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화 (12/72)

이든. 제발. 내가 갈 때까지만 제발…!

“목을 자르자, 그게 확실해.”

마침내 그가 동굴에 들어섰을 때 보이는 것은 그녀의 옆에 널린 여러 구의 시체들. 그리고 그 가운데에 쓰러진 이든의 모습이었다. 이든의 머리채를 붙잡고 검을 들이대고 있는 놈의 모습을 보는 순간, 발터의 눈이 광기에 돌았다.

“…흣!”

발터가 달려가 그녀의 목을 자르려던 놈을 집어 던졌다. 동굴 벽에 부딪힌 놈에게서 온몸의 뼈가 으드득 부서지는 소리가 났다. 온몸이 부서진 놈의 머리채를 붙들고 머리를 잘라 냈다. 분수처럼 솟구치는 피를 뒤집어쓴 상태로 그에게 칼을 들고 달려드는 또 다른 놈의 어깨를 잡고 배를 갈랐다.

“으윽…!”

쓰러지는 동료를 뒤로 한 채, 한 놈이 도망을 쳤다. 발터의 손에서 핏물이 흐르는 칼이 날았다. 정확히 심장을 뚫린 놈이 칼이 꽂힌 채로 앞으로 푹 쓰러졌다.

발터가 쓰러진 이든에게 다가가 그녀를 붙들었다. 순식간에 세 명을 죽인 커다란 손은 그녀의 귀 뒤의 맥을 차마 짚지도 못하고 부들부들 떨렸다.

“이든…. 눈을 떠라…. 이든… 괜찮아…. 괜찮으니까….”

피에 젖은 발터의 튜닉에 그녀의 피가 더해졌다. 가슴, 목 그리고 등. 검붉은 피는 이든의 온몸에서 흘러내리고 있었다. 옷을 찢어 그녀의 상처를 감싸는 커다란 손이 갈피를 못 잡고 떨렸다. 피는 멈출 생각을 하지 않았다. 간신히 지은 매듭까지 시뻘겋게 물들었다. 발터의 강인한 떡이 덜덜 떨리며 위아래 치아가 엉망으로 부딪혔다.

“아아…. 이든… 하아….”

끊임없이 흘러나오는 핏줄기보다 그를 더욱 두렵게 하는 것은, 두 눈을 감은 채 아무 말도 하지 않는 이든이었다.

“…제발 눈을 떠 봐.”

핏기가 사라진 그녀를 향해 발터가 간신히 속삭였다. 이든은 여전히 눈을 뜨지 않았다. 발터는 그녀를 품에 꽉 끌어안았다. 거칠게 들이쉬었다 내뱉는 호흡이 피에 젖은 그녀의 뺨을 데웠다. 이를 악문 발터의 눈동자에 붉게 실핏줄이 터져나갔다.

“내가… 내가… 늦게 와서 화가 난 거지…?”

이든의 귓가에 대고 울음을 간신히 참으며 속삭였다. 평소라면 간지럽다며 어깨를 들썩이며 웃었을 그녀에게서는 아무 말도 없었다.

“이든… 말 좀 해 봐….”

그녀가 죽었을 리가 없었다. 그녀의 몸이 이렇게나 따뜻한데, 이든의 심장이 멈추었을 리가 없다. 그의 등에 뺨을 묻은 채 빨리 오라고 속삭이던 게 그녀의 마지막 말일 리가 없었다.

“화가 나서… 그래서… 눈을 뜨지 않는 거잖아…. 이든. 그렇지?”

정신 나간 사람처럼 내뱉는 발터의 목소리가 낮게 떨렸다. 이든의 고개가 어깨 아래로 힘없이 스르륵 흘러내렸다.

“아, 흐으으….”

발터의 입술이 엉망으로 짓씹혔다. 꽉 깨문 잇새에서 흐릿한 신음이 터져나갔다. 그녀의 등을 감싼 그의 손가락이 고통스레 일그러졌다. 그의 온몸이 이든의 피로 물들었다. 그녀의 냄새가 이토록 생생한데, 그녀가 눈을 뜨지 않는 이 현실이 악몽 같았다.

“이… 이든…. 흐윽….”

꿈이라면 제발 깨게 해 줘.

질끈 감은 발터의 눈에서 진한 눈물이 떨어져 그녀의 피와 섞였다.

이든. 제발.

제발 이러지 마.

“으아아아아아!!!”

피투성이가 되어 숨이 끊어진 이든을 품 안에 끌어안고 발터가 포효했다. 사지가 잘린 짐승이 고통스레 울부짖는 것 같은 소리가 검은 숲에 길게 메아리쳤다. 눈보라 치는 밤이었다.

