나왔다.
“…나는 너를… 도저히 용서하지 못하겠다.”
세드릭이 그녀를 향해 낮게 속삭이며 뒤로 물러나는 순간, 다시 한번 검 두 개가 공중에서 금속음을 내며 부딪쳤다. 세드릭의 검술 수업이면 늘 숨도 쉬지 않는 것처럼 집중했던 아일라는 그동안 더욱 강해져 있었다.
“세드릭 님. 저도 언젠가… 세드릭 님처럼 우아하게 검을 쓸 수 있을까요?”
“아일라, 내가 말하지 않았니? 훈련생 녀석들 중에 너처럼 정석으로 움직이는 이는 없다고. 넌 내가 만든 자랑스러운 인간 교과서야.”
세드릭은 그의 칭찬을 받을 때마다 눈을 반짝이던 아일라를 떠올렸다. 그랬던 그녀의 정체는 카플란이 보낸 세작이었다. 아일라는 5년이라는 시간 동안 그들 모두를 속였다.
“…용서하지 마세요.”
검을 사이에 두고 그를 향해 속삭이듯 내뱉는 아일라의 눈매에서 물기가 흩어졌다. 그녀는 감히 세드릭에게 용서를 바라고 이곳까지 온 것이 아니었다. 그저 스치듯 그의 얼굴을 보는 것만으로 만족할 수 있었는데.
세드릭의 검날을 쳐 낸 아일라의 검 끝이 다시 향한 곳은 페터였다. 아일라는 세드릭의 공격을 막아 가며 페터에게 칼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2대 1로 싸우고 있었지만 아일라는 물러설 마음이 전혀 없었다.
챙!
채챙!!!
세드릭이 자신의 공격을 간신히 막아 낸 후, 다시 몸을 날리는 아일라를 보며 차가운 잿빛 눈을 빛냈다. 전력을 다하고 있는 아일라의 검 끝은 끈질기게 페터를 향해 있었다. 아일라는 세드릭의 공격을 받아쳐 내기만 할 뿐, 그를 죽일 마음이 전혀 없었던 것이다.
세드릭이 숨을 거칠게 몰아쉬었다. 그의 미간이 가운데로 모였다.
아일라. 대체 무슨 생각인 거냐.
“아… 안 돼.”
한편 혜미는 나무 그늘 아래에서 제 머리카락을 꽉 붙잡은 채 벌벌 떨고 있는 중이었다. 등이 뚫린 시체가 옆에 쓰러져 있었지만 거부감을 느끼지도 못했다. 관자놀이가 지끈거리며 온갖 기억이 순식간에 얽혀든 탓이었다.
뎅그렁.
바람에 종소리가 흩날렸다. 동시에 낯선 목소리가 뇌리에 꽝꽝 울려 퍼졌다.
“찾았다! 죽여!”
하늘에서 눈송이가 날리던 겨울밤. 이든이 발터를 기다리고 있던 동굴에 갑자기 난입한 것은 정체를 모를 자객들이었다. 세 명의 자객을 차례로 죽이는 것은 그녀에게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한 놈을 죽이고 검을 빼앗아 다른 두 놈을 동시에 베어 냈다.
“하…. 이든….”
“아. 페터!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
동굴로 달려온 페터를 보고 이든이 안심한 것도 잠시였다. 페터의 뒤에 낯선 자객이 따라붙은 걸 발견한 탓이었다. 놀란 그녀가 페터를 구하려 검을 치켜들었을 때였다.
“흑…!”
세드릭의 공격을 간신히 막아 낸 아일라의 어깨를 페터의 검이 꿰뚫었다. 아일라의 입술에서 짤막한 신음이 터졌다.
“흣…!”
뎅그렁!