말을 멈춘 발터가 조용히 그녀에게 손수건을 내밀었다. 혜미가 주르륵, 뺨으로 흘러내리는 뜨거운 눈물을 닦았다.

“아…. 내가 원래 감수성이 좀 풍부해서. 근데 휴지는… 없지? 그래. 없겠지.”

자문자답하며 손수건으로 코까지 팽, 풀어 낸 후 그녀가 목을 가다듬었다. 원래 몰입을 잘하는 편이긴 하지만 이번엔 좀 심하게 마음이 갔다. 아마 이야기의 주인공이 눈앞에 있어서였는지도 몰랐다. 이렇게 커다란 남자가 온몸을 떨며 오열하는 모습을 떠올리니 또다시 가슴이 찌르르해진다.

“울지 마, 이든.”

그렇게 말하는 발터의 목소리도 슬쩍 떨리고 있기는 마찬가지였다. 무뚝뚝하게 보이는 표정의 변화는 없었지만 색이 짙은 눈꼬리에 이어지는 눈동자가 붉었다.

“네가 울면 내가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으니까.”

무시무시하다고만 생각했었는데. 아주 약간, 커다란 소년처럼 보이는 남자의 모습에 혜미가 풋, 하고 웃었다.

“저기… 그렇게 말하는 당신도 지금 눈물 터지기 일보 직전이거든요?”

“헛소리.”

멋쩍은 듯 고개를 돌리는 모습이 왠지 귀여워 그를 더욱 놀리고 싶어졌다.

“안아 줄 테니까 한 번 맘 놓고 크게 울든지.”

“네가 날 안는 건 나쁜 생각이 아니지만….”

발터가 곁눈으로 그녀를 슬쩍 바라보았다.

“…그 뒤에 일어날 일도 감당할 자신 있어?”

기다란 입술을 들어 올리며 의미심장하게 미소 짓는 모습에 혜미의 가슴이 불현듯 쿵, 소리를 내며 크게 뛰었다.

뭐야. 인상을 구기고 있을 때는 몰랐는데 이제 봤더니 이 남자, 엄청난 미남이었다. 작정하고 멋있는 척을 하면 이성을 여럿 홀릴 외모란 걸 본인은 알고 있을까.

“농담이다. 긴장하지 마.”

잠시 굳은 그녀를 보고 오해를 했는지 발터가 나지막하게 덧붙였다.

“흠….”

혜미는 발터의 기다란 입술에 시선을 빼앗기지 않으려 노력하며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기억을 잃기 전 이든도 분명히 그의 입술을 좋아했을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긴 이야기 잘 들었어.”

이상한 쪽으로 생각이 꼬리를 뻗어 나가기 전에 화제를 원점으로 되돌려야 했다.

“질문은 없고?”

“지금 생각나는 것만 한 백 개 정도?”

“하나씩만 물어봐.”

또다시 희미하게 웃는 발터를 보며 혜미가 눈을 깜빡였다. 일단 가장 알고 싶은 것은 역시나 이 사태의 원인을 누가 일으켰냐는 것이었다. 그녀가 코 묻은 손수건을 꽉 쥐고 물었다.

“그날, 성을 급습하고 나를 죽인 놈들, 대체 누구야?”

발터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지고 그의 표정이 진지해졌다. 짙은 눈동자에 검은빛이 일렁였다.

“…카플란이야.”

“카플란?”

발트리가 숨을 거두기 직전, 세드릭에게 마지막으로 남긴 단서였다.

“‘붉은 여우’라 불리는 또 다른 암살 조직인데… 발트리의 말에 따르면 현재 황실과 가장 가까운 가문이라고 해.”

100년 전, 클라웨 4세는 비밀리에 여러 개의 암살단을 조직했다. 하나가 아니라 여럿이었던 이유는 혹시나 있을 암살단의 배신을 우려한 것이었다. 세르노티와 카플란도 일찍이 만들어진 암살단 중 하나로, 카플란은 현재 황제인 크리스티앙이 황태자였던 시절부터 그를 비호한 가문으로 알려져 있었다.

“그럼… 혹시… 그… 황제인 크리스티앙이 날 죽이라고 명령을 내린 걸까? 황위 다툼, 뭐 그런 걸 염려해서?”

혜미가 마른침을 꿀꺽 삼키며 입을 열었다. 권력을 위해 형제끼리 죽고 죽이는 싸움은 책에서는 많이 봤어도 그녀와는 거리가 백만 광년은 먼 이야기였다. 배다른 누이를 살해하라고 지시하는 동생이라니. 상상만 해도 등골이 서늘해지고 팔뚝에 소름이 돋아났다.

“그건 아직 확실하지 않아.”

발터가 신중하게 말을 이었다.