또다시 종소리가 울려 퍼지는 순간, 혜미의 동공이 커다랗게 확장되었다. 머리가 깨질 듯 아팠다. 그녀의 머릿속에서 알 수 없는 장면들이 뒤죽박죽으로 섞인 사진처럼 파고들었다. 날카로운 면도날이 머릿속에 꽂히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녀는 손으로 머리칼을 쥐어뜯으며 제 머리를 아프게 때렸다.
…날 죽인 건…. 날 죽인 건….
“너…. 네가… 왜…?”
칼끝에서 뚝뚝 떨어지는 자신의 피를 보며 놀란 그녀가 고개를 들었을 때, 다시금 그녀의 가슴에 검이 쑤욱 박혀 들었다. 숨이 턱, 막히는 고통에 일그러진 그녀의 동공에 박힌 것은 어두워진 눈을 빛내며 입술을 씹던 페터였다.
“이든!”
두 눈을 크게 뜬 채 부들부들 떨고 있는 혜미를 발견하고 발터가 달려왔다. 탑에서 열두 명의 암살자를 처리한 그는 온몸이 피와 땀으로 가득했다. 또다시 공격하는 놈 하나의 배를 깊게 찌른 후, 그가 숨을 거칠게 몰아쉬었다.
“괜찮아…?”
“아일라가… 아니야.”
혜미가 정신이 나간 표정으로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눈물 젖은 얼굴로 내뱉는 혜미를 보며 발터는 그녀의 상태가 심상치 않음을 직감했다. 짙은 눈매가 가늘어지며 심각한 빛을 띠었다.
“이든….”
나무 기둥을 꽉 붙잡고 있던 혜미가 맨몸으로 광장으로 달려나간 것은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이든! 위험해!”
발터가 소리쳤지만 혜미는 멈추지 않았다. 그녀의 머릿속에서 울려 퍼지는 아일라의 목소리가 마치 귓가에 대고 속삭이는 것처럼 생생했다.
“이든, 언젠가는 세드릭 님도 누군가를 사랑하게….”
장밋빛 뺨을 붉히며 나직하게 묻던 소녀의 얼굴. 수줍게 미소 짓던 그녀의 얼굴이 혜미의 눈앞에서 페터의 칼을 맞고 고통스레 비틀거리고 있는 아일라의 얼굴에 그대로 겹쳐졌다.
“동료를 배신한 네 죗값은 죽음으로 받겠다, 아일라.”
챙!
세드릭이 아일라의 손에서 검을 쳐 냈다. 기다란 스피어가 허무하게 바닥에 나뒹굴었다.
“할 말이 있으면 지금 해라.”
아일라는 죽기 직전, 마지막으로 변명할 기회를 주고 싶은 세드릭의 바람을 외면했다. 푸른 눈동자에서 눈물이 툭, 길게 아래로 떨어졌다.
“…페터를 …죽이세요. 세드릭 님.”
떨리는 입술에서 튀어나온 것은 동료를 죽이라는 끔찍한 말이었다. 세드릭이 그녀를 보며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더 이상 망설일 필요는 느껴지지 않았다. 결심을 끝낸 후, 검을 치켜든 순간이었다.
“안 돼…. 안 돼!!! 세드릭!”
혜미가 달려오며 목에 핏대를 세운 채, 소리를 질렀다. 발터는 그런 그녀를 뒤따르며 달려드는 암살자들을 끊임없이 베어 내느라 정신이 없었다. 세드릭이 공격을 주춤한 사이 혜미가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날 죽인 건 아일라가 아니라고!”
뭐라고?
인상을 쓰는 세드릭의 뒤에서 페터가 낮게 욕설을 내뱉었다.
“젠장, 빨리 안 죽이고 뭐 하는 거야…!”
페터의 눈이 사악한 빛을 띠었다. 세드릭의 등을 향해 그가 검을 찔러 넣으려는 순간, 그의 공격을 알아챈 아일라의 눈에 푸른 불꽃이 튀었다. 그녀가 엄청난 힘으로 세드릭을 밀치며 그의 앞을 막아선 것은 그다음이었다.