“세드릭은 만약 크리스티앙이 네 존재를 알아챘다면, 암살자가 아닌 군대를 보내어 세르노티 가문 전체를 몰살했을 거라고 판단했다.”

발터 역시 그 점에 있어서는 세드릭과 생각이 같았다. 피로 얼룩진 클라웨의 역사는 178년 동안 이어지고 있었다. 같은 황실에서 서로를 죽이는 저주 같은 역사를 끊으려 애썼던 선대 황제들의 노력이 무색하게도, 크리스티앙은 선조의 잔인한 피를 그대로 타고난 이였다.

“그에게 대의 따위는 중요하지 않으니까.”

“크리스티앙이… 그 정도로 폭군이야?”

혜미의 목소리가 조금 작아졌다.

“귀족들 앞에서 교황을 직접 칼로 찌른 적이 여러 번이라고 들었어. 베네딕트가 스스로를 치유할 수 있는 대마법사가 아니었다면 크리스티앙의 손에 이미 죽고도 남았을 거야.”

혜미가 미간을 찌푸리며 발터에게 되물었다.

“…대체 왜… 그런 짓을 하는 건데…? 교황은 황실을 위해서 일한다며.”

“바로 그 점을 확인시키고 싶었겠지. 다른 이들이 보는 앞에서. 누가 이 제국의 최고의 자리에 있는지를. 다른 인간과는 달리 절대적인 힘을 가진 대마법사를 복종시켜 가면서 말이야.”

혜미가 질색하며 고개를 내저었다. 모르긴 몰라도 절대로 황제와는 엮이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 그럼 암살자를 보낸 게 황제가 아니었다면, 그는 아마도 지금 내 존재를 모르고 있다고 생각해도 되겠네?”

“현재로서는 그러길 바라야지. 클라웨의 첫째 황녀는 18년 전인 다섯 살 때, 사망한 걸로 공표되었으니까. 그때 크리스티앙은 세 살이었다.”

혜미는 발터가 해 준 이야기를 머릿속으로 더듬으며 곰곰이 생각에 빠졌다.

화재가 난 별궁에서 그녀를 구해 내어 세르노티로 데려온 것은 발터의 아버지인 발트리.

그는 선대 황제의 명에 따라 그녀의 정체를 감추고 몰래 거두었다고 했다. 딸이 살아 있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사망했다고 공표했던 황제의 의중은 무엇이었을까.

그녀의 아버지이자 죽은 선대 황제 역시도 그녀가 위험에 처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는 뜻이었다.

“그럼 어렸을 때 날 죽이려고 한 건 대체 누굴까.”

“발트리의 말에 따르면 그 역시도 카플란이었어. 네 어머니였던 첫 번째 황후를 독살하고, 네가 다섯 살 때 별궁에 불을 질렀다.”

발터가 씁쓸한 표정으로 입술을 씹었다. 발트리가 죽기 직전 세드릭에게 털어놓은 과거였다. 만약 진실을 조금만 일찍 알았다면, 상황은 달라질 수 있었을까.

“하지만 암살단은 모두 황제를 위해서 일한다면서.”

혜미는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가지 않았다. 지금이야 카플란이 황제인 크리스티앙의 안위를 위해 일을 한다손 치더라도 그때는 선대 황제가 아직 살아 있을 때였다.

“기본적으로는 그렇지.”

“그러면 배신을 했다는 거야? 카플란이 황제를?”

발터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왜? 뭣 때문에?”

“권력과 부를 위해서.”

야망이 컸던 카플란과 손을 잡은 것은 바로 크리스티앙의 어머니였던 두 번째 황후였다.

“크리스티앙의 엄마가? 왜?”

“자신의 아들을 황제로 만들고 싶었겠지. 그러려면 대마법사의 보석을 받은 네가 없어져야 했을 테고.”

혜미는 길게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배다른 폭군 동생도 모자라 그녀를 죽이려 날뛰는 계모라니. 갈수록 첩첩산중이었다.

“그럼 3년 전에 카플란을 시켜 세르노티를 급습하라고 시킨 사람도, 그 황후 아줌마였을 수도 있단 이야기네?”

“아니. 그럴 가능성은 없어.”

“왜?”

“황후는 10년 전에 이미 누군가에게 독살당해 죽었거든.”

“그 누군가가… 누군데?”

“그녀에게 원한을 품었던 또 다른 누군가겠지. 범인은 아직 밝혀지지 않았어.”

혜미가 테이블에 팔꿈치를 대고 머리를 붙잡은 채 중얼댔다.

“아…. 진짜 개막장이다….”

“그게 네가 태어난 황실의 생태야, 이든.”

혜미는 발터의 무거운 말을 들으며 곰곰이 생각을 정리했다.

대체 3년 전, 세르노티를 급습해 그녀를 죽인 카플란의 배후가 누구일까.

세르노티를 제외한 이들 중, 다섯 살 때 사망한 것으로 알려진 황녀 에데르트가 죽지 않고 살아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은 극소수였다.

1번. 발트리에게 딸을 맡겼던 선대 황제.

2번. 죽은 이든을 직접 찾아와 살렸다는 교황 베네딕트.

3번. 어린 황녀 살해를 직접 추진한 암살단 카플란.

선대 황제는 전쟁 중 사망했다. 교황인 베네딕트가 그녀를 죽이고 싶었다면 그녀를 살려내는 수고로움을 자처했을 리가 없었다.

그렇다면 답은 하나였다. 황녀 에데르트를 살해하려 했으나 실패하고, 별궁에 불을 질렀던 암살단 카플란이었다.

혜미가 눈을 깜빡이며 고개를 들었다.

“그럼 3년 전 일은 카플란이 단독으로 행동했을 수도 있다는 소리잖아.”

“답은 카플란만이 알고 있겠지.”

발터가 신중히 입을 열었다.

“어린 널 죽이는 데 실패했다는 사실을 그들이 이제껏 숨겨 왔다면 말이 안 되는 건 아냐.”

혜미가 발터를 보며 미간을 모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 만약 그들이 황녀를 살해하는 데 실패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면 황후는 카플란을 용서하지 않았을 것이다. 지금 같은 권세는 어림도 없었을 테다.

“만약 내 존재가 세상에 드러난다면, 카플란은….”

“아마 가문 전체가 멸살당하겠지. 황실을 모독한 죄까지 포함해서.”

그제야 어지러웠던 머릿속이 조금씩 정리되는 느낌이었다.

“황제가 왜 살아난 황녀에 대해서 함구하라고 했는지 이제 좀 알겠어.”

황제가 발트리에게 그녀를 부탁한 이유도 알 것 같았다. 황제는 아마 그녀가 무수한 위험에 대항할 힘을 갖출 때까지 시간을 벌고 싶었는지도 몰랐다.

“그럼 카플란은, 18년 전 날 죽이는 데에 실패한 이후 계속 내 존재를 뒤에서 몰래 찾았다고도 할 수 있겠네.”

“아마도.”

“그리고 카플란은 하필이면 발트리가 그 사실을 세르노티의 정예 기사들에게 밝힌 직후에 우릴 급습했고.”

어두워진 눈으로 말없이 긍정하는 발터를 향해 혜미가 불안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이 안에 스파이가 있었던 거야 설마…?”

발트리를 제외하고 그녀의 과거를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녀 자신 역시 몰랐다고 하니까. 하지만 발트리가 기사들에게 그 사실을 말한 직후, 그녀는 살해당했다.

“…맞아.”

발터가 무겁게 입을 뗐다. 아무리 급습이라고 해도, 타이밍이 너무나 빨랐다. 이는 세르노티 안의 사정을 속속들이 아는 이가 없으면 불가능한 것이었다.

“세드릭의 의심병이 더욱 심해진 것도 무리는 아니야.”

대체 그들 중 누가 스파이였을까.

혜미가 의문 섞인 눈으로 발터를 바라보았다. 발터의 입술에서 낮은 목소리가 흘렀다.

“자신을 그토록 따르던 아일라가 세작이었다는 사실을 눈치챈 후, 세드릭은 그 성격에 아마 죽고 싶었겠지.”

“…뭐?”

혜미가 그를 보며 미간을 찌푸린 채 소리를 높였다.

“아일라, 라고?”

다른 이도 아닌 그녀가 스파이였다는 사실을 믿을 수가 없었다. 혜미가 눈을 깜빡였다.

“걔가… 걔가 왜…?”

“암살자에게 이유는 없어. 오직 명령을 따를 뿐.”

발터가 건조하게 내뱉었다. 그런 그를 향해 혜미가 고개를 저었다.

“아냐. 아일라가 아닐 거야.”

자신을 죽인 사람을 무턱대고 옹호하는 그녀를 보며 발터가 아랫입술을 지그시 씹었다. 가슴속에서 뜨겁게 치밀어 오르는 울분을 삼키기가 힘이 들었다.

“이든. 아일라는 발트리가 돌아온 날 밤을 마지막으로 성에서 사라진 후, 돌아오지 않았어.”

“하지만… 그것만으로 아일라를 의심하기엔 무리가 있잖아…?”

“생각해 보면 아일라는 처음부터 너무 강했어. 그걸 의심하지 못했던 게 원인이야.”