“나중에 저도 누군가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하는 대신에, 그를 위해 죽는다면… 상대는 내 진심을 알아 줄까요?”
바보. 이 바보야.
“안 돼, 아일라!!!”
혜미가 목 놓아 소리를 질렀지만 이미 늦은 후였다.
“흐윽…!”
페터의 검이 박힌 아일라의 가슴에서 붉은 피가 분수처럼 터져 나갔다. 그녀의 금발 머리카락이 검붉은 피로 척척하게 젖어 들었다.
“……!”
허겁지겁 달려오던 혜미의 두 발이 딱 멈추었다. 그녀의 눈동자가 충격으로 얼어붙었다. 눈 앞에 펼쳐진 상황에 얼굴을 일그러뜨린 것은 세드릭 역시 마찬가지였다. 페터의 검이 아일라의 가슴에서 거칠게 뽑혀 나갔다.
“흐…. 흑…!”
피투성이가 된 아일라가 페터를 노려보며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바닥에 떨어진 그녀의 검을 향해 부들거리는 손을 뻗었다.
“고백도 못 하고 죽는다니. 그거야말로 너무 극단적이다, 아일라.”
“어떤 사람한테는 백 마디 말보다 한마디 행동이 더욱 진심으로 다가올 수도 있잖아요?”
“애늙은이 같은 소리도 좀 그만해라. 네가 그럴 때마다 자꾸만 세드릭 생각나는 거 아니?”
“…그래요?”
뒤얽힌 기억 속에서 아일라가 황금빛 속눈썹을 내리깔았다. 장미 같은 뺨을 붉히며 배시시 웃는 그녀의 눈동자에 담긴 것은 분명 세드릭에 대한 사랑이었다.
이런 건 말도 안 된다. 왜. 왜, 아무 잘못도 하지 않은 아일라가 죽어야 해.
“페터였어, 세드릭!!!”
혜미가 절규하듯 부르짖었다.
챙!
검을 집으려는 그녀에게 다시 달려드는 페터의 칼을 반사적으로 쳐 낸 것은 세드릭이었다. 세드릭의 단정한 눈썹이 날카롭게 휘어졌다.
지금 이든이 뭐라고 한 건가.
“날 죽인 건 아일라가 아니라 페터라고!!!”
그가 휙, 고개를 돌리는 순간 페터가 주춤, 뒤로 물러섰다.
“이런… 젠장….”
페터가 이를 뿌득 갈았다.
시체의 상태로 겨우 숨만 붙어 있던 이든이 깨어났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가장 긴장한 것은 그녀를 죽인 장본인인 페터였다. 세드릭이 탑으로 훈련생들을 소집했을 때, 변명거리를 만들어 숨어서 동태를 살폈던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다.
이든이 기억을 잃고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어 돌아왔다는 동기들의 말을 듣고 안심한 후 카플란에게 전갈을 날렸지만 아일라가 그 틈에 섞여 있을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아일라는 처음부터 그만을 공격했고, 설상가상으로 이든의 기억마저 돌아온 것으로 보였다.
“그게 사실이냐, 페터?”
세드릭의 목소리는 칼날처럼 시퍼렇게 날이 서 있었다. 어지럽게 흔들리는 페터의 눈동자를 보며, 세드릭은 진실을 직감했다. 페터가 그를 향해 변명처럼 말을 이었다.
“…평생 여기서 썩는 것도 모자라서… 멍청하기 짝이 없는 이든을 따르다 개죽음을 당하고 싶지 않았을 뿐이야.”
도축사의 아들로 태어난 페터가 세르노티의 훈련생이 되었을 때 그의 아버지는 그를 무척이나 자랑스러워했다. 그것이 허울뿐인 명예라는 것을 페터는 금세 깨달았다.
세르노티는 기본적으로 가난했다. 아무리 칼을 잘 써도 세르노티성 밖에서는 그 누구에게도 인정을 받지 못했다. 그들의 능력은 드러내기 위함이 아니라 숨기는 것이었다. 다른 가문의 기사들이 전쟁에서 공을 세우고, 작위를 받고, 봉토를 하사받을 때 세르노티의 기사들은 영지 사람들과 함께 땀 흘리며 밭을 일구어야 했다.
“우리는 다… 모두 다 뛰어난 기사들이잖아…. 여기서 이렇게 썩기에는 너무 아깝잖아, 세드릭….”
물건을 팔러 가는 아버지를 따라나선 여행. 세르노티의 이름을 버리고 영지를 떠나려고 마음먹은 페터에게 접근한 카플란은 현재 제국에서 가장 큰 권력을 누리고 있는 가문이었다.
“세르노티의 동태를 살피는 간단한 일이지.”
카플란이 건넨 묵직한 주머니에는 빛나는 금화가 가득했다.
“크리스티앙 폐하가 황위 계승을 한 이후에는 더 많은 것을 얻게 될 것이다. 어때. 제국을 위해 충성할 마음이 생기는가?”
그가 껍데기만 남은 옛 이름을 훈장처럼 지키는 초라한 세르노티를 배반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아니. 배반도 아니었다.
죽은 줄 알았던 황녀가 살아 있었다는 사실보다 더 충격이었던 것은, 그 주인공이 이든이라는 사실이었다. 칼은 좀 쓰지만 멍청하기 짝이 없는 이든이 황제의 피를 받은 직계라는 사실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그래서 동료를 죽이고 내 등 뒤에서 칼을 휘두른 거야?”
세드릭의 잿빛 눈이 얼어붙는 한기를 내뿜었다. 페터가 말을 잇지 못하고 더듬었다.
“그… 그건….”
“너 따위에게 죽기에는 모두들 너무나 뛰어난 기사들이었다. 페터.”
세르노티의 이름을 본인의 명예라 생각하는 세드릭이었다. 타고나길 귀족인 세드릭은 그의 마음을 평생 이해 못 할 게 당연했다.
“끝까지… 재수 없는 소리만 지껄이는군.”
페터가 등을 돌려 도망치기 시작했다.
“…흣….”
그를 쫒으려던 세드릭의 움직임을 멈추게 한 것은 아일라의 희미한 신음 소리였다. 바닥에 무릎을 꿇은 아일라를 부축하자 자그마한 몸이 고통에 가늘게 떨렸다.
‘아일라….’
세드릭의 잿빛 시선이 일그러졌다.
“배신자다! 저년을 죽여!”
“더러운 창녀 같으니! 역시 피는 못 속이는구나!”
휘릭!
세드릭의 눈빛에 이채가 튀는 순간, 그의 검이 날카로운 빛을 내며 빠르게 움직였다. 그는 고개를 돌리지도 않고, 아일라를 향해 달려드는 카플란의 암살단 둘을 베어 냈다. 순식간에 공격을 받고 쓰러진 이들의 입이 모두 세드릭의 검에 베여 길게 찢어져 있었다.
“죄, 죄송… 해요…. 세드릭 님…. 흣…!”
아일라가 그의 품에 안겨 억지로 입술을 열었다.
“말하지 마. 아일라. 의사가 올 때까지 힘을 빼지 마.”
세드릭이 그녀의 상처를 감싸며 낮게 내뱉었다. 아일라는 신음 소리를 내지 않으려 이를 꽉 물었다. 숨을 쉬기가 힘들 정도로 아픈 것이 칼에 찔려서인지, 아니면 세드릭의 복잡한 시선 때문인지 알 수가 없다.
늘 냉정하리만큼 차분했던 잿빛 눈동자가 흔들리는 것이 꼭 제 탓만 같았다. 아일라가 고통을 참으며 피에 젖은 얼굴로 속삭였다.
“죄송합니….”