날아오는 세드릭의 화살을 손으로 낚아챈 그녀의 행동을 운으로 보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그저 숨겨진 원석이었다고 생각한 아일라는 세드릭의 희망과는 달리 천재가 아니었다. 그녀는 훈련을 받고 보내진 카플란의 일원이었다.

“그런 아일라를 최고의 기사로 키운 게 바로 세드릭이고.”

“아일라를 ‘매의 수호자’ 세르노티의 리스트에서 제명한다.”

얼어붙은 것 같은 목소리로 중얼거리던 세드릭의 표정을 발터는 지금도 기억하고 있었다. 그것은 훈련생들 사이에 암암리에 떠돌던 소문을 확정하는 것과 다름없는 말이었다.

“아일라가 우릴 배신한 거야.”

“아일라가… 이든에 대한 비밀을 흘리고 암살자들을 부른 게 틀림없다고.”

그날, 세르노티에 침입한 카플란의 암살자들은 누구보다 빠르게 움직였다. 누군가 넓은 성안의 지리를 완벽하게 파악하고 있지 않다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보초를 서다 숨이 끊어진 파비안에게는 저항의 흔적이 전혀 없었어. 자다가 습격을 받은 사람들과는 다르게 깨어 있는 상태로 상대와 대면했지만, 그는 칼을 뽑지도 못한 채 죽었어.”

파비안과 면식이 있는 사람이 아니라면 불가능한 이야기였다.

“네가 날 기다리고 있던 동굴의 위치를 알고 있는 사람 역시도 세르노티의 훈련생들뿐이야.”

피투성이가 된 채 그의 품 안에서 숨을 거둔 이든의 모습이 다시금 뇌리를 비집자 발터의 눈동자가 어둡게 이글거렸다. 거칠어지려는 호흡을 가다듬으며 그가 낮게 말을 이었다.

“그곳은 네가 죽기 전년도 겨울, 우리가 산에서 한 달 동안 수렵을 할 때 찾아낸 곳이니까.”

“하지만 아일라는….”

말을 잇는 혜미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렸다.

“그녀는 세드릭을 사랑했잖아.”

세드릭이 세르노티에 얼마만큼 강한 소속감을 품고 있는지 아일라가 몰랐을 리가 없다.

“완벽한 위장이었지. 그 누구도…. 하물며 그렇게 까다로운 세드릭마저 그녀를 의심하지 못하게 할 만큼.”

발터의 말투는 차갑고 건조했다.

아일라가 세르노티의 성에서 지낸 5년은 단 하룻밤 만에 무너질 수 있는 시간이었다. 아일라는 이든이 황녀라는 사실을 알게 된 날 밤, 세르노티를 떠났고 카플란과 함께 돌아와 이틀 뒤 그들을 습격했다.

“발터, 하지만….”

혜미가 말끝을 흐렸다. 근거 없는 확신이라는 건 알고 있었다. 하지만 혜미는 아일라가 세르노티를 배신하고 그녀를 죽였다는 사실을 믿을 수가 없었다. 기분이 좋지 않아 속이 울렁거렸다.

“이든.”

발터가 그녀를 향해 어두워진 눈을 빛냈다.

“지금 내 앞에 아일라가 나타난다면, 난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검으로 그녀의 심장을 뚫을 거야.”

그의 눈동자에 일렁이는 분노의 감정이 너무나 커서, 혜미는 차마 그에게 말을 더 붙일 수가 없었다.

“그건 아마 세드릭도 마찬가지일 거고.”

차갑게 덧붙이는 발터의 말투에는 거짓이 없었다. 그녀는 가늘어진 눈으로 짧게 숨을 몰아쉬었다.

“지옥 같았던 그 밤 이후, 나는 잠든 너를 보며 수천 번, 아니 수만 번 그 시간을 머릿속에 떠올리며 곱씹었어. 동굴에 침입한 자객이 대체 몇 명이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너는….”

발터가 끓어오르는 분노를 삭이듯 낮게 속삭였다.

“이든, 내가 아는 너는 그렇게 처참한 죽음을 당할 이가 아니야. 네 실력은 세르노티 안에서도 최상이었다. 그런 네가, 상대를 차마 찌르지 못했을 거라는 걸 나중에야 짐작했어.”

혜미는 침울한 표정으로 입술을 씹었다. 심장이 쿡쿡 쑤셨다. 정말로 그녀는 같이 훈련한 동기인 아일라에게 살해당한 걸까.

더 깊게 생각하고 싶지가 않았다.

“그럼 이제 난… 앞으로 어떻게 해야 돼?”

황녀가 살아 있다는 사실이 알려진다면, 또다시 같은 일이 반복될 게 뻔하다는 사실은 쉽게 예상할 수 있었다. 세드릭이 그녀에게 기억을 빨리 되찾으라고 선언했던 것도 위험에 최대한 서둘러 대비하기 위해서였던 것이다. 카플란은 또다시 그녀를 죽이려 들 것이 분명했다. 갑자기 가슴이 답답해졌다.

“넌 어떻게 하고 싶어?”

발터가 그녀에게 조용한 말투로 되물었다. 짧아진 초에 비친 그의 그림자가 테이블 위에 너울거렸다. 혜미는 길게 한숨을 쉰 후 마침내 결심한 표정으로 입을 뗐다.

“베네딕트를 만나야겠어.”

“그래. 그래야지.”

발터가 소리도 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무거운 침상을 들어 올리고 마룻바닥에 감춰진 고리를 잡아당기자 그 안에서 검집에 싸인 기다란 칼이 모습을 드러냈다.

달칵.

테이블 위에 놓인 검의 손잡이에서 붉은 보석이 빛을 반사하며 빛났다.

“그 역시 널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피의 보석을 그녀와 나눠 가진 교황은 진정한 황위 계승자를 기다리고 있을 게 분명했다. 발터가 마른침을 삼킨 후, 깔깔한 성대로 낮게 내뱉었다.

“넌 황위를 되찾을 자격이 있어, 이든.”

그녀는 태어나자마자 베네딕트의 보석을 받았다. 마법사의 피로 만들어진 보석은 오직 각인한 상대에게만 반응했고, 그의 보석은 이든이 클라웨의 황위를 이을 사람이란 걸 증명해 줄 유일한 증거였다.

“…….”

감흥 없는 시선으로 물끄러미 칼을 바라보던 혜미가 마침내 발터를 향해 고개를 들었다.

“아니.”

아무리 생각해 봐도 그녀의 결론은 하나였다.

“내가 베네딕트를 만나는 이유는 황제가 되고 싶어서가 아니라, 내 집으로 돌아가고 싶어서야.”

“여기가 네 집이야, 이든. 넌 돌아와야 할 곳으로 돌아온 거다.”

발터가 입 안의 살을 깨물며 나무토막 같은 말을 내뱉었다. 혜미가 깊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저었다.

“발터, 미안한데 나 솔직히 이 상황을 감당할 자신이 도저히 없어. 스케일이 너무 크다고. 백 프로 진심이야.”

그에게 센 척을 할 필요도, 두려운 마음을 숨길 필요도 없다는 느낌이었다. 혜미가 뜨거워진 목소리로 솔직한 진심을 털어놓았다.

“황위 같은 거, 나 관심 없어. 크리스티앙이 폭군이건 성군이건 나한테는 상관없는 일이잖아? 너한테는 미안한 소리지만, 어차피 난 여기서 있었던 일이 하나도 기억이 안 나.”

발터가 그녀를 보며 묘한 표정으로 미간을 모았다. 한순간에 사라질 것만 같은 그녀를 끌어안고 싶어질까 봐 꽉 쥐고 있는 양 주먹에서 땀이 찼다.

“크리스티앙 폐하는 황제가 될 거야. 그가 성군이 되지 않아도, 되어도 상관없는 일이잖아. 어차피 우린 이곳에서 벗어나지 않을 테니까.”

기억을 잃기 전 이든이 했던 말을 반복하는 혜미를 보자 심장이 욱신거렸다. 그 뒤에 일어났던 끔찍한 일을 생각하니 생생한 고통이 발터의 몸을 비집었다.

사지가 조각조각 잘린다고 해도 온몸이 난도질당한 채 숨이 끊어진 그녀를 대면했던 시간보다 고통스럽지는 않으리라.

“이 나라에 날 죽이고 싶어 하는 이들이 득실거린다는 것도 확실하잖아. 난 그런 거 무서워.”

“목숨 걸고 널 지킬 이가 존재한다는 것도 확실하지.”

발터가 말라가는 입술을 애써 떼며 낮게 내뱉었다. 혜미가 한숨을 탁, 내쉬며 그의 팔을 붙잡았다. 발터의 몸이 순간적으로 경직하는 것이 그대로 느껴졌다.

“그러니까 네가 날 좀 도와 달라는 거야.”

발터가 좋은 사람이라는 걸 모르는 바는 아니었다. 짧은 시간 그에게 약간의 호감을 느꼈던 것과는 별개로, 그녀는 도저히 이든의 삶을 살아갈 자신이 없었다.

기억이 없는 것이 차라리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뜨거운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는 발터에게 미안한 마음이 드는 것을 애써 꾹, 누른 채 애원하듯 그를 보았다.

“내 영혼을 빼낸 사람이라면 돌려보내는 것도 가능하겠지. 베네딕트가 있는 곳으로 날 좀 데려가 줘, 발터.”