“말하지 말라고 했어!”
세드릭의 입술에서 절규를 닮은 외침이 터져 나갔다. 조각 같은 그의 얼굴이 엉망으로 일그러졌다. 카플란과 함께 돌아온 아일라가 왜 처음부터 페터만을 공격했는지 이제야 알아챈 그의 눈빛에 분노와 좌절이 뒤엉켰다.
“설명은 내일… 날이 밝은 후 듣겠다, 아일라.”
아일라의 푸른 눈에 길게 눈물이 흘렀다.
제가 이 밤이 지나도 당신을 볼 수 있을까요? 당신에게 아무것도 말하지 못하고 도망쳤던 나를, 당신은 용서한다고 말하고 있는 건가요?
“네가 지금 죽는다면 난 영원히 널 용서하지 않을 거야.”
세드릭이 괴로운 표정으로 이를 악물고 중얼거렸다. 이중 첩자에 대한 교육을 수차례 반복한 것은 바로 그 자신이었다. 아일라라면 충분히 그것이 가능한 실력자라는 사실을 왜 미처 생각하지 못했을까.
“하아….”
우두커니 서서 그들을 보는 혜미의 입술에서 괴로운 숨이 새어 나왔다. 가늘어진 그녀의 눈이 뜨끈하게 달아오르며 젖어 들었다.
칼을 맞고 쓰러진 아일라. 그런 그녀를 지혈하며 이를 악물고 있는 세드릭. 여기저기 불타오르는 세르노티성. 성안을 메운 적들을 향해 목숨을 걸고 싸우고 있는 세르노티의 기사단과 곳곳에서 들리는 신음 소리.
어째서…?
그녀의 가슴속에서 뜨거운 피가 온몸으로 퍼졌다. 그녀의 뇌리를 꽉 채우고 있던 두려움은 씻은 듯 자취를 감추었다. 머릿속을 장악한 단 한 가지 감정은 오로지 분노뿐이었다.
검은 하늘에서 예고 없이 흰 눈발이 날렸다.
뎅그렁.
바람에 종소리가 흐트러졌다.
3년 전. 눈보라 치는 밤에도 분명 이런 상황이었을 것이다. 눈앞에 환히 펼쳐지는 잔인한 광경에 이가 갈렸다.
눈물에 젖은 그녀의 눈동자가 어둡게 번뜩였다. 그때는 아무것도 몰랐지만 지금은 아니다.
용서 못 해.
나를 죽이고, 발트리를 죽이고, 함께 울고 웃은 동료를 무참히 살해한 너를.
“절대 용서 못 해!!!”
혜미는 광장의 남쪽을 향해 달려가고 있는 페터를 향해 뛰었다.
“죽여 버리겠어…!”
혜미가 악을 쓰며 페터를 쫓았다. 쿵쿵거리는 심장이 더 빨리 뛸 수 없을 정도로 빠르게 뛰었다.
“히익…. 뭐야…!”
페터가 뒤를 휙 돌아 그에게로 달려오고 있는 그녀를 보았다. 혜미의 손에 검이 없는 것을 확인한 순간, 도망치던 그가 그녀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페터가 이를 뿌득 갈며 그녀에게 칼을 휘둘렀다.
“모든 게 다… 너 때문이잖아…!”
이든이 황녀가 아니었다면 아무런 문제가 없었을 상황이었다. 세르노티의 동태를 살피다, 크리스티앙이 황제 즉위식을 치른 이후 카플란에 합류해 부와 권세를 한꺼번에 누릴 수도 있었는데.
“너만 죽으면…! 너만 죽으면 모두가 다 편할 거라고!”
휙!
혜미가 한 발짝 물러나며 공중을 가르는 칼을 간단히 피했다. 페터가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회심을 담은 일격으로 두 번, 세 번째 검을 휘둘렀지만 마찬가지였다. 그녀가 페터를 향해 싸늘하게 조소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