“황궁엔 아무나 출입할 수가 없어. 특히나 교황이 있는 곳의 출입은 엄격히 제한되어 있고.”

대답하는 발터의 목소리는 어딘지 모르게 딱딱했다.

“…그럼 누가 들어갈 수 있는데?”

“황족, 혹은 황제의 허락이 내려진 사람들뿐이야.”

혜미의 눈빛에 실망과 동시에 두려움이 번졌다.

결국 크리스티앙을 마주해야 한다는 소리인가. 한 번 본 적도 없는 이와 대면하는 상상을 하는 것만으로 몸이 떨렸다.

“하아….”

그녀는 할 수만 있다면 어딘가에 숨어 있고 싶었다. 이건 직감이었다. 크리스티앙과 만나는 순간, 그녀의 운명이 좋지 않은 방향으로 흐를 거라는 강력한 예감이 들었다. 만나자마자 목이 잘릴지도 모른다.

“발터.”

발터가 깊은 눈으로 그녀를 응시했다. 혜미가 힘이 모조리 빠진 얼굴로 그를 보며 충동적으로 내뱉었다.

“…만약에 내가 같이 도망가자고 하면 같이 가 줄래?”

그녀를 응시하는 어두운 갈색 눈동자가 소리 없이 흔들렸다. 발터는 잠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몇 번이나 생각했었다. 이든과 함께 아무도 모르는 곳으로 도망가고 싶다고 소원하고 바랐다.

황위 따윈 관심 없다고 말하던 이든을 보며 누구보다 안심했던 건 바로 발터 자신이었다.

“나는….”

발터가 말을 잇다 말고 입술을 꽉 물었다. 그녀를 닮은 아이를 낳고 기르는 상상을 감히 했었다. 그와 이든의 생각이 같은 방향을 향해 있다면, 운명이나 출생 따위는 개나 주라고 여겼던 과거의 자신이 있었다.

“네가 영원히 도망치는 삶을 살기를 원하지 않아.”

마침내 입을 뗀 발터의 목소리가 낮게 가라앉아 떨렸다.

“너는 클라웨의 황제가 될 운명이다, 이든.”

그리고 그는 영원히 그녀의 그림자로 살아야 할 운명이었다. 제 욕심 탓에 그녀를 잃고, 차라리 죽기를 바랄 만큼 고통스러웠던 건 인생에 단 한 번으로 족했다.

“날 위해 목숨을 바쳐 충성하겠다며.”

“…세르노티가 황제에게 충성하는 건 가문의 의무니까.”

혜미의 눈동자에 실망이 번졌다. 같은 실수를 두 번 하고 싶지 않은 발터의 마음을 혜미는 알지 못했다.

“내가 충성하는 건, 황제가 될 너다. 이든.”

발터가 갈라진 목소리로 말을 끝내자 혜미는 잠시 말이 없었다.

“…알았어.”

혜미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그에게 실망하고 서운한 기분이 드는 것이 사실이었지만, 스스로가 염치없는 것도 맞았다. 기억도 없는 상태에서 발터의 순정을 이용하려 했던 자신의 얼굴이 두꺼워도 너무 두껍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동안 고마웠어. 베네딕트는 나 혼자 찾아가 볼게. 대신 내가 이것저것 준비할 때까지 만이라도 여기서 좀 지낼 수 있도록….”

“쉿.”

발터의 눈동자가 소리 없이 가늘어지나 싶었다.

뭐지…?

등 뒤에서 오싹한 기분이 든 것은 그다음이었다.

“피해, 이든.”

인상을 찌푸린 발터의 말이 떨어지기도 전에 그의 몸이 먼저 움직였다. 그녀를 향해 달려드는 검은 그림자의 가슴에 버터나이프가 날아가 박혔다. 얇은 버터나이프는 그의 목을 정확하게 관통했다.

“컥…!”

발터의 손에 의해 밀쳐진 혜미가 뒤늦게 상황을 알아챈 후, 눈을 커다랗게 떴다.

“…뭐, 뭐야…?”

쾅!

순식간에 문을 부수고 나타난 이들을 보고 놀랄 새도 없었다. 발터가 검을 뽑아 드는 순간, 한 놈의 몸이 반으로 잘리고 피가 분수처럼 튀었다.

“어… 어, 어, 엄마…!”

시뻘겋게 솟아오르는 피에 혜미의 눈동자가 공포에 질려 얼어붙었다. 황궁에 있는 베네딕트를 혼자 찾아가겠다는 방금 전의 포부는 연기처럼 사라졌다. 그녀는 비명조차 크게 지를 수 없었다.

“젠장….”

순식간에 두 명을 베어 낸 발터가 입술을 질끈 씹었다. 카플란이 또다시 쳐들어올 거라는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예상보다 빠른 급습이었다. 발터는 단검을 날려 천장에 매달린 종의 벨을 휘감고 있는 밧줄을 잘라 냈다.

뎅그렁.

바람에 종이 날리며 세르노티 성안에 고요하게 울려 퍼졌다. 3년 만에 다시 울리는 종소리였다.

“이든! 검을 잡아!”

발터가 소리쳤지만 이미 두려움에 정신이 반쯤 나가 있는 혜미의 귀에는 들리지도 않았다. 그녀를 향해 달려드는 다른 놈의 목이 뎅겅, 잘려 공중에 날아갔다.

“흣…!”

혜미는 테이블 위로 툭 떨어지는 사람의 머리를 보며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뒷걸음질을 쳤다. 눈앞에서 인간의 몸이 고깃덩이처럼 썰리는 것을 목격한 그녀는 이미 제정신이 아니었다.

“아…. 아…!”

시커먼 후드를 두른 암살자들로 공간이 들어차기 시작했다. 그 사이에서 발터의 검이 소리 없이 움직일 때마다 피가 사방으로 튀며 시체가 쌓여 갔다. 발터가 움직이지도 못하고 벽에 몸을 딱 붙인 채 덜덜 떨고 있는 그녀를 향해 다시 한번 소리를 쳤다.

“이든! 검을 잡아!!!”

테이블 위의 검 손잡이에 달린 붉은 보석이 기이한 빛을 냈지만, 혜미의 눈은 그것을 외면했다. 오직 이 끔찍한 상황을 피하고 싶다는 본능만이 그녀의 뇌리를 지배하고 있었다.

“아… 흣!”

그녀에게 날아오는 칼을 피해 혜미는 천장 가까이 뚫린 창으로 몸을 날렸다. 세드릭에게 공격을 당했을 때와는 달리, 돌로 만든 창틀에 간신히 손끝이 닿았다. 두려움이 온몸을 지배한 탓이었다. 혜미는 덜덜 떨며 몸을 띄워 네모나게 뚫린 창으로 간신히 기어 올라갔다.

휘잉.

차가운 겨울바람이 얼굴을 때렸다. 달도 숨어 캄캄한 밤이었지만 그녀의 눈동자는 시야를 정확히 비추고 있었다. 높이가 까마득한 아래를 보자 눈앞이 아찔하며 다리가 후들거렸다.

“여자를 죽여라!”

“이든! 뛰어 내려서 피해!”

암살자와 발터가 크게 외치는 말이 동시에 섞여 들었다. 둘 다 끔찍하게 들리기는 매한가지였다.

‘여… 여기서 뛰어내리라고…?’

미친 짓이다. 혜미는 무릎이 엉망으로 떨리는 두 다리로 간신히 선 채,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어깨 위로 잘린 머리카락이 세찬 바람에 엉망으로 날렸다. 이가 딱딱 부딪혀 소리 내며 떨렸다.

칼에 찔려 죽는 것과 추락해서 머리가 깨져 죽는 것. 둘 다 상상하는 것만으로 두려워 정신이 나갈 것 같았다.

“이든!!! 어서!!!”

발터가 미친 듯이 적을 베며 목에 핏대를 세웠다. 등 뒤로 날아오르는 시커먼 그림자가 가까워짐과 동시에 혜미가 눈을 질끈 감았다. 무슨 선택을 하든 어차피 결과가 죽음이라면, 남에게 살해당하는 것보다 스스로 죽는 편이 낫다.

“아… 아아악!”

어둠 속으로 그녀의 몸이 휙, 날았다.

턱!

혜미는 탑의 벽에 난 돌부리를 잡고 한 손으로 매달린 채, 숨을 크게 몰아쉬었다. 심장이 목구멍에서 튀어나올 정도로 빨리 뛰며 울렁거렸다.

이게… 어떻게 된 거지?

땅바닥으로 추락해 즉사할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그녀의 팔이 저절로 움직여 벽에 매달린 것이다. 등줄기와 옷 사이를 비집는 거센 바람에 그녀가 걸친 헐렁한 튜닉이 펄럭거렸다.

‘…할 수 있다고…?’

아직도 까마득한 탑 아래를 바라보며 그녀는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팔에 점점 힘이 빠지고 있었다. 손가락이 미끄러지려는 순간, 혜미가 입술을 꽉 깨물었다. 두 발이 벽을 박차며 다시 몸이 날았다.

탁!

탁!

탁!

탑의 층마다 박힌 돌부리를 세 번 밟은 후, 혜미는 바닥에 착지했다. 스스로도 믿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하아…! 하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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